동유럽국가의 몰락과 클리프파의 정치적 오도

죽음의 고통에 처한 스탈린주의


[아래의 글은 1917 제 8호(1990년 여름)에 실린 “동유럽 정권들이 스탈린주의의 죽음의 고통을 내발시키다(Eastern Regimes Implode Death Agony of Stalinism)”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번역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의 스탈린주의적 지배는 광범한 노동자 계급층 사이에서 사회주의 의식 그 자체에 대한 신뢰를 심각하게 침해하여 왔다. 동유럽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오도와 배신으로 혼동에 가득 찬 상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러한 상태를 극복하고 곧 독립적인 정치적 세력으로서 우뚝 일어서야 한다. 베를린 장벽을 부수고 챠르세스쿠 깡패무리에 맞서 싸운 대중들은 지배 관료들의 잘못된 경제 행정과 특권 그리고 허위에 대한 증오심으로 함께 뭉쳐져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는 알았지만, 이에 대처할 아무런 긍정적 프로그램을 갖지 못하였다.

관료적 권위체제의 붕괴로 생성된 정치적 공백은 친자본주의적 지식인들과 민족주의적 광신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현재 동유럽 전역에서는 히틀러 시대로부터 그 기원을 둔 파시스트 조직들이 재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루마니아의 티르구 뮤르(Tirgu Mures) 시에서는 파시스트 조직인 아이론 가드(Iron Guard)가 루마니아 내의 헝가리인들을 살해한 사건에 관여하여 왔음이 밝혀졌다. 50여 년 전에 위와 동일한 이름의 파시스트 조직이 유태인들에 대한 학살을 자행하였었다. 불가리아에서는 터키 소수 민족에 대한 잔악한 박해 때문에 수천 명의 터키인들이 목숨을 걸고 도망쳐 나와야만 하였다. 동독에서는 나치 스킨헤드들이 이민자와 좌파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는 사례는 아주 흔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파시스트 세력의 배후에는 소련 블록 국가들을 재점령하려고 몸이 근질근질해 하고 있었던 서방의 은행가들과 자본가들이 존재한다.

현재 명확히 드러나고 있듯이 동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복귀는 세계 프롤레타리아에게 엄청난 퇴보를 의미한다. 관료적으로 시행되었을지라도 동유럽에서 생산수단의 국유화는 노동자계급에게 구체적인 혜택을 가져왔었다. 일자리는 보장되었고 음식, 주거 그리고 교통비는 안정되고 국가로부터 자주 보조를 받았으며 의료와 교육은 대중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제공되었다. 동독에서는 육아시설이 값싸고 어느 곳에서든지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되어 있으며, 특별 법조항에 따라 홀어머니와 은퇴자들은 값싸고 적절한 거주지를 보장받도록 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복구 건설 계획에 의해 직접적으로 공격받고 있는 위의 사회적 성취물들은 현재 시장경제의 ‘마법’에 대중들이 현혹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광범한 대중들 사이에서 진정한 호응을 얻고 있다.


정치혁명을 위하여!--자본주의 복귀는 해답이 아니다!

수백만의 동유럽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노동) 강화와 해고가 도입되는 것을 즐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실질 임금이 삭감되는 동안 식품가격과 임대료가 올라가는 것을 앉아서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며, ‘자유 기업 경쟁(free enterprise)’의 왕국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스프 키친과 실업자 행렬 속으로 조용히 떼를 지어 들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새로운 친자본주의 정부에게 곤란한 문제로 제기된다. 친자본주의 정권의 주요한 자산이 아직까지는 대중적 지지인데 이 기반에 대한 공격을 필요로 하는 사회 반혁명을 수행해야할 책임을 지금이 동유럽 자본주의 정권이 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독에 의한 동독의 흡수통일은 잠재적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많은 모순들을 창출해 내게 될 것이다. 이는 서독의 부르주아지들이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통합의 대가를 치르게 하려고 시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서독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강제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강력한 국가체제와 엄청난 경제적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과는 달리 효과적인 억압적 통치기구가 부재한 동유럽의 새로운 정부들은 커다란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구정권들로부터 전수된 군대/경찰 체제는 현재 무질서한 상태에 있으며, 처음부터 과감한 추방과 새로운 인물의 선발 없이는 거의 의존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군대 체제의 변화는 쉽게 성취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그 동안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다. 동유럽에서 새로운 마샬 플랜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동유럽 자본주의 정권들이 희망하는 피노체트 스타일의 ‘경제기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들이 동유럽의 노동계급의 저항을 박살내 버릴 수 있는 군대역량을 필요로 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반(反)유태인 단체인 ‘독립적 폴란드를 위한 연합(Confederation for an Independent Poland: KPN)’과 같은 공공연한 파시스트 조직들은 하층 대중들의 분노와 절망을 백색테러와 (유태인에 대한) 박해를 위해 이용하려고 하지만, 현재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해내기에는 규모나 영향력이 너무 적다. ‘자유’에 대한 초기의 행복감이 점점 사라져감에 따라, 노동자 대중이 자본주의 사회 생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정확히 인식해 가기 시작할 때, 걸음마 단계에 있는 동유럽 자본주의 정권들은 단결력이 있는 노동계급에 대항할 수 있는 충분한 견제력이 없는 한 붕괴되기 쉬운 상태로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전보다 지금 더욱 더 동유럽 대중들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망을 가지고 싸우는 즉, 사회주의적 소유제를 옹호하며 노동계급의 직접적인 정치적 지배를 건설하기 위해 싸우는 혁명 지도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지도부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자격 조건은 진실을 솔직하게 직면할 수 있으며 자본주의 복구주의자들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그 심각성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사실 외면상 트로츠키주의자임을 자처하는 대부분의 그룹들이 위의 자격조건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대중운동’에 대해 비판하기를 꺼려해서든지 아니면 현재의 정치적 조류가 진보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 못함을 인정하기 꺼려해서이든지, 아무튼 좌익 조직 대부분이 현존하는 세계에서가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현재 원하는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은 흉내를 내고 있다. 이는 단지 자본가들의 반동적인 맹공격에 직면하여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시킬 뿐이다.


스탈린주의의 붕괴: 올바름이 입증된 트로츠키의 예견

어떤 정치 이론이 올바른가에 대한 시험은 바로 그 이론이 중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올바르게 설명해 낼 수 있는가 여부이다. 50여 년 전에 트로츠키는 소련 관료제가 1917년 10월 혁명에 의해 창출된 경제적 토대에 기생하는 특권적 사회신분층이라고 성격을 규정했다. 그는 관료제라는 치명적인 정치적 장애물이 바로 사회주의적 소유제의 올바른 작동에 필요한 생산자에 의한 민주적 참여와 통치를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행강령에서 트로츠키는 “관료제의 지배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경제의 사회주의적 요소들의 토대는 썩어가게 되고, 결국 자본주의 복귀의 기회만을 증대시킬 것이다.”라고 예측하였다.

트로츠키는 또한 부와 지위를 추구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존재는 그들의 지배가 기반하고 있는 평등주의적 소유 형태에 모순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스탈린주의 관료는  결코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응집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트로츠키는 관료적 독재자들이 고도로 불안정한 사회층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노동계급의 봉기나 자본주의 복귀주의자들의 운동에 타격받기 쉽다고 주장하였다. 불변하는 공고한 전체주의 체제라고 여러 인상주의자들이 묘사한 바 있는 동구국가들이, 최근 몇 달 동안 극적으로 붕괴해버린 사실이 바로 트로츠키의 분석이 옳았음을 강력히 확인시켜주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최근 ‘소비에트 블록’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회 발전 양상은 스탈린주의 관료체제가 새로운 지배계급을 형성한다는 그 모든 주장들을 궁극적으로 반박하고 있다.

여러 해 동안 ‘새로운 계급’ 이론의 가장 유명한 제안자는 맥스 색트먼인데, 그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대표하는 것은 부르주아 계급도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아니라 바로 ‘관료적 집산주의자’ 계급이라고 주장하면서 1940년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으로부터 이탈해 갔다. 색트먼의 새로운 계급이론은 너무 모호할 뿐만 아니라, 그가 결국은 제국주의 진영으로 변절해 버린 사실이 너무도 수치스러운 까닭에, 그 ‘관료적 집산주의’론을 정통으로 받드는 사회주의자는 현재 거의 없다.

색트만 이론의 한 변형이 바로 ‘국가자본주의’론인데, 이에 따르면 스탈린 관료제가 자신을 새로운 집단적 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변환시켰다고 한다. ‘국가자본주의’론을 따르는 가장 큰 그룹은 토니 클리프가 지도하는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이다. 원래 클리프 그룹은 한국에서 냉전이 열전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던 바로 1950년대 초반에 트로츠키주의 운동으로부터 이탈하여 나갔다. 북미에서 클리프추종자들은 ‘국제사회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국가자본주의 ‘이론’이, 클리프와 그의 사상적 동조자들을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블록을 방어하는 그 불편한 임무로부터 면제하는 한편, 그들을 사회민주주의자 부류 내에 ‘존경받는’ 사람들로 만들기는 하였지만,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냉전이나 제 3세계에서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잘못) 이끌어진 사회 혁명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또한 그 이론은 만약에 두 개의 ‘자본주의’ 변종들 사이에서 근본적인 적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제국주의자들이 그렇게 광폭하게도 1940년대 중국혁명에서부터 한국, 베트남 그리고 쿠바에 이르기까지 ‘공산주의’를 격퇴시키려고 싸웠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가 없다.


관료제의 성격에 대하여: 크리스 하먼 대 토니 클리프

클리프의 추종자들이 스탈린주의의 붕괴에 대해 찬양하면서 사회민주주의 반대파들을 ‘혁명적 맑스주의자’로 추켜올리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모하는 반면, 어쩌다 가끔 정치적 사건들을 설명하려는 (단지 묘사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도는 그들의 이론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명백히 드러내 주고 있다. 미국 ‘국제사회주의자 조직(International Socialist Organization: ISO)’의 간행물에 실린 글 중에서 크리스 하먼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시장은 동유럽 경제의 재구축을 의미하는 암호어이다. 경쟁력이 없는 산업 부문은 청산될 것이고 노동자들은 전보다 적어진 보수를 위해 더욱 열심히 일해야만 하게 될 것이다(<사회주의 노동자-미국 판>, 1월).” 이는 진실된 말이다. 그러나 만일에 전면적 사유화가 노동계급에게 그러한 재앙적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면 당연히 ‘자유시장 경제’의 맹공에 대항하여 국가 소유제--‘관료적 집산주의’나 ‘국자자본주의’나 또는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지--의 현 상태를 방어하는 것이 맑스주의자의 기본 임무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국가 소유제를 옹호하자는 그러한 주장은 국제사회주의자의 세계관을 규정짓는 반(反)소비에트주의와 전적으로 모순되는 것이 될 것이다.

클리프 추종자들이 자본주의 복귀주의자들의 위험을 과소평가하는 대신 급속도로 약화되어 가는 스탈린주의적 국가 기구들을 노동계급에 대한 주요한 위협 대상으로 뽑아냄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이론이 행동을 위한 지침서로 역할을 해내는 데 완전히 실패하였음을 감추려고 노력한다. 크리스 하먼에 따르면,

“동유럽의 정세가 현재 어떻게 발전되어 갈 것인지를 정확히 예측하기에는 때가 아직 이르다. 단지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지배계급이 아직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현재 헝가리에서 가능해 보이듯이 만일에 구지배 정당이 완전히 붕괴된다 해도, 이는 [역주: 지배계급이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것] 사실이다.

지배계급과 지배정당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다. …비록 (지배)정당이 붕괴된다 해도 (지배) 계급은 생산수단에 대한 지배 그리고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의 진짜 원천을 보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파시즘이 몰락한 이후의 독일이나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보였다.

경찰 간부, 군 장교, 정부의 장관 그리고 자본가들(industrialists)을 연결 짓는 공식적 조직망은 해체되었다.

그러나 비공식적 연결망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는 축적을 위한 그들의 욕구가 그들의 지배  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그들에게 공동의 계급적 목표를 아직도 계속해서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구지배 정당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의 이해를 옹호해 줄 새로운 지배정당을 건설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동유럽에서 이러한 비공식적 연결망들이 구정당들에 밀착되어 있든지 아니면 새로운 정당과 연결되든지에 상관없이 그들은 다음의 싸움판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지금 정렬을 정비하고 있는 중이다.”--같은 신문

분명히 하먼은 그의 피상적 유추가 그의 이론적 고문격인 토니 클리프의 입장과 직접적으로 반대되고 있다는 사실에 별로 염려하지 않는 것 같다.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 in Russia)>에서 토니 클리프는 ‘계급 지배’의 두 가지 체제를 다음과 같이 비교하고 있다.

“경제와 정치의 연합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또는 정치적 반혁명과 경제적 반혁명 사이를 구분 짓는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부르주아지는 봉건적 왕정이든 입헌 왕정이든 또는 부르주아 공화국이든 간에 정부의 여러 다른 형태 하에서도 그들이 사적 소유제를 지배하는 한 부르주아지로서 존재한다. …이런 모든 경우에서 부르주아지와 생산수단 사이에 직접적인 소유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위의 모든 경우에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직접적인 지배로부터 독립적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서 존재하기를 멈추지는 않는다. 그러나 국가가 생산수단의 저장소인 곳[역주: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나라]에서는 경제와 정치 사이에 절대적인 연합이 존재하며 또한 정치적 권력의 박탈은 경제적인 몰수를 의미한다.”

클리프는 적어도 어떤 정치적 분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지에 관계없이 자본가 계급 모두를 함께 결합시키는 “비공식적인 연결망”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제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리고 만약, 클리프와 하먼이 주저없이 인정하겠지만, 사적 소유제의 부재가 소련과 동유럽의 집산화된 경제의 독특한 특징이라면 스탈린주의적 ‘지배계급’이 그들의 권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가에 대한 절대적 독점을 통해서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동유럽에서 줄줄이 스탈린주의자들은 그들의 정치적 독점권을 포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은 과연 역사상 최초로 싸움 없이 권좌를 내던진 지배계급인가?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먼이 스탈린주의적 긴축 경제의 위험에 대해 순진하기만한 동유럽의 반대파 지도자들을 ‘개량주의자’라고 부른 건 잘못이 아닐까? 그 개량주의적 전략은 적어도 작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스탈린적 관료제: 계급이 아닌 신분제(caste)

스탈린주의자들은 지배계급처럼 행동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배계급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 동유럽 노동자들의 주요한 적은 해체 말기에 있는 여러 관료제들이 아니라 이들 경제를 제국주의 세계 시장에 재통합시키려고 노력하는 미국과 서독 자본주의자들이다.

클리프파의 월간지인 <사회주의노동자평론> 제 2월호 중, 그 중 특히 한 불투명한 서평에서 크리스 밤브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사실상 관료제가 취할 수 있는 선택은 과거의 구국가 자본제 방식에 매달리느냐, 아니면 대처주의 사유화 방식과 비슷한 정책을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대처는 모두 착취를 증가시키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동유럽 경제 사유화 정책의 추진력이 “착취 증가”를 통하여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고자 노리는 스탈린 지배자들의 의식적인 결정에 의하여 도출된다고 하는 밤브리의 견해는 한마디로 우스운 것이다. 자본주의 복구를 향한 추진운동은 아직도 스탈린 국가 관료들에게 남아 있는 그 어떤 사회 권력도 오로지 계속해서 더욱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만일 코메콘 국가들이 자본주의를 재도입한다면 스탈린주의적 관료체제는 붕괴되고 말 것이다. 노멘클라투라[스탈린의 집권 이후·이전의 권력층이었던 직업적 혁명가 집단을 대신하여 체제를 유지한 특권적 지배계층] 층은 경제 활동 조정자라는 자신들의 위치를 자본주의 시장으로 대체하는 것이 곧 그들의 물질적 특권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회적 위치 또한 상실하게 됨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배반당한 혁명>에서 트로츠키는 “현 관료 독재의 멸망은 만일 새로운 사회주의 권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면, 산업과 문화의 재앙적 후퇴를 동반한 자본주의적 관계의 복구를 의미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측하였다. <러시아의 국가자본주의>에서 클리프는 트로츠키의 그러한 예측을 부정하였다. “러시아의 내부 세력들은 개별적 자본주의를 복귀시킬 능력이 없다….” 클리프의 잘못된 견해는 단지 운 없는 추측이라고만 할 수 없다. 이는 소련 관료제가 노동자 계급의 소유제 형태에 기반을 둔 기생물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새로운 계급 사회의 형태에 뿌리들 둔 새로운 지배계급이라고 하는 그들의 주장이 가져오는 필연적 귀결이기 때문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들을 맞아 동유럽 관료제는 절망적으로 서둘러서 자신들의 말을 철회하거나 조급히 겁을 집어먹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바로 이들 관료적 신분의 심각한 불안정성을 생생히 폭로해주는 것이었다. 부상하는 자본주의 질서에서 자신들의 자리를 찾고자 이미 앞을 다투어 싸우고 있는 관료들은 이들이 스탈린 ‘지배계급’의 일원으로서 행동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개별적 기업가(entrepreneurs)로서만 그렇게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다른 한편으론 서방이 지배하는 새로운 경제 질서 속에서 아무런 자리도 찾지 못한 (운 없는) 관료들은 그들의 동기와는 상관없이 그들 자신을 ‘시장개혁’에 환멸을 느끼는 노동자 계급 부분들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당할 것이다. 이는 지배계급의 행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떤 종류의 결정적인 계급 대립에서도 보이듯이 서로 싸우는 주요한 세력들 사이에서 분열된 불안정한 사회층의 행동에 더욱 가깝다.

최근 스탈린주의의 위기는 토니 클리프의 교조가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반(反)소비에트 선입견과 정치적으로 조화를 이루어보려는 연막이었음을 드러내 주었다. 동유럽의 계급투쟁에 의해 제기된 가장 기본적 문제들에 대답을 하거나 스탈린주의자들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는 클리프파의 무능력은, 예측했던 것 이상으로 ‘국가자본주의’론이 과학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이보다 더 나쁜 소식은 만일 클리프의 이론을 동유럽의 좌파가 추종한다면 이는 바로 현 시기 제기되고 있는 주요한 계급 문제 즉, 생산수단의 사유제를 복귀시키려는 자들에 대항하여 (민주적 계획경제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는) 집산 소유제를 방어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서 단지 기권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멍청한 낙천주의가 아닌 레닌주의적 사실주의

클리프주의자들은 현존하는 사실을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사실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역사의 등나무는 사회주의를 향하여 뻗어나가지만, 그 등나무는 길고 그래서 때때로 많은 패배의 길을 통해서 이어나가기도 한다. 그러한 패배를 뚫고 생존하여 승리할 때까지 그 뿌리를 보존하려는 의지는 동화나 멍청한 낙천주의 또는 달콤한 거짓 희망이 아니라 단련된 책임의식을 필요로 한다. 계급투쟁 그 자체는 동유럽의 상황이 어떤 결과를 낳든지 관계없이 사라져버리지 않을 것이다. 미래는 사회주의로 귀결된다. 왜냐하면 제국주의 세계 질서의 야만주의와 온갖 사회적 질병을 뚫고 나갈 길을, 오로지 사회주의만이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Eastern Regimes Implode Death Agony of Stalinism <1917> NO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