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혁명사 하-1

소비에트 체제의 승리

 

차례

1장: 10월혁명 이전의 농민

2장: 민족문제

     <민족문제에 대한 보론>

3장: 예비의회 철수와 소비에트대회를 위한 투쟁

4장: 군사혁명위원회

5장: 레닌이 봉기를 촉구하다

6장: 봉기의 기예

 

 

제 1장 10월 혁명 이전의 농민

문명은 농민을 자기 짐을 나르는 말이나 소로 취급해왔다. 거시적으로 보면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이 지는 짐의 형태만 바꾸었을 뿐이다. 한 나라의 국민으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농민은 기본적으로 과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경계 밖에 놓여있다. 무대 장면을 바꾸어 하늘과 땅의 배경 그림을 등에 진 채 나르고 분장실을 걸레로 청소하는 잿빛의 사람들에게 연극 비평가는 거의 관심이 없다. 이와 똑같이 역사학자 역시 궂은 일이나 말없이 하는 농민에게 거의 관심이 없다. 역사상의 혁명들에서 농민이 수행한 역할은 아직까지도 거의 해명되지 않고 있다.       

맑스는 1848년에 이렇게 적었다: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을 해방시키면서 혁명을 시작했다. 농민의 도움으로 이들은 유럽을 정복했다. 프로이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협소한 눈앞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자기의 동맹 세력인 농민을 놓쳐버렸다. 이 결과 농민은 봉건 반혁명 세력의 무기가 되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과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을 대조하는 그의 서술은 올바르다. 그러나 "프랑스 부르주아 계급은 농민을 해방시키면서 혁명을 시작했다"는 주장은 당시 프랑스 공식 역사학계의 신화에 불과한 것으로 맑스는 이 신화에 영향을 받았다. 실제로 부르주아 계급은 모든 힘을 다해 농민 혁명을 반대했다. 1789년 농촌에 대한 정책을 조정한다는 미명 하에 제 3 신분(부르주아 계급)의 지역 책임자들은 농민의 가장 강렬하고 대담한 요구들을 제외시켰다. 농촌에서 혁명의 불길이 밤하늘을 밝히는 가운데 국민의회가 내린 8월 4일의 그 유명한 결정은 내용이 전혀 없는 한심한 정식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이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으려는 농민들을 제헌의회는 맹렬하게 비난하면서 "주어진 의무를 다하기 위해 본업에 복귀하고 봉건 소유제도를 제대로 존중하라"고 꾸짖었다. 그리고 시민 근위대는 여러 차례 농민을 진압하려고 했다. 그러나 도시 노동자들은 봉기에 나선 농민의 편을 들어 부르주아 토벌대에 돌과 깨진 기와로 맞섰다.

5년의 혁명기간 내내 프랑스 농민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들고일어나 봉건 소유주와 부르주아 소유주 사이의 합의를 막았다. 혁명 공화국을 위해 피를 쏟았던 파리의 평민들은 봉건제의 사슬에서 농민을 해방시켰다. 1918년의 독일 공화국은 왕정이 빠진 구체제에 불과했다. 이것과 1931년 스페인 공화국과는 근본적으로 달리 1792년의 프랑스 공화국은 새로운 사회체제의 시작을 알렸다. 근본적 차이가 농업문제에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프랑스 농민은 곧바로 공화국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주의 억압을 벗어 던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파리의 부르주아 공화파는 대체로 농촌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주에 대한 농민의 투쟁이야말로 봉건적 쓰레기를 청소하면서 공화국의 수립을 보장했다. 이 점을 그 유명한 마키아벨리는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에버트가 독일 공화국 대통령이 되기 400년이나 전에 그는 피렌체에 망명하여 어느 푸줏간 주인과 개똥지빠귀 사냥이며 주사위 놀이를 즐겼다. 그리고 시간 틈틈이 민주주의 혁명의 경험을 일반화시키는 저술을 했다. "귀족이 많은 나라에서는 이들을 전멸시키는 것을 통해서만 공화국을 건설할 수 있다." 러시아 농민도 근본적으로 이와 같은 의견이었다. 이들은 "마키아벨리의 사상"은 알지 못한 채 이 사상의 실체를 공공연히 보여주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가 노동자와 병사들의 운동 중심이었던 반면 농민운동의 중심은 후진적인 대(大)러시아 농업 지역과 볼가강 중부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봉건 농노제의 잔재는 특히 뿌리가 깊었다. 귀족계급의 토지 소유는 농민을 철저히 착취하여 대단히 기생적이었다. 농민의 분화는 훨씬 늦어 있었고 농촌의 빈곤은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미 3월에 이 지역에서 터져 나온 운동은 처음부터 폭력으로 얼룩졌다. 그러나 지배 정당들의 노력으로 이 운동은 화해주의 정치노선의 통로로 유도되었다.

공업이 발전하지 않은 우크라이나의 경우 수출을 위한 농업 생산은 훨씬 진보적이고 따라서 자본주의적이었다. 이 지역에서 농민의 계층 분화는 대러시아 농업지역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었다. 더욱이 대러시아인에 저항하는 민족해방투쟁이 당분간 다른 형태의 사회투쟁을 불가피하게 지연시켰다. 그러나 지역적 민족적 조건의 다양성 때문에 시간 차이가 있었지만 농민투쟁은 모든 곳에서 폭발했다. 가을이 되자 농민투쟁은 거의 전국으로 이미 확대되어 있었다. 구 러시아 624개 군의 77%인 482개 군이 이 운동에 끌려 들어갔다. 러시아 북부, 트랜스코커서스, 대평원, 시베리아 등 러시아 변방지역은 농업의 조건이 특수했다. 이 지역들을 제외하면 481개 군의 91%인 439개 군이 농민반란에 휩쓸려 들어갔다.  

경작지, 삼림, 목초지, 임대 농지, 임 노동 등의 다양한 조건 그리고 혁명의 다양한 단계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방식이 달랐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가피하게 지연되었을 뿐 농촌의 운동은 도시의 운동과 같이 크게 두 단계를 거쳤다. 첫 단계에서 농민들은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면서 이를 통해 새로 도입된 제도들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실제적인 이익보다 형식을 따졌다. 혁명 이전에는 인민주의 색채를 띠고 있었던 러시아의 자유주의 신문들은 1917년 여름에 지주들의 심리상태를 대단히 정확하게 표현했다. "농민은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전혀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주위의 토지는 전부 우리 것이다." 4월 톰보프의 어느 마을이 임시정부에 보낸 전보에는 농민들이 이렇게 "평화"를 유지한 이유가 완벽한 드러나 있다: "획득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평화를 유지하겠다. 대신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지주의 토지 매매를 금지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아무도 토지를 경작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농민은 정중한 위협의 어조를 유지하기가 쉬웠다. 왜냐하면 자신의 역사적 권리인 토지를 점거하기 위해 지주에게 압박을 가해도 국가기구와 직접 갈등할 필요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방에서는 정부의 권력 기관들이 부족했다. 마을 위원회는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었고 법원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 또한 지역 인민위원은 힘이 없었다. 농민은 이들에게 이렇게 고함지르곤 했다: "우리가 당신들을 선출했소. 그러니 우리는 당신들을 내쫓을 것이요."

여름 동안 농민은 지난 몇 개월 동안의 투쟁을 확대시키면서 내전의 상태에 점점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이들의 좌파는 내전의 경계를 넘어 실제 전쟁을 일으켰다. 타간로그 지구의 지주 보고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농민들은 건초와 토지를 차지했으며 쟁기질을 방해하고 토지 임대료를 마음대로 정했을 뿐 아니라 지주와 토지관리인까지 제거했다. 니제고로드 정부위원(commissar)의 보고에 따르면 지방에서 폭력행위와 토지 및 삼림 점유의 건수는 크게 늘고 있었다. 군 정부위원은 농민이 자신을 대지주의 옹호자로 보는 것을 두려워했다. 농촌 민병대는 믿을 수 없었다. "민병대 장교들이 군중과 함께 폭력행위에 가담한 경우들이 있었다." 슐뤼셀부르크 군에서는 지역 위원회가 지주의 산림 벌채를 막았다. 농민들의 생각은 간단했다: "제헌의회가 소집되어도 베어진 나무는 다시 살릴 수 없다." 법무부 정부위원은 농민들의 건초 점유를 불평한다: 법원의 말들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는 농민들로부터 건초를 구입해야한다! 쿠르스크 도에서 농민들은 외무장관 테레쉬첸코의 비료를 준 토지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오를로프 도의 말 사육사 슈나이더에게 농민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농민들은 그의 토지에서 자라는 클로버를 수확할 뿐 아니라 그를 "군대로 보낼 수도 있다." 마을 위원회는 로지안코의 토지관리인에게 건초를 농민에게 넘기라고 지시했다: "토지 위원회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귀하는 체포될 것이다...." 이 명령서는 서명되고 봉인되었다.     

농민의 투쟁으로 재산상의 손해를 본 자, 지역 당국, 고상한 사고를 가진 관찰자들의 불평과 우는소리가 전국의 구석구석에서 쏟아졌다. 지주들의 전보는 조야한 계급투쟁 이론을 아주 뛰어나게 반박했다: 작위를 가진 귀족, 대토지 소유주, 종교 지도자, 행정 당국 등은 공공의 행복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이들의 적은 농민이 아니라 볼세비키들이며 때로는 무정부주의자들이기도 하다. 지주들의 재산은 나라의 복지라는 관점에서만 관심거리이다. 체르니고프 도의 입헌민주당원 300명은 볼세비키 선동에 넘어간 농민들이 강제 노동을 하는 전쟁포로들을 풀어주고 자신들이 직접 추수하고 있다고 선언한다. 이 때문에 "세금을 낼 수 없는" 지경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이들은 외친다. 이 자유주의 지주들은 오직 국가 재정을 지탱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국립은행의 포돌스크 지점은 마을 위원회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불평한다. "위원회 의장들은 종종 오스트리아 출신 전쟁포로들이다." 이것은 상처 입은 애국심의 표현이다. 블라디미르 도에 위치한 토지문서 등록국장 오딘트소프의 장원에서 농민들은 "자선단체들을 위해 준비된" 건축 자재들을 자기 용도를 위해 마구 실어갔다. 관리들은 오직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 같다! 포돌스크 도의 어느 주교는 대주교 저택에 딸린 삼림을 농민이 자의적으로 점거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러시아 주교회의 의장은 알렉산드로-네프스키 수도원의 목초지를 농민들이 점거했다고 불평한다. 키즐리아르스크 수녀원 원장은 지역 위원회에 신이 천둥과 번개를 내릴 것을 주문하고 있다: 지역 위원회는 수녀원의 일에 간섭하면서 자기들이 사용하기 위해 토지 임대료를 수녀원으로부터 몰수하고 있다. 또한 "상급자들에게 대항하도록 수녀들을 선동하고 있다." 이 모든 경우에 교회의 정신적 이해는 직접 영향 받고 있다. 레프 톨스토이의 아들 톨스토이 백작은 우핌스크 도의 농업경영자동맹의 이름으로 이렇게 보고한다: "제헌의회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은 채" 지역 위원회로 토지가 이전되면서 "20만 명이 넘는 도내 토지 소유주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세습 귀족은 지주들에 대해서만 걱정하고 있다. 트베르 도의 지주인 상원의원 벨가르트는 노인들이 삼림을 벌채하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이들이 "부르주아 정부에 복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와 분노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탐보프 도의 지주 벨리아미노프는 "군대의 필요에 부응하는" 두 장원을 농민들의 손에서 구출해 줄 것을 요구한다. 우연히도 이 두 장원은 그의 소유이다. 관념주의 철학자에게 1917년 지주들이 보낸 전보들은 진짜 보물이다. 다만 유물론자는 이것들 속에서 온갖 냉소적 행위의 모범들을 볼뿐이다. 그는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거대한 혁명들은 유산자들로부터 품위 있는 위선을 보일 특권조차 박탈한다.

농민의 투쟁으로 재산상 피해를 본 자들은 군과 도 당국, 내무장관, 정부 수상 등에게 호소했으나 일반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면 누구로부터 도움을 받을 것인가? 의회 의장 로지안코가 있다! 7월 시기부터 코르닐로프 반란 때까지 짜르의 시종장이었던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이 영향력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가 전화만 하면 많은 일이 해결되었다.

내무부의 관리들은 지역으로 회보를 보내 소유권을 침해하는 농민들을 재판에 회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사마라 도의 퉁명스러운 지주들은 전보로 이렇게 답했다: "사회주의 장관의 서명이 없는 회보는 강제력이 없다." 이것으로 사회주의의 기능이 드러났다. 체레텔리는 자신의 수줍음을 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8일 그는 "신속하고 단호한 조치들"을 취하라고 장황하게 지시했다. 지주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군대와 국가에 대해서만 걱정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그가 지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농민을 진정시키는 정부의 방법이 갑자기 변했다. 7월까지는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이 지배적인 방식이었다. 군대가 지역에 파견되는 경우에도 정부에서 보낸 연설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승리한 후에는 농민을 설득하는 자를 대동하지 않은 채 기병대가 바로 지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젊은 역사학자 유고프의 말에 따르면 가장 소란스러운 지역인 카잔 도에서는 "체포를 하고 토벌대를 마을에 보내고 심지어 채찍질 관습을 부활시키고 나서야...농민들을 복종시키는데" 성공했다. 다른 곳에서도 이 탄압 조치들은 효과가 없지 않았다. 7월에 지주의 재산 피해 건수는 516건에서 503건으로 줄어들었다. 8월에 정부는 더 많은 성공을 거두었다. 불만이 있는 군의 숫자는 325개에서 288개로 떨어지면서 11% 하락했다. 농민의 투쟁에 의해 피해를 본 재산의 건수도 33%나 줄어들었다.

이렇게 해서 지금까지 가장 소요가 심했던 일부 지구들은 잠잠해 졌거나 부차적인 소요지역이 되었다. 반면에 어제는 믿을만했던 지구들이 이제 투쟁을 시작했다. 한달 전만 해도 펜자 도의 정부위원은 위안이 될만한 얘기를 했다: "농촌은 수확에 바쁘다....마을 젬스트보 선거 준비가 진행 중이다. 정부의 위기는 조용히 지나갔다. 새 정부를 큰 만족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8월이 되자 이 목가적 분위기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과수원들은 대대적으로 약탈되었고 산림들이 벌채되고 있다....혼란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군대에 의존해야했다."

일반적으로 여름의 농민운동은 "평화"기에 속했다. 그러나 허약하기는 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급진화 증상들이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지주의 장원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 전에 비해 감소했으나 7월부터는 증가하기 시작했다. 7월의 분쟁에 대해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흔한 사소한 분쟁에서 큰 분쟁의 순서로 다음과 같이 농민의 투쟁을 구분했다: 목초지, 농작물, 식량과 꼴, 경작지, 농기구 등의 점거; 고용 조건에 대한 분쟁; 장원의 파괴. 8월에는 순서가 다음과 같았다: 농작물, 예비 식량과 꼴, 목초지와 건초, 토지와 삼림 등의 점거; 농업 테러.

9월초 최고사령관으로서 케렌스키는 농민의 "폭력행위"에 대해 전임자 코르닐로프의 주장과 위협을 반복하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이로부터 며칠 뒤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지주와 자본가들이 모든 토지를 농민에게 즉시 넘기지 않으면 결국에는 끝없이 격렬한 농민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이후 몇 개월에 걸쳐 그의 말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8월에 비해 9월에 피해 재산의 건수는 30%나 증가했다. 그리고 10월에는 9월에 비해 43%나 증가했다. 9월과 10월 첫 3주일간의 피해 재산 건수는 3월 이후의 건수보다 3분의 1이 더 많았다. 그러나 분쟁의 강도는 빈도보다 훨씬 빨리 증가했다.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에는 장원의 각종 부속 시설과 기물들을 직접 점거하는 것조차 화해주의 기관들에 의해 완화되고 위장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합법적인 외양도 필요 없었다. 운동의 모든 부분들은 더욱 대담한 성격을 띠었다. 다양한 형태와 강도로 압박을 가하다가 이제 농민들은 지주의 다양한 사업 부분들을 폭력적으로 점거했다. 귀족들의 소굴은 전멸되었고 장원은 불탔으며 지주와 관리인이 살해되는 경우도 생겼다.

토지 임대 조건의 개선 투쟁은 6월에는 폭력행위보다 건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10월에는 폭력행위의 40분의 1로 빈도가 떨어졌다. 더욱이 이 투쟁도 지주를 몰아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토지와 삼림 매매 저지 투쟁이 직접 점거 투쟁으로 바뀌었다. 지주의 재산을 의도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삼림이 벌채되고 가축이 방목되었다. 9월에 공개적인 재산 파괴는 279건 발생했으나 이제는 모든 분쟁의 8분의 1 이상을 차지했다. 2월부터 10월까지 농촌 민병대가 자행한 파괴행위의 42% 이상이 10월에 일어났다.

삼림을 둘러싼 투쟁은 특히 격렬했다. 마을 전체가 전부 불태워지는 경우가 빈번했다. 목재는 엄중한 감시를 받았으며 높은 가격에 팔렸다. 농민은 목재에 굶주리고 있었다. 더욱이 겨울용 땔감을 재어놓을 때가 왔다. 모스크바, 니제고로드, 뻬쩨르부르그, 오렐, 볼린 도 등 전국 곳곳에서 삼림이 파괴되고 끈으로 묶은 비축 땔나무가 몰수되고 있다는 등의 불평이 올라왔다. "농민들이 자기 멋대로 그리고 가차없이 벌채를 하고 있다. 지주 소유 삼림 200 데시아틴이 농민들에 의해 불태워졌다." "클리모비체프스키와 체리코프스키 군의 농민들이 삼림을 파괴하고 겨울 밀을 파헤치고 있다...." 삼림 경비원들이 달아나고 있었다. 지주의 삼림은 신음하고 있었다. 전국에 걸쳐 나무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가을 내내 농민의 도끼가 혁명의 박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곡물 수입 지역의 경우 농촌의 식량 사정은 도시보다 더 빠르게 악화되고 있었다. 식량 뿐 아니라 종자가 부족했다. 곡물 수출 지역의 경우 식량 자원이 평소의 두 배로 반출되면서 식량 사정이 다른 지역과 다를 것이 없었다. 곡물의 고정가격을 인상하자 빈민들이 타격을 받았다. 기근으로 인한 폭동, 곡물창고 습격, 식량 당국에 대한 공격 등이 다수의 도에서 발생했다. 인민은 빵 대용품에 의존했다. 괴혈병, 티푸스, 절망으로 인한 자살 등이 보고되었다. 기근이 퍼지면서 풍요와 사치를 누리던 부자 동네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더욱 빈곤한 부위들이 투쟁의 선두에 섰다.

이 분노의 물결과 함께 사회 밑바닥의 인간 쓰레기들도 같이 올라왔다. 코스트로마 도에서 "흑백인조와 반(反)유태인 선동이 목격되고 있다. 범죄율이 높아가고 있다....정치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고 있는 것이 뚜렷이 눈에 띤다." 정부위원이 쓴 이 보고서의 마지막 문장은 교육받은 유산계급들이 혁명에 등을 돌리고 있다는 의미였다. 포돌스크 도에서는 갑자기 흑백인조들이 짜르의 복귀를 주장했다: 데미도프카의 마을 위원회는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짜르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를 "러시아 인민의 가장 충직한 지도자로 간주한다. 만약 임시정부가 물러나지 않으면 우리는 독일과 연합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 대담한 선언은 특이한 경우였다. 농민들 사이의 왕당파들은 오래 전에 색깔을 바꾸고 지주와 행보를 같이 하고 있다. 지금 언급했던 포돌스크 도와 같은 여러 곳에서는 농민과 합세한 군대가 포도주 저장소를 습격했다. 정부위원은 무정부 상태를 보고하고 있다. "마을과 인민은 사라지고 있다; 혁명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혁명은 결코 수그러들지 않은 채 더 깊은 골을 파고 있었다. 노도처럼 밀려드는 혁명의 물결은 혁명의 문턱 직전에 다다르고 있었다.

9월 8일경 밤에 톰보프 도의 시체프카 마을의 농민들은 곤봉과 쇠스랑으로 무장한 채 남녀노소 없이 전부 지주 로마노프를 습격하자고 선동했다. 마을 집회에서 어느 그룹은 장원을 질서 있게 점거하여 재산을 서로 나누고 대신 건물은 문화적 용도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빈민들은 장원을 불태우고 건물을 하나도 남기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들이 다수파였다. 같은 때에 거대한 불길이 읍 전체를 삼켰다. 농업 개선을 위한 실험용 농토를 포함해 불에 탈 수 있는 것은 모두 불탔다. 종자 소들도 도살되었다. "이들은 술에 취해 미치광이가 되었다." 불길은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번졌다. 농민 투사들은 이제 가부장적인 낫과 쇠스랑으로 더 이상 만족하지 않았다. 어느 도의 정부위원이 이렇게 전보를 쳤다: "권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농민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라넨부르크와 리아쥐스키 군의 장원들을 습격하고 있다." 농민 반란에 이 고급 기술을 도입시킨 것은 바로 전쟁이었다. 지주동맹은 3일 동안 24개의 장원이 불탔다고 보고했다. "지역 당국은 질서를 회복시킬 힘이 전혀 없다." 시간이 흐른 후 군관 사령관이 보낸 군대가 도착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집회는 금지되었으며 선동 주도자들은 체포되었다. 골짜기는 지주의 소유물로 가득했으며 약탈한 물건의 다수는 강 밑으로 가라앉았다.

펜자 도의 농민 베지쉐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9월에 우리는 모두 탈것에 올라 1905년에도 습격 당했던 로그빈을 습격했다. 사람의 무리들과 마차들이 떼를 지어 그의 장원과 그 뒤로 물결쳤다. 수백 명의 농민과 부녀자들은 소, 곡식 등을 가지고 나가기 시작했다." 토지 당국이 부른 군대가 약탈물의 일부를 다시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농민과 부녀자들이 마을에 500명이나 모여 있었기 때문에 군대는 뿔뿔이 흩어졌다. 지주의 짓밟힌 권리를 회복시킬 의욕이 병사들에게는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농민 가포넨코의 기억에 따르면 타우리데 도에서는 9월말부터 시작하여 "농민들이 건물을 습격하고 관리인들을 내쫓고 말과 소, 농기구, 곡물 등을 창고에서 꺼내가기 시작했다....심지어 이들은 창문의 블라인드, 문짝, 마루바닥, 양철 지붕 등도 뜯어갔다...." 민스크 출신의 농민 그룬코는 이렇게 말한다: "맨 처음 이들은 걸어와서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꺼내서 끌고 갔다....그러나 나중에는 말을 끌고 와서 마차에 맨 후 누구의 것이든 짐을 가득히 실어갔다. 사람이 지나다닐 틈이 없었다. 정오에 시작하여 두 날과 두 밤을 멈추지 않고 농민들은 물건들을 끌고 갔다. 48시간동안 이들은 모든 것을 깨끗이 청소했다." 모스크바의 농민 쿠즈미체프에 의하면 재산 몰수는 이렇게 정당화되었다: "지주의 물건은 우리 것이다. 우리는 그를 위해 일했으므로 그의 재산은 우리만의 재산이다." 옛날에 지주들은 농노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너희들은 내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 것도 내 것이다." 이제 농민들은 이 말에 응답하고 있었다: "그는 우리의 지주였고 그의 물건은 전부 우리 것이다."

민스크의 또 다른 농민 노비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여러 곳에서 농민들은 밤에 지주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더욱 자주 이들은 지주의 장원을 불태우곤 했다." 한때 최고사령관이었던 니콜라이 니콜라이에비치 대공의 장원이 다음 차례였다.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다 가지고 간 후 이들은 난로를 해체하여 화관을 제거하고 마루와 판자까지 뜯은 후 모두 끌고 나갔다...."

이 파괴행위 뒤에는 수백 수천 년이나 오래된 농민 전쟁의 전략이 버티고 있었다: 적의 요새들을 완전히 불태운다. 적이 머리를 둘 곳을 남겨놓지 말아라. 쿠르스크의 농민 티간코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좀더 합리적인 농민들은 이렇게 말했다: '건물은 불태우지 말자. 학교와 병원으로 필요하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렇게 고함을 질렀다: '모든 것을 파괴하여 적들이 숨을 곳이 없게 만들어야한다.'" 오렐의 농민 사브첸코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들은 지주의 재산을 모두 가지고 갔으며 이들을 장원에서 내쫓고 지주 저택의 창문, 문짝, 천장, 마루 등을 두들겨 부수었다....병사들이 말했다: '늑대의 소굴을 파괴할 것이면 늑대도 목 졸라 죽여야한다.' 이런 위협들 때문에 최대 지주들은 몸을 숨겼고 이 때문에 이들은 살해되지 않았다."

비테프스크 도 잘레시에 마을에 소재한 프랑스인 바르나르의 장원에 저장되어 있던 곡식 및 건초 창고가 불에 탔다. 농민들은 지주들의 국적을 조사할 생각이 없었다. 다수의 지주들이 서둘러서 특권을 누리는 외국인들에게 토지 소유권을 이전시켰기 때문이었다. "프랑스 대사관이 정부의 조치를 요청했다...." 10월 중순 전선 지역에서는 프랑스 대사관을 위해서라도 "조치"를 취하기는 어려웠다.

리아잔 근처에서는 대규모 장원들이 4일간 계속 파괴되었다. "어린이들도 약탈에 가담했다." 지주동맹은 장관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린치 법, 기근, 내전이 터질 것이다." 지주들이 내전을 미래시제로 말한 이유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런 현상들은 현실로 이미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9월초 협동조합 대회에서 강력한 농민 지도자이자 상인인 베르컨하임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전부가 정신병동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대도시 사람들만이 정신이 나갔다고 나는 확신한다." 농민의 강력하고 보수적인 부위의 이 자기만족의 목소리는 가망 없이 시간에 뒤져 있었다. 농촌의 마을들은 이성의 모든 올가미에서 완전히 풀려나 날뛰었다. 바로 9월에 이들이 보인 투쟁의 격렬한 정도는 도시의 "정신병동"을 훨씬 앞질렀다.

4월에 레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애국주의 협동조합 지도자들과 부농들이 대다수 농민을 부르주아 계급 및 지주들과 화해시킬 수도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농업 노동자 특별 소비에트의 수립과 빈농의 독자적 조직 건설을 지치지 않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 달 한 달이 지나면서 이 정책이 뿌리내릴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발트해 국가를 제외하고 농업노동자 소비에트는 존재하지 않았다. 빈농들 역시 독자적인 조직 형태를 찾아내지 못했다. 이 현상을 단순히 농업 노동자와 빈농의 후진성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주요한 이유는 민주적 농업혁명이라는 역사적 과제 자체에 있었다.

농노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하는 일반적 이해 때문에 빈농과 농업 노동자는 독립적 정책을 가질 수 없다. 토지 임대료와 농업 노동자라는 두 가지 주요 문제에서 이 점은 대단히 명확하게 드러난다. 유럽 러시아에서 농민은 지주로부터 2,700만 데시아틴 즉 개인 소유 토지 전체의 약 60%를 임대했다. 그리고 매년 4억 루블의 임대료를 지불했다. 임대료 때문에 지주에게 종속되는 현실에 대한 투쟁은 2월 혁명 후 농민운동의 주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농업 노동자의 투쟁도 비중은 적었지만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농업 노동자는 지주 뿐 아니라 농민 착취자와도 이해가 충돌했다. 임대 농민은 임대 조건의 개선을 위해 농업 노동자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전자는 지주를 소유주로 후자는 지주를 고용주로 인식하면서 투쟁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여 토지를 차지할 가능성이 열리자마자 빈농은 임대료 문제에 대해 노동조합은 농업 노동자에 대해 관심을 잃어버렸다. 둘 다 자영 농민이 될 전망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임대 빈농과 농업 노동자가 농민 운동 일반에 참여하여 농민 전쟁을 통해 이 운동의 궁극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해결책을 찾았다.

그러나 지주에 대한 투쟁은 농촌의 양극단 부위를 완전히 투쟁으로 끌어들이지는 못했다. 공공연한 반란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도까지 농민의 상층부는 운동에서 상당한 역할 그리고 가끔은 지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부농은 농민 전쟁이 확산되는 것을 더욱더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전쟁이 어떤 결말을 가져올 지 알 수 없었다. 잃을 것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투쟁에서 물러섰다. 그러나 이들은 농민 전쟁을 전적으로 저지하지는 못했다. 농촌이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부농보다 농민 전쟁을 더 유보적으로 그리고 더 적대적으로 바라 본 부위는 농촌 공동체 밖에 존재하는 소규모 자영 농민들이었다. 50 데시아틴까지 소유한 자영 농민의 농지는 전국에 60만개 있었다. 다수의 지역에서 이들은 협동조합의 중추가 되었고 특히 남부지방에서는 보수적인 농민연합을 지지했다. 농민연합은 입헌민주당으로 가는 교량 역할을 이미 하고 있었다. 민스크의 농민 굴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영 농민과 부농은 지주를 지지하면서 농민들을 진정시키려했다." 지역의 특수성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는 농민 내부의 투쟁이 10월 혁명 이전에도 격렬했다. 이 투쟁에서 자영 농민들은 가장 잔인하게 고통을 겪었다. 니제고로드의 농민 쿠즈미체프는 이렇게 말한다: "이들의 농장은 거의 모두 불에 탔다. 이들의 재산은 일부는 파괴되고 일부는 농민들에 의해 몰수되었다." 자영 농민들은 "지주의 삼림 일부를 맡아서 지주의 하인이 되었다; 그는 경찰, 헌병, 지배자들의 친구가 되었다." 니제고로드 군의 여러 마을에 사는 아주 부유한 농민과 상인들은 가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들은 2, 3년 후에야 다시 마을에 나타났다.

그러나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 농민 내부의 관계가 이렇게 가혹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부농은 외교적으로 행동했고 투쟁을 저지시키고 저항했으나 "농민 모두"에게 너무 적대시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한편 빈농들은 부농을 시기하면서 감시하여 이들이 지주와 연합하지 못하게 막았다. 부농에 영향을 미치려는 귀족과 빈농 사이의 투쟁은 "우호적인" 압력에서부터 격렬한 테러행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면서 1917년 내내 계속되었다.             

대지주들은 아양을 떨면서 자영 농민들에게 귀족 사회에 들어오도록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러나 소규모 자영 농민들은 귀족과 함께 망하지 않으려고 보라는 듯이 이들로부터 거리를 두었다. 이것은 정치에서는 이렇게 표현되었다: 혁명 전에 극우정당에 속했던 지주들은 자유주의의 보호색으로 자신을 위장했으며 입헌민주당을 종종 지지했던 자영 농민들은 이제 좌로 이동했다.

9월에 열린 페름 도의 소규모 자영 농민 대회는 "백작, 공작, 자작"등을 지도자로 한 모스크바의 지주 대회와 자신을 뚜렷이 구별시켰다. 50 데시아틴을 소유한 자영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입헌민주당원들은 집에서 만든 양모 외투를 걸치고 나무껍질 신발을 신어본 적이 없다. 따라서 우리의 이익을 결코 방어하지 않을 것이다." 자유주의자들과 거리를 둔 자영 농민은 자신의 소유권을 지킬 "사회주의자들"을 찾아 사방을 둘러보았다. 대의원 하나가 나서서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다. 그러자 자영 농민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그에게 토지를 주면 그는 농촌에 와서 만족하여 과격한 말을 토해내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결코 토지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는 멘세비키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우리의 토지를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을 것이다. 쉽게 토지를 넘기는 자는 쉽게 이것을 가진 지주들이다. 그러나 농민은 토지를 얻느라 엄청나게 고생했다."

가을에 농촌은 부농과 투쟁했다. 그를 내쫓지는 않고 다만 그가 농민 운동 일반을 따르고 우익의 공격으로부터 운동을 방어하도록 강제했다. 장원 습격을 거부하는 부농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부농은 할 수 있는 한 술수를 부렸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뒤통수를 다시 한번 긁으면서 잘 먹인 말을 쇠테로 두른 마차에 매고 자기 몫을 갖기 위해 장원 습격에 참가했다. 그는 종종 가장 많은 몫을 차지하고는 했다. 펜자의 농민 베지쉐프가 말한다: "말과 일꾼을 가진 부농들이 가장 많은 몫을 가지고 갔다." 오렐 출신의 사브첸코도 거의 같은 말을 했다: "부농은 잘 먹었을 뿐 아니라 나무를 끌고 갈 마차가 있어서 이익을 제일 많이 보았다."

베르메니체프의 계산에 의하면 2월에서 10월까지 지주와의 분쟁은 4,954건이 발생했다. 이 가운데 농민 부르주아와의 분쟁은 324건에 불과했다. 대단히 명확한 상호관계가 아닐 수 없다! 1917년의 농민운동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농노제의 잔재에 과녁을 맞추고 있었다. 부농과의 투쟁은 지주가 결정적으로 청산된 후인 1918년에 전개되었다.

농민운동의 순수한 민주적 성격은 공식 민주주의 진영에 정복당할 수 없는 힘을 부여해야만 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은 민주주의 진영의 정치적 파산을 완전히 드러냈다. 상층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농민들은 사회혁명당에 의해 완전히 주도되었으며 이들을 소비에트 대의원으로 선출했고 이들을 따랐고 거의 이들과 합쳐졌다. 5월 농민 소비에트 대회의 집행위원회 선거에서 체르노프는 810표, 케렌스키는 804표를 얻은 반면 레닌은 기껏해야 20표 밖에 얻지 못했다. 체르노프가 자신을 농촌 장관이라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러나 농촌의 전략이 체르노프의 전략과 퉁명스럽게 결별한 데에도 이유가 있었다. 실제 지주와의 투쟁에 너무 전심한 나머지 농민은 산업적 측면에서는 고립 분산되어 국가기구로 구현된 일반적 지주 앞에서는 무력했다. 이 때문에 진짜 국가에 대비되는 전설상의 국가에 농민들은 천성적으로 기댈 필요가 있었다. 옛날에 이들은 상상 속에 존재하는 짜르의 황금 칙령, 정의로운 세계의 전설 등을 구심점으로 삼아 이 주위로 단결했다. 2월 혁명 후에는 "토지와 자유"라는 사회혁명당 깃발 주위로 단결했다. 이를 통해 정부의 장관이 된 자유주의 지주들에 대항하려했다. 농민은 상상의 짜르 칙령을 따랐으나 진짜 짜르에는 대항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인민주의 강령을 따랐으나 진짜 인민주의자 케렌스키에게는 대항했다.

사회혁명당의 강령에는 언제나 유토피아적인 요소가 많았다. 이들은 소규모 상거래 경제에 기초하여 사회주의를 창조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들이 가지고 있는 강령의 토대는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즉 지주로부터 토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자신의 강령을 실현시킬 필요성에 직면하자 사회혁명당은 연립정부와 뒤엉켰다. 지주들과 입헌민주당 은행가들은 토지 몰수에 반대해 들고일어났다. 은행은 토지를 담보로 40억 루블 이상을 대출해주었다. 이 상황에서 사회혁명당은 토지 가격을 제헌의회에서 흥정하되 화기애애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토지에 대한 농민의 열망을 열성적으로 저버렸다. 따라서 이들은 자기 식 사회주의의 유토피아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비(非)일관성 때문에 망했다. 이들의 유토피아를 현실에 비추어 시험하는 데에는 수년이 걸렸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농업 민주주의를 배신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나는 데에는 몇 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강령을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 사회혁명당 정부에 대항해 들고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사회혁명당 정부가 농촌을 탄압하던 7월에 농민들은 급히 도망하여 같은 사회혁명당에 몸을 숨기려했다. 젊은 빌라도에게 쫓긴 이들은 늙은 빌라도에게 보호를 요청했다. 볼세비키당이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이 달에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가장 크게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특히 혁명의 시대에는 흔히 그렇듯이 최대한의 조직적 팽창은 정치적 쇠퇴의 시작을 의미했다. 사회혁명당 정부의 공격에 대해 사회혁명당 등뒤에 숨은 농민들은 정부와 당에 대한 신뢰를 꾸준히 거두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농촌에서 사회혁명당 조직은 팽창했지만 이 자체는 이 잡동사니 정당에게는 치명타가 되었다. 당의 상층부는 질서를 회복시키려한 반면 당의 하부는 이에 반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7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군사조직 회의에서 사회혁명당원인 전선의 병사 대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농민들이 아직도 스스로를 사회혁명당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들과 당은 틈이 생겼다. 병사들도 이것을 확인해 주었다: 사회혁명당의 선동 때문에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을 아직도 적대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은 토지와 권력의 문제를 볼세비키당의 방식으로 결정하고 있다. 볼가강 지역에서 활동하던 볼세비키 포볼쥐스키는 1905년 혁명에 참여했던 가장 존경받는 사회혁명당원들의 인기가 더욱더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 "농민들은 이들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면서 겉으로는 존경했지만 자기 방식대로 투표했다." 혁명적 노동자들은 모든 곳에 침투하여 계속해서 소규모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이 농민들에게 미친 영향력을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욱이 상당수의 공장들이 농촌에 있었기 때문에 상호 침투는 더 쉬웠다. 러시아에서 가장 유럽적인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조차 고향인 농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여름 몇 개월 간 증대하고 있던 실업과 고용주들의 직장폐쇄로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농촌으로 되돌아갔다. 이들의 대다수는 선동가와 지도자가 되었다.

5월부터 6월까지 뻬쩨르부르그에는 도, 군, 마을 단위로 귀향단이 조직되었다. 노동자 신문의 칼럼들이 전부 귀향단 모임을 알리는데 할애되었다. 이 회의에서 귀향 여행에 대한 보고들이 있었고 대의원들에 대한 지시사항들이 작성되었다. 또한 고향의 선동활동을 위해 모금활동이 진행되었다. 봉기가 일어나기 조금 전에 이 귀향단들은 볼세비키당의 지도 하에 특별 중앙사무국으로 통일되었다. 이 귀향단 운동은 곧 모스크바, 트베르는 물론 다수의 기타 공업도시로 곧 확산되었다.

그러나 농촌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노동자보다는 병사가 더 중요했다. 젊은 농민들이 어느 정도 고립을 극복하고 전국적 문제들에 직면한 곳은 바로 전선이나 도시라는 인위적 조건 속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이들의 정치적 의존성이 드러났다. 애국주의 보수적 지식인들에게 계속 장악되어온 농민들은 이들로부터 멀어지려고 노력했다. 또 한편 이들은 다른 사회 집단들로부터 독립하여 군대에서 조직을 형성하려고 노력했다. 군 당국은 이 경향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전쟁부는 반대했으며 사회혁명당은 환영하지 않았다. 그러나 농민 소비에트는 군대에서 뿌리가 허약했다. 가장 유리한 조건 속에서도 농민은 양의 압도적 우위에 상응하는 정치적 질로 자신을 전화시킬 수 없다! 노동자들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혁명의 거대 중심부에서만 농민 병사 소비에트는 중요한 작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1917년 4월부터 1918년 1월 1일까지 뻬쩨르부르그 농민 소비에트는 특별 위임장을 주어 1,395명의 선동가들을 농촌으로 보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수의 선동가들은 위임장이 없이 파견되었다. 이들은 65개 도를 포괄했다. 크론슈타트에서는 노동자들의 예를 따라 귀향단이 병사와 수병들 사이에서 형성되었다. 이들의 대표들은 철도와 기선에서 무임 승차할 "권리"를 부여하는 위임장을 받았다. 민영 철도와 기선은 이 위임장을 군소리 없이 인정했으나 정부가 운영하는 경우에는 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조직의 공식 대표들은 농민의 거대한 바다에서는 물방울에 지나지 않았다. 대중 집회의 연설에서 울려나오는 강력한 구호들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전선과 후방 주둔군 병영에서 탈출한 수십만 수백만의 병사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거대한 일을 했다. 전선에서 말없이 앉아있던 병사들은 농촌의 고향으로 돌아오면 말이 많았다. 이들의 말을 게걸스럽게 듣는 청중은 얼마든지 있었다. 모스크바의 볼세비키 무랄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모스크바를 둘러싸고 있던 농민의 엄청난 수가 좌경화되었다....모스크바 도의 농촌과 도시는 전선에서 돌아온 탈주병들로 넘쳐 났다. 또한 이들은 농촌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도시 노동자들의 방문을 받았다." 농민 나움첸코프에 따르면 칼루가 도의 따분하고 후진적인 마을들은 "6월과 7월에 다양한 이유로 전선에서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 잠에서 깨어났다." 니제고로드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범법 및 무법 행위는 도에 출현한 탈주병, 휴가병, 연대 위원회의 대표 등과 모두 관련되어 있다." 8월에 졸로토노쉬즈키 군에 위치한 바리아틴스키 공주의 장원 관리인이 토지 위원회의 자의적인 행동을 불평한다. 이 위원회의 의장은 크론슈타트 수병인 가트란이었다. 부굴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휴가 중인 병사와 수병들이 무정부 상태와 유태인 학살의 분위기를 조성할 목적으로 선동을 하면서 돌아다닌다." "므글린스키 군의 비엘로고쉬 마을에 도착한 어느 수병이 삼림에서 장작과 철도용 침목을 만들거나 수출하는 것을 자기 멋대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병사들은 투쟁을 시작하지 않았을 경우에는 투쟁을 마무리했다. 니제고로드 군에서 농민들은 수녀원을 약탈하고 초원의 풀을 잘랐으며 울타리를 부수고 수녀들을 괴롭혔다. 그러나 수녀원장은 굴복하지 않으려 했고 민병대는 농민들을 끌고 가서 벌을 주었다. 농민 아르베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질질 끌다가 마침내 병사들이 도착했다. 이들은 작당하여 즉시 일을 벌렸다...." 수녀원은 깨끗이 약탈되었다. 농민 보브코프에 의하면 모길리에프 도에서는 "전선에서 귀향한 병사들이 위원회의 첫 지도자들이었고 지주의 추방을 지휘했다."

소총과 총검으로 동료 병사들을 익숙하게 다루는데 필요한 무거운 결심으로 전선의 병사들은 일을 해치웠다. 병사들의 부인들조차 남편으로부터 투쟁 정신을 배웠다. 펜자의 농민 베지쉐프는 이렇게 말한다: "9월 집회에서 장원 습격에 대한 지지 연설을 하는 병사 부인들의 강력한 운동이 일어났다." 다른 도에서도 같은 일이 관찰되었다. 도시에서도 병사의 부인들은 종종 투쟁을 부채질했다.

베르메니체프의 계산에 따르면 병사들이 농민의 투쟁을 주도한 비율은 3월에는 1%, 4월에는 8%, 9월에는 12%, 10월에는 17% 이었다. 이 수치들은 정확하다고 허세를 부릴 수는 없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일반적 경향을 보여준다. 사회혁명당 교사, 읍 서기, 관리들의 지도력은 죽어간 반면 못 말리는 병사들의 지도력은 상승했다.

당시 독일의 유명한 맑스주의 저술가 파르부스는 전쟁 기간에 재물은 축적했지만 운동의 원칙과 통찰력은 잃어버렸다. 그는 러시아 병사들을 중세의 용병, 도적, 노상강도 등과 비교했다. 그러나 이런 시각을 가지려면 러시아 병사들의 무법행위가 역사상 가장 거대한 농민 혁명의 집행기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무시해야한다.

이 운동이 합법성과 완전히 결별하지 않았기 때문에 토벌대의 농촌 파견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토벌대로 사용될 수 있는 부대는 카자흐 기병뿐이었다. 자유주의 신문 루스코에 셀로(러시아의 농촌) 지는 10월 11일 이렇게 말한다: "4백 명의 카자흐 기병이 세르도브스키 군에 파견되었다...이 조치는 사태를 진정시키는데 효과가 있었다; 농민들은 제헌의회 소집을 기다리겠다고 선언했다." 4백 명의 카자흐 기병은 확실히 제헌의회 소집을 지지하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카자흐 기병은 숫자가 충분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들 자체가 동요하고 있었다. 한편 정부는 더욱더 "단호한 조치들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2월 혁명 후 첫 4개월 동안 군대가 농민을 토벌하기 위해 파견된 건수는 17번, 7월과 8월에는 39번, 9월과 10월은 105번이었다고 베르메니체프는 계산한다.

그러나 군대로 농민을 진압하는 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대다수의 경우 토벌에 나선 군대의 병사들이 농민 편이 되었다. 포돌스크 도의 어느 군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군대 조직 그리고 심지어는 개별 부대들이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을 결정하고 있으며 농민들이 지주 재산을 몰수하고 삼림을 벌채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이들이 직접 약탈에 가담하고 있다....지역의 부대들은 폭력행위를 진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농민 반란은 군대의 마지막 빗장을 풀어버렸다. 노동자들이 농민 전쟁을 주도했기 때문에 농민 군대가 도시의 봉기를 진압할 가능성은 조금도 없었다.

농민들은 노동자와 병사들로부터 우선 사회혁명당이 말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 즉 볼세비키당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레닌의 구호와 그의 이름이 농촌에 침투했다. 사실 볼세비키당에 대해 꾸준히 증대한 불평은 대부분의 경우 조작이거나 과장이었다. 이를 통해 확실한 이익이 될 것이라고 지주들이 생각했을 뿐이었다. "오스트로프스키 군은 볼세비키의 선동 때문에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돌입했다." 우파 도에서는 이런 소식이 들린다: "마을 위원회의 바실리에프는 볼세비키당의 강령을 배포하면서 지주들이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강도 행위로부터 보호"를 구하면서 노브고로드의 지주 폴로니크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집행위원회에 볼세비키들이 득실거린다." 이것은 볼세비키들이 지주들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의미였다. 심비르스크의 농민 주모린은 회상한다: "8월에 노동자들은 농촌의 마을을 돌면서 볼세비키당을 선동하고 볼세비키당 강령을 말하기 시작했다." 세베즈 군을 연구한 어떤 사람은 뻬쩨르부르그에서 26세의 직조공 타티아나 미하일로바가 도착한 사건을 말하고 있다. 그녀는 "고향 농민들에게 임시정부를 타도하라고 촉구하면서 레닌의 전술을 칭송했다." 농민 코토프의 말에 의하면 8월말 경에 "우리는 레닌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 젬스트보에서는 아직도 사회혁명당원들이 절대 다수였다.

볼세비키당은 농민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9월 10일 네프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의 농민 신문 발행을 요구했다: "농민이 파리 노동자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파리 노동자들이 농민을 이해하지 못한 파리 코뮌의 경험을 반복하지 않도록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비예드노타(빈민) 지가 곧 발행되었다. 그러나 농민들 사이에서 순수한 당 활동은 미미했다. 볼세비키당의 힘은 실무적인 자원이나 기구가 아니라 올바른 정책에 있었다. 공기가 들풀의 씨를 퍼뜨리듯이 혁명의 회오리바람은 레닌의 사상을 퍼뜨렸다.

트베르의 농민 보로비예프는 이렇게 회상한다: "9월이 되면 병사들 뿐 아니라 빈농 자신들이 더욱 자주 그리고 더 대담하게 볼세비키당을 옹호하기 위해 집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심비르스크의 농민 주모린도 이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빈농 대다수와 중농 일부는 너나 할 것 없이 레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대화는 오직 레닌에 대한 것뿐이었다." 노브고로드의 농민 그리고리에프는 농촌의 사회혁명당원 한 명이 볼세비키들을 "정권 찬탈자" "배신자"로 부르자 농민들이 "그 개 같은 놈을 처단하라! 그를 돌로 쳐죽이자! 더 이상 우리에게 동화같은 얘기는 하지도 말아라. 토지는 어디 있나? 그만 좀 떠들어라! 볼세비키들이 얘기하게 하자!" 라고 고함을 질렀다. 그런데 전국의 다수 지역에서 일어난 이 같은 일들은 10월 혁명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다. 농민의 기억 속에는 사실은 강하게 남아있으나 일어난 시간은 흐릿하다.

병사 치네노프는 트렁크 하나 가득히 볼세비키당의 간행물을 가지고 자기 고향 오렐 도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농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다. 선전물들은 아마 독일의 돈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다. 그러나 10월에는 "마을의 중핵은 700명에 달했고 다수의 소총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하고 나선다." 볼세비키 브라체프는 농업만 존재하는 보로네즈 도의 농민들이 "사회혁명당의 매연으로부터 깨어나 볼세비키당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이미 마을과 읍의 다수에 지부를 건설하고 신문 정기 구독자들을 확보했으며 우리 위원회의 아주 작은 본부에 다수의 좋은 동지들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이바노프의 기억에 따르면 스몰렌스크 도에서 "볼세비키들은 마을에 아주 귀했다. 군대에는 거의 없었다. 볼세비키당 신문은 발행되지 않았으며 유인물은 아주 드물게 배포되었다....그러나 10월이 가까워 오자 더 많은 마을들이 볼세비키당 편으로 넘어왔다."

이바노프는 다시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이전에 소비에트에서 볼세비키당이 영향력을 행사한 군에서는 지주의 장원은 공격을 받지 않거나 소규모로만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곳에서 동일한 현상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타데우쉬는 이렇게 말한다: "농민에게 토지를 넘기라는 볼세비키의 요구는 모길레프 군의 농민 대중에게 대단히 빠르게 접수되어 이들은 장원을 파괴했으며 어떤 경우는 불까지 질렀다. 이들은 수확물과 삼림도 접수했다." 근본적으로 이 두 증언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볼세비키당의 일반 선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전국에서 내전을 키웠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확고한 뿌리를 내린 곳은 어디든지 농민의 투쟁을 약화시키지 않으면서 공격의 형태를 규제하고 파괴의 정도를 줄였다.

토지 문제만이 현안은 아니었다. 특히 전쟁의 마지막 시기에 농민은 판매자와 구매자로 손해를 입었다. 곡물은 고정 가격에 징발되었지만 공산품은 더욱 얻기가 어려웠다. 농촌과 도시의 경제적 상호관계의 문제는 곧 "협상 가격(가위 가격)"이라는 이름으로 소비에트 경제의 중심적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이미 이 문제는 벌써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볼세비키들은 농민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권력을 장악해 여러분에게 토지를 주고 전쟁을 끝낼 것이다; 또한 공업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고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를 확립하며 공산품과 농산품의 가격 관계를 통제해야한다. 이 대답은 대단히 간단했으나 가야할 길은 제시되었다. 10월 10일 트로츠키는 공장위원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브크센티에프의 덩치 작은 고문들이 우리와 농촌 사이에 장벽을 쌓고 있다. 우리는 이 장벽을 깨야한다. 농기구를 제공하면서 이렇게 설명해야한다: 농민을 돕는 노동자의 모든 노력도 노동자들이 생산을 조직적으로 통제할 때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협의회는 이런 의미를 담은 선언문을 발행하여 농민들에게 배포했다.

당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특별 위원회를 수립하여 금속, 손상된 부품, 조각난 물건 등을 조립하여 "노동자가 농민에게"라는 특별 센터가 운영되도록 했다. 이 고철은 아주 단순한 농기구와 예비 부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었다. 아주 작은 규모이고 경제에 대한 선동을 목표로 했지만 이 최초로 계획된 노동자에 의한 생산은 가까운 미래의 전망을 열어주었다. 농촌이라는 금지된 영역에 볼세비키당이 들어온 곳을 보고 겁에 질린 채 농민 집행위원회는 이 새로운 사업을 장악하려고 했다. 그러나 낡아빠진 화해주의자들은 농촌에서 지지 기반이 이미 유실되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지역에서 볼세비키당과 경쟁할 처지가 전혀 아니었다.

트베르의 농민 보로비에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볼세비키당의 선동 메아리는 "빈농을 너무 들쑤셔 놓았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혁명이 10월에 오지 않았으면 11월에는 확실히 왔을 것이다." 볼세비키당의 정치적 힘에 대한 이 다채로운 묘사는 당의 조직적 허약성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렇게 뚜렷한 불일치를 통해서만 혁명은 전진한다. 진실을 말하자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혁명 운동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 속으로 강제될 수가 없다. 10월이든 11월이든 농업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농민은 해체되고 있던 사회혁명당을 활용해야했다. 이 정당의 좌파는 농민 반란의 압력 하에 서둘러 비체계적으로 그룹을 형성하여 볼세비키당을 따르고 당과 경쟁도 했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좌파의 번쩍거리는 깃발 밑에서 정치적 변화를 주로 겪게 될 것이다. 이 하루살이 정당은 농촌 볼세비키당을 반영하는 불안정한 형태로 농민 전쟁에서 노동계급 혁명으로 가는 일시적인 교량 역할을 할 것이다.

농업 혁명은 나름의 지역 기관들을 가지고 있어야했다. 이 기관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농촌에는 여러 유형의 조직들이 있었다. 읍 집행위원회 같은 국가기관, 토지 및 식량 위원회, 소비에트와 같은 사회적 기관, 당과 같은 순전히 정치적 기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읍 젬스트보로 대표되는 자치기관들이 있었다. 아직까지 농민 소비에트는 도 또는 어느 정도 군의 규모로만 발전했다. 읍 소비에트는 거의 없었다. 읍 젬스트보는 뿌리를 내리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반면 토지 및 집행위원회는 목적 상으로는 국가기관이었다. 그러나 언뜻 이상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나중에는 농업 혁명의 기관이 되었다.

정부 관료, 지주, 교수, 농업 과학자, 사회혁명당 정치꾼 그리고 의심스러운 농민 등이 결합된  토지 수석위원회는 핵심적으로 농민 혁명의 브레이크가 되었다. 도 위원회들은 정부 정책을 전달하는 역할을 결코 중지하지 않았다. 군 위원회들은 농민과 상층 관료들 사이에서 동요했다. 그러나 마을 농민들이 보는 바로 앞에서 선출되고 활동한 읍 위원회는 농민운동의 기구가 되었다. 이들 각종 위원회의 위원들이 사회혁명당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지만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들은 지주의 장원이 아니라 농민의 오두막집과 보조를 같이했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토지 위원회의 국가적 성격을 소중히 여기면서 이것을 내전을 벌이는 일종의 특허권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5월에 사란스키 군의 민병대장 한 명이 이렇게 불평한다: "농민들은 읍 위원회만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군과 시 위원회들은 모두 지주를 위해 일한다는 것이다." 니제고로드의 어느 정부위원은 이렇게 말한다: "농민의 독자적 행동을 반대하려는 일부 읍 위원회들의 시도는 거의 언제나 실패로 끝나고 결국 위원회의 구성이 바뀐다." 프스코프의 농민 데니소프에 따르면, "위원회들은 언제나 농민 운동의 편을 들었다. 왜냐하면 농민과 전선의 병사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부위가 위원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군 위원회 특히 도 위원회는 행정 "지식인"이 주도했다. 이들은 지주와 평화를 유지하려고 애썼다. 모스크바의 농민 유르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농민들은 이들이 옷의 속을 겉으로 뒤집어 입은 채 이름만 다를 뿐 똑같은 정부의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쿠르크스크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임시정부의 지시를 언제나 따르는 군 위원회를 선거를 통해 쇄신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농민이 군 위원회에 진입하는 것은 아주 힘들었다. 사회혁명당은 마을과 읍 사이의 정치적 끈이었다. 이 때문에 농민들은 당을 통해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당의 역할은 오랜 외투의 속을 겉으로 뒤집는 속임수에 있었다.

3월에 농민들은 소비에트를 냉랭하게 대했다. 이 현상은 언뜻 놀라울지 몰라도 사실 아주 깊은 원인들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에트는 토지 위원회와 같은 특별 기관이 아니라 혁명의 보편적 기관이었다. 일반 정책의 영역에서 농민들은 지도부 없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 유일한 문제는 이 지도부가 어디서 오느냐는 것이었다. 도 및 군 차원의 농민 소비에트는 협동조합 지도자들의 주도로 그리고 상당한 정도 이들의 비용으로 수립되었다. 따라서 이것은 농민 혁명의 기관이 아니라 농민에 대한 보수적 감시 기관이었다. 농민들은 사회 혁명당 우파가 건설한 이 소비에트가 정부 당국에 대항하는 방패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토지 위원회를 더 좋아했다.

농촌의 마을이 "순전히 농민의 이익"의 범주 내에 갇히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정부는 서둘러서 민주 젬스트보를 수립했다. 그런데 농민들은 정부의 이 시도에 대해서도 경계했다. 따라서 선거를 강제하는 것이 빈번하게 필요했다. 펜자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무법행위들이 발생하면서 선거가 중단되었다." 민스크 도에서 농민들은 읍의 선거위원회 의장 두르츠코이-리우베츠코이 공을 체포했다. 그가 선거인 명부를 조작했다는 것이었다. 오래된 갈등을 민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그와 농민들이 합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굴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했다: "전체 군에서 읍 젬스트보 선거는 계획처럼 잘 되지 않았다....유권자는 전적으로 농민들이다. 이들과 지역 지식인 특히 지역 지주들과의 냉랭한 관계가 눈에 뚜렷했다." 그러나 형태로 보면 젬스트보는 위원회와 다른 점이 거의 없었다. 민스크 군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불평한다: "지식인 특히 지주에 대한 농민들의 태도는 적대적이다." 9월 23일자 모길레프 신문은 이렇게 보도한다: "토지를 농민에게 즉시 넘기는데 협조하겠다고 확실히 약속하지 않으면 농촌의 문화활동은 위험을 동반한다." 기본 계급들 사이의 합의나 교통이 불가능할 때 민주적 기관들의 토대는 사라진다. 읍 젬스트보의 사산(死産)은 제헌의회의 붕괴를 의심의 여지없이 미리 보여주었다.               

니제고로드의 정부위원은 이렇게 보고한다: "지역 농민들은 다음과 같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민법은 효력을 잃었으며 모든 법적 규제조항들은 농민 조직들에 의해 통제되어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 민병대를 장악하고 있던 읍 위원회는 지역 법을 공표하고 토지 임대료를 정했다. 또한 임금을 규제하고 장원에 자기들이 보낸 관리인을 앉혔다. 또한 토지, 농작물, 장작, 삼림, 연장 등을 차지하고 농기계를 지주로부터 빼앗았으며 수색과 체포를 실시했다. 수백 년 동안 말해온 목소리와 혁명의 신선한 경험은 모두 토지 문제는 곧 권력의 문제라고 농민에게 말했다. 농업 혁명은 농민 독재기구를 필요로 했다. 농민은 라틴어에서 유래한 독재라는 말을 몰랐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지주, 자유주의 정부위원, 화해주의 정치가 등이 불평했던 "무정부 상태"는 실제로는 농촌의 혁명적 독재의 첫 단계였다.

1905년 ~ 1906년 혁명기에 레닌은 토지 혁명을 위해 농민만으로 구성된 특별 기관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열린 당 대회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농민 혁명위원회는 농민운동이 나아갈 유일한 길을 제시하고 있다." 농민은 레닌의 생각을 읽지 못했지만 레닌은 농민의 생각을 읽는 법을 알고 있었다.

소비에트가 정치노선을 바꾼 가을이 되어서야 농민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군과 도의 도시에서 볼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 좌파가 장악한 소비에트는 농민의 투쟁을 저지하는 것이 아니라 더 부추겼다. 2월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 농민들은 합법적 방패 막을 갖기 위해 화해주의 소비에트를 쳐다보았으나 나중에는 이것과 적대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혁명 소비에트에서 진짜 지도자를 찾을 수 있었다. 9월에 사라토프 농민들은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전국의 권력은...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에게 이전되어야한다. 이것이 더 안전할 것이다." 가을이 되어서야 농민들은 토지 강령을 소비에트 권력 구호와 결합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전히 이들은 이 소비에트를 누가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 지를 몰랐다.

러시아의 농민 투쟁은 위대한 전통, 단순하지만 명확한 강령, 지역의 순교자와 영웅들을 가지고 있었다. 1905년의 거대한 경험은 농촌에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만 농민들을 사로잡았던 종파들의 사상이 성취한 작업을 여기서 언급해야한다. 사정을 잘 알고 있던 어느 저술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10월 혁명을 자신들의 종교적 희망이 직접 실현된 형태로 받아들인 다수의 농민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역사상 알려진 모든 농민 반란 가운데 1917년 러시아의 농민 운동은 의심의 여지없이 정치사상의 비료를 가장 풍부하게 공급받았다. 그러나 이 운동은 독자적 지도부를 수립하여 권력을 스스로 장악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그 원인은 고립되고 소규모이며 일상이 반복되는 농업의 천성에서 찾아야한다. 농민의 비참한 경제적 지위는 농민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답으로 경험을 일반화하여 이론으로 정식화할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지는 않았다.

농민의 정치적 자유는 실제로는 다양한 도시의 정당들을 취사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선택조차 선험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농민은 반란을 통해 볼세비키당을 권력으로 밀어 올렸다. 그러나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볼세비키당은 농업 혁명을 노동자 국가의 법률로 전환시켜 농민을 획득할 수 있었다.  

야코블레프의 지도 하에 있던 어느 연구 집단이 자료를 대단히 가치 있게 분류해왔다. 이를 통해 2월부터 10월까지 농업운동의 발전과정이 규명되었다. 매달 농민의 조직화되지 않은 투쟁을 100으로 지정하고 이들은 조직화된 투쟁을 4월에 33, 6월에 86, 7월에 120으로 추산했다. 7월에 사회혁명당의 조직은 절정에 도달했다. 8월에는 100의 비조직화된 투쟁에 비해 62의 조직화된 투쟁이 10월에는 14가 있었다. 비록 그 의의는 제한적이지만 대단히 유익한 이 수치들로부터 야코블레프는 전혀 예상 밖의 결론을 이끌어낸다: "8월까지 운동이 꾸준히 조직성을 증가시킨 것에 비해 가을에는 더욱더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었다." 또 다른 연구자인 베르메니체프 역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0월 이전의 투쟁의 물결에서 조직된 운동의 수치가 낮은 것은 이 시기 운동의 자연발생성을 증언한다."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과 대비되듯이 자연발생성이 의식성과 대비되는 것이 유일한 과학적 대비이다. 그렇다면 농민운동의 의식성은 8월까지 상승했다가 급격하게 하락하여 10월 봉기의 순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결론 내려야한다. 그러나 우리 연구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싶은 생각이 확실히 없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반성적 태도를 취하면 예를 들어 이렇게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겉으로 보면 "조직적" 성격을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회 선거에서 농민이 보인 반응은 훨씬 더 "자연발생적"이었다. 즉 지주에 대항한 "비조직적" 투쟁에서 농민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었던 것에 비해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농민은 생각이 얕고, 유순하며, 맹목적이었다.

8월 위기에서 농민은 의식성을 버리고 자연발생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화해주의 지도부를 버리고 내전을 선택했다. 조직의 쇠퇴는 진짜 피상적인 특징이었다: 화해주의 조직은 사라졌으나 남은 것은 빈 공간이 결코 아니었다. 농민은 가장 혁명적인 병사, 수병, 노동자 분자들의 직접 지도를 받으며 새로운 투쟁의 길로 나섰다. 단호한 투쟁을 시작할 때 농민들은 대단히 자주 대중집회를 열었다. 또한 같은 마을에 사는 모든 농민들이 채택된 결의문에 서명하도록 노력하기조차 했다. 세 번째 연구자 쉐스타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지주의 장원을 공격한 8월에 가장 자주 등장한 장면은 '구 농민 집회...'이다. 집회를 통해 농민은 전유한 물품을 나누고 온갖 종류의 지주, 관리인, 군 정부위원, 토벌대 등과 협상을 한다."

내전 때까지 농민을 지도한 읍 위원회가 내전과 함께 사라진 문제를 이 자료들은 직접 해명할 수 없다. 그러나 설명은 저절로 나온다. 혁명은 아주 빨리 자신의 기구와 도구들을 닭아 없앤다. 토지 위원회는 반(半)평화적 활동을 했기 때문에 지주를 직접 공격하는 데에는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이유에 못지 않게 중요한 특별한 이유들이 보충된다. 지주와 공개적으로 전쟁을 시작하면서 농민들은 자기들이 패배할 경우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 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패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토지 위원회는 케렌스키의 감옥에 갇혔다. 따라서 반란의 책임을 분산시키는 것이 전술상 필요했다. "농촌 공동체"는 이것을 위해 가장 편리한 형태였다. 늘 그렇듯이 농민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성향도 의심의 여지없이 같은 방향으로 작용했다. 이제 문제는 지주의 재물을 직접 점거하고 배분하는 것이었다. 각자는 자기 권리를 누구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이 과정에 참여하려 했다. 따라서 투쟁이 조성한 최고의 긴장 때문에 대표기구들은 일시적으로 사라졌다. 이 대신 농민 집회와 공동체 포고령의 형태로 원시 농민 민주주의가 등장했다.

볼세비키 연구자들이 농민운동의 성격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조야한 오류를 범했다는 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이 새로운 유형의 볼세비키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아야한다. 사고가 관료화되면 상층부에서 농민에게 강요된 조직 형태들을 불가피하게 과대평가 한다. 대신 농민들이 수립한 조직 형태는 과소평가 한다. 교육받은 관리들은 자유주의 교수처럼 사회 현상을 행정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농업 인민위원(People's Commissar of Agriculture) 야코블레프는 이후 훨씬 더 광범위하고 책임이 더 무거운 영역에서 동일한 관료적 즉흥적 사고방식을 드러냈다. 즉 그는 "완벽한 집단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론적 피상성은 대규모로 실천될 때 잔인한 복수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완벽한 집단화의 오류로부터 13년이나 떨어져 있다. 이제 남은 유일한 문제는 지주의 장원을 몰수하는 것이다. 134,000명의 지주들이 천 8백만 데시아틴을 몰수당할까 덜덜 떨고 있다. 그러나 가장 위협을 받고 있는 층은 7천만 데시아틴을 소유하고 있는 3만 명의 구 러시아 대지주들이다. 이들은 일인당 2천 데시아틴이 넘는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귀족인 보보리킨은 짜르의 시종장 로지안코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나는 지주이다. 그런데 내 토지를 박탈당할 것이라는 현실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욱이 사회주의 교리를 실험한다는 대단히 황당한 이유 때문이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혁명의 임무는 지배계급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나 좀더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지주들은 자기 장원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더 이상 장원을 유지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우리 토지를 빨리 처분할수록 더 좋다. 이들에게 제헌의회는 국가가 자기 토지를 배상할 뿐 아니라 토지에 대한 걱정까지 배상하는 거대한 어음교환소이다.

자영 농민들은 좌익 농민의 강령을 따랐다. 이들은 기생적 귀족들이 청산되는 것을 대환영했다. 그러나 토지 소유의 개념을 뒤흔드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이들은 자기들 집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국가는 120억 루블 정도를 지주들에게 지불할 돈이 있다. "농민"인 이들은 귀족의 토지가 유리한 가격으로 인민에 의해 지불되어 자기 것으로 이용될 전망에 기대었다.

토지 소유주들은 배상의 수준이 배상의 순간에 조성되는 역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다. 코르닐로프 식 즉 반동적 방식으로 소집되는 제헌의회가 로지안코와 밀류코프가 각각 제시하는 노선의 중간인 개혁노선을 따를 것으로 8월말까지는 기대되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반란이 실패하면서 유산계급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다.

9월과 10월에 유산계급들은 병이 나을 가망이 없는 환자가 죽음을 기다리듯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농민에게 가을은 정치의 계절이다. 들판의 농작물은 전부 추수되었으며 환상은 박살났고 참을성은 다했다. 끝장을 볼 때가 왔다! 이제 운동은 제방을 흘러 넘치고 모든 곳에 침투하면서 지역의 특수성을 전부 걷어가 버린다. 또한 마을의 모든 계층들을 끌어 모으고 법과 신중함과 관련된 모든 생각들을 쓸어버린다. 공격적이고 난폭하고 격렬하고 분노하는 존재가 되어 이 운동은 쇠, 불, 권총, 수류탄으로 무장한 채 장원을 파괴하고 불태운다. 또한 지주를 몰아내고 자신의 피로 땅 그리고 일부 지역에서는 물을 붉게 물들인다.

푸쉬킨, 투르게네프, 톨스토이가 칭송하던 귀족의 소굴들은 이 과정에서 전부 사라진다. 구 러시아는 연기 속으로 증발한다. 자유주의 언론은 영국식 정원, 농노의 붓으로 그린 유화, 유산으로 상속받은 서재, 톰보프의 파르테논 신전, 승마용 말, 고대의 판화, 씨 황소 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해 신음과 울부짖음을 가득 토해낸다. 부르주아 역사학자들은 이렇게 강변해왔다: 농민들이 상전의 "문화"에 앙갚음하는 "파괴적" 방식에 대한 책임은 볼세비키당에게 있다. 그러나 러시아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이 세상에 등장하기 수백 년 전에 시작된 일을 지금 끝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통해 자신의 진보적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고 있었다. 혁명적 야만행위를 통해 그들은 중세의 야만을 쓸어버리고 있었다. 더욱이 이들, 이들의 선조 및 증선조는 자비나 너그러움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프랑스 농민들이 해방되기 450년 전에 봉건 지주들은 자크리의 난을 진압했다. 이 때 경건한 어느 수도승은 자신의 연대기에 이렇게 적었다: "지주들은 나라에 만행을 너무 많이 저질러서 왕국을 파괴하기 위해 영국인들이 올 필요가 없었다. 프랑스 귀족들이 자행했던 만행을 영국 귀족들은 자행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1871년 5월 파리 코뮌 당시의 부르주아 계급만이 그 악랄함에 있어서 프랑스 봉건 귀족들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노동자의 지도력 덕분에 러시아 농민들은 그리고 농민들의 지지 덕분에 러시아 노동자들은 문화와 인류애의 옹호자들로부터 이 이중의 교훈 즉 반혁명은 혁명보다 몇 배나 잔인하다는 교훈을 배우는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러시아 전체에서 기본 계급들이 가지고 있었던 상호관계는 농촌의 마을에서 재연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이 부르주아 계급의 계획과는 반대로 왕정에 대항해 싸웠듯이 빈농들은 부농의 경고를 귀담아 듣지 않고 지주에 대항해 가장 대담하게 일어섰다. 화해주의자들은 밀류코프가 인정하는 순간에만 혁명이 확고히 자기 발로 설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중농은 좌우를 흘낏 보며 부농의 서명이 자신들의 토지 몰수를 합법화시킬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혁명에 적대적이어서 처음에는 지주 장원에 대한 습격에 저항했으나 부농은 습격의 과실을 즐기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부르주아 계급이 화해주의자들이 자기들에게 넘긴 권력을 갖는데 주저하지 않은 것과 어느 정도 비슷했다. 같은 이유로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으며 지주의 재산은 부농의 손에 오래 남아있지 못했다.

농촌의 계급 갈등을 당분간 극복했다는 사실에서 농업 민주주의 혁명 그리고 핵심적으로 부르주아 혁명의 힘이 드러났다: 부농이 지주를 약탈하는 것을 농민이 도왔다. 러시아 역사의 17세기, 18세기, 19세기는 20세기의 어깨에 올라탔다. 그리고 20세기가 땅으로 몸을 굽히게 만들었다. 농민 전쟁은 부르주아 혁명가들이 전진하도록 재촉하기는커녕 이들이 반동의 진영으로 결정적으로 뒷걸음치게 만들었다. 바로 이 점에서 이 뒤늦은 부르주아 혁명의 허약성이 드러났다. 어제의 중노동 죄수 체레텔리는 무정부 상태에 대항하여 봉건 귀족지주의 장원을 옹호했다! 이렇게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거부당한 농민 혁명은 공업 노동자들과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서 20세기는 자기 목에 걸려 있는 수백 년의 과거를 걷어냈을 뿐 아니라 과거의 어깨에 올라서서 새로운 역사의 지평으로 나섰다. 농민이 자기 토지를 정리하고 울타리를 칠 수 있도록 노동계급은 나라의 선두에 서야했다. 바로 이것이 10월 혁명의 아주 단순한 공식이다.

 

 

제 2장 민족 문제

언어는 인간의 의사소통 그리고 결과적으로 산업활동의 가장 중요한 도구이다. 민족을 통합시키는 상품 교환이 승리하면서 언어는 민족언어가 된다. 이 토대 위에 민족 국가가 건설되어 가장 편리하고 이윤이 많이 나며 정상적인 자본주의의 무대가 된다. 네덜란드의 독립 투쟁과 섬나라 영국의 운명을 제외한다면 서유럽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형성기는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약 100년 뒤 독일 제국이 성립하면서 이 시기는 기본적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유럽의 민족국가들은 생산력을 더 이상 통제하지 못하고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했다. 이 동안 동방 즉 페르시아, 발칸 반도, 중국, 인도 등은 1905년 러시아 혁명의 자극으로  민족 민주 혁명의 시대를 겨우 시작했다. 1912년의 발칸반도 전쟁으로 남부와 동부 유럽의 민족국가 형성은 완료되었다. 이후 제국주의 전쟁은 부수적으로 미완성된 유럽의 민족 혁명을 완성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분할, 독립국 폴란드의 성립, 짜르 제국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러시아 접경 지역의 독립 국가 성립 등으로 유럽의 민족 혁명은 전부 완료되었다.

러시아는 단일 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 국가로 시작되었다. 이 현상은 러시아 사회의 뒤늦은 발전과 맞아 떨어졌다. 널리 흩어져 있는 농업과 가내수공업의 기초 위에 상업자본은 깊이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생산관계를 변화시키지도 못했다. 대신 넓게 퍼져 활동 공간을 증대시켰을 뿐이었다. 무역상, 지주, 정부 관리 등은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퍼지면서 정착 농민을 뒤따라갔다. 농민은 신선한 토지와 세금으로부터의 자유를 찾아 후진 부족들이 거주하는 새로운 지역 속으로 더욱 깊이 침투했다. 러시아 국가의 팽창은 기본적으로는 농업의 팽창이었다. 러시아의 농업은 대단히 원시적이었지만 남부와 동부의 유목민 농업보다는 어느 정도 우월성을 드러냈다. 광활하면서도 계속 퍼져나가는 토대 위에 형성된 관료적 국가는 국경선 서부의 민족들을 정복할 정도의 위력은 가지고 있었다. 이 민족들은 러시아보다 문화 수준이 높았으나 적은 인구 규모나 내부 위기 때문에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수 없었다(폴란드, 리투아니아, 발트해 국가들, 핀란드).    

러시아의 주력인 7천만 대러시아인에 약 9천만의 "변방" 민족들이 서서히 합쳐졌다. 변방 민족들은 러시아보다 문화수준이 높은 서부 민족들과 문화수준이 낮은 동부 민족들로 크게 나누어졌다. 이렇게 성립된 제국의 지배적 민족은 전체 인구의 43% 밖에 되지 않았다. 나머지 57%는 다양한 수준의 문화와 종속성을 지닌 민족들이었다. 이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은 러시아 전체 인구의 17%, 폴란드인은 6%, 백러시아인은 4.5%를 차지했다.

러시아 국가기구는 탐욕스럽게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켰으며 지배계급들의 토대인 농민은 가진 자원이 빈약했다. 이 두 요소가 결합하여 가장 가혹한 착취질서가 성립되었다. 러시아는 서부 국경 뿐 아니라 동부 국경의 민족들도 이웃 나라들보다 훨씬 가혹하게 억압했다. 권리를 박탈당한 피억압 민족들의 엄청난 숫자와 이들이 겪은 극도의 피폐함이 결합하여 짜르 러시아의 민족 문제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고 있었다.

민족적 동질성을 구비한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강력한 구심력을 발휘하였다. 이를 통해 프랑스는 지역주의의 극복을 이탈리아와 독일은 민족 분열의 극복을 호소하는 사상으로 뭉쳤다. 이와 반대로 터키,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등 민족적 이질성이 심했던 제국들에서 발생한 뒤늦은 부르주아 혁명은 소수민족들의 독립을 촉구하면서 제국을 분열시켜 결과적으로 원심력으로 작용했다. 이 두 과정은 기계적으로 표현되면 서로 대립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역사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 단결을 활용하여 산업의 기본 토대를 구축한다. 이 목적을 위해 독일 국가들은 통일되어야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어야했다.

일찍이 레닌은 러시아의 원심력적 민족운동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수년간에 걸쳐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에 반대하여 오랜 당 강령의 유명한 제 9항 즉 민족 자결권을 끈질기게 옹호했다. 볼세비키당은 분리 독립의 복음을 결코 옹호하지 않았다. 다만 거대 국가의 국경 안에 민족들을 강제로 묶어 두는 것을 포함한 모든 형태의 민족 억압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할 의무를 이행했을 뿐이었다. 오직 이 방법을 통해서만 러시아 노동계급은 서서히 피억압 민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문제의 첫 번째 측면에 불과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볼세비키당의 정책은 겉으로는 이 측면에 모순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보완하는 두 번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당과 노동자 조직 일반의 틀 내에서 볼세비키당은 조직의 엄격한 중앙집중성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하여 노동자들을 서로 대립시키거나 분열시킬 소지가 있는 모든 색채의 민족주의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투쟁했다. 볼세비키당은 부르주아 국가가 소수 민족에게 시민권이나 국가 언어를 강요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반면에 자발적인 계급적 규율로 여러 민족의 노동자들을 가능한 밀접하게 단결시키는 것을 진정 성스러운 임무로 간주했다. 따라서 볼세비키당은 민족으로 구분되는 연방적 당 구조를 단호히 거부했다. 혁명 조직은 미래 국가의 원형(原型)이 아니라 국가 수립의 도구에 불과하다. 도구는 제품을 만들기에 적합해야할 뿐 제품을 그 속에 포함시키지 말아야한다. 이렇게 되어야 중앙집중적 조직은 혁명투쟁의 임무 그리고 민족들에 대한 중앙집중적 억압을 분쇄하는 임무를 성취하도록 보장받는다.

러시아의 피억압 민족들에게 짜르의 타도는 필연적으로 민족해방 혁명을 의미했다. 그러나 2월 체제의 여타 문제들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관찰되었다: 공식 민주주의 진영은 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에 정치적으로 종속되어 코가 꿰였기 때문에 구체제의 족쇄를 깨는데 완전히 무능했다. 민주주의 진영은 모든 민족들의 운명을 결정할 자신의 권리를 신성 불가침의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도 대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에게 지배적 지위를 부여한 부, 권력, 영향력의 원천인 민족 억압을 눈에 불을 키고 계속 옹호했다. 화해주의자들의 민주주의는 짜르의 민족 정책의 전통을 자유주의 수사(修辭)로 번역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피억압 민족들의 해방보다 혁명의 단결을 옹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떠벌렸다. 그리고 연립정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민족들의 분열을 막아야 한다는 좀더 효과적인 주장을 들고 나왔다. 따라서 피억압 민족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 오스트리아-독일 총사령부의 공작으로 간주되어야 했다. 이 문제에서도 입헌민주당은 주역을 화해주의자들은 조역을 맡았다.

물론 새 정부는 변방 민족들에 대한 혐오스러운 법률적 족쇄와 복잡한 중세적 조롱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다만 개별 민족들을 차별하는 예외법들을 단순히 철폐하는 것 즉 대러시아 국가관료집단 앞에서 모든 민족들에게 단순히 법률적 평등을 부여하는 것으로 일을 끝내려고 희망하고 노력했다.

이 형식적인 평등은 유태인들에게 가장 많은 것을 선사했다. 왜냐하면 이들의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의 조항은 650개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도시 거주자이며 가장 뿔뿔이 흩어진 민족이었기 때문에 유태인들은 국가적 독립이나 영토적 자치를 주장할 수 없었다. 전국의 유태인들을 학교와 기타 기관들을 통해 단결시킨다는 소위 "문화적 민족 자치" 프로젝트는 다양한 유태인 그룹들이 오스트리아 이론가 오토 바우어로부터 빌린 반동적 공상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햇볕에 밀랍이 녹듯이 2월 혁명의 자유 속에 며칠만에 녹아 없어져버렸다.

그러나 혁명은 적선이나 체불 임금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좀더 부끄러운 민족차별 법들이 철폐되면서 민족과 무관하게 모든 시민에게 형식적 평등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들 사이의 불평등한 지위를 더욱 날카롭게 드러냈을 뿐이었다. 소수 민족들 대부분이 대러시아 국가의 서자나 양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특히 핀란드인에게 평등권 선언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러시아인과의 평등이 아니라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우크라이나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이들은 이전에 이미 강제적으로 러시아인이라고 선언되어 평등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일 지주의 장원과 러시아식 독일 도시에 의해 억압당해온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에게도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또한 중앙아시아 후진 민족과 부족들의 가혹한 운명도 전혀 완화되지 못했다. 이들은 법적 규제가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 족쇄 때문에 맨 밑바닥 지위에 묶여있었다. 자유주의-화해주의 연립정부는 이 모든 문제들을 고려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민주 국가는 오랜 대러시아 관료 국가와 다른 것이 전혀 없었다. 그리고 국가 관료들은 자기의 특권적 지위를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변방의 대중에게 혁명이 깊이 뿌리내리면 내릴수록 러시아 국가언어가 유산계급의 언어라는 사실이 더욱 명확해졌다. 언론과 결사의 자유를 허용한 형식적 민주주의는 후진 피억압 민족들에게 다음의 사실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했다: 우리는 민족 고유의 학교, 법정, 관리 등 문화발전에 가장 기본적인 수단들을 그 동안 너무나 박탈당해 왔다. 미래에 제헌의회가 소집되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말은 이들을 더욱 짜증나게 했을 뿐이었다. 이들은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여당은 제헌의회 역시 지배할 것이며 러시아 동화 정책의 전통을 계속 옹호할 것이다; 또한 지배계급이 넘지 않으려는 양보의 한계선을 탐욕스럽게 경계하면서 이것을 피억압 민족들에게 확실히 주지시킬 것이다.

핀란드는 처음부터 2월 체제의 옆구리에 박힌 가시였다. 노예화된 영세 소작농 "토파즈"가 대단히 고통스러운 농업 문제였기 때문에 인구의 14%밖에 되지 않은 공업 노동자들은 농민을 지지자로 만들었다. 핀란드 의회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다수를 차지한 세계에 유일한 의회였다. 이들은 200 의석 가운데 103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6월 5일에 공포된 법은 전쟁과 대외정책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의회가 주권을 행사한다고 선언했다. 이 때문에 핀란드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동지 당에게" 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이들의 호소는 아주 잘못된 주소로 전달된 것으로 밝혀졌다. 처음에는 임시정부가 한발 물러섰다. "동지 당"이 행동을 취하도록 허용한 것이었다. 체이제를 대표로 한 고문단이 헬싱키에 갔으나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러자 케렌스키, 체르노프, 스코벨레프, 체레텔리 등 뻬쩨르부르그의 사회주의 장관들은 헬싱키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력으로 해산하기로 결정했다.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인 왕당파 루콤스키는 핀란드의 민간 행정당국과 시민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러시아군에 저항할 경우 "도시 특히 헬싱키가 초토화될 것이다." 이렇게 사전 준비가 끝나자 정부는 문체조차 왕당파를 그대로 모방한 엄숙한 선언문을 발표했다: 핀란드 의회는 해산되었다. 무력 진압의 첫날 러시아 정부는 전선에서 차출한 병사들을 핀란드 의회의 정문에 배치시켰다. 10월 혁명으로 전진하고 있던 러시아의 혁명 대중은 이렇게 해서 계급투쟁에서 민주주의 원칙이 차지하는 제한된 지위에 대해 좋은 교훈을 얻었다.

러시아 지배계급들의 이 방자한 민족주의에 직면하여 핀란드의 혁명군대는 존경할 만한 태도를 보였다. 9월초 헬싱키에서 열린 소비에트 지역 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핀란드 민주주의가 의회를 다시 소집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할 경우 의회 소집을 방해하는 어떤 시도도 반혁명 행위로 간주한다." 이것은 의회를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직접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가 지배한 핀란드 민주주의는 봉기를 일으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의회를 해산시키겠다는 위협 속에 진행된 새 선거는 케렌스키 정부의 의회 해산에 동의를 했던 부르주아 정당들에게 200 의석 중 180석이라는 다수를 허용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국내 문제들이 전면에 등장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들과 탐욕스러운 지주들이 있는 이 유럽 북부의 스위스에서 이 문제들은 불가피하게 내전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핀란드 부르주아 계급은 반 공개적으로 군대 간부들에게 내전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이와 동시에 적위대의 비밀 중핵이 구성되고 있었다. 부르주아 계급은 스웨덴과 독일에게 무기와 군사 고문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노동자들은 러시아군의 지지를 받았다. 한편 어제까지만 해도 러시아 정부와 합의할 의향이 있었던 부르주아 내부에는 완전 분리 독립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들의 주요 신문 후부드스타츠블라데트 지는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 인민은 무정부주의 광기에 사로잡혀 있다....그렇다면 될 수 있으면 이 혼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되는 것이 아닌가?" 임시정부는 제헌의회를 기다릴 여가가 없이 일단 양보조치를 취해야했다. 10월 23일 "원칙적으로" 군사와 대외 분야를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포고령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케렌스키가 하사한 "독립"은 별 의미가 없었다: 이로부터 이틀 뒤에 그는 권력에서 쫓겨났다.

러시아의 옆구리에 박힌 두 번째 그러나 훨씬 더 거대한 가시는 우크라이나였다. 6월초 케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의회가 소집한 우크라이나 병사 대회를 금지시켰다. 물론 우크라이나는 이에 불복했다. 정부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케렌스키는 대회를 사후에 합법화시키고 과장된 투의 전보를 보냈다. 이것을 대회는 경멸의 웃음으로 화답했다. 이 쓰디쓴 경험이 있는 후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케렌스키는 3주일 후 모스크바의 회교 군사 대회를 금지시켰다. 민주 정부는 불만을 품은 민족들에게 손에 붙드는 것만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려고 열성인 것 같았다.

6월 10일 처음으로 발표한 "보편 선언"에서 우크라이나 의회는 임시정부가 민족 독립을 반대한다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이에 입헌민주당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독일 첩자라고 비난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들을 심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충고를 했다. 임시정부는 키에프에 대표단을 보냈다. 우크라이나의 열띤 분위기 때문에 케렌스키, 체레텔리, 테레쉔코는 우크라이나 의회를 만나는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노동자와 병사들에 대한 7월 공격 후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나왔다. 8월 5일 압도적 다수로 우크라이나 의회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의 제국주의 경향에 찌든" 정부가 7월 3일의 합의를 깼다고 비난했다.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 비니첸코는 이렇게 선언했다: "약속을 지킬 때가 왔을 때 임시정부는...치사한 사기꾼임이 드러났다. 정부는 사기적 술수를 통해 거대한 역사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이 단도직입적인 언어는 정치적으로 정부에 가까워야할 부위에서조차 정부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를 적절히 전달하고 있다. 왜냐하면 거시적으로 보면 우크라이나의 화해주의자 비니첸코와 케렌스키의 차이점은 하나 뿐이었다: 케렌스키는 평범한 변호사였으며 비니첸코는 평범한 소설가였다.

제헌의회가 이후 정하는 범위 내에서 러시아의 모든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하는 포고령을 정부는 마침내 9월에 발표했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이 약속은 자결권의 한계만 정확히 명시하고 나머지는 대단히 모호한 채 아무 것도 보장하지 않았다. 또한 내적으로 모순적이었기 때문에 누구의 신뢰도 받지 못했다. 임시정부가 하는 일들은 이미 너무 노골적으로 그 정체가 드러나 누구에게도 신뢰를 줄 수 없었다.

상원은 오랜 전통의 제복을 입지 않았다고 새 의원들의 원내 입장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바로 이 상원은 우크라이나 총서기국 즉 내각에 하달되었으며 임시정부가 확인한 지시사항들을 공개하지 않기로 9월 2일 결정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총서기국에 대한 법 조항이 없으며 불법기관에게 지시사항을 하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고상한 법학자들은 다음 사실도 역시 숨기지 않았다: 정부와 우크라이나 의회 사이의 합의 자체는 제헌의회의 권한을 찬탈하는 것이다. 짜르가 임명한 이 상원의원들은 이제 순수 민주주의의 가장 완고한 옹호자가 되었다. 이렇게 용기를 보인 우익의 정부 반대자들은 아무 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었다. 이들은 정부에 대한 자신들의 반대가 지배계급들의 마음에 쏙 들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러시아의 부르주아 계급은 약한 경제적 유대를 통해 러시아에 통합된 핀란드에 대해 어느 정도의 독립을 참아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우크라이나의 곡물, 도네츠의 석탄, 크리보로그의 철광석 등의 "자치"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10월 19일 케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총서기에게 전보를 보냈다: 우크라이나 제헌의회를 지지하기 위해 그곳에서 시작된 범죄적 선동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직접 설명할 것이 있으므로 뻬쩨르부르그로 급히 출두할 것"을 명령한다. 동시에 키에프 지방검사는 의회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라고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이 위협적인 조치들은 용서 행위가 핀란드를 기쁘게 하지 못한 것과 똑같이 우크라이나를 조금도 겁주지 못했다.

이때 우크라이나의 화해주의자들은 뻬쩨르부르그의 화해주의자들보다 자신들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민족적 권리를 위한 자신들의 투쟁을 둘러싸고 있는 상서로운 분위기가 존재했다. 이외에도 상당수 피억압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우크라이나 소부르주아 정당들의 상대적 안정성은 후진성이라고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경제적 사회적 뿌리에 근거하고 있었다. 도네츠와 크리보로그 분지의 급격한 공업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대러시아에 계속 뒤 처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노동계급의 동질성과 단련 정도는 그 수준이 낮았다. 이곳의 볼세비키당은 양적 질적으로 허약했으며 멘세비키당과 조직을 분리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또한 정치적 그리고 특히 민족적 상황에 대처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공업이 발전한 우크라이나 동부에서도 10월 중반에야 겨우 열린 소비에트 지역 협의회에서 화해주의자들은 근소한 다수를 지키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부르주아 계급은 아직도 허약했다. 기억하고 있듯이 전체적으로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사회적으로 불안정한 원인의 하나는 이것이었다: 이들의 강력한 부위는 러시아에 살지도 않는 외국인들이었다. 변방에서는 여기에다가 이에 못지 않은 중요한 원인이 보충되었다: 이곳의 부르주아 계급은 인구 대다수와는 다른 민족이었다.

변방 도시의 인구는 민족 구성이 주변 농촌 지역의 대다수 인민과 달랐다.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에서 지주, 자본가, 변호사, 기자 등은 대러시아인, 폴란드인, 유태인 등 외국인이었다. 농촌 인구는 전부 우크라이나인과 백러시아인이었다. 발트해 국가들의 도시는 독일인, 러시아인, 유태인 부르주아 계급의 피난처였다. 대신 농촌은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이 전부 차지했다. 그루지아 도시들의 지배적 민족은 러시아인과 아르메니아인이었다. 이것은 터키인이 사는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생활과 문화수준 뿐 아니라 언어에서도 대다수 농촌 인구는 도시 인구와 달랐다. 도시 인구는 인도에 사는 영국인과 같은 처지였다. 재산과 수입의 보호를 위해 관료기구의 덕을 보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의 지배계급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던 변방의 지주, 자본가, 상인 등은 자기 주위에 러시아 출신의 관리, 서기, 교사, 의사, 변호사, 기자 그리고 어느 정도 노동자들을 소규모로 포진시키고 있었다. 이로 인해 도시는 러시아 동화 정책 및 식민화의 중심이었다.

이런 현상은 농촌이 조용하기만 하면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갈수록 참을성을 상실하고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자 도시는 자신의 특권적 지위를 방어하면서 계속 이에 저항했다. 관리, 상인, 변호사 등은 산업과 문화의 고지를 지키기 위한 자신의 투쟁을 증대되는 "국수주의"에 대한 비난으로 고상하게 위장했다. 지배 민족이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욕구는 "민족주의"에 대한 우월성으로 위장된다. 이것은 승리한 민족이 자신의 전리품을 보호하기 위해 평화주의를 손쉽게 채택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간디의 인도 민족주의에 직면한 영국 노동당 당수 맥도널드는 자신이 국제주의자인 체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인이 독일에 끌리는 것이 프랑스의 보수주의 수상 쁘웽까레에게는 프랑스 평화주의에 대한 도전인 것처럼 보였다.      5월에 임시정부에 파견된 우크라이나 대표단은 이렇게 적었다: "우크라이나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러시아식 거리를 본다...그리고 이 도시들이 우크라이나 인민의 바다 속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10월 혁명의 강령에 반대한 로자 룩셈부르크의 주장을 담은 글이 그녀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여기에서 그녀는 이렇게 주장했다: 소부르주아 지식인들의 "오락거리"에 불과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민족자결권이라는 볼세비키 효모에 의해 인위적으로 부풀려졌다. 빛나는 지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 주장을 통해 아주 심각한 역사적 오류를 범했다. 일반적으로 우크라이나 농민은 정치적 존재의 수준으로 올라서지 못했기 때문에 과거에는 민족적 요구들을 제기하지 못했다. 2월 혁명의 아마도 유일한 공헌이자 충분한 가치가 있는 가장 중요한 공헌은 바로 이것이었다: 2월 혁명은 러시아의 피억압 계급과 민족들이 자신들의 요구들을 마침내 목소리 높여 외칠 기회를 제공했다. 그리고 농민의 정치적 각성은 이들 고유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학교 교육, 법정, 자치 행정 등은 큰 변화를 강요받았다. 이 운동을 반대하는 것은 농민을 다시 정치적 무존재의 상태로 떠미는 것과 같았다.

소비에트는 지배적으로 도시의 조직형태였다. 따라서 도시와 농촌의 민족적 차이는 소비에트에서도 고통스럽게 감지되었다. 화해주의 정당들의 지도로 소비에트는 빈번히 기본 인구의 민족적 이해를 무시했다. 이것이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가 허약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리가와 레발의 소비에트는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들의 민족적 이해를 아예 망각해버렸다. 바쿠의 화해주의 소비에트는 이곳의 기본 민족인 투르크만인의 이해를 경멸했다. 국제주의라는 거짓 깃발 하에 소비에트는 빈번하게 우크라이나인과 회교인의 방어적 민족주의를 공격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도시의 억압적인 러시아 동화 운동의 방패가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난 후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통해 변방의 소비에트는 농촌의 이해를 대변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의 인민은 자연의 가혹함과 사회의 착취 때문에 짓눌려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의 경제와 문화는 전반적으로 원시성을 면치 못했으며 민족적 열망을 느낄 조건을 제공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보드카, 세금, 강제적인 그리스정교 등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국가의 주요한 억압 도구였다. 이탈리아인이 프랑스의 악이라고 부르고 프랑스인이 나폴리의 악이라고 부르는 것을 시베리아 인민은 "러시아"의 악이라고 불렀다. 이로부터 러시아가 문명의 씨앗을 시베리아에 가지고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월 혁명은 시베리아까지 미치지 못했다. 북극 지방의 황무지에서 사는 사냥꾼들과 순록 목동들은 자신들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아직 한참을 기다려야한다.

볼가강, 코커서스 북부지방, 중앙아시아 등지의 민족과 부족들은 2월 혁명에 의해 처음으로 선사시대의 존재로부터 깨어났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민족 부르주아도 민족 노동계급도 없었다. 농민과 목동 대중 위에 상층부의 얇은 부위가 대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지식인 집단이 되었다. 민족 자치의 강령 수준으로 아직 올라서지 못한 이곳에서 투쟁의 목표는 자신들의 문자, 선생 그리고 가끔 자신들의 성직자를 갖는 것이었다. 이들은 쓰디쓴 경험을 통해 다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육받은 국가 지배자들은 가장 억압받는 이들이 일어서는 것을 자발적으로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가장 후진적인 인민은 가장 혁명적인 계급을 동맹자로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젊은 지식인 집단의 좌파를 통해 보티아크족, 추바쉬족, 지리아족, 다게스탄과 투르케스탄의 부족 등이 볼세비키당을 찾기 시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를 비롯하여 러시아 식민지들의 운명은 러시아 중앙의 산업발전에 따라 바뀌었다. 무역상을 강탈하는 등 직접적이고 공공연한 강도 행위가 좀더 위장된 강도 행위로 바뀌었다. 이를 통해 아시아의 농민들은 주로 면화 등 공업원자재의 공급자로 바뀌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야만성이 결합된 착취질서는 아시아 민족들을 극단적인 치욕상태로 짓눌렀다. 그리고 2월 혁명의 체제는 모든 것을 예전 그대로 유지시켰다.

짜르는 바쉬키르족, 부리아트족, 키르기즈족 기타 유목민 부족들의 가장 좋은 토지들을 강탈했다. 이것들은 원주민 사이의 식민지 오아시스에 흩어져 있는 지주와 러시아인 부농들의 소유로 계속 남아있었다. 이곳에서 민족 독립정신의 각성은 무엇보다 이 식민주의자들에 대한 투쟁을 의미했다. 이들이야말로 인위적으로 대상(帶狀) 토지소유 제도를 구축하여 유목민들을 기아와 점진적인 멸망의 운명으로 내몰았다. 한편 식민주의자들은 아시아 민족들의 "분리독립 운동"을 러시아의 단결 즉 자기 소유권의 신성함으로 저지했다. 원주민 운동에 대한 식민주의자들의 증오심은 트랜스바이칼 지역에서는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3월 사회혁명당의 주도로 농촌의 서기들과 전선에서 돌아온 하사관들은 부리아트족을 대대적으로 학살했다.

구체제를 최대한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식민지의 모든 착취자들과 강도들은 이때부터 제헌의회의 주권에 호소했다. 이들이 자신의 가장 확실한 보루라는 것을 인식한 임시정부가 이 상투어를 제공했다. 반면 피억압 민족의 특권 상층부 역시 더욱 빈번하게 제헌의회에 호소했다. 회교 지배계급인 성직자들은 각성하고 있는 산악 민족과 코커서스 북부지역 부족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흔들수록 이들 위로 회교 율법의 초록색 깃발을 흔들면서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모든 문제들을 연기한다고 선언했다. 제헌의회는 전국의 보수 반동, 특별 이해집단, 특권층 등의 구호가 되었다. 제헌의회에 호소하는 것은 곧 문제 해결을 미루고 시간을 버는 것이었다. 시간을 번다는 것은 반동세력을 규합하여 혁명의 목을 조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초기에만 그리고 후진 민족들과 거의 회교도들 사이에서만 운동의 지도력이 성직자나 봉건 상류층에 의해 장악되었다. 일반적으로 농촌의 민족운동은 당연히 농촌 교사, 서기, 관리, 하급장교 그리고 어느 정도 상인에 의해 주도되었다. 변방의 도시에는 좀더 품위 있고 부유한 분자들로 구성된 러시아인 또는 러시아 동화 지식인 집단과 함께 좀더 젊은 부위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농촌 출신으로 자본의 연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 부위는 자연스럽게 정치적으로 기본 농민 대중의 민족적 이해 그리고 부분적으로 사회적 이해도 대표하는 임무를 맡았다.

변방의 화해주의자들은 민족적 열망 때문에 러시아의 화해주의자들을 적대시했으나 기본적으로 이들과 같은 유형이었으며 심지어 대개는 같은 이름으로 통했다.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과 사회민주주의당, 그루지아와 라트비아의 멘세비키당, 리투아니아의 "트루도비키(노동당)" 등은 대러시아의 사촌들과 똑같이 혁명을 부르주아 체제의 틀 속에 가두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토착 부르주아 계급이 대단히 허약했기 때문에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은 연립정부에 참여하는 대신 국가권력을 스스로 맡을 수밖에 없었다. 변방의 화해주의자들은 농업 및 노동 문제에서 중앙정부보다 더 진보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군대와 농촌에서 연립정부 반대자로 보이는 큰 장점을 누렸다. 이 결과 이들은 러시아 화해주의자들과 결국에는 같은 운명이었으나 다만 상승과 몰락의 시간을 달리했을 뿐이었다.

그루지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소그루지아의 극빈농들을 거느렸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전국의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지도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2월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 그루지아 지식인 집단의 지도자들은 그루지아를 조국이 아니라 지롱드 즉 전국에 지도자들을 제공하도록 점지된 축복 받은 남부의 도로 바라보았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정협의회에서 그루지아의 멘세비키 지도자 첸켈리는 짜르 치하에서 그루지아인들은 날씨가 좋든 나쁘든 이렇게 말했다고 뻐겼다: "단 하나의 조국, 러시아." 그리고 한달 후 민주협의회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다: "그루지아 민족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그루지아 민족은 대러시아 혁명에 전적으로 복무한다." 그리고 대러시아 관료들이 개별 지역들의 민족적 권리 주장을 완화시키거나 저지할 때마다 유태인들을 이용했듯이 그루지아 화해주의자들을 "이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상황은 그루지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 내로 제한하기를 희망할 때까지만 계속되었다.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는 대중이 승리할 위험성이 커지는 만큼이나 그루지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 화해주의자들과 결별하고 그루지아 내부의 반동 세력과 유대를 더 강화했다. 그리고 소비에트가 승리하자마자 러시아의 단결을 주창했던 이들은 분리 독립을 주장하면서 트랜스코커서스 지역의 민족들에게 국수주의의 누런 송곳니를 드러냈다.

일반적으로 변방에는 사회 모순이 덜 발전했고 이 때문에 이것은 불가피하게 민족 문제로 위장되었다. 따라서 10월 혁명은 러시아 중심부보다 변방의 피억압 민족 대부분에 의해 더 많은 저항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족적 갈등은 그 성격상 2월 혁명 체제를 잔인하게 뒤흔들어 중심부의 혁명에 충분히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 상황 속에서 계급 갈등과 동시에 터진 민족적 갈등은 특히 격렬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누적되어온 라트비아인 농민과 독일 호족 사이의 적대감 때문에 전쟁이 터지자 수천 명의 근로 라트비아인들은 러시아군에 자원 입대했다. 라트비아인 농업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된 명사수 연대들은 전선에서 가장 훌륭한 부대에 속했다. 그러나 이미 5월에 이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요구하며 나섰다. 이들의 민족주의는 미성숙한 볼세비키주의의 겉껍질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에스토니아에서도 반복되었다.

백러시아에는 지주들이 폴란드인이거나 폴란드에 동화되었다. 또한 유태인들이 도시와 읍을 장악했다. 더욱이 관리는 러시아인들이었다. 따라서 두 배 세배 억압받은 농민들은 10월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조성된 전선의 영향으로 자신의 민족적 사회적 분노를 볼세비키주의의 통로로 집중시킬 시간을 가졌다. 제헌의회 선거에서 백러시아 대중은 압도적으로 볼세비키당에게 표를 던졌다.

깨어난 민족적 존엄성은 사회적 분노와 연결되어 한때는 이것을 억제하고 한때는 이것을 폭발시켰다. 이 모든 과정들은 군대에서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 민족 단위로 연대를 창설하려는 진정한 열병이 군대를 휩쓸었다. 이 민족 연대들은 전쟁과 볼세비키당에 대한 자신들의 태도에 따라 중앙정부에 의해 보호되거나 용인되거나 탄압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민족 연대들은 갈수록 임시정부를 적대시했다.

레닌은 혁명의 "민족적" 맥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9월말에 쓰여진 유명한 논문 [위기는 무르익었다]에서 그는 끈질기게 이렇게 주장했다: 민주협의회의 민족 대표단은 "연립정부에 대한 반대 투표(55표 가운데 40표)를 통해 소비에트보다 더 급진적이며 노동조합보다 덜 급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피억압 민족들이 대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기대하는 바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은 독자적 투쟁을 한발 한발 혁명적 몰수를 통해 수행하면서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베르흐네유딘스크에서 열린 부리야트족의 10월 대회에서 어느 연설자는 이렇게 선언했다: 변방 민족들의 지위 개선과 관련하여 "2월 혁명은 새로운 것을 전혀 가져다주지 못했다." 그의 판단은 볼세비키들을 아직은 지지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이들에 대해 더욱 우호적인 중립을 지키는 것을 필요하게 만든 것 같았다.

뻬쩨르부르그에서 10월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있던 바로 그 순간에 우크라이나에서는 전국 병사 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는 다음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지만 대러시아 볼세비키당의 무장봉기를 "반민주적 행위"로 규정하는 것도 거부한다; 봉기 진압을 위한 병사의 파견을 막기 위해 모든 조치들을 취한다. 이 입장은 민족 해방 투쟁의 소부르주아 단계를 완벽하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모든 애매한 입장을 끝장내려는 노동계급의 혁명을 촉진시켰다.

한편 지금까지 언제나 중앙정부에게 기울었던 변방의 부르주아 대부분은 10월 혁명이 성공하자 민족적 토대가 조금도 없는 분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발트해의 부르주아 계급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열광적인 애국주의로 로마노프 왕조의 첫 보루였던 독일의 호족들을 따랐었다. 그러나 이제 분리 독립의 깃발 아래 볼세비키당의 러시아와 자기 민족의 대중에게 저항했다. 이와 같은 방향으로 더욱 신기한 현상들이 줄을 이었다. 10월 20일에 "카자흐 군대집단, 코커서스 산악인, 대평원의 자유민족 등의 동남 연방"이 새로운 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여기서 제국주의 중앙정부의 보루였던 돈강, 쿠반 지역, 티어 지역, 아스트라한 지역 등의 카자흐 지도자들은 몇 달만에 연방국가의 열렬한 옹호자로 돌변했다. 그리고 이 근거로 회교 산악인, 대평원 거주민 등의 지도자들과 단결했다. 연방국가의 국경선은 북쪽에서 다가오는 볼세비키당의 위험에 대한 장벽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반혁명적 분리독립 운동은 볼세비키 정부에 저항하는 내전의 주요 훈련장이 되기 전에 먼저 케렌스키의 연립정부에 직접 저항하여 이 정부의 기를 죽이고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하여 다른 모든 문제들과 함께 민족 문제는 임시정부에게 메두사의 머리를 보여주었다. 이 머리에 붙어있던 3월과 4월의 희망적인 머리카락들은 모두 나중에 증오와 분노의 뱀으로 돌변했다.                         

 

 

<민족 문제에 대한 보론>

거시적으로 보면 볼세비키당은 민족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통해 10월 혁명의 승리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 정당이 2월 혁명 직후 바로 이 입장을 채택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 조직이 허약하고 경험이 부족했던 변방 뿐 아니라 뻬쩨르부르그 중앙에도 이것은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에 당은 너무도 약화되었으며 당 중핵의 이론적 정치적 수준도 너무 낮아져 있었다. 따라서 레닌이 해외에서 귀국할 때까지 공식 당 지도자들의 민족 문제에 대한 입장은 대단히 혼란스럽고 어정쩡했다.  

물론 전통에 따라 볼세비키당은 민족 자결권을 옹호했다. 멘세비키당도 말로는 이 입장에 동조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두 당의 강령은 동일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권력 문제였다. 농업 문제 뿐 아니라 민족 문제에서도 볼세비키당이 제출한 구호는 민주주의로 위장된 부르주아 제국주의 체제의 보존과 화해할 수 없이 적대했다. 그러나 당의 임시 지도자들은 이 점을 이해할 능력이 조금도 없었다.  

스탈린의 민주적 입장은 이 무능력의 가장 조야한 표현이었다. 민족 차별을 철폐하는 정부의 포고령에 대한 3월 25일의 논문에서 스탈린은 민족 문제를 역사적 규모로 정식화하려고 했다: "민족 억압의 사회적 기초이자 원동력은 쇠퇴 중인 토지 귀족이다." 그러나 민족 억압은 자본주의 시대에 사상 유례 없이 확대되었으며 식민지 정책에서 가장 야만적 모습을 드러냈다. 스탈린은 이 사실을 인식할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계속 이렇게 적고 있다: "토지 귀족은 부르주아 계급과 권력을 공유하고 있다. 귀족의 무제한적 권력은 영국에서 이미 오래 전에 종식되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 민족 억압은 온건하며 덜 비인간적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전쟁 중에 권력이 지주(!)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민족 억압은 상당히 강화되었다(아일랜드와 인도에 대한 박해)." 아일랜드와 인도를 억압한 자들은 지주들이고 이들은 로이드 조오지를 통해 전쟁 덕분에 권력을 잡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계속 주장한다: "...지주제도가 과거이든 지금이든 전혀 없었으며(!) 권력이 부르주아 계급의 손에만 맡겨진 스위스와 북미에서 민족들은 자유롭게 발전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이 나라들에서는 민족 억압은 존재할 곳이 없다...." 그는 미국의 흑인, 원주민, 이주민, 식민지 문제 등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

봉건제도를 민주주의와 혼란스럽게 대조시키는데서만 나오는 이 가망 없는 편협한 분석으로부터 순수한 자유주의 추론이 정치적으로 도출된다. "정치무대에서 봉건 귀족을 제거하고 그 권력을 빼앗는 것 바로 이것이 민족 억압을 끝내고 민족 자유에 필요한 실제 조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면서 실제로 이 조건들이 조성되었다...." 이 글은 이 주제에 대해 그 동안 멘세비키들이 써온 것 전부보다 제국주의 "민주주의"를 더 원칙적으로 변호하고 있다. 카메네프와 함께 스탈린은 대외 정책에서 임시정부와 분업을 하여 민주적 평화를 성취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이와 똑같은 정도로 국내 정책에서도 그는 르보프공의 민주주의에서 민족 자유의 "실제 조건"을 찾았다.

실제로 짜르의 몰락은 우선 다음 사실을 완전히 폭로했다: 반동 지주 뿐 아니라 자유 부르주아 계급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전체는 노동계급의 애국주의 상층부와 함께 민족적 권리의 진정한 평등 즉 지배 민족의 특권 철폐에 화해할 수 없이 적대적이었다. 이들의 강령 전체는 민족 문제를 완화시키고 문화라는 당의정을 제공하고 대러시아의 지배적 지위를 민주적으로 은폐하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4월 당협의회에서 레닌의 민족문제와 관련된 결의안을 옹호하면서 스탈린은 공식적으로 "민족 억압은 제국주의 집단이 채택하는 체제이자 조치들이다."라는 테제로 자신의 주장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그리고 불가피하게 논지에서 벗어나 자신의 3월 입장으로 돌아간다. "민주 국가일수록 민족 억압은 덜하며 이 역도 성립한다." 이 주장은 그가 직접 요약한 것이며 레닌으로부터 빌린 것이 아니다. 민주적 영국이 봉건적이며 카스트 제도가 억누르고 있는 인도를 억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전처럼 그의 제한된 시야에 잡히지 않는다. 스탈린은 계속한다: "구 토지귀족"이 지배해온 러시아와는 대조적으로 "영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서 민족 억압이 소수 민족의 학살을 가져온 적은 결코 없었다." 마치 토지귀족이 "결코" 영국을 지배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헝가리에서 지배하지 않는 것처럼 그는 말한다! "민주주의"를 약소국 억압과 통합시키는 역사발전의 결합적 성격은 스탈린에게는 아예 금시초문이다.

역사 발전이 뒤늦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다민족 국가로 출발했다. 그러나 뒤늦음은 불가피하게 모순적인 복잡한 개념이다. 후진국은 같은 거리를 두고 선진국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지 가지 않는다. 세계 경제의 시대에 후진국들은 선진국의 압력 때문에 일반적 발전의 고리에 묶여 중간 단계 전부를 건너뛴다. 더욱이 확고히 정착된 사회적 형태와 전통이 없기 때문에 후진국은 최소한 어느 한도 내에서 국제 기술과 사상의 최신 성과를 지극히 환영하면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때문에 후진성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다. 역사 발전 전체는 모순적이고 결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역사적 극단이 후진국의 사회구조를 지배한다. 후진 농민과 선진 노동계급이 부르주아 계급의 중간 부위를 대신한다. 한 계급의 임무는 다른 계급의 어깨에 전가된다. 민족 문제에서도 중세의 잔재를 뿌리뽑는 임무는 노동계급에게 맡겨진다.

물론 정치적 실천은 정치 이론보다 훨씬 원시적이었다. 왜냐하면 사물은 사상보다 변화시키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론은 실제 활동의 요구들을 명확하게 표현했을 뿐이었다. 민족 해방과 문화 발전을 성취하기 위해 피억압 민족들은 자기 운명을 노동계급의 운명과 연결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자기 민족의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 정당들로부터 결별해야했다. 이들은 역사 발전의 길에서 크게 도약해야 했다.

민족운동을 혁명의 기본 과정인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투쟁에 종속시키는 임무는 즉시 성취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임무는 여러 단계에 걸쳐 각 지역마다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케렌스키, 전쟁, 러시아 동화 정책 등에 적대적이었던 우크라이나, 백러시아, 타타르의 노동자, 농민, 병사들은 화해주의 지도부에도 불구하고 이 임무를 통해 노동계급 봉기의 동맹자가 되었다. 볼세비키당의 객관적 지지 세력이었던 이들은 나중 단계에서는 의식적으로 볼세비키당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핀란드,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그리고 더 미약하게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운동의 계층 분화는 10월까지 급격히 날카로운 형태를 띠었다. 이 때문에 외국 군대의 개입만이 노동계급 혁명의 성공을 막을 수 있었다. 민족적 각성이 좀더 원시적이었던 동방 아시아에서 민족 운동은 점진적으로 그리고 상당한 시간차를 두고 노동계급의 지도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진정으로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야 이것이 가능했다. 이 복잡하고도 모순적인 과정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면 결론은 명백하다: 농민 뿐 아니라 민족의 물살이 10월 혁명의 수로로 쇄도하고 있었다.

대중은 정치적 농업적 민족적 해방과 농노제의 철폐 등 가장 기본적인 임무로부터 노동계급 독재의 구호로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저항할 수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이 현상은 자유주의자들과 화해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참주선동", 미리 계획된 틀, 연속혁명의 이론으로부터가 아니라 러시아의 사회구조 그리고 전 세계적 상황에 의해 일어났다. 연속 혁명론은 이 운동 발전의 결합적 과정을 정식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 현상은 러시아에만 일어나지 않았다. 뒤늦은 민족해방 혁명이 노동계급 혁명에 종속되는 현상은 전 세계에 관철되는 법을 따른다. 19세기에 전쟁과 혁명의 근본문제는 생산력에게 국내 시장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반면에 20세기의 문제는 생산력 발전에 족쇄가 되는 일국적 한계로부터 생산력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역사의 거시적 의미에서 동방의 민족 혁명은 노동계급 세계혁명의 단계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민족 운동들 역시 소비에트 독재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짜르 러시아와 전 세계 피억압 민족들의 발전에 내재하는 혁명 역량을 레닌은 경탄할만한 깊이로 평가했다. 일본은 노예화를 목적으로 중국을 침략했다. 중국은 해방을 목적으로 일본에 대항했다. 이 두 현상을 똑같은 정도로 "비난하는" 위선적인 "평화주의"는 레닌의 경멸을 샀을 뿐이었다. 제국주의 억압 전쟁과 대조되는 민족 해방 전쟁은 레닌에게 일국 혁명의 다른 형태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국 혁명은 국제 노동계급의 해방투쟁에 필연적인 고리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국 차원의 전쟁과 혁명을 평가하더라도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과 무관하다. 이와 반대로 후진국 부르주아 계급은 젖니 때부터 외국 자본의 하수인으로 성장한다. 그리고 외국자본을 시기하고 증오하지만 결정적 순간에는 언제나 외국자본의 편이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국의 매판자본은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전형이고 국민당은 매판자본의 전형적 정당이다. 지식인 집단을 비롯해 소부르주아 상층부는 민족해방 투쟁에서 적극적이며 때로는 매우 큰 소리를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독자적 역할을 할 능력은 조금도 없다. 오직 인민의 선두에 선 노동계급만이 민족 혁명이나 농업 혁명을 철저히 완수할 수 있다.

레닌주의의 아류들 그리고 특히 스탈린은 피억압 민족 투쟁의 진보적 역사적 의의에 대한 레닌의 가르침으로부터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적 임무를 도출했다. 이것이 이들의 치명적인 오류이다. 이들은 제국주의 시대 혁명의 연속적 성격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역사발전을 현학적으로 도식화했다. 또한 살아 움직이는 결합발전 과정을 난도질하여 시간에 의해 필연적으로 분리된 죽은 단계로 만들었다. 이 모든 오류를 통해 스탈린은 민주주의나 "민주주의 독재"를 저속하게 이상화시켰다. 현실에서 이것은 제국주의 독재나 노동계급의 독재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스탈린 일당은 이 오류의 방향으로 서서히 나아가면서 민족 문제에 대한 레닌의 입장과 완전히 결별한 채 중국 혁명을 재앙으로 몰고 갔다.                                  

1927년 8월 좌익반대파(트로츠키, 라코프스키, 기타 인물들)에 대항하여 스탈린은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국주의 국가에서 혁명은 나름의 특색이 있다; 이곳에서 부르주아 계급은...혁명의 모든 단계에서 반혁명적이다....식민지와 종속국의 혁명은 또 다르다...; 이곳에서 민족 부르주아 계급은 특정 단계와 날짜에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자국의 혁명운동을 지지할 수 있다."

오직 자신감의 결여 때문에 여담과 완화된 표현을 첨가했을 뿐 그는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에게 1917년 3월 그가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에게 부여했던 같은 특징을 부여한다. 스탈린의 기회주의는 자신의 깊이 타고난 본성에 복종한다. 따라서 어떤 중력 법칙으로 강제된 것처럼 자기의 길을 찾아서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여기서 이론적 주장을 하기 위해 선택하는 내용들은 순전히 우연적이다.

그는 임시정부에 대해 1917년 3월 평가한 내용을 중국의 "민족" 정부에 그대로 이전시켰다. 이렇게 해서 그는 3년 간 국민당과 협력했다. 이것은 현대 역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을 초래한 정책이었다. 중국 부르주아 계급의 충직한 심부름꾼이 되어 아류들의 볼세비키주의는 상해 노동자들이 유혈 낭자하게 도살되는 1927년 4월 11일까지 이들을 뒤따라갔다. 스탈린은 장개석과 자신의 동지 관계를 이렇게 정당화하려고 애썼다: "좌익 반대파의 근본적 오류는 이것이다: 타민족들을 억압하는 제국주의 국가 러시아의 1905년 혁명을 피억압 국가 중국에서 일어난 혁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러시아 혁명을 "타민족들을 억압하는" 나라의 관점이 아니라 중국인만큼 억압을 당한 러시아 내부 "타민족들"의 경험을 통해 바라보아야 한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에게도 놀라울 정도로 이렇게 생각해본 적이 결코 없었다.

세 차례의 혁명을 통해 러시아는 거대한 경험을 했다. 이 과정에서 민족해방 투쟁과 계급투쟁의 모든 변종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이 자기 민족을 해방시킨 경우는 없었다. 정치적 색깔과 무관하게 러시아 변방의 부르주아 계급은 발전 단계마다 러시아 자본 전체의 도구인 중앙은행, 트러스트, 상업 기관들에 종속되었다. 이 기관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러시아 동화 운동에 종속시켰으며 광범위한 자유주의 및 민주주의 지식인 집단을 부르주아 계급에 종속시켰다. 변방의 부르주아 계급은 "성숙"해질수록 전반적인 국가기구에 그만큼 더 강하게 결박되었다. 전체적으로 보아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과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과의 관계는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이 제국주의 금융자본과 맺은 관계와 같았다. 적대와 종속의 위계질서가 복잡했지만 이 세 부르주아 계급들은 봉기 대중에 대항하는 데에 있어서는 단 하루도 근본적인 연대를 중지한 적이 없었다.  

반혁명 시기(1907년 ~ 1917년)에 민족 운동의 지도부는 토착 부르주아 계급에게 있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이들은 러시아 자유주의자들보다 더 솔직하게 짜르 체제와 실무적으로 합의를 추구했다. 폴란드, 발트해 국가, 타타르, 우크라이나, 유태인 부르주아 계급들은 서로 경쟁하여 제국주의적 애국주의를 과시했다. 2월 혁명 후 이들은 입헌민주당의 등뒤에 숨었다. 또는 입헌민주당처럼 자기 민족 화해주의자들의 등뒤에 숨었다. 변방의 부르주아 계급은 1917년 가을에 민족해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진하고 있는 노동계급 혁명에 대해 투쟁하기 위해 분리 독립의 길을 걸었다. 결산하면 피억압 민족의 부르주아 계급은 대러시아 부르주아 계급만큼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3개 러시아 혁명들의 거대한 역사적 교훈은 이 사건들에 참여했던 다수의 사람들 특히 스탈린의 의식 속에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 식민지 국가의 역관계에 대한 화해주의 즉 소부르주아적 사고는 1925년-1927년 중국 혁명을 살해했다. 그런데 이 사고는 레닌주의 아류들에 의해 코민테른 강령에 포함되었고 이 강령은 동방 피억압 민족들에게 족쇄가 되었을 뿐이었다.

 

레닌의 민족 정책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대조의 방법에 따라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정책과 비교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볼세비키주의는 민족해방 혁명이 앞으로 몇 십 년에 걸쳐 계속 폭발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리고 선진노동자들을 이 예상에 입각하여 교육시켰다. 반면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정책에 복종하듯이 적응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0개 민족들에게 강제적으로 동동한 시민권을 부여했을 때 이를 옹호했다. 동시에 이 민족들의 노동자들을 혁명적으로 단결시킬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당과 노동조합 안에 칸막이를 쳐서 이들을 분열시켰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교육받은 관리였던 카알 레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규칙을 부활시킬 방법을 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을 탐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망한 후에도 이 제국의 이론가가 되었다. 이 제국이 붕괴했을 때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시 자신의 지배를 받는 자치국가 연방의 깃발을 들어 올리려했다. 왕정의 틀 속에서 평화로운 발전을 추구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공식 강령은 이제 곧바로 왕정의 강령이 되었다. 이것은 4년 간 전쟁의 유혈과 오물로 뒤덮였으나 10개 민족을 하나로 묶었던 녹슨 굴렁쇠는 산산조각이 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수술 때문에 그 내부에 원심력이 강화되면서 해체되었다. 새로운 국가들이 수립되고 오래된 국가들은 재건되었다. 오스트리아의 독일인들은 심연을 사이에 두고 독일과 분리되었다. 다른 민족들을 계속 지배하는 것은 더 이상 이들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들의 문제는 단지 외국의 지배를 면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좌파"를 대표하여 오토 바우어는 민족 자치의 정식을 제시할 적절한 순간이 이때라고 생각했다. 지난 몇 십 년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와 지배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해 노동계급의 투쟁을 고무시켰을 이 강령은 이제 해방된 슬라브 민족들로부터 위험에 처한 민족을 보존하는 도구로 도입되었다.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개량주의 강령은 눈 깜짝할 순간에 물 속에 가라앉고 있는 왕정이 잡으려는 지푸라기가 되었다. 이와 똑같이 민족 자결의 정식은 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거세되어 독일 부르주아 계급에게 구원의 닻이 되었다.

1918년 10월 3일 사태를 변화시킬 힘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인식한 의회의 사회민주주의 의원들은 너그럽게 구 제국의 민족들에게 자결권을 "인정했다". 10월 4일 부르주아 정당들 역시 자결권을 채택했다. 이렇게 하여 오스트리아-독일 부르주아 계급을 하루 앞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즉시 대기 정책을 재개했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갈 지 그리고 윌슨이 무슨 말을 할지 아직 불투명했기 때문이었다. 오토 바우어의 말에 의하면 10월 13일에 군대와 왕정이 확정적으로 붕괴되고 "우리의 민족 문제 강령이 원래 의도했던 혁명적 상황"이 발생하고 나서야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은 자결권 문제를 실제적인 형태로 제기했다. 진짜 이들은 이제 잃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바우어는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설명한다: "타민족들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게 되자 독일의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의 역사적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사실 타민족을 지배하는 대의를 위해 오스트리아의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자발적으로 독일 조국과 분리했었다. 이렇게 하여 새로운 강령은 피억압 민족들의 필요 때문이 아니라 억압자들에게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포되었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지경으로 내몰린 유산계급들은 법적으로 민족 혁명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이것을 이론적으로 적법화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이들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성숙하며 시기 적절하고 역사적으로 이미 준비된 혁명이었다. 어쨌든 모든 것은 끝났다. 사회민주주의 정신은 여기서 마치 손바닥에 있는 것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다!

그러나 사회혁명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것은 지배계급들로부터 인정받을 수 없었다. 이것은 연기되고 손상되고 광채가 박탈되어야 했다. 제국이 가장 약한 부분 즉 민족의 틈을 따라 분리되었기 때문에 오토 바우어는 혁명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결론 내렸다: "이것은 결코 사회혁명이 아니고 민족 혁명이었다." 실제로 운동은 처음부터 깊은 사회 혁명적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의 "순수하게 민족적인" 성격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서 아주 잘 설명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유산계급들은 공개적으로 연합국들을 초대하여 제국 군대 전체를 포로로 잡도록 했다.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이탈리아 장군에게 간청하여 이탈리아군이 비인을 점령하게 했다!

혁명 과정에서 사회적 내용을 민족적 형식으로부터 저속하게 그리고 현학적으로 분리시키는 것은 이 혁명들을 독립적인 역사 단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오토 바우어가 스탈린에게 얼마나 근접하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은 대단히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의 목적은 사회혁명의 위험에 대항하여 사회민주주의가 부르주아 계급과 협력하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다.

혁명이 역사 발전의 기관차라는 맑스의 말을 인정한다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는 역사 발전의 제동장치이다. 왕정이 실제로 붕괴한 후에도 정부에 참여할 것을 촉구 받은 사회민주주의는 구 합스부르크 내각과 단절할 지 말아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민족" 혁명은 구 장관들을 국가 비서들로 보강시키는 것으로 스스로를 한정시켰다. 독일 혁명이 호언쫄런 왕가를 타도한 10월 9일이 되어서야 오스트리아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국무회의에게 공화국을 선포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대중운동을 수단으로 부르주아 파트너들을 위협하여 이들이 공화국 정부에 참여하도록 강제했다. 물론 대중운동이 두려워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뼈 속까지 덜덜 떨고 있었다. 분별 없는 아이러니로 오토 바우어는 이렇게 말한다: "11월 9일과 10일에 여전히 왕정을 지지했던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11월 11일 저항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 흑백인조 왕정의 당보다 꽉 채워서 무려 이틀이나 앞서 있었다! 인류의 모든 영웅적 전설들도 이 혁명적 대담성 앞에서는 빛을 바랜다.

자기의 의지와는 반대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의 시작부터 자동적으로 인민의 선두에 섰다. 러시아의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처지와 똑같았다. 또한 러시아의 사촌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무엇보다도 정권을 잡는 것을 두려워했다. 연립정부에서 이들은 가능한 장관직을 적게 맡으려고 했다. 오토 바우어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처음부터 정부에 적게 참여하겠다고 요구한 것은 혁명의 순수히 민족적인 성격에 주로 조응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에 의해 권력의 문제는 실제 역관계, 혁명운동의 위력, 지배계급들의 파산, 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일부 똑똑한 체하는 분류자들이 붙인 현학적인 조그만 명찰  즉 "순수히 민족적인 혁명"에 의해 결정되었다.                 

카알 레너는 국무회의의 수석 서기가 되어 혁명의 폭풍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다른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 장관들의 조수인 차관으로 전환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사무실 탁자 밑으로 숨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을 위해 보관하고 있던 혁명의 민족적 껍질을 먹는 것에 대중은 만족하지 않았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부르주아 장관들을 밀쳐내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피신처에서 나오도록 강제했다. 대체할 수 없는 이론가 오토 바우어는 이것을 또한 이렇게 설명한다: "다음 며칠 간의 사건들이 민족 혁명을 사회혁명 쪽으로 밀치고 있었다. 오직 이것 때문에 정부에서 우리의 비중이 커졌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대중의 공세에 직면하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탁자 밑에서 기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능은 단 한순간도 바뀌지 않았다. 이들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낭만주의 및 모험주의에 대해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였다. "정부에서 자신들의 비중을 증대시킨" 사회혁명에게 이 아첨꾼들은 낭만주의 또는 모험주의의 딱지를 붙였다. 이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자들은 1918년에 비인의 크레디트안슈탈트(신용대부기관)의 수호 천사가 되어 노동계급의 혁명적 낭만주의로부터 이것을 방어하는 역사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들의 시도를 가로막는 진정한 혁명정당이 장애물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태는 이렇게 흘러갔다.

다민족 국가였던 러시아 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자신들의 최근 운명을 통해 볼세비키주의와 오스트리아 맑스주의의 차이점을 확실히 부각시켰다. 15년 동안 레닌은 대러시아 국수주의의 모든 정치적 색조들에 비타협적으로 대항하면서 모든 피억압 민족들이 짜르의 제국으로부터 결별할 권리를 설교했다. 그러자 볼세비키당이 러시아의 분할을 꿈꾸고 있다는 비난이 일었다. 그러나 민족 문제에 대한 이 대담한 혁명적 정식은 짜르 러시아의 피억압 소수민족들의 파괴할 수 없는 신뢰를 볼세비키당에게 가져다주었다. 1917년 4월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수립한 것을 보면 우크라이나인들은 분리 독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밀류코프의 공화국을 수립한 것을 보면 이들은 분리 독립할 것이다." 그의 예언은 이후의 사태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었다. 역사는 민족 문제에 대한 두 정책을 아주 뛰어나게 비교했다. 비겁하고 어정쩡한 정책의 정신으로 교육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노동계급은 막강한 격동 앞에 산지사방으로 흩어졌다. 더욱이 이 과정의 주도력은 사회민주주의 제 2 인터내셔널의 지부들이 주로 맡았다. 그러나 짜르 체제의 잔해를 딛고 러시아에서는 민족들로 구성된 새로운 국가가 수립되었고 볼세비키당에 의해 경제적이고 정치적으로 밀접하게 결합되었다.

소련은 아직도 조용한 피난처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이후 운명이 어떻든 레닌의 민족 정책은 인류의 영원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을 것이다.

 

 

제 3장 예비의회 철수와 소비에트 대회를 위한 투쟁

전쟁이 계속될수록 전선은 더욱 붕괴되었고 정부는 더욱 약화되었다. 또한 러시아의 국제적 지위는 더욱 실추되었다. 10월초 독일 해군 및 공군 함대는 핀란드 만에서 활발한 전투를 벌였다. 발트해 함대 수병들은 뻬쩨르부르그로 가는 수로를 보호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그러나 이들은 전선의 어떤 부대보다도 자신의 깊은 모순을 이해하고 있었다. 이 모순은 혁명 전위로서 자신의 지위와 제국주의 전쟁에 강제로 끌려 들어간 자신의 지위 사이에 존재했다. 따라서 이들은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전함의 라디오 방송장비를 통해 사방으로 국제적 혁명 지원을 외쳤다. "우월한 독일군의 공격을 받을 경우 우리 함대는 불공평한 전투에서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군함도 전투를 거부하지 않을 것이다. 반동계급의 비방과 중상에 시달려온 발트해 함대는 자신의 임무를 다할 것이다...혁명은 오랜 고통을 견디어 왔다. 케렌스키는 이 와중에 나라를 통치하고 있는 빌어먹을 독재자이다. 우리는 그의 명령에 따라 싸우지 않는다...우리의 통치자들은 연합국들과 조약을 맺어 자유 러시아의 손을 묶고 있다. 우리는 이 조약의 이름으로도 싸우지 않을 것이다." 아니다, 오직 혁명의 화로 뻬쩨르부르그의 수로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운다. "발트해의 파도가 우리 형제들의 피로 물들고 이들의 시체를 집어삼킬 때 우리는 소리 높여 외친다:...전 세계 피억압 인민이여! 봉기의 깃발을 들어 올려라!"

전투와 사상자에 대한 이 말들은 허풍이 아니었다. 소 함대는 전함 슬라바를 잃고 전투 후 퇴각했다. 독일군은 문순트 제도를 점령했다. 전쟁사의 검은 한 페이지가 또 넘겨졌다. 이 새 군사적 손실을 수도를 이전하는 핑계로 활용하기로 정부는 결정했다. 이 오랜 아이디어는 적당한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배 집단이 모스크바를 특히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이들은 뻬쩨르부르그를 진정으로 증오했다. 반동 왕당파, 자유주의, 민주주의 진영 등은 모두 차례로 수도를 깎아 내리고 굴복시키고 두들겼다. 가장 극단적인 애국주의자들은 이제 베를린보다 뻬쩨르부르그를 훨씬 더 증오했다.

수도를 대피시키는 문제는 아주 시급한 사안으로 제기되었다. 예비의회와 정부를 이전시키는 시간이 2주일 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군수산업 공장들도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이전시키기로 결정되었다. 반면 "사설 기관"인 전국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졌다.

이 계획을 선동한 입헌민주당은 정부를 단순히 이전시키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나중에 기아, 질병, 탈진으로 죽어 가는 혁명 수도를 점령할 생각이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내부 봉쇄는 이미 전속력으로 진행 중이었다. 공장들은 주문이 끊겼고 연료는 이미 4분의 3이 감축되었다. 식량부는 수도로 향하는 소의 무리를 정지시켰다. 마린스키 철도를 통한 화물 운송도 중지되었다.

정부는 10월초가 되어서야 마침내 의회를 해산시켰다. 그런데 이 의회 의장인 호전적인 로지안코는 모스크바의 자유주의 신문 우트로 로시이(러시아의 아침) 지에 수도를 위협하고 있는 군사적 위험에 대해 아주 솔직하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나는 이렇게 독백한다: 신이시여 뻬쩨르부르그를 도와주소서....중앙 기관들 즉 소비에트 등이 몰살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뻬쩨르부르그에 일고 있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기관들이 몰살당하면 나는 아주 즐거울 것이다. 이들은 러시아에 해악만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수도의 함락과 함께 발트해 함대도 몰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로지안코는 불평할 것이 없었다: "그곳의 전함들은 완전히 타락했다." 짜르의 시종장이었던 그가 입을 다물지 않은 덕분에 러시아 인민은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가장 내밀한 생각을 알아낼 기회를 얻었다.

런던의 러시아 대리대사는 이렇게 보고했다: 모든 지원 촉구에도 불구하고 영국 해군본부는 발트해에서 러시아를 구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영국 해군본부의 대답은 이렇게 해석될 수 있었다: 러시아 애국주의 상층부와 함께 연합국들은 독일이 뻬쩨르부르그를 공격하는 것은 공동의 대의에 도움이 될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볼세비키당만이 이렇게 해석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로지안코의 고백이 있은 후 노동자와 병사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이렇게 생각했다: 정부는 우리를 독일 장군 루덴도르프와 호프만의 학교로 보낼 준비를 하고 있다.

10월 6일 소비에트의 병사 부문은 유례 없는 만장일치로 트로츠키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임시정부가 뻬쩨르부르그를 방어할 능력이 없다면 평화조약을 체결하거나 사임해야한다." 노동자들 역시 병사들 못지 않게 비타협적이었다. 이들은 수도를 자신의 성채로 간주했다. 이들의 혁명적 희망은 수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들은 뻬쩨르부르그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한편 군사적 위험, 수도의 대피, 병사와 노동자의 분노, 주민 전체의 흥분 등에 대해 화해주의자들은 경고음을 발했다: 수도를 운명의 장난에 맡길 수 없다. 온 곳에서 수도 대피 계획에 저항할 것이라고 확신하자 정부는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우리 자신의 안전보다는 제헌의회 소집장소에 대해 더 걱정이 된다. 그러나 정부는 이 입장도 유지할 수 없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정부는 이렇게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궁에 계속 거주할 뿐 아니라 전과 동일하게 타우리데궁에서 제헌의회가 소집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렇게 발표했어도 군사적 정치적 상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뻬쩨르부르그의 정치적 힘이 다시 한번 드러났다. 이제 수도는 정부를 타도하라는 인민의 요청을 받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그리고 정부가 바깥으로 도망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후 수도를 감히 모스크바로 옮긴 세력은 볼세비키당 뿐이었다. 이들은 혁명을 성공시킨 후 수도를 이전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진정으로 전략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뻬쩨르부르그에서 도망할 정치적 이유가 전혀 없었다.

수도 방어에 대한 정부의 참회 선언은 러시아공화국 위원회 즉 "예비의회"의 화해주의 다수파가 요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 멋진 기관은 마침내 태어나는데 성공했다. 플레하노프는 농담을 좋아했으며 농담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무기력하고 하루살이 같은 이 공화국 위원회를 "닭발 위에 선 조그만 집"이라고 멸시하듯이 불렀다. 정치적 의미에서 이 규정은 아주 정확했다. 다만 조그만 집치고는 예비의회의 겉모습은 그럴듯했다. 짜르 시절에 내각이 입주했던 웅장한 마린스키궁에 예비의회가 입주했다. 이 우아한 궁전과 낡아빠졌으며 병사들의 냄새로 찌든 스몰니 학원 사이의 격차는 수하노프에게 큰 인상을 주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마린스키궁의 이 웅장함 속에 쉬면서 노동과 투쟁, 기아와 전쟁, 파멸과 무정부 상태, 나라와 혁명 등에 대해 전부 잊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휴식과 망각에 빠질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예비의회의 소위 "민주주의" 다수파는 308명으로 구성되었다: 약 20명의 좌파가 포함된 사회혁명당 120명, 다양한 색채를 가진 멘세비키당 60명, 볼세비키당 66명; 협동조합 대의원들,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대의원 등. 유산계급들에게는 156석이 주어졌는데 입헌민주당은 이 가운데 거의 반을 차지했다. 협동조합 대표들, 카자흐, 케렌스키의 집행위원회의 보수적 인물 등을 합치면 우익은 다수의 문제들에서 거의 다수파에 육박했다. 이렇게 하여 닭발 위에 선 조그만 편안한 집의 의석 배분은 도시나 농촌 인민의 모든 결정적 의지의 표현에 노골적으로 위배되었다. 더욱이 소비에트나 다른 기관이 병사의 칙칙한 회색을 대표적 배색으로 했던 반면 마린스키궁은 "나라의 최우량 분자들"을 소집해 놓고 있었다. 예비의회 대의원들은 선거의 요행, 지역의 정치적 세, 특정 도 선호 등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각 사회 집단과 정당은 자신의 가장 출중한 지도자들을 이곳에 보냈다. 참석자들은 수하노프의 말을 빌면 "대단히 화려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예비의회가 첫 회의를 소집했을 때 다수의 회의론자들은 크게 안도한 것처럼 보였다: "제헌의회가 예비의회보다 나쁘지 않다면 아주 좋을 것이다." 나라의 최우량 분자들은 궁전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크게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자기들이 실질적인 성과를 낼 능력이 없다는 사실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10월 7일 예비의회를 개막하면서 케렌스키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비록 정부는 "모든 권력을" 쥐고 있지만 "진정으로 가치 있는 어떤 제안이든" 경청할 준비가 되어있다. 비록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정부는 충분한 교양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였다. 아브크센티에프를 의장으로 하는 5인 최고회의에서 볼세비키당은 1석을 제의 받았다. 그러나 이 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이 불쌍하고 불행한 희극 감독들은 가슴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비가 오는 우중충한 날에 열린 우중충한 개막식의 관심사는 온통 볼세비키당의 임박한 행동에 집중되었다. 수하노프에 따르면 마린스키궁의 복도에서는 "깜짝 놀랄 소문"이 돌고 있었다: "트로츠키가 두세 표 차이로 다수를 획득했다...볼세비키당은 예비의회에서 즉시 철수할 것이다." 사실 마린스키궁에서 시위하듯이 철수하자는 결정은 5일의 볼세비키당 분파 회의에서 한 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이미 채택되었었다. 지난 2주일간의 좌경화는 대단히 급격했다! 카메네프만이 자신의 원래 입장에 충실하여 예비의회 철수를 감히 반대했다. 중앙위원회에 보낸 특별 선언문에서 카메네프는 예비의회 철수 입장이 "당을 위해 매우 위험한" 노선이라고 솔직하게 표현했다. 볼세비키당의 의도에 대한 의구심은 예비의회를 약간 걱정시켰다. 이들이 두려워한 것은 정부의 붕괴라기보다는 연합국 외교관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스캔들"이었다. 예비의회 대의원 다수는 애국주의 환호의 적절한 축포로 이들을 환영했었다. 수하노프는 미리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공식 인물 즉 아브크센티에프를 볼세비키들에게 보낸 일을 말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오. 권총에서 조그만 총알이 발사된 것뿐이오." 의회에서 빌려온 회의 규칙에 따라 회의가 개막되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 분파의 이름으로 특별 선언문을 발표하도록 트로츠키에게 10분이 허용되었다. 팽팽한 긴장이 감도는 침묵이 회의장을 지배했다. 선언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케렌스키의 정책을 억제하기 위해 소집된 민주협의회가 끝났으나 정부의 무책임한 정책은 변한 것이 없다; 유산계급들은 정치적 영향력에 비해 지나치게 과분하게 의석이 배분되었다; 한달 반 후 소집될 제헌의회를 부르주아 계급이 진짜 준비하고 있다면 이 계급의 지도자들은 의석 배분이 대단히 왜곡된 이 의회에서 정부의 무책임을 맹렬하게 방어할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의 핵심은 이것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제헌의회를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격은 목표를 제대로 잘 겨냥했다. 이 때문에 우익은 그만큼 더 시끄럽게 이 선언문에 항의했다. 선언문의 문구에서 이탈하지 않은 채 트로츠키는 정부의 산업, 농업, 식량 정책을 비난했다. 대중 봉기를 의식적으로 촉발시키려는 목표가 있었어도 정부는 지금과 다른 정책을 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혁명 수도를 독일군에게 넘기려는 생각은 반혁명 음모를 조장하는 정부의 일반 정책과 자연스럽게 연관되어 있다. 이 점을 우리는 인정한다." 그러자 항의는 폭풍으로 변했다. 베를린, 독일의 자금, 봉인열차 등에 대한 고함이 터져 나오면서 이것을 배경으로 진흙탕 속의 깨진 병 조각들처럼 더러운 욕들이 터져 나왔다. 지저분하고 낡아 빠졌으며 병사들이 온 곳에 침을 뱉어 놓은 스몰니 학원의 가장 격렬한 분쟁도 이런 욕설을 뱉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참정권이 제한된 의회를 지배했던 싸구려 술집 분위기를 즉시 재현하려면 마린스키궁의 품위 있는 회의에 참석하기만 하면 된다."

증오심의 폭발과 침묵이 교차하는 순간을 이용하여 트로츠키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다. 볼세비키당 분파는 이렇게 선언한다: 인민을 배신한 이 정부나 반혁명을 눈감아 주는 예비의회와 우리는 공통점이 전혀 없다....예비의회에서 철수하는 우리는 러시아 전국의 노동자, 병사, 농민들이 경계를 늦추지 말고 용기를 가질 것을 촉구한다. 뻬쩨르부르그는 위험에 처해 있다! 혁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 인민이 위험에 처해있다!...우리는 인민에게 촉구한다.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연설을 마친 후 그가 연단에서 내려오자 회의장에 남아있던 20여명의 볼세비키들이 터지는 욕설을 뒤로  하고 퇴장했다. 긴장과 경계의 순간이 지나자 다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볼세비키들만 퇴장했다. 나라의 최우량 분자들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한편 화해주의 좌익은 자기들에게 향한 것 같지 않은 공격에 약간 고개를 숙였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고백한다: "볼세비키들과 가장 가까웠던 우리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완전히 얼이 빠져 그냥 앉아있었다." 흠잡을 데 없이 말로만 싸우는 이들은 말로만 시간을 때울 때가 지나갔다는 것을 감지했다.

외무장관 테레쉬첸코는 비밀 전보를 통해 해외의 러시아 대사들에게 예비의회의 개막을 알렸다: "첫 회의는 볼세비키들이 일으킨 스캔들을 제외하면 별 일 없이 지나갔다." 노동계급과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역사적 결별을 이들은 단순한 "스캔들"이라고 인식했다. 부르주아 언론은 때를 놓치지 않고 볼세비키당의 결연함을 언급하면서 정부를 자극했다: 명예로운 장관님들이 "트로츠키 동지 정도의 결연함과 행동의 의지를 가질" 때에만 나라의 무정부 상태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문제가 개인의 결연함과 의지일 뿐 계급들의 역사적 운명이 아닌 것처럼 이들은 얘기하고 있다! 마치 인물과 성격이 역사적 임무와 무관하게 생성되는 것처럼 이들은 얘기했다. 예비의회의 볼세비키당 철수에 대해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이들은 권력이 자기들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문순트 제도의 함락,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점점 커지는 군사적 위험, 볼세비키당의 예비의회 철수 및 가두 진출 등은 화해주의자들에게 전쟁의 이후 상황을 깊이 생각하도록 강요했다. 전쟁 및 해군 장관, 군대조직 정부위원 및 대표들이 참여한 3일간의 토론 후 중앙집행위원회는 마침내 사태를 해결하는 결정에 도달했다: "러시아 민주주의의 대표들이 연합국들의 파리 회담에 참석이 허용될 것을 촉구한다." 새롭게 노력한 끝에 이들은 스코벨레프를 대표로 선정했다. 자세한 지시사항들이 작성되었다: 병합이나 배상 없는 평화조약;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를 포함하여 해협과 운하들의 중립화 --- 화해주의자들은 정치보다 지리에서 더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비밀외교의 철폐; 점진적인 군비축소. 파리 회담에서 러시아 대표의 목표는 "연합국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중앙집행위원회는 설명했다. 스코벨레프가 프랑스, 영국, 미국에 압력을 가한다! 입헌민주당 신문이 독이 서린 질문을 했다! "연합국들이 간단하게 그의 조건들을 거부하면 스코벨레프는 어떻게 할 것인가? 전 세계 인민에게 다시 호소하겠다고 위협할 것인가?" 슬프게도 화해주의자들은 전 세계 인민에 대한 자신들의 오래된 호소 때문에 얼굴을 붉혀왔었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미국에게 파나마 운하의 중립을 강요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동궁에조차 압력을 넣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12일 케렌스키는 부드러운 질책, 서글픈 불평, 열렬한 약속 등으로 가득한 장문의 편지를 영국 수상 로이드 조오지에게 보냈다: 전선은 "지난 봄보다 상태가 더 좋아졌다." 그는 볼세비키당에 대해 이렇게 불평한다: 물론 볼세비키당의 패배주의 선전이 언급된 모든 계획들을 방해했다. 그러나 평화는 얘기할 수 없다. 정부는 오직 "전쟁을 어떻게 계속할 것인가! 라는 문제만 알고 있다. 자신의 애국심을 담보로 케렌스키가 신용대부를 구걸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볼세비키당이 없어지자 예비의회는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전쟁 문제를 논의했다. 10일에 군대의 전투력을 개선하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세 번이나 연속된 지루한 회의를 통해서도 변하지 않는 한가지 계획이 논의되었다. 좌익이 말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군대를 설득시켜야한다. 우익은 이렇게 응수했다: 설득시킬 것이 아니라 강제해야한다. 화해주의 좌익은 이렇게 응수했다: 강요할 수단이 하나도 없다; 강요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나마 설득시켜야한다. 입헌민주당이 되 받아쳤다: 설득시키는 일은 볼세비키당이 당신들보다 더 잘한다. 양측 말이 전부 옳았다. 익사하기 전에 고함을 지르는 사람 역시 옳다.     

18일에 이 세상의 어떤 것도 변경시킬 수 없는 결정적인 시간이 다가왔다. 사회혁명당의 노선은 찬성 95표, 반대 127표, 기권 50표를 얻었다. 우익의 노선은 찬성 135표, 반대 139표를 얻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수를 획득한 노선은 하나도 없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회의장 전체에 전반적인 소동과 혼란이 일었다. 목표는 같이했으나 나라의 최우량 분자들은 가장 시급한 문제에 대해 이상주의적 결정조차 채택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다른 문제들을 논의하는 위원회나 전체회의에서도 매일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견해의 파편들은 하나로 모아질 수 없었다. 모든 집단들이 정치적 사고의 실체가 없는 그림자들 속에 살고 있었다: 사고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사고가 볼세비키당과 함께 거리로 나가지 않았을까?...예비의회의 막다른 골목은 체제 전체의 막다른 골목이었다.

군대를 다시 설득시키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군대를 강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전투를 통해 사상자를 낸지 얼마 되지도 않는 발트해 함대에 대해 케렌스키가 새롭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수병 대회는 중앙집행위원회에 이렇게 요구했다: "뻔뻔스러운 정치적 협박으로 위대한 혁명을 더럽히고 파괴하는 자"를 임시정부에서 쫓아내라. 케렌스키가 수병들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군대, 함대, 러시아 노동자들의 핀란드 지역 위원회는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임시정부의 화물을 정지시켰다. 케렌스키가 소비에트 대표위원(commissar)들을 체포하겠다고 위협하자 답장이 왔다: 지역위원회는 임시정부의 도전을 평온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자 케렌스키는 침묵을 지켰다. 사실 발트해 함대는 이미 봉기 중이었다. 육지에서는 사태가 아직 이렇게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으나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0월 한달 내내 식량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북부 전선의 사령관은 기아가 "군대의 사기 붕괴의 가장 주요한 원인"이라고 보고했다. 전선의 화해주의 상층부는 이제 병사들의 등뒤에서만 군대의 전투력이 개선되고 있다고 계속 주장했다. 이와 동시에 연대들의 하부는 비밀조약들을 공개할 것과 즉시 평화조약을 제안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서부전선의 정부위원 즈다노프는 10월초 이렇게 보고했다: "추위가 닥치고 식량사정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과 연관시킬 경우 이곳의 정서는 대단히 위태롭다...볼세비키들이 확실히 성공하고 있다."

전선의 정부기관들은 공중에 붕 떠있었다. 제 2군의 정부위원은 병사 증인들이 증언을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군사 법정을 열 수 없다고 보고했다. "지휘부와 병사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전쟁이 질질 끄는 것에 대해 장교들이 비난받고 있다." 정부와 지휘부에 대한 병사들의 적대감은 이미 오래 전에 군대위원회로 이전되었다. 군대위원회는 혁명이 시작된 후 교체된 적이 없었다. 이 위원회들의 머리 위에서 연대들은 대의원들을 수도와 소비에트로 보내 참호의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불평했다. 참호에서 이들은 빵, 옷, 전쟁에 대한 신념 등이 없이 지내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의 영향력이 미약한 루마니아 전선에서조차 모든 연대들이 사격을 거부했다. "2주나 3주 후에 병사들은 정전을 선언하고 무기를 내려놓을 것이다." 어느 사단의 대의원들은 이렇게 보고했다: "첫눈이 내리자 병사들은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제 133군단의 대의원들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위협했다: "평화를 위한 진정한 투쟁이 없으면 병사들은 스스로 권력을 잡고 정전을 선언할 것이다." 제 2군 정부위원은 전쟁 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추위가 닥치면 진지를 포기하겠다는 얘기들이 무성하다."

7월 이후 거의 중단되었던 독일군과의 우애행위는 다시 시작되면서 급격히 증대했다. 병사들이 장교들을 체포하고 증오스러운 장교들을 총살하는 사례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이런 행위는 병사들의 눈앞에서 거의 공공연히 자행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참견하지 않았다. 대다수는 참견을 원치 않았고 소수는 감히 참견하지 못했다. 장교를 살해한 병사는 언제나 숨을 수 있었다: 그는 병사 대중 사이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장군이 이렇게 적었다: "경련을 일으키듯이 우리는 이것이나 저것을 부여잡는다. 우리는 일종의 기적을 위해 기도를 올린다. 그러나 이미 다수는 구원의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간교함과 어리석음을 뒤섞어서 애국주의 신문들은 전쟁 계속, 공세, 승리에 대한 기사를 계속 내보냈다. 장군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들 중 일부는 애매하게 끼어 들었다. 10월 7일 드빈스크 근처의 군단 지휘관 부드버그 남작은 이렇게 적었다: "지금 공세를 꿈꾸는 자들은 완전히 미쳤다." 바로 다음날 그는 똑같은 일기에 이렇게 적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0일에 공격 명령을 받았는데 놀랍고도 황당했다." 아무 것도 믿지 않은 채 모든 일에 대해 어깨만 들썩이고 있는 전쟁 총사령부는 새로 작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적지 않을 수의 장군들은 코르닐로프의 리가 실험을 대규모로 확대하는 것만이 구원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보았다: 군대를 전투에 끌어들여 혁명의 머리에 패배의 총알을 안기자.

전쟁장관 베르호프스키의 주도로 전선에 가장 오래 있었던 부대들을 예비군으로 돌리기로 결정되었다. 철도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병사들의 무게로 신음했다. 과적 객차의 스프링이 부러지고 마루바닥이 무너졌다. 그러나 이 조치도 전선에 남은 병사들의 사기를 개선시키지는 못했다. 부드버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참호는 붕괴하고 있다. 통신용 참호들은 물이 찼으며 쓰레기와 인분이 모든 곳에 널려 있다....병사들은 참호 청소를 딱 잘라 거절한다....봄이 되어 이 모든 것들이 썩고 부패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원한에 찬 수동성으로 병사들은 예방주사를 맞는 것도 떼를 지어 거부했다. 이것 역시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의 한 형태가 되었다.

병사의 수를 줄여 전투력을 개선시키려는 노력이 허사로 끝난 후 베르호프스키는 갑자기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평화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 이 젊고 순진한 장관은 입헌민주당 지도부를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들과의 사적 모임에서 군대의 물질적 정신적 붕괴 상황을 제시했다: "전쟁을 연장시키려는 어떤 시도도 결국에는 재앙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입헌민주당 지도부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자들이 침묵을 지키는 동안 밀류코프는 경멸조로 어깨를 들썩하더니 이렇게 뇌까렸다: "러시아의 명예," "연합국에 대한 충성심."...이 말들을 전혀 신봉하지 않으면서 이 부르주아 지도자는 전쟁이 남길 잔해와 시체더미로 혁명을 매장시키려고 끈질기게 노력하고 있었다. 베르호프스키는 어느 정도 정치적 대담성을 드러냈다. 정부에 알리거나 경고도 없이 그는 20일 예비의회 위원회에 출석하여 연합국들의 동의가 있던 없던 즉시 평화를 체결해야한다고 선언했다. 개인적 대화를 통해서는 그와 동의했던 자들이 모두 나서서 그를 미친 듯이 공격했다. 애국주의 언론은 전쟁장관이 "트로츠키 동지가 탄 전차의 발판에 올라탔다"고 주장했다. 부르트세프는 독일의 자금이 돌고 있다고 암시했다. 베르호프스키는 휴가를 즐기며 머리나 식히라고 멀리 보내졌다. 진심으로 얘기할 때는 애국주의자들은 그의 말이 핵심적으로는 옳다는 것을 인정했다. 부드버그는 자신의 일기에서조차 조심스럽게 얘기해야했다: "우리의 말을 행동으로 옮기는 관점에서 보면 베르호프스키의 제안은 물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기적 이해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제안은 구국의 유일한 희망인지도 모른다." 더불어 이 남작은 "운명이 승리자의 행운을 가져다 준" 독일 장군들에 대해 부러움을 고백했다. 그는 독일 장군들도 바로 다음 차례라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이들의 가장 똑똑한 자들조차 아무 것도 예상할 수 없었다. 볼세비키들은 많은 것을 예상했는데 이것이 그들의 장점이었다.

예비의회 철수를 통해 봉기를 일으킬 정당과 공식 사회를 이어주었던 마지막 교량들이 불타버렸다고 인민 대중은 생각했다. 목표가 가까울수록 노력을 배가하게 마련이다. 볼세비키당은 새로이 솟은 힘으로 선동에 나섰다. 이 선동을 적들은 참주선동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이들이 장관실과 개인 사무실에서 숨기고 있던 것들을 선동이 인민에게 폭로했기 때문이었다. 선동은 지치지 않는 복음이 되어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볼세비키당이 객관적 정세의 진전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객관적 정세에 맞추어 정책을 수립하고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진실과 승리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인민은 이들의 선동을 싫증내지 않았다. 대중은 함께 단결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각자는 다른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테스트하고 싶었다. 그리고 모두 긴장하며 같은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각기 다른 색조와 특징들을 가지고 전개되는 방식을 계속 관찰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군중이 서커스 극장과 큰 건물 주위에 서 있었다. 여기서 인기 있는 볼세비키들이 봉기를 촉구하는 최후의 주장과 호소를 펼치고 있었다.

10월에는 주요 선동가들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었다. 선동가이자 일상적으로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레닌이 우선 주위에 없었다. 그의 단순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일반화는 오랫동안 대중의 의식 속에 남을 수 있었다. 그의 명쾌한 말은 인민의 생각을 정리하여 이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이런 것들을 인민은 크게 아쉬워했다. 일급 선동가 지노비에프도 주위에 없었다. 7월 "봉기"로 기소되어 검찰로부터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10월 봉기를 결정적으로 반대했다. 이 때문에 진짜 결정적인 시기에 그는 행동의 영역에서 철수해 있었다. 대체할 수 없는 선전가이며 당의 경험 많은 정치 강사인 카메네프는 당의 봉기 노선을 비난하고 승리를 믿지 않았다. 그는 재앙만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우울하게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성격상 조직가이지 선동가가 아니었던 스베르들로프는 종종 대중집회에 나타났다. 그의 일정하고 강력하며 지치지 않는 저음의 목소리는 대중에게 평온한 자신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스탈린은 선동가도 아니었고 연설가도 아니었다. 그는 당의 행사에 당 대변인으로 모습을 나타낸 적이 없었다. 그가 단 한번이라도 혁명의 대중집회에 모습을 나타낸 적이 있었는가? 문서나 회고록들은 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                      

볼로다르스키, 라쉐비치, 콜론타이, 추드노프스키 등은 뛰어난 선동가들이었다. 이들보다 급이 떨어지는 다수의 선동가들도 있었다. 대중은 관심과 공감을 가진 채 그리고 수준이 높은 자들은 생색내듯이 루나차르스키의 연설을 경청했다. 그는 사실, 일반화, 애절함, 농담 등을 구사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나 누구를 지도한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 자신이 지도 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혁명이 전진할수록 그는 급속히 빛을 잃고 자신의 화려한 웅변술을 상실했다.

수하노프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혁명 본부의 일에서 뛰쳐나와 그는 오브호프스키 공장에서 트루보체니 공장으로, 푸틸로프 공장에서 발트해 조선소로, 승마 학원에서 병영으로 날라 다녔다. 그는 모든 곳에서 동시에 연설하는 것 같았다. 뻬쩨르부르그의 노동자와 병사는 전부 몸소 그를 알고 있었고 그의 연설을 들었다. 대중 사이에서 그리고 혁명본부에서 그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그는 이 당시 중심 인물이었고 이 놀라운 역사의 페이지에서 최고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봉기 직전 시기에 위에서 열거한 선동가들보다 훨씬 효과적이었던 것은 이름 없는 노동자, 수병, 병사들이 수행한 기본적이면서도 단순한 선동이었다. 이들의 선동으로 대중은 하나 하나 혁명의 편으로 넘어왔으며 최후의 의심과 망설임을 버렸다. 정치활동이 열정적으로 전개된 몇 개월 동안 하부에서는 수많은 중핵들이 탄생했으며 수십만 명의 거칠지만 소중한 투사들이 교육을 받았다. 이들은 정치를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바라보는데 익숙해 있었다. 바로 이 때문에 학구적인 연설가가 가지기 힘든 날카로움으로 이들은 사실과 인물을 파악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혁명의 선두에 섰다. 여러 세대가 노동자였던 이들은 대단한 혁명적 훈련, 높은 정치문화, 사고와 말과 행동의 독자성을 지닌 선동가와 조직가들을 배출했다. 노동조합과 공장의 목수이자 가구장이이자 대장장이였던 이들은 이미 주위에 자신의 유파, 학생, 그리고 미래 소비에트 공화국의 건설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발트해 함대의 수병들은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가까운 전우였으며 상당수가 이들로부터 배출되었다. 이들은 후진 연대, 농촌의 읍, 농민의 마을을 휩쓴 선동가 여단을 배출했다. 혁명 지도자가 현대 서커스 극장에서 던진 일반화된 정식은 생각이 깊은 수백 명의 이들에 의해 피와 살이 붙어 전국을 휘돌았다.   

발트해 국가들, 폴란드, 리투아니아 등에서 수천 명의 혁명 노동자와 병사들이 후퇴하는 러시아군을 따라 공장설비들과 함께 또는 홀로 대피되었다. 이들은 모두 전쟁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자들에 반대하는 선동가가 되었다. 라트비아인 볼세비키들은 고향으로부터 분리된 채 전적으로 혁명의 땅에 선 신념이 확고하고 끈질기고 결의가 강한 인자들이었다. 이들은 매일 하루종일 전국을 돌며 샅샅이 선동을 했다.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 거친 억양, 종종 튀어나온 엉터리 러시아어 표현 등은 지치지 않는 봉기 촉구에 특별한 표현력을 부여했다.

동요하고 있으며 의심스럽고 중립적인 분자들을 대중은 더 이상 참아 넘기지 않았다. 이들은 모두를 붙잡고 잡아끌고 설득하고 정복하려했다. 공장은 연대와 결합하여 대의원들을 전선으로 보냈다. 참호는 후방 근처의 노동자 농민과 연결되었다. 전선의 도시와 읍에는 집회, 회의, 상담 등이 끝없이 이어졌다. 여기서 병사와 수병들은 노동자 농민과 결합했다. 바로 이 방식을 통해 백러시아 전선은 볼세비키 사상으로 획득되었다.

키에프, 보로네쥬, 기타 여러 곳에서는 당 지도부가 동요하면서 때를 기다렸다. 이런 곳에서는 대중이 수동적이 되는 경우가 빈번했다. 자기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도자들은 자기가 조성한 수동적 분위기를 핑계로 대면서 투쟁을 회피했다. 반면에 카잔의 선동가였던 포볼쥐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선동가가 대담하고 결연하게 봉기를 주창할수록 병사 대중은 그를 더욱 신뢰하고 그와 의기 투합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공장과 연대들은 더욱 끈질기게 농촌의 나무 대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한데 모여 대의원들을 출신 도로 내려보냈다. 연대들은 볼세비키당을 지지하라고 농민들에게 촉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도시 노동자들은 주위 농촌으로 내려가 신문을 배포하면서 볼세비키 중핵의 기초를 놓았다. 이 순회들을 통해 이들은 농민 전쟁의 불길을 눈동자에 지니고 도시로 돌아왔다.

볼세비키 사상은 전국을 장악했다. 볼세비키당은 정복될 수 없는 역량이 되었다. 인민이 이들과 함께 했다. 크론슈타트, 짜리친, 코스트로마, 슈이아 등 1인 1표로 선거를 실시한 시의회는 볼세비키당에 의해 완전 장악되었다. 모스크바 지구의회 선거에서 볼세비키당은 52%를 득표했다. 공장이 전혀 없는 사마라와 같이 멀리 떨어진 조용한 톰스크에서 볼세비키당은 의회를 장악했다. 슐뤼셀부르크 군 젬스트보 의원 4명 가운데 3명이 볼세비키였다. 리고프스키 군 젬스트보에서 볼세비키는 50%의 득표율을 올렸다. 모든 곳에서 상황이 이렇게 유리하지는 않았지만 모든 곳에서 같은 방향으로 상황이 바뀌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의 상대적 비중은 급격히 상승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이 볼세비키당을 지지하는 경향은 계급 조직들 속에서 훨씬 명확히 드러났다. 수도의 노동조합들은 50만 노동자들을 포괄하고 있었다. 아직도 일부 노동조합의 집행부를 장악하고 있던 멘세비키들은 자신들이 과거의 유물이라고 느꼈다. 노동계급의 어떤 부위가 조직을 수립하건 이 조직의 당면 목표가 무엇이건 이들은 결국 볼세비키당의 정치적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었다: 노동조합, 공장위원회, 영구적이건 일시적이건 노동계급의 경제적 문화적 조직들은 전체적 상황에 내몰려 모든 개별 문제에서 같은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주인인가?

공장 경영진과의 관계를 통제하기 위해 소집된 협의회에서 대포 공장들의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통해 이들을 가장 잘 통제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것은 단순한 정식이 아니라 경제 구원의 강령이었다. 이들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노동자들은 산업의 문제에도 더욱 구체적으로 다가갔다. 대포 공장 노동자 협의회는 군수품 공장에서 평화시의 공장으로 전환하는 방법들을 연구하는 특별 연구소를 설립하기까지 했다.

모스크바 공장위원회 협의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지역 소비에트는 앞으로 포고령을 통해 모든 파업 분쟁을 결정한다; 대의원들을 시베리아와 도네츠 분지에 보내 석탄과 곡물을 공장에게 보장해준다. 뻬쩨르부르그 공장위원회 협의회는 농업 문제에 관심을 집중하여 트로츠키의 보고에 접하자 농민들에게 보내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노동계급은 특별한 계급일 뿐 아니라 인민의 지도자라는 의무를 스스로 느낀다.

10월 후반부에 소집된 공장위원회 전국 협의회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 통제의 문제를 전국적 문제로 격상시켰다: "공장주보다 노동자들이 공장의 올바르고 중단 없는 생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는 "나라 전체에 이익이 되며 혁명 농민과 혁명 군대에 의해 지지를 받아야 한다." 새로운 경제 질서에 문을 연 이 결의문은 5표의 반대와 9표의 기권을 제외한 러시아 전국 공장 대표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기권을 행사한 몇몇 대표들은 자기 당의 노선을 더 이상 따를 수 없으나 여전히 볼세비키 혁명을 공개적으로 지지할 용기가 없는 고참 멘세비키들이었다. 내일은 이들이 볼세비키당을 지지할 것이다.

최근에 수립된 민주적 지방자치 정부들은 정부 기관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었다. 물, 조명, 연료, 식량 등의 보장과 같은 가장 중요한 임무들은 더욱더 소비에트와 다른 노동자 조직들의 몫으로 떨어졌다. 뻬쩨르부르그 조명 공장의 공장위원회는 도시와 인근을 뛰어다니면서 터빈을 돌리기 위해 한때는 석탄 한때는 그리스(유지)를 찾고 있었다. 그리고 공장주와 경영진에 반대하여 행동하고 있는 다른 공장위원회들을 통해 이것들을 공급받았다.

소비에트 정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물체, 자의적인 발상, 당 이론가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이것은 저항할 수 없는 힘으로 아래로부터 산업의 붕괴를 통해 소유주의 무기력과 함께 대중의 필요에 의해 탄생했다. 소비에트들은 실제로 정부가 되어 있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에게 다른 길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정부에 대해 주장하고 추측할 시간이 없었다. 이것은 실현되어야했다.

6월에 열린 첫 전국 소비에트대회는 대회를 3개월마다 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중앙집행위원회는 제 때에 제 2차 대회를 소집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적대적인 다수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아예 소집할 생각이 없었다. 민주협의회의 가장 주요한 임무는 소비에트를 대체할 "민주주의"기관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달성이 쉽지 않았다. 소비에트는 누구에게도 자리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

민주협의회가 폐막되던 9월 21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즉시 소집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요지의 결의문이 트로츠키의 보고와 함께 채택되었고 모스크바에서 온 손님 부하린은 공식적으로 "새로운 반혁명 물결"에 대비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임박한 공세를 준비하는 이들의 방어 계획은 이 투쟁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인 소비에트에 의존했다. 결의문은 소비에트가 대중 사이에 지위를 강화할 것을 요구했다. 실제 권력이 이미 소비에트였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이것을 결코 손에서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수립된 혁명위원회는 행동을 개시할 준비를 해야한다. "다가오는 위험에 대한 투쟁에서 모든 소비에트의 행동을 통일시키고 조정하고 혁명권력의 조직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즉시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소집해야한다." 이렇게 자기방어 결의문은 정부를 타도할 필요성을 곧바로 제기했다. 이 주요한 정치적 임무를 위해 지금부터 봉기의 순간까지 선동이 수행될 것이다.

소비에트에서 파견한 민주협의회 대의원들은 다음날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소비에트 전국대회 문제를 제기했다. 볼세비키당은 대회가 2주일 내에 소집될 것을 요구했으며 이 목적을 위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 기초한 특별조직을 구성하겠다고 제안이 아닌 위협을 했다. 사실 이들은 구 중앙집행위원회가 대회를 소집하기를 더 원했다. 이렇게 될 경우 대회의 법적 권리에 대한 분쟁이 필요 없을 것이고 화해주의자 자신들의 협력을 통해 이들을 타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반정도 위장된 볼세비키당의 위협은 효과적이었다. 소비에트의 합법성을 깰 위험을 무릅쓰지 않은 채 중앙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임무를 어느 누구에게도 양도하지 않는다. 전국대회는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10월 20일로 소집일자가 공고되었다.

그러나 지방 대의원들이 떠나자마자 중앙집행위원회 지도자들은 갑자기 대회 일자가 부적절하다는 사실에 눈을 떴다: 지역 당 활동가들의 제헌의회 선거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결국 제헌의회 구도에 해를 끼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진짜 두려움은 대회가 권력을 막강하게 요구할 것이라는 점에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점에 대해 외교적 침묵을 지켰다. 9월 26일 단은 필요한 준비에는 개의치 않고 중앙집행위원회 사무국에 대회 연기안을 서둘러 상정했다.

이 민주주의 약장사들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이들은 바로 전에 자신들이 올렸던 입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를 거부하는 민주협의회 결의문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이제 이들은 소비에트에 대한 오만한 경멸을 드러내어 자기들이 기초하고 있었던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부터 무시했다. 이들이 부르주아 계급과의 동맹을 파기하지 않은 채 소비에트를 지지하는 수천만의 노동자, 병사, 농민들의 희망과 요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트로츠키는 단의 제안에 이렇게 응답했다: 규약을 통해서가 아니면 혁명을 통해서라도 대회는 소집될 것이다. 보통 순종적이었던 소비에트 사무국은 이번에는 소비에트 쿠데타를 거부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이 조그만 패배 때문에 무기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이와 반대로 이들은 더욱 자극 받은 것 같았다. 단은 중앙집행위원회의 군대 부문에서 영향력 있는 지지를 얻었다. 이 부문은 전국대회가 소집되어야 하는지 즉 소비에트의 최고 기구에서 두 번이나 채택된 결정을 집행할 것인지에 대해 전선 조직들에게 "문의"하기로 결정했다. 이 동안 화해주의 언론은 대회 반대 캠페인을 시작했다. 특히 사회혁명당은 미친 듯이 이 일에 매달렸다. 디옐로 나로다(인민의 대의)지는 이렇게 적었다: "대회는 소집되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대회는 권력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할 말이 있을 수 없다....케렌스키 정부는 어떤 경우든 소비에트의 결정에 복종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라고 레닌은 물었다. "소비에트 권력, 노동자 농민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소수 민족 학살자들, 유태인 학살자들, 왕당파와 입헌민주당 등을 따르기 위해 디옐로 나로다 지는 이 권력을 트로츠키와 레닌의 권력이라고 부른다."

한편 농민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대회 소집을 "위험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선언했다. 이렇게 악의의 혼란이 소비에트 상층부를 지배하고 있었다. 전국을 순회하고 있던 화해주의 정당들의 대의원들은 소비에트 최고기구가 공식적으로 소집한 대회를 반대하는 지역조직들을 동원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공식 기관지 이즈베스티아 지는 매일 매일 화해주의 지도자들이 요청하여 채택한 대회 반대 결의안을 실었다. 결의안들의 이름은 매우 거창했다. 이들은 3월의 망령들로부터 전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이즈베스티아 지는 주요 논문에서 소비에트가 임시 바리케이드이며 제헌의회가 "새로운 체제의 구조물"을 완성하는 순간 이 바리케이드는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은 대회 반대 선동에 대해 확실히 준비되어 있었다. 9월 24일 당중앙위원회는 중앙집행위원회의 어떤 행동에도 개의치 않고 지역 소비에트와 전선 조직들을 통해 아래로부터 대회 소집 캠페인을 시작하기로 결정했었다. 당은 대회를 사보타지 하는 중앙집행위원회 공식 위원회에 참석하도록 스베르들로프를 임명했다. 그의 지도를 받아 당 지역 조직들이 가동되었고 이들을 통해 소비에트들도 가동되었다. 27일 레발의 모든 혁명 조직들은 이렇게 요구했다: 예비의회가 즉시 해산되고 정부 구성을 위한 소비에트 협의회가 즉시 소집되어야한다. 더욱이 이들은 "성채의 모든 역량과 도구들을 동원하여" 협의회를 지지하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했다. 모스크바 지구들을 시작으로 다수의 지역 소비에트들은 소비에트에 충성하지 않는 중앙집행위원회의 대회 소집 권한을 박탈할 것을 제안했다. 대회를 반대하는 군대 위원회의 결의문들에 반대하여 대회 소집을 요구하는 결의문들이 대대, 연대, 군단, 지역 주둔군 등에서 올라왔다. 우랄지역 키슈틴의 병사 집회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에트 대회는 권력을 잡아야 하며 어떤 행동도 마다하지 말아야한다." 노브고로드 도의 병사들은 농민들에게 이렇게 촉구했다: 대회에 참석하고 농민 집행위원회의 결의안에 관심을 두지 말라. 또한 나라의 가장 먼 구석에 있는 도와 군 소비에트, 공장, 광산, 연대, 드레드노트 군함, 구축함, 전쟁 병원, 집회, 뻬쩨르부르그의 자동차 부대, 모스크바의 앰뷸런스 부대 등은 모두 임시정부를 제거하고 권력을 소비에트로 넘기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 선동 캠페인에 만족하지 못한 채 볼세비키당은 23개 지구의 150명 대의원으로 구성된 북부지역 소비에트 대회를 소집하여 중요한 조직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것은 잘 계산된 타격이었다! 소소한 일을 잘 챙기는 지도자들이 있는 중앙집행위원회는 북부지역 소비에트 대회를 사적인 협의회라고 선언했다. 몇몇의 멘세비키 대의원들은 대회 준비 작업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정보의 목적을 위해" 남아있었다. 뻬쩨르부르그와 그 교외, 모스크바, 크론슈타트, 헬싱키, 레발 즉 두 수도와 해군 성채, 발트해 함대와 뻬쩨르부르그 인근의 주둔군 등의 소비에트가 대표된 전국대회의 의의를 조금이라도 깎아 내릴 수 있을 것처럼 이들은 행동했다. 군사적 색채가 의도적으로 주어진 안토노프가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개막했다. 해군 소위 크릴렌코는 대회 의장을 맡았다. 그는 전선에서 활동하는 당의 최고 선동가였으며 미래 볼세비키 정권의 사령관이었다. 트로츠키가 발표한 정치보고의 중심에는 수도의 혁명 연대들을 제거하려는 정부의 새로운 시도가 폭로되었다: 대회는 "수도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소비에트의 목을 조르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문제는 권력의 근본문제의 한 요소였다. "모든 인민이 볼세비키당에게 표를 주고 있다; 인민은 우리를 신뢰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권력을 장악할 권한을 주었다." 트로츠키가 제안한 결의안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정부의 문제가 모든 소비에트들이 결연하게 만장일치로 거리로 나오는 것에 의해서만 결정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거의 위장되지 않은 봉기를 촉구하는 이 결의안은 3표의 기권을 제외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다.

라쉐비치는 다른 소비에트들이 뻬쩨르부르그의 모범을 따라 지역 주둔군을 장악하라고 촉구했다. 라트비아의 대의원 페테르손은 소비에트 대회를 방어하기 위해 4만 명의 라트비아 명사수들을 동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열광적으로 환영받은 그의 발언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로부터 며칠 밖에 지나지 않아 라트비아 연대 소비에트는 이렇게 발표했다: "인민봉기만이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13일 군함들의 라디오 방송 시설들은 소비에트 전국 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북부지역 대회의 촉구를 전국에 방송했다 "병사, 수병, 농민, 노동자들이여! 모든 장애물들을 극복하는 것이 여러분들의 임무이다..."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북부지역 대회의 볼세비키 대의원들에게 임박한 소비에트 전국대회 참석을 위해 뻬쩨르부르그를 떠나지 말 것을 제안했다. 대회가 선출한 사무국의 지시에 따라 개별 대의원들은 군대 조직들과 지역 소비에트로 가서 보고를 했다. 다른 말로 하면 지방의 봉기 준비를 지원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 기초하여 군함의 라디오 방송시설을 통해 전국과 대화를 나누면서, 대회 소집 문제에 대해 낡아빠진 소비에트의 최고 기구를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강력한 기구가 중앙집행위원회와 나란히 등장했다. 사소한 조직적 술수도 화해주의자들에게는 이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대회 소집을 둘러싼 투쟁은 지역에서 소비에트의 볼세비키화에 마지막 추진력을 제공했다. 스몰렌스크와 같은 다수의 후진 도에서 볼세비키당은 혼자 또는 사회혁명당 좌파와 함께 대회 소집을 위한 투쟁 과정 도중에 또는 직후 대회 대의원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다수를 장악했다. 심지어 시베리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도 볼세비키당은 10월 중반에 사회혁명당 좌파와 함께 영구 다수파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당은 지역 소비에트들에게 쉽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15일에 키에프 소비에트는 찬성 159표, 반대 28표, 기권 3표로 당면한 소비에트 대회를 "권력 기관"으로 인정했다. 16일에 민스크 즉 서부 전선의 중심에서 개최된 북서지역 소비에트 대회는 전국 소비에트 대회 소집을 미룰 수 없다고 선언했다. 18일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전국대회에 보낼 대의원들의 선거를 실시했다; 볼세비키당 대의원 명부(트로츠키, 카메네프, 볼로다르스키, 유레네프, 라쉐비치)는 443표를 얻었으며 사회혁명당 대의원 명부는 162표를 얻었다. 사회혁명당 대의원 명부에는 사회혁명당 좌파의 이름만이 올랐다. 이들은 볼세비키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한편 멘세비키당 명부는 44표의 지지를 얻었다. 110명 대의원 가운데 80명이 볼세비키였던 우랄지역 소비에트 대회에는 크레틴스키가 의장이었다. 이 대회는 223,900 명의 조직 노동자와 병사들을 대표하여 이렇게 요구했다: 약속된 날짜에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개최되어야한다. 19일 같은 날에 전국에서 노동계급을 가장 직접적이고 의심의 여지없이 대표하는 공장위원회 전국 협의회가 즉시 소비에트로 권력이 이전될 것을 요구했다. 20일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는 이렇게 선언했다: 지방의 모든 소비에트들이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공개적이고 가차없는 투쟁을 전개해야한다." 또한 지역의 산업 및 행정 문제들을 독자적으로 소비에트들이 해결할 것을 촉구했다. 지역 정부 당국을 타도할 것을 촉구한 이 결의안에는 반대 1표, 기권 1표가 나왔다. 22일 볼세비키당 신문은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하는 56개 조직의 새 명부를 발표했다. 이들은 모두 진정한 인민 대중 그리고 상당한 정도 무장 대중을 대표하고 있었다.

다가올 혁명의 부대들이 이렇게 강력하게 출석 점검되었으나 단은 중앙집행위원회 사무국에 이렇게 보고했다: 917개의 소비에트 조직들 가운데 50개만이 대의원을 보내는데 동의했으며 더욱이 "조금의 열성도 없이" 동의했다. 자신의 감정을 중앙집행위원회에 보고할 필요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한 몇몇 소비에트들은 전국대회를 시큰둥하게 바라보았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지역 소비에트와 군대 위원회의 압도적 다수는 중앙집행위원회를 아예 무시해버렸기 때문이었다.

대회를 사보타지하려는 노력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고 손상시켰지만 화해주의자들은 이 일을 끝까지 밀어붙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대회를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완전히 명백해지자 이들은 완전히 입장을 바꾸어 볼세비키당에 다수를 넘겨주지 않기 위해 모든 지역 조직들이 대의원을 선출하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너무 늦게 상황을 파악한 중앙집행위원회는 약속한 날짜를 겨우 2, 3일 남겨놓고 대회를 10월 25일로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해주의자들의 마지막 술수 덕분에 2월 체제와 부르주아 사회는 예상 밖으로 유예기간을 얻었다. 그러나 이로부터 실질적인 혜택은 전혀 없었다. 더욱이 볼세비키들은 남은 5일을 크게 이용했다. 나중에 혁명의 적들은 이 점을 인정했다. 밀류코프는 말한다: "무엇보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볼세비키당은 소집 연기를 이용했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의 여러 부대 집회에 트로츠키가 출연했다. 그가 조성한 분위기는 다음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세메노프스키 연대에서 그의 다음 연설예정자였던 집행위원회 위원 스코벨레프와 고츠는 연설을 할 수 없었다. 청중이 이들의 연설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혁명의 역사에서 나쁜 징조를 상징하는 세메노프스키 연대가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간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의의가 있었다. 1905년 12월 모스크바의 봉기를 진압한 주역이 바로 세메노프스키 연대였다. 연대장 민 장군은 이렇게 명령을 내린 바 있었다: "포로로 생포하지 말고 전부 죽여라." 모스크바-골루트비노 철도 구역에서 이 연대는 150명의 노동자와 서기들을 사살했다. 영웅적 행위를 했다고 짜르의 아첨을 받은 민 장군은 1906년 가을 사회혁명당 여성 코노플리아니코바에 의해 암살되었다. 이 오래된 전통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에 세메노프스키 연대는 근위병 부대 다수들보다 오래 자신의 보수성을 고수했다. "믿음직함"의 명성이 너무 강해서 스코벨레프와 고츠의 서글픈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끈질기게 봉기 직전과 직후까지 이 연대를 믿었다.

민주협의회와 10월 혁명 사이 5주일 동안 내내 소비에트 대회 문제는 중심적 정치문제였다. 민주협의회에서 볼세비키당의 선언문은 다가올 소비에트 대회를 나라의 주권 기관이라고 선언했었다. "현 민주협의회의 결정과 제안들 가운데 노동자 농민 병사 소비에트 전국대회에서 인준되는 것들만이 실현될 수 있다." 당중앙위원회 반수의 반대를 받고 반수의 지지를 받은 예비의회 불참지지 결의문은 이렇게 선언했다: "당이 예비의회에 참석하는 문제를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혁명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채택하는 조치들에 직접 종속시킨다." 이 시기 볼세비키당 문서들은 거의 예외 없이 소비에트 대회에 호소했다.

농민 전쟁이 불붙고 있었다. 민족해방 운동이 처절한 수위에 이르고 있었다. 나라의 붕괴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전선이 붕괴되고 있었다. 정부가 와해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소비에트는 창조적 세력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었다. 모든 문제는 권력의 문제로 전환되었으며 권력 문제는 곧바로 소비에트 대회로 연결되었다. 대회는 모든 문제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해야했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제헌의회의 문제도 있었다.

제헌의회 구호를 철회한 정당은 하나도 없었다. 볼세비키당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지난 15년 동안 대중의 영웅적 투쟁으로 채색된 이 가장 민주적인 구호는 혁명이 진행되면서 거의 느낄 수 없을 정도로 퇴색되어 있었다. 또한 어느 정도 맷돌에 갈려서 빈 껍질이 되었으며 내용이 없는 형식에 불과했으며 전망이 없는 전통이 되어 있었다. 이 변질 과정은 전혀 신비롭지 않았다. 혁명이 진전되면서 사회의 두 기본 계급인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직접적 권력 장악 투쟁이 임박했다. 제헌의회는 어느 쪽에게도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급은 이 싸움에서 보충적이며 부차적인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어떤 경우든 스스로 권력을 잡을 능력이 없었다. 지난 몇 달이 증명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었다. 그러나 제헌의회에서 소부르주아 계급은 아직도 다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들은 다수를 획득했다. 그러면 무슨 목적을 위해 다수를 획득했는가? 다수를 가지고 무엇을 할 지를 모르는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 현상은 깊은 역사적 위기의 시기에 형식적 민주주의가 정치적으로 파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 전투가 있기 전날까지 어느 진영도 아직 제헌의회의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로써 전통은 자신의 위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사실 부르주아 계급은 제헌의회에서 코르닐로프 쿠데타로 볼세비키당은 제헌의회에서 소비에트 대회로 이미 목표를 바꾼 뒤였다.

자신 있게 이렇게 가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민의 상당한 부위 그리고 심지어는 볼세비키당의 적은 부위는 소비에트 전국대회의 나름의 헌법적 환상들에 기대었다. 즉 이들은 연립정부로부터 권력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고통이 없이 소비에트로 이전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이 행복한 상황을 소비에트 대회와 연상시켰다. 실제로는 무력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표결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오직 무장 봉기만이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거대한 인민운동 심지어는 가장 현실적인 운동에도 환상이 불가피하게 따라다닌다. 이 환상들 가운데 소비에트 "의회주의" 환상은 모든 상황들을 다 조합해도 가장 위험이 적은 환상이었다. 소비에트는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욱더 무력에 계속 의존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역에서는 정부가 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대회를 투쟁으로 쟁취하고 있었다. 따라서 헌법적 환상은 거의 존재할 장소가 없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환상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은 투쟁과정에서 쓸려가 버렸다.                               

전국 노동자와 병사들의 혁명적 노력을 조정하고, 이들에게 단 하나의 목표를 제시하고, 목표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단일한 행동 날짜를 제시하는데 소비에트 대회 구호가 필요했다. 동시에 이 구호를 통해 반(半)음모적 반(半)공개적 봉기 준비에 노동자 병사 농민의 합법적 대표체인 소비에트를 은폐물로 이용할 수 있었다. 이렇게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혁명 역량의 결집을 촉진하면서 혁명의 결과를 사후 승인했다. 또한 인민이 보기에 비난할 수 없는 형식을 새 정부에 부여했다.

 

 

제 4장 군사혁명위원회

7월말 경부터 대중의 정서는 좌로 급격히 기울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재조직된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을 8월 내내 장악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은 무장이 해제되었다. 혁명 노동자로 구성된 적위대가 보유한 무기는 소총 수천 정에 불과했다. 대중이 다시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오고 있었으나 이 상황에서 봉기를 일으킬 경우 잔인하게 패배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9월에 걸쳐 상황이 서서히 바뀌었다. 코르닐로프 반란 이후 주둔군에 대한 화해주의자들의 영향력은 급속히 상실되었다. 볼세비키당에 대한 불신은 공감으로 또는 최악의 경우에도 주시하는 중립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공감은 적극적이지 않았다. 주둔군은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으며 농민이 늘 그렇듯이 의심이 많았다. 볼세비키들이 우리를 속이지 않을까? 우리에게 진짜 평화와 토지를 가져다 줄까? 대다수의 병사들은 자기 목적을 위해 볼세비키당의 깃발 아래 투쟁할 생각이 아직 없었다. 그리고 주둔군에는 볼세비키당에 적대적이어서 동화가 거의 불가능한 분자들도 있었다. 5천 명에서 6천 명 정도의 사관생도들, 카자흐 3개 연대, 자전거 일개 대대, 장갑차 일개 대대 등이 이들이었다. 따라서 9월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믿을만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상황을 더 유리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져 좋은 본보기가 하나 더 제공되었다. 이를 통해 뻬쩨르부르그 병사들의 운명이 혁명 그리고 볼세비키당의 운명과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군대나 경찰 등 무장 억압기구를 장악하는 권리는 국가권력의 기본권이다. 2월 혁명 직후 집행위원회는 인민에게 임시정부를 강요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2월 봉기에 참여한 부대들을 무장 해제시키거나 수도 밖으로 이동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해서 이중권력과 근본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이중군사력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4월 시위, 7월 시기, 코르닐로프 반란의 준비와 붕괴 등 주요 정치 소용돌이는 수도의 주둔군을 장악하는 문제를 불가피하게 제기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둘러싼 정부와 화해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결국 집안 다툼에 불과했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끝났다. 그런데 볼세비키당이 주둔군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상황은 달라졌다. 정부가 3월에 집행위원회에 약속한 것을 이후 어겼다는 것을 이제 병사들은 기억하기 시작했다. 9월 8일 소비에트 병사 부문은 이렇게 요구했다: 7월 사건에 연루되어 전선으로 이동된 수도의 연대들을 복귀시켜라. 연립정부의 장관들이 나머지 연대들을 이동시키려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을 때 이 요구가 제출되었다.

여러 지방 도시들에서도 수도와 거의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7월과 8월에 지역 주둔군은 애국주의로 재무장되었다. 그리고 8월과 9월에 이들은 다시 볼세비키당 지지로 돌아섰다. 그래서 정부는 다시 시작하는 것 즉 다시 한번 부대들을 이동시키고 재배치하는 것이 필요했다. 수도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정부는 지방부터 시작했다. 정부의 정치적 동기는 군사적 전략이라는 핑계로 조심스럽게 은폐되었다. 9월 27일 탈린(역자 주: 에스토니아의 수도. 독일어로는 레발이라고 한다)의 시가지와 요새 소비에트 합동회의는 부대 이동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사전에 해당 소비에트가 동의할 경우에만 부대 이동을 수락한다. 블라디미르의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주둔군 전체를 이동시키라는 케렌스키의 명령을 이행할 필요가 있는 지에 대해 모스크바에 문의했다. 볼세비키당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은 이렇게 말했다: "이런 식의 명령들이 체계적으로 혁명 연대들에게 내려지고 있다." 임시정부는 모든 권한을 넘기더라도 정부의 기본권인 군대를 지휘할 권한만은 놓지 않으려 했다.

수도 주둔군의 이동 문제는 더욱 시급했다. 왜냐하면 임박한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권력 투쟁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결정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입헌민주당 기관지 레치(말) 지를 비롯한 부르주아 언론은 매일 아침마다 이렇게 주장하고 있었다: "볼세비키당이 내전을 선언할 시간을 정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이것은 적당한 때에 볼세비키당을 공격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바로 이 때문에 지배계급들은 주둔군을 이동시켜 역관계를 유리하게 변화시키려고 했다. 리가와 문순트 제도가 함락된 후 군사 전략적 고려에서 나온 주장들은 설득력이 충분해 보였다. 수도의 지구 사령부는 전선의 공세를 준비하기 위해 수도의 부대들을 재배치하라고 명령했다. 동시에 화해주의자들이 주도하여 이 문제는 소비에트 병사 부문의 의제로 올랐다. 적들의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소비에트에게 단호한 전략을 요구한다; 볼세비키당의 군사적 지지기반을 가로챈다; 소비에트가 저항할 경우 보충부대, 지원 부대 등이 필요한 전선 부대들과 수도 주둔군 사이에 격렬한 충돌을 부추긴다.

자기 앞에 설치된 덫의 성격을 아주 잘 알고 있던 소비에트 지도자들은 돌이킬 수 없는 조치를 취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상황을 탐지하기로 결정했다. 수도 주둔군이 정부의 명령을 거부하는 동기를 전선 부대들이 올바로 이해해야했다. 이럴 경우에만 주둔군은 정부의 명령을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선 부대들과 합의하여 휴식이 필요한 전선의 혁명 연대를 수도의 일부 부대와 교대시키는 것이 좀더 유리할 지도 몰랐다. 위에서 언급된 탈린 소비에트의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것이었다.

병사들은 이 문제를 좀더 거칠게 접근했다: 가을이 한창인데 전선에서 공세를 취한다고?; 이번 겨울에 전투를 한다고?; 아니다. 고통으로 찌든 병사들은 전투 따위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애국주의 언론은 즉시 주둔군을 비난하고 나섰다: 놀면서 살이 오른 수도의 연대들이 전선의 부대들을 배신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병사들 편을 들었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연대의 이동에 항의했다. 이때부터 이 문제는 병영이나 공장에서 언제나 회의 안건에 올랐다. 이로 인해 소비에트의 노동자 부문과 병사 부문이 서로 단결했다. 연대들은 노동자들의 무장 요구를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해주었다.

화해주의자들은 수도가 함락될지도 모른다고 위협하면서 대중의 애국주의를 불붙이려고 했다. 이들은 10월 9일 소비에트에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올렸다: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 수도를 방어할 "혁명수호위원회"를 수립하자. 소비에트는 "소위 임시정부의 전략 그리고 특히 수도에서 혁명 연대들을 제거하는 일"에 책임을 지기를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혁명 연대의 제거에 대한 임시정부의 명령에 대해 서둘러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이 명령의 저의와 이 명령이 근거한 사실들을 파악하기로 결정했다. 멘세비키들은 항의했다: 전쟁 지휘부의 명령에 개입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들은 한달 보름 전에도 코르닐로프의 반란 명령에 대해 이와 똑같은 말을 했었다. 볼세비키들은 이들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켰다. 수도에서 부대를 이동시키는 것이 군사적인 고려인지 정치적 고려인지를 판단할 능력 있는 기구가 필요했다. 볼세비키당이 "혁명수호위원회"에 동의하자 화해주의자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위원회는 수도 방어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수집할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조치였다. 볼세비키들은 적들의 손에서 혁명수호위원회라는 위험한 무기를 탈취했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들이 장악한 소비에트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그리고 정부와 화해주의자들의 의도에 반대하여 부대 이동을 결정할 힘을 갖게 되었다.

군사문제를 다루는 위원회 수립에 대한 멘세비키당의 생각을 볼세비키당은 아주 자연스럽게 자기 것으로 채택했다. 임박한 봉기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권위 있는 소비에트 위원회를 적절한 순간에 수립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이미 충분히 논의했기 때문이었다. 당의 군사기구는 이런 기구에 대한 계획을 이미 작성해 놓고 있었다. 이들이 아직 극복하지 못한 하나의 어려움은 이것이었다: 봉기를 지도하는 기구를 선거와 공개성을 핵심으로 하는 소비에트와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더욱이 소비에트에는 적대 정당들의 대표들이 앉아있었다. 따라서 멘세비키당의 애국주의적인 혁명수호위원회 수립 결의안은 아주 적절한 때에 제기된 셈이었다. 이 안은 혁명의 가장 중요한 지렛대가 될 혁명본부 수립을 도왔다. 혁명수호위원회는 "군사혁명위원회"로 이름이 곧 바뀔 것이다.

이 사건들이 일어난 지 2년 후에 필자는 10월 혁명에 바치는 논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전쟁 총사령부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 수도의 군대를 제거하는 명령을 내리자마자...좀더 진전될 경우 이 문제가 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의의를 갖게 되리라는 것이 명확해졌다." 봉기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 순간부터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소비에트 기구를 고안할 필요는 더 이상 없었다. 위에서 언급한 10월 9일의 예비의회 연단에서 트로츠키는 볼세비키당의 예비의회 철수에 대한 보고를 "혁명 권력을 위한 전국의 직접적 공개적 투쟁 만세!"라고 외치면서 끝냈다. 바로 이 순간에 곧 수립될 위원회의 진짜 목적이 명확히 표현되었다. 이 외침은 "무장봉기 만세!" 구호를 소비에트의 합법적 언어로 표현한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인 10일에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는 비밀회의에서 무장봉기를 당면 임무로 제기한 레닌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순간부터 당은 명확하고 단호한 투쟁 형태를 갖추었다. 권력을 향한 당의 당면 투쟁 계획에 혁명수호위원회 수립이 포함되었다.

정부와 그 동맹세력은 수도의 주둔군을 동심원으로 포위했다. 11일에 북부전선의 사령관 체레미소프 장군은 전쟁장관에게 군대 위원회의 요구사항을 보고했다: 피곤에 지친 전선의 부대들은 후방 뻬쩨르부르그의 부대들로 교체되어야한다. 이때 전쟁 총사령부는 군대 위원회의 화해주의자들과 수도의 화해주의 지도자들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전달 벨트에 불과했다. 수도의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케렌스키의 계획에 넓은 위장 막을 쳐주려고 애쓰고 있었다. 이 포위 작전에 연립정부의 언론은 애국주의 헛소리의 교향곡으로 반주를 맞추었다. 그러나 연대와 공장의 일일 집회는 지배 집단의 음악이 아래에서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12일에 수도의 가장 혁명적인 공장 가운데 하나인 구 파르비아이넨 공장의 노동자 집회는 부르주아들의 공격에 이렇게 응수했다: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거리로 나설 것을 선언한다. 우리는 임박한 투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승리를 자신한다."

"혁명수호위원회"의 규약 작성 소위원회를 수립하면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이 군사기구의 임무를 이렇게 규정했다: 군사적 상황을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들을 취하기 위해 북부전선, 뻬쩨르부르그 지구 사령부, 발트해 함대 중앙위원회, 핀란드 지역 소비에트 등과 연락을 취한다; 뻬쩨르부르그와 인근 주둔군의 인적 사항 및 탄약과 군 보급품 등의 실태를 조사한다; 병사와 노동자 대중의 규율 유지를 위한 조치를 취한다. 이 규정은 모든 것을 포괄하면서 동시에 애매했으며 수도 방어와 무장봉기 사이에서 곡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호 배제적이었던 이 두 임무는 이제 실제적으로 합쳐지고 있었다. 이제 실질적으로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수도를 군사적으로 방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수도를 방어한다면서 무장봉기를 위장한 요소는 서둘러 도입된 것이 아니라 봉기 이전의 조건에 의해 어느 정도 자동적으로 제공되었다.

그럴싸하게 위장하기 위해 볼세비키가 아니라 사회혁명당원이 "혁명수호위원회"의 의장으로 앉혀졌다. 그는 젊고 겸손한 행정 감독관 라지미르였다. 그는 봉기 이전에 이미 볼세비키당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으나 사태가 어느 방향으로 전개될 지를 항상 예측하지는 못했던 사회혁명당 좌파였다. 라지미르가 사전에 제출한 활동계획 초안을 트로츠키는 두 방향에서 수정했다. 이 결과 주둔군 장악과 관련된 실제 계획들은 좀더 명확히 규정되었으나 혁명의 전반적 목표는 더 애매하게 설정되었다. 두 명의 멘세비키가 항의했으나 집행위원회는 이 초안을 인준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병사부문의 각 최고회의, 발트해 함대 대표들, 핀란드 지역 위원회 대표들, 철도 노동조합 대표들, 공장위원회 대표들, 노동조합, 당 군사기구들, 적위대 등이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위원회의 조직 기반은 다수의 다른 기구들과 같았으나 인적 구성은 새로운 임무에 맞추어졌다. 조직들은 군사문제에 익숙하거나 주둔군 근처에 있는 자들을 대표로 보내기로 되어있었다. 기구의 기능은 그 성격에 따라 정해져야했다.

이 시기에 수립된 또 하나의 새 기구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못지 않게 중요했다. 이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주둔군 상설협의회가 구성되었다. 소비에트 병사 부문은 주둔군을 정치적으로 대표했으며 이 부문의 대의원은 당 소속별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주둔군 상설협의회는 부대의 일상생활을 지도하는 연대위원회로 구성되었으며 좀더 직접적으로 실제적인 "동업조합(길드)"이었다. 공장위원회가 공장의 노동자 전부를 대표한 것처럼 연대위원회는 부대의 병사 전부를 대표했다. 소비에트 노동자 부문의 중재를 통해 볼세비키당은 주요한 정치적 문제들과 관련하여 노동자들의 지지를 자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장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공장위원회를 장악하는 것이 필요했다. 소비에트 병사 부문을 통해 볼세비키당은 주둔군 다수의 정치적 공감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부대를 실제로 동원하기 위해서는 연대위원회에 직접 의존해야했다. 봉기 직전에 주둔군 상설협의회가 병사부문을 밀어내고 무대의 중심을 차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다만 병사 부문의 지도적 대의원들은 당연히 상설협의회에 속했다.

이 시기 직전에 작성한 논문 [위기는 무르익었다]에서 레닌은 질책하듯이 이렇게 질문했다: "당에 대한 군대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당은 무엇을 했는가?" 당 군사기구의 헌신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레닌의 질책은 정당했다. 군대의 역량과 물자를 엄격히 군사적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당이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대에 대해서 작업을 하는 사고의 습관과 접근방식이 부재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주둔군 상설협의회가 구성되는 순간 역전되었다. 이제부터 수도 및 인근 주둔군의 생생한 현장이 지도자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12일에 집행위원회는 라지미르의 소위원회가 작성한 규약 초안을 검토했다. 비밀회의였으나 토론은 어느 정도 애매한 언어로 진행되었다. "이 회의에서 말의 겉 뜻과 속뜻이 달랐다"고 수하노프는 정당하게 적고 있다. 규약은 군사혁명위원회 산하에 방위, 물자 보급, 통신, 정보 등을 담당하는 부서를 두었다. 위원회는 사령부 또는 반(反)사령부였다. 주둔군 상설협의회의 목적이 주둔군의 전투력 증진에 있다고 규약이 선언했다. 이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그러나 전투력은 무장봉기에 적용될 수도 있었다. 멘세비키들은 무기력하게 분노를 터뜨리면서 회의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애국주의 목적으로 이들이 제출한 아이디어는 봉기 준비를 위장하는 것으로 전용되고 있었다. 위장을 눈치채기는 결코 불가능하지 않았다. 무슨 논의가 진행 중인지를 모두 다 알고 있었다. 그러나 논의의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었다. 화해주의자들도 한때 이와 똑같이 행동하지 않았는가? 결정적 순간에 이들은 주둔군을 결집시키고 정부기구와 병존하는 주권기구들을 수립했었다. 볼세비키당은 말하자면 이중권력의 전통을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다만 이 오랜 전통에 새로운 내용을 불어넣고 있을 뿐이었다. 전에는 화해의 목적에 봉사했던 활동이 이제는 내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멘세비키들은 자신들이 이 활동 전부를 반대한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라고 요구했다. 실제적인 의미가 전혀 없는 이 관념적 요구는 수락되었다.

다음날 군사혁명위원회와 주둔군 상설협의회 문제가 소비에트 병사 부문에 의해 논의되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 부문은 화해주의자들을 구조했으나 지금은 이들을 익사시켰다. 이 대단히 중요한 회의의 중심인물은 합당하게 발트해 함대 중앙위원회 의장인 디벤코 수병이었다. 그는 검은 턱수염을 한 거인으로 화술이 유창했다. 헬싱키에서 온 이 손님의 연설은 살을 애는 신선한 바닷바람처럼 주둔군의 정체된 분위기와 정면 충돌했다. 그는 발트해 함대와 정부의 최종적 결별 그리고 함대 지휘부에 대한 수병들의 새로운 태도 등에 대해 말했다. 최근의 해상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함대 제독은 당시 회기 중이었던 수병 대회에게 이렇게 질문했다: 수병들은 명령을 수행할 것인가? 우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다. 다만 명령에 대한 감독은 우리가 한다. 그러나...함대가 패배할 것 같이 보이면 지휘부가 제일 먼저 돛대에 목이 매달릴 것이다." 뻬쩨르부르그 주둔군에게 이것은 새로운 언어였다. 함대에서도 이렇게 상황이 바뀐 지는 며칠 되지 않았다. 이것은 봉기의 언어였다. 멘세비키들은 작은 집단이 되어 구석에 처박힌 채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불평이나 늘어놓았다. 최고회의는 병사들의 회색 외투가 밀집된 곳을 놀라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병사들은 디벤코의 말에 전혀 항의를 하지 않았다! 이들의 흥분된 얼굴에 박힌 눈은 불타는 석탄 덩어리처럼 이글거렸다. 봉기를 일으키려는 대담한 분위기가 회의장을 지배했다.

결국 회의 참석자 전부의 공감에 자극 받아 디벤코는 자신 있게 외쳤다: "뻬쩨르부르그로 통하는 길 특히 탈린을 방어하기 위해 수도의 주둔군들을 이동시킨다고 말들이 많다. 그러나 이 말을 절대 믿지 말아야한다. 탈린은 우리가 지킬 것이다. 여러분들은 여기 그대로 남아 혁명의 이익을 방어해야한다....여러분의 지원이 필요하면 우리가 직접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은 우리를 지원해 줄 것이라고 자신한다." 병사들의 정서와 완전히 일치한 이 도전적 발언에 회의장은 진정 열정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이 속에서 몇몇 멘세비키들의 항의는 열광의 소음 속에 완전히 파묻혀 버렸다. 이 순간부터 수도의 연대들을 이동시키는 문제는 완전히 정리되었다.

라지미르가 제안한 군사혁명위원회 규약은 찬성 283표, 반대 1표, 기권 23표로 통과되었다. 볼세비키들도 예상치 못한 이 압도적 표결은 혁명 대중의 압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하게 했다. 이 표결을 통해 소비에트 병사 부문은 주둔군의 관리를 공개적이고 공식적 방식으로 전쟁 총사령부에서 군사혁명위원회로 이관시켰다. 이것이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란 것을 나중의 사건들이 보여주었다.

같은 날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자신이 지도하는 적위대 특별부의 구성을 공포했다. 화해주의자들이 게을리 하고 방해했던 노동자 무장이 볼세비키 소비에트의 가장 중요한 임무가 되었다. 적위대에 대한 병사들의 의심쩍은 태도는 먼 과거의 일이었다. 이와 반대로 연대들이 채택한 결의문 거의 전부는 노동자 무장을 요구했다. 지금부터 적위대와 주둔군은 함께 존재했다. 곧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의 지도를 통해 더욱 밀접하게 단결할 것이다.       

정부는 걱정하고 있었다. 14일 아침 케렌스키의 집무실에서 국무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이 준비중인 "가두 시위"에 반대하는 전쟁 총사령부의 조치들을 승인했다. 이들은 추측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무장 시위로 그칠까 아니면 봉기까지 갈 것인가? 지구 사령관은 언론의 대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다." 죽을 운명에 처한 자들이 죽기 직전에 활력을 느끼는 경우가 자주 있다.

집행위원회 합동회의에서 단은 코커서스로 피신해 있는 체레텔리의 6월 어조를 모방하여 이렇게 질문하면서 볼세비키당의 답변을 요구했다: 가두로 나설 것인가? 그렇다면 언제 나설 것인가? 리아자노프의 대답을 듣고 멘세비키 보그다노프는 합당한 결론에 도달했다: 볼세비키당은 봉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지도할 것이다. 멘세비키 신문은 이렇게 적었다: "그리고 볼세비키당은 임박한 '권력 장악'을 위해 주둔군의 계속 주둔을 원하고 있는 것이 명백하다." 그러나 이 말에서 "권력 장악"이라는 표현은 인용부호로 표시되어 있다. 화해주의자들은 아직도 이 위험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이들은 볼세비키당의 승리보다는 새로운 내전의 결과 반혁명이 승리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노동자들의 무장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소비에트는 무기가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즉시 한꺼번에 무기를 찾아내지는 못했다. 여기서도 대중은 하나 하나의 실제적 조치들을 제안했다. 이들의 제안을 주의 깊게 듣기만 하면 해답이 나왔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4년 후 10월 혁명을 회상하는 저녁 행사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단이 와서 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우리는 무기고를 장악하지 못했다.' 그러자 이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세스트로레츠스크 무기공장에 갔다왔다.' '그런가? 그러면 어떻게 되었는가?' '소비에트가 명령한다면 공장 노동자들이 무기를 배달하겠다고 말했소.' 그래서 나는 소총 5천 정을 달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바로 그날 무기를 소지했다. 이것이 첫 실험이었다." 그러자 보석금을 내고 감옥에서 풀려난 국가반역 사범이 명령을 내려 정부 소유의 공장에서 무기를 가져갔다고 적대 언론들이 즉시 소리를 질렀다. 정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최고 기관인 소비에트는 엄격하게 명령했다: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의 허가가 없다면 아무에게도 무기를 내줄 수 없다. 트로츠키가 무기 전달에 대해 명령을 내릴 입장에 있는 정도만큼 단과 고츠는 무기 소지를 금지시킬 입장이 전혀 아닌 것 같았다. 공장과 무기고는 정부가 관리해야했다. 그러나 중요한 순간마다 정부 당국을 무시하는 것이 중앙집행위원회의 전통이 되어 있었으며 정부도 이것을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다. 역관계로 보아 이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 전통과 관습이 침해되었다. 노동자와 병사들은 중앙집행위원회의 천둥과 케렌스키의 번갯불을 구별하지 않았다. 이들은 이 둘을 전부 무시했다.   

수도의 주둔군 이동을 후방 장관실보다는 전선에서 요구하는 것이 더 편리했다. 이 때문에 케렌스키는 수도 주둔군을 북부전선의 사령관 체레미소프의 관리에 맡겼다. 정부의 수반이었기 때문에 케렌스키는 수도의 군사적 측면을 자신의 관리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그는 최고사령관으로서 수도를 자기가 관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위안을 찾았다. 한편 관리가 대단히 힘든 수도 주둔군을 처리하기 위해 체레미소프 장군은 정부위원과 위원회 위원들의 도움을 청했다. 이들의 공동 노력으로 활동 계획이 작성되었다. 7일에 전선 사령부는 군대 조직들과 합동으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대표들을 프스코프에 불러 참호가 있는 곳에서 이들에게 거친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이 도전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16일 회의에서 약 20명의 대표단이 선정되었다. 이들 중 절반은 소비에트 절반은 연대 대표들이었다. 대표단 단장은 노동자 부문의 의장 페오도로프였다. 그리고 병사 부문과 볼세비키당 군사기구의 지도자들인 라쉐비치, 사도프스키, 메호노쉰, 다쉬케비치 등도 대표단에 뽑혔다. 대표단에 포함된 사회혁명당 좌파와 멘세비키-국제주의자 몇 명은 소비에트의 정책을 방어하겠다고 약속했다. 사령부로 출발하기 전에 대표단 회의는 스베르들로프가 제안한 선언문 초안을 채택했다.

소비에트의 같은 날 회의에서 군사혁명위원회의 규약이 논의되었다. 이 기구는 존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나 적들의 눈에는 갈수록 증오스러웠다. 반대파의 연설자가 이렇게 외쳤다: "공격을 준비하고 있느냐는 단도직입적 질문에 볼세비키당은 대답을 회피하고 있다. 이것은 비겁함이 아니면 자기 역량에 대한 자신감 부족 때문이다." 회의는 이 발언을 듣고 큰 웃음을 터뜨렸다: 여당의 대표가 봉기를 준비하는 당에게 마음 속 비밀을 보여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그는 계속했다: 새로운 위원회는 "권력장악을 위한 혁명 본부"에 불과하다; 그러나 멘세비키들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 좌석에서 누가 이렇게 외쳤다: "당신들 숫자가 전부 몇 명이지?" 실제로 소비에트에는 멘세비키가 전부 합쳐 50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이 가두 시위에 찬성하지 않는다"고 확실히 알고 있는 듯 했다. 답변에 나선 트로츠키는 볼세비키당이 권력장악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것을 비밀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이것이 문제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정부는 혁명 군대가 수도에서 이동될 것을 요구해왔으나 이에 대해 "우리는 대답을 해야한다." 라지미르의 위원회 규약 초안은 압도적 다수로 채택되었다. 의장은 군사혁명위원회가 다음날부터 활동을 시작하라고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또 한 발자국의 전진이 이루어졌다.

이날 지구 사령관 폴코프니코프는 볼세비키당이 가두 시위를 준비하고 있다고 다시 한번 정부에 보고했다. 이 보고는 대담한 어조로 표현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주둔군은 정부의 편이다; 사관학교들이 준비 명령을 받았다. 주민에 대한 호소문에서 폴코프니코프는 필요할 경우 "가장 극단적인 조치들을" 취하겠다고 약속했다. 사회혁명당원인 시장 슈라이더는 여기에 기도문을 삽입시켰다: "누군가 소요를 부채질하여 수도에서 실제로 기근이 발생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한편으로는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간청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담한 채 또 한편으로는 의기소침한 채 지배계급의 언론은 더욱더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대표단에게 큰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프스코프의 접견장에는 군사작전 모형이 설치되었다. 전쟁 총사령부 집무실의 탁자들 위에는 대형 지도들이 펼쳐졌고 이 사이에 고위 장성들, 보이틴스키가 수석으로 있던 고위 정부위원들, 군대 위원회 대표들이 서 있었다. 부서장들은 육지와 해상의 군사적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 내려갔다. 모든 보고서들의 결론은 한결같았다: 수도 진입로들을 방어하기 위해 수도의 주둔군을 즉시 전선으로 불러야한다. 정부위원과 위원회 위원들은 이 결론의 정치적 저의에 대한 모든 의심들을 분노하며 반박했다: 전투는 모두 전략적 필요에서 나온다. 이런 종류의 일에는 증거가 모든 곳에 널려 있을 수는 없다. 그러나 전체 상황 자체가 이들의 주장을 반박했다. 전선의 병력은 충분했다.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전투에 대한 의욕이었다. 이렇게 사기가 흔들린 전선이 수도의 주둔군이 보강된다고 호전될 리는 결코 없었다. 더욱이 코르닐로프 반란의 기억이 모두의 머리 속에 아직도 생생했다. 자신의 올바름을 철저히 확신했기 때문에 대표단은 쉽게 총사령부의 공격을 반박할 수 있었다. 프스코프로 출발했을 때보다 더 일치된 의견을 가진 채 이들은 수도로 복귀했다.

이때 역사의 현장에 없었던 직접적 증거들은 이제 역사학자들의 손에 있다. 군대의 비밀 통신이 입증하는 바에 의하면 전선의 부대들이 아니라 바로 케렌스키가 수도 연대들의 전선 배치를 요구했다. 수상이자 전쟁 장관인 케렌스키의 전보에 대해 북부전선의 사령관은 직접 전보를 통해 이렇게 대답했다: "비밀. 17. 엑스. 수도의 군대를 전선으로 보내라는 지시는 본관이 아니라 귀하가 내렸음....수도의 군대가 전선 배치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즉 이들이 전투에 임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명확해지자 본관은 사석에서 귀하의 장교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그런 군대는 전선에 이미 많이 있다; 귀하가 수도의 군대를 전선에 보내기를 원하므로 지금도 이 군대가 전선에서 필요하다고 귀하가 생각하면 본관은 그들을 과거에 거부하지 않았듯이 지금도 거부하지 않는다." 이 전보의 어조는 반정도 호전적이다. 그 이유는 체레미소프 장군이 고급 정치에 대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짜르의 군대에서 "빨갱이"라고 간주된 그는 밀류코프의 표현에 따르면 "혁명적 민주주의의 총아"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음에 틀림없다: 늦기 전에 정부로부터 그리고 정부와 볼세비키당의 갈등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신상에 좋다. 혁명의 시기에 그가 보인 모습은 이 추측이 완전히 올바르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주둔군을 둘러싼 투쟁은 소비에트 전국대회에 대한 투쟁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 때는 원래 정한 대회 소집날짜로부터 4일이나 5일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대회와 관련해서 볼세비키당의 "가두 시위"가 예상되었다. 7월과 마찬가지로 운동은 시가전을 동반한 대대적인 무장 시위가 될 것으로 생각되었다. 문서를 언제나 대담하게 위조하는 정보국이나 프랑스 전쟁 사절단이 제공한 정보에 명백히 근거하여 멘세비키당 우파 포트레소프는 10월 17일 밤에 일어날 것으로 예상되는 볼세비키당의 투쟁 계획을 부르주아 언론에 설명했다. 이 작자들은 볼세비키당의 투쟁 계획을 기발하게 창조했다. 그리고 이들은 수도의 어느 대문에서 볼세비키당이 "암흑의 분자들"을 끌어들일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위병 연대의 병사들은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신들만큼이나 웃는데 익숙했다. 소비에트 회의에서 포트레소프의 글이 낭독되자 스몰니 학원의 흰색 기둥과 샹들리에가 회의 참석자들의 박장대소로 뒤흔들렸다. 그러나 언제나 지혜로운 정부는 자기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꿰뚫어 볼 능력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포트레소프의 엉성한 날조에 겁을 크게 집어먹고 이 "암흑의 분자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새벽 2시에 서둘러 회의를 소집했다. 케렌스키와 군사 당국 사이에 회의가 재개된 후 필요한 조치들이 취해졌다. 동궁과 중앙은행의 경비 인력이 강화되었다. 오라니엔바움에 소재한 두 군사훈련학교에서 보낸 학생들이 도착했다. 심지어 루마니아 전선의 장갑 기차까지 동원되었다.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마지막 순간에 볼세비키당은 시위 준비를 철회했다. 왜 이렇게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지 몇 년이 지나고도 학식이 풍부한 이 역사학자는 자기 모순에 찬 날조된 자료를 다른 자료들보다 더 믿었다.

정부 당국은 민병대를 지휘하여 수도 인근을 순찰했다. 가두 시위 준비가 진행 중인 징후를 찾기 위해서였다. 민병대의 보고 내용에는 직접 관찰과 경찰의 어리석음이 합작되었다. 상당수의 대공장들이 입주해 있는 알렉산드로-네프스키 구역에서 순찰자들은 대단한 평온함을 발견했다. 비보르그 지구에서는 정부 타도의 필요성이 공공연히 선동되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모든 것이 조용했다. 바실리-오스트로프 지구에서는 분위기는 들끓었으나 역시 "겉으로 보이는" 행동의 징후는 없었다. 나르바 쪽에서는 가두 시위를 지지하는 선동이 배가되고 있으나 언제 시위가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시위 날짜와 시간이 엄격히 비밀로 붙여지고 있거나 진짜 아무도 모르거나 둘 중에 하나였다. 결국 교외에 순찰을 강화하고 민병대 정부위원이 초소를 좀더 자주 감시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모스크바 자유주의 언론의 일부 특파원 기사는 민병대의 보고를 잘 보완하고 있다: "가두 시위를 지지하는 볼세비키당의 선동은 교외, 뻬쩨르부르그 공장, 네프스키, 오부호프스키, 푸틸로프 등 모든 곳에서 진행 중이다. 노동자들은 어느 순간이고 투쟁을 시작할 태세이다. 최근 며칠동안 뻬쩨르부르그에는 유례 없는 규모로 탈영병들이 유입되었다....바르샤바 역에서는 병사들의 흥분된 얼굴에 드러난 의심하는 눈초리와 타오르는 눈동자 때문에 길을 다닐 수 없다....수도에는 먹이의 냄새를 맡은 도둑 떼들이 득실거린다는 정보가 있다. 암흑의 분자들이 조직되고 있으며 밀실과 식당은 이들로 가득하다...." 이 기사에는 속물들의 공포와 경찰의 소문이 어느 정도 엄격한 사실들과 뒤섞여있다. 절정으로 치닫고 있는 혁명의 위기는 사회의 아주 깊은 바닥을 휘저었다. 탈영병, 강도 떼, 악의 소굴들은 실제로 임박한 사회적 지진의 굉음 속에 그 수가 증가했다. 사회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운영해온 체제가 풀어헤친 힘, 그 궤양과 악덕 등을 몸을 떨면서 바라보았다. 혁명은 이 현상들을 초래하지 않았고 단지 들추어내었을 뿐이었다.

이 당시 드빈스크의 군단 사령부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부드버그라는 성을 잘내는 반동 분자가 있었다. 그는 관찰의 재능과 꿰뚫어보는 눈을 나름대로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입헌민주당원들, 입헌민주당원 비슷한 자들, 10월당원들, 다양한 색채의 옛날 및 3월 혁명가들은 자신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사방에서 짹짹거리고 있다. 이들은 월식을 수다질로 멈추려는 회교도를 생각나게 했다."

주둔군 상설협의회는 18일에 처음 소집되었다. 자발적인 행동을 삼가고 소비에트 병사 부문이 확인 서명한 사령부의 명령만을 이행하라고 부대들에게 발송된 전화통지문이 말했다. 이렇게 해서 소비에트는 주둔군을 장악하기 위해 결정적이고 공개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근본적으로 전화통지문은 지금 정부를 타도하라는 촉구였다. 그러나 이중권력의 원리 속에서 화해주의자들을 볼세비키들로 대체하는 평화스러운 권력 교체 행위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결국 같은 것이었지만 좀더 유연한 해석은 환상을 품을 여지를 남겨놓았다. 스몰니 학원의 주인이라고 자부한 중앙집행위원회 최고회의는 전화통지문을 중지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자신의 위신만 한번 더 구겼을 뿐이었다. 수도와 인근의 연대 및 중대 위원회 대표 집회는 정해진 시간에 열렸으며 대단히 규모가 컸다.

적들이 조성한 분위기 덕분에 주둔군 상설협의회에 참석한 부대 대표들의 보고들은 곧 있을 "가두 시위" 문제에 자동적으로 집중되었다. 회의에 참석한 대표들의 출석을 확인하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정도로 참석자의 수가 많았다. 이것은 지도자들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표트르호프의 군사학교와 제 9 기병연대는 시위에 반대했다. 기병근위대들은 중립으로 기울었다. 오라니엔바움의 군사학교는 중앙집행위원회의 명령에만 복종하려 했다. 시위에 적대적이거나 중립적인 단위는 이들이 전부였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말 한마디에 가두 시위에 나서겠다고 선언한 부대는 다음과 같았다: 에게르스크 연대, 모스크바 연대, 볼린스키 연대, 파블로프스키 연대, 케크스골름스키 연대, 세메노프스키 연대,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 제 1 명사수 연대, 제 3 예비연대, 제 2 발트해 승무원, 전기기술 대대, 근위 포병 사단. 척탄병 연대는 소비에트 대회가 촉구할 경우에만 시위에 나올 생각이었다. 이것으로 충분했다. 덜 중요한 부대들은 다수의 흐름을 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수도의 주둔군을 자신의 권력 기반으로 생각했던 중앙집행위원회 대표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발언이 금지되었다. 무기력한 짜증을 부리며 이들은 "인가도 나지 않은" 회의에서 나가버렸다. 회의는 의장의 제안으로 즉시 이렇게 선언했다: 소비에트의 확인 서명이 없으면 어떤 명령도 무효이다.

지난 몇 개월 특히 지난 몇 주일동안 주둔군의 마음속에 준비되고 있던 것이 이제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었다. 정부는 생각할 수 있는 정도보다 훨씬 미미한 존재라는 것이 드러났다. 수도는 가두 시위와 유혈 전투에 대한 소문으로 떠들썩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이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연대 위원회 협의회는 시위와 대대적인 전투가 근본적으로 필요 없게 만들었다. 주둔군은 자신 있게 혁명을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리고 혁명을 봉기로 바라보지 않았다. 다만 나라의 운명을 결정할 소비에트의 반박할 수 없는 권리가 실현된 것으로 바라보았다. 이 운동은 비교할 수 없이 대단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동시에 약간 행동이 둔했다. 볼세비키당은 연대들의 정치적 약진에 맞추어 기술적으로 자신의 활동을 조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대들의 대다수는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로부터 또 일부는 소비에트 대회로부터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중의 혁명적 공세를 일시적이라도 방해할 위험이 일어날 상황이 존재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적 뿐 아니라 아군도 괴롭히고 있던 하나의 문제에 대답할 필요가 있었다: 거의 언제든지 자발적으로 봉기가 터지지 않을까? 전차, 거리, 상점 등에서는 예상되고 있는 가두 시위에 대한 얘기 밖에 없었다. 동궁과 전쟁 총사령부 앞 궁전 광장에는 정부에 충성을 바치겠다는 장교들이 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는 이들에게 권총을 지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짜 위험한 순간에는 권총이나 그 주인이나 단 일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될 것이다. 모든 시사 신문들의 주요 사설은 봉기 문제를 다루었다. 고리키는 볼세비키당에게 이렇게 요구했다: 당이 "분노한 대중의 무기력한 장난감"이 아니라면 이 소문들을 반박해야한다. 불확실성에 대한 이 경계심은 일부 노동자들도 감염시켰으며 병사들을 더 심하게 감염시켰다. 이들도 자기들이 참여하지 않는 가두 시위가 준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누가 준비하고 있는가? 스몰니 학원은 왜 침묵을 지키고 있는가? 소비에트는 공공 의회이자 혁명 본부라는 자기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소비에트의 이 이중적 성격은 봉기가 일어나기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큰 어려움을 조성했다. 더 이상 침묵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소비에트의 저녁회의가 끝날 무렵 트로츠키는 이렇게 선언했다: "지난 며칠 간 신문은 통신, 소문, 임박한 행동에 대한 기사 등으로 가득했다....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결정들은 공개되고 모두에게 알려지고 있다. 소비에트는 선출된 기관이다. 따라서...노동자 병사들이 모르는 결정사항은 있을 수 없다....소비에트의 이름으로 나는 이렇게 선언한다: 무장 시위에 대해 확실히 결정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앞으로 소비에트가 가두 시위의 날짜를 정해야 한다면 노동자와 병사들은 이 호소에 응해 마지막 한사람까지 거리로 나설 것이다. 내가 5천 정의 소총을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도록 명령서에 서명했다고 말이 많다....그렇다, 내가 서명했다....소비에트는 계속해서 혁명을 수호하기 위해 노동자 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킬 것이다." 이제 소비에트 대의원들은 이해가 되었다: 전투는 임박했다; 그러나 우리 없이 우리 머리 위에서 전투 신호가 오고 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중은 확신을 주는 설명 뿐 아니라 명확한 혁명 전망이 필요했다. 이 전망을 제시하기 위해 트로츠키는 수도 주둔군의 이동과 임박한 소비에트 대회라는 두 문제를 하나로 결합시켜 이렇게 말했다. "대단히 첨예화 될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우리는 정부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정부가 혁명 주둔군을 수도에서 제거하게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갈등은 다른 문제에 종속되어 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에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소비에트 권력을 제안할 것이라고 부르주아 계급은 예상하고 있다....그리고 불가피한 전투를 예상하며 이들은 혁명 수도의 무장을 해제시키려고 한다." 이 연설에서 혁명을 위한 정치적 준비사항이 처음으로 완벽하게 규정되었다: 우리는 권력을 장악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주둔군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혁명 주둔군을 적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반혁명이 대회를 해산시키려고 나서는 순간 우리는 끝까지 가차없이 반격할 것이다." 여기서도 혁명 수도의 군사적 방어라는 이름으로 결정적인 정치적 공세가 선언되었다.

이때 수하노프가 회의에 나타났다. 소비에트가 고리키의 50회 생일을 축하하게 하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전혀 가망이 없었다. 그는 이 회의에서 엉킨 혁명의 매듭에 대해 이후 적절한 논평을 했다: 스몰니 학원에 입주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게 주둔군의 문제는 곧 봉기의 문제이다; 병사들에게 이것은 자신들의 운명이 걸린 문제이다. "이보다 더 운이 좋은 정책의 출발점을 상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수하노프는 볼세비키당의 정책이 전체적으로 실패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대중은 경탄할 정도로 신중히 매일 매일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소위 이 "분노한 대중"을 그와 고리키를 포함한 수천 명의 급진지식인들은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소비에트는 자신의 혁명 강령을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심지어 혁명의 날짜까지 정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를 위해 자신이 정한 봉기의 순간까지 발생한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해서 소비에트는 무기력하기 그지없었다. 정치적으로 이미 완전히 무의미한 케렌스키는 아직도 동궁에서 포고령을 내보내고 있었다. 한편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대중 운동을 불러일으킨 레닌은 피신하고 있었다. 법무장관 밀리안토비치는 지방검사에게 레닌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새로 하달하고 있었다. 전능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자기 터인 스몰니 학원에서도 정부 당국의 자비를 통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건물, 현금 상자, 전보 송수신실, 자동차, 전화 등의 관리는 모두 아직도 추상적인 법통이라는 끈 하나로 버티고 있는 중앙집행위원회의 수중에 있었다.  

회의가 끝난 후 대의원들은 시꺼먼 밤에 비가 억수로 내리고 있는 스몰니 광장으로 나왔다. 이 순간을 수하노프는 회상하고 있다. 대의원들 전부는 연기와 냄새가 진동하는 자동차 두 대 주위에 가망 없이 모여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의 풍족한 차고에서 볼세비키 소비에트에 할당된 자동차가 겨우 두 대였다. 안 다니는 곳이 없는 관찰자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의장 트로츠키는 자동차에 막 접근하려고 했다. 그러나 발을 멈추고 한 일분 동안 자동차를 바라본 후 그는 껄껄 웃고는 물웅덩이를 철벅거리면서 어둠 속에 사라졌다." 전차의 승강장에서 수하노프는 검은 염소 수염에 수수한 차림을 한 이름을 알 수 없는 조그만 체구의 인물과 마주쳤다. 이 인물은 귀가하는 먼길의 불편에 대해 수하노프를 위로했다. 수하노프는 어느 볼세비키 친구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야?" "오랜 당 활동가 스베르들로프 동지야." 이로부터 2주일이 채 지나지 않아 조그만 검은 염소 수염을 한 이 조그만 체구의 인물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앙집행위원회의 의장이 될 것이다. 스베르들로프는 같은 길을 가는 수하노프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위로했을 것이다: 8일 전 수하노프의 아파트에서는 물론 집주인이 모르는 가운데 무장 봉기를 일정에 올린 볼세비키당 중앙위원회가 열렸었다.

그 다음날 아침 중앙집행위원회는 사건의 진행을 되돌리려고 시도했다. 최고회의는 주둔군의 "합법" 회의를 소집했다.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다시 선출되어야 했을 그리고 전날에는 집회에도 참여하지 않은 후진적 위원회들도 여기에 끌어들였다. 주둔군에 대한 이 보충적 시험은 뭔가 새로운 면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더욱 확실히 전날의 실상을 확인시켰다. 이번에는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 군대들의 대다수 위원회들이 가두 시위에 반대했다. 그리고 장갑차 사단 위원회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모두는 중앙집행위원회에 복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사실은 무시될 수 없이 중요했다.

수도 중심부와 두 외곽 지구 사이에 네바강과 그 운하들이 섬을 끼고 흐르고 있었다. 이 섬에 위치한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는 근처의 교량들을 내려다보면서 강 쪽에서 정부가 있는 동궁으로 들어가는 도로들을 보호하고 있거나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대규모 작전에서는 중요하지 않은 이 요새는 시가전에서는 요충지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마 이것은 더 중요한 사항일 것인데 요새는 크론베르크스키 무기고와 인접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소총이 필요했다 --- 그렇다, 그리고 좀더 혁명적인 연대들도 거의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다. 시가전에서 장갑차의 중요성은 설명이 필요 없다. 장갑차들이 정부의 손에 들어갈 경우 다수의 불필요한 희생자가 나올 수 있었다. 반면 이것들을 봉기 세력이 장악할 경우 승리의 시간이 단축될 수 있었다. 다음 며칠 동안 볼세비키당은 이 요새와 장갑차 사단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했다. 이것을 제외하면 이 새로운 회의의 역관계는 전날과 다름이 없었다. 나름의 아주 조심스러운 결의안을 통과시키려던 중앙집행위원회의 시도는 압도적 다수로 냉정하게 저지되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가 소집하지 않은 이 회의는 결정 권한이 없다고 생각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화해주의 지도자들은 한번 더 망신살을 자초하였다.

연대에 영향을 미치는 길이 아래에서 막히자 중앙집행위원회는 위에서 영향을 미칠 길을 뚫으려했다. 참모들과 합의하여 이들은 사회혁명당원 말레프스키 대위를 지구 수석 정부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그에게 복종할 경우 소비에트에서 임명한 대표위원들을 인정할 용의가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대위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이 대위를 통해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간 주둔군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당연히 가망이 없었다. 이 제안을 거부한 후 소비에트는 중앙집행위원회와의 협상을 중단했다.

포트레소프가 그 계획을 폭로한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자 적들은 자신 있게 10월 20일에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다들 알고 있듯이 이 날은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원래 열리게 되어 있었던 날이었고 봉기는 이 대회를 자기 그림자처럼 따라갔다. 물론 대회는 개막 일을 이미 5일이나 연기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신경쓸 것이 없었다: 물건은 이동했으나 그 그림자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이번에도 정부는 "가두 시위"를 막기 위해 모든 조치들을 취했다. 교외에는 보초를 서는 위병들이 보강되었다. 밤새 내내 카자흐 기병 순찰대가 노동자 지구들을 돌아다녔다; 기병 예비 병력이 도시 여러 지점들에 몸을 숨긴 채 배치되었다. 민병대는 전투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들의 절반은 정부위원 사무실에게 계속 근무했다. 장갑차, 경포, 기관총 등이 동궁 근처에 설치되었다. 궁전으로 들어가는 길목들을 순찰대가 경비했다.        

아무도 준비하지 않았고 아무도 촉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봉기는 이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많은 다른 날들보다 이 날은 더 평화롭게 지나갔다. 공장의 조업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단이 편집한 이즈베스티아 지는 볼세비키당이 패배했다고 떠들었다: "수도에서 이들의 무장 시위 모험은 거의 끝장이 났다." 볼세비키당은 민주주의 진영의 통일된 분노만으로 벌써 진압되었다: "이들은 이미 항복하고 있다." 적들은 말 그대로 머리가 돌아서 때도 되지 않았는데 공포에 떨고 더욱 때가 되지 않았는데 승리를 외치면서 의도적으로 "여론"을 속이고 있었다. 마치 볼세비키당의 진짜 계획을 이들이 숨겨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9일에 처음 제출된 군사혁명위원회 구성안은 이로부터 1주일 후 소비에트 전원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소비에트는 당이 아니었기 때문에 행동이 느렸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실제로 구성되는데 4일이 더 필요했다. 그러나 이 10일이 허송된 것은 아니었다: 주둔군 장악 작업이 전속력으로 진행되었다; 연대 위원회 협의회는 자신의 생존능력을 증명했다; 노동자 무장은 계속되고 있었다. 이렇게 하여 봉기 5일 전인 20일에야 일을 시작한 군사혁명위원회는 충분히 잘 조직된 무력을 손에 넣었다. 화해주의자들이 불참했기 때문에 위원회는 볼세비키와 사회혁명당 좌파로만 구성되었다. 이 덕분에 임무는 더욱 쉽고 단순하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었다. 그런데 사회혁명당원 위원들 중에는 라지미르만이 제대로 활동했다. 이 위원회가 당기구가 아니라 소비에트 기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사무국장에 앉혀졌다. 그러나 위원장 트로츠키와 위원회 주요 활동가인 포드보이스키, 안토노프-오브세옌코, 라쉐비치, 사도프스키, 메호노쉰 등은 전적으로 볼세비키당에 의존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전원회의를 열어 규약에 명시된 모든 기구들의 대표들을 참석시킨 적이 한번도 없었다. 활동은 위원장의 지도를 받은 사무국을 통해 진행되었으며 중요한 일에는 언제나 스베르들로프가 결합했다. 바로 이들이 봉기 총지휘부였다.

군사혁명위원회 회보는 자신의 첫 활동들을 이렇게 겸허하게 기록하고 있다: 주둔군의 전투 부대, 일부 기관과 창고 등에 "관찰과 지도력을 제공하기 위해" 대표위원이 임명되었다. 소비에트는 주둔군을 이미 정치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조치는 주둔군이 이제 조직적으로 소비에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볼세비키당의 군사기구가 대표위원 선정에 지배적인 역할을 했다. 군사혁명위원회의 뻬쩨르부르그 대표위원은 약 1,000명이었다. 이들 중에는 혁명에 모든 것을 바친 결연한 병사들과 젊은 장교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은 7월 시기부터 케렌스키의 감옥에서 단련되어 왔다. 주둔군 가운데에서 선정되었기 때문에 대표위원들은 주둔군에서 활동을 하는데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주둔군은 이들을 자기 성원으로 간주했으며 이들의 명령에 기꺼이 따랐다.

기관들을 장악하는 주도력은 대부분 아래에서 나왔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인접한 무기고의 노동자와 사무직원들이 직접 무기 공급을 통제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 공장의 대표위원은 사관생도들에 대한 보충적 무장을 중지시켰고 돈 지역으로 향하는 1만 정의 소총을 저지시켰으며 다수의 의심스러운 조직과 개인들에게 가는 무기들도 차단시켰다. 이 통제조치는 곧 다른 무기고들에까지 확대되었고 심지어 개인 무기상들에게도 미쳤다. 특정 기관이나 상점의 병사, 노동자, 사무직원 위원회에 호소만 하면 정부 당국의 저항은 즉시 제압되었다. 이때 이후 무기는 대표위원의 명령을 통해서만 공급되었다.

식자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부수가 증대되고 있는 흑백인조의 유인물과 팜플렛에 대한 군사혁명위원회의 주의를 촉구했다. 사항이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언제든지 식자공 노동조합이 군사혁명위원회의 지시를 따르기로 결정되었다. 반혁명의 인쇄물 선동에 대해서는 식자공들을 통한 통제가 어떤 방식보다 효과적이었다.

소비에트는 봉기에 대한 소문을 공식적으로 부인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따라서 22일 일요일을 자체 역량을 평화적으로 점검하는 날짜로 공개적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형태는 거리 행진이 아니라 공장, 병영, 모든 수도 주요 기관 등의 집회였다. 명백히 유혈 개입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 정체 불명의 신도들이 같은 날을 교회의 행진 날짜로 잡았다. 일부 알려지지 않은 카자흐들의 이름으로 촉구된 공고문은 "1812년 프랑스 점령군으로부터 모스크바가 해방된 사건을 기념하여" 시민들이 종교 행진에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역사상 사건을 끌어들인 이 핑계는 별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조직들은 전지전능한 신에게 "조국의 적들에 대항하여 경계를 서고 있는" 카자흐 군대에 축복을 내려줄 것을 제안했다. 물론 이 제안은 1917년과 명확히 관련되어 있었다.

반혁명 세력이 상당한 규모의 시위를 벌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질 이유는 전혀 없었다. 수도의 대중 사이에 성직자들은 전혀 영향력이 없었다. 이들은 소비에트에 대항하여 교회의 깃발 아래 흑백인조 깡패들의 미미한 잔당들만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국 소속의 경험이 풍부한 밀정들과 카자흐 장교들의 도움을 얻어 유혈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예방 조치로 군사혁명위원회는 우선 카자흐 연대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한 혁명 세력이 입주한 건물에 대한 통제가 좀더 강화되었다. 잔 리이드(John Reed)는 스몰니 학원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고 적고 있다. 첩자들이 계속 침투했기 때문에 몇 시간 단위로 암호체계가 바뀌었다. 곧 있을 "소비에트의 날" 행사를 논의하기 위해 21일에 주둔군 상설협의회 회의가 열렸다. 협의회 대변인은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가두 충돌을 막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제안했다. 가장 좌에 위치한 제 4 카자흐 연대는 대표들을 통해 종교 행진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제 14 카자흐 연대는 이렇게 선언했다: 반혁명 세력의 시도에 대해서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저항하겠지만 동시에 권력을 장악하기 위한 가두 시위도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3개 카자흐 연대 가운데 한 연대만 대표를 보내지 않았다. 볼세비키들을 진압하기 위해 7월 시기에 투입된 가장 후진적인 우랄스키 연대였다.

트로츠키의 제안에 따라 협의회는 3개의 짧은 결의문을 채택했다: (1) "수도와 인근의 주둔군은 군사혁명위원회의 모든 조치들을 전적으로 지지하기로 약속한다..."; (2) 10월 22일은 평화적으로 우리의 역량을 점검하는 날이 될 것이다....주둔군은 카자흐 연대들에게 호소한다:..."내일 집회에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카자흐 형제들이여! 집회는 여러분들을 환영한다."; (3)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평화, 토지, 빵을 인민에게 보장한다." 주둔군은 모든 역량을 소비에트 전국대회에 바칠 것을 엄숙히 약속한다. "병사, 노동자, 농민 대의원 여러분, 우리를 신뢰하라. 우리는 임무를 전적으로 수행하면서 권력을 장악하던가 아니면 죽을 것이다." 이 결의문들에 찬성하는 수백 개의 손들이 올라가면서 봉기의 강령은 확정되었다. 그러나 57명은 기권했다. 이들은 "중립 분자들"로 동요하고 있는 적들이었다. 이 결의문들에 반대하는 손은 하나도 올라가지 않았다. 2월 체제의 목 주위로 올가미는 확실히 걸려서 당겨지고 있었다.

이 날이 지나면서 하나의 사실이 밝혀졌다: 종교 행진을 선동하던 정체 불명의 분자들이 "지구 사령관의 제안으로" 시위 선동을 포기했다. 이 상당한 도덕적 승리는 주둔군 상설협의회의 사회적 압력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입증했다. 이로써 다음날 적들이 거리에 얼굴을 감히 들이밀지 못할 것이라는 일반적 예측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지구 사령부에 3명의 대표위원을 임명했다. 사도프스키, 메호노쉰, 라지미르가 이들이었다.  사령관의 명령은 이 3인 가운데 한 명의 확인 서명이 있어야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스몰니 학원의 전화를 받아 사령부는 자동차를 이들에게 보냈다. 이중권력의 관습은 여전히 유효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반대로 이 대단히 정중한 사령부의 제스처는 쉽게 양보하겠다는 암시가 아니었다.

사도프스키가 읽어 내려간 선언문의 내용을 들은 후 사령관 폴코프니코프는 이렇게 말했다: 대표위원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사령부는 어느 누구의 지도도 필요 없다. 그렇게 나올 경우 군대의 저항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는 대표위원들의 언질에 대해 그는 무미건조하게 이렇게 대답했다: 주둔군은 사령관의 소관이며 이들의 복종은 확보되었다. 자신의 회고록에 메호노쉰은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진정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스몰니 학원으로 다시 돌아올 때는 대표위원들은 자동차를 제공받지 못했다.

출석 요청으로 트로츠키와 스베르들로프가 참석한 주둔군 상설협의회 특별회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지구 사령부와의 결별을 기정 사실화 하고 이 시점부터 더욱 압박을 가한다. 성공의 첫째 조건: 지구들이 투쟁의 모든 단계들과 사건들에 대해 군사혁명위원회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다. 적들이 대중을 기습하게 내버려두지 말아야한다. 지구 소비에트들과 당의 위원회들을 통해 정보는 수도의 모든 부분으로 보내졌다. 연대들은 사령부가 대표위원들을 거부한 사건을 즉시 통보 받았다. 지시사항들이 접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표위원이 확인 서명한 명령만 이행하라. 또한 가장 믿을만한 병사들에게만 순찰 임무를 맡기자는 제안이 있었다.

그러나 지구 사령부 역시 조치를 취하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화해주의 동맹자들로부터 확실히 자극을 받은 폴코프니코프는 오후 1시에 중앙집행위원회 대표들이 출석한 가운데 자신이 조직한 주둔군 협의회를 소집했다. 적의 이 움직임을 미리 예상했기 때문에 군사혁명위원회는 오전 11시에 연대 위원회 비상 협의회를 소집하고 사령부와의 결별을 공식화하기로 결정했다. 이 회의에서 작성된 주둔군에 대한 호소문은 전쟁을 선포하는 언어였다. "수도의 조직된 주둔군과 결별한 사령부는 반혁명의 직접적 도구이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주둔군의 지도부로서 사령부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반혁명 시도에 대해 혁명 질서를 방어한다."     

이것은 봉기를 향한 결정적 조치였다. 아니면 이것은 갈등으로 가득한 이중권력의 역학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에피소드에 불과했을까? 어쨌든 사령부는 군사혁명위원회의 정보를 제때 받지 못한 부대들의 대표들과 논의한 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이것을 갈등의 에피소드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하려했다. 볼세비키 해군 소위 다쉬케비치를 단장으로 소비에트 대표단은 사령부에서 주둔군 상설협의회가 채택한 결의문을 짤막하게 알렸다. 이때 사령부에 있던 부대 대표들 몇몇은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으나 확실한 결정을 거부한 후 해산했다. 언론은 사령부의 말을 이렇게 인용했다: "장시간의 의견교환이 있었으나 명확하게 결정된 것은 없었다; 중앙집행위원회와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사이의 갈등이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요하다." 결국 사령부는 자신의 몰락을 이렇게 해석했다: 두 소비에트 기관이 서로 사령부를 통제하려는 다툼의 결과였다. 자발적으로 현실을 못 본 체하는 이 시각은 장점이 있었다: 소비에트에 대해 전쟁을 선포할 필요가 없었다. 전쟁을 선포하기에는 지배자들에게 적절한 무력이 없었다. 이렇게 이미 폭발할 지점까지 도달한 혁명적 갈등은 다시 한번 정부기관들의 도움으로 이중권력의 합법적 틀 내로 제한되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두려운 사령부는 더욱 충성스럽게 봉기를 위장하는 일에 협력했다. 그러나 이 경박한 권력자들의 행위는 자신들의 실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위장술이 아니었는가? 관료적 순진함으로 위장한 채 사령부는 군사혁명위원회에 예상치 못한 타격을 입히려고 하지 않았는가? 정신이 혼란하고 사기가 떨어진 임시정부 기관들이 이런 것을 시도할 개연성은 별로 없다고 소비에트는 생각했다. 그러나 군사혁명위원회는 가장 단순한 예방조치를 취했다: 근처 병영에서는 첫 경보가 울리자마자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를 돕기 위해 중대들이 낮과 밤으로 무장한 채 대기하고 있었다.

종교 행진이 취소되었으나 부르주아 언론은 일요일에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화해주의 신문은 조간 판에 이렇게 발표했다: "오늘 정부 당국은 20일의 경우보다 더 높은 확률로 볼세비키당의 가두 시위를 예상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17일, 20일, 22일 등 일주일에 벌써 3번이나 이 못된 소년은 "늑대다!"라고 거짓으로 외치면서 사람들을 속였다. 옛날 우화의 내용을 믿는다면 4번째 거짓 외침 후 소년은 늑대에게 잡아먹힐 것이다. 집회 참여를 대중에게 촉구한 볼세비키당 신문은 소비에트 대회 전날 평화적으로 혁명 세력의 역량을 점검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군사혁명위원회의 계획에 완전히 부합했다: 무력 충돌이나 무기 소지 및 과시 없이 거대한 역량 점검을 실시한다. 이것은 대중의 수, 역량, 결의 등을 대중에게 직접 보여주는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만장일치의 단결을 통해 적들이 숨어서 눈에 띄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히도록 설득하는 목적도 있었다. 또한 대중의 역량에 비교되는 부르주아 계급의 무기력을 폭로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를 통해 노동자와 병사들의 의식 속에 행동의 장애물로 남아있는 7월 시기의 마지막 기억들을 없애고자 했다. 자신들의 역량을 직접 파악한 후 대중이 더 이상 대적할 세력이 없다고 말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로부터 5년 후에 밀류코프는 이렇게 적었다: "겁에 질린 시민들은 집에 있거나 거리에서 비켜서 있었다." 집에 남은 자들은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자기들의 신문 때문에 진짜 겁에 질렸다. 나머지 시민들 즉 남녀노소, 소년 소녀, 팔에 아기를 안은 엄마 등은 집을 나와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집회로 몰려다녔다. 혁명기간 내내 이렇게 거대한 집회는 있어본 적이 없었다. 상층부를 제외한 수도 시민 모두는 하나의 확고한 집회 자체였다. 문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강당에는 청중들이 몇 시간 주기로 완전히 새로 바뀌었다. 노동자, 병사, 수병들의 더욱 새로운 물결들이 건물까지 올라와 가득 넘쳤다. 이 물결 그리고 자신들을 겁먹게 만드는 경고들에 자극을 받아 소부르주아들 역시 부산을 떨면서 집회에 나왔다. 수만 명의 인파가 인민의 집이라고 부르는 엄청난 규모의 건물을 가득 채웠다. 이들은 극장, 극장의 강당, 흡연실, 뷔페 실, 로비 등을 채웠다. 이들은 확고하고 흥분된 그리고 동시에 규율을 지키는 덩어리가 되어 모든 곳을 채웠다. 쇠기둥과 위층 창문에 사람들의 머리, 다리, 팔 등이 꽃다발처럼 걸려 있었다. 임박한 폭발을 예감케 하는 짜릿한 긴장이 감돌았다. 케렌스키를 타도하라! 전쟁을 타도하라! 소비에트에 권력을! 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군중 앞에 주장이나 경고를 가지고 감히 나타나려는 화해주의자는 하나도 없었다. 볼세비키들은 발언권을 얻었다. 지방에서 도착하기 시작한 소비에트 대의원들을 포함하여 당의 모든 연설 역량은 전부 행동으로 나섰다. 가끔 사회혁명당 좌파 그리고 일부 장소에서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연설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될 수 있으면 볼세비키들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으려 했다.

빈민가, 다락방, 지하방의 인민은 실이 헤진 회색 제복 외투를 걸치고 집회에 참여했다. 모자와 무거운 숄을 머리에 두르고 거리의 진흙을 신발에 완전히 적신 채 이들은 가을 기침이 목을 아프게 했지만 한시간 내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서 있었다. 어깨를 서로 붙인 채 더 많은 사람이 들어와 전부가 다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몸을 조인 후 이들은 서서 지치지 않고 굶주린 듯 열정적으로 요구하면서 연설자의 말을 경청했다. 이해하고 동화하면서 행동에 필요한 말을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을까 두려워하면서 이들은 귀를 기울였다. 지난 몇 달 동안 그리고 지난 몇 주일 동안 아니 최소한 지난 며칠까지 모든 말들은 다 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최소한 오늘은 이런 말들이 소리가 달랐다. 대중은 이 말들을 복음이 아니라 행동에 대한 의무로 새롭게 경험하고 있었다. 혁명의 경험, 전쟁, 평생 고통스러운 투쟁 등이 가난에 찌든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 깊은 곳에서 올라와 단순하고 명령조의 생각으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 길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다; 미래로 가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한다.   

이 행사에 참여한 모두는 혁명의 배경 속에 그렇게도 깨끗하게 빛나던 단순하고 멋진 이 날을 나중에 회상했다. 이 날은 혁명의 배경이 없어도 충분히 생생했다. 영감을 받았으나 자신의 정복당할 수 없는 힘으로 통제된 인간 홍수의 이미지는 이 광경을 본 사람의 기억 속에 영원히 새겨졌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므스티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적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날 행사는 엄청난 열성으로 수많은 집회에서 치루어졌다." 바실리에-오스트로프 지구의 두 공장에서 연설한 볼세비키 테스트코프스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곧 장악할 권력에 대해 대중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대중은 우리에게 격려의 말만 했다." 인민의 집 집회에 참여한 수하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황홀경에 아주 가까운 분위기가 주위에 흘렀다...트로츠키는 간단한 결의문을 작성했다....이 결의문에 찬성하는 사람들은...수천 명의 사람들이 한 사람처럼 똑같이 손을 들었다. 여성, 소년, 노동자, 병사, 농민 그리고 전형적인 소부르주아들 역시 타오르는 눈으로 손을 들었다....트로츠키는 계속 연설했다. 다수 대중은 계속 공중에 손을 들고 있었다. 트로츠키는 말 하나 하나를 조탁했다: 여러분들의 이 표가 여러분의 맹세가 되어야 한다....다수 대중은 손을 높이 들었다. 이들은 동의했다. 이들은 맹세했다." 대중의 열광적 맹세에 대해 볼세비키 포포프는 이렇게 말한다: "소비에트의 첫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들은 달려나갈 것 같았다." 소비에트에 충성 맹세를 하는 전기가 오른 군중에 대해 므스티슬라프스키는 증언한다. 도시의 중심부에서 교외까지 모든 곳에서 소규모로 같은 광경이 목격되었다. 똑같은 시간에 수십만의 인파가 손을 들고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맹세했다. 소비에트, 병사 부문, 주둔군 상설협의회, 공장위원회 등의 일일 집회는 대규모 지도자 집단에게 내적 연대감을 가져다주었다. 서로 별개로 진행된 대중집회들은 공장과 연대를 단결시켰다. 그러나 10월 22일 이 날은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 높은 온도로 진정으로 인민 대중을 결합시켰다. 대중은 자신과 자신의 지도자들을 보았다. 지도자들은 대중을 보고 이들의 소리를 들었다. 양측은 서로 만족했다. 지도자들은 확신했다: 더 이상 봉기를 늦출 수 없다! 대중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일이 제대로 될 것이다!

볼세비키당이 주최한 일요일의 역량 점검 행사는 성공했다. 이 때문에 폴코프니코프와 그의 참모부들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정부 그리고 중앙집행위원회와 합의하여 사령부는 스몰니 학원과 합의를 시도했다. 접촉과 타협의 우정어린 오랜 관습을 다시 유지하는 것이 결국 좋지 않겠는가? 군사혁명위원회는 의견 교류를 위해 사절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정찰을 할 수 있는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었다. 사도프스키는 이렇게 기억한다: "협상은 간단히 끝났다. 소비에트가 제시한 모든 조건들을 사령부 대표들은 미리 동의했다...이 대가로 10월 22일자 군사혁명위원회의 명령은 철회되어야했다." 이것은 사령부를 반혁명 세력의 도구라고 선언한 문서였다. 이틀 전에 사령관이 무례하게 내보냈던 똑같은 사절들은 이제 사령부가 작성한 합의문의 거친 초안을 소비에트 보고용으로 요구하고 직접 받았다. 토요일 같았으면 이 반정도 명예로운 항복 조건은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월요일인 오늘은 이미 너무 늦었다. 사령부는 결코 오지 않는 답변을 기다렸다.

선언문을 통해 군사혁명위원회는 수도의 시민들에게 군부대와 수도 및 인근의 가장 중요한 지점들에 대표위원을 임명한 조치를 설명했다. "소비에트의 대표인 이들은 신성 불가침의 존재이다. 이들에 대항하는 것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에 대항하는 것과 같다." 시민들은 이렇게 제의 받았다: 소요사태가 일어날 경우 가장 가까이 근무하는 대표위원에게 호소하여 군대를 부르자. 이것은 주권의 언어였다. 그러나 아직도 위원회는 공개적인 봉기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묻는다: "스몰니 학원은 어리석게 구는 것일까 아니면 공격을 유도하기 위해 동궁과 술래잡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도 저것도 아니었다. 위원회는 대중의 압력과 주둔군의 무게로 정부를 몰아내고 있었다. 전투 없이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총을 쏘지 않고도 진지를 점령하고 있으며 행진 중인 자기 군대를 통합하고 강화시키고 있었다. 적으로부터 눈을 잠시도 떼지 않은 채 위원회는 자신의 압력으로 적의 저항력을 측정하고 있었다. 한발 앞으로 나갈 때마다 소비에트에 유리하게 무력을 지휘할 수 있다. 노동자와 주둔군은 봉기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누가 먼저 무기를 들라고 촉구할 것인가? 정부의 역량을 몰아내는 이 공세 과정에서 누가 먼저 정체를 드러낼 것인가?  이제 문제는 시간이었다. 만약 마지막 순간에 정부가 용기를 내거나 절망하여 전투 신호를 낼 경우 이에 대한 책임은 동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비에트가 먼저 공격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10월 23일의 소비에트 선언문은 정부 타도 이전에 권력의 타도를 의미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적대 정부의 팔과 다리를 묶은 후 머리를 타격할 계획이었다. 적의 뼈를 합법적으로 분지르고 정부의 남은 의지를 최면으로 마비시키는 "평화 침투" 전술을 적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위원회의 역량이 의심의 여지없이 월등했으며 이 월등한 역량이 시간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원회는 주둔군 배치 지도를 앞에 놓고 매일 연구하고 있었다. 각 연대의 투쟁 열기를 알고 있었고 병영의 견해와 공감이 바뀌는 순간 순간을 감지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도에는 일부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다. 이것들을 제거하거나 그 영항력을 최소한으로 감소시켜야했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의 군대 위원회들 다수가 부정적인 또는 최소한 의심스러운 정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19일에 명백히 드러났다. 이제 최소한 정치적으로 주둔군 전부가 군사혁명위원회를 지지하고 이 요새를 포위하고 있다면 요새를 정복할 단호한 조치를 취할 시간이 되었다. 요새의 소비에트 대표위원 블라곤라보프 상병은 병사들로부터 저항을 받았다. 요새의 정부 사령관은 볼세비키의 지도를 거부했다. 그가 이 젊은 대표위원을 체포할 것이라고 뻐기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기조차 했다. 뭔가를 그것도 빨리 시행할 필요가 있었다. 안토노프가 제안했다: 파블로프스키 연대의 믿을만한 일개 대대를 이끌고 요새의 적대적인 부대들을 무장 해제시키겠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 단호한 작전이었다. 이것을 장교들이 이용하여 유혈사태를 초래하고 주둔군의 단결을 해칠 수도 있었다. 이런 극단의 조치를 취하는 것이 정말 필요할까? 안토노프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문제를 고려하기 위해 트로츠키를 불렀다....그는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충고는 그의 혁명적 본능의 산물이었다: 내부를 통해 요새를 장악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요새의 군대들이 우리에게 우호적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의 말은 옳았다. 트로츠키와 라쉐비치는 요새의 회의에 참석했다." 위험해 보이는 이 작전의 결과를 소비에트 본부는 크게 흥분하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23일 낮 12시쯤 요새에 들어갔다. 정원에서 회의가 이미 진행 중이었다. 우익의 연설가는 대단히 조심스러웠으며 문제를 회피하고 있었다....병사들은 우리말을 듣고 우리편으로 넘어왔다." 스몰니 학원의 3층에서는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전화를 통해 기쁜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표트르파블로비치 요새 주둔군은 이제부터 군사혁명위원회의 명령만 받아들이겠다고 엄숙하게 약속했다.

요새의 정서가 이렇게 변한 것은 물론 한 두 번의 연설 때문이 아니었다. 과거부터 미리 잘 준비되었던 결과에 불과했다. 병사들은 군대 위원회보다 훨씬 좌에 위치해 있었다는 것이 판명 났다. 도시의 병영보다 요새의 성벽 뒤에서 약간 더 오래 지속된 과거의 규율은 이미 껍질에 급이 가 있었다. 이것은 한번 건드리자 쉽게 무너져 내렸다.

이제 요새 대표위원 블라곤라보프는 자신 있게 요새에 자리를 잡고 자신의 조그만 본부를 조직했다. 그리고 이웃한 볼세비키 소비에트와 가장 가까운 병영의 위원회들과 통신을 확립할 수 있었다. 한편 공장과 군부대의 대표들은 무기를 얻는 길을 찾기 위해 요새로 올라오고 있었다. 요새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생기가 지배했다. "회의와 대중 집회의 새로운 성공들을 알리는 소식들로 전화는 계속 울렸다." 가끔 귀에 익지 않은 목소리가 전선 토벌대가 어떤 기차역에 도착했다고 알리곤 했다. 그러나 즉시 조사한 결과 적들이 유포한 날조임이 드러났다.

이날 소비에트 저녁 회의에는 출석 대의원이 대단히 많았고 분위기가 고조되어 다른 회의 때와는 양상이 달랐다.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를 획득했고 10만 정의 소총이 있는 크론베르크스키 무기고를 점령했기 때문에 봉기가 승리할 가능성은 크게 보장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 대변인은 안토노프였다. 군사혁명위원회가 임명한 대표위원들이 하나 하나 정부 기구들을 몰아낸 상황을 그는 묘사했다: 대표위원들은 모든 곳에서 당연히 권력 당국으로 인정받았다; 이들은 두려움이 아니라 원칙에 따라 복종되었다. "모든 곳에서 대표위원을 임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후진 군부대가 선진 군부대를 따라잡기 위해 서두르고 있었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는 7월의 독일 자금 비방에 제일 먼저 굴복했던 부대였다. 그런데 이제 이 연대는 소속 대표위원 추드노프스키를 통해 자기들이 정부 편이라는 소문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 생각 자체가 악의에 찬 모욕으로 간주되었다!...물론 의례적인 순찰 임무는 계속되었지만 이것은 군사혁명위원회의 동의에 따른 것이라고 안토노프는 말한다. 무기와 자동차를 보내라는 지구 사령부의 명령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이렇게 해서 사령부는 이제 누가 수도의 주인인지를 확실히 알았다.

"전선과 주위 지구들로부터 정부군이 수도를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을 군사혁명위원회는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어떤 조치들을 취했는가?"라는 질문에 대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루마니아 전선에서 기병 부대들이 보내졌으나 프스코프에서 정지 당했다. 이송 중에 목적지와 이송 이유를 알아낸 제 17 보병 사단은 이송을 거부했다. 벤덴에서는 두 연대가 수도 이송을 저지시켰다. 키에프에서 수도로 이송 예정이었던 카자흐 기병과 사관생도들 그리고 짜르스코에 셀로에서 수도로 이송된 돌격대에 대해서는 아직 소식이 없다. 이들은 군사혁명위원회에 감히 손을 대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말은 스몰니의 흰색 홀에 음악으로 울렸다. 안토노프가 보고서를 읽고 있는 순간 봉기 본부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활동하고 있다는 인상이 들었다. 사실 소비에트 본부는 숨길 것이 없었다. 혁명의 정치적 환경은 혁명 세력에게 너무 유리해서 솔직함 자체가 위장술이 되었다: 이런 식으로 봉기를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나 지도자 어느 누구도 "봉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공식적인 조심성의 발로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봉기라는 말 자체가 실제 상황에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케렌스키 정부가 봉기를 일으키는 것만이 남았다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 23차 회의에서 트로츠키가 군사혁명위원회의 목적이 권력 장악이라고 인정했다고 이스베스티아 지가 보도하지는 않았다. 이 위원회의 임무는 체레미소프의 전략적 주장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원래 선언되었었다. 그런데 이 원래의 의도가 이미 오래 전에 기각되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사실이었다. 수도의 연대들을 이송하는 문제는 이제 진짜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23일에도 대화의 주제는 봉기가 아니었다. 다만 필요하다면 군대를 동원하여 다가올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안토노프의 보고에 대해 결의문이 채택된 것은 바로 이 정신에 입각해서였다.

그렇다면 이 사건들을 정부 상층부는 어떻게 보고 있었는가? 22일 밤 케렌스키는 전쟁 총사령부의 참모장 두호닌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했다: 연대들이 사령부의 명령을 거부하도록 군사혁명위원회가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전쟁 총사령부 출발을 미룬 것은 봉기와 같은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 전혀 아니라고 그는 말했다: "그 문제는 모든 것이 잘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없이도 해결될 수 있다." 걱정하는 그의 장관들에게 케렌스키는 안심시키듯이 이렇게 선언했다: 장관들과는 달리 다가오는 공격에 그는 아주 기뻐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볼세비키당과 최종적으로 결판을 낼" 기회일 것이기 때문이다. 동궁에 자주 드나들던 입헌민주당의 나보코프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공격이 일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볼세비키당의 공격을 격퇴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합니까?"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병력을 나는 가지고 있다. 앞으로는 봉기에 대해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저들은 확실히 진압될 것이다."

케렌스키의 이 낙관적인 경박함을 이후 입헌민주당은 빈정거렸다. 그러나 이 정당은 잊어버린 것이 있었다. 실제로 케렌스키는 이 사건들을 입헌민주당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21일에 밀류코프의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내적인 심대한 위기로 크게 침식된 볼세비키당이 감히 가두 시위를 기도한다면 이들은 즉시 어려움 없이 진압될 것이다. 또 다른 입헌민주당 신문은 이렇게 덧붙였다: "폭풍우가 다가오고 있으나 아마 이것은 공기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정도일 것이다." 단은 이렇게 증언했다: 예비의회 회의장 복도에서 입헌민주당과 주위의 그룹들은 볼세비키당이 될 수 있으면 빨리 가두 시위에 나섰으면 하는 소망을 큰 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활짝 열린 곳에서 전투가 벌어지면 이들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격퇴 당할 것이다." 입헌민주당 지도자들은 잔 리이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봉기에서 패배한 후 볼세비키당은 제헌의회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22일과 23일에 케렌스키는 한번은 중앙집행위원회 지도자들과 또 한번은 전쟁 총사령부와 논의를 했다: 군사혁명위원회를 체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자신들이 대표위원에 대한 문제를 직접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폴코프니코프 역시 서둘러 군사혁명위원회를 체포하는 것이 가치가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필요할 경우 군사력은 "충분한 정도 이상이다." 케렌스키는 폴코프니코프의 말도 들었으나 그의 친구인 화해주의자들의 말을 더 많이 들었다. 그는 자신 있게 이렇게 계산하고 있었다: 위험이 다가올 경우 가족들 사이의 모든 오해들에도 불구하고 중앙집행위원회가 제 시간에 자신을 도와줄 것이다. 7월과 8월에는 그랬다. 계속 이렇게 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그러나 지금은 7월도 8월도 아니었다. 10월이었다. 크론슈타트 쪽에서 차갑고 매서운 발트해의 바람이 수도의 광장과 부두로 몰아치고 있었다. 사관생도들이 발꿈치까지 내려오는 긴 외투를 입고 거리를 순찰하면서 자신들의 걱정을 승리의 노래로 잠재우고 있었다. 기마 경찰이 거리를 따라 위 아래로 의기양양하게 말을 타고 다녔다. 이들의 권총은 완전히 새로운 권총집에 들어가 있었다. 아니다, 정부의 권력은 아직도 충분히 위압적이다! 아니면 혹시 이것이 착각이 아닐까? 네프스키 가도의 모퉁이에서 순진하면서도 똑똑한 관찰력을 가진 미국인 잔 리이드가 "볼세비키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이 달린 레닌의 팜플렛을 사고 있었다. 이제 돈 대신 유통되고 있는 우표로 그는 책값을 지불했다.

 

 

제 5장 레닌이 봉기를 촉구하다

공장, 병영, 농촌, 전선, 소비에트 이외에도 혁명은 실험실을 하나 더 가지고 있었다. 바로 레닌의 두뇌였다. 지하로 피신한 그는 7월 6일부터 10월 25일까지 111일 동안 당 중앙위원들과의 모임마저도 줄이지 않을 수 없었다. 대중과의 직접적 교류나 어떤 조직과의 접촉도 박탈된 그는 더욱 결연하게 혁명의 근본문제들에 생각을 집중했다. 이 결과 이 문제들은 그의 방식과 본성의 필요에 따라 맑스주의의 핵심 문제들로 환원되었다.

민주주의자들 심지어는 그 가장 좌파들조차 권력 장악을 반대하는 논거를 이렇게 들었다: 근로 대중은 국가기구를 통달할 능력이 없다. 볼세비키당 내부의 기회주의자들조차 "국가기구!"에 대해 이와 똑같은 두려움을 가졌다. 모든 소부르주아는 인민과 계급들 위로 상승된 이 신비로운 원리 앞에 두려움을 갖도록 교육받는다. 그리고 교육받은 속물은 골수까지 그의 아버지, 아저씨, 상점주인, 부유한 농민들과 똑같이 국가기구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다. 국가기구는 전능한 기관들의 집합체이다.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결정하고 상업적 특허를 부여한다. 세금이라는 채찍질을 가하고 벌을 주다가도 가끔 사면을 베푼다. 결혼과 출생을 법적으로 인정받고 죽음마저 인정받기 위해 이 앞에서 예의바르게 줄을 서서 기다려야한다. 국가기구! 상상 속에서 모자 뿐 아니라 신발까지 벗는 소부르주아는 양말을 신은 발로 발뒤꿈치를 든 채 이 우상의 신전 안으로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바로 케렌스키, 라발, 맥도널드, 힐퍼딩이다. 그러나 이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적 행운이나 상황의 힘에 의해 그가 장관으로 임명되어 이 우상의 신전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바로 이렇다. 그는 "국가기구" 앞에 겸허하게 복종하는 것으로 이 우아한 생색에 대답할 수 있을 뿐이다. 러시아의 급진 지식인들은 혁명기에조차 국가기구 안으로 감히 기어 들어갈 생각을 못했다. 귀족 작위를 가진 지주나 대자본가의 등뒤에 숨어서 여기에 접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들은 두려움과 분노에 차서 볼세비키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거리에서 참주선동이나 하는 저 인간들이 국가기구를 통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참으로 한심하다!

공식 민주주의의 줏대 없는 무기력에 직면하여 소비에트는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혁명을 구원했다. 이때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신념이 없는 자들은 이 모범으로부터 배워야한다. '부르주아 계급을 방어할 수밖에 없는 구 국가기구를 대체할 기구가 우리에게 없다'고 말하는 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라. 우리에게도 국가기구가 있다. 소비에트가 바로 이것이다. 대중의 주도력과 독자성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대중의 혁명조직들을 신뢰하라. 그러면 국가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코르닐로프에 대항하여 단결과 열성을 통해 보여주었던 그 힘과 웅대함과 정복될 수 없는 의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지하생활의 첫 1, 2개월 동안 레닌은 [국가와 혁명]을 저술했다. 이 저서의 주요 자료들은 그가 전쟁 중 해외에 있을 때 수집해 놓았었다. 그는 일상에서 제기되는 실제적 문제들을 심사숙고하였다. 이와 똑같은 노력으로 그는 이 저서에서 국가에 대한 이론적 문제들을 검토했다. 그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론은 실제 행동의 지침이기 때문이었다. 이 저서에서 그는 정치이론의 새로운 언어를 소개하겠다고 제안한 적이 단 일분도 없었다. 이와 반대로 그는 대단히 겸손하게 저작에 임하면서 자신을 맑스의 제자라고 강조했다. "국가에 대한 맑스주의의 진정한 가르침"을 소생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그는 말했다.

이 저서에는 인용문들이 꼼꼼하게 선정되어 있고 논쟁점들이 자세하게 해석되어 있다. 그리고 글들을 분석한 이 저서의 이면에는 지성과 의지가 거대하게 용솟음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을 느낄 수 없는 현학자에게는 이 저서는 현학적으로 느껴질지 모른다. 이 저서를 통해 레닌은 새롭고 보다 높은 역사적 기초 위에 국가의 계급 이론을 재확립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하여 레닌은 맑스의 사상에 새로운 구체성과 새로운 의의를 부여했다. 그러나 국가를 다룬 이 저서의 비할 바 없는 중요성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혁명을 과학에 입각하여 소개한 데에 있다.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지구 표면의 6분의 1을 혁명으로 정복하기 위해 이 맑스 "평론가"는 자기 당을 준비시키고 있었다.

역사적인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요구에 국가가 스스로를 단순히 다시 적응시킬 수 있다면 혁명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부르주아 계급도 혁명을 통해서만 권력을 장악했다. 이제 노동계급의 차례가 왔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노동계급 혁명의 이론적 무기인 맑스주의의 의의를 레닌은 복원시켰다.

노동자들이 국가기구의 주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가? 그러나 이것은 구 국가기구를 장악해서 새로운 목적에 이용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반동적인 유토피아이다. 이것이 레닌의 가르침이다. 구 국가기구 인물들의 선정, 이들의 교육, 이들간의 상호관계 등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임무와 모두 충돌한다. 권력 장악 후 우리의 임무는 구 국가기구를 재교육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분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무엇으로 대체하는가? 바로 소비에트로 대체한다. 혁명 대중의 지도자요 혁명 교육의 도구였던 소비에트는 이제 새로운 국가질서의 기관이 될 것이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 저서를 읽는 독자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저서는 진정 권력 장악 후에나 출판될 것이다. 주로 자신의 내적 자신감과 인류의 미래를 위해 레닌은 이 저서를 통해 국가의 문제를 고찰했다. 맑스주의 사상의 연속성을 보존하는 것은 그의 계속적인 관심사 가운데 하나였다. 7월에 그는 카메네프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우리 둘 사이에서만 하는 얘기인데, 만약 혁명의 적들이 나를 제거한다면 나의 조그만 노트인 맑스주의 국가론을 출판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노트는 내 짐들과 함께 스톡홀름에 묶여있는데 파란색 표지로 되어 있다. 인용문들은 전부 맑스, 엥겔스 그리고 판네퀘크를 논박한 카우츠키의 글 등에서 따온 것이다. 주석과 논평들은 연속되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 이것들을 정리하여 출판하는 시간은 일주일이면 충분할 것이다. 이 노트를 출판하는 것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맑스주의에서 이탈한 자는 플레하노프와 카우츠키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제시하는 조건은 이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둘 사이만의 일이다." 적대국 독일의 첩자로 탄압 당하고 있으며 적들이 자신을 암살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이 혁명 지도자는 맑스와 엥겔스로부터 인용한 글들이 들어 있는 "파란색" 노트의 출판에 대해 고심했다. 이 편지는 그의 마지막 비밀 유언장이 될 것이었다. "나를 제거한다"는 표현은 그가 아주 싫어하는 비애감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을 맡긴다는 자체가 근본적으로 비애감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등뒤에서 가해질 지 모르는 공격을 기다리면서 레닌 자신은 정면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문을 읽고 당에 지시하는 편지를 쓰는 시간 틈틈이 그는 마침내 스톡홀름에서 도착한 그의 귀중한 노트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그를 둘러싼 환경은 정지하지 않았다. 국가의 문제가 실제 행동으로 결정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2월 혁명으로 짜르가 타도된 직후 아직 스위스에 머물러 있을 때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소수의 권력 장악을 주창하는 블랑끼의 추종자가 아니다...." 이 사고를 그는 러시아에 도착한 후에도 발전시켰다: "우리는 소수이다 --- 대중은 아직 우리를 신뢰하지 않는다. 우리는 기다리는 방법을 알고 있다....대중은 우리편으로 돌아설 것이다. 계급 역관계를 설명한 후 우리는 이들에게 말할 것이다: 우리의 때가 왔다." 혁명 후 첫 몇 개월 동안 권력 장악 문제는 곧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문제였다.

반동의 7월의 공격 후 레닌은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권력은 무장봉기를 통해서만 장악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화해주의자들에 의해 기가 꺾인 소비에트가 아니라 공장위원회에 당연히 기초해야한다; 봉기가 승리한 후 소비에트는 권력기관으로 새로 수립되어야한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말한 후 2개월만에 볼세비키들은 화해주의자들의 손에서 소비에트를 빼앗았다. 이 문제와 관련된 레닌의 오류는 그의 전략적 천재성을 대단히 특징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가장 불리한 전제를 통해 가장 대담한 계획을 수립했다. 4월에 독일 영토를 거쳐 러시아로 귀국할 때도 그는 역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감옥으로 끌려갈 각오를 했다. 7월 5일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적들은 아마 우리를 모두 총살시킬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우리가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하는 것을 화해주의자들은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폴레옹은 베르띠에 장군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썼다: "군사작전을 수립할 때 나보다 더 겁이 많은 인간은 없을 것이다. 나는 모든 위험들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불리한 일들을 과장한다....그러나 일단 결정하면 성공을 보장할 사항만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겁이 많다는 부적절한 허세만 제외하면 이 생각의 핵심은 레닌에게도 완벽히 적용된다. 전략의 문제를 결정할 때 그는 자신의 결의와 넓은 시야를 적들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다. 레닌의 전술적 오류는 대개 그의 전략적 위력의 산물이었다. 위에서 언급한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오류라는 말은 전혀 적절하지 않다. 의사가 병을 진단할 때는 가능성이 없는 병들을 하나 하나 제거하면서 가장 가능성이 많은 병을 지정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최악의 가능성들을 가지고 생각을 시작했다. 이것은 오류가 아니라 분석 방법이다. 볼세비키당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소비에트를 장악하자마자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때가 왔다." 4월과 7월에 그는 대중의 투쟁에 제동을 걸었다. 8월에 그는 이론적으로 새로운 조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9월 중순부터 그는 모든 힘을 다해 권력 장악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는 너무 일찍 나서는 것이 아니라 미루는 것이 위험이었다. "지금 권력장악의 문제에서 시기상조는 있을 수 없다."

중앙위원회에 보낸 그의 글과 편지에서 레닌은 정세를 분석하면서 언제나 국제적 조건을 강조했다. 전쟁 중에 유럽의 노동계급이 각성하고 있다는 징후와 사실들이 포착되었다. 이것들은 다음과 같은 그의 판단에 대한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되었다: 러시아 혁명에 대한 외국 제국주의자들의 직접적 위협이 꾸준히 감소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대중이 개량주의자들을 체포했다. 더욱이 독일에서는 함대가 봉기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그는 세계 정세가 극도로 변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는 세계 노동계급 혁명의 입구에 서 있다."

그러나 스탈린 일당의 역사학자들은 레닌의 사상적 출발점인 국제주의를 모른 채 하고 있다. 레닌의 계산이 이후 사건들에 의해 틀린 것으로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이 뿐이 아니다. 최근의 이론들에 따르면 어떤 경우든 러시아 혁명만으로도 사회주의를 충분히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국제정세에 대한 레닌의 평가는 환상이 결코 아니었다. 모든 나라들이 전쟁 상황에서 검열을 실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세를 올바로 파악하기는 대단히 힘들었다. 그러나 이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가 관찰한 징후들은 실제로 혁명의 폭풍을 암시하고 있었다. 1년 내에 중부 유럽 제국들의 기초 자체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이탈리아 뿐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같은 승전국에서도 지배계급들은 오랫동안 자유롭게 행동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이 아니었다면 강력하고 보수적이고 자신감이 넘친 자본주의 유럽에 대항하여 고립된 채 기초가 확고하지 못한 러시아의 노동계급 혁명은 몇 개월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력한 자본주의 유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서유럽에서 혁명을 통해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지는 못했다. 개량주의자들이 부르주아 체제를 구원했다. 그러나 이 상황 때문에 최초의 가장 위험한 시기에 소비에트 공화국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노동계급의 혁명 투쟁은 강력했다.

레닌은 국제 정세에 대한 평가를 언제나 가장 우위에 놓았다. 그러나 이것만이 그의 심오한 국제주의의 표현이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자체를 유럽 혁명의 추진력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종종 되풀이 말했듯이 유럽 혁명은 후진 러시아의 혁명보다 인류 운명에 비할 바 없이 중요했다. 국제적 임무를 이해하지 못한 볼세비키들을 그는 대단히 통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이렇게 빈정대었다: "독일의 봉기 대중에 공감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러시아의 봉기를 배격하자. 이것은 진짜 합리적인 국제주의가 될 것이다!"

민주협의회가 열리던 중에 레닌은 중앙위원회에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했으므로 볼세비키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장악해야한다...." 속임수로 대의원이 배정된 민주협의회에서 농민 대의원 대다수가 입헌민주당과의 연립정부를 반대했다. 이 사실은 그가 보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변화였다. 부르주아 계급과의 연합을 원치 않는 농민들은 볼세비키당을 지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의 동요에 인민은 싫증이 났다. 우리가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승리할 때만 농민들은 우리편으로 넘어올 것이다." 따라서 당의 임무는 "두 수도에서 무장봉기, 권력 장악, 정부 타도를 일정에 올리는 것이다...." 이때까지 이렇게 명령조로 적나라하게 봉기의 임무를 제기한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레닌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각종 선거와 표결을 아주 꼼꼼하게 관찰하면서 실제 계급 역관계를 반영하는 이 수치들을 수집하였다. 선거통계에 대한 반(半)무정부주의적 무관심은 레닌의 경멸을 받았을 뿐이었다. 동시에 레닌은 의회체제의 지수들을 실제 계급 역관계와 동일시한 적도 결코 없었다. 계급 역관계를 판단할 때 그는 언제나 직접 투쟁을 선거수치보다 우위에 놓았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혁명적 노동계급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고 이들을 투쟁으로 끌어들이는 관점에서 보면 혁명적 노동계급의 역량은 선거 투쟁보다 선거 외 투쟁에서 비할 바 없이 크다. 내전의 문제에서 이것은 아주 중요한 관찰 사항이다."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레닌은 농민운동이 결정적 국면에 들어섰다는 것을 주목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즉시 모든 결론들을 이것으로부터 도출했다. 병사들처럼 농민들도 더 이상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9월말에 레닌은 이렇게 적고 있다: "전국 차원의 위기를 조성하는 농민 봉기와 충돌을 일으키는 다른 모든 정치적 징후들은 전혀 무의미할 것이다." 농업문제는 혁명의 토대이다. 정부가 농민 반란을 제압할 경우 이것은 "혁명의 장례식"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 더 유리한 조건을 기대할 수 없다. 행동의 시간이 다가왔다. "위기는 무르익었다.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국제 노동계급 혁명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있다. 위기는 무르익었다."

레닌은 봉기를 촉구한다. 단순하고 무미건조하고 가끔 날카로운 문구 하나 하나에는 혁명에 대한 가장 치열한 열정이 느껴진다. 10월초 그는 뻬쩨르부르그 당협의회에 이렇게 편지를 보낸다: "노동계급과 병사들이 가까운 미래에 케렌스키 정부를 타도하지 않으면 혁명은 물 건너간다...모든 역량을 결집하여 케렌스키 정부 타도의 필사적이고 최후이자 결연한 투쟁의 무조건적 필요성을 노동자와 병사들에게 인식시켜야한다."

대중이 당보다 더 좌에 있다고 레닌은 이미 여러 차례 말한 적이 있었다. 또한 평당원들은 "고참 볼세비키"의 당 상층부보다 더 좌에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중앙위원회의 내부 파벌과 정서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서 중앙위원회가 어떤 형태로든 혁명에 해로운 조치를 취할 것도 예상하고 있었다. 반면에 그는 봉기에 대한 지나친 조심성인 대기주의에 대해 크게 우려했다. 이 경향은 수십 년을 준비해온 역사적으로 중요한 상황을 그냥 지나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레닌은 자기의 통제에서 벗어난 중앙위원회를 신뢰하지 않았다. 그가 지하에서 보낸 편지들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틀린 것이 별로 없었다.

레닌은 대부분의 경우 뻬쩨르부르그에서 이미 결정이 내려진 뒤에야 자기 생각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레닌은 계속해서 좌에서 중앙위원회를 비판했다. 그의 반대는 봉기문제가 제기된 상황에서 나왔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이 문제에 한정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가 화해주의 집행위원회, 민주협의회, 일반적으로 소비에트 상층부의 의회주의적 행위 등에 너무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고 레닌은 생각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연립 최고회의를 구성하자는 중앙위원회의 제안을 그는 날카롭게 반대했다. 예비의회에 당이 참여하기로 한 결정을 그는 "부끄러운" 짓이라고 낙인찍었다. 9월말 발표된 볼세비키당의 제헌의회 후보자 명부에 대해 그는 분노를 터뜨렸다. 이 명부에는 지식인들은 너무 많았고 노동자들은 너무 적었다. "제헌의회를 연설가와 문필가로 가득 채우는 것은 기회주의와 국수주의의 낡아빠진 길을 가자는 것이다. 이것은 제 3 인터내셔널이 아니다." 더욱이 후보자 명부에는 투쟁으로 입증되지 않은 신입 당원들이 너무 많다! 여기서 레닌은 예외적인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트로츠키와 같은 후보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삼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트로츠키는 귀국 즉시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로 그는 지구간 그룹에서 볼세비키당과의 통합을 위해 투쟁했다. 세 번째로 7월의 어려운 시기에 그는 절정에 서서 자신의 임무를 다했으며 혁명적 노동계급의 당을 헌신적으로 옹호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 명부에 이름이 들어간 과거의 당원들 대다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 점은 명확하다...."

4월이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레닌은 다시 중앙위원회와 대립하고 있다. 그때와 지금은 문제가 달라졌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에 반대하는 그의 일반 정신은 똑같다: 중앙위원회는 너무 수동적이고 지식인들의 여론에 너무 민감하고 화해주의자들에 대해 너무 화해주의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무장봉기의 문제를 볼세비키의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 중앙위원회는 너무 관심이 없고 숙명주의적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금은 말에서 행동으로 옮아갈 때이다: "우리 당은 지금 민주협의회에서 실제적으로 당 대회를 구성했다. 이 대회는 원하든 원치 않든 혁명의 운명을 결정해야한다." 무장봉기를 통한 정부의 타도 이외에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봉기에 대한 이 첫 편지에서 레닌은 또 하나의 예외를 두고 있다: "문제는 봉기의 '날짜' 또는 좁은 의미에서 봉기의 '순간'이 아니다. 이것은 노동자 병사 대중과 접촉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일반적 목소리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2, 3일만에 레닌은 민주협의회의 붕괴에 명백히 영향을 받아 즉시 행동을 취할 것을 주장하고 실제 계획을 즉시 제출하고 있다. (이 당시에 편지들은 날짜가 명기되지 않았다. 잊어버려서가 아니라 비밀활동과 관련된 이유들 때문이었다.)       

"민주협의회에서 볼세비키 분파의 수를 늘리려는 노력보다 그 정치적 질을 공고히 하는 노력을 즉시 기울어야한다....짤막한 볼세비키당 선언문을 작성해야한다....우리의 분파 전체를 공장과 병영으로 이동시켜야한다. 동시에 일분도 허비하지 말고 봉기 사령부를 조직해야한다. 우리 부대들을 배치하고 충성스런 연대들을 가장 중요한 지점들로 이동시켜야한다. 민주협의회 회의장인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을 포위하고 표트르파블로프스키 요새를 점령해야한다. 전쟁 총사령부와 정부를 체포하고 사과생도와 야만 사단에 대항해 죽을 각오를 한 부대들을 보내야한다. 적들이 도시 중심부로 진입하지 못하게 막아야한다. 무장 노동자들을 결집하고 필사적이고 최종적인 전투를 벌일 것을 촉구해야한다. 즉시 전신전화국을 점령하고 중앙전화국에 봉기 지도부를 수립해야한다. 전화를 통해 모든 공장, 연대, 주요 무장 투쟁 지점들과 중앙전화국을 연결시켜야한다 등등." 날짜의 문제는 더 이상 "대중과 접촉하고 있는 활동가들의 일반적 목소리"에 의존하지 않는다. 레닌은 즉시 행동을 취할 것을 제안했다: 민주협의회에 최후통첩을 제시하고 퇴장하라; 그리고 무장 대중을 이끌고 다시 회의장으로 돌아가라. 정부 뿐 아니라 화해주의자들의 최고 기구에 대해서도 동시에 결정적 타격을 가해야한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비난한다: "개인 편지를 통해서 민주협의회의 체포를 요구한 레닌은 신문에는 '타협'을 제안했다: 멘세비키당과 사회혁명당이 권력을 정부 장악하게 하고 소비에트 대회가 무슨 말을 하는지 보자....트로츠키도 이 생각을 민주협의회와 그 주위에서 끈질기게 옹호했다." 속임수에 대한 낌새는 조금도 없는데 수하노프는 속임수라고 생각한다. 코르닐로프 반란을 제압한 직후였던 9월 첫 며칠 동안 레닌은 화해주의자들과의 합의를 제안했다. 화해주의자들은 이 제안을 어깨를 들썩하며 무시했다. 이들은 볼세비키당에 대항하여 민주협의회를 입헌민주당과의 새 연립정부를 위한 위장술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이제 합의의 가능성은 절대적으로 사라졌다. 이때부터 권력 문제는 공개적인 투쟁을 통해서만 결정될 수 있었다. 1 단계는 2 단계를 2주일 앞섰으며 2 단계를 조건 지웠다. 수하노프는 이 두 단계를 뒤섞고 있다.

민주협의회의 새로운 연립정부 시도로부터 봉기는 필연적으로 도출되었다. 그러나 레닌의 전술 변화의 급격함은 볼세비키당 지도자들조차 깜짝 놀라게 했다. 그의 편지에 기초하여 민주협의회의 볼세비키 분파를 단결시키는 것은 "수를 늘리려는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확실히 불가능했다. 이 분파의 정서는 레닌이 우려했던 대로 화해주의 경향으로 흘렀기 때문에 예비의회 불참 제안을 찬성 50표, 반대 70표로 거부해버렸다. 예비의회 불참이야말로 봉기로 가는 첫 걸음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의 계획은 전혀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이로부터 4년이 지난 후 과거를 회상하는 저녁 모임에서 과장과 위트가 특징인 부하린이 이 에피소드를 정확하게 묘사했다: "레닌의 편지는 대단한 박력을 뿜었으며 우리에게 온갖 처벌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놀라서 숨이 막혔다.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이렇게 급작스럽게 제기한 적이 없었다....처음에 우리는 모두 어쩔 줄 몰라했다. 나중에 이 문제를 논의한 후 결정에 이르렀다. 중앙위원회가 만장일치로 레닌의 편지를 불태우기로 결정한 것은 우리 당의 역사에서 그때가 유일했다....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우리는 무조건 믿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을 장악하고 민주협의회를 해산시킨 후 우리가 러시아의 나머지에 대항해 요새를 구축할 수는 없었다."

비밀 활동의 필요상 위험한 레닌의 편지 복사 본 여러 장을 불태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만장일치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앙위원들 가운데 6명이 찬성했고 4명이 반대했으며 6명이 기권했다. 역사를 위해서 다행스럽게 복사 본 한 장은 보존되었다. 그러나 부하린의 말은 맞았다. 중앙위원회 전원은 각기 다른 동기로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일부는 일반적으로 봉기 자체를 반대했고 다른 위원들은 민주협의회 회기 중에 봉기를 일으키는 것은 가장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위원들은 그저 동요하면서 기다리는 태도를 취했다.

이 직접적 저항에 직면하자 레닌은 스밀가와 일종의 음모를 꾸몄다. 스밀가 역시 핀란드에 있었으며 소비에트 지역위원회 의장으로 어느 정도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는 1917년에 당내에서 극좌파였고 이미 7월에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여 봉기를 일으키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책의 전환점에서 레닌은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았다. 9월 27일 레닌은 긴 분량의 편지를 스밀가에게 보냈다: "...지금 우리는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결의문을 통과시키는 일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우리는 '날짜들'을 정하고 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열리는 10월 20일이라 --- 이렇게 날짜를 연기시키는 것을 웃기는 짓이 아닌가? 이런 방식에 의존하다니 웃기는 짓이 아닌가?) 케렌스키를 타도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군대를 준비시키는 작업을 당은 하지 않고 있다....무장봉기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불어넣기 위해 당내에서 선동작업을 해야한다....더욱이 그대의 역할에 대해서는...; 가장 충성스러운 군인들로 비밀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과 봉기의 모든 측면들에 대해 논의하고 뻬쩨르부르그와 인근 부대들의 인적 구성과 지위, 핀란드의 부대들을 뻬쩨르부르그로 이동시키는 방안, 함대의 동태 등에 대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수집하고 그대가 확인해야한다, 등등." 레닌은 이렇게 요구했다: "핀란드에 주둔한 카자흐 기병 부대들에게 체계적으로 선전을 해야한다....카자흐 부대들의 태도에 대한 모든 정보를 연구하고 핀란드의 최상의 수병과 병사들로 선동 부대를 조직하여 이들에게 보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의 준비를 올바로 하도록 이런 종류의 구호를 즉시 유포시켜야한다: 권력이 즉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로 넘어가야 하며 여기서 다시 소비에트 대회로 넘어가야 한다. 케렌스키의 코르닐로프와 같은 반혁명 준비와 전쟁을 3주일이나 더 견뎌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이 편지에는 봉기에 대한 새로운 계획이 드러나 있다: 헬싱키의 중요한 군인들을 비밀위원회로 결집시켜 이들을 봉기 지도부로 구성한다; 핀란드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봉기의 전투 부대로 삼는다. "우리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고 중대한 군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들은 핀란드 부대들과 발트해 함대인 것 같다." 레닌은 뻬쩨르부르그 외곽에서 정부를 가장 크게 공격하는 계획을 세웠다. 동시에 "마음의 준비를 올바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는 핀란드의 군대가 정부를 타도하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을 계승할 수 있다.

전에 밝힌 계획과 똑같이 이 새로운 계획도 실현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카자흐 기병 사단들에 대한 선동은 곧 결과를 가져왔다: 이것에 대해서는 디벤코로부터 이미 들었다. 정부를 가장 주요하게 공격하는 군대로 발트해 함대 수병들이 참여하는 것도 나중에 채택된 계획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진짜 중요한 것은 봉기 문제를 지극히 날카롭게 레닌이 제기했기 때문에 아무도 이 문제를 회피하거나 장난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그의 사고는 직접적인 전술적 제안으로는 시간이 적절치 않았으나 중앙위원회의 태도를 떠보는 데에는 아주 요긴했다. 그의 편지는 동요하는 분자들을 반대하는 결연한 분자들에게 버팀목이 되었으며 당의 좌선회에 도움을 주었다.

피신 중에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레닌은 당의 중핵들이 상황의 심각성과 대중적 압력의 정도를 느끼게 만들려고 애썼다. 그는 볼세비키들을 개별적으로 피신처에 불러 당파적인 대질 심문을 하면서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을 시험했다. 그리고 간접적인 방법들을 통해 자신의 구호들을 당내에 깊이 인식시켰다. 이를 통해 중앙위원회가 필요에 직면하여 행동하고 투쟁을 끝까지 밀어붙이도록 강제했다.

스밀가에게 편지를 보낸 지 하루 뒤에 레닌은 위에서 인용한 [위기는 무르익었다]를 썼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중앙위원회에 일종의 선전포고를 했다. "진실을 인정해야한다. 즉시 권력을 장악하고 봉기를 일으키는 것에 반대하면서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리는 경향이나 견해가 중앙위원회와 당 상층부에 존재한다." 어떤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이 경향을 극복해야한다. "케렌스키 정부를 먼저 타도한 후 소비에트 대회를 소집해야한다."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완전한 바보짓이거나 완전한 배신행위이다...." 20일로 예정된 소비에트 대회 개막일까지는 12일 이상이 남아있다: "몇 주일 심지어는 며칠이 이제 모든 것을 결정한다." 결전을 연기하는 것은 봉기를 비겁하게 포기하자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소비에트 대회가 진행 중일 때에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멍청하게 '지정된' 봉기 날에 적들은 카자흐 기병들을 결집시킬 것이다."

편지의 어조 자체는 레닌이 보기에 뻬쩨르부르그 지도부의 대기주의가 얼마나 재앙적인 가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에 그는 맹렬한 비판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항의의 표시로 중앙위원을 사임한다. 그는 사임의 이유를 이렇게 제시한다: 민주협의회가 시작된 이래 중앙위원회는 권력 장악 문제와 관련하여 그의 주장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 기관지 편집위원회(스탈린)는 그의 글들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켜 싣고 있다; 또 "예비의회 참여와 같은 부끄러운 결정과 관련된 볼세비키당의 노골적인 오류들"을 지적하는 그의 글 일부분을 삭제했다, 등등. 중앙위원회의 이 오류를 평당원들에게 숨길 수 없다고 레닌은 생각한다: "본인은 중앙위원 사퇴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통해 본인은 당의 하부와 당 대회에 대한 선동의 자유를 누릴 것이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더 이상 어떤 공식 조치들이 취해졌는지를 문서들은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레닌은 중앙위원을 사임하지 않았다. 순간적인 짜증의 결과라고 볼 수 없는 사임 선언을 통해 레닌은 필요할 경우 중앙위원회의 내부 규율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다. 4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당 하부에 직접 호소하면 승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에 대한 공개적 반란은 임시 회의를 준비해야 가능했기 때문에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지금 부족한 것은 바로 시간이었다. 그는 사임 선언을 예비 카드로 가지고 있었을 뿐 실제로 당내 법적 권한의 범위를 완전히 넘어서는 사임은 피했다. 다만 이를 통해 그는 당 내부의 선들을 통해 더 자유롭게 공세를 계속했다.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편지 사본을 그는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위원회에 보냈다. 또한 그는 지구 지부의 믿을만한 당 활동가들에게도 사본을 보냈다. 10월초 중앙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레닌은 직접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 위원회에 편지를 보냈다: "볼세비키들은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릴 권리가 없다. 바로 지금 권력을 장악해야한다....봉기의 지연은 범죄행위이다. 소비에트 대회를 기다리는 것은 형식적 절차를 통해 유치하고 부끄럽게 장난치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봉기와 관련하여 당에 대한 위계질서의 관점에서 보면 레닌은 결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형식적인 당 규율의 문제보다 훨씬 중요했다.

비보르그 지구 위원회의 스베쉬니코프는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지하에서 레닌은 지치지 않고 계속 글을 썼다. 그리고 크루프스카야는 그의 원고들을 우리 지구위원회에서 직접 읽어주었다.... 지도자의 시급한 말들은 우리의 힘을 배가시켰다....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그때 일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지구 위원회의 어느 방에는 타자수가 일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크루프스카야는 몸을 구부리고 원본과 사본을 꼼꼼하게 대조했다. 이들 바로 옆에는 아저씨와 유전자가 사본을 한 부씩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아저씨"와 "유전자"는 지구 지도자들의 가명이었다. 지구 활동가 나우모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과 며칠 전에 중앙위원회에 전달하라는 레닌의 편지를 받았다....그 편지를 읽고 우리는 숨이 막혔다. 레닌은 이미 오래 전에 중앙위원회에 봉기 문제를 제기한 것 같다. 우리는 소동을 벌여 중앙위원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압력이었다.

10월 첫 며칠 간 레닌은 뻬쩨르부르그 당 협의회에 봉기를 지지하는 확고한 발언을 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의 주도력에 따라 협의회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피할 수 없는 봉기를 지도할 수 있도록 중앙위원회가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을 힘주어 요청한다." 이 표현만 해도 법적 위장술과 외교적 위장술이 들어있었다: 이 글은 봉기의 직접적 준비라는 말 대신 "피할 수 없는 봉기"의 지도라고 말한다. 지구 검사의 손에 볼세비키들을 기소할 물증을 쥐어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 글은 "중앙위원회에 요청한다." 당 최고기관의 권위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요구하거나 항의한다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레닌이 작성한 다른 결의문에는 표현이 좀더 솔직하다: "당의 상층부는 동요하고 있다. 이것은 권력 장악을 두려워하는 증상으로 이 투쟁을 결의문, 항의문, 협의회 등으로 대체하려는 경향이다." 이 표현은 거의 중앙위원회에 당을 직접 대결시키고 있다. 레닌은 이 표현들을 가볍게 결정하지 않았다. 문제가 혁명의 운명이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고려사항들은 배제되었을 뿐이었다.

10월 8일 레닌은 가까이 다가온 소비에트 북부지역 대회의 볼세비키 대의원들에게 연설을 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기다릴 수 없다. 이 대회를 중앙집행위원회는 11월까지 연기할 수 있다. 봉기를 지연시켜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 군대들을 더 많이 수도로 진군시키게 하면 안된다." 핀란드 주둔군, 발트해 함대, 탈린 주둔군 등을 대표하는 북부지역 대회는 "뻬쩨르부르그에 즉시 작전을 펴는" 주도력을 행사해야한다. 이번에는 수십 개의 소비에트 대표들에게 레닌 자신이 즉각적 봉기를 촉구했다. 그러나 당은 아직 아무 것도 결정하지 않았다. 당의 고위 기관들은 아직 의견을 표명하지 않았다.

지하에서 꼼꼼하게 적어 내려간 노트의 조그만 종이 몇 장을 가지고 무장 혁명, 정부의 무장 타도를 선동을 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과 당에 대한 대단한 신뢰와 함께 중앙위원회에 대한 대단히 심각한 불신이 필요했다. 자신이 창건한 당의 지도자들로부터 4월초에 고립되었던 레닌이 9월과 10월에도 이들로부터 고립된 이유는 무엇인가? 볼세비키당의 역사를 순수 혁명 사상의 산물로 묘사하는 칠칠맞은 신화를 믿는다면 이 현상은 이해할 수 없다. 실제로 볼세비키당은 명확한 사회 환경 속에서 이질적 영향들을 받으면서 발전했다. 이질적 영향들 속에는 소부르주아 환경의 영향과 문화적 후진성의 영향이 있었다. 새로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당은 내적 위기를 통해서만 적응해왔다.

볼세비키당 상층부에서 벌어진 10월 봉기 이전의 날카로운 투쟁이 제대로 조명되기 위해서는 본서 제 1권에 묘사된 당의 진화과정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바로 지금 스탈린 분파는 10월 혁명이 준비되고 성취된 과정에 대한 모든 역사적 기억을 말살하기 위해 유례 없는 노력을 그것도 국제적인 차원에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더욱더 우리는 당의 진화과정을 다시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전쟁 전에 볼세비키당은 합법 신문에 자신을 "일관된 민주주의자"로 묘사했다. 이 가명은 우연히 선택되지 않았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구호를 볼세비키당만이 그 논리적 결론으로 끌고 갔기 때문이었다. 혁명에 대한 진단에서 당은 이 선을 넘지 못했다. 그러나 전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을 제국주의와 밀착시켰다. 이로써 "일관된 민주주의" 강령은 노동계급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이 결정적으로 증명되었다. 전쟁을 통해 이 점을 명확히 인식하지 못한 볼세비키들은 전부 혁명이 터진 순간 전혀 준비가 되지 못했다. 결국 이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좌파 동반자가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고 2월 혁명이 시작될 때까지의 시기에 당의 일상생활을 밝혀주는 자료들은 대단히 그리고 유례 없이 부족하다. 더욱이 1923년부터는 이 자료들이 더욱 조작되었다. 그러나 이 난점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의 자료들을 자세히 연구하면 전쟁 기간에 당의 상층부가 지적으로 엄청난 퇴보를 했다는 것이 매일 명확히 드러난다. 전쟁 중에 당은 실제적으로 정상적 생활과 활동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여간 지적 퇴보의 원인은 대중으로부터의 고립과 해외 지도부 즉 주로 레닌으로부터의 고립이었다. 이 결과 당은 고립과 편협성의 진창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고참 볼세비키들은 러시아에서 각자 살아남도록 버려졌다. 이들 가운데 전쟁 기간 전체에 걸쳐 제 2 인터내셔널에서 제 3 인터내셔널로 가는 가장 작은 등불으로라도 인정될 수 있는 문서를 남긴 자는 하나도 없었다. 고참 당원 안토노프-사라토프스키는 몇 년 전에 이렇게 적었다: "평화의 문제, 다가올 혁명의 성격, 미래 임시정부에서 당의 역할 등은 우리에게 매우 막연하게 인식되었거나 전혀 인식되지 못했다." 이때까지 스탈린, 몰로토프, 또는 현재 지도부의 어느 누구도 간접적이고 매우 서둘러서나마 전쟁과 혁명의 전망에 대한 견해를 논문 하나, 일기 한 장, 편지 한 통을 통해 표현한 적이 없었다. 물론 전쟁, 사회민주주의의 붕괴, 러시아 혁명의 준비 등의 기간 중에 "고참 볼세비키들"이 이 문제들에 대해 글을 하나도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이 역사적 사건들은 너무 강력하게 해답을 요구했다. 더욱이 감옥과 유형은 생각에 잠기고 편지를 교환할 여가를 충분히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이 주제들에 대해 쓰여진 모든 글들 가운데 확대해석해서라도 10월 혁명의 사상에 접근한다고 해석될 수 있는 글은 단 하나도 없었다. 볼세비키당 역사 연구소는 1914년부터 1917년까지 스탈린이 쓴 글의 단 한 줄도 출판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었다. 그리고 그가 1917년 3월에 쓴 가장 중요한 문서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은폐하도록 강요되었다. 이 사실만 기억하면 사태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소련 지배 집단의 대다수 인물들에 대한 공식 정치 전기물에서 전쟁 기간은 빈 공간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조금의 가식도 없는 진실이다.

가장 최근의 젊은 역사학자 바이예프스키는 당의 상층부가 전쟁 기간동안 노동계급 혁명의 방향에서 사상을 발전시킨 과정을 증명하는 특별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과학적 양심이 대단히 유연한 그도 자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빈약한 말 이외에는 아무 것도 짜낼 수 없었다: "이 과정을 추적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부 문서들과 회고록들은 다음의 사실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한다: 레닌의 4월 테제의 방향으로 당의 지성들은 암중모색을 하고 있었다...." 과학적 평가와 정치적 전망이 아니라 암중모색이 문제인 것처럼 그는 말하고 있다!

시베리아, 모스크바, 뻬쩨르부르그가 아니라 세계역사의 교차점에서만 10월 혁명의 사상에 선험적으로 도달하는 것이 가능했다. 뒤늦게 성취되어야할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러시아에서 노동계급 독재의 강령을 제출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보이기 전에 세계노동운동의 전망과 교차되어야했다. 소위 러시아 출신 당 "실무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는 좀더 수준 높은 식견은 말할 것도 없고 일개 국가가 아니라 국제적 시야의 고지에서 정세를 관찰하는 것이 필요했다.

당 실무자들은 짜르의 타도가 러시아 "자유"공화국 시대를 개막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구의 예를 따라 이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 건설 투쟁을 시작하자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었다. "혁명으로 해방된 나림 지구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지시를 받아" 3명의 고참 볼세비키 리코프, 스크보르초프, 베그만 등은 3월에 톰스크에서 이런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 "정치적 자유를 정복하기 위해 혁명 중핵들을 너무 성공적으로 준비시킨 프라우다 지의 복간에 축하인사를 보낸다. 이 신문이 일국(一國)혁명의 이름으로 이후 투쟁을 위해 자신의 깃발 주위로 모든 세력을 단결시킬 것이라고 우리는 깊이 확신한다." 이 집단 전보 속에 전부 들어있는 하나의 세계관은 레닌의 4월 테제와는 심연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2월 혁명은 카메네프, 리코프, 스탈린 등 당의 지도적 부위를 곧바로 민주주의 조국방어주의자로 변모시켰다. 더욱이 이들은 멘세비키들과의 화해를 추구하면서 우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후 당 역사가가 될 야로슬라프스키, 중앙통제위원회 의장이 될 오도니키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 될 페트로프스키는 멘세비키들과 밀접히 연합하여 3월에 야쿠츠크에서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의 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은 애국주의적 개량주의와 자유주의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발행된 이 신문들은 조심스럽게 수거되어 말살되었다.

혁명 초기에 뻬쩨르부르그의 프라우다 지는 국제주의 입장을 견지하려고 애썼다. 물론 이것도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틀을 넘지 못했기 때문에 아주 모순적인 입장이었다. 유형지에서 돌아온 권위 있는 볼세비키들은 이 중앙기관지에 민주주의적 애국주의 정책을 부여했다. 칼리닌은 5월 30일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이 사실을 회고했다: "프라우다 지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에 이 신문은 하나의 정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탈린, 무라노프, 카메네프 등이 돌아와서 프라우다 지의 기존 정책을 정반대로 바꾸었다."

당의 지도적 부위에 속했던 앙가르스키는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아직도 허용되고 있었을 때 이렇게 적었다: "대단히 많은 수의 고참 볼세비키들은 4월 당협의회 직전까지 1905년의 볼세비키당 입장을 1917년 혁명의 입장으로 고수하고 있었다. 이 견해를 기각하고 극복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 점을 인정해야한다." 1905년의 입장은 이미 시효가 지났기 때문에 1917년에는 "구 볼세비키당의 견해"가 아니라 애국주의적 개량주의가 되었다는 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용 역사 출판물은 이렇게 말한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에서는 한마디로 운이 없었다. 한 시대를 창조한 이 테제에 대해 2명만이 찬성하고 13명이 반대했으며 1명이 기권했다." "레닌의 주장은 그를 가장 열광적으로 따르던 사람들에게조차 너무 대담하게 느껴졌다."고 포드보이스키가 적고 있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와 군사기구의 견해를 빌리면 레닌의 연설은 "볼세비키당을 고립시켰다. 그리고 말할 필요도 없이 노동계급과 당의 지위를 대단히 손상시켰다."

몇 년 전에 몰로토프는 이렇게 적었다: "솔직히 말해야한다. 당은 혁명운동이 요구하는 명확성과 결연함을 결여하고 있었다....선동과 일반적으로 당의 활동 전부는 확고한 기초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사고는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당면한 투쟁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아직 대담한 결론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월 혁명이 터진 후 두 번째 달에야 이 결함으로부터의 결별이 시작되었다. 몰로토프는 계속 증언한다: "1917년 4월 레닌이 귀국했을 때부터 우리 당은 확고한 기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느꼈다....이때까지 당은 허약하고 의기소침한 채 길을 헤매고 있었다."

3월말에 스탈린은 임시정부에 대한 군사적 방어와 조건적 지지를 천명했다. 또한 그는 수하노프의 평화주의 선언문과 체레텔리가 주도하던 멘세비키당과의 통합을 지지했다. 스탈린 자신은 1924년에 회고조로 이렇게 인정했다: "이 오류를 나는 다른 동지들과 공유했다. 레닌의 테제를 지지한 4월 중순에야 나는 그것을 완전히 기각했다. 새로운 방향이 필요했다. 유명한 4월 테제를 통해 레닌은 당에게 새로운 방향을 부여했다."

칼리닌조차도 4월말에 여전히 멘세비키들과의 선거 연합을 지지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의 당협의회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칼리닌에게 확고하게 반대한다. 국수주의자들과 연합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배신이다." 그러나 칼리닌의 태도는 뻬쩨르부르그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협의회에서는 이런 말이 돌았다: "레닌의 영향력 때문에 통합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지방에서 레닌의 테제에 대한 저항은 상당히 더 오래 지속되었다. 상당수의 도에서는 거의 10월까지 그랬다. 키에프의 노동자 시브초프는 이렇게 말한다: "레닌이 테제를 통해 제시한 사상은 키에프 볼세비키 조직 전체에 의해 즉각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피아타코프를 비롯한 상당수의 동지들은 테제에 동의하지 않았다..." 카르코프의 철도 노동자 모르구노프는 이렇게 말한다: "고참 볼세비키들은 철도 노동자 전부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참 볼세비키 다수는 우리 분파의 밖에 남아있었다. 2월 혁명 후 이들의 상당수는 실수로 멘세비키로 등록되었다. 나중에 이들은 이 일에 대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해했다." 이와 같은 그리고 유사한 증언은 얼마든지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4월에 레닌이 당을 재무장한 것을 언급만 해도 현재의 어용 역사학자들은 이것을 당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한다. 가장 최근의 역사학자들은 역사의 기준을 당의 제복에 대한 명예의 기준으로 대체했다. 이 주제에 대해 이들은 스탈린을 인용하는 권리도 박탈당했다. 스탈린 자신은 4월 변화의 깊은 의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렇게 적었다: "당이 대담한 발걸음으로 새로운 길을 가기 위해 레닌의 유명한 4월 테제가 필요했다." "새로운 방향", "새로운 길"은 당의 재무장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로부터 6년이 지나 역사학자로서 야로슬로프스키는 스탈린이 2월 혁명 초에 "근본 문제들에서 잘못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고 감히 주장했다. 그러자 그는 사방으로부터 맹렬하게 비난받았다. 권위에 대한 우상 숭배는 모든 괴물 가운데 가장 식성이 좋다!

당의 혁명전통, 아래로부터 노동자들의 압력, 위에서 가해진 레닌의 비판 등이 4월과 5월에 스탈린의 말을 빌면 당의 상층부가 "새로운 길을 가도록" 강제했다. 그러나 레닌의 테제에 단순히 찬성표를 던지는 것이 "근본문제들에서 잘못된 입장"을 실제로 그리고 완전히 기각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정치 심리를 완전히 모르는 사람일 것이다. 전쟁 중에 근본적으로 강화된 조야한 민주주의 노선은 실제로는 새 강령에 적응한 채 말없이 이것에 반대했을 뿐이었다.               

8월 6일 카메네프는 볼세비키당 4월 협의회의 결정과는 반대로 집행위원회에서 그 당시 준비중이었던 스톡홀름의 사회 애국주의 협의회에 참여할 것을 주창하는 연설을 했다. 그의 연설을 당 중앙기관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비판하는 레닌의 막강한 논문은 카메네프의 연설 후 10일이 지나서야 겨우 당 기관지에 실렸다. 레닌 자신과 중앙위원 몇 명의 결연한 주장이 있은 후에야 스탈린이 주도한 편집위원회는 이 항의 논문을 실었다.

7월 시기 이후 의구심이 당내에서 요동쳤다. 노동계급 전위의 고립은 특히 지방에서 다수의 지도자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코르닐로프 반란 도중 겁에 질린 이 지도자들은 화해주의자들과 접촉하려 했다. 그러자 레닌은 다시 이들의 행위를 경고하는 고함을 질렀다.

8월 20일 프라우다 지의 편집위원장 스탈린은 비판적 논평 없이 지노비에프의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은 봉기 준비를 반대했다. "진실을 직시해야한다: 1871년 파리 코뮌과 같은 실패한 봉기가 터질 유리한 조건들이 뻬쩨르부르그에 많이 존재한다...." 9월 3일 레닌은 다른 문제와 관련하여 그리고 지노비에프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에 대한 간접적 비판을 가했다: "파리 코뮌에 대한 언급은 아주 피상적이며 심지어 어리석은 행위이다. 우선 볼세비키당은 1871년 이후 뭔가를 배웠다. 우리는 반드시 은행들을 장악할 것이며 베르사이유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조건이라면 코뮌도 봉기에 성공했을 것이다. 더욱이 코뮌이 권력을 잡았더라도 지금 볼세비키당이 인민에게 제공할 수 있는 것 즉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고 즉각적인 평화를 즉시 제의하는 일들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름을 밝히지는 않았으나 지노비에프 뿐 아니라 프라우다 지의 편집위원장 스탈린에 대한 명확한 경고였다.    

예비의회 참여 문제는 중앙위원회를 양분시켰다. 에비의회에 참여한다는 민주협의회 볼세비키당 분파의 결정은 대다수는 아니더라도 상당수의 지역 위원회에 의해 비준되었다. 예를 들어 키에프가 그랬다. 보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이렇게 말한다: "예비의회 문제에 대해 위원회의 대다수는 참여에 찬성했으며 피아타코프를 대의원으로 선출했다." 예를 들어 카메네프, 리코프, 피아타코프 그리고 기타 인물들과 같은 다수의 다른 인물들이 연속적으로 동요한 것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하다. 4월 레닌의 테제, 9월 예비의회 불참, 10월 무장봉기 등에 대해 이들은 모두 반대했다. 반면 당 상층부 바로 밑의 부위는 대중과 좀더 가까이 생활했으며 정치적으로 덜 성숙했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예비의회 불참을 수용하고 당 중앙위원회를 비롯하여 당의 각급 위원회들에게 대전환을 강요했다. 레닌의 편지에 영향을 받아 키에프 시협의회의 압도적 다수는 키에프 위원회에 반대했다. 이와 비슷하게 거의 모든 격렬한 정치적 전환점에서 레닌은 당의 상층부에 대항해 하층부의 지지를 받았거나 당 기구 전체에 반대하는 당 대중의 지지를 받았다.

상황이 이러했기 때문에 10월 봉기에 대한 동요를 레닌은 완전히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미리 날카로운 안목으로 무장한 채 위험한 징후들을 관찰하면서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동요에 대해 너그러움을 보이느니 지나친 압박을 가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모스크바 지역 사무국은 9월말에 중앙위원회가 우유부단과 동요에 빠져 있으며 당대오에 혼란을 유포하고 있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레닌의 제안을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사무국은 중앙위원회에 이렇게 요구했다: "봉기에 대한 명확하고 확정적인 노선을 택하라." 이 조직의 이름으로 10월 3일 로모프는 이 결정을 중앙위원회에 보고했다. 회의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문제를 토론하지 않기로 결정하다." 중앙위원회는 당면한 문제를 계속 회피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를 통해 전달된 레닌의 압박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틀 후에 중앙위원회는 예비의회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이 봉기의 길을 터주고 있다는 것을 적들과 반대자들은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예비의회에서 자기 군대를 철수시킨 트로츠키는 노선을 폭력 혁명 쪽으로 명확히 틀고 있었다." 예비의회 철수에 대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의 보고는 이렇게 외치면서 끝을 맺었다: "나라의 혁명권력을 위한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투쟁 만세!" 이때가 10월 9일이었다.

그 다음날 레닌의 요구에 따라 봉기의 문제가 단도직입적으로 제기된 중앙위원회의 그 유명한 회의가 열렸다. 회의의 시초부터 레닌은 이 회의의 결과에 따라 이후 정책을 계획했다: 중앙위원회를 통해 정책을 관철시키지 않으면 중앙위원회 없이 정책을 밀고 나가겠다. 수하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유쾌한 역사의 여신이 새로이 농담을 했다! 그 고위의 결정적 회의가 내 아파트인 카르포브카 32번지 31호 아파트에서 열렸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모르고 있었다니." 멘세비키인 그는 부인이 볼세비키였다. "그때 내가 외박을 하도록 특별조치들이 취해졌다: 최소한 아내는 나의 의도를 조심스럽게 확인한 후 우정어린 그리고 공정한 충고를 했다 --- 업무가 끝난 후 긴 귀가 길로 몸을 피곤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 어쨌든 그 고상한 회의는 나의 침입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했다." 더 중요한 것은 케렌스키의 경찰로부터도 안전했다는 것이다.

21명의 중앙위원들 가운데 12명이 회의에 참석했다. 레닌은 가발과 안경을 착용하고 턱수염 없이 회의 장소에 나타났다. 회의는 밤이 깊도록 10시간을 지속했다. 회의 중간에 빵과 소시지가 곁들인 차가 간식으로 나왔다. 그리고 간식이 필요했다: 짜르의 과거 제국에서 권력을 장악하는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스베르들로프의 조직 보고로 회의가 시작되었다. 이번에 그의 보고는 명백히 레닌과의 사전 합의에 따라 전선에 집중되었다. 필요한 추론에 의해 그가 지지를 받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레닌의 방식 그대로였다. 북부전선 군대의 대표들이 스베르들로프를 통해 이렇게 경고했다: 반혁명 지휘부가 "전선의 부대들을 내륙으로 철수시키면서 일종의 수상한 음모"를 준비하고 있다; 서부전선의 사령부가 있는 민스크에서 코르닐로프의 새로운 반란이 준비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지역 주둔군의 혁명적 경향 때문에 사령부는 이 도시를 카자흐 부대들로 포위했다. "사령부와 전쟁 총사령부 사이에 일종의 수상한 협상이 진행 중이다."; 민스크 사령부를 점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역 주둔군은 카자흐 일당을 무장해제 시킬 준비가 되어있다; 또한 이들은 민스크에서 뻬쩨르부르그로 혁명 군단을 보낼 위치에 있다; 전선의 정서는 볼세비키당을 지지한다; 이들은 케렌스키에 저항할 것이다. 이것이 스베르들로프의 보고의 요지였다. 이 보고는 모든 부분이 충분히 명확하지는 않았지만 성격상 완전히 고무적이었다.

레닌은 즉시 공세를 취했다: "9월초부터 봉기의 문제에 대한 일종의 무관심이 있었다." 대중은 혁명에 대한 열정이 식고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다는 사실을 그는 언급했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대중은 말과 결의문에 싫증이 났다." 상황을 전체적으로 파악해야한다. 도시의 사건들은 거대한 농민운동의 배경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농민 봉기를 진압하려면 정부는 엄청난 병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정세는 준비되어 있다. 지금 봉기의 기술적인 문제를 논의해야한다. 이것이 곧 우리의 임무 전부이다. 한편 조국방어주의자들처럼 봉기의 체계적 준비를 정치적인 죄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우리들 속에 있다." 레닌이 감정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 역력했다: 그는 감정이 너무 쌓여있었다. "결정적인 행동을 시작하기 위해 북부 지역 소비에트대회와 민스크의 제안을 활용해야한다."

중앙위원회 회의와 정확히 같은 날에 북부 소비에트대회가 열렸으며 이삼일 후에 폐막될 것이다. "결정적인 행동"의 시작을 레닌은 다음 며칠동안의 임무로 제시했다. 기다리면 안된다. 연기하면 안된다. 스베르들로프의 보고를 통해 들었듯이 전선에서 적들은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가 도대체 열리기나 할 것인가? 알 수가 없다. 즉시 권력을 장악하여 대회 같은 것을 기다리면 안된다. 이로부터 몇 년 후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이 긴장되고 열정적인 즉흥 연설들의 일반적 정신을 전달하거나 재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레닌의 연설은 반대하고 동요하고 의심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생각, 의지, 자신감, 용기 등을 주입시키려는 욕구로 가득했다...."

레닌은 강력한 저항을 예상했다. 그러나 그의 우려는 곧 기우로 끝났다. 9월에 즉각적 봉기 제안을 중앙위원회가 만장일치로 거부한 것은 일시적 현상이었다: 좌파는 일시적인 이유 때문에 "민주협의회 포위"에 반대했었다. 우파는 비록 철저히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 전략의 이유 때문에 봉기 제안을 거부했다. 이후 3주일 동안 중앙위원회는 상당히 좌로 이동했다. 찬성 10표 반대 2표로 봉기가 결정되었다. 이것은 커다란 승리였다!

혁명의 승리 직후 당내 투쟁의 새로운 단계에서 레닌은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토론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 중앙위원회 회의 직전까지 그는 "국제주의자 통합파가 기회주의로 넘어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나 이 우려는 곧 불식되었다. 그러나 우리 당에서 일부 중앙위원들은 봉기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나는 크게 유감스러워했다." 레닌이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었던 트로츠키 외에 "국제주의자" 중앙위원은 이후 독일 대사가 될 요페, 뻬쩨르부르그 비밀경찰의 총수가 될 유리츠키, 체르보네츠(역자 주: 소련의 최초의 안정된 통화)를 고안할 소콜니코프였다. 이들 전부는 레닌의 편을 들었다. 그의 반대자는 과거에 레닌과 가장 가까웠던 고참 볼세비키 2인이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레닌은 공세를 주도했고 나머지 중앙위원들은 하나 하나 그의 편으로 합류했다.

사각형 도안지로 된 아동의 공책에서 뜯어낸 종이 한 장에 레닌은 끄트머리가 이빨로 뜯겨진 연필로 급히 결의문을 적어 내려갔다. 이것은 아주 엉성했으나 봉기를 확고히 지지하는 내용이었다. "러시아 혁명의 국제정세(세계 사회주의 혁명이 유럽 전역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극단적 표현인 독일 함대의 봉기 그리고 러시아 혁명을 목조르기 위해 제국주의 국가들이 평화조약을 체결할 위험성), 군사적 상황(뻬쩨르부르그를 독일군에게 넘겨주려는 러시아 부르주아와 케렌스키 일당의 의심의 여지없는 결정), 농민봉기와 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도 급상승(모스크바 선거)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 2차 코르닐로프 반란의 명백한 준비(뻬쩨르부르그 주둔군 이동, 뻬쩨르부르그로 카자흐 기병부대 유입, 카자흐 기병부대의 민스크 포위 등) --- 이 모든 것이 무장봉기를 일정에 올렸다고 중앙위원회는 인정한다. 무장봉기는 불가피하며 완벽히 무르익었다고 인정하며 중앙위원회는 당의 모든 조직들에게 권고한다: 이 정세 인식에 따라 모든 실제적인 문제들을 고려하고 결정한다(북부 지역 소비에트 대회, 수도 주둔군의 이동, 모스크바와 민스크의 가두 시위)."

당시의 상황과 결의문 작성자 레닌을 특징짓는 놀라운 사항은 봉기의 조건이 나열된 순서 자체이다. 우선 국제혁명의 성숙이 언급되고 있다; 러시아의 봉기는 전체 사건들의 연쇄의 한 고리로 인식된다. 이것은 레닌의 변함 없는 출발점이자 그의 주요한 전제이다: 그는 달리 사고할 수 없었다. 봉기의 임무를 그는 당의 임무로 직접 제시한다. 당의 봉기 준비를 소비에트와 일치시키는 어려운 문제는 아직 논의되지 않는다.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트로츠키의 주장에 따라 북부 지역 소비에트 대회와 "모스크바와 민스크의 가두 시위"에 "뻬쩨르부르그 주둔군 이동"이 봉기 지지 요인으로 덧붙여졌다. 이것은 봉기 계획의 유일한 힌트였다. 이후 수도에서는 사건의 전개에 따라 봉기 과정이 결정되었다. 이 결의문에 전술적 수정을 제안한 중앙위원은 하나도 없었다. 봉기의 필요성 자체를 거부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에 대항하여 결의문은 봉기의 전략적 출발점만 규정했다.        

아주 최근에 소련의 어용 역사학자들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제외한 당 지도부 전체가 봉기를 지지한 것처럼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들과 문서들을 살펴보면 이 주장은 산산조각이 난다. 봉기에 찬성한 지도자들은 대개의 경우 봉기를 먼 미래의 일로 미루는 경향이 있었다. 이외에도 중앙위원회에서 공개적으로 봉기에 반대한 인물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만이 아니었다. 제 10차 중앙위원회 회의에 불참한 리코프와 노긴은 전적으로 봉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밀류틴은 이들과 유사한 입장이었다. 레닌 자신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당의 상층부에 동요의 분위기가 감지되었다. 권력 장악에 대한 일종의 공포감이 이들을 사로잡았다." 안토노프-사라토프스키의 말에 따르면 중앙위원회 회의가 끝난 후 사라토프에 도착한 밀류틴은 "봉기를 '시작해야한다'고 요구한 레닌의 편지, 중앙위원회의 동요 현상들, 예비 단계에서 '기각'된 레닌의 제안, 그의 분노 그리고 마지막으로 봉기 직전까지의 과정 등에 대해 말했다." 나중에 볼세비키 사도프스키는 이렇게 적었다: "봉기에 대한 막연한 감과 자신감 부족이 당시 분위기를 지배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중앙위원회에서도 어떻게 봉기를 시작할 것인지 그리고 봉기를 진짜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와 갈등이 있었다."

사도프스키 자신은 이때 소비에트 병사부문과 볼세비키당 군사기구의 지도자였다. 그러나 다수의 회고록에 드러나듯이 10월 봉기에 대해 특히 반대한 자들은 바로 당 군사기구의 성원들이었다. 조직의 특성상 군사기구 지도자들은 봉기의 정치적 조건은 과소평가하고 기술적 측면은 과대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10월 16일 크릴렌코는 이렇게 보고했다: "당 군사기구 사무국의 대다수는 봉기를 실제로 강제해서는 안되며 소수는 봉기를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8일에 군사기구의 지도자 라쉐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즉시 권력을 장악해야하는가? 아니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레닌이 제안한 전략 계획은 모든 측면에서 엉성하다." 안토노프-오브세옌코는 레닌과 군사기구 주요 지도자들 사이의 어느 회의를 묘사하고 있다: "포드보이스키는 의문을 나타냈으며 네프스키도 처음에는 그의 생각에 동의했으나 나중에 레닌의 자신 있는 어조에 넘어갔다; 나는 핀란드의 상황을 묘사했다....레닌의 자신감과 확고함은 나에게 용기를 주었고 네프스키에게 활기를 불어넣었다. 그러나 포드보이스키는 끈질기게 의구심을 가졌다." 이런 종류의 회상에는 의구심은 대충 그리고 자신감은 강하게 채색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추드노프스키는 봉기에 단호히 반대했다. 회의를 표시한 마누일스키는 경고를 보냈다: "전선의 군대들은 우리편이 아니다." 톰스키도 봉기에 반대했다. 볼로다르스키 역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지지했다. 더욱이 봉기를 반대하는 자들 모두가 공개적으로 자기 입장을 표명하지도 않았다. 15일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회의에서 칼리닌은 이렇게 말했다: "중앙위원회의 결의문은 지금까지 나온 것 가운데 최상의 것이다....실제 우리는 무장봉기에 다가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언제 가능할까? 지금부터 1년 후? 이것을 알 수가 없다." 중앙위원회 결의문에 대한 이런 종류의 "합의"는 칼리닌의 특성이었지만 그에게 국한되지 않았다. 다수는 봉기에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보장받기 위해 결의문에 동의했다.

모스크바 지도자들 간의 견해는 가장 분분했다. 지역 사무국은 레닌을 지지했다. 그러나 모스크바 위원회는 상당히 주저했다. 봉기를 연기하자는 분위기가 이곳을 지배했다. 도 위원회는 명확한 입장이 없었으나 야코블레바의 말에 따르면 결정적 순간에 도 위원회가 봉기를 반대할 것이라고 지역 사무국은 생각했다.

혁명 직전에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사라토프 출신의 레베데프는 리코프와 산책한 때를 묘사한다. 그는 석조 저택, 부유한 상점, 주위의 상업적 활기를 지적하며 봉기의 어려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다. "부르주아 모스크바의 바로 이 중심에서 우리는 산을 움직이려는 난쟁이들 같이 보인다."

당의 모든 조직과 모든 도 위원회에는 지노비에프 그리고 카메네프와 같은 정서를 가진 분자들이 있었다. 다수 위원회들에서 이들은 다수파였다. 볼세비키들만 존재했던 노동계급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도 지배 파벌들 간의 이견은 특히 격렬했다. 회고록들이 스탈린의 노선에 적응했던 1925년에 볼세비키 노장 노동자 키셀레프는 이렇게 적었다: "일부 개인적인 예외를 제외하면 당의 노동자 당원들은 레닌을 지지했다. 그러나 당의 소규모 지식인 그룹과 개인별로 고립된 노동자 당원들은 레닌을 반대했다." 공개적인 토론에서 봉기를 반대한 자들은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키셀레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러나 사적인 논쟁은 좀더 격렬하고 솔직했다. 일부는 이렇게 까지 말했다: '레닌은 미친 사람이다. 그는 노동계급을 확실한 파멸로 이끌고 있다. 이 무장봉기로 우리는 얻는 것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적들은 우리를 분쇄할 것이다. 당과 노동계급은 전멸 당할 것이고 혁명은 수년에 걸쳐 지연될 것이다, 등등.'" 대단히 용감했으나 식견이 넓지 못했던 프룬제가 특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봉기가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곳에 만연한 대기주의 관성과 우익의 직접 저항을 결코 깨지 못했다. 모스크바에서는 지도자들의 동요로 봉기가 거의 실패할 뻔했다. 피아타코프가 의장으로 있던 키에프 위원회는 순수한 방어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주도력을 그리고 나중에는 권력까지 의회에 넘겨주었다. 브라체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보로네즈의 우리 당 조직은 크게 동요했다. 이곳의 실제 봉기는 당 위원회 다수파가 아니라 모이세이예프가 주도하는 적극적 소수파에 의해 이루어졌다." 전반적으로 지방의 도시들에서 10월의 볼세비키당은 "반혁명에 대항하여" 화해주의자들과 연합했다. 마치 화해주의자들이 반혁명의 가장 주요한 지주가 아닌 것 같았다! 거의 모든 곳에서 지역 위원회의 최후의 우유부단을 분쇄하고 이들이 화해주의자와 결별하고 운동을 주도하게 만들기 위해 당 상층부와 하부의 압력이 모두 필요했다. "10월말과 11월초 당내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었다. 다수는 재빨리 분위기에 항복했다." 이것은 동요에 상당히 기여했던 슐리아프니코프의 보고이다.       

카르코프의 볼세비키들처럼 2월 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멘세비키 진영에 있던 분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나중에 "어떻게 이런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하고 궁금히 여겼다. 이런 부류들은 일반적으로 10월 혁명 과정에서 자기 역할을 전혀 찾지 못한 채 동요하고 기다렸다. 이들은 지적 반동의 시기인 지금 더욱 자신 있게 나서서 자기들이 "고참 볼세비키"라고 주장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이 사실들을 은폐하려는 거대한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지금 연구자들에게 접근이 금지된 비밀 문서보관 체제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신문, 회고록, 역사 잡지 등에 풍부한 증언들이 보존되어 있다. 이것들은 봉기의 전야에 가장 혁명적인 볼세비키당의 공식기구들조차 봉기에 크게 저항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보수주의는 불가피하게 관료주의로 나아간다. 당에 봉사하는 도구가 되고 혁명 사상에 자신을 복종시키고 대중이 통제할 때에만 당 기구는 혁명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10월 10일 중앙위원회의 결의문은 대단히 중요했다. 이것을 통해 봉기를 진정으로 주창하는 분자들이 당의 권한을 확고히 틀어쥘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당의 모든 조직들과 중핵들의 가장 결연한 분자들이 책임 있는 직책을 맡기 시작했다. 뻬쩨르부르그를 시작으로 당의 조직들은 대오를 정비하고 자신의 역량과 물질적 자원들을 파악했다. 또한 통신을 강화하고 봉기 준비에 좀더 집중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결의문은 중앙위원회 내부의 견해 차이를 끝장내지 못했다. 이와 반대로 차이를 표현하여 수면 위로 드러냈을 뿐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당의 상층부 일부에서 공감의 분위기를 느꼈던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정서가 급격히 좌로 움직이는 것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들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기로 작정하고 바로 다음날 당원들에게 방대한 양의 연설문을 돌렸다. 이들은 이렇게 적었다: "역사, 국제노동계급, 러시아 혁명, 러시아 노동계급 앞에서 지금 무장봉기를 통해 모든 미래를 저당 잡힐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이들의 계획은 제헌의회에 강력한 야당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제헌의회는 "소비에트에 의존하여 자신의 혁명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의 노선은 이것이었다: "제헌의회와 소비에트 즉 우리가 지향하고 있는 국가기구의 혼합형태." 볼세비키들은 제헌의회에서는 소수파가 될 것이고 소비에트에서는 다수파가 될 것이었다. 이 두 국가기구는 하나는 부르주아 계급의 기관이 되고 하나는 노동계급의 기관이 되어 평화스러운 이중권력 속에 "결합"될 것이었다. 그러나 이 체제는 화해주의자들이 주도할 때도 성공하지 못했는데 소비에트가 볼세비키당에 의해 장악된 상황에서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지금이든 언제든 노동계급 정당 앞에 권력 이양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심대한 역사적 오류이다. 아니다, 노동계급 정당은 성장할 것이고 이 정당의 강령은 더욱더 광범위한 대중에게 명확히 이해될 것이다."

실제 계급 투쟁의 과정과 무관하게 볼세비키당이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이 희망은 이 당시 레닌의 주제와 정면 충돌했다: "러시아와 세계 혁명의 성공은 2, 3일 사이의 투쟁에 달려있다."

이 극적인 대화에서 진실이 전적으로 레닌 쪽에 있었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치 않다. 혁명 상황은 우리 뜻대로 연장할 수 없다. 10월과 11월에 볼세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을 경우 이들은 전혀 권력을 쥘 수 없었을 것이다. 확고한 지도력 대신 대중은 볼세비키당에서도 자신들이 그렇게도 싫증내던 말과 행동의 불일치를 발견했을 것이다. 또한 최근 이들이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을 버렸듯이 자신들의 희망을 저버린 볼세비키당을 2, 3 개월에 걸쳐 버렸을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부는 무관심에 빠졌을 것이고 또 일부는 무정부적 투쟁의 형태를 띤 경련성 운동, 게릴라 투쟁, 복수와 절망에 의한 테러 등으로 자신들의 역량을 소진시켰을 것이다. 이렇게 제공된 휴지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 계급은 독일과 단독 평화조약을 체결하고 혁명조직들을 전멸시켰을 것이다. 이 결과 러시아는 반(半)제국주의 반(半)식민지 국가로 자본주의권에 다시 포함되었을 것이다. 또한 노동계급 혁명은 무한정 먼 미래로 연기되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이 전개될 것을 우려하여 레닌은 이렇게 경고하며 외쳤다: "러시아와 세계 혁명의 성공은 2, 3일 사이의 투쟁에 달려있다."

10월 10일 이래로 당의 상황은 급격히 변화했다. 레닌은 그의 제안이 중앙위원회에 의해 거부된 고립된 "반대자"가 더 이상 아니었다. 고립된 것은 바로 우파였다. 레닌은 중앙위원을 사임하는 대가로 자유 선동의 권리를 누릴 필요가 없었다. 당은 합법적으로 그의 편이었다. 반면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중앙위원 다수의 결정을 공격하는 자신들의 문서를 돌리면서 규율을 위반하고 있었다. 그리고 투쟁 중의 레닌은 자기 적들의 실수를 벌하기 않고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보다 훨씬 더 가벼운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제 10차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제르진스키의 제안에 따라 7인으로 구성된 정치국이 선출되었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스탈린, 소콜니코프, 부브노프. 그러나 이 새로운 기구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레닌과 지노비에프는 아직도 피신 중이었다. 더욱이 지노비에프는 카메네프와 같이 봉기에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 벌이고 있었다. 10월의 정치국은 한번도 회의를 하지 못했다.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성된 특별 기구들과 마찬가지로 이 기구 역시 곧 잊혀져 버렸다.

그런데 10차 회의는 봉기에 대한 잠정적인 실제 계획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의문에 들어있지는 않았으나 합의된 사항이 있었다: 봉기는 소비에트 전국대회보다 일찍 그리고 가능하면 10월 15일까지는 시작한다. 이 날짜에 모두가 전부 열성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다. 뻬쩨르부르그에서 계획된 봉기를 시작하는 날짜로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러나 봉기 지연을 주장하는 것은 우파를 지지하면서 계획 자체를 뒤섞는 것이 될 것이었다. 더욱이 봉기를 연기한다면 날짜가 얼마든지 늦추어질 수 있었다!

15일로 봉기의 날짜를 임시로 정한 사실은 이 사건 후 7년이 지난 1924년에 트로츠키가 레닌을 추억하는 자리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곧 스탈린에 의해 부인되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역사 문헌에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봉기는 실제로 25일에 일어났기 때문에 미리 정한 날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중앙위원회의 정책에 오류가 있거나 날짜 문제에서 지연이 발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스탈린주의 역사가들은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 스탈린은 이렇게 적고 있다: "봉기의 날짜를 중앙위원회가 10월 15일로 정해놓고 나중에 이 결의문을 위반하여(!) 날짜를 10월 25일로 연기했다는 얘기가 된다. 이것이 사실인가? 아니다, 사실이 아니다." "트로츠키의 기억력이 그를 배신했다"고 그는 결론을 내린다. 이에 대한 증거로 그는 날짜를 정하지 않은 10월 10일의 결의문을 인용한다.

봉기의 날짜에 대한 이 논쟁은 사건의 리듬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명확히 해명되어야한다. 10월 10일의 결의문이 날짜를 명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전반적인 내용을 담은 결의문은 전국의 봉기를 다루었으며 수백 수천 명의 지도적인 당 활동가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결의문 속에 비밀 봉기의 날짜를 명시하여 다음 며칠에 걸쳐 뻬쩨르부르그에서 봉기를 실행시켰다면 대단히 비합리적이었을 것이었다. 보안의 문제 때문에 이 당시 레닌은 자기 편지에도 날짜를 명시하지 않았다. 이 경우는 문제가 너무 중요했고 동시에 너무 간단해서 회의 참가자들이 기억하는데 조금의 어려움도 없었다. 단지 며칠 내에 성사될 일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따라서 스탈린이 결의문 내용을 따지는 것은 그가 이 문제를 이해할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회의 참석자가 자신의 기억에 의거하고 다른 참석자가 그의 기억의 올바름을 부인하는 상황에서 역사 연구가들은 정황에 의존할 수만은 없다. 이 점은 인정할 준비가 되어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문제는 당시의 상황과 문서들을 분석하는 다른 차원에서 의심의 여지없이 해결되었다.

소비에트 전국대회는 10월 20일에 열릴 예정이었다. 중앙위원회 제 10차 회의와 소비에트 대회 개막일 사이에는 10일의 시간이 있었다. 대회는 소비에트 권력을 선동하지 않고 권력을 장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몇 백 명 정도의 대의원들만으로는 권력을 장악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회를 위해 대회 이전에 권력을 잡는 것이 필요했다. "먼저 케렌스키를 정복하고 그 다음에 대회를 소집한다" --- 이 생각은 9월 중순부터 레닌의 선동에서 중심 주제였다. 권력 장악을 일반적으로 지지한 인물들은 모두 이 사항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중앙위원회는 10월 10일과 20일 사이에 봉기를 수행하는 임무를 스스로 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봉기가 며칠이 걸릴 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봉기의 시작은 15일로 정해졌다. 레닌에 대한 추억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적었다: "봉기를 실제로 시작할 날짜에 대해서는 내가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논란은 거의 없었다. 날짜가 개략적이며 목표를 확정하기 위해 설정되었다는 것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사건의 진행에 따라 날짜가 당겨질 수도 늦추어질 수도 있다는 것도 이해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오차가 며칠 이상이 될 수는 없었다. 날짜 그것도 근사치의 날짜가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했다."

정치 논리에 근거한 이 증언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전부 다루었다. 더욱이 보완 증거들도 얼마든지 있다. 레닌은 끈질기게 그리고 빈번하게 이렇게 제안했다: 소비에트 북부지역 대회에 맞추어 당은 군사행동을 시작한다. 중앙위원회의 10월 10일 결의문은 이 생각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0일에 열린 북부지역 대회는 15일 바로 전에 폐막될 예정이었다.

16일에 열린 당협의회에서 지노비에프는 6일 전에 채택된 결의문을 취소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렇게 요구했다: "다음 5일에 걸쳐 봉기를 할 수 없다는 점을 솔직하게 인정해야한다." 그는 소비에트 전국 대회 개막 일까지 5일이 남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같은 회의에서 "봉기 날짜를 지정하는 것은 모험주의"라고 주장한 카메네프는 "20일 전에 봉기가 일어나야 한다고 전에 말한 적이 있다"고 회의 참석자들에게 상기시켰다. 아무도 이 말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반대할 수도 없었다. 레닌의 결의문이 실패했다고 카메네프가 해석한 이유는 바로 봉기가 지연되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봉기에 대해 "이번 주일에 한 일은 하나도 없다." 이것은 당연히 과장이었다. 날짜가 정해졌기 때문에 모두들 계획을 좀더 엄격하게 정하고 활동의 속도를 서둘러야했다. 그러나 10일의 회의에서 정해진 5일간의 시간은 너무 짧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봉기의 연기는 이미 기정사실이 되어 있었다. 중앙집행위원회가 소비에트 전국대회의 개막을 25일로 연기한 것은 바로 17일이었다. 전국대회가 연기되었기 때문에 그 사이에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 마련되었다.

봉기와 관련하여 발생한 당내의 이 모든 장애물과 갈등들은 피신 중의 레닌에게 어쩔 수 없이 과장된 형태로 전달되었다. 그는 봉기 연기에 놀란 나머지 중앙위원회를 새로 소집할 것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 회의에는 수도의 당 활동과 관련된 좀더 중요한 부서 대표들도 참석시킬 것을 주장했다. 도시 교외 레스노이에서 16일에 열린 바로 이 회의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위에서 언급된 바 전에 설정된 봉기 날짜를 철회하고 새 봉기 날짜 지정도 반대하는 주장을 폈다.

논란은 배가된 힘으로 다시 가열되었다. 밀류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첫 공격을 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다른 전망이 나타난다: 무장 충돌....이 가능성은 커지고 더 가까워지고 있다. 이 충돌에 준비해야한다. 그러나 이 전망은 봉기와는 다른 것이다." 그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좀더 정연하게 옹호한 방어적 입장을 주장한 셈이었다. 당 역사의 산 증인인 뻬쩨르부르그의 나이 많은 노동자 쇼트만은 이렇게 주장해왔다: 뻬쩨르부르그 위원회와 군사혁명위원회가 모두 참여한 이 뻬쩨르부르그 협의회에서 정서는 중앙위원회보다 훨씬 덜 전투적이었다. "우리는 봉기를 일으킬 수는 없고 다만 준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레닌은 밀류틴과 쇼트만이 계급 역관계를 비관적으로 평가하고 있다고 공격했다: "여기서 문제는 군대와의 투쟁이 아니라 군대 일부가 다른 일부와 투쟁하는 문제이다....우리가 적들에 비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사실들이 입증하고 있다. 중앙위원회는 왜 봉기를 시작할 수 없는가?"

이때 트로츠키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 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그는 소비에트에서 군사혁명위원회에 대한 결의문을 통과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며칠간 스몰니 학원에서 확고히 형성된 관점을 크릴렌크는 옹호했다. 그는 트로츠키 그리고 안토노프-오브세옌코와 함께 북부지역 소비에트 대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물이 충분히 끓고 있다"고 크릴렌코는 확신했다. 봉기를 지지하는 결의문을 철회하는 것은 "가장 거대한 오류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누가 어떻게 봉기를 시작할 것인가의 문제에서" 그는 레닌과 견해를 달리했다. 봉기의 날짜를 명확히 설정하는 것은 아직도 불편하다. "그러나 수도에서 군대를 이동시키는 문제는 지금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현안이다....우리에 대한 공격은 이미 사실이고 이것을 우리는 활용해야한다....누가 봉기를 시작할 것인가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이미 사태는 시작되었다." 크릴렌코는 군사혁명위원회와 주둔군 상설협의회가 채택한 정책을 설명하고 옹호하고 있었다. 봉기가 계속 전개된 것은 바로 이 길을 따라서였다.

레닌은 크릴렌코의 말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수도에서 지난 6일간 일어난 일들을 레닌은 보지 못했다. 그는 봉기 지연을 우려했다. 그의 관심은 봉기의 노골적인 반대자들에게 고정되었다. 은연중에 흘리는 말, 조건을 건 정식, 명확하지 않은 대답 등을 그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를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행위로 해석했다. 이들은 배수진을 친 군대처럼 레닌을 반대하고 있었다. 카메네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번 주의 결과들은 봉기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우리는 봉기를 수행할 기구가 없다. 적들의 기구는 우리보다 훨씬 강력하며 아마 이번 주에 더 크게 성장했을 것이다....여기서 두 전술이 충돌하고 있다: 음모의 전술과 러시아 혁명의 원동력에 대한 신뢰의 전술." 기회주의자들은 투쟁이 필요할 때에는 언제나 원동력을 믿는다.

레닌은 이렇게 응수했다: "봉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면 음모에 대해 주장할 필요가 없다. 봉기가 정치적으로 불가피하다면 우리는 봉기를 기예로 다루어야한다." 당내에서 근본적이며 진정 원칙에 대한 논란은 바로 이 선을 따라 진행되었다 --- 이것은 누구의 결정 누구의 결의문에 따라 혁명의 운명이 좌우되는 가에 대한 논쟁이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 다수를 결집한 레닌의 일반적 정식의 틀 내에서 부차적인 그러나 매우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성숙한 정치 상황에 기초하여 어떻게 봉기에 접근할 것인가? 정치에서 혁명의 기술로 가는 교량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이 교량으로 어떻게 대중을 지도할 것인가?

좌파에 속한 요페는 10일의 결의문을 지지했다. 그러나 한가지 점에서 그는 레닌에 반대했다: "문제가 순수히 기술적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봉기의 순간은 정치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한다." 바로 지난주는 당, 소비에트, 대중에게 봉기가 단순히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10일에 정한 봉기를 성사시키지 못했다.

"모든 조직들과 모든 노동자 병사들이 무장봉기를 전면적으로 그리고 가장 활발하게 준비하자"고 촉구한 레닌의 새 결의안은 찬성 20표, 반대 2표(지노비에프/카메네프), 기권 3표로 통과되었다. 어용 역사가들은 이 숫자를 근거로 봉기 반대세력이 완전히 무의미해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들은 사태를 단순화하고 있다. 당 하부의 좌선회는 이미 너무 강력해서 봉기의 반대자들은 공개적으로 감히 나서지 못하고 두 진영 사이의 원칙의 장벽을 전부 없애는 것이 이익이라고 생각했다. 미리 정한 날짜에도 불구하고 봉기가 16일까지 실현되지 않았다면 미래에 봉기를 하면 되지 않는가? 이 문제는 "봉기로 나아가는 과정"의 문제이므로 실제적인 중요성이 없지 않은가? 칼리닌의 의견이 전혀 그만의 의견이 아니라는 점은 회의에서 아주 명확히 드러났다. "소비에트 전국대회 볼세비키 분파의 협의회가 있기 전에는 어떤 행동도 인정할 수 없다"는 지노비에프 결의안은 찬성 6표, 반대 15표, 기권 3표로 거부되었다. 견해의 분포는 바로 여기서 진짜 확인이 되었다. 중앙위원회 결의문의 "옹호자들" 일부는 이 결정을 소비에트 전국 대회 그리고 "옹호자들" 다수는 좀더 온건한 지방 소비에트들의 새 협의회가 구성될 때까지 이 결정을 연기하기를 진짜 원했다. 기권자들까지 포함하면 이런 류의 "옹호자들"은 24명 가운데 9명으로 3분의 1이 넘었다. 물론 이들은 아직 소수였지만 봉기 사령부를 구성하는 인자들로는 상당히 중요한 소수였다. 봉기 개시 문제에 대해 봉기 사령부인 중앙위원회가 가망 없이 허약했던 이유는 이 기구가 당의 하부나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지노비에프와 합의하여 카메네프는 전날 밤에 채택된 결정을 공격하는 선언문을 고리키의 신문에 건네주었다. 카메네프는 이렇게 적었다: "지노비에프와 나 뿐 아니라 다수의 실천적 동지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소비에트 전국대회를 며칠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대회와는 독자적으로 지금의 사회 세력 관계 속에서 무장봉기를 추진하는 것은 노동계급과 혁명을 파멸시키는 인정할 수 없는 조치이다....앞으로 며칠동안 봉기에 모든 것을 거는 것은 절망의 행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당은 너무 강력하고 너무 위대한 미래를 앞두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를 취해서는 안된다...." 투쟁을 반대하는 자들은 우리가 싸움을 걸기에는 "너무 강력하므로" 구태여 싸울 필요가 있느냐고 언제나 생각한다.

카메네프의 편지는 중앙위원회에 대한 더욱이 아무도 농담을 나눌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대한 직접 선전포고였다. 즉시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상황은 공통의 정치적 원인을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인들의 에피소드에 의해 복잡해졌다. 적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트로츠키는 18일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소비에트는 앞으로 다가올 며칠로 봉기의 날짜를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짜를 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노동자와 병사들은 한 몸이 되어 봉기에 참여할 것이다. 단상의 최고회의에서 트로츠키 바로 옆에 앉은 카메네프는 즉시 일어나 짤막한 발언을 했다: 나는 트로츠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대해 모두 서명을 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은 간교한 술책이었다. 트로츠키는 합법성의 측면에서 봉기를 그럴듯한 방어 정식으로 은폐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메네프는 자신과 근본적으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던 트로츠키의 정식을 이용하여 완전히 반대되는 정책을 은폐하려고 했다.          

카메네프가 부린 술수의 효과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같은 날 열린 공장위원회 전국협의회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연설을 했다: "내전은 불가피하다. 최대한 고통이 없이 이것을 조직하기만 하면 된다. 동요와 주저를 통해서는 이것을 성취할 수 없다. 오직 권력을 향한 끈질기고 용감한 투쟁을 통해서만 이것을 성취할 수 있다." 동요에 대한 비난이 지노비에프, 카메네프 그리고 이들의 동료들을 겨냥하고 있다는 것을 청중은 모두 이해했다.

이외에도 그는 소비에트에서 카메네프가 연설한 내용을 중앙위원회 다음 회의가 조사하자고 제안했다. 이 동안에 봉기에 반대하는 선동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카메네프는 중앙위원을 사임했다. 이 문제는 그가 불참한 가운데 논의되었다. 트로츠키는 "그가 조성한 상황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카메네프의 사임서가 수락되어야 한다는 동의안을 제출했다. (저자 주: 1917년 중앙위원회 회의록은 1929년에 출판되었다. 이 회의록에 따르면 "카메네프에 의해 강제되었기 때문에" 트로츠키는 자신의 선언을 소비에트에서 설명했다. 이것은 명백히 잘못 기록되었거나 아니면 이후 편집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이다. 트로츠키의 선언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었다. 상황에 의해 이 선언이 도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이한 우연으로 레닌을 전적으로 지지한 모스크바 지역위원회는 18일 같은 날에 모스크바 당 신문에 트로츠키의 정식과 거의 같은 선언문을 싣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음모를 꾸미는 당이 아니므로 비밀리에 우리의 행동을 위한 날짜를 정하지 않는다....우리가 봉기를 결정하면 기관지에 그렇게 말할 것이다...." 적들의 직접적 질문에 다르게 대답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트로츠키의 선언은 카메네프에 의해 강제되지도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적으로 카메네프의 거짓 공감에 의해 손상되었고 더욱이 트로츠키가 자세하게 해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당한 상황에서 일어났다.)

트로츠키의 동의안을 지지하면서 스베르들로프는 레닌의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의 편지는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고리키의 신문에 선언문을 싣는 행위로 인해 파업파괴자가 되었다고 낙인을 찍은 후 이들의 출당 처분을 요구했다. 레닌은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카메네프가 저지른 술수는 대단히 비열했다. 그가 트로츠키와 완전히 의견이 일치한다고 말하다니! 트로츠키는 적들 앞에서 그것 외에 다른 말을 할 수도 없었고 할 권리도 없었다. 이것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봉기의 필요성, 봉기가 완전히 무르익었다는 사실, 봉기의 전면적인 준비 등에 대한 중앙위원회의 결정은 공개 연설을 통해서는 봉기를 비난할 뿐 아니라 봉기의 주도력도 적들에게 있다고 떠넘기는 것을 필요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카메네프의 술책은 치사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스베르들로프를 통해 분노에 찬 항의를 했을 때 레닌은 아직도 다음의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당 중앙기관지에 보낸 편지에서 지노비에프는 자신의 견해가 "레닌이 공격하는 견해들과 아주 다르며" "어제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서 한 트로츠키의 선언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봉기의 3번째 반대자인 루나차르스키도 신문에서 이와 똑같이 선언했다. 이 악의에 찬 혼란을 완성하기 위해 20일 중앙위원회 회의가 있던 바로 그 날 중앙기관지에 실린 지노비에프의 편지에 대해 기관지 편집위원들은 공감 어린 논평을 실었다: "지노비에프의 선언 그리고 소비에트에서 카메네프의 선언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었기를 희망한다. 레닌의 글이 담고 있는 날카로운 어조에도 불구하고 근본 문제들에서 우리는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새로 뒤통수를 치는 짓이었다. 그리고 이 조잡한 행위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왔다. 봉기에 찬성하는 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대항하여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당에 적대적인 고리키의 신문에서 공개적으로 선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순간에 당의 중앙기관지는 레닌의 어조의 "날카로움"을 비난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에서"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에 대해 연대를 표시했다. 이 순간 봉기의 문제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당 기관지는 말하고 있었다! 요약된 회의록에 의하면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중앙기관지에 실린 지노비에프와 루나차르스키의 편지 뿐 아니라 편집위원들의 논평도 인정할 수 없다." 스베르들로프는 이 항의를 지지했다.

이때 기관지 편집위원은 스탈린과 소콜니코프였다. 회의록은 이렇게 적고 있다: "지노비에프의 편지에 대한 편집위원들의 선언에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 선언이 오류라고 소콜니코프는 말한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스탈린이 개인적으로 다른 편집위원들과 중앙위원회 다수에 반대하여 공감 어린 논평을 통해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를 지지했다는 사실이 이렇게 해서 알려졌다. 이때는 봉기가 시작되기 불과 4일 전이었다. 그의 행위에 대한 분노는 대단했다.

카메네프의 중앙위원 사임 수락을 반대하면서 스탈린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의 상황 전체가 자기 모순적이다." 즉 봉기에 반대하는 중앙위원들이 인민의 마음에 심어 놓은 혼란을 스스로 방어하겠다는 것이었다. 카메네프의 사임은 찬성 5표, 반대 3표로 수락되었다. 찬성 6표, 반대 1표로 중앙위원회 정책에 대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의 투쟁을 금지하는 결정이 통과되었다. 이 표결에도 스탈린은 반대표를 던졌다. 회의록은 이렇게 말한다: "스탈린이 편집위원 사임을 선언하다." 이미 어려운 상황을 더 어렵게 하지 않기 위해 중앙위원회는 스탈린의 사임을 거부했다.

그의 주위에 조성된 신화에 비추어 보면 스탈린의 행위는 설명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그의 정신적 특성과 그의 정치적 방식과 정확히 일치한다. 거대한 문제들에 직면하면 스탈린은 언제나 후퇴한다. 카메네프의 경우처럼 근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시야의 협소함과 창조적 상상력의 결핍 때문이다. 의심하는 조심성 때문에 그는 거의 천성적으로 거대한 결정과 깊은 견해 차이의 순간에 음지 속으로 물러나 기다린다. 그리고 가능하면 양쪽의 결과 모두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 스탈린은 봉기에 대해 레닌에게 지지를 보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봉기에 공개적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러나 레닌의 비판이 가지고 있는 "어조의 날카로움"을 제외하면 "근본 문제들에 있어서 우리는 같은 견해이다." 카메네프의 선언에 대한 스탈린의 논평은 경박함의 소산이 결코 아니었다. 이와 반대로 그는 조심스럽게 상황과 말을 재고 있었다. 다만 10월 20일에 그는 봉기 반대 진영으로 철회할 수 없이 완전히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지금 인용하지 않을 수 없는 이 회의록들은 원본이 아니라 스탈린의 서기국이 편집한 공식 판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회의록들의 증언은 중앙위원들의 실제 입장을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그 내용의 간략함과 무미건조함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의 진짜 모습을 그 내부의 모든 모순과 불가피한 개인적 동요들과 함께 펼쳐 보이고 있다. 전체 역사 뿐 아니라 역사의 가장 대담한 전환의 순간들도 인간적 요소들을 전부 가지고 있는 인물들에 의해 성취된다. 그렇다고 성취되는 것의 중요성이 감소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화면에 나폴레옹의 가장 뛰어난 승리들을 펼쳐 보이는 영화는 그의 천재성, 넓은 시야, 기발함, 영웅적 행위와 함께 개개 사령관들의 우유부단, 군사적 판도를 읽을 수 없는 장군들의 혼란, 장교들의 어리석음, 군대 전부가 느끼는 공포 그리고 심지어 공포로 인해 늘어진 창자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우리 앞에 펼쳐 보일 것이다. 이 현실적인 역사 자료는 이렇게 증언한다: 나폴레옹 군대는 신화 속의 자동 인형이 아니라 두 시대를 단절시키는 시기에 태어나고 성장한 살아있는 프랑스인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은 역사 전체의 웅대함을 더욱 단순 명쾌하게 강조한다.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혁명을 피와 살로 흡수하는 것보다 혁명이 끝난 후 이것을 이론화하는 것이 더 쉽다. 봉기로 가는 길은 봉기를 일으키는 정당의 위기를 불가피하게 초래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단련되고 가장 혁명적인 정당의 경험으로 이 점이 입증되었다. 봉기 며칠 전 레닌은 자신의 가장 가깝고 가장 뛰어난 두 제자의 출당 처분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만 언급해도 충분할 것이다. 최근 이 갈등을 개인적 성격 차이로 인한 "사고"로 환원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이 시도는 당의 과거를 순수 교회의 관점에서 이상화시키는 것이다. 1917년 가을 레닌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완벽하고 더 결연하게 봉기의 객관적 필연을 표현했다. 반면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솔직하게 당내의 투쟁 저지 경향, 우유부단한 정서, 소부르주아 연줄의 영향, 지배계급들의 압력 등을 드러냈다.

10월 한달 동안 볼세비키당 상층부에서 발생한 모든 회의, 논쟁, 개인적 다툼 등을 속기사가 기록했다면 후세는 이 점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대단히 치열한 당내 투쟁을 통해 당 지도자들은 봉기에 필요한 결의를 다졌다. 동시에 속기록은 이 점도 보여줄 것이다: 혁명 정당은 대단한 수준의 당내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투쟁 의지는 미리 예비되는 것이 아니며 위에서 강제되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경우에 독자적으로 갱신되고 단련되어야한다.

필자는 "당은 노동계급 혁명의 기본 도구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인용하면서 1924년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혁명의 '기본 도구'가 좋지 않았다면 어떻게 우리 혁명이 승리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그의 아이러니는 그의 주장이 담고 있는 원시적인 오류를 숨기지 못한다. 교회가 그리는 성자상과 성자 후보들이 그리는 악마 사이에 살아있는 인간이 존재한다. 역사를 만드는 존재는 바로 이 인간들이다. 볼세비키당이 고도로 단련되었다는 증거는 이견, 동요, 심지어 공포의 전율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제때에 내적 위기를 통해 당을 정비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건의 과정에 결정적으로 개입했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전체적으로 당이 혁명의 대단히 적절한 도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개량주의 정당은 자신이 개량하려는 토대가 확고하다고 생각한다. 이 결과 불가피하게 지배계급의 사상과 도덕에 복종한다. 노동계급의 등에 기어올라 일어선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정당의 제 2 중대가 되었을 뿐이다. 반면 볼세비키당은 진정한 혁명가의 전형을 창조했다. 이들은 현 체제와 화해할 수 없는 역사적 목표에 개인적 존재, 개인적 사상, 개인적 도덕 판단 등의 조건들을 종속시킨다. 또한 주시하는 비타협적 정신을 통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필요한 거리를 유지한다. 레닌은 이것을 고무한 지도자였다. 레닌은 결코 지치지 않은 채 소부르주아 환경이 당과 지배계급 사회 사이에 조성하는 끈들을 수술 칼로 잘라냈다. 동시에 레닌은 당이 자기 고유의 사회적 견해를 창조하고 상승하는 계급의 사상과 감정에 기초하도록 가르쳤다. 이렇게 혁명가가 선정되고 교육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계속적인 투쟁을 통해 볼세비키당은 부르주아 사회의 견해로부터 독립적이며 이것에 비타협적으로 반대하는 나름의 정치적 도덕적 매체를 창조했다. 오직 이것을 통해서만 볼세비키들은 대오 내의 동요를 극복하고 행동을 통해 용감한 결의를 드러냈다. 이것이 없었으면 10월 혁명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 6장 봉기의 기예

사람들은 전쟁에 열성적이지 않듯이 혁명에도 열성적이지 않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강제가 결정적이지만 혁명에서는 상황의 강제 이외에 다른 강제가 없다. 사회 문제에 대한 다른 해결책이 없을 때에만 혁명이 일어난다. 산맥 위에 우뚝 솟은 정상처럼 봉기는 혁명의 정상이다. 그리고 혁명과 마찬가지로 봉기 역시 우리 마음대로 일으킬 수 없다. 대중은 최종 공격인 봉기를 결정하기 전에 여러 번 전진과 후퇴를 반복한다.

다수 대중의 자연발생적 운동과 소수의 의식적 행위처럼 대중 봉기와 소수의 음모는 서로 대비된다. 승리한 봉기는 인민의 선두에 서도록 역사의 부름을 받은 특정 계급의 행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은 방법과 역사적 의의에 있어서 대중 몰래 음모자들이 성취하는 정부 전복과 차이가 크다.  

모든 계급 사회에는 모순들이 널려 있어서 이 틈새로 음모가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예를 들어 스페인, 포르투갈,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음모자들이 정권을 밥먹듯이 교체하는 현상을 계속 유지시키려면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질병이 필요하다. 순수한 음모는 승리하더라도 같은 지배계급의 한 파벌을 다른 파벌로 바꿔치기 할 수 있을 뿐이다. 또는 고작해야 정권의 얼굴을 바꿀 수 있을 뿐이다. 오직 대중봉기를 통해서만 한 사회체제는 다른 사회체제로 대체되었다. 주기적인 음모는 흔히 사회의 정체나 쇠퇴를 표현한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회의 오랜 균형을 깨뜨리는 급격한 변화를 통해 대중봉기가 흔히 일어난다. 남아메리카 공화국들의 고질적인 "혁명들"은 연속 혁명과 하나라도 유사한 구석이 있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는 이와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대중 봉기와 소수의 음모가 언제나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거의 모든 대중 봉기에는 어느 정도 음모의 요소가 개입되게 마련이다. 혁명의 특정 단계에서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지는 대중 봉기는 결코 순수하게 자연발생적이지 않다. 봉기는 여기에 참여하는 대다수도 전혀 예상하지 못하는 가운데 폭발한다. 그러나 이것은 삶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되는 사상에 의해 비옥하게 그 토양이 준비되어왔다. 한편 대중 봉기는 예측과 준비가 가능하여 미리 조직될 수 있다. 이때 음모는 봉기에 복종하고 봉사하고 그 과정을 편하게 하면서 그 승리를 빨리 보장한다. 혁명운동의 정치적 수준이 높고 그 지도부가 진지할수록 대중 봉기에서 음모가 차지하는 역할은 더 크게 마련이다.

봉기와 음모가 서로 대치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를 모두 이해하는 것이 아주 필요하다. 왜냐하면 맑스주의 문헌에서조차 음모라는 말 자체는 겉으로 보기에 모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어떤 때에는 소수의 독자적인 행위를 또 어떤 때에는 소수에 의한 대중 봉기의 준비를 암시한다. 여기서 모순이 발생한다.

어떤 조건 속에서는 음모 없이도 대중 봉기가 승리할 수 있다. 이 점을 역사는 물론 증언하고 있다. 만연한 분노, 산발적인 항의 투쟁, 시위, 파업, 가두 투쟁 등으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봉기는 적의 일부를 이 운동에 끌어들이고 적의 역량을 마비시키면서 구 권력을 타도할 수 있다. 러시아의 1917년 2월 혁명이 어느 정도 이러했으며 1918년 가을의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혁명들도 대체로 이런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이 혁명들의 경우 봉기의 이해와 목적에 철저한 정당이 없었다. 이 때문에 봉기는 승리했으나 권력은 마지막 순간까지 봉기에 반대한 정당들에게 어쩔 수 없이 넘어갔다.

구 권력을 타도하는 것과 권력을 스스로 장악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혁명적이어서가 아니라 부르주아적이었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이 계급은 재산, 교육, 언론, 사회의 전략적 요충들의 그물 망 그리고 위계질서를 갖춘 기관 등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전혀 그렇지 않다. 본성상 모든 사회적 혜택들을 박탈당한 채 봉기를 일으키는 노동계급은 자신의 숫자, 단결, 중핵, 공식 지도부 등에 의존할 수 있을 뿐이다.

대장장이가 빨갛게 달아오른 쇠를 맨손으로 잡을 수 없듯이 노동계급은 곧바로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이 임무를 위해 적합한 조직을 가지고 있어야한다. 음모를 통해 대중 봉기를 지도하고, 음모를 봉기에 복종시키고, 음모를 통해 봉기를 조직하는 것을 맑스와 엥겔스는 "봉기의 기법"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혁명정치의 복잡하고도 책임이 막중한 부분이다. 이것은 대중을 전체적으로 올바로 지도하는 지도부, 변화하는 조건 속에서의 유연한 지향, 철저히 입안한 공격 계획, 조심스러운 기술적 준비, 과감한 공격 등을 전제로 한다.

구 체제에 대한 공동의 적대감으로 단결했으나 명확한 목적, 잘 준비된 투쟁 방법 또는 승리로 가는 길을 의식적으로 보여주는 지도부가 없는 대중 운동을 역사가나 정치가들은 보통 자연발생적 봉기라고 부른다. 관변 역사가들 그리고 최소한 민주주의적 성향을 가진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필요악이라고 생색내듯 인정해주고 그 책임을 구 체제에 떠넘긴다. 이들이 이 운동을 생색내듯이 인정하는 진짜 이유는 "자연발생적" 봉기가 부르주아 체제의 틀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자들도 이와 유사한 태도를 보인다. 지진, 화산 폭발, 일식과 월식, 전염병의 창궐 등을 거부할 수 없듯이 이들은 혁명을 사회적 재앙으로 보고 대체로 거부하지 않는다. 이들이 거부하는 것은 봉기와 혁명의 준비, 계획, 음모 등이다. 이것들을 이들은 블랑끼주의 또는 볼세비키주의라고 부른다. 다른 말로 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권력을 부르주아 계급에게 넘겨주는 봉기를 사후에만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노동계급에게만 권력을 가져다 줄 지 모르는 방법들을 비타협적으로 비난한다. 이렇게 객관주의적 태도를 가진 것처럼 허세를 보이면서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방어하는 자신들의 정책을 포장한다.

오귀스뜨 블랑끼는 다수의 실패한 봉기를 목격했거나 이것들에 직접 참여했다. 이것들에 대한 관찰과 반성을 통해 그는 위반할 경우 봉기의 승리가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지극히 어려운 몇 가지 전술적 규칙들을 도출했다. 그는 봉기의 승리를 위해 이것들을 요구했다: 적합한 혁명 부대의 시기 적절한 구성, 이들에 대한 중앙 집중적 지휘와 적절한 장비, 바리케이드의 잘 계산된 위치 선정 및 설치, 일시적이 아닌 체계적인 바리케이드 방어. 봉기의 군사적 문제들로부터 도출된 이 규칙들은 사회 조건과 군사적 기술에 따라 당연히 바뀌어야한다. 그러나 그 자체로 보면 이 규칙들은 독일어로 "폭동주의" 또는 혁명적 모험주의에 가까운 의미인 블랑끼주의는 결코 아니다.

봉기는 기법이다. 따라서 모든 기법들이 그렇듯이 나름의 법칙들을 가지고 있다. 블랑끼의 규칙들은 군사적 차원에서 혁명적 현실주의를 구현하기 위한 요구들이었다. 블랑끼의 오류는 겉으로 드러난 그의 직접적 규칙들이 아니라 이면에 깔려 있는 규칙들에 있다. 전술적 허약성이 봉기의 패배를 규정한다는 사실에서 블랑끼는 이렇게 유추했다: 봉기 규칙들을 준수하기만 하면 승리는 보장된다. 오직 이 측면에서만 블랑끼주의는 맑스주의와 배치된다. 왜냐하면 음모는 봉기를 대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의 조건이 어떠하든 아무리 잘 조직되어도 적극적인 소수의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역사는 블랑끼주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그러나 이 점만이 문제이다. 그의 긍정적인 규칙들은 유효성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은 자연발생적인 봉기 이상을 성취해야한다. 적절한 조직, 계획, 음모 등이 필요하다. 바로 이것이 봉기 문제에 대한 레닌의 견해이다.

엥겔스는 바리케이드에 대한 물신숭배를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군사기술과 기술 일반의 발전에 기초했다. 블랑끼의 봉기 전술은 구 파리의 특성인 반(半)수공예적 노동계급, 좁은 거리, 루이 필립의 군사체계 등에 적합했다. 혁명을 봉기와 동일시한 것이 블랑끼의 원칙적 오류였다. 봉기를 바리케이드와 동일시한 것은 그의 기술적 오류였다. 그의 견해에 대한 맑스주의의 비판은 이 두 오류에 맞추어졌다. 봉기를 기법으로 간주하는 점에서 블랑끼와 엥겔스는 견해가 일치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 사실을 발견했다: 봉기는 혁명에서 부차적 지위를 차지할 뿐 아니라 바리케이드는 봉기에서 그 역할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속물들은 호엔쫄런 왕가의 검열제도와 협력하여 블랑끼주의에 대한 엥겔스의 비판이 혁명적 봉기 방식에 대한 비판이라고 왜곡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순수 의회주의 방식을 위해 혁명적 방식을 결코 기각하지 않았다. 엥겔스에게 바리케이드에 대한 문제는 봉기의 기술적 요소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다. 그가 바리케이드의 결정적 중요성을 거부한 것에서 개량주의자들은 혁명적 폭력 일반을 거부한 것으로 유추했다. 이것은 미래의 전쟁에서 참호의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사실로부터 군국주의의 멸망을 유추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노동계급이 구 권력을 타도하고 대체하는 조직적 수단은 소비에트이다. 소비에트는 10월 혁명이 성공한 뒤에는 역사적 경험의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10월 혁명이 성공하기 직전까지는 당연히 1905년 혁명이라는 과거의 경험에 근거한 이론적 예측이었다. 소비에트는 대중 봉기를 준비하는 기관이면서 동시에 봉기를 수행하는 기관이다. 또한 봉기의 승리 후에는 노동자국가의 통치 기관이다.

그러나 소비에트 자체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소비에트는 강령과 지도부에 따라 다른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소비에트는 당으로부터 강령을 보급 받는다. 혁명 상황에만 등장하는 소비에트는 완전히 후진적이고 수동적이거나 기가 꺾인 부위를 제외한 계급 전체를 포괄한다. 반면에 혁명 정당은 계급의 두뇌이다. 소비에트 또는 이것과 어느 정도 같은 수준의 다른 대중 조직과 당이 명확히 결합해야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  

혁명 정당의 지도를 통해서 소비에트는 의식적으로 그리고 제때에 권력 장악의 길로 나아간다. 정세의 변화와 대중의 정서에 맞추어 소비에트는 봉기의 군사적 기반을 준비하고 단 하나의 행동 계획으로 돌격대를 단결시키고 공세와 최종 공격의 계획을 수립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조직된 음모를 대중 봉기와 결합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여러 번 그리고 10월 혁명을 성공시키기 오래 전부터 볼세비키들은 음모주의니 블랑끼주의니 하는 적들의 비난들을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순수한 음모의 체계에 대해 가장 비타협적인 투쟁을 수행한 인물은 바로 레닌이었다.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자들은 짜르 체제의 하수인들에 대한 개인적 테러를 자행한 구 사회혁명당의 전술을 이미 여러 차례 옹호했다. 이때 볼세비키들은 지식인의 개인적 모험주의 전술을 가차없이 비난하며 이에 대비되는 대중 봉기를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종류의 블랑끼주의와 무정부주의를 반박하면서도 레닌은 단 한순간도 대중의 "성스러운" 자연발생성에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혁명의 객관적 요인과 주관적 요인, 자연발생적 대중운동과 당의 정책, 인민대중과 진보적 계급, 노동계급과 그 전위, 소비에트와 당, 봉기와 음모 사이의 상호관계를 그는 어느 누구보다 앞서 더욱 깊이 고찰했다.

봉기는 마음 내키는 대로 촉구할 수 없다. 그리고 승리하려면 봉기는 미리 조직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혁명 지도자들은 상황을 올바르게 진단해야한다. 점점 힘을 얻고 있는 봉기의 기운을 제때에 느끼고 이것을 음모를 통해 보완해야한다. 출산의 고통에 산파가 개입하는 비유는 상당히 남용되어왔다. 그러나 봉기라는 원초적 과정에 의식성이 개입하는 현상을 이 비유는 가장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헤르쩬은 한때 그의 친구 바쿠닌을 이렇게 비난했다: 그는 혁명에 개입할 때마다 임신 2개월을 임신 9개월로 잘못 판단하고 있다. 그런데 헤르쩬 자신은 임신 9개월인데도 임신 자체를 부인하는 경향이 있었다. 러시아의 2월 혁명 때에는 출산 날짜가 문제될 수 없었다. 중앙집중적 지도부가 없이 봉기가 제멋대로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권력은 봉기를 일으킨 세력이 아니라 봉기에 제동을 건 세력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두 번째 봉기인 10월 혁명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볼세비키당은 봉기를 의식적으로 준비했다. 적절한 순간을 올바로 포착하여 공격 신호를 내리는 것이 당시 볼세비키당 지도부의 임무였다.

여기서 적절한 순간을 특정 날짜나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안된다. 출산에도 불확실한 시기가 상당히 있다. 이 시기의 범위는 산파술 뿐 아니라 민사 재판관의 판결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된다. 봉기의 촉구가 시기상조여서 혁명이 사산되는 순간과 유리한 봉기 상황을 헛되이 놓친 순간 사이에는 일정한 시간이 존재한다. 이것은 몇 주일 일수도 있고 때로는 몇 개월 일수도 있다. 이 일정한 시기 내에서 봉기는 어느 정도 성공할 확률이 있다. 이 비교적 짧은 시기를 판별하고 최종 공격을 위해 명확한 순간 즉 특정 날짜나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혁명 지도자에게 부과되는 가장 무거운 책임이다. 이것이 바로 혁명의 핵심 문제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혁명 정책을 봉기 기술과 결합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과 마찬가지로 봉기도 다른 수단들을 통한 정치의 연장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다른 모든 종류의 창조적 활동과 마찬가지로 혁명을 지도하는 데에도 직관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말고도 훨씬 많은 다른 것들이 필요하다. 마술도 직관과 경험에 의존하면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 마술은 정상적 리듬이 지배하는 시대와 시기에만 써먹을 수 있다. 거대한 역사적 격동의 시대에는 마술사나 무당은 아무 소용이 없다. 이 경우 직관에 의해 해명된 경험가지고도 부족하다. 이 경우에는 주요한 역사적 세력들의 상호작용을 이해하는 종합적 사상이 있어야한다. 강령과 구호의 움직이는 그림자 뒤에 실제로 존재하는 사회 세력의 운동을 파악하게 해주는 유물론적 방법론이 있어야한다.

기존의 사회구조는 사회 발전의 시급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이것이 혁명의 근본 전제이다. 그러나 역사가 제시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앞장 설 새로운 계급이 있을 때에만 혁명은 가능하다. 산업과 계급들에 내재해 있는 모순들과 관련된 객관적 문제들이 살아있는 인간 대중의 의식 속에 침투해야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들의 의식이 변하고 사회 세력의 새로운 상호관계가 창조되어야한다. 이렇게 혁명은 준비된다.

막다른 골목에서 사회를 구출할 능력이 지배계급에게 없다는 사실이 현실로 드러난다. 이 때문에 지배계급은 자신감을 상실한다. 지배계급의 구 정당들은 산산조각이 난다. 집단과 파벌들 간의 격렬한 다툼이 만연한다. 기적이나 기적을 이루는 자들에게 인민은 희망을 건다. 이 모든 것들은 비록 수동적이기는 하나 매우 중요한 혁명의 정치적 전제조건이 된다.

현 질서에 대한 격렬한 적대감이 생긴다.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장 영웅적인 노력과 희생을 할 각오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혁명계급의 새로운 정치의식이며 혁명의 가장 중요한 적극적 전제조건이다.

대부르주아 계급과 노동계급의 두 근본 진영이 사회의 인구를 다 차지하지는 않는다. 이 두 근본 계급 사이에는 온갖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색채를 가진 광범위한 소부르주아 계급이 존재한다. 이들의 불만, 지배계급의 정책에 대한 이들의 실망, 이들의 참을성 상실과 분노, 노동계급의 대담한 혁명적 주도성을 지지하려는 이들의 용의 등이 혁명의 세 번째 정치적 전제조건이다. 소부르주아 상층부를 중립화시키는 점에서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수동적 요인이지만 또한 부분적으로 능동적 요소이다. 왜냐하면 이 상황 속에서 소부르주아 하부가 노동계급과 직접 나란히 투쟁하기 때문이다.

이 전제들이 상호 작용하여 혁명을 일으킨다. 노동계급이 단호할수록 그리고 더 자신 있게 투쟁할수록 중간 계급이 투쟁의 동맹세력으로 더 잘 이끌린다. 또한 지배계급을 더 고립시켜 이들의 사기를 더욱 격심하게 떨어뜨린다. 그리고 지배계급의 사기가 떨어질수록 혁명 계급의 물레방아는 더욱 힘차게 돌아간다.

명확한 전망을 가질 때, 실제 행동으로 자신에게 유리하게 계급 역관계를 시험할 기회를 얻을 때, 넓은 시야와 확고함과 자신감을 갖춘 지도부가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이때에만 노동계급은 정부 타도에 필요한 자신감에 충만한다. 마지막 그러나 결코 그 중요성이 뒤지지 않는 권력 장악의 전제 조건은 강한 결속력을 과시하며 투쟁으로 단련된 계급의 전위인 혁명 정당의 존재이다.

국내외의 역사적 조건이 유리하게 결합하여 러시아 노동계급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명확하고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단련된 혁명 정당의 지도를 받았다. 오직 이 때문에 인구의 소수인 젊은 노동계급이 유례 없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1871년의 빠리 꼬뮌, 1918년의 독일과 오스트리아 혁명, 헝가리와 바바리아의 소비에트 혁명, 1919년의 이탈리아 혁명, 1923년의 독일 위기, 1925년-1927년의 중국 혁명, 1931년의 스페인 혁명 등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이렇게 증언한다: 혁명의 승리를 위한 필요조건 가운데 가장 허약한 부분은 혁명 정당의 존재였다. 노동계급이 역사적 임무의 절정에서 나름의 역할을 할 수 있게 혁명조직을 건설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힘든 임무이다. 오래된 문명국에서는 강력한 힘이 작용하여 혁명적 전위를 약화시키고 기를 꺾는다. 이 강력한 힘의 중요한 부분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맑스주의의 혁명적 정수를 "블랑끼주의"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해 투쟁한다.              

세계 도처에서 거대한 사회적 정치적 위기들이 다수 발생했다. 그러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만 노동계급 혁명의 승리와 안정화에 필요한 모든 조건들이 맞아떨어졌다. 혁명 상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소부르주아 계급의 정서는 혁명의 전제 조건 가운데 가장 불안정하다. 전국적 위기의 시기에 말과 행동 모두에서 자신감을 불어넣는 계급을 소부르주아 계급은 따른다. 이 계급은 충동적인 열정을 발휘하고 혁명적 분노를 폭발시킬 능력은 있으나 인내력이 부족하여 역경 속에서 쉽게 낙담하고 희망으로 들떴다가 금방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렇게 급변하는 소부르주아의 정서는 모든 혁명 상황의 불안정에 일조 한다. 노동계급 정당이 단호함을 보여 대중의 희망과 기대를 혁명적 행동으로 제때에 전환시키지 못하면 혁명의 밀물은 급격하게 썰물로 바뀐다. 이제 중간 계급은 혁명 진영에서 눈을 돌려 반혁명 진영에서 구세주를 찾는다. 밀물에서는 노동계급이 소부르주아를 끌고 가는 것과 똑같이 썰물에는 소부르주아가 노동계급의 상당한 부위를 끌고 간다.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목격된 공산주의와 파시즘의 변증법이 바로 이것이다.      

맑스는 이렇게 주장했다: 어떤 체제도 자신의 가능성들을 전부 소진할 때까지는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는다. 이 주장에 근거하여 멘세비키들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가능성을 결코 소진하지 않은 후진국 러시아에서 노동계급 혁명의 정당성을 부인했다. 그런데 이 입장은 모두 치명적인 두 가지 오류를 담고 있다. 우선 자본주의는 일국 체제가 아니라 세계체제이다. 제국주의 전쟁과 그 결과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세계적 차원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는 것을 증명했다. 세계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진 것이 바로 러시아 혁명이었다.

그러나 멘세비키의 사상적 오류는 일국적 관점에서도 드러난다. 경제를 추상하면 러시아 자본주의가 자신의 가능성들을 소진시키기 않았다는 것을 진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경제는 진공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라는 매질 내에서 작동한다. 자본주의는 추상이 아니다. 우선 국가권력을 필요로 하는 계급 관계의 살아 움직이는 체제이다. 러시아 자본주의는 짜르 체제의 보호를 받으며 발전했다. 멘세비키들은 짜르 체제가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2월 혁명은 중간적 국가체제를 수립하려했다. 우리가 앞에서 추적한 이 체제는 8개월만에 완전히 자신의 가능성을 소진시켰다. 그렇다면 이 상황 속에서 어떤 국가질서가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을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온건파 사회주의자들만이 옹호하는 부르주아 공화국은 대중의 지지를 더 이상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지될 수 없었다. 이 체제의 정수 자체가 증발해버렸다. 남은 것은 껍질뿐이었다." 이 정확한 규정은 밀류코프의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 증발된 체제의 운명은 필연적으로 짜르 체제의 운명과 같았다: " 두 체제는 모두 혁명의 근거를 제공했다. 그리고 혁명이 일어나자 이 체제들은 단 한 명의 옹호자도 찾을 수 없었다."

7월과 8월에 이미 밀류코프는 코르닐로프와 레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상황을 규정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의 실험은 형편없는 실패작으로 끝났다. 케렌스키 체제가 존속할 여지는 전혀 없었다. 온갖 종류의 정서가 존재했으나 "일치 단결된 정서는 케렌스키 정부에 대한 증오심이었다."고 수하노프는 말한다. 막판에 가서 귀족의 상층부 심지어는 대공들조차 짜르 체제가 전혀 가망이 없다고 인식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케렌스키 체제를 직접 꼬드긴 화해주의 상층부 "대공들"도 이제 케렌스키 정부를 혐오했다. 모두가 현 체제에 불만을 드러내었고 모든 계급들의 정치적 신경이 날카롭게 긴장되었다. 이 현상이 바로 성숙한 혁명 상황의 징후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기의 고름이 터지기 바로 전에 생명체의 모든 근육, 신경, 근 섬유는 참을 수 없이 긴장한다.           

볼세비키당의 7월 당 대회 결의문은 노동자들에게 적들과의 섣부른 충돌을 피하라고 경고하면서 동시에 이렇게 지적했다: "전국 차원의 위기와 혁명에 대한 대중의 뜨거운 열성 때문에 도시와 농촌의 빈민이 노동계급 쪽으로 넘어오는 유리한 상황에는 언제나" 전투에 합류해야한다. 이 상황이 9월과 10월에 왔다.

이때부터 봉기는 자신의 성공을 믿을 수 있었다. 인민의 진짜 대다수의 지지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것을 형식적으로만 이해하면 안된다. 봉기에 대해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면 결과는 매우 모순적이고 불확실했을 것이다. 혁명을 지지하려는 내적 용의와 혁명의 필요성을 명확히 표현하는 능력과는 아주 다르다. 더욱이 이 문제가 제시되는 방식, 국민투표를 주관하는 기관 또는 좀더 단순히 표현하여 권력을 장악한 계급 등에 따라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민주적 방식의 적용에는 한계가 있다. 모든 승객들에게 어떤 유형의 자동차를 타고 싶은지 물어볼 수는 있다. 그러나 기차가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어서 사고 위험이 높을 때 브레이크를 밟는 것이 좋은 지에 대해 물어볼 수는 없다. 그러나 능숙하게 그리고 제때에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조치가 취해진다면 브레이크를 밟으라는 승객들의 승인은 미리 보장된다.

의회는 한 순간을 정하여 인민에게 의견을 구한다. 그러나 혁명의 순간에 인민의 각 부위는 어쩔 수 없이 아주 근소한 시간차를 두고 차례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선발 부위가 혁명 투쟁에 나서고자 안달하고 있을 때 후진 부위들은 그제야 움직이기 시작한다.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에서 모든 대중조직들은 볼세비키당의 지도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수도를 합친 인구보다 약간 작은 3백만 이상의 인구를 가진 탐보프 도에서 소비에트의 볼세비키당 분파는 10월 혁명 직전에야 처음 등장했다.

사물의 객관적 발전의 삼단논법은 대중의 사고발전의 삼단논법과 날이 갈수록 격차를 일으킨다. 그리고 사건들이 급박하게 전개될 때 거대한 실천적 결정은 미룰 수 없다. 이때에는 국민투표를 실시할 수 없다. 각 부위들의 정치적 수준과 정서의 차이는 행동을 통해서 극복된다. 선두 부위는 동요하는 부위를 끌고 가면서 반대하는 부위를 고립시킨다. 다수는 수를 셀 필요 없이 획득된다. 직접 행동만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바로 그 순간에 봉기가 일어난다.

농민들은 지주에 대한 전쟁을 통해 스스로 필요한 정치적 결론을 도출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농촌에서 이미 봉기를 일으켰기 때문에 도시의 봉기를 지지하고 불러일으키고 요구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얀 투표용지가 아니라 눈을 치켜 뜨는 것을 통해 더 진지한 형태의 국민투표를 했다. 소비에트 독재를 수립하는데 필요한 농민의 지지는 이미 확보되어 있었다. 레닌은 봉기를 주저하는 자들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소비에트 독재는 농민에게 토지를 줄 것이고 지역의 농민 위원회에 모든 권한을 부여할 것이다.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면 농민이 이 독재를 지지하는 것을 의심을 할 수 있는가?" 투표용지의 회오리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병사, 농민, 피억압 민족들이 투쟁 과정에서 볼세비키당을 혁명 지도세력으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당이 권력을 잡아야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위해 어떤 계급 역관계가 필요했는가? 10월 혁명을 해석하면서 나중에 레닌은 이렇게 적었다: "결정적인 순간과 지점에서 힘의 압도적인 우위를 확보하는 것 ---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한 이 법칙은 정치적으로 승리하기 위한 법칙이기도 하다. 특히 끓어오르는 격렬한 계급들의 전쟁인 혁명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수도 또는 일반적으로 말해 상공업의 최대 중심부는 인민의 정치적 운명을 크게 결정한다. 물론 지역 농촌의 즉각적 지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한 지지가 중심부에게 필요하다." 레닌이 인민의 대다수를 말한 것은 바로 이 역동적 의미에서였다. 그리고 대다수 개념의 유일하고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었다.

민주주의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면서 자신들을 위로했다: 볼세비키당을 따르는 인민은 단순한 원재료이고 형체가 갖추어지지 않은 역사적 진흙에 불과하다; 이 진흙을 빚어서 도자기를 만드는 자는 교육받은 부르주아 계급과 협력하는 민주주의자들이 될 것이었다. 어느 멘세비키 신문은 이렇게 질문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와 병사들은 다른 모든 사회 계층으로부터 이렇게 고립을 당한 적이 전에 없었다는 것을 모르는가?" 노동계급과 병사들의 불행은 자신들에 의해 권력을 빼앗기게 될 계급들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과 전선에서 무지몽매한 대중의 공감과 지지에 의존하는 것이 정말로 가능했을까? 수하노프는 경멸하듯이 이렇게 적었다: "이들의 볼세비키주의는 연립정부에 대한 증오 그리고 토지 및 평화에 대한 갈망에 불과했다." 마치 이것이 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는 말한다! 연립정부에 대한 증오심은 부르주아 계급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는 욕구를 의미했다. 토지와 평화에 대한 갈망은 노동자의 지도를 받으며 농민과 병사들이 수행하려는 거대한 강령이었다. 민주주의자들 심지어 극좌 민주주의자들의 정치적 미미함은 "교육받은" 회의주의자들이 대중에게 품고 있는 불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무지몽매한 대중은 세세한 사항이나 미묘한 차이들에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상황 전체를 파악하고 있었다. 지식인들은 자기들이 마치 귀족이나 되는 것처럼 인민을 혐오했다. 이 태도는 볼세비키주의에 이질적이었으며 볼세비키주의 성격 자체에 적대적이었다. 볼세비키들은 하얀 손을 가지고 문자나 쓰는 대중의 친구가 아니었으며 현학자도 아니었다. 이들은 사회 밑바닥에서 처음으로 들고 일어서는 후진적 계층들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역사가 이들을 창조한 그대로 그리고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 이들이 들고 일어선 그대로를 볼세비키들은 인정했다. 볼세비키들은 인민의 선두에 서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받아들였다. 볼세비키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봉기에 반대했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은 곧 인민이었다.

10월 혁명을 성취한 기본 정치세력은 노동계급이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선두에는 수도의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 노동자들의 전위에는 비보르그 지구가 있었다. 봉기 계획은 공격의 출발점으로 이 기본적으로 노동계급적인 지구를 선택했다.

마르토프를 필두로 하여 모든 색조의 화해주의자들은 혁명이 끝난 후 볼세비키주의를 병사 대중의 운동으로 규정하려 했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들의 시도를 기쁜 마음으로 낚아채었다. 그러나 이들의 시도는 근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무시했다: 노동자들이 가장 먼저 볼세비키들에 동조했다;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나아갈 길을 보여주고 있었다; 노동자들보다 병사들이 훨씬 더 오래 화해주의의 아성이었다;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당은 소비에트에서 노동자들을 희생시켜 병사들에게 모든 종류의 특권을 부여했다; 병사들은 노동자들의 영향을 받은 후에야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노동자들이 병사들을 지도했다; 마지막으로 10월 혁명 후 1년이 지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러시아의 기회주의 동료들의 모범을 따라 병사들에게 의존하여 노동자들에 대항했다.

가을이 되면 화해주의 우파는 공장과 병영에서 연설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화해주의 좌파는 봉기의 미친 짓을 대중에게 설득시키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었다. 7월에 마르토프는 반혁명 공세에 대항하여 대중의 심금을 울리는 길을 찾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또다시 가망 없는 대의에 몸을 바치고 있었다. 10월 14일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이렇게 인정했다: "볼세비키들이 우리의 말을 들으리라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그는 "대중에게 경고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중은 도덕적 충고가 아니라 행동을 원했다. 므스티슬라프스키는 이렇게 인정했다: 잘 아는 조언자들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듣고는 있지만 이들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것과 똑같은 생각을 되씹고 있었다." 이슬비가 내리는 속에서 수하노프는 푸틸로프 노동자들에게 봉기 없이도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설득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참을성을 상실한 목소리들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이들은 그의 말을 다시 2, 3분 듣다가 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는 말한다: "몇 번 시도하다가 나는 포기해버렸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이슬비는 더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참을성을 상실한 10월의 하늘 밑에서 불쌍한 민주주의 좌파들은 심지어 자기들의 표현에 따르더라도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심지어 일부 볼세비키들을 포함하여 혁명에 반대하는 "좌익"이 애용하는 주장은 하부에서 투쟁 열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10월 11일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노동자와 병사 대중의 정서는 7월 3일 이전의 정서와는 전혀 비교될 수 없다." 이 주장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너무 오래 봉기를 기다리다 지친 뻬쩨르부르그 노동계급은 약간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이들은 심지어 볼세비키들에 대해서도 실망하기 시작했다: 이들도 우리를 속이는 것이 아닐까? 10월 16일 핀란드 출신으로 뻬쩨르부르그에서 활약한 볼세비키 투사 라히아는 당 중앙위원회 협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구호가 이미 약간 낡았다는 점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촉구하고 있는 것을 실행에 옮길 것인지에 대해 대중이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다림에 지쳐 기운이 빠진 모습은 투쟁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사라졌다.

모든 봉기의 첫 번째 임무는 군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 임무를 성취하는 가장 주요한 수단은 총파업, 대규모 행진, 가두 투쟁, 바리케이드 전투 등이다. 10월 혁명을 통해 가장 완성된 모습을 드러낸 특징은 이것이었다: 상황이 교묘하게 잘 맞아떨어져서 노동계급 전위가 공개적인 봉기 이전에 수도의 주둔군을 획득했다. 봉기는 군대를 획득했을 뿐 아니라 주둔군 상설협의회를 통해 이 성과를 공고히 했다. 결과를 미리 계산하기 가장 어려우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봉기의 임무는 군대를 자기편으로 획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임무는 무장 투쟁이 시작되기 전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이 점을 충분히 인식하지 않으면 10월 혁명의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고 봉기 자체가 필요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주둔군의 압도적 다수가 노동자들의 편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수는 노동자, 혁명, 볼세비키당에 아직도 반대하고 있었다. 이 얼마 되지 않는 소수는 군대 내의 최정예 분자들로 장교, 사관생도, 돌격대대 등이었으며 아마 카자흐 기병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 이들을 획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따라서 이들은 무력으로 제압되어야했다. 역사상 10월 봉기로 이름이 남은 혁명의 마지막 임무는 이 때문에 순수하게 군사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 마지막 단계에서는 소총, 총검, 기관총 그리고 대포가 사태를 결정했다. 볼세비키당은 이 길로 봉기를 인도했다.

임박한 대결을 위해 어떤 군사력이 동원되었는가? 사회혁명당의 군사 활동을 지도한 보리스 소콜로프는 이렇게 말한다: 봉기 이전 시기에 "연대에서는 볼세비키당을 제외한 모든 당 군사기구들이 이미 와해되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군사기구를 수립할 조건은 대단히 불리했다. 병사들의 정서는 명확히 볼세비키당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볼세비키주의는 수동적이었으며 적극적인 무장운동으로의 움직임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전적으로 충성을 바치고 전투를 할 능력이 있는 한 두 연대만 있어도 전체 주둔군을 충분히 장악할 수 있었다." 왕당파 장군에서 "사회주의"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말 그대로 "한 두 연대"만 있으면 사태를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 두 연대만 있으면 노동계급 혁명은 진압될 수 있다! 그러나 주둔군의 압도적 다수는 정부에 대단히 적대적이었지만 볼세비키당의 편에서 싸울 수 있는 전투력은 전혀 없었다. 이것은 사실이었다. 군대의 구 군사구조와 이들의 새로운 정치적 구조 사이에 단절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 전투 부대의 근간은 지휘부이다. 그런데 지휘부는 볼세비키당에 적대적이었고 군대의 정치적 근간은 볼세비키 노선이었다. 볼세비키들은 부대를 지휘하는 법은 고사하고 대다수가 총을 다룰 줄도 몰랐다. 병사 대중은 동질적이지 않았다. 소위 적극적 전투 분자들은 소수였다. 병사들의 대다수는 볼세비키들에게 공감하여 이들에게 표를 던졌고 이들을 대표로 뽑았다. 그러나 또한 이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기를 기대했다. 군대 내에서 볼세비키에 적대적인 분자들은 너무 세력이 미미하여 어떤 일도 감히 도모할 수 없었다. 이렇게 주둔군의 정치적 조건은 봉기에 대단히 유리했다. 그러나 주둔군의 전투 역량은 크지 않았다. 이 점은 처음부터 명백했다.

그러나 주둔군을 군사적 관점에서 완전히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었다. 혁명을 위해 싸우려는 1천 명의 병사들은 수동적인 대중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은 어느 정도 대중을 이끌고 있었다. 구성이 좀더 유리한 일부 부대들은 규율과 전투력을 보존하고 있었다. 와해되고 있는 연대에서도 강력한 혁명 중핵이 존재했다. 약 1만 명의 제 6 예비대대 5개 중대 가운데 제 1 중대는 언제나 뛰어났다. 이 부대는 거의 2월 혁명 시작 때부터 볼세비키로 알려져 있었고 10월 시기에는 혁명투쟁의 절정에 올라 있었다. 주둔군의 전형적인 연대들은 실제로는 연대가 아니었다. 행정구조는 와해되어 있었고 장기간 전투를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는 전투를 경험했다. 모든 부대들은 단 하나의 정서로 통일되어 있었다: 하루바삐 케렌스키를 타도하고 해산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새 토지제도를 수립하자. 이렇게 해서 완전히 사기가 떨어진 주둔군은 다시 한번 10월 시기에 힘을 결집하였다. 이들은 완전히 와해되기 전에 무기를 암시적으로 부딪치며 투쟁의지를 과시했다.

그렇다면 군사적 관점에서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어떤 역량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 질문은 적위대 문제를 제기한다. 적위대는 역사의 거대한 무대에 곧 등장할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05년 혁명의 전통에서 탄생한 노동자 방위대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이후 혁명과 운명을 같이했다. 뻬쩨르부르그 군사지구 사령관으로 있을 때 코르닐로프는 이렇게 주장했다: 2월 혁명 도중에 권총 3만 정과 소총 4만 정이 무기고에서 사라졌다. 여기에 경찰이 무장 해제되었고 혁명에 우호적인 연대들이 무기를 제공하여 상당량의 무기가 인민의 손에 쥐어졌다. 무기를 반납하라는 요구에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다. 혁명은 소총의 소중함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조직 노동자들에게 들어온 무기는 아주 적었다.

혁명의 첫 4개월 동안 노동자들은 봉기의 문제에 전혀 직면하지 않았다. 이중권력이라는 민주적 체제로 인해 볼세비키들은 소비에트에서 다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노동자 무장 부대는 민병대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이 편재는 형식적이었다. 노동자의 손에 있는 소총은 학생이 들고 있는 소총과는 역사적 원칙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소총을 들자 유산계급들은 처음부터 경계하기 시작했다. 무기 소지로 인해 역관계가 노동자들에게 급격하게 유리하게 기울었기 때문이었다. 중앙집행위원회가 지지한 국가기구는 처음에는 수도에서 의심의 여지없는 권력을 휘둘렀다. 따라서 노동자 민병대는 별로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방의 공업지역에서는 노동자 민병대가 강화되면서 공장 뿐 아니라 주위의 역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다. 무장 노동자들은 공장 관리자와 엔지니어들을 쫓아냈을 뿐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체포해버렸다. 공장 집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에 근거하여 노동자 무장 부대인 적위대는 빈번하게 공장의 자금을 통해 봉급을 지급 받았다. 1905년 게릴라 투쟁의 전통이 풍부하게 남아있던 우랄지역에서는 나이든 병사들이 주도한 적위대가 법과 질서를 확립했다. 무장 노동자들은 거의 눈에 띠지 않은 채 구 정부를 해산시키고 소비에트를 권력 기관으로 확립시켰다. 소유주들과 관리들이 사보타지에 들어가자 노동자들은 기계, 창고, 예비용 석탄과 원자재 등 공장의 재산을 보호했다. 이제 자본가와 노동자의 역할이 바뀌었다. 노동자들은 소총을 움켜쥐고 자기 권력의 원천인 공장을 방어했다. 이렇게 해서 노동계급 전체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전에 이미 노동자 독재의 요소들이 공장과 지구에 도입되었다.

늘 그랬듯이 화해주의자들은 유산자들의 두려움을 반영하여 모든 힘을 다해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의 무장을 반대하거나 이것을 최소화시키려고 애썼다. 미니체프의 말에 따르면 나르바 지구의 모든 무기들은 "15 내지 20 정의 소총과 몇 정의 권총" 뿐이었다. 이때는 강도 및 폭력 행위가 수도에서 증가하고 있었다. 새로운 소요를 알리는 놀라운 소문들이 사방으로 퍼지고 있었다. 7월 시위의 전야에 수도의 지구에 불을 놓을 것이라는 예상이 일반적이었다. 노동자들은 무기를 찾아서 모든 문들을 노크하고 가끔 건물 안으로 진입했다.

푸틸로프 노동자들은 7월 3일의 시위에서 탄약띠가 들어있는 상자 5개와 기관총 1정을 전리품으로 획득했다. "우리는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고 미니체프가 말했다. 일부 공장들은 더 확실하게 무장했다. 리치코프의 말에 따르면 그의 공장 노동자들은 소총 80정과 큰 권총 20정을 가지고 있었다. 진짜 풍성한 무장이었다! 적위대 본부를 통해 두 대의 기관총을 손에 넣은 이들은 한 정을 식당에 또 한 정을 다락방에 설치했다. 리치코프는 이렇게 말한다: "공장 부대장은 코체로프스키였고 그의 제 1 부관은 톰차크였다. 후자는 10월 시기에 짜르스코에 셀로 근처에서 백군에게 살해되었다. 에피모프 역시 부관이었는데 그는 함부르크 근처에서 백군에게 총살당했다." 이 빈약한 증언들을 통해서 우리는 10월 혁명과 미래 적군의 중핵들이 형성되는 실험이 공장에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적군을 통해 톰차크와 에피모프 같은 훌륭한 적군 투사들이 선정되고 단련된 후 부대 지휘술을 배웠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수백 수천의 이름 없는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것을 적으로부터 충실하게 지켰으며 사방의 전장에서 쓰러져갔다.

7월 시기는 적위대를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충고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 노동자들은 아주 공공연하게 무장 해제 당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내놓은 무기는 대개 아주 낡은 쓸모 없는 것들이었다. 아주 소중한 총들은 전부 조심스럽게 숨겨졌다. 당의 가장 믿을만한 당원들에게 소총이 배분되었다. 기관총은 쇠기름으로 칠한 후 땅 밑에 숨겨졌다. 적위대는 불법활동을 통해 볼세비키들과 같이 긴밀히 행동했다.

노동자들을 무장시키는 임무는 원래 당의 공장 및 지구 위원회 소관이었다. 7월 시기의 타격에서 회복되고 난 후에야 주둔군과 전선에서만 활동했던 당 군사기구가 적위대 조직을 시작했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군사교관들과 일부의 경우 무기들을 제공했다. 당이 제시한 무장봉기의 전망은 서서히 선진노동자들에게 적군의 역할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준비시켰다. 이들은 더 이상 공장과 노동자 지구의 노동자 민병대가 아니었으며 미래에 있을 봉기의 군사 중핵들이었다.            

8월에 공장에서는 자본가들의 사보타지로 보이는 화재가 급증했다. 새 위기가 닥치기 전에 언제나 인민의 집단적 의식이 먼저 요동치면서 경고음의 물결을 사방으로 보냈다. 공장위원회들은 이런 종류의 공격들로부터 공장을 지키기 위해 치열하게 노동했다. 숨겨진 소총들이 꺼내졌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실패로 끝나면서 적위대는 최종적으로 합법화되었다. 약 25,000명의 노동자들이 중대로 편성되고 물론 완벽하게는 아니었지만 소총으로 그리고 일부의 경우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했다. 슐뤼셀베르크 탄약 공장의 노동자들은 네바강을 통해 거룻배에 가득히 수류탄과 폭탄들을 실어 보냈다. 코르닐로프 반란을 진압하는데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해주의자들의 중앙집행위원회는 현명한 그리스인들의 이 선물을 거절했다! 비보르그 적위대는 밤을 이용해 이 선물을 지구 전체에 배포했다.

노동자 스코린코는 이렇게 말한다: "전에는 아파트와 연립주택에서 소총 사격 훈련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대낮에 공원과 대로변에서 훈련이 이루어졌다." "공장이 훈련장으로 돌변했다...배낭을 매고 소총을 옆에 둔 노동자들이 공장의 벤치 옆에 서 있었다."고 노동자 라키토프는 말한다. 곧이어 사회혁명당원과 멘세비키들을 제외한 폭탄 공장 노동자들은 모두 적위대에 입대했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자마자 노동자들은 공장의 마당에 훈련을 받기 위해 집합했다. "수염을 기른 노동자 옆에 소년 연수생이 있었다. 모두 교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렇게 해서 짜르의 군대는 와해되고 미래 적군의 기초가 공장에서 마련되었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진압되자마자 화해주의자들은 자기들이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늑장을 부렸다. 예를 들어 3만 명의 푸틸로프 노동자들에게 소총이 500정만 지급되었다. 곧이어 무기 공급이 아예 중단되었다. 이제 위험은 우익이 아니라 좌익에 있다고 화해주의자들은 생각했다. 이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사관생도들로부터 보호를 받으려고 했다.

당면한 실제 목표도 없고 무기도 부족해서 노동자들은 적위대에서 멀어졌으나 이것도 잠시였다. 중핵들은 모든 공장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중대 사이에 확고한 유대가 확립되었다. 이 중핵들은 이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위험이 닥칠 경우 활동을 할 수 있는 진지한 예비 분자들이 확보되어 있다.

소비에트가 볼세비키당으로 넘어가면서 적위대의 지위가 다시 급격하게 변했다. 적위대는 탄압 당하거나 용인되었다가 이제는 권력 장악에 나선 소비에트의 공식 기구가 되었다. 이제 노동자들은 종종 소비에트의 허락을 구하면서 스스로 무기를 찾아 나섰다. 9월말부터 계속해서 그리고 특히 10월 10일부터 봉기 준비가 공개적으로 일정에 올랐다. 봉기 한 달 전부터 수도의 수많은 공장에서 군사 활동 특히 주로 소총 사격훈련이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0월 중순이 되자 무기에 대한 관심은 새롭게 절정에 도달했다. 일부 공장들에서는 거의 마지막 노동자들까지 중대에 편재되었다.

노동자들은 더욱더 안달하면서 소비에트에게 무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무기는 갖고 싶어서 내뻗는 손보다 비교할 수 없이 부족했다. 엔지니어 코즈민이 이렇게 말한다: "매일 스몰니 학원에 왔는데 그때마다 소비에트 회의가 시작되기 전 그리고 끝난 후 노동자와 수병들이 트로츠키에게 다가가 노동자 무장을 제의하고 무기를 요구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어디에서 이 무기들이 배포되었는 지를 보고하고 이렇게 질문했다: '봉기는 언제 시작됩니까?' 이들은 매우 안달하고 있었다...."

전에 적위대는 당과 무관했다. 그러나 봉기가 다가올수록 볼세비키들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졌다. 이들은 모든 중대의 중핵이었으며 부대 지휘부와 다른 공장 및 지구들과의 연락을 통제했다. 당에 소속되지 않은 노동자들과 사회혁명당 좌파도 볼세비키의 지도를 따랐다.

그러나 봉기 전야에도 적위대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16일에 당 중앙위원 유리츠키는 수도의 노동자 군대가 4만 명이라고 추산했다. 이 수치는 아마 과장되었을 것이다. 무기를 마련할 자원은 여전히 아주 적었다. 정부가 전혀 힘이 없었지만 공개적으로 봉기를 일으키지 않고서는 무기고를 장악할 수 없었다.

22일에 적위대 수도 협의회가 열렸다. 100명의 대의원들은 약 2 만여 명의 적위대를 대표하고 있었다. 이 수치를 너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한다. 등록된 대원들 모두가 활동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고가 발동되면 자원하는 노동자들이 중대로 몰려 들어왔다. 다음날 협의회가 채택한 규약은 적위대를 "반혁명에 대항하고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하기 위한 노동계급의 무장 조직"이라고 규정했다. 봉기가 일어나기 24시간 전이었으나 적위대의 임무는 여전히 공격이 아니라 방어로 규정되고 있었다.

적위대의 기본 단위는 10명이었다. 4개 기본 단위는 분대, 3개 분대는 중대, 3개 중대는 대대가 되었다. 지휘부와 특별 부대를 포함하여 1개 대대는 500명이 넘었다. 1개 지구의 대대들이 모이면 1개 사단이 되었다. 푸틸로프와 같은 대공장은 자체적으로 사단들을 가지고 있었다. 공병, 자전거, 전보통신, 기관총, 포대 등 특별 기술 부대들을 지휘하는 분자들은 해당 공장에서 모집되어 소총수들과 결합한 후 한 부대에 배속되었다. 또는 이들은 주어진 임무의 성격에 따라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지휘부는 모두 선출되었는데 여기에 따르는 위험은 없었다. 모두가 자원했으며 서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적십자 사단을 창설했다. 군대용 수술 물품을 만드는 공장에서 부상자 간호 강좌가 열린다는 발표가 있었다. 타티아나 그라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미 거의 모든 공장들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필요한 응급처치 물품들을 구비하여 간호 근무를 정기적으로 서고 있었다." 자금과 기술 장비의 면에서 조직작업이 대단히 빈약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점차 공장위원회들은 병원 기지와 앰뷸런스에 필요한 물자들을 보내고 있었다. 혁명이 진행 중인 시간에도 허약한 중핵들이 급속히 만들어졌다. 갑자기 엄청난 양의 기술 장비가 이들의 손에 장악되었다. 24일에 비보르그 지구 소비에트는 이렇게 명령했다: "모든 자동차들을 즉시 징발한다....응급처치 물품들의 재고를 즉시 조사하고 모든 병원에 간호사들을 준비시켜라."

당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노동자들이 더욱 자주 사격 및 기동연습에 참여하고 있었다. 순찰 임무가 필요한 초소의 수가 늘어나고 있었다. 공장에서는 보초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근무를 서고 있었다. 적위대 본부는 좀더 넓은 공간으로 이전되었다. 23일 파이프 제련소에서 적위대 열병식이 있었다. 어느 멘세비키가 봉기에 반대하는 발언을 시도했으나 그만하면 됐다는 분노의 폭풍 속에 그의 주장은 금새 파묻혔다. 주장할 시간은 이미 지나갔다! 운동은 저항할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이제 이 운동은 멘세비키들까지 삼키고 있었다. 타티아나 그라프가 말한다: "이들은 적위대에 가입하여 모든 임무들을 다 맡을 뿐 아니라 주도력도 일부 발휘하고 있었다." 23일에 스코린코는 나이가 많고 적은 사회혁명당과 멘세비키들이 볼세비키들과 연대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도 같은 공장에 있는 아버지를 즐겁게 포옹했다고 말한다. 노동자 페스코보이는 자기가 속한 부대에 "16세의 어린 노동자와 50세의 노인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렇게 다양한 나이대가 "커다란 활기와 투쟁의 용기"를 불러일으켰다.          

비보르그 지구는 특히 전투 준비에 열성적이었다. 네바강 교량들의 열쇠를 훔치고 지구의 취약 지점들을 연구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선출한 후 공장위원회들은 상설 순찰대를 구성했다. 카유로프는 비보르그 노동자들이 당연히 가질만한 자부심을 가지고 이렇게 적고 있다: "이들은 짜르 체제에 대항해 전투에 나선 첫 번째 집단이었고 지구에 8시간 노동제를 수립한 첫 번째 집단이었고 장관-자본가들에 항의하여 처음 거리로 나선 집단이었고 7월 7일 볼세비키당에 대한 탄압에 항의한 첫 번째 집단이었다. 이제 이들은 10월 25일의 결정적인 날에도 일찍 투쟁에 참여했다." 사실은 어쩔 수 없이 사실이다!  

적위대의 역사와 이중권력의 역사가 서로 맞닿아 있는 부분은 상당하다.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통해 이중권력은 봉기 이전에도 노동자들이 상당한 정도 무장하도록 도와주었다. 봉기의 순간에 전국적으로 동원된 노동자 부대의 수를 계산하는 것은 최소한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쨌든 수십만의 무장 노동자들이 봉기의 중핵이 되었다. 예비병력은 거의 무한했다.

물론 적위대의 조직은 결코 완벽하지 못했다. 모든 일이 서둘러 대충 그리고 언제나 엉성하게 진행되었다. 적위대 소속 노동자들 대다수는 거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통신도 제대로 조직되지 못했다. 보급체계는 서툴렀다. 위생 부대는 뒤에 처졌다. 그러나 가장 자기희생이 강한 노동자들로 모집된 적위대는 이번에 임무를 끝까지 수행하겠다는 욕망에 불타고 있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다. 노동자 사단과 농민 연대 사이의 차이는 사회 계급적인 것만이 아니었다. 엉성한 병사들의 다수는 고향 마을로 돌아가 지주의 토지를 나눈 후 백군에 대항해 처음에는 게릴라 부대로 나중에는 적군에 소속되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더 직접적인 차이도 있었다. 전쟁에 반대하여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나이 많은 병사들의 강제적 집합체가 주둔군이었다. 그러나 적위대 사단은 새로운 토대와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개개인의 선택에 따라 새로 구성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는 발트해 함대 수병이라는 세 번째 종류의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 계급적 성분으로 보면 이들은 보병보다 노동자에게 훨씬 가까웠다. 이들 속에는 상당수의 수도 노동자들이 있었다. 수병들의 정치적 수준은 병사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소총에 대한 모든 것을 까먹은 투쟁적이지 않은 예비 병력과 달리 수병들은 군복무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실제 전투 과정에서는 무장한 볼세비키들, 적위대 사단들, 수병의 선진 그룹, 비교적 와해 과정이 더딘 잘 보존된 연대들에 확고히 의존할 수 있었다. 이 집단적 군대의 구성부분들은 서로를 보완했다. 다수의 주둔군들은 전투 의지가 없었다. 수병 부대들은 수가 부족했다. 적위대는 전투 기술이 부족했다. 수병과 함께 노동자들은 활력, 대담성, 열성을 제공했다. 주둔군 연대들은 관성이 박힌 예비 병력이었으나 엄청난 수와 압도적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노동자, 병사, 수병들과 날마다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볼세비키들은 자신들이 전투로 인도할 군대의 구성부분들 사이의 큰 질적 차이를 알고 있었다. 봉기의 계획 자체가 이 차이들을 상당히 계산해 놓고 있었다.

유산계급들은 적대 진영의 사회 세력이었다. 이들은 이 진영의 군사적 약점이 되었다. 자본, 언론, 종교를 구성한 이들은 한번도 전투에 나선 적이 없었다. 이들은 전신이나 전화를 통해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할 전투의 결과를 알아보는 것에 익숙해 있다. 이들의 청년 세대, 아들, 학생은 어떤가? 이들은 거의 모두 10월 혁명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대다수 역시 비켜서 있었다. 이들은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아버지들과 함께 있었다. 나중에 이들의 상당수는 장교와 사관생도 대오에 합류했다. 그런데 이들은 대개 학생층에서 모집되었다. 유산계급들은 자기들을 따라 줄 인민 대중이 없었다. 노동자, 병사, 농민들은 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화해주의 정당들이 붕괴되자 이들에게는 군대가 없었다.

현대 국가에서 철도가 차지하는 중요성에 비례하여 두 적대 진영의 정치적 계산에서 철도 노동자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의 인적 구성은 위계 질서 속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정치적 성향은 대단히 다양했으며 이 때문에 화해주의 외교관들에게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최근에 수립된 전국 철도노동조합 집행위원회(빅줼)는 예를 들어 전선의 군대위원회 보다 사무직원과 노동자들 사이에 더 확고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철도 조직에서는 소수만이 볼세비키들을 따르고 있었다. 볼세비키들은 주로 역, 작업장 그리고 창고시설의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조합운동의 볼세비키 지도자 슈미트의 보고에 따르면 뻬쩨르부르그와 모스크바의 철도집결지 노동자들은 당과 관계가 아주 밀접했다.

그러나 9월말 철도 파업 이후 화해주의 사무직원과 노동자들도 급격하게 좌로 기울었다. 말이나 늘어놓고 동요하는 빅줼에 대한 불만은 하부로 내려갈수록 명백했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철도와 우편 직원들은 계속해서 정부와 크게 갈등하고 있다." 당면한 봉기의 임무에 비추어 보면 이것만으로 혁명세력은 거의 충분히 유리한 상황에 있었다.

우편 전신 분야에서는 상황이 덜 유리했다. 볼세비키 보키의 말에 따르면 "우편전신국 직원의 대부분은 입헌민주당원들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부 직원들은 상층부에 적대적이었다. 우편 배달부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체국을 점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말을 통해 철도와 우편 사무직원들의 마음을 바꾸려고 했다면 가망이 없었을 것이다. 볼세비키들이 우유부단하다면 입헌민주당과 화해주의 상층부에게 상황이 유리했을 것이다. 단호한 혁명지도부를 통해 하부는 중간층을 획득하고 빅줼의 상층부를 고립시켜야했다. 혁명을 목적으로 정세를 계산할 때 통계수치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 살아있는 행동의 계수 역시 필수적이다.

그러나 볼세비키당 내부에서 봉기를 반대하는 세력은 비관적 결론을 내릴 근거를 충분히 찾아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적의 역량을 과소 평가하는 것에 대해 경고했다. "뻬쩨르부르그가 상황을 결정할 것인데 여기에서 적들은 상당한 역량을 가지고 있다: 무장을 대단히 잘 갖추었고 전투력이 있는 5천 명의 사관생도, 군대 총사령부, 돌격대, 카자흐 기병, 상당 부분의 주둔군, 뻬쩨르부르그 주위로 부채 살처럼 분산 배치되어 있는 대단한 수량의 대포 등을 이들이 보유하고 있다. 더욱이 적들은 중앙집행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전선에서 군대를 수도로 배치시킬 것이 거의 확실시된다...." 적들의 군사 목록은 위압적이다. 그러나 단지 목록에 불과하다. 전체적으로 군대가 사회의 복사판이라면 사회가 공공연히 분열을 일으킬 때 군대 역시 분열된다. 유산계급들의 군대는 고립과 쇠퇴 때문에 벌레가 먹어 구멍이 난 나무와 같았다.    

호텔, 식당, 매춘굴로 모여든 장교들은 케렌스키와 코르닐로프가 서로 결별한 이래 정부에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볼세비키들에 대한 이들의 증오심은 무한했다. 일반적으로 짜르를 지지하는 장교들이 정부의 편에서 가장 활발히 움직였다. "크로닐로프와 크리모프 장군님, 당신들이 이루지 못한 일을 어쩌면 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봉기 당일 동궁을 가장 용감히 방어한 장교 시네구브의 기도문이었다. 엄청난 수의 장교들 가운데 싸울 준비가 정말 되어 있는 자들은 몇몇 개인들에 불과했다. 완전히 사기가 꺾인 장교들은 전투력이 아니라는 것을 코르닐로프 반란이 이미 증명했다.

사관생도들의 출신 성분도 동일하지 않았고 이들 사이에도 의견은 일치하지 않았다. 세습 군인들, 장교의 아들이나 손자, 짜르 치하에서 전쟁의 필요에 의해 모집된 우연적 분자들이 사관생도를 구성했다. 공병학교 교장은 어느 장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과 함께 죽는다....우리는 귀족이다. 따라서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다." 결국 고귀한 죽음을 회피한 이 운이 좋은 신사들은 민주적 사관생도들을 "거칠고 어리석은 얼굴을 가진" 상놈이나 농민이라고 말했다. 고귀한 혈통과 그렇지 못한 혈통 사이의 분열은 사관학교에서 골이 깊었다. 공화국 정부를 방어하기 위해 가장 열성적으로 나선 자들은 짜르의 몰락을 가장 슬퍼했던 자들이었다. 민주적 사관생도들은 케렌스키가 아니라 중앙집행위원회를 지지한다고 말했다. 혁명은 처음에 유태인들에게 사관학교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특권 상층부의 자기 기반을 지키기 위해 유태인 자본가의 아들들은 볼세비키당에 대단히 적대적이었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들을 가지고는 구체제는 물론이고 동궁마저도 지킬 수 없었다. 사관학교의 출신 성분은 이질적이었다. 사관학교는 군대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었다. 이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 사관생도들은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이들은 질문하기 시작했다: 카자흐 기병들의 움직임은 어떠한가? 우리 이외에도 나서는 자들이 있는가? 임시정부를 방어하는 것이 가치가 있기는 한가? 포드보이스키의 보고에 따르면 10월초 뻬쩨르부르그 소재 사관학교들에서 사회주의자들은 약 120명이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42명 또는 43명이 볼세비키였다. "학교의 지도부 전체는 반혁명 세력이라고 사관생도들은 말한다.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날 사태에 대해 이들은 확실히 준비되어 있다...." 사회주의자들 특히 볼세비키들의 숫자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이들 덕분에 스몰니 학원은 사관생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중요한 일들을 다 알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사관학교들의 위치는 아주 불리했다. 사관학교들은 병영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있었다. 이들은 병사들을 경멸했지만 또한 대단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관생도들이 긴장할 이유는 많았다. 수천 개의 적대적인 눈들이 이웃 병영과 노동자 지구에서 이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모든 사관학교들이 병사집단을 보유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감시는 더 효과적이었다. 병사들은 말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봉기를 지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학교의 창고는 비(非)전투 병사들의 소관이었다. 공병학교의 어느 장교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 깡패 같은 놈들은 창고 열쇠를 잊어버리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내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기관총의 개머리판 잠금 장치들이 어디로 숨겨져 있었다." 이 상황에서 사관생도들의 영웅적 행위가 기적을 이루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었다.

혹시 뻬쩨르부르그의 봉기가 인접 주둔군들에 의해 위협받지는 않을까? 짜르 몰락의 마지막 순간에도 반동들은 수도를 둘러싼 소규모 군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짜르 체제의 추측은 틀렸지만 지금은 어떨까? 가능한 모든 위험을 배제하는 조건을 보장받을 생각이라면 봉기 자체가 필요 없었을 것이었다. 결국 봉기의 목적은 정치적으로 해체할 수 없는 장애물들을 없애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미리 계산할 수는 없지만 계산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미리 계산할 수 있었다.

10월초 뻬쩨르부르그 도의 소비에트 협의회가 크론슈타트에서 열렸다. 수도에 인접한 가치나, 짜르스코에, 크라스노에, 오라니엔바움, 크론슈타트 등의 주둔군 대표들이 발트해 함대 수병들의 최고 음이 낸 공명에 응답했다. 크론슈타트의 결의문을 협의회 대표들이 지지했다. 농민들은 사회혁명당 좌파를 통해 볼세비키당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었다.

16일에 열린 당 중앙위원회 협의회에서 뻬쩨르부르그 도의 당 활동가 스테파노프는 역관계를 다채롭게 제시하면서 볼세비키당의 역량이 지배적이라고 결론 내렸다. 세스트로레츠크와 콜피노의 노동자들은 무장하고 있으며 이들의 분위기는 전투적이다. 노비 표트르호프에서는 연대에 대한 당의 활동이 중지되었다. 연대가 와해되었기 때문이었다. 크라스노에 셀로에서 제 176 연대는 볼세비키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7월 4일에 타우리데 궁을 순찰한 연대가 바로 이 연대였다. 제 172 연대는 볼세비키당을 지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연대에는 기병대가 있다." 루가에서는 3만 명의 주둔군이 볼세비키당으로 넘어왔다가 지금은 일부 동요하고 있다. 이곳의 소비에트는 아직 조국방어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그도프에서 연대는 볼세비키당에 장악되었다. 크론슈타트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지난 몇 개월 간 주둔군은 끓어 넘쳤으나 지금 수병의 우량 분자들은 함대 작전에 동원되어 있다. 뻬쩨르부르그에서 60 킬로미터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슐뤼셀부르크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소비에트가 유일한 권력기관이다. 탄약 공장의 노동자들은 수도를 지원할 준비를 항상 갖추고 있다.

크론슈타트의 소비에트 협의회 결과와 함께 제 1선 예비병력에 대한 정보는 아주 고무적인 것으로 생각될 수 있을 것이다. 2월 혁명이 확산되면서 광범위한 지역에서 군대의 규율이 무너졌다. 이제 수도 인근의 주둔군들에 대해서도 자신할 수 있었다. 이들의 상태가 미리 충분히 파악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핀란드와 북부전선의 군대는 제 2선 예비병력에 포함되었다. 여기서는 상황이 더 유리했다. 스밀가, 안토노프, 디벤코의 활동은 대단히 소중한 결과를 가져왔다. 헬싱키 주둔군과 함께 발트해 함대는 핀란드 영토에서 주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정부는 힘이 전혀 없었다. 헬싱키에 주둔한 카자흐 기병 2개 사단은 수병들과 긴밀히 접촉하면서 볼세비키당이나 사회혁명당 좌파를 지지했다. 발트해 함대에서 사회혁명당 좌파는 볼세비키당과 구별이 갈수록 모호해졌다. 코르닐로프가 반란을 일으킬 때 수도에 대한 공격 부대로 상정한 부대가 바로 이 카자흐 기병 사단들이었다.

헬싱키는 탈린 해군기지의 수병들에게 손을 뻗치고 있었다. 수병들은 이때까지 명확한 입장이 없었다. 발트해 함대가 역시 주도력을 행사한 것처럼 보이는 북부지역 소비에트 대회는 수도 인근 주둔군 소비에트들을 너무도 널리 단결시켜서 모스크바 일부와 아르한겔스크 일부도 포괄했다. 안토노프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이렇게 해서 혁명 수도를 케렌스키 군대의 공격 가능성으로부터 방어하고 무장시킨다는 생각이 실현되었다." 스밀가는 소비에트 대회를 마치고 헬싱키로 돌아와 봉기의 첫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수도로 보낼 수병, 보병, 포병 특별 부대들을 조직했다. 이렇게 해서 뻬쩨르부르그 봉기의 핀란드 쪽 허리는 가장 확실하게 보호되었다. 이쪽에서는 적의 공격을 예상할 필요가 없었으며 오직 강력한 지원만 기대하면 되었다. 전선의 다른 부분들에서도 상황은 전적으로 유리했다. 가장 낙관적인 볼세비키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이 당시 상황은 최소한 훨씬 유리했다. 10월에 군대 전체에서 군대 위원회 선거가 열렸다. 그리고 모든 곳이 볼세비키당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드빈스크 근처에 주둔한 군단의 연대 및 중대 위원회 선거에서 "나이 많은 합리적인 병사들은" 완전히 패배했으며 이들 대신 "화가 나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초리에 늑대와 같은 주둥이를 한 우울한 회색의 인간들이" 선출되었다. 전선의 다른 구역들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모든 곳에서 위원회 선거가 진행중이며 모든 곳에서 볼세비키들과 전쟁 패배주의자들만이 선출되고 있다." 정부위원들은 배속된 부대에 가는 것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상황도 우리와 나을게 없다." 이것은 부드버그 남작의 말이다. 그가 지휘한 군단의 2개 기병 연대인 후사르 카자흐 연대와 우랄 카자흐 연대는 가장 오래 지휘관들의 통제를 인정했고 가장 오래 반란을 일으킨 부대들을 진압하는 일을 거부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부대들도 갑자기 색깔을 바꾸고 "토벌대와 헌병의 임무를 면제시켜줄 것"을 요구했다. 이 경고의 위험성은 남작과 모두에게 명확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바이올린을 켜서 하이에나, 자칼, 양 등을 몰고 다닐 수는 없다. 유일한 구원은 뜨거운 낙인을 대량으로 찍는 것 밖에 없다...." 그리고 비극적인 고백이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고 아무 곳에서도 할 수 없다."

다른 군단과 사단들에 대한 유사한 증언을 인용할 수 없다면 그 이유는 이들의 지휘관들이 부드버그만큼 관찰력이 있지 않거나 일기를 쓰지 않거나 일기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빈스크 근처에 주둔한 이 군단과 제 5군의 다른 군단들 사이의 차이점은 이 군단의 지휘관이 신랄한 문체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뿐이었다. 사실 제 5군 역시 다른 군단에 비해 앞선 것이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공중에 붕 떠있었던 제 5군의 화해주의 위원회는 계속해서 애용하는 문구로 전보를 보내  뻬쩨르부르그를 위협했다: 총검으로 후방의 질서를 회복시키겠다. 그러나 "모두가 단순한 허풍에 불과했다"고 부드버그는 적고 있다. 사실 이 위원회는 명이 며칠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23일에 이 위원회는 재선에 실패했다. 볼세비키가 장악한 새 위원회의 의장은 스클리안스키 의사였다. 그는 훌륭한 젊은 조직가로 적군 창립 과정에서 그의 재능을 널리 발휘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미국의 어느 호수에서 카누를 타다가 사고로 죽고 말았다.

10월 22일 북부전선의 정부위원 부관은 전쟁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볼세비키 사상은 군대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으며 대중은 평화를 원한다; 최후 순간까지 버틴 포병도 "전쟁 패배주의 선전에 호응"하고 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증상이었다. 혁명이 일어나기 3일 전에 "임시 정부는 권위가 없다"고 정부위원이 보고하고 있다.

물론 군사혁명위원회는 이 당시 이 모든 문서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미 알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23일 전선의 여러 부대 대표들이 뻬쩨르부르그 소비에트에 출석하여 평화를 요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후방으로 진군하여 "10년 더 전쟁을 연장하려는 모든 기생충들을 죽이겠다"고 대답했다. 전선 대표들은 소비에트에게 말했다: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으면 "전선 부대들은 당신들을 지지할 것이다."

좀더 떨어진 그리고 후진적인 전선인 남서전선과 루마니아 전선에서 볼세비키들은 여전히 희귀한 종자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병사들의 정서는 다른 곳과 같았다. 주메린카 근처에 주둔한 제 2 위병 군단의 6만여 병사들 가운데 한 명의 젊은 공산주의자와 두 동조자가 있었다고 에프게니아 보쉬가 말한다. 그러나 이 군단도 10월에 봉기를 지지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정부는 카자흐 기병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우익 진영의 눈이 좀 덜 먼 정치인들은 카자흐 군대도 상황이 아주 나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었다. 카자흐 기병의 장교들은 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코르닐로프를 지지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더욱더 좌로 기울고 있었다. 정부는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궁에 대한 카자흐 연대들의 냉담함은 칼레딘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법무장관 말리안토비치도 명확히 인식했다: "카자흐 장교들만이" 칼레딘을 지지했다. 다른 병사들과 똑같이 카자흐 병사들도 볼세비키당에 기울고 있을 뿐이었다.

3월초 자유주의 신부들의 손과 발에 키스를 했으며 입헌민주당 장관들을 어깨에 태우고 다녔고 케렌스키의 연설에 취해 볼세비키들이 독일의 첩자라고 믿었던 전선의 부대들 가운데 이제 정부를 지지하는 쪽은 하나도 없었다. 병사들이 물이 새는 장화로 밟고 다니기를 거부한 참호의 진흙탕 속에 이 장밋빛 환상들은 모두 잠겨버렸다. 뻬쩨르부르그에서 봉기가 일어난 바로 그 날 부드버그는 이렇게 적었다: "결말이 다가오고 있다. 그 결과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볼세비키의 지도를 따르지 않으려는 부대는 우리 전선에 단 하나도 없다."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written by Leon Trotsk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