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범서의 『회상』 서평

“끊긴 길을 다시 잇고, 우리는 전진할 것이다!”

 

남한 노동운동권에서 좌익반대파-제4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은 대단히 생소하다. 왜 그럴까? 그 원인을 규명하자면 적지 않은 분량의 글로 논증을 해야겠지만, 몇 가지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일단 남한에서 최초로 트로츠키를 긍정적 차원에서 소개했으며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한 최초의 정치조직인 ‘국제사회주의자’(IS), 지금의 ‘다함께’는 클리프주의와 상충하지 않는 한에서만 트로츠키를 옹호하였으며, 정작 트로츠키주의의 핵심이면서 자신들의 클리프주의에는 어긋나는 제4인터내셔널의 창건, 소련에 대한 “퇴보한 노동자 국가” 규정, 식민지 방어노선 등에 대해서는 스탈린주의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은 비방과 중상을 통해서 그것의 가치를 폄하하고 자신들의 기회주의를 변호해왔다. 자신들의 수정주의를 은폐하기 위해 트로츠키의 다른 한 측면을 의도적으로 억눌려왔던 것이다.

그 밖에 다른 자칭 반(反)스탈린주의자들도 대혁명가로서의 트로츠키의 권위를 차마 무시할 수 없기에 트로츠키를 존중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때로는(필요한 경우에는) 열심히 인용도 하지만, ‘다함께’가 그러하듯이 정작 트로츠키주의의 핵심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역시 국가자본주의론을 추종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그렇다고 해서 똑부러지게 트로츠키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을 시도해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짐작컨대, 그럴만한 이론적인 역량이 없거나, 그렇게 했다가는 도리어 논쟁 속에서 자신들의 기회주의가 노출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소련·중국·북한 등의 사회성격문제, 두 나라(혹은 그 이상) 사이의 갈등·전쟁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취할 태도를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입장 차가 발생했을 때, 그것은 ‘혁명진영(?) 내의 이견’ 정도로 간주되어 덮어두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그들이 곤경에서 탈출하는 방법이다. 이쯤 되면 ‘노동조합에 대한 견해차이만 아니면 좌공으로 전향하는 건데…’하는 생각이 들 것 같기도 하다. 트로츠키주의를 “자본주의의 좌파”라고 비난하는 좌익공산주의 논리에는 적어도 최소한의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이들이 남한 노동운동권의 가장 전투적 부위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선진노동자·학생들은 이들이 진정한 혁명노선을 따르고 있다고 간주하곤 한다. 이렇게 피상적 원칙성, 전투적 태도에 이끌려 정치조직에 입문한 동지들에게 맑스-레닌주의의 고전들을 연구하고 토론할 시간은 없다. 다름 아닌 ‘실천’을 하느라 말이다. 결국 이 동지들에게 ‘실천’에 그다지 쓸모도 없어 보이는, 선배들이 학습하라고 강조하지도 않는 ‘제4인터내셔널’ 따위에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게 된다. 게다가 ‘사회주의의 이상’과 몇 억 광년은 동떨어져 보이는 중국이나 북한, 포악한 독재자가 집권하고 있는 이라크나 아프간, 리비아 등을 방어하는 노선을 주장하여 대중들로부터 멸시당하는 것은 정말이지 참기 힘든 일일 것이다.

이러한 정치풍토가 트로츠키주의자를 운동권 내 극소수로 존재하도록 만들지만, 또한 트로츠키주의가 갖는 타당성을 인정하면서도 트로츠키주의와는 거리를 두고자 하는 심리를 형성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한다. 또한 이는 트로츠키주의자를 짓누르는 압력 가운데 하나로 작용한다.

이런 현실 속에서 왕범서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회상 : 나의 중국혁명』은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단지 막연히 알고 있거나 생경한 동지들에게 좋은 지침이 될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저자의 인생역정과 투쟁의 경험 속에서 트로츠키주의가 왜 해방의 열쇠로 간주될 수밖에 없는지 설명해주고 있다. 물론 이 책은 중국혁명과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를 현장감 있는 언어로 전달하고 있으므로, 중국혁명과 좌익반대파─4인터내셔널의 역사를 공부하려는 동지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중국, 북한 등의 스탈린관료체제가 여전히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 사회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관하여, 이 문제를 여태껏 고민할 겨를이 없었던 동지들에게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행동지상주의”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

이 책의 저자인 왕범서는 1925년 5·30운동의 세례를 받은 세대에 속한다. 원래 저자는 스스로를 서구의 학문과 시를 짓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경멸했던 학생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요즘으로 치면 비권/반권 성향의 학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을 휩쓴 5·30운동의 폭풍 속에서 얼떨결에, 단지 “웅변대회” 입상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학생대표로 선출된 그는 이 활동을 통해서 “‘학문을 위한 학문’이라는 말이 얼마나 허구적인가를, 그리고 진정한 학문은 행동과 결합하며 행동을 위해 공헌해야 한다는 것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북경대학에 입학한 저자는 학내에서 공산당의 대학지부에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 시기는 대략 20년대 중반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그런데 소련과 코민테른의 역사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독자라면 20년대 중후반 소련공산당을 비롯하여 코민테른에 속한 공산당들이 다들 그러했듯이 중국공산당 역시 관료화의 물결에 휩싸이고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료화는 필연적으로 당원들의 비판의식을 마비시켜 당기구에 굴종하도록 만들기 마련이다. 물론 저자의 북경대 재학시절에 중국공산당은 아직까지 구제불능의 관료기구로 타락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당내 분위기에 대한 저자의 증언 속에서 관료화의 전조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내가 공산당에 참가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가장 철저하고 혁명적이기 때문이었고 그 이상은 더 깨닫지 못하였다. 당시 지방의 일부 지도자들은 심지어 우리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기까지 했다. “더이상 무엇을 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필요하다. 그런 신념이면 족하다. 왜냐하면 혁명의 길은 무엇보다도 행동하고 실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연구를 많이 하면 ‘학원파(學院派)’가 돼버릴 것이며, ‘학원파’는 단지 탁상공론만 할 뿐이다.” 당시 우리는 이런 태도에 불만을 가졌으며, 진위인(陳爲人) 등의 행동지상주의에 불만스러워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런 태도가 필시 진 동지 자신이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론을 경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이 북방의 한두 간부의 편견이 아니라 두 차례의 혁명 동안에 당내에 유행하던 주요 경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44)

이들은 ‘당원 필수 지식’을 글이나 말로 번역해서 조금 가르치고 반년쯤 지나면 귀국시켜 ‘실제 투쟁에 참가’시켰다. 만일 누가 러시아어를 열심히 배우거나 ‘필수’ 이외의 이론서를 읽는다면 그것은 곧 이들의 전문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되어 그 사람은 반드시 지독한 비판을 받고 활동적이지 못한 분자로 간주되거나 예정보다 앞당겨서 귀국할 가능성이 있었다. (p.99)

“혁명의 길은 무엇보다도 행동하고 실천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뭔가 귀에 익은 듯한 얘기처럼 들리지 않는가?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행동지상주의”는 비단 그 당시 중국에서뿐만 아니라 지금도 혁명적 지도력이 부재한 세계 곳곳에서 “유행”하는 “주요 경향”이다. 오늘날 남한의 ‘사회주의’, 혹은 ‘혁사’(혁명적 사회주의)를 내건 조직들은 대개 현재 벌어지는 경제투쟁에 거의 모든 역량을 투여하고, 이를 이것이 진정한 “행동”이며 “실천”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저기 벌어지고 있는 투쟁사업장에 결합하고 연대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최고 덕목으로 간주되며, 사회주의의 대의에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가를 측정하는 지표가 된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맑스-레닌주의 고전연구를 기피하는 현상, 국제노동운동/공산주의운동사의 연구를 쓸모없는 것 내지는 연구자들의 몫으로 치부하는 인식, 그리고 강령논쟁에 임하는 경박한 자세가 몸에 배기 시작한다. 또한 운동에 새로 유입된 동지들은 고작 입문서 수준의 지식을 익히고 나서 조직으로 인입된 이후 본격적으로 맑스-레닌주의의 고전들을 학습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면서 사상적 발전이 정체되기 시작한다. 이론의 연구는 ‘권위 있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동지’들의 몫으로 여기게 된다. 자신은 그저 거리로 나가서 열심히 ‘실천’하면 그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자기최면을 건다. 결국 그 ‘지도적 위치에 있는 동지’들이 잘못된 사상──예컨대 국가자본주의론, 노동자주의, 스탈린주의 등──으로 이들을 지도할 경우 이를 뿌리칠 수 없게 된다.

20년대 중반 중국공산당에 만연한 “행동지상주의”의 폐해는 저자가 이후 진술하고 있는 중국혁명의 참혹한 패배를 통해 드러나게 된다. 물론 중국공산당이 스탈린/부하린의 범죄적 정책을 집행하는 데 협조하는 하수인이 되어 그 자신도 파멸적인 타격을 입게 된 까닭을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행동지상주의”가 당원들의 지적수준을 저하시키고 비판의식을 마비시켜, 결국 낭떠러지로 향하는 열차에 제동을 걸 최후의 장치마저 해체시켰다는 점은 확실하다. 저자 역시 중국공산당을 스탈린주의로 이끈 요인 가운데 하나로 이 “행동지상주의”를 언급하고 있다.

…한편 노간부들은 실천만을 과도하게 강조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전통적 낙후성을 드러내었다. 그들은 레닌식의 ‘이론이 행동을 이끈다’는 의미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실천만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관념이 중공 노간부들의 머릿속에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중공 지도자들의 협애하고 단선적인 시각을 초래했고, 경험주의적이고 상식주의적인 사상을 만들어냈으며, 관료적이고 권위적이며 행정사무주의적인 모습을 낳았던 것이다. 이 문제가 여러 차례 혁명적인 국면의 맥을 끊고, 중공으로 하여금 맹목적으로 스탈린주의를 따라가게 했다. 오늘날 전국적인 정권을 획득한 중공이, 전술적인 측면에서 정객들이나 하는 수단을 부리고 끝내 원칙적인 방향을 견지하지 못한 채 관료독재주의의 진흙탕에 빠져 발을 뺄 수 없게 된 것도 여기서 연유하는 것이다. (p.171~172)

남한의 소위 ‘혁사’ 진영에 만연한 “행동지상주의” 역시 조직원들의 무지를 조장하고, 조직 내 의미 있는 반대파의 출현을 예방하고, 이를 통해 기회주의를 교정할 가능성을 차단하여 결국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의 혁명적 사상에서 한참 벗어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다.

아직 지도부에 반기를 들만큼 성숙하지 않았던 저자는 “행동지상주의”의 풍토에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해 나름대로 문제의식을 느끼고 “혁명의 성질, 사회의 성질, 혁명의 지도, 혁명에 있어서 계급관계 그리고 중국혁명과 세계혁명의 관계 등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자신의 “사상생활에서 중요한 명제”로 삼게 된다(물론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저자가 이론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깨닫게 된 계기는 훨씬 이후 즉 모스크바에 가고 나서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남한 혁명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한다. 남한의 혁명가에게 다가올 혁명의 성질, 남한 사회의 성질, 혁명의 지도, 혁명에 있어서 계급관계, 남한에서의 혁명과 세계혁명의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요 사활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중국혁명, 패배의 경험

저자가 공산당원으로서 활동을 시작했을 무렵에, 중국공산당은 국민당 속으로 자신을 청산하고 있었다. 저자 역시 “‘국민당에 가입’되었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진술하면서 이 당시 상황의 희비극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의아스러웠던 점은 우리가 국민당의 회의를 열어야 했다는 것이다. 입당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처음으로 명을 받고 이런 회의에 참석했을 때 나는 총리의 유영(遺影)에 경례하고 유촉(遺囑)을 경청한 다음 남방의 정세 보고를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십수 명 내지 20명 정도가 참가했던 그 회의에서 진짜 국민당원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고 그 외 나머지는 모두 우리 동지들이었다. 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통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후 몇 차례 더 웃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정작 참가해야 할 진짜 국민당원이 오지 않은 것이다. 회의에 출석한 것은 공산당원 일색이었는데도 우리는 의식을 그대로 진행했다. 경례를 하고 유촉을 읽는 동안 몇몇 사람들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는 이제까지 품고 있던 의혹에 관해 상급의 동지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그의 해석은 물론 연합전선이었다. “그러나”라고 말을 떼면서 나는 말했다. “이곳에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연합할 국민당원이 없습니다. 지금 우리는 희극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 “남방의 상황은 다릅니다. 그곳의 국민당은 실제로 역량이 있습니다. 우리는 전국적인 정책을 집행해야 합니다.” 나는 결코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었고 이 가짜 연극을 여전히 웃긴다고 생각했지만 그뿐, 반대할 만한 근거는 생각해내지 못했다. (p.54~55)

한편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였던 이대조가 장작림에게 붙잡혀 처형되는 등 북방의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군벌세력은 “남쪽의 혁명당”이 “실제로는 반공의 입장”임을 알게 되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장개석이 이들 군벌과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여 혁명가들의 학살을 교사했기 때문이다.

급기야 “‘혁명군의 지도자’가 노동자를 도살한다는 사실”이 남방으로부터 전해지면서 저자를 비롯한 북방의 공산당원들은 경악했다. 이 참혹한 학살극은 다름 아닌 스탈린/부하린이 교사한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으며, 이후 저자도 좌익반대파를 접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당지도부는 이 사태에 대하여 고작 “장개석은 제국주의에 투항했다. 우파에 투항했다. 혁명을 배반했다”는 설명밖에 할 수 없었으며, 이는 이 사건의 원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당원들을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왕정위·당생지의 무한정부가 “믿을 만한 동맹자”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에 대해 왕정위와 그의 국민당 좌파 정부는 노골적인 반공기조를 드러내면서 공산당원들을 체포하는 것으로 화답하였다.

당시에 저자는 왕정위의 반동성을 간파하고 있었으나 그의 생각이 당의 공식적인 입장에 반할뿐더러 이론적으로도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공합작 이후 일련의 사태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명료한 입장을 갖기까지는 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당시──정확히 말해서 정주회의(鄭州會議, 1927년 6월 10일 무한정부 지도자와 풍옥상이 벌인 회의) 이후 시점──에 저자는 노동자·농민의 친구 행세를 하는 지배계급 좌익분파의 가면 속에 숨겨진 반혁명적 본질을 알아챌 수 있었다 : “풍옥상의 혁명적인 태도는 단지 소련의 무기를 갈취하기 위한 가장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의 입장이 공고해지면 그는 곧바로 반동 군벌의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아직 이론적으로 성숙해지기 이전에 지니고 있었던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깨달음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의 일부는 때때로 반제국주의 사회주의 수사를 남발하면서 노동자국가와의 우호친선관계를 과시한다. 그리하여 노동자국가로부터 ‘인민의 벗’이라는 신임장을 수여받음과 동시에 막대한 물질적 지원을 누리며, 자국의 피착취인민들에게 환상을 불어 넣는다. 그러나 일단 정치적 곤궁함이 어느 정도 해소된 상태에서 국내의 계급투쟁이 일정 수위에 도달하면 이들은 망설임없이 북경 또는 모스크바와의 불장난 우호관계를 청산한다. 중국뿐만 아니라 터키, 이라크,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토착지배계급은 소련(또는 중국)을 적당히 이용해 먹은 후에 다시 제국주의의 품에 안겼다. 그 과정에서 많은 공산당의 투사들과 노동자들이 일차적으로 정치적 무장해제를 겪고, 그 다음에는 물리적 무장해제를 당하면서 박멸당했다. 이것이 지난 역사를 통해 확인된 간단하면서도 중요한 진리인 것이다.

한편, 광주의 “성항파업위원회”(혹은 ‘성항파공위원회’)와 그 소속기관은 저자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이 파업위원회는 사법권까지 장악하여 사실상 이중권력을 형성하였다. 이 파업위원회를 통해 표출된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목도한 저자는 “중국혁명에서 노동자계급의 지도적 위치”를 실감하게 된다.

 

트로츠키주의자가 되다

“패잔병”의 처리과정 속에서 저자는 러시아로 유학을 떠날 기회를 얻게 된다. 저자가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된 시기는 10월 혁명 10주년이 될 무렵이었다. 이 시기에는 이미 좌익반대파와 스탈린/부하린 파벌 사이에 격렬한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저자를 비롯한 중국학생들은 “곧 소련공산당 집안싸움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갔다.” 특히 당시 주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가 중국혁명에 관한 문제였으므로 중국학생들은 이 논쟁에 더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스탈린/부하린 파벌은 이미 당 기구를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다수’, ‘중앙위’의 권위를 내세워서 이제 막 중국에서 건너온 청년투사들을 현혹시킬 수 있었다. “당은 우리에게 무조건 다수에 찬성하고 중앙위원회를 존중하라고 교육시켰다. 따라서 우리는 문건을 읽거나 논쟁의 내용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스탈린을 중심으로 한 측이 옳다고 미리 단정했다.” 그러나 반대파의 문건 유포가 제한적이며, 당원대회에서 반대파 연설자에 대한 치졸한 방해행위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저자는 반감을 가지게 된다.

소련공산당 내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기 위하여 저자는 “국제노동운동사, 정치경제학, 러시아혁명사, 소련 경제 문제 등을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그러나 저자를 비롯한 중국유학생들은 중국혁명의 한가운데에 있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초보적인 답을 내릴 수 있었으며, 이는 좌익반대파의 입장에 근접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중앙’, ‘다수’의 권위에 짓눌려 있었으므로, 자신들의 의견을 올곧게 피력하지는 못한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경험을 확대해 일반화하고 그것을 가지고 문건의 어떤 견해를 증명하거나 비평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리에 함께한 지도인물이 우쭐대는 미소를 띠며 “동지, 당신의 의견을 트로츠키(혹은 라데크)가 들으면 기뻐할 것이오”라고 가볍게 지적하면 발언한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매우 낭패한 얼굴로 황급히 그 의견을 철회하곤 했다. 중국의 혁명가는 결코 본성이 겁쟁이가 아니고 대다수가 활력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 것은 ‘당’, ‘중앙’, ‘다수’라는 말이 당시에는 너무나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말들을 독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무상의 권위를 향유했던 것이다. (p.87)

여러 가지 의혹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주의자로 남아있던 저자는 우연한 계기로 좌익반대파의 유관인자와 접촉하게 되면서 온갖 중상과 비방에 가려져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좌익반대파의 실체를 접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반대파에 대한 비난, 제명안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트로츠키의 유형을 비롯하여 반대파에 대한 물리적 탄압이 가속화되고, 저자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마음 속 깊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관료집단이 장악한 당에 대한 저자의 반감은 어느새 과학과 만나기 시작한다. “모든 시간을 러시아어를 배우는 데 썼고 필사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이론을 연구하였으며 가능한 한 많은 소련 반대파들의 저작들을 읽었다.” 이런 학습과정을 통해서 그는 비로소 “두서너 해 동안 가슴속에 쌓여 있던, 중국공산당의 혁명 지도에서 드러난 이해할 수 없는 전술에 관한 의문들”을 해소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저자는 “볼셰비키-레닌파”가 되었다.

 

진독수 : “볼셰비키주의에서 카우츠키주의로”

한때 남한에서 노동해방의 대의에 헌신하던 투사들 가운데 적지않은 이들이 혁명노선을 포기하고 떠나갔다. 일부는 아예 바리케이드 저편으로 넘어가 철천지원수가 돼버리기도 하였다. 이 책에서도 많은 변절자들이 소개된다. 그 변절자들 가운데는 국민당 특무와 한 패가 되어서 옛 동지들을 탄압하고 학살하는데 일조하는 마옥부같은 비열한 인간들도 있다. 이들은 대개 혁명을 자신의 출세수단 정도로 생각하는 기회주의자들로, 혁명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수지타산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될 시에 언제든지 조직과 동지들을 내팽개칠 준비가 되어있다. 그러나 이런 가장 추악한 배신자들 이외에도,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다른 유형의 변절자들로 인하여 또 다른 시련을 맞이한다.

진독수라는 인물에 대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중국근대사상사의 최고봉에 서있었으며 중국공산당의 창건자이며 초기 중국공산당의 주요 지도자였던 그는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을 대신하여 파괴된 중국혁명의 속죄양이 되어야 했다. 실패의 모든 책임을 억울하게 뒤집어 쓴 그는 러시아 반대파의 문건들을 접하면서 자신이 범한 중대한 착오는 “스탈린이 결정한 명령을 충실하게 집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계기로 작용하여 트로츠키주의자가 된다. ‘짓지 않은 죄’를 회개하여 코민테른의 신임을 회복할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스탈린주의자들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된 ‘진독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관료집단의 권위에 굴하지 않고 올바른 노선을 추구하려는 그의 의지가 트로츠키주의와 만나 좌익반대파 중국지부를 역사의 무대로 등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 노혁명가에게도 쇠락의 시기가 닥쳐왔다. “중국 계몽운동 지도자가 사상적으로 새롭게 변화하고, 또 부단한 약진 뒤에 다시 퇴각”하게 된 것이다.

1939년 8월에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고 같은해 11월에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이 두 사건은 “전세계 노동자계급과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제4인터내셔널의 대오에 광범한 논쟁을 촉발했고 아울러 조직이 분열되는 상황을 만들었다.”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소련이라는 국가의 성격에 관한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배반당한 혁명>, <소련의 계급적 성격>, <이행강령>,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등에서 소련이 ‘퇴보한 노동자국가(degenerated workers’ state)’[이 책의 국역본은 “추락하는 노동자국가”라고 번역]임을 논증하였다. 이에 반해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버넘, 섁트먼 등은 소련이 노동자국가임을 부정하였고, 소련방어 역시 거부하면서 결국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구제불능의 반공주의자가 되어 피그만 침공, 베트남전쟁 등 노동자국가와 미제국주의 사이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미제국주의의 편을 들었다.

중국에서는 바로 진독수가 버넘, 섁트먼 분파와 같은 입장에 서 있었다. 이미 진독수는 1934년경에 이미 트로츠키의 소련에 대한 규정인 ‘퇴보한 노동자국가’에 회의를 표명한 바 있었다 : “이렇게 비민주적인데도, 아직도 무슨 노동자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후 한동안 트로츠키의 입장에 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그는 독·소 불가침 조약 이후 다시 트로츠키에 반기를 든다. “그의 입장은 역시 민주주의의 견해에 근거한 것이다. 즉 부르주아 제도보다 높은 민주주의가 없으면, 근본적으로 노동자국가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진독수의 이러한 관점에 대하여 저자는 “감정적이고 직관적인 것”이라고 규정한다. 진독수의 비과학적 관점에 대한 비판이지만, 예리한 독자라면 이러한 규정이 비단 진독수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님을 짐작할 것이다. 소련 그리고 중국·북한·쿠바 등을 자본가 혹은 다른 착취계급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는 관점들이 실제로 대부분 “감정적이고 직관적” 즉, 인상주의적인 것이다. 오늘날 남한에서는 소련·중국·북한 등을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는 트로츠키주의자(?), 좌익공산주의자, 등소평 집권 이후 중국이 자본주의로 변모했다고 주장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진독수의 이러한 관점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민주는 사회의 진보 혹은 후퇴의 가장 신뢰할 만한 지표”라는 진독수의 민주주의 물신은 국가자본주의론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다. 이것이 레닌과 트로츠키의 것이 아니라 카우츠키의 것이라는 점 또한 기억해둘 필요가 있겠다.

트로츠키주의를 소련방어를 거부하는 국가자본주의론과 동일선상에 놓고 비난하는 것이 스탈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반면 클리프주의, 좌익공산주의 등 각양각색의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은 트로츠키주의와 제4인터내셔널의 정치를 은근슬쩍 반(反)스탈린주의에 철저하지 못한 것처럼 깎아내리거나 스탈린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치부한다. 노동자국가 방어노선을 스탈린주의에 대한 모종의 타협으로 왜곡하려는 국가자본주의론 진영의 악선동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만년의 진독수 역시 그러했다. 소련문제에 관하여 트로츠키의 입장을 옹호하는 저자를 비롯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진독수로부터 다음과 같은 감정과잉의 편지를 받아보게 된다.

(너희는) 사상적으로 그 개자식(스탈린을 지칭한다)과 다를 게 없다. … ‘민주국가인 영국과 미국에 반대하고’, ‘파시즘을 공격하지 않으며’[서평자 주 - 제4인터내셔널이 파시즘을 공격하지 않았다는 진독수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다만 진독수가 카우츠키주의로 퇴보하면서 견지했던 모종의 항일 인민전선에 반대했을 뿐이다. 따라서 이것은 진독수의 오해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으로 추정된다], ‘소련을 옹호한다’는 이 세 정강을 합쳐보면, 제3인터내셔널과 제4인터내셔널은 이치상 마땅히 합병해야 할 것이다. (p.342)

오늘날 남한의 ‘혁사’들 상당수는 만년의 진독수가 빠져들었던 인상주의적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우리는 이처럼 “감정”과 “직관”에 사로잡혀 결국 “볼셰비키주의에서 카우츠키주의로” 추락한 진독수가 아닌,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뻔뻔한 비방공세에 위축되지 않았으며 명망가이자 고참혁명가인 자신의 권위를 내세움없이 젊은 동지들로부터 겸허하게 좌익반대파의 사상을 접하고 학습했던, 그리하여 전세계의 약소국·식민지 혁명가들에게 유일한 길을 제시했던 진독수를 모범으로 삼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실패를 극복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이다. 이것이 스탈린주의자들의 온갖 비방과 증오를 한 몸에 떠안았던 한 거인, “중국의 플레하노프”를 기리는 우리의 방식이다.

 

1949년 중국혁명과 중국사회의 성격논쟁 : 관료집산주의, 파블로주의, 트로츠키주의

전쟁이 끝나고 일제가 항복하였다. “생기 넘치는 이 희망은 다시 비약적으로 통치자에 대한 분노와 불평으로 훌쩍 넘어갔다.” 만약 이때 중국에 진정한 레닌주의 노동자당이 존재하였다면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나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그들을 구워 과자로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일본제국주의, 국민당 특무, 스탈린주의의 투옥, 학살에 의해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을 잃어버린 것이 커다란 손실이었다. 그러나 저자는 무엇보다도 중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분열이 극복되지 못한 것이 무엇보다도 뼈아픈 일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 역시 올바른 지적이다. 그러나 이 언급이 강령적 차이를 어설프게 봉합하는 식으로라도 혁명운동의 통일을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것으로 읽혀져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중국 트로츠키주의가 겪게 된 어려움은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 역시 겪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게슈타포와 KGB의 극악한 탄압 속에서 헌신적이며 경험 많은 활동가들이 목숨을 잃었다. 유럽조직이 사실상 물리적으로 궤멸된 것이다. 그리고 주로 제4인터내셔널 내의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조장된 분열과 이탈로 인해서 막대한 역량을 손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후 개량주의 세력 특히 스탈린주의가 득세하면서 국제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을 가로막았다. 다시 한 번 지도력의 부재가 기회를 날려먹었다. 유럽자본주의는 미제국주의의 지원을 통해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중국이나 동유럽 등지에서는 약간 다른 상황이 전개되었다. 혁명세력이 부재하거나 미미한 상황, 스탈린주의의 득세와 더불어 제국주의의 패퇴, 허약하기 짝이 없는 토착자본가계급의 존재 등의 요소들이 맞물려 연속혁명이 굴절된 형태로 관철된다.

국민당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으며, 마침내 1949년, 홍군은 중국대륙을 석권하여 제국주의와 그 하수인들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1952년 12월 전국적으로 트로츠키주의자에 대한 체포의 광풍이 몰아친다. 이 때 중국 스탈린주의는 정치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식솔들까지 잡아 가두는 봉건시대의 유물인 연좌제 방식도 서슴지 않았다. 체포된 혁명가들은 ‘반혁명’이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히거나 총살당했다. 이것이 “진정한 공산주의자”들, 그리고 “평생의 귀중한 세월을 노동자계급의 해방과 이익을 위해 바쳤다”는 사람들에게 가해진 형벌이었다. 저자는 다행스럽게도(?) 단기간 구금된 이후 국외로 추방되는 처분을 받게 된다.

어찌되었든, 중국을 석권한 것은 볼셰비키-레닌주의가 아니라 스탈린주의였다. 이러한 현실은 저자를 비롯한 중국 트로츠키주의 진영에게 커다란 고뇌를 안겨주었다. “이는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이것은 트로츠키주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다.” 이것은 저자에게 “소련과 스탈린주의의 성질이라는 문제로부터 중공 승리의 원인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저자는 대략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나는 소련이 이미 하나의 관료집산주의적인 국가로 변했으며 스탈린주의 정당이 곧 관료집산주의 정당으로 변했다고 보았다. 따라서, 중공의 승리는 단지 하나의 집산주의적 관료정당의 승리일 뿐이며, 결코 중국무산계급정당 및 그 혁명의 승리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p.381~382)

눈치가 빠른 독자들은 이것이 섁트먼의 ‘관료집산주의(bureaucratic collectivism)’라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4인터내셔널 미국지부의 핵심지도자였던 섁트먼은 소련의 핀란드 침공으로 야기된 반소여론에 굴복하여 소련방어를 거부한 이래 피그만 침공, 베트남 전쟁과 같은 사태에서 미제국주의를 지지하는 등 자국의 지배계급에 충성해왔다. 이미 브루노 알에 의해서 고안되어 트로츠키에게 논박된 적이 있는 관료집산주의는 이러한 배신을 합리화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소련과 제국주의 양쪽 모두 공평하게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서방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들은 적어도 소련에는 존재하지 않는 민주적 권리를 누리고 있다. 이것으로 미제국주의를 지지할 충분한 이유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가 일시적으로나마 관료집산주의를 받아들인 까닭은 지배계급의 위력과 자본주의적 여론의 압력에 비굴하게 무릎꿇은 섁트먼 일파와는 다른 것으로 여겨진다. 아마 저자는 소련에 대한 새로운 계급이론, 즉 관료집산주의가 당시 중국, 동유럽 등지에서 벌어진 현상에 대한 설명을 함에 있어서 정통 이론보다 나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이점에 대해서 보다 상세하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노선을 따르던 회원들은 소련 적군이 제국주의 군대를 몰아내고 점령한 지역에서 사적소유가 공격당하고 자본가계급이 축출되는 사태를 보면서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트로츠키주의는 집단적 소유체제가 오직 노동자 계급에 의해서 수립될 수 있는 것으로 간주해왔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은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해방 과제가 노동자전위의 지도 아래 그리고 노동계급독재를 통해서 순수하고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그러나 중국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승리, 국유화된 소유체제의 수립은 노동자전위에 의해 달성되지 않았다. 소련이 점령한 동유럽,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나라에 스탈린주의 소련이 복제되었다. 스탈린주의 소련은 이전에 이미 퇴보한 노동자국가라고 선언된 바 있다. 그러나 이제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 건설되지 않은 이 나라를 노동자국가라 말하는 것이 온당한가?’라는 새로운 시대의 예리한 물음에 답해야 했다. 당시 정통노선, 다시 말해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간주하는 입장을 견지하는 진영에서는 적군점령지에서 ‘노동자국가의 수립’이나 ‘자본주의의 타도’가 이루어졌다고 믿지 않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홍군의 승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팽술지는 북경의 새 정권이 “실제로는 농민무장에 의거한 소자산계급과 자산계급의 타협을 바탕으로 세워진 일종의 적나라한 보나파르트주의 군사독재”라고 단정하였다. 이들의 입장은 ‘노동자혁명이 없었는데 노동자국가라니! 무슨 소리요?’라고 반문하는 오늘날의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의 사고와 동일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차라리 이들 나라에서 ‘자본주의의 흔적은 내일이면 즉시 일소될 것’임을, 그리고 ‘러시아와 같은 사회체제를 확립하려는 완벽한 경향이 이들 나라에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인식하고 있던 섁트먼 분파의 입장이 현실을 직시한 편에 가까웠다. 이러한 이유로 섁트먼의 관점은 ‘정통노선’의 무능함을 답답해하던 일부 혁명가들에게 설득력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저자도 “이 새로운 입장은 소련과 스탈린당의 많은 현상들, 특히 중공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에게 적지 않은 해석상의 편리를 제공”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해석상의 편의에 안주하지 않고 예리한 눈으로 사태를 관찰한다면 이 이론의 몰과학, 반혁명적 성격은 간파될 수밖에 없다. 저자 역시 “이 새로운 입장이 이론적으로는 비록 몇 가지 사상적인 매듭을 풀 수 있도록 도와주지만 이를 실제 정치에 응용하면 오히려 적합하지 않음을 점차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결국 “사회주의혁명의 이익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역시 트로츠키의 옛 입장”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중공에 의해 장악된 중국은 기형적 노동자국가라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이 입장의 올바름은 제4인터내셔널의 기치 아래 투쟁하는 혁명가들에 의해 여러 차례 논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섁트먼주의를 포기하고 트로츠키주의로 회귀하면서도 이론적 혼란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섁트먼주의를 포기하고 트로츠키주의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잘못된 전제를 수용했던 것 같다. 저자는 중국공산당으로 대표되는 스탈린관료집단의 정치성으로부터 중국사회의 계급적 성격을 규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였다. 이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소련과 중국, 북한 등의 관료집단의 반노동계급적 성격을 비난하는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의 주장은 대체로 정당하다. 그러나 스탈린관료집단의 정치가 이들이 통치하는 사회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규정해주지 않는다.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가 그가 통치하는 소련을 자본주의로 회귀시켰다는 마오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동일한 반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유체제의 문제이다. 이것은 일찍이 맑스-엥겔스가 수립한 관점이기도 하다.

팽술지가 애초에 신중국의 사회성격을 ‘소자본가, 자본가계급의 독재’로 간주하다 돌연 “노동자당원의 증가”와 “노동자계급적인 방향이 강화”된 것을 들면서 노동자국가로 간주하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에 대해 저자가 “자산계급의 군사독재정권이 집권당 내에 노동자당원이 증가하고 노동자계급적 경향이 강화된다고 해서 어떻게 평화적으로 어떠한 유형으로든 노동자국가로 변화할 수 있었는가?”라고 비판한 것은 참으로 지당한 것이다.

[이 글을 작성하면서 저자에 관한 추가정보를 얻고자 웹서핑을 하던 도중에 ‘미래연대’(지금의 ‘노건투’)의 동지가 작성한 『회상』의 서평을 보게 되었다. 그 글은 저자가 중국이 노동자국가라는 “잘못된 결론”(미래연대-사노련-노건투는 일관되게 중국을 자본주의로 규정하였다)을 내린 것이 “중공 내 노동자당원이 증가되어 노동자계급적 경향이 강화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저자의 입장이 아니라 팽술지의 입장이었으며 저자는 도리어 이를 철저하게 논박했으므로 ‘미래연대’의 그 글은 저자의 입장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30년대 중반의 중국공산당, 이미 소부르주아 농민군집단으로 변모한 이 조직이 여전히 무산계급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 역시 제4인터내셔널 내의 ‘정통노선’ 추종자들, 팽술지 등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교조, ‘(노동자전위가 이끄는) 노동자혁명 없이 노동자국가가 수립될 수 없다’라는 명제──물론 일반적으로는 올바른 명제이다──에 현실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시도가 빚어낸 결과였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의 패배 이후 이미 도시를 등지기 시작했고, 모택동은 ‘도시 거주자와 군대의 중요성은 3할’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프롤레타리아혁명노선을 농민전쟁노선이 대체하였다. 물론 “노동자계급의 경향”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산디니스타 같은 제3세계 민족주의 좌익들도 “노동자계급의 경향”을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소부르주아 좌익집단에 불과하다. 저자는 “중공이 무산계급이 지도하는 혁명연합전선”을 주장한 것과 중공 내부에 스탈린의 투항정책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 중공이 “시종 엄격한 규율로 혁명가 조직을 유지”한 점 등을 들어 중공에 “시종 노동자계급의 경향을 유지해온 정당”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렇게 제시된 근거들은 핵심을 빗겨간, 부차적 요소들의 나열에 불과하다. 게다가 신중국 수립 10년 후에 노동자계급 혹은 공산주의와 아무런 인연이 없었던, “노동자계급의 경향”이 존재한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카스트로의 게릴라 집단이 권력을 장악한 후에 소련과의 관계 속에서 쿠바의 자본주의를 일소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일부는 쿠바에 노동자혁명이 일어났다고 자기최면을 거는 것으로 딜레마에서 벗어나고자 했었다.

다시 저자의 입장으로 되돌아오면, 저자는 스탈린관료집단의 이중적 성격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고 있다.

때로 그들은 제2인터내셔널보다 더 뻔뻔스럽고 적나라하게 자본주의를 위해 복무했으며, 더 잔인하고 대담하게 혁명을 배반했다. … 그러나 … 그들은 소련의 국유재산제를 보존·확대하고, 자본주의국가에서 이 제도를 실현하고자 한다. 확실히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전형적인 멘셰비키의 말을 자주 입에 담고 그 정강을 적고 있다. 그러나 이 ‘멘셰비키주의’와 예전의 멘셰비키주의는 다르다. 만약 후자가 원칙적이고 전략적인 입장이라면, 전자는 시종(적어도 1930년 이후) 책략이나 수단 또는 계책을 펼치기 위한 연막으로 간주할 수 있다. 우리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항상 이 두 종류의 멘셰비키주의를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스탈린당의 반자본주의적인 성질을 간과하거나 낮게 평가했다. (p.394~395)

여기서 저자의 혼란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으며, 저자의 병명(病名)이 무엇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그 병명이란 바로 ‘파블로주의’이다. 파블로주의는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비록 제대로 된 혁명세력은 아니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혹은 왼편으로부터의 압력을 받아 혁명노선을 실행할 수 있다는 가정을 한다. 이 가정으로부터 ‘객관적인 조건’ 하에서 공산당들이 혁명적 지도력을 가지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당으로 자신을 해소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파블로주의자들은 형식적으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범죄를 비난하면서 트로츠키주의에 충실한 체 하지만, 이내 스탈린주의의 ‘혁명적 성격’을 칭찬하면서 스탈린 관료집단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힘’에 부끄럽게 굴복하고 만다. 심지어 파블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모택동 정권의 학살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실수에 의한 것이며 그것도 예외적인 경우”라는 경악스러운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스탈린관료집단에 “반자본주의적인 성질”이 있으며, 이를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는 저자의 지적은 타당하다. 이 점은 국가자본주의론자들이 한사코 외면했던 것이기도 했다. 형식논리가 아닌 변증법으로 관료집단을 봐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반자본주의적인 성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그들이 지배하는 국가의 소유형태가 집단적, 노동계급적 형태를 띠고 있으며, 그들은 이 소유체제에 기생하는 입장에서 ‘숙주’의 생존에 그들의 이해가 걸려있다는 점 때문이다. 또한 스탈린관료집단이 그들의 선배인 멘셰비키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그것은 트로츠키가 지적하였듯이, “자신 때문이 아니라 승리한 혁명이 조성한 사회변화” 때문이다. 따라서 관료집단으로부터 “반자본주의적 성질”을 발견하였다면, 그것은 10월 혁명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파블로주의는 이 점을 간과하고 관료집단의 “반자본주의적인 성질”을 그들에게서 찾고자 한다. 그리고 특정 상황에서 그들이 혁명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티토와 모택동, 카스트로, 체게바라, 호치민 등이 노동자계급의 혁명가로 둔갑한다. 실제로 파블로와 만델은 해외의 제4인터내셔널 투사들이 중국, 쿠바, 베트남 등에서 학살당하는 것을 은폐하고 방조하였다. 이것은 중국혁명을 팔아넘긴 스탈린/부하린 파벌의 범죄행위에 비견될만한 것이었다. 팽술지는 이러한 범죄행위에 맞서 싸웠다[그러나 팽술지 역시 이후 통합서기국을 지지한 행적을 놓고 볼 때 일관되게 파블로주의에 맞서 싸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범서는 팽술지의 투쟁에 동참하지도 않았으며 아마 이 무렵에 이미 파블로와 만델의 협력자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역시 여생을 통합서기국과 함께 하였다. 파블로주의로 퇴보한 이후 다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중대한 오점──파블로주의가 제4인터내셔널의 붕괴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에도 불구하고, “중공의 스탈린주의적 통치”가 앞으로 겪게 될 운명에 대하여 저자가 보여주는 통찰력은 오늘날의 현실에 비추어 보더라도 전혀 그릇됨이 없어 보인다.

중공의 스탈린주의적 통치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 [중공의 스탈린주의 통치에 대한] 불만들 가운데 우파적인 자산계급의 경향을 진정으로 대표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고, 대부분은 노동자·농민의 건전한 민주적 요구를 반영하고 있다. 이 요구들은 지금 ‘잔혹한 투쟁’과 ‘비정한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오히려 모택동이 말하는 것과 똑같이 “사태를 어지럽게 만들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 ‘반우파’ 투쟁을 거친 뒤 중공의 스탈린주의적인 모습과 체제가 더욱 공고하게 된다면, 중국의 지식청년과 공·농대중의 반스탈린주의가 폭발하는 시기는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이며 그것도 아주 강력하게 폭발할 것이다. (p.408~409)

이 책이 쓰인 지 30여년이 흘러 인민대중의 “반스탈린주의” 분노가 천안문 광장을 가득 메웠다. 관료집단의 가혹한 탄압과 노동계급 혁명지도부의 부재로 인하여 결국 불발하고 말았지만, 89년 천안문의 불발탄은 언제든 다시 관료독재와 친시장노선에 대한 분노의 열기와 만나 다시 한번 위력을 발휘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선구자들이 멈춰선 그 지점에서

우리는 이 한 권의 책을 통해서 한 투사가 “사상적으로 새롭게 변화하고, 또 부단한 약진 뒤에 다시 퇴각”──이것은 중국 공산주의운동의 선구자였던 진독수의 사상적 진퇴에 대한 저자의 논평이기도 했다──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적어도 파블로주의의 벽에 가로막히기 이전까지[이 책에서 파블로주의, 쿠바혁명, 통합서기국의 탄생 등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 책의 초판은 1957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저자는 맑스-레닌주의의 저작들을 치열하게 연구하면서 올바른 정치적 결론에 도달하고자 분투하였으며, 그와 같은 결론을 다른 투사들도 획득할 수 있도록 맑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가 남긴 과학적 사회주의의 주옥같은 고전들, 좌익반대파의 중요한 문서들을 중국어로 번역하여 보급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고 주변 활동가들의 학습기풍을 세우고자 노력하였다. 이러한 점들이 그가 적어도 1949년 중국혁명 이전까지 트로츠키주의자로서 올바른 입장을 견지해왔던, 또 그러한 입장들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태들에 관하여 통찰력 있는 논평을 제공했던 원동력이 되었다.

왕범서는 『회상』에서 “트로츠키파의 무기고에서 무기를 한두 개 훔쳐내서 스탈린파를 공격함으로써 장개석의 환심을 사려는 자들”, “한편으로 반관료주의를 부르짖거나 심지어 반관료제를 외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제4인터내셔널의 경험과 이론을 반대하거나 냉대”하는 자들의 반동성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키고 있다. 이는 스탈린혐오증(Stalinophobia)에 사로잡힌 남한의 ‘혁사’ 진영이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필자는 웹 상에서, 앞서 언급한 바 있는 ‘미래연대’ 기관지에 실린 서평과 다함께 지지자로 추정되는 블로거가 작성한 서평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한사코 침묵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껏해야 저자의 노동자국가 방어노선에 대해 “지식인의 궤변수준”, “‘운동에서 은퇴한 노신사’ 수준”(‘미래연대’의 서평)라고 비방하거나, 아니면 트로츠키의 입장에 대해 “자신이 세운 나라가 자본가국가로 변질됬다는변질됐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이미 트로츠키가 살아생전 사이비 정신분석이라 비웃었던 얘기를 되풀이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이들이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을 폐기해도 좋을만한 이론과 실천을 보여줄 것인지는 역사가 조만간에 검증해 줄 것이라 확신할 수 있다.

소련과 동유럽은 무너졌지만, 중국과 베트남, 북한과 쿠바는 아직도 자본주의가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성채로 남아있다. 이들 나라의 관료집단은 자본주의에 뒷문을 열어주고 자국의 노동대중들을 공격하면서 불안정한 체제의 종말을 재촉하고 있다. 이 체제는 조만간 사유화의 피바람에 휩쓸리거나, 아니면 노동자전위에 의해 지도되는 대중에 의해 관료집단이 타도되거나 둘 중 하나의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들 나라의 운명을 획기적으로 바꾸게 될 노동자 정치혁명을 지지한다. 맑스·엥겔스·레닌·트로츠키에 의해 확립된 공산주의 사상이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다. 이 무기를 손에 쥔 중국의 노동자계급은 진독수·왕범서·정초린·팽술지 등의 선구자들에 의해 개척된, 그러나 그들이 멈춰섬으로써 끊겨버린 길을 다시 잇고 전진할 것이다. 그 길의 선두에 반드시 제4인터내셔널의 깃발이──비록 기회주의자들에게 짓밟히고 난도질당한 적이 있었지만──다시 힘차게 휘날릴 것이라 확신한다.

 국내외의 여러 가지 혁명적인 요인으로 인해, 중공에는 하나의 강력하고 진정한 좌파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중국의 제4인터내셔널 분자들과 연합하여 모든 반스탈린주의운동을 이끌어 새로운 반관료주의적 혁명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은 진정한 공·농정권을 세우고 전세계 무산계급과 함께 순탄하고 신속하게 사회주의로 나갈 것이다.

나는, 이것이 제멋대로의 희망이 아니며 역사가 반드시 우리에게 증명해보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p.409~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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