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사 중-2

 

차례

8장: 케렌스키의 계략

9장: 코르닐로프의 쿠데타

10장: 자본가계급이 민주주의진영과 힘을 겨루다

11장: 반동의 공세에 놓인 대중

12장: 상승하는 혁명의 물결

13장: 볼세비키당과 소비에트

14장: 최후의 연립정부

 

제 8장 케렌스키의 계략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정협의회는 정부의 권위에 손상을 입혔다. 밀류코프가 올바르게 말하듯이 "화해나 합의가 불가능한 두 진영으로 나라가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국정협의회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기를 높여주었고 혁명을 말살시키려는 이들의 초조함을 더욱 자극했다. 한편 국정협의회는 대중운동에게 새로운 자극을 가했다. 모스크바의 총파업을 계기로 노동자와 병사들이 좌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이 결과 볼세비키당은 도저히 제압할 수 없는 세력이 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좌파만이 대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 누릴 수 있었다. 멘세비키당의 뻬쩨르부르그 조직은 시의회 후보 명단에서 체레텔리를 제외시켰다. 이것은 이 조직이 좌로 기울고 있다는 징조였다. 8월 16일 사회혁명당의 뻬쩨르부르그 협의회는 22대 1의 압도적인 표결로 전쟁 총사령부에서 장교동맹을 해체하고 반혁명에 저항하는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것을 정부에 요구했다. 8월 18일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의장 체이제의 반대를 무시하고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문제를 안건에 올렸다. 표결에 앞서 체레텔리는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사형제도가 폐지되지 않는다면 여러분들은 대중을 거리로 불러모아 정부를 타도할 것인가?" 이에 대해 볼세비키들은 "그렇다"라고 고함으로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는 대중을 결집시켜 정부를 타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자 체레텔리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요즘 다시 살아서 머리를 쳐들고 있다." 사실 볼세비키당은 대중과 함께 다시 머리를 쳐들었다. 대중이 머리를 쳐들자 화해주의자들의 머리는 수그러들었다. 사형제도를 폐지하라는 요구는 900대 4의 압도적 표결로 채택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4명은 체레텔리, 체이제, 단, 리이버였다! 이로부터 4일이 지나 멘세비키당과 그 자매 그룹들의 합동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근본 문제들에 대한 체레텔리의 결의안은 마르토프의 결의안을 물리치고 채택되었다. 그러나 사형제도를 즉시 철폐하자는 요구는 토론 없이 통과되었다. 더 이상 압력에 저항할 수 없었던 체레텔리는 침묵을 지켰다.

점점 격화되고 있던 정치적 분위기는 전선의 사건들에 의해 더욱 격화되었다. 8월 19일 독일군은 이크스쿨 근처의 러시아군 전선을 돌파했으며 21일에는 리가를 점령했다. 코르닐로프의 예상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것은 미리 합의라도 한 것처럼 부르주아 공세의 신호탄이 되었다. 부르주아 언론은 "일하지 않으려는 노동자"와 "싸우지 않으려는 병사"에 대한 공격의 강도를 10배나 늘렸다. 혁명은 모든 것에 책임을 졌다: 혁명은 리가를 내주었다; 혁명은 이제 뻬쩨르부르그마저 내주려고 한다. 병사들에 대한 비방은 2.5개월 전만큼이나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나 조금의 정당성도 없었다. 6월에 병사들은 공세를 거부했었다: 이들은 독일군의 소극성을 적극성으로 부추겨 전투를 재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리가 전선에서 독일군이 공세로 나오자 병사들은 아주 다른 태도를 보이며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더욱이 제 12군 가운데에서 가장 철저히 혁명 선전을 받은 부위가 독일군의 공세에 가장 적게 흔들렸다.

제 12군 사령관 파르스키 장군은 군대가 "모범적인 대형"을 유지하며 후퇴했고 이것은 갈리시아와 동프로이센 전선의 경우와는 비교도 될 수 없다고 자랑했다. 그의 주장은 근거가 없지 않았다. 정부위원(commissar) 보이틴스키는 이렇게 보고했다: "우리 군대는 적이 공격에 나선 지역에서 명예롭게 그리고 조금의 흠도 없이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적의 공격을 오래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한 걸음씩 후퇴를 하면서 엄청난 병력을 잃고 있다. 라트비아인 명사수들의 대단한 용기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완전히 지쳤지만 이들의 나머지는 다시 전투에 임했다...." 병사 위원회 의장이자 멘세비키인 쿠친의 보고는 더 열렬하다: "병사들의 기상은 놀랄 정도였다. 위원회 위원들과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의 견고성은 유례가 없었다." 같은 군대의 또 다른 대표는 며칠 후 집행위원회 사무국 회의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공격의 중심에는 거의 전적으로 볼세비키들로 구성된 라트비아인 여단이 있었다...전진하라는 명령을 받고 이 여단은 붉은 깃발을 앞세우고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대단한 용기를 내어 전진했다." 나중에 스탄케비치는 좀더 누그러뜨려서 같은 내용을 보고했다: "병사들을 비난할 태세로 악명 높은 자들이 득실거리는 총사령부도 전투 명령 뿐 아니라 어떤 명령이든 구체적으로 거부된 예를 단 하나도 들 수 없었다." 공식 문서에 따르면 문순트 작전에 투입된 해병대 상륙 부대 역시 눈에 띄게 용감했다. 혁명의 두 중심지인 리가와 뻬쩨르부르그를 직접 방어하는 문제였기 때문에 병사들 특히 라트비아인 명사수들과 발트해 수병들의 사기는 남다르게 충천했다. "총검을 땅에 박아 놓는다고 전쟁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생각 그리고 평화를 향한 투쟁은 곧 국가권력과 새로운 혁명을 향한 투쟁이라는 볼세비키의 사상은 선진 부대들을 이미 사로잡고 있었다.

장군들의 비난에 겁이 질려 일부 정부위원(commissar)들은 군대의 견고함을 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병사들과 수병들은 명령을 수행하면서 죽어갔다. 이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다만 핵심을 말하자면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제 12군은 적의 공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기습당했다. 병력, 무기, 보급품, 방독면 등 모든 것이 부족했다. 통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부실했다. 러시아제 소총에 일제 탄창이 제공되었기 때문에 공격은 지연되었다. 그리고 전선의 다른 부분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리가 함락의 중요성은 총사령부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제 12군에서 드러난 방어 병력과 보급품의 대단히 비참한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장교들은 볼세비키주의의 아성인 이 도시를 포기하려 했다. 이 때문에 리가가 고의로 적에게 넘겨졌다는 소문이 볼세비키들에 의해 퍼지기 시작했다. 군대는 이 소문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도시를 방어하려는 전투나 저항이 없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6년 12월에 이미 루즈키 장군과 브루쉴로프 장군은 리가가 "북부 전선의 불행"이며 병사들을 처형해야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볼세비키 선전의 소굴"이라고 불평했었다. 리가의 노동자와 병사들을 독일군 점령이라는 시련에 내버려두자는 것이 북부 전선에 배속된 다수 장군들의 비밀스러운 소망이었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전선의 총사령관이 리가 포기의 명령을 내렸다고 생각한 자는 물론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령관들은 코르닐로프의 연설과 참모총장 루콤스키 장군의 인터뷰 내용을 신문으로 읽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명령을 내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북부 전선의 총사령관인 클렘보프스키 장군은 음모자들의 파벌에 속해 있었다. 따라서 리가의 포기를 구국 운동의 신호탄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더욱이 정상적인 조건 속에서도 러시아 장군들은 포기와 후퇴를 선호했다. 리가의 경우 총사령부가 모든 책임을 면제시켜 주었고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가 패배를 강요했기 때문에 이들은 적의 공격에 저항하지 않았다. 일부 장군들이 수동적인 사보타지를 통해 방어행위 자체를 저지했는지는 부차적이며 진상이 파악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배신행위가 처벌받지 않는 상황에서 장군들이 구태여 자기들에게 이익이 되는 행위를 억제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사고일 것이다.

관찰력이 있는 미국인 기자 쟌 리이드(John Reed)는 불멸의 10월 혁명 연대기를 남겼다. 러시아 유산계급의 상당수가 혁명의 승리보다는 독일군의 승리를 선호했다는 사실을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공공연히 증언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날 저녁 나는 어느 모스크바 상인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차를 마시는 동안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 있던 11명의 사람들에게 '빌헬름 황제와 볼세비키들' 가운데 누가 러시아의 주인이 되는 것이 더 좋은가 하고 물었다. 한 명을 제외한 전원이 빌헬름 황제를 택했다." 그는 북부 전선의 장교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들은 "병사위원회와 함께 일하느니 독일군이 승리하는 것이 솔직히 더 좋다"고 말했다.

볼세비키당과 다른 조직들은 리가의 포기에 대해 정부를 정치적으로 비난했다. 이 비난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는 리가의 포기가 음모자들의 계획에 들어가 있었으며 이들의 스케줄에 확실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점은 코르닐로프가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행한 연설의 행간을 읽으면 아주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후의 사건들은 이 점을 완전히 해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을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언들이 존재한다. 증인의 정체 자체가 반박할 수 없는 권위를 부여했다. 밀류코프는 자신의 혁명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코르닐로프는 연설을 통해 '나라를 파멸에서 그리고 군대를 붕괴에서 구출'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더 이상 연기할 생각이 없는 시점을 언급했다. 이 시점은 그가 예상한 리가의 함락이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사건은...애국주의의 열광을 가져올 것이었다... 8월 13일 모스크바 회의에서 코르닐로프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케렌스키 정부와 공개적인 싸움을 벌일 순간은 그의 마음속에 완전히 결정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는 이 날을 8월 27일로 미리 박아놓고 있었다." 이보다 더 명확한 발언이 있을 수 있을까? 뻬쩨르부르그에 진군하여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코르닐로프는 리가를 독일군에게 넘겨주는 날짜를 실제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미리 정할 필요가 있었다. 코르닐로프에게는 리가의 진지를 강화하고 진지한 방어조치들을 취하는 것은 비할 바 없이 더욱 중요한 다른 전투에 대한 계획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빠리를 함락하기 위해서는 미사를 거행할 필요가 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라면 리가를 독일군에게 거저 내주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리가의 함락과 코르닐로프 봉기 사이의 일주일 동안 전쟁 총사령부는 병사들에 대한 비방의 진원지가 되었다. 총사령부의 비방이 러시아 신문에 실리자마자 연합국 언론도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자 러시아의 애국주의 신문들은 더 타임즈(The Times), 르 땅(Le Temps), 르 마땡(Le Matin) 등에 실려있는 러시아군에 대한 경멸과 욕설들을 열렬하게 그대로 실었다. 이에 대해 전선의 병사들은 원한, 분노, 혐오감에 몸을 떨었다. 화해주의자이든 애국주의자이든 가릴 것 없이 정부위원들과 위원회들은 모두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 비방에 대한 항의가 사방에서 빗발쳤다. 루마니아 전선, 오데사 군관구, 흑해 함대 등의 집행위원회인 소위 룸체로드가 보낸 편지는 특히 신랄한 비난을 담고 있었다. 이 편지는 "혁명 러시아를 방어하기 위해 매일 죽어가고 있는 수천 러시아 병사들의 용기와 헌신적인 용감성을 러시아 국민에게 보여줄 것"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요구했다. 아래로부터의 항의 물결에 직접 영향을 받아 화해주의 지도자들도 수동적 자세를 버렸다. 자신의 정치 동맹자들에 대해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렇게 적었다: "혁명 군대에 대해 부르주아 신문들이 던지지 않는 오물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전쟁 총사령부에 중심을 둔 음모는 병사들을 비방할 필요가 있었다.

리가를 포기한 직후 코르닐로프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서 탈주병 몇 명을 병사들 앞에서 사살하라고 전보로 명령했다. 정부위원 보이틴스키와 파르스키 장군은 이 명령이 전혀 부당하다고 보고했다. 이에 미칠 듯이 화가 난 코르닐로프는 총사령부의 대표위원회에서 군대의 상황에 대한 허위 보고의 책임을 물어 보이틴스키와 파르스키를 군법에 회부하겠다고 선언했다. 스탄케비치에 의하면 허위 보고의 실제 내용은 "병사들을 비난하지 않은 것"이었다. 실상을 완전히 보여주기 위해서는 같은 날 코르닐로프가 장교동맹 지도위원회에서 볼세비키당 소속 장교들의 명단을 넘길 것을 각 부대 참모부에 명령했다는 사실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입헌민주당의 노보실체프가 우두머리인 장교동맹은 반혁명 음모의 지휘부였다. 이렇게 반혁명 음모의 중심 인물인 코르닐로프를 케렌스키는 "혁명의 최고 군인!"이라고 국정협의회에서 치켜올렸다.

음모를 가리고 있는 커튼을 아주 조금만 들어올리기로 작정한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렇게 적었다: "최고사령부와 아주 가까이 있는 신비의 파벌이 엄청난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 "신비의 파벌"은 코르닐로프와 그의 참모부였다. 다가오고 있는 내전의 번갯불은 오늘과 어제의 행위들을 전부 새롭게 드러내기 시작했다. 자기방어를 위해 화해주의자들은 6월 공세 당시 지휘부가 저지른 의심스러운 행위들을 들추기 시작했다. 신문에는 사단과 연대의 참모부가 악의적인 비방을 자행한 내용들이 더욱 자세히 실렸다.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국민은 7월의 후퇴에 대해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 기사를 병사, 수병, 노동자들은 열심히 읽었다. 특히 전선의 재앙에 대해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들을 가득 채우고 있던 병사들은 더 그랬다. 이로부터 이틀 후에 이즈베스티아 지는 좀더 공개적으로 이렇게 선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총사령부는 선언문들을 발표하면서 임시정부와 혁명적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정치게임을 벌이고 있음이 명백하다." 이 보도에서 임시 정부는 총사령부의 음모에 걸려든 죄 없는 희생자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장군들의 음모를 저지할 모든 기회가 있었으나 이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었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병사들에 대한 배신적인 비방에 대해 룸체로드는 특히 분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 총사령부의 공식 선언문들은...장교들의 용감성은 강조하면서 혁명을 방어하는 병사들의 헌신성을 의도적으로 낮게 보는 것 같다." 룸체로드의 항의문은 8월 22일 신문에 실렸다. 그리고 다음날 장교들을 찬양하는 케렌스키의 특별 명령서가 실렸다. 이 글에 따르면 장교들은 "혁명의 첫날부터 자신들의 권리가 축소되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리고 이 글은 "이상주의적 구호 밑에 비겁함을 감추고 있는" 병사 대중을 부당하게 모욕하고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조수들인 스탄케비치, 보이틴스키 그리고 기타 인물들이 병사에 대한 모욕을 항의하고 있는 마당에 케렌스키는 눈에 뜨일 정도로 병사들을 모욕했다. 그리고 전쟁 장관과 수상의 명의로 그는 병사들을 자극하는 명령을 내렸다. 곧이어 케렌스키는 이렇게 인정했다: 이미 7월말에 그는 전쟁 총사령부를 중심으로 한 장교들의 음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손에 넣고 있었다. 그의 말을 인용해보자: "장교동맹 지도위원회는 적극적 음모자들을 임명했으며 동맹의 회원들은 여러 곳에서 음모를 꾸몄다. 이들은 동맹의 합법적 행위에 필요한 색칠을 가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올바른 말이다. 다만 "필요한 색칠"은 병사들, 위원회, 혁명에 대한 비방의 색칠이었다. 이것이 바로 케렌스키가 8월 23일 내린 명령의 색깔이기도 했다.   

그러면 이 수수께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일관된 그리고 심사숙고한 정책이 케렌스키에게 없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장교들의 음모를 알고 있으면서 자기 모가지를 음모자들의 칼 밑에 들이밀고 동시에 이들의 위장을 돕는 것은 머리가 완전히 돌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행위였다. 처음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케렌스키의 행위는 사실 쉽게 설명될 수 있다: 그는 2월 혁명의 곤경에 빠진 정부를 타도하려는 음모자들과 이미 같은 패거리가 되어 있었다.

실상을 드러낼 때가 오자 케렌스키는 카자흐 집단, 장교 집단, 부르주아 정치인 집단들로부터 그가 개인 독재체제를 수립하라는 제안을 여러 번 받았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 제안들은 비옥하지 않은 토양에 뿌려진 씨앗과 같았다..." 어쨌든 그의 입장 때문에 반혁명 지도자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와 쿠데타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었다. 데니킨의 말에 따르면 공세를 준비하던 6월초에 시작된 "독재에 대한 최초의 대화는 약간 탐색전의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대화에 케렌스키는 빈번하게 참여했다. 특히 케렌스키는 이런 대화를 통해 자신이 독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케렌스키에 대해 수하노프는 올바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도자가 된다는 하나의 조건 속에서만 코르닐로프 쿠데타 세력에 동참했다." 공세가 붕괴하는 동안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와 다른 장군들에게 그가 성취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약속했다. 루콤스키 장군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선을 순회하는 동안 그는 종종 용기를 크게 내어 확고한 권력, 통령(directory)정부, 독재 권력 등에 대해 동행하는 자들과 자주 얘기했다." 그의 성격에 걸맞게 그는 이 대화들에 형체가 없는 너절한 아마추어적인 요소를 끌어들였다. 반면 장군들은 군사적인 정확함을 기하는 경향이 있었다.

장군들의 대화에 케렌스키가 스스럼없이 참여하게 되면서 군사독재는 나름의 합법성을 부여받았다. 아직도 분쇄되지 않은 혁명을 의식하여 이들은 이 군사독재 체제를 "통령 정부"라고 불렀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정부 체제에 대한 역사적 회상이 작용했는지는 여기서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용어상의 위장술 문제를 논외로 하면 통령 정부는 우선 개인적 야심이 정치적 필요에 종속된다는 장점이 확실히 있었다. 통령 정부에서는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 뿐 아니라 사빈코프나 심지어 필로넨코도 자리를 차지해야했다. 일반적으로 고위직 후보자 자신들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철의 의지"를 가진 인물들에게 주요한 직책이 마련되어야 했다. 이들은 통령정부가 집단지도체제의 과도기를 거쳐 단독 독재체제로 이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각각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 총사령부와 음모적 흥정을 하기 위해 케렌스키는 급격한 변화를 시도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이미 시작한 정책을 계속 확대시키기만 하면 되었다. 더욱이 그는 장군들의 음모에 적절한 방향을 제시하여 볼세비키당을 분쇄할 뿐 아니라 나름의 한계 내에서 자신의 동맹자이면서도 귀찮은 보호자인 화해주의자들 역시 분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음모자들을 완전히 폭로하지 않은 채 이들을 충분히 겁주어서 자신의 의도대로 이들이 움직이도록 술수를 부렸다. 정부의 수반인 자신이 불법 음모자가 되기 직전까지 케렌스키는 자신을 밀어붙였다. 9월 초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우익, 자본가 파벌들, 연합국 대사관들, 그리고 특별히 전쟁 총사령부가 자신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케렌스키에게는 필요했다. 이렇게 되면 그는 완전히 자유롭게 자신의 계략을 실천에 옮길 수 있기 때문이다. 케렌스키는 장군들의 반란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재를 강화시키려했다."

국정협의회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무제한의 기회에 대한 환상과 함께 개인적 실패가 초래한 굴욕감에 젖어 모스크바에서 뻬째르부르그로 돌아온 케렌스키는 모든 주저들을 벗어 던지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였을까? 모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볼세비키들이었다. 이들은 그가 화려하게 차려놓은 국가적 청사진 밑에 총파업이라는 지뢰를 파묻어 놓았다. 이들을 제압한 후 그는 그를 진지하게 인정하지 않고 그의 제스처를 비웃으며 그의 권력을 권력의 그림자로 생각하고 있는 쿠츠코프와 밀류코프 등 우익 모두를 손 볼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화해주의 선생들, 나라에 의해 선택된 자신을 국정협의회에서조차 교정시키고 지시를 내린 증오스러운 체레텔리 등 "그들"을 확실히 징계할 것이다. 그는 세상 모두에게 확고하고 최종적으로 다음의 사실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그 자신은 위병대 및 카자흐 장교들이 그를 더욱더 공개적으로 부르는 별명인 "히스테리 환자", "사기꾼", "발레리나"가 결코 아니다; 마음의 문을 꼭 잠그고 극장 특별관람석의 아름다운 여성들이 바친 기도도 마다하고 이 열쇠를 바다에 던진 무쇠인간이다.

이 당시 스탄케비치는 케렌스키가 "나라에 만연한 우려와 놀라움에 응답할 새로운 대책을 내놓으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케렌스키는 군대에 징벌을 도입하기로...결심했다. 아마 그는 다른 단호한 조치들을 제시할 준비도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탄케비치는 자기 상관인 케렌스키가 전달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의도만을 전달받았다. 실제 이때 케렌스키의 생각은 상당히 멀리까지 나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실천에 옮겨 그의 권위를 무너뜨린 후 부르주아 계급을 자신에게 묶어둘 결심이었다. 구츠코프는 군대를 공세로 동원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은 공세를 감행했다. 코르닐로프는 자기 강령을 실천에 옮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은 할 수 있다. 모스크바의 총파업은 그의 길에 장애물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그에게 상기시켰다. 그러나 7월 시기는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시 한번 말하면 이 일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만이 필요했다. 좌익의 친구들이 연미복의 꼬리를 잡아끌도록 허용하면 안된다. 무엇보다도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이 혁명 연대들은 소비에트를 항상 감시하지는 않을 "건강한" 부대들로 교체되어야 한다. 이 계획을 집행위원회와 논의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왜 필요한가?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정부는 독립적 권력이라고 인정되었고 이에 맞게 왕관을 머리에 썼다. 물론 화해주의자들은 정부의 독립성을 자유주의자들을 안심시키는 수단 즉 형식적 의미로만 이해했다. 그러나 케렌스키 자신은 이 형식적 의미를 실제적 의미로 전환시킬 것이다. 우익과도 좌익과도 손을 잡지 않을 것이고 바로 여기에 자신의 힘이 있다고 그가 모스크바에서 선언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제 그는 이것을 행동으로 증명해 보일 것이다!

국정협의회가 끝난 후 케렌스키의 노선과 집행위원회의 노선은 계속 벌어졌다: 화해주의자들은 대중이 두려웠던 반면 케렌스키는 유산계급들이 두려웠다. 대중은 전선의 사형제도를 폐지할 것을 요구했다. 반면 코르닐로프, 입헌민주당, 연합국 대사관들은 후방에도 사형제도가 도입될 것을 요구했다.

8월 19일 코르닐로프는 수상에게 전보를 보냈다: "본인이 뻬쩨르부르그 군관구를 지휘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바입니다." 전쟁 총사령부는 공개적으로 수도를 장악하려고 손을 뻗쳤다. 8월 24일 집행위원회는 용기를 내어 정부가 "반혁명 조치들"을 종식시키고 "지체 없이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여" 민주개혁을 시행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것은 새로운 목소리였다. 케렌스키는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민주 조치들을 취할 경우 이 조치들이 별 효력은 없어도 자유주의자들 및 장군들과 결별을 해야할 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비에트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코르닐로프의 반혁명 강령을 수용해야한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 입헌민주당, 연합국들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그는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익과의 공개적 충돌을 피하고 싶었다.

8월 21일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동시에 몇몇의 인물들도 사찰대상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에는 조금의 진지함도 없었으며 케렌스키는 이들을 즉시 풀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코르닐로프 쿠데타에 대한 증언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거짓 냄새를 맡도록 유도된 것 같다." 이 증언에 이렇게 덧붙이기만 하면 된다: "우리 자신이 협조하여 유도되었다." 진지한 음모자들 즉 국정협의회의 우익 전체에게 문제는 왕정을 복귀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민에 대한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너무도 명확한 사실이었다. 코르닐로프와 그의 동료 장군들 전부가 분노하면서 "반혁명" 즉 왕당파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비난을 거부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였다. 물론 전직 장교, 부관, 시종부인, 흑백인조 조정 중신, 마법사, 수도승, 발레리나 등이 뒤뜰 여기저기에서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부르주아 계급의 승리는 군사독재의 형태로만 가능했다. 왕정을 복귀시킬 것인가의 문제는 미래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그것도 라스푸틴의 시종부인들에 기초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 반혁명에 기초해서만 가능했다.

당장 진짜 중요한 것은 코르닐로프의 깃발 아래 부르주아 계급이 결집하여 인민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었다. 이 진영과 연합을 추구하면서 케렌스키는 가짜로 대공들을 체포하면서 좌익의 의심을 해소시키고 자신의 계략을 숨기려는데 더욱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계략은 너무도 뻔히 보이는 것이어서 모스크바의 볼세비키당 신문은 당시 이렇게 적었다: "로마노프 왕가의 골빈 앞잡이들 몇몇을 체포하면서 코르닐로프를 우두머리로 하는 군대 지휘관 파벌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인민을 속이는 짓이다..." 이 때문에도 볼세비키당은 그의 증오를 받았다. 볼세비키들은 모든 것을 보고 있었고 본 것을 큰 소리로 외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정적 시기에 케렌스키에게 영감과 인도를 제공한 자는 사빈코프였다. 그는 대단한 모험주의자로서 재미 삼아 혁명을 하는 인간이었다. 그는 개인적 테러의 학교에서 훈련을 받아 대중을 경멸했다. 재능과 의지를 겸비했지만 그는 몇 년 동안 유명한 밀정인 아제프의 손에 놀아났다. 회의주의자이자 냉소주의자인 사빈코프는 자신이 케렌스키를 깔 볼 권리가 있다고 믿었는데 근거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오른손으로 케렌스키에게 존경스럽게 경례를 하면서 왼손으로 그의 코를 꿰어 그를 끌고 갔다. 그는 케렌스키에게는 행동하는 인물로 코르닐로프에게는 역사적인 이름을 가진 진정한 혁명가로 자신을 내세웠다. 밀류코프는 사빈코프와 코르닐로프가 처음 만난 때를 묘사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사빈코프가 제공한 것이었다.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에게 말했다: "장군, 귀하가 나를 총으로 쏠 상황이 발생하면 귀하는 나를 쏠 것이요. 나는 이것을 알고 있소." 잠시 뜸을 들인 후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나 내가 귀하를 쏠 상황이 발생하면 나 역시 그렇게 할 것이오." 사빈코프는 문학을 좋아하여 꼬르네이유와 위고의 작품을 접했었다. 그리고 그는 고상한 장르에 이끌렸다. 한편 코르닐로프는 사이비 고전주의나 낭만주의 표현에 신경 쓰지 않고 혁명을 제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장군 역시 "강력한 예술 스타일"의 매력에 낯설지는 않았다. 테러리스트였던 사빈코프의 말은 흑백인조 출신인 이 장군의 가슴속에 파묻혀 있던 영웅적 원칙을 즐겁게 간지럼 태웠다.

사빈코프 자신의 작품일수도 있으며 그의 영감을 확실히 받은 어느 신문 기사에서 그의 계획은 아주 명확하게 설명되었다. 이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아직도 정부위원이었을 때 사빈코프는 임시정부가 나라의 난국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세력들이 개입해야했다. 그러나 이 작업은 임시정부 특히 케렌스키의 지휘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철권통치에 의한 혁명독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가 바로 철권이라고 생각했다." 케렌스키는 "혁명"의 얼굴마담이 되고 코르닐로프는 철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는 제 3자의 역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수상과 총사령관을 화해시키는 사빈코프 자신이 이 둘을 모두 제거할 생각을 했음이 틀림없다. 표현되지 않은 이 생각은 표면에 아주 가까이 드러났기 때문에 국정협의회 전날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사빈코프를 강제로 사직시켰다. 그러나 이 판에서 늘 그렇듯이 그의 사직은 최종적인 것은 아니었다. 필로넨코가 이렇게 증언한다: "8월 17일 발표에 따르면 사빈코프와 나는 유임될 것이며 코르닐로프 장군, 사빈코프 그리고 내가 공동으로 제출한 보고서의 강령을 수상은 원칙으로 받아들였다." 8월 17일 케렌스키는 사빈코프에게 "후방에서 채택될 조치들에 대한 법 초안을 작성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사빈코프는 이 목적을 위해 아푸쉬킨 장군을 의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사빈코프를 진정 두려워했으나 케렌스키는 자신의 거대한 계획을 위해 그를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이 때문에 그를 전쟁부 차관으로 유임시켰을 뿐 아니라 덤으로 해군부 차관으로 임명시켰다. 밀류코프에 따르면 이것은 "볼세비키들을 거리로 불러내는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뭔가 명확한 조치들을 정부가 취할 때가 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주제에 대해 사빈코프는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두 개 연대만 있으면 볼세비키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들의 조직들을 분쇄할 수 있다."

특히 국정협의회가 끝난 후 케렌스키와 사빈코프는 화해주의 소비에트가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단지 어제에 전선의 사형제도 철폐를 요구했던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후방으로 사형제도를 확대시킬 경우 배가된 힘으로 들고 일어설 것이다. 따라서 케렌스키의 쿠데타에 저항하는 운동은 볼세비키당이 아니라 소비에트에 의해 지도될 가능성이 있다. 이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도중에 멈출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나라를 구하는 것이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2일 사빈코프는 나의 명령을 받고 전쟁 총사령부로 갔다. 무엇보다도(!) 코르닐로프 장군에게 정부가 사용하도록 기병 1개 군단을 준비시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사빈코프는 여론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고 자신의 임무를 이렇게 묘사했다: "기병 1개 군단을 코르닐로프 장군으로부터 얻기 위해서 갔다. 뻬쩨르부르그에 계엄령을 실시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적대 세력의 공격으로부터 임시정부를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핀란드를 독일군이 포위하고 이와 함께 봉기가 일어나는 상황에 발맞추어 볼세비키당이 임시정부를 전복시킬 준비를 또다시 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정보는 어느 외국의 정보국으로부터 나왔다..." 외국 정보국의 황당한 정보는 다음의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밀류코프에 따르면 정부는 "볼세비키들을 거리로 불러낼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즉 정부가 봉기를 유도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군사독재를 확립시키는 포고령이 8월 마지막 며칠 사이에 공포될 것이기 때문에 사빈코프는 이 날짜에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8월 25일 볼세비키당 기관지 노동계급(Proletarian)은 아무런 외적인 이유가 없이 폐간되었다. 이 기관지 대신 나온 신문 노동자(Worker)는 이렇게 선언했다: 노동계급 지는 "리가 전선의 붕괴와 관련하여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자기억제와 평온함을 유지할 것을 촉구한 다음날 폐간되었다. 당이 봉기 유도에 말려들지 말 것을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을 막는 자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아주 적절했다. 볼세비키 신문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는 사빈코프였다. 신문을 폐간시킨 행위는 그에게 두 가지 장점이 되었다: 대중의 분노를 사 봉기를 유도할 가능성을 늘리는 것이 하나이고 정부의 고위층에서 나온 봉기 유도 수작을 당이 대중에게 알리는 것을 막는 것이 또 하나였다.     

총사령부의 회의록은 아마 약간 윤색되었겠지만 일반적으로 이때 상황과 관련된 인물들을 정확히 반영했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사빈코프는 코르닐로프에게 이렇게 알렸다: "라브르 게오르기에비치, 귀하의 요구들은 며칠 지나면 다 충족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과 관련하여 정부는 심각한 파장이 뻬쩨르부르그에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귀하의 요구들이 공개되는 즉시 이것이 신호가 되어 볼세비키들이 거리로 나올 것입니다....계엄령을 선포하는 새 법에 대해서 소비에트가 어떤 태도를 보일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소비에트가 정부에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따라서 명령을 내리셔서 제 3 기병 군단이 8월말 경에 뻬쩨르부르그로 보내져 임시정부의 지휘를 받도록 명령을 내릴 것을 요청합니다. 볼세비키들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가 거리로 나올 경우 우리는 이들을 공격해야 합니다." 케렌스키의 사절인 사빈코프는 공격이 아주 단호하고 무자비해야한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이외의 행동은 있을 수 없다." 나중에 자신을 정당화시킬 필요가 생기자 사빈코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볼세비키가 봉기를 일으킬 때 소비에트가 볼세비키에 의해 장악된 경우에만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조야한 술책이다. 케렌스키의 쿠데타 포고령은 3일이나 4일 지나서 나올 예정이었다. 따라서 문제는 미래 소비에트가 아니라 8월말 당시의 소비에트였다. 오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리고 볼세비키들이 "적절한 때가 되기 전에" 거리로 나서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합의되었다: 우선 기병 군단을 뻬쩨르부르그에 집결시킨다; 다음에 수도에 계엄령을 선포한다; 그리고 나서 볼세비키 봉기를 유도할 새 법을 선포한다. 총사령부의 회의록에는 이 계획이 명명백백하게 적혀있다. "뻬쩨르부르그 군관구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새로운 법이 공포되는 정확한 일자를 임시정부가 알 수 있도록 코르닐로프 장군은 전보를 통해 기병 군단이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하는 시점을 사빈코프에게 정확히 전해야한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음모를 꾸미는 장군들은 "사빈코프와 케렌스키가...총사령부의 도움으로 쿠데타를 일으키기를 원한다고 이해했다. 총사령부의 도움만이 필요했다. 이들은 모든 요구와 조건들을 서둘러 합의했다...." 케렌스키에게 충성을 바친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유보조건을 달고 있다: 총사령부는 케렌스키와 사빈코프를 "잘못 연결시켰다." 그러나 케렌스키로부터 정확히 표현된 지시사항을 가지고 사빈코프가 사령부에 도착한 마당에 어떻게 이들을 분리시켜 생각될 수 있는가? 케렌스키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5일 사빈코프는 총사령부에서 수도에 도착하여 나의 지시에 따라 임시정부가 지휘할 군대가 수도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8월 26일 저녁에 정부는 후방에 사형제도를 확대하는 법을 채택할 계획이었다. 이와 함께 기병 군단이 단호한 공격으로 나설 것이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이제 단추만 누르면 되었다.

사건들, 문서들, 사건 참여자들의 증언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케렌스키 자신의 자백이 만장일치로 다음의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자기 정부의 일부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리고 자기에게 권력을 부여한 소비에트의 등뒤에서 그리고 자신이 소속된 당으로부터 비밀을 지킨 채 수상 케렌스키는 최고위 장군들과 합의하여 군대의 도움으로 정권을 근본적으로 바꾸려고 했다. 형법 용어에 따르면 이런 종류의 활동은 명확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최소한 이 활동이 승리하지 못할 때 명확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케렌스키 정책의 "민주적" 성격과 무력의 도움으로 정부를 구하려는 그의 계획 사이의 모순은 피상적으로 관찰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병을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계획은 화해주의 정책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이 과정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로 케렌스키의 개성 뿐 아니라 정국의 특수성으로부터 법칙을 추상해야한다. 이것은 혁명의 상황 속에서 화해주의의 객관적 논리가 드러난 문제이다.

독일 인민의 전권대사였던 프리드리히 에버트는 화해주의자요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이 소속한 독일사민당의 등뒤에서 그리고 호엔쫄런 왕조 장군들의 안내를 받으며 행동에 나섰다. 이 뿐이 아니었다. 1918년 12월초 그는 군사 쿠데타에 직접 참여했다. 이 쿠데타의 목표는 소비에트 최고위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에버트 자신을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포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 직후 케렌스키가 에버트를 이상적인 정치인이라고 선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케렌스키, 사빈코프, 코르닐로프의 음모가 무위로 돌아가자 케렌스키는 이 음모를 은폐하는 그리 쉽지 않은 작업을 해야했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모스크바 국정협의회가 끝난 후 정부를 전복하려는 시도가 좌익이 아니라 우익으로부터 올 것이라는 점이 나에게는 명확했다." 케렌스키는 총사령부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이 장군 음모가들에게 보인 공감을 두려워했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중요한 것은 이 점이었다: 기병 군단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실천하면서 케렌스키 자신은 이를 통해 총사령부에 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상과 공범인 이중인간 사빈코프는 단순히 정상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지 않았다. 단순히 이것을 위한 것이라면 동궁에서 암호로 전보를 써서 모길레프에 있는 총사령부로 보내기만 하면 되었다. 아니었다, 그는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를 화해시키고 이들의 계획을 합의시키고 쿠데타가 가능하다면 합법적으로 수행되도록 보장하기 위해 중재자로 갔다. 마치 사빈코프를 통해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한 것과 같았다: "일을 진행시켜라, 그러나 나의 계획 속에서만 말이다. 그러면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네가 원하는 것은 거의 다 이룰 수 있다." 여기에 사빈코프는 이렇게 힌트를 달았다: "케렌스키의 계획을 넘어 서둘러 나가면 안된다." 세 변수가 결합된 기이한 방정식의 성격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성격을 이해해야 케렌스키가 사빈코프를 통해서 기병 군단을 총사령부에 요청한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음모자인 수상은 자신의 합법성을 유지하면서 자신이 음모의 정점에 서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나머지 음모자들에게 이 계획을 전달했다.

사빈코프가 케렌스키로부터 받은 지시 가운데 한 가지만이 어느 정도 우익 음모자들을 공격하기 위한 것처럼 보였다. 장교동맹 지도위원회의 해산에 관한 조치가 바로 이것이었다. 케렌스키의 정당은 이 조치를 뻬쩨르부르그 협의회에서 요구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명령의 표현 자체이다: "...가능한 선에서 장교동맹을 해체하라." 마치 이 명령의 장식적 성격을 강조하기라도 하듯이 이 명령은 명령의 목록에 제일 먼저 올라가 있었다.

우익의 역습을 예상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혁명 연대들을 수도에서 철수시키고 동시에 "믿을만한" 군대를 보내달라고 코르닐로프에게 호소했다. 이 사실의 치명적인 의미를 최소한 약간이나마 약화시키기 위해 그는 기병 군단을 수도로 불러들이는 세 가지 신성한 전제 조건을 나중에 언급했다. 코르닐로프가 뻬쩨르부르그 군관구를 지휘하는데 합의하는 대신 케렌스키는 수도와 인접 교외들을 군관구에서 분리시켜 정부가 총사령부의 손아귀에 완전히 장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케렌스키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잡아먹힐 것이다." 장군들을 자신의 기도에 종속시키려는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케렌스키가 동원할 수 있는 무기는 유보조건이라는 무기력한 속임수 뿐이었다. 세 가지 조건은 이 점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산채로 잡아먹히지 않으려는 케렌스키의 욕구는 증명의 여지가 없다. 이외에 다른 두 조건은 단순히 이것이었다: 코카서스 산악 군대로 구성되어 있는 소위 "야만 사단"을 코르닐로프는 수도 원정군단 속에 포함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크리모프 장군이 원정군단을 지휘하지 말아야 한다. 민주주의의 이해를 방어하는 것과 관련해서 말하자면 이 조건들은 낙타를 꿀꺽 삼키되 모기에 질식당하는 터무니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혁명에 대한 공격을 위장하기 위해서는 비할 바 없이 의도적인 이 조건들을 활용해야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러시아어를 못하는 코카서스 산악군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 신중하지 못한 처사였다; 심지어 짜르도 이렇게 할 작정을 못했을 것이다! 크리모프 장군에 대해서 집행위원회는 꽤 명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이 장군이 원정군단을 맡을 경우 발생할 불편을 사빈코프는 공동의 이해를 근거로 총사령부에 설명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소요가 일어날 경우 크리모프 장군이 이것을 진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할 것이다. 여론이 그의 이름을 그와 무관한 동기와 결부시킬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정부의 수반이 수도로 군대를 불러모으는데 야만 사단은 부르지 말라, 크리모프는 임명하지 마라 등 요구를 제시했다는 사실 자체는 다음을 증명한다: 케렌스키는 쿠데타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죄가 인정될 수 있다; 이와 똑같이 음모의 전반적 계획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원정군대에 속하는 부대들과 음모를 꾸미는 지위에 있는 중요한 자들에 대해서도 전반적으로 알고 있었다는 죄를 그가 가지고 있음이 인정된다.

더욱이 이 부차적인 문제들이 어떻든 간에 코르닐로프의 기병 군단은 "민주주의"를 방어하는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했다. 반면에 군대의 모든 부대들 가운데 이 기병 군단이 혁명에 저항하는 가장 믿을만한 무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케렌스키는 의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좌익과 우익 위로 자신을 추켜세운 케렌스키 자신이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부대를 갖는 것은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후 사태가 증명하듯이 이러한 부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혁명에 저항하는 자들은 코르닐로프의 추종자들뿐이었으며 케렌스키는 이들에게 의존했다.

이 군사적 준비들은 정치적 준비들을 보완했을 뿐이었다. 국정협의회와 코르닐로프 쿠데타 사이에 2주일이 채 되지 않는 시간에 임시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전반적 노선은 케렌스키가 우익에 대한 투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우익과 공동전선을 체결하여 인민에 대해 투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는데 충분했을 것이다. 이 반혁명 정책에 대한 집행위원회의 항의를 무시하며 정부는 8월 26일 곡물 가격을 두 배 인상시키는 예상외의 포고령을 지주들에게 안겨주었다. 이것은 대담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더욱이 로지안코의 구두 요구에 따라 도입되었기 때문에 인민에게 더욱 증오스러웠다. 이 조치로 정부는 굶주린 대중을 의식적으로 투쟁으로 유인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확실히 케렌스키는 엄청난 뇌물로 국정협의회 극우 분파를 획득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2월 혁명의 잔해를 기병을 동원하여 공격하기 전날 밤 "나는 그대들의 것이요!"라고 그는 서둘러 지주들에게 외쳤다.

케렌스키 자신이 임명한 조사위원회에서 있었던 케렌스키의 증언은 치욕이었다. 비록 증인의 자격으로 위원회에 출두했지만 이 정부 수반은 자신이 진짜 피고인들의 우두머리라고 느꼈다. 더욱이 그는 범죄현장에서 잡힌 용의자였다. 이 사태의 내막을 대단히 잘 이해하고 있던 경험이 풍부한 사법부 관리들은 정부 수반의 설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체했다. 그러나 케렌스키가 소속된 당의 당원들을 포함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은 아주 솔직하게 스스로 물었다: 똑같은 기병 군단이 어떻게 쿠데타를 성취하고 동시에 그것을 막을 수 있을까? "사회혁명당원"이 수도를 목조르기 위한 군대를 수도로 들여보내는 것은 너무 무모한 짓이었다. 물론 트로이 군대는 적군을 자기 도시의 성안으로 끌고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무로 만들어진 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고대 역사가들은 트로이 목마 이야기를 노래한 시인을 반박하고 있다. 파우사니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트로이 군대가 "조금의 이성도 가지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고 가정할 경우에만 호메로스 시인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다. 그렇다면 케렌스키의 증언을 듣고 파우사니우스는 무슨 말을 했을까?

 

 

제 9장 코르닐로프의 봉기

8월초에 이미 코르닐로프는 야만 사단과  제 3 기병 군단을 남서전선에서 네벨-노보소콜니키-벨리키 루키 철도 삼각지대로 이동시킬 것을 명령했다. 철도 삼각지대는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하는데 가장 유리한 기지였다. 더욱이 그는 이 부대들을 리가를 방어하기 위한 예비 병력으로 위장하여 이동시켰다. 또한 그는 비보르그와 벨로스트로프 사이에 카자흐 기병 1개 사단을 집결시켰다. 벨로스트로프와 뻬쩨르부르그 사이의 거리는 불과 30 킬로미터였다! 수도의 바로 코앞에 이렇게 군대를 집결시킨 후 그는 핀란드에서 있을 지 모르는 작전에 대비하여 병력을 집결시켰다고 변명했다. 이렇게 하여 모스크바 국정협의회 개최 이전부터 기병 4개 사단이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하기 위해 진을 치고 있었다. 더욱이 이 사단들은 볼세비키들을 제거하는데 가장 유용한 병력으로 간주되었다. 코르닐로프 파벌 내부에서는 코커서스 사단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산악 기병들은 누구를 도살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전략적 계획은 단순했다. 남쪽에서 이동 중인 3개 사단은 기차를 통해 짜르스코에 셀로, 가치나, 크라스노에 셀로 등으로 전진할 것이다. "뻬쩨르부르그의 소요 소식이 접수되는 즉시 그리고 9월 1일 아침 이전까지" 이 지점에서 도보로 행군하여 네바강 좌안에 위치한 수도 남부를 점령할 것이다. 핀란드에서 주둔 중인 사단은 이와 동시에 수도 북부를 점령할 것이다.

        장교 동맹을 통해 코르닐로프는 수도의 애국주의 단체들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험 있는 장교의 지도가 필요한 잘 무장된 2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자임했다. 휴가의 명목으로 전선의 지휘관들을 호출하여 이 병력을 지도하겠다고 코르닐로프는 약속했다. 한편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의 정서 그리고 혁명분자들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비밀 경찰조직이 수립되었다. 이 조직의 책임자는 야만 사단의 대령인 하이만이었다. 이 준비는 군사 법규의 틀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전쟁 총사령부의 기구가 활용되었다.

        모스크바 국정협의회는 코르닐로프의 계획을 강화시키는 역할만 했다. 밀류코프는 자기가 이 계획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다고 말했다. 케렌스키가 일부 지역에서 어느 정도 인기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충고는 안달이 난 코르닐로프에게 먹힐 리가 없었다. 결국 문제는 케렌스키가 아니라 소비에트였다. 더욱이 밀류코프는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라 민간인이었으며 더 나쁜 것은 그의 직업이 교수라는 사실이었다. 은행가, 자본가, 카자흐 장군 등은 코르닐로프를 부추겼다. 교회의 대주교들은 그에게 축복을 내렸다. 군대의 전령 자보이코는 코르닐로프의 승리를 보장했다. 사방에서 안부 전보들이 도착했다. 연합국 대사관들은 이 반혁명 세력의 결집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영국 대사 부캐넌은 음모를 조종할 끈을 많이 쥐고 있었다. 전쟁 총사령부에 배속된 연합국 군사고문들은 그에게 충심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데니킨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군사고문은 감동적으로 공감을 표시했다." 대사관들 뒤에는 연합국 정부들이 있었다. 8월 23일의 전보를 통해 임시정부의 해외 위원 스바티코프는 빠리로부터 이렇게 보고했다: 이임식 파티에서 프랑스 외무장관 리보는 "케렌스키 측근으로 힘과 활기에 넘치는 인물이 누구냐고 열성적으로 물었다." 그리고 쁘웽까레 대통령은 "코르닐로프에 대해...많은 질문을 했다." 러시아의 전쟁 총사령부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코르닐로프는 계획을 미루고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8월 20일 경에 기병 2개 사단이 뻬쩨르부르그를 향해 더 가까이 배치되었다. 리가가 함락되던 날에 각 군의 모든 연대에서 4명의 장교들이 차출되어 전부 4천 명의 장교들이 "영국식 폭탄 던지기를 연구하기 위해" 총사령부에 모였다. 가장 믿을만한 장교들은 이번에 아예 한꺼번에 "볼세비키들이 장악하고 있는 뻬쩨르부르그"를 쓸어버릴 계획이 진행 중이라는 설명을 시급히 들었다. 같은 날 총사령부의 명령에 의해 기병 2개 사단에게 수류탄 여러 상자가 보급되었다. 시가전에서는 이 무기가 가장 유용하다는 것이었다. 참모총장 루콤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8월 26일까지는 모든 준비가 끝나야 한다는 점에 대해 모두 동의했다."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수도에 접근함에 따라 조직들이 "수도 내부에 등장하여 스몰니 학원을 점령한 후 볼세비키 지도자들을 체포할 예정이었다."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회의가 있을 때만 스몰니 학원에 나타났던 반면 장관들을 임명했으며 케렌스키가 공동 부의장을 맡고 있는 집행위원회는 이곳에 상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대의를 위해서는 세세한 것들에는 신경 쓸 수도 없고 이것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최소한 코르닐로프는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루콤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하수인들과 간첩들 특히 레닌을 교수형에 처하고 다음에는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들을 해산시킬 때가 왔다. 그리고 다시는 소집되지 못하게 소비에트를 확실히 해산시켜야한다."

대담하고 결의에 찬 장군으로 군 내부에서 명성을 누리고 있던 크리모프에게 작전의 지휘권을 맡길 생각이 코르닐로프에게는 확고했다. 데니킨은 말한다: "그때 크리모프는 행복했으며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감을 가지고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총사령부는 그를 확실히 믿고 있었다.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주저하지 않고 소비에트 대의원 전원을 교수형에 처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렇게도 행복하고 인생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던 이 장군을 이 특수 작전의 지휘관으로 선택한 것은 결과적으로 대단히 적절했다.                 

전선의 독일군은 이 움직임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 반란 준비가 절정에 도달한 시점에 사빈코프는 오랜 합의문의 세세한 부분을 다듬고 부차적인 수정을 가하기 위해 총사령부에 도착하였다. 코르닐로프는 이미 오래 전에 케렌스키를 타도하는 행동 개시의 날짜를 2월 혁명 발발 후 6개월 뒤로 잡고 있었다. 이와 똑같은 날짜를 사빈코프는 공동의 적인 볼세비키들을 분쇄하는 날짜로 제시했다. 이 음모는 양쪽에서 각각 진행했으나 양쪽은 모두 이 계획의 공통 요소를 가지고 작업을 진행시키려 했다. 코르닐로프는 이것을 위장술로 이용했고 케렌스키는 자신의 환상을 계속 유지시킬 목적으로 이것을 이용하려했다. 사빈코프의 제안은 총사령부의 의도와 딱 들어맞았다: 정부는 자신의 머리를 내밀었고 사빈코프는 올가미를 머리에 들이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총사령부의 장군들은 손을 비볐다. 이들은 즐거운 낚시꾼처럼 이렇게 외쳤다: "물고기가 입질을 하고 있다!" 코르닐로프는 자기에게 아무런 손해도 되지 않는 제안된 양보를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단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수도에 진입하면 총사령부에 대한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명령 불복종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다른 두 조건에도 합의한 후 그는 즉시 이것들을 위반했다: 그는 야만 사단을 선두에 배치시키고 크리모프를 전체 작전의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코르닐로프는 사소한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볼세비키들은 자신들의 근본 정책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공개적으로 토론했다. 대중정당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전쟁 총사령부는 볼세비키당이 대중을 억제시켜 이들의 투쟁 의지를 절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소망은 생각을 낳게 마련이다. 따라서 반동 세력의 정치적 필요는 이들의 정세 전망의 기초가 된다. 모든 지배계급들은 봉기가 임박했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봉기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얘기하는 봉기의 날짜는 때에 따라 며칠 빠르거나 늦었다. 부르주아 언론에 따르면 전쟁부 즉 사빈코프는 봉기가 임박했다고 "아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볼세비키 분파가 봉기를 책임지고 있다고 레치 지는 말했다. 모사꾼 밀류코프는 볼세비키당의 봉기 임박설에 아주 깊이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사가로서의 명예를 걸고 이 황당한 설을 지지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정보국이 이후 공개한 문서들에 따르면 트로츠키의 프로젝트를 지원하기 위한 독일의 새로운 자금이 정확히 이때를 맞추어 책정되었다." 이 박식한 역사가는 러시아 정보국과 마찬가지로 망각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독일군 총사령부가 러시아 애국주의자들을 위해 직접 이름을 언급한 트로츠키는 "정확히 이때를 맞추어" 7월 23일부터 9월 4일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다. 지구의 자전 축은 상상의 산물이지만 지구는 여전히 이 축을 따라 자전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코르닐로프의 군사작전은 볼세비키당의 상상 속의 봉기를 축으로 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축은 반동 세력이 봉기를 준비하는 시기에는 충분히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봉기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좀더 실질적인 것이 필요했다.

빈버그 장교는 이 군사적 음모의 주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이 작전을 위해 막후에서 진행되고 있던 상황을 드러내는 흥미 있는 노트를 남겼다. 엄청난 규모의 군사적 도발이 준비되고 있다는 볼세비키당의 주장을 그의 노트는 올바른 것으로 확인시켜주고 있다. 심지어 밀류코프조차 사실과 문서들의 증거에 밀려 이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극좌 써클들의 의구심은 정확했다: 공장에서의 선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장교 조직들의 임무였다." 그러나 이것도 별 도움은 되지 못했다. 그는 이렇게 불평한다: "볼세비키당은 속임수에 걸려들지 않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대중은 볼세비키당의 지시가 없이는 거리로 나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장애물조차 반동세력의 계획 속에 들어있었고 말하자면 미리 장애물의 기능은 정지되어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 머물고 있는 음모자들의 지도적 기구는 "공화파 쎈터"로 불리었다. 이 기구는 볼세비키당을 대신하여 자기들이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해버렸다. 혁명 봉기를 모방하는 임무는 카자흐 기병 대령 두토프에게 맡겨졌다. "1917년 8월 28일에는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었는가?"라고 그의 정치적 친구들은 1918년 1월에 질문했다.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8월 28일부터 9월 2일 사이에 볼세비키 봉기의 형태로 행동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모든 것은 예상되고 있었다. 이 계획에 대한 전쟁 총사령부 장교들의 고심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케렌스키는 사빈코프가 전쟁 총사령부에서 돌아온 후 모든 오해들이 풀렸으며 전쟁 총사령부는 완전히 자신의 계획 속으로 유인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이들 전부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으며 행동의 방식 자체에 대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고 모두 믿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행복한 순간들은 오래 가지 못했다. 사고가 하나 터져 모든 역사적인 사건들이 그랬듯이 필연의 수문을 열어놓았다. 첫 임시정부의 장관이었던 10월당의 르보프가 케렌스키를 방문했다. 규모가 큰 러시아 정교회 최고회의의 수장으로서 임시정부가 "백치들과 깡패들"로 가득하다고 보고를 했던 자가 바로 그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의 계획이 실제로는 서로에 대해 적대적인 두개의 계획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임무가 운명에 의해 그에게 주어졌다.

직업이 없으면서 말하기는 좋아하는 정치꾼인 르보프는 어떤 때에는 전쟁 총사령부에서 또 어떤 때에는 동궁에서 정부의 교체와 구국에 대한 끝없는 대화에 참여해왔다. 이번에는 그는 하나의 제안을 가지고 나타났다. 불만을 가진 전쟁 총사령부의 벼락과 천둥으로 케렌스키를 협박하면서도 친근한 방식으로 자신이 민족 성분에 따라 정부의 장관들을 교체시키는 일을 중재하도록 허용해 달라는 것이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수상 케렌스키는 르보프를 이용하여 전쟁 총사령부와 자신의 공모자인 사빈코프의 충성심을 동시에 시험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독재체제 수립에 대한 계획에 공감을 표현했다. 물론 이 체제에서 그는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었다. 그리고 르보프가 중재를 하도록 격려했다. 여기에는 군사적 술수가 숨어있었다.

케렌스키의 위임장을 받아 어깨가 무거워진 르보프가 다시 전쟁 총사령부에 도착했을 때 장군들은 그의 임무를 정부가 굴복할 때가 무르익었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사빈코프를 통해 케렌스키는 카자흐 일개 군단에 의해 정부가 호위될 경우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실천하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오늘 케렌스키는 이미 총사령부에 협력하기 위해 내각을 교체하겠다고 제안하고 있었다. 장군들은 올바르게 이렇게 결정했다: "그의 배를 무릎으로 깔아뭉갤 때가 되었다." 따라서 코르닐로프는 르보프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볼세비키당의 임박한 봉기가 "임시정부의 타도, 독일과의 평화조약, 독일에게 발트 함대의 양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므로 "최고사령관인 나에게 임시정부가 즉시 권력을 넘기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리고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덧붙였다: "...최고사령관이 누가 되든 상관이 없다." 그러나 그는 현재 자신의 직책을 누구에게 넘길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의 입지는 성조오지 기병대, 장교동맹, 카자흐 군대 위원회의 충성 서약으로 이미 강화된 뒤였다. 볼세비키당의 위협으로부터 케렌스키와 사빈코프가 "안전"을 보장받으려면 이들이 전쟁 총사령부로 와서 자신의 개인적 보호를 받으라고 코르닐로프는 긴급히 요청했다. 그의 당번병인 자보이코는 르보프에게 이 보호의 성격에 대해 확실히 힌트를 주었다.

모스크바로 돌아온 르보프는 케렌스키가 "임시정부 장관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코르닐로프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친구"로서 열렬히 촉구했다. 마침내 케렌스키는 독재체제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게임이 심각한 국면에 돌입했으며 자신에게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그는 먼저 코르닐로프를 직통전화로 불러 사실을 확인하려했다: 르보프가 그의 의사를 정확히 전달했는가? 케렌스키는 자신의 이름 뿐 아니라 르보프의 이름을 걸고 이렇게 질문했다. 이 직통전화의 대화에 르보프는 참석하지 않았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행위는 형사에게는 적절하지만 정부의 대표에게는 부적절했다." 다음날 케렌스키는 이미 결정을 한 것처럼 자신이 전쟁 총사령부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화를 통한 이 직접 대화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경거망동이었다. 민주 정부의 수반과 "공화파" 장군이 마치 침대차의 자리를 흥정하는 것처럼 권력을 넘기는 문제를 서로 흥정하고 있다!

자신에게 권력을 넘기라는 코르닐로프의 요구가 "독재체제와 정부의 재편 등에 대해 이미 오래 전에 공공연히 시작된 대화들의 연장선상"에 불과하다고 밀류코프는 보고 있다. 그는 전적으로 옳다. 그러나 이 주장을 토대로 총사령부에서 음모가 진행되지 않았다고 그가 말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 아닐 수 없다. 코르닐로프가 케렌스키와 음모를 꾸미고 있지 않았다면 그는 자신의 요구를 르보프를 통해 케렌스키에게 전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코르닐로프는 개인적 음모를 공동의 음모로 은폐하고 있었다. 이 사실도 바뀔 수가 없다. 케렌스키와 사빈코프가 볼세비키당을 전멸시키고 부분적으로는 소비에트도 제거하려고 했던 시점에 코르닐로프는 임시정부마저  제거할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케렌스키가 원치 않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26일 저녁 몇 시간 동안 전쟁 총사령부는 정부가 조금의 저항도 없이 항복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물론 이것은 음모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것은 음모가 막 성공할 것 같았다는 의미였다. 음모가 승리하면 항상 법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길을 찾아내기 마련이다. 전쟁 총사령부에서 외무부를 대표하고 있던 외교관 트루베츠코이는 이렇게 말한다: "이 대화가 끝난 후 나는 코르닐로프 장군을 보았다. 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이것이 정부가 귀하의 노선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것을 의미합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는 잘못 알고 있었다. 케렌스키로 대표되는 정부가 그와의 만남을 끊은 것이 바로 이 순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총사령부는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문제는 독재체제 일반이 아니라 코르닐로프 독재였던가? 그렇다면 이들은 케렌스키를 조롱하기 위해서 그에게 법무장관 자리를 제안하고 있었는가? 사실 코르닐로프는 르보프를 통해 케렌스키에게 법무장관직을 주겠다고 제안했었다. 자기 자신을 혁명 자체로 혼동하여 케렌스키는 재무장관 네크라소프에게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나는 그들에게 혁명을 넘겨버릴 수는 없어!" 그리고 사심이 없는 친구인 르보프는 즉시 체포되어 두 명의 보초가 그의 앞에 지키고 있는 가운데 동궁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그리고 벽을 사이에 두고 "승리감에 도취된 케렌스키가 알렉산드르 3세의 방에서 이 잘 풀리고 있는 일에 즐거워하며 끝없이 오페라의 빠른 곡조를 흥얼거리는 것"을 이를 갈면서 듣고 있었다. 이 순간 케렌스키는 활력이 용솟음치는 것을 느꼈다.

이 당시 뻬쩨르부르그는 이중의 불안 속에 놓여있었다. 부르주아 언론이 의도적으로 과장하고 있던 정치적 긴장은 폭발할 소지를 안고 있었다. 리가의 함락으로 전선은 수도에 더 가까이 위치했다. 짜르가 몰락하기 한참 전부터 전쟁 때문에 제기된 수도 대피 계획은 이 때문에 새로운 힘을 얻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독일군의 진격보다는 새로운 봉기를 훨씬 더 두려워했기 때문에 수도를 떠나고 있었다. 8월 26일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재차 경고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우리 당의 이름으로 도발을 선동하고 있다." 같은 날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등의 주요 기구들은 어떠한 노동자 조직이나 정당도 어떤 형태가 되었든 시위를 촉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정부가 다음 날 타도될 것이라는 소문은 단 일분도 멈추지 않고 계속 퍼졌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렇게 말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모든 시위를 진압한다는 결정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시위를 진압하기 전에 우선 시위를 자극하는 모든 조치들을 취했다.

27일 조간신문에는 전쟁 총사령부의 봉기 의도에 대한 소식이 실리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사빈코프의 인터뷰는 이렇게 선언했다: "코르닐로프 장군은 임시정부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2월 혁명 6개월 기념식은 이상하게 조용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시위처럼 보이는 어떤 행위도 피했다. 부르주아들은 소요를 두려워하여 집에 처박혀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 하나 없었다. 군신장에 안치된 2월 혁명 열사들의 무덤은 방치된 것처럼 보였다.

오래 기다려온 구국의 이날 아침 최고사령관 코르닐로프는 전보를 통해 수상 케렌스키로부터 이렇게 명령을 받았다: 모든 임무를 참모장에게 넘기고 즉시 뻬쩨르부르그로 귀환하라.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코르닐로프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그는 "이중의 술수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아차렸다. 자신이 꾸며온 이중의 술수가 발각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차라리 더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코르닐로프는 항복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직통 전화를 통해 사빈코프가 촉구해도 소용이 없었다. 최고사령관은 성명서를 통해 인민에게 호소했다: "공개적으로 행동에 나서도록 강요된 본인 코르닐로프 장군은 이렇게 선언한다: 소비에트 다수파인 볼세비키당의 압력을 받아 임시정부는 독일군 총사령부의 계획과 완전히 일치하는 행동을 하고 있으며 리가 해안으로 독일군 진입이 임박한 상황에서 군대를 살육하면서 나라를 내부에서 뒤흔들고 있다." 권력을 적에게 넘기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코르닐로프 자신은 "명예와 전투의 격전장에서 싸우다 죽기를 더 원한다." 나중에 이 성명서의 주인공에 대해 밀류코프는 존경의 마음을 표하면서 "결연한 태도로 세부 법 조항들을 경멸하면서 자신이 한때 올바르다고 결정한 목표를 향해 직접 나아가는데 익숙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적이 버티고 있는 전선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자신의 정부를 타도하려는 최고사령관을 "세부 법 조항들"에 집착했다고 비난하기는 정말 힘들 것이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개인적 권위만을 동원하여 코르닐로프를 해임했다. 이때 임시정부는 존재하고 있지 않았다. 26일 저녁 장관들이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행위는 모든 세력들이 원했던 바였다. 행복한 우연의 일치가 아닐 수 없었다. 전쟁 총사령부와 정부가 결별하기 며칠 전에 루콤스키 장군은 이미 알라딘을 통해 르보프에게 이렇게 암시했었다: "8월 27일이 되기 전에 정부에서 철수하라고 입헌민주당에게 경고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장관들의 사임으로 정부는 어려운 처지에 놓일 것이고 입헌민주당은 불쾌한 일들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입헌민주당은 이 암시를 확실해 이해했다. 한편 케렌스키 자신은 정부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권력이 나 개인에게 집중되는 조건 속에서만"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저항할 수 있다. 입헌민주당 소속 장관들과 케렌스키를 제외한 나머지 장관들은 사임할 적절한 때만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해서 연립정부는 또 하나의 시련을 겪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미래에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않은 채 때가 되면 사임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전통에 걸맞게 입헌민주당은 투쟁이 끝날 때까지 물러나 있다가 그 결과에 따라 결정하기를 원했다. 화해주의자들이 침해할 수 없는 자신들의 자리를 마련해 놓을 것이라고 이들은 확신했다. 이렇게 책임에서 벗어난 뒤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사임한 다른 정당 소속의 장관들과 함께 "개인적 성격"을 띤 일련의 회의에 참여했다. 이렇게 해서 내전을 준비중인 두 진영은 "개인적" 방식으로 정부 수반 주위에서 무리를 이루었다. 이렇게 해서 정부 수반은 모든 가능한 권한을 부여받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전혀 없었다.

코르닐로프는 전쟁 총사령부에서 전보를 통해 케렌스키의 명령을 받았다: "뻬쩨르부르그와 교외 지구들로 전진하고 있는 모든 부대들을 가장 최근의 주둔지로 복귀시켜라." 이에 대해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답장을 보냈다: "명령을 거부한다. 뻬쩨르부르그로 부대들을 계속 전진시킬 것이다." 이렇게 해서 군사적 반란이 확실히 시작되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 한다: 철도 대형을 이룬 3개 기병 사단이 수도로 진군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병사들에 대한 케렌스키의 명령은 다음과 같았다: "자신의 애국심과 인민에 대한 충성심을 공포한 후...코르닐로프 장군은 전선에서 연대들을 철수시켜...이들을 뻬쩨르부르그에 대항시키고 있다." 이 연대들이 자신의 직접 명령으로 전선에서 철수했으며 지금 코르닐로프의 배신 사실을 전해 듣고 있는 수도 주둔군을 쓸어버리기 위해 수도로 진군할 계획이었다는 것을 케렌스키는 지혜롭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총사령관은 이에 대해 전보로 재빨리 응답했다: "배신자들은 우리 대오에 있지 않다. 바로 수도에 있다. 이들은 정부의 범죄적인 묵인 하에 독일의 돈을 받기 위해 러시아를 팔아 넘겨왔다." 이렇게 해서 볼세비키당에 퍼부어졌던 비방은 새로운 과녁을 찾았다.

사임한 장관협의회 의장 케렌스키가 오페라에서 불렀던 고양된 야상곡의 음조는 재빨리 사라졌다.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은 어떤 우여곡절을 겪든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쟁 총사령부의 반란 첫째 날 밤 뻬쩨르부르그 병사들과 노동자들 사이에는 사빈코프가 코르닐로프의 반란과 연계되어 있다는 소문이 끈질기게 나돌았다." 이 소문은 사빈코프 다음으로 케렌스키를 반란 공모자로 지명했으며 이 소문은 틀린 것이 없었다. 앞으로 대단히 위험한 내용들이 폭로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케렌스키를 사로잡았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8월 26일 늦은 밤에 전쟁부의 총무청장 사빈코프가 크게 흥분한 채 나의 집무실에 들어왔다. 차려 자세를 취한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장관님, 코르닐로프의 공모자로 저를 즉시 체포해 주십시오. 그러나 저를 신뢰한다면 제가 반란자들과 공통점이 전혀 없다는 것을 인민에게 증명할 기회를 주십시오'....이 선언에 대한 응답으로 나는 즉시 그를 뻬쩨르부르그의 임시 지사로 임명했다. 그리고 코르닐로프 반란군에 저항해 수도를 방어할 다양한 권한을 그에게 부여했다." 이것에 만족하지 않은 채 케렌스키는 사빈코프의 청을 받아들여 필로넨코를 사빈코프의 부지사로 임명했다. 이로써 반란을 일으키고 동시에 이것을 진압하는 임무는 "통령정부"의 협소한 파벌에 집중되었다.

케렌스키가 이렇게 급하게 사빈코프를 뻬쩨르부르그 지사로 임명한 이유는 자신의 정치적 생존이라는 절박한 필요 때문이었다. 만약 케렌스키가 사빈코프를 소비에트에서 배신했다면 사빈코프는 즉시 케렌스키를 배신했을 것이다. 반면 코르닐로프에 대항하는 투쟁에 적극 나서서 자신의 적법성을 증명할 가능성을 약간의 협박과 함께 케렌스키로부터 부여받은 사빈코프는 케렌스키에 대한 반란 혐의를 벗기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지사"는 반혁명에 대항하기보다는 반란 공모의 흔적을 은폐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이제 즉시 공모자들의 우정어린 노고가 시작되었다.

사빈코프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8월 28일 아침 4시에 나는 케렌스키의 호출을 받고 동궁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테레쉬첸코가 있었다. 르보프의 최후통첩이 오해에 불과했다는 점에 대해 우리 4명은 모두 동의했다." 이 새벽 회의의 사회는 사빈코프가 맡았다. 밀류코프는 배후에서 이 회의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는 이날 중으로 무대 위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코르닐로프가 양의 두뇌를 가졌다고 말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와 같은 편이었다. 반란 공모자들과 이들의 하수인들은 이 모든 일을 "오해"의 결과라고 선언하려고 마지막 시도를 했다. 즉 공동의 계획을 통해 구출할 수 있는 것은 모두 구출하려고 여론 조작을 공모하기 시작했다. 야만 사단, 크리모프 장군, 카자흐 기병의 대형, 최고사령관직 사임을 거부한 코르닐로프, 수도로 향한 반란군의 전진 등은 모두 "오해"의 세부사항들에 불과했다! 상황이 불길하게 꼬이는 것에 겁을 먹은 케렌스키는 "그들에게 혁명을 넘겨줄 수 없다!"는 고함을 더 이상 지르지 않았다. 알렉세이예프와 함께한 회의를 마치고 케렌스키는 즉시 동궁의 기자실로 들어가 코르닐로프를 반역자로 선언한 자신의 성명서를 신문기사에서 제외시킬 것을 기자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기자들이 이 조치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명백히 하자 케렌스키는 이렇게 외쳤다: "아 그럴 수가!" 다음날 신문에 실린 이 비참한 에피소드는 이제 가망 없이 일이 꼬인 나라의 최고 책임자의 처참한 모습을 아주 명백하게 드러내었다.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을 너무도 완벽하게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이제 정부의 권력과 이에 대한 범죄적 음모자의 모습을 동시에 아주 훌륭히 체현한 인물이 되었다.

28일 아침이 되자 정부와 최고사령관의 분열은 전 인민의 눈앞에서 기정사실이 되었다. 증권거래소는 즉시 이 문제에 개입했다. 코르닐로프가 리가의 함락을 위협하는 연설을 모스크바에서 했을 때 러시아 주식들이 하락했던 반면 그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모든 주가가 상승했다. 2월 혁명으로 등장한 체제를 극단적으로 폄하하면서 증권거래소는 코르닐로프의 승리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유산계급들의 분위기와 희망을 한 치의 오차 없이 표현했다.

전날 케렌스키에 의해 코르닐로프 대신 임시 최고사령관이 되도록 명령받은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총장 루콤스키는 이렇게 응답했다: "코르닐로프 장군의 권한을 넘겨받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군대 내부에 폭발이 일어나 러시아를 멸망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주저 후에 임시정부에 대한 충성을 선언한 코카서스 전선의 사령관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전선의 모든 사령관들은 다양한 차이의 목소리를 내면서 코르닐로프 장군의 요구들을 지지했다. 입헌민주당의 감화를 받은 장교동맹 지도위원회는 군대와 함대의 모든 지휘관들에게 전보를 보냈다: "여러 차례 정치적 무능을 드러낸 임시정부는 도발을 통해 그 이름에 먹칠을 했으므로 더 이상 러시아의 우두머리로 남아있을 수 없다..." 그런데 루콤스키가 바로 장교동맹의 존경스러운 회장이었다. 전쟁 총사령부는 제 3 기병군단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크라스노프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다: "케렌스키를 방어할 사람은 하나도 없다. 반란은 식은 죽 먹기이다. 모든 것은 준비되었다."

앞에서 소개한 트루베츠코이 공작이 외무부에 보낸 암호 전보문을 보면 반란의 지도자들과 지지자들이 얼마나 상황을 낙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면 모든 부대의 지휘부, 압도적 다수의 장교들, 최상의 병사들이 모두 코르닐로프를 지지하고 있다. 카자흐 기병 전체, 군사 학교의 대다수, 최상의 전투 부대들이 그를 후방에서 지지하고 있다. 이 물리적 힘에 사회주의자들을 반대하는 반란군에 대한 인민의 도덕적 공감...여기에 조금만 채찍질을 가해도 굴복하는 하층민들의 정부에 대한 무관심...등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 3월에 사회주의자를 자처했던 엄청난 수의 인간들은 코르닐로프의 승리와 함께 당연히 우리편으로 넘어올 것이다." 트루베츠코이는 여기에서 전쟁 총사령부의 희망 뿐 아니라 연합국 대사관들의 태도도 함께 표현했다. 뻬쩨르부르그를 점령하기 위해 전진 중인 반란군 가운데에는 영국 군인이 지휘하는 영국제 장갑차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 부대는 반란군 가운데 가장 믿을만한 부대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러시아 주재 영국 군사고문단의 단장 녹스 장군은 미국 대령 라빈즈가 코르닐로프를 지지하지 않자 그를 꾸짖었다: "나는 케렌스키 정부에는 관심이 없다. 너무 허약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한 독재체제이다. 카자흐 기병이 필요하다. 인민은 채찍질을 당할 필요가 있다! 독재체제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것뿐이다." 각지에서 유래한 이 목소리들은 모두 동궁의 거주자들을 경악시켰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반드시 성공할 것 같았다. 게임은 완전히 끝났으며 명예로운 죽음만이 남았다고 네크라소프 장관은 친구들에게 알렸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확인시키고 있다: "소비에트의 유명한 지도자 몇 명은 코르닐로프의 승리가 자신들의 운명에 가져올 결과를 예상하고 서둘러 외국 여권을 준비했다."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더 위협적이 되었다. 부르주아 언론은 이 소식들을 허기진 듯이 집어삼켜 확대하고 축적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8월 28일 낮 12시 30분: "코르닐로프 군대가 루가 근처에 집결했다." 오후 2시 30분: "코르닐로프 군대를 실은 새로운 기차 9대가 오레데즈 역을 통과했다. 선두 기차에는 철도 공병대대가 타고 있다." 오후 3시: "루가 주둔군은 코르닐로프 군대에 항복한 후 무기를 전부 넘겨주었다. 반란군은 루가의 역과 관공서를 전부 점령했다." 저녁 6시: "코르닐로프 군대의 대형들이 나르바를 돌파하여 가치나를 5백 미터 남겨놓고 있다. 2개 대형이 가치나 진격에 합류했다." 29일 오전 2시: "뻬쩨르부르그를 33 킬로미터 남겨놓은 안트로프쉬노 역에서 정부군과 반란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 밤이 되자 러시아 남부 곡창지대를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로부터 차단시키겠다고 칼레딘이 위협했다는 소식이 도달했다. "전쟁 총사령부", "전선의 사령관들", "영국 대사관", "장교들", "대형들", "철도 대대들", "카자흐 기병들", "칼레딘 장군" 등의 모든 말들이 마치 최후의 심판을 알리는 트럼펫처럼 동궁의 말라치트 홀에 울렸다.

케렌스키 자신은 이 사실을 약간 완화된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8월 28일에 큰 동요가 있었다. 민주주의 진영 내에서 코르닐로프 군대의 역량에 대한 대단한 의구심과 초조함이 동시에 교차했다." 이 말들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두 진영 가운데 누가 더 강력하고 누가 개인적으로 자신에게 덜 위험한 가에 대한 추측으로 케렌스키의 마음은 갈가리 찢겨졌다. "우리는 우익 편도 좌익 편도 아니다" --- 이 말들은 국정협의회가 열린 모스크바 극장의 무대에서는 효과적인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이것을 발발 직전에 있는 내전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런 의미일 것이다: 케렌스키 집단은 우익이나 좌익에게 불필요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드라마에 접하자 우리는 절망으로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모든 인민의 눈앞에서 전쟁 총사령부와 정부의 분열이 명백해진 후에도 어느 정도의 화해를 이루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 사실에서 마비의 정도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중재자가 되기를 원했던 밀류코프가 말했다: "중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이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났다." 28일 저녁에 동궁에 나타나 그는 "위법에 대한 엄격한 형식적 견해를 포기할 것을 케렌스키에게 충고했다." 과일의 속과 껍질을 구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해한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이때 충직한 중재자의 역할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8월 13일 밀류코프는 코르닐로프로부터 27일을 거사일로 잡았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국정협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요구했다: "최고사령관이 제시한 조치들을 즉시 채택하는 것이 그에 대한 의심, 언어적 위협, 심지에 해임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 27일까지 코르닐로프는 의심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동시에 밀류코프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은 채" 케렌스키를 지지하겠다고 그에게 말했다. 교수집행인의 올가미를 생각나게 만드는 대목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이 올가미는 슬프게도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은 채 목을 졸라맨다." 이에 대해 케렌스키는 이렇게 인정하고 있다: 중재를 제안한 밀류코프는 "진짜 권력은 코르닐로프에게 있다는 것을 나에게 증명할 아주 좋은 순간을 포착했다." 이 두 사람의 대화는 너무 잘 진행되었다. 결론적으로 밀류코프는 자신의 정치적 친구들에게 케렌스키의 후임으로 알렉세이예프 장군이 임명될 것이고 그에 대해 코르닐로프는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켰다. 알렉세이예프는 이 제안을 너그럽게 수용했다.

그리고 밀류코프보다 더 거대한 자가 등장했다. 저녁 늦게 영국 대사 부캐넌은 외무장관에게 선언문을 건네주었다. 이에 따르면 연합국 대표들은 "인류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피하려는 소망에 따라" 도움을 자원한다고 만장일치로 제안했다. 정부와 반란군 장군 사이에 공식적으로 중재를 하겠다는 것은 반란을 지지하고 보장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임시정부의 명의로 외무장관 테레쉬첸코는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해 "크나큰 놀라움"을 표시했다. 왜냐하면 정부는 그의 정치 강령의 대부분을 이미 채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고립과 무력감 속에서 케렌스키는 사임한 장관들과 끝없는 회의를 하나 더 소집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안이 없었다. 전적으로 사심이 없는 이 시간 보내기 작업이 계속되고 있는 중에 반란군의 수도 접근에 대한 특히 놀라운 소식이 도착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네크라소프는 "몇 시간 후면 반란군이 아마 뻬쩨르부르그에 도착할 것"이라고 전했다. 전직 장관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정부가 구성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추측하기 시작했다. 통령을 임명하자는 생각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우익과 좌익 모두 알렉세이예프 장군이 "통령"의 참모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을 표시했다. 입헌민주당의 코코쉬킨은 알렉세이예프가 정부의 수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부의 주장에 따르면 케렌스키는 밀류코프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른 인물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아무도 이에 반대하지 않았다. 알렉세이예프가 정부 수반의 후보가 되는 것을 중심으로 모든 세력이 화해를 했다. 밀류코프의 계획이 막 실현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이때 최대 긴장의 순간에 늘 그렇듯이 누가 극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바로 옆방에서 "반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위원회"의 대표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아주 적절한 때에 이곳에 도착했다. 코르닐로프 지지자, 중재자, 굴복자 등으로 구성되어 동궁의 어느 홀에서 진행된 가련하고 비겁하고 배신적인 회의는 반혁명의 가장 위험한 소굴의 하나였다.                    

반혁명에 반대하는 투쟁위원회라는 새로운 소비에트 기구는 노동자-병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수립되었었다. 27일 저녁에 수립된 이 기구는 양 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는 3개 소비에트 정당, 노동조합 중앙,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등이 특별히 선출한 대표들로 조직되었다. 소비에트의 지도적 기구들이 자신들의 나약성을 인정하고 혁명 투쟁을 위해서는 새로운 피가 수혈될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을 이 투쟁위원회는 근본적으로 드러냈다.

반란 장군에 대항해 대중의 지지를 구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한 화해주의자들은 서둘러 왼쪽 어깨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들은 원칙과 관련된 모든 문제들이 제헌의회 소집 때까지 연기되어야 한다는 자신들의 연설을 전부 그리고 즉시 잊어버렸다. 멘세비키당은 이렇게 선언했다: 민주공화국을 시급히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한 후 농업개혁을 도입하라고 정부에게 압력을 가할 것이다. 최고사령관의 반역에 대한 정부의 선언문에서 "공화국"이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권력의 문제에 대해서 양 집행위원회는 정부를 잠시 그대로 유지한 채 사임한 입헌민주당 장관들을 대신하여 민주 인사들을 임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이 문제를 최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가까운 미래에 체이제의 강령을 바탕으로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 단결한 모든 조직들이 총회를 개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밤 12시까지 협상한 후 케렌스키가 정부를 민주적으로 통제하자는 생각을 결연히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의 좌우 모두에서 지지가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자 케렌스키는 모든 힘을 다해 "통령 정부"에 대한 생각을 고수했다. 이 정부가 수립되면 아직도 죽지 않은 그의 꿈인 강력한 권력을 실현할 여지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스몰니 학원에서 아무 성과도 없고 피곤하기만한 토론이 끝난 후 대체될 수 없는 유일한 인물인 케렌스키에게 다시 이렇게 호소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는 양 집행위원회의 예비 작업에 동의해야한다. 오전 7시 30분에 체레텔리는 다음과 같은 소식을 가지고 돌아왔다: 케렌스키는 양보할 생각이 없으며 다만 자신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받아 반혁명에 대한 투쟁에서 "모든 국가권력"을 동원하는 것에 동의했다. 밤샘으로 피곤에 지쳐 양 집행위원회는 실의 매듭 구멍만큼이나 공허한 "통령 정부" 안에 마침내 양보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에 투쟁하기 위해 "모든 국가권력"을 동원하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했지만 전쟁 총사령부에게 평화적으로 항복하는 문제에 대해 밀류코프, 알렉세이예프, 전직 장관 등과 계속 협상을 했다. 그런데 이 협상이 밤 12시 반혁명 반대 투쟁위원회의 문을 노크하는 소리로 방해를 받았다. 이로부터 며칠 후 조국방어위원회의 위원이자 멘세비키인 보그다노프는 케렌스키의 배신에 대해 조심스러우나 확고한 어조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임시정부가 동요하고 있으며 케렌스키의 모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가 명확하지 않은 때에 밀류코프와 알렉세이예프 장군과 같은 중재자들이 등장했다..." 그러나 반혁명 반대 투쟁위원회는 그의 보고를 중단시킨 후 "모든 힘을 다해" 공개적인 투쟁을 할 것을 요구했다. 보그다노프는 계속 보고했다: "우리의 압력을 받아서 정부는 모든 협상을 중단하고 코르닐로프의 어떠한 제안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좌익에 대해 어제 음모를 꾸민 정부 수반이 오늘은 좌익의 정치적 포로가 되었다. 이 일이 일어난 후에 26일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장관직을 사임했던 입헌민주당 장관들은 이제 정부에서 나가겠다고 확정적으로 발표했다. 그렇게 애국적이고 조국에 충성하며 나라를 구하는데 열심인 반란을 케렌스키가 진압하는 행위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사임한 장관들, 고문들, 친구들이 모든 하나하나 동궁을 떠났다. 케렌스키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파괴될 운명에 처한 곳을 우르르 포기하는 행위"였다. 이 일은 8월 28일과 29일 사이의 밤에 일어났다. 이때 케렌스키는 동궁에서 거의 "완벽한 고독" 속에 방안을 거닐었다. 오페라의 대담한 연기는 더 이상 그의 머리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진정 초인적인 책임의식이 그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낮과 밤 동안에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케렌스키 자신의 운명에 대한 책임의식이었다: 모든 것들은 이미 그와 관계없이 이루어졌으며 그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제 10장 부르주아 계급이 민주주의 진영과 힘을 겨루다

8월 28일이 되자 동궁의 인물들은 공포에 질려 열병에 걸린 것처럼 떨었다. 야만 사단의 지휘관 바그라치온 공이 코르닐로프에게 전보로 이렇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야만 사단의 군인들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것이며 이들의 최고 영웅인 코르닐로프의 명령에 따라...마지막 한 방울의 피까지 흘릴 것이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야만 사단의 진격은 중지되었다. 그리고 8월 31일 바그라치온 자신을 우두머리로 한 특별 대표단이 케렌스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야만 사단은 임시정부에 절대 복종할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는 전투 한번 없이 아니 총 한방 쏘지 않고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야만 사단은 마지막 피 한 방울은 고사하고 첫 번째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코르닐로프 군대는 무장을 갖추고 뻬쩨르부르그로 진격하려는 시도마저 하지 못했다. 장교들은 이들을 지휘할 생각을 감히 못했다. 정부군은 코르닐로프 군대의 공세를 저지하기 위해 무력에 의존할 필요성을 결코 느끼지 못했다. 반란의 음모는 와해되어 공기 속으로 사라졌다.

이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격돌한 세력들을 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 점에 주목해야 한다: 반란 음모를 주도한 자들은 짜르의 관료들이었다. 물론 이것은 예상 밖의 새로운 발견은 아니었다. 이들은 두뇌가 없어 종교를 믿는 자들이었으며 자신들이 시작한 이 엄청난 게임에서 두 세 수를 앞서서 생각할 능력이 없었다. 코르닐로프는 봉기의 날짜를 몇 주일 앞서 정해 놓았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예측하지 못했으며 제대로 계산한 것도 전혀 없었다. 봉기의 순수한 군사적 준비는 부적절하고 엉성하고 경박하게 진행되었다. 조직이나 지휘부 구성 등과 관련된 복잡한 변화는 봉기 전날에서야 서둘러 시도되었다. 혁명에 첫 타격을 가하기로 계획된 야만 사단은 병력이 전부 합쳐서 1,350명이었으나 소총 600 정, 창 1,000 자루, 기병도 500 자루 등이 부족했다.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기 5일 전에 코르닐로프는 야만 사단을 군단으로 개편하라고 명령했다. 어떤 전투 교과서라도 반대할 이 조치는 봉급이 많은 장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임이 명백했다. 마르티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부족한 무기들이 프스코프에서 보급될 것이라는 내용의 전보는 반란이 완전히 붕괴된 8월 31일이 되어서야 바그라치온에게 전달되었다." 또한 전쟁 총사령부는 막판이 되어서야 전선에서 교관들을 수도로 보냈다. 반란 병력을 지휘할 임무를 받아들인 장교들에게는 돈과 개인용 자동차가 흔쾌히 제공되었다. 그러나 애국 영웅들은 조국을 구하는데 크게 서두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틀 후에 총사령부와 수도 사이의 철도 노선이 두절되었다. 또한 영웅들 대다수는 병력을 지휘하기로 한 장소에 도착하지도 않았다.

한편 수도에는 약 2,000 명의 코르닐로프 동조 조직이 있었다. 여기서 반란 음모자들은 맡은 특별 임무에 따라 나뉘어졌다. 장갑차 탈취, 소비에트 지도자 체포 및 살해, 중요 공공기관 점거 등이 특별한 임무에 속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군사적 의무 동맹 회장인 빈버그는 이렇게 말한다: "크리모프의 병력이 도착할 때쯤에는 혁명 주력 부대는 이미 분쇄되어 무력화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크리모프의 임무는 수도의 치안을 회복시키는 것뿐이 될 것 같았다." 물론 모길레프의 전쟁 총사령부는 이 계획이 허풍이 좀 심하다고 생각했으며 크리모프가 거의 모든 임무를 도맡을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총사령부는 공화파 거점 지역에서 보내온 부대가 크게 도움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수도의 음모자들은 단 한 순간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찍소리를 내거나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마치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빈버그는 이 신비스러운 현상을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다. 국가정보국 국장 하이만 대령은 결정적인 순간에 수도 바깥의 술집에 있었던 것 같다. 또한 코르닐로프의 직접 명령을 받으며 수도의 모든 애국주의 단체들의 활동을 지도할 시도린 대령과 국방부의 책임자 두세메띠에르 대령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행방이 묘연했다." 카자흐 기병 대령 두토프는 볼세비키로 "위장하여" 행동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반란 붕괴 직후 이렇게 불평했다: "나는 거리로 뛰어 나와...사람들에게 거리로 나오라고 외쳤으나 따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빈버그의 말에 따르면 반란 조직을 위해 조성된 자금은 반란 주동자들이 유용하여 저녁 식사 파티 비용으로 낭비되었다. 데니킨의 주장에 의하면 시도린 대령은 "핀란드로 도망하면서 10만 또는 15만 루블에 해당되는 남아 있던 반란 자금 전부를 챙겨서 달아났다." 동궁에서 체포되었던 르보프는 반란 직후 이렇게 말했다: 일부 장교들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건네주기로 한 비밀 자금 기부자 한 명이 약속된 장소에 나타났으나 반란자들이 만취하여 돈을 건넬 수가 없었다. 빈버그 자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진짜 한심스러운 이 "사고들"이 아니었다면 반란 계획은 완전히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이 애국주의 반란은 왜 주정꾼, 낭비벽이 심한 자, 배신자로 들끓었는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는 모든 임무는 이 임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 중핵들을 동원시키기 때문이 아닐까?

인적 구성으로 보면 반란 음모는 가장 우두머리부터 형편없었다. 입헌민주당 우파에 속한 이즈고예프에 따르면, "코르닐로프 장군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장군이었다. 그러나 병사들 사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최소한 내가 관찰할 기회가 있었던 후방의 군인들에게는 인기가 없었다." 그가 얘기하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네프스키 가도 인근에서 사는 부유층을 의미했다. 전후방을 막론하고 코르닐로프는 대중에게 이질적이며 적대적이며 증오스러운 인물이었다.

제 3 기병 군단의 지휘관은 크라스노프였다. 그는 왕당파였으며 혁명 직후 독일의 황제 빌헬름 2세의 하수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다: "코르닐로프는 대단한 일을 구상했지만 정작 자신은 성공에 대한 신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모길레프의 궁전에서 터키인들과 돌격대에 둘러싸여 지냈다." 결정적인 순간에 수도에 있지 않은 이유를 묻는 프랑스 기자 끌로드 아네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몸에 병이 있었다. 중증 말라리아에 걸려 평소의 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와 같은 불행한 사고들은 너무 많았다. 미리 실패가 정해진 일이 늘 이렇다. 반란 음모자들의 정서는 어려움이 없을 때에는 술에 취한 것처럼 절정으로 치달았다가 진짜 장애물이 처음 나타나면 완전히 기가 죽는 사이를 왔다갔다했다. 코르닐로프의 말라리아가 아니라 훨씬 깊고 더 치명적이어서 치료할 수 없는 그래서 결국 유산계급들의 의지를 마비시키는 질병, 이것이 문제였다.

입헌민주당은 코르닐로프가 로마노프 왕조를 부활시키는 반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진지하게 부인해왔다. 마치 구 왕조의 부활이 문제의 핵심인 것처럼 이들은 말한다! 코르닐로프는 "공화주의"를 신봉했지만 여전히 왕당파 루콤스키와 죽이 잘 맞았다. 그리고 그의 "공화주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인민연합 즉 흑백인조의 회장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반란 당일에 그에게 전보를 보냈다: "러시아를 구하는 귀하의 큰 일을 신께서 도와주도록 진심으로 기도합니다. 저는 전적으로 귀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짜르를 신봉하는 흑백인조 깡패들은 공화국 깃발과 같은 값싼 물건 때문에 자신들의 일을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이들은 코르닐로프의 강령이 그 자신과 그의 과거와 그의 바지에 그려진 카자흐 줄무늬, 그의 재정적 연줄과 출처 그리고 무엇보다도 혁명의 목을 자르려는 그의 무한한 용의에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선언문들을 통해 코르닐로프는 자기를 "농민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반란 계획은 전적으로 카자흐 기병과 야만 사단에 기초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할 병력 가운데 보병 부대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 장군은 농민과 접촉할 창구가 없었으며 이것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쟁 총사령부에는 농업 개혁가로 자처하는 "교수" 나부랭이가 물론 있었다. 그는 모든 병사들에게 환상적인 수치의 토지를 약속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주제에 대한 선언문은 하나도 발표되지 않았다. 총사령부의 장군들은 지주를 겁주고 도망치게 만들지 모른다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두려움 때문에 농업에 대한 참주선동을 삼갔다.

이 당시 총사령부의 참모부 주위에서 긴밀하게 상황을 관찰했던 모길레프의 농민 타데우쉬는 이렇게 증언한다: 병사들과 농민들 가운데 코르닐로프의 선언문을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이들은 말했다: "그는 권력을 탐할 뿐 전쟁을 끝내는 것과 토지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해 대중은 2월 혁명 후 6개월 동안 어떻게든 자기 길을 찾아냈다. 코르닐로프는 인민에게 전쟁을 계속 수행할 것 그리고 장군들의 특권과 지주들의 재산을 방어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대중에게 더 이상 줄 것이 없었으며 이들은 그로부터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반란 음모자들은 노동자는 물론 농민 보병에게도 전혀 기대할 수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일당이 사회에서 배제되고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렇게 표현되었다.

총사령부에 상주한 외교관 트루베츠코이 공은 정치적 세력 관계를 면밀히 추적했다. 그러나 그의 판단은 많은 경우 옳았으나 한 가지에서는 틀렸다. 그는 인민이 "가장 약한 채찍질에도 굴복한다"는 식으로 억압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런 경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반대로 대중은 대단한 깊이의 활력과 자기희생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 채찍질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대중의 정서를 이렇게 오판했기 때문에 반란 주동자들의 모든 계산들은 전부 어긋나 버렸다.

반란 음모자들은 하층민, 노동자, 전투의 희생자, 당번 병, 하인, 서기, 운전사, 전령, 요리사, 여자 세탁부, 신호수, 전신 기사, 마부, 택시 운전사 등이 없이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것에 익숙한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반란을 음모했으니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눈에 뜨이지 않지만 수없이 많은 꼭 필요한 인간들이 사회생활의 작은 볼트와 연줄들을 구성했다. 그런데 이들은 전부 소비에트를 지지했으며 코르닐로프를 반대하고 있었다. 혁명은 모든 곳에 존재하면서 침투하여 음모자들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혁명은 모든 곳에 자신의 눈, 귀, 손을 가지고 있었다.

군사 교육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졌다면 병사는 장교들이 보든 보지 않든 똑같이 행동해야한다. 그러나 1917년의 러시아 병사들과 수병들은 지휘관 앞에서도 공식 명령을 거부했다. 이 대신 혁명의 명령은 다른 일을 하다가도 즉시 따랐다. 또한 명령이 있기 전에 자발성을 발휘하여 명령의 내용을 수행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수없이 존재하는 혁명의 하인, 대리인, 정보원, 투사 등은 자극이나 감독이 없이도 자기 일을 성실히 수행했다.

공식적으로 반란 음모를 분쇄하는 임무는 정부에게 있었고 집행위원회는 이에 협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 임무는 전혀 다른 채널들을 통해 수행되고 있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책임의 무게에 짓눌려 케렌스키가 혼자 동궁의 층수를 세고있을 때 군사혁명위원회로 불리기도 한 혁명방어위원회는 엄청난 규모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침 일찍 전보를 통해 철도 노동자, 우편 전신 노동자, 병사들에게 지시사항이 하달되었다. 같은 날 멘세비키 단은 소비에트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군대의 모든 움직임은 혁명방어위원회가 공동 서명한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 이런 저런 유보조항들을 제외한다면 이것은 혁명방어위원회가 임시정부의 확고한 이름 하에 병력을 배치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이와 동시에 수도 내에 존재하는 코르닐로프 지지조직들의 소굴을 소탕하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군사 학교들과 장교 조직들에 대해 수색과 체포가 진행되었다. 혁명방어위원회의 손길은 모든 곳에서 느껴졌다. 수도의 주지사는 인민의 관심을 전혀 또는 거의 받지 못했다.

한편 소비에트 하급 조직들도 상부 조직의 지시를 기다리지 않았다. 주요한 노력은 노동자 지구들에 집중되었다. 정부가 크게 동요하고 집행위원회와 케렌스키가 지루하게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동안 지구 소비에트들은 더욱 밀접히 단합하면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결의문들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지구간 회의들은 계속된다; 집행위원회 실무진에 대표를 보낸다; 노동자 민병대를 수립한다; 정부위원을 지구 소비에트가 통제한다; 반혁명 선동가들을 구금하기 위해 기동대를 조직한다. 전체적으로 이 결의문들은 상당한 정도 정부의 기능 뿐 아니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기능마저 지구 소비에트가 대신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상황의 논리에 의해 소비에트 기구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축소시키고 하급 조직들에게 활동공간을 열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지구 소비에트들이 투쟁 영역으로 진입함에 따라 수도 소비에트의 범위와 방향은 즉시 변화했다. 다시 한번 소비에트 조직 형태의 무한한 생명력이 드러났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에 의해 상부 조직이 마비되었으나 소비에트들은 대중의 압력에 의해 결정적 순간에 아래로부터 다시 태어났다.

지구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에게 코르닐로프 반란은 예상 밖의 일이 전혀 아니었다. 이들은 미리 예상하고 있었으며 경계심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투쟁 현장에 제일 먼저 나타났다. 8월 27일 합동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소콜니코프는 이렇게 발표했다: 인민에게 위험을 알리고 방어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볼세비키당은 필요한 모든 조치를 이미 취해 놓았다; 볼세비키들은 군사적 작업을 집행위원회 기구들과 공조할 의향을 선언했다. 볼세비키당 군사조직의 밤 회의에는 각급 부대의 대의원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반란 음모자 전원의 체포, 노동자 무장, 이들에게 교관의 제공, 대중의 주도에 의한 확실한 수도 방어, 노동자 병사 혁명 정부 수립의 준비 등이 결정되었다. 주둔군의 전체 조직들도 회의를 열었다. 첫 신호와 함께 출동할 수 있도록 병사들의 무장이 촉구되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소비에트 소수파였으나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력을 장악하고 있음이 아주 명백했다." 그는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진지하게 행동하기를 원한다면 혁명적 방식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혁명적 행동을 위해서는 "볼세비키들만이 진짜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대중이 이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투쟁이 가열될 경우 언제나 모든 곳에서 좀더 적극적이며 대담한 분자들이 등장했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혁명 분자들이 선정되면서 볼세비키들의 지위는 높아지고 이들의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또한 이들은 주도력을 장악하여 자신이 소수파인 조직에서도 실제적인 지도력을 행사했다. 지구, 공장, 병영으로 가까이 갈수록 볼세비키들의 지도력은 더욱 완벽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당의 중핵들은 모두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대공장에서 볼세비키들은 보초 체계를 조직했다. 당의 지구위원회에서는 소규모 공장의 대표들이 근무를 섰다. 공장에서 지구를 거쳐 당중앙위원회까지 조직이 연결되었다.

볼세비키들 그리고 이들이 주도하는 조직들의 직접적 압력을 받아 혁명방어위원회는 노동자 지구, 공장, 작업장 등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 조직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했다. 대중에게 필요한 것은 이 위원회의 승인뿐이었다. 노동자들이 발간한 신문에 의하면 "적위대에 즉시 참여하려는 열성적인 노동자들이 줄을 이었다." 사격과 무기 사용법에 대한 훈련이 시작되었다. 경험 있는 병사들이 교관으로 참여했다. 29일이 되면 거의 모든 지구에서 적위대가 수립되었다. 4만 정의 소총을 소지한 병력을 전투에 투입할 준비가 되었다고 적위대는 선언했다. 무장을 하지 않은 노동자들은 참호를 파고 판금으로 요새를 구축하고 철조망을 설치하기 위해 작업 중대로 조직되었다. 케렌스키는 공모자 사빈코프와 3일 이상 얼굴을 맞대고 있을 수 없었다. 그를 대체한 신임 수도 주지사 팔친스키는 특별 성명을 통해 이렇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공병대 작업이 필요하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개인적 노동으로 몇 시간 동안 거대한 임무를 달성했다. 이들이 없었다면 이 일은 며칠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전임 사빈코프의 모범을 따라 신임 팔친스키는 노동자들이 자기들의 신문으로 유일하게 간주하는 볼세비키당 신문을 억압했다.

거대한 푸틸로프 공장은 표트르호프 지구의 저항 중심이 되었다. 이 공장에서 전투 중대들이 서둘러 조직되었다. 공장의 일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었다. 노동자 포병 사단을 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대포가 분류되었다. 노동자 미니초프가 이렇게 말한다: "당시 우리는 하루에 16시간 일했다...우리는 약 100 문의 대포를 만들었다."

새로 수립된 빅첼(역자 주: 철도노동조합 전국집행위원회. 화해주의자들이 조직을 장악했다.)은 즉시 전쟁의 세례를 받았다. 철도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의 승리를 두려워할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그가 철도에 대한 계엄령을 강령에 포함시켰기 때문이었다. 여기에서도 하부가 상부를 앞질렀다. 철도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 군대를 저지하기 위해 철로를 끊고 바리케이드를 쳤다. 전쟁 경험이 유익하게 활용되었다. 또한 반란 음모의 중심인 모길레프를 고립시키기 위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때문에 전쟁 총사령부로 들어가고 나가는 물류가 중단되었다. 체신 노동자들은 전쟁 총사령부의 전보와 명령문 또는 그 복사본을 혁명방어위원회에 보내기 시작했다. 전쟁 몇 년 동안 장군들은 수송과 통신을 기술적 문제로 생각하는데 익숙해 있었다. 이들은 이제 이것들이 정치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정치적 중립과는 거리가 먼 노동조합들은 특별 지시를 받기도 전에 군사 진지들을 점령했다. 철도 노동조합은 조합원들을 무장시키고 철길 감시, 철로 해체, 교량 보호 등의 임무를 위해 이들을 파견했다. 열성과 결의에 찬 노동자들은 좀더 관료화되고 온건한 빅첼보다 앞서 행동했다. 금속 노동조합은 수많은 사무 직원들을 혁명방어위원회에 보내 일을 시켰다. 또한 거액의 돈을 비용 기금으로 내놓았다. 운전사 노동조합은 이 위원회에게 기술 및 수송 시설들을 제공했다. 인쇄 노동조합은 인민의 정세 인식을 위해 몇 시간만에 월요일 신문이 나오도록 조치했으며 동시에 반동 신문을 통제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들을 동원했다. 코르닐로프는 발로 땅을 굴렀다. 그러자 땅 속에서 군단들이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       

서로 이웃한 주둔군의 병영, 거대 철도역, 함대 등 뻬쩨르부르그 전역에서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작업이 진행되었다. 혁명 인민은 자기편 인적 자원을 파악하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철로 순찰대를 내보내고 이웃한 지점들과 스몰니 학원 등에 통신을 유지하면서 바삐 움직였다. 혁명방어위원회의 임무는 노동자들의 감시와 소환이 아니라 이들을 등록시키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이 위원회의 계획은 언제나 미리 준비되었다. 반동 장군들의 반란에 대해 수도를 방어하는 임무가 대중에 의한 반란 음모자 체포 임무로 변했다.

헬싱키에서는 전국 소비에트 조직들이 총회를 열어 혁명위원회를 수립했다. 이 위원회는 주지사, 사령관, 국가정보국 그리고 기타 기관들에 대표를 보냈다.

이때부터 혁명위원회의 서명이 없이는 어떤 명령도 효력이 없었다. 전신과 전화는 통제되었다. 헬싱키 카자흐 기병 연대의 공식 대표들은 주로 장교들이었는데 이들은 중립을 선언하려고 했다. 이들은 은밀한 코르닐로프 지지자들이었다. 두 번째 날이 되자 카자흐 병사들이 위원회에 출두하여 연대 전체가 코르닐로프를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카자흐 기병의 대표들이 처음으로 소비에트 회의에 참여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번에도 격심한 계급 갈등은 장교들을 우로 병사들을 좌로 몰고 갔다.

7월의 타격에서 완전히 회복된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전신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집행위원회가 지시하는 순간 크론슈타트 주둔군은 단 한 명까지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갈 것이다." 당시 이들은 혁명에 대한 방어가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의 몰살에 대한 방어가 되는 지를 알지 못했다. 이때까지 이들은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7월 시기에 혁명 세력이 패배한 직후 임시정부는 볼세비키의 소굴인 크론슈타트 성채의 병력을 전부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코르닐로프와 합의한 이 조치는 공식적으로는 "전략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설명되었다. 지저분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수병들은 이 조치에 저항했다. 코르닐로프의 배신행위를 비난 한 직후 케렌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전쟁 총사령부가 배신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전설은 크론슈타트에 너무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이 때문에 성채로부터 포대를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군중의 격렬한 저항을 초래했다." 크론슈타트를 해체하는 방안은 정부에 의해 코르닐로프의 몫으로 넘겨졌다. 그는 한 가지 방식을 생각해냈다: 이 도시를 점령하자마자 크리모프는 포를 갖춘 여단을 오라니엔바움에 파견한다; 해안에서 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한 후 크론슈타트 주둔군이 성채의 무장을 해제하고 육지로 나오라고 요구한다. 육지로 나온 수병들은 대대적으로 처형될 것이었다. 그러나 크리모프가 정부를 구출하는 임무를 시작하고 있을 때 정부는 크론슈타트 주둔군에게 크리모프로부터 정부를 보호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집행위원회는 크론슈타트와 비보르그에 전화통지문을 보내 상당한 병력을 수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29일 아침이 되자 군대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볼세비키가 장악한 부대들이었다. 집행위원회의 부대 호출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의 승인이 있어야했다. 이보다 약간 일찍 28일 정오에 겸손한 요청처럼 들린 케렌스키의 명령에 따라 오로라 순양함의 수병들은 동궁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일부는 7월 시위에 참여한 죄로 여전히 크레스티 감옥에 있었다. 근무가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수병들이 감옥에 갇힌 크론슈타트 수병들, 트로츠키, 라스콜니코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을 면회했다. 방문한 수병들이 물었다: "정부 장관들을 체포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부정적인 답변이 나왔다: "아니다. 아직도 때가 되지 않았다. 케렌스키를 총 받침대로 이용하여 코르닐로프를 저격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케렌스키를 정리하면 된다." 6월과 7월에 이 수병들은 혁명 전략에 대해서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두 달의 짧은 시간 동안 이들은 많은 것을 배웠다. 자신들을 실험하고 의식을 가다듬기 위해 이렇게 질문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사건들이 필연적으로 진행하는 방향을 스스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7월 전반부에 이들은 두드려 맞고 비난과 비방을 당했으며 8월말에는 코르닐로프 병력에 대항해 동궁을 방어하는 믿음직한 투사가 되었다. 그리고 10월말에는 오로라 순양함에서 동궁을 포격할 것이다.

수병들은 2월 정권과 결산할 시간을 당분간 연기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자기들 위에 군림하는 코르닐로프 장교들을 쓸데없이 단 하루라도 그대로 둘 생각이 없었다. 7월 시기 이후 정부가 이들에게 강요한 부대 지휘부는 거의 확고하게 코르닐로프 편이었다. 크론슈타트 소비에트는 정부가 임명했던 지휘관을 즉시 제거하고 자신이 원하는 자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제 화해주의자들은 크론슈타트 공화국이 분리 독립한다고 비난의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장교들의 직위를 해제하는 것으로 모든 곳에서 일이 끝나지는 않았다. 여러 곳에서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수하노프는 말한다: "분노에 차고 공포에 질린 비보르그의 수병-병사 군중이 장군들과 장교들을 패 죽이면서 유혈사태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군중은 분노에 차있지도 않았으며 공포에 질렸다고 말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29일 아침 쎈트로플롯(Centroflot)은 비보르그 지구 사령관 오라노프스키 장군에게 전보를 보내 전쟁 총사령부의 반란 소식을 병사들에게 전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사령관은 전보 내용을 하루 동안 알리지 않았으며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달받은 내용이 없다고 말했다. 수병들이 주도한 수색 과정에서 전보가 발견되었다. 은폐 행위가 탄로 나자 사령관은 코르닐로프를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수병들은 역시 코르닐로프를 지지한다고 선언한 다른 두 명의 장교와 그를 모두 총살시켰다. 수병들은 발트 함대의 장교들로부터 혁명에 충성한다는 내용의 서약서를 요구했다. 한편 전투용 범선 표트로파블로프스키의 장교 4명이 서명을 거부하고 코르닐로프 지지를 선언했다. 수병들의 결의로 이들은 즉각 총살당했다.

병사들과 수병들에게 죽음의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와 크론슈타트 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주둔군들에게도 유혈 충돌이 임박하고 있었다. 갑자가 대담해진 장교들의 목소리와 곁눈질을 통해 병사와 수병들은 전쟁 총사령부의 반란이 성공할 경우 자신들에게 가해질 운명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분위기가 특히 험악한 곳에서 이들은 적의 진로를 서둘러 차단하고 장교들의 유혈 보복을 미리 방지했다. 내전은 나름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인도주의 법칙과는 다르다고 널리 인정되어왔다.

체이제는 즉시 비보르그와 헬싱키에 전보를 보내 린치 법을 "혁명에 대한 치명타"라고 비난했다. 케렌스키는 헬싱키로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혐오스러운 폭력 행위를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혁명은 법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이 점을 잊지 않는다면 개별적인 린치 법에 대한 정치적 책임은 전적으로 정부와 화해주의자들에게 있다. 이들은 위험한 순간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혁명 대중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나중에 이들을 다시 반혁명 장교들에게 넘기려고 했다.

모스크바에서 국정협의회가 열리는 동안 케렌스키는 곧 봉기가 일어날 것을 예상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전쟁 총사령부와 결별한 후에도 그는 "병사들이 혁명을 방어하도록 설득해 달라"고 볼세비키당에 요청했다. 그러나 동궁 방어를 볼세비키 수병들에게 요청하면서도 그는 이들의 동지인 7월 시위 구속자들을 풀어주지 않았다. 이 문제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알렉세이예프가 케렌스키 그리고 감옥에 있는 트로츠키에게 속삭이는 상황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죄수로 꽉 찬 감옥을 휩쓴 흥분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해군 사관생도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임시정부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이렇게 위험한 상황에서 트로츠키와 같은 혁명가들을 크레스티 감옥에서 계속 썩게 만들다니....우리가 운동 시간에 산책을 하면서 감옥 내를 돌고 있을 때 트로츠키는 말했다: '저들은 정말 겁쟁이들이다. 즉시 코르닐로프를 죄인으로 선언하여 코르닐로프를 죽일 권리가 있다고 혁명 병사들 전부가 느끼게 해야한다.'"

코르닐로프의 군대가 뻬쩨르부르그를 함락시킬 경우 체포된 볼세비키들은 전부 처형되었을 것이다. 선발부대를 이끌고 수도로 입성할 바그라치온 장군에게 크리모프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감옥과 구치소에 보초를 세워 지금 체포된 자들이 어떤 경우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것은 4월 시기부터 밀류코프가 사주한 강령과 일치했다: "어떤 경우에도 도망가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 당시 수도의 모든 집회나 회의는 7월 투쟁 구속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대표단들이 연이어 집행위원회를 찾아갔으며 집행위원회는 지도자들을 동궁에 보내 이 문제를 협상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한 케렌스키의 확고함은 대단히 놀랍다. 반란이 일어난 지 하루 반이나 이틀 동안 그는 정부가 소생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반란 장군들이 교수형에 처할 볼세비키들을 감시하는 간수의 역할로 자신을 한정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아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대중이 한 순간도 케렌스키를 신뢰하지 않은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정부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투쟁은 그만큼 더 결연하고 헌신적이었다. 반란군에 대한 저항은 도로, 돌, 공기로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 크리모프가 도착한 루가 역의 철도 노동자들은 기관차가 없다면서 반란군을 실은 기차를 이동시키기를 한사코 거부했다. 카자흐 기병대 대오도 2만 명이나 되는 루가 주둔군에 의해 즉시 포위되었다. 군사적 충돌은 없었으나 반란군에 대한 혁명 방어군의 접촉, 교제, 침투라는 훨씬 더 위험한 일이 벌어졌다. 루가 소비에트는 정부의 코르닐로프 해임 발표문을 인쇄하여 반란군 사이에 널리 배포시켰다. 장교들은 카자흐 병사들에게 선동가들의 말을 믿지 말라고 설득하려했다. 그러나 설득을 해야하는 상황 자체가 나쁜 징조였다.

코르닐로프의 진군 명령을 받아 크리모프는 총검으로 위협하며 30분내에 기관차를 준비시키라고 지시했다. 이 위협은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약간 시간이 지체되기는 했으나 기관차가 제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기차를 이동시킬 수 없었다. 철도가 손상을 입었을 뿐 아니라 차량들로 너무 혼잡하여 이것들을 전부 치우는데 24시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반란군의 사기를 죽이는 선전으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크리모프는 28일 저녁에 군대를 루가에서 몇 킬로미터 이동시켰다. 그러나 선동가들이 즉시 마을에 나타났다. 병사, 노동자, 철도 인부 등이 선동가였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었다. 이들은 모든 곳을 헤집고 다녔다. 심지어는 카자흐 기병들도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여 선전 공세에 시달린 채 자신의 무능을 저주하면서 크리모프는 헛되이 바그라치온을 기다렸다. 철도 노동자들은 야만 사단의 진군을 정지시키고 있었는데 이 사단 역시 대단히 놀라운 도덕적 공격을 곧 받게 될 것이다.

화해주의자들의 민주주의 진영은 정말 줏대가 없고 겁이 많았다. 그러나 자신들이 다시 부분적으로 의존한 대중의 역량은 이들 앞에 무한한 행동의 원천을 제공했다. 공개적인 투쟁을 통해 코르닐로프 반란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생각했다. 이것은 올바른 사고였다. "화해주의"의 이 노선에 대해 볼세비키당이 반대하지 않은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화해주의의 기본이기 때문이었다. 볼세비키당의 요구는 단순했다: 선동가들과 의회 의원들 뒤에서 무장 노동자들과 병사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코르닐로프 연대들에 대한 이 도덕적 행동 방식은 무한한 수단과 방법들을 갑자기 발견했다. 이렇게 해서 회교도 대표단이 야만 사단을 만나도록 보내졌다. 이들은 즉시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이들 가운데에는 짜르에 대항하여 코커서스 지방을 영웅적으로 방어한 그 유명한 샤밀의 손자와 토착 군주들도 있었다. 야만 사단의 병사들은 장교들이 대표단을 체포하는 것을 허용하려하지 않았다. 이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손님 환대의 관습에 위배되기 때문이었다. 협상이 시작되어 곧 협상의 끝을 향한 출발을 알렸다. 반란을 설명하기 위해서 코르닐로프의 지휘관들은 뻬쩨르부르그에서 시작되었을 독일 첩자들의 반란에 대해 계속 얘기했다. 수도에서 바로 도착한 대표들은 반란의 사실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손에 들은 문서들을 보이면서 크리모프야말로 반란자이며 정부에 대항하여 군대를 일으켰음을 증명했다. 코르닐로프의 장교들은 여기에 대해 무슨 답변을 할 수 있었겠는가?

야만 사단의 참모부 차량에 병사들은 "토지와 자유"라는 글이 새겨진 붉은 깃발을 꽂았다. 그러자 참모장이 깃발을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중령 계급을 단 그가 정중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철도 신호 깃발과 혼동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참모부의 병사들은 이 비겁한 설명에 만족하지 않고 그를 체포했다. 코커서스의 야만 사단은 누구를 살육하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전쟁 총사령부의 말은 확실히 오류였다.

다음날 아침 코르닐로프가 보낸 대령 한 명이 크리모프의 지휘부에 도착했다. 군단을 집결시키고 즉시 수도로 진군하여 "기습적으로" 수도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그는 전달했다. 전쟁 총사령부는 현실에 눈을 감으려고 아직도 애쓰는 것이 명백했다. 이 명령에 대해 크리모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군단에 속한 부대들이 철길을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으며 일부에서는 부대들이 기차에서 내리고 있다; 현재 수하에는 카자흐 기병 8개 대대 밖에 없다; 철도는 파괴되고 과부하가 걸렸으며 바리케이드가 쳐 있기 때문에 걸어서만 진군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수도를 기습 점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수도와 외곽지역에 무장 노동자와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크리모프 자신의 군대조차 "기습적으로" 작전을 펼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이 때문에 사태는 더욱 꼬이고 있었다. 뭔가 불길할 징조를 눈치채고 이들은 설명을 요구했다. 이들에게 코르닐로프와 케렌스키 사이의 갈등을 알리기 위해 병사 집회를 공식 일정에 올리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순간에 크리모프는 명령을 통해 이렇게 전했다: "오늘 저녁 수도에서 반란이 시작되었다는 정보를 총사령부와 수도로부터 받았다...." 이 속임수는 이미 대단히 공개적으로 드러난 정부 타도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29일 코르닐로프 자신은 명령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네덜란드 정보국의 보고는 다음과 같다: (가) 며칠 후 전선 전체에 대한 동시 다발적인 공격이 시작되어 붕괴되고 있는 러시아군을 패퇴시키려한다; (나) 봉기가 핀란드에서 준비되고 있다; (다) 드네프르강과 볼가강의 교량들이 폭파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라) 볼세비키당의 봉기가 수도에서 조직되고 있다." 이것은 사빈코프가 이미 23일에 언급한 바 있던 그 "정보"였다.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기 위해 네덜란드가 언급되었다. 모든 증거에 의하면 이 문서는 러시아 주재 프랑스 전쟁대표부에서 작성되었거나 대표부의 참여로 작성되었다.         

같은 날 케렌스키는 크리모프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수도는 완전히 평온하다. 시위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귀관의 군단은 수도로 진입할 필요가 없다." 시위는 케렌스키 자신의 군사 포고령에 의해 촉발될 예정이었다. 정부의 이러한 도발을 연기시키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케렌스키가 "시위는 하나도 일어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행동은 전적으로 정당했다.

탈출구가 없음을 눈치챈 크리모프는 수하의 8개 카자흐 기병 대대를 이끌고 수도로 접근하려는 애매한 시도를 했다. 이것은 자신의 양심을 깨끗이 하려는 몸짓에 불과했다. 물론 이 행위로부터 나온 이렇다할 성과는 하나도 없었다. 루가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순찰 중인 혁명군 병력을 만나자 크리모프는 전투 시도조차 못하고 군대를 되돌렸다. 제 3 기병군단의 지휘관 크라스노프는 이 완전히 허구적인 "작전"에 대해 나중에 이렇게 적었다: "86개 기병 및 카자흐 대대로 수도를 타격 해야했다. 그런데 우리는 일개 여단과 8개의 허약한 대대로 타격을 가했는데 이 부대들 가운데 반은 장교가 없었다. 주먹 대신 손가락으로 타격을 가한 셈이었다. 결국 손가락만 아플 뿐 상대방은 타격을 느끼지도 못했다." 사실은 손가락으로도 타격이 가해지지 않았다. 아무도 타격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당시 철도 노동자들은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반란 부대들은 예정과는 다른 도로로 진군하고 있는 자신들을 발견했다. 연대는 다른 사단을 찾았고 포대는 막다른 골목으로 보내졌으며 참모부는 소속 부대와 통신이 되지 않았다. 규모가 큰 철도역에는 모두 소비에트와 노동자 및 군사 위원회가 있었다. 전신 노동자들은 이 조직들에게 모든 사건, 모든 부대의 움직임, 모든 변화들을 전달했다. 또한 이들은 코르닐로프의 전보 명령을 전달하지 않았다. 반란군에게 불리한 정보는 즉시 확대되어 배포되고 벽보로 붙었으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기계공, 신호수, 연료 관리인 등은 선동가가 되었다. 코르닐로프의 부대들이 진군하거나 정지한 것은 바로 이 환경 속에서였다. 상황이 가망이 없음을 곧 눈치챈 지휘부는 진군을 당연히 서두르지 않았다. 이 수동성은 수송체계를 반란군에게 불리하게 만드는 혁명 노동자들을 도왔다. 이렇게 해서 크리모프가 이끄는 군대의 일부는 8개 철도의 역, 측선, 지선 등에 뿔뿔이 흩어졌다. 반란군의 운명을 지도로 추적하면 이들이 철도에서 봉사 술래잡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것이다.       

8월 30일 밤의 관찰에 기초하여 크라스노프 장군은 이렇게 적고 있다: "거의 모든 곳에서 상황은 한결 같았다. 철도 위에서나 차량 안에서나 말의 안장 위에서나 무장한 기병들은 앉아있거나 서있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에는 병사의 긴 외투를 걸친 활달한 인물들이 일부 있었다." 이 "활달한 인물들"이 곧 다수가 되었다. 반란군과 맞서기 위해 보낸 연대들에서 수많은 대표단들이 수도에서 도착했다. 전투를 하기 전에 이들은 먼저 대화를 나누고 싶어했다. 혁명군은 전투 없이 사태가 해결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희망했다. 이 희망은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카자흐 기병들이 즉시 이들을 만나러 나왔다. 군단의 통신 분대는 기관차를 탈취하여 대표단을 모든 철도로 보냈다. 상황은 모든 부대에게 설명되었다. 집회들은 계속되었고 여기 저기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우리는 속았다!"

크라스노프는 말한다: "사단장들 뿐 아니라 연대장들도 자기들 대대와 중대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 지를 몰랐다. 식량과 꼴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모두들 더욱 짜증을 냈다. 주위의 무의미한 모든 혼란을 본 병사들은...자기 부대장과 장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독자 본부를 차린 소비에트 대표단은 이렇게 보고했다: "병사들 사이의 우애행위가 급속히 번지고 있다....군사적 충돌 상황은 종료된 것으로 완전히 자신한다. 모든 쪽에서 대표단들이 오고 있다...." 부대를 지휘하는 일은 장교의 손에서 위원회의 손으로 넘어갔다. 군단 대표 소비에트가 곧 수립되어 40명의 병사로 구성된 대표단이 임명되어 임시정부를 만나기로 예정되었다. 카자흐 기병 병사들은 큰 소리로 이렇게 선언하기 시작했다: 크리모프와 장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이 수도에서 도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30일에 스탄케비치는 보이틴스키와 함께 프스코프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도중에 관찰한 바를 전하고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짜르스코에가 반란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것이라고 수도에서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치나에도 아무도 없었다....루가로 가는 길에도 아무도 없었다. 루가는 조용하고 평안했다....군단 참모부가 있을 마을에 도착했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아침 일찍 카자흐 기병들이 진지를 버리고 수도의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았다." 반란은 역전되었고 분쇄되었으며 땅으로 꺼져버렸다.

그러나 동궁은 여전히 반란군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케렌스키는 반란군 지휘부와 대화를 시도했다. 그에게는 이 방향이 하층민의 "무정부주의적" 주도성보다는 더 희망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는 대표들을 크리모프에게 보내 "구국의 이름으로" 그를 수도로 초대하였으며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의 안전을 보장했다. 사방에서 압박을 받고 완전히 이성을 상실한 크리모프는 물론 이 초대에 서둘러 응했다. 바로 그의 뒤에는 카자흐 기병의 대표단이 따라 붙었다.

전선은 전쟁 총사령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남서 전선만이 어느 정도 진지하게 지지를 시도했다. 데니킨의 참모부는 때를 늦추지 않고 예비조치들을 취했다. 믿을 수 없는 위병들은 카자흐 기병으로 대체되었다. 27일 밤 인쇄기들이 접수되었다. 참모부는 자신감 있는 상황의 주인으로 처신하려고 했으며 심지어는 전선의 병사 위원회가 전신을 이용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환상은 몇 시간을 넘기지 못했다. 여러 부대의 대표단이 병사 위원회를 방문하여 지지 의사를 표명하기 시작했다. 장갑차, 기관총, 야전 포대 등이 등장했다. 병사위원회는 즉시 참모부의 활동을 통제했으며 참모부가 적군에 대해 작전을 할 경우에만 주도력을 인정했다. 28일 3시가 되면 남서 전선은 전적으로 병사위원회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데니킨은 질질 눈물을 짜면서 말했다: "이때처럼 나라의 미래가 그렇게 어둡고 우리의 무기력이 그렇게 슬프고 모욕적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전선에서는 사태가 그리 극적이지 않았다: 전선의 사령관이 주위를 둘러보기만 해도 임시정부의 위원에게 우애의 감정이 급류를 이루어 다가가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29일 아침까지 루마니아 전선의 쉐르바초프, 서부 전선의 발루예프, 코커서스 전선의 프르제발스키 장군 등이 충성을 서약하는 전보를 동궁에 보냈다. 클렘보프스키 사령관이 공공연한 반란군 편이었던 북부 전선에는 스탄케비치가 사비츠키라는 자를 그의 부관으로 임명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군사적 충돌의 순간에 전보를 통해 부관으로 임명된 사비츠키는 보병, 카자흐, 당번 병, 심지어는 사관생도 등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호소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심지어 사령관을 체포하는 문제조차 명령이 떨어지면 곧 실행될 정도였다." 클렘보프스키는 별 어려움이 없이 본초-브뤼비치에 의해 대체되었다. 후자는 잘 알려진 볼세비키 친형의 중재로 이후 볼세비키 정부에 참여한 최초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남부 전선의 기둥인 돈 카자흐 수장 칼레딘에게는 일이 좀더 잘 풀렸다. 수도에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칼레딘은 카자흐 군대를 동원하고 있으며 전선의 군대가 돈강에서 그와 합류하기 위해 행군 중이었다. 한편 그의 전기작가의 말에 의하면 그는 "철도에서 멀리 떨어진 마을에 말을 타고 다니면서....평화로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실제로 칼레딘은 혁명 진영에서 상상한 것보다는 좀더 조심스럽게 처신하고 있었다. 그는 사전에 그에게 알려진 공개적인 봉기의 순간을 택하여 "평화로운" 마을 순찰을 계획했다. 이 결정적인 날에 전보나 기타 통신수단이 그에게 접근하지 않도록 그리고 동시에 카자흐 병력의 정서를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27일 그는 부관인 보가예프스키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냈다: "모든 수단과 힘을 동원하여 코르닐로프를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과 그의 대화는 올바른 의미에서 그에게 수단이나 힘이 없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밀을 경작하는 카자흐들은 코르닐로프를 방어하기 위해 봉기를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반란의 붕괴가 명백해지자 소위 돈강 유역 카자흐의 "군대 집단(카자흐의 의회를 이렇게 불렀다)"은 "진짜 세력 역관계가 명확해질 때까지" 자신의 의견을 표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이 전술 덕분에 돈강 유역 카자흐의 수장들은 때를 맞추어 양 진영의 충돌에서 발을 뺄 수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돈강 유역, 전선 등 반란군의 대형이 지나가는 여기 저기 그리고 모든 곳에서 코르닐로프의 동조자, 파벌, 우호자 등이 있었다. 이들의 숫자는 전보, 환영 연설, 신문 기사 등으로 판단하면 엄청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겠지만 모습을 드러낼 때가 오자 이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대개의 경우 원인은 개개인의 비겁함이 아니었다. 코르닐로프의 장교들 가운데에는 용감한 인물들이 다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용감성은 적용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대중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고립된 개인들은 사건에 접근할 수 없었다. 무게가 있는 산업가, 은행가, 교수, 엔지니어 뿐 아니라 학생들 심지어 전투 장교들조차 밀려나고 한쪽으로 던져지고 팔꿈치로 밀쳐졌다. 이들은 마치 발코니 앞에서 전개되고 있는 사건들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신세였다. 데니킨 장군과 함께 이들은 자신들의 모욕적이고 끔찍한 무기력을 저주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

8월 30일 집행위원회는 모든 소비에트에 "코르닐로프 군대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다"는 기쁜 소식을 보냈다. 이들은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위해 가장 사기가 높으며 볼세비키들의 영향력으로부터 가장 잘 보호되어 가장 애국적인 성향이 강한 부대들을 선정했다는 사실을 잠시 잊어버렸다. 병사들이 장교들을 결정적으로 불신하고 이들을 적으로 인식한 결과 군대의 사기 저하가 초래되었다. 따라서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혁명을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군대의 사기 저하가 더욱 심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볼세비키들이 사기 저하의 주범이라고 비난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반란 장군들은 그리도 엉성하며 힘이 없어서 구체제에 대해서 우연히 승리한 것처럼 보였던 혁명의 저항력을 검증할 기회를 마침내 갖게 되었다. 2월 시기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군인의 허풍을 드러내는 화려한 표현이 반복되어왔다: "강력한 부대를 하나만 주면 놈들에게 본때를 보이겠다." 2월말 하발로프와 이바노프 장군의 경험은 이 허풍 센 군인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와 똑같은 곡조를 민간인 전략가들은 빈번히 읊었다. 10월당의 쉬들로프스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만약 2월에 수도에서 "크지는 않지만 규율과 전투적 기상으로 단결된 부대가 하나만 있었어도 2월 혁명은 며칠만에 진압되었을 것이다." 악명 높은 철도 재벌 부블리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전선에서 차출된 규율이 잡힌 1개 사단만 있었어도 봉기를 철저히 붕괴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사건들에 참여했던 여러 명의 장교들은 데니킨에게 확언했다: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 지를 아는 지휘관 밑에 확실한 대대 하나만 있었어도 전체 상황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구츠코프가 전쟁 장관으로 있을 때 크리모프 장군은 후방으로 그를 방문하여 이렇게 제안했다: "1개 사단으로 수도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피를 당연히 흘려야합니다." "구츠코프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이 제안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래에 통령이 될 인물을 위해 나름의 "8월 27일"을 준비하고 있던 사빈코프는 2개 연대만 있으면 볼세비키들을 가루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제 운명은 "인생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장군을 통해 이 작자들의 영웅적인 계산을 검증할 충분한 기회를 제공했다. 혁명군에게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못한 후 머리를 숙인 채 부끄러움과 모욕감에 젖은 크리모프는 동궁에 도착했다. 케렌스키는 그와 멜로드라마를 연출할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이 드라마에서 그의 특별 효과는 성공이 미리 예약되어 있었다. 수상을 만난 후 전쟁부 집무실로 돌아오는 도중 크리모프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렇게 해서 혁명을 진압하려는 그의 시도는 "피를 흘려야 했다."

동궁의 인물들은 엄청난 난관이 도사리고 있던 상황이 유리하게 끝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린 후 이제 좀더 편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중단되었던 평소의 업무에 가능한 빨리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케렌스키는 스스로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짜르의 장군들과 정치적 유대를 유지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그보다 더 나은 적임자는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에 그는 알렉세이예프를 선정했다. 그런데 그는 이틀 전만 하더라도 수상이 될 뻔했었다. 처음에는 주저하고 자기 친구들하고 논의한 후 이 장군은 경멸에 찬 인상을 찌푸린 후 자신의 임명을 수락했다. 물론 그의 친구들에게 설명했듯이 이 분쟁을 평화적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니콜라스 2세가 최고사령관이었을 때 참모장을 지낸 그는 이제 케렌스키 정권 하에서도 같은 직책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환상적이었다! 이 임명 직후 케렌스키는 그의 환상적인 임명을 이렇게 설명했다: "전쟁 총사령부의 인물들과 친분이 있고 군부의 고위급 내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알렉세이예프 만이 군의 지휘권을 코르닐로프로부터 새로운 인물들에게 평화로이 이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였다. 반란자들과 같은 편인 그의 임명은 조금의 가능성만 있었더라도 반란자들의 저항을 더욱 부추겼을 것이다. 사빈코프가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소환되었던 것과 똑같은 이유로 알렉세이예프는 반란의 실패 후 참모장으로 발탁되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익과 대화 채널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임 최고사령관 케렌스키는 장군들과 우정을 유지하는 것이 특히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혼란이 있은 후에는 확고한 질서를 안착시키는 것이 필요할 것이고 따라서 이중으로 강력한 권력이 필요하다.

한편 전쟁 총사령부에는 이틀 전만 해도 지배했던 낙관적 분위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반란 음모자들은 후퇴할 길을 찾고 있었다. 케렌스키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코르닐로프는 "전략적 상황으로 보아 강력한 정부가 구성되는 것"이 확실하다는 조건 하에서 최고사령관직을 평화적으로 내놓을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반란 실패자들은 이 거대한 최후통첩에다가 조그만 최후통첩을 덧붙였다: 코르닐로프 자신은 "군대에 없어서는 안될 장군들과 다른 인물들을 체포하는 것은 대체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즐거워진 케렌스키는 즉시 자신의 적을 만날 조치를 취했다. 그는 라디오를 통해 군사작전의 영역에서 코르닐로프 장군의 명령들을 모두 따를 의무가 있다고 선언했다. 같은 날 코르닐로프 자신은 크리모프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세계 역사상 유일한 종류의 에피소드가 일어났다: 조국에 대한 반역과 배신을 저질러 법정에서 심리를 받을 최고사령관이 군대 지휘를 계속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케렌스키라는 인물의 형편없음이 새로이 드러나자 반란 음모자들의 기대는 즉시 상승했다. 이들은 자신들을 너무 싼값에 넘기는 것을 두려워했다. 코르닐로프는 몇 시간 전에 보낸 전보에서 "이 끔찍하게 험악한 순간에" 내부의 갈등을 인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전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한이 절반 정도 회복된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압박을 가하라"는 전갈을 칼레딘에게 전하기 위해 두 사람을 그에게 보냈다. 그리고 동시에 크리모프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상황이 허용한다면 내가 보낸 지시의 정신을 살려 독자적으로 행동하라." 이 지시의 정신은 다름이 아니라 정부를 전복시키고 소비에트 요인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었다.

신임 참모장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를 장악하기 위해 출발했다. 동궁의 인물들은 이 작전을 진지하게 간주했다. 실제로 코르닐로프는 성 조오지 기병 대대, "코르닐로프" 보병 연대, 1개 테킨스키 기병 연대 등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 조오지 기병 대대는 반란 시작부터 정부 편으로 넘어가 버렸고 코르닐로프 및 테킨스키 연대들은 아직 반란군에 충성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으나 일부는 떨어져 나갔다. 전쟁 총사령부에는 대포가 전혀 없었다. 이 상황에서 반란군의 저항은 말도 되지 않았다. 알렉세이예프는 코르닐로프와 루콤스키를 의례상 방문하는 것으로 자신의 임무를 시작했다. 이 방문 도중 양 측 모두는 신임 최고사령관 케렌스키에 대해 군인들의 어휘인 욕설을 일치된 마음으로 퍼부었다고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알렉세이예프나 코르닐로프나 구국의 행위는 어쨌든 당분간 연기 되어야한다고 생각했음이 명백했다.            

그러나 전쟁 총사령부에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평화조약이 행복하게 맺어지는 동안 수도의 분위기는 대단히 뜨거워지고 있었다. 동궁에서는 인민에게 알릴 안심되는 소식이 모길레프로부터 나오기를 안타깝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정보를 얻기 위해 알렉세이예프의 옆구리를 계속 찔러대었다. 케렌스키가 신뢰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 바라노프스키 대령은 전화를 통해 이렇게 불평했다: "소비에트는 들끓고 있다. 권력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코르닐로프 일당을 체포해야 이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알렉세이예프의 의도와는 전혀 맞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응답했다: "대단히 유감스럽지만 우리가 소비에트의 끈질긴 마수에 완전히 넘어갔다는 나의 두려움은 의심의 여지없는 사실이 되었다." 익숙한 대명사 "우리"는 케렌스키 파벌을 의미한다. 알렉세이예프는 비난의 화살을 완화시키기 위해 조건부로 자신을 이 파벌에 포함시키고 있다. 바라노프스키 대령도 같은 어조로 대답하고 있다: "소비에트의 끈질긴 마수에 넘어간 우리를 신께서 구원하소서." 혁명 대중이 코르닐로프의 마수에서 케렌스키를 구원하자마자 이 민주주의 지도자는 대중에 대항하기 위해 서둘러 알렉세이예프와 합의했다: "우리는 소비에트의 끈질긴 마수에서 벗어날 것이다." 그러나 알렉세이예프는 필요상 주요 반란 음모자들을 체포하는 의례를 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최고사령관직에서 제거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인민에게 선언한지 나흘만에 코르닐로프는 아무 반대 없이 조용히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모길레프에 도착한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통신부 차관, 여러 명의 참모부 소속 장교들, 도착하지 않은 외교관 알라딘, 장교동맹 지도위원회 위원 전체를 체포했다.

반란이 붕괴된 후 첫 몇 시간동안 화해주의자들은 맹렬한 몸짓을 했다. 심지어 아브크센티에프조차 번갯불처럼 번쩍거렸다. 반란군은 꼬박 3일 동안 아무런 지휘도 없이 전선을 떠나있었다! 집행위원회 위원들이 외쳤다: "반역자들에게 죽음을!" 아브크센티에프는 이 목소리들을 환영했다: 그렇다, 코르닐로프와 그의 추종자들의 요구로 사형이 도입되었다. "사형 제도는 반란자들에게 그만큼 더욱 확실히 적용될 것이다." 이 선언에 열렬한 박수 갈채가 오래 지속되었다.

2주일 전까지만 해도 사형 제도의 복원자라고 칭송하며 코르닐로프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던 모스크바 교회협의회는 이제 전보를 통해 정부에 이렇게 호소했다: "신과 예수 같은 이웃 사랑의 이름으로 잘못을 저지른 코르닐로프의 목숨을 살려주시오." 이밖에 우익은 다른 압력 수단들도 동원하여 반란 음모자들의 목숨을 구하려했다. 그러나 정부는 피를 볼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야만 사단의 대표단이 동궁의 케렌스키를 방문했다. 신임 최고사령관의 일반적인 발언에 대해 병사 가운데 하나가 "반역 지휘관들은 인정 사정없이 벌을 받아야 한다"고 응답했다. 이때 케렌스키는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귀하의 임무는 지휘관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요. 우리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요." 왼발을 구르면 대중이 나타났다가 오른발을 구르면 이들이 사라져야 한다고 케렌스키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필요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할 것이요." 그러나 이들이 한 모든 조치는 의심스럽거나 한심스럽지는 않더라도 불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대중은 틀리지 않았다. 상층부는 코르닐로프 반란을 초래한 조건을 그대로 복원시키는데 관심의 대부분을 쏟았다. 루콤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조사위원회 위원들의 몇몇 질문이 끝나자 이들이 우리에게 대단히 우호적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이들은 원래 반란 음모자들의 동조자요 보조자들이었다. 군사법정의 검사 샤블로프스키는 피고인들에게 사법 정의를 피하는 문제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그러자 전선의 병사 조직들이 항의를 했다. "반란 장군들과 동조자들은 국가와 인민의 죄인으로 취급받지 않고 있다....반란 음모자들은 외부 세계와 통신할 완벽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루콤스키는 이 주장을 올바른 것으로 입증하고 있다: "최고사령관의 참모부는 우리의 관심사들에 대해 정보를 계속 제공했다." 분노한 병사들은 여러 번 장군들을 자신의 법정에서 심판할 충동을 느꼈다. 체포된 반란자들은 비크호프 구치소에 급파된 반혁명적 1개 폴란드 사단의 보호로 즉결 처형을 겨우 면했다.

9월 12일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에서 밀류코프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는 대부르주아 계급의 행동에 대한 반란 음모자들의 합당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대부르주아 계급은 처음에는 반란자들의 반란을 부추기고는 반란이 붕괴하자 모른 체했다. 알렉세이예프는 분노가 담긴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회의 일부 계층은 반란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지적으로 동조했을 뿐 아니라 가능한 선에서 코르닐로프를 도왔다는 것을 귀하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장교동맹의 이름으로 알렉세이예프는 반란 실패자들에게 등을 돌린 비쉬네그라즈키, 푸틸로프, 기타 대자본가들에게 "공동의 사상과 준비로 단결했던 인물들의 배고픈 가족들"을 위해 30만 루블을 모금할 것을 요구했다. 이 편지는 공개적인 위협으로 끝을 맺었다: "정직한 언론이 상황에 대한 열정적인 설명을 즉시 시작하지 않을 경우...코르닐로프 장군은 반란 준비활동, 인물 및 그룹들과 나눈 대화, 이들의 역할 등 전부를 법정에서 널리 폭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눈물 젖은 최후 통첩의 실제 결과에 대해서는 데니킨이 이렇게 보고한다: "10월말이 되어서야 이들은 모스크바에서 약 4만 루블을 코르닐로프에게 보냈다." 이 기간에 밀류코프는 일반적으로 정치무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입헌민주당의 공식 견해에 따르면 그는 "휴식을 취하기 위해 크림반도에 갔다." 그 동안 격렬한 선동활동을 했으니 이 자유주의 지도자는 확실히 휴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조사위원회의 희극은 10월 볼세비키 봉기 때까지 질질 끌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그의 동조자들은 석방되었을 뿐 아니라 케렌스키의 전쟁 총사령부에 의해 모든 필요한 문서들을 제공받았다. 이 탈출한 장군들이 나중에 내전의 토대를 마련했다. 코르닐로프, 자유주의자 밀류코프, 흑백인조의 우두머리 림스키-코르사코프를 단결시킨 성스러운 목적의 이름으로 수십만 명의 인민이 살해되었고 러시아 남부와 동부는 약탈의 대상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또한 나라의 산업은 거의 완벽히 파괴되었으며 적색 테러가 혁명에 강요되었다. 케렌스키의 법정에서 풀려난 후 코르닐로프는 내전의 전선에서 볼세비키의 포탄에 맞아 곧 사망했다. 칼레딘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돈강 유역 카자흐의 "군대 집단"은 칼레딘 체포 명령을 철회하고 수장으로서의 그의 지위를 복권시킬 것을 요구했다. 여기서도 케렌스키는 자신의 말을 번복하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스코벨레프는 군대 집단에 사과를 하도록 노보체르카스크에 파견되었다. 민주 진영의 장관인 그는 칼레딘이 주도한 세련된 빈정거림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이 카자흐 장군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돈강 유역에서 폭발하고 있던 볼세비키 혁명에 의해 사면초가가 된 그는 몇 달 후 자살했다. 그러자 코르닐로프의 깃발은 데니킨 장군과 콜착 제독의 손에 넘어갔다. 내전의 주요 기간은 이들의 이름과 연관되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들은 1918년과 이후의 일이다.

 

 

제 11장 반동의 공세에 놓인 대중

혁명의 직접적 원인은 서로 격돌하고 있는 계급들의 심리 변화이다. 사회의 물질적 관계는 이 과정의 통로를 규정할 뿐이다. 집단의식의 변화는 당연히 반정도 은폐된다. 이 변화가 일정 수위에 도달할 때에만 새로운 정서와 사상들은 대중투쟁의 형태로 표면에 드러난다. 대중의 투쟁은 비록 매우 불안정하지만 새로운 사회 균형을 조성한다. 혁명의 진전은 새로운 단계마다 권력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후 즉시 이것을 다시 은폐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문제는 새로 부각된다. 반혁명도 같은 리듬을 가지고 있다. 다만 혁명의 영화와는 정반대로 필름이 돌아갈 뿐이다.

정부와 소비에트 상층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혁명의 과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대중의 깊은 심리 변화를 파악하지 않고는 어느 정당의 진정한 의의나 정치 지도자들의 술수를 이해할 수 없다. 7월에 노동자와 병사들은 패배했다. 그러나 10월의 저지할 수 없는 공세를 통해 이들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이 4개월 동안 이들의 머릿속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위에서 비 오듯 쏟아지는 공격을 이들은 어떻게 견디고 살아남았는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이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공개적인 권력 장악 기도에 맞섰는가? 여기에서 독자들은 7월의 패배로 다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제대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는 것이 종종 필요하다. 지금 우리 앞에는 10월의 도약이 놓여있다.   

소련의 관변 역사는 일종의 고무 도장처럼 다음과 같은 견해를 확립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탄압과 비방을 결합한 반동의 7월 공격은 노동자 조직들에게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그러나 이 견해는 실제 사실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당원 수가 감소하고 대중 투쟁이 퇴조한 현상은 물론 몇 주일만 지속했다. 투쟁의 밀물은 대단히 빨리 시작되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대단히 큰 소리를 내며 시작되었다. 그래서 탄압과 퇴조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반 이상 지워버렸다. 승리는 직전의 패배를 언제나 새로이 조명한다. 그러나 지역 당 조직의 회의록 출판에 비례하여 7월 퇴조기의 그림들이 더욱 선명해진다. 7월 이전까지 투쟁은 중단 없이 상승했다. 이에 비례하여 7월의 하강은 더욱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역관계가 한쪽에게 명확히 불리하게 작용한 결과가 패배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패배는 언제나 패자에게 불리하게 역관계를 변화시킨다. 왜냐하면 승자의 자신감이 상승하는 반면 패자의 자신감은 감소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기 역량에 대한 이러저러한 어림 계산은 객관적 역관계의 대단히 중요한 요인이다. 뻬쩨르부르그의 노동자와 병사들은 직접 패배를 당했다. 대중은 혁명을 급격하게 전진시키려는 강한 충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인 역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대중의 투쟁 목표는 혼란과 모순에 빠졌다. 또한 지방과 전선은 여전히 후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들이 결합하여 결국 7월 투쟁은 패배했다. 따라서 패배의 결과가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날카롭게 드러난 곳은 바로 수도였다. 그러나 지방이 7월 패배를 거의 인식하지 못했다는 관변 역사의 빈번한 주장 역시 실제 사실과 크게 어긋난다. 이 주장은 이론적으로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사실과 문서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반박되고 있다. 거대한 문제들이 등장할 때마다 나라 전체는 자기도 모르게 항상 수도를 쳐다보았다. 따라서 수도의 노동자와 병사들의 패배는 특히 지방의 선진 부위에 엄청난 인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두려움, 실망감, 냉담함 등이 편차를 달리했지만 모든 곳에서 관찰되었다.

혁명적 압력의 감소는 무엇보다도 적에 대한 대중의 저항력의 상당한 약화로 드러났다. 수도로 진입한 군대는 노동자와 병사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공식적인 징벌을 수행했다. 이와 동시에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반정도 자원한 패거리들이 거리낌없이 노동자 조직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프라우다 지의 편집실과 볼세비키당 인쇄소가 공격당한 후 금속노동조합 본부도 같은 신세가 되었다. 다음에는 지구 소비에트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화해주의자들도 반동의 공격으로부터 면제되지 않았다. 10일에는 내무장관 체레텔리를 지도자로 하고 있는 멘세비키당의 기관 한 곳이 공격받았다. 수도에 도착하고 있는 병사들에 대해 단은 대단한 자기 절제력을 발휘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혁명의 폐허 대신 혁명의 새로운 승리를 목격하고 있다." 이 승리는 너무나 멀리 나아가서 멘세비키 프루쉬츠키에 따르면 거리의 행인들조차 노동자처럼 생겼거나 볼세비키로 의심될 경우 언제든지 잔인하게 구타당할 위험이 있었다. 정세가 급변했다는 것을 이것처럼 의심의 여지없이 보여주는 징후가 또 어디 있겠는가!

10월 혁명 직후 "혁명수호 특별위원회(역자 주: Cheka. 1917년에 창설된 최초의 볼세비키 비밀경찰 조직.)"의 유명한 위원이 된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라트시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7월 9일. 수도의 모든 인쇄소는 파괴되었다. 우리 신문과 유인물을 인쇄하려는 자는 하나도 없다. 비합법 신문을 만드는 수밖에 없다. 비보르그 지구는 모든 이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와 탄압 당하고 있는 당 중앙위원들이 여기에 모여있다. 르노 자동차 공장의 경비실에는 레닌이 참석한 위원회 협의회가 열렸다. 총파업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위원회 내에서 업무 분담이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총파업을 지지한다. 레닌은 상황을 설명한 후 총파업 취소 동의안을 제출한다....7월 12일. 반혁명이 승리했다. 소비에트는 권력을 박탈당했다. 미친 듯이 날뛰는 사관생도들은 멘세비키들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당의 일부는 자신감을 상실했다. 신입 당원들의 행렬이 멈추었다....그러나 아직도 탈당하는 당원들은 없다." 7월 이후 "뻬쩨르부르그 공장들에서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강화되었다"고 노동자 시스코가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의 고립은 화해주의자들의 비중과 자신감을 자동적으로 상승시켰다. 7월 16일 바실리예프스키 오스트로프의 대표 한 명이 볼세비키당의 어느 도시 협의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그가 소속된 지구의 정서는 몇몇 공장들을 제외하고 "일반적으로" 충만하다. "발트해 연안 공장들에서는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 우리를 몰아내고 있다." 여기서 사태는 너무 멀리 나가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살해된 카자흐 기병들의 장례식에 참여해야 한다고 공장위원회가 선포했으며 볼세비키들은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물론 공식적으로 당원의 이탈은 미미했다. 지구 전체에서 4천명 당원 가운데 공개적으로 탈당한 수는 100명을 넘지 않는다. 그러나 첫 며칠 동안 훨씬 많은 당원들이 대오에서 말없이 떨어져 나갔다. 노동자 미니초프는 이 사건 직후 이렇게 회상했다: "목숨이 두려워 당원증을 '씹어 삼키고' 당과의 모든 관계를 부인하는 자들이 우리 대오에 있다는 것을 7월 시기가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덧붙인다: "그러나 이런 자들의 수는 많지 않았다..."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사건과 그 직후 진행된 우리 조직에 대한 폭력과 비방 캠페인은 7월초에 엄청난 규모로 증대하고 있던 우리의 영향력을 정지시켰다....당 자체가 반합법이 되었고 주로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 의존하여 방어투쟁을 전개해야했다."

한편 볼세비키들이 독일 첩자라는 비난은 수도 노동자들에게조차 상당수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요하고 있던 노동자들은 당으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당원이 막 되려고 하던 노동자들은 동요했다. 이미 당원이 된 노동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탈퇴했다. 볼세비키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 노동자들도 7월 시위에 큰 역할을 했었다. 그런데 반동의 탄압을 받자 이들은 제일 먼저 자기 당의 깃발과 노선 속으로 도망쳐버렸다. 소속 당의 규율을 무시하고 시위에 참여한 것이 이들에게는 진짜 큰 실수였던 것처럼 보였다. 공식적으로 선언되고 법으로 치장된 비방의 영향을 받아 볼세비키당에 우호적이었던 광범위한 비당원 노동자들도 당에서 멀어졌다.

이 변화된 정치 분위기 속에서 반동의 탄압은 이중의 효과를 가져왔다. 볼세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위원이었으며 가장 고참 당원의 한 명이었던 올가 라비치는 탄압 직후 이렇게 보고했다: "7월 시기는 당 조직을 산산조각 내어 탄압 이후 첫 3주일간 당은 아무런 활동도 할 수 없었다." 여기서 라비치는 대개 당의 공개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오랫동안 당 신문은 발행될 수 없었다. 볼세비키당을 도우려는 인쇄소는 찾을 수 없었다. 인쇄소 주인들만 인쇄에 저항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인쇄소에서 노동자들은 볼세비키당 신문이 인쇄될 경우 일을 그만두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주인은 이미 서명한 인쇄 계약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버렸다. 이 때문에 크론슈타트에서 발행한 신문이 당분간 수도에 보급되었다.

이 몇 주일동안 그나마 공개 투쟁의 장에 모습을 보였던 극좌 그룹은 "멘세비키-국제주의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마르토프의 연설을 열심히 들었다. 혁명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보다는 그 동안의 성과를 보존하는 투쟁이 필요한 후퇴기에 그의 투쟁 본능은 살아 올랐다. 마르토프의 용기는 비관적 용기였다. 그는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반동 세력이 혁명을 완전히 정지시킨 것 같다....러시아 혁명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여지가 없다면 명예롭게 투쟁의 장에서 떠납시다. 이 도전을 말없는 포기가 아니라 정직한 투쟁으로 받아들입시다." 이 제안은 단과 체레텔리 같은 멘세비키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이들은 노동자와 병사들에 대한 장군과 카자흐 기병들의 승리를 무정부적 혼란에 대한 혁명의 승리로 바라보았다. 고삐가 풀린 채 맹렬하게 계속되고 있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과 카자흐 기병 앞에서 화해주의자들은 계속 배를 깔고 굴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몇 주일 동안 노동자들은 마르토프의 행위를 고귀한 것으로 인정했다.

7월 위기는 수도의 주둔군에게 특히 심한 타격이었다. 정치적으로 병사들은 노동자들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이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간 후에도 병사 부문은 화해주의의 아성이었다. 병사들은 총을 들고 투쟁할 준비가 놀랍게도 잘 되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성숙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시위에서 이들은 노동자들보다 훨씬 공격적이었다. 그러나 공격을 당할 때에는 이들이 훨씬 멀리 후퇴했다. 볼세비키당을 적대하는 물결은 수도의 주둔군 사이에 상당히 높게 일었다. 한때 병사였던 미트레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7월 패배 후 나는 연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탄압의 폭풍이 지나가기 전에 살해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시위에 가장 앞장섰으며 따라서 직후 가장 심한 탄압을 받았던 혁명적 연대들에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실제로 가장 낮았다. 너무 영향력이 낮았기 때문에 이 연대들에서는 3개월이 지난 후에도 조직을 복구할 수 없었다. 이 부대들은 너무 심한 타격을 받아 기운이 완전히 바닥난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당 군사기구는 단호히 활동을 축소할 수밖에 없었다. 한때 병사였던 미니초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패배이후 당의 상층부 뿐 아니라 일부 지구위원회들도 당 군사기구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크론슈타트에서 당은 250명의 당원을 잃었다. 이 볼세비키 아성의 정서는 크게 나빠졌다. 헬싱키에도 이 정서가 퍼져서 아브크센티에프, 부나코프 그리고 변호사 소콜로프는 이 곳을 방문하여 볼세비키 군함들의 참회를 받았다. 이들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주요 볼세비키 당원들을 체포하고 공식적으로 비방을 퍼뜨리고 위협을 가하여 이들은 심지어 볼세비키 전함인 표트로파블로프스키에서조차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러나 "선동가들"을 체포하여 넘기라는 이들의 요구는 모든 군함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피아트니츠키는 이렇게 회상한다: "부르주아 언론의 공격은 모스크바 위원회의 일부 위원들에게조차 공포를 유발시켰다." 7월 패배 후 이 조직은 당원 수가 줄었다. 모스크바의 노동자 라테힌은 이렇게 적고 있다: "죽을 지경으로 진짜 힘들었던 그 당시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자모스크보레츠키 지구 소비에트의 전원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이 회의에는 볼세비키 동지들이 별로 없었다....이 와중에 아주 활동적인 동지 스테클로프가 가까이 다가와서 입을 거의 놀리지 않은 채 이렇게 물었다: '레닌과 지노비에프가 봉인열차를 타고 귀국한 것이 사실이야? 이들이 독일 정부의 돈을 받고 일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야...?' 이 질문을 받자 나의 심장은 고통으로 내려앉았다. 콘스탄티노프 동지도 다가와서 물었다: '레닌은 어디에 있니? 도망쳤다고 하던데....이제 어떻게 하냐?' 이런 식이었다." 이 생생한 그림은 이 당시 선전 노동자들의 경험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다. 모스크바의 포병 다비도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알렉신스키가 공개한 문서들이 돌면서 여단 내에는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볼세비키당에 가장 충성하던 우리 포대도 이 비겁한 거짓말에 타격을 받아 동요했다....우리는 모든 신념을 잃은 것 같았다."

이 당시 당 중앙위원이었으며 넓은 모스크바 지역의 활동 지도자였던 야코블레바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패배 이후 지역의 모든 보고 내용들은 한 목소리로 대중의 정서가 급격히 가라앉았으며 당에 대해 명확히 적대감을 표출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우리 연설자들이 두들겨 맞은 경우도 상당했다. 당원 수는 급격히 감소했으며 특히 남부의 도들에서는 여러 조직들이 아예 없어졌다." 8월 중순이 되어도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당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 사이에서 정치활동은 계속되었으나 조직은 성장하지 않았다. 리아잔과 탐보프 도에서는 볼세비키 세포조직이나 동조조직이 새로 생기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이 지역은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차지였다.                        

키네쉬마 노동자 지구의 활동을 지휘했던 에브레이노프는 7월 패배 직후 대단히 어려운 상황이 조성되었다고 회상한다. 사회 단체들이 전부 모인 어느 대회에서 볼세비키당을 소비에트에서 추방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일부 경우에는 당원들의 이탈이 너무 심해 당원을 새로 받아들인 후에야 정상적인 조직 생활이 가능했다. 툴라에서는 신입 당원을 철저히 심사했기 때문에 당원 수가 줄지는 않았다. 그러나 당원들과 대중의 연대는 약화되었다. 베르호프스키 대령과 멘세비키 킨추크가 주도하여 볼세비키 징벌 캠페인이 있은 후 당원 수는 급격히 감소했다. 시의회 선거에서 당 후보들 가운데 4명만 당선되었다. 칼루가에서는 볼세비키 분파가 소비에트에서 추방될 가능성을 고려했다. 모스크바 지역의 일부에서는 볼세비키들이 소비에트 뿐 아니라 노동조합에서도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라토프에서는 볼세비키당과 화해주의자들은 관계가 아주 평화스러웠기 때문에 6월말 시의회 선거에서 통합 후보들을 낼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7월 패배 직후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에 너무 심하게 노출된 나머지 병사들은 선거대책 회의에 난입하여 사람들의 손에서 볼세비키 회보를 빼앗고 선동가들을 두들겨 팼다. 레베데프가 이렇게 적고 있다: "선거대책 회의에서 일단 발언하기가 어려웠다. 일부가 '독일 첩자! 밀정!'이라고 종종 고함을 질렀다." 사라토프의 볼세비키 당원 가운데 상당수는 크게 겁을 먹었다: "다수가 탈당서를 제출했고 몸을 숨기는 당원들도 있었다."

오랫동안 흑백인조의 수도로 유명했던 키에프에서 볼세비키들은 특히 심하게 탄압 받았다. 심지어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들도 탄압을 받았다. 이곳에서는 혁명운동의 쇠퇴가 특히 심하게 느껴졌다. 지역의회 선거에서 볼세비키당의 득표율은 6%에 불과했다. 당의 시협의회에서 연설자들은 냉담성과 수동성이 만연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당 신문은 일간지에서 주간지로 전환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연대들이 해체되거나 딴 곳으로 이동하면서 주둔군의 정치적 수준은 낮아졌다. 이 뿐 아니라 우군이 버티고 있을 때 든든함을 느꼈던 지역 노동자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이 미쳤다. 트베르에서 제 57 연대가 이동하면서 병사와 노동자들 사이의 정치적 관계는 급격히 변했다. 심지어 노동조합 내에서도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미미해졌다. 이 현상은 그루지아의 수도 티플리스에서 더욱 뚜렷했다. 이 도시에서 멘세비키들은 참모부와 짜고 볼세비키 연대들을 전혀 정치 색깔이 없는 연대들로 대체시켰다.

어떤 곳에서는 주둔군의 구성, 지역 노동자들의 수준, 기타 우연적인 원인들 때문에 정치적 반동은 역설적인 형태를 띠었다. 예를 들어 야로슬라블에서는 7월에 볼세비키당이 노동자 소비에트에서 수적으로 거의 완전히 몰려나다시피 하였으나 대신 병사 소비에트에서는 지배적인 위치를 누리고 있었다. 더욱이 일부 지역들에서는 7월 사건들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지나가면서 당의 성장을 저지하지 못한 것 같았다. 우리의 판단에 의하면 일반적 후퇴기가 혁명의 장으로 새로운 후진 층이 등장할 때와 일치했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그래서 일부 섬유공업지역에서는 7월에 상당수의 여성 노동자들이 조직으로 유입되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들이 당세 하락의 일반적 사실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부분적 패배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의심의 여지없이 격심했으며 심지어는 과장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노동자들이 지불해야할 대가였다. 그런데 병사들은 더 심한 대가를 지불했다. 왜냐하면 이들은 7월 이전 시기에 너무 순탄하고 급격하게 그리고 너무 두서 없이 볼세비키당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중의 정서가 이렇게 급격하게 전환되면서 당의 중핵 내부에서도 자동적이며 더욱이 어김없는 도태과정이 일어났다. 이 당시 흔들리지 않았던 당원들은 미래에는 절대적으로 신뢰할 분자들이었다. 이들은 공장과 지구의 핵심을 구성했다. 10월 봉기 전야에 임무와 직책이 맡겨졌을 때 조직가들은 7월 시기의 행동들을 상기하며 책임을 맡을 분자들을 점찍었다.

모든 관계들이 좀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선에서 7월 패배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특히 격렬했다. 부대 참모부는 "자유 조국에 대한 임무"를 다하는 특별 부대를 수립하기 위해 주로 7월 사건들을 이용했다. 각 연대는 돌격 중대를 조직했다. 데니킨은 이렇게 말한다: "종종 돌격 중대들을 보았는데 이들은 언제나 긴장되어있고 우울했다. 이들에 대한 연대 나머지 병력의 태도는 초연하거나 적대적이었다." 병사들은 이 "의무 사단들"이 반동 근위대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보았다. 사회혁명당원 데그티아레프는 이후 볼세비키 당원이 되었는데 이렇게 말한다: "7월 패배의 반응은 신속했다." 그는 후진적인 루마니아 전선을 말하고 있다: "다수의 병사들은 탈영병으로 체포되었다. 장교들은 목에 힘을 주고 병사위원회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일부 지역에서 장교들은 거수 경례를 부활시키려했다." 정부위원들은 군대를 숙청시켰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거의 모든 사단에는 사단장보다 이름이 더 알려진 볼세비키가 있었다....우리는 이 유명한 병사들을 하나 하나 제거했다." 전선 전체에서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부대들은 동시에 무장이 해제되었다. 이 일을 위해 지휘관들과 정부위원들은 병사들이 크게 혐오하는 카자흐 기병과 특별 중대들을 동원했다.

리가가 함락되던 날 부대 대표들을 참석시킨 북부 전선의 정부위원 회의는 가혹한 탄압 조치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시행할 필요가 있다고 선언했다. 일부 병사들은 독일군과 우애행위를 했다는 죄명으로 총살당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흐릿한 기억으로 용기를 낸 다수의 정부위원들은 철권으로 위협하려했다. 자코벵 대표위원들이 하층민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들은 까먹었다. 이들은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을 살려두지 않았다. 평민의 무자비함을 권위로 이들은 용기를 내어 군대 내에 엄격한 규율을 도입했다. 케렌스키의 정부위원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도덕적 권위가 없었다. 병사들의 눈에 이들은 부르주아의 앞잡이요 연합국들의 충견에 불과했다. 이들은 병사들을 잠시 겁줄 수는 있었다. 그리고 실제 이렇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계속 이렇게 할 힘이 없었다.

8월초 수도의 집행위원회 사무국은 군대의 정서가 호전되고 있으며 훈련이 진행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러나 반면에 폭압, 전제, 억압이 증대되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 장교들의 문제는 특히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완전히 고립되어 자기들만의 폐쇄적인 조직을 구성하고 있었다." 겉으로 보면 전선에는 더 큰 질서가 확립되고 있었다. 병사들은 사소하고 우연한 일들을 가지고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들의 불만은 더욱 높아가고 있었다. 국정협의회에서 멘세비키 쿠친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외교적인 연설을 했는데 이 안심시키는 어조 속에서도 경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의심 없이 평온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뭔가 다른 것도 감지된다. 실망하고 있다는 느낌이 다가오는데 이 느낌을 우리는 상당히 우려하고 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일시적 승리는 무엇보다 병사들의 새로운 희망,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이들의 신념에 대한 승리였다. 대중은 이제 좀더 조심스러워졌으며 어느 정도 규율을 획득했다. 그러나 지배자들과 병사들 사이의 심연은 더 깊어갔다. 내일 이 심연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집어삼킬 지 알 수 없었다.

7월의 반동은 2월 혁명과 10월 혁명 사이의 결정적 분수령이었다. 노동자, 후방의 주둔군, 전선, 심지어는 나중에 보겠지만 부분적으로 농민도 명치를 얻어맞은 것처럼 몸을 사리고 움츠렸다. 실제로 이것은 신체적이라기보다는 심리적 타격이었다. 그러나 바로 이것 때문에 그만큼 더 실재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대중은 오직 좌로만 움직였다. 볼세비키당은 성장했고 강력해졌으며 대담해졌다. 그러나 이제 이 운동이 철벽을 만났다. 실제로 2월 혁명의 길로는 더 이상의 전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확해졌을 뿐이었다. 혁명이 기력을 소진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다. 진정으로 2월 혁명은 바닥까지 힘을 다 써버린 후였다. 대중의 의식이 드러낸 이 내적 위기는 반동 세력의 비방 그리고 탄압 조치와 결합하여 혼란과 후퇴 그리고 일부 경우에는 공포를 가져왔다. 적은 더욱 대담해졌다. 대중 내부의 후진적이고 의심스러운 분자들이 모두 수면 위로 올라왔다. 이들은 혼란과 피폐 속에서 참을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혁명의 파도가 후퇴하면서 엄청난 힘이 나왔다. 이 힘은 사회 수리역학의 근본 법칙들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이 거대한 파도를 마주 부딪쳐 정복할 수는 없다. 비껴 서서 휩쓸리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반동의 파도가 소진될 때까지 살아 남아서 새로운 전진의 발판을 마련해야한다.

일부 연대들은 7월 3일에는 볼세비키당 깃발 아래 시위에 참여했다가 일주일 후는 독일 황제의 첩자는 끔찍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당에게 고함질렀다. 이 현상을 보고 교육받은 회의주의자들은 완전히 승리한 듯이 의기양양하게 기뻐했을지 모른다: 당신들이 얘기하는 대중이 바로 그렇지 않소; 그들의 안정감과 이해력은 그 정도에 불과하지 않소! 그러나 이것은 값싼 회의이다. 대중이 우연한 상황에서 감정과 생각을 마구 바꾼다고 인정하자. 그럴 경우 거대한 혁명의 특징인 자연법칙에 이들이 막강하게 복종하는 현상은 설명될 수 없을 것이다. 수백만 대중이 혁명에 더 깊이 끌려들어 갈수록 그리고 혁명의 진전이 더 규칙적일수록 우리는 그만큼 더 자신 있게 혁명의 이후 단계들을 예측할 수 있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대중의 정치적 발전과정은 직선이 아니라 복잡한 곡선을 그린다는 것을 상기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이 모든 물질 운동의 특성이 아닌가? 객관적 조건들은 노동자, 병사, 농민들을 볼세비키당의 깃발로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은 자신의 과거, 과거의 신념, 또한 부분적으로 오늘의 신념을 가지고 이 투쟁의 길에 들어서고 있었다. 실패와 실망이 교차하는 어려운 전환기에 이들은 아직도 다 타지 않은 오래된 편견들을 폭발시키고 있었다. 혁명의 적은 당연히 이것을 구원의 닻으로 끌어당겼다. 명확하지 않고 이상하고 궁금한 볼세비키당의 모든 것 -- 사고의 새로움, 대담성, 구 권력과 신 권력 모두에 대한 경멸 -- 이 모든 것이 이제 갑자기 하나의 단순한 설명을 찾아냈다. 그리고 이 설명의 황당함 때문에 그만큼 더 설득력이 있었다: 볼세비키들은 독일의 첩자이다! 볼세비키들에 대해 이렇게 비난하면서 적들은 과거 인민의 노예 상태, 무지몽매와 야만성과 미신의 유물들에 진정 모든 것을 걸고 있었다. 이것은 만만한 게임이 아니었다. 7월과 8월 내내 이 거대한 애국주의 거짓말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요인이었으며 당시 모든 문제들을 설명하는 약방의 감초였다. 입헌민주당 신문이 전국에 유포한 비방의 파문은 지방과 개척지 등을 집어삼키고 가장 인적이 드문 벽촌에까지 침투했다. 7월말에 볼세비키당의 이바노보-보즈네젠스크 조직은 비방에 반대하는 좀더 활기찬 캠페인을 당에게 여전히 주문하고 있었다. 문명 사회에서 비방이 정치투쟁에서 차지하는 상대적 비중의 문제는 아직도 사회학자들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다.

비록 초조와 안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노동자와 병사들의 반동은 깊이나 지속성이 없었다. 좀더 선진적인 수도의 공장들은 공격을 받은 지 며칠만에 회복을 시작했다. 이들은 체포와 비방에 항의했으며 집행위원회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당의 연락선을 복구시켰다. 적의 공격을 받아 무장이 해제된 세스트로레츠크 무기공장을 노동자들은 다시 장악했다. 7월 20일에 열린 총회는 시위에 참여한 날도 봉급을 받아야 하며 이 봉급은 전선에 필요한 선전물을 제작하는데 전부 사용되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올가 라비치의 증언에 따르면 수도에서 볼세비키당의 공개적인 선동 작업은 7월 20일과 30일 사이에 다시 시작되었다. 200명이나 300명을 넘지 않는 집회에서 3인의 선동가가 도시의 여기 저기에 모습을 나타냈다. 이후 크림반도에서 백군에 의해 살해된 슬루츠키, 수도에서 사회혁명당에 의해 살해된 볼로다르스키, 수도의 금속 노동자이자 혁명의 가장 유능한 웅변가 예프도키모프 등이 이들이었다. 8월에 당의 교육활동은 범위가 확대되었다. 라스콜니코프의 노트에 의하면 7월 23일에 체포된 트로츠키는 감옥의 동지들에게 수도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볼세비키 사냥을 미친 듯이 계속하고 있다. 동지들에 대한 체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당내의 분위기는 어둡지 않다. 이와 반대로 모두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보고 있으며 탄압은 당의 인기를 상승시킬 뿐이라고 계산하고 있다....노동자 지구들도 기죽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표트르호프 지구의 27개 공장 노동자 회의는 곧이어 무책임한 정부와 정부의 반혁명 정책을 항의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노동자 지구들은 아주 빠르게 살아나고 있었다.

7월 21일과 22일 동궁과 타우리데궁이 계속 반복하여 새로운 연합을 만들었다가 폐기하던 바로 그 시간에 뻬쩨르부르그에서는 거대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거대한 사건은 공식적으로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좀더 확고한 연합이었다: 수도 노동자들과 현역 병사들이 동맹을 맺은 것이었다. 전선의 병사 대표들이 수도에 도착하여 혁명의 목을 조르는 것에 항의하는 연대들의 의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대표들은 집행위원회의 문을 두드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집행위원회는 이들을 문전 박대하고 이들로부터 몸을 사렸다. 한편 새로운 대표들이 계속 수도에 도착하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박대를 받은 병사 대표들은 복도와 민원실에서 서로 만나 불평하고 집행위원회를 욕하면서 공동의 길을 모색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볼세비키들의 도움을 받았다. 병사 대표들은 수도의 노동자, 병사, 수병들과 의견을 교환하기로 결정했다. 수도의 대중은 병사 대표들을 쌍수로 환영하고 잠잘 곳과 먹을 것을 마련해 주었다. 위에서 아무도 지시하지 않은 가운데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조직된 회의에서 전선의 29개 연대, 수도의 90개 공장, 크론슈타트 수병, 인근 주둔군 등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회의의 핵심은 참호의 병사 대표들이었다. 이들 중에는 다수의 젊은 장교들도 있었다. 수도 노동자들은 전선 대표들의 말을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이들은 공세의 실패가 어떻게 혁명을 집어 삼켰는지를 말했다. 회색 외투를 걸친 이 병사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선동가가 아니었지만 전선의 일상 생활을 투박한 말로 채색했다. 자세한 내용을 듣는 사람들의 마음은 무거워졌다. 모든 것이 혁명 이전의 증오스러운 상태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병사들이 너무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어제의 희망과 오늘의 현실 사이의 격차는 듣는 모든 이들의 심금을 울리고 이들을 하나의 정서로 결집시켰다. 병사 대표들은 물론 거의 사회혁명당원들이었지만 3명만의 기권으로 거의 만장일치로 과감한 볼세비키의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이 결의문은 죽은 문서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회의를 마치고 전선으로 흩어진 대표들은 화해주의 지도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문전 박대했으며 노동자들이 어떻게 자신들을 환대했는 지를 낱낱이 말할 것이다. 그리고 참호의 병사들은 자신들을 결코 속이지 않는 대표들의 말을 믿을 것이다.

7월말 특히 전선의 병사 대표들이 집회에서 발언한 이후 수도의 주둔군은 반동의 공격과 비방에서 깨어나는 조짐이 뚜렷했다. 물론 좀더 크게 타격을 입은 연대들은 그렇게 빨리 냉담성에서 회복될 수 없었다. 반면에 2월 혁명 후 첫 몇 달 동안 기존의 규율을 그대로 지키면서 애국주의 태도를 가장 오랫동안 보존했던 부대들에서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눈에 띠게 커지고 있었다. 특히 탄압의 타격을 심하게 받은 당 군사기구는 발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패배 후에는 늘 그렇듯이 이들은 당 군사 작업의 지도자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상상의 그리고 실제의 오류와 편향들을 이들의 탓으로 돌렸다. 당중앙위원회는 군사기구를 좀더 가까이 두고 스베르들로프와 제르진스키를 통해 직접 통제했다. 이전보다는 좀더 느리지만 대신 좀더 확실하게 활동이 재개되었다.

7월말이 되면 수도 공장들에서 볼세비키당의 지위는 이미 회복되었다. 노동자들은 같은 깃발로 뭉쳤으나 과거와는 달리 좀더 성숙하여 좀더 조심성이 있으나 대신 좀더 확고한 모습을 보였다. 7월 27일 볼세비키당 대회에서 볼로다르스키는 이렇게 보고했다: "공장에서 우리는 무제한적인 거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당 활동은 주로 노동자들 자신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아래로부터 조직은 성장했으며 당이 결코 와해되지 않을 이유들이 있다." 청년연합은 이때 회원이 5만 명이었는데 더욱더 당의 영향력 하에 놓이고 있었다. 8월 7일 소비에트 노동자 부문은 사형 제도의 폐지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정협의회에 대한 항의 표시로 푸틸로프 노동자들은 하루의 임금을 노동자 신문 발행을 위해 기부했다. 공장 위원회들을 대표하는 협의회는 모스크바의 국정협의회를 "반혁명 세력을 조직하려는 시도"로 선언하는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크론슈타트도 상처에서 회복되고 있었다. 7월 20일 야코르니 광장의 집회는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 헌병과 경찰을 포함하여 카자흐 기병의 전선 전출, 사형 제도의 철폐, 나콜라스 2세의 확실한 감시를 위해 크론슈타트 대표들의 짜르스코에 셀로 입회, 죽음의 대대들의 해체, 부르주아 신문의 압수 등을 요구했다. 거의 같은 시간에 성채의 지휘권을 넘겨받은 신임 제독 티르코프는 함선들에 걸려 있는 붉은 깃발을 내리고 안드레이예프스키 깃발을 올릴 것을 명령했었다. 그리고 장교들과 병사들의 일부는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이것에 항의했다. 7월 3일부터 5일까지 있었던 사건들을 조사하는 정부 위원회는 야유, 항의, 위협에 직면하여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하고 크론슈타트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함대 전체에도 정서가 바뀌고 있었다. 핀란드의 지도자 잘레쥐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말과 8월초에 외부의 반동은 헬싱키의 혁명 역량을 깨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좌로의 급격한 전환과 볼세비키당에 대한 공감의 대대적인 성장이 관찰되었다." 상당한 정도로 수병들은 당의 머리 위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 당의 의지에 반하여 7월 운동을 선동했다. 이들은 당의 뜻을 온건함 내지는 거의 화해주의라고 의심하였다. 그러나 무장 시위의 경험은 권력의 문제가 그리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반정도 무정부주의적 정서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신뢰로 바뀌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7월말 어느 헬싱키 대표의 보고가 아주 흥미롭다: "소형 군함에서는 사회혁명당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지만 대형 전함, 순양함, 구축함 등에서는 수병들이 모두 볼세비키당의 당원이거나 동조자들이다. 이전부터 표트로파블로프스키 전함과 공화국 전함의 수병들은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7월 3일부터 5일까지 사건이 있은 후 강구트, 세바스토폴, 루릭, 안드레이 페르보즈바니, 디아나, 그로모보이, 인도 등의 전함 수병들도 우리에게 넘어왔다. 이 결과 우리는 대규모의 전투력을 보유하게 되었다....7월 3일부터 5일까지의 사건들은 수병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마음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비록 수도에는 뒤졌지만 모스크바도 같은 길을 가고 있었다. 포병 다비도프스키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병사 대중은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다시 전면 공세를 취했다. 대중의 좌선회를 잠시 저지시켰던 그 거짓말은 이후 대중이 우리 쪽으로 쇄도하는 것을 촉진시켰을 뿐이었다." 적의 공격을 받은 후 공장과 병영의 우정은 더욱 깊어졌다. 모스크바의 노동자 스트렐코프는 미헬슨 공장과 이웃 연대 사이에 서서히 확립된 밀접한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노동자와 병사 위원회는 합동회의에서 공장과 연대의 실제적인 삶의 문제들을 자주 결정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을 위해 저녁 시간에 문화와 교육 프로그램을 돌렸으며 이들에게 볼세비키당 신문을 사주었고 다른 방식들을 통해 도움을 주었다. 스트렐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어느 병사가 징벌을 당하면 즉시 병사들이 우리에게 와서 불평했다. 거리 집회에서 미헬슨 공장의 노동자가 어느 곳에서든 모욕을 당하면 한 명의 병사만 이 소식을 들어도 전체가 뛰어가 그를 보호해주었다. 이때에는 모욕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독일의 돈을 받은 반역자라는 등 화해주의자들의 저질 거짓말들이 판을 쳤다."

7월말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공장위원회 협의회는 온건한 어조로 회의를 시작했으나 주중에 급격히 좌로 기울어 막판에 가서는 볼세비키 노선이 명백히 가미된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때 모스크바의 대표인 포드벨스키는 당 협의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지구 소비에트의 60%는 우리 손에 장악되어 있다....현재 조직적으로 가해지고 있는 비방 공격으로부터 볼세비키당을 확고히 지지하는 노동자 대중만이 우리를 구하고 있다." 8월초 모스크바 공장 선거에서 볼세비키들은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원 대신 선출되고 있었다. 당의 영향력이 성장했다는 사실은 국정협의회 전야에 벌어진 총파업에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 기관지 이즈베스티야는 이렇게 적었다: "볼세비키당이 무책임한 그룹이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의 조직된 분파이며 언제나 규율을 유지하지는 않고 있지만 혁명에 열렬히 충성하는 광범위한 대중이 이들을 지지하고 있다고 인식할 때가 마침내 왔다."

7월에 노동계급의 지위가 약화되자 제조업 자본가들이 용기를 냈다. 은행을 포함하여 13개 핵심 기업들의 협의회가 산업방어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공장 폐쇄를 비롯하여 혁명에 반대하는 모든 정치적 공격을 주도했다. 노동자들은 이에 저항했다. 전국에 걸쳐 대규모 파업을 비롯한 분쟁들이 터졌다. 투쟁 경험이 많은 부위가 조심스럽게 투쟁에 나선 반면 새로 투쟁에 나선 부위는 더욱 결연하게 투쟁에 나섰다. 금속 노동자들이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동안 섬유, 고무, 피혁, 제지 노동자들은 투쟁의 장으로 달려나왔다. 가장 후진적이고 순종적인 노동자들의 부위가 일어서기 시작했다. 키에프에는 야경꾼과 수위들이 폭동에 가까운 파업을 벌여 주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집들을 돌면서 파업 노동자들은 전등을 끄고 엘리베이터에서 열쇠를 뽑고 거리로 향한 문을 열어 주었다 등등. 어떤 문제로 일어났던 간에 모든 분쟁은 특정 산업 전체에 확산되어 혁명 원칙을 확립하려는 투쟁으로 발전하는 경향을 보였다. 전국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어 모스크바의 피혁 노동자들은 공장위원회가 노동자를 고용하고 해고할 권한을 갖도록 8월에 길고도 끈질긴 투쟁을 시작했다. 많은 경우 특히 지방에서 파업은 대단히 극적으로 전개되어 관리자들과 경영자들이 파업노동자들에 의해 체포되는 수위까지 발전했다. 정부는 노동자들의 자제를 설교하며 자본가들과 연합했다. 또한 카자흐 기병들을 돈강 분지로 파견하고 빵과 군수물자의 가격을 배로 인상시켰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분노를 극대화시킨 이 정책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중공업 재벌 아우어바하는 이렇게 불평한다: "각 지역의 노동 위원들은 노동부 장관 스코벨레프에게 켜진 빨간 불을 아직 보지 못했다....노동부는 지방 담당관들을 신뢰하지 않았다....대신 노동자 대표들을 수도에 불러 대리석궁에서 이들을 꾸짖고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제조업 자본가와 엔지니어들을 이들과 화해시키려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갔다. "이때쯤 노동자들은 꾸준하게 좀더 결연한 지도자들 그리고 참주선동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분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공장 내의 이중권력에 대항하여 제조업 자본가들이 휘두른 가장 주요한 무기는 경제 패배주의였다. 8월 전반부에 열린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생산의 붕괴와 정지를 목표로 한 제조업 자본가들의 사보타지 정책이 자세하게 폭로되었다. 금융과 관련된 술수들 뿐 아니라 원자재를 숨기고 공구실과 정비실을 폐쇄하는 행위가 일반화되었다. 쟌 리드는 자본가들의 사보타지를 잘 폭로하는 증언을 했다. 그는 미국의 특파원으로서 온갖 곳에 보도 내용을 전했으며 연합국 외교관들의 신임장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는 러시아 부르주아 정치꾼들의 솔직한 고백을 청취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라의 경제를 붕괴시키는 것이 혁명을 해치는 캠페인의 일부라고 입헌민주당 뻬쩨르부르그 지부 비서가 나에게 직접 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기로 내가 약속한 연합국의 어느 외교관은 이 내용이 옳다고 확인시켜주었다. 하리코프의 광산주들은 광산에 불을 지르고 배수펌프를 고장내어 갱도를 침수시켰다. 모스크바 섬유공장의 엔지니어들은 공장을 나서면서 기계들을 고장냈다. 철도 관리들은 기관차들을 고장내다가 노동자들에게 들켜 체포되었다." 경제 현실은 이렇게 잔인했다. 이 생산 파괴 행위들은 화해주의자들의 환상이나 연립정부의 정책이 아니라 코르닐로프 반란과 때를 맞추어 진행되었다.

전선에서는 성스러운 연합이 후방만큼이나 악질적으로 진행되었다. 볼세비키 개인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스탄케비치는 불평한다. "범죄 정신이 만연해 있다. 대중 전체가 이것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범위를 확실히 정하는 것이 힘들다." 병사들의 행위가 억제되어 있다면 이것은 증오심을 다스리는 법을 이들이 어느 정도 배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단 터지면 이들의 감정은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났다. 신임 중대장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체 명령을 받은 두벤스키 연대 소속의 한 중대는 여러 중대들을 설득하여 마침내 연대 전체가 반란을 일으켰다. 연대장이 무기를 사용하여 질서를 회복시키려하자 병사들은 그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때려 죽였다. 이 사건은 7월 31일에 일어났다. 다른 연대에서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연대 참모부는 속으로 이런 일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두려워했다.

8월 중순에 쉐르바초프 장군은 전쟁 총사령부에 이렇게 보고했다: "죽음의 대대들을 제외하면 보병의 정서는 아주 불안정하다. 며칠만에 일부 보병 부대들의 태도가 정반대로 돌변하는 경우가 때때로 발생한다." 7월의 비방과 탄압 방식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다수의 정부위원들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8월 22일 정부위원 야만트는 이렇게 보고했다: "서부 전선의 혁명 군사법정은 참모부와 병사 대중 사이에 끔찍한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아예 군사법정의 존재 이유 자체를 훼손시키고 있다...." 반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코르닐로프의 구국 강령은 충분히 시도되었다. 그리고 막다른 골목에 처박힐 뿐이었다.

유산계급들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카자흐 기병들의 규율이 붕괴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망령이었다. 여기에서 반동의 최후 보루가 무너질 위기를 맞고 있었다. 2월에 수도의 카자흐 연대들은 저항 없이 왕정을 포기했었다. 카자흐의 본 고장인 노보체르카스크에서 행정 당국은 혁명을 알리는 전보를 물론 숨기려했다. 그리고 평상시와 똑같은 엄숙함을 유지하며 알렉산드르 2세를 기리는 3월 1일 미사를 올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카자흐들은 짜르 없이도 기꺼이 살아갈 용의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역사에서 공화국 전통을 발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한 것은 할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카자흐들은 대표들을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 보내지 않았다. 노동자나 병사들과 같이 취급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들은 카자흐 군대 소비에트를 수립하여 후방 지휘관들이 대표를 맡은 12개 카자흐 공동체를 결집시켰다. 부르주아 계급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공격을 카자흐 군대에 기초하여 계획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카자흐의 정치적 역할은 국가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특별 지위에 의해 결정되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독특한 하급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일반 농민보다 상당히 큰 토지를 할당받았다. 돈, 쿠반, 트베르의 인근 세 지역에서 3백만의 카자흐들이 2천3백만 데시아틴의 토지를 소유했다. 반면 같은 지역의 일반 농민 4백30만 명은 6백만 데시아틴 밖에 소유하지 못했다. 다시 말하면 카자흐는 일반 농민보다 일인당 5배나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물론 카자흐 사이에서도 토지는 매우 불공평하게 분배되었다. 카자흐 집단 내부에도 지주와 부농이 있었으며 이들은 북부 지방의 지주와 부농보다 더 막강했다. 당연히 빈농도 있었다. 모든 카자흐는 국가가 부를 때 자기 말과 무기를 가지고 출두할 의무가 있었다. 부유한 카자흐들은 이 비용을 세금에서 면제되는 것으로 간단히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층민들은 이 부역에 의해 억압을 받았다. 이 기본 자료는 카자흐 사회의 자기 모순적 상태를 충분히 설명한다. 카자흐 하층민은 일반 농민과 아주 가까이 접근했으며 상층부는 지주와 밀접히 접근했다. 동시에 하층민과 상층부는 선택받은 인민이라는 특별한 인식으로 단결했다. 그리고 노동자 뿐 아니라 농민도 깔보는 습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중간층 카자흐들은 반란을 진압하는데 대단히 유용했다.

전쟁 기간동안 카자흐의 젊은 세대가 전선에 있을 때 노인 세대는 보수적 전통을 유지한 채 장교들과 밀착하여 공동체의 상전이 되었다. 카자흐 민주주의를 부활시킨다는 미명 하에 2월 혁명 후 첫 몇 개월 간 카자흐 지주들은 소위 "군대 집단"을 소집하여 일종의 회장인 아타만(수장)을 선출했다. 그리고 이들의 지배 하에 "군대 정부들"을 수립했다. 카자흐 지역에서는 여타 일반인들의 공식 정부위원들과 소비에트들은 권한이 없었다. 왜냐하면 카자흐들은 재산, 물리력, 무장력에서 이들보다 우세했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당은 농민과 카자흐 대표들로 구성된 공동 소비에트를 수립하려고 했으나 카자흐들이 반대했다. 농업혁명이 자기 토지를 빼앗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농업장관이었던 체르노프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카자흐들은 자기 땅을 약간 양보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역 농민들과 보병 병사들이 더욱 자주 카자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당신들은 너무 오랫동안 상전 노릇을 했다." 이것이 후방에 있는 카자흐 지역의 현실이었으며 부분적으로는 수도 주둔군 내에서도 정치적 초점이 되었다. 7월 시위에서 카자흐 기병의 진압 행위는 이로써 해명이 된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1917년 여름에 카자흐 현역군은 162개 연대와 171개 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고향으로부터 분리된 채 전선의 카자흐들은 군대 전체와 함께 전쟁을 경험했다. 그리고 약간 늦기는 했지만 보병과 똑같은 변화를 겪었다. 승리에 대한 신념을 잃었으며 극도의 혼란상에 대해 분노했으며 지휘부에 대해 불평했으며 평화와 고향을 그리워했다. 무려 45개 연대와 65개 대대가 서서히 일선에서 빠져나가 전선에서는 헌병 임무를 후방에서는 경찰 임무를 맡았다! 이들은 다시 헌병과 경찰이 되었다. 병사, 노동자, 농민들은 이들에 대해 불만을 터뜨렸으며 이들에게 자신들이 1905년 혁명 때 맡았던 학살자의 역할을 상기시켰다. 2월에 진압군의 역할에 자부심을 느꼈던 다수의 카자흐들은 이제 마음이 무거웠다. 이들은 자신의 채찍을 저주하며 종종 이것을 무기로 휴대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돈과 쿠반 출신의 카자흐 가운데에는 탈영병이 별로 없었다. 이들은 고향 마을의 노인들이 두려웠다. 일반적으로 카자흐 기병들은 보병보다 훨씬 오랫동안 장교들의 통제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돈과 쿠반 지역에서 전선으로 소식이 날아왔다: 노인들과 함께 카자흐 수장들이 전선의 카자흐에게 상의도 하지 않고 정부를 수립했다. 이 소식은 잠자고 있던 사회적 갈등을 일깨웠다: "고향에 가면 본 때를 보여주겠다." 이것이 전선의 카자흐들이 내뱉은 말이었다. 돈 지역의 반혁명 지도자인 크라스노프 장군은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카자흐 부대들이 서서히 붕괴되는 과정을 생생히 묘사했다: "집회가 열리고 가장 극단적인 결의문들이 통과되었다....이들은 자기 말을 정기적으로 손질하고 먹이는 일을 그만두었다. 진지하게 근무하겠다는 생각이 사라졌다. 이들은 진한 분홍색 밴드로 치장하고 붉은 리본을 맸다. 장교들을 존경하라는 충고는 조금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상태에 최종적으로 도달하기까지 이들은 오랫동안 주저했으며 머리를 긁었다. 어떻게 해야하나? 따라서 결정적인 순간에 특정 카자흐 부대가 어떤 행동을 보일지는 쉽게 추측할 수 없었다.

8월 8일 돈 지역의 군대 집단은 제헌의회 선거를 위해 입헌민주당과 연합했다. 이 소식은 즉시 전선의 군대에 도달했다. 카자흐 장교 야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카자흐 병사들 사이에 이 연합은 아주 부정적으로 비추어졌다. 입헌민주당은 군대 내에 아무런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군대는 입헌민주당을 증오했으며 이들을 대중을 목 조르는 모든 것과 동일시했다. 병사들은 이들을 놀렸다: "고향의 노인네들이 당신들을 입헌민주당에 팔아 넘겼다!" 그러자 카자흐 병사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고향에 가면 본때를 보여주겠다!" 남서 전선에서 카자흐 부대들은 특별 결의문을 채택하여 입헌민주당이 "근로 인민의 불구  대천의 원수이며 억압자"라고 선언했다. 또한 입헌민주당과 감히 협약을 체결하는 자들을 모두 군대 집단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했다.

자신이 카자흐 출신인 코르닐로프는 특히 돈 지역 카자흐 부대들의 도움에 크게 기대었다. 또한 자신의 쿠데타를 주도할 사단을 카자흐 부대들로 채웠다. 그러나 카자흐 병사들은 이 "농민의 아들"을 위해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농촌 주민은 자기 지역에서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해 맹렬하게 싸울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남의 분쟁에 끼어 들 생각은 없었다. 제 3 기병 군단 역시 코르닐로프가 자기에게 보인 희망을 저버렸다. 비록 독일군과의 우애행위에는 시큰둥했지만 뻬쩨르부르그 전선에서 카자흐 병사들은 기꺼이 병사 그리고 수병들과 만났다. 코르닐로프 반란을 유혈사태 없이 붕괴시킨 것은 바로 이 우애행위였다. 이렇게 해서 구 러시아의 마지막 기둥인 카자흐 부대들은 약화되고 붕괴해갔다.

이와 같은 시간에 러시아 국경과는 아주 먼 프랑스 영토에서 러시아군을 "부활"시키려는 실험이 실험실 규모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실험은 볼세비키당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좀더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여름과 가을에 러시아 신문에는 프랑스 주둔 러시아군의 반란을 전하는 긴급 기사들이 실렸으나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기사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혁명이 터지기 전인 1917년 1월까지도 프랑스에 주둔한 2개 러시아 여단 소속 병사들은 장교 리소프스키의 말을 인용하면 "러시아군에게 필요한 탄약 때문에 자신들이 프랑스에 팔렸다고 확신했다." 이들의 생각은 그리 틀리지도 않았다. 이들은 연합국 상전들에 대해서는 "조금의 공감"도 갖지 못했다. 그리고 자기 장교들에게는 조금의 신뢰도 보이지 않았다. 2월 혁명의 소식에 대해 이 수출용 여단 병사들은 정치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장교들이 혁명에 대해 설명할 리는 없었다. 왜냐하면 계급이 높은 장교들일수록 더 놀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망명자들 가운데 민주적 애국자들이 병영에 모습을 드러냈다. 리소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외교관과 위병 연대 장교들 일부가 친절을 베풀어 망명자들에게 의자를 권하는 것이 여러 번 관찰되었다." 연대들은 대표기관을 수립했으며 병사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라트비아인 병사가 곧 도착했다. 여기에서도 "외국인 분자들"이 있었다. 모스크바에서 편성되었으며 전적으로 노동자, 사무원, 영업사원으로 구성되어 일반적으로 노동자와 반(半)노동자의 색깔을 띤 제 1 연대는 혁명 1년 전에 프랑스에 도착했으며 겨울 동안 상파뉴 지방의 전선에서 훌륭히 싸웠다. 그러나 "사기 침체의 질병이 이 연대에 먼저 발병했다." 농민이 많은 제 2 연대는 더 오래 평온을 유지했다. 거의 시베리아 농민들로만 구성된 제 2 여단은 완전히 믿음직해 보였다. 그러나 2월 혁명 직후 제 1 여단이 규율을 깨뜨렸다. 알자스나 로렌을 위해 싸우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신 이들은 새로운 러시아에서 한번 살아보기를 원했다. 이 여단은 후방으로 전출되었고 프랑스의 한 가운데인 깡 라 꾸르띤을 숙영지로 삼았다. 리소프스키가 이렇게 말한다: "조용한 부르주아들의 마을 한 가운데에서 무장을 갖춘 채 장교도 없이 명령을 절대로 거부하는 약 1만 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이 대규모 숙영지에서 완전히 독특하고 특별한 종류의 삶을 영위했다." 코르닐로프는 따뜻한 동조자인 뿌웽까레와 리보의 도움으로 군대의 규율을 회복시키는 자기 방법을 적용할 아주 좋은 기회를 이곳에서 가졌다. 최고사령관은 전보로 명령을 보냈다: 병사들을 규율에 "복종시키고" 살로니카에 보내라. 그러나 반란 병사들은 항복하려고 하지 않았다. 9월 1일 숙영지에 큰 대포가 동원되고 코르닐로프의 위협하는 전보를 인용한 플래카드가 올라갔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문제가 생겨 일이 꼬였다. 코르닐로프 자신이 반역자이자 반혁명 분자로 선언되었다는 소식이 프랑스 신문에 실렸다. 반란 병사들은 확고히 결정했다: 반역자 장군의 명령 때문에 살로니카에서 죽을 이유가 없다. 탄약 때문에 프랑스에 팔린 이 노동자와 농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저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외부의 누구와도 대화를 거부했다. 이때부터 이 숙영지를 떠난 병사는 하나도 없었다.

이제 제 2 여단이 제 1 여단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되었다. 포대가 근처 산기슭에 설치되었고 보병은 공학의 모든 규칙들을 동원하여 라 꾸르띤에 접근로와 참호를 팠다. 주위를 고산 명사수들이 철통같이 에워싸서 러시아의 두 여단이 전투를 벌이는 현장에 프랑스인이 단 한 명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 이렇게 프랑스 군사 당국은 자기 영토를 총검의 울타리로 포위한 후 러시아 내전을 위한 무대를 제공했다. 이것은 예행연습에 불과했다. 나중에 프랑스의 지배 계급들은 러시아 영토에서 내전을 조직하면서 내전 현장을 철조망으로 둘러막았다.

"숙영지에 대한 체계적인 포격이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수백 명의 병사들이 숙영지에서 빠져 나와 항복에 동의했다. 이들의 항복은 받아들여졌고 포격이 즉시 재개되었다. 이 전투 행위는 낮과 밤이 없이 나흘동안 계속되었다. 러시아 병사들은 부대 별로 나뉘어 항복했다. 9월 6일이 되자 목숨이 붙어있는 동안 항복을 원치 않는 병사들이 약 200명이었다. 이들의 선두에는 침례교 광신자인 우크라이나인 글로바가 있었다. 러시아에서라면 그는 볼세비키로 불리었을 것이다. 대포, 기관총, 소총이 한꺼번에 괴성을 내면서 불을 뿜는 가운데 숙영지는 실제로 습격을 받았다. 결국 반란 병사들은 진압되었다. 사상자의 수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법과 질서는 어쨌든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몇 주일만에 제 1 여단을 포격했던 제 2 여단은 사기 침체라는 같은 질병에 걸렸다.

러시아 병사들은 이 무시무시한 질병의 병균을 텐트 배낭, 외투의 안감, 마음 깊은 곳에 묻힌 채 바다 건너 조국으로 갔다. 라 꾸르띤의 극적인 사건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준비된 이상적인 실험이었다. 또한 거의 종 모양의 실험용 유리 그릇 속에 러시아 군대의 내적 변화 과정들을 테스트한 셈이었다. 한편 이 실험의 기초는 러시아의 전체 역사에 의해 준비되어왔다.

 

 

제 12장 상승하는 혁명의 물결

비방이라는 강력한 무기는 양날의 칼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볼세비키들이 독일의 첩자라면 인민의 가장 증오하는 세력이 이 소문을 주로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조국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다고 노동자와 병사들을 비난해온 바로 그 입헌민주당 신문이 볼세비키 비난에는 가장 크고 깨끗한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무엇인가? 2월 봉기 이후 몸을 숨기고 있던 반동 관리자나 엔지니어가 갑자기 튀어나와 볼세비키들을 저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반동적인 장교들이 목에 힘을 주며 연대를 활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레닌 일당"을 비난하면서 병사들이 반역자인 것처럼 이들의 얼굴에 주먹을 대고 위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공장이든 볼세비키들이 있었다. 정비공이나 가구 제작자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독일 첩자처럼 보여, 응?" 노동자들은 그의 이력을 낱낱이 알고 있었다. 화해주의자들도 반혁명 공격에 저항하는 동안 가끔 원래 계획보다 멀리 나가 뜻하지 않게 볼세비키들을 도왔다. 병사 페레이코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느 병사 집회에서 플레하노프의 추종자인 군의관 마르코비치는 레닌이 독일 첩자라는 비방을 반박했다. 레닌의 정치관이 일관되지 않고 재앙만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려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집회가 끝난 후 병사들은 이렇게 말했다: "레닌이 똑똑한 인물이어서 첩자나 반역자가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를 지지한다."

성장이 일시 정지된 후 볼세비키당은 다시 자신 있게 날개를 펴기 시작했다. 8월 중순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보상은 빨리 되고 있다. 추방, 박해, 비방에 시달린 후 우리 당은 가장 빨리 성장했다. 이 현상은 곧 수도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과 군대로 퍼질 것이다....새로운 시련이 닥칠 때 전국의 모든 근로 대중은 자신의 운명을 볼세비키당에 거는 법을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항상 그래왔듯이 수도가 앞장을 섰다. 마치 전능한 빗자루가 공장에서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모든 구석구석에서 화해주의자들의 영향력은 흔적도 없이 청소되었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마지막 남은 조국방어주의 성채들이 함락되고 있다...오부호프스키 거대공장에서 조국방어주의자들이 혼자 활개를 쳤던 때가 오래 전이었는가?...이제 이들은 이 공장에서 감히 얼굴도 못 내민다." 8월 20일 뻬쩨르부르그 시의회 선거에서 55만 명만이 투표에 참여했다. 이 수치는 7월의 지구의회 선거 때보다 상당히 적었다. 37만 5천 표 이상을 잃었지만 여전히 사회혁명당은 20만 표 이상을 얻어 37%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입헌민주당의 득표율은 20%였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멘세비키들은 불쌍하게도 2만3천 표 밖에 얻지 못했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볼세비키당은 거의 20만 표를 획득하여 약 33%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8월 중순 우랄 지역에서 15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노동조합 협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볼세비키당의 정책을 담은 결의문들이 모든 문제들과 관련하여 채택되었다. 8월 20일 키에프의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볼세비키당 결의문은 찬성 161표, 반대 35표, 기권 13표로 채택되었다.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킨 바로 그 순간에 이보노보-보즈네센스크의 민주 시의회 선거에서 전체 102 의석 가운데 볼세비키당은 58석, 사회혁명당은 24석, 멘세비키당은 4석을 얻었다. 크론슈타트에서는 볼세비키당 소속 브레크만이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역시 볼세비키인 포크로프스키는 시장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이와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당의 세력이 하락했다. 그러나 8월 거의 전국에 걸쳐 볼세비키당은 성장하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반란은 대중의 급진화에 강력한 추진력이 되었다. 슬루츠키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맑스의 말을 회상했다: 혁명은 때때로 반혁명의 채찍이 필요하다. 혁명에 가해지는 위협은 대중의 활력 뿐 아니라 통찰력도 일깨웠다. 대중의 집단적 사고는 이제 더 긴장되어 작동했다. 올바른 정치적 결론들을 끌어낼 자료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혁명을 방어하기 위해 연립정부가 필요하다고 전에 선언되었으나 반혁명 세력이 연립정부와 동맹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모스크바 국정협의회는 조국의 단결을 점검하는 행사라고 선언되었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만이 이렇게 경고했다: "국정협의회...는 불가피하게 반혁명 음모의 기구로 전환될 것이다." 이후 사건들은 이 경고가 올바름을 확인시켜주었다. 케렌스키는 이렇게 선언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의 국정협의회는...8월 27일 쿠데타의 서곡이었다....여기에서 세력의 역량이 점검되었다....여기에서 미래의 독재자 코르닐로프가 러시아에 처음 소개되었다...."  자신이 협의회의 주도자, 조직자, 의장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는 말한다. 코르닐로프를 "제 1의 군인"이라고 자기 입으로 소개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말한다. 병사들에 대한 사형 도입이라는 무기를 임시정부가 코르닐로프에게 제공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말한다. 국정협의회에 대한 볼세비키당의 경고를 자기가 참주선동이라고 비난하지 않은 것처럼 그는 말한다.

더욱이 수도의 주둔군은 기억하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반란 이틀 전에 열린 병사 부문 집회에서 볼세비키당은 진보적인 연대들이 수도 밖으로 배치되어 반혁명이 도움을 받고 있다고 의심했다. 이에 대해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 대표들은 위협적인 요구로 응답했다: 코르닐로프 장군의 명령에 대해서는 토론할 생각을 말아라. 이와 같은 정신의 결의안은 이미 도입되어 통과된 뒤였다. 지금 비당파 노동자와 병사들은 틀림없이 이렇게 말하고 있을 것이다: "볼세비키들이 허풍을 떨지는 않았던 것 같다!"        

화해주의자들이 늦게나마 비난하고 있듯이 반란 음모를 꾸민 장군들이 리가를 적에게 넘겨주고 7월 전선의 붕괴에 대한 죄가 있다면 왜 볼세비키들을 괴롭히고 병사들을 처형하는가? 군대의 밀정들이 8월 27일 노동자와 병사들을 거리로 유도했다면 이들은 7월 4일의 유혈 충돌에도 역할을 하지 않았는가? 더욱이 이 모든 사건들에 대한 케렌스키의 입장은 무엇이었는가? 누구에 대항하여 그는 제 3 기병군단을 호출했는가? 왜 그는 사빈코프를 주지사로 필로멘코를 부지사로 임명했는가? 통령 후보인 필로멘코는 누구인가? 예상외로 대답은 장갑차 사단에서 나왔다: 이 사단에서 대위로 복무한 필로멘코는 병사들을 최악으로 멸시하고 모욕했었다. 사기꾼 자보이코는 어디서 왔는가? 일반적으로 최고 상층부에 사기꾼들이 이렇게 모여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실들은 단순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고 알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것들을 부정할 수도 없었다. 사실들은 이렇게 치명적이었다. 야만 사단의 대형, 끊어진 철도, 동궁과 전쟁 총사령부의 상호 비난, 사빈코프와 케렌스키의 증언 등은 모두 자명했다. 이것들은 화해주의자들과 이들의 정부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기소 내용이다! 볼세비키당을 탄압한 이유는 완전히 해명되었다: 쿠데타를 준비하기 위해 탄압은 반드시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알기 시작한 노동자와 병사들은 격심한 부끄러움에 사로잡혔다. 악질적인 비방 때문에 레닌은 몸을 숨기고 있다. 입헌민주당, 장군, 은행가, 연합국 외교관 등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볼세비키들이 감옥에 갇혀있다. 볼세비키들은 출세꾼이 아니며 연립정부 주식회사에 합류하기를 거부했다.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그렇게도 심하게 증오를 받고 있다! 이것이 억압당하고 순진하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의 결론이었다. 볼세비키들에 대한 죄의식과 결합된 이 감정은 당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충성심과 당 지도자들에 대한 신뢰감으로 바뀌었다.

나이 많은 병사, 군대의 상비 인력, 하사관 등은 모든 힘을 다해 마지막까지 대세에 저항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투적 노고, 희생, 영웅적 행위 등 모든 것을 무로 돌리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다 허사란 말인가? 그러나 마지막 버팀대가 무너지자 이들은 볼세비키당 쪽으로 급격히 쏠렸다. 이제 이들은 혁명의 편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하사관 계급장, 전투로 단련된 병사의 의지와 튀어나온 턱 근육 등이 혁명에 합류했다. 이들은 속아서 전쟁에 가담했으나 이번에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끝장을 볼 각오를 다졌다.

지역의 군사 및 민간 당국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 당시 볼세비키주의는 모든 종류의 대중활동, 모든 종류의 단호한 요구, 착취에 대한 모든 저항, 모든 진보운동의 동의어가 되었으며 혁명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파업 노동자, 항의하는 수병, 불만에 가득 찬 병사의 부인, 들고 일어선 농민 등은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들이 볼세비키주의란 말인가? 화해주의 상층부의 배신적 정책 때문에 대중은 자신들에게 아주 소중한 생각과 요구들을 볼세비키의 구호들과 동일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혁명은 자기에게 겨누어진 칼을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이용했다. 역사 발전이 요구할 경우 이성은 비(非)이성으로 전화될 뿐 아니라 비이성도 이성으로 전화된다.

8월 30일 열린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정치적 분위기가 역전되었다는 사실이 아주 명확히 드러났다. 크론슈타트 대표들은 집행위원회에 의석을 요구했다. 억눌릴 수 없는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비난하고 따돌렸던 이 기구가 이들에게 자리를 내줄 수 있을까? 그렇지만 이들을 거부할 방법이 있는가? 어제만 해도 크론슈타트의 수병과 병사들은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달려왔다. 순양함 오로라호의 수병들은 지금 동궁을 지키고 있다.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눈 후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에게 표결권이 없는 참관 의석 4개를 제공했다. 그러나 수병들은 감사의 표시가 없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이 양보조치를 수락했다.

모스크바 주둔군의 병사 치네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코르닐로프 쿠데타 이후 부대들은 모두 볼세비키당에 동조했다....코르닐로프 장군이 곧 뻬쩨르부르그의 문 앞에 도착할 것이라는 볼세비키당의 예언이 현실로 드러나자 모두들 크게 충격을 받았다." 장갑차 사단의 병사 미트레비치는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후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영웅적 전설을 회상한다: "용감성과 위대한 행위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렇게 용감하다면 전 세계에 대항해 싸울 수 있다는 식이었다. 이제 볼세비키당은 실체를 인정받았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난 날 감옥에서 풀려난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즉시 헬싱키로 돌아갔다. "대중 사이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후였다."고 그는 말한다. 핀란드 소비에트의 지역 대회에서 사회혁명당 우파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볼세비키당은 사회혁명당 좌파와 연합하여 다수파가 되었다. 스밀가가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단히 젊은 나이에 볼세비키당 중앙위원이 되었으며 좌로 나가려는 강한 충동을 드러냈다. 그는 이미 4월에 임시정부를 타도하려고 했다. 주둔군과 러시아 노동자들에 기초한 헬싱키 소비에트의 의장에는 볼세비키 샤이네만이 선출되었다. 그는 이후 소비에트 중앙은행 총재가 되었는데 조심성 있고 관료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그는 다른 지도자들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자신이 해산시킨 핀란드 의회를 핀란드인들이 다시 소집하는 것을 금지시켰었다. 지역 위원회는 의회 소집을 제안해 놓았고 이 제안을 지키겠다고 자발적으로 나섰다. 핀란드에서 여러 부대들을 철수시킨 임시정부의 명령을 이 위원회는 거부했다. 여기서 볼세비키당은 이미 소비에트 독재 체제를 수립해 놓았다.

9월초 볼세비키당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전국의 도시에서 당 조직이 최근 급격히 성장했다는 소식이 올라오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의 광범위한 민주적 대중 내에 당의 영향력이 성장했다는 사실이 더 의의가 크다." 에카테리노슬라브의 볼세비키 당원 아베린은 이렇게 적고 있다: "처음에 우리말을 들으려 하지 않던 공장들이 코르닐로프 반란 때문에 우리편이 되었다." 사라토프의 볼세비키당 지도자 안토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칼레딘이 짜리친과 사라토프를 공격하기 위해 카자흐 기병을 동원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 소문이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란으로 확인되고 강화되자 대중은 며칠만에 이전의 편견을 벗어 던졌다."

9월 19일 키에프의 볼세비키당 신문은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선거에서 무기고에 근무하는 12명의 동지들이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들은 모두 볼세비키였다. 멘세비키 후보들은 모두 패배했다. 다른 공장에서도 연이어 이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의 전보들이 매일 노동자 신문들을 장식하고 있다. 적대적인 신문들은 볼세비키당의 성장을 최대한 축소 보도하거나 보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도약하고 있는 대중은 전에 보였던 동요, 주저, 일시적 후퇴를 만회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곳에서 끈질기고 되돌릴 수 없는 밀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 바바라 야코블레바는 7월과 8월에 볼세비키당이 모스크바 지역 전체에서 대단히 약화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었다. 이제 그녀는 협의회 보고에서 급격한 변화를 증언하고 있다: "9월 후반부에 지역 사무국의 노동자들이 지역을 순회했다....이들의 느낌은 절대적으로 동일했다; 모든 곳에서 대중의 볼세비키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농촌도 똑같이 볼세비키당을 원했다...." 7월 시기 직후 당 조직이 와해되었던 지역에서는 조직이 소생하여 급격히 성장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이 허락되지 않았던 지구들에서는 당 중핵이 자발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보루인 탐보프스키와 라이잔 도는 후진적인 지역이었다. 예전에 볼세비키들은 완전히 절망하여 이 지역의 조직을 포기했었다. 이제 이곳에서도 진짜 혁명이 진행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은 나날이 급격하게 성장하고 있었고 화해주의 조직들은 해체되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난 지 한 달 후 그리고 볼세비키당의 무장봉기가 일어나기 한 달 전에 모스크바 지역에서는 볼세비키당 협의회가 열렸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대의원들은 자신감과 열성이 가득한 보고를 했다.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두 달간의 쇠퇴 후 당이 다시 건강을 되찾았다. 사회혁명당 노동자들이 수백 명씩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트베르에서는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에 광범위한 당 활동이 시작되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붕괴하고 있었다. 아무도 이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들은 쫓겨나고 있었다. 블라디미르 도에서 볼세비키당은 세력이 너무 커져서 도 소비에트 대회에서 멘세비키는 5명 사회혁명당은 3명밖에 없었다. 러시아의 맨체스터라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소비에트, 의회, 젬스트보는 전부 볼세비키당의 무대였다. 당은 반정도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볼세비키 당 조직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에 대한 당의 영향력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이 증대되고 있었다. 당의 왜소한 실무적 자원과 거대한 정치적 영향력 사이의 괴리는 극히 적은 당원 수에서 드러났다. 대중은 너무 강력하고 빠르게 사건들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어서 당 기구로 조직될 시간이 없었다. 대중에게는 심지어 특별 당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할 시간마저 없었다. 이들은 공기를 숨쉬듯이 자연스럽게 볼세비키 구호들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이 구호들이 집단적 경험에 기초하여 제출되는 복잡한 실험실이 당이었지만 대중에게는 이 사실이 명확히 이해되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2천만 명이 넘는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다. 10월 혁명 전야에 당원이 24만 밖에 되지 않았지만 당은 더욱 자신 있게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등을 통해 다수 대중을 지도하고 있었다.

온갖 다양한 지역 조건과 정치적 수준을 가진 채 뿌리째 뒤흔들리는 이 광대한 나라 전역에는 매일 선거들이 열렸다. 의회, 젬스트보,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군대위원회, 토지위원회 등등. 그리고 이 모든 선거에는 볼세비키당의 성장이라는 확고한 사실이 붉은 실타래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스크바시 구 의회 선거는 대중의 급격한 정서 변화를 특히 확연히 드러내면서 전국을 놀라게 했다. "거대" 정당인 사회혁명당은 6월에는 37만 5천 표를 얻었으나 9월말에는 5만 4천 표밖에 얻지 못했다. 멘세비키당은 7만 6천 표에서 1만 6천 표로 완전히 찌그러졌다. 입헌민주당은 8천 표만 잃은 채 10만 1천 표를 얻었다. 반면 볼세비키당은 7만 5천 표에서 19만 8천 표로 급상승했다. 6월에는 사회혁명당이 58%의 득표율을 기록했는데 9월에는 볼세비키당이 약 5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주둔군의 90%가 볼세비키당에 투표했다. 일부 부대에서는 지지율이 95%를 넘었다. 대형 대포를 만드는 어느 공장에서 볼세비키당은 2,347표 가운데 2,286표를 얻었다. 그러나 투표율은 상당히 낮아졌다. 환상을 가지고 있을 때 화해주의자 대오에 합류했던 다수의 소도시 주민들이 이후 정치적으로 소멸했기 때문이었다. 멘세비키들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사회혁명당은 입헌민주당 표의 반 밖에 얻지 못했다. 그리고 입헌민주당은 볼세비키당 표의 반 밖에 얻지 못했다. 볼세비키당의 9월 득표율은 다른 모든 정당들에 대항한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다. 볼세비키당의 표들은 강력한 표들이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다. 중간 계급들의 전멸, 부르주아 진영의 상당한 안정, 가장 증오의 대상이었으며 탄압을 당한 노동자 정당의 거대한 성장 --- 이것은 혁명적 위기의 증상이 틀림없었다. 산산조각 난 멘세비키당의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렇다, 볼세비키들은 열성적으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이들은 대중과 공장 가운데 언제나 있었다....이들은 공장과 병영의 일상에서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지도하면서 항상 대중과 함께 있었다. 대중은 볼세비키당과 함께 살고 함께 숨쉬었다. 이들은 레닌과 트로츠키의 당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한편 전선에서는 정치적 상황이 좀더 다양했다. 볼세비키당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연대와 사단들이 있었다. 이들의 다수는 자신들이 볼세비키라고 비난받자 진짜 황당해 했다. 반면 흑백인조의 반동적 특성 일부와 무정부적 정서를 보인 일부 사단들은 자기들을 순수한 볼세비키라고 잘못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선의 정서는 한 방향으로 정리되고 있었다. 다만 참호의 병사들을 통로로 삼은 정치적 물살 속에는 소용돌이, 역류, 일시적 급류 등이 다수 존재했다.

9월에 볼세비키당은 출입금지 선을 깨고 지난 2개월 간 완전히 단절되었던 전선과 접촉했다. 이때까지도 볼세비키를 거부한다는 공식 명령은 없어지지 않았다. 군대의 화해주의 위원회들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볼세비키들을 부대에서 몰아내려고 애썼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들은 수포로 돌아갔다. 병사들은 "볼세비키주의"에 대해 너무도 많은 얘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진짜 볼세비키를 보고싶어 모두 안달이었다. 볼세비키 한 명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도착하자마자 화해주의 위원회들이 생각해낸 공식적 장애물, 지연, 복잡한 절차 등은 병사들의 우격다짐으로 전부 제거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 뛰어나게 활동하던 노장 혁명가 에프게니아 보쉬는 병사들의 원시적 정글에 대담하게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 경험에 대해 아주 훌륭한 회고록을 남겼다. 그녀의 친구들은 그녀의 활동 계획에 대해 진지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 겁먹은 경고를 했었다. 그러나 이 경고는 모든 곳에서 반박되었다. 볼세비키당에 대해 지독하게 적대적이라던 사단들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자신의 주제를 다룬 이 여성 웅변가는 병사 청중이 그녀와 같은 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기침 소리, 가래침 뱉는 소리, 코푸는 소리 등 따분하다는 신호는 전혀 없었다; 정숙과 질서는 완벽했다." 이 대담한 선동가를 기리는 열렬한 박수갈채가 집회의 끝을 장식했다. 일반적으로 에프게니아 보쉬의 전선 순회는 모두 일종의 개선 행진이었다. 그녀보다 수준이 떨어진 다른 선동가들의 경험도 덜 영웅적이고 덜 효과적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같은 결과를 가져왔다. 새로운 방식, 새로운 구호, 새로운 일반화로 설득력을 갖춘 새로운 사상들이 참호의 정체된 일상 속에 박차고 들어왔다. 사건들의 자극에 의해 수백만 병사들의 두뇌가 팽팽히 회전하면서 이들의 정치적 경험을 결산하고 있었다. 전선의 어느 병사는 당 신문의 편집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노동자 병사 동지 여러분, 전 세계를 유혈 살육의 장으로 팔아 넘긴 그 악질적인 첫 글자 케이(K)를 그대로 내버려두면 안됩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카인, 콜카(니콜라스 2세), 케렌스키, 코르닐로프, 칼레딘, 카데트(입헌민주당) 등이 이들입니다. 코사크(Kossack)도 우리에게 위험한 놈입니다.... 시도르 니콜라이예프 올림." 케이 자로 시작되는 이름의 나열에는 미신의 여지가 없었다. 이것은 단순히 정치적인 기억 증진법이었다.

전쟁 총사령부에서 시작된 코르닐로프의 반란은 병사들의 모든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외적인 규율을 회복시키려는 시도는 그 동안에 이미 많은 희생자를 냈었다. 이번에도 이 시도는 사방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있었다. 서부 전선의 군사 정부위원 즈다노프는 이렇게 보고했다: "병사들의 일반적 정서는 장교들을 참지 못하고, 의심하고, 때를 기다리는 행위로 나타났다. 이들은 명령을 거부하면서 코르닐로프의 명령이므로 당연히 따를 수 없다고 설명한다." 군사 최고위원직을 필로멘코로부터 넘겨받은 스탄케비치 역시 같은 요지로 이렇게 적고 있다: "병사 대중은 반역자들에 의해 포위되었다고 생각했다....이 생각을 바꾸어 주려는 자는 모두 반역자로 보였다."

고위 장교들에게 코르닐로프 반란의 붕괴는 마지막 희망의 붕괴였다. 반란이 실패하기 전에도 러시아군 지휘부는 별로 자신감이 없었다. 8월의 마지막 며칠동안 수도의 군사 음모자들은 술에 취하고 허풍 떨고 의지가 박약했던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제 장교들은 완전히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꼈다. 어느 장교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증오, 그 괴롭힘, 그 완벽한 수동성, 체포와 부끄러운 죽음에 대한 그 영원한 예감 등에 견디지 못한 장교들은 도로변의 술집, 개인 식당, 호텔 등으로 향했다....술에 찌든 분위기 속에 장교들은 푹 빠졌다." 이와 대조적으로 병사와 수병들은 어느 때보다 정신이 또렷했다. 이들은 새로운 희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머리를 높이 들고 다니면서 볼세비키들은 자신들이 군대의 완전한 주인이라고 느꼈다. 하급 위원회들은 볼세비키 중핵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군대의 모든 선거는 볼세비키당의 놀라운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더욱이 북부전선 뿐 아니라 아마 러시아 전선 전체에서 가장 규율이 잘 잡힌 제 5군단은 최초로 볼세비키 군대 위원회를 선출했다. 이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한편 함대는 더욱 명확하고 간명하고 화려하게 볼세비키가 되고 있었다. 9월 8일 발트해 수병들은 노동자 농민에게 권력을 넘기는 투쟁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로 모든 군함에 전투 깃발을 올렸다. 함대는 모든 전선에서 즉시 전투를 중지할 것, 토지를 농민위원회에게 넘길 것,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시행할 것 등을 요구했다. 이로부터 3일 후에는 좀더 후진적이고 온건한 흑해함대 중앙위원회가 발트해 수병들의 요구를 지지하면서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채택했다. 제 12 군단의 제 23 시베리아 연대와 라트비아인 보병 연대 역시 9월 중순 같은 구호를 채택했다. 다른 사단들도 꾸준히 뒤를 이었다. 이때부터 군대나 함대에서 소비에트 권력 요구는 결코 일정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수병 집회의 90%는 볼세비키들로만 이루어졌다."고 스탄케비치는 말한다. 신임 수석 정부위원이 레발의 수병들 앞에서 임시정부 지지 발언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첫 마디를 뗄 때부터 이 시도가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정부"라는 말 한마디에 수병들은 적대감으로 뭉쳤다: "분노, 증오, 불신의 물결이 즉시 군중 전체를 사로잡았다. 이들은 명확하고 강력하고 열정적이었으며 억누를 수 없었다. 이들은 단 하나의 일치된 고함으로 외쳤다: '정부를 타도하라!'" 자기를 죽일 것처럼 적대적인 군중의 비난 앞에서도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지 않은 스탄케비치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2개월 동안 지하로 몰려난 평화의 문제는 이제 10배의 힘으로 등장한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회의에서 전선에서 막 도착한 장교 두바소프는 이렇게 선언한다: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무슨 말을 하든 병사들은 더 이상 싸우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회의 참석자들이 응답한다: "볼세비키들도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볼세비키가 아닌 두바소프가 응수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병사들이 전하라고 지시한 것을 말할 뿐이다." 참호의 오물과 악취로 절은 긴 회색 외투를 입은 우울한 병사 한 명도 9월에 선언했다: 병사들은 어떤 종류든 평화가 필요하며 심지어는 "품위 없는 평화조차" 필요하다. 병사의 이 거친 말에 소비에트는 겁을 집어먹었다. 사태는 이렇게까지 진전되었다! 전선의 병사들은 어린애가 아니었다. "전쟁 지도"가 나타내는 지금의 전황으로 보면 오직 억압자들만이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다. 이 점을 병사들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참호에서 막 나온 이 병사 대표는 최대한 거친 말을 사용하여 독일이 체결할 평화조약에 대한 자신의 혐오감을 힘껏 표현했다. 마음을 이렇게 솔직하게 털어놓는 것을 통해 이 병사는 소비에트 대의원들에게 확실히 이해시켰다: 다른 방법은 없다; 전쟁 때문에 병사들은 막가파 식이 되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금 즉시 평화가 필요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참호에서 온 이 연설자의 말을 악의에 찬 기쁨으로 수집한 후 이것이 볼세비키의 말이라고 둘러대었다. 이후 유산계급들은 품위 없는 평화라는 말을 인민의 야만성과 비도덕성의 극단적인 표현이라고 계속 선전해 대었다!

투쟁의 밀물이 보여주는 아름다운 순간을 정치 아마추어 스탄케비치는 경탄하여 바라보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화해주의자들은 이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이 밀물이 혁명투쟁의 무대에서 자신들을 쓸어가 버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매일 매일 놀라움과 공포에 떨면서 이 대세에 저항할 힘이 자신들에게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인식했다. 사실 화해주의자들에 대한 대중의 신뢰 속에는 혁명의 첫 순간부터 오해가 숨겨져 있었다. 이 오해는 역사적 상황으로 보면 불가피했으나 오래 갈 수 있는 성질은 아니었다. 단지 몇 달만에 이 오해는 해소되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집행위원회 특히 동궁의 언어와는 다른 언어로 이제 노동자 병사들과 대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의 책임 있는 지도자들은 한 주 두 주가 지나면서 공개 석상에 나타나는 것을 더욱더 두려워했다. 이들 대신 2류 내지 3류 선동가들이 애매한 표현을 사용하여 인민의 급진화에 영합하였다. 또는 이들은 공장, 광산, 병영의 정서에 진짜로 동화되어 대중의 정치적 소망을 표현하면서 소속 당에서 이탈했다.

자기가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생각한 수병들이 실제로는 볼세비키 강령을 옹호하는 경우를 수병 호브린이 그의 회고록에 적었다. 이것은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대중은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알고는 있었으나 이것의 이름을 몰랐을 뿐이었다. 2월 혁명의 핵심이었던 "오해"는 대중에게 흔했다. 특히 농촌에서는 이 오해가 도시보다 더 오래갔다. 오직 경험만이 이 혼란에 질서를 부여할 수 있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대중 정당들을 끊임없이 뒤흔들면서 당원들은 당의 간판에 가려져 있는 당의 진정한 정책을 꿰뚫어 보았다.

대중이 화해주의자들에게 가한 보복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있다. 7월초에 도네츠 지역의 2천여 광부들은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은 채 5천 명의 사람들 앞에서 선서를 했다. "우리 자식들, 신, 땅과 하늘, 신성하다고 간주하는 모든 것들에 걸고 1917년 2월 28일 우리의 피로 찾은 우리의 자유를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을 믿으며 레닌주의자들의 말을 결코 듣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왜냐하면 볼세비키 레닌주의자들은 선동을 통해 러시아를 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통일된 목소리로 보상 없이 토지를 몰수하여 인민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자본주의 사회는 무너지고 대신 사회주의 사회가 수립되어야 합니다....이 정당들의 지도 하에 전진할 것을 맹세합니다. 죽음도 우리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볼세비키당을 겨냥한 광부들의 이 맹세는 곧바로 볼세비키 혁명으로 나아갔다. 2월 혁명의 껍데기와 10월 혁명의 속이 이 순진하고 열정적인 그림에 너무 명확히 드러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연속혁명의 문제 전부를 제시하고 있다.

9월이 되면 도네츠 지역의 광부들은 자기 이익이나 맹세를 배신하지 않은 채 화해주의자들에게는 이미 등을 돌린 후였다. 우랄 지역 광부들의 가장 후진적인 대오도 이미 도네츠 광부들을 따라갔다. 사회혁명당원이자 집행위원인 오제고프는 우랄 지역의 대표로 8월초 자신이 소유한 이제프스키 공장을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보고서에 이렇게 슬픈 사연을 적었다: "내가 없는 동안 일어난 급격한 변화에 나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8천 명의 당원 수와 활동으로 우랄 지역 전체에 알려졌던 사회혁명당 조직은 무책임한 선동가들 때문에 이제 500명밖에 남지 않았다."

오제고프의 보고서는 집행위원회를 놀라게 하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7월 사태 직후 사회혁명당은 일시적으로 공장에서 선두주자가 되었으며 일부 지역에서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이후 이 정당의 쇠퇴는 더욱 급격했다. 나중에 사회혁명당의 젠지노프가 이렇게 적었다: "물론 7월에 케렌스키 정부는 사태를 장악했고 볼세비키 시위자들은 흩어졌으며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그리스의 피루스 왕이 거둔 무늬만의 승리였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피루스 왕처럼 화해주의자들은 군대를 잃고 승리를 얻었기 때문에 한번만 더 승리하면 피루스 왕의 말처럼 망할 지경이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노동자 스코린코는 이렇게 적고 있다: "7월 3일과 5일 전에는 일부 지역에서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노동자들 앞에 나타나도 휘파람 야유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을 보장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이들에게는 보장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사회혁명당은 영향력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당의 구성원도 바뀌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볼세비키당으로 이미 넘어갔거나 화해주의 정당을 이탈하면서 내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반면에 전쟁 중에 공장에서 몸을 숨기며 전선을 피했던 상점주인, 부농, 하급 관리 등의 아들들은 숨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가 사회혁명당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9월에는 이들조차 최소한 수도에서는 사회혁명당원이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웠다. 노동자와 병사 그리고 일부 지방에서는 농민들도 사회혁명당을 이미 버린 후였다. 이제 이 정당에는 보수적이고 관료적인 속물들만이 남았다.

혁명에 눈 뜬 대중이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을 신뢰했을 때 이 정당들은 인민의 높은 지적 능력을 지치지 않고 칭송했다. 혁명 사건들의 학교를 거친 동일한 대중이 볼세비키당으로 급격하게 몰리자 화해주의 정당들은 인민의 무식 탓으로 자신들의 붕괴를 설명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전보다 더 무식해졌다는 주장에 대중은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이와 반대로 이들은 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시들고 약화된 사회혁명당은 구성 성분에 따라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당원들을 적대 진영으로 내던졌다. 농촌의 들판과 마을에는 볼세비키들과 함께 그리고 보통 이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정부 내 사회혁명당 지도자들의 공격에 대항해 자신들을 지켜왔던 사회혁명당원들이 있었다. 두 진영 사이의 격화된 투쟁은 두 진영 사이에 중간 그룹을 형성시켰다. 체르노프가 주도하는 이 그룹은 탄압자와 피탄압자를 단결시키려했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 뒤엉키면서 가망 없는 그리고 종종 황당한 모순에 봉착했다. 이 결과 이 그룹은 당을 더욱 훼손시켰다. 대중 집회에 모습을 보이기 위해 사회혁명당 연설자들은 자신들을 "좌파", 국제주의자로 포장한 후 "3월의 사회혁명당" 파벌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좋은 분자들이라고 끈질기게 자신들을 미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시기 후 사회혁명당 좌파는 공식적으로 당과 결별은 하지 않은 채 공개적으로 당을 반대했다. 그리고 늦게나마 볼세비키당의 주장과 구호들을 채택했다. 9월 21일 트로츠키는 교육적 의도를 숨긴 채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볼세비키당이 사회혁명당 좌파와 합의하는 것이 더욱 쉬워지고 있다." 결국 좌파는 독자 정당으로 분립하면서 혁명의 역사책을 아주 환상적으로 장식했다. 이 조직은 자족적인 지식인들이 드러낸 급진주의의 마지막 불꽃이었다. 그리고 10월 혁명 후 몇 달이 지나자 이 조직에게 남은 것은 타다 남은 재 한 움큼뿐이었다.       

멘세비키당도 크게 분화했다. 당의 뻬쩨르부르그 조직은 중앙위원회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체레텔리가 주도한 핵심 부위는 사회혁명당과 같은 농민 대중의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더 빨리 녹아 없어졌다. 볼세비키당과 멘세비키당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던 사회민주주의 중간 그룹들은 아직도 두 정당을 통합시키려했다. 이들은 여전히 3월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때에는 스탈린조차 체레텔리와 연합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면서 "당내의 사소한 이견을 참고 넘길 수 있다"고 믿었었다. 8월 후반부에 통합을 주창하는 분자들은 멘세비키들과 통합했다. 이들의 합동회의에서 우파는 압도적인 다수였다. 이 때문에 전쟁의 지속과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을 찬성하는 체레텔리의 결의안이 찬성 117표, 반대 79표의 차로 통과되었다. 당내에서 체레텔리는 승리했지만 노동계급 내부에서 당의 패배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극히 적은 수의 노동자들로 구성된 뻬쩨르부르그 조직은 마르토프를 추종하면서 그를 밀고 갔다. 그러나 그의 머뭇거림에 짜증난 이들은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갈 준비를 했다. 9월 중순 바실리 섬 지구의 조직은 거의 통째로 볼세비키당에 합류했다. 이 사건으로 다른 지구와 도들에서 볼세비키 선동이 촉진되었다. 멘세비키당 내 경향들의 지도자들은 합동회의에서 당을 파괴했다고 서로 비난했다. 멘세비키당의 좌에 위치한 고리키의 신문은 9월말에 이렇게 말했다: 좀 전에만 해도 당원이 1만 명이었던 멘세비키 뻬쩨르부르그 조직은 "실제적으로 존재를 마감했다....마지막으로 열린 뻬쩨르부르그 당협의회는 정족수의 부족으로 회의를 할 수 없었다."

플레하노프는 멘세비키들을 오른 쪽에서 공격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체레텔리와 그의 친구들은 알지도 못하고 원치도 않은 채 레닌의 노선을 준비해왔다."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9월의 혁명적 밀물 속에서 체레텔리가 보인 정치적 모습을 명확하게 묘사했다: "이때 그가 보인 정서의 가장 큰 특징은 볼세비키당의 상승에 겁을 먹은 것이었다. 볼세비키당의 권력 장악 가능성에 대해 그가 터놓고 나에게 얘기한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물론 그들은 2주일이나 3주일 이상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초래할 파괴를 생각만 해보아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것만은 막아야 한다.'라고 그는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진짜 공포에 질린 경악의 음조가 깔려있었다...." 2월에 나보코프가 경험한 정서를 체레텔리는 10월 이전에 경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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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당은 사회혁명당, 멘세비키당과 나란히 존재했으나 끊임없이 이들과 충돌했다. 소비에트 정당들의 상대적 역관계의 변화는 불가피한 시간차와 인위적인 지연 등으로 소비에트의 구성이나 사회적 기능에 즉시 그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7월 시기 이전에 다수의 도 소비에트들은 이미 권력기관이 되어있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루간스크, 짜리친, 헤르손, 톰스크, 블라디보스톡 등의 도에서는 공식적이 아니더라도 사실상 그리고 계속적이 아니더라도 간간이 소비에트가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는 아주 독자적으로 개인 소비품의 구입을 위해 카드제도를 시행했다. 사라토프의 화해주의 소비에트는 경제적 분쟁에 개입하고 제조업자들을 체포했다. 또한 벨기에인의 전차를 몰수하고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실시했으며 자본가들이 내버린 공장에서 생산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05년 이후 볼세비키당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던 우랄 지역에서는 소비에트들이 빈번히 민간 법정을 운영하고 여러 공장에서 민병대를 조직했다. 또한 공장의 현금상자에서 장비 사용료를 지불하고 원자재와 연료를 수집하는 노동자 감시단을 조직했으며 완제품의 판매를 감독하고 임금 체계를 확립했다. 우랄 지역의 일부 지구에서 소비에트는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여 집단적으로 경작했다. 심스크 금속공장에서 소비에트는 지역 공장관리국을 조직했다. 이 기구는 전반적인 관리, 현금 상자, 회계, 판매 부서 등을 책임졌다. 이렇게 하여 심스크 금속지구에는 대체로 국유화가 이미 성취되어 있었다. 이 자료들을 제공한 엘친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미 7월에 우랄 지역의 공장에서 볼세비키당은 모든 것들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농업 등의 분야에서 문제 해결의 모범을 제시하고 있었다." 이 사회주의 교습들은 원시적이었다. 하나의 체계로 정리되지도 않았고 이론에 의해 해명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많은 측면에서 이 교습들은 미래에 걸어야할 길을 제시해주었다.

7월 시기는 당이나 노동조합보다 소비에트에 더 심한 타격을 가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투쟁은 주로 소비에트의 생사와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당과 노동조합은 "평화"기와 어려운 반동기에 모두 나름의 의의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와 방식은 시기에 따라 변했지만 기본 기능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혁명적 상황에서만 생존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혁명적 상황이 끝나면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노동계급 대다수를 단결시킨 소비에트는 모든 개인, 그룹, 길드의 필요를 초월하는 그리고 임금 문제, 일반적인 개혁과 개량의 문제를 초월하는 문제를 노동계급에게 제시했다. 한마디로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에게 권력 장악의 문제를 제시했다. 그러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호는 노동자와 병사들의 7월 시위와 함께 패배한 것처럼 보였다.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당을 약화시킨 이 패배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권력기구인 소비에트 자체를 약화시켰다. "구국 정부"는 독자적인 관료집단의 부활을 의미했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포기하는 것은 소비에트가 정부위원 앞에서 모욕당하고 약화되고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7월 패배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의의는 쇠퇴했다. 이 현상은 생생하게 겉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화해주의자들에게 집행위원회가 입주한 타우리데 궁전을 비워줄 것을 요구했다. 제헌의회를 소집하기 전에 보수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귀족의 딸들이 교육을 받았던 스몰니 학원 건물이 7월 전반부에 소비에트 활동을 위해 마련되었다. 이제 부르주아 언론은 소비에트가 "하얀 비둘기들"의 집을 차지하는 것을 비방했다. 볼세비키당이 크쉐신스카야 궁전에 입주했던 것에 대한 비방과 같은 논조였다. 징발된 건물에 입주했던 노동조합을 비롯한 다양한 혁명 조직들도 주택 부족의 문제를 이유로 동시에 비난받았다. 부르주아 사회가 소유하는 대단히 널찍한 건물들로부터 노동자 혁명을 몰아낼 심산이었다. 물론 때가 약간 늦었지만 입헌민주당 언론의 분노는 끝이 없었다. 인민이 시설을 부수고 개인과 국가 재산권을 짓밟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7월말 식자 노동자들을 통해 예상 밖의 사실이 드러났다. 악명 높은 의회위원회 주위로 유산계급의 정당들이 모여 있었다. 이미 오래 전에 부유한 국가인쇄소와 그 부속 전보 시설 및 무료 송달 특권 등을 개인적 용도로 이들이 점유해왔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입헌민주당의 선동 팜플렛은 공짜로 인쇄되었을 뿐 아니라 톤 단위로 무료 배포되었다. 더욱이 이것도 전국에 걸쳐 우선적 권리를 누렸다. 이 비난을 검토할 필요가 있었던 집행위원회는 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입헌민주당은 새로운 주제를 찾아낸 후 또 분노를 터뜨렸다. 파괴의 목적으로 정부 건물을 점유하는 것과 국가의 가장 위대한 보물들을 방어하기 위해 국가 재산을 사용하는 것을 한 순간이라도 같은 범주에 놓을 수 있는가? 한 마디로 신사양반들이 약간 가볍게 손가락을 놀려 국가 재산을 강도질을 했다면 이것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한 일이다. 그러나 이 주장이 모두에게 설득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건설 관련 직종들은 자신들의 노동조합을 위해 건물을 사용할 권리가 입헌민주당이 국가인쇄소를 이용할 권리보다 더 우위에 있다고 완고하게 믿었다. 이 견해 차이는 우연히 생기지 않았다. 이것은 곧바로 제 2의 혁명으로 나아갔다. 어쨌든 입헌민주당은 이제 세 치 혀를 약간 물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행위원회는 8월 후반기에 볼세비키당의 세력이 북부 지역보다 훨씬 약한 남부 지역의 소비에트들을 순회하도록 연사들을 보냈다. 이 가운데 한 명이 마음을 무겁게 하는 순회 보고를 했다: "정치적 정서가 뚜렷이 변하고 있다....임시정부의 정책 변화 결과 대중 상층부의 혁명적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대중 사이에 혁명에 대한 피곤함과 무관심이 느껴진다. 소비에트에 대한 냉랭함이 뚜렷하다....소비에트의 기능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다...." 자기가 보낸 민주적 대표들의 동요에 대중이 싫증을 내고 있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이 아니라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에 대해서 냉랭했다. 모든 강령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실제로 화해주의 소비에트에 있었던 지역에서는 특히 참을 수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집행위원회는 관료집단 앞에서 굴복했다. 이 상황에 완전히 엉켜서 지도자들은 권력을 사용할 엄두를 감히 내지도 못했다. 그리고 대중의 눈앞에서 소비에트의 기능을 훼손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더욱이 일상 활동의 상당 부분은 소비에트에서 민주적 자치단체로 그리고 더 많게는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로 넘어간 후였다. 소비에트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갈수록 불투명해졌다. 그리고 미래에 소비에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수립된 후 첫 몇 개월 동안 소비에트는 다른 모든 조직들을 크게 앞질렀다.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클럽 등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아하고 이 조직들의 활동을 지도했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탄생시킨 이 노동자 조직들이 제 발로 걷기 시작하자 이들은 시간이 갈수록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따르게 되었다. 8월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공장위원회는 일시적인 모임을 통해 수립되지 않는다. 대중은 공장의 일상 생활에서 확고함, 진지함, 노동자의 이해에 대한 헌신성 등을 증명한 인물들을 공장위원회에 선출한다. 그리고 이 위원회의...압도적 다수는 볼세비키들로 구성되어있다." 이제 화해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소비에트가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을 보호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와 반대로 볼세비키당이 장악한 공장위원회 및 노동조합과 화해주의 소비에트는 서로 격심하게 충돌했다. 대중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들에서 소비에트는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 비해 투쟁 의지가 더욱더 떨어진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의 노동조합들은 소비에트의 결정에 반대하여 총파업을 벌였다. 이보다는 덜 명확한 형태이지만 모든 곳에서 이와 비슷한 갈등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결국 승자는 대개의 경우 소비에트가 아니었다.

자신들의 정책에 의해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갇힌 화해주의자들은 소비에트를 위해 부수적인 활동들을 스스로 "고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가장 핵심적으로 소비에트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문화활동을 고안했다. 그러나 이것도 소용이 없었다. 왜냐하면 소비에트는 권력 장악 투쟁을 위해 수립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른 임무들을 위해서는 좀더 적절한 조직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사라토프의 볼세비키 안토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멘세비키들과 사회혁명당의 소비에트 활동은 모두 의미를 상실했다....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우리는 따분해서 결례를 무릅쓰고 하품을 하곤 했다. 사회혁명당-멘세비키의 소비에트 수다 공장은 공허하고 사소했다."

한편 병든 소비에트들이 뻬쩨르부르그의 중앙조직을 지원하는 것이 갈수록 불가능했다. 집행위원회가 입주한 스몰니 학원과 지역 소비에트들 사이에는 교신의 빈도가 떨어지고 있었다: 글을 보내거나 제안할 것이 없었으며 전망과 임무가 없었다. 소비에트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자 재정적 위기가 아주 크게 느껴지면서 다가왔다. 지방의 화해주의 소비에트들은 자기부터 돈이 없었기 때문에 스몰니 학원의 지도부를 지원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반혁명에 가담하여 신뢰를 추락시킨 집행위원회에 대해 좌파 소비에트들은 시위하듯이 재정적 지원을 중단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쇠퇴 과정은 부분적으로 반대되는 성격의 다른 과정과 교차했다.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개척지, 후진적인 군,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벽촌 등이 잠에서 깨어나면서 소비에트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중앙 지도부의 부정적 영향력이나 정부의 탄압으로 소멸하기 전까지 이 신생 소비에트들은 신선한 혁명적 기상을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의 전체 숫자는 급격하게 상승하고 있었다. 8월말 집행위원회 서기국의 기록에 의하면 600개나 되는 소비에트가 전국에 걸쳐 존재했으며 이들은 2천3백만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다. 강력하게 왼쪽으로 물결치고 있는 인간의 거대한 바다 위에 공식 소비에트 체제가 솟구쳐 올라와 있었다.

볼세비키화와 동시에 진행된 소비에트의 정치적 부흥은 밑바닥에서 시작되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는 지구 소비에트가 제일 먼저 소리를 질렀다. 7월 21일 지구간 소비에트 협의회의 대표단이 집행위원회에 일련의 요구들을 제시했다: 의회를 해산하라, 정부의 포고령을 통해 군대 조직의 신성 불가침을 확인하라, 좌익 언론을 회복시켜라, 노동자의 무장해제를 중지하라, 대대적인 체포를 중지하라, 우익 언론을 통제하라, 연대의 해체를 중지하고 전선의 사형제도를 철폐하라. 7월 시위 때와는 달리 정치적 요구 수준이 낮아진 점이 아주 명백했다. 그러나 이것은 회복을 위한 첫 걸음에 불과했다. 구호들의 수준을 내리는 대신 지구 소비에트들은 대중적 기초의 확대에 애썼다. 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외교적 제스처를 써서 지구 소비에트들의 "민감성"을 환영했다. 그러나 7월 봉기로 모든 불행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하는 선에서 그쳤다. 결국 양측은 정중하게 그러나 냉랭하게 갈라섰다.

지구 소비에트들의 강령 하에 의미심장한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이즈베스티아 지는 매일같이 의회 해산, 볼세비키당 탄압 중지, 반혁명 세력 비호 중지 등을 요구하는 소비에트, 노동조합, 공장, 군함, 군부대 등의 결의문을 실었다. 이 전반적 배경 속에서 좀더 급진적인 목소리들이 들렸다. 7월 22일 모스크바 시 소비에트보다 상당히 선진적인 모스크바 도 소비에트는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26일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도 소비에트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탄압 방식을 "경멸로 낙인찍고" "혁명적 노동계급의 영광스러운 지도자" 레닌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7월말과 8월 전반부에 걸쳐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진행된 선거는 일반적으로 각급 소비에트 내에서 볼세비키당 분파를 강화시켰다. 반동의 공격을 받아 전국에서 악명이 높았던 크론슈타트의 소비에트 선거에서 볼세비키당은 100명, 사회혁명당 좌파는 75명, 멘세비키-국제주의자는 12명, 무정부주의자는 7명, 화해주의자들에 대한 공감을 감히 공개적으로 표현하지 못한 비당파는 90명의 대의원을 각각 선출했다. 8월 18일에 열린 우랄 지역의 소비에트대회에서 볼세비키당 86명, 사회혁명당 40명, 멘세비키당 23명의 대의원이 선출되었다. 짜리친은 부르주아 언론이 특히 증오하는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볼세비키당이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곳의 볼세비키 지도자 미닌이 시장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돈강 지역의 카자흐 수장 칼레딘의 옆구리에 박힌 볼세비키 가시인 짜리친 시에 대해 케렌스키는 아무 근거도 없이 혁명의 아성을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징벌대를 보냈다.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기타 공업 지구들 전체에서 볼세비키당의 결의안에 찬성하는 대중의 손은 날이 갈수록 더 많이 올라갔다.

8월말의 사건들은 소비에트들을 테스트했다. 위험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가운데 내부에서 아주 빨리 재편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은 모든 곳에서 상대적으로 거의 토론 없이 진행되었다. 수도와 지방을 막론하고 공식 소비에트 체제의 양아들인 볼세비키들이 선두에 진출했다. 또한 화해주의 정당의 참모부에서 "3월" 사회주의자 그리고 정부의 각급 기관 응접실에 드나드는 정치꾼 등은 지하운동으로 단련된 좀더 전투적 분자들에 의해 일시적으로 밀려났다. 이 새로운 세력 재편을 위해서는 새로운 조직 형태가 필요했다. 혁명을 방어하는 지도부가 집행위원회에 집중된 곳은 하나도 없었다. 집행위원회 형태는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처하기에는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이 때문에 모든 곳에서 혁명방어 특별위원회, 혁명 위원회, 혁명 참모부 등이 조직되었다. 이 조직들은 소비에트에 의존했으며 소비에트에 활동 보고를 했다. 그러나 임무의 혁명적 성격에 부응하여 새로 선정된 분자들 그리고 새로운 투쟁 방식을 대표했다.          

국정협의회가 열렸던 때와 마찬가지로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군대를 배치하고 체포 권한을 유일하게 보유한 6인 투쟁위원회를 수립했다. 8월말에 열린 키에프 지역의 소비에트 대회는 지부 소비에트들에게 군사 분야이건 민간 분야이건 믿을 수 없는 권력의 대표들을 갈아치우는데 주저하지 말 것이며 반혁명 분자들을 즉시 체포하고 노동자들을 무장시킬 것을 권고했다. 비야트카에서는 소비에트 위원회가 군대 지휘권을 포함한 특별권한을 가졌다. 짜리친에서는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 참모부로 넘어갔다. 니즈니-노브고로드에서는 혁명위원회가 우체국과 전신국에 보초를 세웠다. 크라스노야르스크 소비에트는 민간 권력과 군사 권력을 동시에 장악했다.

다양한 그리고 때로는 상당한 제한을 가하면 이 상황은 거의 모든 곳에서 그대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단순히 수도를 모방한 것만도 아니었다. 소비에트는 대중적으로 구성되면서 일반 법치의 성격을 좀더 발전시켰다. 이 결과 소비에트는 모든 거대한 사건에 같은 방식으로 반응했다. 연립정부가 내전의 전선에 의해 두 개로 분리된 반면 소비에트는 나라의 살아있는 모든 세력들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이 철벽에 부딪쳐 반란 장군들의 공격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보다 더 유용한 교훈을 요구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볼세비키당 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소비에트를 몰아내고 그 권력을 박탈하려는 정부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는 코르닐로프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인민 대중의 힘과 주도성을 발휘했다....이 새로운 경험은 노동자, 병사, 농민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해도 몰아낼 수 없다. 2월 혁명의 시초에 볼세비키당이 외쳤던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구호는 이제 혁명 조국 전역의 목소리가 되었다."

소비에트와 경쟁하려고 했던 시의회는 위험한 시기에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가 아예 사라져 버렸다. 뻬쩨르부르그 시의회는 "전반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교신 유지를 요청하기 위해" 겸허한 자세로 소비에트에 대표단을 파견했다. 시 인구의 일부에 의해 선출된 소비에트는 전체 인구에 의해 선출된 의회보다 권력과 영향력이 더 적어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혁명의 변증법은 일부 역사적 조건 속에서는 부분이 전체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다는 것을 증명해왔다. 정부에서와 마찬가지로 의회에서도 화해주의자들은 볼세비키당에 대항해 입헌민주당과 연합했다. 그런데 이 연합은 정부와 마찬가지로 의회도 마비시켰다. 반면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계급의 공격에 맞서 화해주의자들과 볼세비키당이 방어적인 협동을 하는 자연스러운 형태임이 증명되었다.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 소비에트 앞에 역사의 새로운 장이 펼쳐졌다. 특히 주둔군에서는 화해주의자들이 여전히 상당한 오명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볼세비키당 쪽으로 너무 날카롭게 전향하여 우익과 좌익을 모두 놀라게 했다. 9월 1일 밤 체이제가 여전히 의장이었지만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의 정부 수립에 찬성표를 던졌다. 화해주의 정당의 분파 내에서 보통 대의원들은 거의 확고히 볼세비키당의 결의안을 지지했다. 이에 대항하는 체레텔리의 결의안은 15표 밖에 얻지 못했다. 화해주의 최고회의는 자신들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우익이 대의원들에 대한 출석 체크를 요구했기 때문에 이 절차는 오전 3시까지 질질 끌었다. 소속 정당에 반대하는 표를 공개적으로 던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대의원들 다수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모든 압력 수단들에도 불구하고 볼세비키당의 결의안은 최종적으로 찬성 279표 대 반대 115표로 통과되었다. 이것은 거대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화해주의자들의 몰락을 알리는 첫 신호였다. 화해주의자들이 장악한 소비에트 최고회의는 충격에 휩싸인 채 사임을 선언했다.

9월 2일 핀란드의 러시아 소비에트 기구들이 합동회의를 열어 찬성 700표 반대 13표 기권 36표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9월 5일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를 뒤따라갔다. 찬성 355표 반대 254표로 소비에트는 임시정부를 불신임한 후 곧이어 임시정부가 반혁명의 도구라고 선언했다. 또한 입헌민주당과 집행위원회의 연합정책을 비난했다. 킨추크가 의장이었던 최고회의는 사임을 선언했다. 9월 5일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열린 시베리아 중앙지역의 소비에트대회는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끝까지 따랐다. 9월 8일 키에프 소비에트에서는 공식 볼세비키당 분파의 대의원 수가 가 95명이었으나 찬성 130표 반대 66표로 볼세비키당의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10일에 열린 핀란드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15만의 수병, 병사, 러시아 노동자들이 69명의 볼세비키 대의원 48명의 사회혁명당 대의원 그리고 몇 명의 비당파 대의원을 선출했다. 뻬쩨르부르그 도 농민 소비에트는 볼세비키 세르게이에프를 민주 협의회 대표로 선출했다. 볼세비키당이 노동자와 병사들의 중재로 농촌과 즉시 접촉을 시도할 경우 농민들은 열렬히 당의 깃발을 따른다는 사실이 여기서도 드러났다.

9월 9일의 역사적 회의에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내에서 볼세비키당의 지배력은 극적으로 확인되었다. 모든 분파들은 열심히 자기 성원들을 챙겼다: "이 회의에 소비에트의 운명이 걸려있다." 약 1천 명의 노동자 병사 대의원들이 회의에 참석했다. 9월 1일의 표결은 회의 성원들의 우연한 구성 때문에 일어난 단순한 에피소드였는가 아니면 소비에트 정책의 완전한 변화를 의미했는가? 이렇게 문제가 제기되었다. 볼세비키당은 최고회의에 대항해 다수를 획득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최고회의에는 체이제, 체레텔리, 체르노프, 고츠, 단, 스코벨레프 등 화해주의 지도자들이 모두 포진되어 있었다. 그래서 볼세비키당 분파는 각 당의 대의원 수에 비례하여 최고회의가 구성될 것을 제안하는 동의안을 상정했다. 이 동의안은 원칙에 대한 정당들 사이의 날카로운 갈등을 흐릴 소지가 다분했다. 이 때문에 레닌은 이 동의안 상정을 호되게 비난했다. 그러나 동요하는 대의원 분자들이 볼세비키당을 확실히 지지할 수 있다는 전술적 장점이 있었다. 체레텔리는 이 타협안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가 실제로 정치노선을 바꾸었는지를 알고자 하기 때문에 최고회의는 "볼세비키당의 전술을 따를 수 없다." 우익이 제출한 결의안은 9월 1일의 표결이 소비에트의 정치노선과 일치하지 않으며 소비에트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최고회의를 신뢰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볼세비키당은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으며 흔쾌히 이렇게 했다. 트로츠키는 감옥에서 해방된 뒤 처음으로 소비에트에 모습을 드러내 상당수의 대의원들로부터 따뜻한 환영 박수를 받았다. 양측은 속으로 박수의 정도를 측정했다: 트로츠키가 다수의 박수를 받았는가 아닌가? 그는 표결이 있기 전에 설명을 요구했다: 케렌스키는 전과 마찬가지로 최고회의 위원인가? 잠시 주저한 후 최고회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로써 이미 많은 죄를 짓고 짓눌려 있었던 최고회의는 이 대답으로 목에 맷돌을 하나 더 달았다. 트로츠키는 말했다: "케렌스키가 최고회의 출석을 금지 당할 것으로 우리는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생각은 틀렸다. 케렌스키의 망령이 지금 단과 체이제 사이에 앉아있다....최고회의의 노선을 승인하는 것은 곧 케렌스키의 정책도 승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대의원 여러분들은 잊지 말아야한다." 이제 회의는 상상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긴장 속에 진행되었다. 분노가 폭발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는 대의원 전부의 소망 덕분에 회의 질서는 유지되었다. 이들 전부는 자신의 적과 동지의 수를 될 수 있으면 빨리 세고 싶어했다. 권력, 전쟁, 혁명의 운명을 자신들이 결정하고 있다는 점을 이들은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대회장을 나가면서 투표하도록 결정되었다. 최고회의의 사임을 승인하는 대의원들은 대회장을 나가야한다: 다수보다는 소수가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대회장의 모든 구석에서 열정적이면서도 속삭이는 선동이 시작되었다. 구 최고회의냐 신 최고회의냐? 연립정부냐 소비에트 권력이냐? 다수의 대의원들이 출입문으로 몰려 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최고회의의 생각으로는 너무 많은 대의원들이 몰려 나가고 있었다. 한편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다수 획득에는 약 100표가 모자란다고 어림 계산했다. 미리 이들은 이렇게 자신들을 위로했다: "그 정도만 되어도 우리는 대단히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은 계속해서 출입문을 향해 밀려나가고 있었다. 목소리를 죽인 웅성거림이 있었다. 소리 높이 주장하는 폭발의 순간이 잠시 있었다. 한쪽에서는 "코르닐로프 반란자들!"이라고 외쳤고 또 한쪽에서는 "7월 투쟁의 영웅들!"이라고 외쳤다. 이 상황은 약 1시간을 끌었다.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대규모의 팔들이 동요했다. 흥분을 좀처럼 억제할 수 없었던 최고회의는 한 시간 내내 단상에 남아 있었다. 마침내 집계가 이루어지고 저울질이 되었다: 최고회의와 연립정부에 대한 찬성 414표, 반대 519표, 기권 67표였다! 새로운 다수파는 폭풍처럼 열광적으로 그리고 격렬하게 박수를 쳤다. 그럴 권리를 이제 얻었다. 승리의 대가는 이미 톡톡히 지불한 바 있었다. 이제 더 먼 길이 앞에 남아 있었다.

침울한 얼굴을 하면서 충격으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타도된 지도자들은 단상에서 내려왔다. 체레텔리는 마지막 한마디의 무서운 예언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출입문으로 몸을 움직이면서 반은 얼굴을 돌린 채 그는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6개월 동안 혁명의 깃발을 존엄하게 높이 들고 있었다는 인식과 함께 이 연단에서 퇴장한다. 이 깃발은 이제 당신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당신들이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3개월이나 이것을 들고 있을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체레텔리는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틀렸지만 이제 자신이 제시한 기한에 대해서도 잔인하게 틀리게 될 것이다.  

모든 소비에트의 어머니인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이제 어제까지만 해도 "참주선동가들의 미미한 소수 집단"이었던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연단에서 트로츠키는 최고회의가 볼세비키들이 독일 총참모부의 첩자라는 비난을 아직도 거두지 않았음을 상기시켰다. "밀류코프와 구츠코프 같은 자들이 매일같이 자기들의 일생에 대해 말하라고 하라. 그들은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 활동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리는 러시아 인민으로부터 숨길 것이 하나도 없다...." 특별 결의문을 통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비방의 저자, 배포자, 촉진자 등을 경멸로 낙인찍었다."

이제 볼세비키당은 화해주의자들로부터 물려받은 재물을 조사했다. 상속 재물은 어마어마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대단히 미미했다. 때를 맞추어 집행위원회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창립한 두 신문을 가지고 가버렸다. 또한 모든 행정 사무실,  모든 기금, 타자기와 잉크병을 포함한 모든 장비들도 가지고 가버렸다. 2월 시기부터 소비에트의 소유였던 수많은 자동차들은 마지막 한 대까지 화해주의자들의 궁전으로 넘어간 후였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가질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금, 신문, 비서기구, 수송수단, 펜과 연필 등 어느 것도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텅 빈 벽과 --- 노동자 병사들의 타오르는 자신감뿐이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소비에트의 정책이 근본적으로 이전과 단절된 후 화해주의자들의 대오는 더욱 급격히 녹아 사라지고 있었다. 9월 11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단은 연립정부를 옹호하고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는 연설을 했다. 곧이어 있었던 표결에서 연립정부는 거부되었다. 거부를 반대하는 표는 10, 기권하는 표는  7이 나왔다! 같은 날 모스크바 소비에트는 만장일치의 표결로 볼세비키당에 대한 탄압을 비난했다. 혁명 초에 볼세비키당이 좌익의 좁은 한쪽을 차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화해주의자들은 우익의 좁은 구석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그 동안 얼마나 큰 변화가 있었는가! 볼세비키당은 언제나 소비에트보다는 대중 사이에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반면 화해주의자들은 대중보다 소비에트에서 더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은 세력이 허약한 시기에도 미래가 있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과거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 과거에 대해서도 이들은 자랑스러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정치노선과 함께 겉모습도 바꾸었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채 집행위원회 안에 굴을 파고 들어앉았다. 소비에트에서는 이들 대신 제 2진과 제 3진 지도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체레텔리, 체르노프, 아브크센티에프, 스코벨레프 등이 사라지면서 이 민주적 장관들의 친구들과 숭배자들인 급진 경향의 장교와 부인, 반(半)사회주의 작가, 문화인, 유명인 등도 사라졌다. 이제 소비에트는 더욱 단일한 색으로 통일되었다. 회색이 더 많아지고 더 어두워졌으나 대신 더 진지해졌다.

 

 

제 13장 볼세비키당과 소비에트

자세히 살펴보면 볼세비키당의 선동활동이 동원한 수단과 도구들은 볼세비키당의 정치적 영향력과는 완전히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대단히 왜소해 보인다. 이뿐 아니라 그 비천함 자체가 단지 놀라울 따름이다. 7월 시기까지만 보면 당은 주간지와 월간지를 합쳐 총 41종의 출판물을 발행했다. 그리고 전부 통틀어 발행 부수는 32만 부에 불과했다. 반동의 7월 공격 후 발행 부수는 2분의 1로 줄어들었다. 8월말 당 중앙 기관지의 발행 부수는 5만 부였다. 당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될 당시 당중앙위원회 금고의 보유 현금은 지폐로 3만 루블밖에 되지 않았다.   

지식인들은 볼세비키당에 거의 가입하지 않았다. 1905년 혁명에 가담한 학생이었다가 소위 "고참 볼세비키"로 성장한 상당수의 인물들은 나중에 운동을 그만두고 엔지니어, 의사, 정부관리 등으로 크게 성공했다. 이제 이들은 별 일이 아닌 듯 당에 차가운 등을 돌렸다. 수도인 뻬쩨르부르그에도 선전가, 연설자, 선동가가 항상 부족했다. 지방은 아예 이런 인적 자원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지도자들이 없다; 대중에게 볼세비키당의 목적을 설명할 정도로 정치적 안목을 갖춘 사람이 없다!" 이 외침은 수백 곳의 벽촌 특히 전선에서 들려왔다. 농촌에는 볼세비키당 중핵이 아예 없었다. 우편을 통한 교신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혼자서 상황을 헤쳐나가도록 방치된 지역 조직들은 중앙위원회가 수도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고 가끔 비난했다. 사실 이 비난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이 허약한 조직과 하잘 것 없는 당 선전물의 규모에도 불구하고 볼세비키당의 사상과 구호가 인민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해답은 아주 단순하다: 계급과 시대의 절절한 요구에 부응하는 구호들은 수천 개의 전달 통로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빨갛게 달아오른 혁명 매체는 사상을 신속히 전달한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큰 소리로 낭독되었고 갈기갈기 찢겨질 때까지 읽혀졌다. 가장 중요한 글들은 외워지고 낭송되고 베껴지고 가능한 곳마다 다시 인쇄되었다. 병사 피레이코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부대 참모부의 인쇄소는 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병사들에게 아주 친근하고 이해되기 쉬운 프라우다 지 글과 소형 책자 등 다수가 다시 인쇄되었다! 그리고 다시 인쇄된 이 신문들은 항공 우편, 자전거, 오토바이 등을 통해 신속하게 전선에 배포되었다...." 동시에 부르주아 신문은 수백만 부가 공짜로 전선에 공급되었지만 거의 읽히지 않았다. 이 신문들은 뜯지도 않은 무거운 짐짝이 되어 그대로 방치되었다. "애국주의" 신문에 대한 보이코트는 가끔 시위의 성격을 띠었다. 제 18 시베리아 사단의 대표들은 부르주아 정당들이 인쇄물 발송을 중지할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차를 끓이기 위해 사용될 뿐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비해 볼세비키당 신문의 용도는 아주 달랐다. 이 때문에 이 신문의 유용한 또는 유해한 정도는 부르주아 신문과 비교될 수 없었다.

대중의 요구에 맞아떨어진 "구호의 단순성"이 볼세비키당의 성공 요인으로 흔히 설명된다. 이 주장은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민주적 정당들"에 비해 볼세비키당은 사적 소유의 방어로 귀착되는 암시적 또는 반(半)암시적 복음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당 의 정책은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이 특징만으로는 볼세비키당의 성공을 전부 설명할 수 없다. 우익에서는 "민주주의 진영"이 볼세비키당과 경쟁했으며 좌익에서는 무정부주의자, 최대강령주의자, 사회혁명당 좌파 등이 볼세비키당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이 그룹들은 모두 무기력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볼세비키당은 인민 대중의 이해를 방어한다는 주관적 목표를 혁명의 객관적 법칙에 종속시켰다. 이것이 다른 정치 세력들과 볼세비키당을 구별시키는 가장 큰 차이였다. 과학적으로 발견된 혁명의 객관적 법칙 특히 대중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이 볼세비키당 정책의 기초가 되었다. 근로 대중은 자신의 요구, 필요, 생활 경험에 기초하여 투쟁한다. 볼세비키당은 대중의 독자적 경험을 귀족들이 그렇듯이 경멸해본 적이 결코 없었으며 이와 반대로 이것을 토대로 삼아 정책을 수립했다. 바로 이것이 이 정당을 우월하게 만든 큰 장점의 하나였다.

혁명은 언제나 말이 많다. 볼세비키당 역시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나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선동이 초점을 분산시키며 자기 모순적이었고 그 의미가 흔히 애매했던 반면 볼세비키당의 선동은 집중점이 있었고 치밀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어려움을 말로 대충 때웠다. 반면 볼세비키들은 어려움에 다가갔다. 객관적 상황을 계속 분석하고 구호를 사실에 비추어 검증하고 진지하지 않은 적을 진지하게 대했기 때문에 볼세비키당의 선동은 특별한 힘과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당 신문은 성공을 과장하지 않았고 역관계를 왜곡시키지도 않았으며 목소리만 높여서 승리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레닌의 정치 유파는 혁명적 현실주의의 유파였다. 역사 비평과 시대의 문서들로 비추어 보면 1917년 볼세비키당 신문의 자료들은 여타 정치 세력들의 자료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정확했다. 이 정확함은 볼세비키당이 가지고 있던 혁명적 역량의 결과였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은 이 역량을 강화시켰다. 이후 스탈린주의 아류들의 가장 해악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레닌은 해외에서 귀국한 즉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돌팔이가 아니다. 우리는 대중의 의식만을 토대로 활동해야한다. 소수에 머무르는 것이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다....소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대중을 지배계급의 속임수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우리는 비판을 수행할 것이다....우리 노선은 올바른 것으로 증명될 것이다. 모든 피억압 대중은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이들에게는 다른 탈출구가 없다." 바로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참주선동 및 모험주의와 정반대인 것으로 이해된 볼세비키당의 정책이다.

레닌은 피신 중이다. 그러나 그는 신문들을 꼼꼼하고 진지하게 분석하면서 항상 그렇듯이 행간을 읽고 있다. 또는 자주 있지 않은 개인들과의 대화 속에서 깊이 생각되지 않은 사고의 메아리, 제대로 표현되지 않은 의도들을 잡아내고 있다. 대중은 후퇴하고 있다. 마르토프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을 비난하면서 동시에 자기 꾀에 넘어갈 정도로 그렇게 "꾀가 많은" 이 당에 대해 서글픈 아이러니를 일삼고 있다. 볼세비키 가운데 일부도 당 정책을 후회하고 있다. 순간적 인상에 쉽게 좌우되는 루나차르스키만이 동요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라고 레닌은 추측하고 있다. 곧 이와 관련된 소문들이 그의 귀에 들어올 것이다. 그는 소부르주아의 불평에 대해 그리고 이 불평에 민감한 일부 볼세비키들의 "배신적 성향"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지구와 도에서 활동하고 있는 볼세비키들은 레닌의 이 엄격한 말들을 찬성하면서 듣고 있다. 이들은 다시 그리고 더욱 확고하게 확신을 갖는다: "이 노인"은 머리가 돌지 않았다. 그의 의지는 확고하다. 그는 일시적 분위기에 결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스베르들로프일지도 모르는 어느 당 중앙위원이 지방에서 레닌에게 편지를 쓴다: "지금 우리는 신문 발행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조직은 아직 깨지지 않았습니다....당 대회는 연기되지 않습니다." 그에게 강요된 고립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레닌은 당 대회 준비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반동에 대한 공세를 강화시키는 것이 당 대회의 근본 의제라고 지적한다. 일부 독자적인 혁명 그룹들을 당에 포함시킬 것이기 때문에 대회는 미리 합동 대회로 명명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그룹은 뻬쩨르부르그 지구간 조직이었다. 이 그룹에는 트로츠키, 요페, 유리츠키, 리아자노프, 루나차르스키, 포크로프스키, 마누일스키, 크라한, 유레네프, 그리고 과거에 알려진 또는 지금 알려지고 있는 여타 혁명가들이 속해 있었다.

시위의 바로 전날인 7월 2일 약 4천 명의 노동자를 대표하는 이 지구간 조직이 협의회를 개최했다. 방청석에서 회의를 지켜본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다수는 내가 모르는 노동자와 병사들이었다....그 동안 열화와 같이 작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성공이 우리 모두에게 느껴졌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 뿐이었다: 볼세비키당과 이 조직의 차이점은 무엇이며 왜 이 조직은 볼세비키당에 합류하지 않는가?" 일부 지도자들은 이 통합을 연기시키려고 했으나 트로츠키는 통합을 서두르기 위해 프라우다 지에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지구간 조직과 볼세비키당은 현재 원칙이나 전술에 있어서 차이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두 조직의 독자적 존재를 정당화할 이유가 없다."

실제로는 볼세비키당 제 6차 대회인 합동 대회는 7월 26일에 열렸다. 두 노동자 지구에서 교대로 은밀히 열린 이 반(半)합법 회의에는 176,750 명의 당원과 112개 조직을 대표하는 175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이 가운데 157명만이 표결권을 가지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는 41,000 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이중 36,000 명은 볼세비키당 조직에 4,000 명은 지구간 조직에 약 1,000 명은 군사기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중앙 공업지역에는 당원이 42,000 명, 우랄 지역에는 25,000 명, 도네츠 분지 지역에는 약 15,000 명이 있었다. 코커서스 지역에는 바쿠, 그로즈니, 티플리스에 대규모 볼세비키 조직이 있었다. 티플리스에는 병사들이 당원의 대다수였으나 나머지 두 도시에는 거의 전부 노동자들만이 당원이었다.

당 대회의 인적 구성은 혁명 이전까지 당의 역사를 구현하고 있었다. 설문지를 채운 171명의 대의원 가운데 110명은 전부 합쳐서 245년의 감옥 생활을 했으며 10명의 대의원은 41년 동안 중노동형을 살았다. 24명은 73년을 유형지에서 보냈으며 55명은 127년간 망명생활을 했다. 27명은 국외에서 89년을 보냈으며 150명은 547번 체포되었다.

현재 코민테른의 서기 가운데 하나인 피아트니츠키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당 대회에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등은 불참했다....당 강령 문제는 의제에서 철회되었으나 대회는 당 지도자들이 없이 진지하게 잘 진행되었다...." 레닌의 4월 테제가 당 활동의 기초가 되었다. 부하린과 스탈린이 주요 보고를 했다. 레닌이 귀국한 후 4개월 동안 당의 모든 간부들과 스탈린 자신이 겪은 변화는 스탈린의 보고에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 이론에 자신이 없었으나 정치적 결단을 내린 스탈린은 "사회주의 노동자혁명의 심대한 특성"을 규정하는 특징들을 나열하려고 했다. 이 대회가 보인 만장일치의 모습은 4월 당협의회의 분열상과 대조되었기 때문에 즉시 눈에 띠었다.

중앙위원회 선출에 대한 대회의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중앙위원 4명의 이름이 크게 낭독되었다: 총 133표 가운데 레닌 133표, 지노비에프 132표, 카메네프 131표, 트로츠키 131표. 이 4명 이외에 중앙위원으로 선출된 당원은 노긴, 콜론타이, 스탈린, 스베르들로프, 라이코프, 부하린, 아르템, 요페, 유리츠키, 밀류틴, 로모프였다. 중앙위원들의 이름에 주목해야 한다. 이들의 지도로 10월 혁명이 성취될 것이다.

마르토프는 편지를 보내 당 대회를 축하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당에 대한 비방 캠페인에 깊은 분노를 표시했으나 근본 문제들에 대해서는 역시 행동을 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했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다수파에 대항해서 권력을 장악하지 말아야 한다...." 전과 마찬가지로 마르토프에게 "혁명적 민주주의의 다수파"는 기반이 이미 무너진 공식 소비에트 대의제를 의미했다. 이때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공허한 분파적 전통 뿐 아니라 사회혁명에 대한 대단한 기회주의적 태도에서 마르토프는 사회 애국주의자들과 밀착되어 있다. 그에게 사회혁명은 당면 문제에 대한 해결 방안을 결정하지 못하는 먼 미래의 목표에 불과하다. 이것 자체가 그와 우리를 분리시키고 있다."

이 시기에 라린이 주도한 소수의 멘세비키 좌파만이 결정적으로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왔다. 이 멘세비키 국제주의자들과의 통합에 대해 보고한 미래의 소비에트 외교관 유레네프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멘세비키의 소수파 가운데 소수와...."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 10월 혁명이 성취된 이후에야 멘세비키들이 떼를 지어 당에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노동계급의 봉기가 아니라 봉기로 등장한 권력을 옹호한 멘세비키들은 기회주의의 기본 특성인 집권세력에 대한 굴종을 그대로 드러냈다. 당의 인적 구성 문제에 대해 언제나 매우 민감했던 레닌은 곧 이렇게 요구했다: 10월 혁명 후 당원이 된 멘세비키들의 99%는 제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에 당의 문은 활짝 열렸다. 과거의 이 화해주의자들은 스탈린의 당권에 한 기둥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이후 시기의 일이다.

당 대회의 실질적 조직자였던 스베르들로프는 이렇게 보고했다: "트로츠키는 대회 이전에 당 신문의 편집부에 합류했으나 감옥에 갇혔기 때문에 실제 작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7월 당 대회를 통해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 볼세비키당에 합류했다. 이로써 수년간의 이견과 분파 투쟁은 결론이 났다. 트로츠키는 레닌을 사부(師父)로 인정하고 그의 당에 들어왔다. 이 사부의 힘과 의의를 그는 여타 다수의 볼세비키들보다 늦게 이해했으나 아마 이들보다 더 완벽하게 이해했다. 트로츠키가 캐나다에서 귀국한 후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여러 주일동안 감옥에서 그의 옆에 있었던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적었다: "트로츠키는 레닌을 대단히 존경했다. 러시아 국내나 국외를 막론하고 그가 만났던 어떤 인물보다 레닌을 높이 샀다. 레닌에게 말하는 트로츠키의 목소리에는 사부에 대한 제자의 헌신성이 느껴졌다. 당시 레닌은 30년 간 그리고 트로츠키는 20년 간 노동계급의 대의에 복무하고 있었다. 전쟁 이전에 있었던 두 인물 사이의 이견은 이제 메아리조차 없었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전술에는 차이가 조금도 없었다. 전쟁 중에 이미 눈에 띄게 드러난 두 인물의 화해는 트로츠키가 러시아로 돌아온 순간에 완전히 그리고 의심의 여지없이 결정되었다. 그의 첫 연설을 듣자마자 고참 레닌주의자인 우리들 모두는 그가 우리편이라고 느꼈다." 여기서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면서 받은 131표만 보더라도 그가 당에 합류한 바로 그 순간부터 그를 아웃사이더로 바라 본 인물은 볼세비키당 내부에 아무도 없었다.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 멀리서 당 대회에 참석한 레닌은 대회의 활동에 책임감과 대담성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당의 창시자이자 사부인 그는 이론이나 정치적 실천에 있어서 엉성함을 참을 수 없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정치적 관찰과 마찬가지로 부정확한 경제 정식은 행동에 옮겨질 때 비로소 우리에게 잔인하게 보복한다. 이 교훈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부차적인 당 문서 하나 하나에 대해서도 지나치게 꼼꼼한 자신의 태도를 옹호하면서 그는 여러 번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사소한 세부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정확해야한다. 우리 선동가들은 이것을 알면 잘못될 수 없을 것이다...." 무엇을 말할 것이며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평당원 선동가의 진지하고 꼼꼼한 태도를 보면서 그는 이렇게 덧붙이곤 했다: "우리는 좋은 당을 가지고 있다."

볼세비키당의 대담성은 여러 번 큰 충격을 유발했다. 레닌의 4월 테제가 불러일으킨 충격이 이러했다. 혁명의 시대에는 근시안적 시야에 갇혀 있을 경우 충격을 먹게 된다. 이 시대에는 장기적인 시야와 정책만이 혁명적 현실주의를 구현할 수 있다. 볼세비키주의가 근시안적 시야 때문에 먹은 큰 충격과 전혀 무관했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사실 레닌의 정당이야말로 혁명의 와중에 정치적 현실주의를 구현한 유일한 정당이었다.

6월과 7월초에 노동자 볼세비키들은 여러 번 이렇게 불평했다: 우리는 대중의 투쟁을 억제시키는 소방 호스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역할은 항상 성공하지도 못했다. 7월은 패배와 함께 대가가 비싼 교훈을 제시했다. 이후 대중은 당의 경고에 훨씬 더 주의를 기울였으며 당의 전술적 계산을 더욱더 잘 이해했다. 당의 7월 대회는 대중의 투쟁에 대한 이 경고들을 인준했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계급의 도발에 넘어가지 말아야한다. 지금 부르주아 계급은 우리를 섣부른 싸움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안달하고 있다." 8월 한달 내내 특히 후반부로 갈수록 당은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거리로 나서지 말 것을 계속 경고했다. 볼세비키 지도자들은 종종 자기들의 경고와 독일 사민당의 정치적 중심 테마 사이의 유사성에 대해 농담을 주고받았다. 독일 사민당은 언제나 도발자들이 초래하는 위험 그리고 역량을 축적할 필요성을 말하면서 대중이 어떤 진지한 투쟁도 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러나 실제로 이 유사성은 허구에 불과했다. 역량은 투쟁에 의해 축적된다. 투쟁을 수동적으로 회피한다고 역량이 축적되지는 않는다. 이 점을 볼세비키들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레닌에게 현실에 대한 연구는 행동을 위한 이론적 탐색에 불과했다. 상황을 평가할 때 그는 언제나 자기 당을 적극적 행동의 중심으로 놓고 생각했다. 오토 바우어나 힐퍼딩 등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이론적 분석을 수동성에 대한 박식한 논평으로 바꿔치기 했다. 이 경향에 대해 레닌은 특히 적대감 아니 좀더 정확히 혐오감을 표시했다. 신중함은 제동장치이지 원동력이 아니다. 제동장치를 가지고 여행한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신중함만으로 무엇을 이룬 사람 역시 하나도 없다. 그러나 투쟁은 역관계를 잘 계산해야 한다. 대담해지려면 우선 신중해야한다. 볼세비키들은 이것도 잘 알고 있었다.

섣부른 투쟁을 경고하면서 제 6차 당 대회 결의문은 이렇게 지적했다: 전국적인 위기와 대중의 깊은 운동을 통해 도시와 농촌의 빈민이 노동자 편으로 넘어올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을 때 전투에 임해야한다. 혁명 발전의 속도로 보면 이것은 10년이나 몇 년이 아니라 몇 개월의 문제였다.

무장봉기 준비의 필요성을 대중에게 설명하는 임무를 당 대회는 일정에 올렸다. 또한 이전 시기의 중심 구호였던 소비에트 권력 구호를 거두기로 결정했다. 이 둘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글, 편지, 개인적 대화 등을 통해 레닌은 구호의 변경을 촉발시켰다.

소비에트로 권력을 이전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화해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 화해주의자들의 선의 그리고 정부에 대해 대중이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신뢰의 잔재를 통해서만 부르주아 정부는 존재해왔다. 따라서 이것들이 사라진 지금 부르주아 정부를 단순히 물리치는 것을 통해서 소비에트 권력은 평화적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 2월 27일 이래로 노동자 병사 독재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이 현실을 필요한 정도까지 인식하지 못했다. 이들은 화해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겼고 다시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겼다. 혁명이 평화적으로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는 볼세비키들의 계산은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 대중에게 자발적으로 권력을 넘겨줄 것이라는 희망에 근거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노동자와 병사들은 화해주의자들에게 강요할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기지 말고 직접 권력을 장악해라. 평화적 혁명 성취의 가능성에 대한 볼세비키들의 계산은 바로 이 판단에 근거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가 시행되고 소비에트에게 권력이 집중될 경우 볼세비키당은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될 완벽한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강령에 기초한 정부를 수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무장봉기는 필요 없을 것이다. 이 결과 정당들 사이의 권력 이양은 평화적으로 달성될 것이다. 4월부터 7월까지 당의 모든 노력은 소비에트를 통해 평화적으로 혁명을 달성하는 임무에 집중되었다. "참을성 있게 설명하라" --- 이것이 볼세비키당 정책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7월 시기가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권력은 소비에트가 아니라 입헌민주당 및 연합국 대사관들과 밀착한 군사 파벌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파벌은 케렌스키를 민주주의의 얼굴 마담으로 일시적으로 용인했을 뿐이었다. 만약 집행위원회가 권력을 자신의 손으로 접수하는 결의문을 통과시키기로 결심했다면 결과는 3일 전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군사 학교의 생도들과 함께 카자흐 연대가 타우리데 궁전에 진입해 "권력 찬탈자들"을 체포하려고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이때부터 "소비에트 권력" 구호는 정부 그리고 그 뒤에 버티고 있는 군사 파벌들에 대항하는 무장봉기를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권력을 원치도 않는데 "소비에트 권력"이라는 대의를 위해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당연히 말도 되지 않았다.

권력이 없는 소비에트에서 평화로운 선거를 통해 볼세비키당이 다수를 획득할 수 있을까? 이 점이 7월 패배 이후에는 의심스러워졌다. 심지어 일부는 이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혁명 대중에 대한 7월 공격에 자신들을 연관시키면서 계속해서 볼세비키당 탄압을 위해 좌익적 외피로 행세할 것이다. 여전히 화해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된 소비에트는 반혁명 정부 아래 아무 힘이 없는 야당이 되다가 곧 정치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이 상황 속에서 노동계급에게 평화적으로 권력을 이전시킨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았다. 볼세비키당에게 이것은 곧 무장봉기 준비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어떤 구호를 통해 무장봉기를 준비할 것인가? 노동계급과 빈농의 권력 장악이라는 솔직한 구호를 내세우는 것이 최상이었다. 적나라한 형태로 혁명적 임무를 제시해야한다. 애매한 소비에트 형태에서 계급적 핵심을 해방시켜야한다. 이것은 소비에트 자체에 대한 포기가 아니었다. 권력을 장악한 후 노동계급은 소비에트 형태로 국가기구를 조직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화해주의 소비에트의 방어적 기능과 완전히 정반대 되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것이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비방과 공격이 시작될 때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소비에트 권력 구호는 이제 이상한 느낌이 들고 농담처럼 들린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이제부터 이 구호는 인민을 속이는 역할을 할 것이다. 마치 소비에트가 권력을 원하고 권력을 접수하기 위해 이런 요지의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환상을 인민에게 암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은 교수집행인인 반동계급을 도와주면서 자기 자신을 더럽힌 정당이 소비에트 내부에 없는 것처럼 말하는 셈이 될 것이다! 마치 있었던 것을 없었던 일로 우리가 위장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소비에트 권력 요구를 포기한다고? 이 생각은 표명되자마자 일단 당을 충격 속에 몰아넣었다. 다시 말하면 지난 3개월 동안 이 대중적 구호로 생활하면서 이것을 거의 혁명의 내용 전체로 간주한 선동 중핵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당내에서 이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마누일스키, 유레네프 등 다수의 저명한 당 활동가들은 이렇게 주장했다: "소비에트 권력" 구호를 철회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농민으로부터 고립시킬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계급적 내용에 특정 형태의 기관을 대체시킨 결과였다. 언뜻 들으면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조직 형태에 대한 물신 숭배는 혁명 운동권 내부에 대단히 흔한 질병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소비에트 내부에 남겠다고 결정할 경우 우리는 혁명의 과거를 반영하는 소비에트가 미래 혁명의 임무를 달성할 수준까지 상승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역할과 운명의 문제가 아무리 중요해도 이 문제는 노동계급, 도시의 반(半) 노동계급, 군대, 농민 등으로 구성된 정치권력/혁명적 독재를 위한 투쟁의 문제에 전적으로 종속되어야한다."

어떤 대중조직이 봉기의 지도 단위가 되어 당에 봉사할 것인가? 이 문제는 단정적인 대답은 말할 것도 없고 선험적인 대답도 허용하지 않았다. 봉기의 기관은 이미 볼세비키당 휘하에 있는 공장위원회와 노동조합이 될 수도 있었다. 동시에 개별적인 경우에는 화해주의자들의 멍에에서 벗어난 소비에트가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레닌은 오조니키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중력의 중심을 공장위원회로 옮겨야 한다. 공장위원회가 봉기의 기관이 되어야한다."

대중은 7월에 소비에트와 갈등을 일으켰다. 그리고 처음에는 소비에트가 자신에 대한 수동적인 반대자로 있다가 나중에는 적극적인 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따라서 소비에트 권력 구호가 철회되는 것은 대중의 의식 속에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객관적 상황에 의해 도출되면서도 대중의 주관적 경험을 표현하는 가장 단순한 구호를 제출해야한다 --- 레닌이 항상 골몰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선진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미 이렇게 느끼고 있었다: 우리가 권력을 넘길 대상은 체레텔리의 소비에트가 결코 아니다; 이제 우리 손으로 권력을 장악하자.

국정협의회 개최에 반대하는 모스크바의 파업은 소비에트의 의지에 반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사건들이 제시했으며 레닌이 올바로 해석한 교훈을 대중은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동시에 반혁명이 화해주의 소비에트의 목을 조를 위험이 나타나자마자  모스크바 볼세비키들은 한 순간도 주저하지 않고 투쟁의 진지를 차지했다. 볼세비키당의 정책은 혁명적 단호함을 최대의 유연성과 언제나 결합시켰다. 바로 이것이 볼세비키당이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 비결이었다.    

전선의 상황은 곧 당의 국제주의 정책을 아주 가혹하게 테스트했다. 리가가 함락된 후 뻬쩨르부르그의 운명은 노동자와 병사들의 급소를 찔렀다. 스몰니 학원에서 열린 공장위원회 회의에서 최근 수도 노동자들의 무장 해제를 주도했던 장교인 멘세비키 마주렌코가 수도에 가해진 위협에 대해 연설했다. 그리고 수도를 방어하기 위한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기했다. 그러자 볼세비키 연설자 가운데 하나가 이렇게 외쳤다: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요? 우리의 지도자들은 감옥에 있는데 당신은 수도의 방어와 관련된 문제들을 다루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소?" 공업 노동자이자 부르주아 공화국의 시민인 비보르그 지구 노동자들은 혁명 수도의 방어를 사보타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원으로서 이들은 러시아 인민과 만국 인민들 앞에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배계급과 공동으로 질 생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방어적인 정서가 조국방어주의 정책으로 바뀔 것을 우려한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노동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간 후에야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리가가 함락되든 뻬쩨르부르그가 함락되든 우리는 조국을 방어할 수 없다. 이 순간까지 우리는 노동계급 혁명을 주창한다. 우리는 전쟁에 반대한다. 우리는 조국방어주의자가 아니다." 감옥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리가의 함락은 우리에게 잔인한 타격이었다. 수도의 함락은 우리에게 불행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 노동계급의 국제주의 노선이 함락될 경우 이것은 파멸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주장은 광신도들의 교조주의였는가? 볼세비키 명사수들과 수병들이 리가의 성벽에서 죽어가고 있던 그 순간 케렌스키 정부는 볼세비키들을 공격하기 위해 리가의 군대를 수도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또한 최고사령관이라는 작자가 정부에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전선이든 후방이든 방어든 공세든 이 정책에 대해 볼세비키들은 조금의 책임도 질 수 없었으며 지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이들은 볼세비키가 아니었을 것이다.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는 똑같은 위험의 두 변종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는 고질적이고 또 하나는 급성인 이 두 변종은 8월말 서로 충돌했다. 나중에 고질적인 위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선 급성 위험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했다. 비록 소규모의 소수가 될 운명이었지만 볼세비키당은 혁명방어위원회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코르닐로프에 대항하기 위해 심지어 통령인 케렌스키와 "군사적 실무적 연합"을 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이 주제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들은 대단한 수완과 정치적 지혜를 드러냈다....물론 이들의 본성과 부합되지 않는 타협을 하면서 이들은 동맹 세력이 예상하지 못한 나름의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이 문제에 있어서 이들의 지혜는 더 뛰어났다." 이 정책에서 볼세비키의 본성에 "부합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이와 반대로 이 정책만큼 당의 온전한 성격에 더 부합되는 정책은 없었을 것이다. 볼세비키들은 제스처가 아닌 행동의 혁명가들이었고 형태가 아닌 실체의 혁명가였다. 이들의 정책은 공감이나 혐오감이 아니라 실재하는 역관계에 의해 결정되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 비아냥거리자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볼세비키당에 대한 공격, 전선의 총살형, 노동자의 무장해제 등에 지지를 보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화해주의 정당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혁명적 노동계급이 반혁명에 맞서 이 정당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일 것이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을 실무적으로 지지하되 정치적으로는 지지하지 말아야한다. 레닌은 당중앙위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이들에게 정치적 지지를 표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단호한 경고를 실었다: "지금도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지 말아야한다. 이것은 원칙에 어긋난다. 그러나 우리가 코르닐로프에 대항해야 하지 않는가? 라고 여러분들은 질문한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에 대항하기 위해 군사적 실무적으로 케렌스키와 동맹을 맺는 것과 그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도 넘지 말아야할 선이 있다. 일부 볼세비키들은 이 선을 넘어서 '화해주의'로 빠져 들어가 사태의 물결에 휩쓸리고 있다."

멀리서도 정치적 정서의 아주 섬세한 차이를 잡아낼 줄 아는 능력을 레닌은 가지고 있었다. 8월 29일 열린 키에프 시의회 회의에서 지역 볼세비키 지도자 피아타코프는 이렇게 선언했다: "이 위험한 순간에는 과거의 모든 원한들을 잊어야 한다...그리고 반혁명에 대항하는 결정적인 투쟁을 지지하는 모든 혁명 정당들과 연합해야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단결하도록 촉구한다, 등등." 이것이 레닌이 경고했던 바로 그 잘못된 정치적 메시지였다. "과거의 모든 원한들을 잊자"는 것은 막 파산을 앞둔 자들에게 새로이 신용대부를 해주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코르닐로프에 대항해 진정 싸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케렌스키를 지지할 것이 아니라 그의 약점을 폭로해야한다. 명확한 차이점이 있다....임시정부를 지지한다 등등의 표현에 대해서는...단순히 허풍이 들어간 표현에 불과하다고 규정하고 정확히 그리고 무자비하게 반대해야한다." 노동자들은 동궁의 화해주의자들과 맺는 연합의 성격에 대해 환상이 전혀 없었다. "코르닐로프에 대항할 때 노동자들은 케렌스키의 독재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혁명의 모든 성과들을 방어하기 위해 싸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지방의 노동자들이 했던 말이다. 볼세비키들은 화해주의자들에게 조금의 정치적 양보도 하지 않았고 조직이나 깃발을 혼동하지도 않았다. 항상 그래왔듯이 주어진 순간에 더 위험한 다른 적을 타격할 수 있을 경우 이들은 자신의 행동을 덜 위험한 반대파/적의 행동과 조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코르닐로프에 대한 투쟁에서 볼세비키들은 자신의 "특별한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미 혁명방어위원회를 노동계급 혁명의 도구로 전환시킬 임무를 정했다고 수하노프는 암시한다. 코르닐로프에 대항한 혁명방어위원회가 이후 노동계급 봉기를 지도할 기관의 원형이 어느 정도 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수하노프는 볼세비키들이 멘세비키인 자신의 조직적 요인을 미리 보았다고 생각한다. 이 순간 수하노프는 볼세비키들에게 분에 넘치게 너무 많은 선견지명 능력을 부여하고 있다. 볼세비키들의 "특별한 목적"은 반혁명을 분쇄하고 화해주의자들을 입헌민주당과 될 수 있으면 멀리 분리시키고 자신들의 지도 하에 될 수 있으면 많은 대중을 결집시킨 후 최대한 많은 혁명적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것이었다. 탄압 당한 볼세비키당은 자신을 탄압하고 비방한 정부를 구해주었다. 그러나 오직 이 정부를 더욱 확실히 정치적으로 분쇄하려는 목적을 위해서 이 정부를 군사적 파괴에서 구했을 뿐이었다.

8월의 마지막 며칠은 역관계를 또 한번 급격히 변화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는 우에서 좌로의 변화였다. 투쟁에 응한 대중은 소비에트를 7월 위기 이전의 지위로 다시 올려놓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이때부터 소비에트의 운명은 대중 자신의 손에 들어갔다. 투쟁 없이도 이들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미 현실이 된 역관계를 화해주의자들이 인준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이들이 이렇게 하기를 원하는 가에 있었다. 이제 화해주의자들은 입헌민주당과의 연합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고 열에 들떠 선언했다. 이들의 말이 진정이라면 이 연합은 언제든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합을 포기하는 것은 화해주의자들이 권력을 부르주아들로부터 넘겨받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레닌은 즉시 이 새로운 상황의 핵심을 간파하고 이로부터 필요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9월 3일 그는 "타협에 대해서"라는 제목의 멋진 논문을 작성했다. 소비에트의 역할이 이제 다시 바뀌었다고 그는 선언했다. 7월초에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에 대항하는 기관이었고 8월말에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는 기관이 되었다. 소비에트는 다시 군대를 장악했다. 역사는 다시 혁명이 평화적으로 성취될 가능성에 반정도 문을 열어주었다. 이것은 대단히 드물고 귀중한 가능성이다. 이것을 성취하려고 노력해야한다. 여담으로 레닌은 어떤 타협이든 거부하는 허풍선들을 놀렸다. "불가피한 타협이라면 이 타협을 통해서" 목표를 수행하고 임무를 달성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타협 내용은 7월 이전의 요구와 같다: 모든 권력이 소비에트에게 넘어가야 하며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이 수립하는 정부는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오직 지금, 어쩌면 며칠 후, 아니면 일주일이나 이주일 후에 이 정부는 완전히 평화적 방식으로 수립되고 강화될 수도 있다." 시한이 이렇게 짧은 것은 전반적 정세의 격심한 성격 때문이었다: 화해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중 하나를 선택할 시한은 며칠 밖에 없었다.

화해주의자들은 레닌의 제안을 교활한 함정이라고 생각한 후 서둘러 몸을 사렸다. 실제로는 레닌의 제안 속에 교활함이 들어 있다는 힌트는 조금도 없었다. 자신의 정당이 인민의 선두에 설 운명이라고 자신한 레닌은 혁명이 성취될 때까지 벌어질 투쟁의 강도를 약화시키려고 솔직하게 시도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항하는 적의 저항을 약화시키려고 했을 뿐이었다.

레닌의 대담한 정책 변화는 언제나 상황의 변화 자체에 의해 도출되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전략적 계획의 통일성을 언제나 보존했다. 그의 정책 변화에 담긴 이 원리는 혁명 전략의 무한히 소중한 교과서이다. 레닌의 타협적 제안은 무엇보다도 볼세비키당 자신을 위한 혁명 실습으로 의의가 있었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나긴 했지만 화해주의자들이 혁명을 거부할 가능성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는 점을 이 제안은 증명했다. 이제 볼세비키당은 자신이 유일한 혁명의 정당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느꼈다.

3월에 화해주의자들은 권력을 노동계급의 손에서 부르주아 계급의 손으로 넘겨주는 역할을 했다. 이제 이들은 거꾸로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서 노동계급의 손으로 넘겨주는 역할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지금 이들은 이 역할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 권력" 구호는 다시 정지되었다. 그러나 이 정지 상태는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며칠 동안 볼세비키당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그리고 이후 여러 곳에서 다수를 획득했다. 따라서 "소비에트 권력" 구호는 일정에서 철회된 것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았다: 모든 권력을 볼세비키당의 소비에트로 넘겨라. 이제 이 구호는 평화로운 혁명의 구호가 결코 아니었다. 당은 소비에트를 통해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무장 봉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사건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화해주의 소비에트는 어떻게 7월에 헛되이 잃었던 권력을 9월초에 되찾았는가? 볼세비키당 제 6차 대회의 모든 결의문들에는 이런 주장이 들어있다: 7월 사건의 결과 이중권력은 청산되었고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로 대체되었다. 최근 소련의 관변 역사학자들은 이후의 사건들에 비추어서 이 생각을 재평가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그저 이 책에서 저 책으로 모방만 일삼았다. 더욱이 이들은 이렇게 질문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만약 7월에 권력이 군사 파벌의 손에 넘어갔다면 이들은 왜 8월에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을까? 권력을 쥔 자들은 음모를 꾸미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이 짓은 권력을 원하는 자들만이 할 뿐이다.

제 6차 당대회의 표현은 아무리 봐주어도 부정확했다. 허구적인 권력이 공식 정부에게 있고 실제 권력이 소비에트에게 있는 상황을 이중권력이라고 기본적으로 이해한다면 실제 권력의 일부분이 소비에트로부터 부르주아 계급으로 넘어갔다고 해서 이중 권력이 청산되었다고 주장할 이유는 없다. 당시의 상황을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반혁명의 손에 집중된 권력을 과대 평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있고 진정 필요하기도 했다. 당연히 정치는 이성 속에나 존재하는 수학이 아니다. 실제적인 측면에서 7월 패배 직후의 상황 변화가 가져온 의의를 과장하는 것보다 극소화하는 것이 훨씬 위험한 짓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를 분석하는 데에는 선동이 요구하는 이러한 과장이 필요 없다.     

레닌의 사고를 단순화해서 스탈린은 당 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상황은 명확하다. 이제 아무도 이중권력을 말하지 않는다. 소비에트는 전에 실제 권력이었지만 지금은 대중의 단결을 위한 도구에 불과할 뿐 권력을 갖고 있지는 않다." 이에 대해 일부 대의원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7월에 반동은 승리했으나 반혁명은 승리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스탈린은 놀라운 경구로 이렇게 대답했다: "혁명 중에는 반동이 없다." 사실 혁명은 간간이 발생하는 일련의 반동을 통해서만 승리한다. 두발 전진한 후에는 꼭 한발 후퇴한다. 반혁명과 반동의 관계는 혁명과 개량의 관계와 같다. 권력을 소유한 세력이 바뀌지 않은 채 반혁명 계급이 요구하는 방향으로 권력이 변화하는 것을 반동의 승리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반혁명의 승리는 다른 계급에게 권력이 넘어가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다. 7월에 권력은 결정적으로 다른 계급에게 넘어가지는 않았다.

"7월 봉기가 반(半)봉기였다면 반혁명의 승리는 어느 정도 반(半)승리였다." 몇 달 전에 부하린은 이렇게 적었다. 그의 생각은 맞다. 다만 그는 자기 말로부터 필요한 결론을 이끌지 못했다. 절반의 승리는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길 수 없었다. 이중권력은 재구성되고 변모되었으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공장에서는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의지에 반하는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농민은 지주가 소유권을 누리지 못할 정도로 충분히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병사들 앞에서 지휘관들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소유권과 군사력을 제거할 물질적 가능성이 없다면 권력은 아무 의미도 없다. 8월 13일 트로츠키는 그간의 정세 변화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정부와 함께 소비에트가 옆에 존재하면서 정부의 기능을 전부 수행했다....이 뿐이 아니었다. 소비에트와 정부 위에는 각기 다른 계급에 의존하는 두 개의 다른 정치체제가 서있었다. 이것이 상황의 핵심이었다....부르주아 공화국 정부는 위에서 강요되었고 노동자 민주주의 정부는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이 두 정부는 서로를 마비시키면서 나란히 존재했다."

정세의 변화로 집행위원회는 정치적 비중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이것은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화해주의 지도자들이 상실한 모든 것을 부르주아 계급이 전부 가졌다고 상상하는 것은 오류일 것이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우익에게 빼앗겼을 뿐 아니라 좌익에게도 빼앗겼다. 이로 인해 군사 파벌이 이익을 보았을 뿐 아니라 공장위원회와 군대의 연대위원회도 이익을 보았다. 권력은 분산되었다. 그리고 일부는 7월 패배 직후 노동자들이 숨겨 놓은 무기와 함께 지하로 숨었다. 이중권력은 "평화롭고" 접촉을 유지하며 통제된 이전의 모습을 상실했다. 대신 좀더 은폐되었고 좀더 분산되었으며 좀더 적대적이 되어 폭발성을 가졌다. 8월말 이 은폐된 이중권력은 다시 활성화되었다. 이 사실이 10월에 어떤 의의를 획득했는지를 나중에 알게 될 것이다.

 

 

제 14장 최후의 연립정부

심각한 충격에는 조금도 견디지 못하는 전통에 따라 임시정부는 8월 26일 밤에 산산조각이 났다. 코르닐로프의 편의를 위해 입헌민주당은 임시정부에서 철수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케렌스키의 편의를 위해 임시정부에서 철수했다. 정부의 위기는 이렇게 새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케렌스키가 문제가 되었다. 정부의 수반이 반란 음모의 공모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에 대한 분노가 너무 커서 그의 이름만 언급해도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가끔 볼세비키식의 어휘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던 장관들의 열차에서 최근 뛰어내렸던 체르노프는 소속 당의 중앙 기관지에 글을 실어 "어디서 코르닐로프가 끝나고 어디서 필로멘코와 사빈코프가 시작되며 어디서 사빈코프가 끝나고 임시정부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는 전반적인 혼란상"을 다루었다. 그가 암시하는 바는 아주 분명했다. "임시정부 자체"는 물론 케렌스키였다. 그런데 그는 체르노프와 같은 당에 있었다.

그러나 막말로 분노를 풀었지만 화해주의자들은 케렌스키가 꼭 필요한 존재라고 결정했다.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를 사면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이들은 케렌스키만은 즉시 사면했다. 사면에 대한 보답으로 케렌스키는 정부 형태에 대해 양보하기로 이들과 합의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헌의회만이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그러나 이제 법적인 어려움은 갑자기 사라졌다. 정부는 선언문을 통해 코르닐로프의 최고사령관직 해임은 "조국, 자유, 공화국 정부를 구출할" 필요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좌익을 의식한 이 순전히 말뿐이며 더욱이 뒤늦은 선언은 정부의 권위를 조금도 강화시키지 못했다. 왜냐하면 코르닐로프조차 자신이 공화파라고 선언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8월 30일 케렌스키는 사빈코프를 해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자는 며칠 뒤에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사회혁명당에서도 제명되었다. 사빈코프와 같은 종류의 정치 음모꾼 팔친스키가 즉시 후임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볼세비키당 신문을 폐간시키면서 자신의 임기를 시작했다. 집행위원회는 그의 조치에 항의했다. 이즈베스티아 지는 이 조치를 "조야한 도발"이라고 불렀다. 그도 결국 임명 3일 뒤 해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자신의 전반적인 정책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입헌민주당과 함께 하는 새로운 연립정부를 31일에 구성한 것으로 증명되었다. 심지어 사회혁명당조차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이 정당은 당의 대표들을 정부에서 소환하겠다고 위협했다. 정부에 대한 새로운 처방은 바로 체레텔리가 제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연립정부의 아이디어는 보존하되 대신 정부의 목에 맷돌처럼 걸려있는 인물들은 모두 제거해야한다." 스코벨레프는 체레텔리의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다: "연립정부의 아이디어는 강화되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음모와 연루된 당은 정부에 참여할 자리가 없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 제한에 동의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것은 케렌스키의 방식으로 보면 당연히 올바른 반응이었다.

부르주아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을 배제한 채 부르주아 계급과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물론 말이 되지 않았다. 카메네프는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특징인 훈계조 연설을 통해 최근의 사건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었다. "당신들은 무책임한 집단들로 구성되는 더욱 위험한 연립정부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최근의 불길할 사건들에 의해 승인되고 인준된 혁명적 노동계급, 농민, 혁명적 군대로 구성된 연립정부는 잊어버렸다." 체레텔리의 비난으로부터 크론슈타트 수병들을 옹호하기 위해 트로츠키가 5월 26일에 한 말을 그는 상기시켰다: "어느 반혁명 장군이 혁명의 목에 올가미를 던지려고 할 때 입헌민주당은 이 올가미에 미끄럽게 비누칠 할 것이고 크론슈타트 수병들은 우리와 함께 싸우고 죽기 위해 달려올 것이다." 이 상기는 정곡을 찔렀다. "단결된 민주주의"와 "정직한 연립정부"의 허풍에 대해 카메네프는 이렇게 응답했다: "민주주의의 단결은 비보르그 지구와 연립정부를 구성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달려있다....다른 연립정부는 정직하지 못하다." 카메네프의 연설은 의심의 여지없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연설에 대해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었다: "카메네프는 아주 똑똑하고 재치 있게 연설했다." 그러나 이 연설은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에 머물렀다. 왜냐하면 양측이 나아갈 길은 미리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해주의자들과 입헌민주당의 결별은 처음부터 과시용에 불과했다. 코르닐로프를 지지했던 자유주의자들은 며칠만 어두운 곳에서 숨어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이제 입헌민주당과의 명백한 합의에 따라 밀실에서 이렇게 결정되었다: 나라의 모든 진정한 세력들의 한참 위에 군림하는 정부를 구성하여 이 정부가 확고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확신시키자. 케렌스키 이외에 통령 정부를 구성할 5명의 장관들은 다음과 같았다: 연합국 외교관들과의 연줄 덕분에 이미 교체가 불가능한 외무장관 테레쉬첸코; 장관 임명을 위해 대령에서 장군으로 서둘러 진급된 모스크바 군관 사령관 베르호프스키; 역시 장관 임명을 위해 서둘러 감옥에서 풀려난 베르데레프스키 제독; 마지막으로 장관 임명 후 제명 당할 죄를 지었다고 소속 당이 인정한 의심스러운 멘세비키 니키틴.

남의 도움으로 코르닐로프를 제압한 케렌스키에게 이제 관심사는 하나 뿐인 것처럼 보였다: 코르닐로프의 강령을 시행하는 것. 코르닐로프는 최고사령관직과 정부 대표직을 통합하고 싶어했다. 케렌스키는 그의 소망을 달성시켜 주었다. 코르닐로프는 5명의 통령을 내세워 개인 독재를 위장하고 싶어했었다. 케렌스키는 그의 계획을 실현시켰다. 부르주아 계급은 정부에서 체르노프의 축출을 요구했었는데 케렌스키는 그를 동궁에서 축출시켰다. 입헌민주당의 영웅이자 수상 후보였던 알렉세이예프 장군을 케렌스키는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 즉 실질적인 군대의 총수로 임명했다. 육군과 함대에 명령을 내려 케렌스키는 군대 내 정치투쟁의 종식 즉 혁명 이전의 질서 복구를 요구했다. 피신처에서 레닌은 권력 상층부의 상황을 그답게 대단히 간결하게 묘사했다: "코르닐로프와 우연히 다투었지만 코르닐로프 추종자들과 긴밀하게 계속 연합한 코르닐로프 추종자가 있다. 케렌스키가 바로 그 작자이다." 그러나 케렌스키에게 약점이 하나 있었다: 반혁명에 대한 혁명 대중의 승리는 케렌스키의 개인적 계획이 요구한 것보다 훨씬 완벽했다.

통령 정부는 구 전쟁장관이었으며 반란 음모의 주동자의 일인으로 간주된 구츠코프를 감옥에서 서둘러 풀어주었다. 일반적으로 법무부는 입헌민주당의 반란 음모자들은 손도 대지 않았다. 이 상황에서 볼세비키들을 감옥에 계속 가두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정부는 해결책을 하나 찾아냈다: 기소를 취하하지 않은 채 보석금을 받고 볼세비키들을 석방시키자. "존경받는 혁명적 노동계급 지도자의 석방을 위해 보석금을 마련하는 명예"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와 노동조합들이 얻었다. 9월 4일 적은 액수이지만 진정으로 허구적인 3천 루블의 보석금으로 트로츠키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자신이 쓴 러시아 소요의 역사에서 데니킨 장군은 종교적 열정으로 이렇게 적었다: "동일한 임시정부에 의해 9월 1일 코르닐로프 장군은 체포되었으며 9월 4일 트로츠키는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 두 날짜를 러시아는 기억해야 한다." 이후 며칠에 걸쳐 볼세비키들이 보석금을 내고 계속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볼세비키들은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곧장 투쟁 대오에 합류했다. 대중은 이들을 기다리고 요구하고 있었다. 당은 사람이 필요했다.

트로츠키가 감옥에서 풀려난 날 케렌스키는 명령을 내렸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정부의 권력에 아주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지만 이제 활동을 중단해야한다. 이즈베스티아 지 역시 케렌스키가 상황을 상당히 엉성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들의 지구간 협의회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반혁명에 대해 투쟁하는 혁명 조직들을 해산시킬 수 없다." 아래로부터 압력이 너무나 거셌기 때문에 화해주의자들의 군사혁명위원회는 케렌스키의 명령에 굴복하지 않기로 결정한 후 지부들에게 "계속되는 위험한 상황에 비추어 이전의 열정과 규율을 발휘하여 활동할 것"을 촉구했다. 케렌스키는 이 상황을 침묵으로 받아들였다. 그로서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통령 정부의 전능한 대표인 그는 행동의 순간마다 이렇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황은 바뀌었다; 반대 세력은 힘이 커졌다; 최소한 말로만이라도 변화가 필요하다. 9월 7일 베르호프스키는 언론에 이렇게 발표했다: "군대의 지금 심리상태로 보아 사기만 더욱 침체시킬 것이므로" 코르닐로프 반란 전에 준비된 군대 부흥 프로그램은 당분간 시행을 연기한다.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전쟁장관인 그는 집행위원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조금도 걱정할 것 없다; 알렉세이예프 장군은 해임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함께 코르닐로프 반란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자들도 모두 해임될 것이다; "채찍과 기관총을 동원해서가 아니라 올바름, 정의, 엄격한 규율을 암시하는 것을 통해" 군대 내에 건강한 원칙들이 주입되어야한다. 그의 말은 혁명의 봄날 같이 들렸다. 그러나 밖은 9월이었고 가을이 다가오고 있었다. 실제로 며칠 후에 알렉세이예프는 해임되었고 두호닌이 대신 임명되었다. 이 신임 참모장의 뛰어난 점은 아무도 그를 모른다는 데에 있었다.

이 양보조치에 대한 대가로 집행위원회가 즉시 정부를 지원하라고 이 전쟁 및 해양 장관은 요구했다: 장교들은 신변의 불안 속에 살고 있다; 발트해 함대는 최악이다; 수병들을 진정시켜야한다. 긴 토론 후 언제나 그랬듯이 발트해 함대에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결정되었다. 이 대표단에는 볼세비키 특히 트로츠키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화해주의자들은 우겼다: 오직 이 조건이 충족되어야 대표단은 확실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이들은 말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체레텔리가 옹호하는 정부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의 협력도 단호히 거부한다....정부는 인민의 통제에 벗어나 있으며 인민의 이익에 반하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막다른 골목에 처하거나 재앙을 가져오면 정부는 혁명조직들에게 이 불가피한 결과들을 진정시키는 중노동을 강요하고 있다....당신들이 표현하는 바 이 대표단의 임무 중의 하나는 주둔군의 참모부에서 '암흑 세력' 즉 밀정과 첩자들을 찾아내는 것이다....내 자신이 108조에 의해 기소되어 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잊었는가?...린치 법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검찰총장이나 정보국과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혁명정당으로서 대중을 설득하고 조직하고 교육시킬 것이다."

코르닐로프 반란 와중에 "민주 협의회" 소집이 이미 결정되었다. 이 협의회의 기능은 민주주의의 역량을 드러내고, 좌우익의 적들에게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심을 불어넣고, 마지막으로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임무로, 너무 열성적인 케렌스키를 저지시키는 것이었다.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일종의 즉흥적인 대의제로 정부를 개조하겠다고 화해주의자들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부르주아 계급은 미리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민주주의 진영이 코르닐로프에 대한 승리를 통해 다시 회복한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시도가 민주협의회로 나타났다고 이들은 판단했다. 밀류코프는 자신의 혁명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체레텔리의 민주협의회는 핵심적으로 레닌과 트로츠키의 계획 앞에 완전히 굴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였다: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려는 볼세비키당의 투쟁을 마비시키는 장치가 체레텔리의 민주협의회였다. 민주협의회는 소비에트 전국대회에 대항하여 계획되었다. 자신들을 위해 새로운 토대를 구축한 후 모든 종류의 조직들을 인위적으로 뭉뚱그려 놓아 소비에트를 목 졸라 죽이는 것이 화해주의자들의 계획이었다. 민주주의자들은 민주협의회의 표를 마음대로 배분하여 자기들이 확실한 다수를 보장받으려고 골몰했다. 상층 조직들은 하층 조직들보다 민주주의자들에게 훨씬 유리했다. 비민주적인 젬스트보를 포함하여 자치 기구들은 민주협의회에서 소비에트보다 훨씬 비중이 컸다. 협동조합의 공식 대표들은 민주주의자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주인이 되었다.

이때까지 정치의 장에서 전혀 존재가 없던 협동조합 공식 대표들은 모스크바 국정협의회를 통해 정치 무대의 전면에 떠밀려 올라왔다. 이때부터 이들은 2천만 회원들 또는 좀더 단순히 표현해서 러시아 인구의 약 절반의 대표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농촌 상층부를 통해 뿌리를 내렸다. 농촌 상층부는 종종 엄청난 면적의 자기 토지가 그대로 유지되고 확대되는 조건으로만 귀족 소유의 토지를 "정당하게" 몰수하는 것을 승인했다.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자유주의 인민주의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자유주의 맑스주의 지식인들에서 배출되었다. 이들은 입헌민주당과 화해주의자들을 연결시키는 자연스러운 교량이었다. 부농이 복종하지 않는 농촌 노동자를 증오하듯이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볼세비키들을 증오했다. 이들이 자기 이익을 확대하기 위해 중립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볼세비키당에 대항했으며 이 순간 화해주의자들은 이들을 동맹 세력으로 열심히 포섭했다. 레닌은 이 민주부엌(민주협의회)의 주방장들을 가차없이 비난했다. "이 엄선된 협동조합 대의원 100명 이상 보다 10명의 확신 있는 병사나 후진적 공장의 노동자가 1,000 배나 더 가치 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의사가 환자들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하지 않고 우체국 직원이 일반인의 정치적 의지를 표현하지 않듯이 협동조합 관리들도  농민의 정치적 의지를 마찬가지로 표현하지 않는다.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좋은 조직가, 상인, 회계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처럼 농민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방어하는 투쟁에서 소비에트를 신뢰한다." 그러나 이 주장에도 불구하고 협동조합 지도자들은 민주 협의회에서 150석을 차지했다. 이를 통해 개혁되지 않은 젬스트보와 머리채가 잡혀 끌려온 모든 종류의 다른 조직들과 마찬가지로 대중의 대표권을 완전히 왜곡시켰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민주협의회 대의원에 레닌과 지노비에프를 포함시켰다. 이 두 대의원이 협의회 대회장 안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지만 대회장에 들어오기 위해 입구를 통과할 때는 체포하라고 정부가 명령했다. 화해주의자들과 케렌스키는 이렇게 합의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레닌 및 지노비에프 대의원을 통해 정치적 시위를 했을 뿐이었다. 왜냐하면 레닌이나 지노비에프나 민주협의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볼세비키당이 민주협의회에서 할 일은 전혀 없다고 레닌은 생각했다.

국정협의회가 끝난 지 정확히 한달 후인 9월 14일에 민주협의회가 알렉산드린스키 극장 강당에서 개막되었다. 1,775명의 대의원들에 대한 신임장이 인정되었다. 약 1,200명의 대의원이 협의회 개막식에 참석했다. 물론 볼세비키당은 소수파였다. 그러나 대의원 배정 방식의 모든 속임수에도 불구하고 당은 상당한 그룹을 형성하여 일부 문제들에서는 전체 대의원의 3분의 1 이상을 결집시켰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정부가 이 "사적인" 행사에 불과한 협의회에 참석하는 것이 적절한가? 이 문제에 대해 동궁은 결정하기가 상당한 힘들었다. 그리고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은 흥분 속에 이 결정을 기다렸다. 결국 케렌스키는 협의회에 모습을 나타내기로 결정했다. 케렌스키의 대회장 도착을 묘사하면서 슐리아프니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박수를 받으며 무대에 올라가 연단 탁자에 앉아있는 인사들과 악수를 했다. 우리 볼세비키들은 서로 가까이 앉아 있었다. 우리 차례가 왔을 때 우리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손을 내밀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는 케렌스키가 내민 손에서 내 손을 빼버렸다. 그러자 그는 우리를 지나친 채 다른 사람들과 악수했다!" 코르닐로프 지지자들과 반대쪽에 앉아있는 좌익 대의원들도 같은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과 코르닐로프 지지자들 외에는 이렇다할 실세가 없었다.

협의회의 전반적 상황 때문에 그는 반란 음모에서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그는 너무 지나치게 즉흥적으로 상황을 비껴가려고 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나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코르닐로프에게 가기 전에 나에게 와서 같은 길을 갈 것을 제안했다." 그러자 좌익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누가 와서 제안을 했는가?" 자기가 한 말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오자 케렌스키는 겁을 먹은 채 입을 닫았다. 그러나 음모의 정치적 배경은 가장 단순한 자들에게도 이미 드러나 있었다. 협의회 참석 후 우크라이나의 화해주의자 포쉬는 키에프 의회에서 이렇게 보고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이 코르닐로프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위험에 처한 순간에는 모두가 앞으로 나와 자기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등등 모두가 싫증내는 그의 상투적 표현에 대해 "그리고 사형 제도에 대해서도 그런가?"라고 누가 응수하자 케렌스키는 이와 못지 않은 큰 타격을 스스로에게 가했다. 평정을 상실한 채 자기를 포함해 모두가 완전히 놀랄 정도로 그는 고함을 내질렀다: "잠깐만. 나와 최고사령관이 단 한번이라도 사형 승인서에 서명을 했다면 나를 욕해도 좋다." 그러자 어느 병사가 연단의 가장자리까지 가까이 다가와 고함을 질렀다: "당신은 나라의 재앙이요." 결국 이렇게 해서 일이 터졌다! 케렌스키는 정부 대표라는 고위직을 잊어버리고 협의회의 평범한 일인으로 사안들을 논의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말했다: "그러나 참석 대의원 모두가 이 사람을 이해하지는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권위의 언어를 구사할 생각이었다: "감히 덤빌 사람은 모두..." 애석하게도 모스크바 국정협의회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감히 코르닐로프가 그에게 대들었다.      

연설을 통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물었다: "사형 제도가 필요했다면 이것을 활용하지 않겠다고 케렌스키가 감히 지금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민주주의 대중에게 사형 제도를 적용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그가 생각한다면...사형 제도의 부활은 범죄성의 한도를 넘어서는 경박한 행동이다." 일부는 침묵으로 일부는 시끄럽게 그러나 전부가 이 말에 동의했다. 케렌스키의 동료이자 그를 존경했던 법무차관 데미아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고백함으로써 케렌스키는 자신과 임시정부의 얼굴에 심한 먹칠을 했다."

정부 구성의 문제를 해결한 것 이외에 정부가 한 일을 보고할 수 있었던 장관은 한 명도 없었다. 경제 조치들? 단 하나도 거론할 수 없었다. 평화 정책? 다른 장관들보다 더 정직하게 구 법무장관 자루드니가 말했다: "이 문제에 대해 임시정부가 한 일이 하나라도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본 적이 없다." "권력은 전부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으며" 그의 고갯짓에 장관들이 임명되고 해임되었다고 자루드니는 당혹스럽게 불평했다. 체레텔리는 이 주제에 대해 조심성 없이 이렇게 발언했다: "정상에 앉은 민주주의의 대표가 약간 현기증을 느꼈다면 민주주의는 자신을 책망해야한다." 그러나 정부의 독재를 초래한 민주주의의 모든 특징들을 가장 완벽하게 구현한 자는 바로 체레텔리였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반박했다: "케렌스키는 왜 지금 그 자리에 앉아있는가? 민주주의 진영의 허약함과 단호하지 못함 때문에 케렌스키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통령 정부의 장관 전부나 그 대표를 불명예스럽게 옹호하려는 연설자는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 이 말에 항의의 고함이 터졌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계속 말했다: "지금 고함으로 표현되고 있는 관점을 누가 연단에 나와 차근차근 표현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단 한 명의 연설자도 연단에 올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다: '연립정부의 과거에 대해 왜 주장을 늘어놓는가? 연립정부의 미래에 대해 왜 걱정을 하는가? 우리에게는 케렌스키가 있다. 그 하나만으로 충분하다....'" 이제 이 문제가 볼세비키당의 관점으로 제시되자 체레텔리와 자루드니는 거의 자동적으로 단결했으며 이들은 모두 케렌스키와 단결했다. 이 점에 대해 밀류코프는 날카롭게 지적했다: 자루드니는 케렌스키의 독재권력을 불평할 수 있었다; 체레텔리는 정부가 현기증을 느끼고 있다는 힌트를 던질 수 있었다 --- "그것들은 말에 불과했다." --- 그러나 어느 누구도 케렌스키를 공개적으로 방어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트로츠키가 말하자 "공동의 적이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대회장의 대의원들은 즉시 느꼈다."

권력을 부담이요 불행으로만 보는 자들이 권력을 말했다. 권력을 위한 투쟁? 페쉐호노프 장관은 대의원들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이제 모든 자들은 권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다." 이것은 사실이었는가? 코르닐로프는 자신을 권력으로부터 보호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주 신선한 이 교훈은 이미 반정도 잊혀졌다. 체레텔리는 이렇게 공격했다: 볼세비키들은 직접 권력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이것을 소비에트에게 밀쳐 넘기고 있다. 그러자 그의 생각을 이어서 말하는 자들이 나왔다. 그렇다, 볼세비키들이 권력을 잡아야한다! --- 이렇게 단상의 탁자에 앉아있던 대표들이 중얼거렸다. 아브크센티에프는 자기 옆에 앉아있던 슐리아프니코프에게 얼굴을 돌렸다: "권력을 잡으시오, 대중이 당신들을 따를 것이요." 같은 목소리로 슐리아프니코프는 그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일단 단상의 탁자 위에 권력을 올려놓자. 연단의 연설과 단상의 대화에서 나온 볼세비키당에 대한 이 도전은 반정도 아이러니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도전은 일부는 빈정거림이었고 일부는 탐색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모스크바, 그리고 다수의 지방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를 차지한 볼세비키당은 이제 어떻게 나올 것인가? 이들이 정말 감히 권력을 장악할까? 이것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체레텔리가 이 도전적인 연설을 하기 10일전에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 지는 이렇게 선언했다: 앞으로 상당한 세월동안 볼세비키당의 꼴을 보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 당의 지도자들이 러시아를 통치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대세를 장악한 저 불행한 지도자들은 권력을 전부 장악할 욕망이 결코 없다....실제로 이들의 입장은 어떤 관점에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없다." 가장 봐주면서 말하자면 이 자부심이 가득한 결론은 약간 성급했다.

지금 시점까지 온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볼세비키당의 엄청난 강점이 하나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적들을 아주 잘 이해하고 이들을 완전히 꿰뚫어 보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이겠다고 결심한 집단이나 가질 수 있는 명확성, 단순성, 날카로운 주의력 등이 볼세비키당에게 있었다. 레닌주의 정치 유파의 이 강점은 유물론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반면 자유주의자들과 화해주의자들은 자신들의 편의에 맞추어서 그리고 순간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볼세비키당을 창조했다. 이와 다르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미래가 없는 정당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직시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한번도 증명하지 못했다. 치유될 가망이 없는 환자가 자기 질병을 직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화해주의자들은 볼세비키당이 봉기를 일으킬 것이라고 믿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봉기를 여전히 두려워했다. 케렌스키는 이 점을 가장 잘 표현했다. 그는 연설 한 가운데에서 갑자기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잘못 판단하지 마라. 볼세비키당이 나를 괴롭힐 때 민주주의 세력이 나를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말라. 내가 공중에 붕 떠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당신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철도가 멈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라. 전보도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이 연설을 대회장 일부는 박수로 환호했고 일부는 당혹스러운 침묵을 유지했다. 볼세비키당 대의원들은 그냥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이 공중에 붕 떠있지 않다고 주장하지 않을 수 없는 독재는 참으로 가련한 독재이다!

이 아이러니컬한 도전, 비겁하다는 비난, 엉성한 위협에 대해 볼세비키당은 선언문을 통해 이렇게 대답했다: "강령 실현을 위한 권력장악 투쟁에서 우리 당은 전국 근로대중 다수의 조직된 의지에 반하여 권력을 잡으려고 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이것은 소비에트 다수당으로서 정권을 잡겠다는 의미였다. "근로 대중의 조직된 의지"에 대한 말은 다가올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가리킨 것이었다. 선언문은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인정하는 민주협의회의 결정과 제안들만이 실현의 길을 찾을 것이다...."

트로츠키가 읽어나간 볼세비키당의 선언문은 노동자의 즉각적 무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그러자 협의회의 다수파 벤치에서는 고함이 계속 터져 나왔다: "무엇을 위해? 무엇을 위해?" 놀라움과 도발의 동일한 음조였다. 무엇을 위해? 그러자 트로츠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반혁명에 대한 진정한 보루를 구축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었다: "우리 당과 우리 당을 따르는 노동자 대중의 이름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한다. 무장한 노동자들은 러시아 역사가 그 동안 결코 알지 못했던 영웅적 행위를 통해 제국주의 군대에 대항해 혁명 조국을 방어할 것이다...." 대회장을 격렬하게 양분시킨 이 약속을 체레텔리는 허풍이라고 규정했다. 이후 적군(赤軍)의 역사는 그의 생각을 반박했다.

화해주의 지도자들이 입헌민주당과의 연합을 파기한다고 선언한 뜨거운 열정의 순간은 이제 한참 먼 과거의 일이 되었다: 입헌민주당 없는 연립정부는 구성될 수 없었다. 물론 여러분들은 우리에게 권력을 다 가지라고 요청하지는 않겠지요! 스코벨레프는 이렇게 깊이 생각했다: "2월 27일에 권력을 잡을 수도 있었는데. 그러나...부르주아들이 혼란에서 회복되어 권력을 잡도록 우리는 모든 힘을 다해 도와주었지." 그런데 혼란에서 회복된 부르주아 양반들은 왜 코르닐로프 같은 자들이 권력을 잡는 것을 막았을까? 체레텔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순수 부르주아 정부는 아직 수립될 수 없다; 이 정부가 들어서면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이 일련의 단계들을 거쳐 정권을 잡는 상황을 코르닐로프 같은 자들의 군사적 모험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들을 제압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제 혁명적 민주주의가 승리했으므로 연립정부 수립의 특별히 좋은 기회가 다가왔다."

협동조합 지도자들의 정치철학을 이들의 지도자 베르컨하임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결국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잡을 것이다." 나이 많은 혁명적 인민주의자 미노르는 민주협의회가 연립정부를 만장일치로 승인하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속이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육할 것이다...." "누구를 살육할 것인가?" 라는 고함이 좌익의 벤치에서 나왔다. 미노르는 불길한 침묵 속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서로를 살육할 것이다." 입헌민주당의 견해에 따르면 볼세비키당의 "무정부주의적 폭력행위"에 대처하기 위해 연립정부가 필요했다. 밀류코프가 아주 솔직하게 설명했듯이 "이것이 연립정부 수립의 핵심 이유이다." 연립정부가 수립되면 화해주의자들과 볼세비키들은 서로 살육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미노르의 희망이었다. 반면 화해주의자들과 입헌민주당이 단결하여 연립정부를 수립하면 볼세비키당을 살육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밀류코프의 확고히 계산이었다.

연립정부에 대한 토론 도중 리아자노프는 8월 29일자 레치 지의 사설을 대의원들에게 읽어주었다. 이 사설은 밀류코프가 인쇄되기 바로 직전에 철회했기 때문에 빈칸으로 남아있었다. 리아자노프는 신문 대신 사설의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목적을 코르닐로프 장군은 추구하고 있었다. 우리는 두려움 없이 이렇게 말한다." 이 사설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좌익에서 이렇게 외쳤다: "조국을 잘도 구하겠다!" 그러자 입헌민주당은 자기 방어에 열심이었다: 결국 사설은 실리지 않았다!; 더욱이 입헌민주당원 모두가 코르닐로프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죄인과 성자를 구별할 줄 알아야한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입헌민주당 전체가 코르닐로프 반란에 참여했다고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저들의 주장이다. 즈나멘스키는 볼세비키들에게 이렇게 말해왔다: '7월 3일~5일의 시위에 대해 볼세비키당 전체가 책임이 있다고 우리가 비난했을 때 당신들은 항의했다.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해 입헌민주당 전부가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지 말아라.' 그러나 이 비교는 정확한 구석이 조금도 없다. 저들이 7월 3일 ~ 5일 시위에 대해 볼세비키들을 비난했을 때 저들은 우리를 장관실에 초대한 것이 아니라 감옥으로 초대했다. 법무장관 자루드니는 이 차이를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도 지금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코르닐로프 반란에 대한 죄로 입헌민주당원을 감옥으로 끌고 들어가려면 입헌민주당원들 전부를 도매금으로 끌고 들어가지 말고 당원을 하나씩 사방에서 조사한 후 끌고 들어가라 (터지는 웃음. '멋지다!'라는 목소리). 입헌민주당을 장관실로 모시는 문제라면 다음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배후에서 이런 저런 입헌민주당원이 코르닐로프를 만났다; 사빈코프가 코르닐로프와 협상하고 있는 동안 마클라코프는 전신실에 서 있었다; 로디체프는 돈강 지역으로 내려가 칼레딘과 정치협상을 벌였다. 이런 일들은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부르주아 언론 전부가 코르닐로프를 공공연히 환영했거나 그의 승리를 기다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것이다....내가 당신들에게 연립정부의 파트너가 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음날 헬싱키와 스베아보르그의 대표인 수병 쉬슈킨은 같은 주제에 대해 좀더 짤막하고 암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발트해 수병들과 핀란드 주둔군은 연립정부를 신뢰하거나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연립정부에 반대하여 수병들은 전투 깃발을 게양했다!" 이성에 입각한 주장은 효력이 없었다. 그래서 수병 쉬슈킨은 군함의 대포로 주장을 대신했다. 대회장 입구에 보초를 서던 다른 수병들은 그의 말을 충심으로 지지했다. 부하린은 이후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당에 대항하여 민주협의회를 방어하도록 케렌스키가 보초로 세운 수병들은 트로츠키에게 얼굴을 돌려 총검을 흔들면서 그에게 물었다: '언제 빨리 이것으로 작업을 시작합니까?'" 이 질문은 크레스티 감옥에서 트로츠키를 면회할 때 순양함 오로라호의 수병들이 했던 것과 똑같았다. 그러나 그때와 달리 지금 수병들에게는 행동할 순간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섬세한 정치적 색조들을 무시한다면 민주협의회를 세 집단으로 쉽게 나눌 수 있었다. 우선 규모가 크지만 매우 불안정한 중앙파가 있었다. 이 집단은 권력을 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했으며 연립정부에 찬성하지만 입헌민주당은 원치 않았다. 다음으로 케렌스키를 무조건 지지하고 부르주아 계급과 연립정부를 원하는 허약한 우파가 있었다. 우파보다 규모가 두 배나 큰 좌파는 소비에트 정부나 사회주의자(화해주의자)들의 정부를 원했다. 민주협의회의 소비에트 대의원단 회의에서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권력을 그리고 마르토프는 사회주의자 단일 정부를 지지하는 연설을 각각 했다. 전자는 86표를 후자는 97표를 얻었다. 공식적으로는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의 반 정도가 볼세비키당을 지지했다. 나머지 반은 볼세비키당과 화해주의자 사이에서 동요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은 산업과 문화 중심지에 있는 강력한 소비에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당은 민주협의회보다는 소비에트에서 훨씬 강력했고 소비에트에서보다는 노동계급과 군대에서 훨씬 강력했다. 더욱이 후진적인 소비에트들은 급격하게 선진적인 소비에트들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민주협의회는 찬성 766표, 반대 688표, 기권 38표로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연립정부 찬성파와 반대파는 힘이 거의 대등했다! 연립정부에서 입헌민주당을 제외시키자는 수정안은 찬성 595표, 반대 493표, 기권 72표로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입헌민주당을 제외시키는 것은 연립정부의 목적에 전적으로 어긋났다. 이 때문에 전체적으로 연립정부 결의안은 813표의 다수로 거부되었다. 즉 우파, 좌파, 결의에 찬 당파적 인물들, 연립정부에 대해 타협하지 않는 적 등이 연합했다. 이들의 반대에 중앙파는 붕괴하여 133표가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80표는 기권이었다. 따라서 연립정부 반대 결의안은 최대 다수가 단합한 표결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입헌민주당 없는 연립정부만큼이나 무의미했다.

밀류코프가 말하고 있듯이 "기본 문제에서 협의회는 이렇게 입장이나 정식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면 지도자들이 해야할 일은 무엇이었는가? 자신들의 의지를 거부한 "민주주의"의 의지를 짓밟는 것뿐이었다. 이미 전체 회의에서 결정된 문제를 다시 결정하기 위해 정당들과 그룹들의 대표로 구성된 최고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역시 결과는 연립정부 찬성 50표, 반대 60표였다. 이제 이 문제는 명확한 것처럼 보였다. 상설 기구인 민주협의회가 정부를 통제하는 문제는 확대 최고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로 이 기구를 채우는 것에 대한 표결에서 찬성 56표, 반대 48, 기권 10이 나왔다. 그러자 케렌스키가 나타나 사회주의자 단일 정부를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제 남아있는 일은 기분이 상한 민주협의회를 집으로 보내고 이것 대신 무조건 연립정부를 지지하는 자들이 다수가 될 기구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이 바람직한 일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산수의 규칙만 이해하면 되었다. 최고회의의 이름으로 체레텔리는 협의회에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대표기구는 "정부 수립에 협력하기 위해" 소집되었으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정부는 "이 기구를 제재"해야만 한다. 이렇게 하여 케렌스키에게 자갈을 물리려는 꿈은 기록 보관서의 서류철에 남았다. 부르주아 대표들이 필요한 정도로 채워진 미래의 공화국 의회 즉 예비의회는 입헌민주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를 승인할 것이다. 체레텔리의 결의안은 민주협의회가 원했던 것 그리고 바로 전에 최고회의가 결의한 것의 정반대였다. 그러나 대의원들의 전반적인 좌절, 쇠퇴, 사기 침체는 너무나 커서 민주협의회는 약간 위장된 굴복적 성격의 결의안을 찬성 829표, 반대 106표, 기권 69표로 통과시켰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이렇게 하여 지금 화해주의 및 입헌민주당 양반들은 상황을 정복했다. 당신들의 게임을 하라. 당신들의 새로운 실험을 하라. 그것은 당신들의 마지막 실험이 될 것이다. 이 점을 우리가 보장한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민주협의회는 생각이 대단히 느슨해서 이것을 입안한 사람들조차 놀랐다." 화해주의 정당들에서는 "완전한 혼란이 지배했다."; 우익과 부르주아 정치권에서는 "웅성거림과 귓속말로 전해지는 비방이 난무했으며 그나마 마지막까지 조금 남아있던 정부의 권위는 천천히 부식되었다...; 그리고 좌익에서만 투쟁 분위기와 역량이 강화되었다." 이것은 볼세비키당을 반대했던 어느 인물의 증언이었다. 그는 10월에 볼세비키에서 다시 총부리를 겨누게 될 것이다. 거국적 단결의 행진이었던 모스크바 국정협의회가 케렌스키에게 선물했던 것을 이제 민주주의 행진인 뻬쩨르부르그 민주협의회가 화해주의자들에게 선물했다. 이 선물의 이름은 정치적 파산의 공개적 고백과 정치적 쇠퇴의 확인이었다. 국정협의회가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촉진제가 되었던 반면 민주협의회는 볼세비키당의 무장봉기에 마침내 길을 내주었다.

해산되기 전에 민주협의회는 대의원의 15%를 상설기구의 성원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전부 약 350명의 대의원이었다. 이와 더불어 유산계급들의 기관들은 120석을 할당받았다. 정부는 자기 이름으로 카자흐들에게 20석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공화국 회의 즉 예비의회를 구성할 것이다. 이 기구는 제헌의회가 소집되기 전까지 나라를 대표할 것이다.

공화국 회의에 대한 볼세비키당의 태도는 즉시 아주 격렬한 전술적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대중에게 자기들의 정치적 허약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과 반(半)무정부주의자들은 의회 기구에 어쩔 수 없이 불참한다. 이를 통해 이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 없는 수동적 고고함을 보존한다. 혁명정당은 현 정권을 즉시 타도하는 임무를 설정했을 경우에만 의회에 등을 돌릴 수 있다. 1905년 혁명과 1917년 혁명 사이의 기간에 레닌은 혁명정당의 의회 참여 문제를 대단히 깊이 탐구했다.

가장 제한적인 참정권에 기초한 의회도 실제 계급 역관계를 표현할 수 있으며 역사상 여러 번 이것을 표현했다. 예를 들어 1905년~1907년의 패배한 혁명 직후 소집된 의회가 이런 경우였다. 이런 의회를 거부하는 것은 의회를 혁명에게 유리하게 변화시키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는 행위이며 동시에 실제 역관계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체레텔리와 케렌스키의 예비의회는 역관계를 조금도 반영하지 못했다. 이것은 정부 상층부의 기구에 대한 신비한 신념, 형식에 대한 물신숭배, 이 물신숭배를 자기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적에게 덮어 씌워 제압하려는 희망 등을 통해 이들이 무기력과 사기 행각으로 만들어낸 기구였다.

혁명이 예비의회의 멍에를 복종하듯이 받아들여 어깨를 숙이고 등을 구부리도록 강요하기 위해서는 먼저 혁명을 분쇄하는 것이 필요했다. 또는 어쨌든 혁명을 심각하게 패배시켜야했다. 그러나 지금은 부르주아 계급의 전위가 패배를 당한 지가 3주일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혁명은 새로운 활력의 유입으로 역량이 이미 강화되었다. 혁명은 부르주아 공화국이 아니라 노동자 농민의 공화국을 자신의 목표로 이미 설정했다. 따라서 소비에트 내에서 혁명이 영향력을 꾸준히 확대시키고 있는 마당에 예비의회의 멍에 밑으로 기어 들어갈 이유는 전혀 없었다.

9월 20일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민주협의회의 볼세비키 대의원, 중앙위원 자신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등으로 구성된 당 협의회를 소집했다. 중앙위원회의 대변인 자격으로 트로츠키는 예비의회 불참 구호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카메네프, 라이코프, 리아자노프 등 일부가 결단코 반대한 반면 스베르들로프, 요페, 스탈린 등은 공감을 표시했다. 이 문제로 양분된 중앙위원회는 당헌과 당의 전통을 위반하면서 이 문제를 당 협의회가 결정하도록 넘기지 않을 수 없었다.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대표하여 트로츠키와 라이코프가 발언했다. 이 뜨거운 논쟁이 순전히 전술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으며 실제로 다수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 논쟁은 4월의 이견을 소생시켰으며 10월의 이견을  촉발했다. 당이 부르주아 공화국의 수립에 자신의 임무를 조정할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권력 장악의 목표를 세울 것인지가 문제였다. 77표 대 50표의 다수로 당 협의회는 불참 구호를 거부했다. 9월 22일 승리로 만족한 리아자노프는 민주협의회에서 당을 대표하여 발언했다: "화해주의의 이 새로운 성채에서 부르주아 계급이 참여하는 새로운 연립정부 수립의 모든 시도들을 폭로하기 위해" 볼세비키당은 예비의회에 대표를 보낼 것이다. 그의 발표는 대단히 급진적인 것처럼 들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혁명적 행동의 정책을 야당의 폭로 정책으로 바꿔치기 하는 것이었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당 전체에 의해 실천되어왔다. 그러나 큰 문제가 등장할 때마다 3월의 태도들이 4월 테제의 물결 밑에서 비집고 올라오곤 했다. 그리고 이 태도는 당의 상층부에서 매우 강했다. 그리고 당은 최근이 되어서야 전국의 다수 지역에서 멘세비키당과 분리되었다. 레닌은 사건이 종료된 후에야 이 논쟁에 참여할 수 있었다. 9월 23일 그는 이렇게 적었다: "예비의회에 불참해야한다. 노동자 병사 농민 소비에트, 노동조합 그리고 일반적으로 대중에게 가야한다. 이들의 투쟁을 촉구해야한다. 이들에게 올바르고 명확한 구호를 제시해야한다: 예비의회를 통해 사기행각을 벌이는 케렌스키 독재자 일당을 몰아내야 한다....코르닐로프 반란을 겪고도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우리의 타협안을 거부했다....이들에 대해 가차없이 투쟁해야한다! 모든 혁명조직에서 이들을 가차없이 추방해야한다!...트로츠키는 불참을 지지했다. 트로츠키 동지, 훌륭하다! 민주협의회 볼세비키 대표단이 불참 전술을 패배시켰다. 불참 전술 만세!"

이 문제가 당의 하부로 내려갈수록 역관계는 결정적으로 불참 전술을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거의 모든 지역 당 조직들이 이 문제를 놓고 다수파와 소수파로 분열되었다. 예를 들어 키에프 위원회에서 에프게니아 보쉬가 주도한 불참 전술 지지자들은 허약한 소수파였다. 그러나 당 협의회가 끝난 지 며칠 후 열린 키에프 전체 시협의회에서 예비의회 불참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압도적 다수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안은 선언했다: "수다떨고 환상을 유포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한편 이 와중에 민주주의의 허약한 허세를 모두 던진 채 케렌스키는 모든 힘을 다해 입헌민주당에게 자신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보이려 애썼다. 9월 18일 그는 함대의 중앙위원회를 해체한다는 예상 밖의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 수병들은 이렇게 응답했다: "함대 중앙위원회를 해체하라는 명령은 불법이므로 따를 수 없다. 즉시 이 명령을 취소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집행위원회가 개입하여 3일 후에 케렌스키가 이 명령을 취소할 공식적인 이유를 제공했다. 사회혁명당이 다수였던 타쉬켄트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하고 구 관료들을 해임시켜버렸다. 그러자 이 반란을 진압하기로 지명된 장군에게 케렌스키는 전보를 보냈다: "반란군과는 협상하지 말아야한다....가장 단호한 조치들이 필요하다." 정부군은 도시를 점령한 후 소비에트 권력의 대표들을 체포했다. 그러자 곧이어 40개 노동조합이 참여하는 총파업이 터졌다. 일주일 동안 신문이 발행되지 못했으며 주둔군 병사들은 부르르 끓고 있었다. 이렇게 법과 질서라는 허깨비를 추구하면서 정부는 관료적 무정부 상태를 자초하고 있었다.

민주협의회가 입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를 거부한 날 입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코노발로프와 키쉬킨에게 케렌스키의 장관직 제의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해 놓았었다. 영국 대사 부캐넌이 이 권고를 지시했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부캐넌 자신이 직접 이것을 지시하지 않았다면 그의 그림자가 그랬다: 연합국들이 인정할 수 있는 정부가 수립되어야했다. 모스크바의 자본가들과 브로커들은 목에 힘주고 있었다. 이들은 이미 제품 가격을 인상하고 최후통첩을 제시했다. 민주협의회는 투표 도중 공중분해 되면서도 자신의 표결이 진짜 의미가 있는 것처럼 상상했다. 실제로 이 문제는 연립정부의 정당 대표들로 구성된 정부의 잔해가 동궁에 소집한 합동회의에서 이미 결정되었다. 입헌민주당은 이 회의에 가장 솔직한 코르닐로프 지지자들을 보냈다. 모두는 서로에게 단결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상투어를 지치지 않고 나열하는 체레텔리는 새로운 발견을 했다: 합의의 가장 중요한 걸림돌은 "지금까지 상호불신에 있었다....이 불신은 제거되어야한다." 외무장관 테레쉬첸코는 계산을 끝낸 후 혁명정부가 197일 지속하는 동안 56일은 위기로 점철되었다고 보고했다. 나머지 날들은 어떻게 점철되었는 지 그는 말하지 않았다.

민주협의회가 자기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체레텔리의 결의안을 삼키기 전에 이미 영국과 미국 언론의 특파원들은 본국으로 기사를 타전했다. 이들은 입헌민주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보장되었다고 보도했으며 자신 있게 새 장관들의 이름까지 제시했다. 한편 우리의 오랜 친구 로지안코가 의장으로 있는 모스크바 공인(公人)회의는 정부에 참여하라는 초대를 받은 자기 회원 트레티아코프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8월 9일 이들은 코르닐로프에게 이렇게 전보를 보낸 적이 있었다: "가혹한 시련이 조국을 위협하는 이 시간에 생각이 있는 러시아인들은 모두 귀하를 희망과 신념으로 바라보고 있다."

"임시정부만이 권력을 조직하고 정부 직원들을 임명할 권한을 인정받는다"는 조건으로 케렌스키는 예비의회의 존재에 우아하게 동의했다. 입헌민주당이 이 모욕적인 조건을 지시했다. 물론 부르주아 계급은 확실히 이해했다: 제헌의회 대의원 구성이 예비의회의 대의원 구성보다 자기들에게 훨씬 더 불리하다. 밀류코프는 말했다: "제헌의회 선거는 가장 우연하고 아마도 가장 해악스러운 결과만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짜르가 허락했던 의회에 정부를 종속시키려고 했던 입헌민주당은 예비의회의 입법권을 절대적으로 거부했다. 이것은 제헌의회를 소집하지 않으려는 희망을 입헌민주당이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만을 의미했다.

"코르닐로프 아니면 레닌 둘 중에 하나다": 밀류코프는 대안을 이렇게 규정했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소비에트 정부 아니면 코르닐로프 군사독재. 중간 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밀류코프와 레닌의 상황 평가는 일치했다. 그리고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화해 단계의 영웅들에 비해 이 두 인물은 사회 기본계급들의 대표였다. 밀류코프에 의하면 "나라가 두 진영으로 갈리고 있으며 이 사이에 근본적인 화해나 합의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모스크바 국정협의회가 아주 명백하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두 진영 사이에 합의가 있을 수 없다면 문제는 내전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입헌민주당도 볼세비키당도 제헌의회 구호를 철회하지 않았다. 당면한 사회개혁, 소비에트, 혁명 등에 대항해 제헌의회는 최후의 항소법정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입헌민주당의 생각이었다. 민주주의가 만든 민주주의의 그림자인 제헌의회는 살아있는 진짜 민주주의 즉 노동자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이용될 수 있었다. 볼세비키당을 분쇄하고 난 후에만 부르주아 계급은 제헌의회를 공개적으로 거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럴 단계가 결코 아니었다. 지금 단계에서 입헌민주당은 혁명대중 조직들로부터 정부의 독자성을 확보해 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물론 나중에는 정부를 자기 뜻에 좀더 확실하고 완전하게 복종시킬 생각이었다.

형식 민주주의로는 혁명의 탈출구를 찾을 수 없었지만 볼세비키당은 아직도 제헌의회 소집 전술을 철회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전술을 철회하는 것은 이 당의 특징인 혁명적 현실주의를 포기하는 오류였다. 미래의 사건들을 통해 노동계급이 인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아 완전히 승리하게 될지는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없었다. 볼세비키당은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화해주의 소비에트와 민주적 지방자치단체들을 방어했다. 이와 똑같이 이 당은 부르주아 계급의 소집 거부에 대항해 제헌의회를 방어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30일간 지속된 정부의 위기는 마침내 새 정부의 수립으로 끝났다. 케렌스키 다음으로 새 정부에게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할 인물은 대부호인 모스크바 기업가 코노발로프였다. 그는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고리키의 신문에 돈을 대주었고 이후 첫 연립정부의 장관을 했다. 그러나 제 1차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끝난 후 항의 표시로 장관직을 사임한 후 코르닐로프 반란이 무르익을 즈음에는 입헌민주당에 들어갔다. 그리고 이제는 부수상이자 상공업장관으로 정부에 복귀했다. 그와 함께 모스크바 증권거래소 위원장 트레티아코프, 모스크바 군사산업위원장 스미르노프 등도 장관직을 꿰어찼다. 키에프의 설탕 제조업자 테레쉬첸코는 외무장관으로 유임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된 다른 장관들은 이렇다할 개인적 특성이 없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하자는 대로 따라갈 준비가 확실히 되어 있었다. 고참 외교관 나보코프가 런던 대사로 유임되자 연합국 정부들은 러시아의 새 정부에 만족 이상을 표현했다. 코르닐로프와 사빈코프의 동맹자였던 입헌민주당의 마클라코프는 파리 대사 그리고 "진보적인" 에프레모프가 스위스 수도 베른의 대사로 각각 임명되었다. 민주적 평화를 위한 투쟁은 이렇게 해서 믿을만한 손에 맡겨졌다. 새 정부의 선언문은 민주주의 진영의 모스크바 선언문을 악의에 차서 비꼬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립정부의 의미는 사회 변혁의 강령에 있지 않았다. 볼세비키당을 분쇄하여 혁명의 목을 자르려던 7월 시기의 못다한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 새 정부의 의미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프라우다 지의 부활판의 하나인 라보치 푸트(노동자의 길) 지는 연립정부의 파트너들에게 무례하게 이렇게 상기시켰다: "지금 볼세비키당이 곧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라는 사실을 당신들은 까먹고 있다." 이 말은 아픈 곳을 건드렸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인정했다: "치명적인 문제가 스스로 제기되었다: 볼세비키당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지금은 너무 늦지 않았을까?"

진정 너무 늦었다. 6명의 부르주아 장관과 10명의 반(半)사회주의자 장관들로 새 정부가 구성된 날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13명의 볼세비키, 6명의 사회혁명당원, 3명의 멘세비키당원으로 새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소비에트는 새로 선출된 의장 트로츠키가 제출한 결의문으로 연립정부를 환영했다. "새 정부는...혁명의 역사에서 내전의 정부로 남을 것이다....정부 구성의 소식에 대해 혁명적 민주주의 진영 전체는 단 하나의 대답으로 응수한다: 사임하라! 진정한 민주주의의 만장일치를 통해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진정한 혁명정부를 구성할 것이다." 적들은 이 결의문이 담고 있는 정부 불신임 의사를 의례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 의사가 실현되는 데에는 정확히 1개월 밖에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산업생산의 곡선은 계속해서 급격히 하락했다. 정부, 중앙집행위원회, 그리고 곧 새로 구성된 예비의회는 이 하락의 사실과 증상을 무정부 상태, 볼세비키당, 혁명 등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자기들은 산업계획의 그림자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산업을 통제하려는 정부 기구는 단 하나의 진지한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 자본가들은 공장 문을 닫고 있었다. 철도 수송은 석탄의 부족으로 효율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발전소는 죽어가고 있었다. 언론은 재앙에 대해서 징징거렸다. 물가는 올라가고 있었다. 정당, 소비에트, 노동조합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부위들은 돌아가면서 파업을 하고 있었다. 혁명을 향해 의식적으로 이미 움직이고 있던 노동자 부위들만이 파업에 돌입하지 않았다. 아마 가장 평화스러운 도시는 뻬쩨르부르그 이었을 것이다.

정부는 대중을 돌보지 않고 대중의 필요에 가벼운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대신 항의와 절망의 외침에 뻔뻔스러운 미사여구로 대응했다. 이 때문에 모든 세력들은 정부를 적으로 보고 들고일어났다. 정부가 의도적으로 갈등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의 2월 혁명 때부터 철도 노동자들과 사무직원들은 임금 인상을 요구해왔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위원회가 계속 수립되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이제 이것이 철도 노동자들의 신경을 긁고 있었다. 그 동안 화해주의자들은 이들을 교화시켰고 빅첼은 이들을 저지시켰다. 그러나 드디어 9월 24일에 이들은 폭발했다. 이 때가 되어서야 정부는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철도 노동자들에게 일종의 양보조치가 마련되었다. 9월 27일 이미 철도의 많은 부분을 사로잡고 있던 파업이 취소되었다.

8월과 9월에는 식량사정이 급격히 악화되었다.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킬 즈음에는 모스크바와 뻬쩨르부르그에서 빵 배급은 하루 0.5 파운드로 줄어들어 있었다. 모스크바 군에서는 일주일에 2 파운드 이상 배급하지 않기 시작했다. 볼가강 지역, 남부 지방, 전선, 전선의 바로 후방 지역 등 나라의 모든 부분에서 격심한 식량위기가 닥쳤다. 모스크바 근처의 섬유공업지구에서는 다수의 공장들이 이미 말 그대로 굶주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스미르노프 공장의 노동자들은 근처 오레호프-주예프 읍에서 "우리는 굶주리고 있다," "우리 자식들이 굶주리고 있다," "우리를 위하지 않는 자는 우리의 적이다"라는 글귀가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바로 이때 이 공장의 주인은 새 연립정부의 국가 회계감사로 임명되었다. 오레호프 노동자들과 지역 군대병원의 병사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배급품을 시위대와 나누어 가졌다. 이것은 연립정부에 대항하는 또 다른 연대 행위였다.

신문들은 매일같이 분쟁과 반란의 새로운 중심지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노동자, 병사, 도시 소부르주아 등이 항의하고 있었다. 병사의 부인들은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지원금, 생활공간, 땔나무 등의 증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흑백인조들은 대중의 기아를 선동의 재료로 삼으려했다. 모스크바 입헌민주당 신문 루스키에 베도모스티(러시아의 기록) 지는 전에는 자유주의를 인민주의와 결합시켰었다. 그러나 지금은 증오와 혐오감으로 진짜 인민을 바라보았다. "광범위한 혼란의 물결이 러시아 전국을 뒤덮고 있다"고 자유주의 교수들이 적었다. "유태인 집단 학살의 자발적 성격과 무의미함 때문에 이것에 대항하기가 무엇보다 어렵다...." 탄압조치, 무장력의 도움에 의존하라고? 그러나 지역 주둔군의 병사들인 무장력이 유태인 집단 학살을 주도하고 있었다. 군중이 거리로 나와 자신이 상황의 주인이라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었다.

1905년 혁명기에 볼세비키를 자임했던 말리안토비치는 지금 법무장관이 되어 사라토프 지방검사의 보고를 접했다: "우리가 도저히 대항할 힘이 없는 최고의 악은 병사들이다. 린치 법, 자의적인 체포와 수색, 모든 종류의 징발 --- 이 모든 것들이 대다수의 경우 병사들에 의해서 또는 이들이 곧 이어 참여하면서 진행되고 있다." 사라토프 도청소재지, 군 소재지, 농촌 마을들에서 "법무부를 지원할 자원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전혀 없다." 지방 검사의 사무실은 온갖 사람들이 자행하는 범죄들을 기록할 시간이 없었다.

권력 장악과 함께 직면해야할 난관들에 대해 볼세비키당은 환상을 가지지 않았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새 의장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일분만에 아픈 곳이 전부 치료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노동조합 집행부는 파업 노동자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지원하고 아무 것도 은폐하지 않으며 줄 수 없을 때 이것을 공개적으로 인정한다. 이와 닮은 권력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새 정부의 첫 회의들은 지역 특히 농촌 마을의 "무정부 상태"에 집중했다. "가장 단호한 조치들도 회피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다시 한번 선언되었다. 지나가면서 말하자면, 혼란에 대한 투쟁이 실패하는 이유는 농민 대중 사이에 정부위원이 "인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정부는 발견했다. 정부위원들을 돕기 위해 혼란에 영향을 받는 모든 도에서 "임시정부 특별위원회"를 즉시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농민들은 징벌대의 도착을 고함을 질러 열성적으로 환영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힘이 지배자들을 끌어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새 정부의 성공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 케렌스키의 고립은 고칠 수가 없었다. 지배계급들은 그가 코르닐로프를 배신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없었다. 카자흐 장교 카클리우긴은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에 대항할 준비가 된 자들은 임시정부의 이름 아래 또는 이 정부를 방어하면서 투쟁하고 싶지 않았다." 케렌스키는 권력을 근근히 유지하고 있었을 뿐 이것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저항 세력의 커지는 힘은 그의 의지를 마지막 한 올까지 마비시켰다. 그는 모든 결정을 회피했으며 행동을 강요받았을 때에는 동궁의 집무실을 피했다. 새 정부의 구성과 거의 동시에 그는 수상직을 코노발로프에게 슬쩍 떠넘기고 자기가 아마 가장 필요 없는 전쟁 총사령부로 직접 갔다. 그는 예비의회를 개원하기 위해서만 뻬쩨르부르그로 다시 돌아왔다. 장관들 옆에 있으라고 재촉 받았으나 그는 14일에 전선으로 돌아갔다. 케렌스키는 자기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운명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              

나보코프의 말에 따르면 케렌스키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부수상 코노발로프는 케렌스키의 무능력과 그의 말을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유로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다른 장관들의 기분도 수상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장관들은 주위를 계속 둘러보고 놀라움에 떨었다. 그리고 듣고 기다리다가 행동을 회피하는 쪽지를 적은 후 사소한 일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나보코프의 말에 따르면 법무장관 말리안토비치는 상원의원들이 검은 양복을 입은 새 동료 소콜로프를 상원에 들여보내려 하지 않아 끔찍하게 고통스러워했다. 말리안토비치는 놀라서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케렌스키가 확립하고 꼼꼼하게 지켜진 예식에 따르면 장관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첫 이름과 중간 이름이 아니라 강력한 권력의 대표들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직책 이름으로 서로에게 말했다: "이런 저런 직책의 장관님" 장관들의 회고록은 풍자처럼 들린다. 케렌스키 자신은 이후 자신의 전쟁 장관에 대해서 이렇게 적었다: "그것은 나의 장관 임명 가운데에서 가장 불행한 경우였다. 베르호프스키는 자신의 활동에 뭔가 표현할 수 없이 코믹한 요소를 도입시켰다." 그러나 임시정부의 모든 활동에 비자발적인 코믹한 요소들이 가미되었다는 것이 불행이었다. 장관들은 무엇을 해야할 지 어디에 관심을 돌려야할 지를 몰랐다. 이들은 나라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애들이 병정 놀이를 하듯이 정부 놀이를 했다. 다만 어린애들의 놀이가 훨씬 즐거웠을 뿐이었다.

이 당시의 증인으로서 밀류코프는 아주 명확한 표현으로 정부 대표의 상태를 묘사했다: "자기 발 밑이 무너졌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시간이 갈수록 의학용어로 '심리적 신경쇠약'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신병 상태의 모든 증상을 드러냈다. 그는 아침에는 활력이 극단적으로 떨어져 있다가 오후에는 복용하고 있는 약의 영향으로 극도로 흥분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은 이 사실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밀류코프에 의하면 환자 케렌스키를 능숙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정신과 의사인 입헌민주당 장관 키슈킨은 그에게 특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증언들을 우리는 전적으로 이 자유주의 역사가의 책임으로 남겨놓는다. 그는 물론 진실을 알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으나 진실을 최고의 기준으로 선택한 적은 결코 없었다.

케렌스키에게 가까운 스탄케비치의 증언은 정신의학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심리적으로 케렌스키에 대한 밀류코프의 성격규정을 올바른 것으로 확인시키고 있다. 스탄케비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전체 상황 속에서 케렌스키는 일종의 공허함 그리고 이상하게 유례가 없는 평온함을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언제나 '소규모 그룹의 보좌관들'을 자기 주위에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군중, 대표단, 각광 등이 그를 계속 둘러싸는 경우는 더 이상 없었다....일종의 여가가 있는 이상한 시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몇 시간동안이고 그와 대화할 드문 기회를 가졌다. 그런데 이 동안 그는 이상하게도 서두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강력한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부는 새로운 변모를 모두 시도했다. 그리고 정부 각 부처는 장조로 시작했다가 며칠만에 신경쇠약의 상태로 떨어지곤 했다. 그리고 매번 대중운동이라는 외적인 자극만 있으면 산산조각이 났다. 사람의 눈을 속이는 겉모습 밑으로 침투하면 정부는 언제나 대중운동의 방향과 정반대로 변화했다. 한 정부가 다른 정부로 바뀌면서 위기는 매번 더 오래 가고 그 성격이 병적으로 변했다. 새로운 위기가 있을 때마다 정부 권력의 일부는 사라지고 혁명은 약화되었으며 지배 집단들의 사기는 찌그러졌다. 2월 혁명 후 첫 2개월 동안 집행위원회는 어떤 일이든지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부르주아 계급을 이름뿐인 권력으로 앉힐 수도 있었다. 그 다음 2개월 동안 집행위원회와 함께 임시정부는 여전히 많은 것을 할 수 있었다. 심지어 전선에서 공세를 시작할 수도 있었다. 허약해진 집행위원회와 함께 제 3차 정부는 볼세비키당에 대한 파괴공작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을 끝까지 수행할 힘이 없었다. 제 4차 정부는 가장 긴 위기 후에 등장했는데 어떤 일도 할 수 없었다. 이 정부는 태어나기도 전에 죽기 시작했으며 장의사를 기다리면서 눈을 크게 뜨고 앉아있었다.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