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사 상-2 (11장-23장)

<차례>

11장: 이중 권력

12장: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13장: 군대와 전쟁

14장: 지배파벌과 전쟁

15장: 볼셰비키당과 레닌

16장: 당의 재무장

17장: "4월 시기"

18장: 첫 번째 연립정부

19장: 러시아군의 공세

20장: 농민

21장: 대중의 정서변화

22장: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와 6월 시위

23장: 결론

 

제 11장: 이중권력

무엇이 이중권력의 핵심인가?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저술에서 이 문제는 한번도 해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은 사회위기의 뚜렷한 특징이며 러시아의 1917년 혁명에서 가장 뚜렷하게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 혁명에만 특수한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사회에는 적대 계급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권력이 없는 계급은 권력을 가진 계급의 지배를 자기에게 유리하게 왜곡시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 두개 이상의 권력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들 사이의 관계는 정치구조의 성격을 직접 규정한다. 단일권력은 정치 안정의 필요조건이다. 그리고 지배계급이 자신의 경제적 정치적 구조를 사회 전체의 유일한 선택으로 강요하는데 성공할 경우 단일권력은 유지된다.

호엔쫄런 왕조의 형태로든 공화국 형태로든 독일의 융커(대지주 계급)와 자본가 계급은 동시에 독일 사회를 지배했다. 이 두 지배계급은 서로 날카롭게 갈등을 일으킨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권력이 아니다. 이들의 사회기반이 같아서 이들 사이의 갈등이 국가기구를 분열시킬 위험이 없기 때문이다. 이중권력은 계급갈등이 화해할 수 없을 때에만 등장한다. 따라서 혁명기에만 등장할 수 있으며 혁명의 기본적 구성요소의 하나가 된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하면서 혁명은 정치적으로 작동한다. 무력을 동반한 권력의 타도는 보통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 심지어는 하룻밤 혁명으로 피지배 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격상되지 않는다. 이 계급은 혁명 이전부터 구 지배계급에 대해 아주 독자적인 태도를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 더욱이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독자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중간 계급 계층들의 희망을 자기에서 집중시켜야 한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부름 받은 계급은 혁명 직전의 시기에 사회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이 준비된다. 물론 이때 공식 국가기구는 여전히 구 지배계급의 손에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에서 이중권력의 초기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중권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혁명으로 권력에 올라선 새로운 계급은 실제로는 이미 낡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효가 지난 계급이다. 이 결과 이 계급은 공식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계급이 된다. 그런데 이 계급이 권력으로 밀려 올라간 순간 충분히 성숙하여 권력을 도모하는 적대 계급과 마주칠 때가 있다. 이 때는 불안정한 이중권력보다 더 불안한 권력이 정치혁명으로 수립된다. 어쨌든 이중권력의 “무정부 상태”를 새로운 단계 단계마다 극복하는 것이 혁명 또는 반혁명의 과제이다.                      

일반적으로 이중권력은 두 적대 계급에 의해 권력이 균형 있게 양분될 가능성을 전제하기는커녕 배제한다. 이것은 헌법으로 인정되는 권력이 아니라 혁명에 의해 조성되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균형이 파괴되어 상부구조인 국가가 이미 쪼개진 상황이 이중권력이다. 이때가 되면 두 적대 계급은 시효가 지난 정부기구와 막 형성되고 있는 정부기구 즉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정부기구를 하나씩 꿰어찬다. 그리고 이 정부기구들은 시시때때로 서로를 밀치며 경쟁한다. 투쟁 과정에서 형성되는 계급의 상호관계에 따라 각 계급이 휘두르는 권력의 양이 결정된다.

본성 상 이 상태는 안정적일 수 없다. 사회는 한 계급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안정되기를 원한다. 따라서 지배계급 또는 두 반(半)지배계급들을 통해 사회는 이 목적을 달성하려고 애쓴다. 권력의 양분 상태는 내전의 전조이다. 그러나 두 적대계급이 이 극단으로 치닫기 전에 특히 제 3 세력의 개입을 두려워할 때 이들은 상당 기간 이중권력을 감내하고 심지어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체제는 폭발을 피할 수 없다. 내전은 영토를 놓고 싸우기 때문에 이중권력의 모습을 가장 두드러지게 표현한다. 자신의 아성을 구축한 두 세력은 나라의 영토를 전부 차지하려고 애쓴다. 이 결과 두 적대 세력은 서로를 계속해서 침략하는 형태로 이중권력을 감내하다가 이 가운데 하나가 결정적으로 세를 굳힌다.          

17세기의 영국 혁명은 나라를 완전히 파괴한 거대한 혁명이었다. 따라서 내전 형태로 이중권력이 급격히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왕정은 귀족과 주교 등 특권 계급 또는 이 계급 상층부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이 계급과 밀착한 대지주들이 연합하여 왕정에 도전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아성인 런던이 지지하는 장로의회(Presbyterian Parliament)가 부르주아 계급의 정부였다. 이 두 권력 사이의 장기화된 투쟁은 마침내 공개적인 내전으로 해결된다. 두 권력의 중심부인 런던과 옥스퍼드는 각각 자신의 군대를 조직한다. 이로써 이중권력은 영토를 차지한 내전의 형태를 띤다. 물론 내전에는 언제나 그렇듯이 영토 경계선은 수시로 변한다. 마침내 의회군이 승리하고 왕은 체포되어 운명을 기다린다.

이제 장로 부르주아 계급의 단일권력이 수립될 조건이 형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의 권력이 깨지기 전에 의회군은 스스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변모한다. 이 군대는 자기 대오에 독립파(Independents) 즉 수공업자와 농민 등 신앙심이 투철하고 결의에 찬 소부르주아 계급을 결집시킨다. 그리고 단순한 무장집단으로서 뿐 아니라 치안방위군(Praetorian Guard) 그리고 부유한 대부르주아 계급에 반대하는 새로운 계급의 정치적 대표가 되어 사회에 강력히 개입한다. 그리고 이에 조응하여 군대는 총사령부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국가기관 즉 병사 장교 대의원(“선동가들”) 위원회를  수립한다. 이렇게 이중권력의 새로운 시기가 도래한다. 한쪽에는 장로의회 또 한쪽에는 독립파 군대가 서로 대항하면서 이중권력을 형성한다. 그리고 공개적인 투쟁이 계속된다. 부르주아 계급의 군대는 크롬웰의 평민 “모범군”을 무찌르기에는 역부족이다. 이 투쟁은 독립파의 칼에 장로의회가 난도당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제 장로의회는 잔당만 남아 유명무실해지고 크롬웰의 독재가 수립된다. 그러나 다시 혁명의 극좌파인 수평파(Levellers)가 군대의 하부를 지휘하여 군대 귀족에 대항, 평민 정권을 수립하려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이중권력은 계속 발전하지 못한다. 소부르주아 계급의 최하층인 수평파가 권력을 잡기에는 역사적 조건이 무르익지 않았다. 크롬웰이 수평파를 제거하면서 결코 안정적이지 않은 새로운 정치적 균형을 수립한다. 이 균형은 수년을 지속한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제 3 신분의 상층부는 제헌의회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대의기구는 왕의 특권을 전부 폐지하지 않은 채 권력을 장악한다. 이 시기에 이중권력의 쌍방은 명확히 구분된다. 루이 16세가 바렌느로 도망하는 것으로 이중권력 상황은 끝난다. 그리고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이 상황은 공식적으로 청산된다.

1791년에 제정된 제 1차 프랑스 헌법은 입법부와 행정부의 완전한 독립이라는 허구에 기초하였다. 이것은 혁명 인민으로부터 이중권력 상황을 은폐했거나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이중권력의 한 축은 혁명 인민의 바스띠유 감옥 점령 이후 국민의회를 확고히 장악한 부르주아 계급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성직자, 관료, 군대의 상층부에 여전히 의존하면서 반동 외국들의 혁명 개입을 희망한 낡은 왕정이었다. 이 자기 모순적 체제는 내부에 파괴의 싹을 불가피하게 가지고 있었다. 이 모순은 유럽의 반동 강대국들이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여 부르주아 계급을 제거하던가 아니면 왕과 왕정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으로만 해결될 수 있었다. 결국 혁명 빠리와 반동 코블렌츠가 힘을 겨루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과 단두대 이전에 꼬뮌(인민자치위원회)이 빠리의 혁명 무대에 등장한다. 제 3 신분 가운데 도시 최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던 꼬뮌은 점점 대담해지면서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의 공식 대표들과 권력을 다투었다. 이렇게 새로운 이중권력이 형성되었다. 이중권력의 징후는 대부르주아와 중부르주아가 행정부와 자치도시들에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한 1790년에 이미 나타났다. 가발과 비단 승마바지의 유산계급들이 나라의 운명을 독단하고 있던 정치무대에 사회의 밑바닥 평민들이 등장하여 정치에 개입했다. 이들의 노력은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며 또 얼마나 지독하게 비방을 받았는가! 교양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짓밟혀온 사회의 밑바닥이 꿈틀거리며 생명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인간의 머리가 딱딱한 땅을 비집고 올라와 노동으로 딱딱하게 거칠어진 손을 뻗치며 목은 쉬었으나 용감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혁명의 사생아인 빠리의 구(區)들은 자기의 삶을 시작하고 있었다. 이들은 즉시 지배계급의 눈에 들어왔다. 이들을 모르는 체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고 구는 소(小)구로 다시 재편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법의 경계선을 무너뜨리고 아래로부터 신선한 피를 계속 수혈 받았다. 그리고 법을 무시하고 무권리와 빈곤에 찌든 빈민들에게 정치 활동의 문을 열어주었다. 동시에 봉건소유제를 방어하는 부르주아 법에 대항해 농민들이 봉기를 일으키자 지방의 자치도시들은 이들을 옹호했다. 이렇게 하여 이등 국민 밑에서 삼등 국민이 들고 일어선다.

빠리의 소구들은 처음에는 꼬뮌과 대치했다. 당시 꼬뮌은 여전히 품위 있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장악되고 있었다. 1792년 8월 10일 대담한 공격으로 소구민들은 꼬뮌을 장악했다. 이때부터 혁명 꼬뮌은 입법의회 그리고 이후 국민공회에 저항했다. 입법의회와 국민공회는 혁명이 제기한 문제들과 속도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다만 사건을 기록할 뿐이었다. 빠리의 구 한가운데에서 일어나 가장 후진적인 농촌마을의 지지를 받은 새로운 계급의 활기, 대담성, 의견의 완전일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구민들이 꼬뮌을 장악하자 꼬뮌은 새로운 봉기를 통해 국민공회를 장악했다. 혁명의 단계마다 대항권력이 극명하게 구분된 이중권력이 등장하여 우익 권력은 방어투쟁을 좌익 권력은 공세투쟁을 통해 강력한 단일권력을 확립하려고 애를 썼다. 혁명과 반혁명에서 독재체제 수립을 위한 요구는 이중권력의 참을 수 없는 모순에서 나온다. 이중권력은 내전을 통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이행한다. 권력이 새로운 계급 계층에게 넘어가는 혁명의 거대한 단계들은 각 단계에 조응하는 대의기관을 동반하지 않는다. 대의기관은 마치 뒤늦은 그림자처럼 혁명의 폭풍 뒤에 천천히 따라올 뿐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하층민의 혁명 독재는 국민공회의 독재와 연합한다. 그러나 어떤 국민공회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테러로 이 대의기구를 장악했던 지롱드파는 제거되었다. 대신 새로운 사회 세력의 지배를 위해 국민공회는 축소되고 개조되었다. 이렇게 이중권력의 단계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은 4년을 경과하면서 절정에 도달한다. 그리고 테르미도르 9일의 반동 이후 다시 이중권력의 단계들을 통해 하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상승 단계 때와 똑같이 하강 단계마다 먼저 내전이 벌어진다. 이 방식을 통해 새로운 사회는 새로운 세력 균형을 찾는다.

라스푸틴의 관료들과 싸우기도 하고 협동하기도 하면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전쟁 중에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엄청나게 강화시켰다. 짜르 체제의 패배를 활용하고 도시와 농촌의 단체들 그리고 군산위원회 등을 통해 이들은 거대한 권력을 장악했다. 엄청난 국가의 자원을 마음대로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아성들은 짜르에 버금가는 정부였다. 전쟁 중에 짜르의 장관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르보프공이 군대에 보급품, 식량, 의약품 등을 공급하고 있을 뿐 아니라 병사 이발소까지 차리고 있다. 1915년 크리보쉐인 장관은 이렇게 말했다: “이 상태를 중지시키거나 그에게 권력을 전부 넘기거나 둘 중에 하나 밖에 없다.” 이로부터 1년 반이 지나 르보프가 “권력 전부”를 접수할 것이라고 그는 상상도 못했다. 다만 권력은 짜르가 아니라 케렌스키, 체이제, 수하노프에 의해 제공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권력을 접수받은 지 이틀만에 새로운 이중권력이 성립했다. 어제는 자유주의자들의 반(半)정부였다가 오늘은 공식적으로 합법성을 부여받은 임시정부가 한 축을 이루었다. 그리고 공인 받지는 않았으나 훨씬 더 실세인 근로대중의 정부 소비에트가 또 한 축을 이루었다. 이 순간부터 러시아 혁명은 세계 역사적 의의를 지닌 사건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이중권력의 특수성은 무엇인가? 17세기와 18세기의 혁명에서 이중권력은 적대 세력들에게 일시적으로 강요된 투쟁의 자연스러운 단계였다. 여기서 각 세력은 자신의 단일권력으로 이중권력을 대체하려했다. 그런데 1917년 혁명에서는 공식 민주주의 세력이 의식적으로 이중권력을 수립해 놓고 모든 힘을 다해 권력 장악을 회피했다. 언뜻 보면 적대 계급들의 권력장악 투쟁이 아니라 한 계급의 자발적인 “양보”로 이중권력이 성립한 것 같다.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 권력에서 물러나는 것을 통해 이중권력의 모순을 청산하려했다. 우리가 표현한 바 2월 혁명의 역설은 바로 이 현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러시아의 경우는 1848년 독일 부르주아 계급이 왕정에 대해 보인 태도와 유사하다. 그러나 완전히 유사하지는 않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합의를 통해 왕정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 진지하게 노력했다. 이를 통해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완전히 왕정에 넘겨주지도 않았다. “프로이센 부르주아 계급은 명목상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구 정부 세력이 아무 조건 없이 복종하여 자신의 전능을 충성스럽게 따를 것이라고는 단 한순간도 생각하지 않았다.” (맑스와 엥겔스)

1917년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봉기의 순간부터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이것을 부르주아 계급과 나누려고 했을 뿐 아니라 국가기구 전부를 통째로 넘기려했다. 20세기의 첫 25년에 러시아의 공식 민주주의 세력은 19세기 독일의 자유부르주아 계급보다 훨씬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스스로를 해체했다. 그리고 이 현상은 역사의 법칙에 전적으로 부합한다. 같은 시기 노동계급의 급성장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크롬웰의 지지기반인 수공업자들 그리고 로베스삐에르의 지지기반인 하층민과 똑같이 이제 러시아 노동계급은 혁명을 철저히 수행할 지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좀더 깊이 관찰하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이중권력은 권력 실세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다. 노동계급만이 유일하게 새로운 권력을 주장할 수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을 불신하면서 이들에게 의존했던 화해주의자들은 왕과 예언자의 이중 장부를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의 이중권력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진짜 이중권력을 숨기면서 동시에 반영할 뿐이었다. 이로부터 몇 달 뒤 볼셰비키들이 화해주의자들을 몰아내고 소비에트의 선두에 설 때 이 숨겨진 진짜 이중권력은 표면으로 드러나고 10월 혁명의 전조가 된다. 이때까지는 혁명은 정치적 반사의 세계에 살고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 지식인들의 변명으로 굴절된 이중권력은 계급투쟁의 단계가 아니라 계급투쟁을 억제하는 원칙이 되었다. 이중권력이 모든 이론적 논의의 중심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모든 사물은 나름대로 소용이 있다: 2월 이중권력의 반사경 같은 성격 때문에 두 체제의 투쟁을 통해 완전하게 모습을 드러낸 이중권력의 시기가 더 잘 이해된다. 햇빛이 반사되어 흐릿하게 비치는 달빛이 햇빛에 대한 중요한 결론들을 이끌게 해주는 것과 같다.

17세기와 18세기 혁명의 주역이었던 도시 대중과 비교하면 러시아 노동계급은 비교할 수없이 더 성숙했다.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근본적 특수성이다. 이 결과 반정도 허깨비 같은 이중권력의 역설이 나왔다. 그리고 이 결과 나중에 성립한 진짜 이중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에게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문제는 간단했다: 부르주아 계급이 구 국가기구를 실제로 장악하여 자기 목적에 맞게 약간 개조하면서 소비에트를 무용지물로 만들던가 소비에트가 새로운 국가의 기초를 형성하여 구 국가기구 뿐 아니라 이것이 봉사했던 계급들의 지배를 청산하던가 둘 중의 하나였다.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첫 번째 해결책을 찾았고 볼셰비키는 두 번째 해결책을 찾았다. 프랑스의 혁명가 마라는 이렇게 말했다: 과거의 피억압 계급은 자신이 시작했던 혁명을 끝까지 수행할 지식, 기술, 지도력을 소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의 러시아 혁명에서 피억압 계급인 노동계급은 이 세 가지 모두로 무장되었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는 승리했다.

러시아 혁명이 승리한지 일년만에 같은 상황이 독일에서 반복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계급 역관계는 러시아와 달랐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민주정부를 수립하고 대신 소비에트를 청산하는 쪽으로 혁명을 이끌었다. 룩셈부르크와 리이프크네히트는 소비에트 독재로 혁명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승리했다. 독일의 힐퍼딩과 카우츠키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막스 아들러 등은 소비에트 체제를 민주주의와 “결합시켜” 노동자 소비에트를 헌법에 포함시킬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실현되었다면 잠재적 또는 실제적 내전이 국가 정치체제의 구성부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보다 더 신기한 유토피아는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이 제안은 독일의 전통에서 유일한 변명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1848년 혁명에서 위르템베르크 민주주의자들은 공작이 국가를 대표하는 공화국을 원했다.

맑스주의 국가이론에 의하면 정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활발한 논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중권력 현상은 맑스주의 이론과 모순되는가? 이것을 달리 표현하면 이런 질문이 된다: 공급과 수요에 의한 가격 등락은 노동가치론과 모순이 되는가?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는 자기희생 행위는 생존투쟁 이론을 반박하는가? 그렇지 않다. 이 현상들을 통해 같은 법칙들이 좀더 복잡하게 결합하고 있을 뿐이다. 국가는 계급지배의 조직이다. 혁명은 지배계급의 타도이다. 그렇다면 한 계급으로부터 다른 계급으로의 권력 이동은 반드시 자기 모순적인 국가 상태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중권력을 성립시킬 수밖에 없다. 계급 역관계는 선험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 수학적 양이 아니다. 구 체제가 타도되어 균형을 잃어버리면 투쟁을 통해서만 새로운 역관계가 확립될 수 있다. 이것이 혁명이다.

이중권력에 대한 이론적 탐구가 1917년 사건들을 우리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탐구를 통해 우리는 당시 사건들의 핵심에 도달한다. 정당들과 계급들의 극적인 투쟁은 바로 이중권력의 문제를 축으로 전개되었다. 오직 이론적 고지에서만 이 현상을 완전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제 12장: 집행위원회

2월 27일 타우리데 궁전에서 “노동자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실체는 그 이름과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소비에트의 원조는 1905년 혁명의 노동자 소비에트였다. 이 조직은 총파업 과정에서 수립되었으며 대중투쟁을 직접 대표했다. 파업 지도자들은 소비에트 대의원이 되었다. 따라서 대의원들은 삶과 죽음이 오락가락 하는 투쟁에 의해 걸러지고 단련되었다. 그리고 이 조직의 집행위원회는 투쟁을 진전시키기 위해 소비에트에 의해 선출되었다. 무장봉기를 일정에 올린 조직이 바로 이 집행위원회였다.

그러나 1917년 2월 혁명에서는 노동자들이 소비에트를 수립하기도 전에 군대의 봉기가 먼저 승리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한 후 집행위원회는 소비에트보다 먼저 그리고 공장이나 병영과는 독자적으로 결성되고 선언되었다.

이 현상은 급진주의자들의 주도력이 모범적으로 성공한 고전적인 예이다. 이들은 혁명 투쟁에서는 팔짱을 끼고 있다가 혁명의 성과는 자기 것으로 가로채려 했다. 이때 노동자들의 진짜 지도자들은 아직 가두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반동기구의 무장을 해제하고 혁명을 무장시키면서 혁명의 확실한 승리를 확보했다. 타우리데 궁전에서 일종의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들 가운데 시야가 넓은 일부는 놀라면서 우려를 표시했다. 1916년 가을 친위 쿠데타를 예상하면서 자유 부르주아들은 쿠데타가 성공할 경우 새로 즉위하는 짜르에게 제시할 예비 정부를 준비해 놓은 상태였다. 따라서 급진 지식인들은 2월 혁명이 승리할 순간에 이미 예비 정부를 구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은 한때 노동자 운동에 접근하면서 이 전통으로 자기들의 정체를 숨기려고 애썼었다. 그래서 이들은 혁명이 성공하자 자기들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모든 역사 특히 인민혁명의 역사를 가득 장식하는 반(半)의도적인 속임수의 한 예였다. 과거와 급격히 단절하는 혁명이 터지면 구 지배계급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는 방법을 터득해야할 “교육받은” 계층은 대중의 영웅적 투쟁과 관련된 이름이나 상징은 어떤 것이든지 즐겁게 잡아채어 자기 것으로 위조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되놈이 가져간다. 따라서 이름은 진짜를 사칭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영향력 있는 집단들의 이해에 부합할 경우는 더 그렇다. 처음 생길 때부터 집행위원회는 막강한 권위를 누렸다. 이것은 1905년 소비에트가 계속되고 있다는 착각에 근거했다. 진짜 소비에트가 막 생겨나 혼란스러운 첫 회의를 열었을 때 집행위원회는 엉겁결에 인준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소비에트 대의원들과 그 정책에 대단히 보수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혁명의 진정한 대표들을 걸러내는 삶과 죽음의 투쟁은 끝났으며 봉기는 과거지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모두들 승리에 취해 혁명의 성과를 누리며 좀더 편하게 살 궁리를 하고 긴장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리고 칼날 같아야할 이성도 느슨해져 있었다. 소비에트는 혁명의 승리를 재단에 모셔놓는 기관이 아니라 새로운 봉기를 위한 투쟁과 준비의 기관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지도부도 물갈이되어야했다. 이를 위해서는 앞으로 몇 달 동안 새로운 갈등과 투쟁이 필요했다. 이 측면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 동안 우리는 이 문제를 전혀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탄생 당시의 상황 때문에만 집행위원회와 소비에트가 온건 화해주의를 표방한 것은 아니었다. 일시적 상황보다 더 깊고 더 끈질긴 원인들이 작용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에는 15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보다 최소한 4배나 많은 노동자들이 이 도시에 거주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에는 노동자 대의원 두 명마다 병사 대의원은 다섯 명이 있었다. 대의원 규정은 매우 가변적이었으며 언제나 병사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되었다. 노동자들은 천 명당 한 명의 대의원을 소비에트에 보냈으나 아주 작은 군대 단위도 두 명의 대의원을 보내는 경우가 빈번했다. 병사의 회색 군복이 소비에트의 분위기를 규정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선출한 민간인 외에 적지 않은 수가 개인적인 초대를 받거나 연줄에 의해 또는 단순히 침투능력 때문에 소비에트에 출석했다. 급진 성향의 변호사, 의사, 학생, 기자 등이 의심스러운 집단들을 대표하거나 단순히 개인적 야망으로 소비에트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히 왜곡된 소비에트를 지도자들은 차라리 환영했다. 이들은 공장과 병영의 뻑뻑한 진국을 교양 있는 속물들의 미적지근한 물로 희석시키는 것을 전혀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우연한 기회주의자들, 모험가들, 자칭 구세주들, 전문 허풍선들은 말이 없는 노동자들과 결심이 서지 않은 병사들을 상당한 기간 동안 권위로 눌렀다.

뻬쩨르부르그의 상황이 이러했다면 전혀 투쟁이 없이 혁명이 성공한 지방은 어떨지 상상이 간다. 나라 전체는 병사들로 우글거렸다. 키에프, 헬싱키, 티플리스 등의 주둔군은 뻬쩨르부르그만큼 규모가 컸다. 사라토프, 사마라, 탐보프, 옴스크 등에는 7만에서 8만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야로슬라프, 에카테리노슬라프, 에카테린부르그 등에는 6만 명이 기타 도시들에는 5만, 4만, 3만 명의 병사들이 주둔했다. 각 지역마다 소비에트 대표 방식이 달랐지만 모든 곳에서 병사들은 특권을 누렸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초한 결과였다. 이들은 병사들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장교들을 만나기 위해 최대한 양보를 했다. 병사들에 의해 처음 대의원으로 선출된 하급장교들 외에도 특히 지방에서는 사령부 참모진도 특별한 대표권을 누렸다. 이 결과 군대는 다수의 소비에트에서 압도적 우위를 누렸다. 나름대로 정치노선을 갖기 전에 병사 대중은 자기 대의원들을 통해 소비에트의 성격을 먼저 규정했다.

대의기구는 자기를 선출한 대중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혁명이 터진지 이틀 째 되는 날에는 특히 더했다. 정치성이 허약한 병사들이 대의원들을 선출했으나 이들은 종종 병사나 혁명과 무관한 경우가 많았다. 모든 종류의 지식인들과 반(半)지식인들이 병영 뒤에 숨어 있다가 병사들의 대의원이 되어 극단적 애국자로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병영의 정서와 병사 대의원들로 채워진 소비에트의 정서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했다. 혁명이 승리한 후 스탄케비치 장교가 소속된 대대의 병사들은 그를 불신과 퉁명스러움으로 대했다. 그러나 그가 군대의 규율이라는 민감한 문제에 대해 병사 소비에트에서 연설했을 때는 호평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자문했다: 소비에트의 정서는 대대의 정서보다 왜 이렇게 부드럽고 친근할까? 이 생각이 없는 놀라움은 하층의 정서가 상층으로 전달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시 한번 증명했다.

그리고 이미 3월 3일 병사와 노동자들의 집회는 이렇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소비에트는 자유부르주아 임시정부를 즉시 타도하고 스스로 권력을 잡아라! 이번에도 이 움직임은 비보르그 지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중의 마음에 이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가까운 요구가 있을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이 선동은 곧 중단되었다. 조국방어주의자들이 날카롭게 반발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부 다수가 이미 3월초 이중권력에 굴복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볼셰비키들 외에는 아무도 권력의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 따라서 비보르그 지도자들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단 한순간도 새 정부를 자신들의 정부로 인정하고 신뢰를 보낸 적이 없었다. 다만 이들은 병사들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이들을 너무 날카롭게 반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계산이 빠른 농민은 새 지주들을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인 농민은 이제 막 정치 경험을 시작했기 때문에 자기가 뽑은 대표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병사 대표들은 집행위원회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후자는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박동을 경청하였다. 이렇게 하부가 상부를 경청하는 상황이 당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하층의 정서는 결국 표면으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위적으로 무시되었던 권력의 문제는 비록 위장된 형태로나마 계속 제기되었다. 도시와 지방은 이중권력에 대한 불만을 집행위원회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병사들은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다.” 3월 16일 발트해와 흑해 함대의 대표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임시정부가 집행위원회와 보조를 맞출 경우 임시정부를 인정하겠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임시정부를 인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생각은 더욱더 큰 소리로 터져 나왔다. 172 예비연대는 이렇게 결의한다: “군대와 인민은 소비에트의 지시만 따른다. 소비에트의 결정에 반대되는 임시정부의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 만족감과 걱정을 동시에 느끼면서 집행위원회는 현실을 인정했다. 반면 임시정부는 이빨을 갈면서 참았다. 이들이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이미 3월초 모든 주요 도시와 공업 중심지에서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이곳들을 중심으로 다음 한두 주에 걸쳐 전국 소비에트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4월과 5월이 되어야 마을 단위로 소비에트가 모습을 나타낸다. 처음에는 군대만 농민의 이름으로 발언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실제적으로 국가기구로 격상되었다. 다른 도시와 지방의 소비에트들은 수도 소비에트의 지도를 받아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 결의문을 채택했다. 첫 몇 개월 동안 수도 소비에트와 지방 소비에트의 관계는 원만했다. 그러나 정세로 보아 국가기구가 명백히 필요했다. 짜르가 타도된 지 한달 만에 구성원이 불완전하고 일방적이었지만 전국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렸다. 185개 출석 소비에트 가운데 3분의 2는 지방 소비에트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부분 병사 소비에트였다. 전선의 군대 대표들과 함께 군대 대의원들은 대개 장교였으며 소비에트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연설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볼셰비키들이 온건한 정도를 넘어서서 조심스럽게 행동했지만 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성토가 있었다. 이 협의회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16명의 보수적인 지방 대표들을 첨가시켰다. 이제 집행위원회는 국가기구의 성격을 적법하게 부여받았다.

이로 인해 우익 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부터 이들은 지방 소비에트들의 보수적 노선을 언급하면서 자기에게 불만을 표시하는 분자들을 겁주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대의원 자격을 엄격히 제한하는 결의문이 3월 14일에 채택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실행되지 못했다. 이제는 지역 소비에트 대신 전국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모든 것을 결정했다. 이로써 집행위원회 공식 지도자들은 거의 부동의 지위를 차지했다. 임시정부 핵심들과 사전 합의를 거친 후 집행위원회 핵심들은 가장 중요한 결정들을 내렸다. 이제 소비에트는 한쪽으로 물러나 있었다. 지도자들은 소비에트를 하나의 회의 정도로 치부했다: “총회에서 정책이 나오지는 않는다. ‘전원 회의’들은 거의 중요하지 않았다.”(수하노프) 만족한 지도자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권한을 위임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이제 할 일을 다했다. 그러나 이들의 생각은 곧 틀렸음이 증명된다. 대중은 참을성이 있다. 그러나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찰흙이 아니다. 더욱이 혁명의 시대에 이들은 빨리 배운다. 여기에 혁명의 원동력이 있다.

이후에 전개되는 사건들을 더 잘 이해하려면 두 정당의 성격을 잠시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정당들은 처음부터 긴밀하게 정치적으로 연합했고 소비에트, 민주적 자치도시, 소위 혁명적 민주주의 대회 등을 장악했다. 심지어 압도적 다수의 쪽수가 꾸준하게 줄어들었으나 이들은 제헌의회 때까지 다수를 유지했다.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태양이 비추는 언덕 꼭대기의 저녁놀처럼 제헌의회는 이 정당들이 누렸던 과거의 권력을 마지막으로 반영했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너무 늦게 세상에 나왔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를 수호할 세력이 될 수 없었다. 같은 이유로 러시아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자처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에 민주주의 이념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때문에 20세기를 앞둔 시기에 급진 지식인들은 대중에게 다가가려면 자신을 사회주의로 치장해야했다. 노동계급과 자본가 계급 정당의 사이에 샌드위치가 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바로 이 역사적 배경 속에서 등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각각 나름의 뿌리와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

멘세비키의 세계관은 맑스주의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역사적 후진성 때문에 러시아의 맑스주의는 자본주의에 대항하기보다 자본주의 발전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면서 시작되었다. 곰팡내 나는 “인민주의” 지식인들을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서구화시키기 위해 역사의 신은 알맹이가 빠진 노동계급 혁명이론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이 과정에서 멘세비키들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부르주아 지식인들 가운데 좌파였던 이들은 의회와 노동조합에서 합법활동에 열중하고 있던 노동계급의 온건파 상층부와 부르주아 계급을 연결시켜 주었다.

반면 사회혁명당은 이론적으로 맑스주의에 가끔 투항하면서도 이것에 대항했다. 이들은 비판이성의 인도 하에 지식인, 노동자, 농민을 연합시킨 정당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 정당의 경제 이론은 역사적으로 축적된 다양한 성과들이 소화되기 힘들게 뒤섞인 잡탕이었다. 이것은 급격히 자본주의 발전을 겪고 있는 나라의 농민들이 처한 모순을 반영했다. 사회혁명당에게 당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도 사회주의 혁명도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 혁명에 불과했다. 이들은 사회적 내용(토대)을 정치적 개념(상부구조)으로 대체했다. 즉 토대의 진정한 변화 없이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중간 지점에 자기 노선을 확정하고 두 양대 계급의 중재자로 나섰다. 2월 혁명 후 사회혁명당은 이 목적에 대단히 가까이 접근한 것처럼 보였다.

1905년 혁명 당시부터 이들은 농민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1917년의 첫 몇 달간 농촌의 지식인들은 모두 인민주의의 전통 노선인 “토지와 자유”를 자기 노선으로 채택했다. 언제나 도시의 정당이었던 멘세비키들에 비해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지지기반을 찾은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이들은 도시까지 장악했다. 소비에트에서 이들은 병사 부문을 통해 그리고 첫 민주적 자치도시들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 정당의 역량은 무한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정당은 정치적 변태에 불과했다. 자기가 무엇을 위해 투표하는 지를 아는 소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은 정확한 의미에서 정당이 아니다. 이것은 전세계 아기들이 공통으로 내뱉는 옹알이가 진정한 언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2월 혁명의 설익고 혼란스러운 모든 것을 사회혁명당은 전부 엄숙히 표현했다. 혁명 이전에 이미 입헌민주당이나 볼셰비키당에게 표를 던져야할 이유를 상속받은 사람들을 제외한 모두는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졌다. 이때 입헌민주당은 유산계급들의 폐쇄된 공간 안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볼셰비키들은 여전히 극소수였으며 대중에 의해 오해되고 심지어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던지는 것은 혁명 일반에 표를 던지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표를 던지는 것 이상의 의무를 이 정당은 강요하지 않았다. 사회혁명당은 도시에서 병사들이 농민을 대표하는 정당과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욕구, 노동자 후진층이 병사들과 좀더 가까이 하려는 욕구, 소도시 사람들이 병사와 농민들로부터 떨어지지 않으려는 욕구 등을 표현했다. 당시 사회혁명당 당원증은 혁명 기관들에 입장할 수 있는 임시 극장표였다. 이 표는 좀더 진지한 성격의 표로 대체될 때까지만 유효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인 이 거대한 정당을 누군가가 거대한 허깨비 정당이라고 불렀다. 이 표현은 참으로 적절하다.

1905년 혁명부터 멘세비키들은 러시아 혁명의 부르주아적 과제로부터 자유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을 필요성을 추론했다. 그리고 이 동맹을 농민과의 동맹보다 더 우위에 놓았다. 이들은 농민을 불안한 동맹 세력으로 보았다. 이와 반대로 볼셰비키들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노동자 농민 동맹을 혁명이론의 토대로 삼았다. 그런데 2월 혁명에서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밀접한 정치동맹을 체결한 후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연대했다. 따라서 현실은 볼셰비키들의 구도와 완전히 정반대가 되었다. 이 결과 공식 정치무대에서 볼셰비키들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이 정치현상은 겉으로 보기에는 설명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는 사물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한다. 사회혁명당의 구호는 농촌에서 완벽한 지지를 누렸다. 그러나 이 정당은 농민 정당이 결코 아니었다. 이 정당의 정책을 규정하고 장관과 관료들을 배출한 핵심들은 봉기를 일으킨 농민 대중보다는 도시의 자유주의 및 급진 정치권과 훨씬 더 밀접했다. 3월부터 쏟아져 들어온 출세주의자들로 인해 이 정당의 핵심 부위는 공룡처럼 덩치가 커졌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정당의 구호를 내세운 농민 봉기가 확산되자 죽을 것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이 신판 “인민주의자들”은 농민들이 잘되기를 바랬으나 공산주의 사상이 농민들을 사로잡는 것은 원치 않았다. 농민 봉기를 보고 사회혁명당 지도부가 공포에 떤 것은 노동자들의 공세에 멘세비키들이 공포에 떤 것과 정확히 맥을 같이했다. 피억압 인민 운동이 유산계급들을 크게 위협하는 것을 이 민주주의자들은 대단히 무서워했다. 이제 이 위협이 현실적인 힘으로 위력을 발휘하자 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주의 반동 진영에 합류했다. 사회혁명당은 대지주 르보프공의 임시정부와 연합하고 대신 농민혁명과 관계를 끊었다. 이것은 멘세비키들이 구츠코프, 테레쉬첸코, 코노발로프 등 자본가 및 은행가들과 동맹을 맺은 후 노동계급 운동과 관계를 끊은 것과 똑같았다. 이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서로 동맹을 맺고 유산계급과 연합하기 위해 노동계급 및 농민과 각각 단절했다.

지금까지의 관찰을 통해 두 민주주의 정당의 사회주의가 허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그렇다고 이들의 민주주의 신조가 진정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신조의 정체는 사회주의의 가면으로 위장된 무혈 민주주의였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자유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면서 민주주의를 진전시켰다. 따라서 민주주의 정당들은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연합한 후 노동계급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것이 민주적 화해주의자들과 볼셰비키당 사이에 벌어지게 될 잔인한 투쟁의 사회적 뿌리였다.

지금까지 개략적으로 설명한 과정들을 적나라한 계급 분석으로 환원하면 대체로 이런 역사적 결론이 나온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은 대중의 지지를 획득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 따라서 이들이 혁명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혁명이 필요했다. 이 모순 때문에 참정권을 가진 부르주아 계급은 자식들과 어린 동생들을 두게 되었다. 전자는 노동자에게 후자는 농민에게 향했다.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을 자기에게 밀착시키려고 애쓰면서 자신들이 사회주의자들이며 부르주아 계급에 적대적이라고 진심으로 뜨겁게 증명했다. 이런 방식으로 이들은 대중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곧 이들의 영향력은 원래의 의도를 한참 초월해버렸다. 그러자 부르주아 계급은 즉시 자기 목숨을 위협하는 위험을 감지하고 경고를 발했다. 그러자 이 계급의 자식들이자 어린 동생들인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가장의 소환에 적극 응답했다. 그리고 서로간의 이견을 서둘러 봉합하고 단결한 후 대중을 버리고 부르주아 체제를 구원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다.

이 결과 이 정당들이 누렸던 대중적 영향력은 급속히 무너졌다. 그러나 멘세비키당보다 사회혁명당은 더 그랬다. 중요한 고비 때마다 이들이 모두 삼류 입헌민주당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볼셰비키당은 인식했다. 그런데 입헌민주당에게 사회혁명당은 삼류 볼셰비키당처럼 보였다. (물론 두 경우 모두 이류는 멘세비키당이었다.) 이 정당들의 불안정한 대중적 영향력과 사상의 무정형성은 이 정당들의 지도자들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사회혁명당 지도자들 모두의 특징은 미완결성, 피상성, 감상적 불안정성이었다. 정치적 예리함과 계급 관계에 대한 뛰어난 이해력으로 보면 가장 유명한 사회혁명당 지도자들보다 볼셰비키 평당원들이 더 나았다. 이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안정된 정치적 자질을 구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혁명당은 도덕적 의무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도덕적 허세를 부리면서도 이들은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나 사안에서는 치사한 협잡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대중의 안정된 지지, 명확한 이론, 진정한 도덕적 뿌리가 없는 중간계급 정당의 특징이다.

멘세비키당-사회혁명당의 동맹에서 쪽수는 후자가 월등했지만 주도권은 전자에게 있었다. 이것은 도시가 농촌을 지배하고, 도시 소부르주아가 농촌 소부르주아를 지배하고, “맑스주의” 지식인이 러시아 역사의 빈곤함에 자부심을 가진 러시아 토종 지식인을 지배하는 현상의 정치적 표현이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난 후 첫 몇 주일간 수도에 실제 본부를 둔 좌익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이름난 지도자들은 모두 해외에 있었다. 그리고 제 2선 지도자들은 극동의 유형지에서 수도로 올라오고 있는 중이었다. 이 때문에 혁명 현장에 있던 임시 지도자들은 행동거지를 조심하면서 기다려야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단합했다. 그 당시 몇 주일동안 자신의 노선을 끝까지 밀고간 주요 그룹들의 지도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이 결과 소비에트 내부에서 정당들은 아주 평온한 관계를 유지했다. 똑같은 “혁명적 민주주의”가 뉘앙스만 약간씩 달리하고 있었다. 3월 19일 유형지에서 체레텔리가 도착하자 소비에트 지도부는 급격히 우경화 하여 임시정부와 전쟁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역시 유형지에서 돌아온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영향으로 볼셰비키당도 3월 중반에 급격히 우경화 했다. 소비에트 다수파와 소수파 정당들 사이의 정치적 차이는 4월초가 되면 3월초보다 더 적었다. 본격적인 정치적 분화는 약간 나중에 시작되었다. 이것이 시작된 날짜를 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레닌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지 하루가 지난 4월 4일이 바로 이날이었다.

멘세비키당 내부에는 각기 다른 경향들을 주도하는 출중한 인물들이 있었다. 그러나 혁명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플레하노프, 자술리치, 도이치 등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선생들이 주도한 극우파는 짜르 체제하에 이미 애국주의 노선을 취했었다. 맑스주의자에 합당한 정치 생명력을 상실한지 너무 오래된 플레하노프는 어느 미국 신문에 이렇게 썼다: “전쟁 중인 지금 러시아에서 파업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투쟁은 범죄행위이다.” 당내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고참 멘세비키인 마르토프, 단, 체레텔리 등은 짐머발트 반전회의 진영에 가담하여 전쟁을 반대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와 마찬가지로 멘세비키 좌파의 국제주의는 대개 짜르의 전쟁 정책에 대한 단순한 민주주의적 반대에 불과했다. 짐머발트 반전주의자 대다수는 2월 혁명이 터지자 전쟁을 혁명 방어 투쟁으로 인식하여 전쟁을 지지했다. 이 노선을 가장 당당하게 들고 나온 자가 체레텔리였다. 그는 단을 비롯한 다른 멘세비키들을 이 노선으로 결집시켰다. 전쟁이 터질 당시 프랑스에 망명해 있었던 마르토프는 5월 9일에야 러시아로 귀국했다. 1914년 초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독일 절대주의에 반대한 프랑스의 좌익 가운데 게드, 쌍바 등은 조국의 부르주아 공화국에 대한 방어를 주창했다. 마르토프는 2월 혁명 후 멘세비키들이 이들과 같은 노선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렇게 하여 그는 혁명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멘세비키 좌파의 수장이 되었다. 그는 체레텔리와 단의 조국방어 정책에 반대했다. 그러나 동시에 멘세비키 좌파와 볼셰비키의 화해도 반대했다. 당내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다수를 장악하고 있던 체레텔리의 정책은 멘세비키당의 공식노선이 되었다. 혁명 전의 애국주의자들이 혁명 후의 애국주의자들과 연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는 한술 더떠서 완전한 국수주의 노선을 주창하면서 멘세비키당과 소비에트 바깥에서 자기 그룹을 이끌었다. 멘세비키당을 떠나지 않은 마르토프의 분파는 자체 신문이나 정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대한 역사적 행동이 필요한 때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르토프는 가망 없이 허우적대다가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1905년 혁명과 마찬가지로 1917년 혁명에서도 이 대단히 능력 있는 인물은 이렇다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    

멘세비키당 의원단의 의장 체이제는 거의 자동적으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의장이 되었으며 나중에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직무에 자기 양심을 모두 바치려고 노력하면서도 도저히 지울 수 없는 자신감 부족을 천진난만한 익살로 위장했다. 그는 고향의 영향을 그대로 성격에 반영했다. 산이 많은 그루지아는 노동자의 수는 대단히 적었으나 햇빛, 포도원, 농민, 군소 군주들은 많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아주 광범위한 성향의 좌익 지식인들을 배출했다. 이들은 융통성이 있었으며 흥분을 잘하는 기질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압도적 다수는 소부르주아 세계관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 지역은 4차까지 열린 의회에 언제나 멘세비키 의원들을 보냈다. 이들은 멘세비키 의원단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그루지아는 러시아 혁명의 지롱드파였다. 그러나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지롱드파가 연방주의를 표방한 반면 20세기 러시아의 지롱드파는 처음에는 통일 러시아를 나중에는 분리주의를 주창했다.

그루지아 지롱드파가 배출한 가장 저명한 인물은 의심의 여지없이 체레텔리였다. 그는 제 2차 의회 의원이었는데 유형지에서 돌아오자마자 멘세비키당 뿐 아니라 소비에트 다수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론가는 물론이고 신문기자도 아니었던 그는 훌륭한 웅변가였다. 따라서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배출되는 급진주의자의 전형이었다. 일상적 시기에 태어났다면 그는 의회라는 물 속의 물고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혁명의 시대에 태어나서 청년기에 맑스주의의 물맛을 약간 보았다. 그는 멘세비키들 가운데 유일하게 혁명의 와중에서 넓은 시야를 견지하고 일관된 정책을 추구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2월의 이중권력 체제를 파괴하는데 어느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체이제는 체레텔리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다만 그의 교조적 솔직함에 가끔 크게 놀라기도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유형지에서 중노동에 시달렸던 혁명가 체레텔리는 이 교조적 솔직함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의 보수파와 손을 잡았다.

마지막 의회에서 멘세비키 의원이었다는 이유로 스코벨레프는 새롭게 인기를 누렸다. 그는 젊은 외모 때문에 부유층 가정의 연극 무대에서 정치인 배역을 맡은 학생처럼 보였다. 그는 “과도함”을 억제하고 지역 갈등을 조용하게 해결하면서 이중권력의 새는 틈을 메우는 역할을 전문적으로 했다. 그리고 5월의 연립정부에서는 불행하게 노동장관이 되었다.

단은 멘세비키 사이에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는 당내의 고참 활동가였으며 언제나 마르토프의 오른팔로 인식되었다. 일반적으로 멘세비키당은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쇠퇴기에 드러냈던 피와 살, 전통, 정신 등을 먹고 성장했다. 따라서 단은 독일사민당의 행정가였던 에버트의 축소판이었다. 독일의 단인 에버트는 개량주의자로서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1년 후 러시아의 에버트인 단은 그렇지 못했다. 단이 에버트보다 못나서가 아니라 러시아의 전반적 정치상황이 독일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주역인 제 1 바이올린 주자가 체레텔리였다면 귀를 찢는 날카로운 클라리넷 주자는 대단한 폐활량과 충혈된 눈을 가진 리이버였다. 그는 유태인 노동자연합(분트) 출신의 멘세비키로 오랜 혁명 경력을 자랑했다. 대단히 진지하면서도 대단히 쉽게 흥분했던 그는 웅변술이 대단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제한된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비타협적 애국자요 강철같은 정치인으로 자신을 부각시키는데 열성이었다. 한편 그는 볼셰비키들을 문자 그대로 미친 듯이 증오했다.

초좌익 볼셰비키였던 보이틴스키도 멘세비키 지도자였다. 그는 1905년 혁명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중노동 징역형에 처해졌다. 3월에 애국주의를 표방하면서 볼셰비키당과 단절하고 멘세비키 대오에 합류한 그는 예상대로 볼셰비키 전문 킬러가 되었다. 다만 과거 동료었던 볼셰비키들을 리이버만큼 잘 괴롭히지는 못했다. 후자처럼 쉽게 흥분하는 기질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 인민주의자들의 지도부 역시 집다한 분자들의 집합체였다. 다만 이들의 수준은 멘세비키들보다 훨씬 낮았다. 사회혁명당의 극우파는 소위 인민사회주의자들이었는데 고참 망명가 차이코프스키가 지도자였다. 그는 플레하노프와 똑같이 군사적 국수주의를 표방했으나 재능과 경력에 있어서는 그보다 한참 모자랐다. 그와 함께 브레쉬코-브레쉬코프스카야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원들은 그녀를 “러시아 혁명의 할머니”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그녀는 러시아 반혁명의 할머니가 되려고 열성적으로 자신을 강제했다. 이미 정년을 넘긴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은 젊은 시절부터 인민주의자들에게 약점을 잡혔다. 테러 분자가 되기에는 마음이 약했던 그는 전쟁을 변명 삼아 거의 50년간 자기가 가르친 사상을 전부 부인하고 연합국을 지지했다. 러시아의 이중권력도 비난했다. 그러나 이것이 국가라서 비난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단일권력이 아니라서 비난했다. 그러나 나이 많은 인물들은 주로 장식품에 지나지 않았다. 나중에 내전이 터지자 차이코프스키는 처칠의 돈을 받은 백군 정부 하나를 주도하여 볼셰비키들과 대항했다.

사회혁명당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의 인물은 케렌스키였다. 그는 사회혁명당 내부가 아니라 위에서 존재했는데 정당 경력이 전혀 없었다. 이 행운아를 우리는 앞으로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중권력 시기에 그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약점들을 결합시키는 장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정식으로 사회혁명당에 입당했으나 정당 일반에 대한 그의 경멸감은 여전했다. 그는 자신을 나라에 의해 직접 선택받은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미 사회혁명당은 거대한 그리고 전국적인 허깨비 정당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집단에서 케렌스키가 지도자가 되는 것은 아주 적절했다.

이후 농업장관과 제헌의회 의장이 될 체르노프는 구 사회혁명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동시에 그는 이 정당에 영감, 이론, 지도를 제공했다. 교육을 잘 받았다기보다는 많은 것을 읽은 이 인물은 상당하지만 정리되지 않는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인용문들을 무한정 준비하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상당히 오랫동안 러시아 청년들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이들은 그로부터 배운 것은 별로 없었다. 이 잡학 지도자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누구를 어디로 인도하고 있는가? 도덕론과 시로 장식된 체르노프의 절충적 표현들은 잠시 동안 대단히 잡다한 대중을 결집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자신의 정당 건설 방법을 레닌의 “종파주의”와 대비시켰다. 그리고 스스로 만족스러워 했는데 이것은 그에게 딱 맞는 행위였다.

체르노프는 레닌보다 5일 늦게 해외에서 귀국했다. 영국은 처음에는 약간 주저하다가 그를 억류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소비에트가 베푼 온갖 환영 행사들에서 소비에트의 최대 정당을 대표한 그는 연설도 가장 길게 했다. 반정도 사회혁명당원이었던 수하노프는 그의 연설을 이렇게 논평했다: “나뿐 아니라 많은 수의 사회혁명당원 애국자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너무 재미없게 말을 줄줄 이어갔다. 눈을 반쯤 감았다 눈알을 굴렸다 하면서 목적이나 계획이 전혀 없이 말을 무한정 이어갔다.” 혁명 과정에서 체르노프가 수행했던 모든 활동들은 그의 첫 귀국 연설과 똑같았다. 좌파의 입장에 서서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반대하려고 그는 여러 번 애를 썼다. 그러나 모두에게 공격을 받자 싸움 한번 없이 항복했다. 그리고 망명 시절 주창했던 반전주의를 청산한 후 접촉위원회 그리고 나중에는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그의 모든 행위는 부적절했다. 따라서 그는 모든 사안들을 회피했다. 표결 때마다 기권하는 것이 그의 정치활동 방식이었다. 4월에서 10월에 이르기까지 사회혁명당보다 그의 권위가 더 빨리 와해되었다. 체르노프와 케렌스키는 서로 다른 점도 많았고 서로를 증오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적 뿌리는 똑같이 혁명 이전 시기에 있었다. 러시아 사회는 축 늘어진 채 기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대중을 교도하고 보호하는 은인의 역할을 수행하려 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하면서도 이들로부터 깨닫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다만 무기력과 허세가 가득했을 뿐이었다. 체르노프와 케렌스키는 이 구시대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대중의 정서와 욕구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면 혁명 정치인이 될 수 없다.

한편 아브센티에프는 사회혁명당에 의해 농민소비에트 집행위원장, 내무장관, 예비의회 의장 등 최고의 혁명 직책으로 상승되었다. 그러나 그는 혁명 지도자의 대단히 우스꽝스러운 변종에 불과했다. 오렐 여자신학교의 매력 있는 언어선생 --- 이것이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물론 그의 정치활동은 그의 개인적 매력보다 훨씬 지독한 해악을 끼쳤다.

고츠는 주로 배후에서 소비에트의 지배 파벌과 사회혁명당 분파를 크게 조종했다. 유명한 혁명 가문 출신의 테러 분자였던 그는 자신의 아주 가까운 정치 동료들보다는 허세가 덜했고 좀더 진지했다. 그러나 소위 “실제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그는 주로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면서 큰 문제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넘겼다. 그는 웅변가나 문필가가 아니었다. 그의 최대의 자산은 수년간 중노동 징역형을 살면서 얻은 개인적 권위였다.

이제 사회혁명당 인민주의자들의 지도급 인물들은 전부 언급되었다. 이들 밑에는 전혀 우연하게 이 당과 인연을 맺은 필리포프스키와 같은 인물들이 있었다. 그가 2월 혁명의 와중에서 왜 그렇게 유명해졌는지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다. 해군 장교였던 그가 입고 있었던 제복이 근사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다.

집행위원회를 주도한 두 정당들의 공식 지도자들과 함께 적지 않은 수의 “재야인사들”, 독불장군들, 과거 이런 저런 단계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개인들, 봉기가 있기 오래 전에 운동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 그리고 이제는 승리한 혁명의 깃발 아래 서둘러 운동에 복귀하여 천천히 아무 당이나 들어간 사람들이 있었다. 모든 근본 문제들에서 “재야인사들”은 소비에트 다수파의 노선을 따랐다. 첫 며칠간 이들은 심지어 지도적 역할까지 맡았다. 그러나 유형지와 해외에서 돌아오는 지도자들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당에 소속되지 않은 이들은 제 2선으로 물러났다. 이제 정치가 모습을 갖추어갔고 당원들은 나름의 권리를 누리기 시작했다.

집행위원회를 공격한 적들은 반동 진영에 몰려 있었다. 이들은 집행위원회 내부에 비(非)러시아인들이 “너무 많다”고 과장되게 지적했다. 유태인, 그루지아인, 레트인, 폴란드인 등등. 사실 집행위원회 위원들 전체에서 비러시아인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이 최고회의, 각급 위원회, 연설가 집단 등에서 아주 높은 지위를 차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피억압 민족들의 지식인들은 대부분 도시에 집중적으로 거주했기 때문에 혁명 대오에 떼거지로 몰려들었다. 따라서 구세대 혁명가들 가운데 비러시아인의 수가 특히 많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들의 경험은 언제나 수준이 높지는 않았으나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서는 대체할 수 없이 귀중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혁명과정 전체의 정책을 “너무 많은” 비러시아인들의 탓으로 설명하는 것은 전혀 말도 되지 않는다. 이 경우에 민족주의는 진짜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인민을 또다시 경멸한다. 민족주의는 거대한 민족적 각성으로 인민들이 떨쳐 일어나는 시기에 이들을 외부 세력의 우연한 손에 쥐어진 나무토막으로 정도로만 간주한다. 그렇다면 비러시아인들은 혁명기에 어떻게 수백만 러시아인들보다 훨씬 기적적인 능력을 가졌는가? 심대한 역사적 변화의 순간 한 나라의 다수 민족은 어제까지만 해도 가장 억압받았던 소수민족들을 압박하여 자기 이익을 위해 활용한다. 소수민족들은 새로운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면서 그 동안 억눌린 욕구를 표현할 수 있다. 따라서 기꺼이 다수 민족의 압박에 호응한다. 소수민족들이 혁명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이 이들을 활용할 뿐이다. 지배층이 시작한 모든 거대한 개혁들은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표트르 1세(대제)는 기존의 관례에서 크게 이탈하여 비러시아인들과 외국인들을 등용하였다. 따라서 그의 정책은 일국적 차원을 넘어섰다. 당시 독일 변두리의 영주나 네덜란드의 선장은 러시아인 사제나 모스크바 귀족보다 러시아의 발전에 필요한 요구에 훨씬 더 잘 부응했다. 사실 러시아인 사제는 오래 전에 그리스인들에 의해 질질 끌려 다녔으며 모스크바 귀족은 러시아를 창립한 외국 부족들을 조상으로 두었으면서도 외국인들이 나라를 너무 쥐고 휘두른다고 불평했다. 어쨌든 1917년의 비러시아인 지식인들은 소비에트 다수파 정당들 내에서 소속 민족의 인구비례에 걸맞게 존재했다. 이것은 러시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비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방어와 단결에 특별한 열정을 보였다.

이로써 민주주의 세력의 최고 권력기관인 집행위원회의 면모를 전부 살펴보았다. 애초의 환상들은 없앴으나 편견은 그대로 가지고 있었던 두 정당들은 특히 말을 행동으로 옮길 능력이 없는 지도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한 세기의 질곡을 타파하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를 놓을 혁명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의 모든 활동은 고통스러운 모순의 길고 긴 연속에 불과했다. 결국 이들은 대중의 혁명 에너지를 소진시키고 내전의 비극을 초래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은 혁명 사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이들은 자기들이 수립한 소비에트가 혁명을 초래한 해악들을 즉시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모두 소비에트로 뛰어갔다. 여기에서 이들은 고통 보따리들을 전부 풀어놓았다. 고통 보따리가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필요한 결정들이 빨리 내려질 것을 요구했으며 도움을 얻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정의가 구현되기를 기다렸으며 배상을 요구했다. 의뢰인, 불평인, 청원인, 폭로인 등은 마침내 자신들이 적대 권력을 몰아내고 자기 권력을 수립했다고 생각하면서 소비에트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인민은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인민은 무장했다; 따라서 소비에트는 주권기관이다. 이들의 생각은 당연히 옳았다. 병사, 노동자, 병사의 부인, 소상인, 서기, 부모 등의 인간 물결이 끊이지 않고 소비에트의 문을 열고 닫았다. 그리고 찾고, 질문하고, 눈물을 흘리고, 요구하고 행동을 강제했다. 심지어는 구체적인 행동을 명시하였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는 진정한 혁명정부로 변모되었다. 물론 인민의 혁명적 압력에 모든 힘을 다해 저항한 우리의 친구 수하노프는 이렇게 불평한다: “이것은 소비에트 자체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했다. 최소한 소비에트의 계획에는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성공할 수 있을까? 슬프게도 그는 곧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능도 없고 할 일도 없는 공식 정부기구를 소비에트는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자동적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공식 정부기구에 앉아 있으면서 구 권력에 항복할 것을 주장하던 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수하노프는 슬픈 모습으로 이렇게 고백한다: “현실을 인정하고 다른 행정기능을 수행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마린스키 궁전(구 정부청사)이 정부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는 허구를 유지해야 한다.” 전쟁과 혁명의 불길로 인해 파괴된 나라에서 이들이 바쁘게 한 일은 인민이 근본적으로 타도한 정부의 권위를 속임수로 유지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은 죽어도 허구는 영원히 살아야 한다! 그러나 이 사기꾼들이 문밖으로 몰아낸 진짜 권력은 창문을 통해 계속 기어 들어와 이들을 기습하였다. 이때마다 이들의 모습은 비참하거나 우스꽝스러웠다.

2월 28일 밤 집행위원회는 짜르를 지지하는 언론을 폐쇄시키고 신문 발행 허가제도를 공포했다. 그러자 그동안 남의 입을 틀어막았던 반동들이 가장 크게 저항했다. 며칠 후 집행위원회는 언론의 자유를 허용하는 문제에 다시 부딪쳐야했다: 반동 신문들의 발행을 허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견이 표출되었다. 수하노프같은 교조주의자들은 언론의 절대적 자유를 주창했다. 이에 대해 체이제는 처음에는 반대했다: 철천지원수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를 어떻게 그냥 내버려두는가? 그런데 이 문제를 임시정부에 넘기자고 제안한 자는 하나도 없었다. 임시정부는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식자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의 명령만 따랐다. 3월 5일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확정했다: “우익 언론은 폐쇄되었으며 새로운 신문의 발행은 소비에트가 허가한다.” 그러나 집행위원회는 부르주아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여 3월 10일 이 결의문을 철회했다. “이들이 제 정신을 차리는데는 3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수하노프는 기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근거가 허약한 기쁨이었다! 언론은 사회 위에 군림할 수 없다: 혁명 중에 언론의 존재는 혁명의 진전 자체를 반영한다. 혁명이 내전의 성격을 띠면 경쟁 세력들은 자기 영역 내에 적대적 언론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들이 장악한 병기고, 철도, 인쇄시설 등을 적들에게 내주지 않는 것과 똑같다. 혁명 투쟁에서 언론은 일종의 무기일 뿐이다. 당연히 표현의 권리는 생존의 권리에 종속된다. 사실 혁명은 생존의 권리마저 자기 밑에 둔다. 혁명정부는 자신의 강령이 천박할수록 그리고 과거와 긴밀히 얽혀있어서 보수적일수록 반동 세력에게 더 큰 관용과 자유를 베풀고 더 “아량을 보인다”. 그리고 이의 역도 성립한다: 혁명 권력은 수행해야할 임무가 거대할수록 그리고 파괴해야할 기득권이 많을수록 자기 손에 더욱더 많은 힘을 결집시키고 독재를 더욱더 노골적으로 행사한다. 좋든 나쁘든 인류는 이 혁명 법칙을 통해 지금 여기까지 전진해왔다. 언론을 통제하려는 소비에트의 결정은 옳았다. 그렇다면 왜 이 올바른 결정을 그렇게 쉽게 포기했는가? 진지한 투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는 평화와 토지 문제 심지어 공화국 문제에 대해서도 침묵을 지켰다. 권력을 보수 부르주아에게 넘긴 뒤였기 때문에 집행위원회는 우익 언론을 두려워할 이유도 없었고 이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개월 후 정부는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아 좌익 언론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하나 하나 폐간되었다.

3월 7일 모스크바에서 케렌스키는 열변을 토했다: “짜르는 내 손안에 있다. 나는 러시아 혁명의 마라(역자 주: 프랑스 혁명 당시 자코벵파의 지도자. 혁명 신문 [인민의 벗]을 발행하며 혁명을 계속 전진시키다가 반동의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는 결코 되지 않을 것이다. 니콜라스 2세는 나의 감독 하에 영국으로 보내질 것이다....” 유한 부인들은 이 연설에 호응하여 꽃을 던졌고 학생들은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혁명 인민은 술렁거렸다. 제대로 된 혁명은 폐위된 왕이 국경선을 넘어 도망가는 것을 방치해 본 적이 없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계속 요구했다: 로마노프 왕족들을 체포해라. 그러자 집행위원회는 이 문제를 가볍게 처리하면 큰일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비에트가 로마노프 왕족의 문제를 처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것은 임시정부를 신뢰할 수 없다는 공개 선언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철도를 책임지는 모든 조직에게 짜르를 통과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짜르의 기차가 철길에 그대로 정지해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집행위원회의 위원인 노동자 그보스데프는 멘세비키 우파였는데 니콜라스 2세를 체포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찌그러졌고 그와 함께 임시정부도 찌그러졌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이에 항의하여 사임하지는 않고 말없이 가만히 복종하기만 했다. 3월 9일 체이제는 집행위원회 보고를 통해 임시정부가 짜르를 영국에 보내는 생각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짜르 일가는 이제 동궁에 가택연금 되었다.

이렇게 집행위원회는 자신의 베개 밑에 있던 권력을 다시 훔쳤다. 그러나 전선에서 끈질긴 요구가 계속 올라왔다: 짜르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집어넣어라!

혁명은 입법 조치 뿐 아니라 혁명 대중 스스로의 몰수 행위를 통해 소유권을 바꾸어왔다. 역사상 어떤 농민혁명도 이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된 적이 없다: 법적 개혁은 언제나 대중의 혁명적 행동에 뒤진다. 그러나 농촌에 비해 도시에서는 강제 몰수가 미미했다. 부르주아 혁명은 부르주아 소유관계를 뿌리뽑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적들의 건물을 사회적 목적을 위해 대중이 전유하지 않은 혁명 역시 없었다. 2월 혁명이 승리한 직후 정당들은 지하활동을 청산하고 공개의 장에 나타났다.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다. 집회가 계속 열렸다. 모든 지구에 소비에트가 수립되었다. 이 모든 활동에는 본부가 필요했다. 단체들은 짜르 장관들이 소유했던 여름 별장이나 짜르의 발레리나들이 기거했던 궁전 등 사용되고 있지 않는 건물들을 몰수했다. 구 소유주들은 불평했다. 또는 정부가 스스로 이 문제에 개입했다. 그러나 공식 정부는 껍데기에 불과했고 몰수자들이 실세였다. 따라서 검사들이 집행위원회에 호소하여 발레리나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필요했다. 다만 짜르 왕족들은 발레리나의 별로 복잡하지도 않은 기능에 대해 인민을 희생시키면서 너무 후하게 값을 지불해왔다. 물론 접촉위원회의 개입이 필요했다. 장관들이 회의를 열었다. 집행위원회 사무국(局, bureau)도 회의를 열었다. 대표단이 몰수자들에게 보내졌다. 이 일은 수개월을 질질 끌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좌익’이므로 소유권에 대한 가장 급진적인 법적 침해에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강제 몰수에는 결연히 반대한다.” 이와 같은 속임수를 동원하여 혁명에 불만을 가진 “좌익”분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을 은폐해왔다. 진정한 혁명정부라면 시기 적절한 건물 징발 포고령을 통해 혼란스러운 몰수를 당연히 최소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좌익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사적 소유권의 광신도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혁명이 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요지의 설교를 대낮에 대중 앞에서 할 그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의 공기는 이런 종류의 관념주의를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빵을 타기 위해 늘어선 줄은 혁명에게 최후의 자극을 가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정권에게는 가장 시급한 위험 요인이었다. 소비에트의 첫 회의에서 식량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도의 주민들을 먹여 살릴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이들을 기아로 굴복시키는 것을 별로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임무는 소비에트에게 떨어졌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계급의 경제 및 행정 기구에서 일을 했던 경제 및 통계 전문가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고르먼이나 체레바닌과 같이 대부분 우파 멘세비키였거나 볼셰비키였다가 극우로 선회한 바자로프나 아빌로프였다. 그러나 임무에 착수하자마자 투기를 제압하고 시장을 재조직하기 위해서는 극단적 조치가 필요하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소비에트는 일련의 회의들을 통해 “군사적 사회주의” 조치들을 채택했다. 이제 모든 곡물상점들은 공공소유로 전환되었다. 빵 가격이 확정되었다. 공업제품에 대해서도 비슷한 가격이 책정되었다. 국가가 산업을 통제했다. 농민과의 상품 교환도 국가가 통제했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경악하여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다른 제안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이 급진적 해결책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 접촉위원회는 당혹스럽게 이 내용들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정부는 이 조치들을 검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르보프공과 구츠코프와 코노발로프는 자기들과 자기 동맹자들에게 통제나 징발 등 어떤 제한 조치도 강요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소비에트의 모든 경제 조치들은 국가기구의 수동적 저항 때문에 산산조각이 났다. 따라서 지역 소비에트들이 이 조치들을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밖에 없었다. 식량 공급과 관련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유일한 실제적 조치는 엄격한 배급제를 실시하는 것이었다. 육체노동 종사자에게는 1.5 파운드의 빵을 나머지에게는 1 파운드의 빵을 배급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이 제한 조치는 수도 주민의 식량 지출액에 거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빵 1 파운드나 1.5 파운드나 생명을 부지하는 데에는 차이가 없었다. 일상적인 영양실조는 여전히 계속될 전망이었다. 몇 개월이 아니라 몇 년간 혁명은 쪼그라드는 위장에 허리띠를 더 졸라매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시련을 견디어 낼 것이다. 그러나 지금 문제는 기아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의구심과 불안이었다. 32개월의 전쟁으로 불거진 경제적 난관들은 새 정부의 문과 창문을 두들기고 있었다. 수송의 마비, 원자재의 부족, 장비의 상당한 노후화, 위험수위에 다다른 인플레, 상업의 마비 등 모든 난관들이 대담하고 발빠른 조치들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 문제들을 경제적으로 접근하면서 정치적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들이 직면한 모든 경제 문제들은 이중권력을 부정했다. 모든 결정사항들에 서명하는 이들의 손가락은 불에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하루 8시간 노동제 투쟁은 계급 역관계를 크게 시험했다. 봉기는 성공했으나 총파업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했다: 정권이 교체되면 생활이 곧바로 달라져야 한다. 이 때문에 새 정부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즉시 불안을 느꼈다. 애국주의 정당들과 신문들은 “병사는 병영으로 노동자는 작업장으로!”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면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요?” 라고 노동자는 묻는다. 이에 대해 멘세비키들은 “당분간만 그렇소.”라고 당혹스럽게 대답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알고있다: 지금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계급은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을 처리하도록 내버려두었다. 집행위원회는 혁명이 승리하여 혁명투쟁에서 노동계급의 지위가 충분히 보장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리고 3월 5일을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이 작업장으로 복귀하는 날로 정했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가시오! 자유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교육받은 계급들의 뻔뻔한 이기주의가 명백히 드러났다. 현실에 대한 불만과 미래에 대한 희망이 터져 나와 봉기가 승리했다. 그런데 이들은 혁명을 승리로 이끈 수백만 노동자 병사들이 이제 유순하게 과거의 생활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다. 역사 서적을 읽은 이들은 과거의 혁명도 이렇게 결말이 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틀렸다. 과거에도 이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노동자들이 돼지우리로 다시 갇힌 경우는 패배와 기만 등의 우회로를 한참 겪은 후였다. 마라는 정치혁명이 잔인하게 왜곡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공식 역사가들에 의해 엄청난 비방을 당했다. 1792년 8월 10일의 혁명이 있기 한달 전에 그는 이렇게 썼다: “혁명은 최하층 계급들 그리고 무산자들에 의해서만 성취되고 유지된다. 이들을 뻔뻔한 부자들은 하층민이라고 부르고 로마인들은 늘 그랬듯이 냉소하면서 프롤레타리아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혁명이 무산자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가? “혁명운동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공하다가 마침내 정복된다. 지식, 기술, 수단, 무기, 지도자, 명확한 행동계획 등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 기민함, 술수 등을 가진 음모자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다.” 케렌스키가 러시아 혁명의 마라가 되기를 원치 않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러시아의 거물 자본가 아우어바하는 분노하며 이렇게 말한다: “하층민들은 혁명을 부활절의 축제 같이 생각했다. 예를 들어 하인들은 며칠 동안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빨간 리본을 단 채 산보를 하고 자동차를 타고 아침에 집에 와서 세수한 후 다시 재미를 보러 나갔다.” 혁명의 풍기 문란 행위를 비방하는 이 자본가는 하인의 행위를 부르주아 유한 마담의 일상과 비교한다. 대단히 주목할만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물론 빨간 리본을 다는 것은 비교에서 제외된다. 그렇다. 피억압자들은 혁명을 휴일 또는 휴일 전야로 인식한다. 혁명으로 흥분한 하인은 피할 수 없는 모욕적이고 괴로운 일상의 노예 노동에서 벗어나려고 제일 먼저 시도한다. 노동계급은 승리의 상징으로 빨간 리본을 다는 것으로 자신을 위로할 수도 없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다. 그랬다면 혁명은 남을 위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뻬제르부르그 공장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으로 술렁거렸다. 상당수의 작업장들은 소비에트의 결의를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물론 노동자들은 작업장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어떤 조건으로 조업에 복귀할 것인가? 이들은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요구했다. 그러자 멘세비키들은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이 8시간 노동제를 강제로 도입하려다가 패배한 경험을 언급했다. “반동 세력과 자본가들 모두에 대항하는 것은 노동자들에게는 너무 버겁다.” 이것이 멘세비키들의 핵심 사고였다. 이들은 미래에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과 단절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순전히 이론적인 인정은 이들의 행동을 전혀 속박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단절을 강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멘세비키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부르주아 계급은 웅변가나 기자들의 열띤 말이 아니라 근로 대중의 독립된 행동에 밀려 반동 진영에 합류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든 힘을 다해 노동자와 농민의 경제투쟁을 반대하려고 애썼다. 이들은 이렇게 설교했다: “사회문제들은 노동계급에게 제일 중요하지 않다. 지금은 정치 자유를 획득해야한다.” 그러나 추상적인 자유가 무엇인지 노동자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들은 우선 자신의 근육과 신경에게 약간의 자유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때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멘세비키들이 8시간 노동제가 중요한 사안이 아니라고 설명하던 3월 10일 바로 그 날에 소비에트와 공식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던 제조업 협회는 8시간 노동제를 도입하고 공장 및 작업장 위원회의 수립을 허용할 의향이 있다고 선언했다. 공업 자본가들은 소비에트의 민주주의 전략가들보다 더 거시적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고용주들은 노동자들과 얼굴을 늘 마주하고 있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공장의 반 이상 그리고 대공장의 다수가 이미 8시간 노동을 끝내고 집단적으로 작업장을 떠나고 있었다. 소비에트와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거절한 것을 고용주들은 허용했다. 자유주의 신문은 살살 녹는 말로 1917년 3월 10일 러시아 자본가들의 제스처를 1789년 8월 4일 프랑스 귀족들의 제스처와 비교했다. 그런데 이 비교는 이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역사적 진실에 훨씬 가까웠다: 18세기말의 봉건세력과 똑같이 20세기초 러시아 자본가들도 필요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은 일시적으로 양보하되 미래에는 모든 것을 다시 확실히 되돌리고 싶어했다. 입헌민주당의 어느 기자는 솔직히 인정했다: “멘세비키들에게는 불행하지만 볼셰비키들은 이미 테러를 통해 제조업 협회가 8시간 노동제를 즉시 도입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이것은 사실 거짓말이었으나 내용으로 보면 진실이었다. 이 테러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노동자 볼셰비키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 투쟁을 주도했다. 2월의 결정적 순간과 똑같이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은 이들을 따랐다.

멘세비키에 의해 장악된 소비에트는 자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얻어진 노동자들의 이 거대한 승리를 착잡한 감정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망신을 당한 이 지도자들은 더 전진적인 조치를 취하도록 강제되었다. 이들은 제헌의회 소집보다 먼저 러시아 전역에 8시간 노동제를 선언하자고 임시정부에 제안해야했다. 그러나 정부는 자본가들과 합의를 이미 끝낸 후 이 제의를 거부했다. 이들은 소비에트가 이렇다할 집요함이 없이 제시한 이 제의를 더 좋은 날을 기다리면서 거부했다.

모스크바에서도 똑같은 투쟁이 벌어졌으나 똑같은 결과를 쟁취하는 데에는 시간이 더 오래 걸렸다. 여기에서도 소비에트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무릅쓰고 조업재개를 요구했다. 어느 대공장에서는 파업 종료를 반대하는 결의안이 7천 대 6의 표차로 통과되었다. 다른 공장들도 거의 같은 반응을 보였다. 3월 10일 소비에트는 즉시 조업을 재개할 것을 다시 촉구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공장에서 조업은 재개되었으나 노동시간 단축 투쟁이 모든 곳에서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직접 행동을 통해 지도자들을 교정시켰다. 오랜 거부 끝에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3월 21일 8시간 노동제 도입을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자본가들은 즉시 소비에트의 선언을 이행했다. 지방에서는 4월까지 이 투쟁이 계속되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는 이 투쟁에 저항했다가 나중에야 노동자의 압력에 굴복하여 자본가들과 협상에 들어갔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받아들이지 않은 경우 독자적으로 8시간 노동제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억압체제는 크게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임시정부는 고의적으로 개입을 회피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지도하에 노동자들에 대한 맹렬한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들을 이간질시키기로 결정되었다.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전선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전시에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참호에서도 시간을 계산하는가?... 유산계급들은 일단 참주선동을 시작하면 결코 멈추지 않는다. 이 선동은 열을 띠면서 참호로 퍼졌다. 이 선동은 주로 얼치기 사회주의자 장교들에 의해 곧바로 수행되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병사 피레이코는 회상한다. “그러나 이들이 장교였기 때문에 선동 효과는 크게 약화되었다. 모든 병사들은 장교들이 과거에 자기들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너무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비방하는 이 선동은 수도에게 가장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주둔군 막사에서 자본가들과 입헌민주당은 선동의 기회와 수단을 무진장 찾아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3월말이 되자 횡단보도, 전차, 모든 공공장소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격렬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주먹싸움까지 벌어졌다. 노동자들은 이 술수를 알아차리고 능숙하게 이것을 피했다. 사실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진실을 알리기만 하면 되었다. 전쟁으로 자본가들이 거두어들이는 엄청난 이윤을 수치로 설명하고 기계 소리가 귀를 찢는 공장을 병사들에게 보이고 용광로의 살인적인 열기를 이들이 느끼게 해주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산재 희생자가 발생하는 것을 보여주기만 하면 되었다. 노동자들의 주도하에 주둔군 병사들은 정기적으로 공장을 찾았고 특히 병기공장을 찾았다. 병사들은 공장을 보고 노동자들의 말을 직접 들었다. 노동자들은 증명해 보이고 설명했다. 이 방문은 노동자와 병사의 연대를 획기적으로 증대시키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노동자들과의 흔들릴 수 없는 연대를 표시하는 군대의 수많은 결의문들을 사회주의 신문들이 보도했다. 4월 중순이 되면 노동자와 병사의 다툼은 신문지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부르주아 신문은 침묵을 지켰다. 경제투쟁의 승리 후 노동자들은 정치적 도덕적 승리도 함께 거두었다.

8시간 노동제 투쟁과 관련된 사건들은 혁명의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제 노동자들은 몇 시간 자유를 얻어 신문과 책도 읽고 회의에도 참가하고 소총 사격연습도 했다. 노동자 민병대가 수립되는 순간 사격연습은 일상화되었다. 더욱이 이 투쟁으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좀더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멘세비키당의 권위는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은 공장에서 더욱 커졌으며 병영에서도 부분적으로 확대되었다. 병사들은 좀더 꼼꼼해지고 생각이 깊어졌으며 사물을 냉철하게 주시했다.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들의 뒤를 밟으면서 공작을 펴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참주선동의 기만적 술수는 역작용을 일으켰다. 이 결과 노동자와 병사들은 서로 반목하고 거리를 두는 대신 연대를 더욱 두텁게 했다.

“접촉위원회”의 그럴듯한 간판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소비에트, 소비에트 지도자들, 자신에 대한 이들의 감시 행위를 증오했다. 이 증오심은 단박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순전히 정부기구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으며 이것도 임시정부가 대중을 억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을 때 정부의 요청에 따라 수행했다. 따라서 집행위원회는 활동비용으로 소액의 지원금을 정부에 요청했다. 그러자 정부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반복된 요청에도 불구하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설 단체”에게 국가의 자원을 허비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소비에트는 대항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소비에트의 재정은 노동자들에 의해 마련되었다. 이들은 혁명의 필요를 위해 쉬지 않고 모금을 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상호 친선의 예의를 지켰다. 전국소비에트 협의회는 이중권력이 허구라고 선언했다. 케렌스키는 병사 대의원들에게 정부와 소비에트는 완벽히 단결하고 있다고 확신시켰다. 체레텔리, 단 등 소비에트의 핵심 지도자들도 이중권력의 존재를 한사코 부인했다. 이 거짓말을 통해 이들은 거짓말에 바탕을 둔 권력을 강화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권력은 첫 주부터 비척거렸다. 조직적 연합을 위해 지도자들은 쉬지 않고 움직였다. 이들은 우연히 등장한 온갖 종류의 대의기구들을 대중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병사들을 노동자들에 대항하게 만들고 새로운 의회, 도의회, 협동조합 등이 소비에트에 대항하게 만들고 지방이 수도에 대항하게 만들고 마지막으로 관료들이 인민에 대항하게 만들었다.

소비에트 형태라고 특별히 신비로운 영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소비에트도 모든 대의기구의 결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이러한 결점들을 최소화시키는 데에 소비에트의 강점이 있다.

소비에트 이외의 대의기구는 대중을 원자화시키기 때문에 혁명기에는 대중의 의지를 대단히 비효율적으로 그것도 대단히 지연시키면서 반영한다. 이후 사건들은 이 주장의 진실성을 곧 증명할 것이다. 모든 혁명적 대의기구 가운데 소비에트는 가장 유연하며 가장 직접적이며 투명하다. 그러나 이것도 여전히 대의기구이다. 주어진 순간에 대중이 투입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수행할 수는 없다. 소비에트는 대중이 자기 오류를 이해하고 교정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기능 때문에 소비에트는 혁명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지도자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후 수하노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나의 계획에 의하면 권력을 잠시만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고 민주주의가 강화되면 곧 확실히 다시 넘겨받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고는 어쨌든 단순하기도 하지만 사건이 지나간 다음의 회고 타령에 불과하다. 당시 이런 계획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체레텔리는 집행위원회의 동요를 종식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이 조직에 체계를 부여했다. 그는 공공연히 이렇게 선언했다: 강력한 부르주아 권력이 없으면 혁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 세력은 자유부르주아들에게 압력을 행사하는 선에서 그쳐야한다; 부주의한 행위로 이들을 반동 진영으로 밀치지 말아야한다; 역으로 이들이 혁명의 성과를 지지하는 한 이들을 지지해야 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체레텔리의 이 어정쩡한 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의회에서 야당 역할을 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을 성립시켰을 것이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의 곤란 중의 곤란은 전반적인 계획의 부재가 아니었다. 당면한 행동 강령의 부재가 진짜 어려움이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에게 이렇게 약속했다: “압력”을 행사하여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민주적 정책을 유도하겠다. 인민 대중의 압력으로 지배계급이 양보를 한 경우는 역사상 여러 번 있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압력”은 지배계급을 권력에서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무기가 민주주의 세력에게는 없었다. 이들은 권력을 자발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겼다. 이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경우에는 민주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겠다고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반납하겠다고 위협했다. 따라서 압력을 행사할 핵심 지렛대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있었다. 아무 힘도 없는 정부가 어느 정도 진지한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모든 조치에 대항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4월 중순이 되면 완전히 자유주의자들에게 의존하는 핵심 지도자들에게 집행위원회는 너무 큰 기구가 되었다. 따라서 “사무국(bureau)”이 구성되어 조국방위주의자 우파가 이것을 장악했다. 이제 큰 틀의 정치는 이 조그만 사무국에서만 진행되었다. 이제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잘 짜여진 것처럼 보였다. 체레텔리는 소비에트에서 무한한 재량권을 누리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점점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아래에서 대중이 최초의 경고음을 울린다. 케렌스키의 그룹과 가깝게 지냈던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썼다: “정치작업의 권한을 조국방위주의 정당들로만 선정된 사무국이 장악한 바로 이 순간에 대중 통제력은 이들의 손에서 미끄러져 나갔다. 대중은 이들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었다. 사물의 법칙에 딱 들어맞을 뿐이었다.              

 

제 13장: 군대와 전쟁

혁명 몇 개월 전에 군대의 규율은 이미 크게 무너져 있었다. 이 당시 장교들이 늘어놓은 불평들의 예는 너무나 많았다: 병사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병사들이 말(馬), 군용 물품, 심지어는 무기들도 함부로 취급한다; 군용 기차에서 난동이 벌어지고 있다 등등. 사태가 모든 곳에서 똑같이 심각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곳에서 똑같이 파멸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혁명이라는 커다란 충격이 가해졌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봉기는 장교 없이 장교에 대항하여 일어났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휘관들은 모두 머리를 처박고 숨었다. 10월당 의원 쉬들로프스키는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장교들과 2월 27일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의회에 대한 이들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귀족 출신의 왕당파 장교들이 현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어쩌면 반정도 위선이 결합된 무지일 수도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두 돌아가고 있는 상황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쉬들로프스키는 말한다: “바로 다음날 연대 전체가 군악대를 앞세우고 대형을 이루어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대오는 아주 질서정연했다. 그런데 장교는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이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 물론 몇 개 중대는 장교들과 함께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그러나 좀더 정확히 말하면 병사들은 장교들을 끌고 다녔다. 물론 이 의기양양한 행진에서 장교들은 자기들이 포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도 체포된 몸으로 이 광경을 본 클라인미헬 백작부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장교들은 도살장으로 떠밀려 가는 양떼와 같았다.”

2월 봉기는 병사와 장교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다만 원래 있었던 분열을 표면에 드러냈을 뿐이었다. 병사들의 입장에서 왕정에 대한 봉기는 곧 군 지휘부에 대한 봉기였다. 당시 장교복을 입고 있었던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2월 28일 아침부터는 외출이 위험했다. 병사들이 장교들의 견장을 잡아뜯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새로운 권력의 첫날 병영의 모습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우선 병사들과 장교들의 화해를 촉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병사들이 기존 지휘부에 복종하는 것을 의미했다. 수하노프는 말한다: 장교들이 소속 연대로 복귀하는 것은 “전면적인 혼란과 무지몽매하고 기강이 무너진 병사들의 독재”에 대항해 군대를 보호하는 행위이다. 이 혁명가들은 자유주의자들과 똑같이 장교가 아니라 병사를 두려워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은 “무지몽매한” 병사들과 똑같이 똑똑한 장교들이 진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병사와 장교의 화해는 일시적일 뿐이었다.

봉기 후 부대로 복귀한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반응을 장교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병사들은 규율을 어기고 장교의 허락 없이 그리고 대개 장교의 명령을 무시하고 병영을 나갔다. 장교들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거대하게 자신들을 해방시켰다. 장교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장교들이 병사들을 거리로 인도하여 이들의 봉기를 도왔는가? 왜냐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고 덜 위험했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승리로 끝나자 장교들은 자기들도 혁명에 참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과연 얼마나 진실한가? 그리고 얼마나 오래 갈까?” 그런데 스탄케비치 자신은 “좌익”성향의 장교이면서 병사들을 거리로 인도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따라서 그의 고백은 그만큼 더 의미심장하다.

28일 아침 삼프소니에프스키 가도에서 어느 공병사단 사령관이 병사들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증오하는 정부가 타도되었다. 대신 르보프공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다. 따라서 전과 같이 장교들의 명령을 따라야한다. 이제 모두 각자의 위치로 복귀하라.” 그러자 몇몇 병사들이 외쳤다: “기꺼이 명령에 따르겠습니다.”(저자 주: 이 말은 군대에서 병사들이 명령을 받았을 때 하는 관습적인 대답이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병사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게 전부야?”

이때 노동자 카유로프는 이 광경을 보고 열이 받았다. 그는 “내가 한 마디 합시다.”라고 말한 후 허락도 기다리지 않고 병사들에게 질문했다: “3일 동안 뻬쩨르부르그 거리에는 노동자들의 피가 흘렀다. 지주 한 놈을 다른 지주 한 놈으로 교체하기 위해서 이런 희생을 했는가?” 카유로프의 질문은 정곡을 찔렀다. 이 질문은 앞으로 몇 달간의 투쟁을 한 마디로 요약했다. 장교에 대한 병사의 적대감은 지주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이 굴절된 형태였다.

지방의 장교들은 제때에 상부의 지시를 받아 수도의 혁명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냈다: “나라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시던 폐하께서 너무 지나치게 정사를 돌보셨다. 그래서 정부의 짐을 동생에게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크림 반도의 벽촌서 근무하던 어느 장교는 병사들의 반응이 “니콜라스나 미하일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 얼굴에 써 있었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이 장교는 다음날 혁명이 승리했다는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게 되자 병사들의 표정이 갑자기 달라졌다고 한다. 이들의 질문, 제스처, 눈빛 등은 “생각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의 무지몽매하고 혼란스러운 머리 속에 누군가가 장기간 끈질긴 작업을 했다”는 것을 증명했다. 장교들은 아무 노력 없이 뻬쩨르부르그에서 온 최근의 전보를 머리 속에 입력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투박하지만 정직하게 혁명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를 정하면서 못이 박힌 손바닥에다 혁명을 저울질했다. 혁명에 대한 두 집단의 태도는 이렇게 차이가 컸다! 

한편 전쟁 총사령부는 혁명의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이 소식이 전선에 퍼지는 것을 막기로 결정했다.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모든 전선의 사령관들에게 명령했다: “갱단”(그는 혁명 대표단을 이렇게 불렀다)이 관할 지역에 들어오면 이들을 즉시 체포하여 군법회의에 회부하라. 다음날 그는 “전하”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 대공의 이름으로 “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 즉 혁명을 중지시킬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총사령부는 최대한 늦게까지 현역군에게 혁명 소식을 알리지 않았다. 짜르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여러 전선에서 혁명 소식을 차단하는 혁명 검역이 실시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한 모든 편지들은 전달이 금지되었고 신병들의 부대 배치가 연기되었다. 이렇게 구 체제는 영겁의 시간에서 며칠을 도둑질했다. 3월 5일이나 6일이 되어서야 혁명 소식은 전투 지역에까지 도달했다. 소식의 내용은 위에서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공이 군통수권자로 임명되었다; 짜르는 조국을 위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외에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 많은 참호에서 그리고 어쩌면 대다수의 참호에서 혁명 소식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하기 전에 독일군에 의해 먼저 퍼졌다. 총사령부가 혁명 소식을 은폐하는 음모를 꾸몄다는 것이 병사들에게 너무 명백히 드러났다. 혁명 소식이 전해진 이틀 후 장교들은 가슴에 붉은 리본을 달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들을 전혀 신뢰할 수 없었다.

흑해 함대의 사령관은 이렇게 말한다: 뻬쩨르부르그의 혁명 소식은 처음에는 병사들에게 이렇다할 인상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수도에서 사회주의 신문이 도착하자마자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들의 정서가 변했다.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범죄 선동가들이 숨은 틈에서 기어 나왔다.” 이 해군 제독은 자기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정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은 신문이 아니었다. 신문은 혁명의 정도에 대한 병사들의 의구심을 없애고 이들이 지휘부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기의 진짜 생각을 표현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흑해 함대 사령부의 정치노선은 이 해군 제독의 말 한마디에 특징적으로 드러나 있다: “함대 장교들의 대다수는 짜르가 없으면 조국이 망한다고 생각했다.” 민주주의자들도 자기들이 “무지몽매한” 수병들에게 이 밝은 빛을 비추지 않으면 조국이 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육군과 해군의 지휘부는 두 부류로 나누어졌다. 한 부류는 자기 직책을 고수한 채 혁명에 귀를 기울이고 사회혁명당원으로 등록했다. 나중에 이들의 일부는 심지어 볼셰비키당에 기어들어 오려고 했다. 다른 부류는 한동안 목에 계속 힘을 주면서 새 질서에 저항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격렬한 투쟁을 일으키다가 병사들의 대세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이 분화는 너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혁명 때마다 모습을 드러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왕정에 조금의 흔들림 없이 충성했던 장교들 가운데 한 명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혁명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이들은 병사들의 항명보다는 동료 장교들의 항복에 의해 더 크게 타격을 입었다. 크게 보았을 때 구 지휘부의 대다수는 밀려났거나 제압되었고 극히 일부분만이 재교육을 받고 혁명에 합류했다. 결국 좀더 극적인 방식으로 장교들은 출신 계급의 운명을 따른 셈이었다.

군대는 언제나 자기가 모시는 사회를 그대로 닮는다. 다만 사회 관계를 응축된 형태로 표현하여 이 관계의 긍정적 부정적 특징 모두를 극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이 일반 사회와 다르다. 전쟁 중에 러시아는 위대한 지휘관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것은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을 고려하면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다. “과도한 모험주의, 과도한 무식, 과도한 이기심, 음모, 출세주의, 탐욕, 무능력, 선견지명의 결여, 개인의 목숨 심지어는 안위와 건강까지 희생할 수 있는 지식과 재능과 욕구의 결여” 등이 총사령부의 특징이라고 총사령부 소속의 잘레스키 장군이 말했다. 첫 총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이예비치의 특징은 큰 키에 위엄 있는 무례함이 전부였다. 날카로움이라고는 전혀 없는 평범한 늙은 군대 서기인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인내심 하나로만 다른 장군들을 제압했다. 코르닐로프는 대담한 소장파 지휘관이었으나 그를 존경하는 자들조차 그가 약간 단순하다고 생각했다. 케렌스키의 전쟁장관 베르호프스키는 나중에 코르닐로프를 사자의 심장과 양의 두뇌를 겸비한 인물이라고 묘사했다. 브루쉴로프 장군과 콜착 제독은 다른 장군들에 비해 교양이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것 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데니킨은 근성이 없지는 않았으나 책을 5권이나 6권만 읽은 대단히 평범한 장군이었다. 이들 다음에는 유데니치, 드라고미로프, 루콤스키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프랑스어를 구사하거나 못하거나 술을 적당히 마시거나 지나치게 마시는 것 외에 범인과 다를 바 없었다.                             

봉건 러시아처럼 부르주아 및 민주주의 러시아도 장교단에 대표들을 가지고 있었다. 전쟁은 수만 명의 소부르주아 청년들을 장교, 군대 서기, 군의관, 공병장교로 합류시켰다. 이들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확고히 생각하고 있었지만 광범위한 개혁조치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대체로 반동 지휘부를 추종한 이들은 짜르가 있을 때에는 두려움으로 혁명 후에는 확신을 가지고 반동 세력에 복종했다. 후방의 민주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복종한 것과 같은 식이었다. 화해주의 장교들은 이후 화해주의 정당과 같이 불행한 운명을 맞이했다. 다만 전선은 후방보다 천 배나 날카롭게 매사가 진행되었다. 집행위원회는 애매한 입장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사들 앞에서 장교들이 애매한 입장을 고수하기는 쉽지 않았다.

민주주의 장교들과 귀족 장교들 사이의 악감정과 갈등은 군대를 소생시키기는커녕 붕괴시키는데 일조 했다. 구 러시아에 의해 성격이 결정되었기 때문에 군대는 완전히 봉건적이었다. 겸손하고 생각이 없는 농민 청년일 뿐 개인 의식에 아직 눈뜨지 않은 병사, 이것이 장교들이 생각하는 모범적인 병사였다. 이것이 러시아 군대의 “민족” 전통이었다. 이것을 수보로프 전통이라고 하는데 원시 농업, 농노제, 농촌 공동체에 기초하고 있었다. 18세기에 수보로프 원수는 이 군대를 지휘하며 군사적 기적들을 창조하고 있었다. 귀족의 시각으로 인민을 사랑한 톨스토이는 자기가 창조한 플라톤-카라타예프를 통해 구 러시아 병사의 전형을 이상화했다. 이 병사는 혹독한 자연, 폭정, 죽음에 불평 한마디 없이 복종했다([전쟁과 평화]). 인간 활동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주의의 찬란한 승리를 가져다준 프랑스 혁명은 동시에 수보로프식 용병술을 퇴출시켰다. 프랑스 혁명 후  러시아 혁명 발발까지 즉 19세기 전부와 20세기초까지 짜르의 군대는 봉건 군대였기 때문에 계속 패배했다. “민족”전통에 기초한 러시아 군 지휘부는 병사의 개성을 경멸하고 수동적 관료주의 정신에 찌들어 있었다. 또한 군사학에 대해서는 완전히 깡통이었으며 군사적 영웅주의 즉 자기희생의 원칙을 전혀 지키지 않은 대신 치사하게 군대의 재산이나 훔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우월 의식을 드러내는 외양, 특권계층의 예식, 억압 체제, 심지어 특별한 은어 즉 병사가 장교에게 사용하게 되어있는 경멸할만한 노예적 표현 등에 장교의 권위가 기초하고 있었다. 짜르의 원수들은 말로만 혁명을 인정하면서 임시정부에 충성을 서약했다. 그리고 자기들이 저지른 죄악을 무너진 왕정 탓으로만 돌렸다. 니콜라스 2세가 역사 전체의 속죄양으로 선언되는 것을 이들은 정중하게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였다! 인민 대중을 고귀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것이 혁명의 도덕적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억압하여 특권을 누렸던 짜르의 장군들이 혁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전선의 사령관에 임명된 데니킨은 민스크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혁명을 전적으로 인정한다. 그러나 혁명을 군대에 도입하고 참주 선동을 일삼는 것은 나라를 망칠 뿐이다.” 고위 장성들의 멍청함이 전형적으로 드러난 예가 아닐 수 없다! 잘레스키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하위 장성들의 요구는 단 하나였다: “제발 간섭만 말아달라.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 전부이다.” 그러나 혁명은 이들을 간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은 특권 계급이었기 때문에 얻을 것은 없어도 잃을 것은 많았다. 이들은 장교 특권 뿐 아니라 토지마저 내놓아야할 처지였다. 임시정부에 충성하여 자신들을 보호한 후 반동 장교들은 소비에트에게 치열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혁명이 병사 대중 그리고 자기들 장원에까지 침투하자 이들은 볼셰비키당은 말할 것도 없고 케렌스키, 밀류코프, 심지어 로지안코까지 지독한 배신자라고 생각했다.

해군의 일상조건은 육군의 경우보다 더욱 가혹하였다. 따라서 내전의 씨앗은 해군에서 더 크게 자랐다. 강철 벙커에 강제적으로 몇 년간 감금되는 수병들의 생활은 음식의 문제에서조차 노예선 노예들의 생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로 이들 옆에는 대부분 특권 계급 출신으로 해군 복무를 소명으로 여기는 장교들이 있었다. 이들은 조국, 짜르,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리고 수병을 군함의 가장 쓸모 없는 부분으로 여겼다. 서로 이질적이며 극도로 폐쇄적인 두 세계가 가까이 접촉하면서 서로를 항상 주시하고 있었다. 함대의 군함들은 군함 건조와 보수를 위해 노동계급이 밀집된 공업도시들을 항구 기지로 사용했다. 더욱이 군함의 공병 및 기계 병과에는 상당수의 숙련 노동자들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함대는 혁명의 어뢰였다. 모든 나라의 혁명과 군대 봉기에서 수병들은 가장 폭발성이 강했다. 이들은 거의 언제나 첫 기회가 오자마자 과감하게 장교들과 충돌했다. 러시아 수병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론슈타트 해군 기지에서는 혁명의 승리와 동시에 수병들이 장교들에게 유혈 보복을 벌였다. 장교들은 자신의 과거에 대해 공포에 질린 듯이 수병들에게 혁명의 소식을 숨겼었다. 당연히 수병들이 증오했던 비렌 제독은 보복의 첫 희생자에 포함되었다. 다수의 지휘부 장교들이 수병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체포되지 않은 장교들은 무기를 압수 당했다.

헬싱키와 스베아보르그에서 네페닌 제독은 3월 4일까지도 봉기의 소식을 숨겼다. 그는 이 동안에도 병사와 수병들을 탄압하겠다고 협박했다. 따라서 혁명의 소식을 접한 병사와 수병들의 봉기는 그만큼 더 격렬했다. 봉기는 하루 밤과 낮 동안 계속되었다. 다수의 장교들이 체포되었다. 가장 증오스러운 장교는 얼음이 꽁꽁 언 바다 밑으로 처넣어졌다. “무지몽매한 병사들”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은 수하로프도 이렇게 썼다: “함대 장교들과 헬싱키 군 당국의 잔혹행위를 스코벨레프가 올바르게 묘사했다면 장교들에 대한 과격한 행동이 이렇게 드물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육군에서도 병사들은 장교들에게 여러 차례 유혈 보복을 했다. 맨 처음에는 장교들의 잔혹한 병사 구타에 대한 복수였다. 병사들은 원한에 사무친 학대를 수없이 당했기 때문이었다. 1915년에 채찍질이 규율을 유지하는 체벌로 군대에 공식 도입되었다. 가장인 경우가 종종 있었던 병사들이 장교의 재량에 의해 채찍질을 당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보복은 과거의 잔악 행위에 대한 복수만은 아니었다.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어느 병사 대의원은 이미 3월 15일이나 17일에 현역군에 체벌 도입 명령이 떨어졌다고 보고했다. 전선에서 돌아온 어느 의회 의원의 말에 따르면 장교가 없는 틈을 타 카자흐 병사들이 그에게 말했다: “여기에 명령서가 있소.(이것은 그 유명한 명령 제 1호였다. 이것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어제 이것이 도착했소. 그리고 오늘 장교가 나의 턱을 후려갈겼소.” 군대의 볼셰비키들은 화해주의자들만큼이나 분주하게 병사들의 보복행위를 제지했다. 그러나 유혈 보복은 발사된 총이 자동적으로 뒤로 물러나는 것처럼 불가피했다. 자유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무혈혁명이라고 부를 근거가 없었다. 구태여 근거가 있다면 혁명에 가담하지 않은 자기들이 한 방울의 피도 흘리지 않고 권력을 잡았다는 것뿐이었다.

일부 장교들은 붉은 리본에 대해 격렬한 갈등을 조장했다. 병사들에게 이것은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했다. 이 과정에서 숨스키 연대의 지휘관이 살해되었다. 새로 도착한 지원군 병사들에게 리본을 달지 말라고 명령한 어느 지휘관은 병사들에게 체포되어 위병 막사에 감금되었다. 장교 숙소에서 아직도 철거되지 않은 짜르의 초상화에 대해서도 종종 싸움이 벌어졌다. 장교들이 아직도 왕정에 충성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개의 경우 이들은 혁명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만일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짜르의 초상화를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초상화 뒤에 구 체제의 귀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상부의 치밀한 계획이 아니라 병사들의 경련과 같은 운동에 의해 군대에 새로운 체제가 들어섰다. 규율 유지와 관련된 장교의 권한은 폐지되지도 제한되지도 않았다. 다만 3월의 첫 몇 주일간 저절로 없어졌을 뿐이었다. 흑해 함대 사령관이 말했다: “규율 유지와 관련된 장교의 권한 자체가 없어졌다.” 바로 이것이 인민혁명이 진정 승리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규율을 강제할 권한이 없어진 군대 지휘부는 완전히 파산했다. 뛰어난 관찰력과 군사문제에 대한 관심을 보인 장교 스탄케비치는 지휘부의 파산을 의기소침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과거의 규율에 따라 훈련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훈련은 병사의 인내심과 복종심을 시험했을 뿐이었다.” 물론 장교들은 자기들의 파산상태를 혁명의 탓으로 돌리려했다.

재빨리 잔인하게 보복을 가한 병사들은 동시에 순진한 어린애처럼 쉽게 남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자기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망각한 채 장교들에게 인간의 정을 베풀기도 했다. 신부이자 자유주의 의원인 필로멘코는 병사들에게 혁명사상의 기수이자 혁명의 보호자로 잠시 인식되었다. 교회의 낡은 사상은 우습게도 새로운 신념과 결합되었다. 병사들은 그를 머리에 이고 썰매 위에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그는 나중에 환희에 겨워 목이 멘 채 의회에서 말했다: “작별 인사를 끝낼 수 없었다. 병사들이 나의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다.” 이 의원은 의회가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군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혁명이었다. 그리고 우연하게 유명해진 인물들에게 눈부신 광선을 반사시킨 것도 혁명이었다.

전쟁장관 구츠코프는 수십 명의 장군들을 해임시켜 군 상층부를 상징적으로 정화시켰다. 그러나 이 조치는 병사들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했다. 다만 고위급 장교들이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이들은 지위를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장교 대다수는 대세에 거스르지 않기로 작정하고 혁명에 대해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머니 속에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병사들과 일상적으로 대면해야했던 중간급 및 하급 장교들에게는 상황이 더 나빴다. 여기에는 정화 조치가 없었다. 법적 조치를 강구하기 위해 어느 포병 중대의 병사들은 집행위원회와 의회에 편지를 보냈다: “형제들, 우리 내부의 적인 중대장 반체하자를 해임할 것을 겸허하게 요청합니다.” 그러나 청원에 대해 아무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중대장에 대한 항명, 축출, 심지어는 체포 등 강구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했다. 그리고 나서야 군 지휘부는 정신을 차리고 체포되거나 구타당한 장교들을 해임했다. 그리고 병사들을 징벌하려고 했으나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가는 일이 자주 있었다. 장교들은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병사들의 지위는 명확하게 개선되거나 확정되지 않았다.

군대의 미래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하던 다수의 장교들은 총사령부에 전반적 정화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것만이 군대의 전투력을 소생시킬 수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병사들도 의회 의원들에게 이에 못지 않은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전에는 불만이 있을 때 장교들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하는가? 장교들의 태도는 예전과 같을 것이다.” 어느 의원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 질문은 군대 전체의 운명과 미래를 미리 말하고 있었다.

전국의 모든 병과와 연대에서 상황이 이와 비슷했다고 말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차이는 상당했다. 발트해 함대의 수병들은 혁명의 소식을 듣자마자 장교들을 살해했다. 그러나 이들 바로 옆에 위치한 헬싱키 주둔군에서는 장교들이 4월초에 이미 병사 소비에트의 주도 그룹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압적인 장군이 사회혁명당의 이름으로 연설하고 있었다. 증오심과 신뢰감이 이렇게 다양하게 공존했다. 그러나 군대는 마치 통신장비와 같이 병사들과 수병들의 정치적 정서를 하나의 주파수로 수렴하고 있었다.

병사들이 급격하고 결정적인 변화를 고대하고 있는 동안만은 군대의 규율이 어느 정도 유지되었다. 전선에서 도착한 어느 소비에트 대의원이 말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억압, 노예상태, 무식, 모욕 등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병사들이 인식하는 순간 선동이 시작되었다.” 인간 대다수에게 코뿔소의 가죽을 씌우지 않은 자연은 병사들에게도 신경계통을 부여했다. 혁명은 자연이 저지른 부주의를 이따금 상기시킨다.

전선은 물론이고 후방에서도 우연한 핑계거리가 쉽게 갈등을 불렀다. 병사들은 “모든 시민들과 똑같이” 극장, 집회, 연주회 등에 참석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다수의 병사들은 이것을 공짜로 극장에 입장할 수 있는 권리로 해석했다. 그러나 전쟁부는 “자유”를 추상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봉기를 수행한 인민이 플라톤주의나 칸트주의의 관념론에 빠질 리가 없었다.  

주둔군 부대나 연대에서 규율의 낡은 피부는 때와 장소를 달리하여 여러 방식으로 갈라졌다. 어느 지휘관은 자기 연대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문이 배포되고 외부의 선동가가 도착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저항할 수 없이 거대한 깊이와 규모의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유주의 의원 야누쉬케비치는 전선에서 돌아온 후 이렇게 상황을 일반화했다: 농민으로 구성된 “신참” 부대에서 규율이 가장 크게 무너졌다. “좀더 혁명적인 연대에서는 병사와 장교의 사이가 아주 좋다.” 사실 규율은 부농들로 구성된 특권 기병대, 노동자와 지식인의 비율이 높은 포병 및 기계화 부대의 두 축으로 유지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토지를 소유한 카자흐들은 가장 끝까지 규율을 유지했다. 얻을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을 것은 많은 농민혁명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혁명 후 두 번 이상 카자흐 사단들이 농민을 토벌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규율은 날짜와 속도의 차이를 두었을 뿐 붕괴하고 있었다.

맹목적인 투쟁에는 밀물과 썰물이 있었다. 장교들은 상황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병사들은 다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일시적 소강상태 즉 휴전이 발효중인 몇 주일 또는 며칠간 구체제 군대를 붕괴시키고 있던 사회적 증오심은 더욱 격화되었다. 빈번하게 이것은 달아오른 대기의 벼락처럼 작렬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원형극장에서 병사와 장교를 망라한 상이용사들의 집회가 열렸다. 병사 상이용사는 장교들을 비난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그러자 장교 상이용사들은 발을 구르고 지팡이와 목발을 두드리며 항의했다. 그러자 연설 중인 병사가 말했다: “장교 여러분, 채찍과 주먹으로 병사들을 모욕한 지 얼마나 지났소?” 부상당하고 포탄에 의해 정신 이상을 일으키고 신체가 찢겨진 병사들과 장교들은 마치 마주보는 두 벽처럼 대치했다. 다수의 상이 병사들과 역시 소수의 상이 장교들이 목발을 짚은 채 마주 보았다. 원형극장의 이 끔찍한 광경은 임박한 내전의 격렬함을 예고하는 듯했다.

군대와 나라 전체를 휘감고 있던 동요와 모순은 하나의 영원한 문제인 전쟁을 축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발트해에서 흑해까지 그리고 흑해에서 카스피해 너머 페르시아의 깊은 곳까지 측정할 수 없이 긴 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전선 곳곳에 68개 보병 군단과 9개 기병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다. 앞으로 이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군대는 혁명 전에 보급문제를 상당히 보강해 놓았었다. 전쟁에 필요한 국내 생산은 증대되었고 무르만스크와 아르항겔스크를 통한 전쟁 물자의 수입 특히 연합국으로부터 대포의 수입도 증대되었다. 전쟁의 첫 몇 년간에 비해 이제 소총, 대포, 탄창 등은 비교할 수 없이 보급이 원활했다. 보병 사단들이 새로 증편되고 있었다. 공병대도 규모가 확대되었다. 이것에 근거하여 상당수의 불행한 사령관들은 전쟁 승리 직전에 혁명이 터져 모든 것을 망쳤다고 증명하려고 나중에 무진 애를 썼다. 12년 전에 쿠로파트킨과 리네비치는 이와 유사한 근거로 위테 때문에 러시아가 일본에 승리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상 1917년에 러시아는 승리할 가능성이 어느 때보다 적었다. 탄약은 증대되었지만 1916년 말 식량은 대단히 부족했다. 티푸스와 괴혈병이 전투보다 더 많이 희생자를 앗아갔다. 수송체계의 붕괴 하나 때문에 대규모 군대 재조직 전략은 전부 취소되었다. 더욱이 짐을 끄는 말이 대단히 부족하여 대포를 사용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딴 곳에 있었다. 군대의 사기가 완전히 절망적이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군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전투의 패배, 후퇴, 지휘부의 부패 등으로 군대는 철저히 무너지고 있었다. 나라의 신경체계를 바꿀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군대의 붕괴는 행정 조치로 정지될 수 없었다. 벌레가 기어다니는 고깃덩어리를 보고 구역질을 느끼듯이 탄창 더미를 보고 병사들은 구역질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전부 필요 없고 가치 없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기만과 도적질처럼 보였다. 장교는 그에게 확신을 줄만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심지어 그의 턱을 주먹으로 갈겨야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도 없었다. 장교 자신이 우선 상부에 의해 속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이 병사들 앞에서 상관에 대한 수치심을 빈번히 느꼈다. 군대는 치유불능 상태로 병들어 있었다. 군대는 혁명의 승패를 결정할 수는 있었으나 전쟁은 수행할 수 없었다. 장교나 병사 어느 누구도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다. 군대도 인민도 전쟁을 원치 않았다.

물론 특별한 종류의 생활을 누리고 있던 군 고위 당국은 대규모 작전, 춘계 공세, 다다넬스 해협의 점령 등에 대해 단순히 습관상 지껄이고 있었다. 크림 반도에서는 다다넬스 해협의 점령을 위해 대규모 군대가 준비되었다. 최고 정예 부대들이 해협을 포위하기 위해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게시판에는 써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위병 연대들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혁명 발발 2일전인 2월 25일 군대의 훈련을 시작한 한 장교의 말에 의하면 증원군은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는 푸른색, 엷은 갈색, 회색의 눈동자들에는 전투에 대한 의욕이 조금도 없었다.... “이들의 생각과 열망은 오직 하나 즉 평화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 증언은 수없이 많다. 혁명은 이미 썩어가고 있던 것을 표면으로 드러냈을 뿐이었다. “전쟁을 끝내라!”는 구호는 이 때문에 2월 혁명 중 가장 주요한 구호의 하나였다. 이 구호는 여성 시위대,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 친위병 연대에서 터져 나왔다. 3월초 의회 의원들이 전선을 순시했을 때 특히 나이 많은 병사들은 계속 질문했다: “토지에 대해서는 무슨 말이 오가고 있습니까?” 의원들은 토지 문제는 제헌의회에서 결정할 것이라고 피하듯이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모두가 품고 있었으나 표현하지 못한 것을 밝히는 목소리가 울렸다: “글쎄, 토지는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필요 없지요.” 먼저 평화 그리고 다음에 토지! 이것이야말로 혁명을 일으킨 병사들의 원래 강령이었다.

3월말 가까이 전국소비에트 협의회가 열렸다. 여기서 애국심을 자랑하는 연설들이 빈번히 울려 퍼졌다. 이때 참호의 병사들을 대표하는 대의원들 가운데 하나가 전선의 병사들이 혁명을 맞이하는 태도를 아주 진지하게 보고했다: “모든 병사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여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는 평화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참호의 병사들은 대의원에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동지여러분, 우리는 전쟁이 끝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현실의 살아있는 목소리였다. 특히 평화에 대한 갈망이 더욱 그랬다. 어쩔 수 없다면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위에 있는 자들이여, 빨리 서둘러 평화를 가져다주시오.

전혀 부자연스러운 분위기 속에 있던 프랑스 전선의 러시아 군대도 같은 감정에 휩싸여 동일한 붕괴의 단계들을 밟고 있었다. 중년의 어느 문맹 농민 병사는 자기 장교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짜르가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는 모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짜르가 우리를 전쟁터로 내몰았는데 또다시 참호에서 썩어야 한다면 자유는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외부에서 주입되지 않은 병사들의 진정한 혁명철학이었다. 어느 선동가도 이처럼 단순하고도 설득력 있는 말을 생각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중에 자유주의자들 그리고 반(半)자유주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애국적 봉기로 치장하려했다. 3월 2일 밀류코프는 프랑스의 기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러시아의 전쟁 승리를 가로막는 장애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다.” 이 말에서 위선은 자기기만과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위선이 자기기만보다 더 컸다. 차라리 정직한 반동들이 상황을 더 정확히 파악했다. 비록 반동적 증오심이 가득 담긴 언어이기는 했지만 독일 범슬라브주의자이며 그리스정교회 루터파이자 맑스주의 왕당파였던 폰 스트루베는 혁명의 진짜 원천을 더 정확히 규정했다: “인민 특히 병사 대중은 애국심 때문에 혁명에 나서지 않았다. 이들은 폭동을 통해 징집해제를 노렸으며 전쟁 연장에 곧바로 대항했다. 즉 혁명은 전쟁을 중지시키기 위해 일어났다.”

이 말에는 진실과 함께 비방도 섞여있다. 봉기를 통한 징집해제는 전쟁의 직접적 결과였다. 혁명은 징집해제를 재촉하지 않았고 중지시켰을 따름이었다. 혁명 전에 아주 빈번했던 탈주는 혁명이 일어난 후 첫 몇 주일동안 아주 뜸했다. 군대는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혁명이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희망 때문에 병사들은 전선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전선을 버릴 경우 새 정부가 평화조약을 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3월 23일 정예 보병 사단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러시아군은 방어를 할 뿐 공격은 할 수 없다고 병사들은 확실히 믿고 있다.” 고참 혁명가이자 이후 볼셰비키 정권에서 총사령관을 맡았던 크릴렌코 해군 소위는 당시 병사들의 확고한 전쟁관을 증언했다: “전선은 지키되 공격은 하지 않는다.” 좀더 엄숙하지만 전적으로 진실한 언어로 표현하면 이것은 혁명으로 얻어진 자유를 방어하겠다는 노선이었다.

“총검을 땅에 박을 수는 없다!” 당시 애매하고 모순적인 정서에 사로잡혀 있던 병사들은 볼셰비키들의 말도 빈번히 거부했다. 아마 볼셰비키들의 솜씨 없는 연설을 듣고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볼셰비키들은 혁명 방어에 관심이 없어서 정부의 평화조약 체결을 막을 수도 있다. 사회애국주의 신문들과 선동가들은 이 생각을 병사들 속에 더욱더 깊이 심어놓았다. 그러나 볼셰비키들의 연설을 때때로 막기는 했으나 병사들은 혁명 첫날부터 공세는 결단코 거부했다. 이것은 적절한 압력을 가하면 해소될 수 있는 일종의 오해라고 수도의 정치가들은 생각했다. 이 결과 전쟁 선동이 크게 고조되었다. 수백만 부의 발행 부수를 자랑하는 부르주아 신문들은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는 관점에서 혁명을 조명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갈수록 대담하게 화해주의자들은 같은 곡조를 흥얼거렸다. 혁명이 터질 당시 군대 내에서 매우 미약했던 볼셰비키들의 영향력은 파업에 대한 벌로 전선에 배치된 수 천명의 노동자들이 다시 공장으로 복귀하자 더 약화되었다. 따라서 평화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렬한 전선은 이 욕구를 공개적이고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자신들을 위로하는 환상을 찾고 있던 지휘관들과 인민위원들은 실제 상황을 속일 수 있었다. 당시의 신문기사들과 연설들은 빈번하게 주장했다: 병사들이 공세를 거부한 이유는 이들이 “병합과 배상 없는 평화”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화해주의자들은 열심히 주장했다: 방어는 공세를 허용하며 때때로 이것을 필요로 한다. 이들은 이 현학적인 문제가 주요 이슈인 것처럼 착각했다! 공세는 전쟁을 다시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다리면서 전선을 지키는 것은 정전을 의미했다. 병사들이 주창한 방어 전쟁의 이론과 실천은 독일과의 평화조약을 의미했다. 지금 이것은 공공연히 표현되지는 않았으나 나중에 병사들은 아주 공개적으로 이것을 요구했다. “우리를 건드리지 않으면 우리도 너희들을 건드리지 않겠다.” 이것 이외에 군대가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은 공세의 주장에 여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세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반동 장교들이 병사들을 확고히 제압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병사들은 대화 중에 “독일군에게는 총검을, 총 개머리판은 내부의 적에게”라는 표현을 썼다. 그러나 여기서 총검은 방어적인 의미였다. 참호의 병사들은 다다넬스 해협은 생각도 못했다. 평화에 대한 욕구는 땅 밑에 흐르는 강력한 물길이 되어 곧 표면으로 솟아오를 참이었다.

밀류코프는 군대 내에 부정적인 징후가 “관찰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혁명 후 오랫동안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군은 연합국이 자기에게 내린 과제인 공세를 개시할 능력이 있었다. 그는 역사학자의 특성을 드러내며 이렇게 썼다: “볼셰비키들의 선전은 곧바로 전선에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혁명 후 1개월 또는 1개월 반 동안 군대는 건강했다.” 그는 문제 전체를 선전의 수준에서 조망한다. 마치 이것이 역사 과정 전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는 볼셰비키당이 진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정당에 대해 뒤늦게 투쟁하면서 사실을 왜곡했다. 앞에서 이미 군대의 실상은 충분히 파악되었다. 그러면 여기서 혁명 후 첫 몇 주일간 또는 첫 며칠간 지휘관들이 군대의 전투력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었는지를 알아보자.

3월 6일 북부 전선의 총사령관 루즈키 장군은 집행위원회에 이렇게 보고한다: 병사들의 완벽한 항명이 시작되고 있으므로 인기 있는 인물들이 군대를 진정시키기 위해 전선에 파견되어야 한다.

흑해 함대의 총사령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혁명 첫날부터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전쟁은 패배했다는 것이 명확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콜차크도 같은 생각이라고 밝혔다. 병사들의 폭력으로부터 자기 참모장교들을 보호하기 위해 그는 전선 사령관직을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국 근위대 사령관 이그나티에프 백작은 3월 나보코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쟁은 이미 끝났다. 우리는 더 이상 싸울 능력도 의지도 없다. 이것을 명확히 이해해야한다. 머리가 있는 인간이라면 전쟁을 고통 없이 끝내는 방법을 생각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재앙이 닥칠 것이다....” 동시에 구츠코프는 자기가 이런 편지들을 천 통씩이나 받고 있다고 나보코프에게 말했다. 피상적으로 매우 희망에 찬 보고서들은 아주 드물었는데 대부분 자체 보완 설명에 의해 모순을 일으켰다. 제 2군 사령관 다닐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승리하려는 군대의 의욕은 일부 연대에서는 이전보다 더 강해졌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기강이 해이해졌다.... 상황이 진정될 때까지 1개월에서 3개월까지 공세를 연기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는 예상치 않은 보완 설명이 뒤따른다: “증원군의 50%만이 도착하고 있다. 앞으로도 계속 군대의 규모가 축소되고 규율이 동일하게 해이해진다면 공세의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용감한 제 51 보병 사단장은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 사단은 방어 능력이 확실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즉시 이렇게 덧붙인다: “병사 및 노동자 대의원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군대를 구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 182 사단장은 군단장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하루가 지날수록 사소한 일들에 대한 병사들의 오해가 증대하고 있다. 이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병사들은 더욱더 신경질적이 되고 있고 장교들은 더 그렇다.”

이 산발적인 증언들은 얼마든지 있다. 3월 18일 총사령부에서는 군대의 실상을 논의하는 고위 장성들의 회의가 열렸다. 총사령부 중앙기관들의 결론은 전부 일치했다: “예비군들 사이에 소요가 있기 때문에 전선의 병력 손실을 보충할 증원군이 부족하다. 군대는 병들어 있다. 장교들과 병사들의 관계를 조정하는데 아마 2개월 또는 3개월이 걸릴 것이다.” 이 질병은 호전되지 않고 악화될 뿐이라는 것을 장군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장교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군대가 술렁이며 탈주 충동이 상당하다는 것을 주목했다. “군대의 전투력은 하락했으며 현재 공세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론은 이렇다: “춘계로 예정된 공세를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불가능하다.”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서 상황은 계속 악화되었으며 유사한 증언들은 끝없이 증가하고 있다. 3월말 제 5군 사령관 드라고미로프 장군은 루즈키 장군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전투 기상이 떨어졌다. 공세에 대한 욕구가 병사들에게는 없다. 이뿐 아니라 방어를 단순히 고집하는 성향도 하락하여 전쟁의 성공을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군대의 모든 부위들에 확산된 정치는 군대 전체에 오직 한가지 욕구만 조성했다: 전쟁을 끝내고 집에 돌아가자.”

반동 지휘부의 기둥 가운데 하나인 루콤스키 장군은 새로운 상황에 불만을 품은 채 어느 군단의 지휘를 맡았다. 그러나 그의 말에 의하면 규율은 포병 및 공병 사단에만 존재했다. 이 사단들에는 정규군 장교와 병사의 수가 많았다. “3개 보병 사단은 모두 완전히 붕괴하고 있다.”     

혁명이 가져다준 희망으로 줄어들었던 탈주 사태는 실망이 퍼지면서 다시 증가했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보고에 의하면 4월 1일부터 7일까지 일주일 사이에 약 8천 명의 병사들이 북부 및 서부 전선에서 탈주했다. 그는 구츠코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군대의 ‘뛰어난’ 규율에 대한 무책임한 보고들을 진짜 황당한 마음으로 읽었다.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은 독일군을 속이지 못할 것이며 우리에게는 치명적인 자기기만이다.”

지금까지 소개한 보고서들은 볼셰비키들을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점은 주목할 만하다. 장교들의 대다수는 이 기이한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들은 군대의 붕괴 원인이 신문, 선동가, 소비에트 등 일반적으로 “정치” 즉 2월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일이 잘 풀린 것이라고 희망한 낙관주의자 장교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수는 있었다. 새 정부를 불편하지 않게 하려고 현실로부터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자들은 더 많았다. 반면에 특히 최고위 장성들 사이에는 상당수가 군대의 붕괴 징조를 의식적으로 과장하여 정부가 결단을 내릴 것을 유도하려했다. 그러나 이들은 결단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그림은 의심의 여지없이 명확하다. 군대가 병들어 있음을 알아챈 혁명은 군대 붕괴의 무자비한 과정을 시간이 갈수록 더욱 잔인하게 명확한 정치형태로 위장했다. 평화에 대한 타오르는 갈망과 군 지휘부와 국가 지배계급들 일반에 대한 병사 대중의 적대감을 혁명은 논리적 결론으로 이끌고 갔다.   

4월 중반에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군대의 정서를 정부에 보고했다. 보고 회의에서 그는 과장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썼다: “두려움과 절망이 나를 크게 사로잡았던 당시를 나는 지금도 잘 기억한다.” 혁명 후 첫 6주 후에 있었음에 틀림없는 이 보고 회의에 밀류코프는 참석했을 것이다. 사실 동료 장관들 그리고 이들을 매개로 사회주의자 친구들을 겁주려는 생각으로 알렉세이예프를 소환한 것은 바로 그였을 가능성이 많다.

실제로 구츠코프는 보고 회의 후에 집행위원회 대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이렇게 불평했다: “독일군과의 파멸적인 우애가 시작되었다. 직접적인 항명의 사례들이 보고되고 있다. 명령이 이행되기 전에 군대 조직과 총회에서 먼저 논의되고 있다. 이런 저런 연대들은 적극적인 작전에 대해 얘기도 듣지 않으려 한다. 평화가 내일 올 것이라고 희망하면 (여기서 구츠코프는 지혜롭게 이렇게 덧붙인다) 누가 오늘 목숨을 버리려 하겠는가.” 이로부터 전쟁장관은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평화에 대해 크게 떠드는 것을 중지해야한다.” 그러나 혁명은 인민에게 말도 못하고 간직했던 생각을 크게 말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그의 생각은 혁명을 중지시키자는 것과 같았다.

물론 병사는 전쟁 바로 첫날부터 죽거나 싸우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대포를 끄는 말이 무거운 대포를 진흙탕 속에서 끌고 싶지 않은 것처럼 죽음과 전쟁을 원치 않았다. 말과 같이 그는 저들이 자기에게 매어 놓은 짐을 벗어 던질 수 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의지와 전쟁 사이에는 아무 연결고리가 없었다. 그러나 혁명이 그에게 이것을 보여주었다. 수백만 병사들에게 혁명은 개인적 삶을 누릴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권리를 의미했다. 총알과 포탄으로부터 자기 생명을 보호할 권리 그리고 같은 의미에서 장교의 주먹으로부터 자기 얼굴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군대에서 벌어지고 있는 근본적 심리변화 과정은 앞에서 말했다. 이것은 병사들이 개인적 권리에 눈뜨는 것을 의미했다. 이 개인적 권리에 대한 각성은 종종 혼란스러운 형태를 띤 채 활화산처럼 분출했다. 교육받은 유산 계급들은 이 현상을 나라에 대한 배신행위라고만 규정했다. 그러나 병사들의 열화와 같은 연설, 열정적인 저항, 장교들에 대한 유혈 보복은 몰개성적이며 선사(先史)적 재료인 병사 대중이 진정하게 국민이 되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대중은 개인적 권리를 물밀듯이 요구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계급은 이것을 증오했다. 하지만 이 현상은 2월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개인적 권리의 촉진이 부르주아 혁명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2월 혁명의 유일한 내용은 아니었다. 농민과 농민의 자식인 병사 외에 노동자들도 이 혁명에 참여했다. 노동자는 이미 오래 전에 자신이 한 개인임을 느꼈고 전쟁을 증오했다. 또한 전쟁에 대항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전쟁터에 끌려갔다. 그에게 혁명은 권력을 정복한다는 명백한 사실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사상이 부분적으로 승리하는 것을 의미했다. 왕정의 타도는 그에게 첫 단계에 불과했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목적을 향해 급히 나아갔다. 그에게 문제는 병사와 농민들이 자기와 함께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병사는 물었다: 내가 살아있지 않으면 토지는 무슨 소용이냐? 극장의 닫혀진 문을 보며 그는 노동자와 함께 반복해서 질문했다: 자유로 향한 열쇠가 지배자의 손에 있다면 자유가 무슨 소용인가? 2월 혁명의 측량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10월 혁명의 강철과 같이 날카로운 광선이 이미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제 14장 지배 파벌과 전쟁

전쟁과 군대에 대한 임시정부와 집행위원회의 계획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당시 정세를 주도한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정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겉으로 보면 자유주의의 전쟁 정책은 조국 방어를 위한 공세, 점령지 병합, 평화조약 반대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정책은 자기모순이었고 배신적이었으며 패배주의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었다.

나중에 로지안코는 이렇게 적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그리고 교전국들과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했을 것이다.” 그의 견해는 독창적인 구석이 없이 자유주의 보수 세력의 견해를 평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위병 대대들의 반란과 혁명의 승리로 유산계급들은 영토를 확대할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반대로 영토를 축소시킬 전쟁의 패배를 예상할 수밖에 없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자기 기만에 빠질 수 없었다. 이 위험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대항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밀류코프는 혁명이 전쟁의 승리를 위한 일보 전진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의 예상 밖의 혁명 낙관주의는 실제로는 절망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전쟁을 계속하거나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문제는 자유주의자들에게 이제 별개의 사안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혁명을 이용하여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따라서 전쟁을 이용하여 혁명을 패배시키는 임무가 그만큼 더 시급했다.

전쟁이 끝난 후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 채무와 새로운 신용대부, 자본시장과 판매시장 등의 문제들을 부르주아 계급은 해결해야했다. 그러나 이 문제들은 이들의 정책과 직접 관련이 없었다. 현재의 관심사는 자본주의 러시아를 위해 유리한 국제적 조건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가 더욱 쇠약해지더라도 일단 국내의 자본주의 자체를 구출하는 것이었다. 중상을 입은 이 계급은 말했다: “우선 부상에서 회복되어야한다. 그 다음에 만사를 정리할 것이다.” 그리고 부상에서 회복되기 위해 혁명을 진압해야했다.

소위 혁명 “심화 세력”에 대항해 대중 특히 군대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장악하기 위해서는 전쟁으로 최면술을 걸어야 했다. 또한 국수주의 정서를 계속 부채질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것이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원래의 목표와 동맹 세력들이 그대로 있는 짜르의 낡은 전쟁을 혁명의 성과와 희망을 간직한 새로운 전쟁으로 인민에게 팔아먹는 것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떻게 성사시킬 것인가? 어제까지만 해도 라스푸틴 파벌에 대항해 동원했던 모든 애국주의 조직 여론을 혁명에 대항해서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유주의자들은 확고히 믿었다. 인민을 억압하는 최고의 항소법원인 왕정을 지키지 못했으므로 이들은 이제 더욱더 연합국들을 꽉 잡고 놓지 말아야했다. 전시에는 연합국들이 왕정보다 훨씬 더 강력한 항소법원이었다.

전쟁을 계속할 경우 기존의 군사적 관료적 국가기구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제헌의회를 연기시킬 수 있다. 또한 승리한 혁명 인민을 전선 즉 자유부르주아 계급과 장단을 맞추고 있는 전쟁 총사령부에 종속시킬 정당한 근거가 마련될 것이다. 특히 농민문제와 사회입법 등 모든 국내 문제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해결이 연기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자들이 믿고 있지 않는 전쟁 승리 때까지 종전은 계속 미루어질 것이다. 적들의 진을 뺄 전쟁은 혁명의 진을 뺄 전쟁으로 전환될 것이다. 이 전술은 공식 회의에서 미리 철저히 계산되고 논의되고 완벽하게 구상된 계획은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것은 자유주의의 원래 정책과 혁명이 조성한 상황 때문에 불가피하게 도출된 계획이었다.          전쟁 계속 노선을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밀류코프는 전쟁 승리 후 전리품 분배에 참여하는 것을 미리 거부할 수는 물론 없었다. 연합국들은 진짜 승리할 가능성이 많았다. 더욱이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여 이 가능성은 더욱 커졌다. 물론 연합국들과 러시아는 다른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들은 깨달았다: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허약성 때문에 독일 등 구축국에 대한 연합국의 승리는 러시아에 대한 승리이기도하다. 전쟁이 어떻게 끝나든 러시아는 파괴되고 국력이 허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 제국주의자들은 이 전망에 대해 눈을 감기로 아주 의식적으로 결심해버렸다.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었다. 구츠코프는 자기 사람들에게 정직하게 말했다: 기적만이 러시아를 살릴 수 있으며 전쟁장관인 자신의 강령은 기적을 바라는 것이다. 국내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밀류코프는 전쟁 승리에 대한 신화가 필요했다. 그가 전쟁 승리에 대해 얼마나 큰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어쨌든 다다넬스 해협이 점령되어 콘스탄티노플이 러시아 영토가 되어야 한다고 그는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 주장에는 그의 본성과도 같은 냉소주의가 배어 있었다. 3월 20일 러시아의 외무장관인 그는 연합국 대사들을 이렇게 설득시키려했다: 불가리아가 구축국들을 배반하도록 부추기기 위해서 세르비아를 배신하자. 그러자 프랑스 대사는 코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이에 동요되지 않고 밀류코프는 “이 문제에서 감상주의를 배격할 필요가 있다”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그리고 1905년 혁명의 패배이후 자신이 주창했던 신(新)슬라브주의를 버릴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미 1882년 엥겔스는 베른슈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올바르게 이렇게 주장했다: “러시아가 주장하는 범슬라브주의라는 헛소리는 무엇을 의미하겠소? 콘스탄티노플을 러시아가 먹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오.”

어제는 라스푸틴 파벌이 독일과 내통하고 있으며 독일의 뇌물을 받았다는 비난이 가해졌다. 이 비난은 이제 혁명에게 가해졌다. 하루가 갈수록 더 대담하고 더 웅장하고 거만하게 주장된 이 비난은 입헌민주당의 연설과 신문을 장식했다. 터키 근해를 점령하기 전에 자유주의자들은 혁명의 샘을 더럽히고 여기에 독약을 풀어놓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혁명 직후 자유주의 지도자들이 전쟁에 대해 똑같이 확고한 입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다수는 여전히 혁명 이전의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교전국과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할 전망을 그리고 있었다. 입헌민주당의 일부 지도자들은 나중에 아주 솔직하게 이 생각을 털어놓았다. 나보코프의 고백에 의하면 그는 이미 3월 7일에 독자 평화조약을 정부 장관들과 논의하고 있었다. 입헌민주당 중앙파의 일부는 전쟁 지속의 불가능성을 당 지도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증명하려했다. 놀데 자작은 이렇게 말한다: “전쟁의 애초 목적이 달성되어야 한다고 밀류코프는 특유의 냉랭한 날카로움으로 설명했다.” 당시 입헌민주당 쪽으로 끌리고 있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밀류코프의 생각에 동의하며 “군대는 소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군사적 재앙을 조직한 이 총사령관은 자신이 군대를 소생시킬 소명을 받은 것처럼 느꼈다.

약간 생각이 단순한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 상당수는 밀류코프의 노선을 오해하여 그가 연합국에 모든 충성을 다 바치는 연합국 돈키호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볼셰비키당이 정권을 장악하자 밀류코프는 서슴지 않고 독일군이 점령한 키에프로 내려가 호엔쫄런 왕가의 정부에 봉사하겠다고 제의했다. 물론 독일 정부는 이 봉사를 서둘러 받을 필요는 없었다. 볼셰비키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밀류코프는 독일의 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그의 시급한 목표였다. 그런데 그는 혁명 세력이 독일의 돈을 받았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장본인이었다. 1918년 그가 독일에 붙은 노선은 그가 1917년 첫 몇 달간 독일을 제압하려던 노선만큼이나 자유주의자들 다수에게 이해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이 두 상반된 것 같은 노선은 사실 동전의 양면에 불과했다. 그는 세르비아를 배신하려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독일에 붙어 연합국을 배신할 망정 밀류코프는 자기나 자기 계급은 배신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같은 정책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이것이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혁명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짜르가 타도되기 전에 독일과 독자 평화조약을 체결하려했다. 2월 혁명이 터지자 그는 혁명을 저지하기 위해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10월 혁명을 타도하기 위해 독일과 손을 잡으려했다. 이 모든 행동에서 그는 유산계급들의 이해에 충실했다. 물론 그는 이들을 돕는데 성공하지 못했고 매번 자기 머리를 새로운 장벽에 부딪쳤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손님들이 막다른 골목에 처한 계급들이었기 때문에 그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혁명 봉기가 성공한 첫 며칠간 독일군이 러시아를 공격하여 혁명의 머리를 확실히 부수는 일이 밀류코프에게 필요했다. 불행한 것은 3월과 4월에 날씨가 좋지 않아 독일군은 러시아 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펴기가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던 독일군은 약간 주저하다가 러시아 혁명의 자체 논리에 러시아를 맡기기로 결정했다. 리징언 장군만이 3월 20일과 21일에 스토코드에서 공세를 가했다. 그의 성공은 독일 정부를 깜짝 놀라게 만든 동시에 러시아 정부를 기쁘게 했다. 뻔뻔스러운 러시아 총사령부는 짜르 치하에서는 아무리 사소한 군사적 승리도 크게 과장했는데 이제는 스토코드의 패배를 크게 과장했다. 자유주의 신문들도 이에 동조했다. 이들은 전에 전쟁 포로들과 전리품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마음껏 묘사한 것과 똑같이 이번에는 러시아군의 허약성, 공포, 손실 등을 과장하여 묘사했다. 혁명이 성공한 지금 이미 부르주아 계급과 총사령부는 전쟁 패배 노선으로 넘어갔다. 리징언 장군은 상관들에 의해 공세를 제지당했고 전선은 다시 봄철의 진흙탕과 희망 속에 교착되었다.

그러나 전쟁을 혁명에 대항시키는 방법은 한가지 조건이 충족될 때만 성공할 수 있었다. 즉 인민대중이 따르고 있던 중간 정당들이 자유주의 정책을 지지해야했다. 자유주의는 전쟁 지속과 혁명을 결합시킬 위치에 있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혁명이 전쟁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설교했기 때문이다. 이 임무는 중간정당들을 장악한 민주주의자들에게 넘겨져야 했다. 그러나 물론 이들에게 “비밀”이 새나가면 좋지 않다. 이들은 계략을 모른 채 이용되어야만 한다. 이들의 편견, 허영, 정치가다운 지혜를 갖추고 있다는 자부심, 혼란에 대한 두려움,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미신적인 굴종 등을 이용하여 이들을 계략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첫 며칠동안 사회주의자들 및 민주주의자들(모두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에 대한 약칭)은 전쟁에 대한 노선을 정할 수 없었다. 체이제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까지는 언제나 전쟁에 반대해왔다 --- 그런데 어떻게 전쟁을 계속하자고 주창할 수 있는가?” 3월 10일 집행위원회는 러시아에 도착한 프란츠 메링(역자 주: 독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을 환영하기로 표결했다. 이 조그만 제스처로 집행위원회 좌파는 별로 활발하지도 않은 사회주의 양심을 진정시키려했다. 전쟁에 대해 소비에트는 계속 아무 말도 못했다. 지도자들은 이 주제로 혹시 임시정부와 갈등을 일으켜 “접촉”의 밀월 몇 주를 어둡게 할까 두려웠다. 이들은 대오 내의 분열도 두려워했다. 이들은 조국방어주의자들과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들의 짬뽕이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내의 이 두 그룹들은 서로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있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혁명적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부르주아 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공개적이든 은폐되었든 애국주의가 지식인들을 지배계급들과 단결시켜 이들을 대중으로부터 떨어지게 만들었다. 좌익이 흔들었던 짐머발트의 반전 깃발은 이렇다할 결속력이 없었다. 그리고 이 깃발은 좌익이 라스푸틴 파벌들과 애국주의로 연대한 모습을 잘 위장시켜주었다. 그런데 이제 로마노프 왕조는 타도되었다. 러시아는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온갖 색깔로 춤을 추고 있는 러시아의 자유는 군사독재로 감시가 엄중한 유럽 국가들의 단색 배경과 뚜렷이 대비되었다. 집행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 옛날의 그리고 새로운 애국주의자들이 외쳤다: “독일에 대항하여 혁명을 방어해야한다.” 수하노프와 스테클로프 성향의 짐머발트주의자들은 수줍게 지적했다: 이 전쟁은 제국주의 전쟁이다; 짜르가 제국주의자들과 합의한 영토 병합 정책을 유지하자고 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근심에 찬 체이제는 말한다: “어떻게 전쟁을 지속하자고 주창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이 짐머발트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길 것을 주창했었다. 따라서 자유주의자들의 전쟁 지속 노선에 대한 이들의 반대는 허공에 붕 뜬 허세에 불과했다. 몇 주일간 동요하고 부심한 후 체레텔리의 도움으로 밀류코프 계획의 제 1부가 만족스럽게 결정되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꺼림칙한 이 민주주의자 또는 자칭 사회주의자들은 전쟁의 마차에 묶인 후 자유주의자들의 채찍질을 받으며 모든 힘을 다해 전쟁 승리로 매진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연합국의 러시아에 대한 승리이며 미국의 유럽에 대한 승리였다!

화해주의자들의 주요 기능은 대중의 혁명 에너지를 애국주의에 합선시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이들은 군대의 전투력을 소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또 한편으로 이들은 연합국 정부들이 강도행위를 포기하도록 유도하려고 했다. 이것은 정말 웃기는 짓이었다. 이 두 가지 힘든 노력을 하면서 이들은 환상에서 실망으로 오류에서 모욕감으로 빠져들었다. 여기서 이 노선의 첫 부분을 주목해보자.

자신의 권력을 느낄 수 있었던 짧은 시간에 로지안코는 병영 복귀와 장교들에 대한 복종을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이 명령서는 주둔군 대오에 분노를 불러 일으켰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는 첫 회기들의 하나를 미래 병사의 지위 문제에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시간 동안 열띤 분위기 속에서 대중 집회와 같은 혼란한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 결과 결석한 지도자들이 제지할 수 없었던 병사들의 지시에 따라 그 유명한 “명령 제 1호”가 탄생했다. 이것은 2월 혁명의 단 하나 가치 있는 문서로서 혁명군대의 자유헌장이었다. 조직적 방식으로 병사들을 새로운 지위로 격상시킨 대담한 첫 문단들은 이렇게 선언한다: 모든 연대에 선거에 의한 병사위원회가 구성된다; 병사위원회 대표들은 소비에트에 출석한다; 모든 정치행위에 대해 병사들은 소비에트와 그 산하 위원회의 지도를 따른다; 무기는 연대와 대대의 병사위원회가 관리하며 “어떤 경우에도 장교에게 양도될 수 없다”; 가장 엄한 규율로 임무를 수행할 것이며 비번일 때에는 완전한 시민권을 누린다; 비번 때는 장교에게 경례하지 않는다; 장교의 계급은 따로 부르지 않는다; 병사에 대한 무례한 행위 특히 자네라고 부르는 것은 금지된다.... 이것이 바로 뻬쩨르부르그 병사들이 혁명에 참여하면서 이끈 결론이었다. 다른 결론이 가능했을까? 어느 누구도 이것에 감히 반대하지 못했다. 이 “명령”을 준비하는 동안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자유주의자들과의 협상이라는 더 고상한 일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과 전쟁 총사령부에게 이렇게 핑계를 대었다. “명령 제 1호”와 함께 집행위원회는 전열을 서둘러 결집시킨 후 곁들여 인쇄공들에게 병사들에 대한 호소문을 보냈다. 호소문은 장교들에 대한 병사들의 보복을 비난하면서 병사들이 구 지휘부에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식자공들은 이 문서의 식자를 거부했다. 이 호소문을 작성한 민주주의자들은 분노로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식자공들이 장교들에 대한 유혈 보복을 열망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이다. 혁명이 승리한지 이틀만에 짜르의 지휘부에게 복종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단순히 반혁명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라고 병사와 노동자들은 생각했다. 물론 식자공들은 월권행위를 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을 단순한 식자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 문제에 혁명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이들은 생각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첫 며칠동안 병사들과 노동자들은 군대로 복귀한 장교들의 미래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 볼셰비키당과 가까웠던 사회민주주의 그룹인 메주라욘치(지구간 그룹)는 이 중요한 문제를 대담하게 혁명적으로 접근했다. 이들이 병사들에게 보낸 호소문은 이렇게 말했다: “귀족 출신 장교들이 여러분들을 속이지 못하도록 소대장, 중대장, 연대장들을 여러분 스스로 선출하고 인민의 친구라고 알고 있는 장교들만을 받아들이자.” 그러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상황에 적절했던 이 호소문은 집행위원회에 의해 즉시 압수되었다. 그리고 체이제는 연설을 통해 이것을 경찰 끄나풀들의 짓이라고 규정했다. 좌익을 공격할 때 민주주의자들은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다행히 이들의 자유는 충분히 제한되었다. 왜냐하면 집행위원회를 최고 기관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노동자와 병사들은 모든 중요한 순간에는 직접 개입하여 지도자들의 정책을 교정시켰기 때문이다. 이틀이 채 지나기 전에 집행위원회는 “명령 제 2호”를 발령하여 명령 제 1호를 철폐하고 전자를 뻬쩨르부르그 군관구에만 적용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은 소용없는 짓이었다. “명령 제 1호”는 철폐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로운 발명품이 아니라 후방과 전방의 현실을 확인하고 강화시켰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현실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자유주의 의원들조차 병사들과 마주치면 “명령 제 1호”를 언급하며 질문과 질책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했다. 그러나 큰 정치무대에서는 이 대담한 명령이 소비에트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비난거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패배한 장군들은 “명령 제 1호”가 독일군에게 승리하는 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에서 이 명령이 발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집행위원회의 화해주의자들은 자기 행위에 대해 계속 사과하면서 왼손이 놓친 것을 오른손으로 회수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병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한편 소비에트에서 병사 및 노동자 출신 대의원들은 벌써 장교의 선출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에 민주주의자들은 흥분했다. 더 좋은 주장을 찾지 못하자 수하노프는 대의원들을 겁주려고 이렇게 말했다: 권력을 넘겨받은 부르주아 계급은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자들은 솔직히 구츠코프의 등뒤로 숨었다. 대중을 저지하기 위해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을 핑계삼았다. 이것은 자유주의자들이 왕정을 핑계삼은 것과 똑같았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연단에서 내려와 자리로 돌아오는데 어느 병사가 길을 가로막았다. 그는 내 얼굴에 주먹을 흔들더니 ‘병사의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없는 신사들’에 대해 화를 내며 뭔가를 외쳤다.” 이 병사의 “과격 행위” 후에 이 민주주의자는 완전히 평정을 상실하여 케렌스키를 찾으려 뛰어갔다. 그리고 후자의 도움을 통해서만 “이 문제는 어쨌든 얼버무려졌다.” 이들은 언제나 문제를 얼버무렸다.

혁명이 승리한 후 2주일간 이들은 전쟁 문제를 모른 체했다. 그러나 마침내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었다. 3월 14일 집행위원회는 수하노프가 작성한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소비에트에 제출했다. 화해주의자 좌파와 우파를 단결시킨 이 문서를 자유주의 언론은 “대외 정책의 명령 제 1호”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이 아양떠는 평가는 이 문서만큼이나 잘못되었다. “명령 제 1호”는 혁명으로 군대에 제기된 문제를 병사들이 스스로 정직하게 답변한 것이었다. 그러나 3월 14일의 선언문은 병사와 노동자들의 정직한 문제제기에 대한 상층부의 배신적 답변이었다.

물론 이 선언문은 평화 더욱이 병합이나 배상이 없는 평화를 표방했다. 그러나 2월 혁명 훨씬 전부터 서방 제국주의자들은 이 내용을 자기들 이익에 맞게 활용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참전 순간에 준비했던 구실이 바로 영속적인, 명예로운, “민주적” 평화였다. 신앙심이 투철했던 당시의 영국 수상 애스퀴스는 의회에서 박식하게 병합의 종류들을 분류했다. 그리고 영국의 이해에 위배되는 모든 병합을 부도덕하다고 비난할 근거를 확실히 마련했다. 한편 프랑스 외교의 핵심은 상점 주인과 대금업자들의 탐욕을 가능한한 최대로 충족시키는 것이었다. 다만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선언문은 그 동기가 단순할 정도로 진지했을 뿐 프랑스 공식 외교의 위선을 진부하게 빼어다 박았다. 선언문은 외국의 군국주의에 대항해 “우리의 자유를 확고히 방어할 것”을 약속했다. 1914년 8월 전쟁의 시작이래 프랑스의 사회애국주의자들도 바로 이렇게 행동해왔다. 선언문은 말한다: “인민 스스로 전쟁과 평화를 결정할 시간이 당도했다.” 그런데 이 선언문의 작성자들은 러시아 인민의 이름으로 이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대부르주아 계급에게 이미 넘긴 뒤였다. 이 선언문은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노동자들에게 “왕, 지주, 은행가의 정복 및 약탈 도구가 되기를 거부하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의 정수였다. 왜냐하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영국과 벨기에의 국왕, 일본 황제, 러시아와 연합국의 지주와 은행가 등과 동맹을 단절할 의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프로이센을 러시아 영토로 전환시킬 술수를 부렸던 밀류코프에게 대외정책의 지도력을 넘긴 소비에트의 지도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노동자들에게 러시아 혁명을 본받을 것을 촉구했다. 전쟁의 도살을 이들이 연극하듯 비난해 보았자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이런 짓은 교황도 하고 있었다. 은행가, 지주, 왕의 그림자에게 호언장담으로 도전한 후 화해주의자들은 2월 혁명을 실제 왕, 지주, 은행가의 도구로 전환시키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축전을 보내면서 로이드 조오지 영국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의 전쟁이 기본적으로 인민 정부와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사실을 러시아 혁명이 입증했다. 3월 14일의 선언문은 “근본적으로” 로이드 조오지와 연합했고 미국 국내의 전쟁 선전에 대단히 귀중한 도움을 주었다. 입헌민주당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문은 평화주의를 전형적으로 주창하면서 서두를 장식했으나 우리와 우리 동맹국들이 공유하는 사상을 핵심적으로 표현했다.” 이 주장은 천 배나 옳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은 가끔 이 선언문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프랑스의 검열 제도는 이 문서가 프랑스 국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 선언문을 혁명 대중이 액면 그대로 믿을까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비록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들이 작성했지만 이 선언문은 애국주의 분파의 승리를 확연히 드러냈다. 각 지역의 소비에트들도 이것을 이해했다. 이들은 “전쟁 반대” 구호를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볼셰비키들이 강력했던 우랄과 코스트로마 지역에서조차 이 애국주의 선언문은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그러니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들은 이 거짓 문서를 반대하지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이 선언문이 나온 후 몇 주가 지나자 환어음을 일부 결재할 필요가 있었다. 임시정부는 물론 “자유 공채”라는 이름의 전쟁 공채를 발행했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대체로” 정부가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있으므로 민주주의 세력은 전쟁 공채를 지지해야 한다. 집행위원회에서 전쟁 공채에 대한 반대는 3분의 1이 넘었다. 그러나 4월 22일 열린 소비에트 총회에서 2천 표 가운데 112표만이 전쟁 공채에 반대했다. 이 사실로부터 집행위원회가 소비에트보다 더 좌였다는 결론이 가끔 제시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소비에트는 집행위원회보다 좀더 정직했을 뿐이었다. 전쟁이 혁명을 방어한다면 전쟁 노력에 돈을 대주어야 하고 전쟁 공채에 찬성해야한다. 집행위원회는 더 혁명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더 술수에 능할 뿐이었다. 자신의 의도를 애매하게 치장하고 이런 저런 유보 조건으로 진짜 의도를 숨겼을 뿐이었다. 집행위원회는 자기가 수립한 정부를 “대체로” 지지했으며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느 선에서” 떠맡았다. 대중은 이런 치졸한 속임수를 쓸 줄 모른다. 병사들은 “어느 선에서” 싸울 수도 없으며 “대체로” 죽을 수도 없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정치인다운 사고가 허풍에 대해 승리할 수 있도록 3월 5일까지만 해도 반전 선전가 “갱단”을 모두 체포하여 총살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반동이 4월 1일에 군 총사령관으로 공식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모든 것이 질서를 잡았다. 짜르의 대외 정책을 입안했던 밀류코프는 외무장관이 되었고 짜르의 군대 지도자였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혁명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따라서 구체제는 혁명 후에도 건재했다.

그러나 동시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상황의 논리에 따라 자기들이 엮어 놓았던 그물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공식 민주주의 세력은 스스로 인정하고 지지했던 장교들을 대단히 무서워했다. 따라서 자기의 권위를 동원하여 이들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고 병사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 될 수 있으면 장교들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3월 6일 회의에서 집행위원회는 모든 연대와 군대 기관에 소비에트 인민위원을 파견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내렸다. 이렇게 해서 병사와 소비에트 사이에는 삼중의 끈이 묶여졌다: 연대의 병사들은 소비에트에 대표를 보내고 집행위원회는 연대에 인민위원을 보내고 연대의 병사위원회는 연대를 지도하면서 소비에트의 하급 중핵이 되었다.

인민위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의 하나는 군 지휘부의 정치적 신뢰성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데니킨은 분노하며 말한다: “민주 정부는 이 측면에서는 전제 정부를 능가했다.” 그리고 자기 참모부 장교들이 뻬쩨르부르그의 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들 간의 암호 편지를 솜씨 있게 가로채어 그에게 넘긴 것을 자랑했다. 왕당파들과 봉건 영주들을 감시하다니 이것만큼 분노할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집행위원회와 인민의원 사이의 편지를 가로채는 것은 물론 전혀 분노할 일이 아니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도덕의 수준에 관계없이 당시 군대 지배기구 내부의 상황은 아주 명확했다: 서로 상대방을 두려워하면서 적대심을 가지고 서로를 감시했다. 다만 병사 대중을 두려워하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단결했다. 장군들과 제독들은 각각 희망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한가지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민주주의로 위장하지 않으면 전혀 일이 풀리지 않는다. 콜차크는 함대의 병사 및 수병 위원회에 대한 결의안을 작성했다. 그는 나중에 이 위원회들을 목 졸라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이것들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그는 참모부 장교들에게 위원회들을 승인하라고 지시했다. 이와 비슷하게 백군 장수가 될 마르코프 장군도 지휘부의 충성심을 감시할 인민위원 제도에 대한 계획을 4월초 전쟁부에 보냈다. 이렇게 해서 “군대의 유구한 법칙” 즉 군사관료 체제의 전통이 혁명의 압력을 받아 지푸라기처럼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물론 병사들은 정반대의 각도에서 병사 및 수병 위원회를 바라보았으며 이것을 중심으로 지휘부에 대항했다. 병사들에 대항해서 위원회가 장교를 보호했으나 이것도 한도가 있었다. 위원회와 갈등을 일으킨 장교의 상황은 참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병사들이 자신의 지휘관을 제거하는 불문(不文)의 권리가 확립되었다. 데니킨의 말에 의하면 7월까지 서부 전선에서는 군단장에서 연대장까지 60명의 고참 장교들이 해임되었다. 연대 내에서도 이와 유사한 해임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전쟁부, 집행위원회, 접촉위원회 등의 서기들은 아주 꼼꼼한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것의 목표는 군대 내에 “합리적인” 대인 관계를 조성하고 장교의 권위를 높이고 병사 위원회를 부차적인 그리고 주로 경제적인 역할에 한정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군대의 고위 지도자들은 빗자루의 그림자로 혁명의 그림자를 청소하고 있었다. 한편 병사 위원회는 뻬쩨르부르그 집행위원회에 버금가는 강력한 체제로 발전하고 있었으며 군대에 대한 조직적 통제를 강화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집행위원회는 인민위원과 병사 위원회를 통해 군대를 다시 한번 전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 통제체제를 주로 사용했다. 이제 더욱더 병사들은 이렇게 곰곰이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선출한 위원회가 왜 우리 생각이 아니라 장교들의 생각을 대변하고 있을까?

참호의 병사들은 더욱 빈번하게 수도로 대표를 보내 상황을 탐지했다. 4월이 시작되면서 전선에서 병사 대표들이 계속 수도를 방문했다. 대중의 대화가 타우리데 궁전에서 매일 들렸다. 전선에서 도착한 병사 대표들은 무거운 머리를 움직이며 단 하나의 문제에 대해서도 속시원한 대답하지 않는 집행위원회의 정책을 이해하려했다. 군대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소비에트의 입장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정치적 파산을 명확히 확신하기 위해서였다.

자유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소비에트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국수주의가 병사들을 오염시켜야했다. 입헌민주당 출신 장관인 싱가레프는 전선에서 온 병사 대표들과 회의를 했다. 그는 여기서 독일군 전쟁포로에 대한 “불필요하게 관대한 행위”를 반대하는 구츠코프의 명령을 옹호하면서 “독일군의 잔악 행위”를 언급했다. 그러나 그의 말에 병사들은 전혀 호응하지 않았다. 반대로 이 회의는 독일군 전쟁포로들의 조건을 개선시킬 것을 명확히 결의했다. 자유주의자들은 병사들이 일상적으로 과도한 행위와 잔악 행위를 일삼는 자들이라고 그렇게 비난해왔다. 그러나 전선에서 온 이 회색 군복의 병사들은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병사를 모욕하는 장교는 보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든 가상이든 독일군 총사령관 루덴도르프가 자행한 잔악 행위에 대해 독일군 병사 포로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은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거칠고 비천한 농민 병사들에게 영원한 도덕률은 너무 이질적이었다.

부르주아 계급도 군대를 장악하려고 노력하자 이들과 화해주의자들 사이에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아무 성과도 남기지 못했다. 4월 7일부터 10일까지 서부 전선의 병사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전선의 병사들을 대표하는 이 첫 대회는 군대에 대한 결정적인 정치적 시험대였다. 따라서 양측은 모두 대회가 열리는 민스크에 최상의 대표들을 보냈다. 소비에트를 대표해서 체레텔리, 체이제, 스코벨레프, 고즈데프가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해서 로지안코, 입헌민주당의 로디체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이 참석했다. 민스크 극장은 사람들로 만원이었으며 홀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이 긴장감은 파문처럼 퍼져 도시 전체를 감쌌다. 참석한 병사 대표들의 보고들을 통해 진짜 현실이 드러났다. 전선 전체에 걸쳐 독일군과의 우애 행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병사들은 더욱더 대담하게 이 행위를 주도했다. 그러나 군 지휘부는 이 행위를 처벌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여기서 자유주의자들이 무엇을 말할 수 있었겠는가? 열정적인 병사 청중 앞에서 이들은 소비에트의 노선과 반대되는 결의안을 제출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들은 병사 대표들을 환영하는 애국주의 연설을 한 후 모두 퇴장했다. 싸움도 하지 않고 집행위원회 민주주의자들이 승리했다. 그러나 이들의 임무는 부르주아 계급에 반대하여 대중을 지도하는 것이 아니라 저지하는 것이었다. 3월 14일 선언문의 정신에 입각하여 혁명방어를 위한 전쟁으로 모호하게 치장된 평화 구호가 대회를 지배했다. 전쟁에 대한 소비에트의 결의안은 610표의 찬성, 8표의 반대, 46표의 기권으로 채택되었다. 전선의 병사들을 후방에 대항시키고 군대를 소비에트에 대항시키려던 자유주의자들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러나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승리에 감격하기보다는 겁에 질린 채 대회에서 돌아왔다. 이들은 혁명이 불러온 귀신을 보고 이것과 도저히 대항할 수 없다고 느꼈다.      

 

제 15장 볼셰비키당과 레닌

해외 망명 중이던 레닌은 4월 3일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다. 바로 이때부터 볼셰비키당은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진짜 자신의 노선으로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혁명 첫 몇 개월간 볼셰비키당은 어리둥절했으며 동요했다. 봉기의 승리 직후 당중앙위원회가 작성한 “선언문”은 이렇게 말했다: “작업장과 공장의 노동자와 봉기 병사들은 즉시 임시혁명정부에 대표를 보내야한다.” 그리고 이것은 순전히 절차의 문제에 불과한 것처럼 논평이나 반대 없이 공식 소비에트 기관지에 실렸다. 볼셰비키당 지도자들 역시 이 구호를 순전히 과시용으로 인식했다. 이들은 독자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려는 노동계급 정당의 대표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단지 자신의 원칙을 선언한 후 정해지지 않은 기간동안 충실한 야당이 될 민주주의 좌파처럼 행동했다.

3월 1일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가장 중요한 의제는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는 조건에 대한 것뿐이었다고 수하노프는 주장한다. 이때 집행위원회 위원 39명 가운데 11명이 볼셰비키당 당원이었거나 동조자였으나 부르주아 정부 수립에 대해 반대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더욱이 볼셰비키당 중앙의 잘루츠키, 슐리아프니코프, 몰로토프도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슐리아프니코프의 보고에 의하면 다음날 소비에트 회의에서 출석 대의원 400명 가운데 19명만이 부르주아 권력 수립에 반대했다. 이때 볼셰비키당 소속 대의원 수는 40명이었다. 표결은 순전히 의회의 형식에 따라 순식간에 처리되었다. 볼셰비키당은 명확한 반대 결의안을 제출하지 않았다. 당 신문에도 갈등이나 웅성거림이 전혀 없었다.

3월 4일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사무국은 임시정부의 반혁명적 성격과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회는 이 결의문을 요식 행위로 치부했는데 이것은 옳았다. 왜냐하면 당면 행동에 대한 지침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정반대의 각도에서 접근했다. 위원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소비에트의 결의문을 접한 본 위원회는 임시정부가 다음의 사항들을 준수할 경우 반대하지 않는다.” 등등....근본적으로 이것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입장과 동일한 것으로 제 2선으로 물러선 입장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회의 이 결의문은 공공연히 기회주의를 드러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만 중앙위원회의 결의문과 모순되었다. 후자의 요식적 내용은 정치적으로 완전히 무의미했으며 기정사실을 인정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부에 아무 말 없이 또는 유보조항을 달고 복종하려는 분위기는 당 전체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노동자 당원들은 처음부터 임시정부를 예상치도 않은 장애물로 간주했다. 비보르그 위원회는 수 천명이 참석한 노동자 병사 집회들을 열었는데 여기서는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의문들이 거의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동에 적극 참여했던 딩겔슈테트가 증언한다: “우리 이외의 누가 같은 내용의 결의안을 제출했더라도 전부 채택되었을 것이다.” 한편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권력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노동자와 병사들 앞에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했다. 인기가 있었던 비보르그 위원회의 결의문은 플래카드에 인쇄되었고 풀로 붙여졌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회가 이 결의문을 완전히 금지시키자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이 조치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혁명의 사회적 내용과 전망에 대해서도 역시 애매 모호했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봉건적 관계들이 붕괴하고 있으며 대신 부르주아 관계들에 합당한 모든 종류의 ‘자유들’이 등장하는 시기를 우리는 경과하고 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멘세비키들과 같은 생각이었다.” 프라우다지 첫 호가 말했다: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모스크바 시당 위원회는 소속 노동자 대의원들에게 보낸 지침서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자신의 궁극 목표인 사회주의를 위해 노동계급은 자유를 누리고자 한다.” “궁극 목표”라는 전통적 언사를 사용하여 사회주의가 상당히 먼 미래의 과제라는 점이 충분히 강조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이 선을 넘어서려고 하지 않았다. 민주주의 혁명의 경계를 초월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화해주의자들 앞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수용하면서 현실적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당 중앙이 보인 정치적 근성의 부재는 지방조직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점과 관련하여 사라토프 조직의 증언만 들어보기로 하자: “봉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후 대중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확실히 상실되었다. 대신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이득을 보았다. 볼셰비키당의 구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이것은 아주 우울한 현실이었다.”

볼셰비키당 좌파 특히 노동자 당원들은 모든 힘을 다해 이 답답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이며 이것을 뛰어넘어 노동계급이 정권을 잡으려 할 경우 대중으로부터 고립될 것이라는 주장을 이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를 갈면서도 지도자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혁명 바로 첫날부터 당내에는 서로 충돌하는 여러 경향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간 경향은 하나도 없었다. 프라우다지는 당의 불명확하고 불안정한 정치적 상태를 반영했을 뿐 당의 정치적 단결을 촉진하지 못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이 유배지에서 돌아온 3월 중순에 상황은 더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이들은 갑자기 당의 공식 노선을 우경화 시켰기 때문이었다.

거의 창당 때부터 당원이었던 카메네프는 언제나 당의 우파였다. 그는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본능을 어느 정도 구비하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러시아에서 분파투쟁의 경험이 풍부했으며 망명 생활을 통해 서구의 정치 현상들도 풍부히 관찰했다. 그는 대다수 볼셰비키들에 비해 레닌의 사상 일반을 더 잘 파악했다. 다만 실제 행동에서는 이 사상을 가능한 선까지 가장 온건하게 해석했다. 그로부터 판단의 독자성이나 행동의 주도성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는 선전가, 웅변가, 기자 등으로 이름이 있었으나 이 분야에서 대단히 뛰어나지는 않았고 다만 생각은 깊었다. 그는 다른 정당들과 협상을 하거나 다른 사회 세력들을 정찰하는 데에는 특히 귀중했다. 다만 이런 활동이 끝난 후 그는 당내에 이질적 정서를 항상 조금씩 끌고 들어왔다. 카메네프의 이 특성들은 너무나 명백해서 그를 정치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거의 실수를 하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그가 “날카로운 구석”이 없다고 평하면서 계속 이렇게 말한다: “그를 올바른 노선으로 이끄는 것이 언제나 필요하다. 이에 대해 그는 약간 저항을 할지는 몰라도 강하게 저항하지는 않는다.” 스탄케비치 역시 같은 평가이다: 적들에 대한 카메네프의 태도는 “너무 부드러워서 마치 그 자신이 화해 불가능한 입장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집행위원회 내부에서 그는 적이 아니라 단지 반대자에 불과했다.” 이 평가는 너무 적절하여 덧붙일 말이 거의 없다.         

그러나 스탈린은 심리 구조와 활동 방식이 카메네프와 완전히 다른 유형의 볼셰비키였다. 그는 강인한 조직가였으나 이론과 정치적 감각이 유치했다. 카메네프는 선전가로서 당의 이론적 지주인 레닌과 함께 오래 해외에 머물렀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위 “실무자”로서 이론적 관점, 넓은 정치적 관심, 외국어에 대한 지식 등이 결여되어 있었다. 다만 그는 러시아의 토양과 분리될 수 없었다. 이런 유형의 당 활동가들은 잠시 해외에 나가 지시사항을 하달 받고 문제들을 좀더 깊이 논의한 후 다시 러시아로 돌아갔다. 활동력, 끈기, 배후 음모와 관련된 기발한 생각 등에서 스탈린은 활동가들 가운데 아주 뛰어났다. 카메네프는 성격상 당의 실천적 결론에 대해 “당혹스러워했다.” 반면 스탈린은 자신이 옳다고 받아들인 실천적 결론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옹호하면서 이것을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 두 인물은 성격이 정반대였으나 혁명 초기에는 같은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들은 서로를 보완했기 때문이다. 혁명 의지가 없는 혁명 사상은 내부 스프링 하나가 끊어진 손목시계처럼 무용지물이다. 이 때문에 카메네프는 언제나 혁명의 진전이나 당면 임무에 부응하지 못하고 뒤 처졌다. 한편 폭 넓은 정치 사상을 구비하지 못하면 대단히 강인한 의지를 가진 혁명가도 거대하고 복잡한 사건들 앞에서 우유 부단할 수밖에 없다. 경험주의자였던 스탈린은 의지와 지성에 있어서 이질적 계급들의 영향을 쉽게 받았다. 결국 단호하지 못한 선전가와 지성의 폭과 깊이가 없는 조직가가 결합하여 1917년 3월 볼셰비키당을 멘세비키주의의 경계선으로 바짝 끌고 갔다. 당의 대표로 집행위원회에 참석한 스탈린은 독자적 입장을 개진할 능력이 카메네프보다 부족했다. 집행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와 신문을 보면 자유주의의 발 밑에서 “민주주의자들”이 아양을 떨 때 스탈린이 볼셰비키당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제안서, 선언서, 항의서 등을 제출한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자신의 저작 [혁명 노트]에서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당시 집행위원회에는 볼셰비키당에서 카메네프 외에 스탈린이 출석했다....집행위원회 활동 가운데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는 가끔 흐릿하고 작은 빛을 내는 회색의 반점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것 이외에 그에 대해 말할 것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대체로 수하노프는 스탈린을 과소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의 소굴인 집행위원회에서 스탈린이 보인 정치적 성격의 부재를 그는 올바르게 묘사하고 있다.

3월 14일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소비에트에 의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이 선언문은 2월 혁명의 승리를 연합국들의 이해에 비추어 해석했으며 프랑스식의 새로운 공화국과 사회애국주의가 승리했음을 선포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이 선언문을 상당한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 성공은 이렇다할 투쟁 없이 성취된 것이 확실했다. 프라우다지는 이 선언문을 “소비에트 내부의 다양한 경향들이 의식적으로 화해한 결과”라고 평했다. 그러나 이 화해는 레닌의 노선이 소비에트에서 전혀 반영되지 않은 직접적 결과에 불과했다.

카메네프는 중앙기관지의 망명 편집위원이었었다. 스탈린은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중앙위원이었었다. 무라노프 역시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의회 의원이었었다. 이 세 인물은 너무 “좌파적인” 프라우다지의 기존 편집부를 제거하고 약간 의심스러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3월 15일 신문의 편집권을 장악했다. 새 편집부는 강령 선언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볼셰비키당은 임시정부가 “반동이나 반혁명에 대항해 투쟁할 경우에 한해” 단호한 지지를 보낼 것이다. 그리고 전쟁 문제에서도 이와 못지 않게 단언했다: 독일군이 독일 황제에 복종하듯 러시아 병사들도 “총탄에는 총탄 포탄에는 포탄으로 대응하면서 확고히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우리는 ‘전쟁을 중지하라’는 의미 없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우리의 임무는 모든 교전국들이 즉각 공개 협상에 임하도록 임시정부를 압박하는 것이다... 협상이 끝날 때까지 모든 병사들은 자기에게 맡겨진 전투 위치를 고수해야한다!” 이것은 모두 조국방어주의 노선이었다. 평화를 위해 제국주의 정부를 “유인”해야 한다는 이 강령은 독일의 카우츠키, 프랑스의 장 롱게, 영국의 맥도널드가 표방하는 강령이었지 제국주의 타도를 외친 레닌의 강령은 결코 아니었다. 애국주의 신문에 대항해 자신을 방어하면서 프라우다지는 심지어 한술 더 떴다: “짜르의 검열로 보호받던 신문들은 ‘전쟁 패배’ 노선을 무차별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 노선은 뻬쩨르부르그 거리에 혁명 연대가 처음 등장한 그 순간 전부 사라졌다.” 이렇게 해서 프라우다지는 레닌의 노선을 즉각 폐기했다. “전쟁 패배” 노선은 짜르의 검열로 보호받던 반동 신문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패배가 그나마 낫다”는 말은 레닌이 했다. 혁명 연대의 첫 등장이나 왕정의 타도도 전쟁의 제국주의적 성격을 바꾸지는 않았다. 슐리아프니코프는 말한다: “편집부가 바뀐 후 처음 발행된 프라우다지를 보자 조국방어주의자들은 기뻐했다. 의회 위원회의 사업가부터 혁명적 민주주의의 중심인 집행위원회 위원들까지 타우리데 궁전 전체는 하나의 소식을 이구동성으로 전했다: 온건하고 합리적인 볼셰비키들이 극단주의자들을 제압했다. 집행위원회에서 그들은 독이 서린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맞았다....그러나 이 신문은 공장에서 볼셰비키 당원들과 동조자들을 완전히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대신 적들은 빈정거리며 만족감을 나타냈다....당 지부들은 크게 분노했다.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도착한 세 명의 구 편집자들이 프라우다지를 장악했다는 사실을 안 노동자들은 이들의 제명을 요구했다.” 프라우다지는 비보르그 지구의 격렬한 항의문을 곧바로 실어야했다: “노동자들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프라우다지는 아무리 어려움에 봉착해도 자신의 임무를 달성하여 잘난 체하는 부르주아들에게 혁명의식의 빛을 비추어야한다.” 아래로부터 이런 항의들이 올라오자 편집자들은 좀더 조심스럽게 표현을 다듬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의 노선은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은 레닌이 혁명 이후 해외에서 보낸 첫 번째 글을 신문에 싣지도 않았다. 이들의 우경화는 요지부동이었다. 볼셰비키당 좌파의 대변인 딩겔슈테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이중권력의 원칙을 채택해야했다... 그리고 2주일 동안의 치열한 정치활동을 통해 자기 임무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된 노동자와 병사 대중에게 이 우회로의 불가피성을 증명해야했다.”

전국에서 당 조직들은 자연스럽게 프라우다지의 노선을 추종했다. 다수의 소비에트들은 권력 장악이라는 근본 문제에 대한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볼셰비키 당원들은 소비에트 다수파에 단순히 굴복했다. 모스크바 지역의 소비에트 협의회에서 볼셰비키들은 전쟁에 대한 사회애국주의자들의 결의문을 지지했다. 3월말과 4월초 82개 소비에트 대표들이 참석한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볼셰비키들은 권력문제에 대한 공식 결의문을 지지했고 이것을 멘세비키 지도자 단이 옹호했다. 볼셰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이 대단한 정치적 화해는 당 통합 움직임을 크게 확산시켰다. 지방에서는 볼셰비키들과 멘세비키들이 조직을 통합했다. 카메네프-스탈린 분파는 혁명적 민주주의의 좌파로 꾸준히 변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타우리데 궁전의 복도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들과 대화하면서 이들에게 의회주의 “압력”을 가했다. 그리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민주주의 세력에게도 유사한 압력을 가했다.

해외에 망명 중이던 당 중앙위원들과 이들의 기관지 [사회민주주의자]는 당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왔다. 지노비에프를 조수로 둔 레닌은 지도부의 임무를 전부 수행했다. 레닌의 부인 크룹스카야는 가장 책임 있는 비서였다. 실제 활동에서 이 소규모 중앙은 수십 명에 이르는 볼셰비키 망명자들의 지지에 의존했다. 전쟁 중에 연합국 헌병들이 이들을 점점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국내와 단절된 이들의 고립은 더욱 참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동안 초조하게 기다렸던 혁명이 터지자 이들은 깜짝 놀랐다. 혁명적 국제주의 망명자들을 꼼꼼하게 관리하고 있던 영국은 단호하게 러시아 행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레닌은 취리히의 우리 속에 갇힌 채 분노하며 탈출 방도를 모색했다. 논의가 된 백 가지의 탈출 계획 중 하나는 맹인이자 벙어리인 어느 스칸디나비아인의 여권으로 여행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레닌은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자신의 노선이 전파될 경로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3월 6일 그는 스톡홀름을 통해 뻬쩨르부르그로 전보를 쳤다: “우리의 전술은 다음과 같다: 임시정부를 절대로 지지할 수 없다; 특히 케렌스키를 경계해야한다; 노동계급을 무장시키는 것이 혁명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뻬쩨르부르그 시의회의 선거를 즉시 실시할 것을 주장해야한다; 다른 정당들과 화해할 수 없다.” 이 가운데 소비에트 대신 시의회 선거 실시에 대한 주장은 일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곧 없어졌다. 그러나 전보의 짤막하고 기민한 문구로 표현된 다른 정책들은 일반적 방향을 완벽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는 프라우다지에 논문 [먼 곳에서 보낸 편지들]을 보냈다. 이 글은 외국에서 얻은 정보의 파편들에 기초했지만 혁명 상황을 완벽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외국 신문들을 읽은 후 레닌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케렌스키 뿐 아니라 체이제의 직접적 도움을 통해 임시정부는 노동자들을 속이고 있으며 제국주의 전쟁을 조국방어 전쟁으로 위장하고 있다. 스톡홀름의 친구들을 통해 그는 경고로 가득한 편지를 3월 17일 작성했다. “임시정부의 기만에 볼셰비키당이 합세하는 것은 당의 영원한 치욕과 정치적 자살이 될 것이다.... 당내의 사회애국주의자들과는 즉시 관계를 끊을 것이다....” 그는 특정 인물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간청했다: “세계 역사적 책임이 자신의 두 어깨에 있다는 사실을 카메네프는 인식해야한다.” 여기서 카메네프의 이름이 언급되었다. 정치적 원칙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만약 레닌이 실제적인 투쟁의 문제를 염두에 두었다면 스탈린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컸다. 어쨌든 레닌이 연기가 자욱한 유럽을 관통하여 뻬쩨르부르그에 자신의 팽팽한 의지를 전하려고 애쓰고 있을 때 카메네프는 스탈린과 협조하여 사회애국주의로 급격히 선회하고 있었다.

변장, 가짜 구레나룻, 외국 여권, 위조 여권 등 다양한 술수가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되어 하나 하나 폐기되었다. 한편 독일을 통해 러시아로 귀국하자는 아이디어가 더욱 구체화되었다. 이 계획은 애국주의 노선을 품고 있던 인물들을 포함하여 대다수의 망명자들을 두렵게 했다. 마르토프 등 멘세비키들은 레닌의 대담한 계획을 따를 것인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연합국 대사관들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봉인 열차”가 적들의 악랄한 선동에 이용되자 다수의 볼셰비키들도 독일을 통한 귀국을 나중에 후회했다. 레닌은 처음부터 이 계획의 어려운 점들을 알고 있었다. 취리히를 떠나기 직전 크룹스카야는 이렇게 적었다: “물론 애국주의자들은 아우성을 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감수해야한다.” 문제는 간단했다: 스위스에 계속 체류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을 통해 귀국할 것인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레닌은 이 문제를 놓고 단 한순간도 주저하지 않았다. 레닌이 귀국한지 한달 만에 마르토프, 악셀로드 등 멘세비키들도 같은 방식으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중에 적대국 영토를 통과하는 특이한 여행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지도자 레닌의 기본 특성인 발상의 대담함과 실천의 대단한 면밀성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위대한 혁명가 속에는 깐깐한 공증인이 한 명 들어앉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다. 사적 소유를 증명하는 공증인이 영원히 필요 없도록 하기 위해 그는 러시아로 귀국하는데 필요한 문서를 작성했다. 혁명 신문의 편집부와 호엔쫄런 왕가 사이에 독특한 국제조약이 체결되었다. 독일을 통과하는 조건들이 대단히 꼼꼼하게 고안되었다. 레닌은 여행 중 완전한 치외법권을 요구했다: 승객의 얼굴, 여권, 짐 등은 절대로 감시 대상이 아니다. 여행 내내 승객 외에는 단 한 명도 기차 안에 출입할 수 없다. (여기서 “봉인” 열차에 대한 전설이 나왔다.) 한편 망명자들은 같은 숫자의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 민간인 포로들을 석방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하는 것에 동의했다.

동시에 여러 외국 혁명가들과 공동선언문이 작성되었다. “혁명의 대의에 헌신하기 위해 귀국하는 러시아 국제주의자들은 정부에 대항해 다른 나라 특히 독일과 오스트리아 노동계급을 선동하는데 도움을 제공할 것이다.” 프랑스의 로리오와 질보, 독일의 파울 레비, 스위스의 플라튼, 스웨덴의 좌익 의원들과 기타 인물들이 이 선언문에 서명했다. 이 조건과 예방조치가 충족되자 3월말 30명의 러시아 망명자들은 스위스를 떠났다. 전쟁 화물 가운데에서도 대단히 폭발성이 강한 화물이 이동하고 있었다!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에서 레닌은 1915년 가을 볼셰비키당의 중앙기관지가 선언한 내용을 이들에게 상기시켰다: 혁명 러시아의 공화국 정부가 전쟁 지속을 선언할 경우 볼셰비키당은 이 정부를 반대할 것이다. 이제 똑같은 상황이 현실화되었다. “우리는 구츠코프-밀류코프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 이 말과 함께 레닌은 혁명 러시아에 들어섰다.

한편 임시정부 장관들은 레닌의 귀국을 경계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나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임시정부의 3월 회기 가운데 정회가 선언되자 우리는 볼셰비키당의 선전이 증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해 긴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 케렌스키는 늘 그렇듯이 히스테리컬한 낄낄 웃음과 함께 이렇게 말했다: ‘잠깐 기다려, 레닌이 오고 있다, 이제 진짜 일이 시작된다!’” 그의 말은 옳았다. 이때가 되어서야 진짜 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보코프의 말에 의하면 장관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독일에게 간청하여 귀국했으니 레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장관들은 통찰력이 대단했다.

레닌과 개인적 친분이 있었던 그의 제자들은 그를 배웅하러 핀란드에 갔다. 청년 해군장교이자 볼셰비키 당원인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차에 타자마자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카메네프를 공격했다: ‘프라우다지의 글들이 왜 그 모양인가? 여러 호를 읽은 후 올바로 비판했는데도 바뀐 것이 없지 않은가.’” 수년간 떨어진 후 조수와 선생 사이의 첫 만남은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비판적 어조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우정어린 회합이었다.

군대의 협력을 얻어 뻬쩨르부르그 볼셰비키 시당 위원회는 레닌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 수천 명의 노동자와 병사들을 동원했다. 어느 우호적인 장갑차 사단이 차량을 전부 동원하여 그를 맞이했다. 시당 위원회는 장갑차로 레닌이 도착할 역에 가기로 결정했다. 도시의 거리에서 아주 유용한 이 괴물 장비를 혁명은 이미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후였다.

핀란드역의 소위 “짜르 응접실”에서 열린 공식 회의는 여러 권으로 출판된 수하노프의 빛이 상당히 바랜 회고록에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레닌은 거의 뛰다시피 ‘짜르 응접실’에 들어갔다. 동그란 모자를 쓴 그의 얼굴은 추위로 약간 얼어있었는데 팔에는 커다란 꽃다발이 안겨 있었다. 방의 한가운데로 서둘러 가다가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장애물을 만난 듯 체이제 앞에서 멈추어 섰다. 여기서 체이제는 이전의 우울한 표정을 버리지 않은 채 ‘환영 연설’을 했다. 도덕 설교가의 정신과 내용 뿐 아니라 목소리까지 꼼꼼하게 유지한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레닌 동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와 혁명 전체의 이름으로 귀하의 귀국을 환영합니다....그러나 현재 혁명적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내외의 모든 공격으로부터 우리 혁명을 방어하는 것입니다....이 임무를 위해 동지가 우리와 함께 하기를 희망합니다.’ 체이제는 연설을 마쳤다. 너무 빨리 끝난 연설에 나는 실망했다. 그러나 레닌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처리할 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는 체이제의 환영 연설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서서 이쪽 저쪽을 찬찬히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일반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짜르 응접실’ 천장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체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큰 꽃다발을 고쳐 잡은 후 집행위원회 대표들을 완전히 외면한 채 그는 이렇게 ‘화답했다’: ‘친애하는 동지, 병사, 수병,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들의 모습을 통해 승리한 러시아 혁명을 맞게되어 반갑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국제 노동계급 군대의 전위대로 맞게 되어 기쁩니다....우리의 동지 카알 리이프크네히트의 외침에 호응하여 인민이 손에 든 무기를 자국의 자본주의 착취자들에게 돌릴 시간이 멀지 않았습니다....여러분이 성취한 러시아 혁명은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세계사회주의혁명 만세!”

수하노프의 묘사는 적절하다. 꽃다발은 레닌의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컸고 엄중한 혁명 사건들의 배경으로 부적절했기 때문에 레닌을 당혹스럽게 했다. 일반적으로 레닌은 꽃다발의 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의 응접실에서 열린 공식적이며 위선적인 교회 일요학교 같은 환영 행사는 그에게 훨씬 더 당혹스러웠음이 틀림없었다. 체이제는 자신의 환영 연설 내용보다는 값이 더 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레닌에 대해 약간 겁을 먹었다. 물론 사람들은 처음부터 이 “종파주의자”를 꾸짖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틀림없이 말해놓았을 것이다. 지도부의 형편없는 수준을 증명한 체이제의 연설을 보완하기 위해 청년 해군장교 하나가 수병들을 대표하여 환영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레닌이 임시정부의 장관이 되기를 희망했다. 이 정도면 연설의 수준이 짐작될 것이다. 2월 혁명은 말이 많고 배 가죽이 축 늘어진 꽤 어리석은 인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사상과 의지의 모든 면에서 사태를 올바로 고치겠다고 굳게 결심하고 귀국한 인물을 이 엉성한 혁명은 이렇게 환영했다. 레닌이 귀국과 함께 느낀 이 최초의 인상들은 상황에 대한 그의 애초의 경각심을 10배나 증폭시켰다. 또한 그에게 억제하기 힘든 저항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소매를 걷어붙이고 당장 투쟁에 나설 수 있었다면 그는 훨씬 더 만족했을 것이다! 체이제가 아니라 병사와 노동자들에게, 조국 방어가 아니라 국제혁명에게, 임시정부가 아니라 리이프크네히트에게 레닌은 호소했다. 이것을 통해 그는 이후 자신이 실현할 정책 전부를 역에서 짤막하게 리허설 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엉성한 혁명은 즉시 그리고 흔쾌히 자기 지도자를 가슴에 품었다. 병사들은 레닌이 장갑차에 올라 탈 것을 요구했다. 그는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서히 드리워지고 있던 밤은 환영 행렬을 아주 인상깊게 만들었다. 다른 장갑차들의 전조등은 희미하게 낮추어졌다. 레닌이 타고 있는 장갑차의 날카로운 전조등 불빛으로 밤은 환하게 밝혀졌다. 이 불빛은 거리의 어둠 속에 서있는 노동자, 병사, 수병들의 흥분된 모습을 비추었다. 이들은 위대한 혁명을 성취했으나 권력을 잡지 못했다. 자신의 연설을 들으려는 청중을 위해 레닌이 연설을 반복하거나 그 내용을 바꿀 때마다 밴드는 연주를 멈추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환영 행진은 대단히 훌륭했으며 어느 정도 상징적이었다.” 

볼셰비키당 본부가 위치한 크쉐신스카야 궁전은 어느 궁중 무용수의 저택이었는데 윤이 나는 비단으로 내부가 장식된 화려한 건물이었다. 당 본부로 어울리지 않는 궁전의 화려함에 대해 레닌은 언제나 생기 있는 농담을 했다. 이제 여기에서 환영식이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에게 너무 과중했다. 초조한 행인이 문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레닌은 찬사조의 환영 연설들을 계속 참고 들어야 했다. 자신의 귀국을 사람들이 진정하게 기뻐하고 있다고 느꼈으나 그는 환영 연설들의 수다를 계속 듣자니 괴로웠다. 공식 환영 연설의 어조 자체가 그에게는 모방과 허세로 느껴졌다. 이것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에게서 빌려온 표현으로 한마디로 연설조에다 감상적이며 거짓이었다. 혁명은 자신의 문제와 임무를 규정하기도 전에 벌써 피곤한 의전 절차를 만들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성격 좋은 미소를 마치 꾸짖듯이 지었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가끔 보면서 하품을 숨기지 않았다. 마지막 환영 연설의 메아리가 사라지기도 전에 이 특이한 손님은 답변 연설을 통해 청중에게 자신의 열정적인 생각들을 마구 퍼부었다. 이것은 거의 심한 꾸지람 같이 들렸다. 당시 속기술은 아직 당에 도입되지 않았다. 아무도 그의 연설을 기록하지 않았다. 모두들 일어나고 있는 일에 너무 깊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연설의 내용은 보존되지 않은 채 청중의 기억에 일반적 인상으로만 남아있다. 그리고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가감되었다. 여기에 황홀감이 덧붙여지고 경악의 감정은 씻겨 없어졌다. 레닌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조차 레닌의 연설은 경악이었다. 한달 동안 계속 입으로 반복되면서 뒤흔들릴 수 없이 영원하다고 생각된 기존의 표현들이 레닌의 연설에 의해 하나 하나 깨어져 나갔다. 핀란드역에서 그의 짧은 연설이 체이제의 머리 위에서 터지자 그는 깜짝 놀랐다. 레닌은 이 연설의 주제를 볼셰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중핵들 앞에서 두 시간 짜리 강연으로 발전시켰다.

아무 당에도 소속되지 않은 사회주의자 수하노프는 손님으로 우연히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성격이 좋은 카메네프에 의해 입장이 허용되었다. 물론 레닌은 이런 행위를 참아 넘기지 않았다. 어쨌든 이 덕분에 반은 적대적이면서도 반은 매혹 당한 이 외부인은 뻬쩨르부르그 볼셰비키들과 레닌의 첫 만남을 자신의 회고록에 담을 수 있었다.

“우연히 참석한 나 같은 이단자 뿐 아니라 충실한 당원 모두에게 그의 천둥 같은 연설은 큰 놀라움이었다. 이 연설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환영식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이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자연의 힘과 귀신이 땅위로 튀어나와 장벽, 개인적 난관, 개인적 고려 등을 무시한 채 크쉐신스카야 궁전의 연회장과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그의 추종자들 머리 위를 휘감는 것 같았다.”

수하노프가 표현한 개인적 고려와 난관은 막심 고리키와 차를 나누면서 동요하던 [노비 지즌](역자 주: “새로운 삶”이란 의미의 이 잡지는 멘세비키 국제주의자들이 2월 혁명 후 발간했다. 이 잡지는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정권에 반대하여 강제 폐간 당했다.)의 편집부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그러나 레닌의 고려는 더 깊었다. 그 연회장을 휘감은 것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힘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이었다. 후자는 전자를 당혹스러워하기 보다는 이해하고 통제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이것은 신경쓸 것이 없다. 당시 분위기를 수하노프는 잘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하노프에 의하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과 여기로 오면서 나는 저들이 우리를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곧바로 가둘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결국 일어날 것이며 이 일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예상을 잊어버리지 맙시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혁명의 발전은 민주주의의 강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전망은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 곧장 갇히는 것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이것은 불길한 농담인 것 같았다. 그러나 레닌도 혁명도 농담을 하고 있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불평한다: “그는 농업개혁을 위한 입법을 포함해 소비에트의 정책들을 무시했다. 그는 정부를 전혀 무시한 채 농민들이 조직적으로 토지를 점거할 것을 촉구했다.”

“‘의회 공화국은 필요 없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도 필요 없다.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 외에는 어떤 정부도 필요 없다.’”

이때 레닌은 자신을 소비에트 다수파와 확연히 단절시키면서 후자를 적으로 분류했다. “이것만해도 그의 연설을 듣는 사람들은 현기증을 느꼈다!”             

수하노프는 분노하면서 레닌의 사상을 계속 전달한다: “오직 짐머발트 좌파만이 노동계급의 이해와 세계 혁명을 옹호한다. 나머지는 모두 낡은 기회주의자들이며 말은 근사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주의와 노동자 대중의 대의를 배신하고 있다.”

라스콜니코프는 수하노프의 보고를 이렇게 보완한다: “당 지도그룹과 개개 동지들이 그의 귀국 이전에 표방한 전술을 그는 단호히 공격했다. 당의 중책을 맡고 있는 동지들은 모두 참석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도 일리치의 말은 계시 그 자체였다. 레닌은 어제의 전술과 오늘의 전술 사이에 루비콘강(역자 주: 루비콘강은 건널 수 없는 선을 의미한다. 케사르는 루비콘강을 건너면서 철회할 수 없는 결단을 내렸다.)을 만들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되겠지만 루비콘강이 금방 생긴 것은 아니었다.

그의 연설에 대한 토론은 없었다. 모두들 너무 놀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각자에게 필요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자신의 보고를 마친다: “나는 거리로 나왔다. 이날 밤 나는 마치 홍두깨를 맞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명확했다. 레닌 옆에는 당원이 아닌 나 같은 사람은 있을 자리가 없었다!”

정말 그랬다!

다음날 레닌은 자신의 견해를 짤막한 글로 정리하여 당에 제시했다. [4월 4일 테제]라는 제목을 단 이 글은 혁명의 가장 중요한 문서 가운데 하나이다. 테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한 사상을 단순한 말로 표현했다: 2월 혁명으로 수립된 공화국은 우리의 공화국이 아니다; 이 정부가 수행하고 있는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다. 볼셰비키당의 임무는 이 제국주의 정부를 타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정당들은 인민 대중의 신뢰를 누리고 있다. 우리는 소수이다. 이 상황에서 정부를 외부에서 폭력으로 전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중이 화해주의자들과 조국방어주의자들을 지지하지 않도록 대중을 교육시켜야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대중에게 우리의 노선을 설명해야한다.” 현 정세에 의해 요구되는 이 정책은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여 부르주아 체제의 한계를 넘어설 것이다. 우리는 자본가들과 절대적으로 단절하여 이들의 비밀조약들을 공개할 것이며 전세계 노동자들이 자본가 계급의 족쇄를 깨고 전쟁을 끝낼 것을 촉구해야한다. 우리는 국제혁명을 시작하고 있다. 국제혁명이 성공할 때에만 우리의 노력은 결실을 맺을 것이며 사회주의체제로의 이행이 보장될 것이다.    

이 테제는 레닌의 이름으로만 발표되었다. 당의 중앙기구들은 이 테제를 놀라움으로만 완화된 적대감으로 대했다. 레닌과 함께 이 문서에 서명한 조직, 그룹, 개인은 하나도 없었다. 10년간 해외에서 레닌과 함께 활동하며 그의 직접적 영향을 일상적으로 받았으며 레닌과 함께 귀국한 지노비에프조차 말없이 물러섰다. 물론 이에 대해 레닌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수제자를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메네프가 대중 선전가였다면 지노비에프는 선동가였다. 레닌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선동가에 불과했다.” 우선 그는 지도자가 되기에는 책임감이 부족했다. 더욱이 내적 규율이 없는 그의 사고는 이론 작업을 수행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선동가의 형태 없는 직관으로 해소된다. 대단히 예민한 후각 덕분에 그는 분위기를 파악한 후 어떤 표현이 그에게 필요한 지를 금방 알아낼 수 있다. 그리고 이 표현은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자이자 웅변가이면서도 그는 기본적으로 선동가이다. 다만 그는 글을 통해서는 자신의 약점을 연설을 통해서는 자신의 강점을 드러낸다. 선동의 순간에 그는 어느 볼셰비키보다 훨씬 대담하고 거침이 없다. 그러나 혁명적 주도성은 카메네프보다도 부족하다. 지노비에프는 모든 참주선동가들이 그렇듯이 우유부단하다. 분파투쟁의 단계에서 대중의 직접 투쟁의 단계로 넘어가면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스승인 레닌과 결별했다.

볼셰비키당이 직면한 4월의 위기가 일시적이며 거의 우연적인 혼란에 불과했다고 증명하려는 시도들이 최근 양산되어왔다. 그러나 이 시도들은 실제 사실과 대면하자마자 산산이 깨져나간다.(저자 주: 포크로프스키 교수가 편집한 거대한 [10월 혁명사 논문집]<1927년, 모스크바, 제 2권> 가운데 바이예프스키라는 인물은 “4월의 혼란”에 대해 변명조로 논문을 썼다. 그러나 이 논문은 사실들과 문서들을 마구잡이로 취급하여 유치하게 무기력하지 않으면 냉소적인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3월 볼셰비키당의 활동 내용은 이미 언급이 되었다. 이에 비추어 보면 레닌과 뻬쩨르부르그 당지도부 사이의 모순은 가능한 한 가장 깊었다. 이 모순은 레닌의 귀국 순간에 가장 치열하게 드러났다. 82개 소비에트의 대표들이 모인 전국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임시정부의 주권에 대한 결의안을 제출했으며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이것을 지지했다. 이 협의회와 동시에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볼셰비키당 전국협의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 협의회의 말미에 레닌이 귀국했는데 이 협의회는 전쟁으로 인한 당과 당 상층부의 분위기와 견해를 파악하는데 대단히 흥미로운 자료를 제공한다. 협의회에 보고된 글들은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들을 읽어보면 빈번히 경악하게된다: 이 대표들로 구성된 당이 겨우 7개월만에 철권을 휘둘러 정권을 잡다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인가? 당협의회가 개최된 때는 봉기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난 시점이었다. 한 달의 시간은 전쟁이나 혁명에게는 긴 시간이다. 그러나 혁명의 가장 기본 문제들에 대해서도 당의 견해는 확정되지 않았다. 보이틴스키, 엘리아바 등 극단적 애국주의자들이 자칭 국제주의자들과 나란히 협의회에 참석했다. 물론 멘세비키당에 비해서야 훨씬 적지만 공공연히 애국주의를 주창하는 당원의 비율은 상당히 높았다. 협의회는 애국주의 당원들과 결별할 것인지 또는 멘세비키당의 애국주의자들과 연합할 것인지를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협의회 막간에 볼셰비키들과 소비에트 협의회 대표들인 멘세비키들이 전쟁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합동회의를 열었다. 가장 열렬한 애국주의자인 멘세비키 리이버는 이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볼셰비키다 멘세비키다 하는 낡은 구분은 없애고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대해서만 논의하자.” 그러나 볼셰비키인 보이틴스키는 서둘러 그의 말 하나 하나에 자신의 서명을 첨부하겠다고 선언했다. 볼셰비키들, 멘세비키들, 애국주의자들, 국제주의자들 모두는 전쟁에 대한 공동 노선을 찾고 있었다.

스탈린은 임시정부와 당의 관계에 대해 보고했는데 이것은 당 협의회의 노선을 가장 적절히 표현했다. 당 협의회의 보고들과 마찬가지로 아직 출판되지 않은 그의 연설의 핵심을 여기에 소개할 필요가 있다. “권력은 현재 두 기관에 의해 분점 되어 왔다. 이 둘 사이에는 논의와 투쟁이 오고가고 있는데 당연히 그래야 한다. 역할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소비에트는 혁명적 변화의 주도권을 쥐어왔다. 소비에트는 봉기를 수행한 인민의 혁명 지도자이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통제하는 기관이다. 사실 임시정부는 혁명 인민의 성과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해왔다. 소비에트는 세력을 동원하고 통제한다. 임시정부는 망설이고 혼란 되어 있으나 인민의 성과를 지키는 요새의 역할을 맡아왔다. 인민은 이미 이 성과를 차지했다. 이 상황은 약점과 장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사건들을 강제하여 부르주아 계층을 배척시키는 것은 지금 이익이 되지 않는다. 어차피 미래에 부르주아 계급은 우리로부터 불가피하게 이탈할 것이다.”

이 보고자는 계급 구분을 초월하여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과의 관계를 단순히 분업관계로 묘사하고 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혁명을 완수하고 구츠코프와 밀류코프는 이것을 “요새처럼 지킨다.” 여기에서 우리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러시아 혁명의 모델로 잘못 설정한 멘세비키들의 전통 노선을 목격한다. 역사를 감독하는 이 입장은 멘세비키 지도자들의 특징에 딱 들어맞는다. 여러 계급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이들의 성과를 후원자처럼 비판한다. 혁명으로부터 부르주아 계급을 이탈시키는 것이 불리하다는 사고는 언제나 멘세비키 정책의 지도원리였다. 이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 자유주의 동맹자들을 겁주지 않기 위해 대중운동을 무디게 하고 약화시켜야한다.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에 대한 스탈린의 결론은 화해주의자들의 애매한 입장과 완전히 일치한다: “임시정부가 혁명의 단계들을 방어하는 한 우리는 임시정부를 지지해야한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반혁명 정책을 취하면 우리는 지지를 철회해야한다.”

스탈린의 보고는 3월 29일에 있었다. 이 다음날 소비에트 협의회의 공식 대변인인 무당파 사민주의자 스테클로프는 임시정부에 대한 똑같은 조건적 지지 노선을 옹호했다. 그리고 그의 열정적 웅변은 혁명을 “요새처럼 방어하는 자들”의 활동 모습을 너무도 확연하게 제시했다. 사회 개혁 반대, 왕정에 대한 호의, 반혁명 세력의 보호, 병합에 대한 애착 등등. 이 결과 당협의회는 경악하며 임시정부 지지 노선에 반발했다. 볼셰비키 우파인 노긴은 이렇게 선언했다: “스테클로프의 연설은 새로운 생각을 도입시켰다: 지금 우리는 지지가 아니라 저항을 얘기해야한다. 이 점은 명확하다.” 스크리프닉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스테클로프의 연설 이래로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따라서 더 이상 임시정부를 지지할 수 없다. 인민과 혁명에 대항해 임시정부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임시정부와 소비에트에 대한 이상주의적 “분업”을 주장했던 스탈린은 이제 임시정부 지지 노선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짧고 피상적인 논의가 진행되었다: “조건부로”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인가 아니면 임시정부의 혁명활동만을 지지할 것인가? 사라토프의 대표인 바실리예프는 올바르게 선언했다: “임시정부에 대해 우리는 모두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크레스틴스키는 상황을 더욱 명확하게 표현했다: “실천상 스탈린과 보이틴스키 사이에는 이견이 없다.” 비록 보이틴스키가 협의회 직후 멘세비키당으로 넘어갔지만 크레스틴스키의 견해는 별로 틀리지 않았다.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공개적 지지를 철회했으나 지지 노선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이 문제를 원칙에 입각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유일한 인물은 크라시코프였다. 그는 몇 년간 당을 떠나있었으나 삶의 경험에 짓눌려 당에 복귀하려는 고참 볼셰비키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는 핵심을 부여잡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비꼬는 투로 질문했다: 이것이 막 우리가 시작하려는 노동계급 독재인가? 그러나 당협의회는 그의 빈정거림을 무시했다. 동시에 이것을 관심 밖의 문제로 치부해버렸다. 협의회가 채택한 결의문은 혁명적 민주주의 세력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구 체제의 완전한 청산을 위해 대단히 열정적으로 투쟁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하라. 즉 이 결의문으로 볼셰비키당은 부르주아 계급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다음날 볼셰비키당 협의회는 볼셰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통합에 대한 체레텔리의 제안을 심의했다. 스탈린은 이 제안에 전적으로 찬성했다: “우리는 통합을 성사시켜야 한다. 통합의 기초로서 우리의 제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짐머발트-키엔탈 반전주의에 기초해서 통합이 가능하다.” 논조가 너무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카메네프와 스탈린에 의해 프라우다지 편집부에서 쫓겨난 몰로토프는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체레텔리는 잡다한 분자들을 통합시키려고 한다; 그도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로 자처한다; 이를 기초로 당을 통합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기 입장을 고수했다: “앞서 나가 이견을 가로막을 필요는 없다. 이견이 없다면 당 생활은 존재할 수 없다. 당내의 사소한 이견들은 때가 되면 해소될 것이다.” 전쟁 기간 내내 레닌이 사회애국주의와 이것의 평화주의 위장노선에 대항해 수행한 투쟁은 모두 손쉽게 한쪽으로 밀려났다. 1916년 9월 레닌은 슐리아프니코프를 통해 특별히 강조하는 내용의 편지를 뻬쩨르부르그 당 중앙에 보냈다: “화해주의와의 통합은 러시아 노동자당에게 최악의 사태가 될 것이다. 이것은 백치와 같은 어리석은 짓일 뿐 아니라 당을 파멸시킬 것이다....당 통합과 관련된 속임수를 이해하고 러시아의 형제들(체이제 일당)과 분열해야할 필요성을 인식하는 분자들에게만 의존해야한다.” 이 경고는 당시 제대로 이해되지 못했다. 소비에트 다수파의 지도자 체레텔리와의 이견은 스탈린에게 사소한 이견으로 보였다. 이것은 같은 당 안에서 “때를 기다리면 해소”될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은 당시 스탈린이 가지고 있던 견해를 평가하는 가장 좋은 기준이다.

4월 4일 레닌이 당 협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테제”를 전개하는 그의 연설은 혼란에 빠진 학생이 흑판에 쓴 것을 선생이 축축한 스폰지로 지우는 것처럼 협의회의 기존 작업을 무로 돌렸다.                          

레닌은 물었다: “왜 여러분은 권력을 잡지 않았는가?” 얼마 전에 있었던 소비에트 협의회에서 스테클로프는 권력을 잡지 않은 이유를 혼란스럽게 설명했었다: 혁명의 성격은 부르주아적이다; 이것은 첫 단계이다; 그리고 전쟁 중이지 않은가 등등. 레닌은 말했다: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이다. 노동계급이 충분히 의식이 상승하지 않았으며 충분히 조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우리는 인정해야한다. 물리력은 노동계급에게 있으나 부르주아 계급은 의식과 준비정도에서 앞서 있다. 이것은 끔찍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인민에게 솔직히 말해야한다: 우리가 조직과 의식에서 준비가 덜 되었으므로 권력을 잡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항복하는 자들은 사이비 객관주의의 뒤로 숨는다. 그러나 레닌은 문제 전체를 주관적 차원으로 이동시켰다. 노동계급은 2월에 권력을 잡지 않았다. 볼셰비키당이 자신의 객관적 임무를 수행할 수준에 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인민 대중을 정치적으로 독차지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날 변호사 크라시코프는 이렇게 도전적으로 말했었다: “노동계급 독재를 실현할 때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를 그렇게 제기해야한다.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는 권력을 장악할 물리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때 협의회 의장은 그의 발언권을 박탈했다. 실제적 문제가 논의 중에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유일한 실제적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계급 독재를 준비하는 문제가 일정에 올랐다. 이것이 레닌의 생각이었다. 그는 테제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의 현 정세는 노동계급의 불충분한 의식과 조직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긴 혁명의 첫 단계에서 노동계급과 빈농에게 권력을 부여해야하는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이것이 현 정세의 특수성이다.” 프라우다지의 인도에 따라 당 협의회는 혁명의 임무를 제헌의회를 통해 실현될 민주 개혁으로 제한시켜 놓았었다. 이에 대항해 레닌은 선언했다: “우리의 삶과 혁명은 제헌의회를 무대 뒤로 밀어버릴 것이다. 노동계급 독재는 존재하고 있으나 어떻게 이것을 실현할 지 아무도 모르고 있을 뿐이다.”

협의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은 눈길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들은 서로 속삭였다: 일리치는 해외에 너무 오래 있었기 때문에 사태를 제대로 파악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사이의 기발한 분업을 선언한 스탈린의 연설은 영원히 이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스탈린은 침묵을 지켰다. 지금부터 그는 꽤 오랫동안 침묵을 지켜야만할 것이다. 카메네프 혼자서 기존 노선을 방어하게 될 것이다.     

레닌은 제네바에서 편지를 통해 이미 경고한 바 있었다: 전쟁 문제, 국수주의, 부르주아 계급과의 타협 등에서 양보를 하는 어떤 자와도 결별할 준비가 되어있다. 이제 당의 지도 그룹과 대면한 그는 같은 선상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직접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애매 모호함과 어정쩡함의 살아있는 실례가 필요할 때에 그는 당원이 아닌 인물들 또는 스테클로프나 체이제를 지적했다. 이것이 레닌의 관례였다: 너무 일찍 인물의 입장을 규정하지 않는다; 신중한 사람은 제때에 전투에서 퇴각할 시간을 남에게 준다; 이를 통해 미래의 공공연한 적을 만들지 않는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2월 혁명 후 전쟁을 통해 병사와 노동자들이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혁명 이전이나 이후나 병사와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징집 노예로 전쟁에 참여한다고 생각한다. 적들의 범위를 좁히면서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심지어 볼셰비키들도 임시정부를 신뢰한다. 혁명이 연기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주의의 사망을 의미한다....이것이 여러분의 입장이라면 우리는 각자의 길을 간다. 나는 차라리 소수로 남겠다.” 이것은 단순히 웅변조의 위협이 아니었다. 끝까지 논리를 전개시킨 명확한 혁명노선이었다.

카메네프나 스탈린의 이름은 직접 입에 올리지 않았으나 레닌은 신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라우다지는 정부가 병합을 포기하라고 요구한다. 자본가 정부에게 병합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 여기서 억제된 분노가 높은 소리로 터져 나온다. 그러나 그는 즉시 자신을 통제한다: 그는 필요한 것보다 더 적게 말하지도 않지만 더 많이 말하지도 않는다. 지나가는 김에 그는 혁명 정치인의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 규칙을 말한다: “대중이 영토 병합을 원치 않는다고 말하면 나는 이들을 믿는다. 그러나 구츠코프와 르보프가 이렇게 말한다면 이들은 사기꾼이다! 노동자가 조국 방어를 원한다고 말하면 그는 피억압 인민의 본능으로 말한다.” 사물의 이름을 올바로 말하는 원칙은 삶 자체만큼 단순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제때에 이름을 올바로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세계 인민에게 보내는” 소비에트의 호소문이 발표되자 자유주의 신문인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연설)는 평화주의가 연합국의 공통노선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좀더 명확하고 짤막하게 자신의 입장을 표현했다: “거친 폭력으로부터 가장 섬세한 속임수로 급격히 전환하는 것이 요즘 러시아의 특성이다.”

이 선언문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적었다: “이 호소문이 (서구의) 광범위한 대중에게 도달하면 수십만 노동자들이 그 동안 잊혀졌던 구호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를 기억할 것이다.”

이에 레닌은 이렇게 반대한다: “소비에트의 호소문에는 계급의식으로 충만한 말은 하나도 없다. 말만 무성할 뿐 알맹이가 없다.” 자생 짐머발트 반전주의자들의 자부심이 깃든 이 문서는 레닌이 보기에는 “가장 섬세한 속임수”를 구사하는 무기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전까지 프라우다지는 짐머발트 좌파를 한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인터내셔널을 말할 때에도 어느 인터내셔널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레닌은 이것을 “프라우다지의 카우츠키주의”라고 불렀다. 그는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짐머발트와 키엔탈에서 중앙파가 대세를 장악했다....우리는 좌파를 건설하여 중앙파와 결별했다....세계 모든 나라에 짐머발트 좌파는 존재한다. 사회주의가 전세계에서 분열했다는 것을 대중은 인식해야한다....”

이 말이 있기 3일 전에 스탈린은 같은 협의회에서 짐머발트-키엔탈에 기초하여 즉 카우츠키주의에 기초하여 시간을 두고 체레텔리와 이견을 해소할 용의를 천명했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에 당 통합 움직임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조국방어주의자들과 당을 통합하는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다. 차라리 리이프크네히트의 말처럼 110대 1로 홀로 서는 것이 나을 것이다.”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인물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채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라고 기존 노선을 비난한 것은 단순히 강한 언사가 아니었다. 이것은 사회애국주의자들에게 손가락이라도 내밀며 연대하려는 볼셰비키들에 대한 레닌의 태도를 완벽히 표현했다. 멘세비키들과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 스탈린에 대해 레닌은 이들과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을 공유하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당의 이름을 공산당으로 바꿀 것을 개인적으로 제안한다.” “개인적으로”라는 말은 당 협의회의 어느 누구도 제 2 인터내셔널과 궁극적으로 단절하는 상징적 제스처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분들은 과거의 기억으로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레닌은 당혹감과 놀라움과 약간의 분노를 드러낸 대의원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더러운 셔츠를 벗고 새로운 셔츠를 갈아입을” 때가 왔다. 다시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철저히 썩어빠진 낡은 말에 연연하지 말아야한다. 새로운 당을 건설할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한다.... 그러면 피억압 대중 모두가 여러분의 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시작하지 않은 임무의 거대함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대오 내의 지적 혼란 앞에서 그리고 회의, 환영식, 치레에 불과한 결의문 등으로 어리석게 낭비한 귀중한 시간을 생각하며 레닌은 외친다: “환영식과 결의문은 치워버려라! 이제 진짜 우리의 임무를 시작할 시간이다. 실천적인 일을 진지하게 시작해야한다!”

이로부터 한 시간 후 레닌은 미리 약속된 볼셰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합동회의에서 그의 연설을 반복해야했다. 그의 연설은 회의 참석자 다수에게 웃음거리와 정신 착란의 중간처럼 들렸다. 그의 연설을 봐주는 듯한 자들도 어깨를 들썩거렸다: 이 사람은 틀림없이 달나라에 갔다왔다; 10년간 해외에 있다가 핀란드역의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노동계급의 권력장악을 설교하다니 확실히 돌았군. 애국주의자들 가운데 성질이 좀더 못된 자들은 봉인 열차를 언급했다. 레닌의 연설이 그의 적들을 아주 기쁘게 했다고 스탄케비치는 증언하고 있다: “저런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은 위험하지 않다. 그가 귀국한 것은 잘된 일이다. 이제 그의 권위는 사라졌다....그는 자신의 말을 곧 철회할 것이다.”

레닌의 연설은 혁명의 전망을 대담하게 파악했으며 오랫동안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과 결별하려는 굽히지 않는 결의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이 혁명의 진전에 발맞추어 나가지 못할 것에 대비해서 그의 연설은 대단한 현실감각과 대중의 정서에 대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정확성을 보여주었다. 한마디로 그의 연설은 전체가 한치의 기울어짐도 없이 균형이 잡혀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의 연설은 민주주의자들에게 황당한 수박 겉 핥기로 보였다.

볼셰비키당은 소비에트 내에서 아주 극소수인데 레닌은 권력을 잡을 꿈을 꾸고 있다니 이것이 순전한 모험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러나 레닌의 연설에는 모험주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광범위한 대중이 가지고 있는 “정직한” 조국방어 정서에 한순간도 눈을 감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대중의 정서 속에 함몰되거나 이들의 등뒤에서 음모적으로 활동할 생각이 없었다. “우리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의 의식에 기초하여 활동을 전개해야한다. 소수로 남아 있는 것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렇게 할 것이다. 당분간 지도적 위치를 포기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소수로 남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그는 미래에 그를 반대하고 비난할 자들에 정면 도전을 했다. 마치 리이프크네히트의 110대 1과 같이 소수로 남아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심지어는 단 한 명의 소수가 되더라도 여기서 출발해야한다. 이것이 그의 연설의 주제였다.

“진정한 정부는 노동자 소비에트이다....소비에트에서 우리 당은 소수이다....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다수의 전술적 오류를 인내심을 가지고 끈질기게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소수로 남아있는 한 우리는 속임수로부터 대중을 구출하기 위해 비판을 수행할 것이다. 대중이 우리의 말을 그대로 믿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돌팔이 의사가 아니다. 대중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오류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영원히는 아니지만 당분간 소수로 남아있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우리 당이 승리할 때가 올 것이다. “우리 노선의 올바름은 증명될 것이다....피억압 인민 모두는 우리를 지지할 것이다. 전쟁이 이들을 우리 쪽으로 밀칠 것이다. 이들에게 다른 탈출구는 없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볼셰비키당과 멘세비키당의 합동회의에서 레닌은 조직 분열의 살아있는 화신이었다....멘세비키 지도자인 보그다노프는 연단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가까운 곳에 앉아있었다. 그는 레닌의 연설을 가로막고 말했다: ‘저것은 미친 자의 헛소리이다....저런 주접에 박수를 보내다니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이렇게 말한 후 그는 분노와 경멸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청중에게 고함을 질렀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 치욕스러운 사건이다!’”

한때 볼셰비키당 중앙위원이었던 골든베르크는 이때 당을 나가있었다. 그는 레닌의 테제를 이렇게 격하시켰다: “수년간 러시아 혁명에서 바쿠닌의 자리는 비어있었다. 이제 레닌이 이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는 말한다: “이때 레닌의 강령은 분노라기보다는 경멸의 대상이었다. 모두에게 그의 노선은 너무 황당하고 미친 것처럼 보였다.”

같은 날 저녁 접촉위원회의 복도에서 두 사회주의자가 밀류코프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대화는 레닌에 대한 것이었다. 스코벨레프는 레닌을 “운동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명을 다한” 인물로 평가했다. 수하노프도 이에 동의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레닌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그는 여기 있는 나의 친구 밀류코프에게도 더 이상 위험하지 않다.”

그러나 이 대화에서 역할 배분은 레닌이 표현한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볼셰비키주의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빼앗을 마음의 평정을 사회주의자들이 지켜주고 있었다.

레닌이 형편없는 맑스주의자로 선언되었다는 소문은 주러시아 영국대사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영국 대사 부캐넌은 이렇게 적었다: “새로 귀국한 무정부주의자에는 레닌도 끼어있었다. 그는 봉인 열차를 타고 독일을 거쳐 귀국했다. 그는 사회민주주의당 회의에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보였는데 그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았다.”

레닌을 가장 봐주는 척 한 자는 바로 케렌스키였다. 그는 임시정부 장관들과 함께 있다가 레닌을 만나러 가보아야겠다고 갑자기 말했다. 그리고 주위의 놀라운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글쎄, 그는 완전히 고립되어 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모든 것을 그의 광기의 안경을 통해 보고 있다. 주위의 사태를 그가 이해하도록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것은 나보코프의 증언이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레닌을 교정할 시간을 결코 내지 못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그의 반대자들과 적들에게 놀라운 분노만을 안기지 않았다. 몇몇 고참 볼셰비키들은 그의 노선에 반발하여 멘세비키 진영으로 넘어가거나 고리키의 신문을 중심으로 모여있던 중간 그룹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이 탈당사태는 심각한 정치적 파장을 가져오지는 않았다.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레닌의 노선이 볼셰비키당 지도그룹에게 남긴 인상이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귀국한 후 며칠동안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의식적인 당내 동지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는 그의 주장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심지어 그의 당 동지들조차 당혹감에 사로잡혀 그를 외면했다.” 이때 수하노프와 젠지노프는 볼셰비키당 지도자들을 매일 집행위원회에서 만나고 있었으며 이들이 했던 말을 직접 듣고 있었다.

볼셰비키 당원들 사이에서도 이와 같은 증언은 얼마든지 있다. 2월 혁명 당시를 우연히 회상할 때 고참 볼셰비키 다수와 마찬가지로 치콘 역시 가능하면 정도를 낮추어 이렇게 적었다: “레닌의 테제가 나오자 당 대오가 약간 동요했다. 많은 동지들은 레닌이 조합주의 편향을 드러내고 있으며 러시아의 정세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고 현 정세를 전혀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등등. 지방의 출중한 볼셰비키였던 레베데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레닌이 귀국했을 때 한 선동은 볼셰비키들에게 완전히 이해되지 못했다. 그는 공상주의자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그가 러시아의 현실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렇다고들 이해했다. 그러나 서서히 그의 노선은 우리들에게 흡수되어 우리의 피와 살이 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시당 위원이었으며 그의 환영식을 조직했던 동지들 가운데 하나였던 잘레쥐스키는 좀더 솔직하게 말한다: “레닌의 테제는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너무도 따뜻하고 인상적인 귀국 환영식 이후 레닌이 완전히 고립되었다고 그는 확실히 확인시키고 있다: “4월 4일 레닌 동지는 우리 대오 내에서도 공개적인 동조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프라우다지의 증거이다. 4월 테제가 발표되고 이에 대한 설명과 상호 이해가 이루어질 시간이 충분히 흐른 4월 8일 프라우다지의 편집자들은 이렇게 표현했다: “레닌 동지의 전반적인 노선은 인정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끝났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또한 이 혁명이 즉시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화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렇게 볼셰비키당 중앙기관지는 공개적으로 노동계급과 그 적들에게 당의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지도자 레닌과 결별을 선언했다. 그것도 볼셰비키당 대오가 오랜 세월 준비해왔던 혁명의 핵심 문제에서 레닌과 결별한 것이었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당의 4월 위기의 깊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사상과 행동의 두 노선은 이때 정면 충돌했다. 이 위기가 극복될 때까지 혁명은 전진할 수 없었다.     

 

제 16장 당의 재무장

4월초에 레닌이 겪은 극심한 정치적 고립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은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으며 볼셰비키당은 어떻게 재무장에 성공했는가?

1905년부터 볼셰비키당은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 구호로 짜르 체제에 저항해왔다. 이 구호와 이 구호의 이론적 기초는 레닌에 의해 제공되었다. 반면 멘세비키 이론가 플레하노프는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잡지 않는 부르주아 혁명은 오류”라고 주장하면서 이에 완강히 저항했다. 멘세비키의 노선에 반대하면서 레닌은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혁명을 지도할 능력을 이미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밀접한 동맹만이 왕정과 지주에 대항하여 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동맹이 승리하면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될 것이다. 이것은 노동계급 독재와 다를 뿐 아니라 날카롭게 대치된다. 왜냐하면 민주주의 독재는 사회주의 체제는 물론 이에 도달하기 위한 이행기 체제도 수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봉건적 관계를 무자비하게 청산하는 임무를 띠고 있을 뿐이다. 민주주의 혁명의 목표는 세 구호 속에 충분히 포괄되었다: 민주공화국 수립, 대지주의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일. 오랜 민간 우화에 의하면 사람들이 사는 땅을 밑에서 떠받든 것은 고래들이었다. 그래서 이 세 구호는 일상 대화에서 볼셰비키당의 세 마리 고래로 비유되었다. 

그러나 과연 농민은 독자적으로 혁명을 달성하여 왕정과 지주를 청산할 정부를 수립할 수 있는가? 바로 이것이 노동자 농민 민주주의 독재 이론의 맹점이었다. 물론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한 혁명 정부에는 노동자 대표들의 참여가 전제되었다. 그러나 이 참여는 폭이 미리 제한되어 있었다. 농민 혁명의 문제들을 해결할 때 노동계급은 좌파 동맹세력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이 헤게모니를 행사한다는 사고는 널리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이 헤게모니의 실제 의미는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노동계급 정당은 자신의 정치적 무기로 농민을 도와준다; 이들에게 봉건제를 청산할 최상의 수단과 방법들을 제안한다; 이것들을 현실에 적용하는 방법을 농민에게 보여준다. 따라서 노동계급이 농민의 봉기를 이용하고 이들의 지지를 받아 사회주의 체제로 직접 이행하는 자신의 역사적 임무를 일정에 올리는 것은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민주주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는 노동계급 독재와 확연히 구분되었고 이론적으로는 이것과 대치되었다. 1905년 봄부터 볼셰비키당이 교육받아온 것은 바로 이 사상이었다.

그런데 2월 혁명의 실제 과정은 이 익숙한 도식을 무너뜨렸다.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으로 혁명이 성공한 것은 사실이었다. 주로 병사의 군복을 입고 자기 역할을 수행했지만 역시 농민은 농민이었다. 혁명이 평화시에 터졌어도 짜르의 농민 군대는 혁명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이 터져 3백만의 농민이 군인의 모습으로 완전히 탈바꿈했다. 봉기가 승리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은 정세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런 의미에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2월 혁명으로 부르주아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권력은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된 채로 유산계급의 권력을 제한했을 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뒤엉켜버렸다. 혁명 독재라는 가장 집중된 권력 대신 이중권력이라는 뱃가죽이 축 늘어진 무기력한 권력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 내부에서 지배계급들의 허약한 힘은 내부 갈등으로 소모되었다. 어느 누구도 이런 정권이 수립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물론 예측은 사물의 근본 경향을 밝힐 수 있을 뿐 다양한 요인들이 우연히 결합한 예상외의 현상을 밝힐 수는 없다. 나중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혁명을 끝까지 수행하는 방법을 미리 알고 난 뒤에 거대한 혁명을 성취한 자가 과연 있었던가? 이런 지식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가? 확실히 책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 이런 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중의 경험을 통해서만 사태에 부응하는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는 보수적이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특별히 보수적으로 사고할 때가 가끔 있다. 러시아 국내의 볼셰비키당 중핵들은 과거의 도식에 계속 집착하였다. 이 결과 2월 혁명이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권력을 탄생시켰는데도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의 첫 단계라고만 인식했다. 3월말 라이코프는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이름으로 프라우다지에 축하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정치적 자유의 획득”을 목표로 한 “국민 혁명”의 승리를 축하했다. 볼셰비키 주요 인사들은 모두 민주주의 독재 정부가 조만간 수립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다른 생각을 한 볼셰비키가 혹시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그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다.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자신의 역할을 다한 후” 부르주아 의회체제에 앞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가 수립될 것이었다. 이 전망은 완전히 틀린 것으로 드러났다. 2월 혁명이 탄생시킨 권력은 민주주의 독재를 준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런 독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생생히 그리고 자세히 보여주었다. 케렌스키의 경박성과 체이제의 제한된 지능을 통해 화해주의 성향의 민주주의자들이 자유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후 8개월 내내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정부를 유지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사실로 이 점이 증명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 병사들을 탄압하면서 부르주아 정권의 우군이자 옹호자로 투쟁하다가 10월 25일 타도되었다. 이들은 혁명의 거대한 임무를 앞에 놓고 대중의 지지를 무한정 받으면서도 스스로 권력을 포기했다. 이 현상은 정치적 원칙이나 편견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이 차지하는 가망 없는 지위 때문이었다. 이것은 처음부터 명확했다. 나라, 인민, 계급의 근본 문제들이 결정되는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는 이 현상이 특히 부각되었다. 밀류코프에게 권력을 넘기면서 소부르주아들은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이 임무를 달성할 능력이 없습니다.”

농민은 화해주의 성향의 민주주의자들을 어깨에 태운 채 서있었다. 이들은 초보적 형태로 자본주의 사회의 모든 계급들을 자기 속에 포괄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전혀 못한 도시 소부르주아 계급과 함께 농민은 계급의 원형질이었다. 여기서 새로운 계급들이 분화되었으며 지금도 계속 분화되고 있다. 농민은 항상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노동계급을 바라보고 또 하나는 자본가 계급을 바라본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같은 “농민”정당의 중간적 화해적 입장은 정치과정이 비교적 정체하고 있을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혁명기에는 소부르주아들이 노동계급이나 자본가 계급 중 하나를 반드시 선택해야한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처음부터 선택을 해버렸다. 이들은 맹아 상태로 있는 “민주주의 독재”를 파괴했다. 이것이 노동계급 독재의 가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의도와는 반대로 이들은 민주주의 독재를 파괴하면서 노동계급 독재에 길을 열어주었다. 이 두 정당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대하면서 노동계급 독재는 자신의 길을 열었다.

혁명이 전진하려면 낡은 도식이 아니라 새로운 사실들에 기초해야한다. 자기 대표들을 통해 대중은 일부 자기 의지에 반해 그리고 일부 의식하지 못한 채 이중권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이중권력이 평화나 토지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의 경험으로 인식하기 위해 대중은 이 단계를 거쳐야 했다. 대중이 이중권력을 배척할 경우 이것은 곧 사회혁명당/멘세비키당과 결별하는 것을 의미했다. 대신 이중권력을 전부 무너뜨리고 볼셰비키당을 지지하는 것은 곧 노동자 농민 동맹에 기초한 노동계급 독재를 의미했다. 만약 대중이 패배했을 경우 볼셰비키당은 파멸되고 대신 자본가 계급의 군사독재만이 성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간 어떤 경우에도 “민주주의 독재”는 불가능했다. 따라서 볼셰비키당이 민주주의 독재를 추구하려면 과거의 유령을 쫓아가야 했다. 레닌이 당을 새로운 길로 인도하겠다는 불굴의 결심으로 귀국했을 때 볼셰비키당은 과거의 유령을 쫓아가고 있었다.

물론 레닌 자신은 2월 혁명이 시작될 당시까지도 민주주의 독재 노선을 조건적이든 가상적이든 다른 노선으로 대체하기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옳았는가? 그렇지 않다. 2월 혁명 후 당내에 일어난 사태는 당의 재무장을 시도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너무 놀랍게 드러내었다. 더욱이 주어진 상황에서 당의 재무장을 수행할 사람은 레닌뿐이었다. 그는 이 임무에 대한 준비를 이미 마친 상태였다. 그는 전쟁의 불길 속에 자신을  흰빛이 날 정도로 뜨겁게 달구었고 다시 망치질을 했다. 역사의 일반적 전망 자체가 이미 바뀌어 있었다는 것을 그는 인식했다. 전쟁의 충격은 서구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성취될 시간을 급격히 앞당겼다. 레닌은 생각했다: 러시아 혁명은 여전히 민주주의 혁명이지만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자극할 것이다; 그러면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은 러시아의 민주주의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끌고 들어갈 것이다. 취리히를 떠날 때 가지고 있던 레닌의 생각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미 인용된 스위스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레닌의 편지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유럽의 가장 후진적인 농업국이다. 사회주의는 이 나라에서 즉시 수립될 수 없다. 귀족의 손에 엄청나게 광대한 토지가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1905년 혁명의 경험에 기초할 경우 러시아의 농민성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에 거대한 전망을 제시할 것이다. 그리고 이 혁명은 세계사회주의 혁명의 서곡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레닌은 러시아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할 것이라고 이 편지에서 처음 표명했다.   

러시아 혁명을 민주주의 목표로 한정시킨 볼셰비키당의 이전 입장과 4월 4일 테제를 통해 레닌이 당에 처음 제시한 새로운 입장을 연결하는 고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노동계급 독재로 즉시 이행해야 한다는 이 새로운 전망은 완전히 예상 밖이었으며 당의 전통에 모순되었다. 이 때문에 그의 테제는 제대로 이해될 수 없었다. 여기서 기억할 것이 하나 있다. 2월 혁명의 발발 직전까지 그리고 발발 후 당분간 트로츠키주의의 내용은 러시아 영토 안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아니었다. (1924년까지 이 “가능성”을 피력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생각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이 당시 트로츠키주의는 러시아 노동계급이 서구 노동계급보다 먼저 권력을 장악할지도 모르며 이럴 경우 러시아 노동계급은 민주주의 독재의 한계 속에 자신을 가둘 수 없으며 상황에 의해 애초부터 사회주의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레닌의 4월 테제가 트로츠키주의라고 비난받은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고참 볼셰비키들이 레닌의 테제를 반박한 논리는 여러 갈래가 있었다. 가장 주요한 논점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성취되어 종료되었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이러했다: 농업혁명이 아직 완수되지 않았으므로 전체적으로 민주주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따라서 노동계급 독재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사회적 조건으로 보아 일반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시기에 노동계급 독재는 가능하다. 이 논리는 그 자체로는 정당하다. 이미 인용된 글에서 프라우다지의 편집자들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이 바로 이것이었다. 나중에 4월 당 협의회에서 카메네프는 이 논리를 반복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말한 레닌은 틀렸다....봉건적 잔재의 전형인 대토지 장원은 아직 청산되지 않았다....국가는 아직 민주주의 사회로 전환되지 않았다....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자신의 가능성을 모두 소진시켰다고 말하기는 아직 너무 이르다.”

톰스키는 주장했다: “민주주의 독재는 우리의 초석이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권력을 조직해야한다. 이것을 노동계급만의 권력인 꼬뮌과 구별해야한다.”

라이코프는 그의 주장을 재청한다: “거대한 혁명적 임무가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 임무를 성취하더라도 부르주아 체제의 틀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물론 레닌도 이들과 같이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민주주의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이것은 시작도 하기 전에 과거지사가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새로운 계급의 권력만이 혁명을 끝까지 끌고 갈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영향권 즉 자유 부르주아 계급의 간접적 영향권에서 대중을 분리시켜야 가능하다. 노동자 특히 병사들에 대한 이 정당들의 연결 고리는 “조국방어” 또는 “혁명 방어” 노선이었다. 따라서 레닌은 모든 색조의 사회애국주의에 대한 비타협적 투쟁을 요구했다. 나중에 대중을 후진성에서 해방시키려면 우선 후진 대중을 볼셰비키당에서 분리시켜라. 그는 계속 반복했다: “낡은 볼셰비키주의를 버려야한다. 소부르주아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구분을 명확히 해야한다.”                         

피상적으로 보면 오랜 적들이 서로 무기를 교환한 것처럼 보인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노동자와 병사의 다수를 대표했다. 그래서 멘세비키당에 대항하여 볼셰비키당이 언제나 주창했던 노동자 농민의 정치동맹이 실현된 것처럼 보였다. 반면 레닌은 노동계급 전위가 이 동맹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측은 모두 자신의 모습에 충실했을 뿐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멘세비키당은 자신의 임무를 자유 부르주아 지지에 두었다. 이들과 사회혁명당의 동맹은 이 지지를 넓히고 강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했다. 이와 반대로 볼셰비키당의 지도하에 노동자 농민의 동맹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노동계급 전위가 소부르주아 진영과 단절해야했다.

레닌에 반대하는 또 다른 논리는 러시아의 후진성을 들고 나왔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면 사회주의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러시아의 경제와 문화는 사회주의로 이행할 만큼 성숙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선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해야한다. 서구의 사회주의 혁명만이 러시아의 노동계급 독재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 이것은 4월 당 협의회에서 라이코프가 내놓은 주장이었다. 러시아의 문화와 경제가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적절치 못하다는 점은 레닌에게 초보적 전제였다. 그러나 사회는 그리 이성적이 아니어서 사회주의를 위해 경제적 문화적 조건이 성숙한 바로 그 순간에 맞추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지는 않는다. 인류가 이렇게 이성적으로 진화했다면 일반적으로 독재나 혁명은 필요 없을 것이다. 실제로 사회는 철저히 비이성적이며 이것의 정도가 심할수록 발전도 그만큼 지연된다. 러시아 같은 후진국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부르주아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기 전에 이미 쇠퇴했다. 그리고 이 계급 대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전국 지도부는 노동계급뿐이었다. 이것이 바로 비(非)이성의 표현이었다. 러시아의 경제적 후진성은 노동계급의 임무를 면제시키는 대신 임무 수행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회주의가 선진공업국에서 등장해야한다고 계속 반복하는 라이코프에게 레닌은 단순하면서도 충분한 해답을 내놓았다: “누가 시작하고 누가 끝낼 지를 미리 말할 수는 없다.”    

1921년에는 당의 관료화가 진행되기 훨씬 전이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당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처럼 자신의 과거를 자유롭게 평가하고 있었다. 이때 고참 볼셰비키 가운데 올민스키라는 인물이 있었다. 당의 발전 단계마다 당 신문 발간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그는 이렇게 질문했다: 2월 혁명 때에는 기회주의를 드러낸 당은 어떻게 급선회하여 10월 혁명의 길을 걸었는가? 너무 오래 “민주주의 독재”에 고착되었기 때문에 3월에 탈선의 길을 걸었다고 그는 올바르게 대답했다. 그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당면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한다....이것은 당원 모두가 의무적으로 인정하는 전제였으며 당의 공식 견해였으며 1917년 2월 혁명 때까지 그리고 이후 잠시 동안 당의 변함없는 구호였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올민스키는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프라우다지의 편집부를 장악하기 이전 올민스키 자신을 포함한 “좌파” 편집부가 3월 7일 프라우다 지에 선언한 내용을 언급할 수도 있었다: “자본의 지배를 타도하기 전에 전제와 봉건제가 먼저 타도되어야 한다.” 이 너무 짧은 목표 때문에 당은 3월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포로가 되었다. 올민스키는 또 이렇게 묻는다: “거의 20년간의 당이 견지해온 철칙이 어떻게 지도자와 평 당원들에 의해 급히 기각되었는가?”

수하노프는 볼셰비키당의 적으로서 문제를 다르게 제기한다. “어떻게 레닌은 볼셰비키들을 제압했는가?” 레닌은 당내에서 완전히 그것도 대단히 신속하게 승리했다. 볼셰비키당의 개인 독재에 대해 상당히 빈정대면서 당의 적들은 이 사실을 붙잡고 늘어졌다. 수하노프는 자기가 던질 질문을 전적으로 영웅적 정신에 입각해 대답한다: “천재 레닌은 역사상 출중한 당 지도자였다. 이것은 나의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 될 수 있다. 또 하나의 대답은 레닌 이외에 당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레닌이 없는 위대한 장군 몇 명은 태양이 없는 거대한 행성들과 같이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당시 볼셰비키당에 소속되지 않은 트로츠키는 제외시킨다).” 이 흥미로운 주장은 레닌의 영향력을 원래 그가 가지고 있던 영향력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것은 잠을 오게 하는 아편의 능력을 그것의 최면 효과로 설명하는 것과 같이 설득력이 없다.

당에 대한 레닌의 영향력은 의심의 여지없이 대단했다. 그러나 결코 무한하지는 않았다. 10월 혁명이 성공한 후 당이 세계 역사적 사건들의 기준에 의해 그 위력이 입증되자 레닌의 권위는 대단히 상승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의 노선에 대한 도전은 계속되었다. 따라서 당의 지도 그룹 전부가 레닌과 다른 입장을 채택한 1917년 4월에 이미 그의 권위가 막강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올민스키는 수하노프의 질문에 대해 거의 정답을 말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노선을 표방했지만 당의 실제 정책은 권력 장악을 위해 오랫동안 노동계급을 지도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또는 최소한 우리 가운데 다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노동계급 혁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2월 혁명을 준비한다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10월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대단히 소중한 일반화이며 동시에 흠잡을 데가 없는 목격자의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볼셰비키당을 이론적으로 교육하는 과정에는 모순이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애매한 정식으로 표현되었다. 당 협의회에서 레닌이 행한 보고 내용에 대해 어느 여성 대의원은 올민스키의 생각을 좀더 단순하게 표현했다: “볼셰비키당의 예측은 틀렸으나 전술은 옳았다.”

대단히 역설적인 것처럼 보였던 4월 테제에서 레닌은 낡은 정식에 대항해 당의 살아있는 전통 즉 지배계급에 대한 비타협적 태도 그리고 모든 미적지근한 조치들에 대한 적대감에 호소했다. 반면에 “고참 볼셰비키들”은 아직 생생했지만 이미 시효가 지난 기억에 의존하여 계급투쟁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대항했다. 볼셰비키당은 멘세비키당에 대항한 역사적 투쟁 전체과정에서 강력하게 단련되었다. 이 때문에 당은 레닌을 강력히 지지했다. 여기서 기억해야할 사실들이 있다. 볼셰비키와 멘세비키는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아직도 공유하고 있었다. 문서에 의하면 민주주의 혁명의 실천적 임무는 두 정당에 공통되었다. 그러나 실제 행동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했다. 볼셰비키 노동자 당원들은 2월 혁명 후 즉시 8시간 노동제 투쟁을 주도했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이 요구를 너무 늦게 선언했다. 볼셰비키들은 짜르 관료들의 체포에 앞장섰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과격 행위”에 반대했다. 볼셰비키들은 열정적으로 노동자 민병대를 수립했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부르주아들과 다투기 싫어서 노동자의 무장을 지연시켰다. 아직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않았지만 볼셰비키들은 지도부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비타협적 혁명가들처럼 행동하거나 행동하려고 노력했다. 반면 멘세비키들은 자유주의와의 동맹을 위해 매 순간 자신의 민주주의 강령을 희생시켰다. 당내에서 민주주의 동맹 세력이 전혀 없는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이 때문에 허공에 붕 뜬 존재가 되었다.

4월 당 협의회에서 드러난 레닌과 당 지도부의 갈등은 결코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볼셰비키당의 역사 내내 대단히 결정적인 순간마다 당의 지도자들 모두는 레닌보다 우파였다. 일부 예외적인 경우도 근본적으로는 일반적 경향을 확인시켰을 뿐이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레닌은 세계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정당의 절대적 지도자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의 사상과 의지는 거대한 혁명적 가능성을 가진 러시아와 혁명 시대의 요구에 진정으로 부응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다른 지도자들은 모두 약간씩 그리고 자주 더 큰 결함을 보였다.

혁명이 있기 전 수개월간 또는 수년간 볼셰비키당의 주요 인물 거의 모두는 실천활동에서 멀어져 있었다. 다수가 감옥과 유배지에서 전쟁 첫 몇 개월의 억압적 상황을 기억하면서 홀로 또는 소그룹으로 제 2 인터내셔널의 붕괴 시기를 보냈다. 당 대오와 함께 있을 때에 이들은 자신들을 혁명가로 만든 볼셰비키 혁명 사상에 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립의 상황 속에서는 주위의 여론에 저항하면서 사건들을 맑스주의에 입각하여 독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강인함이 없었다. 전쟁 시작 후 2년 6개월 동안 대중의 정서는 급변했다. 그러나 이것을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포착하지 못했다. 그러나 혁명은 이들을 고립 상태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명성 때문에 이들은 즉시 당의 지도적 위치로 급격히 부상했다. 이들은 공장의 혁명적 노동자들보다는 “찌머발트” 반전 지식인의 정서에 훨씬 더 가까운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고참 볼셰비키들”은 1917년 4월 이 이름을 허세를 부리며 과장했다. 그러나 역사의 시험을 거치지 않은 당의 전통을 방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실패할 운명이었다. 예를 들어 칼리닌은 4월 14일 뻬쩨르부르그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참 볼셰비키 레닌주의자이다. 지금의 특수 상황에 오랜 레닌주의가 쓸모 없다는 것은 결코 증명되지 않았다. 고참 볼셰비키들이 지금 혁명의 장애물이라고 레닌 동지가 선언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당시 레닌은 이처럼 화난 목소리를 많이 들어야 했다. 그러나 당의 전통 노선과 결별했다고 해도 레닌은 “레닌주의자”였다. 그는 볼셰비키 사상의 핵심을 새로운 상황에 적용시키기 위해 낡은 볼셰비키 사상의 껍질을 던져 버린 것뿐이었다.

고참 볼셰비키들에 대한 투쟁에서 레닌은 당의 다른 부위로부터 지지를 획득했다. 이들은 이미 투쟁을 통해 단련이 되어 있었으며 좀더 새로운 피였다. 더욱이 이들은 대중과 좀더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던 부위였다. 이미 앞에서 확인했듯이 2월 혁명에서 볼셰비키 노동자 당원들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봉기에서 승리한 계급이 권력을 잡는 것은 이들에게 너무도 당연했다. 따라서 바로 이들이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노선에 격렬히 저항했다.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심지어 “지도자들”을 당에서 제명시켜야 한다고 위협했다. 지방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졌다. 최대강령주의 심지어는 무정부주의에 오염되었다고 비난받는 좌파 볼셰비키들이 거의 모든 곳에 존재했다. 이 혁명 노동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방어할 수 있는 이론적 내용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렇다할 저항을 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레닌이 명확한 노선을 제창하자마자 이들은 그를 지지했다. 이들은 1912년부터 1914년까지 노동자 투쟁이 상승할 때 단호히 일어선 바로 그 부위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정부는 볼셰비키 의원단을 체포하면서 당에 심각한 타격을 가했다. 이미 이때 레닌은 미래의 혁명활동을 언급하면서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탄생할 계급의식이 투철한 수천의 노동자들을” 당이 교육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두 전선이 가로놓여 있었고 통신수단이 미비했으나 레닌은 이들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전쟁, 감옥, 시베리아, 중노동 등이 이들을 두 번 아니 열 번이나 억눌러도 이들은 파괴될 수 없다. 이들은 혁명에 대한 열정과 국수주의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고취되어 있는 살아있는 부위이다.”

마음속으로 레닌은 이 노동자 볼셰비키들과 함께 호흡하고 이들과 함께 필요한 정치적 결론을 내렸다. 다만 그는 이들보다 더 넓게 더 대담하게 사고했을 뿐이었다. 당의 광범위한 상층 중핵들의 우유 부단에 대해 투쟁하면서 레닌은 노동자 볼셰비키들의 정서를 더 잘 반영하고 있던 중간층 중핵들을 신뢰하며 이들의 힘을 빌었다.

사회애국주의자들은 대중의 일시적 편견과 환상에 기초하여 일시적으로 대세를 장악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당의 기회주의 경향은 이 일시적 편견과 환상에 영합하면서 자신의 허약성을 숨기고 있었다. 레닌은 운동의 내적 논리를 이해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책을 수립했다. 바로 이것이 레닌의 최대 장점이었다. 그는 자기 계획을 대중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대중이 스스로 계획하고 이것을 실현하도록 도왔을 뿐이었다. 레닌은 혁명의 모든 문제들을 “대중에게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것”으로 환원시켰다. 이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대중이 정확히 의식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화해주의자들의 정책에 실망한 노동자나 병사는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절충적 입장에 머무르지 않은 채 레닌의 입장으로 획득되어야 했다. 

레닌의 노선은 일단 공포되자마자 볼셰비키당의 지난 몇 개월간의 경험과 앞으로 전개될 매일 매일의 경험에 새로운 빛을 던졌다. 당의 광범위한 평당원들 사이에는 노선의 분화가 급격히 일어났다. 이들은 레닌의 테제를 향해 계속 좌로 이동했다. 잘레쥐스키가 말했다: “노동자 지구들이 하나 하나 레닌의 테제를 지지하였다. 4월 24일 전국 볼셰비키당 협의회가 열릴 때쯤에는 뻬쩨르부르그 조직 전체가 레닌을 지지하였다.”

당 대오를 재무장시키는 투쟁은 4월 3일 저녁에 시작되었으나 이 달 말에는 이미 끝나버렸다. (저자 주: 레닌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한 바로 그날 대서양의 반대편에 있는 핼리팩스에서 영국의 해양경찰은 노르웨이의 기선 [크리스티아니아피요르드]를 나포하여 뉴욕에서 러시아로 돌아가는 6명의 망명자인 트로츠키, 추드노프스키, 멜니찬스키, 무힌, 피쉘레프, 로만첸코 등을 체포했다. 이들은 5월 4일에야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때쯤 당의 재무장은 최소한 대충이나마 완료되어 있었다. 따라서 트로츠키가 뉴욕의 러시아어 일간지에 표명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견해는 이 저서에서 소개될 수 없다. 그러나 이후 당의 정치적 분화와 10월 혁명 전야의 투쟁을 독자들이 이해하는데 이 견해는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견해는 본 저서 제 1권 제 2 부록에 실려있다. 10월 혁명의 이론적 측면에 관심이 없는 독자는 이 부록을 편안한 마음으로 무시하면 될 것이다.)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뻬쩨르부르그에서 열린 전국 당 협의회는 기회주의적 동요를 보인 3월과 격렬한 위기를 보인 4월을 평가했다. 이때가 되면 당세는 규모와 정치적 의미에서 모두 크게 성장하였다. 7만9천명의 당원을 대표하여 149명의 대의원이 협의회에 참석했다. 수도의 당원 수는 1만5천 명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하조직이었으며 지금 애국주의를 반대하는 정치조직 치고는 대단한 규모였다. 레닌은 여러 번 이에 대해 만족감을 표시했다. 5명의 최고회의가 선출되면서 협의회의 정치적 성격은 금방 규정되었다. 3월의 동요를 주도한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당 전체는 논의된 문제들을 이미 확고히 결정했다. 그러나 과거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던 다수의 지도자들은 이 협의회에서 레닌을 계속 반대하거나 절반정도 반대했다. 스탈린은 침묵을 지킨 채 때를 기다렸다. “4월 테제에 반대하는 다수”의 이름으로 레닌에 반대하는 보고가 “우리와 함께 실제 혁명을 경험했던 동지들”에 의해 발표되어야 한다고 제르진스키가 요구했다. 즉 레닌의 테제가 망명자의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카메네프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독재를 옹호하는 보고를 했다. 라이코프, 톰스키, 칼리닌은 자신들의 3월 입장을 대체로 고수하려 했다. 자유주의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멘세비키당과 연합해야 한다고 칼리닌은 계속 주장했다. 유명한 모스크바 당 활동가 스미도비치는 연설 중 맹렬히 불평했다: “연설할 때마다 레닌 동지의 테제라는 악귀가 우리를 반대한다.” 전에 모스크바 당원들이 멘세비키당의 결의문을 찬성했을 때는 상황이 좀더 평화스러웠다는 의미일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제자인 제르진스키는 민족자결권을 반대하면서 레닌이 러시아 노동계급을 약화시키는 분리주의 경향을 옹호한다고 비난했다. 이에 응수하여 레닌은 그가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주창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자 제르진스키는 다시 이렇게 반박했다: “레닌은 폴란드, 우크라이나 그리고 기타 나라 국수주의자들의 관점에 서 있다.” 이 대화는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대러시아인 레닌이 폴란드인 제르진스키에게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표방한다고 비난하고 후자는 전자가 폴란드 국수주의를 표방한다고 비난했다. 민족문제에 대한 레닌의 올바른 정책은 10월 혁명의 대단히 중요한 구성부분이 되었다.

레닌 반대 세력은 확실히 영향력을 상실했다. 논의된 문제들에 대해 반대파는 7표 이상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당의 국제관계와 관련하여 신기하고도 날카로운 예외가 있었다. 협의회 폐회 직전인 4월 29일 회의에서 지노비에프는 자기가 속한 위원회의 이름으로 결의안을 제출했다: “스톡홀름에서 5월 18일 열릴 찌머발트 반전주의 국제회의에 참석할 것을 결의한다.” 협의회 보고서는 “이 결의안이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의 지지를 얻었다.”고 말한다. 이 한 명은 레닌이었다. 찌머발드 회의에서 독일의 독립사민당과 스위스의 그림과 같은 중립 평화주의자들을 다수가 단호히 지지했으므로 이 회의와 결별해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전쟁 중에 찌머발트주의는 러시아에서 볼셰비키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당 협의회 대의원들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을 포기하거나 찌머발트와 결별할 준비가 아직 되어있지 않았다. 더욱이 대의원들에게 찌머발트는 제 2 인터내셔널 대중과의 연대를 상징했다.

레닌은 회의의 참가 목적이 정보 수집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수정 제안했다. 지노비에트는 그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다. 레닌의 수정 제안은 거부되었다. 그러자 레닌은 결의안 전체에 반대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것은 어제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고립”을 두려워한 “3월” 경향의 마지막 승리였다. 그러나 스톡홀름 회의는 열리지 않았다. 레닌이 결별하려고 했던 찌머발트의 내적 질병의 결과였다. 그래서 모두가 반대한 레닌의 보이코트 노선이 실제로는 승리했다.

당 노선의 급격한 반전은 모두에게 명백했다. 나중에 노동 인민위원이 된 노동자 당원 슈미트는 4월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레닌은 당에게 다른 방향을 제시했다.” 몇 년 후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1917년 4월에 레닌은 “당 지도자들의 의식에 10월 혁명을 불어넣었다....우리 당의 전술은 단 하나의 직선이 아니었다. 레닌의 귀국으로 전술은 급격히 좌로 움직였다.” 고참 볼셰비키였던 루드밀라 슈타알은 4월 14일 뻬쩨르부르그 당 협의회에서 좀더 직접적이고 정확하게 이 변화를 평가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전까지 모든 동지들은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우리는 1905년의 노선 밖에 알지 못했다. 인민의 창조적인 독자적 투쟁을 보고도 우리는 이들을 지도하지 못했다....우리 동지들은 의회적 수단인 제헌의회 소집을 준비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시켰을 뿐 이것을 넘어설 가능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레닌의 구호들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현실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우리는 꼬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이미 노동자 정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필요가 있다. 빠리 꼬뮌은 노동자 정부였을 뿐 아니라 소부르주아 정부이기도 했다.” 당의 재무장은 “레닌이 5월초까지 거둔 가장 주요하면서 근본적인 승리”였다고 수하노프는 말했다. 그의 말은 맞았다. 이 투쟁에서 레닌은 맑스주의 무기 대신 무정부주의자의 무기를 사용했다고 수하노프는 생각했다. 이것도 옳은 생각이었다.

여기서 대답하기 어렵지만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남아 있다. 1917년 4월 레닌이 귀국하지 않았다면 혁명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레닌은 혁명의 신이 아니었으며 단지 객관적 역사과정의 한 고리였을 뿐이다. 지금까지의 서술이 이 점을 제대로 증명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그는 이 과정의 거대한 고리였다. 전체 상황을 통해 노동계급의 독재를 유추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했다. 노동계급의 독재를 수립할 필요가 있었다. 당이 없이는 노동계급 독재의 수립은 불가능했다. 당이 우선 자신의 임무를 인식한 후에야 이 임무가 완수될 수 있었다. 당이 자신의 임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레닌이 필요했다. 그가 귀국할 때까지 혁명을 진단한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카메네프와 스탈린은 사건의 진행에 떠밀려 우로 그리고 사회애국주의 노선으로 나아갔다. 레닌주의와 멘세비키주의 사이에 중간 단계는 존재할 수 없었다. 볼셰비키당의 내부 투쟁은 피할 수 없었다. 레닌의 귀국은 이 과정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그가 누린 개인적 권위는 위기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러나 그가 없이도 당이 자기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담하게 그럴 수 있었다고 답할 수는 없다. 시간의 요인은 결정적이다. 사건이 지난 뒤에 역사의 시간을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어쨌든 유물 변증법은 숙명주의와 조금도 공통점이 없다. 레닌이 없었다면 기회주의 지도부가 초래할 수밖에 없었던 위기는 대단히 격렬하게 장기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과 혁명은 당이 자신의 임무를 성취할 시간을 오래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향을 잃고 분열된 당은 수년에 걸쳐 혁명의 기회를 잡지 못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여기서 개인의 역할은 진정 거대한 규모로 우리에게 다가선다. 여기서 한 가지 진실만 올바로 이해하면 된다: 개인은 역사 과정에서 하나의 고리이다.

오랜 망명 후 “갑작스럽게” 추진된 레닌의 귀국, 그에 대한 언론의 맹렬한 비난, 자신이 창립한 당의 지도자들 모두에 대한 그의 투쟁, 이들에 대한 그의 신속한 승리 등 상황의 겉모습은 레닌이라는 개인, 영웅, 천재를 객관적 상황인 대중 및 당과 기계적으로 아주 쉽게 비교하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이 비교는 완전히 일면적이다. 레닌은 역사 발전의 우연적 요인이 아니라 러시아 역사 전체의 산물이었다. 그는 역사에 대단히 깊은 뿌리를 박고 있었다. 그는 혁명이 일어나기 전 25년간 노동계급 전위와 함께 투쟁했다. 따라서 그가 혁명에 개입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에 비해 영국 수상 로이드 조오지가 그의 귀국을 막기 위해 매어 놓은 조그만 지푸라기는 진짜 우연이었다. 레닌은 당 외부에서 당에 저항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당의 가장 완벽한 표현이었다. 당을 교육시키면서 그는 자신도 교육시켰다. 당 지도부에 대한 그의 투쟁은 당의 미래가 과거에 대해 투쟁한 것이었다. 만약 레닌이 망명과 전쟁이라는 조건에 의해 당과 인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더라면 위기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훨씬 덜 분명했을 것이다. 그리고 당의 내적 발전과정이 이렇게 극심하게 압도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레닌의 귀국은 혁명의 진전에 엄청난 기여를 했다. 이로부터 얻어지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지도자들은 우연히 탄생하지 않는다; 이들은 수십 년에 걸쳐 서서히 걸러지고 훈련되기 때문에 제멋대로 대체될 수 없다; 이들이 투쟁으로부터 강제적으로 제거되면 당은 치유될 수 없는 타격을 입고 대개의 경우 상당한 기간 마비상태에 빠진다.   

 

제 17장 “4월 시기”

3월 24일 미국이 연합국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이날 뻬쩨르부르그에서는 2월 혁명 열사들의 장례식이 열렸다. 삶의 즐거움을 찬양하는 분위기 속에 진행된 장례 행렬은 5일간의 혁명 교향악이 장대한 화음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과 같았다. 모든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 열사들과 함께 투쟁했던 사람들, 이들이 투쟁하지 못하도록 제지한 사람들, 이들을 실제로 죽인 사람 등 모두 참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도 투쟁을 방관한 사람들 역시 참여했다. 노동자, 병사, 소시민과 함께 학생, 장관, 대사, 자본가, 기자, 연설가, 모든 정당들의 지도자들도 모였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어깨 위로 떠받친 붉은 천을 두른 관은 노동자 지구들에서 군신장(軍神場)까지 줄을 지어 나아갔다. 관들이 무덤 안으로 내려지는 순간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서 첫 예포가 울려 수많은 군중을 깜짝 놀라게 했다. 대포 소리는 새롭게 들렸다. 혁명 인민이 소유한 대포가 혁명 인민을 대표하여 혁명 열사들을 기렸기 때문이었다. 비보르그 지구에서만 51개의 관이 나왔는데 이 관들의 주인들은 이 혁명 지구가 자랑스럽게 배출한 열사들의 일부에 불과했다. 행렬 중에서 가장 대오가 정연한 것은 비보르그 노동자 행렬이었다. 이 행렬 속에 볼셰비키당의 수많은 깃발들이 다른 행렬의 깃발들과 평화롭게 펄럭였다. 군신장에는 정부, 소비에트, 의회의 대표들이 일어서서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의회는 죽은지 오래되었으나 끝끝내 자신의 장례식을 거부했다. 하루 종일 80만 명 이상의 조문객들이 띠와 깃발로 뒤덮인 무덤을 한 줄로 서서 차례로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한 지점을 통과하려면 대단한 혼잡과 북새통이 초래될 것이라고 최고위 군사 당국이 예상했다. 그러나 장례 행렬과 조문은 정연한 질서 속에 전혀 문제없이 진행되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혁명 행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었다. 위대한 업적이 성취되었다는 만족감과 모든 것이 갈수록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이 지배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정서가 질서를 유지했다. 왜냐하면 행사 조직은 아직도 미약했고 경험이 부족하여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장례식은 무혈 혁명에 대한 신화를 충분히 깨뜨린 것 -같았다. 그러나 장례식 분위기는 무혈 혁명의 신화를 탄생시킨 혁명의 첫 며칠을 어느 정도 재생시켰다.

이로부터 25일이 지나 노동절이 다가왔다. (양력에 따르면 5월 1일이며 구력에 따르면 4월 18일이었다.) 이때에는 이미 소비에트가 경험과 자신감을 상당히 축적한 뒤였다. 이 날 러시아의 모든 도시들은 집회와 시위로 뒤덮였다. 직장 뿐 아니라 국가, 도시, 농촌 등의 모든 공공기관은 문을 닫았다. 전쟁 총사령부 본부가 있는 모길레프에서는 성 조오지 기병대가 시위 행렬의 선두에 섰다. 해임되지 않은 짜르의 장군들은 노동절의 깃발들과 함께 행진했다.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노동계급의 휴일이 혁명의 색조를 띤 애국주의 정서와 뒤섞였다. 각 계층은 고유의 특징을 이 휴일에 첨가시켰으나 모두 하나의 모습으로 수렴되었다. 아주 느슨하게 결합되었으며 부분적으로는 허식도 있었으나 대체로 노동절 행사는 웅장했다. 수도와 주요 공업도시들에서 노동자들은 축하행사를 지배했다. 이 가운데 볼셰비키당이 배너, 플래카드, 연설, 함성 등으로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마린스키 궁전의 거대한 정면 전체에 “제 3 인터내셔널 만세!”라고 적힌 붉은 배너가 길게 널렸다. 관청의 조심성을 아직 벗어 던지지 못한 행정당국은 이 불쾌하고 무서운 배너를 철거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모두가 노동절을 축하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전선의 군대도 힘이 닫는데 까지 노동절을 축하했다. 참호에서 집회가 열리고 깃발이 게양되었으며 연설과 혁명가요가 울려 퍼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독일군 가운데에서도 일부 호응하는 부대가 있었다.

전쟁은 끝나기는커녕 영역을 넓혔을 뿐이었다. 혁명 열사들이 땅에 묻히던 바로 그날 북미 대륙 전체가 참전하여 전쟁에 새로운 모습을 부여했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 전역에서는 병사들과 함께 전쟁 포로들이 같은 깃발 아래 축하 행진에 참여했다. 그리고 언어는 달랐지만 같은 혁명가요를 불렀다. 봄날에 눈 녹은 물이 홍수가 되어 모든 것을 씻어 버리듯이 노동절 행사는 계급, 정당, 사상 등을 모두 쓸어버리고 전부를 하나의 큰 강물로 만들었다. 모두가 엄청난 규모로 이 날을 기념했다. 그리고 러시아 병사들은 오스트리아 및 독일 군대 전쟁포로들과 함께 행진했다. 이 모든 것은 한가지 희망적 사실을 생생하게 말하고 있었다: 모든 고통과 파괴에도 불구하고 혁명은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초석이다.          

3월에 열린 혁명열사 장례식처럼 노동절 기념일도 “전국적 축제”가 되어 이렇다할 충돌이나 사상자 없이 무사히 지나갔다. 그러나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면 참을성을 이미 상실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협박하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먹고살기는 갈수록 힘들었다. 물가는 놀랄 정도로 올랐다. 노동자들은 최저임금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사장들은 이에 저항하고 있었다. 공장에서 충돌의 횟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식량 사정은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빵 배급량이 줄어들었다. 곡물 카드제가 도입되었다. 주둔군의 불만도 높아갔다. 병사들을 저지할 준비를 하고 있던 군 관구 사령부는 혁명적 성향이 강한 부대들을 뻬쩨르부르그에서 철수시키고 있었다. 이 적대적 조짐을 간파한 병사들은 4월 17일 주둔군 총회를 열어 병력 철수의 중지를 요구했다. 이 요구는 앞으로도 계속 제기되어 혁명이 새로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좀더 단호한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악의 근원은 전쟁이었는데 이것은 끝날 기미가 없었다. 혁명은 언제 평화를 선물할 것인가?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는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이제 대중은 볼셰비키의 주장을 더욱 경청하면서 일부는 반정도 적대감으로 일부는 이미 신뢰감을 가지고 좀더 두고 보자는 듯이 이들을 주시했다. 시위는 의기양양한 규율을 겉으로 드러냈으나 혁명 대중의 분위기는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러나 마린스키 궁전의 배너에 글자를 그려 넣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노동절 이삼일만에 혁명의 국민적 단합이 무자비하게 파괴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위협적인 사건이 반드시 터질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많았으나 이렇게 빨리 터질 줄은 아무도 몰랐다. 임시정부의 대외정책 즉 전쟁 문제가 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 바로 밀류코프가 심지에 성냥불을 붙인 장본인이 되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자 임시정부의 외무장관인 밀류코프는 크게 고무 받아 기자들을 불러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콘스탄티노플 점령, 아르메니아 점령,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분할, 페르시아 북부지방 점령 그리고 무엇보다 민족 자결권 등이 성취되어야 한다. 역사가 밀류코프는 외무장관 밀류코프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연설할 때마다 해방전쟁의 평화적 목표를 단호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것을 언제나 러시아의 민족문제 및 이익과 긴밀히 연관시켰다.” 그러나 그의 기자회견은 청중의 불만을 불러 일으켰다. 멘세비키당의 신문이 강력히 비판했다: “임시정부의 대외정책은 언제 위선을 벗어 던질 것인가? 연합국들에게 병합을 공개적이고 단호하게 포기하라고 임시정부는 왜 요구하지 않는가?” 이들은 약탈의 솔직한 언어를 위선이라고 생각했다. 약탈의 욕구를 평화주의로 위장하면서 이들은 모든 위선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고대했다. 민주주의자들의 소요에 놀란 케렌스키는 서둘러 공보국을 통해 이렇게 발표했다: “밀류코프의 강령은 개인의 의견일 뿐이다.” 개인 의견을 피력한 사람이 바로 외무장관이라는 사실은 우연에 불과하다는 투였다. 

체레텔리는 모든 문제를 상투어로 해결하는 재능을 지녔다. 그는 이렇게 우겼다: 러시아에게 전쟁은 전적으로 국토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정부가 선언해야 한다. 이에 밀류코프 그리고 어느 정도 구츠코프의 저항은 꺾였다. 3월 27일 정부는 선언했다: “자유 러시아의 목표는 다른 인민들을 지배하거나 이들의 민족 유산을 박탈하거나 이들의 영토를 폭력적으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연합국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완수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의 왕들과 예언자들은 부친을 살해하고 간음을 행한 자들과 연합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했다. 이들은 다른 것들도 부족했지만 특히 유머감각이 부족했다. 정부의 이 선언을 화해주의 신문들 뿐 아니라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프라우다지도 환영했다. 레닌이 귀국하기 4일 전에 프라우다지의 주요 사설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나라들을 지배하는 것이 러시아의 목표가 아니라는 점을 임시정부는 인민 전체에게 명확하고 확고하게 선언했다,” 등등. 영국 신문들은 즉시 만족감을 표시하며 러시아의 병합 포기 선언을 콘스탄티노플 점령 포기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선언을 자기 나라에 확대 적용하는 것은 결코 신경 쓰지 않았다. 런던의 러시아 대사는 경고음을 발한 후 러시아 정부에게 이렇게 설명할 것을 요구했다: “병합 없는 평화의 원칙을 러시아는 무조건적으로 적용하지 않는다. 러시아의 핵심 이해에 반하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할뿐이다.” 물론 이것은 밀류코프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우리는 건드릴 필요가 없는 나라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약속한다.” 런던과는 반대로 빠리는 밀류코프를 지지했을 뿐 아니라 계속 격려했다. 그리고 러시아 주재 프랑스 대사 빨레올로그를 통해 소비에트에 대항하여 좀더 적극적인 정책을 펼 것을 주문했다.

뻬쩨르부르그의 엄청난 형식적 절차에 안달한 프랑스 총리 리보는 런던과 로마에 요청했다: “애매 모호함을 걷어치울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할 필요가 있다.” 런던은 이렇게 대답했다: “프랑스와 영국의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에 가서 그곳의 사회주의자들을 설득시킬 시간을 주는 것”이 지혜로울 것이다.

연합국 사회주의자들의 러시아 방문은 짜르의 장군들이 장악한 러시아 총사령부가 주도했다. 앨버트 토머스에 대해 리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임시정부가 단호하게 결정을 내리는데 그가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토머스가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너무 밀착한다고 밀류코프는 불평했다. 그러자 리보는 이렇게 대답했다: 토머스는 밀류코프를 지지하려고 “성실하게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대사가 좀더 적극적으로 밀류코프를 지지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병합 포기를 밝힌 3월 27일의 임시정부 선언은 완전히 공허한 말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나 연합국들은 이것이 소비에트에 굴복한 결과라고 생각하고 심기가 불편했다. 런던은 “러시아의 군사력”에 대한 신뢰를 거둘지도 모른다고 위협했다. 빨레올로그는 이 선언의 “소심함과 불명확성”을 불평했다. 그러나 밀류코프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연합국들이 자신을 지원할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밀류코프는 자기 능력에 훨씬 과분한 큰 게임에 착수했다. 그의 기본 사고는 전쟁을 이용하여 혁명을 압살하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첫 단계는 민주주의자들의 기를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4월의 첫 며칠만에 밀류코프의 대외정책에 대해 점점 초조하고 안달했다. 왜냐하면 바로 이 문제에 대해 하층 계급들은 자기들을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신용대부가 필요했다. 그런데 대중은 조국방어를 지지했으나 전쟁 대부가 아니라 평화 대부를 지지할 생각뿐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 평화에 대한 전망을 조금이라도 제시하는 것이 필요했다.

상투어로 구원의 정책을 개발하는 체레텔리는 이렇게 집행위원회에 제안했다: 3월 27일의 선언과 유사한 메모를 연합국들에게 보내라고 임시정부에 요구하자. 이를 수락할 경우 보답으로 집행위원회는 “자유 대부”를 소비에트에서 통과시키겠다. 대부를 받기 위해 밀류코프는 메모를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이 거래를 이중으로 이용하겠다고 결심했다. 정부의 선언을 해석한다고 위장하면서 그의 메모는 선언의 내용을 부정했다. 정부의 평화애호 문구는 “혁명 때문에 러시아가 연합국들과 공동 대응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할 근거를 조금도 제공하지 말아야한다. 이와 반대로 세계 대전을 결정적 승리의 순간까지 철저히 수행하려는 모두의 욕구는 더 강화되었을 뿐이다.” 메모는 자신감을 더욱 강하게 나타냈다: “전쟁에서 승리한 연합국들은 미래의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필요한 보장 및 제재 조치들을 확보할 수단을 찾아낼 것이다.” 토머스의 끈질긴 주장으로 삽입된 “보장 및 제재 조치들”에 대한 문구는 강도들의 외교 은어 특히 프랑스어로는 병합과 배상을 의미했다. 노동절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날에 밀류코프는 연합국 외교관들의 구술로 작성된 이 메모를 연합국 정부들에게 전보로 보냈다. 그리고 곧바로 집행위원회와 언론에 동시에 이것을 보냈다. 정부가 접촉위원회를 무시했기 때문에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일반 시민의 지위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메모에서 밀류코프로부터 이미 전해들은 내용만 보았다 하더라도 화해주의자들은 이것이 사전에 계획된 적대행위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이 메모는 화해주의자들을 대중의 공격에 노출시켰다. 대중은 이들이 볼셰비키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에 확실히 한쪽 편을 들것을 요구했다. 사실 이것이 밀류코프의 목적이었다. 모든 것이 이것을 입증하고 있으며 그의 계획은 이것보다 한술 더 뜨고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밀류코프는 러시아군이 다다넬스 해협을 공격, 점령하는 재수 없는 계획을 소생시키려 이미 3월에 모든 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이 이 작전을 지휘할 것을 종용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계산했다: 이 계획이 실현되고 난 후에 민주주의자들이 기정사실을 앞에 놓고 병합에 대해 항의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노동절에 밀류코프가 작성한 이 메모는 민주주의자들이 엉성하게 방어하고 있던 해안을 그가 다다넬스 작전과 유사하게 기습 공격한 것과 같았다. 다다넬스에 대한 군사 공격과 민주주의자들에 대한 정치 공격은 성공했을 경우 서로를 보완하여 서로를 정당화시켰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승리자는 비난받지 않는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승리자가 될 운명이 아니었다. 다다넬스 해협을 공격하려면 20만에서 30만의 병력이 필요했다. 아쉽게도 그의 계획은 아주 사소한 세부사항 하나 때문에 수포로 돌아갔다: 병사들이 공격을 거부해 버렸다. 병사들은 혁명을 방어하는 데에는 동의했으나 공세를 취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다다넬스를 점령하려던 밀류코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이것 때문에 그의 이후 계획들도 전부 틀어져버렸다. 그가 승리했다면 그의 계획들은 잘 짜여진 수작이 되었을 것이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었다.

4월 17일 뻬쩨르부르그에서 상이 군인들은 소름끼치는 애국주의 시위를 벌였다. 팔과 다리가 잘린 채 붕대를 감은 엄청난 수의 상이 군인들이 수도의 병원들에서 빠져 나와 타우리데 궁전으로 행진했다. 보행이 불가능한 군인들은 트럭에 몸을 싣고 시위에 참가했다. 이들의 깃발에는 “끝까지 전쟁을 수행하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것은 제국주의 전쟁으로 동강이 난 인간들의 절망적인 시위였다. 자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혁명이 인정해 달라고 이들은 요구했다. 그러나 입헌민주당 아니 밀류코프는 이 시위 뒤에 숨어서 다음날의 거대한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19일 밤 특별회의에서 집행위원회는 전날 연합국 정부들에게 전달된 메모를 논의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한번 읽자마자 이 메모는 집행위원회가 예상한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 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메모에 대한 책임은 케렌스키를 포함한 정부 전체가 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우선 정부를 구출할 필요가 있었다. 체레텔리는 암호가 전혀 사용되지 않은 이 메모를 “해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더욱더 많은 장점들을 찾아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자들과 정부의 목표가 우연하게도 완벽하게 일치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스코벨레프는 심오하게 생각했다. 이 지혜로운 자들은 밤을 새고 동이 틀 때까지 애를 썼으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었다. 아침에 모임을 해산한 이들은 몇 시간 후에 다시 만났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자 모든 신문들은 메모의 내용을 보도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는 꼼꼼하게 준비된 도발의 정신으로 메모를 논평했다. 사회주의 언론은 크게 흥분하였다. 체레텔리와 스코벨레프는 밤새 느낀 분노를 이때 이미 해소한 뒤였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멘세비키 기관지 라보차야 가제타는 임시정부가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문서”를 발표했다고 논평했다. 그리고 “이 메모의 재앙적 결과를 막기 위해” 소비에트가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요구했다. 볼셰비키들의 점증된 압력이 이 논평에서 아주 명확히 드러났다.

집행위원회는 회의를 속개했으나 다시 한번 해결책이 없음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 공유를 위해” 소비에트 특별총회를 소집하기로 결의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부의 불만이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고 자신들의 동요를 수습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는 속셈이었다. 한편 불만을 전부 가라앉힐 목적으로 모든 종류의 접촉위원회들을 소집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이중권력이 예식을 치르는 것처럼 부산하게 움직이는 동안 제 3의 권력이 예상 밖에 개입했다. 대중이 손에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선 것이었다. 병사들이 치켜든 총검들 일부는 “밀류코프를 타도하라!”는 글자가 번쩍거리는 배너를 달고있었다. 다른 배너에는 구츠코프의 타도를 외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 분노에 찬 시위 대중이 노동절의 화기애애했던 대중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어느 정당도 이 시위를 주도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역사가들은 이것을 “자발적” 운동이라고 부른다. 즉시 거리 시위를 호소한 린데는 이 덕분에 혁명사에 이름을 남겼다. “학자, 수학자, 철학자”인 그는 어느 정당에도 소속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혁명은 진심으로 자신의 약속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밀류코프의 메모와 레치지의 논평이 그를 분기시켰다. 그의 전기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그는 즉시 행동을 개시하여 핀란드 연대로 직행했다. 그리고 연대 위원회를 소집하여 이들이 마린스키 궁전까지 연대 전체를 끌고 행진할 것을 제안했다....린데의 제안은 수용되었고 오후 3시 핀란드 연대가 도전적인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뻬쩨르부르그 거리를 볼만하게 행진했다.” 핀란드 연대 다음에는 제 180 예비군 부대, 모스크바 연대, 파블로프스키 연대, 켁스골름스키 연대, 제 2 발트 함대의 수병 등 2만5천에서 3만의 무장군인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이 소동이 노동자 지구로 퍼지자 노동자들은 일을 중지하고 병사들을 뒤따라 시위에 가담했다.

밀류코프는 자신이 직접 시위대들에게 물어본 것처럼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 대다수는 이유도 모르고 시위에 참여했다. 군대 이외에 소년 노동자들도 시위에 참여했다. 이들은 시위 참여 대가로 10루블에서 15루블을 받았다고 큰 소리로(!) 선언했다.” 이 돈의 출처도 명확하다: “두 장관(밀류코프와 구츠코프)을 타도하라는 생각은 직접 독일에서 나왔다.” 그런데 밀류코프는 4월 투쟁 한가운데가 아니라 3년 후에도 이 심오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때는 그에 대한 인민의 증오심을 돈으로 구입하기 위해 누군가가 높은 임금을 지불할 필요가 없었다는 점이 10월 혁명의 승리로 이미 풍부하게 증명된 뒤였다.

대단히 격렬했던 4월 시위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층의 속임수에 대해 대중의 분노가 즉시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정부가 평화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경계가 필요하다.” 이것은 열성이 아니라 확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상층이 평화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대중은 가정하고 있었는데 이제 그렇지 않다는 것이 명백히 드러났다. 물론 볼셰비키들은 정부가 약탈행위를 위해 전쟁을 연장하려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대중은 이렇게 물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케렌스키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2월부터 알고 있었다; 이들은 병영에 있던 우리들에게 처음 다가왔다; 이들은 평화를 원한다; 더욱이 레닌은 베를린에서 곧바로 귀국했지만 체레텔리는 중노동 징역을 살고 있었다; 우리는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평화를 성사시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한다....한편 진보적인 공장과 연대는 볼셰비키당의 평화 정책을 더욱 확고히 지지했다: 비밀 조약들을 공개하라; 연합국의 정복 전쟁과 단절하라; 모든 교전국들에게 즉시 평화 조약을 제시하라. 4월 18일의 메모는 이 복잡하고 동요하는 분위기 사이에 떨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상층 지도자들은 결국 평화가 아니라 낡은 전쟁 목적을 지지하고 있었구나! 우리의 참을성과 기다림이 전부 소용없었단 말인가? 타도하라....그러나 누구를 타도하지? 볼셰비키들의 말이 옳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메모의 내용은 어찌된 일인가? 누군가가 우리의 목숨을 짜르의 동맹국들에게 팔아먹고 있었다는 것이 아닌가. 입헌민주당과 화해주의자들의 신문을 단순 비교하면 밀류코프는 대중의 신뢰를 배반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수상인 로이드 조오지 및 리보와 함께 정복 정책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콘스탄티노플 점령 계획이 “밀류코프의 개인 견해”라고 선언했다....이 운동이 폭발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동질성이 없었다. 일부 성급한 혁명가들은 이 운동의 규모와 정치적 성숙도를 크게 과장했다. 너무 격렬하고 급속한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들은 군대와 공장에서 활기차게 활동했다. 이 운동의 최소 강령 격인 “밀류코프를 해임시켜라”는 요구를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 전체에 반대하는 내용의 플래카드로 보완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에 따라 달리 해석되었다: 일부는 선전적 구호로 또 일부는 당면 임무로 이 구호를 받아들였다. 무장 병사와 수병들은 거리에서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라고 외쳤다. 그런데 이 구호는 항의성 시위에 일종의 무장봉기 사상을 어쩔 수없이 첨가시켰다. 상당수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즉시 임시정부를 타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들은 마린스키 궁전에 진입하여 출구를 봉쇄하고 장관들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장관들을 구출할 임무를 부여받은 스코벨레프는 자신의 임무를 달성했다. 마침 마린스키 궁전이 비어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츠코프의 질병 때문에 정부는 이날 그의 아파트에서 회의를 가졌다. 장관들이 우연으로 체포를 면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들은 심각하게 위협 당하지 않았다. 전쟁을 질질 끄는 자들을 응징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2만5천에서 3만 규모의 군대는 르보프공의 정부보다 훨씬 강한 정부도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원했던 것은 창문에 주먹을 갔다대면서 상층 신사들이 콘스탄티노플 점령보다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 바삐 움직이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병사들은 밀류코프에 반대하여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도우려 했다.

코르닐로프 장군도 장관 회의에 참석하여 병사들의 무장 시위를 보고했다. 그리고 뻬쩨르부르그 관구 사령관으로서 시위를 철권으로 진압할 병력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그는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콜차크도 우연히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한참 뒤에 적군에 의해 처형당했는데 처형 직전에 열린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르보프공과 케렌스키는 시위에 대한 무력 진압을 반대했다. 밀류코프는 단도직입적으로 자기 입장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렇게 말하면서 상황을 요약했다: 존경하는 장관님들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생각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떤 결정이 나오더라도 시위 병사들은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당연히 입헌민주당의 핵심인 그와 생각이 같았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손쉽게 병사들을 설득하여 이들을 마린스키 궁전의 광장에서 철수시키고 심지어 병영으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소동은 이것으로 가라앉지 않았다. 군중들이 모이고 집회가 열리고 거리 모퉁이에서 논쟁이 벌어졌다. 전차의 승객들은 밀류코프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렸다. 네프스키 가도와 인접한 거리들에서 부르주아 웅변가들이 레닌에 반대하는 선동을 했다. 위대한 애국자 밀류코프를 타도하기 위해 그가 독일에서 귀국했다는 것이었다. 메모와 메모의 장본인 밀류코프에 대한 분노를 정부 전체에 대한 분노로 확대시키기 위해 교외와 노동자 지구에서 볼셰비키들은 열심히 노력했다.

저녁 7시에 소비에트 총회가 열렸다. 팽팽한 분노로 떨고 있던 참석자들에게 지도자들은 할말이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임시정부와 회담을 가질 것이라고 체이제는 장황하게 설명했다. 체르노프는 내전이 벌어질지도 모른다고 말하면서 이들을 위협했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인 금속 노동자 페오도로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내전은 이미 벌어지고 있다; 소비에트는 내전에 의존하여 권력을 장악해야한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의 말은 완전히 새로웠으며 공포를 자아냈다. 그의 발언은 지배적인 정서에 심금을 울렸다. 그래서 볼셰비키들은 그 동안 결코 경험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한동안 경험할 수 없었던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스탄케비치의 예상 밖의 연설이 회의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는 케렌스키가 총애하는 자유주의 사회주의자인데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 왜 우리가 ‘행동’해야 합니까? 누구에 대항해서 우리의 힘을 결집시킬 것입니까? 유일한 권력은 여러분들이고 여러분 뒤에 버티고 있는 대중입니다....보십시오! 지금 시간은 7시 5분전입니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총회 참석자 전원이 그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임시정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사임했다고 결의합시다. 우리는 이 결의문을 전화로 전할 것입니다. 그러면 5분 후에 임시정부는 자신의 권한을 우리에게 넘길 것입니다. 폭력, 시위, 내전 등에 대해 말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연설이 끝나자 커다란 박수갈채가 터졌다. 그리고 격앙된 지지의 고함소리가 울렸다. 그는 현 상황으로부터 극단적인 결론을 이끌면서 소비에트를 위협하려 했다. 그러나 자기 연설의 결과에 놀라 스스로 겁을 먹었다. 예상 밖으로 드러난 소비에트의 위력에 대한 진실은 총회를 상승시켜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한심한 음모를 압도해 버렸다. 소비에트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게 회의를 질질 끄는 것이 지도자들의 주요 임무였다. 어느 연설자는 참석자들의 박수 갈채 후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누가 정부를 대체할 것입니까? 우리가요? 그러나 우리의 손은 떨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은 화해주의자들의 상태를 정확히 드러냈다. 막강한 상층 지도자들이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수상 르보프는 마치 스탄케비치의 말을 다른 쪽에서 보완하듯이 다음날 이렇게 발표했다: “지금까지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의 지도기관으로부터 흔들리지 않는 지지를 받아왔다. 그러나 지난 2주일간 정부는 의심을 받아왔다. 이 상황에서...임시정부가 사퇴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2월 혁명의 실체가 누구인지는 너무 명확히 드러났다!

집행위원회와 임시정부의 연석회의가 마린스키 궁전에서 열렸다. 개회 연설에서 르보프공은 정부에 반대하는 사회주의 조직들의 캠페인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리고 반은 화난 듯이 또 반은 위협하듯 사임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관들은 차례로 모든 힘을 다해 자신들이 자초한 직무 수행의 난관들을 말했다. 밀류코프는 “접촉”에 대한 모든 웅변에 등을 돌린 채 발코니에서 입헌민주당 시위대에 연설했다. “‘밀류코프를 타도하자!’라고 쓴 플래카드들을 보면서... 나는 밀류코프가 아니라 러시아를 위해 두려워했다.” 광장에 모인 군중 앞에서 장관 밀류코프가 한 이 겸손한 말을 역사학자 밀류코프가 이렇게 보도했다. 체레텔리는 메모를 새로 작성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체르노프는 멋진 해결책을 찾은 것처럼 밀류코프가 공공교육부를 맡을 것을 제의했다. 지리 시간의 소재인 콘스탄티노플은 외교의 소재인 콘스탄티노프보다 확실히 덜 위험할 것이었다. 그러나 밀류코프는 학자로 돌아가는 것과 새 메모를 작성하는 것을 모두 딱 잘라 거부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많은 힘이 들지 않았다. 이들은 기존의 메모에 대한 “설명”에 동의했다. 민주주의 언사로 치장된 몇 몇 문구만 발명해서 메모에 삽입하면 위기를 넘길 것이고 밀류코프의 장관 자리는 보존될 것 같았다.

그러나 들고 일어선 제 3의 권력은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4월 21일에는 전날보다 더 강력한 시위가 폭발했다. 이날은 볼셰비키당의 뻬쩨르부르그 위원회가 시위를 촉구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반대 선동에도 불구하고 대규모의 노동자 대중이 비보르그 지구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지구에서 도시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시위자들을 만나기 위해 집행위원회는 체이제를 우두머리로 하여 가장 권위 있는 시위 진정 사절단을 보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기 발언을 확고히 할 생각이었으며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어느 유명한 자유주의 기자는 노동자 시위대가 네프스키 가도에서 행진하는 것을 레치지에 묘사했다: “약 100명의 무장 노동자가 선두에서 행진했다. 이들 뒤에는 1000명 정도의 무장하지 않은 남녀가 단단한 대형을 이루어 행진했다. 양쪽 모두에 살아있는 인간의 사슬이 줄지어 있었다. 노래가 울려 퍼졌다. 시위대의 얼굴은 놀라왔다. 수천 명의 시위대는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 수도승들의 놀란 듯한 환희의 얼굴이었다. 달랠 수 없는 무자비한 표정이 마치 살인, 종교재판, 죽음을 마다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자유주의 기자는 노동자 혁명의 눈을 쳐다본 순간 이것이 내뿜는 강렬한 결의를 몸소 느꼈다. 하루 15루블을 받고 독일군 총사령관 루덴도르프에 의해 고용된 밀류코프의 “소년 노동자들”과 이 시위대는 많이 달랐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이날도 시위자들은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거리로 나서지는 않았다. 물론 추측하면 이들 대다수는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는 이날 시위를 대다수의 정서가 규정한 한계를 훌쩍 뛰어넘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체이제는 시위대에게 방향을 돌려 지구로 돌아갈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위 지도자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알아서 할 것이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이것은 새로운 반응이었다. 그리고 체이제는 다음 몇 주일간 이것에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이 시위대를 설득하고 이들의 침묵을 종용하는 동안 입헌민주당은 도전하고 분노했다. 전날 코르닐로프에게는 총포의 사용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와 아니라 반대로 이날 아침 일찍부터 시위대에게 기병과 대포로 응수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었다. 장군들의 대담함에 단단히 의존하면서 입헌민주당은 지지자들을 거리로 부르는 특별 삐라를 뿌렸다. 사태를 결정적인 국면까지 끌고 갈 의도가 명확했다. 비록 다다넬스 해협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으나 밀류코프는 자신의 전면 공세를 계속했다. 이 공격에 코르닐로프는 선발대가 되었고 연합국들은 중무장한 예비군이 되었다. 소비에트의 등뒤에서 보낸 메모와 레치지의 사설은 2월 혁명의 자유주의 장관인 밀류코프에게 긴급 전보가 되어주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가 제출한 호소문은 이렇게 외쳤다: “러시아와 러시아의 자유를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임시정부 주위로 단결하여 정부를 지지해야한다.” 그리고 즉각적 평화를 주창하는 자들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모든 선량한 시민을 거리로 초대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대동맥인 네프스키 가도는 입헌민주당의 확실한 집회장으로 변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들이 선두에 선 상당한 규모의 시위대가 마린스키 궁전으로 행진했다. 간판공의 손에서 금방 제작된 플래카드가 모든 곳에서 보였다: “임시정부에 완전한 신뢰를!” “밀류코프 만세!” 장관들은 귀빈처럼 보였다. 이들도 나름의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소비에트의 특별 사절들이 최선을 다해 이들을 도와 혁명 집회를 해산시키고 노동자와 병사의 시위를 교외로 유도하고 병영과 공장이 거리로 나오지 못하도록 억제시켰기 때문에 이들의 지지세력은 더 눈에 두드러져 보였다. 정부 방어의 깃발 아래 반혁명 세력이 처음으로 공공연히 그리고 대규모로 동원되었다. 도시 중앙에 무장을 갖춘 장교, 사관생도, 학생들을 실은 트럭이 보였다. 성 조오지 기병대도 거리로 나왔다. 부유층 청년들이 네프스키 가도에서 모의 재판을 벌이고 있었는데 레닌 지지자들과 “독일 스파이들”이 같은 편으로 등장했다. 소규모 충돌이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했다. 보도에 의하면 노동자들로부터 임시정부 반대 구호의 깃발을 장교들이 탈취하려는 과정에서 유혈 충돌이 처음 발생했다. 이런 충돌들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총격전이 오갔다. 오후가 가까워지면서 총격전은 계속 벌어졌다. 누가 왜 총을 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일부는 악의에 차서 그리고 일부는 공포심에 사로잡혀 무분별한 총격이 발생했다. 벌써 희생자가 발생했다. 충돌은 뜨겁게 가열되고 있었다.

이 날 국민적 단결은 전혀 표출되지 않았다. 두 세계가 대치하고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에 대항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입헌민주당의 애국 시위대는 장교, 관리, 지식인 등 전부 부르주아 계급 출신들이었다. 인간의 두 물결이 하나는 콘스탄티노플로 또 하나는 평화로 향하면서 도시에서 각각 모습을 나타냈다. 사회적 출신도 다를뿐더러 외모도 조금도 닮지 않은 이들은 플래카드에 적대적인 글귀를 새긴 채 주먹, 곤봉, 심지어 총포 등으로 격돌했다.

코르닐로프가 마린스키 궁전 광장에 대포를 이동시키고 있다는 예상 밖의 소식이 집행위원회에 보고되었다. 이것이 코르닐로프의 독자 행동이었을까? 그의 성품과 경력으로 보아 누군가가 이 용감한 장군의 코를 꿰어서 그를 끌고 다니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입헌민주당 지도자들의 짓이 확실했다. 이들이 지지세력을 거리로 소집한 것도 바로 코르닐로프의 개입을 예상하여 개입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어느 소장 역사학자는 올바르게 지적했다: 코르닐로프는 사관학교들을 마린스키 궁전 광장으로 이전하려 했는데 이것은 궁전을 적대 군중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진짜 또는 허구의 필요 때문이 아니었다; 입헌민주당의 시위가 최고조로 상승한 순간에 이 생각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밀류코프와 코르닐로프의 계획은 아주 치욕스럽게 산산조각이 났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의 사고는 대단히 단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목이 날아간다는 것을 이해 못할 리 없었다. 네프스키 가도의 유혈 충돌에 대한 소식이 처음 전해지기 전에 이미 집행위원회는 뻬쩨르부르그와 인근의 모든 군부대에 전보를 보냈었다: 소비에트의 지시 없이는 병영을 나올 수 없다; 수도의 거리에 단 하나의 분대도 허용할 수가 없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나자 집행위원회는 그 동안의 모든 엄숙한 선언들을 걷어치우고 코르닐로프에게 확실히 명령했다: 즉시 군대를 철수시켜라. 또한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거리에 나온 군대를 복귀시키는 임무를 스코벨레프와 필리포프스키에게 맡겼다. “지금처럼 위험한 때에 집행위원회의 명령이 없이 무기를 들고 거리로 나올 수 없다. 여러분을 지휘할 권한은 오직 집행위원회에게만 있다.” 이후 관례에 의한 의전행사가 아니면 군대 호출의 모든 명령은 소비에트의 공식 서류와 권한을 가진 2인 이상의 서명으로만 유효했다. 소비에트는 코르닐로프의 행동을 내전을 일으키려는 반혁명의 시도로 명확히 해석한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관구 사령관의 권한을 완전히 무력화시켰으나 집행위원회는 그를 해임할 생각은 결코 하지 않았다. 정부의 권한을 침해할 생각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겠는가? “이들의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이 나이 어린 임시정부는 베개를 베고 누워있으면서 압박붕대를 잔뜩 동여맨 환자처럼 민주주의자들이 생각해낸 온갖 허구로 칭칭 감겨져 있었다. 군부대 뿐 아니라 사관학교들도 체이제의 명령이 있기도 전에 이미 소비에트의 허락 없이 거리로 나서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역관계를 파악하는데 아주 유용한 단서였다. 입헌민주당이 예상하지 못한 이런 종류의 불쾌한 일들이 하나 하나 터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국민혁명이 터질 순간까지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반(反)국민적 계급이었다는 사실에서 나온 불가피한 결과였다. 이 사실은 이중권력에 의해 잠시 은폐될 수 있었을 뿐 고쳐질 수는 없었다.

4월 위기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집행위원회는 이중권력의 문지방에 서서 대중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한편 이에 감사하는 정부는 “보장 및 제재 조치들”이 국제 사법 재판소, 군비 제한 그리고 기타 모든 훌륭한 것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집행위원회는 이 용어상의 양보를 서둘러 수용하여 34 대 19의 표결로 이 사태를 정정시켰다. 이에 놀란 대중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비에트 다수파는 이렇게 결의문을 채택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시켜야한다; 정부는 사전에 집행위원회에 통지하지 않을 경우 어떤 중요한 정치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외무부 구성원들이 크게 물갈이되어야 한다. 이렇게 실제로 존재하던 이중권력은 헌법이라는 법적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이 바꾼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화 자세로 나온 다수파 때문에 좌파는 밀류코프의 해임조차 확보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이전 그대로 있어야 한다. 연합국 정부들은 위에 군림하여 임시정부를 훨씬 더 효과적으로 통제했다. 이에 대해 집행위원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21일 저녁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정세를 결산했다. 3월 27일 발표된 메모에 대한 모든 거짓 해석들을 불식시킨 지혜로운 지도부의 신선한 승리에 대해 체레텔리가 보고했다. 카메네프는 볼셰비키당 명의로 소비에트만으로 구성된 정부 수립을 제의했다. 전쟁 기간에 멘세비키당에서 볼셰비키당으로 넘어온 인기 있는 혁명가 콜론타이는 뻬쩨르부르그의 모든 지구들과 인근 지구들에 걸쳐 임시정부나 기타 정부의 효용에 대해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들은 소비에트의 의식수준으로는 거의 수용될 수 없었다. 결국 권력의 문제는 소비에트의 수준에 맞게 수정된 것 같았다. 겨우 13표의 반대라는 엄청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집행위원회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이때 볼셰비키당 출신 대의원 다수는 물론 공장, 거리, 시위대 등에서 투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중심 대중이 볼셰비키당으로 넘어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의심의 여지없이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2일 동안 거리 시위를 중단할 것을 지시했다. 이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모두가 이 결정을 따를 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었다. 사실 노동자, 병사, 부르주아 청년, 비보르그 지구, 네프스키 가도 등 어느 누구도 소비에트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어떠한 강제조치도 없이 도시는 평온을 되찾았다. 소비에트는 자신이 정세의 주인이라고 느끼기만 하면 되었고 사실이 그랬다.

이 당시 좌익 신문의 편집실에는 밀류코프 그리고 가끔 임시정부 전체의 사임을 요구하는 수많은 결의문들이 공장과 연대에서 도착했다. 뻬쩨르부르그 뿐 아니라 모스크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작업장을 뛰쳐나왔으며 병사들은 병영에서 튀어나와 거리들을 항의 시위의 폭풍으로 강타했다. 수많은 지역 소비에트에서 집행위원회로 전보가 날아들어 밀류코프의 정책을 반대하고 소비에트에 대한 완전한 지지를 약속했다. 같은 목소리가 전선에서도 들려왔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전과 같아야 했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정부에 호의적인 분위기가 4월 21일 다시 거리를 장악했다.” 대다수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그는 발코니에서 거리를 내려다보고 이렇게 생각했음에 틀림없었다. 실제로 정부는 완전히 발가벗겨져 있었다. 정부를 지지하는 진정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스탄케비치와 르보프공의 입에서 우리는 이 사실을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반란자들을 진압할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코르닐로프의 확신은 이 존경받는 장군님의 극단적인 경박함에서 나왔음이 틀림없었다. 이 경박성은 8월에 만개하여 음모자 코르닐로프는 뻬쩨르부르그에 대항하여 있지도 않은 군대를 배치하게 될 것이다. 지휘부를 군대와 동일시한 것이 그의 잘못이었다. 장교 대다수는 물론 그의 편이었으며 임시정부를 방어한다는 핑계로 소비에트의 갈비뼈를 부러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소비에트 편이었으며 사실 소비에트 자체보다 훨씬 좌에 있었다. 그래서 소비에트가 임시정부를 방어할 때에는 코르닐로프도 반동 장교 휘하의 소비에트 병사들을 동원할 수 있었다. 또한 이중권력 상황 때문에 소비에트와 임시정부는 서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도자들이 병영에서 나오지 말라고 병사들에게 명령하자마자 병력 동원 능력이 없는 코르닐로프 자신은 임시정부와 함께 허공에 붕 떠버렸다.

그러나 아직도 정부는 붕괴하지 않고 있었다. 공세로 나선 대중은 정부를 타도할 지점까지 상황을 끝까지 밀어붙일 태세가 아니었다. 따라서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2월 정권을 아직도 원래 위치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구성된” 당국에 대항하여 공개적으로 군대를 장악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스스로 망각했는지 아니면 남들에게 망각시키려는 것인지 소비에트 기관지 이스베스치아 지는 4월 22일 이렇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자기 손에 권력을 장악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 지지자들이 치켜든 수많은 깃발에는 정부의 타도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전할 것을 요구하는 구호들이 적혀 있었다.” ... 노동자와 병사들이 화해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잡으라고 유혹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 신사들이 혁명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능력이 있다고 진지하게 상상하고 있었다. 이것은 정말이지 분통터지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말이지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권력을 원치 않았다. 이미 확인했듯이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을 것을 요구하는 볼셰비키당의 결의안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별로 지지를 얻지 못했다. 4월 22일 볼셰비키당이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제출한 임시정부 “불신임” 결의안은 수백 표 가운데 74표의 지지를 얻는데 그쳤다. 물론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 장악한 헬싱키 소비에트는 같은 날 당시로서는 정말 대담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제국주의 임시정부”를 제거한다면 무장 지원을 하겠다. 그러나 수병들의 직접 압력을 받고 채택된 이 결의문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소비에트 대의원의 압도적 다수는 어제만 해도 임시정부에 대해 거의 무장봉기를 시도한 대중을 대표했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중권력을 고수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중은 단호하게 공세에 나섰으나 이 사실은 정치적으로는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다. 이것은 대단한 모순이지만 우연한 현상은 아니다. 혁명기의 피억압 대중은 자기 대표들을 통해 자기의 욕망과 요구를 공식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손쉽게 그리고 재빨리 직접 행동에 나선다. 대의제도는 추상적일수록 대중 행동을 결정하는 사건의 리듬에 그만큼 뒤쳐진다. 대의제도 가운데 가장 덜 추상적인 소비에트 대의제는 혁명기에 측정할 수 없는 대단한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4월 17일에 자신의 규정에 따라 수립된 민주적 의회는 전혀 방해 요소가 없었으나 소비에트와 비교하면 철저히 무기력했다. 그러나 공장과 연대의 적극적 대중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는 여전히 대의기관이며 의회주의의 한계와 왜곡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대의기관은 대중 행동을 위해 필요하다. 그러나 아주 쉽게 대중 행동을 저지하는 보수적 장애물이 된다. 바로 이것이 소비에트 형태를 포함한 대의제도의 모순이다. 대표들을 계속 물갈이하는 것이 이 모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제적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어느 곳에서도 결코 단순하지 않다. 더욱이 혁명기에는 대중의 직접 행동이 끝난 후 이것을 결산하기 위해 대표들이 교체된다. 따라서 이것도 대중 행동에 항상 뒤쳐진다. 어쨌든 4월에는 2분의 1 봉기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4분의 1 봉기가 일어났고 다음에 7월에는 2분의 1 봉기가 일어난다. 그런데 4월 봉기의 경우 봉기 다음날 소비에트에 출석한 대의원들은 이전에 선출된 대의원들이었다. 봉기의 결과 새로운 대의원을 뽑을 시간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봉기와 무관한 대의원들은 앉았던 의자에 그대로 앉아서 역시 봉기와 무관한 지도자들이 제출한 동의안들을 가결시켰다. 겉으로 보면 이전과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물론 4월의 폭풍은 소비에트, 2월 체제, 더욱이 대중 자체에 확실히 영향을 끼쳤다. 비록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못했지만 노동자와 병사들의 거대한 개입은 정세를 변화시켰고 혁명 운동 전반에 추진력을 불어넣고 불가피한 세력 재편을 가속화시켰다. 또한 살롱과 밀실의 정치인들이 어제의 계획을 잊어버리고 새로운 상황에 스스로를 적응하도록 강제했다.

화해주의자들은 내전의 섬광과 같았던 4월 봉기를 청산시킨 후 모든 것이 이전으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때 정부의 위기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직접 참여하지 않을 경우 계속 권력을 행사할 생각이 없었다. 한편 이중권력의 논리에 강요되어 자유주의자들의 조건에 동의한 사회주의자들도 다다넬스 해협 점령을 확실히 포기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했다. 이 결과 어쩔 수 없이 밀류코프는 몰락했다. 5월 2일 그는 정부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4월 20일의 시위대가 내세운 구호는 12일 만에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의지에 반하여 실현되었다.

그러나 화해주의 정당들이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4월 사건들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힘을 대중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더욱 우경화 하여 부르주아 계급과 더욱 밀착했다. 이때부터 애국주의는 지배적인 노선으로 확고히 정착된다. 집행위원회 다수파는 더욱 단결한다. 최근에 와서야 소비에트의 정책에 영향을 미쳤으며 최소한 사회주의 전통의 일부라도 구하려고 시도한 불분명한 정치색깔의 급진주의자 수하노프, 스테클로프 등은 옆으로 밀려난다. 체레텔리는 확고한 보수 애국주의 노선을 견지하고 노동 대중의 대의기관인 소비에트에서 밀류코프의 정책을 수용한다.

4월 시기에 볼셰비키당의 행동은 일정치 않았다. 당은 터지는 사건들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당내 위기는 막 종료될 시점이었고 당 협의회 준비가 바쁘게 진행되고 있었다. 노동자 지구들의 격렬한 임시정부 반대 운동에 감명을 받은 일부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 타도를 지지했다. 3월 5일 임시정부를 조건적으로 지지했던 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동요했다. 21일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되었으나 그 목표는 아직도 충분히 정해지지 않았다. 위원회의 일부는 막연하게나마 임시정부를 타도할 목적으로 노동자와 병사들을 거리로 동원시켰다. 당 밖의 개별 좌익 분자들도 같은 방향으로 나아갔다. 또한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바삐 움직이는 무정부주의 분자들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임시정부를 타도한다고 또 어떤 때에는 적과 시가전을 벌인다면서 장갑차나 일반적 증원을 요구하는 개인들이 병영에 접근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과 가까운 어느 장갑차 사단은 집행위원회의 명령이 아니면 장비를 내줄 수 없다고 선언했다.

입헌민주당은 유혈 충돌의 책임을 볼셰비키들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특별위원회는 총격이 거리가 아니라 현관과 창문에서 시작되었다고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했다. 검찰의 발표를 신문이 보도했다: “항상 범죄자들에게 유용한 혼란과 소요를 부채질하기 위해 인간 쓰레기들이 총격을 시작했다.”           

볼셰비키들에 대한 소비에트 지배 정당들의 적대감은 이로부터 2개월이 지난 7월에 이성과 양심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로 상승한다. 그러나 4월에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의 직원들이 그대로 남아있었지만 법무부는 혁명 앞에 차려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짜르의 비밀경찰이 사용했던 방법들을 극좌 세력에게 적용하는 일은 아직 없었다. 이 상황에서 밀류코프의 공격은 어려움 없이 격퇴되었다.

한편 당 중앙위원회는 좌파 볼셰비키들을 비난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의 시위 금지는 올바르며 무조건 준수되어야 한다고 4월 21일에 선언했다. 중앙위원회 결의문은 이렇게 말했다: “‘임시정부 타도’ 구호는 지금 옳지 못하다. 확고한 즉 의식적이고 조직된 인민의 다수가 혁명적 노동계급에 지지를 보내지 않을 경우 이 구호는 공문구이거나 모험주의 시도 에 불과하다.” 그리고 당면 임무는 비판과 선전이며 권력 장악의 기초로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이라고 결의문은 선언했다. 이 결의문에  반대하는 자들은 이것이 공포에 질린 지도자들의 후퇴 또는 약삭빠른 술수라고 생각했다. 권력 문제에 대한 레닌의 기본 입장은 이미 말한 바 있었다. 그는 대중의 실제 경험에 입각하여 “4월 테제”를 당이 적용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이 시점 3주일 전에 카메네프는 이렇게 선언했었다: 멘세비키당, 사회혁명당과 함께 임시정부에 대한 공동 결의문을 채택하게 되어 “행복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입헌민주당과 볼셰비키당의 분업 이론을 개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나 이 이론들은 지금 얼마나 먼 과거의 일이 되었는가! 4월 시기의 교훈을 체득하고 나서야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호의적 “통제” 노선을 반대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전 입장에서 조심스럽게 후퇴했다. 그러나 이 책략은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시야에서 사라졌다.

4월의 위험한 며칠이 지난 직후 열린 협의회에서 레닌은 물었다: 당 정책의 어느 부분이 모험주의 노선인가? 혁명적 폭력을 행사할 여지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정세에서 폭력을 동원하려는 시도가 바로 모험주의였다. “인민에게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은 타도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폭군이 없다. 대포와 소총은 자본가가 아니라 병사의 손에 있다. 자본가들은 폭력이 아니라 술수로 정세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은 폭력을 동원하자고 말할 때가 아니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우리는 평화 시위를 외쳤다. 우리는 전투를 원하지 않았다. 적의 역량을 평화적으로 정찰하기만을 원했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는 너무 좌로 기울었다....‘소비에트 만세!’라는 올바른 구호와 함께 ‘임시정부를 타도하라!’는 잘못된 구호를 함께 제시했다. 행동의 순간은 ‘너무 좌로 기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은 최대의 범죄행위인 조직 파괴행위이다.”

계급 역관계의 변화 때문에 혁명은 극적으로 전개된다. 그렇다면 무엇이 계급 역관계를 변화시키는가? 대개는 중간계급, 농민, 소부르주아, 군대 등의 동요가 역관계를 변화시킨다. 입헌민주당의 제국주의와 볼셰비키주의 사이에 거대한 규모의 동요가 존재한다. 이 동요는 동시에 서로 정 반대 방향으로 진행한다. 소부르주아, 이들의 지도자들, 화해주의 지도자 등은 부르주아 계급을 향해 급격히 우경화 한다. 반면 피억압 대중은 매번 더욱 날카롭고 대담하게 좌경화 한다. 뻬쩨르부르그 조직 지도자들의 모험주의를 비판한 레닌은 하나의 예외를 두었다: 중간 대중이 진지하고 심오하고 꾸준하게 우리 쪽으로 움직였다면 우리는 마린스키 궁전의 정부를 즉시 타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이 상황이 오지 않았다. 거리에서 폭발한 4월 위기는 “소부르주아 그리고 반(半)노동계급 대중의 최초나 최후의 동요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임무는 아직도 당분간 “참을성 있게 설명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 쪽으로 대중을 더 깊게 더 의식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때를 준비해야 한다.

4월에 노동계급은 볼셰비키당에게 접근했다. 이것은 4월 정세의 명확히 표현된 특징이었다. 노동자들은 멘세비키당에서 볼셰비키당으로 이적하기 위해 당 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공장에서 이들은 대의원들에게 대외 정책, 전쟁, 이중권력, 식량 문제 등에 대해 끈질기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소속 대의원들은 좀더 빈번하게 볼셰비키당 대의원들로 대체되었다. 공장과 인접한 지구 소비에트에서 급격한 전환이 시작되었다. 비보르그 지구, 바실리예프 섬, 나르바 지구 등의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들은 4월말에 예상 밖으로 갑자기 다수파가 되었다. 이것은 대단한 의의를 지닌 사건이었다. 그러나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상층 정치에 바쁜 나머지 노동자 지구에서 볼셰비키들이 바삐 움직이는 것을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지구들은 더욱 뚜렷하게 중앙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공장에서는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명령 없이 시 소비에트에 나갈 노동자 대의원 재선거의 정열적이고 성공적인 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하노프의 계산에 의하면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의 3분의 1이 5월초에 볼셰비키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3분의 1이 아니었다. 가장 활동적인 3분의 1이었다. 3월의 흐리멍덩한 정치색깔은 사라지고 정치 노선들이 날카롭게 날을 세우고 있었다. 레닌의 “황당한” 테제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지구들에서 진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혁명의 모든 전진은 대중의 직접 개입으로 촉발되거나 강제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소비에트 정당들은 대중의 직접 개입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어느 누구의 허가도 받지 않은 채 노동자와 병사들은 2월 봉기로 왕정을 타도했다. 이후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대중의 역할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치명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대중은 무대에서 내려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8시간 노동제 투쟁이 진행된 3월초에 이미 노동자들은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수도에서 이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소비에트는 자기의 개입 없이 그리고 자기의 의지에 반해 획득된 승리를 그저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4월 시위 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든 대중 행동은 그것의 당면한 목표와 관계없이 지도부에 대한 경고이다. 이 경고는 처음에는 온건하다가 더욱더 결연해진다. 7월이 되면 이것은 지도자들에 대한 위협으로 변한다. 10월에는 사태를 결정하는 최종 행동이 결행된다.

모든 결정적 순간에 대중은 “자발적으로” 개입한다. 다른 말로 하면 정치 경험을 통해 유추한 나름의 결론 그리고 아직도 공인되지 않는 자기 지도자들만을 복종한다. 선동가들의 내용 가운데에서 이런 저런 전제를 소화시킨 대중은 스스로의 의지로 이것의 결론을 행동으로 번역한다. 정당인 볼셰비키당은 8시간 노동제 투쟁을 지도하지 않았다. 그리고 4월 시위에 대중을 부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7월초에 무장 대중을 거리로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10월이 되어야 당은 마침내 대중과 보조를 같이한다. 이때는 시위가 아니라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마침내 당은 대중의 선두에 선다.             

 

제 18장 첫 번째 연립정부

임시정부가 진짜 권력이었다는 주장이 이론, 선언, 광고 등을 통해 공식적으로 수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권력은 문서상으로만 존재했다. 혁명은 소위 민주주의자들의 저항을 무시하며 힘차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대중의 새로운 부위들이 정치무대에 등장했으며 소비에트의 대중 기반이 강화되었다. 또한 제한적으로나마 노동자들이 무장을 시작했다. 한편 지방 정부의 대표들과 이들이 부르주아 단체들을 중심으로 산하에 조직한 “사회 위원회”는 소비에트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밀려났다. 중앙정부의 하수인들이 이에 저항할 경우에는 격렬한 충돌이 발생했다. 이들은 지방 소비에트들이 중앙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부르주아 언론은 크론슈타트, 슐뤼셀부르크 또는 짜리친 등의 지역이 러시아에서 탈퇴하여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지방 소비에트들은 말도 되지 않는 이 주장에 항거했다. 그러자 장관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정부에 참여한 사회주의자들은 문제의 지역에 서둘러 내려가 부르주아 계급을 설득, 위협하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시켰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도 계급 역관계를 바꾸지는 못했다. 이중권력을 붕괴시키는 운명적 과정은 각기 다른 속도로 러시아 전역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것으로 이중권력의 명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금방 드러났다. 소비에트는 정부를 통제하는 기관에서 행정기관으로 바뀌고 있었다. 따라서 권력 분립의 이론 같은 것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군대 행정, 경제적 갈등, 식량과 수송 문제 심지어는 법원에 대해서도 계속 개입했다. 노동자들의 압력을 받자 소비에트는 8시간 노동제를 선포하고 반동 관료들을 제거했다. 또한 봐주기 힘든 임시정부의 대표들을 축출하고 수색 및 체포의 권한을 행사했으며 혁명에 적대적인 신문들을 탄압했다. 식량 및 상품 기근이 계속되자 지방 소비에트는 물가를 정하고 타지방으로의 물자수송을 금지하고 식량을 징발했다. 그러나 전국의 소비에트를 장악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볼셰비키당이 제출한 구호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분노에 차서 거부했다.

이 점과 관련하여 멘세비키 지롱드파의 아성인 트빌리시 소비에트의 활동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체레텔리, 체이제 등은 이 지역 출신이었으며 나중에 뻬쩨르부르그에서 패망하자 이곳으로 몸을 숨겼다. 트빌리시 소비에트의 지도자는 이후 독립 그루지야 공화국의 수반 요르다니아였다. 이 소비에트는 매 순간 다수를 장악한 멘세비키당의 원칙을 훼손하고 단독 권력을 행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비에트가 사용하기 위해 개인 인쇄소를 몰수했으며 반동들을 체포하고 정치범을 수사하고 재판했다. 또한 빵 배급제를 시행하고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가격을 정했다. 소비에트 수립 첫날부터 이중권력에 대한 공식 선언과 현실 사이의 모순은 눈에 두드러졌으며 3월과 4월 내내 계속 증폭되었다.

항상 그렇지는 않았지만 뻬쩨르부르그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예절의 일부는 최소한 지켜졌다. 그런데 4월 시위는 임시정부의 무기력을 숨기고 있던 장막을 활짝 걷어버리고 정부가 수도에서 지지세력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4월의 마지막 10일 동안 정부는 꺼져가는 촛불이었다. “정부는 이미 사라졌으며 업무를 수행하는 대신 업무수행의 조건이나 논의하고 있다고 케렌스키가 괴롭게 말했다”(스탄케비치). 10월 무장봉기 때까지 정부는 어려운 순간마다 위기에 휩싸였다. 그리고 위기의 사이사이에서 그저 목숨을 부지할 뿐이었다. 계속해서 “업무수행의 조건을 논의”했기 때문에 정부는 업무를 수행할 시간이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을 미리 연습하는 것처럼 4월 위기가 터졌다. 이로부터 이론적으로 세 가지 결말이 가능했다. 첫째, 권력이 완전히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어가는 경우인데 이것은 내전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밀류코프는 내전을 기도했지만 실패했다. 둘째, 권력이 완전히 소비에트에게 넘어가는 경우인데 이것은 내전도 필요 없이 손가락만 까딱하거나 마음만 먹으면 가능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것을 원치 않았고 이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감은 많이 상실되었지만 아직 남아있었다. 이 결과 근본적인 결말은 불가능했다. 유일한 결말은 혼란, 미적지근함, 비겁함 등이 혼합된 화해뿐이었다. 이 결말의 이름은 연립정부였다.

4월의 위기가 끝난 후에도 사회주의자들은 연립정부를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아무 것도 예상하지 못했다. 4월 21일의 결의문을 통해 집행위원회는 공식적으로 이중권력을 실제 사실에서 헌법적 원칙으로 전환시켰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너무 늦게 날아갔다: 왕들과 예언자들의 3월 이중권력은 법으로 공식화된 순간 대중 행동을 통해 그 허구가 드러났다. 사회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외면하려 했다. 밀류코프의 말에 의하면 연립정부의 문제가 제기되자 체레텔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부에 참여하는 것이 당신들에게 도움이 됩니까? 당신들이 완고하게 나오면 우리는 문을 꽝 차버리고 정부에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체레텔리는 자기가 나중에 정부를 “꽝” 차버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을 겁주려했다. 근본정책이 항상 그렇듯이 멘세비키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을 생각하여 연립정부가 소용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물은 목까지 차 올랐기 때문에 이것저것 따질 틈이 없었다. 케렌스키는 집행위원회를 겁주었다: “현재 정부는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다. 정부가 사임한다는 소문은 헛소문이 아니다.” 동시에 부르주아 정치권도 집행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 모스크바 시의회는 결의문을 통해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4월 26일 사전작업이 충분히 이루어지자 임시정부는 특별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아직 정부에 참여하지 않은 적극적인 창조적 역량들을” 정부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제 이 문제는 집행위원회로 곧바로 넘어갔다.

그러나 연립정부에 반대하는 정서는 아주 강했다. 4월말 모스크바, 트빌리시, 오데사, 에카테린부르크, 니즈니-노브고로드, 트베르 그리고 기타 지역의 소비에트들은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멘세비키 지도자는 이 정서를 아주 명확히 이렇게 표현했다: 사회주의자들이 정부에 참여하면 대중운동을 “명확한 방향으로” 인도할 세력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이 생각을 이해시키기는 어려웠다. 이것은 이들을 기만과 술수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볼셰비키당으로 넘어오지 않은 대중은 사회주의자들의 정부 참여를 확고히 지지했다. 케렌스키가 장관이 되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그와 같은 인물 6명이 장관이 되는 것은 그만큼 더 좋은 일이라고 이들은 생각했다. 연립정부가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정부이며 이 계급이 사회주의자를 좌익적 외피로 이용하여 인민에 대항할 것이라는 점을 대중은 알지 못했다. 병사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임시정부와는 연립정부에 대한 생각이 달랐다. 이들은 사회주의자들을 이용하여 부르주아들을 정부에서 몰아내려고 했다. 이 동상이몽 때문에 정치적으로 정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있던 두 세력은 연립정부에 대해서는 같은 의견을 보였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볼셰비키당에 우호적인 장갑차 사단을 포함해 여러 군부대가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지방은 압도적 다수로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사회혁명당에서도 연립정부 지지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다만 이들은 멘세비키당이 입각하지 않을 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마지막으로 군대도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6월의 소비에트 대회에서 어느 병사 대의원이 권력 문제에 대한 전선 병사들의 태도를 적절히 대변했다: “신뢰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사회주의자들이 입각을 거부하려 했을 때 병사들은 신음소리를 냈다.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이 정부에 있기 때문에 병사들은 계속 죽어나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병사들의 이 신음소리는 뻬쩨르부르그에서도 틀림없이 들렸을 것이다.”

다른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결정적인 요인은 전쟁이었다. 처음에 사회주의자들은 권력 문제와 마찬가지로 전쟁 문제에서도 그냥 팔짱이나 끼면서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나 병사들은 더 이상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정부의 위기 도중에 전선에서 병사 대의원들이 수도에 도착하여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에게 질문했다: 계속 전쟁을 할 겁니까 말 겁니까? 이 질문의 진짜 의미는 이것이었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당신들이 질 겁니까 말 겁니까? 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합국들 역시 반정도 위협조로 같은 질문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합국들은 4월에 서유럽 전선에서 공세를 감행하여 큰 피해를 보았으나 이렇다할 결과를 얻지는 못했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과 큰 희망을 걸었던 공세의 실패로 프랑스 군대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뻬뗑 원수의 말을 빌면 군대가 “우리 손안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이 위협적인 상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군대의 공세가 필요했다. 그리고 실제 공세 이전에 일단 공세를 감행하겠다는 확고한 약속이 필요했다. 물리적인 도움도 필요했지만 러시아 혁명이 평화를 약속한다는 병사들의 막연한 기대감을 빨리 무너뜨릴 필요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 병사들의 희망을 꺾는 것과 동시에 러시아 혁명을 연합국들의 범죄와 연관시켜 혁명의 대의를 시급히 훼손해야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제국주의 살육의 피와 진흙탕 속에 러시아 혁명의 깃발을 될수록 빨리 더럽히고 짓밟는 것이 필요했다.            

이 고상한 목적을 위해 모든 수단들이 동원되었다. 연합국의 애국적 사회주의자들도 하나의 수단으로 동원되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경험이 많은 자들이 러시아로 보내졌다. 이들은 아양떠는 양심과 줏대 없는 말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외국의 사회애국주의자들은 마린스키 궁전의 환대를 받았다. 브란팅, 까쉥, 오그래디, 드 부르케르 등은 이 궁전을 자기 집처럼 편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장관들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소비에트에 대항했다.” 화해주의자들이 장악한 소비에트조차 종종 이 작자들을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전선을 순회했다. 반더벨드는 이렇게 적었다: “흑해 수병 대표단, 케렌스키, 알버트 토머스 등이 조금 일찍 펼쳤던 노력과 우리의 노력이 같은 목적에 기여하도록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이 모든 노력들은 공세를 위한 도덕적 준비를 끝낼 것이었다.” 민주주의의 영광스러운 이상을 실현하는 투쟁에서 제 2 인터내셔널의 의장과 니콜라스 2세의 총사령관은 이렇게 공통의 언어를 찾아냈다. 프랑스 사회주의 지도자 르노델은 안심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필요 없이 우리는 이제 정의로운 전쟁에 대해 말할 수 있다.” 이로부터 3년이 지나 이 작자들은 러시아의 내전에서 백군을 지지했다. 결국 인류는 이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붉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별의별 동요를 다 겪은 후 집행위원회는 5월 1일에 41표의 찬성, 18표의 반대, 3표의 기권으로 연립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볼셰비키당과 소규모의 멘세비키 국제주의자들만 반대표를 던졌다.

그런데 민주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 연립정부를 통해 더 밀접하게 화해한 결과가 흥미롭다. 부르주아 계급의 공인된 지도자 밀류코프가 정부에서 쫓겨난 것이었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정부를 나가지 않았다. 다만 쫓겨났을 뿐이었다.” 전쟁장관 구츠코프는 “병사 권리 선언문”에 서명을 거부하며 4월 30일 사임했다.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연립정부를 살리기 위해 밀류코프의 사임을 반대하지 않았다. 이것만 보아도 이 당시 자유주의자들의 속이 얼마나 검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입헌민주당 우파의 이스고예프는 “당이 지도자를 배신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 그는 아주 올바르게 이렇게 말했다: “4월말에 입헌민주당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 도덕적 치명타 때문에 당은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밀류코프의 거취를 최종적으로 결정한 세력은 연합국들이었다. 밀류코프는 러시아가 다다넬스 해협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좀더 온화한 “민주주의자”가 대외정책을 담당하는 것을 영국은 완전히 지지했다. 헨더슨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부캐넌 대신 러시아 대사가 될 권한을 부여받은 후 뻬쩨르부르그에 머물고 있었다. 그는 상황을 파악한 후 부캐넌이 계속 대사로 남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부캐넌은 적임자였다. 왜냐하면 그는 영국의 정복욕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연합국들의 영토병합을 열렬히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테레쉬첸코에게 부드럽게 속삭였다: “러시아는 콘스탄티노플을 원치 않는다는 발표는 빨리 할수록 좋습니다.” 프랑스는 처음에 밀류코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토머스가 자기 역할을 했다. 그는 부캐넌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자들과 함께 밀류코프를 반대했다. 이렇게 해서 대중이 증오한 밀류코프는 연합국 정부들,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가 창립한 당에 의해 버림받았다.

밀류코프는 이런 잔인한 벌을 받을 정도로 나쁜 짓을 하지는 않았다. 최소한 그를 반대한 자들로부터 모욕을 당할 정도로 잘못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연립정부는 자신을 정화하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다. 민주적 평화를 향한 모두 노력을 어둡게 만든 악령이 밀류코프라고 대중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연립정부는 밀류코프의 목을 쳐서 제국주의의 죄악으로부터 자신을 단번에 정화시켰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5월 5일 연립정부의 장관들과 강령을 인준했다. 볼셰비키당은 100표를 결집시켜 인준에 반대했다. 밀류코프는 비꼬는 투로 자기를 몰아낸 소비에트 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연설자들과 장관들의 발언을 따뜻하게 환영했다. 그리고 똑같은 열광적 환호로 ‘1905년 혁명의 지도자’ 트로츠키를 환영했다. 전날 미국에서 귀국한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그는 ‘이중권력’이 파괴된 것이 아니라 ‘연립정부로 전이되었을 뿐’이며 ‘권력이 노동자 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에게 넘어가는 다음 단계에서만’ 러시아를 ‘구원’할 유일한 세력이 형성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국가와 국가가 겨루는 대신 고통받고 억압받는 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새로운 유혈과 철의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류코프의 표현에 의하면 트로츠키는 대중이 채택해야할 정책의 세 가지 규칙을 제시했다 --- “세 가지 혁명 신조: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지도자들을 통제해야한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만 믿어야한다.” 이 연설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트로츠키는 자기 연설에 대해 아무도 공감하지 않을 것이라고 틀림없이 예상했을 것이다.” 사실 트로츠키는 연단에서 내려올 때보다 올라갔을 때 훨씬 더 많은 박수를 받았다. 지식인들이 회의장 복도에 서서 하는 말과 행동에 대단히 민감한 수하노프는 이렇게 덧붙인다: “트로츠키는 볼셰비키당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레닌보다 더 형편없는 인물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사회주의자들은 15개의 장관직 가운데 6개를 차지했다. 이들은 연립정부 안에서도 소수파가 되기를 원했다. 입각을 공개적으로 결정한 후에도 이들은 계속 양보 게임을 했다. 르보프공은 수상으로 유임되었고 케렌스키는 전쟁 및 해양 장관이 되었다. 체르노프는 농업장관이 되었다. 그리고 테레쉬첸코는 밀류코프를 대신해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는 케렌스키, 영국 대사 부캐넌 등과 속을 터놓고 지내는 내밀한 친구였는데 발레 애호가였다. 이들은 러시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지 않고도 번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법무장관에는 무명의 변호사 페레베르제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7월에 볼셰비키당을 탄압하면서 일시적으로 영광을 누렸다. 체레텔리는 집행위원회에 계속 시간을 할애하기 위해 체신장관을 맡았다. 노동장관이 된 스코벨레프는 장관이 된 기쁨에 흥분하여 자본가들의 이윤을 100%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이 말은 곧 날개를 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결국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모스크바의 대자본가 코노발로프가 상공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모스크바 증권거래소의 유명인사들을 정부 요직에 앉혔다. 그런데 2주일 후 공공경제의 “무정부성”에 항의하여 그는 장관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스코벨레프는 2주일도 되기 전에 이윤을 공격하겠다는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고 경제의 무정부성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파업을 진정시키고 노동자들에게 자제력을 발휘해 달라는 호소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모든 연립정부들이 그렇듯이 새 정부도 선언문을 상투어로 채웠다. 평화를 추구하기 위한 적극적 대외정책, 식량문제 해결, 토지문제 해결을 위한 준비 완료 등이 언급되었는데 모두 말장난에 불과했다. 최소한 의도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지한 부분은 “러시아와 연합국들의 패배를 막기 위한 방어 및 공격 작전에” 군대를 준비시킨다는 내용이었다. 연립정부의 의의는 이 말 속에 핵심적으로 전부 포함되었다. 결국 연립정부는 연합국들이 러시아를 가지고 놀기 위한 최후의 시도였다.

부캐넌은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의 연립정부는 러시아 전선에서 군사적 구원의 마지막이자 거의 유일한 희망이다.” 따라서 2월 혁명의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지도자들이 제시한 강령, 연설, 타협, 표결 등의 뒤에는 연합국이라는 제국주의 무대 감독이 서 있었다. 연합국들은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전선을 강화시킨다는 미명하에 사회주의자들은 서둘러 연립정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이들은 정부의 3분의 1과 전쟁 전체에 대한 책임을 떠맡았다.

신임 외무장관은 3월 27일 선언문에 대한 연합국 정부들의 응답을 2주일간 공개하지 않았다. 연립정부의 선언문에 반대하는 연합국들의 주장을 위장하기 위해 응답의 문구를 일부 수정해야했기 때문이었다. 테레쉬첸코는 구체제 서기들이 작성했던 외교 전보의 문구를 열심히 수정하여 “평화를 위한 적극적 대외정책”을 나름대로 표현했다. “요구” 대신 “정의의 요구”, “이해를 확보하는” 대신 “인민들의 이익을 위해”라는 문구가 들어갔다. 분노로 이빨을 약간 갈면서 밀류코프는 신임 외무장관을 이렇게 평했다: “그가 연합국 정부에 보낸 외교 전보들의 ‘민주적’ 어구는 일시적 요구들에 마지못해 양보한 결과라는 것을 연합국 외교관들은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것을 제멋대로 해석했다.”

토머스와 새로 도착한 반더벨드도 팔짱을 끼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들은 열심히 “인민들의 이익”을 연합국들의 필요에 일치하도록 해석했으며 집행위원회의 바보들을 움직이는데 상당히 성공했다. 반더벨드는 이렇게 보고했다: “스코벨레프와 체르노프는 시기상조인 평화를 주창하는 자들에게 열렬히 저항했다.” 이 조수들에 의존하여 프랑스 수상 리보는 5월 9일 자신 있게 프랑스 의회에서 선언했다: “조금의 양보도 없이” 테레쉬첸코에게 만족스러운 답장을 보내겠다.

정세의 진짜 주인들은 널려있는 이익을 조금이라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바로 이즈음 이탈리아는 알바니아의 독립을 선언한 후 이 나라를 즉시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강도 본성을 보여준 좋은 예였다. 임시정부는 민주주의의 미명을 위해서가 아니라 “발칸반도의 균형”을 파괴한 이탈리아에 대해 항의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무기력한 임시정부이므로 당분간 혀를 깨물고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연립정부의 대외정책에서 새로운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미국과의 성급한 화해였다. 이 새로운 우호관계는 세 가지 중요한 장점이 있었다: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미국은 군사적 악행으로 이름이 많이 더럽혀지지는 않았다; 대서양 저편에 있는 미국은 러시아에게 신용대부와 군사물자를 대폭 제공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민주적 경건함과 협잡이 결합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외교는 임시정부의 수사적 필요에 아주 적합했다. 루트를 단장으로 한 러시아 사절단을 보내면서 윌슨은 마치 교구민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임시정부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어느 나라 인민도 강제로 지배당하지 말아야한다.” 미국 대통령은 전쟁의 목적을 두루뭉실하게 속이듯이 규정했다: “...전쟁의 목적은 미래의 세계평화, 복지, 행복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표현이 어디 있겠는가! 테레쉬첸코와 체레텔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용대부와 평화주의의 상투적 표현이었다. 전자의 도움과 후자의 외피로 이들은 전선의 공세를 준비할 수 있었다. 세느강의 샤일록인 프랑스 금융자본가들은 당연히 약속 어음을 맹렬하게 흔들면서 이 공세를 요구하고 있었다.

5월 11일 케렌스키는 전선을 순시하면서 공세를 지지하는 선동을 했다. 신임 전쟁장관은 자기 열성에 목이 메어 이렇게 보고했다: “공세에 대한 열정이 군대 내에서 상승하고 확산되고 있다.” 5월 14일 그는 군대에 명령을 내렸다: “지휘관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매력이 없는 잘 알려진 전망을 장식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였다: “여러분은 총검 끝에 평화를 걸고 다닐 것이다.” 5월 22일 줏대 없이 조심스러웠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 좀더 융통성이 있으며 진취적인 브루쉴로프가 임명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모든 힘을 다해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2월 혁명에게 거대한 재앙이 될 운명이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기관이었다. 여기서 병사는 물론 농민을 의미했다. 임시정부는 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이었다. 접촉위원회는 화해의 기관이었다. 임시정부를 접촉위원회로 변환시킴으로써 연립정부는 이 구조를 단순화시켰다. 그러나 이중권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체레텔리가 접촉위원회 위원이든 체신장관이든 아무 소용이 없었다. 러시아 전역에는 서로 화해할 수 없는 두 국가기구가 존재했다. 임시정부를 정점으로 한 신구 관료들의 위계질서가 첫 번째 국가기구였고 전선의 말단 중대까지 내려간 소비에트의 선거구조가 또 하나의 국가기구였다. 이 두 국가기구는 역사적 결전을 준비만 하고 있는 서로 다른 계급을 토대로 했다. 연립정부에 참여하면서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체제가 평화적으로 서서히 해체되기를 기대했다. 자기들이 장악하고 있는 소비에트 권력이 공식 정부에 포섭될 것으로 이들은 상상했다. 케렌스키는 부캐넌에게 단언했다: “소비에트는 자연스럽게 소멸할 것이다.” 이 희망은 즉시 화해주의 지도자들의 공식 노선이 되었다. 이들의 사고에 따르면 중력의 중심이 지역 소비에트에서 새로운 자치 기관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앙위원회는 제헌의회로 대체되어야한다. 이렇게 해서 연립정부는 부르주아 의회공화국으로 나아가는 가교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혁명은 이 노선을 원치도 않았고 원할 수도 없었다. 이것이 문제였다. 이런 의미에서 새로 소집된 시의회들의 운명은 명확한 경고였다. 시의회 선거는 참정권을 최대한 확대하면서 실시되었다. 병사들은 도시민들과 함께 여성은 남성과 함께 똑같이 투표했다. 4개 정당들이 선거에 참여했다. 노보예 브렘야(신 시대)지는 짜르 정부의 신문이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부정직한 신문 가운데 하나였다. 이것만해도 이 신문의 성격이 짐작될 것이다. 이 신문은 우익, 민족주의자, 10월당 등에게 입헌민주당을 찍으라고 촉구했다. 그러나 유산 계급들의 정치적 무기력이 완전히 명백해지자 대다수 부르주아 신문들은 “볼셰비키당을 제외하고 원하는 모든 당에게 표를 던지자!”는 구호를 채택했다. 각급 의회에서 입헌민주당은 우익이었으며 볼셰비키당은 세력이 커지고 있는 좌익 소수파였다. 다수파는 언제나 엄청난 지지를 얻고 있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었다. 새로 소집된 각급 의회들은 소비에트보다 더 광범위한 대의기구였으므로 커다란 권위를 누려야할 것 같았다. 더욱이 사회적 법적 기관인 의회는 공식 정부의 지지란 엄청난 장점을 누리고 있었다. 민병대, 식량 공급 기관, 수송 체계, 인민 교육 등은 공식적으로 의회의 소관이었다. “사적” 기관인 소비에트는 예산도 권한도 없었다. 그러나 권력은 소비에트에게 있었다. 결국 의회는 소비에트의 지방자치단체 위원회에 지나지 않았다. 의회와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장악한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소비에트가 의회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깊이 확신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와 공식 민주주의 기관인 의회는 실제 권력을 행사하는 점에 있어서 상당한 격차가 있었다. 실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놀라운 현상은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설명을 하자면 간단하다: 민주주의의 모든 기관들과 같이 지방 정부는 확고히 정착된 사회적 관계 즉 명확한 소유체제에 기초해야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의 근본 초석인 소유체제를 의문시하는 것이 혁명의 핵심 성격이다. 그리고 혁명을 통해 계급 역관계가 공개적 시험을 거친 후에야 이 의문은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비록 지도부가 문제였지만 소비에트는 억압받는 계급들의 투쟁조직이었다. 따라서 이 계급들은 의식적이든 또는 반(半)의식적이든 단결하여 사회구조의 기초인 소유체제를 변모시켰다. 지방 정부들은 시민이라는 추상으로 환원된 모든 계급들에게 똑같은 참정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혁명 상황에서는 제한된 그리고 위선적인 언어를 구사하는 외교관계 회의와 같았다. 한편 정부 내부의 적대 진영들은 전투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혁명의 일상에서 지방 정부들은 반(半)허구적으로 존재를 연명해갔다. 그러나 대중의 개입이 정치적 사건들의 방향을 규정하는 결정적 순간에 지방 정부들은 공중 분해되어 그 구성 부분들은 바리케이드의 양쪽 반대편에 떨어졌다. 5월부터 10월까지 소비에트와 지방 정부들의 역할을 비교하기만 하면 제헌의회의 운명을 예측할 수 있었다.

연립정부는 제헌의회 소집을 전혀 서두르지 않았다. 민주주의 산술에 의하면 정부의 다수파인 자유주의자들은 새로 소집된 각급 의회에서처럼 제헌의회에서도 허약한 우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것 때문에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혁명이 승리한 지 3개월이 지난 5월말이 되어서야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특별 협의회가 작업을 시작했다. 자유주의 법학자들은 모든 머리카락을 16 등분해서 모든 종류의 민주적 퇴적물을 증류기에 넣고 뒤흔들었다. 또한 군대의 선거권에 대해 끝없이 말다툼을 했다. 예를 들어 수백만에 달하는 도망병들에게 선거권을 줄 필요가 있는 지 그리고 수십 명에 불과한 짜르 왕족에게 선거권을 줄 필요가 있는 지에 대한 논의가 분분했다. 그러나 제헌의회 소집 날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말을 삼갔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회의 예절을 어기는 행위였다. 이것은 볼셰비키들만 할 수 있는 나쁜 짓으로 간주되었다.

여러 주일이 지났으나 화해주의자들의 희망 섞인 예언과 달리 소비에트는 소멸하지 않았다. 가끔 지도자들에 의해 침체하고 혼란을 겪었으나 소비에트는 빈사상태로 떨어지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위험의 징조가 처음 나타나는 순간 소비에트는 벌떡 일어나 자기가 정세의 진짜 주인이라는 사실을 모두에게 인식시켰다. 소비에트를 마비시키려 애쓰면서도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중요한 일이 터질 때마다 소비에트를 우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점은 두 정당의 최상 분자들이 소비에트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지방 의회와 정부에는 제 2진에 속하는 기술자들과 행정가들이 임명되었다. 이 현상은 볼셰비키당에도 적용되었다. 소비에트에 접근할 수 없는 입헌민주당만 최상 분자들을 자치 정부 기관들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가망 없는 소수파로 몰린 부르주아들은 이 기관들을 진정한 지지기반으로 전환시킬 수 없었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지방 정부를 자기 기관이라고 간주할 수 없었다. 노동자와 자본가, 병사와 장교, 농민과 지주 사이의 격화되는 갈등은 지방 정부나 의회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수 없었다. 이 논의는 한편으로는 소비에트에서 또 한편으로는 의회의 “사적” 회의와 “참정권을 누리는” 정치인들의 각급 협의회에서 끼리끼리 진행되었다. 사소한 일은 적과 논의할 수 있으나 죽고 사는 문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정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이다. 이 맑스주의 공식을 인정한다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는 계급들의 진정한 “집행위원회”는 연립정부 바깥에 존재했다. 사회주의자들의 입각으로 소비에트는 정부 내에서 소수파였다. 그러나 소비에트 자체는 이중권력의 한 축이 되어 정부와 무관하게 권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정부의 다수파인 부르주아 계급도 정부 내에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대단히 중요한 문제들을 자유주의자들은 정부 내부에서 사회주의자들이 보는 앞에서 진지하고 냉철하게 논의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했다. 부르주아 계급의 공인된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는 지도자이며 유산자들의 지도부를 거느린 밀류코프가 정부에서 밀려난 사건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 정부는 모든 의미에서 껍데기에 불과한 기이한 존재이며 이 사실은 너무 명백하게 드러났다. 일상은 두 축을 중심으로 돌고 있었다. 한 축은 마린스키 궁전의 좌에서 또 한 축은 우에서 돌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들을 정부 내부에서 까놓고 말할 수 없게 되자 장관들은 스스로 정한 협약에 따라 논의하고 움직였다. 연립정부에 의해 은폐된 이중권력은 이율배반과 동상이몽의 학교가 되었다. 다음 6개월 동안 위기, 재건, 개각 등을 겪으면서 연명한 연립정부는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근본 특징인 무기력과 위선을 계속 유지했다.               

 

 

제 19장 러시아군의 공세

러시아 전국과 똑같이 군대에서도 정치적 재편이 계속 되어 하층 부위는 좌로 상층 부위는 우로 움직였다. 집행위원회는 연합국들을 위해 혁명을 길들이는 도구가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 지휘부에 대항하여 병사들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수립된 병사위원회는 병사들을 제압하려는 지휘부의 도구로 전환되고 있었다.

병사위원회의 내적 구성은 다양했다. 우선 전쟁과 혁명의 목적이 같다고 진정으로 생각한 애국주의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들은 상부에서 강요한 공세에 용감하게 가담하여 자기 이익과는 무관한 대의에 목숨을 바쳤다. 이들 옆에는 케렌스키처럼 말만 앞서는 자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참호에서 빠져 나와 언제나 특권을 노리는 치사한 사기꾼과 뺀질이도 적지 않았다. 모든 대중운동은 특히 초기에 온갖 성향의 인간들을 지도자로 격상시킬 수밖에 없다. 그리고 특히 화해의 시기에는 허풍선과 카멜레온이 판을 친다. 사람이 강령을 만들지만 강령 또한 사람을 만든다. “접촉” 정치의 파벌은 혁명의 와중에는 사기 및 음모의 파벌이 된다.

이중권력 상태는 군사력 양성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입헌민주당원들은 대중의 증오를 샀기 때문에 군대에서 자신을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소개했다. 민주주의자들은 권력을 잡을 수 없듯이 군대도 소생시킬 수도 없었다. 이 두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임시정부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병사들의 행진을 단 한번도 조직하지 않았다. 수하노프가 호기심을 가지고 언급하는 이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아주 잘 조명하고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장군들은 소비에트가 자기들이 조직한 행진에 참여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없이는 행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위 장교들은 갈수록 입헌민주당과 유착했다. 그리고 더 반동적인 정당들이 등장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부르주아 지식인층은 짜르 치하의 경우와 같이 군대의 하급 장교들을 상당수 배출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모습대로 지휘부를 수립할 수 없었다. 자기 모습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혁명 과정이 보여주듯이 백군이 했듯이 귀족이나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지휘부를 충원하던가 볼셰비키당이 했듯이 노동계급을 새로 훈련시켜 지휘부를 양성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었다. 설득하고 호소하면서 모두를 속이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일 전부였다. 그리고 이것이 아무런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면 이들은 절망한 채 권력을 반동 장교들에게 넘기고 이들이 인민에게 올바른 혁명 사상을 가르치게 내버려두었다. 

구 사회의 궤양들은 하나씩 순서대로 퍼져나가 군대의 조직을 파괴시켰다. 민족 구성이 다양한 러시아에서 온갖 형태를 띠고 등장한 민족문제는 대러시아인이 절반도 채 되지 않는 병사 대중 속으로 갈수록 깊게 파고들었다. 민족 갈등이 계급 갈등과 모든 방향에서 중첩되었다. 모든 문제에 대해 그렇듯이 민족문제에 대해서도 정부의 정책은 동요와 혼란을 보이면서 이중으로 배신을 때리는 것처럼 보였다. 일부 장군들은 루마니아 전선에 등장한 “프랑스 군대의 규율을 가진 이슬람교도 군단” 등의 민족 단체들과 놀아났다. 이 단체들은 일반적으로 구 군대에서 가장 강인한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새로운 사상과 깃발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민족적 단합도 오래가지 못했다. 계급투쟁이 민족 단체들을 분열시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단체들의 형성 과정 자체가 군대의 절반에 영향을 미칠 태세였다. 이 결과 군대는 조직 구조가 녹아내려 새로운 부대가 생기기도 전에 옛날 부대는 붕괴했다. 이렇게 온갖 방면에서 온갖 불행이 군대를 괴롭혔다.

밀류코프는 자신이 쓴 역사책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혁명’ 사상과 군대의 정상적인 규율 사이의 갈등 그리고 ‘군대의 민주화’와 ‘군대의 전투력 보존’ 사이의 갈등 때문에” 군대는 붕괴했다. 여기서 군대의 “정상적인” 규율은 물론 짜르 치하의 규율을 의미한다. 그러나 거대한 혁명은 전부 구체제의 군대를 멸망시켰다. 역사가라면 이 정도의 법칙은 알아야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 법칙은 추상적인 규율의 원칙이 빚어낸 결과가 아니다. 살아있는 계급들이 충돌하면서 나온 결과일 뿐이다. 혁명은 군대의 엄격한 규율을 허용할 뿐만 아니라 창조하기도 한다. 다만 혁명으로 타도된 구 지배계급들에 의해 이렇게 되지는 않는다.

1851년 9월 26일 지혜로운 어느 독일인이 역시 지혜로운 어느 독일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군대의 해체와 규율의 철저한 붕괴는 승리한 모든 혁명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조건이었다. 이 사실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의 눈에는 명백히 드러난다.” 인간의 역사 전체는 이 단순하고도 의심의 여지없는 법칙을 증명한다. 그러나 1905년 혁명을 경험하고도 러시아의 자유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이 법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자들은 엥겔스와 맑스라는 두 지혜로운 독일인을 자기들의 스승이라고 불렀다. 더욱이 이들은 군대가 혁명 후에도 구체제 지휘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또한 이 사회주의자 멘세비키들은 볼셰비키들을 유토피아(공상)나 추구한다고 비난했다!

5월초 브루쉴로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의 회의에서 군 지휘부의 상태를 간략하게 규정했다: 15%에서 20%의 장교들은 확신을 가지고 새 질서에 적응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장교들은 병사들과 놀아나면서 이들이 지휘부에 저항하도록 부추기고 있다; 그러나 약 75%의 장교들은 혁명 이후의 상황에 적응하지 못해 분노하면서 자기의 껍질 속에 몸을 숨기고는 무엇을 해야할 지 모르고 있다. 덧붙이자면 압도적 다수의 장교들은 순전히 군사적 의미에서 쓸모가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장군들과의 회의에서 케렌스키와 스코벨레프는 슬프게도 “계속되고 있는” 혁명에 대해 변명하면서 이 사실을 고려해 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대해 흑백인조 장군 구르코는 이 장관들에게 도덕적인 설교를 늘어놓았다: “혁명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말을 들어주세요. 일단 혁명을 멈추어 주시고 우리 군대가 끝까지 임무에 충실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케렌스키는 충심을 다해 장군들을 만났다. 그러다가 결국 용감한 코르닐로프 장군은 그를 거의 목 졸라 죽일 뻔했다.

혁명기에 화해주의 정책을 구사하려면 적대 계급들 사이를 열심히 왔다갔다 해야한다. 케렌스키는 바로 이 정책의 화신이었다. 명확하고 간결한 체계가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기관이 바로 군대이다. 그런데 이 기관의 우두머리가 된 케렌스키는 곧바로 군대를 붕괴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데니킨 장군은 최고 지휘부의 인사 이동에 대해 흥미로운 목록을 공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인사 이동은 완전히 과녁을 빗나갔으며 그 내막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전쟁장관 케렌스키도 이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인사 이동의 진짜 대상자는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병사위원회에 너무 양보한다는 이유로 전선 사령관인 루즈키 장군과 육군 사령관 라드코-드미트리예프 장군을 해임시켰다. 한편 알렉세이예프 장군의 후임인 브루쉴로프 장군은 공포에 질린 유데니치를 같은 이유로 해임시켰다. 한편 케렌스키는 총사령관 알렉세이예프 장군, 전선 사령관 구르코 장군과 드라고미로프 장군을 군대의 민주화에 저항한다는 이유로 해임시켰다. 같은 이유로 브루쉴로프 장군은 칼레닌 장군을 해임시켰고 자신 역시 병사위원회에 너무 양보한다는 이유로 이후 해임되었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민주주의자들과 좋은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어서 뻬쩨르부르그 관구 사령관을 사임했다. 그러나 그는 이후 전선 사령관과 총사령관이 되었다. 데니킨 장군은 봉건적 행정 방식 때문에 알렉세이예프 총사령관의 참모장 직책에서 해임되었으나 곧 서부 전선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등 타넘기 식 인사 이동은 최고 지휘부의 방향 상실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질병은 서서히 하부로 전염되어 중대에까지 내려가 군대의 붕괴를 재촉했다.

정부에서 보낸 인민위원들은 장교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병사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자신들은 장교들을 신뢰하지 않았다. 공세가 절정에 달했던 시점에 모길레프의 전쟁 총사령부 본부에서 소비에트 회의가 열렸다. 이때 어느 소비에트 대의원이 케렌스키와 브루쉴로프가 보는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휘부 장교의 88%는 반혁명을 조장하고 있다.” 이 사실을 병사들은 뻔히 알고 있었다. 이들은 혁명 이전부터 장교들을 많이 접했기 때문에 이들의 정체를 잘 알고 있었다.

5월 내내 지휘부의 보고서는 최고위부터 최하위까지 한가지 주제를 다양하게 연주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일반적으로 공세에 대해 부정적이다. 특히 보병의 경우는 더 그렇다.” 때때로 이들은 이렇게 덧붙였다: “기병의 경우는 좀 괜찮고 포병은 충분히 긍정적이다.”

공세 준비가 완료된 5월말 제 7군 인민위원은 케렌스키에게 전보를 보냈다: “제 12 사단 제 48 연대 병력 전체는 공세에 투입되었다. 제 45 및 46 연대는 전체 중대들의 반 정도만 공세에 투입했다. 제 47 연대는 공세를 거부하고 있다. 제 13 사단에서는 제 50 연대만 병력 전부를 공세로 투입했다. 제 51 연대는 내일 공세에 나서기로 약속했으며 제 49 연대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제 52 연대는 공세에 나서기를 거부한 후 장교들을 모두 체포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상황은 비슷했다. 인민위원의 보고에 대해 정부는 이렇게 응답했다: “제 45, 46, 47, 52 연대를 해체시키고 장교와 병사들의 명령 거부를 조장한 자들을 군사 법정에 회부하라.” 이 내용은 끔찍했으나 아무도 겁먹지 않았다. 전투를 원치 않았던 병사들은 부대의 해체나 군사법정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병사들을 배치할 때는 한 부대가 다른 부대를 감시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짜르 치하와 마찬가지로 억압의 도구로 카자흐 기병대가 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이제 이들도 사회주의자들의 명령을 받았다. 혁명을 방어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공세를 2주 남긴 6월 4일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은 이렇게 보고했다: “북부 전선은 여전히 들끓고 있다. 병사들이 독일군 병사들과 우애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보병은 공세에 반대하고 있다....서부 전선의 상황은 불투명하다....남서 전선에서는 분위기가 일부 개선된 것이 눈에 보인다....루마니아 전선에서는 상황이 호전된 기미가 없다. 보병은 진격을 원치 않는다.”

6월 11일 제 61 연대장이 이렇게 적고 있다: “장교들과 나는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외에 할 일이 없다. 왜냐하면 뻬쩨르부르그에서 도착한 제 5 중대의 병사 한 명이 레닌주의자이기 때문이다....가장 뛰어난 장교들과 병사들 다수는 이미 탈영했다.” 연대에 레닌주의자 하나가 들어왔다고 장교들이 도망칠 리는 없었다. 다만 이 병사는 포화상태의 용액에서 처음 생긴 결정체였음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것은 볼셰비키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당시 공세에 반대하여 대담한 발언을 감행한 병사는 모두 레닌주의자로 분류되었다. 다수의 “레닌주의자”들은 독일 황제 빌헬름이 레닌을 스파이로 채용하여 러시아로 보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제 61 연대장은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정부가 엄벌을 내릴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자 병사 하나가 이렇게 응답했다: “우리는 구 정부를 타도했다. 우리는 케렌스키도 타도할 것이다.” 이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이었다. 병사들은 볼셰비키들의 선동으로 각성했으나 이들의 사고는 선동의 내용을 훨씬 뛰어넘었다.

사회혁명당의 지도를 받고 있던 흑해 함대는 발트해의 크론슈타트 수병들과 달리 애국주의의 아성으로 간주되었다. 이 함대는 수병복으로 갈아입은 활발한 대학생 바트킨을 단장으로 300명의 특별파견단을 4월말 전국에 보냈다. 이 파견단은 허세도 많이 부렸으나 좀더 진지한 충동을 드러내어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자는 노선을 유포시켰다. 그러나 일주일 일주일이 지나면서 청중은 이들에게 갈수록 적대감을 드러냈다. 이 때문에 흑해 수병들은 전쟁 지지의 목소리를 낮추어야했다. 바로 이때 발트해 파견단이 흑해의 세바스토폴에 도착하여 평화를 주창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간 발트해 파견단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간 흑해 파견단보다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영향을 받아 세바스토폴 수병들은 6월 8일 함대 지휘부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가장 증오스러운 장교들을 체포했다.

소비에트 대회의 6월 9일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질문했다: “애국주의 파견단을 전국에 보낸 모범적인 흑해 함대는 애국주의 조직의 아성이다. 그런데 이 결정적인 시점에 수병들이 지휘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이 사건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그러나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성과 방향감각을 완전히 상실한 군대는 병사, 지휘관, 병사위원회 모두를 괴롭혔다. 이들 모두는 참을 수 없는 현 상황에서 탈출하려는 강렬한 욕구를 보였다. 지도자들은 공세가 이 엉망진창을 극복하고 명확성을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 생각은 어느 정도 옳았다. 체레텔리와 체르노프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온갖 민주적 수사를 조심스럽게 구사하면서 공세를 지지했다. 전선의 병사위원회는 장교들과 단결했다. 이 결과 전쟁과는 양립할 수 없고 혁명에 필수적인 새로운 세력에 대항해 병사위원회는 투쟁해야했다. 이 변화는 곧 눈에 드러났다. 어느 해군 장교가 이렇게 말한다: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병사위원회는 눈에 띄게 우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병사와 수병들 사이에서 이들의 권위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그런데 병사와 수병들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전쟁은 불가능했다!

케렌스키의 승인을 받아 브루쉴로프는 자원 병사들로 돌격 대대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군대가 전투 능력을 상실했음을 솔직히 인정하는 행위였다. 이 대대에는 온갖 종류의 분자들이 즉시 모여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무라비에프 대위 같은 모험주의자들이었다. 그는 10월 혁명이 승리하자 곧바로 사회혁명당 좌파가 되더니 나름대로 뛰어난 파란 만장한 경력을 쌓은 후 결국 소비에트 권력을 배신했다. 아마 그는 볼셰비키의 총탄에 사망했거나 자살했을 것이다. 한편 반혁명 장교들은 돌격 대대 구성에 끈덕지게 매달리면서 이것을 자기 세력을 결집시키는 합법적 방법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이 움직임에 대해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험을 즐기는 일부 여성들은 “흑사병 경(輕)기병” 여성 대대들을 구성했다. 이 중의 한 대대는 10월에 동궁과 케렌스키를 방어한 최후의 무장병력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전쟁의 궁극 목적인 독일 군국주의 타도에는 거의 도움이 되지 못했다.

연합국들에게 약속한 초봄 공세는 일주일씩 계속  연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연합국들은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기로 확고히 결정했다. 즉각적인 공세를 압박하기 위해 연합국들은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반더벨드의 애처로운 간청과 더불어 이들은 군사물자의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모스크바의 이탈리아 총영사는 이탈리아 언론이 아니라 러시아 언론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러시아가 교전국들과 개별적으로 평화협정을 맺을 경우 연합국들은 일본이 시베리아를 맘대로 점령하게 내버려둘 것이다. 로마가 아니라 모스크바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이 거만한 위협에 열광하여 애국주의 논조로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단독 평화협정이 아니라 공세를 재촉하기 위해 이 협박을 이용했다. 다른 측면에서도 연합국들은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예를 들어 이들은 망가진 대포를 러시아에 보냈다. 연합국들이 제공한 무기의 35%는 2주일만 조심스럽게 사격하면 망가졌다. 영국은 신용대부를 중단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새로운 은인인 미국은 영국 몰래 임시정부에 7천5백만 달러를 빌려주었다. 이에 대한 담보물은 물론 새로운 공세였다. 러시아 자본가들은 열화와 같이 공세를 촉구하면서 연합국들의 요구를 지지했다. 그러나 전쟁에 필요한 돈 즉 자유 대부는 제공하지 않았다. 공세가 성공할 것이라고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타도된 왕정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자기 존재를 부각시켰다. 임시정부의 명의로 발표한 선언문에서 로마노프 왕가는 전쟁 대부를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렇게 덧붙였다: “재무부가 짜르 왕가를 부양할 자금을 제공해야한다.” 군대는 이 움직임을 모두 읽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장관 대다수 뿐 아니라 고위 장교의 대다수도 왕정 복귀를 원한다는 것을 병사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러시아 군대를 벼랑으로 몰고 가는 반더벨드, 토머스, 까쉥 등의 노력에 연합국들 전부가 동의하지는 않았다. 경고의 목소리도 있었다. 프랑스의 원수 뻬뗑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군대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공세를 취할 경우 금방 무너질 것이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도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혁명의 심장인 군대를 도려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나중에 뼁르베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군과 러시아군의 우애 행위는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그대로 놓아둘 경우 러시아군은 급격히 해체될 위험이 있다.” 가장 가까운 동료들에게도 비밀로 붙인 채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는 맨 처음으로 공세에 대한 정치적 준비를 시작했다. 반정도 신성시되고 있던 지도자들이 혁명을 방어해야 한다고 여전히 떠버릴 때에도 체레텔리는 더욱더 확고하게 공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가장 오래 즉 가장 수줍게 대응한 지도자는 체르노프였다. 5월 17일의 임시정부 회의에서 자칭 이 “농촌 장관”은 매서운 질문을 받았다: 어떤 회의에서 공세에 대해 미적지근한 발언을 했다는데 사실인가? 이에 대해 체르노프는 이렇게 응답했다: “공세는 정치인인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전선의 전략가들이 해결할 문제이다.” 이들은 혁명과 마찬가지로 전쟁에 대해서도 숨바꼭질을 했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뿐이었다.

공세에 대한 준비 때문에 볼셰비키당에 대항하는 투쟁은 배가되었다. 볼셰비키들이 평화협정을 준비하고 있다는 비난이 더욱 빈번해졌다. 다른 교전국들에 비해 러시아는 훨씬 허약하고 지쳐있었다. 이 전반적 상황으로 보아 개별 평화협정이 러시아의 유일한 탈출구가 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새로운 요인이 되고 있는 혁명의 위력을 측정하지 못했다. 볼셰비키당은 믿고 있었다: 혁명의 힘과 권위가 대담하게 전쟁을 반대할 때에만 개별 평화협정을 피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과 결별하는 것이 필요했다. 6월 9일 레닌은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개별 평화협정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어떤 자본가들과도 개별 평화협정을 할 수 없다고 우리는 선언한다. 러시아 자본가들과는 더 그렇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러시아 자본가들과 개별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개별 평화협정을 분쇄하자!” 대회 보고서는 그의 연설에 대한 반응을 “박수갈채”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대회의 극소수만 박수를 보냈다. 따라서 이 박수는 특히 열렬하게 터져 나왔다.

집행위원회의 일부는 이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또 다른 일부는 좀더 권위 있는 기관 뒤에 몸을 숨길 생각이었다.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결정되었다: 소비에트 대회가 이 문제에 대해 최종 방침을 내릴 때까지 케렌스키는 공세를 명령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회 첫 회의에서 볼셰비키당이 제출한 선언문은 이렇게 밝혔다: “공세는 군대를 더욱 파괴시켜 한 부위가 다른 부위에 대항하게 만들뿐이다. 따라서 소비에트 대회는 즉시 이 반혁명 공세를 저지하거나 솔직하게 공세에 대한 책임을 전부 져야한다.”

소비에트 대회는 공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민주적 절차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고 있었다. 대포는 오랫동안 적의 진지를 겨냥하고 있었다. 6월 16일 군대와 함대에 내린 명령에서 케렌스키는 전쟁 총사령관을 “승리의 날개로 상승한 우리의 지도자”라고 칭송했다. 그리고 “적에 대한 즉각적이고 결정적인 타격”의 필요성을 논증한 후 “나는 여러분들에게 전진을 명령한다”로 말을 맺었다. 공세 전야에 쓴 글에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대회에 볼셰비키당이 제출한 선언문을 논평했다: “공세를 취하는 것을 통해 정부는 전쟁 승리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공세를 위한 물리적 조건은 대단히 불리하다. 전반적인 경제 붕괴 때문에 군대는 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또한 지금 정부는 단 하나의 급진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 공세의 정신적 조건은 더욱더 불리하다. 정부는 제국주의 동맹국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정책을 결정할 수 없다. 이 진실이 군대 앞에서 폭로되었다. 공세로 군대는 급속히 붕괴할 것이다. 대대적인 탈영은 이제 타락한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다. 이 현상은 정부가 내적 단결과 목적으로 혁명군대를 결집시킬 능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은 더욱이 이렇게 지적하면서 결론을 맺는다: “대단히 후진적인 농민들에게 이 혁명이 그들 것이라고 확신시킬 단 하나의 조치는 지주제의 즉각적인 폐지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물질적 정신적 조건 속에서 공세는 모험에 지나지 않는다.”

전쟁 지휘부도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공세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 다만 정치적 고려에 의해 강제되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맡은 전선을 순시한 후 데니킨은 브루쉴로프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공세가 성공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또한 지휘부 자체가 백해무익한 인간들의 집합장소였기 때문에 전쟁이 승리할 가망은 더욱 없었다. 장교이자 애국주의자인 스탄케비치는 군대의 사기와는 별개로 기술적으로도 승리가 불가능하다고 증언한다: “공세는 비판할 가치조차 없이 엉터리로 준비되었다.” 장교 협회의 의장인 입헌민주당의 노보실체프는 장교 파견단을 이끌고 입헌민주당 지도자들과 만났다. 그리고 공세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최상의 부대들의 전멸만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상부의 권력 실세들은 이 경고들을 추상적 표현을 동원하면서 무시했다. 총사령부의 참모장인 반동 장군 루콤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처음 전투에서 승리하면 아마 대중의 심리가 바뀔 것이고 장교들은 병사에 대한 통제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마지막 희망의 불씨는 아직 남아있다.” 이들의 주요한 목적은 병사에 대한 통제력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이미 오래 전에 수립된 계획은 이렇게 설명했다: 남서 전선의 병력이 르보프 방향으로 공격하면서 독일군은 가장 강력한 타격을 입게될 것이다. 그리고 북부 및 서부 전선은 이 작전을 지원해야했다. 결국 모든 전선에서 동시에 진격이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휘부의 능력을 훨씬 넘는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그래서 부차적인 전선들이 차례로 공격을 시작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데니킨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자 총사령부는 계획적 전략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준비된 전선부터 작전을 개시해야했다.” 이제 모든 것은 신의 가호에 맡겨졌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짜르 왕후의 성상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것을 민주주의의 성상으로 대체하려했다. 케렌스키는 모든 곳을 돌아다니며 축복을 호소하고 선언했다. 공세는 시작되었다: 6월 16일 남서 전선, 7월 7일 서부 전선, 8일 북부 전선, 9일 루마니아 전선 등의 순서로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세 개 전선의 공세는 허구였다. 주요 전선인 남서 전선이 붕괴하면서 동시에 붕괴했기 때문이었다.

케렌스키는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오늘은 혁명의 거대한 승리의 날이다. 거대한 열정으로 무장한 러시아의 혁명 군대가 6월 18일에 공세를 시작했다.” 입헌민주당의 기관지 레치지는 이렇게 논평했다: “오래 기다려온 공세가 시작되었다. 이것으로 러시아 혁명의 최상의 시기는 단번에 회복되었다.” 노인이 된 플레하노프는 19일의 애국주의 집회에서 이렇게 외쳤다: “시민 여러분,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으면 여러분들은 ‘월요일’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틀렸습니다. 오늘은 부활의 날입니다.(저자 주: 러시아어에서 일요일은 ‘부활’이란 의미이다.) 조국과 전세계의 부활입니다. 짜르의 멍에를 던져버린 러시아는 적들의 멍에도 던져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같은 날 체레텔리는 소비에트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러시아 혁명사의 새로운 장이 열리고 있다. 혁명 군대의 승리는 러시아 민주주의 뿐 아니라...제국주의에 대항해 진실로 투쟁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을 것이다.” 애국적 민주주의는 모든 입을 열어놓고 지껄였다. 한편 신문들도 즐거운 소식을 실었다: “빠리 증권거래소는 러시아 군대의 공세를 맞이하여 러시아 주식들 전부의 가격을 상승시켰다.” 이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안정을 주식시세로 측정하려했다. 그러나 역사는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혁명이 망할수록 증권거래소는 더 좋아한다.

그러나 수도의 노동자들과 주둔군 병사들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애국주의 물결에 단 한순간도 감염되지 않았다. 애국주의의 유일한 무대는 네프스키 가도였다. 치네노프 병사는 회고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네프스키 가도로 나가 공세에 반대하는 선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일부가 우산을 들고 우리를 쫓아왔다....우리는 이들을 병영으로 끌고 들어왔다...그리고 내일은 이들이 전선으로 보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내전의 폭발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조였다. 7월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의 기관총 연대는 6월 21일 총회에서 이렇게 결의했다: “전쟁이 혁명을 옹호할 때에만 전선에 병력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부대를 해체하겠다는 위협에 대해 “임시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단체들을” 해체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여기서 다시 볼셰비키당의 선동보다 훨씬 앞선 위협적인 태도가 표현되었다. 6월 23일자 혁명 연대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제 2군 부대들이 적의 제 1선과 제 2선 참호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노동자 6천명의 바라노프스키 공장에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3명의 사회혁명당원 대신 3명의 볼셰비키당원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 달 말이 되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성격이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이 소비에트는 6월 20일 공세 중인 군대를 환영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면 어느 규모의 다수가 이 결의문을 지지했는가? 찬성 472표, 반대 271표, 기권 39표였다. 이것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역관계를 나타내고 있었다. 볼셰비키당은 멘세비키당 및 사회혁명당의 좌파 그룹들과 함께 이미 소비에트의 5분의 2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것은 공장과 병영에서 공세 반대파가 의심의 여지없이 다수를 장악했음을 의미했다.

비보르그 지구 소비에트는 6월 24일 결의문을 채택했는데 문구 하나 하나가 무거운 망치처럼 강력하다: “과거에 체결한 날강도 조약을 준수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 모험주의 정책에 우리는 항의한다... 그리고 이 정책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임시정부와 이를 지지하는 멘세비키당 및 사회혁명당에 있음을 인정한다.” 2월 봉기 이후 뒤쪽으로 밀려났던 비보르그 지구는 이제 자신 있게 지도적 지위로 전진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당은 비보르그 소비에트를 이미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은 공세의 운명 즉 참호의 병사들에게 달려있었다. 공세를 떠맡기로 되어 있던 병사 대중에게 공세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이들은 억제할 수 없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치자들은 최소한 병사의 일부에서 이 갈망을 공세에 대한 용의로 잠시 전환시켰다.

혁명 후 병사들은 새 권력이 즉시 평화조약을 체결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전선을 지킬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병사들은 볼셰비키들의 선동 탓도 있었지만 나름대로 평화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주로 독일군 및 오스트리아군과 우애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것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모든 쪽에서 진행되었다. 더욱이 독일 병사들이 아직도 장교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평화가 오지 않자 우애 행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당시 전선에는 실제로 전투가 중단되어 있었다. 이 틈을 타 독일은 군대를 대폭 서부 전선으로 이동시켰다. 러시아 병사들은 적의 참호가 텅 비고 기관총이 제거되고 대포가 수레에 실려 가는 것을 보았다. 바로 이때 “공세를 위해 군대의 사기를 상승시키는” 계획이 수립되었다. 병사들에게 체계적인 암시가 가해졌다: 적이 완전히 약화되어 병력이 없다; 미국이 서부전선에서 적을 압박하고 있다; 우리가 약간만 공격하면 적의 전선은 붕괴하여 평화가 올 것이다. 물론 당국은 이 주장을 단 일분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군대가 일단 전투를 시작하면 전쟁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임시정부의 외교도 독일군과의 우애 행위도 평화를 가져오지 않자 병사들의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세 번째 계획에 매달렸다: 전쟁이 공중분해 되도록 압박을 가하자. 소비에트 대회에 출석한 전선의 어느 병사 대의원은 병사들의 정서를 정확히 이렇게 표현했다: “독일군의 전선은 엷어졌다. 대포도 없다. 우리가 전진하여 적을 타도하면 원하던 평화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 독일군은 진짜 대단히 허약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전투에 응하지 않고 틀어박혀 있었다. 그러나 이때 러시아 군대 역시 공세를 취할 전투력이 없었다. 그런데 붕괴되기는커녕 적은 재집결하여 병력을 집중시켰다. 몇십 킬로미터를 전진한 후 러시아 병사들은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적은 새로 강화된 진지에서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화를 위해 공세에 동의했을 뿐 병사들은 전쟁을 바라지 않고 있었다. 이 사실은 이제 명백히 드러났다. 강제력, 도덕적 압박 그리고 무엇보다도 속임수 등을 결합시켜 저들은 병사들을 공세로 끌고 들어갔다. 그러나 이제 병사들은 그만큼 더 분노하여 이에 저항했다.

제 1차 세계대전 시기의 러시아 역사를 연구한 역사가 자욘츠코프스키 장군은 이렇게 말한다: “밀도와 위력에 있어서 유례없는 대포 공격을 가한 후 러시아 군대는 병력 손실이 거의 없이 적의 진지를 점령했다. 그리고 더 이상 전진을 원치 않았다. 이제 진지에서 탈주가 꾸준히 계속되었으며 부대 전체가 하나씩 철수했다.” 도로쉔코는 갈리시아 지방의 임시정부 인민위원을 역임했으며 우크라이나인 지도자였다. 그는 갈리치와 칼루쉬의 두 도시를 점령한 후 일어난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칼루쉬에서 주민에 대한 끔찍한 학살이 즉시 자행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인과 유태인이 살해되었을 뿐 폴란드인들은 멀쩡했다. 학살 경험이 많은 어떤 자가 학살을 지도하여 이곳 우크라이나인의 문화 및 교육기관들을 겨냥했다.” “병사들 가운데 좀더 우수한 그래서 혁명에 가장 적게 오염된” 부위가 학살에 참여했다. 사실 이들은 공세를 위해 면밀히 선정된 병력이었다. 그리고 공세의 지도부인 짜르의 사령관들은 학살에 대한 경험이 풍부했다. 바로 이들이 이 사건의 진상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제 11군 소속 병사위원회들과 인민위원들은 7월 9일 정부에 전보를 보냈다: “7월 6일 제 11군에게 시작된 독일군의 공격으로 러시아 군대는 대재앙을 맞고 있다....소수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병사들은 공세에 나섰다. 그러나 이들은 사기는 이제 급격히 떨어져서 파멸 직전에 있다. 공세는 급격히 소진되고 있다. 군대의 대다수는 지금 점점 해체되고 있다. 지휘관의 권위나 명령에 대한 복종은 완전히 실종되었다. 설득과 주장은 힘을 잃었다. 병사들은 위협을 가하며 때때로 장교들을 살해하고 있다.”

인민위원과 병사위원회의 동의를 얻은 후 남서 전선의 사령관은 탈영병을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서부 전선의 사령관 데니킨은 6월 12일 본부로 돌아왔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나의 마음에는 절망이 가득했다. 기적에 대한 마지막 가물거리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생각이 명료히 떠올랐다.”

병사들은 전투를 원치 않았다. 적의 참호를 점령한 후 허약해진 부대를 보충하는 후방부대는 이렇게 대답했다: “왜 전진했지? 누가 전진하라고 시켰나? 지금은 공격할 때가 아니라 전쟁을 끝낼 때이다.” 제 1 시베리아 군단의 사령관은 최고의 지휘관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밤이 되자 병사들이 적의 공격도 받지 않은 제 1선을 무리를 지어 중대 단위로 이탈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장교들이 병사 대중의 원초적 심리를 전혀 변화시킬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이해했다. 나는 오랫동안 슬프게 흐느껴 울었다.” 어느 중대는 독일어 원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할 병사가 나타날 때까지 갈리치의 점령을 알리는 유인물을 적에게 던지는 것조차 거부했다. 구 지휘부와 2월의 새 지휘부를 막론하고 지휘부에 대한 병사 대중의 완전한 불신이 이 사건으로 표출되었다. 병사들에 대한 1백년 동안의 모욕과 폭력이 마치 화산처럼 표면에 분출했다. 병사들은 다시 속았다고 느꼈다. 공세는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가져왔다. 병사들은 전쟁을 원치 않았다. 이들은 옳았다. 후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애국자들은 병사들을 규율 위반자로 낙인찍은 후 이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병사들은 옳았다. 이들은 억압받고 속고 고문당한 인간의 의식으로 굴절된 채 그리고 혁명이 가져다준 희망으로 상승했다가 다시 피투성이로 곤죽이 된 채 이제 진정한 인민의 본능을 갖게 되었다. 병사들은 옳았다. 전쟁이 연장되면 러시아 인민은 계속 희생되고 모욕당하고 재앙을 맞게 될 뿐이다. 그리고 대내외적으로 노예상태가 가중될 것이다.

입헌민주당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들의 애국주의 언론은 러시아의 겁쟁이 및 탈영 병사들과 프랑스 대혁명의 영웅적인 대대들을 지치지 않고 비교했다. 이것을 통해 이들은 자신들이 혁명 과정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역사에 대해서도 대단히 무지하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프랑스 혁명과 프랑스 제국의 놀라운 전사들은 규율을 위반하면서 군인 경력을 시작한 경우가 빈번했다. 밀류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이들은 볼셰비키로 군인 생활을 시작했다. 나중에 프랑스 육군의 원수가 된 다부는 1789년과 1790년에 중위였다. 이때 그는 에스뎅 주둔군의 “정상적인” 규율을 파괴하고 지휘부를 축출시켰다. 1790년 중반까지 프랑스 전국에는 군대 전체가 완전히 붕괴하고 있었다. 벵쎄느 연대의 병사들은 장교들이 자기들과 같이 식사할 것을 강요했다. 함대는 장교들을 몰아냈다. 20개 연대들이 장교들에 대해 다양한 형태의 폭력을 자행했다. 낭씨에서는 3개 연대들이 최고위 장교들을 감옥에 가두었다. 1790년부터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은 병사들의 잔악 행위를 지치지 않고 반복했다: “정부는 죄악을 범했다. 왜냐하면 혁명에 적대적인 장교들을 제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라보와 로베스삐에르는 모두 구체제 장교단 전체를 해임하는데 찬성했다. 이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다만 전자는 이를 통해 좀더 빨리 확고한 규율을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후자는 이를 통해 반혁명의 무장을 해제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 두 혁명가들은 구체제 군대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점을 이해했다.

프랑스 혁명과 달리 러시아 혁명은 전쟁 도중에 터졌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엥겔스가 주목한 역사적 법칙 즉 혁명이 구 군대를 해체한다는 진리가 위반될 수는 없다. 이와 반대로 질질 끌 뿐 승리하지 못하는 전쟁은 군대의 혁명적 해체를 재촉하고 격화시킬 뿐이다. 민주주의자들의 형편없는 범죄 행위인 공세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군대의 붕괴를 완성시켰을 뿐이었다. 마지막 한 명까지 병사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피는 더 이상 흘릴 수 없다! 우리가 살지 않으면 토지와 자유는 무슨 소용인가?” 계몽된 평화주의자들이 합리적 주장으로 전쟁을 철폐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그러나 무장 대중이 이성의 무기를 가지고 전쟁에 반대할 경우에는 전쟁은 거의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  

 

제 20장 농민

농업 문제는 혁명의 깊은 토양이었다. 러시아 사회의 가장 야만적 특징들의 뿌리는 농노제에서 유래한 낡은 토지제도, 지주의 전통 권력, 지방 행정당국/의회와 지주의 유착 등이었다. 그리고 이 야만성의 정점은 라스푸틴 일당이 전횡한 짜르 체제였다. 유구한 역사를 통해 러시아의 아시아적 특성을 지탱해온 농민은 또한 이 체제의 첫 희생자였다.

2월 혁명이 터진 후 첫 몇 주일간 농촌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농민의 가장 활동적인 연령층은 군대에 끌려가 전선의 참호 속에서 고생하고 있었다. 고향에 남은 노년층은 혁명이 반혁명의 보복으로 끝난다는 것을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농촌은 말이 없었으며 도시는 농촌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전쟁의 유령은 이미 3월초부터 지주의 보금자리를 떠돌고 있었다. 가장 귀족적인 즉 가장 후진적이고 반동적인 지역들은 진짜 위험이 닥치기도 전에 도와달라고 아우성쳤다. 자유주의자는 지주의 공포를 예민하게 반영했다. 그리고 화해주의자는 자유주의자의 정서를 반영했다. 급진주의 좌파인 수하노프는 혁명 직후 이렇게 주장한다: “앞으로 몇 주일 내에 농업문제를 우격다짐으로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것이다. 더욱이 이렇게 나올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는 평화 문제나 8시간 노동제에 대한 강제적 해결 역시 위험한 시도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어려움 앞에서 몸을 숨기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더 간단한 방법이다. 더욱이 기존의 토지관계를 뒤흔들 경우 봄철의 파종과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이 차질을 빚을 것이라고 지주들은 걱정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지방에 전보를 보내 권고했다: “도시에 대한 식량공급을 게을리 할 정도로 농업문제에 몰두하지 말아야 한다.”

많은 지역에서 지주들은 혁명에 겁을 먹고 씨뿌리기를 그만두었다. 식량위기가 이미 전국을 덮친 상황에서 텅 빈 농토는 새 주인을 찾아 절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농민들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지주들은 새 권력에 거의 기대를 하지 않고 서둘러 재산을 정리했다. 부농들은 매물로 나온 재산들을 게걸스럽게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들이 농민이니까 강제 몰수는 없을 것이라고 속으로 계산했다. 토지 매매의 대다수는 악명 높을 정도로 자의적이었다. 일정 기준 이하의 개인 토지는 몰수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이 생각에 기초하여 지주들은 소유 토지를 인위적으로 작게 쪼갠 후 가짜 주인을 만들었다. 토지는 외국인, 연합국이나 중립국 시민들에게 빈번히 이전되었다. 부농의 투기와 지주의 속임수 때문에 제헌의회가 소집되면 공유지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았다.

농민들은 이 술수를 알아차리고 정부에 요구했다: 포고령을 선포하여 토지 매매를 중단시켜라. 농민 대의원들은 도시로 몰려들어와 혁명 당국에게 토지와 정의를 요구했다. 정부 장관들이 고상한 논의와 박수 끝에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 복도에는 회색의 농민 대의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은 자주 벌어졌다. 어느 농민 대의원은 눈물을 흘리며 토지 매매를 중단시킬 법을 선포하라고 장관에게 간청했다. 수하노프가 이 장면을 묘사한다. 흥분하고 창백한 케렌스키는 농민 대의원의 말을 짜증스럽게 가로막은 후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렇게 될 것이요...그렇게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볼 필요는 없지 않소.” 이때 옆에 있던 수하노프는 나중에 그의 회고록에 이렇게 덧붙인다: “그가 한 말을 나는 그대로 옮겼다. 케렌스키의 생각은 옳았다: 그 농민은 이 유명한 인민 장관이자 지도자 양반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간청은 하면서도 더 이상 신뢰하지 않는 농민과 이 농민의 의심을 제스처로 넘기는 급진파 장관 사이의 짧은 대화는 2월 정권이 몰락할 수밖에 없음을 예견하고 있었다.

농업개혁을 준비하기 위한 기구인 토지위원회 수립 법이 혁명 후 첫 농업장관인 입헌민주당의 싱가레프에 의해 공포되었다. 관료적인 자유주의자 교수 포스트니코프가 위원장을 맡은 중앙 토지위원회는 주로 인민주의자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위원장보다 덜 온건하게 인식되는 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지역 토지위원회는 도, 군, 지구 단위에서 구성되었다. 농촌에서 상당히 느리게 수립된 소비에트는 사설 조직으로 간주되었으나 토지위원회는 정부 기구였다. 그런데 법이 토지위원회의 기능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을수록 위원회에 가하는 농민의 압력은 더 거세었다. 또한 서열이 낮아 농민에 더 가까이 있는 토지위원회일수록 더 빨리 농민운동의 도구가 되었다.

3월말이 다가오자 혁명의 무대에 농민이 등장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처음 수도에 전해졌다. 노브고로드의 인민위원이 전보를 보내왔다: 파나시우크 상등병의 사주로 “지주들이 무조건 체포되었다.” 탐보프 도에서는 휴가 나온 병사들이 주도하여 농민들이 어느 지주의 장원을 약탈했다. 첫 소식들은 물론 과장되었다. 당연히 지주들은 이 갈등들을 과장하여 호소하면서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앞질러 말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병사들이 농민운동을 지도했다. 이들은 전선과 도시 병영에서 발휘한 주도력을 농촌으로 가지고 왔다.

카르코프 도의 어느 지구 토지위원회는 4월 5일 토지소유주들의 무기를 수색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은 임박한 내전을 벌써 느끼게 했다. 리아잔 도의 스코핀스키 군에서는 소요가 발생했다. 그 이유를 인민위원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접한 도의 집행위원회가 토지 임대료 납부를 강제하는 포고령을 선포했기 때문이었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분쟁을 중지하자는 학생들의 선동은 효과가 없었다.” 1905년에 “학생들”은 농민을 동원하여 혁명 노동자들에게 테러를 가했었다. 이것이 당시 사회혁명당의 전술이었다. 그런데 1917년이 된 지금 학생들은 준법과 사회평화를 설교한다. 물론 이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다.

심비르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좀더 발전한 농민운동을 묘사하고 있다: 지구 및 마을 위원회는 지주들을 체포하여 추방한 후 토지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들도 쫓아냈다; 그리고 토지를 점령한 후 자의적으로 토지 임대료를 결정했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가 보낸 대의원들은 농민의 편을 들고 있다.” 동시에 개인 토지소유주들에 대항하여 공동체 농민들의 운동이 시작된다. 개인 토지소유주들은 1906년 11월 9일 스톨리핀이 제정한 법에 따라 농촌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와 토지를 소유한 농민의 강력한 계층이었다. “도내의 소요 때문에 씨뿌리기가 위협받고 있다.” 이미 4월에 심비르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토지의 국가 소유를 즉시 선포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나중에 제헌의회가 국가 소유의 명확한 내용을 규정할 것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모스크바 바로 외곽의 카쉬르 군 집행위원회가 교회, 수도원, 지주의 장원들을 배상도 하지 않고 점거하도록 농민을 선동하고 있다는 불평도 들려온다. 쿠르스크 도에서는 농민들이 지주의 장원에서 일하는 전쟁포로들을 쫓아내고 심지어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있다. 농민총회가 끝난 후 펜자 도의 농민들은 토지와 자유에 대한 사회혁명당의 결의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여 지주들과 최근 체결한 계약을 어기기 시작한다. 동시에 이들은 새 권력기관들을 공격한다. 펜자 도의 인민위원은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3월에 지구 및 군 집행위원회가 수립될 때는 지식인들이 위원회의 다수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후 지식인 반대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4월 중순에는 농민들이 위원회를 독점했다. 그리고 이들은 토지문제와 관련해서는 명백히 법을 무시했다.” 이웃한 카잔 도의 일부 지주들은 임시정부에 탄원한다: 농민들이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거부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종자를 훔치고 많은 곳에서는 장원의 가산들을 탈취한다; 또한 우리가 소유한 숲에서 나무 베는 것을 금지한다; 폭력을 휘두른다 또는 죽인다는 등의 위협 때문에 도저히 못살겠다. “법원이 없다; 각자 하고싶은 대로 행동한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테러를 당한다.” 카잔의 지주들은 이러한 무정부 상태의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있다: “농촌에는 임시정부의 지시 따위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의 유인물은 널리 배포되고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지시를 대단히 많이 내려보냈다. 3월 20일의 전보에서 르보프공은 인민위원들에게 지역의 권력기관으로 지구위원회를 수립할 것을 제의했다. 또한 이 위원회의 활동에 “지역 토지소유주들과 농촌의 모든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라고 권고했다. 국가기구 전체를 밀실에서 화해하는 방식으로 조직할 것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인민위원들은 곧 “지식인들”이 밀려나고 있다고 울먹였다. 농민들이 군과 지구의 케렌스키들을 불신하고 있음이 명백했다.

유루소프공은 수상과 내무장관을 겸임하고 있던 르보프공의 내무장관 대행이었다. 내무부는 높은 작위를 가진 사람만이 장관을 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내무장관 대행은 4월 3일 이렇게 권고한다: 자의적인 행위는 인정될 수 없다; 특히 모든 자유 가운데에서 가장 달콤한 “토지처분권”은 옹호될 것이다. 이로부터 10일 후 르보프공도 뭔가를 해야한다고 생각한 후 인민위원들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법의 전권을 동원하여 모든 폭력과 강탈을 중지시켜야한다.” 이로부터 이틀 후 유루소프공은 도 인민위원들에게 이렇게 지시를 내린다: “무법행위로부터 종마(種馬)농장을 보호할 조치를 취하고 이 조치를 농민들에게 설명하라 등등.” 4월 18일 유루소프공은 심기가 불편하다. 지주들의 장원에서 일하는 전쟁포로들이 과도한 요구들을 제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민위원들에게 전에 짜르의 도지사들이 누렸던 권한에 기초하여 이 무례한 놈들을 징벌하라고 지시한다. 회보, 지시, 전보 명령 등이 상부에서 소낙비처럼 계속 하부로 쏟아 내려온다. 5월 12일 르보프공은 새 전보를 보내 “전국에서 끊이지 않고 있는” 무법행위들을 나열한다: 자의적인 체포와 수색; 직책을 가진 관리 및 장원, 공장, 작업장 관리자 등의 해임; 재산 파괴; 약탈, 명령 불복종, 기물파괴; 관리들에 대한 폭력; 세금 강요; 특정 집단에 대한 폭력 조장 등등. “이러한 행위들은 명백히 불법행위로 어떤 경우에는 무정부적 행위로 간주되어야한다....” 불법에 대한 규정은 명확하지 않으나 결론은 명확하다: “이러한 행위들에 대해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한다.” 도 인민위원은 군청에 명령을 내렸으며 군청은 지구 위원회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저항에 직면하여 이 국가기구들은 모두 무기력 증세를 드러냈다.           

농촌 지역에 가까이 주둔한 군대는 거의 모든 곳에서 농민의 저항에 동조했다. 종종 군대가 투쟁의 주도권을 쥐었다. 이 운동은 지역과 투쟁의 격렬함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지주가 없는 시베리아에서 농민들은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장악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성직자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신앙심이 돈독한 스몰렌스크 도의 경우 전선에서 바로 도착한 병사들의 영향으로 신부와 수도승들이 체포되었다. 농민들이 비교할 수 없이 더 급진적 조치를 취할 것이 두려워 지역 단체들은 원하는 것보다 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초 사마라 도의 어느 군 집행위원회는 오를로프-다비도프 백작의 재산을 농민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공공 이사를 임명했다. 케렌스키의 약속과는 달리 토지 매매를 중지시키는 법이 제정되지 않자 농민들은 토지 측량을 막아 나름의 방식으로 토지 매매를 중단시켰다. 지주의 무기 심지어 사냥용 무기마저 몰수하는 행위가 더욱 확산되었다. 민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이렇게 불평한다: 농민들은 “농민총회의 결의사항을 법으로 간주한다.” 그렇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농민총회는 지역에서 유일한 진짜 권력이었다. 행동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말로만 떠드는 사회혁명당 지식인들과 이렇게 너무 달랐다.       

5월말이 다가오자 멀리 아시아의 대초원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키르기즈 초원이 지주들에 대항해 들고 일어섰다. 과거에 짜르는 이 지역의 가장 좋은 토지만 농민에게 빼앗아 하수인들에게 주었다. 이제 농민들은 빼앗긴 토지의 반환을 요구했다. 아크몰린스크 도의 인민위원은 “이 생각이 초원 지역에 확산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키르기즈 초원의 정반대 쪽에 위치한 리플란드 도에서는 어느 군 집행위원회가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스타알 폰 홀슈타인 자작의 재산에 대한 약탈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은 별로 대단하지 않으며 자작이 사회 평화를 해치고 있다고 조사단은 선언했다. 그리고 이렇게 제안했다: 자작을 자작 부인과 함께 뻬쩨르부르그에 보내 임시정부의 재량에 맡기자. 이 갈등은 지역정부와 중앙정부, 하부 사회혁명당원들과 상층 사회혁명당원들 사이에 일어난 수많은 갈등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5월 27일에 제출된 에카테리노슬라프 도의 파블로그라드 군 보고서는 법과 질서를 거의 목가적인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토지위원회는 농민에게 모든 오해들을 설명하여 “모든 과격 행위를 미연에 방지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 목가는 몇 주일 밖에 가지 못할 것이다. 5월말 코스트로마의 어느 수도원 원장은 지독하게 불평했다: 농민들은 그가 소유한 뿔 달린 소의 3분의 1을 징발해갔다. 이 존엄한 수도승은 좀더 온유했어야 했다: 그는 곧 나머지 소들과도 작별하게 될 것이다.

쿠르스크 도에서는 농촌 공동체로 귀환을 거부한 개인 토지소유주들에게 박해가 시작되었다. 거대한 토지 혁명인 “검은 분할”의 시간이 다가오자 농민들은 일치 단결하기를 원했다. 내적인 분열은 장애물이 될 지 모른다. 공동체는 한 몸으로 나서야한다. 따라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투쟁은 개별 농민 즉 토지 개인주의자에 대한 폭력을 동반했다.

5월의 마지막 날 사모일로프 병사는 토지세 납부 거부를 사주했다는 죄로 페름 도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그는 곧 다른 사람들을 체포할 것이다. 카르코프 군의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종교 행진 도중 그리첸코 농민은 마을 사람들 전부가 보는 앞에서 성 니콜라이 성상을 도끼로 찍어 쓰러뜨렸다. 이렇게 온갖 종류의 항의가 행동으로 표현되었다. 해군 장교이자 지주인 어느 이름 없는 인물은 [백위군의 노트]라는 자신의 글에서 혁명 후 첫 몇 개월간 일어난 농촌의 변화를 흥미 있게 묘사하고 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처음에는 부르주아들이 직책에 선출되었다. 모두들 질서 유지에만 골몰했다.” 물론 농민들은 토지를 요구했으나 첫 두 세 달 동안에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모든 곳에서 “우리는 강탈이 아니라 합의를 통해 토지를 갖고 싶다”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해군 중위인 회고록 필자는 이 안심시키는 말에서 “숨겨진 위협”을 감지했다. 초기에는 폭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농민들은 소위 지식인들을 “곧 멸시하기 시작했다.” 이 백위군의 말에 의하면 5월이나 6월까지 농민들은 초조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나 이후에는 급격히 태도가 달라졌다. 임시 조치에 항의하면서 농민들은 스스로 나서서 요구를 실현시켰다.” 다른 말로 하면 농민들은 2월 혁명에게 약 3개월간의 사회혁명당 어음을 끊어주었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당원인 치네노프 병사는 혁명 후 모스크바에서 고향 오렐을 두 번 방문했다. 5월에 사회혁명당은 지구 위원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다수 지역에서 농민들은 아직 지주에게 임대료를 내고 있었다. 치네노프는 병사, 농업노동자, 빈농으로 구성된 볼셰비키 핵심 조직을 수립했다. 이 조직은 임대료 납부 거부와 무토지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를 선동했다. 이들은 즉시 지주의 초지를 등록시켜 마을에 분배한 후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들었다. “지구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들은 우리의 불법 행위에 대해 고함을 질렀으나 자기 몫의 건초는 악착같이 챙겼다.” 마을 대표들이 책임이 두려워 직책을 포기하자 농민들은 좀더 단호한 분자들을 새로 선출했다. 그러나 이들 전부가 볼셰비키당원은 아니었다. 직접 압력을 통해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을 분열시켜 혁명 분자들을 관료 및 출세주의 분자들로부터 분리시켰다. 장원의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든 후 농민들은 가을 파종을 위해 휴경지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조직은 장원의 곡물창고를 관리하여 남는 곡물을 굶주리는 수도로 보냈다. 이 조직의 결의문은 농민의 정서와 일치했기 때문에 시행에 옮겨졌다. 치네노프는 고향에 볼셰비키당의 선전물들을 가지고 왔다. 농민들은 선전물들의 내용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역의 지식인들과 사회혁명당원들은 내가 독일의 금을 많이 가지고 와서 농민들을 매수할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이 같은 현상은 규모에 관계없이 일어났다. 농촌 지구에도 밀류코프, 케렌스키 그리고...레닌이 있었다.

스몰렌스크 도에서는 농민 대의원 대회가 끝난 후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커지기 시작했다. 물론 예상대로 대회는 인민에게 토지가 반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지도자들과 달리 농민들은 이 결정을 진짜 전부 삼켰다. 이때부터 농촌의 사회혁명당원 수는 계속 증가했다. 이 지역의 어느 당 활동가는 이렇게 말한다: “대회에서 사회혁명당을 지지하여 분파에 가담한 자들은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원이거나 이와 비슷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도청 소재지에는 사회혁명당이 영향을 미치는 두개 연대가 주둔해 있었다. 지구 토지위원회는 지주의 토지를 쟁기질하고 풀을 베기 시작했다. 그러자 도 인민위원인 사회혁명당원 에피모프는 이에 반대하는 명령을 위협하듯이 내렸다. 그러자 마을의 농민들은 깜짝 놀랐다. 농민들이 곧 정부이며 토지에서 일하는 농민만이 토지를 차지하여 노동의 대가를 누릴 수 있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는가? 사실은 그의 지시에 따라 옐린 군에서만 17개 지구 토지위원회 가운데 16개가 지주의 토지를 몰수했다는 이유로 이후 몇 달간 재판정에 선다. 따라서 나름의 방식으로 인민주의 지식인들과 인민 사이의 사랑 행각은 파멸을 향해 다가갔다. 군 전체에서 볼셰비키는 서너 명뿐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어 사회혁명당원들을 몰아내거나 분열시켰다.

5월초에 뻬쩨르부르그에서 전국농민대회가 열렸다. 대의원들은 대체로 농촌의 상층 부위였으며 우연히 대의원 자격을 얻은 경우도 많았다. 이미 말했듯이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대회는 사건의 진행과 대중의 정치적 변화에 계속 뒤 처졌다. 그렇다면 사방으로 널리 흩어진 농민들을 대표하는 조직은 말할 필요도 없이 농촌의 실제 정서에 더욱 뒤 처졌다. 주로 상업적 협동조합이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농민과 연결된 극우 인민주의 지식인 대의원들이 한편에 존재했다. 또 한편에는 농촌의 유복한 상층인 부농, 상점주인, 협동조합 관리자 등이 진짜 “인민”을 대표했다. 사회혁명당은 대회를 압도했다. 더욱이 이 정당의 극우파 인물들이 모든 것을 대표했다. 그러나 이들조차 대의원들 일부의 토지에 대한 탐욕과 “극우” 정치노선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지주 문제에 대해서 이 대회는 대단히 급진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조금의 배상도 없이 모든 토지를 국가소유로 전환시켜 평등하게 경작한다.” 물론 부농은 평등을 지주와의 평등으로 받아들였지 농업노동자와의 평등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허구적인 사회주의와 농민의 농업 민주주의 사이의 사소한 오해는 나중에 확연히 드러날 것이다.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농민대회에 부활절 달걀을 선사하려는 욕망에 불탔다. 그래서 토지 매매를 금지하는 포고령을 마련하느라 헛되이 부산을 떨었다.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어느 정도 자칭 사회혁명당원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농민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토지 매매는 방해받지 말아야 한다는 지시를 각 지역에 하달했다. 이에 대해 농민 대의원들이 잡음을 일으켰으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르보프공의 임시정부는 지주의 토지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임시정부에 손도 대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농민대회 지도자들 역시 자기들의 반동 노선과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욕구 사이의 모순을 전혀 해결할 수 없었다.

레닌은 5월 20일 농민대회에서 연설했다. 마치 레닌이 악어 구덩이에 빠진 것 같다고 수하노프는 말한다. “그러나 덩치가 조그마한 농민들은 그의 연설을 주의 깊게 들었다. 이들은 그의 말에 공감했을 가능성이 컸으나 이것을 감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볼셰비키당에 대단히 적대적인 병사 부문도 같은 반응을 보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처럼 수하노프도 토지문제에 대한 레닌의 전술을 무정부주의로 채색하려고 한다. 이것은 르보프공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지주의 권리에 대한 침해를 언제나 무정부주의로 바라보았다. 이 논리에 의하면 혁명은 대체로 무정부주의와 같다. 그러나 레닌이 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은 그의 반대자들이 보기보다 훨씬 심오했다. 농업혁명 그리고 주로 지주의 토지 몰수를 수행하는 기관은 농민 대의원 소비에트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토지위원회는 소비에트의 직속 기관이 되어야했다. 농민 소비에트는 미래 국가권력의 기관 더욱이 대단히 집중된 권력기관인 혁명적 독재의 기관이라고 레닌은 생각했다. 이것은 정부를 포기하는 이론과 실천인 무정부주의와는 대단히 거리가 멀었다. 4월 28일 레닌은 이렇게 말했었다: “가능한 한 가장 조직된 모습으로 토지가 농민에게 즉각 이전될 것을 촉구한다. 그러나 무정부적인 토지 점거는 절대적으로 반대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혁명적 주도력이다; 법은 혁명 투쟁의 결과일 뿐이다. 법이 제정될 때까지 손을 놓고 기다리면서 혁명 열기를 식히면 법도 토지도 얻을 수 없다.” 레닌의 이 단순한 말은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혁명들의 주장이었다.

한달 간의 회의를 마친 후 농민대회는 상설기구로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다. 여기에는 농촌의 강인한 소부르주아 그리고 교수 또는 장사꾼 유형의 인민주의자들 200명이 모였다. 그리고 집행위원회 지도부에는 얼굴마담들인 브레쉬코프스카야, 차이코프스키, 베라 피그너, 케렌스키 등이 자리잡았다. 의장은 사회혁명당의 아브크센티에프였다. 그는 지방의 유지들이 모이는 연회에나 어울릴 인물이었지 곧 다가올 농민전쟁에 어울릴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이때 이후 더 중요한 문제들은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집행위원회와 농민 집행위원회의 합동회의에서 논의되었다. 합동회의는 우익을 크게 강화시켰는데 이들은 입헌민주당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노동자들을 압박하거나 볼셰비키들을 탄압하거나 크론슈타트 독립공화국을 채찍과 전갈로 위협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농민 집행위원회의 2백 개 손 아니 주먹이 장벽을 이루며 치켜 올라갈 것이다. 이들은 밀류코프와 똑같이 볼셰비키들을 “끝장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주의 토지 문제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가 아니라 농민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 및 임시정부와 적대하게 된다. 농민 대회가 해산하기도 전에 불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회의 결의문들이 지역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지면서 농민들이 지주들의 토지와 장비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완고한 농민의 머리 속에 말과 행동의 차이를 인식시키는 것은 한마디로 불가능했다.

공포에 질린 사회혁명당은 후퇴의 호각을 불었다. 6월초에 열린 모스크바 당대회에서 이들은 토지의 자의적 점거를 엄중히 비난했다: 제헌의회가 열릴 때까지 기다려야한다. 그러나 이들의 결의문은 농민운동을 조금도 멈추거나 약화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당내에는 지주에 대항하여 농민들과 함께 끝까지 투쟁할 분자들이 적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꼬여갔다. 아직 공개적으로 탈당을 결심하지 못한 사회혁명당 좌파는 농민들이 법을 우회하거나 최소한 나름대로 법을 해석하도록 도와주었다.

농민운동이 특히 격렬히 달아오른 카잔 도에서 사회혁명당 좌파는 다른 곳보다 더 빨리 결집되었다. 이들의 지도자 칼레가에프는 이후 볼셰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소비에트 연립정부에서 농업 인민위원이 되었다. 5월 중순부터 카잔 도에서는 토지가 체계적으로 지구 위원회로 이전되었다. 이 조치는 스파스크 군에서 가장 대담하게 취해졌는데 이곳에는 볼셰비키당원 한 명이 농민 조직을 지도했다. 크론슈타트에서 온 볼셰비키들이 농민들을 선동한다고 도 행정당국은 중앙에 불평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신앙심이 돈독한 수녀 타마라가 “이에 반대한 죄로” 체포되었다.

보레네쥬 도의 인민위원은 6월 2일 이렇게 보고했다: “특히 농업문제와 관련해 도내에서 불법행위를 일삼는 건수가 하루가 지날수록 늘고 있다.” 펜자 도에서도 토지 점거는 더욱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칼루가 도의 어느 지구 토지위원회는 수도원 소유 초지의 절반을 몰수했다. 그리고 수도원장이 불평하자 군 위원회는 이렇게 결의했다: 초지를 전부 몰수한다. 그런데 이렇게 상부 기관이 하부 기관보다 더 급진적인 경우는 자주 있지 않았다. 펜자 도에서 어느 수녀원장은 수녀원 토지를 몰수한다고 울고 있다: “지역 당국은 힘이 없다.”

비아트카 도에서는 농민들이 이후 우크라이나 카자흐 족장 가문이 될 스코로파드스키 가문의 재산을 폐쇄했다. 그리고 “토지 문제가 결정될 때까지” 어느 누구도 이 가문 소유의 숲에 들어가지 말 것과 재산에서 나온 수입은 공공기금으로 쓰일 것을 결의했다. 다른 지역에서도 연이어 토지위원회는 토지 임대료를 5배 내지 6배 인하했을 뿐 아니라 토지문제가 제헌의회에서 해결될 때까지 지주가 아니라 위원회가 임대료를 관리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농민의 진지한 방식이었으며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토지문제를 연기하자는 변호사의 방식과는 전혀 달랐다. 사라토프 도에서는 어제만 해도 지주들의 벌채를 금지한 농민들이 스스로 벌채에 나섰다. 특히 지주가 거의 없는 곳에서 농민들은 더욱 빈번하게 교회와 수도원의 토지를 몰수했다. 리플란드에서는 레트인 농업노동자들이 레트인 대대 병사들과 함께 자작들의 토지를 조직적으로 몰수했다.

비테프스크 도의 목재 왕들은 토지위원회의 조치들이 목재산업을 고사시키고 있으며 자신들이 전선의 목재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막고 있다고 큰 소리로 항의한다. 이들 못지 않게 나라를 생각하는 폴타바 도의 지주들은 농민의 소요 때문에 군대에 식량을 공급할 수 없다고 걱정한다. 마지막으로 모스크바의 말 사육 협회는 농민의 토지 몰수가 조국의 종마들에게 거대한 불행을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다.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은 이 교회 주교들을 “백치들과 악당들”이라고 부른 적이 있었다. 그는 이제 카잔 도의 농민들이 수도승들의 토지와 소 뿐 아니라 미사용 빵을 만들 밀가루도 가지고 간다고 정부에 불평한다. 수도에서 두발자국 떨어져 있는 뻬쩨르부르그 도에서는 농민들이 임대 농민들을 쫓아내고 토지를 스스로 관리하기 시작한다. 놀라서 눈을 크게 뜬 내무장관 대행 유루소프공은 6월 2일 사방에 전보를 보낸다: “내가 그렇게 여러 차례 요구했는데... 다시 지시한다. 가장 단호한 조치를 취하라.” 그러나 이 공작은 정확히 어떤 조치를 취하라는 것인지는 까먹고 있다.

러시아 전국에서는 봉건제와 농노제의 깊은 뿌리들이 뽑히는 거대한 과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농업장관 체르노프는 제헌의회 관련 자료들을 집무실에 모으고 있었다. 그는 가장 정확한 농업 관계 자료와 가능한 모든 종류의 통계에 기초하여 개혁을 실시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농민들에게 자신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아주 상냥한 목소리로 계속 촉구했다. 그러나 그가 신성한 도표들을 작성하기 훨씬 전에 지주들은 이 “농촌장관”을 쫓아내 버렸다.

 

임시정부가 보관했던 문서들에 기초하여 소장 연구자들은 이 당시 농민운동의 상황을 종합했다. 3월에는 34개 군만이 나름대로 힘있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것이 4월에는 174개 군, 5월에는 236개 군, 6월에는 280개 군, 7월에는 325개 군으로 증가한다. 그러나 이 수치들은 운동의 실제 성장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한 달 한 달이 지날 때마다 군 내부의 운동은 더욱 완강하고 광범위한 대중적 성격을 띠었기 때문이다.

3월부터 7월까지의 첫 시기에 농민의 압도적 다수는 지주에 대한 직접 폭력을 여전히 자제하고 있었으며 공공연히 토지를 몰수하지도 않았다. 현재 소련의 농업 인민위원 야코블레프는 위에서 소개한 연구를 주도했었다. 그는 농민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신뢰했기 때문에 비교적 평화적인 전술을 택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틀렸다. 농민들은 도시, 행정당국, 문명 사회를 계속 의심해왔다. 더욱이 농민은 르보프공의 정부를 신뢰할 수 없었다. 첫 시기에 농민들이 공개적으로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합법적 또는 반(半)합법적 압력을 행사하려고 노력한 이유는 간단했다: 이들은 자신의 투쟁 역량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정부를 믿지 못했다. 농민들은 상황을 파악하면서 적의 저항을 측정하는 정도에 그쳤다. 동시에 모든 방향에서 지주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들은 말한다: “우리는 강탈하고 싶지 않다. 모든 일을 좋게 해결하고 싶다.” 이들은 초지를 몰수하지 않고 다만 풀을 베어 건초를 만들뿐이다. 또한 지주가 토지를 빌려주도록 강요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임대료는 스스로 정하고 있다. 아니면 토지를 “구입”하되 가격을 스스로 정할 뿐이다. 지주나 자유주의 변호사들을 갸우뚱하게 만든 이 모든 합법적 외양은 정부에 대한 깊은 불신 때문이었다. 농민은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지주를 잘 대해도 토지를 넘겨받지는 못한다. 그러나 폭력은 위험하다. 수를 써보자.” 농민은 지주의 동의하에 토지를 넘겨받는 것을 당연히 선호할 것이다.

야코블레프는 주장한다: “몇 개월 내내 농민들은 지주들에게 대단히 ‘평화적으로’ 투쟁했다. 이 역사상 유례없는 행위는 농민이 부르주아 계급과 부르주아 정부를 신뢰했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례없다고 선언된 이 평화적 투쟁은 실제로는 모든 농민전쟁의 초기 단계에 등장하는 전형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불가피하게 강제된 방식이다. 교회법 이든 세속법 이든 법으로 초기의 반란 행위를 위장하려는 시도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모든 혁명계급의 투쟁방식이었다. 충분한 힘과 자신감을 축적하여 구 사회와 결별하기 전까지는 조심에 조심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다른 어떤 계급보다 특히 농민에게 더 그랬다. 왜냐하면 최상의 경우에도 농민은 반정도 몽매한 상태에서 전진하면서 도시의 친구들을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농민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다. 농민운동의 첫 단계에서 도시의 농민 동맹세력은 자유주의 및 급진 부르주아 계급의 하수인들이다. 농민의 요구 일부를 주장하면서도 이 동맹세력은 부르주아 소유권을 보호하기 위해 조심한다. 따라서 농민 봉기를 부르주아 법의 틀 안에 가두려고 최선을 다한다.       

혁명이 터지기 오래 전부터 다른 요인들도 같은 방향으로 작용한다. 귀족 계급 내부에서 화해를 주창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레프 톨스토이는 어느 누구보다 농민의 영혼을 깊이 꿰뚫어 보았다. 그는 악에 대한 비폭력 저항을 주창했는데 이 철학은 농민혁명의 첫 단계에 일반적으로 등장하는 사고이다. “강탈하지 않고 상호간의 동의를 통해” 모든 것이 해결될 그날을 톨스토이는 꿈꾸었다. 그는 정화된 기독교의 형태로 이 전술을 종교화했다. 마하트마 간디는 톨스토이와 똑같은 전술을 인도에서 실천하고 있다. 다만 그는 톨스토이보다 좀더 실리적인 방식을 취하고 있을 뿐이다. 성서의 시대 아니 이보다 더 이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야코블레프가 주장한 “역사상 유례없는” 현상들이 온갖 종교적, 민족적, 철학적, 정치적 외피를 뒤집어 쓴 채 존재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917년 러시아 농민 봉기의 특수성은 부르주아 합법성의 하수인들이 자칭 사회주의자 또한 자칭 혁명가였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농민운동의 성격과 리듬을 결정한 것은 이들이 결코 아니었다. 농민은 사회혁명당이 자신을 위해 지주와 화해할 적절한 정치적 수단을 확보해 줄 때까지만 이 정당을 따라갔다. 동시에 이 정당은 농민의 법적 외피가 됨으로써 농민의 이익에 기여했다. 결국 이 정당은 법무장관이었다가 나중에 전쟁장관이 된 케렌스키 그리고 농업장관 체르노프의 정당이었다. 지주와 자유주의자들의 저항 때문에 농민에게 필요한 포고령들이 지연되었다고 지구 및 군 토지위원회의 사회혁명당원들이 설명했다. 그리고 이들은 정부의 “우리 당 사람들”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농민에게 확신시켰다. 물론 이 변명에 대해 농민은 대답이 없었다. 다만 그는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에게 그 소중한 “신뢰감”을 조금도 느끼지 않은 채 투쟁을 통해 이들을 밑에서 밀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열심히 투쟁하여 너무 철저히 도움을 준 나머지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은 자기 관절이 으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볼셰비키당은 농민의 환상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당에 대한 농민의 적대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농민은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다른 정당들의 속임수를 알아차리고 실망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당에게 지지를 보냈다. 이 정당은 다른 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농업문제에 있어서도 말과 행동이 일치했다. 바로 여기에 이 정당의 강점이 있었다.

사회학의 일반 이론을 통해서는 농민이 지주에 대항해 투쟁할 역량이 있는 지의 여부를 선험적으로 결정할 수 없었다.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 사이에 농업 부문의 자본주의적 경향은 강화되었다. 그리고 부농 계층이 농촌공동체에서 떨어져 나왔다. 또한 부농이 운영하는 농업 협동조합은 크게 성장했다. 이 모든 것 때문에 다음의 질문에 대해 확신 있는 대답을 하기는 불가능했다: 농민과 지주/귀족 사이의 계층적 갈등과 농민 내부의 계급 갈등 가운데 어느 것이 혁명에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 

해외에서 귀국한 레닌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4월 14일 이렇게 말했다: “농민운동은 예언에 불과할 뿐 사실이 아니다....농민이 부르주아 계급과 동맹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한다.” 이것은 우연히 던진 생각이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레닌은 수많은 경우에 이 말을 끈질기게 반복했다. 4월 24일의 당 협의회에서 그는 농민을 과소평가 한다고 자신을 비난했던 “고참 볼셰비키들”을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 정당이 농민과 동일한 이해를 가져야 한다고 희망하는 것은 인정될 수 없다. 농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우리는 투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농민은 어느 정도 의식면에서는 자본가 편에 서 있다.” 스탈린주의 아류들은 이렇게 주장해왔다: 노동계급과 농민의 이해가 영원히 조화를 이룬다고 레닌이 말했다. 그러나 지금 인용한 레닌의 말은 이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지를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계층으로서 농민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레닌은 4월에 보다 불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즉 그는 지주, 부르주아 계급, 광범위한 부위의 농민이 안정적인 블록을 형성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농민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 지금 애쓰는 것은 우리를 밀류코프의 손아귀에 갖다 바치는 것과 같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중력의 중심을 농업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로 이전해야한다.”

그러나 그의 예상보다 더 유리한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다. 농민운동은 예언에서 사실로 전화되었다. 그리고 잠시 그러나 엄청난 위력으로 자본주의적 갈등보다 농민의 계층적 유대가 월등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농업노동자 대의원 소비에트는 오직 몇 개 지역 특히 주로 발트해의 몇 개 도에서만 의미 있는 세력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토지위원회는 농민 전체의 투쟁기구가 되었다. 이들은 묵직한 압박을 가해 토지위원회를 화해의 밀실에서 농업혁명의 도구로 전환시켰다.

커다란 하나의 몸체로 보면 농민은 역사상 마지막으로 러시아에서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 사실은 다시 한번 러시아 자본주의의 허약성과 강인성을 증언한다. 부르주아 경제는 아직까지 중세 농노제의 토지관계를 흡수하지 못하고 있었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대단히 발전했기 때문에 농촌의 모든 계층들은 토지소유의 낡은 형태들을 더 이상 참고 인정할 수 없었다. 우선 지주와 농민의 토지는 서로 엉켜있어서 대단히 의식적으로 지주의 권리가 전체 공동체의 이익을 덫에 가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마을의 토지는 절개지 형태로 어지럽게 소유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최근 들어 토지 공동체와 개별 토지소유주 사이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이 모든 것은 미적지근한 입법 조치로는 해결이 불가능했다. 이 결과 토지관계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욱이 농민은 이것을 농업 이론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게 느꼈다. 수 세대에 거쳐 물려받은 삶의 경험은 이들 모두가 같은 결론을 짓게 만들었다: 토지에 대한 상속권과 기타 특권을 철폐해야한다; 토지의 모든 경계를 없애야한다; 역사적 관습을 청산하고 일하는 농민에게 토지를 넘겨야한다. 이것이 바로 농민의 격언 “토지는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오직 신의 것이다”의 의미였다. 그리고 이 정신으로 농민은 사회혁명당의 토지 사회화 강령을 해석했다. 그러나 인민주의자들의 모든 이론에도 불구하고 사회혁명당의 강령에는 사회주의적 내용이 전무했다. 역사상 가장 대담한 농업혁명도 그 자체로는 부르주아 경제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농민 각자에게 “토지소유권”을 보장할 사회화는 무제한적 시장관계 때문에 완전한 공상이었다. 멘세비키들은 이 공상을 자유부르주아의 관점에서 비판했다. 반면 사회혁명당 이론이 공상으로 만든 농업혁명에서 볼셰비키들은 진보적 민주주의 경향을 찾아내었다. 이들은 농민이 노동계급과 동맹함으로써 농업혁명을 완수하고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을 도와야 한다고 보았다. 레닌은 이렇게 러시아 농민운동의 진정한 역사적 의미를 밝혔다. 이것은 맑스주의에 대한 그의 기여 가운데에서도 가장 위대한 기여에 속한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역사 발전의 연구자요 사회학자로서 (즉 고지에서 사건들의 진행을 관찰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레닌과 트로츠키가 최근 유럽의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보다 푸가초프, 라진, 볼로트니코프 등 17, 18세기의 러시아 역사와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적 조합주의”를 언급한 것은 일단 논외로 하자. 이것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가 끌어다 놓은 것으로 지금의 논의와 전혀 무관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유주의 사회학자로서 주장한 바에 일말의 진실이 있더라도 이 진실은 볼셰비키당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오직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 역사무대에서 이들의 뒤늦은 등장, 이들의 정치적 무의미성에 대한 비판이 될 뿐이다. 과거의 거대한 농민운동들이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들을 민주화시키지 못한 것은 볼셰비키당의 잘못이 아니다. 이 운동들을 도시가 지도하지 못했기 때문에 민주화는 성취되지 못했다! 1861년의 소위 농민 해방이 공동체 토지의 도둑질, 국가에 대한 농민의 노예화, 신분제도의 완벽한 보존 등을 결과한 것도 볼셰비키당의 잘못이 아니다. 한 가지는 명확하다: 17세기, 18세기, 19세기에 시도조차 되지 못한 거대한 사회변화를 볼셰비키당이 20세기 첫 25년에 수행해야했다. 이 거대한 부르주아 혁명의 임무를 수행하기 전에 볼셰비키당은 구 지배계급들과 구 시대라는 역사적 쓰레기를 우선 치워야 했다. 최소한 이 예비 임무를 볼셰비키당은 대단히 성실하게 성취했다. 이 점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밀류코프도 지금은 이것을 감히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제 21장 대중의 정서 변화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체제는 출범 4개월 째에 자기 모순 때문에 벌써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6월은 전국 소비에트 대회와 함께 시작되었다. 이 대회는 러시아군의 공세에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공세의 시작과 동시에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볼셰비키당에 반대하는 화해주의자들의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그러나 결국 이것은 화해주의자들에 반대하는 볼셰비키당의 시위가 되어버렸다. 대중은 더욱 분노하면서 2주일 후 또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상부의 지시 없이 대중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이 시위는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역사는 “7월 시기”라는 이름을 붙여 이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이 사건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정 중앙 시점에 발생했다. 7월의 이 반(半)봉기는 2월 혁명 체제를 마감했으며 10월 혁명을 준비하는 총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본 저서의 제 1권은 7월 시기의 문턱에서 끝난다. 뻬쩨르부르그의 6월 시위를 둘러싼 사건들로 넘어가기 전에 대중에게 일어나고 있던 일련의 과정들을 여기서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느 자유주의자는 5월초에 이렇게 단언했다: 정부가 좌로 움직일수록 국민 즉 “유산계급들”은 우로 움직인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응수했다: “노동자, 빈농, 극빈농으로 이루어진 ‘국민’은 체르노프와 체레텔리 같은 화해주의자들보다는 1000배나 좌에 그리고 우리보다는 100배나 좌에 있다. 조금만 더 지내보면 이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 레닌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볼셰비키당보다 “100배”나 더 좌에 있다고 추정했다. 이 생각은 근거가 좀 빈약한 것처럼 보인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여전히 화해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있었으며 이들 가운데 다수는 볼셰비키당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은 현실을 더 깊이 꿰뚫어보고 있었다. 대중은 자신의 이익, 증오, 희망을 표출할 적절한 방식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화해주의자들의 정책은 자기 표출 방식의 첫 단계에 불과했다. 대중은 체르노프와 체레텔리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좌에 있었다. 다만 자신의 급진적 지향을 아직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볼셰비키당보다 좌에 있다는 레닌의 생각은 옳았다. 왜냐하면 볼셰비키당의 압도적 다수는 각성하고 있는 인민의 가슴 깊이 끓어오르는 혁명적 열정의 거대함을 아직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질질 끌고 있는 전쟁, 경제 파탄, 정부의 악의에 찬 복지부동 등이 대중의 분노를 키우고 있었다.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광활한 대평원은 철도 덕분에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다른 어떤 것보다 철도체계에 가장 큰 타격을 가했다. 수송체계는 꾸준히 붕괴하고 있었다. 일부 철도노선들에서는 운행 불능 기관차가 50%에 달했다. 철도본부의 박식한 엔지니어들은 6개월 내에 철도수송이 완전히 마비된다는 내용의 보고서들을 읽고 있었다. 이 예상은 의식적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수송체계는 위협적인 수위에 다다랐다. 이 결과 철도는 묶이고 상품 교환은 극심히 교란되었으며 안 그래도 높은 생활비는 더 올라갔다.          

도시의 식량 사정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43개 도에서 농민운동이 중심을 잡으면서 군대와 도시에 대한 곡물 공급은 위험할 정도로 줄어들고 있었다. 물론 좀더 비옥한 지역에서는 수 십억 푸드(역자 주: 소련에서 사용된 무게 단위로 16.38 kg에 해당된다.)의 잉여 곡물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고정된 곡물 가격에 저항했다. 이들은 오른 물가에 맞추어 곡물 가격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곡물 구입은 여의치 않았다. 더욱이 수송의 붕괴로 준비된 곡물을 인구 중심부로 수송하기가 어려웠다. 1916년 가을 이후로 전선에 도착하는 식량 열차의 수는 평균해서 예상수치의 절반에 불과했다.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그리고 기타 공업 중심지들은 필요한 식량의 10% 밖에 공급받지 못했다. 그리고 비축 식량은 거의 없었다. 도시 대중의 생활수준은 영양 실조와 기아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연립정부는 수립되자마자 하얀 빵의 제조를 금지하는 민주적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몇 년이 지나야 수도에서 “프랑스 롤빵”이 다시 나타날 것이다. 버터는 충분치 못했다. 6월에는 전국에 명확한 배급제가 시행되면서 설탕 소비가 감소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교란된 시장질서는 국가 통제로 대체되지 않았다. 이미 선진 자본주의 정부들은 국가 통제를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일은 이를 통해서만 4년간의 전쟁을 견딜 수 있었다.

경제 파탄의 위협적인 징후들은 모든 곳에서 나타났다. 수송체계의 붕괴 이외에도 장비의 마모, 원자재와 소모품의 부족, 인원의 교체, 열악한 금융, 만연한 불확실성 등에 의해 공장의 생산성이 하락했다. 주요 공장들은 전쟁물자 생산을 위해 계속 가동되고 있었다. 주문은 2년이나 3년을 앞질러 분배되었다. 한편 노동자들은 전쟁이 계속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문들은 전쟁 이윤의 놀라운 수치들을 공개하고 있었다. 생활비는 오르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무언가 변화를 기대하고 있었다. 공장의 기술 및 관리 인력들은 단체를 조직하여 자기들의 요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분야도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주도했다. 공장의 생산체계는 해체되고 있었다. 연결 부분들도 모두 약화되고 있었다. 전쟁이 승리할 것이며 국가경제가 튼튼해질 것이라는 전망은 흐렸다. 그리고 재산 소유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이윤은 하락하고 있었으며 투자 위험은 증대되었다. 혁명이 가져온 부정적 상황 때문에 자본가들은 생산 의욕을 상실했다. 전체적으로 부르주아 계급은 경제 패배주의 노선을 수용하고 있었다. 경제 마비로 인한 일시적인 손실과 적자는 “문화”의 토대를 위협하는 혁명을 저지하는데 지출할 경상비용이었다. 동시에 고마운 언론은 매일 이렇게 비방했다: 노동자들이 악의적으로 태업에 돌입했다; 이들이 원자재를 훔치고 있다; 이들이 생산을 중단시키기 위해 불필요하게 연료를 태우고있다. 이 비방의 허구성은 모든 한계를 초월했다. 연립정부를 주도하는 정당의 신문이 이 비방을 주도했기 때문에 당연히 노동자들은 임시정부에 대해 분노했다.

1905년 혁명에서 정부가 적극 지지한 잘 조직된 공장폐쇄는 노동자들의 8시간 노동제 투쟁 뿐 아니라 혁명도 패배시켰다. 이것은 왕정의 유지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역사적 경험을 자본가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상공업 총연합회라고 그럴듯하게 이름지어진 독점 자본의 투쟁기관에서 공장폐쇄의 문제가 논의되었다. 엔지니어 출신의 재계 지도자 아우어바흐는 나중에 회고록에서 공장폐쇄 전술이 거부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 전술은 군대의 후방에서 뒤통수를 치는 격이 될 것 같았다...정부의 지지 없이 이 전술이 운용되면 대다수의 국민이 이것을 음흉한 수작이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불행하게도 “진짜” 정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에 의해 마비되어 있었다; 소비에트의 합리적인 지도자들은 대중에 의해 마비되어 있었다; 공장의 노동자들은 무장하고 있었다; 더욱이 거의 모든 공장들은 바로 옆에 우호적인 연대나 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공장폐쇄는 “국가적 차원에서 별로 내키지 않는다”고 자본가들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공장폐쇄를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주어진 상황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가 아니라 은근히 이 전술을 구사할 생각이었다. 아우어바흐의 외교적 표현에 의하면 자본가들은 이렇게 최종 결론을 내렸다: “실제로 공장들은 하나씩 서서히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실 자체가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실제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다른 말로 하면 시위하는 식으로 공장을 폐쇄시킬 경우 “엄청난 책임”을 져야하므로 이 자본가 연합회는 회원들에게 하나씩 문을 닫아 품위 있는 핑계를 마련하라고 권유했다.

은근한 공장폐쇄 계획은 놀랍게 체계적으로 시행되었다. 과거 위테 내각의 장관이었으며 자본의 지도자인 입헌민주당의 쿠틀러는 산업의 붕괴에 대한 의미심장한 보고서들을 읽었다. 그리고 3년간의 전쟁이 아니라 3개월간의 혁명이 이 사태에 책임이 있다고 비난했다.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지는 참을성을 상실하고 이렇게 예언했다: “2, 3 주일에 걸쳐 작업장과 공장들은 하나씩 문을 닫을 것이다.” 여기서는 위협이 예언으로 위장되었다. 엔지니어, 교수, 기자들은 일반 신문과 전문지에 캠페인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 구국의 기본 조건이라고 이 캠페인은 선언했다. 자본가 장관 코노발로프는 사임하기 직전인 5월 17일에 시위하듯 이렇게 선언했다: “흐리멍덩한 머리들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수천 개의 공장들이 문을 닫는 광경을 목격할 것이다.”

6월 중순에 어느 상공인 총회는 “혁명을 가져오는 제도와 급진적으로 결별할 것”을 임시정부에 요구한다. 이미 장군들은 이렇게 요구했었다: “혁명을 중지시켜라.” 그러나 자본가들은 이 요구를 좀더 간결하게 제시한다: “볼셰비키당 뿐 아니라 사회주의 정당들이 악의 근원이다. 확고한 철권통치만이 러시아를 구할 수 있다”

정치적 준비작업을 마친 자본가들은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 3, 4월에 걸쳐 9천명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129개의 소규모 공장들이 문을 닫는다. 5월에는 비슷한 규모의 노동자들을 고용하는 108개의 공장, 6월에는 3만8천명을 고용하는 125개의 공장이 문을 닫았다. 7월에는 206개의 공장이 문을 닫으면서 4만8천명의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았다. 이제 공장폐쇄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뻬쩨르부르그 섬유공장에 이어 모스크바 섬유공장이 문을 닫더니 이것이 각 도로 확산되었다. 연료, 원자재, 주변 기기, 신용대부가 부족해서 공장을 폐쇄한다고 제조업자들은 이유를 댔다. 그러자 이때 노동자들이 수립한 공장위원회가 개입했다. 공장위원회는 수없이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입증했다: 노동자들에게 압박을 가하기 위해 또 정부의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 자본가들이 악의적으로 산업을 파괴하고 있다. 자국 대사관을 통해 행동하는 외국 자본가들은 특히 뻔뻔스러웠다. 이들의 공장폐쇄 기도는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에 공장위원회가 이것을 폭로한 후 공장은 다시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이로써 모순이 하나 하나 드러났다. 혁명으로 인해 가장 주요한 모순 즉 산업의 사회적 성격과 도구와 장비의 사적 소유 사이의 모순이 이제 명백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전체 인민의 생존이 걸린 공장을 마치 담배 갑을 닫듯이 제멋대로 닫았다.

전쟁을 지원하기 위한 자유 대부를 거부한 은행들은 대자본에 대한 혁명의 재무 간섭에 대해 전투적으로 저항했다. 재무장관에게 보낸 편지에서 은행가들은 이렇게 “예언했다”: 급진적으로 금융이 개혁될 경우 자본은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며 지폐들은 금고로 들어갈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은행가 애국자들은 산업의 폐쇄에 이어 금융도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정부는 서둘러 이렇게 인정했다: 목숨 밖에 남은 것이 없는 크론슈타트의 늙은 수병이 아니라 전쟁과 혁명으로 자본을 잃을 위험에 처한 존경받는 인물들이 태업을 조직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입각한 이후 국가경제에 대한 책임이 소비에트 다수파에 있다고 대중은 이해하고 있었다. 이 점을 집행위원회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집행위원회 경제부는 광범위한 국가통제 계획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경제파탄의 위협 때문에 아주 온건한 경제전문가들의 제안들이 훨씬 급진적으로 해석되었다. 집행위원회의 계획은 이러했다: “다수의 산업 분야에서는 국가의 상업독점을 시행할 때가 무르익었다(빵, 고기, 소금, 가죽). 다른 분야에서는 국가 독점체를 통제할 조직을 수립할 조건이 무르익었다(석탄, 석유, 금속, 설탕, 종이). 마지막으로 거의 모든 산업 분야에서 원자재와 완제품 유통 그리고 가격 확정 등과 관련하여 국가 통제가 요구된다....이것과 동시에 모든 신용기관들을 통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5월 16일 집행위원회의 당황한 지도부는 거의 논의도 없이 경제전문가들의 제안들을 채택했다. 그리고 정부에 독특한 경고를 보내 이것들을 지지했다: “국가의 산업과 노동을 계획을 통해 조직할 임무”를 정부가 맡아야한다; 이 임무를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체제는 무너졌으며 임시정부를 연립정부로 다시 조직하는 것이 필요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스스로 용기를 북돋우기 위해 자신들에게 겁을 주고 있었다.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집행위원회의 강령은 통제 계획, 독점기업의 국유화, 투기에 대한 투쟁, 노동에 대한 책임 등에 있어서 아주 훌륭하다....이 ‘무서운’ 볼셰비키 강령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경제파탄의 무시무시한 위협에 직면하여 다른 탈출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이 멋진 강령을 시행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임시정부가 이 강령을 시행할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즉시 나왔다. 집행위원회가 이 경제강령을 채택한 지 하루만에 상공장관 코노발로프는 사임을 발표한 후 꽝 소리나게 문을 닫으며 정부청사를 나왔다. 엔지니어 출신의 팔친스키는 그에 못지 않게 충성심이 강했다. 이제 그가 대자본의 더욱 열정적인 대변인이 되어 코노발로프를 대신했다. 한편 사회주의자 장관들은 자유주의 동료들에게 집행위원회의 강령을 진지하게 제의할 생각도 못했다. 기억하고 있듯이 체르노프는 토지 매매 금지법을 정부에서 통과시키려 했으나 헛수고만 했었다. 정권을 유지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자 정부는 수도의 공장과 작업장들을 시골 한가운데로 옮기는 계획을 들고 나왔다. 이 계획은 독일이 수도를 점령할 위험이 있다는 군사적 고려와 수도가 연료와 원자재의 원산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경제적 고려에서 나왔다. 이 계획은 수개월과 수년에 걸쳐 뻬쩨르부르그의 산업을 청산시킬 것이다. 이 계획은 노동계급의 전위를 전국에 산재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제출되었다. 이 계획과 함께 군 수뇌부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수도에서 혁명적 군부대들을 옮길 계획을 들고 나왔다.        

팔친스키는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에게 모든 힘을 다해 공장 이전의 장점들을 확신시키려했다. 노동자들이 지지하지 않으면 이 계획은 실현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산업의 통제와 마찬가지로 공장 이전 계획도 전혀 진척이 없었다. 경제 파탄은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물가는 올라가고 있었으며 공장은 계속 폐쇄되면서 실업을 증대시켰다. 정부는 시간이 흐르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중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정부는 물길에 따라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물길은 볼셰비키당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물길은 볼셰비키당 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노동계급은 혁명의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었다. 동시에 혁명은 노동계급을 형성시켰다. 따라서 노동계급에게는 혁명이 크게 필요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2월 혁명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 사실을 우리는 이미 살펴보았다. 가장 전투적인 진지들은 모두 볼셰비키들의 차지였다. 그러나 혁명이 승리한 직후 이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대신 화해주의 정당들이 정치 무대 앞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권력을 자유주의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겼다. 애국주의는 이 동맹의 암호였다. 애국주의 공세는 너무 강력하여 볼셰비키당 지도자 절반 이상은 여기에 굴복했다. 레닌의 귀국과 함께 당의 노선은 급변했으며 이후 새로운 노선의 영향이 급상승했다. 4월 무장시위에서 노동자와 병사의 선두 대오는 화해주의자들의 사슬에서 이미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첫 시도 후 이들은 후퇴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여전히 지도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볼셰비키당이 전쟁에 지친 농민군에게 많은 빚을 졌다는 내용의 글들이 10월 혁명 후 많이 나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피상적인 설명이다. 정반대의 말이 진실에 더 가까울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이 2월 혁명에서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이유는 농민군이 인민의 생활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혁명이 평화시에 터졌다면 노동계급의 주도적 역할은 처음부터 훨씬 두드러졌을 것이다. 전쟁이 없었다면 혁명은 더 나중에 승리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계산에 넣지 않는다면 평화시 혁명의 희생자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대신 화해주의 및 애국주의 정서가 지배할 구석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은 이미 오래 전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것은 농민군의 일시적 정서가 아니라 사회의 계급구조를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예측은 완전히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기본적인 계급 역관계는 전쟁을 통해 굴절되었으며 군대 즉 탈계급화 한 무장 농민조직의 압력에 의해 일시적으로 변화했다. 소부르주아 화해주의 정책의 위력을 대단히 강화시키면서 8개월간의 실험을 통해 나라와 혁명을 약화시킨 것은 바로 전쟁으로 조성된 인위적인 사회 구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의 뿌리는 농민군에 대한 언급으로 전부 설명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성격, 구성, 정치적 수준에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일시적으로 대세를 장악한 보충적 원인을 찾아야한다. 전쟁은 노동계급의 구성과 정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전쟁 이전 시기가 혁명적 에너지가 상승하는 시기였다면 전쟁은 이 과정을 날카롭게 단절시켰다. 군대 동원령은 군사적일 뿐 아니라 더욱더 정치적 관점에서 계획되고 시행에 옮겨졌다. 정부는 서둘러서 공업지구에서 적극적이고 저항적인 노동자 부위들을 전선으로 보내 그 영향력을 제거시켰다. 전쟁 첫 몇 개월의 동원으로 숙련노동자 대부분과 전체 노동자의 약 40%가 공업지역에서 분리되었다. 이들이 사라지면서 생산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전쟁 산업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는 정도가 큰 자본가들일수록 더 거세게 항의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핵심부위는 더 이상 파괴되지 않았다. 산업활동에 필수적인 노동자들은 군복무를 면제받으면서 공장에 머물렀다. 군대로 끌려간 숙련 노동자들에 의해 생긴 생산 공백은 농촌에서 도시로 나온 농민, 소도시민, 미숙련 노동자, 여성, 소년들에 의해 채워졌다. 산업에서 여성의 비율은 32%에서 40%로 증대되었다.

노동계급이 묽어지고 새로 충원되는 과정은 수도에서 극에 달했다. 1914년에서 1917년까지 5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수는 뻬쩨르부르그 도에서는 거의 배로 늘었다. 폴란드 특히 발트해 국가들에서 공장이 청산되면서 러시아에 전쟁산업이 전반적으로 성장한 결과 1917년 뻬쩨르부르그에는 40만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 밀집된다. 이들 가운데 33만 5천명은 140개의 거대 공장에 밀집되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계급의 전투적 분자들은 전선에서 군대의 혁명적 정서를 표현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러나 농촌에서 갓 올라온 노동자들은 종종 부유한 농민이거나 상점주인으로서 전선의 참호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숨어있던 자들이었다. 이들과 여성 그리고 소년들은 일류 노동자들보다 훨씬 순종적이었다. 또한 군복무를 공장에서 대신한 숙련노동자들은 수십만 명이었는데 이들은 전선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대단히 몸을 사려야했다. 이 상황은 애국주의 정서가 지배하게 된 사회적 배경의 일부가 되었다. 또한 짜르 치하에도 노동자들의 일부가 애국주의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여기에 덧붙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애국주의 정서에는 안정적 토대가 없었다. 무자비한 군대와 경찰의 탄압, 배가된 착취, 전선의 패배, 산업의 붕괴 등은 노동자들을 투쟁으로 내몰았다. 그러나 전쟁 중에 파업은 대부분 경제 파업이었으며 전쟁 전보다 훨씬 온건했다. 노동계급의 약화는 노동계급 정당의 약화에 의해 가중되었다. 볼셰비키당 의원단이 체포되고 유형지로 추방당한 후 이전부터 존재한 밀정 조직의 도움으로 볼셰비키 당조직은 전반적으로 파괴당했다. 당은 2월 혁명 때까지 이 탄압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희석된 노동계급은 1915년에서 1916년까지 초보적인 투쟁의 학교를 거쳐야했다. 이후 부분적 경제파업과 기아로 굶주린 여성들의 시위가 1917년 2월 총파업으로 결합되고 군대가 봉기에 동참하면서 노동계급의 투쟁은 전쟁 이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이렇게 뻬쩨르부르그 노동계급은 이질적으로 구성되어 계급적 단결을 달성하지 못한 가운데 2월 혁명을 맞이했다. 더욱이 이때에는 계급의 선진 부위까지 정치의식이 낮은 수준에 있었다. 화해주의 정당들이 일시적으로 득세한 두 번째 조건은 전쟁으로 야기된 노동계급의 정치적 문맹 및 반(半)문맹이었다.

혁명은 대중을 교육시키는데 그것도 대단히 빠르게 교육시킨다. 바로 여기에 혁명의 위력이 있다. 혁명 일주일마다 대중은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운다. 혁명 2개월은 한 시대를 창조한다. 2월말에는 봉기가 일어났고 4월말에는 뻬쩨르부르그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무장 시위를 벌였다. 7월초에는 범위가 훨씬 넓고 좀더 결연한 구호 하에 대중의 새로운 공격이 시작된다. 8월말에는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시도가 대중에 의해 격퇴 당한다. 10월말에는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다. 리듬이 대단히 격렬한 이 사건들은 대중의 정치의식에 세포 분열을 가져와 노동계급의 이질적 구성부분들을 정치적 단일체로 결집시킨다. 파업은 이 과정에서 가장 주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 특수로 인한 엄청난 이윤으로 흥청망청하던 자본가들은 혁명의 번갯불에 깜짝 놀라 공포에 떤다. 이들은 혁명 첫 몇 주일동안 일단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한다. 뻬쩨르부르그 공장주들은 제한 및 예외 조항들을 두었으나 8시간 노동제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사태가 잠잠해지지 않았다. 생활수준이 계속 하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5월에 집행위원회는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앙등하는 생활비 때문에 노동자들은 “다수가 고질적인 기아 상태에 근접했다.” 노동자 지구의 정서는 갈수록 날카롭고 팽팽해졌다. 이들을 짓누른 것은 무엇보다 전망의 부재였다. 궁핍을 감내하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경우 대중은 가장 가혹한 궁핍도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새 정부는 시간이 갈수록 대중이 타도한 구체제의 변종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것을 이들은 견딜 수 없었다.

더욱 격심한 착취에 시달리던 후진 노동자들의 파업은 특히 맹렬했다. 세탁소 노동자, 염색 노동자, 통 제조 노동자, 사무노동자, 건설 노동자, 종이 상자 제조 노동자, 소시지 제조 노동자, 가구 제조 노동자 등은 부위별로 6월 내내 파업을 계속했다. 반면에 금속노동자들은 파업에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했다. 선진 노동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갈수록 명백해졌다: 전쟁, 경제 파탄, 인플레 등의 상황에서 개별적 경제파업은 사태를 제대로 개선할 수 없다; 토대 자체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의 광범위한 공장폐쇄 전술을 알아챈 노동자들은 산업의 통제 요구에 쉽게 호응했다. 또한 이들은 공장을 국가가 통제해야할 이유를 이해했다. 이것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대다수의 개인 공장들은 전쟁 노력에 투입되고 있었으며 같은 유형의 국가기업들이 이들과 나란히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1917년 여름에 러시아의 벽지에서 노동자 및 사무직 대표단이 수도를 방문하여 재무부가 공장을 접수할 것을 호소했다. 공장의 주주들이 생산자금을 끊었기 때문에 공장이 가동되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 호소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부를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것에 반대했다. 그러자 노동자들은 화해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4만의 노동자가 고용된 푸틸로프 공장은 혁명의 첫 몇 개월간 사회혁명당의 아성이었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아 이 아성은 볼셰비키당의 공격에 성을 내주었다. 양복장이 출신의 볼로다르스키는 볼셰비키들의 공격에서 대개 선봉에 섰다. 몇 년간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하는 이 유태인은 대단한 대중 연설가였다. 그는 논리적이고 기발하며 대담했다. 그의 미국영어 억양은 그의 우렁찬 목소리에 독특한 표현력을 부여하여 수천 명의 집회에서 간결하게 울려 퍼졌다. 미니체프 노동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가 나르바 지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푸틸로프 공장의 기반은 사회혁명당 신사들의 발 밑에서 꺼지고 있었다. 2개월만에 푸틸로프 노동자들은 볼셰비키당으로 넘어갔다.”

파업 그리고 일반적으로 계급투쟁이 성장하면서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은 거의 자동적으로 상승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모든 경우에 노동자들은 확신했다: 볼셰비키들은 딴 마음을 품고있지 않다; 이들은 아무 것도 숨기지 않는다; 이들은 신뢰가 간다. 투쟁의 순간에는 무당파 노동자, 사회혁명당 노동자, 멘세비키 노동자들은 모두 볼셰비키당으로 이끌렸다. 관리자들과 공장주들의 태업에 맞서 공장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공장위원회는 소비에트보다 볼셰비키당에 훨씬 빨리 포섭되었기 때문이었다. 6월초에 열린 뻬쩨르부르그와 인근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볼셰비키당의 결의안은 421표 가운데 335표의 지지를 받았다. 이 사실을 거대 신문들은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경제생활의 근본 문제들에서 아직 화해주의자들과 결별하지 않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이 사실상 볼셰비키당으로 넘어갔음을 보여주었다.

6월에 열린 노동조합 협의회에서 뻬쩨르부르그의 50개가 넘는 노동조합들이 자그마치 25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금속노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약 10만 명이었다. 조합원 수가 5월 한달 동안 배로 늘은 셈이었다. 노동조합에서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은 더욱 빠르게 커졌다.

소비에트의 보궐선거가 있을 때마다 승리는 볼셰비키당에게 돌아갔다. 6월 1일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대의원 분포는 볼셰비키당 206명, 멘세비키당 176명, 사회혁명당 110명이었다. 지방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으나 진행속도가 느렸을 뿐이었다. 볼셰비키당의 당원 수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었다. 4월말 뻬쩨르부르그 당 조직은 1만5천의 당원을 보유했으나 이 수치는 6월말에 3만2천명으로 증가했다.

이때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은 이미 볼셰비키당이 다수였다. 그러나 노동자 병사 합동회의에서는 병사 대의원들이 볼셰비키 대의원들을 앞질렀다. 프라우다지는 더욱더 끈질기게 총선거를 주장했다: “50만 수도 노동자들은 15만 수도 주둔군보다 대의원 수는 4배나 적다.”

6월에 열린 소비에트 대회에서 레닌은 자본가들과 은행가들의 공장폐쇄, 생산시설의 약탈, 경제생활에 대한 방해공작 등에 대해 단호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자본가들의 이윤을 공개하고 최대 백만장자를 50명이나 100명 선에서 체포하라. 짜르와 같은 특별 대우를 해주면서 이들을 몇 주일 동안 감옥에 가두자. 그러면 이들은 자신들의 연줄, 속임수, 치사함, 이기심 등을 털어놓을 것이다. 이들의 수작으로 새 정부에서도 수백만 루블의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 소비에트 지도자들에게 레닌의 제안은 너무 황당해 보였다. “개별 자본가들에 대한 폭력 행사를 통해 경제법칙을 바꿀 수 있다고 상상하는가?” 그러나 이들에게는 자본가들이 인민에 대한 음모를 통해 법을 강제하는 상황은 일상적 질서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천둥과 같은 분노로 레닌을 비난한 케렌스키는 한달 뒤에 “경제 생활의 법칙”을 자본가들과 다르게 이해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을 전혀 주저하지 않고 체포했다.  

경제와 정치 사이의 관계가 폭로되고 있었다. 신비스러운 원리에 근거한 것처럼 보였던 국가는 더욱 자주 자신의 가장 원초적 형태 즉 특정 소유관계를 방어하는 무장 군사집단의 모습을 드러냈다. 양보나 심지어 협상 자체도 거부했던 고용주들을 노동자들은 소비에트에 강제로 출석시키거나 가택연금에 처했다. 노동자 민병대가 유산계급들에게 특히 증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들의 10%를 무장시키려는 집행위원회의 원래 결정은 시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부분적으로 무장했으며 더 적극적 분자들은 민병대에 참여했다. 노동자 민병대의 지도부는 공장위원회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공장위원회의 지도부는 더욱더 볼셰비키당의 지도를 받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어느 공장의 노동자 포스타프쉬치크는 이렇게 말한다: “6월 1일 볼셰비키들을 다수파로 하는 새로운 공장위원회가 수립되자마자...80명의 노동자 민병대가 나이 많은 병사 레바코프 동지의 지도 아래 구성되었다. 이들은 무기가 없을 때에는 막대기로 훈련했다.”

민병대가 폭력을 휘두르고 징발과 불법 체포를 자행한다고 언론은 비난했다. 민병대가 폭력을 행사한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수립된 목적이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폭력의 대상이 되는데 익숙하지 않았으며 그렇게 되기를 원치도 않았던 유산계급의 대표들을 다룰 때 민병대는 폭력을 사용했을 뿐이었다. 이것이 죄라면 죄였다.

임금인상 투쟁에 지도적 역할을 했던 푸틸로프 공장에서 6월 23일 협의회가 개최되었다. 여기에는 공장위원회 중앙위원회, 노동조합 중앙사무국, 기타 73개 공장의 대표들이 참여했다. 볼셰비키당의 지도하에 이 협의회는 지금의 조건 속에서 공장의 파업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조직되지 않은 정치투쟁”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따라서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합당한 분노를 억제하고” 전반적 공세를 위해 투쟁력을 준비할 것을 제의했다.

이 중요한 협의회 전날 밤에 볼셰비키 분파는 집행위원회에서 이렇게 경고했었다: “우리 당이 억제하지 않았다면 4만 명의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파업을 벌이고 거리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가 이들을 계속 억제할 수 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오면 대다수 노동자와 병사들이 뒤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이 경고들을 참주선동으로 간주했다. 또는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평온한 마음을 유지했다. 이들은 공장과 병영을 방문하는 것도 거의 그만두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이들을 불쾌하게 대했기 때문이었다. 충분한 권위를 획득하여 이들의 산발적인 투쟁을 억제할 수 있는 세력은 볼셰비키당 뿐이었다. 그러나 가끔 볼셰비키들에게도 화풀이를 할만큼 대중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었다.          

이때 공장과 함대에 무정부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사건과 거대한 대중 앞에서 이들은 언제나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를 드러냈다. 이들은 새로운 국가기관인 소비에트의 의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국가권력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쉬웠다. 더욱이 혁명에 어안이 벙벙해진 이들은 대개의 경우 국가권력의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이들은 대개 사소한 충돌이나 조장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파산 상태를 드러냈다. 경제 파탄의 막다른 골목과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점증하는 분노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은 약간의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전국적 차원에서 계급 역관계를 평가할 수 없었던 이들은 아주 사소한 대중의 항거도 최후의 구원으로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당이 단호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화해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가끔 비난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불평하는 정도에서 그쳤다. 볼셰비키들은 무정부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반응을 혁명의 열기를 가늠하는 척도로 가끔 이용했다.     

핀란드역에서 레닌의 귀국을 환영했던 수병들은 이로부터 2주일 후 사방의 애국주의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만약에 그가 어떤 방법으로 귀국했는지를 우리가 미리 알았더라면 열광적인 만세 대신 우리는 ‘거부한다! 왔던 나라로 다시 돌아가라!’라고 분노하여 외쳤을 것이다.” 크림 반도의 병사 소비에트들은 이 애국주의 반도에 대한 레닌의 방문을 막겠다고 차례로 위협했다. 사실 레닌은 이곳을 방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2월 27일 봉기의 주역이었던 볼린스키 연대는 애국주의 열풍에 휩싸여 레닌을 체포하겠다고 결의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집행위원회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나름의 조치를 취해야했다. 이 정서는 6월 공세까지 걷히지 않았다. 그리고 7월 시기 이후에도 날카롭게 다시 상승하곤 했다. 동시에 가장 멀리 떨어진 주둔지와 전선의 먼 구석에서 병사들은 더욱 대담하게 그리고 종종 의식도 하지 못한 채 볼셰비키당의 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연대 안에 볼셰비키는 한 명뿐이었으나 당의 구호들은 더욱 깊이 침투하고 있었다. 이 구호들은 전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올라오는 것 같았다. 자유주의자들은 이것이 대중의 무지와 혼란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레치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국은 지금 정신병동으로 변하고 있다. 귀신에 홀린 자들은 행동에 나서서 명령하고 있다. 아직 이성을 상실하지 않은 자들은 공포에 질려 한발 물러나 벽에 몸을 붙이고 있다.” 모든 혁명에서 “온건파들”은 바로 이런 말로 자기 영혼을 토로한다. 화해주의 신문들은 자기 위안의 말을 이렇게 표현했다: 모든 오해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볼셰비키당과 관계하기를 전혀 원치 않는다. 한편 대중의 무의식적인 볼셰비키 노선은 혁명의 논리를 반영하면서 레닌의 당에게 정복될 수 없는 위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3일간의 토론 끝에 전선의 병사들은 소비에트 대회에 나갈 대의원을 선출했다. 선출된 대의원은 모두 사회혁명당원들이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피레이코 병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반적으로 자신들이 이해하고 있는 문제에서 병사들은 볼셰비키의 가장 과격한 분자보다 훨씬 왼쪽에 있었다.” 대중이 “우리보다 100배나 왼쪽에 있다”는 레닌의 말은 바로 이 현상을 두고 한 말이었다.    

타우리데 도의 어느 오토바이 상점에서 일하는 사무원은 이렇게 말한다: 부르주아 신문을 읽은 후 병사들은 빈번하게 이름을 알 수 없는 볼셰비키들을 학대했다. 그리고 곧바로 토론에서 전쟁을 중지해야하며 지주의 토지를 몰수해야할 필요성 등을 말하곤 했다. 레닌이 크림 반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다고 욕한 애국주의자들이 바로 이들이었다. 후방의 거대한 주둔지에서 생활하는 병사들은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운명이 바뀌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할 일없는 인간들이 계속 밀려들어 거대한 집단을 이루었다. 이 때문에 병사들은 떼거지로 거리로 나가거나 전차를 탄 채 불만을 터뜨리고 해바라기 씨를 유행병처럼 씹어대었다. 참호에서 입는 외투를 어깨에 걸치고 해바라기 씨 껍질을 엉덩이에 붙인 병사들은 부르주아 언론에게 가장 증오스러운 대상이었다. 전쟁 중에 이들은 조야한 아양발림으로 치켜세워졌다. 이들은 영웅으로 불리기조차 했다. 물론 이 영웅들은 여전히 전선에서 벌로 채찍질을 당했다. 그리고 2월 혁명 후에 이들은 해방투사로 칭송되었다. 그러더니 이제는 갑자기 깡패, 배신자, 총잡이, 독일의 첩자가 되었다. 애국주의 언론이 러시아 병사와 수병들에게 퍼붓지 않은 욕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이때 집행위원회는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무정부적 혼란상에 대항하고 대중의 과도한 행위들을 저지하고 공포에 질린 질문지와 도덕적 지시사항들을 배포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짜리친은 무정부주의적 볼셰비키주의의 아성으로 인식되었다. 이 도시의 소비에트 의장은 중앙에서 내려온 정세 설문지에 간결하게 대답했다: “주둔군이 좌로 나갈수록 일반인들은 우로 나간다.” 이것은 전국의 상황에 해당되는 표현이었다. 병사는 좌로 부르주아는 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들보다 대담하게 솔직한 느낌을 표현하는 병사는 상부에 의해 전부 볼셰비키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이 비난은 워낙 끈질기게 가해져서 시간이 좀 지나면 비난의 대상자조차 이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의 생각은 평화와 토지 문제에서 이제 권력의 문제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산발적으로 들리는 볼셰비키당의 구호에 대한 관심은 이제 당에 대한 의식적인 공감으로 변했다. 4월에 레닌을 체포하기로 작정한 볼린스킨 연대는 2개월이 지나면서 볼셰비키당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에게르스키 연대와 리토프스키 연대도 마찬가지였다. 레트인 명사수들은 전쟁 목적을 위해 짜르에 의해 육성되었었다. 토지를 분배받은 농민과 농업노동자들이 발트해 귀족들에 대해 품고 있는 증오심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이 연대들은 멋지게 싸웠다. 그러나 짜르가 의존하려했던 계급적 증오심은 나름의 길을 찾았다. 레트인 명사수들은 처음에는 짜르 그리고 다음에는 화해주의자들과 결별한 최초의 연대였다. 이미 5월 17일 레트인 8개 연대 대표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볼셰비키당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호를 지지했다. 이들은 앞으로도 혁명의 길에서 막강한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전선에서 어느 이름 없는 병사가 이렇게 적고 있다: “오늘 6월 13일에 본부에서 소규모 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레닌과 케렌스키에 대해 얘기했다. 병사들은 대부분 레닌을 지지했다. 그러나 장교들은 레닌이 대단한 ‘부르주아’라고 말했다.” 공세가 붕괴한 후 케렌스키라는 이름은 군대에서 커다란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6월 21일 페테르호프의 사관생도들이 깃발과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스파이들을 타도하자”, “케렌스키와 브루쉴로프 만세.” 물론 사관생도들은 브루쉴로프를 지지했다. 그러자 제 4 대대의 병사들은 이들을 공격하여 거칠게 다룬 후 해산시켰다. 케렌스키를 칭송하는 플래카드가 가장 큰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다.

6월 시위는 군대의 정치적 변화를 크게 가속화시켰다. 공세에 대해 유일하게 미리 반대의 입장을 밝힌 볼셰비키당의 인기는 엄청난 속도로 증대하기 시작했다. 볼셰비키 신문은 군대로 배포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리고 자유주의 신문이나 애국주의 신문들에 비해 부수도 대단히 왜소했다. 모스크바의 어느 병사는 엉성한 필체로 이렇게 썼다: “귀하의 당이 발행하는 신문들 가운데 한 종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귀하 당의 신문들에 대한 소문만 들리고 있습니다. 공짜 부르주아 신문은 받아볼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짝으로 묶여져서 전선으로 실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애국주의 신문들이 볼셰비키당의 인기를 크게 상승시킨 장본인이었다. 피억압 대중의 항의, 토지 점거, 증오스러운 장교들에 대한 보복 등 모든 일이 볼셰비키들의 짓이라고 이 신문들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들이 좋은 사람들이라고 병사들은 결론지었다.

제 12군의 인민위원은 7월초 케렌스키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병사들의 정서를 묘사한다: “모든 고통이 부르주아 장관들과 소비에트 때문이라고 병사들은 비난한다. 이들이 부르주아 계급에게 자기들을 팔아 넘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엄청난 수의 대중은 암흑 속에 갇혀있다. 이들은 신문조차 거의 읽지 않는다. 이들은 ‘글 솜씨 한번 좋네’, ‘허풍은 되게 떠네’ 하면서 인쇄물의 내용을 완전히 불신한다.” 혁명 직후 첫 몇 달간 애국주의 인민위원들은 혁명군대 자체는 물론이고 군대의 의식과 규율에 대해 찬사 일색이었다. 그러나 4개월간 계속 실망한 군대가 정부의 연설가와 기자들을 신뢰하지 않자 이제 인민위원들은 군대가 암흑 속에 갇혀있다고 말한다.

주둔군이 좌로 나갈수록 일반인은 더 우로 나간다. 공세에 자극 받아 반혁명 단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뻬쩨르부르그에 등장했다. 이들의 이름은 서로 경쟁하듯이 거창했다: 조국명예연합, 병역의무 연합, 자유대대, 영혼단 등등. 이 존경스러운 간판들은 귀족, 장교, 관료층, 부르주아 계급 등의 야망과 기도들을 그럴싸하게 위장했다. 군사동맹, 성조오지 기병연합, 지원군 사단 등은 군사적 음모의 완성된 핵심 조직들이었다. 열렬한 애국자로 등장한 “명예”와 “영혼”의 기사들은 연합국 대사관에 쉽게 드나들었을 뿐 아니라 가끔 정부의 지원금을 받기도 했다. 대신 소비에트는 “사설 단체”이므로 정부의 지원금이 거부되었다. 신문왕 수보린 가문의 일파는 당시 [작은 신문]을 출판했다. “독자적 사회주의”의 기관지인 이 신문은 철권 독재를 주창했는데 콜착 제독이 독재자의 후보로 제안되었다. 이보다 좀더 건전한 신문은 독자성은 강조하지 않은 채 모든 방법을 통해 콜착에 대한 인기를 창조하려고 애썼다. 이미 1917년 여름에 그의 이름과 관련된 계획은 수립되어 있었다. 또한 수보린의 등뒤에는 막강한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콜착의 이후 행적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일부 개인적인 도발을 제외하면 반동 세력은 단순한 전술적 계산에 근거하여 레닌주의자들만 공격하는 체 했다. “볼셰비키”라는 말은 악마의 기원과 동의어가 되었다. 혁명 전에 짜르의 사령관들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포함한 모든 불행을 독일 첩자 특히 “유태인놈들” 탓으로 돌렸다. 이와 똑같이 6월 공세가 붕괴하자 실패와 패배의 책임은 끊임없이 볼셰비키들의 탓으로 돌려졌다. 이 점에서 케렌스키와 체레텔리 같은 민주주의자들은 밀류코프와 같은 자유주의자는 물론 데니킨 장군 같은 공공연한 봉건주의자들과도 거의 구별되지 않았다.

모순이 한계까지 도달했으나 아직 폭발하지 않은 때에 언제나 그렇듯이 정치 세력의 좌표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부차적인 문제들에서 좀더 솔직하고 명확히 드러났다. 당시 크론슈타트는 정치적 열정의 번갯불을 수렴하는 피뢰침 가운데 하나였다. 제국 수도의 바다 대문에 위치한 충성스러운 초소가 되어야했을 이 오래된 요새는 여러 번 반란의 깃발을 치켜들었었다. 무자비한 보복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불길은 크론슈타트에서 결코 꺼지지 않았다. 혁명 후에도 반란의 섬광은 위협적으로 이 요새에서 번쩍였다. 곧 이 해군 요새의 이름은 애국주의 언론에 의해 혁명의 가장 흉칙스러운 측면 즉 볼셰비키주의의 동의어가 되었다. 사실은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아직 볼셰비키당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5월에 대의원 107명은 볼셰비키, 112명은 사회혁명당원, 30명은 멘세비키, 97명은 무당파였다. 그러나 사회혁명당원들과 무당파들은 엄청난 혁명의 압력솥 속에서 살고있었다. 중요한 문제들에서 대다수는 볼셰비키들을 따라갔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술수나 외교에는 흥미가 없었다. 이들은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말이 나오면 곧 행동으로 들어간다. 당연히 허깨비 정부에 대해 이들은 대단히 단순화된 행동 방법을 취했다. 5월 13일 소비에트는 이렇게 결의했다: “크론슈타트의 유일한 권력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이다.” 입헌민주당의 페펠야에프는 정부에서 보낸 크론슈타트의 인민위원이었는데 마차의 다섯 번째 바퀴처럼 전혀 영향력이 없었으며 요새에서 그의 얼굴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요새에는 모범적인 질서가 유지되었다. 도시 안에서 카드놀이는 금지되었고 모든 매춘굴은 폐쇄되었다. 위반자는 요새에서 추방되었다. “재산을 몰수하고 전선으로 추방한다”는 위협과 함께 거리의 술 주정은 금지되었다. 이 위협은 여러 차례 행동으로 옮겨졌다.

이곳의 수병들은 짜르 함대와 해군 요새의 무시무시한 체제에 의해 단련되어 있었다. 엄격한 작업, 희생, 격심한 분노 등이 이들의 관습이었다. 이제 그들 앞에 새로운 삶의 장막이 올라갔다. 스스로 주인이 될 삶이 전개되자 이들의 힘줄은 혁명을 누릴 가치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이들은 목마른 듯이 뻬쩨르부르그의 적과 아군을 모두 덮쳐 이들을 강제로 크론슈타트로 끌고 왔다. 투쟁하는 혁명 수병의 모습이 어떤지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이 도덕적 긴장은 물론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오래 지속되었다. 이들은 일종의 투쟁하는 혁명 십자군이었다. 그렇다면 어떤 혁명의 십자군인가? 체레텔리 장관과 그의 인민위원 페펠야에프로 대변되는 혁명은 아니었다. 크론슈타트는 임박한 두 번째 혁명의 전령으로 우뚝 서있었다. 이 때문에 첫 번째 혁명이 충분할뿐더러 과도하다고 생각한 모든 반동들은 크론슈타트를 증오했다.

페펠야에프가 평화롭게 별 주목도 받지 못하고 인민위원직에서 제거되자 지배 질서는 이것을 국가의 단합에 반대하는 무장봉기처럼 묘사했다. 정부는 소비에트에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즉시 대표단을 크론슈타트에 파견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이중권력은 삐걱거리면서 행동에 들어갔다. 체레텔리와 스코벨레프가 참석한 가운데 소집된 5월 24일의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볼셰비키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이렇게 인정했다: 소비에트 권력이 전국에 수립될 때까지는 임시정부에 실제적으로 복종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다음날 이 굴복에 분노한 수병들의 압력을 받아 소비에트는 이렇게 선언했다: 바뀔 수 없는 크론슈타트의 입장을 장관들에게 “설명”했을 뿐이다. 이것은 명백히 전술적 오류였다. 그러나 이 오류에는 혁명에 대한 포부 이외에 아무 것도 없었다.

이 좋은 기회를 이용하여 크론슈타트에게 교훈을 제시하고 이들의 과거 죄를 동시에 묻기로 상부는 결정했다. 물론 검사는 체레텔리였다. 가슴이 저리는 자신의 감옥생활을 언급한 후 체레텔리는 특히 요새 감옥에 갇혀있는 80명의 장교들을 풀어주라고 호통을 쳤다. 모든 선한 언론은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화해주의 장관들의 정부 신문들조차 이것이 “직접 횡령” 그리고 “공포 상황을 조성하면서까지 주먹으로 통치한 장교들”의 문제라고 인정했다. 체레텔리의 공식 기관지 이스베스티아지조차 이렇게 말했다: “수병 증인들은 체포된 장교들이 1906년의 봉기를 진압한 행위, 대대적인 총격, 바다에서 처형되고 익사 당한 수병들의 시체로 가득한 바지선, 기타 끔찍한 사건들을 증언하고 있다. 이들은 이런 일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고 말한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체포된 장교들을 한사코 정부에 넘기려하지 않았다. 귀족 출신의 살인자들과 횡령자들은 1906년을 비롯해 여러 해에 걸쳐 고문당한 수병들과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정부에 가까웠다. “연립정부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인물 가운데 하나”라고 수하노프가 온건하게 묘사하는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감옥에서 짜르의 가장 악질적인 정치경찰 하수인들을 체계적으로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출세한 민주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반동 관료들에게 자신들의 고상함을 인정받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체레텔리의 기소 내용에 대해 크론슈타트는 호소문에서 이렇게 응답했다: “혁명 와중에 우리에게 체포된 장교, 헌병, 경찰 등은 감옥에서 받은 대우에 대해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정부 대표들에게 선언했다. 크론슈타트의 감옥 건물들이 끔찍하게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짜르가 우리를 가두기 위해 세운 건물들이다. 다른 건물들은 없다. 인민의 적들을 감옥에 가둔 것은 보복심 때문이 아니라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3월 27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재판했다. 이들을 변호하기 위해 출석한 트로츠키는 체레텔리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반혁명 장군들이 혁명의 목에 올가미를 던질 때 입헌민주당은 올가미 밧줄이 반질거리도록 비누칠을 할 것이고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싸우기 위해 달려와 우리와 함께 죽을 것이다.” 이 경고는 3개월 후에 의외로 그대로 들어맞았다: 코르닐로프 장군이 반란을 일으켜 수도에 대항하자 케렌스키, 체레텔리, 스코벨레프는 동궁을 방어하라고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불렀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상관인가? 6월에는 민주주의자들이 무정부 상태에 대항하여 법과 질서를 수호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어떤 주장이나 예측도 중요하지 않았다. 찬성 580표, 반대 162표, 기권 74표로 혁명적 민주주의를 “배신”한 “무정부주의” 크론슈타트를 비난하는 결의문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통과되었다.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던 정부는 결의문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수도와 요새 사이의 개인 통신용 전화선을 즉시 끊어버렸다. 볼셰비키당 중앙이 크론슈타트 수병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모든 훈련용 군함들에게 크론슈타트를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또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무조건 복종”이 요구되었다. 당시 회기 중이던 농민 대의원 대회는 ‘크론슈타트에 식량 공급을 거절하겠다“고 위협했다. 화해주의자들의 등뒤에 서있던 반동 세력은 결정적인 그리고 가능한 선에서 살벌한 해결책을 찾았다.

젊은 역사학자 유고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무분별한 조치는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었다. 그 상황에서 적절한 탈출구를 찾는 것이 필요했다. 이 목적으로 트로츠키는 크론슈타트를 방문했다. 그리고 소비에트에서 연설한 후 그는 나중에 소비에트에 의해 채택되고 만장일치로 통과된 결의안을 작성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원칙적인 입장은 그대로 지킨 채 실제적인 문제에서만 양보했다.

이 갈등이 평화적으로 해결되자 부르주아 언론은 완전히 미칠 지경이었다: 요새는 무정부 상태이다; 수병들은 자기들 멋대로 돈을 찍고 있다(돈의 황당한 견본이 신문에 실렸다); 이들은 국가재산을 약탈하고 있다; 여성들은 국유화되고 있다; 강도 행각과 술 주정이 계속되고 있다. 엄격한 규율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수병들은 수백만 부가 발행되면서 전국에 자기들에 대한 비방을 퍼뜨리고 있는 이 신문들을 읽고 굳은살이 박힌 주먹을 배가된 힘으로 불끈 쥐었다.

크론슈타트 장교들을 인도 받자 페레베르제프의 사법 기관들은 이들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은 수가 이후 내전에 참여했고 이들이 얼마나 많은 수의 병사와 노동자와 농민들을 총살시키고 교수형에 처했는지를 알면 대단히 유익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유용한 조사를 수행할 처지에 있지 못하다.

정부의 권위는 섰다. 그러나 수병들은 불명예를 당한 것에 비해 곧 만족감을 얻었다. 전국 각지에서 붉은 크론슈타트를 기리는 결의문들이 좌익 소비에트, 공장, 연대, 대중집회 등에서 답지하기 시작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임시정부에 대한 확고한 불신임”에 경의를 표하는 기관총 연대의 시위가 처음으로 뻬쩨르부르그 거리에서 완벽한 대형을 갖추고 일어났다.

그러나 크론슈타트는 좀더 의미 있는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부르주아 언론의 비방은 크론슈타트를 전국적으로 중요하게 만들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크론슈타트에 아성을 만든 후 볼셰비키들은 적절하게 훈련된 선동가들의 도움으로 러시아 전역에 선전의 그물망을 쳤다. 크론슈타트의 사절단은 전선에도 파견되어 규율을 망치고 농촌에 파견되어 지주의 장원을 몰수하도록 농민을 부추겼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이 사절단에게 특별 권한을 위임했다: ‘어떤 자는 출신 도의 군, 지구, 마을 위원회에서 결정권을 행사하는 투표권을 가지고 파견되었다. 또한 집회에서 연설하고 집회를 자기 판단에 따라 소집하였다.’ 그리고 ‘모든 철도와 기선을 아무 거리낌없이 공짜로 이용하고 총기를 소지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크론슈타트 시 소비에트는 앞에서 말한 선동가의 불가침권을 보장했다.’”                                          

이렇게 밀류코프는 이 발트해 수병들의 국가 파괴활동을 폭로하였다. 그러나 박식한 당국, 기관, 신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병들이 홀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의 권한을 위임받아 먹을 것과 잘 곳을 모든 곳에서 제공받고 모든 대중 집회에 입장이 허용되고 모든 곳에서 경청되고 역사의 사건들에 수병의 손자국을 남긴 이유와 방법을 그는 설명하지 못했다. 자유주의 정치에 봉사하는 이 역사가는 이 단순한 질문을 생각해내지 않는다. 그러나 크론슈타트의 기적은 한 가지 이유로 충분히 설명이 가능했다. 이들은 지성이 풍부한 교수들보다 역사 발전의 요구들을 훨씬 깊이 표현했다. 헤겔의 언어로 말하면 반(半)문명 수병들이 위임받은 권한은 이성적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에 주관적으로 대단히 똑똑한 계획들은 허깨비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역사의 이성은 밤에도 이것들을 찾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소비에트는 공장위원회에 뒤 처졌다. 공장위원회는 대중에게 뒤 처졌다. 더욱이 지방의 각 도들은 수도에 뒤 처졌다. 이것이 혁명의 불가피한 법칙이다. 이 법칙은 수천의 모순들을 만들어 내지만 동시에 이것들이 우연히 시간이 지나면서 해결되도록 한다. 또한 이 법칙은 새로운 모순들을 마치 장난치듯이 즉시 만들기도 한다. 볼셰비키당 역시 혁명의 발걸음에 뒤 처졌다. 그런데 당은 특히 혁명기에는 사태에 뒤 처질 권리가 없다. 에카테린부르크, 페름, 툴라, 니즈니-노브고로드, 소르모보, 콜롬나, 유조브카 등 노동자 중심지에서 볼셰비키들은 5월말이 되어야 멘세비키들과 분리되었다. 오데사, 니콜라에프, 엘리자베트그라드, 폴타바 그리고 기타 우크라이나 도시들에서 볼셰비키들은 6월 중순까지도 독자 조직을 가지지 못했다. 바쿠, 즐라투스트, 베제트스크, 코스트로마 등지에서 볼셰비키들은 6월말이 되어야 멘세비키들과 분리되었다. 이로부터 4개월이 채 되기 전에 볼셰비키당은 정권을 장악한다. 이런 저런 사실들을 고려해 보았을 때 이것은 놀라울 따름이다. 전쟁 기간에 당은 대중의 정치적 발전과정에 대단히 뒤져있었고 카메네프와 스탈린의 3월 지도부는 거대한 역사적 임무에 대단히 뒤져있었다. 역사상 유례없이 혁명적인 이 정당도 역사의 사건들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투쟁의 불길 속에서만 볼셰비키당은 다시 전열을 재정비하고 사건들의 공세 속에서 대오를 무장시켰다. 결정적인 시점에서 대중은 이 극좌정당보다 “100배”나 좌에 있었다. 자연스러운 역사과정의 힘에 실려 확대된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은 자세히 관찰해보면 나름의 모순, 지그재그, 밀물과 썰물을 드러낸다. 대중은 구성이 다양할 뿐더러 손을 데인 후 멀찌감치 떨어 서서 자신의 경험을 반추한 후에만 혁명의 불길을 다루는 법을 배운다. 볼셰비키당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우는 대중의 각성과정을 가속화시킬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들은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 그리고 이번에 역사는 이들의 참을성에 보답을 해주었다.

볼셰비키들이 작업장, 공장, 연대 등을 결연히 획득하고 있는 동안 민주 의회 선거는 화해주의자들에게 대단한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점점 많은 장점을 부여했다. 이것은 혁명의 가장 날카롭고 가장 신비로운 모순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순전히 노동자들만 모여있는 비보르그 지구의 의회는 볼셰비키가 다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6월 모스크바 시의회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은 60% 이상을 득표했다. 이들은 자기 득표율에 놀랐다. 왜냐하면 자기 영향력이 급속히 상실되고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진짜 혁명의 전개와 민주주의라는 거울 속에 이것이 반영되는 현상 사이의 상호관계를 이해하는데 모스크바 선거는 대단히 흥미롭다. 광범위한 부위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화해주의 환상을 서둘러 벗어 던지고 있었다. 한편 소도시의 광범위한 부위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이 산발적으로 흩어진 대중에게 민주적 선거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거의 최초의 그리고 대단히 드문 기회였다. 어제까지 멘세비키나 사회혁명당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병사들과 함께 볼셰비키당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택시운전사, 배달부, 수위, 시장의 여성, 상점주인, 그의 조수, 교사 등은 사회혁명당에게 표를 주는 대단히 영웅적인 행위를 통해 처음으로 정치무대에 등장했다. 소부르주아 부위는 늦게나마 케렌스키에게 표를 던졌다. 왜냐하면 이들에게 그는 2월 혁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2월 혁명은 선거일에 비로소 이들에게 침투했다. 사회혁명당이 60%를 장악한 모스크바 시의회는 꺼져 가는 등불이 마지막으로 확 타오르는 것과 같았다. 민주적 자치 기관들에게도 사정은 매한가지였다. 겨우 도착한 이들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힘이 부쳤다. 이것은 혁명 과정이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달려있을 뿐 발로 차올려져서 혁명의 회오리에 춤을 추는 인간 먼지들에게 달려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피억압 계급들이 혁명으로 각성하는 심오하면서도 간단한 변증법은 바로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의 기계적인 회계사는 어제, 오늘, 내일을 같은 난에 셈하고 이를 통해 공식 민주주의자들이 혁명의 지도부를 장악하도록 부추긴다; 바로 이럴 때에 혁명은 가장 위험하게 궤도를 벗어난다. 공식 민주주의자들이 장악한 혁명의 지도부는 실제로는 혁명의 아주 무거운 꼬리에 불과했다. 레닌은 볼셰비키당에게 머리와 꼬리를 구별하도록 가르쳤다.                 

 

제 22장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와 6월 시위

6월 3일 뻬쩨르부르그의 사관학교에서 개최된 제 1차 전국 소비에트 대회는 케렌스키의 공세를 승인했다. 표결권이 있는 820명의 대의원과 발언권만 있는 268명의 참관 대의원들이 참석한 이 대회는 305개 지역 소비에트, 전선의 53개 지구 및 지역 조직, 군대의 후방 조직들, 몇몇 농민 단체들을 대표했다. 표결권은 포괄 대중이 2만5천명이 넘는 소비에트에게만 주어졌다. 1만명에서 2만5천명까지 포괄하는 소비에트에게는 발언권만 주어졌다. 그리 엄격하게 준수되지 않았던 이 규약에 근거하면 전국 소비에트 대회는 2천만명을 대표했다. 소속을 밝힌 777명의 대의원 가운데 285명은 사회혁명당, 248명은 멘세비키당, 105명은 볼셰비키당 그리고 몇몇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룹에 속해 있었다. 대회의 좌파를 구성한 볼셰비키당 그리고 이 정당과 연합한 국제주의자들은 표결권이 있는 대의원 전체의 5분의 1도 되지 않았다. 3월에는 사회주의자로 등록했으나 6월에는 이미 혁명에 지친 자들이 대의원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들에게 뻬쩨르부르그는 완전히 미친 도시였다.

대회는 그림의 국외 추방을 인준하면서 회기를 시작했다. 그는 독일 외교관들과 막후 협상을 통해 러시아 혁명과 독일 사민당을 구하려고 노력했던 스위스의 불행한 사회주의자였다. 임박한 공세를 즉시 의제로 삼자는 좌파의 요구는 압도적 다수에 의해 거부되었다. 볼셰비키당은 아주 작은 그룹처럼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날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 시간에 뻬쩨르부르그 공장위원회 협의회는 소비에트 정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결의문을 역시 압도적 다수로 채택했다.       

아무리 근시안들이었지만 화해주의자들은 매일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6월 4일 회의에서 볼셰비키당을 증오하는 리이버는 지방 출신들의 영향을 받아 아무 쓸모도 없는 정부의 인민위원들을 비난했다. 각 도의 행정당국은 이들에게 권한을 넘겨주지 않고 있었다. “이 결과 정부기관들의 기능은 모두 소비에트로 넘어갔다. 소비에트가 이것을 원치 않아도 할 수 없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해치더라도 누군가를 비난해야했다.

현직 교사인 어느 대의원은 대회에서 이렇게 불평했다: 혁명이 승리한 지 4개월이 지났으나 교육 부문에서는 조금의 변화도 없다. 교사, 장학관, 교장, 지구교육감 등의 다수는 흑백인조 회원이었는데 그대로 유임되었다. 또한 교육과정, 반동적인 교과서 그리고 심지어는 교육부 차관들조차 평화로이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짜르의 초상화만이 다락방으로 올라갔는데 이것도 언제든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대회는 구 의회나 국무회의를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결정할 수 없었다. 반동 세력에 대한 대회의 소심한 태도는 멘세비키 연설가 보그다노프의 발언에 의해 은폐되었다: 의회와 소비에트는 “어쨌든 기능을 상실한 유명무실한 조직들”이다. 이에 대해 마르토프는 위트 있게 비꼬면서 반대했다: “의회를 죽었다고 선언은 할지언정 실제로 죽이지는 말자고 보그다노프는 제안한다.”

소비에트 대회에서 다수파는 확고히 사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는 불안과 불확실성 속에서 진행되었다. 애국주의는 이제 기력을 잃고 가끔 번쩍 하는 빛을 낼뿐이었다. 대중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으며 볼셰비키당은 대회에서보다 전국 특히 수도에서 훨씬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볼셰비키당과 화해주의자들 사이의 다툼은 언제나 이 문제로 집약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제국주의와 노동자 가운데 누구의 편을 들것인가? 연합국의 그림자가 대회에 드리워져 있었다. 대회 이전에 공세는 이미 결정되었다. 따라서 민주주의자들은 이것을 인준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설교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인민의 대의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사회세력도 포기하지 말고 우리편으로 끌어 들여야한다.” 이렇게 해서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이 정당화되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노동계급, 군대, 농민 등이 매순간 자기 계획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볼셰비키당에 대해 전쟁을 선포한다고 뻥을 치면서 대신 인민에 대한 전쟁을 개시해야했다. 체레텔리는 입헌민주당원 인민위원 페펠야에프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배반자라고 선언했었다. 연립정부는 찬성 543표, 반대 126표, 기권 52표로 인준되었다.

사관학교에 모인 이 거대하고 무기력한 대회는 선언은 거창하게 하면서도 정작 필요한 일은 인색하게 진행시켰다. 이 때문에 대회의 결정사항들에는 절망과 위선의 도장이 찍혔다. 대회는 러시아의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했으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피억압 민족들 자신이 아니라 미래에 소집될 제헌의회에게 주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제헌의회에서도 다수파가 되어 제국주의자들에게 굴복할 생각이었다.

대회는 8시간 노동법안을 통과시키지 않았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각계 각층의 이해를 조정하기가 어렵다고 체레텔리는 설명했다. 반동 세력에 대한 진보 세력의 승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이해를 조정하는 것”을 통해 역사의 거대한 요구가 단 하나라도 성취된 것처럼 그는 말한다!

소비에트의 경제 전문가 그로만은 대회가 끝날 무렵 임박한 경제 파탄과 정부의 경제 통제의 필요성을 설명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요식적인 결의안은 통과되었으나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6월 7일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그림을 강제 추방한 후 대회는 정상 일정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스코벨레프와 그의 동료들에게 자본가의 이윤은 예전과 같이 성역이었다. 식량 위기는 매시간 급격히 악화되고있다. 외교 분야에서 정부는 계속 얻어맞고 있다. 광적으로 선언된 전선의 공세는 끔찍스러운 모험행각이 되어 나라를 덮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르보프, 테레쉬첸코, 체레텔리 등의 신성한 활동을 평화로이 지켜볼 용의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땅 밑의 두더지는 너무 빨리 굴을 판다. 권력의 문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사회주의자’ 장관들의 도움으로 소비에트 대회에 제기될지 모른다.”

더 높은 권위로 자신들을 대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지도자들은 대회를 질질 끌면서 모든 갈등들을 다루었다. 이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의 눈에 대회의 의미는 무참하게 손상 당했다. 두르노보가 소유한 여름 별장과 관련된 사건은 아주 뚜렷한 예였다. 짜르의 늙은 관료였던 그는 1905년 혁명을 진압한 내무장관으로 유명했다. 이 증오스럽고 더러운 관료의 빈 별장을 비보르그 노동자 조직이 몰수했다. 어린이들이 놀이터로 애용하는 대단히 넓은 정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곳을 소수민족 학살자들과 무장강도들의 소굴 즉 비보르그 지구의 크론슈타트로 묘사했다. 어느 누구도 사실관계를 확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부는 모든 중요한 문제들은 조심스럽게 회피하면서도 신선한 열정을 발휘하여 이 가옥을 구출하는 행동에 들어갔다. 그리고 집행위원회가 이 영웅적인 노력을 지지할 것을 요구했다. 물론 체레텔리는 이를 거부하지 않았다. 검사는 24시간 내에 이곳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군사행동이 준비되고 있다는 것을 안 노동자들은 경고를 발했다. 한편 무정부주의자들은 무기를 들고 저항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28개 공장들이 항의 파업을 선언했다. 집행위원회는 성명을 발표하여 비보르그 노동자들이 반혁명을 돕고 있다고 비난했다. 모든 사전 행동들이 끝나자 사법부의 대표와 민병대가 이 사자 굴에 침투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질서정연했다. 이 집은 여러 노동자 교육 단체들이 사용하고 있었다. 정부가 보낸 병력은 치욕스럽게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될 것이다.

6월 9일 소비에트 대회장에 폭탄이 터졌다: 프라우다지의 아침 판이 그 다음날 시위를 벌일 것을 촉구했다. 쉽게 놀라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 놀라게 할 수 있는 체이제는 무덤에서 나오는 듯한 공포의 목소리로 이렇게 발표했다: “소비에트 대회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내일은 치명적인 날이 될 것이다.” 그러자 대의원들은 놀라서 머리를 쳐들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 병사들과 소비에트 대회 사이의 결판은 정세에 의해 암시되었다. 대중은 볼셰비키당의 행동을 촉구했다. 주둔군은 특히 끓어오르고 있었다. 전선의 공세 때문에 병사들은 연대로 분산되어 전선으로 투입될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다 병사들은 “병사 권리 선언문”에 크게 실망했다. 이것은 “명령 제 1호”와 비교하면 크게 후퇴한 내용이었다. 또한 군대의 규율에 대해서도 병사들은 크게 불만이었다. 볼셰비키당의 군사조직은 시위를 조직하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당이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병사들이 스스로 거리로 나설 것이라고 이 조직의 지도자들이 주장했다. 이 주장은 이후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대단히 옳았다. 그러나 대중의 정서가 이렇게 급격하게 좌로 기우는 것을 볼셰비키당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당 대오에 약간의 동요가 일었다. 볼로다르스키는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설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또한 시위가 어떤 성격을 띨 것인지도 알 수 없어서 불안했다. 병사들이 정부의 공격과 보복을 두려워하여 무기를 들것이라고 군사조직 대표들이 선언했다. “그렇다면 시위로부터 얻을 것이 무엇인가?”라고 신중한 톰스키가 질문했다. 그는 좀더 논의를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병사들은 끓어오르고 있으나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스탈린은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에 저항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는 판단했다. 전투를 환영하기보다는 언제나 피하는 경향이 많았던 칼리닌은 결연히 시위에 반대했다. 특히 노동자들에게는 시위의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고 그는 지적했다: “시위는 순전히 인위적인 성격을 띨 것이다.” 6월 8일 노동자 부문 대표 협의회가 열려 일련의 예비 표결 끝에 찬성 131표, 반대 6표, 기권 22표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반대 선동을 막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시위는 비밀리에 준비되었다. 이 올바른 경계 조치는 나중에 군사적 음모의 증거라고 화해주의자들에 의해 해석되었다. 공장위원회 중앙위원회는 시위를 조직하는 결정에 동참했다. 유고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트로츠키의 찬성 의견과 루나차르스키의 반대 의견을 들은 후 메주라욘치 위원회는 시위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시위는 펄펄 끓는 열정으로 준비되었다.     

시위에서는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적힌 깃발이 올라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10명의 자본가 장관들을 타도하자!”가 투쟁의 구호였다. 이것은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을 파기하라는 요구를 아주 단순하게 표현했다. 시위대는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고 있는 사관학교로 행진할 계획이었다. 시위의 목적이 정부의 타도가 아니라 소비에트 지도자들에 대한 압박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볼셰비키당 예비 협의회에는 다른 의견들도 물론 제출되었다. 예를 들어 청년 중앙위원 스밀가는 “시위가 정부와의 충돌로 비화할 경우에는 우체국, 전신, 무기고를 지체없이 점거해야한다”고 제안했다. 협의회에 참석한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라트시스는 스밀가의 제안이 거부되자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세마쉬코, 라히아 동지들과 함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완전히 무장할 것이다. 그리고 기관총 연대의 도움으로 철도 터미널, 무기고, 은행, 전신전화국 등을 점거할 것이다.” 세마쉬코는 기관총 연대의 장교였으며 라히아는 전투적인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이런 정서는 쉽게 이해되었다. 당은 이미 권력 장악의 길에 들어섰으며 문제는 정세를 정확히 평가하는 것뿐이었다. 뻬쩨르부르그의 정세는 볼셰비키당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같은 과정이 좀더 느리게 진행되고 있었다. 더욱이 전선의 병사들은 공세의 고통스러운 교훈을 깨달은 후에야 볼셰비키당에 대한 불신을 불식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닌은 4월에 자신이 제안한 내용을 고수했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라.”

수하노프는 자신의 [혁명 노트]에서 “상황이 유리할 경우” 6월 10일 시위로 레닌은 직접 권력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사실 볼셰비키 당원 개개인들은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레닌은 이에 대해 “좌로 너무 약간 기울었다”고 비꼬듯이 말했다. 수많은 연설과 글을 통해 표현된 레닌의 노선과 자신의 자의적인 추측을 수하노프는 비교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저자 주: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본서의 부록 제 3편을 참조하시오.)

집행위원회 사무국은 즉시 볼셰비키당에게 시위를 취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근거가 없었다. 국가 권력만이 공식적으로 시위를 금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시위를 금지시킬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두 정당의 연합으로 주도되고 있는 “사설 단체” 소비에트가 어떻게 제 3자의 시위를 막을 수 있는가?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시위의 평화적 성격을 좀더 부각시키기로 결정했다. 6월 9일 노동자 지구들에 볼셰비키당의 벽보가 붙었다. “우리는 자유 시민이므로 시위할 권리가 있다. 우리는 너무 늦기 전에 이 권리를 사용해야한다. 우리는 평화적으로 시위할 권리가 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소비에트 대회에 회부했다. 바로 이 순간에 체이제는 치명적인 결과를 예언하면서 대회의 회의가 밤새 진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시 지롱드파였던 최고회의 위원 게게츠코리는 볼셰비키들을 향해 이렇게 거칠게 고함지르며 연설을 마쳤다: “이 영광스러운 대의에 그대들의 더러운 손을 대지 마시오!” 볼셰비키당은 회의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논의할 수 있게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부되었다. 대회는 3일간 모든 시위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에 대한 폭력 행사였으며 정부에 대한 권한 찬탈 행위였다. 소비에트는 계속해서 정부의 권력을 훔쳐서 자기 베개 밑에 숨겨놓았다.

이때 밀류코프는 카자흐 협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볼셰비키당을 “러시아 혁명의 주적(主敵)”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혁명의 최고의 우군이 자기 자신이라고 선언하며 협의회가 추측할 시간을 주었다. 그런데 그는 2월 혁명 직전에 러시아 인민의 혁명을 인정하느니 독일에게 패배하겠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었다. 레닌주의자들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 사람들을 끝장낼 때가 되었다.” 이 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는 너무 서두르고 있었다. 사실 그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한편 공장과 연대들이 집회를 열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로 다음날 거리로 나갈 것을 결의했다. 한편 비보르그 지구 의회에 볼셰비키당 37명, 사회혁명당-멘세비키당 22명, 입헌민주당 4명의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대회와 카자흐 대회의 소음 속에 이 사실은 주목받지 못한 채 무시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은 이 문제를 재고하기로 결정했다. 소비에트 대회가 시위를 금지하는 단도직입적인 결의안을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우익이 위협적으로 시위대를 공격할 것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었다. 당은 봉기가 아니라 평화적인 시위를 원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금지된 시위를 반(半)봉기로 전환할 의도가 전혀 없었다. 이에 반해 소비에트 대회 최고회의는 조치를 강구하기로 결정했다. 시위를 막기 위해 수백 명의 대의원들이 10명씩 짝을 지어 노동자 지구와 병영을 방문했다. 그리고 아침에 타우리데 궁전에 모여 정보를 교환하기로 했다. 농민 대의원 집행위원회는 70명을 이 원정에 가담시켰다.

볼셰비키당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나마 자신의 목적을 달성했다.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들은 수도의 노동자 병사들을 알고 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산이 예언자에게 다가갈 수 없으면 예언자가 산에 다가가야 한다. 대의원들의 방문은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 멘세비키 통신원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이즈베스티아 지에 이렇게 묘사했다: “밤새 내내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500명이 넘는 대회의 다수파는 10명씩 짝을 지어 뻬쩨르부르그의 공장과 군부대를 방문하여 이들 모두에게 시위에 참가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그러나 다수의 공장과 여러 군부대에서 소비에트 대회는 권위가 없었다. 대의원들은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으며 때때로 적대적인 반응에 접했다. 그리고 모욕을 당하며 거부당한 경우도 아주 자주 있었다.” 이 소비에트 공식 기관지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전혀 다른 두 세계가 밤에 만난 사건을 아주 온건하게 묘사하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대중을 만난 대의원들은 앞으로 누가 시위를 소집하고 취소할 것인지에 대해 조금의 의문도 갖지 않았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은 프라우다지를 통해 볼셰비키당의 결의문과 대회의 선언문이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야 시위에 반대하는 대회 선언문을 벽에 붙이는데 동의했다. 푸틸로프 공장이 노동자들의 선봉인 것처럼 제 1 기관총 연대는 주둔군의 선봉이었다. 이 부대는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농민 집행위원회를 각각 대표하는 체이제와 아브크센티에프의 연설을 들은 후 결의문을 채택했다: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와 그 군사조직에 동의하여 시위를 연기한다.”

시위를 진정시키려는 대의원 여단은 잠도 자지 못한 상태에서 완전히 기가 죽어 타우리데 궁전에 도착했다. 이들은 대회의 권위가 신성불가침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불신과 적대의 돌담에 부딪쳤다. “대중은 볼셰비키들과 친하다.”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에게 적대적이다.” “이들은 프라우다지만 믿는다.” “일부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너희들의 동지가 아니다.’” 대의원들은 차례로 보고했다: 대회는 시위를 철회시키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패배했다.

대중은 볼셰비키당의 결정에 복종했으나 일부는 이에 항의하고 분노하기도 했다. 일부 공장들은 당 중앙위원회를 견책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좀더 불같은 성격의 볼셰비키당원들은 당원증을 꺼내 찢어버렸다. 이것은 심각한 경고였다.

화해주의자들은 말했다: 3일간 시위를 금지시킨 이유는 왕당파의 음모 때문이다. 볼셰비키당의 시위에 편승하여 이들이 음모를 시행에 옮기려했다는 것이었다. 이 음모에는 카자흐 대회의 일부가 참여했으며 반혁명 군대가 뻬쩨르부르그에 접근하고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볼셰비키당은 시위를 취소한 후 당연히 음모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설명을 하기는커녕 대회 지도자들은 볼셰비키당이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다. 곤경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이들은 이 즐거운 방법을 찾아냈다.

6월 10일 밤에 화해주의자들은 음모를 발견했으나 대신 사기가 크게 뒤흔들렸다. 대중이 볼셰비키당과 함께 화해주의자들에 대항하기 위해 꾸민 음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이 대회의 결의문에 복종하자 이들은 기가 살았다. 이들의 공포심은 광기로 변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무쇠와 같은 힘을 과시하기로 결정했다. 6월 10일 멘세비키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레닌주의자들을 혁명의 배신자로 낙인찍을 때가 되었다.” 집행위원회의 대표는 카자흐 대회에 참석해 대회가 볼셰비키당에 대항하여 소비에트를 지지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우랄 지역의 카자흐 추장이자 대회 의장 두토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카자흐들은 소비에트에 결코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반동들은 볼셰비키당에 대항하기 위해 소비에트와 손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물론 이것은 나중에 볼셰비키당이 타도된 후 더욱 확실히 소비에트의 목을 조르기 위해서였다.

6월 11일에 집행위원회, 소비에트 대회 최고회의, 분파들의 지도자들 등 모두 100명 정도로 구성된 막강한 재판소가 소집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검사는 체레텔리이다. 격노로 목이 메인 채 그는 치명적인 조치들을 요구한다. 그리고 볼셰비키당을 괴롭힐 준비는 되어 있으나 파괴할 준비는 아직 하지 않은 단을 경멸하듯이 손을 저어 물리친다. “지금 볼셰비키당의 행위는 이데올로기적 선전이 아니라 음모이다....볼셰비키당은 우리를 용서해야한다. 우리는 지금 다른 투쟁방법들을 채택할 것이다....우리는 볼셰비키당의 무장을 해제시켜야한다. 이 당이 지금까지 가진 두가지 거대한 기술적 도구들을 빼앗아야한다. 우리는 음모를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소리였다. 볼셰비키당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여기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셰비키당은 정말이지 특별히 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모든 무기들은 실제로 병사와 노동자들의 손에 있었다. 다만 이들의 압도적 다수가 볼셰비키당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볼셰비키당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것은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것이다. 이것 이상을 의미한다면 군대의 무장을 해제시키자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반동 세력의 요구에 따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혁명의 승리를 보장한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혁명의 고전적인 순간이 왔다. 박식한 인물들을 포함한 민주주의 신사들은 옛날 책을 읽을 때에는 무장을 해제하는 자가 아니라 해제 당한 자에게 언제나 동정심을 보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달랐다. 수년 동안 강제 중노동형을 당한 혁명가이며 어제는 찌머발트 반전주의자였던 체레텔리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킨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대회장은 멍하게 놀란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들은 누가 자기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고 있다고 느꼈다. 장교 출신 대의원 중의 하나가 히스테리 증세를 보였다.                                

체레텔리 만큼 창백해진 카메네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참석자들이 느낄 수 있는 존엄성을 가지고 외쳤다: “체레텔리 장관님, 바람에게 얘기하고 있지 않다면 말만 하지 말고 나를 체포하시오. 그리고 혁명에 반대한 음모로 나를 재판하시오.” 볼셰비키 대의원들은 항의의 표시로 대회장을 퇴장하여 자기들을 놀리는 카메네프의 행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했다. 대회장의 긴장은 거의 참을 수 없이 팽팽했다. 리이버는 서둘러 체레텔리를 지원하러 나섰다. 억제된 격노는 히스테리의 격노로 바뀌었다. 리이버는 무자비한 조치들을 촉구했다. “볼셰비키당을 따르는 대중을 획득하려면 볼셰비키주의와 결별해야한다.” 그러나 청중은 그의 말에 공감하기는커녕 반정도 적대감을 드러냈다.

분위기에 언제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루나차르스키는 즉시 다수파와 공통분모를 찾으려 애썼다: 볼셰비키당이 자신에게 평화 시위만 생각하고 있다고 약속했지만 자신의 경험으로는 “시위를 조직하는 것이 오류”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갈등을 격화시키지 말아야한다. 적들을 달래지 못한 루나차르스키는 친구들을 화나게 했다.

“우리는 좌파에 대항하지 않는다”고 단은 음흉하게 말했다. 그는 대중을 늪으로 인도하는 지도자들 가운데 경험은 가장 많으면서도 쓸데없는 일을 가장 많이 했다. “우리는 반혁명에 대해 투쟁하고 있다. 여러분의 어깨 뒤에 독일 첩자들이 서 있는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논쟁을 대신하기 위해 그는 독일을 언급했을 뿐이다. 물론 이 신사들은 독일 첩자를 하나도 지목할 수 없었다.

체레텔리는 펀치를 날리고 싶었으나 단은 주먹만 흔들어 보이고 싶었다. 무기력한 집행위원회는 단의 편을 들었다. 다음날 대회에 제출된 결의안은 볼셰비키당에 반대하는 예외적인 법이었으나 즉각 효력이 있는 측면은 하나도 없었다.

볼셰비키당이 대회에 제출한 선언문은 이렇게 말했다: “시위가 없는 것은 대의원 여러분들이 시위 금지 결의안에 찬성해서가 아니라 우리 당이 시위를 취소시키기 때문이다. 공장과 연대들을 방문한 대의원들은 이 점을 조금도 의심할 수 없다....군사적 음모는 노동계급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해산시키기 위해 임시정부가 꾸며낸 말에 불과하다....우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전부 넘어간다고 치자. 그리고 소비에트가 우리의 선동에 족쇄를 채우려 한다고 치자. 이렇게 되더라도 우리는 수동적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와 여러분들을 구별시키는 국제사회주의 사상의 이름으로 차라리 징역이나 다른 벌을 감수할 것이다.”

소비에트의 다수파와 소수파는 마치 결전을 치르듯이 3일 동안 서로 가슴을 마주 대고 있었다. 그러나 양측은 마지막 순간에 서로 물러섰다. 볼셰비키당은 시위를 포기했다. 화해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킬 생각을 포기했다.

체레텔리는 자기 세력 속에서 소수파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관점에서는 그가 옳았다.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대중을 마비시키고 이 연합을 유지해야할 시점이 왔다. 화해주의 정책을 성공시키고 부르주아 계급의 의회체제를 수립하려면 노동자와 병사들의 무장을 해제시켜야했다. 체레텔리는 옳았다. 그러나 자기 생각을 시행에 옮길 힘이 없었다. 병사들은 물론 노동자들도 자발적으로 무기를 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에게 강제력을 가하는 것이 필요했으나 체레텔리에게는 이렇게 할 무장력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반동 세력에게서 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반동 세력이 볼셰비키당을 분쇄했다면 즉시 화해주의 소비에트도 분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체레텔리에게 그가 강제 중노동 죄수 출신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주듯이 반동 세력도 이렇게 할 정도의 충분한 무장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체레텔리는 주장했다: 볼셰비키당이 노동자들을 농민으로부터 이간질시키기 때문에 볼셰비키당에 대항해야한다. 이에 대해 마르토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체레텔리는 농민 한가운데로부터 사상을 가지고 오지 않는다. 농민이 아니라 입헌민주당 우파, 자본가, 지주, 제국주의자, 서방의 부르주아 계급 등이 노동자와 병사의 무장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그는 옳았다: 유산계급들은 역사상 여러 번 농민의 등뒤에 숨어서 거짓 주장을 늘어놓았다.

레닌의 4월 테제가 발표된 순간부터 혁명을 전진이 아니라 후진시키려는 자들은 모두 노동계급이 농민으로부터 분리될 위험성을 가장 주요한 주장으로 늘어놓았다. 레닌이 체레텔리를 “고참 볼셰비키들”에 비유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17년에 쓴 저작에서 트로츠키는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우리 당이 극단적인 고립 심지어는 감옥의 독방 신세를 지면서까지 사회혁명당 및 멘세비키당으로부터 고립된다해도 노동계급은 피억압 농민 및 도시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혁명적 노동계급의 정책이 소비에트 지도자들의 배신적 정책으로부터 날카롭게 분리되어야 수백만 농민을 구원하는 정치적 분화가 가능하다. 그리고 공격적인 사회혁명당 유형의 배신적 농민 지도부로부터 농민을 분리시킬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 노동계급을 전국 인민혁명의 진정한 지도자로 변모시킬 수 있다.”

그러나 체레텔리의 완전히 틀린 주장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10월 혁명 전야에 이것은 배가된 힘으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다수 “고참 볼셰비키들”의 봉기 반대 주장으로 애용되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10월 혁명에 대한 지적인 반동이 시작되었을 때 체레텔리의 노선은 스탈린주의 아류들의 가장 주요한 이론적 무기가 되었다.

볼셰비키들이 퇴장하고 비난받은 같은 날 멘세비키당의 어느 대표는 예상 밖의 결의안을 제출했다: 다음 일요일인 6월 18일에 뻬쩨르부르그를 비롯한 중요 도시들에서 시위를 개최하자. 적에게 민주주의의 단결과 위력을 보이겠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 어안이 벙벙한 속에서도 이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밀류코프는 화해주의자들의 이 예상 외 움직임을 상당히 잘 설명했다: “6월 10일로 예정된 무장 시위의 취소에 대해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설하면서...장관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너무 우리 쪽으로 치우쳤으며 정치 기반이 자기들 발 밑에서 꺼지고 있음을 느꼈다. 이들은 겁을 집어먹고 급작스럽게 볼셰비키당 쪽으로 물러섰다.” 6월 18일에 시위를 개최하겠다는 결정은 볼셰비키당 쪽으로 이끌린 것이 당연히 아니다. 다만 볼셰비키당에 대항해 대중을 획득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시위를 중지시키기 위해 노동자와 병사들을 설득했던 밤 활동은 소비에트 지도자들을 어느 정도 낙담시켰다. 이 때문에 대회 개막 당시의 계획과는 정반대로 이들은 정부의 이름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9월 30일에 제헌의회를 소집하는 내용의 결의안을 서둘러 작성했다. 시위에서 외칠 구호도 대중에게 불쾌하지 않게 선택되었다: “보편적인 평화”, “제헌의회 즉각 소집”, “민주공화국”. 전선의 공세나 연립정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레닌은 프라우다 지에서 이렇게 물었다: “신사들, ‘임시정부에 대한 완전한 신뢰’는 어디에 갔는가?..당신들의 혀가 입천장에 붙었는가?” 그의 비꼼은 아주 적절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참여한 정부에 대해 대중이 신뢰를 보내라고 감히 요구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번 노동자 지구들과 병영들을 방문한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시위 전날 밤에 집행위원회에 완전히 고무적인 보고를 했다. 이 보고로 마음을 평정을 되찾고 자기 만족적 설교를 펼 기분이 난 체레텔리는 볼셰비키들을 향해 몇 마디 던졌다: “이제 혁명 세력을 공개적이고 정직한 방식으로 검토할 기회가 생겼다....당신들과 우리들 중 누가 다수 대중의 지지를 받는 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들의 도전이 조심성 없이 이렇게 표현되기 전에 볼셰비키당은 이미 이 도전을 받아들였었다. 프라우다지는 이렇게 적었다: ”10일로 예정되었으나 취소된 시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8일 시위에 참여할 것이다.“

최소한 피상적으로나마 민주주의의 거대한 단합을 과시한 3개월 전의 장례 행렬을 의식한 듯 시위 코스는 또다시 군신장과 2월 혁명 열사들의 묘지로 정해졌다. 그러나 시위 코스를 제외하고는 그때를 연상시킨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장례식보다 훨씬 적은 4만 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소비에트와 연합하고 있던 부르주아 세력 뿐 아니라 장례식의 민주주의 행렬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었던 급진 지식인들도 시위에 불참했다. 노동자와 병사들 이외에 참여한 세력은 거의 없었다.

군신장에 모인 대회 대의원들은 플래카드의 문구를 읽으며 세력 분포를 가늠해보았다. 처음 눈에 들어온 볼셰비키 구호들은 반정도 이들의 조소를 자아냈다. 전날에 체레텔리는 너무도 자신 있게 볼셰비키당에 도전장을 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같은 구호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10명의 장관 자본가들을 타도하자!” “공세를 타도하자!”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제 비꼬는 미소는 굳어지더니 서서히 사라졌다. 천지에 볼셰비키 깃발이었다. 대의원들은 이 불편한 집계를 그만두었다. 볼셰비키당의 승리는 너무 명백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여기 저기에 사회혁명당이나 공식 소비에트 구호들이 볼셰비키 깃발과 대오 사이에 보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볼셰비키 물결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다음날 소비에트 공식 기관지는 ‘“임시정부에 신뢰를”이라고 적힌 깃발을 시위대가 여기저기에서 얼마나 맹렬하게 찢어 내버렸는지’를 묘사했다.” 물론 그는 약간 과장했다. 3개 그룹만이 임시정부 지지 플래카드를 들었다: 플레하노프 그룹, 카자흐시위대, 분트에 소속된 몇몇의 유태인 지식인들. 정치적으로 희귀한 점이 인상적이었던 이 세 그룹은 임시정부의 무기력함을 공개적으로 보이기 위해 시위에 참여한 것처럼 보였다. 시위대의 적대적인 고함을 듣자 플레하노프 그룹과 분트는 자기 플래카드를 내려버렸다. 카자흐 시위대는 완고했기 때문에 이들의 깃발은 문자 그대로 이들의 손에서 탈취되어 찢겨졌다. 이즈베스티아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까지 조용히 흐르던 시위 물결은 갑자기 홍수 때 강물이 제방을 넘쳐흐를 것처럼 넘실대었다.” 비보르그 시위대였다. 이들은 모두 볼셰비키당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 “10명의 장관 자본가들을 타도하라!” 어느 공장은 “생존권이 사유재산권보다 더 귀중하다”는 문구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이 제안한 구호가 아니었다.

실망한 지방 출신들은 자기 지도자들을 찾느라 온 곳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은 눈을 내리깔거나 숨어버렸다. 볼셰비키들은 지방 출신들을 쫓아다니며 설득했다. 우리가 음모를 꾸미는 일당처럼 보이는가? 대의원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당신들이 권력이요.” 이들은 대회 공식 석상에서 드러냈던 목소리와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로 인정했다. “그러나 지방과 전선에서는 상황이 다를 것이오. 뻬쩨르부르그가 나라 전체에 대항할 수는 없소.” 이에 대해 볼셰비키들은 대답했다: 당신들의 차례가 곧 오겠지만 우리는 같은 구호를 제시할 것이요.

노인이 된 플레하노프는 이렇게 적었다: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군신장에서 체이제 옆에 서있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자본주의 장관들의 타도를 요구하는 압도적인 수의 플래카드가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레닌주의자들 일부는 마치 휴일을 즐기는 사람들처럼 그의 옆을 지나가면서 그에게 위압적인 명령의 말을 건넸다. 마치 체이제의 얼굴 표정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 같았다.” 볼셰비키들이 휴일 분위기를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고리키의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시위대의 플래카드와 구호로 판단하면 일요일 시위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당이 완전히 승리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진정 거대한 승리였다. 특히 적이 선택한 무기를 들고 격투장에서 승리한 셈이었다. 공세를 승인하고 연립정부를 인정하고 볼셰비키당을 비난하면서 소비에트 대회는 대중에게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올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대중은 선언했다: 우리는 공세나 연립정부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볼셰비키당을 지지한다. 이것이 이 시위의 정치적 의미였다. 시위를 주최한 멘세비키 신문들이 다음날 슬프게 스스로 질문한 것은 당연했다: 누가 이 서글픈 아이디어를 제안했는가?

물론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 전부가 시위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시위자들이 모두 볼셰비키인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연립정부를 원하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아직도 볼셰비키당에 적대적인 노동자들에게는 이렇다할 대안 프로그램이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적대감은 주시하는 중립으로 바뀌었다. 볼셰비키 구호를 따르며 시위에 참여한 멘세비키 및 사회혁명당원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탈당하지는 않았지만 자기 당의 구호에 대한 신념을 이미 상실하고 있었다.

6월 18일의 시위는 참가자들에게 엄청난 인상을 남겼다. 대중은 볼셰비키당이 권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보았으며 동요하는 분자들은 이 정당으로 이끌렸다. 모스크바, 키에프, 카르코프, 에카테리노슬라브 그리고 기타 지방 도시들의 시위들도 볼셰비키당의 영향력이 대단히 증대했음을 보여주었다. 모든 곳에서 2월 체제의 심장부를 공격하는 같은 구호들이 제출되었다.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화해주의자들은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공세가 마지막 순간에 이들을 도왔다. 6월 19일에 애국주의자들의 시위가 입헌민주당의 지도로 그리고 케렌스키의 초상화와 함께 네프스키 가도에서 개최되었다. “전날의 시위와 너무 달라서 승리의 감정과 의식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교차했다.”고 밀류코프가 말했다. 이것은 합당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들의 생각은 즉시 두 시위 위로 비상하여 민주주의가 아직 살아있다고 확신했다. 이 민주주의 양반들은 환상과 모욕감을 있는 대로 전부 경험할 운명이었다.

4월에는 혁명 시위와 애국주의 시위가 동시에 개최되어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그러나 서로 적대적인 이 시위는 6월에는 18일과 19일에 각각 개최되어 충돌이 없었다. 그러나 유혈충돌은 피할 수 없었고 다만 2주일 후로 연기되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독자성을 과시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은 18일 시위에 참여하면서 비보르그 지구의 감옥들을 공격했다. 대부분이 범죄자였던 죄수들은 싸움이나 사상자 없이 해방되었다. 이것도 감옥 한 군데가 아니라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일어났다. 감옥 당국은 기습을 당해 놀라기는커녕 즐거운 마음으로 진짜와 가짜 무정부주의자들을 환영하러 나왔다. 그러나 이 신비한 에피소드는 시위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그러나 애국주의 언론은 이 둘을 연관시켰다. 볼셰비키당은 460명의 범죄자들이 풀려난 경위를 철저히 수사할 것을 대회에 제의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 사치를 허용할 수가 없었다. 이들은 감옥 당국 상층부에서 동맹자들을 만날까 두려웠다. 더욱이 이들은 자기들이 주최한 시위를 악의적인 비방으로부터 방어할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두르노보의 여름 별장과 관련하여 창피를 당했던 법무장관 페레베르제프는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탈출한 죄수들을 찾는다는 핑계로 이 별장을 다시 덮쳤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이에 저항하였고 이 가운데 한 명이 살해되었다. 별장은 파괴되었다. 별장을 자기 소유로 생각했던 비보르그 노동자들은 경고를 발했다. 여러 공장이 작업을 중단했다. 경고는 퍼져서 병영에까지 도달했다.

6월의 마지막 날들은 계속되는 웅성거림 속에 지나간다. 어느 기관총 연대는 임시정부에 대한 즉각 공격을 준비한다. 파업 중인 공장의 노동자들은 연대를 순회하면서 병사들을 거리로 불러모은다. 머리가 허연 농민들이 병사 외투를 걸치고 수염을 기른 채 보도를 따라 항의 행진을 한다. 이 중년 농민들은 농토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동원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볼셰비키당은 거리로 나가는 것을 반대하는 선동을 하고 있다. 18일의 시위는 할말을 다했다는 것이다.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시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혁명의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6월 22일 볼셰비키당 신문은 주둔군에게 호소한다: “거리로 나서라는 군사조직 명의의 촉구를 믿지 말아라.” 전선에서 도착한 대의원들은 병사들에 대한 폭력과 징벌을 불평한다.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연대들은 해체시킨 뒤 다시 구성한다는 위협은 불에 기름을 붇는 격이다. “다수의 연대에서 병사들은 손에 무기를 들고 잠을 잔다”고 집행위원회에 제출되는 볼셰비키당의 선언문이 말한다. 무장을 갖춘 애국주의 시위는 종종 시가전을 촉발한다. 이것은 축적된 전기가 조금 방출되는 현상과 같다. 어느 쪽도 직접 공격하기를 원치 않는다. 반동 세력은 너무 허약하고 혁명 세력은 자기 권력에 대해서 아직도 완벽한 자신감이 없다. 그러나 도시의 거리들은 폭발 물질들로 널려 있는 것 같다. 곧 전투가 벌어질 분위기이다. 볼셰비키 신문은 정세를 설명하면서 대중을 억제시킨다. 애국주의 신문은 볼셰비키당을 마음껏 비방하면서 두려움을 해소한다. 25일 레닌은 이렇게 적고 있다: “볼셰비키당에 대한 보편적인 악의와 분노의 난폭한 외침은 입헌민주당, 사회혁명당, 멘세비키당이 자기들의 무력감을 공동으로 불평하는 형태이다. 이들은 다수파이며 정부이다. 이들은 모두 연합해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되는 것이 없다. 볼셰비키당에 대해 격노하는 것 이외에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제 23장 결론

본 저서의 첫 페이지들을 통해 우리는 10월 혁명이 러시아의 사회관계에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우리의 분석은 성취된 사건들의 결론을 사후에 수용하지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혁명 한참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10월 혁명의 서곡인 1905년 혁명 이전에 이미 분석은 완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후의 페이지들을 통해 우리는 러시아의 사회 세력들이 혁명 사건들을 통해 어떻게 모습을 보였는지를 밝히려했다. 우리는 정당들의 활동을 계급들과의 상호관계를 통해 기록했다. 이 정당들에 대한 필자의 공감이나 반감은 논쟁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관계의 실제 전개에 토대를 두고 정확하게 확립된 사실들의 내적 연관을 재구성할 경우 역사 서술은 객관성을 보장받는다. 이렇게 해서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 역사 과정의 내적 인과 관계는 그 자체가 역사 서술의 객관성을 가장 훌륭히 입증한다.

독자들 앞에서 스쳐 지나간 2월 혁명의 사건들은 최소한 반쪽이나마 우리의 이론적 예측이 옳았음을 연속적 소거의 방법을 통해 확인시켜주었다.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까지 정세의 다른 변종들 전부는 현실의 시험을 거쳐 가치가 없는 것으로 소거되었다.

케렌스키를 민주주의의 인질로 잡은 자유 부르주아 정부는 완전한 실패작으로 판명 났다. “4월 시기”를 통해 10월 혁명은 2월 혁명에게 처음으로 솔직하게 경고했다. 이 사건 직후 부르주아 임시정부는 연립정부로 대체되었으나 연립정부도 존재하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자신이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집행위원회가 6월 시위를 촉구했을 때 이것은 자발적인 행동이 결코 아니었다. 어쨌든 이 시위는 2월 혁명이 10월 혁명과 힘을 겨루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사건이었다. 이 패배는 뻬쩨르부르그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 패배는 2월 혁명을 성취하고 이것을 전국에 확산시킨 노동자와 병사들의 손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특히 치명적이었다. 6월 시위는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이 목적이 뚜렷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새로운 혁명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증명했다. 명확한 징후들은 나라의 나머지 부분들도 어쩔 수 없이 뒤늦게 수도를 따라잡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지 4개월을 채울 즈음에 2월 혁명은 정치적으로 이미 소진되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신뢰를 잃었다. 소비에트 주요 정당들과 소비에트 대중 사이의 갈등은 이제 불가피해졌다. 두 혁명의 계급 역관계를 평화적으로 시험한 6월 18일 시위 후 두 혁명 사이의 모순은 공공연하고 폭력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해서 “7월 시기”가 도래했다. 상부에서 조직한 6월 시위 2주일만에 시위에 참여했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이번에는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가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게 권력을 잡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단도직입적으로 거절했다. 7월 시기에는 시가전이 벌어지고 사상자가 생겼다. 그리고 2월 체제의 정치적 파산에 책임이 있다고 선언된 볼셰비키당이 강제로 해산되었다. 6월 11일 체레텔리는 볼셰비키당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이 정당의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상정했으나 표결에서 패했다. 그런데 이 결의안은 7월초에 그 내용 전부가 실행에 옮겨졌다. 볼셰비키 신문들은 강제 폐간되고 그 군사 조직들은 해체되었다. 노동자들은 무장 해제를 당했으며 볼셰비키당의 지도자들은 독일 총사령부의 첩자라고 선언되었다. 이들 중 한 명은 몸을 숨겼으며 나머지는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볼셰비키당에 대한 화해주의자들의 이 “승리”는 민주주의자들의 무기력을 완전히 드러냈다. 노동자와 병사들에 반대해 민주주의자들은 볼셰비키당 뿐 아니라 소비에트에게도 적대적인 악명 높은 반혁명 세력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집행위원회는 이미 자기 부대를 상실한 후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이로부터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였다. 이것을 밀류코프는 대안의 형태로 표현했다: 코르닐로프인가 레닌인가? 실제로 혁명은 중용의 제국에게 더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반혁명은 스스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결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총사령관 코르닐로프는 볼셰비키당에 대항한 투쟁이라는 외피로 혁명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그 동안 혁명에 반대하는 모든 합법적 형태들은 애국주의 즉 독일에 대항할 필요성이라는 위장술을 채택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제 반혁명의 합법적 형태들은 모두 볼셰비키당에 대항할 필요성이라는 위장술을 채택했다. 코르닐로프는 유산계급들과 이들의 정당인 입헌민주당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코르닐로프가 뻬쩨르부르그에 대항해 배치한 군대는 싸움 한번 뭇하고 패배했으며 항복했다. 이들은 뜨거운 난로 뚜껑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수증기가 되어 사라졌다. 이렇게 우익은 특히 군대의 총사령관을 동원하여 혁명을 제압하려했다. 유산계급들과 인민 사이의 역관계는 행동을 통해 시험되었다. 코르닐로프와 레닌 사이의 선택에서 코르닐로프는 나무 가지에 달린 썩은 과일처럼 땅에 떨어졌으며 레닌은 그때에도 깊숙이 몸을 숨기고 있어야했다.

이 사건 이후 아직도 시도되지 않고 시험되지 않은 대안은 무엇이었는가? 다름 아닌 볼셰비키주의라는 대안이었다. 사실 코르닐로프 쿠데타의 비참한 패배 이후 대중은 열정적이고 단호하게 볼셰비키당으로 넘어왔다. 10월 혁명은 물리적인 필연성을 가지고 전진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상당수의 희생자가 있었으나 2월 혁명은 무혈혁명이라는 이름표를 달았다. 이에 비해 10월 혁명은 진짜 유혈사태 없이 수도에서 성공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권리가 있다: 10월 혁명의 심오한 자연적 불가피성에 대한 더 이상의 증명이 필요한가? 자신의 가장 민감한 부분인 이윤에 타격을 입은 자들만 이 혁명을 모험주의와 참주선동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너무 당연했다. 볼셰비키당의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유혈 투쟁이 터진다. 이때 타도된 계급들은 연합국 정부들의 물질적 지원을 얻어 잃은 것을 되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이렇게 해서 내전의 몇 년이 지나간다. 적군이 창설되고 굶주린 나라는 군사적 공산주의 체제에 놓이고 스파르타식 전쟁 막사로 변모한다. 10월 혁명은 한 발 한 발 자신의 길을 다지고 모든 적들을 격퇴하고 산업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의 대단히 무거운 상처를 치유하고 산업 발전의 영역에서 거대한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이 혁명 앞에 새로운 난관들이 닥친다. 막강한 자본주의 국가들이 이 혁명을 에워싸고 고립시키기 때문이다. 역사발전이 지체되었기 때문에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이것은 고립된 국가의 틀 내에서는 해결될 수 없는 과제들을 노동자 권력에게 제시한다. 이 노동자 국가의 운명은 이렇게 해서 이후 세계역사의 전개와 완전히 결부되어있다.

2월 혁명을 다룬 본 저서 제 1권은 왜 그리고 어떻게 이 혁명이 아무 성과도 가지고 올 수 없었는지를 보여주었다. 본 저서 제 2권은 어떻게 10월 혁명이 승리했는지를 보여줄 것이다.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