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바브웨 : 클리프주의자의 독이 묻은 ‘승리’

이보다 더 큰 범죄는 없다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에 부르주아지와 연합하는 것보다 더 큰 범죄는 없다.”

- 레온 트로츠키, 1939년 7월 15일

[ 초록색 ]……역주

짐바브웨 선거는 사면초가에 몰린 인민주의 선동가 무가베(Robert Mugabe)의 짐바브웨 아프리카 민족동맹(ZANU) 정부에 대한 압박이 증대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이안 스미스(Ian Smith)의 백인 과두정권[ 소수자 독재 정권 ]에 대해 벌인 15년의 게릴라 투쟁 때문에,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10년간을 감옥에서 보낸 무가베는 1980년에 짐바브웨의 초대 대통령으로 무난하게 당선되었다. 그는 그 이후 지금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

무가베는 20년 전 서방 언론에 의해 위대한 정치가로 칭송받았다. 미국과 영국은 짐바브웨가 전략적으로 중요한 지역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막는 역할로서 “자유세계”와 한 몸이 된 것에 상당한 중요성을 부여하였다. 무가베의 “맑스-레닌주의” 정권은 제국주의에 의해 중재된 1979년 스미스 악당정권과의 “랭커스터 협정”의 합의 사항들을 은근슬쩍 미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백인 정착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과, 심지어 백인 인종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인종주의 전쟁에 쏟아붓느라 발생한 부채를 상환하는 것에 대한 동의가 포함되어 있다. 런던과 워싱턴의 무가베 후원자들은 더 비양심적이었다—국가재건을 위해 제공되기로 약속된 7억 5천 파운드 상당의 세계은행의 “짐바브웨 개발기금”은 결코 제공되지 않았다.

1979년 이후로 짐바브웨에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사담 후세인이 그러했듯이, 냉전이 종식되자 무가베도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가치가 많이 떨어졌다. 잔혹한 독재정권은 한때 “자유세계”의 맹우로 칭찬 받았지만, 이제는 고비용의 비효율적 시대착오 체제로 간주되고 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시대에 제국주의 지배는, 토착 엘리트의 다양한 분파들이 제국주의 모국의 요구를 집행하는 직책을 향해 경쟁을 벌이는 선거를 통해서, 더 유연하고 더 적은 비용으로 행사될 수 있게 되었다.

부패하고 부정직한 무가베 체제는 신식민지 국가를 “아프리카화”하는 데 성공했었지만, 지금은 그 약발도 다 된 듯하다. 올해[ 2001년 ] 짐바브웨의 경제는 10%의 하락이 예상된다. 노동인구의 45%는 실업상태이며, 돈을 찍어서 예산의 부족분을 메우려는 정부의 발악적 시도 덕택에 인플레이션은 60%를 넘어서 치솟고 있다. 지난 몇 년간 ZANU에 대한 대중의 저항이 급속히 늘어났다. 이 흐름은 흑인 노동조합 활동가와 영국과 미국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는 백인 자본가 사이의 기묘한 동맹인 민주변혁운동(MDC)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

 

‘아프리카인들의 끝없는 고통’

무가베는 그의 상전에게 지속적으로 굽신거린 경력이 있지만, 여전히 반제국주의 수사를 남발하고 있으며 IMF에 대한 가장 강경한 제3세계 비판가 중의 한 사람이다. 1991년, ZANU는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Economic Structural Adjustment Program: ESAP-“아프리카인들의 끝없는 고통[Eternal Suffering for African People]”이라는 별칭으로 불림)을 받아들였다. 경제개발과 삶의 질 향상의 첩경으로 선전되는 IMF의 처방은, 실제로는 신식민지의 경제를 “선진국”의 다국적기업과 은행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세계적 분업체제에 통합하도록 계획된 것이다.

짐바브웨의 IMF 구조조정은 국유기업(“반半공공기관”) 사유화, 기업과 사치품에 대한 세금 인하, 공공지출 삭감 및 일정한 수출상품을 생산하는 경제로 재편하기 위해 국내제조업을 위한 보호관세의 철폐 등을 포함하였다. 이 조치는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짐바브웨 제조업에 특히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짐바브웨 제조업은 국제적 제재를 맞았던 1960년대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다.

“[짐바브웨가 ]생산한 아침식사용 시리얼, 각설탕, 고급 가구, 막대사탕, 아스파라거스 통조림, 새 모이, 15종의 샴푸, 10종의 핸드클리너, 5종의 립스틱, 7종의 수영장 페인트 그리고 10종의 애완동물 사료… 생산품종은 1967년에는 1,059개에서 1970년에는 3,837개로… 1971년 평균적인 고소득 백인 가정들은 로디지아산[즉, 짐바브웨산] 제품으로 집을 가득 채울 수 있었다.—Uneven Zimbabwe, 패트릭 본드

IMF가 “구조조정”한 다른 모든 신식민지들과 마찬가지로, 짐바브웨에서도 일부 수출 상품의 공급 증가는 그 상품의 가격을 하락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동시에 제국주의 금융자본에 대한 국가의 의존도가 심화되고, 사회적 불평등이 증대되고 다수의 생활수준이 악화되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 하에서 제조업의 생산량은 1991년에서 1995년까지 40% 감소하였고 실질임금 역시 하락했다.

“실질임금 하락의 주된 요인은 치솟는 물가상승률과 실업의 증가이다. 1996년에 조합원들이 1980년보다 평균적으로 38% 더 빈곤하게 되었고, 1990년보다 40% 더 빈곤하게 되었다는 짐바브웨 노총의 보고를 고려해볼 때, 인플레이션은 노동자의 삶을 파괴했다. 또한 ‘사회적 임금’의 하락—상당부분 보건, 교육 및 기타 사회복지에 대한 새로운 비용 회수 정책, 게다가 소비자 신용에 대한 전례 없이 높은 금리로 인한—과 더불어서 노동자와 빈민은 1990년대 초에 유례 없는 금융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급격하게 낮아진 임금은, 정통 경제학 이론에서 얘기하는, 더 많은 일자리 창출로 전환되지 못했다. 실업은 여전히 만연해있다.”—같은 책

부자들을 위한 감세는 정부의 세입을 줄였고 이는 국가부채를 급격하게 증가시켰다. 무가베는 이에 대해 공공부문의 지출을 삭감하는 것으로, 즉 의료서비스와 교육을 누릴 기회(ZANU가 1980년대 초기에 크게 확장시켰던 두 영역)를 급격하게 줄이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1990년과 1994년 사이에 1인당 의료서비스 지출은 37% 떨어졌고, 그 동안에 HIV의 보균자의 비율은 1990년의 10%에서 현재 25%까지 급증한 상태다.

존 펙(John Peck)은 ESAP[ IMF 구조조정 ]의 효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처방된 모든 ‘자유시장’약을 삼켰지만, 짐바브웨의 상황은 무역조건이 악화되고 국내성장이 정체하는 등 여전히 나쁘다. 설상가상으로 여자 아이들의 초등학교 출석률이 20% 떨어졌고, 병원 이용률은 27% 줄어들었으며, 소농과 소자본가들에게 적용되는 이자율은 45%이며, 고등학교 졸업자 중에 50%가 실업상태이며, 실질임금은 1980년 수준보다 60% 감소했다. 세계은행/IMF의 강요로 260명 이상의 공원관리인들이 해고된 덕택에, 짐바브웨에서 이미 멸종위기에 처한 검은 코뿔소에 대한 ‘자유방임’ 밀렵의 고삐가 풀렸다. 서구 초강대국과 그들의 다국적 사채업자들이, 짐바브웨에서 사적 소유에 대한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다면 앞으로의 융자를 보장할 수 없다고 협박하면서, 토지개혁은 사실상 중지되었다. 혁명적 공약들에 대한 번복과 무가베 정부 상층에 만연한 부패는 단지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었다.”—ZMagazine, September 1998

이전에 ZANU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강력한 짐바브웨 노총(ZCTU)은 전투적 파업 물결이 전국지도부가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전국을 휩쓴 1990년대 중반에 주요한 정치적 요소가 되었다. 노동자 투쟁은 1998년 5일간의 “총파업”으로 절정에 달했다. 정권은 초기에 잔혹한 경찰 진압으로 대응했지만 통제력을 회복하는 데 실패했다. 광범한 대중의 반대에 직면한 무가베는 기본식료품에 대한 가격통제, 수입 사치품에 대한 세금인상 및 기업들이 보유한 외환을 짐바브웨 달러로 환전하도록 강제하는 조치들을 도입하면서 좌선회하였다. 이에 격분한 IMF는 1999년 11월 융자를 즉각 중단하고, 모든 대형 국제은행들이 동조하도록 하면서 정부를 흔들었다.

또한 무가베는 로랑데지레 카빌라(Laurent-Désiré Kabila) 정권을 후원하기 위해 콩고에 개입하면서 그의 제국주의 대부들을 불쾌하게 했다. 그의 지지(지금까지 짐바브웨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이 투입되고 미화 2억 달러 상당의 금액이 지원됨)에 대한 답례로 카빌라는 다이아몬드 광산 채굴권을 ZANU의 장관과 고위 장교들에 의해 통제되는 몇몇 기업들에게 제공하였다(Africa-Confidential, 2000년 5월 26일).

 

무가베가 토지 카드를 꺼내다

2000년 2월, 무가베는 그의 임기를 10년 연장하고 의회를 해산할 권한과 파업의 금지 및 그의 측근에게 면책특권을 보장하는 조치들을 포함하는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치는 것을 통해 권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가 패배할 것이 뻔해보이자, 무가베는 백인의 대토지를 토지 없는 흑인들에게 분배하는 조항을 추가하였다.

영국에게 정복되기 이전에, 토착 흑인 부족들은 50만 에이커[ 1에이커 = 4,050 평방미터 ]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890년 세실 로즈(Cecil Rhodes)는 영국 남아프리카 회사를 통해 오늘날 짐바브웨로 알려진 지역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였으며, 현지인들의 저항이 분쇄된 뒤, 1902년에 가장 비옥한 경작지의 4분의 3이 백인들에게 “합법적으로” 배분되었다. 오늘날 이들의 후손들은 짐바브웨 연 수출액의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작물(주로 담배)을 재배하는 4000개 남짓한 상품농장에 25만 흑인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다. 척박하고 메마른 지역의 작은 땅덩어리로 밀려난 조상을 둔, 토지에 굶주린 수백만 흑인들은 빈농으로서 근근이 연명하고 있다.

토지문제는 농촌의 흑인들에게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로 남아있지만, 무가베의 술책은 그가 이전에 반복적으로 그와 비슷한 공약을 저버림으로써 전통적인 농민 지지자들에 신용을 상실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들은 ZANU에 의해 “재분배”된 거의 모든 비옥한 토지가 그들이 권력을 잡은 20년 동안 무가베의 측근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국민투표의 결과는 정권에게는 참담한 패배였으며, 반대파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농촌에서 그들의 지지기반을 회복하려고, ZANU는 백인이 소유한 상업농장 침탈을 후원하였다. 국민투표가 시행된 주에 민족해방전쟁군인회(National Liberation War Veterans’ Association)의 조직원들과 ZANU의 청년조직이 이끄는 침입자들에 의해 1000여개의 사유지가 점거되었다. 민주변혁운동(Movement for Democratic Change: MDC)은 즉시 이 행위를 비난하고 “법치와 사적 소유 존중”을 다짐하였다. 이것은 무가베에게 6월 총선 승리를 위한 충분한 지지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쟁점을 제공했다. MDC는 도시에서 완승을 거두었지만, ZANU는 농촌을 장악했고 의회에서 다수를 유지했다.

무가베의 백인 농장주 토지(먼저 그들의 조상들이 빼앗았던) 수탈 위협은 전적으로 정치적 술수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런던과 워싱턴의 제국주의 전략가들로 하여금 짐바브웨의 수탈이 남아프리카에서 유사한 운동(여론조사는 이 지역에서의 토지 약탈자들에 대한 지지가 짐바브웨에서보다 더 높음을 보여주고 있다)을 이것이 촉발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하였다. 토지의 재수용은 곧 그 지역의 광산 및 자본가의 여타 소유물에로 번질 수 있다.

 

민주변혁운동( MDC)의 등장

지난 몇 년간 짐바브웨 정치에서 가장 중대한 변화는 아마도 1990년대의 전국적 노동조합 투쟁으로 촉발된 대중적 반정부 정서에 편승하면서 백인 부르주아지가 거둔 성공일 것이다. 짐바브웨 국제사회주의 조직(ISO—토니 클리프의 영국 사회주의 노동자당[SWP/B]과 제휴)의 지도자인 무니아라드지 귀사이(Munyaradzi Gwisai)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게 되었는지 설명한 바 있다. 그는 1990년대 대중투쟁의 상승에 대해 논평하면서, MDC가 노동자당의 대안으로서 결성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라레[ 짐바브웨의 서울]와 불라와요에서 열린 노동자 포럼에서 소수 노동자들이 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면, 이에 대한 일반적 대답은 ‘짐바브웨 노총(ZCTU)이 모든 노동자를 대표한다.’일 것이었다. 그러나 1998년 총파업과 전국제헌의회[NCA]의 결성이 있었고 또한 경제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ZCTU의 사무총장 모건] 창기라이(Morgan Tsvangirai)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이에 대해 숙고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압력이 아래로부터 가해지기도 했지만, 또한 전문직 종사자들로부터의 압박도 있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창기라이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Socialist Review, 2000년 9월

귀사이는 MDC 결성의 주축세력인 소부르주아 NCA의 역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NCA는 헌법 문제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현재는 전문직—NGO 활동가, 변호사, 경제전문가 등—에 종사하고 있는, 1980년대 후반의 급진적 학생들이 NCA에 결집했다. 특히 1997년[의 파업]과 함께 노동자계급 급진화의 위협이 있었기 때문에 모건은 NCA(ZCTU 출신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의 상징적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는 활력 넘치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들에게 풍족히 후원받는 NCA에 신뢰성을 부여했다. NCA는 노동자 정당의 건설이 지체되고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방해받는 가운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것은 MDC의 나머지 절반이 되는 실질적인 세력이 되었다.”—같은 글

1999년 2월, 국제사회주의조직(ISO)은 점점 많아지는 정치적 반대파들을 조직하기 위해 개최된 “노동인민대회” 참가를 금지 당했다.

“대표자들이 각지에서 왔는데, 주로 ZCTU 지역 활동가들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신문을 배포하고, 회의의 의장을 맡고, 성명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는 지도부는 자유주의 및 좌파 자유주의 지식인과 한두 명의 사업가로 이루어진 NCA 사람들이 독차지하였다. 그때 이미 모건은 그가 광범한 기반을 가진 당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열성적이었다.

“각 조직에 1명의 대표자가 주어진 대회로부터 느슨한 지도부가 선출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ZCTU와 짐바브웨 인권변호사협회가 동등하게 취급될 수 있는가? 이런 방식으로 중간계급의 지배가 이루어졌다. 1999년 9월, 당이 공식적으로 출범할 때까지 MDC 조직은 여러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이는 ZCTU 조직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초기에는 공장 분회까지 있을 정도였다. 소부르주아지들은 기층에, 특히 하라레를 벗어나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역 지도부 전체는 노동자들이 주도하고 있었다.”—같은 글

그러나 1999년 9월에 MDC가 출범했을 때, 노동자계급의 활동가들은 밀려났다.

“지역의 지도자들은 2월 이후 운동이 건설되어 온 것에 따라, 자신들이 전국 지도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회에서, [지도부] 명단이 그냥 발표되었다.”—같은 글

2000년 1월, 창립총회가 열릴 무렵에 MDC는 당원 수가 백만—짐바브웨 인구의 약10%—이라고 선언하였다. MDC의 성원은 흑인과 노동자 계급이 압도적이었지만, 그 지도부는 실질적으로는 백인 상업농과 기업인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창기라이가 MDC의 의장이 되고 이전에 ISO의 지도자였던 텐다이 비티(Tendai Biti)는 토지 문제에 대한 MDC의 공식적 대변인이 되었다. 그의 일은 백인 지주의 특권 방어를 “진보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MDC의 경제부 장관인, 짐바브웨 산업연맹의 에디 크로스(Eddie Cross)는 MDC 정부가 어떻게 “24개월 이내에 준공공기관의 사유화와 구조조정 달성을 보장”할지를 설명하는 “짐바브웨를 위한 MDC의 민영화 및 아웃소싱 정책”으로 명성을 얻었다. “짐바브웨 기업인들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약속하면서 성명서는 또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국외의 전략적 투자자들에게 사유화된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매입하는 것이 장려될 것이다.” 또한 ZCTU 간부들을 달래기 위해, “노동조합이 사기업화된 회사의 주식을 살 수 있도록” 한다는 조항이 제출되었다.

 

영국공산당 : 멘셰비즘의 재발명

귀사이는 하라레(짐바브웨의 수도)의 노동자 계급 거주지이자 전통적으로 급진적 흑인 민족주의를 지지하는 지역인 하이필드에서 MDC의 공천 후보자로 출마했다. 그는 73%의 득표율(하라레의 다른 많은 후보자들과 경쟁하여 얻은 수치)로 승리했다. 귀사이는 국제 사회주의 경향에서 선출직 공직자가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승리”가 몹시도 추했다는 것에 대한 암묵적 인식 속에, 영국 SWP에 있는 ISO의 멘토들은 그들의 동지가 선거에서 엄청난 표차로 승리한 것에 대해 극도로 말을 삼갔다.

어떤 좌익은 덜 신중했다. 예컨대, 사회주의자 동맹 선거블록에서 영국의 클리프주의자들과 밀착해있는 서푼짜리 인민전선주의자들인 영국공산당(CPGB)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지난달 짐바브웨 총선에서 혁명적 의원(즉, 귀사이)의 당선은 노동자 계급의 의미 있는 약진을 보여주었다—일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수준에서.”—Weekly Worker, 2000년 6월 22일

한편으로 MDC 강령이 “국제 자본가의 입맛에 맞춰져”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CPGB 추수주의자들은 다음과 같이 우기고 있다.

“귀사이 동지를 지지하고 다른 노동자 계급 MDC 후보자들에게 비판적 지지를 보내는 것이 모든 혁명가들의 의무이다.”—같은 글

백인 부르주아 정당을 지지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인해 혼란스러워 하는 <위클리 워커>의 독자들은, 영국공산당의 “비판적”이라는 무화과 잎사귀로 큰 위안을 얻지는 못할 것이다. 투표는 투표이다. 이 순간에도 짐바브웨 백인 엘리트들은, 지지표라면 그 어떤 것이든 그리고 모든 “혁명가” 천치들을 환영할 것이다.

폭발 직전의 혁명적 상황이 잠재되어 있는 짐바브웨에서, CPGB의 ‘작은 영국[ Little England: 제국주의적이지 않은 영국 ]’ 개량주의자들은 신식민지 지배의 헌법제도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대통령제의 폐지와 더불어 전원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대표자들로 구성된 단원제 의회를 요구해야 한다.”—같은 글

CPGB의 지도적 선전가는 심지어 짐바브웨에서의 부르주아 사적소유의 몰수 요구를 내거는 것에 반대하기까지 했다.

“간단치 않은 많은 문제들이 있다. 산업 핵심 생산력은 물리적으로 해외에 있는 요인들에 의존하거나, 그것들을 몰수하려고 할 경우 해외로 나가려고 할 것이다.”—Weekly Worker, 2000년 6월 22일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의 “핵심 생산력”은 국제적 자원에 많든 적든 의존하게 마련이다. 예컨대 영국의 산업은 “물리적으로 해외에 있는 요인”들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그리고 영국 자본가들은 자신들에게 수탈의 위협이 가해질 때 그들의 자산을 빼돌리기 위해 애쓸 것임이 분명하다. 이로부터 영국공산당(CPGB)은 어떤 결론을 도출할 것인가?

분투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에 대한 “통제권” 지속을 어느 정도 쟁취해내고 있는 짐바브웨에서, 영국공산당의 크레틴병 환자들[ 의회 백치증, 부르주아 민주주의 의회에 집착하는 좌익 정당을 향한 레닌의 야유에서 유래 ]은 레닌주의의 몰수강령을 사회민주주의적 환상으로 대치한다.

“아직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수립되지 않은 나라 노동자 계급의 잠재적 무기로서… 노동자 통제는 이 모든 것의 핵심이다. …반면에 국가의 자립이라는 원칙위에서의 단순한 몰수는 그저 경제적 쇠퇴와 자본주의 국가 노동자들에 대한 노동자 국가의 영향력 감소를 가져올 뿐이다.”—같은 글

멘셰비키도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이와 유사하게, 만약 그들이 볼셰비키 패거리를 따르고 자본가들을 수탈한다면 결국 경제적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경고를 했었다.

 

말과 기수

레온 트로츠키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 형성된 연합을 말과 기수의 관계에 비유한 바 있다. MDC에서 기수가 과연 누구인지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백인 자본가들은 무가베를 끌어내릴 무기로 흑인 노동자들의 힘을 이용하길 원하기 때문에, 흑인 노동조합 간부들과 이들의 꽁무니를 뒤쫓는 ISO의 “혁명가”들을 전면에 내세운 당에 참여하는 것을 흡족해 한다. 한때 ZANU 정권이 몰락하면서 부르주아와 그들의 동맹은 군대와 경찰을 손아귀에 넣었으며, 따라서 그들은 노동조합을 마음껏 파괴할 수 있게 되었다.

MDC 지도부에 참여한 노동조합 상층관료의 존재는 평조합원들로 하여금 노골적인 대처[ 레이건과 더불어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였던 영국의 수상 ]주의 강령이 자신들의 이익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 다음엔 “혁명적인” ISO가 ZCTU 관료들에게 좌익적 외피를 제공한다. ZCTU 관료들은 MDC가 그다지 우익인 것인 아니라는 증거로 MDC 내에 있는 “맑스주의자”들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이다.

초기에 클리프주의자들은, MDC를 노동조합에 기반한 “반(反)무가베 활동가들”의 “운동”으로 모호하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MDC의 계급적 성격이라는 쟁점을 피하고자 애썼다.

“대중적 반대가 지난 4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장하였다. 작년에는 반(反)무가베 활동가들이 한데 모여 민주변혁운동(MDC)을 창립하였다. MDC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에 기반하고 있다.…”—Socialist Worker (영국), 2000년 2월 26일

“대중적 반대”로부터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셜리스트 워커>는 짐바브웨 ISO 활동가들의 몇몇 논평을 게재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MDC가] 노동자 정당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이는 환영할만한 전진이다. 우리는 이 운동이 더 왼쪽으로 나아가길 바라고 이 운동이 좌익 사상의 장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MDC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지금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MDC가 무가베 치하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던 자본가들의 지지를 끌어내기 위해 활동하고 있고, 부유한 백인들의 일부를 끌어들인다고 말이다.”—같은 글

“무엇이 짐바브웨 노동자 계급을 위한 길인가?”라는 제목으로 함께 실린 기사 또한 MDC에 대한 천진난만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진정한 변화는 최소한 부농들(대부분 백인들)의 땅의 몰수와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민주변혁운동(MDC)은 전혀 이를 주장하지 않는다. MDC는 노동자와 농민의 기백을 빼면 남는 게 없다. 하지만 그들을 진정한 해방으로 이끌지 않고 있다.”

<소셜리스트 워커>에서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표현되었지만, 실제로 MDC는 그들을 처참한 패배로 인도하고 있다. 영국 SWP의 국제 사업에서 많은 몫을 담당해 온 알렉스 캘리니코스(Alex Callinicos)는 6월 선거에 앞서 며칠 전에 글 하나를 썼는데, 여기에서 귀사이의 출마는 완전히 무시되었고, MDC는 “백인 사장과 지주에서부터 ZCTU의 노조활동가들에 이르기까지 두 계급, 인종의 노선을 초월하는 연합”으로 규정되었다. 그는 MDC가 “IMF가 지시한 비상 프로그램의 이행을 약속”했다는 점을 언급하고, 지난 IMF 개혁의 “파괴적 효과”에 주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주말의 최선의 결과는 MDC가 승리하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Socialist Worker, 24 June 2000).

이 선거 이후의 분석에서, <소셜리스트 워커>는 MDC의 “기업주에 친화적인” 경제 정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무미건조하게 언급했다.

“MDC는 토지 점거 확대를 촉구할 수도 있고, 토지개혁을 20년 동안이나 지연시킨 것에 대해 무가베를 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대신에 백인 농장주들을 원상회복시키고 지원하기 위해 “법과 질서”를 부르짖고 있다.”—Socialist Worker, 2000년 7월 1일

돼지가 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소셜리스트 워커>는 탄식한다.

“운동의 모순적 성격이, 한편으로는 무니아라드지 귀사이가 또 한편으로는 그와 정반대인 전(前) 산업경영인협회 의장 에디 크로스가 의원단에 포함되도록 만들었다.”—같은 글

MDC는 전적으로 부르주아 정당이며, 이것이 귀사이와 MDC의 잡다한 좌익 대변인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현실이다. 대신에 이들은 이 자본가의 정치적 기구가 언젠가는 어떻게든 사회주의를 위한 수단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상상(또는 상상하는 척)을 한다. 클리프주의자들도 잘 알다시피, 부르주아지는 책략에 넘어가지 않으며, 압박당하지 않으며, 그들 자신의 이해를 거스르도록 설득될 수 없다. 실제로 ISO와 이들의 멘토인 영국 SWP 지도부는 서로 같지는 않지만 관련은 있는 환상—귀사이가 <위클리 워커>와의 인터뷰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이 “MDC를 이용할 엄청난 기회를 얻었다”는 믿음—에 빠져있다. 귀사이에 의하면, MDC에 참여하는 것은 ISO에게,

“핵심 지역의 노동계급과 가까워질 기회를 준다. 우리는 주변부에 머물러 왔었다.

“우리가 MDC에서 활동하는 주된 이유는 거기서 유의미하게 남아있으면서 성장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소규모 그룹이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길 바란다.”—Weekly Worker, 2000년 7월 6일

ISO의 활동은 확실히 “영향력을 발휘”하겠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무가베에 대한 짐바브웨 흑인 노동자들의 분노를 백인 농장주들에 대한 지지로 전환시키는 것에 협조하는 것을 통해, ISO는 반동의 길을 닦고 있다. “유의미하게 남아있으면서 성장”하겠다는 그럴 듯한 이유로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독립이라는 사회주의 제1원칙을 포기한 행위는, 국제사회주의경향(ISt)과 그들이 표방하는 트로츠키주의 전통 사이의 심연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국민당에서 MDC까지 : 계급협조주의가 패배를 야기하다

ISO의 MDC 참여는 1920년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스탈린주의적 변질에 맞서서 트로츠키가 주도한 투쟁의 핵심 쟁점이었던 중국공산당의 재앙적인 부르주아 국민당 입당전술의 반복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8차 총회에서 트로츠키가 중국 공산당과 부르주아 국민당과의 “연합”에 대해 지적한 것은 ISO와 MDC의 동침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다:

“만약 부르주아지가 피억압 인민대중을 자신의 깃발 아래로 이끌고, 그 지도력을 통해서 국가 권력을 장악한다면, 이는 동맹이 아니라 피억압 대중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착취이다.”—“중국문제에 대한 첫 번째 연설”

반대로 알렉스 캘리니코스 등은 스탈린을 좇아, 트로츠키가 문자 그대로 자살적이라고 묘사한 계급협조주의가,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지름길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동맹’은 부르주아 국가들의 의회사(史)뿐만 아니라 혁명사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대부르주아지는 민족공동전선에서 공문구를 늘어놓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이끌고, 다음에는 후자[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가 노동자들을 혼란시켜서 그들이 부르주아 뒤를 따르도록 이끈다.’ 만약 소부르주아 말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롤레타리아 ‘후위’가 아주 맹렬하게 떨쳐 일어나면 부르주아는 그의 장군들에게 짓밟으라고 명령한다. 그러면 기회주의자들은 심오한 어조로 부르주아지가 민족적 대의를 ‘배반’했다고 말한다.”—“중국혁명과 스탈린 동지의 테제”, 트로츠키, 1927년 5월 17일

귀사이는 ISO가 MDC 후보로 출마하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MDC에 입당한 이후 우리는 [선거] 캠페인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 이것을 혁명적 대안의 기초로 삼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Socialist Review, 2000년 9월

트로츠키는 이러한 생각을 딱 잘라 부정했다: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대중에 대한 새로운 타격을 위한 직접적 구실이 되거나, 무기력한 인질이 된다.”—“중국문제에 대한 두 번째 연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8차 총회에서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국민당으로 청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당과 완전하게 단절하고 견실한 계급투쟁의 강령을 세울 것을 촉구했다.

“당신들의 노동자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그것과 농민 소비에트에 결합시켜라. 소비에트를 통해 스스로 무장하고, 병사대표들을 소비에트에 끌어들여라. 소비에트를 인정하지 않는 장군을 사살하고 소비에트에 대항하여 반란을 조직하려는 관료들과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을 사살하라. 오직 농민과 병사 소비에트를 통해서만이 장개석 병사 다수를 당신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같은 글

ISO는 조만간에 MDC가 분열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그렇게 되었을 때, 그들은 틀림없이 이러한 전개를 예상했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실천적 행동은 부르주아지로부터의 분립을 지향하는 대신에, “반(反)무가베 운동”의 광범위함에 찬사를 보낸다. 이러한 점은 트로츠키의 사상의 대척점에 있다.

“볼셰비키의 방식은…부르주아지로부터 무조건적으로 정치적 조직적 선을 긋고, 혁명의 모든 첫 단계에서부터 부르주아지에 대해 가차 없이 폭로하고, 부르주아지와의 연합전선에 대한 소부르주아지의 모든 환상을 파괴하며, 대중에 대한 지도력을 위해 부르주아지와 정력적으로 투쟁하는 것에 있다.”—“중국혁명과 스탈린 동지의 테제”, 1927년 5월 17일

클리프주의자들의 MDC에 대한 태도는 전혀 다른 전통에서 나온 것이다.

“멘셰비키의 정책은, 소위 부르주아지의 이탈을 예견하면서, 가능한 한 이탈의 순간을 연기하는 방향으로 지도된다. 프롤레타리아의 정책과 조직의 독립성이 이 목적을 위해 희생되는 동안, 노동자들에게는 부르주아지의 진보적 역할에 대한 확신이 주입되고, 정치적 자기억제의 필요성이 설교된다.”—“중국문제에 대한 첫 번째 연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8차 총회에서

그러나 자본가의 “진보적” 분파에 정치적으로 순응하는 전략은 노동계급에게 치명적이다.

“그렇다. 그럼으로써 부르주아지가 이탈하는 순간은 연기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연기는 프롤레타리아에 대항하는 부르주아지에 의해 이용된다: ‘부르주아지는 거대한 사회적 이점들 덕택에 주도권을 잡고, 그들의 충직한 군대를 무장시키고, 군사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프롤레타리아의 무장을 금지시킨다. 그리고 우위를 차지한 이후 최초의 중대한 격돌에서 그들은 반혁명적 대량학살을 조직한다.’”—같은 글

실제로 클리프주의자들의 짐바브웨에 대한 현 정책은 여러모로 1920년대 스탈린의 중국에 대한 정책보다 더 나쁘다. 국민당은 최소한 양적으로는 제국주의의 후원을 받는 군벌들의 왼편에 서 있었지만, MDC는 명백하게 ZANU의 오른편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에서 노동자 계급은 전략적으로 중요하긴 했지만,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짐바브웨에서 노동자 계급은 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인구의 절반 가량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서 벌어진 일들은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것이었다. 아래와 같은 트로츠키의 결론은 순전히 이 같은 역사적 경험에 기초한 것이다:

“후진국에서 혁명운동 발전의 일반 경향은, 러시아의 3대 혁명(1905년 혁명, 1917년 2월 혁명, 1917년 10월 혁명)에 의해 명확히 드러난 바대로, 연속혁명의 정식에 따라 규정될 수 있다.”—이행 강령

 

승리를 향한 길

ZANU와 MDC는 모두 짐바브웨 노동자 농민의 적이다. 무가베의 좌파적 가식은 그의 20년 동안의 통치를 통해 충분히 폭로되었고, 한편 MDC는 IMF의 앞잡이 역할을 열망하고 있다. 짐바브웨의 도시와 농촌에 있는 빈민과 노동자 계급에게 윤택한 삶의 기회는 오직 자본주의 기생충들을 수탈하는 것을 통해서 열릴 것이다.

혁명가들의 핵심적인 목표는 ZANU의 민족주의적 선동과 부르주아 MDC가 설파하는 “민주적” 긴축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을 깨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신식민지 지배와 자본주의 착취를 근절하는 강령을 내건 혁명적 노동자 정당만이 앞길을 열 수 있다. 이 전략의 핵심 요소는 농촌 프롤레타리아와 빈농과 실업자의 이해를 옹호하는 것을 통해서, 무가베의 기층에 대한 지배력을 박살내는 것이어야 한다.

승리가 보장되어 있지는 않지만, ISO의 계급협조주의 정책으로는 패배가 확실하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망토를 걸치려 하지만, ISO는 실제로 제2인터내셔널의 우익 “사회주의”—프랑스의 “가능주의[ possibilists: 노동자혁명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만 추구하는 정치 조류 ]”, 밀레랑과 베른슈타인—의 전통 위에 서 있다. 그들의 기회주의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클리프주의자들은 의회나 커다란 국가 기구에서 수많은 사람과 함께하는 운동 “현실” 속에서 넋을 잃어 버렸다. 이들은 MDC에 대해 진지하게 비판하면 이를 따르는 대중들을 “소원”하게 만들 것을 두려워한다. 결국 ISO는 영광스러운 사회주의 미래의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과 아무런 실천적 가치도 스스로 부여하지 않는 혁명 전통에 대한 추상적 충실함의 선언으로 포장된, 노동자들의 환상에 대한 수동적 순응 정책을 택했다.

75년 전의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짐바브웨에서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은 자본가 계급의 모든 분파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적대를 표현한다.

“농업혁명의 심화, 농민에 의한 토지의 즉각적인 몰수는 즉시 장개석을 약화시킬 것이며, 그의 병사들에게 혼란을 야기할 것이며, 내륙의 농민들을 동요시킬 것이다. 승리를 위한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중국혁명과 스탈린 동지의 테제”, 1927년 5월 17일

MDC로의 정치적 종속정책은 이와 대조적이다. ISO 지도부의 주관적 의지가 무엇이든지간에, 그들이 선택한 길은 단지 농촌과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 패인 골을 깊게 만들고, 토지에 목마른 빈농들에 대한 무가베의 지배력을 강화시키며, 파멸을 위한 연합을 건설할 뿐이다. 1920년대 후반 스탈린주의화된 중국공산당에 대한 트로츠키의 비판은 오늘날의 국제사회주의경향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적용될 수 있다.

“중국의 볼셰비즘은 오직 공산당의 가장 최정예 당원들에 의한 무자비한 자기비판 하에서만 솟아오를 수 있다.…그것들에 대한 논쟁을 인위적으로 억제함으로서 과거의 잘못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거대한 해악을 야기할 것이다.…만약 우리가 가장 빠른 시일 안에 그들이 멘셰비즘과 멘셰비키로부터 그 자신을 정화하도록 돕지 않는다면 그들은 분열, 탈당, 그리고 여러 그룹들의 격화된 갈등으로 장기간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같은 글

혁명 투쟁의 발생가능성이 최근 몇 년간 짐바브웨에서 격렬한 형태로 존재했었다.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은 IMF/MDC의 긴축정책과 무가베 정권이 선동하는 “반제국주의” 모두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대중투쟁을 통해서 수백만 노동자 계급은 그들이 집단적으로 막대한 사회적 위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배웠다. 짐바브웨에서의 혁명의 폭발은 즉시 남아프리카로 확산될 것이며 전 세계에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단 하나만을 제외하고, 혁명이 발발하기 위한 모든 조건은 갖춰져 있다. ‘분노가 압제자들의 수탈을 겨냥하도록 분투하는 조직 중핵’의 존재. 이러한 지도부는 백인 농장주들이 흑인 프롤레타리아의 목에 올가미를 씌우는 것을 돕는 “전술”을 옹호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단호한 정치 투쟁을 통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Zimbabwe: Cliffites’ Poisoned ‘Victory’

1917 no.23: February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