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인터내셔널의 역사

1.고난의 전사: 1933-1938

객관적 필요/ 근본적인 전환/ 소중한 자산/ 첫 성과들/ 주요한 성과/ "프랑스 전환"/ 박차를 가하다/ 1936년 국제회의/ 인민전선에 대한 투쟁/ 모스크바 조작재판/ 창립대회와 이행강령/ 일인 인터내셔널?/ 혁명전통이 계승되다

2. 붕괴의 역사:  1938-1963

동요와 혼란/ 미국지부의 일국주의/ 유럽에서 혁명전통이 단절되다/ 교조에 집착하다/ 파블로주의의 득세/ 파블로주의에 대한 저항/ 붕괴의 완료

 

 

1. 고난의 전사(前史): 1933-1938

 

객관적 필요

국제주의는 애초부터 맑스주의의 핵심 노선이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구했을 때 이것은 단순한 수사나 상징이 아니었다. 즉 혁명적 노동자들이 자기 나라에서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제조직을 건설하여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맑스와 엥겔스는 실제로 제 1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고 그 활동을 주도하였다.

사실 1930년대 당시 맑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어느 누구도 맑스주의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물론 어떤 종류의 인터내셔널이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했다. 이때는 스탈린이 코민테른을 해체하기 전이었다. 스탈린은 인터내셔널이 시대에 뒤진 것이라고 선언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코민테른을 해체했다. 오늘날 일부 스탈린주의 조직들은 인터내셔널이 시대의 퇴물이 되었다고 아직도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1933년에 혁명가들에게 제기된 핵심 사안은 맑스주의 인터내셔널을 건설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아니었다. 이와 연관된 별개의 문제가 이들에게 고민을 안겼다: 인터내셔널이 애초의 혁명적 원칙과 실천에서 이탈하여 퇴보할 경우 혁명가들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인가? 원칙에서 이탈한 인터내셔널에 남아 있으면서 이 조직의 잘못된 노선을 교정시키려고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일정 시점에서 이 노력이 전혀 희망 없다고 결론 내리고 인터내셔널과 결별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할 것인가?

그런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 경험은 이미 당시에 축적되어 있었다. 1870년대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이 건설한 제 1 인터내셔널이 무정부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도록 내버려두느니 이것을 해체하는 것이 낫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맑스가 죽은 후 제 2 인터내셔널이 건설되었다. 이 새로운 인터내셔널은 이후 25년간 전세계 맑스주의자들을 결집시키면서 대체로 진보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제 2 인터내셔널 각국 정당들이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맑스주의를 배신하고 자국 부르주아 계급의 전쟁 노력에 지지를 보내자 레닌은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촉구했다. 이 노선은 볼셰비키들과 다른 국제주의자들을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기간동안 결집시켰다. 그리고 레닌이 이 노선을 주창한 지 약 4년 후에 제 3 인터내셔널 즉 공산주의 인터내셔널(Communist International)이 건설되었다.

이 사례는 1933년 혁명가들에게 제기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례를 제공했다. 그러나 전례가 이렇게 중대한 문제를 결정하는데 유일한 요인이 될 수는 없었다. 객관적 필요성이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 요인은 1933년 8월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좌익반대파 집행위원회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되었다. 결국 집행위원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 작업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트로츠키주의 운동사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다.

레닌의 지도하에 진행된 코민테른 첫 4차 대회들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레닌주의를 새로운 상황에서 발전시켰다. 1923년부터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 초기의 올바른 노선이 조직 내부에서 견지되도록 투쟁했다. 이 투쟁으로 이들은 코민테른과 그 산하조직들로부터 축출 당했지만 여전히 자신들을 코민테른의 분파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자신들에 대한 축출 조치가 철회될 것을 요구하였고 코민테른의 경쟁조직을 건설하려 한다는 비방에 대항해 싸웠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노조지도자들의 비겁함 그리고 스탈린의 기회주의 정책으로 인해 1933년 초 히틀러가 독일에서 정권을 장악한다. 이때 코민테른은 반나찌 노동자 공동전선을 필사적으로 저지했으며 결국 파시즘의 승리를 불러들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후 몇 달 동안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강력한 독일 노동운동이 파시스트들에 의해서 무참히 압살된 책임을 인정하기는커녕 거대한 재앙을 가져온 정책의 올바름을 재확인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트로츠키를 비롯한 좌익반대파 지도자들은 코민테른이 구제불능이며 혁명조직으로 수명을 다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일이 국제노동계급에게 가장 시급한 임무로 다가왔다.

근본적인 전환

이 결론은 계속성과 변화가 동시에 일어난 아주 뚜렷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레닌주의의 원칙은 변함이 없으나 혁명운동의 노선, 조직성격, 전술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공산당 대오 및 주변조직들에 대해 선전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며 거의 유일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활동의 축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직접 레닌주의 국제조직을 건설하는 책임을 맡을 상황이 온 것이다. 물론 다른 혁명세력 그리고 공산당에서 획득할 수 있는 인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인터내셔널 건설 작업을 시작해야했다. 이 상황에서 당연히 선전작업이 가장 핵심적이었다. 그러나 작업의 형식이 바뀌고 범위가 확대되어야 했다. 이제는 공산당에 속해있지 않은 대중에게도 선전을 해야했다. 그리고 노동운동과 기타 대중운동 내의 일상투쟁과 함께 새 인터내셔널 건설 작업이 진행되어야 했다. 또한 새로운 레닌주의 정당의 중핵을 양성하는 활동도 필요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이 요구하는 작업의 규모, 주창자들의 대담성, 실제 작업의 어려움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당시 좌익반대파의 상황을 알 필요가 있다.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새로운 정당이 아니라 공산당 내에 레닌주의 분파가 결성되어야 한다는 노선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직원들을 획득했다. 그리고 새로운 조직원들에 대한 교육도 같은 노선에 입각해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은 주로 이 노선을 선전해왔다. 따라서 당이 아니라 분파가 거의 조직적 전통이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노선이 제시되었을 때 이들은 심리적으로 강하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 반발은 조직 내부에 이렇다할 힘을 형성하지 못했으며 반발의 기간도 아주 짧았다. 프랑스에서는 새로운 노선에 반대한 분파가 떨어져 나갔다. 그러나 어차피 다른 이유 때문에 탈퇴할 분파였으므로 조직 에 큰 충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여기 저기에서 몇몇 개인들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운동 대오에서 떨어져 나갔다. 새로운 노선에 대한 반대는 너무도 미미하여 지도부는 국제대회를 소집하지 않고도 이 중요한 노선을 조직의 입장으로 채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만장일치에 가까운 입장 통일은 좌익반대파 조직원들의 상대적으로 놓은 정치의식을 반영했다. 이들은 독일에서 파시즘이 승리하기 전까지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세계노동계급 운동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의 정치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트로츠키의 권위도 커다란 작용을 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을 주창한 그의 논리는 논박의 여지없이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 손쉬운 입장 통일은 인터내셔널 건설의 앞길에 놓여있는 엄청난 난관을 이들이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소중한 자산

좌익반대파의 주요한 자산 중의 하나는 이미 언급한 바 있다. 즉 조직원들은 당시 다른 어떤 조직의 성원들보다 사상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잘 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편 이 조직은 왜소한 그리고 힘없는 운동을 대표하고 있었다.

1933년 2월 좌익반대파 국제회의에는 독일, 프랑스, 영국, 벨기에, 그리스, 스페인, 불가리아, 스위스, 이탈리아, 소련 그리고 미국 등 11개국 조직 대표들이 참가했다. 중국, 남아프리카, 중남미, 중부 유럽 등지에도 좌익반대파 그룹이 존재하였으나 대표를 보낼 수 없었다. 소련과 이탈리아 조직은 망명 조직이었다. 그리고 히틀러 승리 이후 독일 조직의 지도자 대부분도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소련의 조직은 거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국내에 남아있던 조직원들은 망명하거나 감옥에 갇혔다. 이들은 서로간에 연락을 주고 받기도 힘들었으며 트로츠키를 비롯한 국제지도부와도 연락이 끊겼다. 그리스와 스페인의 지부는 1000명이 넘는 최대 규모의 지부들이었다. 기타 주요 지부들은 몇백 명 정도의 성원들을 평균적으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지부들은 규모가 더 작았다. 대부분의 지부들은 4쪽의 주간 신문조차 정기적으로 발간할 수 없었다. 1933년 말에 국제회의가 열리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2월 회의 이후 다시 회의를 개최할 재정 능력이 없었다. 사실 다음 국제회의는 1936년에 가서야 열렸다.

그러나 당시 제 2 인터내셔널과 제 3 인터내셔널은 수백만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좌익 인터내셔널은 두 개가 더 있었다. 하인리히 브란틀러(Heinrich Brandler)가 주도한 국제 공산당 반대파(International Communist Opposition) 즉 우익반대파(Right Opposition)가 있었다. 그리고 스탈린의 “제 3기” 초좌익주의에 반대하여 코민테른에서 축출 당한 공산당 소수분파들과 좌파 사회민주주의자들이 느슨하게 연합한 중도주의 조직이 있었다. 나중에 이 조직은 런던 사무국(London Bureau)이라고 주로 명명되었다. 당시 좌익반대파가 국제적으로 최대 4천 내지 5천명 정도의 조직이었던 반면 이 두 조직들은 모두 훨씬 규모가 큰 지부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위세를 떨친 운동들은 항상 소규모로 출발했다. 따라서 이 상태가 지속되지 않는 이상 규모의 왜소함이 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다수 인류를 획득하여 세계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에게 소규모 조직은 결코 미덕이나 강점이 될 수 없었다.

왜소한 조직 규모 이외에도 좌익반대파는 회원의 계급구성이 좋지 않았다. 지부 대부분은 소부르주아 지식인들과 학생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것도 운동 초기에는 흔한 현상이다. 그러나 역시 많은 문제의 온상임에는 틀림이 없다. 더욱이 이민자가 많아서 나라의 사정이나 운동 내부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 회원들은 젊었기 때문에 정치적 조직적 경험이 별로 없었다. 더욱이 일부는 스탈린의 공산당에 몸담은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잘못된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지부의 지도부는 나이나 경험 면에서 좀더 유리했다. 일부는 러시아 혁명 또는 제 1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노동운동에 종사했다. 그리고 벨기에와 미국의 일부 동지들은 공산당 시절부터 같이 일한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레닌 사후부터 스탈린이 장악하기 이전까지 코민테른에 만연했던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즉 혁명정당이 정치적 주도권과 집단적 지도력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는 전투 조직이 아니라 분파들의 연합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무원칙한 파벌 행위가 정치적 조직적 안정을 기하려는 노력에 해를 끼쳤다.

당시 좌익반대파의 유일한 국제 조정기구는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Secretariat)이었다. 그리고 1933년이 되어서야 집행위원회(executive committee)가 설치되어 국제서기국의 업무를 보좌했으나 이것도 국제서기국이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각국 지부들이 재정의 어려움으로 대표나 지도적 인사를 빠리 본부에 파견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국제서기국의 인적 구성은 어느 정도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국제서기국 위원들은 젊었으며 얼굴이 자주 바뀌었다. 특히 프랑스 지부 내의 분파투쟁으로 지도부가 자주 교체되었기 때문에 국제서기국 구성에 작은 변동을 초래했다. 상근자는 행정서기 하나 뿐이었으며 다른 위원들은 자기 지부의 일에 정신이 없었다. 결국 국제서기국은 지도력을 인정받으며 높은 권위를 누릴 수 없었다.

1030년대 당시 좌익반대파의 가장 훌륭한 자산은 바로 트로츠키의 지도력이었다. 그는 러시아 혁명의 경험, 그 이전의 고난에 찬 투쟁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이 차례로 이끈 코민테른의 교훈들을 몸소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구현한 혁명 전통은 초기의 운동이 언제나 드러내는 온갖 실수와 재앙을 좌익반대파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의 도덕적, 정치적, 이론적 권위는 어느 지도자들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어느 누구보다도 그는 국제서기국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지부 조직담당자가 늘 그렇듯이 현재 조직원들이 완벽하지 않다고 거부할 것이 아니라 이들의 능력을 최대한 운동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올바른 지도력만 주어지면 노동자들이 계급적 착취와 억압에서 스스로 해방될 능력이 있다는 신념을 그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계급 전위당이 지도력을 확립할 수 있다는 확신도 그는 결코 버리지 않았다. 따라서 투옥된 정치범과 같은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다른 인사들에 대해 최대한 인내할 수 있었으며 중단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는 국제서기국 위원들과 각국 지부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어 맑스주의와 원칙에 입각한 정치활동의 방법들을 이들에게 가르쳤으며 이들이 혁명 중핵으로서 운동 전체를 위해 지도력을 발휘하도록 격려하였다. 이들은 활동 중 종종 좌절감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살인적인 압력 속에서 혁명활동을 해야했기 때문이었다. 고립감, 끝없는 크고 작은 패배들, 제국주의 세력과 스탈린 일당의 위협과 파괴공작, 모든 종류의 억압, 파시즘의 확산, 빈곤, 대대적인 실업으로 인한 대중의 사기저하 등이 모두 살인적 압력의 내용이었다. 결국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가 되면 30년대의 지도자들은 모두 운동 무대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트로츠키의 지도력과 권위도 운동의 가혹한 객관적 상황과 국제사무국 지도부의 허약함을 대체할 수 없었으나 국제 지도부의 한계를 어떤 때에는 최소화할 수 있었다.

첫 성과들

이 상황에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을 결정한 1933년 8월 이후의 첫 성과들은 매우 고무적이었다. 새로운 노선이 확정된 지 일주일 후 프랑스 빠리에서는 중도주의 인터내셔널인 런던 사무국(London Bureau) 산하조직들과 주변 조직들이 국제회의를 개최하였다. 좌익반대파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을 촉구하고 동맹자들을 구하기 위해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 결과 [4조직 선언문](Declaration of Four)으로 알려진 문서가 4개 주요 조직의 대표들에 의해 서명되었다. 히틀러의 승리로 인한 독일 노동운동의 처참한 패배의 교훈들이 널리 인식되면 급진 운동 내부에 소용돌이가 몰아칠 것이며 이 결과 중도주의 및 사민주의 조직들 내부에는 좌파 경향들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고 트로츠키는 이미 예상한 바 있었다. 이 예상은 빠리 국제회의에서 입증되었다. 좌익반대파와 3개 일국 조직들이 합동으로 [4조직 선언문]을 발표했기 때문이었다. 이 조직들은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SAP), 네덜란드독립사회당(OSP), 네덜란드혁명사회당(RSP)이었다.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은 독일사민당에서 축출된 좌파가 1931년에 창당하였다. 나찌에 의해 불법화되었으나 1933년 10만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독립사회당은 네덜란드사회당에서 분립한 좌파가 1932년 창립하였으며 4천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었다. 네덜란드혁명사회당은 스탈린주의를 반대한 좌파가 네덜란드공산당에서 축출 당한 후 1929년 창립했으며 1천명의 조직원을 두고 있었다. 나중에 이들 중 고참공산주의자 헨리쿠스 스니블릿(Henricus Sneevliet)이 주도한 네덜란드 조직만이 좌익반대파와 합류하여 이 조직의 네덜란드 지부가 되었다. 스니블릿 자신은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어 이후 5년 동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스니블릿의 그룹이 합류한 직후 국제좌익반대파는 조직의 명칭을 국제공산주의동맹(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으로 바꾸고 이 명칭을 1936년까지 사용하였다.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 노선은 여러 나라의 지부에 긍정적 효과를 발휘했다. 프랑스에서 좌익반대파 청년조직은 사회당 청년조직 내부에서 진지한 분파활동을 했으며 1년 후 소중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미국에서는 3년간 지부를 마비시킨 제임스 캐넌(James Cannon), 맥스 섁트먼(Max Shachtman), 마튼 애이번(Martin Abern) 분파들의 투쟁이 이를 계기로 호전되었다. 트로츠키와 국제사무국의 도움으로 이 분파들의 오랜 견해 차이는 해소되었다. 그리고 1938년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까지 캐넌과 섁트먼 사이에는 생산적인 협력이 계속되었다. 이 결과 미국 지부는 조직의 가장 강력한 지부가 되었으며 선전그룹에서 대중선동을 수행하는 대중적 노동자당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모든 결과가 다 좋은 것은 아니었다. 이미 언급한 바대로 새로운 노선으로 인해 프랑스 지부의 한 분파는 조직을 나갔다. 그런데 이 분파의 조직원들은 이미 2년 동안 조직을 나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이 현상은 반가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좀더 심각했다. 이들은 그리스 지부 대표이자 국제서기국 위원인 위테(Witte)에 의해 조종되고 있었다. 고(古)맑스주의(Archeo-Marxists) 그룹은 그리스공산당의 분파였는데 1924년 당에서 축출 당했다. 몇 년 동안 선전그룹으로 활동한 후 이들은 공산당과 경쟁하는 강력한 조직이 되었다. 이들은 1930년 좌익반대파에 참여했으며 1932년 이 조직의 그리스 지부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위테는 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 사태의 전모가 밝혀지자 국제서기국과 트로츠키는 위테에게 원칙을 지킬 것을 경고하였다. 그러자 그는 조직을 탈퇴하면서 가장 규모가 큰 그리스 지부도 함께 끌고 나가버렸다.

그리스 지부가 탈퇴한 정치적 이유는 당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이 지부의 지도부는 조직 운영의 원칙 문제로 탈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34년 조직을 탈퇴한 후 바로 이들은 런던 사무국에 합류하였다. 런던 사무국은 중도주의 인터내셔널로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에 아주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그리스 지도부가 쟁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을 뿐 사실은 조직 내에 제 4 인터내셔널의 필요성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빠리 국제회의에 참석한 중도주의 그룹 가운데 영국의 독립노동당이 있었다. 이 조직의 대의원들은 [4조직 선언문]에 반대하는 표결을 했지만 이 조직 지도부의 일부는 프랑스에 망명해 있던 트로츠키를 방문하여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전망을 알아보는 높은 관심을 보였다. 이들과 대담을 나누고 이 조직의 신문을 검토한 결과 트로츠키는 이 조직의 일부가 좌경화하고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리고 그는 결성된 지 1년 밖에 안된 좌익반대파 영국 지부가 독립노동당에 입당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통해 이 조직의 내부에 제 4 인터내셔널의 전망을 선전하고 지지를 얻을 목적이었다. 국제서기국은 이 제안에 동의하여 영국 지부에 같은 내용의 전술을 제안하였다.

이로부터 일년 후에 “입당전술(entrism)”에 대한 훨씬 커다란 토론이 격렬하게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예행연습이라도 하듯이 정치경험이 일천하며 40여명의 조직원 밖에 없던 영국 지부의 지도부는 이 제안을 충격과 분노로 받아들였다. 뭐라고?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 노선을 확정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독립노동당과 같은 빌어먹을 조직에 들어가라고 명령이야? 이 제안이야말로 혁명정당의 독자성이 언제나 유지되어야 한다는 대원칙과 완전히 위배되는 행위가 아닌가! 이 반응에 대해 트로츠키는 참을성 있게 설명해 나갔다. 40명의 조직원은 혁명정당을 위한 중핵에 지나지 않으며 융통성과 유연성을 발휘해서 이 중핵조직을 성장시켜야 한다. 독립노동당 내부에서 원칙에 입각한 분파투쟁을 벌여 정치적 독자성을 보존할 수 있다 등등. 그러나 영국의 종파주의적 교조주의자들은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입당전술은 하나의 제안에 지나지 않았으며 명령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술을 지지한 소수파를 축출시키고 좌익반대파에서 탈퇴했다. 나중에 이들 대부분은 제 4 인터내셔널의 분파가 아니라 진짜 중도주의자로서 독립노동당에 입당했다.

1933년과 이후의 여러 사건들이 증명하듯이 새로운 노선을 확정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혁명운동의 중핵은 그럴싸한 결의문 채택으로 그 진가가 측정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결의문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이다. 1933년 좌익반대파 성원 거의 모두는 새로운 인터내셔널 노선에 찬성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어떤 내용의 노선에 찬성표를 던지고 있는지 또는 이 노선을 어떻게 실행에 옮겨야 할 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또 다른 이들은 이 임무의 막중함과 거대함에 질려 도중에 마음을 바꾸어 버렸다.

1933년 말 [4조직 선언문]에 서명한 4개 조직은 후속 행동을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4개 조직의 공동작업을 자세하게 계획하기 위해 국제회의를 소집했다. 빠리에서 열린 이 회의에 트로츠키는 국제공산주의동맹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첫 회의에서 이들은 6주 후에 다시 회의를 열어 강령적 문서들을 작성하기로 했다. 그러나 독일 및 네덜란드의 중도주의자들과 국제공산주의동맹 대표들 사이에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따라서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았다. 사실 이 회의는 4개 조직이 전부 참여한 마지막 회의였으며 제안된 2월 회의는 결코 성사되지 못했다.

이 회의를 언급하는 이유는 국제공산주의동맹의 주요 대표 8인을 언급하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당시 좌익반대파 조직의 주요 문제들과 당시 상황을 몸소 겪었던 인물들이었다. 트로츠키, 새로운 네덜란드 지부의 스니블릿, 국제사무국의 행정비서이자 독일 지부의 대표 에르윈 바우어(Erwin Bauer), 이탈리아 지부의 창립자 알폰소 레오네티(Alfonso Leonetti), 프랑스 지부의 창립자 삐에르 나빌(Pierre Naville)과 삐에르 프랑크(Pierre Frank), 트로츠키의 아들이자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한 레온 세도프(Leon Sedov), 트로츠키의 독일어 비서이자 이후 국제사무국의 행정서기가 된 루돌프 클레먼트(Rudolf Klement) 등이 바로 8인이었다.

이들은 당시 국제공산주의동맹의 전체 지도부는 아니었으나 핵심인물들이었다. 이들 중 세도프와 클레먼트는 1938년 소련 비밀경찰(GPU)에 의해 살해되었다. 나머지 인사들에 대해서는 이후 필요한 대목에서 설명할 것이다.

주요한 성과

제 4 인터내셔널을 결집하는 문제는 조직 문제라기보다는 노선 문제였다. 좌익반대파가 코민테른의 분파였을 때에는 코민테른의 오류들을 비판하는 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조직의 존재가 정당화되고 조직활동에 헌신할 인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조직들과 확연히 구별되는 강령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점과 관련하여 코민테른 첫 4회 대회들의 기본 원칙들을 재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코민테른 첫 4회 대회 이후 기록된 엄청난 패배에 대해 필요한 교훈들을 이끌어 내야 했다. 그리고 1930년대 당시 혁명운동에게 제기된 시급한 전략적 전술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강령으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사실 지금 소개하고 있는 5년간의 투쟁은 조직 측면을 내포하고 있는데 강령의 측면과 직접 연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강령을 확정하는 문제는 주로 트로츠키의 역량에 달려있었다.

사실 이 시기의 주요한 성과는 강령에 있었다. 그런데 조직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는 이유는 이 측면이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자는 노선이 결정된 지 몇 주가 지나서 소련 사회의 분석과 관련하여 결정적인 진전이 있었다. 즉 소련을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규정하여 제국주의의 공격에 맞서 혁명가들이 소련을 방어해야할 의무가 있다고 결론이 난 것이 바로 이때였다. 이 결론 이전까지는 러시아공산당 뿐 아니라 소련 국가기구도 개혁의 대상으로 생각되었다. 결국 기존의 사고가 비현실적이라는 결론이 난 것이었다. 이제 소련공산당은 개혁될 수 없으며 제 4 인터내셔널 소련 지부에 의해서 타도되고 대체되어야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개혁할 것이 아니라 강제력으로 권력에서 축출해 소련의 국가기구와 사회 전체에 노동자 민주주의를 회복시켜야했다. 이후 정치혁명이란 개념으로 정식화된 이 사고는 이때부터 퇴보한 노동자국가나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제 4 인터내셔널의 공식입장이 되었다. 1933년 10월 [소련 국가의 계급적 성격](The Class Nature of the Soviet State)이란 논문에서 트로츠키가 이 입장을 제시했을 때 조직 내에 이견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 집단의 범죄행위가 도를 더해감에 따라 다른 견해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예를 들어 이 공식노선은 1937년 프랑스 지부의 전국대회에서 전체 대의원 3분의 1에 의해 거부당했다. 그리고 1940년 미국 지부인 사회주의노동자당 분열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 즉 당원의 거의 반수가 이 입장을 거부하여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서 소련이 독일 제국주의의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소련 방어노선을 거부하여 탈당했다.

스탈린 체제의 발전과정에 대한 올바른 분석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중요한 강령적 성과의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 조직 내부의 위기와 분쟁의 주요 쟁점이 되었다. 이외에도 파시즘의 성격과 반파시즘 공동전선 투쟁(독일), 인민전선 비판(프랑스와 스페인), 반제 민족해방투쟁(중국),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혁명적 투쟁 노선 등이 이 조직의 기본 강령이 되었다. 강령적 입장이 없이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존재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기본 노선은 쉽게 합의되거나 자동적으로 도출된 것은 아니었다. 조직 내외에서 벌어진 격렬한 투쟁의 결과였다.

“프랑스 전환”

한편 1934년 2월 프랑스의 우익과 파시스트들은 독일에서 히틀러의 승리에 자극 받아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부에 대해 무장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같은 때에 오스트리아의 보나파르트 정권은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의 무장봉기를 진압했다. 그리고 10월 스페인사회당의 무장봉기가 우익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때 트로츠키는 프랑스를 계급투쟁의 결전장으로 보았다. 3월 선언문에서 그는 이제 프랑스가 국제적 관심의 초점이라고 말했다. 1930년에서 33년까지 독일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표현을 썼었다. 즉 유럽 혁명운동의 구심이 프랑스로 옮겨진 것이었다. 프랑스의 투쟁 결과에 따라 전세계 계급투쟁 상황이 결정될 것이었다. 그리고 이후 제 4 인터내셔널 운동의 성장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었다.

이 판단에 따라 트로츠키는 모든 힘을 집중하여 프랑스 정세에 개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4월 프랑스 정부는 그에 대한 대대적인 마녀사냥을 자행했다. 그는 강제출국 직전에 놓였으며 이로 인해 국제서기국 회의에 출석할 수 없었다. 이후 그는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벽촌에서 이따금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정세를 설명하거나 글을 쓰는 방식으로 직접적인 조직활동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악조건 속에서도 프랑스 지부의 활동에 대한 그의 관심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프랑스 반동들의 2월 쿠데타 기도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렀다. 총파업이 시작되었으며 반파시즘 공동전선에 대한 노동자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이 결과 처음에는 사회당 그리고 이어서 공산당마저 공동전선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태가 발전함에 따라 이 두 정당의 통합에 대한 대중의 압력이 거세게 일어 통합협상이 활발해졌다. 이 시점에서 트로츠키는 알프스 산맥의 벽촌에 거주하는 문제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아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신세였다. 이때가 6월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 그는 프랑스 지부에게 공식적으로 조직을 해체하고 사회당에 입당할 것을 제안했다. 즉 사회당 내부에서 분파로서 활동하면서 분파의 명의로 신문을 발행할 권리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히틀러 승리 이후 급진화되고 있던 사회당 좌파 노동자들 다수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 전술을 통해 프랑스 지부는 노동자 공동전선에서 고립을 면할 수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이 전술은 이후 “프랑스 전환(French turn)”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 지부 뿐 아니라 다른 지부들로부터도 강력한 반발을 받았다. 이 반발의 정도는 제 4 인터내셔널 건설 제안의 경우보다 훨씬 더 컸다. 격렬한 토론 후 조직은 분열 직전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제서기국의 개입으로 사태는 진정되고 8월말에 개최된 프랑스 지부 전국대회에서 이 전술이 다수파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때 지부의 두 주요 지도자 중 레이몽 몰리니에(Raymond Molinier)는 이 제안을 지지하였으며 삐에르 나빌(Pierre Naville)은 반대했다. 전국대회가 끝난 직후 나빌이 이끈 분파는 조직을 탈퇴했다. 나중에 이 분파는 사회당에 합류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레닌 그룹(사회당에 입당한 프랑스 지부의 명칭)에는 오랫동안 합류하지 않았다.

형식주의, 교조주의, 종파주의, 일상주의, 수동성 등에 오염된 채 혁명 원칙과 볼셰비키식 단호함에 대한 급진적 수사를 늘어놓던 동지들에게 입당전술은 정치적 타격이었으며 개인적 모멸감 그 자체였다. 이 동지들은 이제 거리낌없이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일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입당전술은 원칙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주장했으며 나빌과 같은 인물은 전술적 이유에서 반대했다. 그리고 온갖 다른 이유들을 들어 반대한 동지들도 있었다.

입당전술은 전술에 불과하며 아주 특이한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다고 주장될 수도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입당전술 제안은 1933년에서 1938년 제 4 인터내셔널 창립까지 트로츠키가 남긴 가장 훌륭한 공헌 중의 하나였다. 이 전술은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제안이 촉발시킨 논쟁은 코민테른 시절 그리고 스탈린의 제 3기 이후 조직된 동지들의 교조주의를 청산하는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조직의 노선에 도저히 동화될 수 없으며 운동의 건강한 발전에 장애가 되는 분자들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프랑스 전환”은 프랑스 지부보다 국제서기국과 집행위원회에 더 큰 충격을 가했다. 여러 위원들은 이 전술을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했으다. 특히 트로츠키가 국제사무국과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은 채 직접 프랑스 지부에 이 전술을 제안했다는 사실에 분노를 표시하였다. 국제서기국 집행서기 바우어는 이 제안을 볼셰비키 원칙에 위배된 것이라고 비난하고 트로츠키가 제 2 인터내셔널에 투항했다고 공격하였다. 그는 이 전술을 평가하기 위해 예정된 10월 집행위원회 회의를 기다리지 않고 즉석에서 사임하고 런던 사무국의 독일 조직에 가입하였다. 네덜란드 지부의 스니블릿과 벨기에 지부의 베레컨(Vereecken)은 대체로 전술적 이유로 이 제안을 반대했지만 트로츠키의 외교적 노력으로 설득되었다. 즉 이 전술을 반대하지만 최소한 프랑스 지부가 사회당 내의 분파로서 활동을 완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했다. 조직의 일부이면서도 오랫동안 관계가 소원했던 스페인 지부의 지도부는 프랑스 전환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만약 바우어가 그렇게 일찍 사임하지 않았고 스페인 대표들이 회의를 거부하지 않았다면 10월 회의의 표결 결과는 더욱 아슬아슬했을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 중요한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결국 트로츠키의 제안은 6대 3의 표결로 통과되었는데 스니블릿과 베레컨 그리고 나빌 분파의 지지자 삐에트로 트레소(Pietro Tresso)가 반대표를 던졌다. 제안의 지지자 중에는 미국 지부의 캐넌이 있었다. 그는 트로츠키의 간청에 의해 회의에 참석했으며 바우어, 나빌 등에게 전술 문제로 운동을 분열시키면 안된다고 설득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몰리니에 역시 이 전술을 지지했는데 다만 나빌 분파가 프랑스 지부로 복귀해야 한다는 조항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집행위원회에서 사임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나중에 캐넌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스니블릿은 바로 이 시점에서 국제공산주의동맹 전체를 런던 사무국에 가입시켜 이 중도주의 인터내셔널 전체를 제 4 인터내셔널로 유인하자고 캐넌을 설득하였다.    

결국 1934년의 논쟁으로 주요 지도자 가운데 바우어와 나빌이 조직을 떠났다. 나빌은 이후 다시 조직에 합류하여 1939년까지 활동하였다. 바우어가 런던 사무국에 가입하고 스니블릿마저 이 조직에 대해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에 대한 이들의 결의가 허구였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들은 [4조직 선언문]에 서명했지만 이 선언문이 나온 지 1년 후에 이미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0월 회의 이후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여세를 타면서 잘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프랑스와 미국 지부의 성과가 가장 두드러졌다.

미국 지부는 이미 1934년 초 마스티(Muste)가 주도하던 중도주의 좌파 조직인 미국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에게 통합을 공식으로 제안했다. 제 4 인터내셔널 건설 노선을 실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는 달리 이 계획은 미국 지도부가 제안했으며 트로츠키가 동의했다. 이 사업은 마스티의 세력이 털리도 오토-라이트(Toledo Auto-Lite) 파업투쟁으로 미국 노동운동사의 빛나는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미국 지부가 미니애폴리스 트럭노조 파업투쟁(Minneapolis Teamster strikes)을 주도하여 혁명적 지도력을 발휘하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이미 1933년 독일과 네덜란드 지부를 런던 사무국 산하 중도주의 조직과 통합시키려는 시도가 있기는 했으나 불발에 그치고만 적이 있었다. 따라서 미국 지부의 통합노력은 10월 회의 후 첫 중요한 시도였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 지부의 중핵들이 선진노동자 그룹과 통합하면서 대중투쟁으로 단련된 노동자 대부분이 제 4 인터내셔널에 합류했다.

미국 지부와 미국노동자당(American Workers Party)의 통합으로 미국노동자당(Workers Party of the United States)이 탄생했다. 그러나 이 정당은 창립 즉시 국제조직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마스티의 조직은 어느 국제조직과도 관계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공산주의동맹에 가입하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임시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창당 7개월 후 노동자당 지도부 대부분은 제 4 인터내셔널 수립을 위한 국제공산주의동맹 가입을 표결로 공식화했다. 미국 지부의 성공은 타국 지부에도 전염되었다. 1935년 초 네덜란드 지부는 페터 슈미트(Peter Schmidt)가 주도하던 중도주의 조직과 통합하였다. 그런데 이 결과 탄생한 정당은 당분간 국제공산주의동맹과 런던 사무국에 이중으로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진전은 국제정세의 열쇠를 쥐고 있던 프랑스에서 일어났다. 사회당에 입당한 지 몇 달만에 프랑스 지부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볼셰비키-레닌 그룹은 회원을 3배로 늘리면서 사회당 내 좌파 수천 명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 그룹은 사회당 청년 조직의 좌파 지도자들과 연합했다. 이 사태로 사회당 개량주의 지도부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완고한 종파주의자 베레컨까지도 볼셰비키-레닌 그룹이 사회당 내부에서 훌륭한 혁명작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점에서 소련의 스탈린 관료집단은 1934년 제3기 초좌익 노선을 버리고 프랑스 공산당이 사회당과 공동전선을 수립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스탈린, 공산당 지도부, 사회당 지도부 어느 누구도 자본에 대항하는 노동자 공동전선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반동적 또는 파시스트 자본 분파에 대항하여 자유 부르주아 자본 분파와 손을 잡기를 원했다. 즉 계급투쟁 대신에 계급협조에 기초한 연합 즉 인민전선(People's Front)을 추구했다. 그리고 1935년 5월 스탈린은 프랑스 제국주의 정부와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프랑스 정부의 군비증강을 지지했다. 이제 그의 의도는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집단 안보”라는 미명하에 프랑스와 같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주적 제국주의 세력과 연합하여 나찌 독일과 같은 호전적인 파시스트 제국주의 세력과 대항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리고 이 연합을 위해 프랑스 노동자들을 수갑으로 채워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에게 넘겨줄 심산이었다. 1935년 자유 부르주아 분파인 급진사회당과 노동자 정당인 개량주의 사회당,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인민전선을 공식으로 체결했다.

이 사태 전개는 사회당에 들어간 볼셰비키-레닌주의 그룹에게 지극히 유리하였다. 사회당 내부에서 인민전선의 진짜 의도를 폭로하여 좌파노동자들을 다가올 전쟁에 반대하는 혁명 노선으로 결집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당 지도부를 부추겨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축출시켰다. 노동자들이 트로츠키주의에 감염되는 것을 될 수 있으면 빨리 막기 위해서였다.

이때가 1935년 6월이었다. 트로츠키는 프랑스에서 강제출국 당하여 노르웨이로 갔다. 이제 상황을 현실적으로 파악한 그는 동지들에게 사회당 내에 남아있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며 새로운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 빨리 움직일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전술적인 이유에서 축출에 저항할 수 있는 사회당 당헌의 민주적 조항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사회당 관료들의 움직임을 폭로하고 좌파노동자들의 지지를 구할 것을 충고했다. 이 모든 전술들은 독자적 혁명정당 건설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박차를 가하다

이때 스탈린은 이미 코민테른 7차 세계대회 즉 마지막 대회(1935년)를 소집하여 새로운 사회애국주의 정책을 선언했다. 이해 말 무쏠리니의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은 이디오피아 침공을 공공연히 준비하고 있었다. 즉 전쟁 위험이 더욱 커지고 있었다. 따라서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미국 등지에서 구사한 입당전술의 시급성 때문에 유보되었던 제 4 인터내셔널 건설 작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트로츠키는 생각했다.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공개 서한](Open Letter for the 4th International)에서 그는 1933년에 작성된 [4조직 선언문]의 유효성을 재확인하고 이후의 정세에서 도출된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이 문서는 1935년 여름에 발표되었다.

그러나 몰리니에가 주도하던 프랑스 지부 다수파는 트로츠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 루(Jean Rous)-나빌 분파도 단호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몰리니에는 사회당 내부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더 많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너무 확신이 강하여 조직의 규율을 어기고 자기 노선을 선전하는 신문을 발행했다. 프랑스 지부는 이제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봉착했다. 몰리니에 분파는 1935년 말 조직에서 축출되었으며 혼자서 새로운 정당을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시간이 낭비되었다. 사회당에서 획득된 많은 조직원들과 동조자들은 조직의 내분에 사기를 잃어 줄줄이 대오에서 이탈했다. 두 주요 분파는 1936년 다시 통합했으나 몇주 지나지 않아 다시 분열했다. 상황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이 결과 프랑스 인민전선의 선거 승리 직후 폭발한 대대적인 파업투쟁 과정에서 프랑스 지부는 힘을 쓸 수 없었으며 이때부터 제 2차 세계대전까지 국제공산주의동맹 내에서 이렇다할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는 이 사태의 책임을 몰리니에 분파에게 물었다. 전쟁을 준비하던 부르주아 계급은 공산당, 사회당과 함께 사회애국주의를 대대적으로 유포하고 있었다. 몰리니에 분파는 이 압력에 투항했다고 트로츠키는 비판했다. 그러자 몰리니에는 비판의 부당함을 거세게 항의하면서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의 방식과 정세에 대한 이견만이 존재한다고 응수했다. 사실 몰리니에 분파의 이후 궤적은 사회애국주의와는 무관했다. 그러나 전술 운용에 대한 이견만이 문제가 되었더라도 이 중요한 시기에 지부를 분열시킨 것은 프랑스 뿐 아니라 다른 나라 운동에도 심각한 타격을 입힌 무책임한 행위였다. 더욱이 이 사태로 인해 단결과 엄격한 규율에 입각한 제 4 인터내셔널 운동의 필요성을 이들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지가 의심스러웠다. 또한 이 사태로 인해 몰리니에 뿐 아니라 초기 8인의 주요 지도자에 속했던 삐에르 프랑크도 조직을 나가버렸다. 제 2차 세계대전 중 두 분파는 마침내 재통합되었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프랑크는 조직에 복귀했다.

1936년 국제회의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노동자들은 1935년과 36년에 걸쳐 급속히 좌경화 되었다. 그러나 이 투쟁 열기는 인민전선에 의해 김이 빠져버렸다. 인민전선은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정권을 장악하여 이제 가장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되었으며 제 4 인터내셔널의 성장에 주요한 장애를 초래하였다.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인민전선에 대한 많은 선전물과 교육자료를 제작했으나 적은 수의 전위만이 이 노력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이 노력은 아직까지 제 4 인터내셔널의 정치적 자산으로 남아있다. 인민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에 대해 어느 누구도 처음에는 직접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추상적으로 동의한 후 나중에 구체적이고 심각하게 이견을 나타내는 동지들이 계속 나타났다.

인민전선에 대한 견해차이를 논의하기 전에 잠시 1936년 7월의 국제회의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이 회의는 1933년 국제회의와  1938년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 사이에 열린 유일한 국제회의였으며 당시 운동 상황에 대해 많은 진실을 제공했으나 논의된 적이 거의 없다.

1935년 트로츠키가 발표한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공개서한]은 세계적 차원에서 각국 혁명활동을 통합하여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의 기초를 다져야 할 필요성을 선언했다. 그리고 상황이 허용할 경우 국제회의 개최 가능성을 언급했다. 1936년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이 시간이 당도했다고 보고 4월에 회의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회의준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네덜란드 지부의 스니블릿과 페터 슈미트가 회의 조직책이었으나 이들은 회의준비를 고의로 미루거나 방해했다. 그래서 회의는 7월로 연기되었다. 그런데 회의를 몇 주일 앞두고 네덜란드 지도자들은 국제서기국과 트로츠키에 대한 불만 때문에 회의 불참을 통보했다. 이로 인해 회의가 채택할 결의문들은 노르웨이에 머물고 있던 트로츠키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 이 결과 사전 토론이 불가능하였다. 결국 트로츠키의 압력에 굴복하여 스니블릿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독일, 이탈리아, 소련 미국 등 8개국 지부들만 회의에 참가하였다. 나머지 지부들은 초청장을 받았으나 사정으로 불참했으며 일부 지부는 아예 초청장도 받지 못했다.

국제회의가 열린 1936년 7월은 프랑스의 총파업이 끝난 지 몇 개월, 미국 지부가 사회당 입당전술을 결의한 지 2개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 프랑스 지부의 제 2차 분열 후 며칠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회의는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제 1차 국제회의로 명명되었으며 이 회의 결과 국제공산주의동맹은 해체되었다. 대신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운동(MFI, Movement for the Fourth International)]이 조직의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강령적 문서들에 대한 많은 토론과 준비 과정을 몇 개월 거친 후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하자는 희망을 피력했다. 그러나 애석하게 이 회의의 기록은 분실된 채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회의 참석자들을 통해 회의의 전체를 복원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참석자 대부분이 사망했으며 사망하지 않은 인사들은 노령으로 당시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일부 인사는 아예 입을 다문 채 진실을 묻어두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한 훌륭한 결의문들, 소련의 정치혁명에 대한 결의문, 런던 사무국에 대한 결의문 등은 모두 남아있으며 출판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조직 체계와 임원구성에 대한 사실들도 밝혀졌다. 국제집행위원회에 해당하는 총회(General Council), 11명으로 구성된 국제사무국(International Bureau), 5명으로 구성된 국제서기국(International Secretariat) 등이 구성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에 관한 한가지 사실도 밝혀졌다.

그 동안 이 회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전해져왔다. 즉 트로츠키는 이 회의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선언할 것을 제안했으며 회의 참석자들은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소문을 확증할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회견에 응한 참석자들 모두는 이 소문을 입증하지 못했다. 그리고 최근 입수된 참석자들 간의 편지들은 모두 이 소문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소문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아마 2년 후 1938년 트로츠키가 쓴 글에서 이 소문이 추정된 것 같다. 이 글에서 그는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운동]이란 조직 이름을 없애고 이 해 말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열자고 주장하고 있다: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운동]은 처음 채택될 때도 뭔가 현학적이고 부적절하며 약간 황당하게 느껴졌었다.” 그러나 이 글은 조직의 이름에 대한 불편함 이외에 아무런 제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이 회의가 이후 조직 전망에 대해 합의만을 도출했다고 속단해서도 안된다. 네덜란드 지부를 런던 사무국 쪽으로 끌던 스니블릿이 회의 소수파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그는 의제 순서가 맘에 들지 않아 회의에 불참했다. 그러나 그가 참가했더라도 지지를 끌어내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트로츠키가 제 4 인터내셔널을 선언하자고 주장했을 경우 지지를 얻을 가능성도 많았다. 다만 참석자들은 인터내셔널의 전망에 대해서 이견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인민전선에 대한 투쟁

이제 다시 인민전선의 문제로 돌아가자. 프랑스 인민전선이 수립된 지 몇 주 후인 1935년 10월 프랑스 지부 내에 위험한 경향이 있다고 트로츠키는 경고했다. 일부 조직원들은 급진사회당이 인민전선에서 축출될 것을 요구하는 조직의 구호에 반대하고 있었다. 이들은 노동자들이 인민전선 정권을 직접 경험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인민전선을 지지할 것을 주장했다. 이들은 인민전선의 지지자가 아니었다. 다만 인민전선을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견해 또는 이와 비슷한 견해의 동지들은 소수였다. 그러나 인민전선과 같은 근본문제에 대해서도 격렬한 투쟁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소수파의 입장은 사회당에서 바로 획득한 신참 회원들 뿐 아니라 독일공산당 지도자였으며 당시 국제사무국과 집행위원회의 일원이었던 루트 피셔(Ruth Fischer)의 견해이기도 했다. 그는 부르주아 급진사회당이 포함된 인민전선에게 정권 장악을 촉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인민전선으로 인한 가장 커다란 분열은 스페인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Workers Party of Marxist Unification)과 관련하여 일어났다. 이 정당은 1935년 9월 요아낀 마우린(Joaquin Maurin)이 주도한 중도주의 노동자농민연합당(Workers and Peasants Bloc)과 안드레스 닌(Andres Nin)이 주도한 국제공산주의동맹 스페인 지부의 통합체였다. 스페인 지부는 1933년 제 4 인터내셔널 건설 노선을 지지했으나 국제서기국과 트로츠키에 대한 불만으로 거의 활동 중지 상태였다. 1934년 스페인 사회당 청년그룹이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 지지 결의문을 발표했으나 스페인 지부는 프랑스 전환과 스페인 사회당 입당전술을 거부했다.

통일노동자당은 창당 이후 곧바로 런던 사무국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국제공산주의동맹은 1936년 1월이 되어서야 이 조직과 공식관계를 정리한다. 통일노동자당이 스페인 인민전선의 선거강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이 노선을 노동자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규정했다. 7월에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면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에 대한 그의 비판은 조직 내에 격렬한 토론을 불러 일으켰다.

내전 초기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파시스트들을 물리치는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잠시 국제공산주의동맹 지도부는 전쟁의 불길 속에서 이 정당이 자신의 오류를 교정하고 조직과 화해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트로츠키 역시 이 견해에 동조하여 가능하다면 노르웨이에서 바르셀로나로 거처를 옮기겠다고 자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9월 안드레스 닌은 까딸로니아 인민전선 정부의 법무장관이 되었다. 이제 트로츠키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에 대한 단호한 비판을 재개하고 이 정당이 트로츠키주의 분파를 허용하지 않으므로 제 4 인터내셔널 정당을 창립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다른 지도자들은 1936년 말 이 정당의 신문을 분석한 후에야 트로츠키와 견해를 같이한다. 그리고 일부 지도자들은 이 정당에 대한 희망과 연대의식을 포기하지 않았다.

당시 조직 내에서 노동자당을 가장 열성적으로 지지한 인사들은 스니블릿, 베레컨, 빅토르 세르게이(Victor Serge)였다. 세르게이는 1936년 소련 관료집단에 의해 망명이 인정되어 곧바로 국제회의에서 총회 위원으로 선출된 바 있었다. 이 동지들은 인민전선을 지지하지는 않았으며 때때로 이 정당의 “오류들”을 비판했다. 그러나 이 오류들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조직이 이 정당을 스페인의 유일한 혁명세력이라고 선언하고 완전한 정치적 지지를 표명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의 은밀한 인민전선 지지 경향은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지지로 표명되고 있었다. 1937년 조직의 국제서기국이 이들의 견해를 거부하자 세르게이는 조직을 탈퇴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 지부 역시 1938년에야 공식으로 조직을 탈퇴했지만 그 동안 이 쟁점으로 지부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베레컨 역시 1938년에 공식으로 탈퇴했지만 1937년 내내 조직 내에서 국제서기국의 노선에 맞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지지했다.

모스크바 조작재판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운동”(MFI)이란 조직 명칭을 가진 후 첫 번째 공식 회의는 이렇게 끝났다. 그러나 이로부터 2주일후 회의의 공식 문서들이 출판되기도 전에 스탈린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대대적인 제 1차 모스크바 “자백” 재판의 개최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가 주요 피고인들이었으나 실제로는 트로츠키와 제 4 인터내셔널 전체가 이 조작재판의 주 공격목표였다. 제 4 인터내셔널을 전세계 노동운동권에서 추방시켜 품위 있는 노동자라면 결코 대화를 나누려하지 않을 정치 부랑아로 이 조직을 낙인찍으려는 시도였다. 트로츠키와 MFI는 스탈린 일당의 모략과 비방으로부터 조직을 방어하기 위해 거의 1년간 생사를 걸고 싸워야 했다. 그리고 모스크바 재판의 조작성을 폭로하고 조직과 트로츠키 개인의 무죄를 증명하는데 대체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제 제 4 인터내셔널 창립 작업이 계속될 힘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결국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다시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재판의 여파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계 전역에서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는 이 재판으로 크게 떨어졌다. 러시아 혁명에 동조했던 노동자들 사이에서 볼셰비키주의에 반대하는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는 자본가 계급과 스탈린주의자들의 선전에 굴복하여 많은 활동가들이 희망을 잃고 정치투쟁을 포기했다. MFI 내부에서도 지도자, 조직원, 동조자 할 것 없이 혁명투쟁을 포기하는 사례들이 생겨났다.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주창했던 지도자들이 스탈린의 날조와 비방에 견디지 못하고 조직을 이탈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 느껴질 것이다. 세계노동운동에 대한 스탈린의 범죄행위 때문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던 동지들이 바로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1936년 국제회의에서 총회 위원으로 선출된 마스티와 슈미트는 이 이유로 조직을 나갔다. 1936년 회의가 끝난 지 한달 밖에 지나지 않았고 모스크바 재판이 며칠 지나지도 않은 시점에서 이들은 직책을 사임하고 조직을 탈퇴했다. 마스티는 원래 그의 출발점이었던 교회로 돌아가고 슈미트는 사회민주주의자가 되었다. 노동자계급이 계급사회의 착취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신념은 혁명활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부르주아 사회의 압력은 혁명가 개인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작용하여 이 신념을 파괴시킨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염증과 증오심(Stalinophobia)은 지난 수십 년간 혁명 의식을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중의 하나였다.

당시 소련의 스탈린 일당은 수백만 인민들을 살해하고 투옥하였다. 그런데도 전세계적으로 수백만의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파시즘과 전쟁에 반대하는 가장 열성적이고 활동적인 세력이라고 인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스탈린은 1939년 히틀러와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이 사건 직후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기 전까지 파시즘과 전쟁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스탈린에게 동조하였다. 이 동조자들 가운데에는 정치에 막 눈을 뜬 사람도 있었지만 알폰소 레오네티 (Alfonso Leonetti)같은 노장 혁명가들도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공산당과 이탈리아 좌익반대파의 창립자였다. 그리고 1930년에서 1936년까지 국제서기국 위원이었으며 1936년 국제회의에서 국제서기국 위원으로 다시 선출된 바 있었다. 그는 스탈린 제 3기 정책의 초좌익 종파주의 광기 속에서 좌익반대파로 전향했으며 스탈린의 초우익 정책인 인민전선에 대해서는 국제공산주의동맹의 노선을 따랐다. 그러나 전쟁과 파시즘에 대항할 대중운동적 대안을 찾지 못한 그는 서서히 인민전선의 긍정적 측면들을 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6년 국제회의 이후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더니 조직을 나가버렸다. 전쟁의 압력은 그를 프랑스 스탈린주의자들의 협력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그는 이탈리아공산당에 다시 가입하더니 이후 “유럽식 공산주의자(Eurocommunist)”가 되었다.

레오네티는 1933년 좌익반대파 지도자 8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언급된 인사이다. 8인의 행적을 다시 한 번 더듬어 보자. 트로츠키, 세도프, 클레먼트는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레오네티는 스탈린주의에 투항하였다. 프랑크와 나빌은 전술적 이견으로 조직을 나갔다. 이중 나빌은 더 깊은 견해 차이로 인해 나중에 영원히 조직을 나가버렸다. 바우어와 스니블릿은 중도주의 인터내셔널인 런던사무국에 가입했다. 바우어는 종파주의적 교조주의자였고 스니블릿은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지지하는 기회주의에 빠졌지만 이 둘은 결국 같은 중도주의 수렁에 빠졌다. 런던사무국이 해체되지 않았다면 나빌도 아마 같은 운명을 만났을 것이다. 몇 년 전까지도 제 4 인터내셔널을 건설하자고 결의했던 운동의 지도자들이 애초의 목표에 훨씬 미달하는 정치적 행동을 한 것을 보면 이들이 직면한 다양한 압력의 정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국제공산주의동맹이나 제 4 인터내셔널 건설을 위한 운동(MFI)이 인민전선 정책의 압력을 별로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동지들은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사실 인민전선의 압력으로 조직을 이탈한 동지들은 대단히 많았다.

창립대회와 이행 강령

한편 멕시코에 망명 중이던 트로츠키는 1937년 중반 모스크바 재판에 대한 역사적인 폭로작업을 거의 완결하였다. 그리고 다시 조직 내부 문제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그는 국제회의를 1937년 10월에 개최할 필요성에 대해서 국제서기국과 합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 역시 연기되어야 했다. 미국 지부가 사회당에서 축출 당했으며 연말로 계획된 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대회 준비에 바빴기 때문이었다.

1938년 3월 캐넌, 섁트먼, 비 알 던(V. R. Dunne), 로우즈 카스너(Rose Karsner) 등 사회주의노동자당 대표단이 멕시코로 트로츠키를 방문하여 곧 개최될 국제회의와 관련하여 토론을 가졌다. 토론 내용들은 모두 문서로 정리되어 출판되었는데 일독과 재독의 가치가 있다. 운동 지도자들과 협력하는 트로츠키의 기술이 아주 잘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동지들의 말을 아주 잘 새겨들을 줄도 알았다. 그는 가르치면서 동시에 배우는 사람이었다. 트로츠키는 집단적 지도력을 수립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집단정신을 고취시킬 줄 알았다. 그의 작업 성과들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의 문서들에 잘 간직되어 있다.

멕시코의 첫 토론을 통해 곧 열릴 국제회의의 성격, 개최시기, 이행 요구들을 담은 강령적 문서들의 내용 등에 대해서 합의가 도출되었다. 캐넌은 이렇게 말했다:

“조직 문제의 측면에서 이 국제회의를 임시회의로 개최할 것인가 아니면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로 개최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당시 지배적인 의견은 창립대회였다. 제 4 인터내셔널을 창립할 기본 요건들이 갖추어진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중도주의 조직들에 대한 모든 협상과 공작을 종결하고 이들을 우리와 이질적인 조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트로츠키는 캐넌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그리고 인터내셔널 창립에 반대할 조직 내부의 세력들을 점검하였다. 베레컨을 비롯한 벨기에 대표단의 일부, 프랑스 대표단의 일부, 스니블릿과 네덜란드 대표단의 다수파 등이 거론되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당연히 우리 인터내셔널은 허약합니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인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미국 대표단에게 창립 입장을 단호하게 밀어붙이라고 촉구했다.

캐넌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다:

“일부 동지들은 중도주의 조직들에 대한 양보와 공작 전술을 영구적인 정책으로 바라보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이제 더 이상의 공작은 조직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다. 2년, 3년, 4년 전만 하더라도 이 공작들을 수행하기 위해 인터내셔널 창립을 연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때는 지나갔다. 공작을 영원한 정책으로 바라보는 동지들이 있음을 그간의 토론이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이 측면을 동지들에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트로츠키는 캐넌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전부 옳다고 찬동했다. 토론 내용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창립대회를 5개월 밖에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동지들 간에 이견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기 때문이었다.

5월에 트로츠키는 창립대회 사전토론용으로 체코의 어느 동지에게 보내는 대단히 열렬한 어조의 편지를 조직에 제출하였다. 이 편지의 제목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위해서’라고? 아니다.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이다”로 되어있다. 이 편지를 읽고 베레컨은 조직을 탈퇴했다. 스니블릿과 네덜란드 지부는 이미 탈퇴한 뒤였다. 프랑스의 일부 동지들이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소수파에 지나지 않았다. 창립대회에서 19대 3의 표결로 창립 규약이 통과되었다. 반대표는 폴란드 지부의 대표 2명 그리고 프랑스 지부의 크레포(Craipeau)가 던졌다.

창립대회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소련, 이탈리아, 브라질, 폴란드,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스 등 11개국 지부 대표단이 참가했다.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지지했으나 대표단을 보낼 수 없는 지부가 여럿 있었다. 한편 창립대회 당시 제 4 인터내셔널의 조직원 수가 1933년 좌익반대파 시절보다 늘었다는 것을 확증하는 증거는 현재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1938년 당시 폴란드 지부 대표단은 인터내셔널 창립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고 단언했다. 너무나 왜소한 인터내셔널은 의미가 없는 제스처에 불과하며 첫 3개 인터내셔널들은 모두 혁명 고양기에 창립되었다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폴란드 대표단 중 3인은 1938년 인터내셔널 창립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혁명 고양기가 어느 정도의 운동적 상승을 의미하는 가에 대해 이들은 구체적으로 답변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이들 중 한 명은 나중에 시온주의자로 변했으며 나머지 한 명은 활동을 그만두었다. 프랑스 지부의 크레포는 전쟁이 끝난 후 조직을 탈퇴하고 제 4 인터내셔널을 반대하는 여러 중도주의 조직에서 활동하였다. 창립을 지지한 동지들은 각국 지부들의 조직 규모가 아무리 작아도 명확히 규정된 국제적 조직체계와 지도부를 갖추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하였다.

만약 트로츠키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단호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다면 어떤 표결결과가 나왔을까? 이 추측은 아주 흥미롭다. 제 2차 세계대전은 혁명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국제집행위원회 15인 중 5명은 전쟁 중 스탈린주의자와 파시스트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10명 중 두 사람 즉 미국의 캐넌과 카알 스코글런드(Carl Skoglund)만이 조직을 이탈하지 않았다. 이 결과로 보아 트로츠키와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의 단호한 결의가 없었다면 인터내셔널 창립은 부결되었을 것이다.

인터내셔널 창립 이외에 1938년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이행 강령(transitional program)이었다. 트로츠키는 이 문서의 초안을 작성하면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에게 토론을 조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 문서는 레닌 이후 혁명운동이 이룩한 가장 소중한 강령적 업적이다. 이행 강령은 전세계 노동계급이 제국주의 시대에 겪고 있는 실제 경험에 기초하여 교훈들을 집약하고 있다. 더욱이 투쟁하는 노동계급과 그 동맹군이 현재의 의식수준에서 노동자권력을 향한 투쟁으로 의식이 상승하도록 안내하는 강령과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930년대 후반기 당시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다. 그러나 이행 강령이 제시하는 투쟁 방법은 과거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타당하며 유용하다. 이행 강령은 제 4 인터내셔널 운동에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이것이 없었다면 제 4 인터내셔널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온갖 난관들을 헤쳐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일인(一人) 인터내셔널?

지금까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까지의 과정이 거칠게나마 소개되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우리 마음에 떠나지 않는 의문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먼저, 만약 트로츠키가 없었다면 1838년에 제 4 인터내셔널이 창립되었을까? 당시 그의 역할은 너무도 지대해서 비판가들은 제 4 인터내셔널을 일인 인터내셔널(One Man International)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트로츠키가 죽으면 제 4 인터내셔널은 반드시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이후 역사는 이 예상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1940년 트로츠키는 암살되었다. 그러나 제 4 인터내셔널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혁명 원칙들을 고수하여 혁명적 국제주의의 진정한 계승자로서 의연히 그 존재를 유지하였다. 1940년 트로츠키 추모식에서 캐넌이 말했듯이 트로츠키는 인물이 아니라 사상을 중심으로 운동을 건설하였으며 사상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다.

트로츠키와 제 4 인터내셔널의 관계에 대한 질문은 레닌과 러시아 혁명의 관계에 대한 질문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 만약 1917년 초 스위스 쮜리히의 레닌 저택에서 벽돌이 하나 지붕에서 떨어져 그를 죽였다면 그해 말 러시아 10월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 대부분은 이 질문이 아주 기묘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한다면 역사에서 개인의 역할을 교조적으로 무시하는 셈이 된다. 부정적으로 답한다면 사적유물론의 원리를 부정하여 계급 역관계와 대중의 역할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역사에서 위대한 개인들의 역할을 과대 평가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맑스주의자는 혁명적 대중의 역할과 예외적이며 심지어는 없어서는 안될 혁명 지도자의 역할 사이에 어떤 모순도 느끼지 못한다. 이 두 요소는 혁명의 성공을 위해 모두 필요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맑스주의 운동이 아직도 이론적 미숙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일부 지도자들은 숙명론에 찌든 맑스주의를 주장한 바 있었다. 즉 지도자들의 결정적 역할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고 몰개성적 경제 동력의 불가피한 전진을 통해 사회주의가 도래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1917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의 맑스주의로서 볼셰비키주의가 확립되었을 때 이 오류들은 진정한 맑스주의자들에 의해 교정되었다. 이들은 숙명론을 배격하고 자생성의 한계와 함정을 인식하였으며 이론과 실천에 있어서 지도력 특히 집단적 지도력의 핵심적 필요성을 좀더 정확하게 평가하였다.

1935년 나찌 독일의 지하운동에 대한 토론에 트로츠키가 참여한 적이 있었다. 맑스주의 이론과 서적에 대해 무지한 동지들을 경멸하는 경향이 독일 동지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그는 목격하였다. 그는 독일 동지들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맑스주의자들이 당에 없어도 혁명은 이루어진다. 개인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을 집단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한 분야도 제대로 통달하기 힘들다. 그래서 서로의 결점들을 보완하는 전문가들이 모일 필요가 있다. 이런 전문가들은 완벽한 맑스주의자는 못되어도 종종 쓸만한 맑스주의자는 된다. 왜냐하면 완벽한 맑스주의자의 지도를 받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당은 아주 좋은 예이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지도 아래 부하린, 몰로토프, 톰스키 그리고 백여 명의 동지들은 훌륭한 맑스주의자가 되었다. 그리고 위대한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지도가 사라지자마자 이들은 부끄럽게 몰락했다. 맑스주의가 비밀스러운 과학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이 훌륭한 지도자 없이 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압력에 대항하기가 아주 힘들기 때문이다.”  -- [나찌 독일의 지하운동] (레온 트로츠키 저작집 보충판)

혹시 이 글을 읽고 트로츠키가 맑스주의 중핵의 훈련과 교육에 무관심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해이다. 그는 일생을 맑스주의 중핵 훈련에 바쳤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대충 이렇다: 맑스주의 중핵을 교육하는데 불가능하거나 이상적인 목표를 설정하면 안된다; 자본주의체제의 압력이 계속되는 한 동지들 전부가 완벽한 맑스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현재 가능한 재능과 능력을 살려 모두가 집단적 혁명활동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리고 트로츠키는 한가지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완벽한 맑스주의자”는 거의 없지만 이들의 역할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왜냐하면 완벽하지 못한 맑스주의자들의 성공이나 실패가 이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맑스주의 지도력의 의미를 트로츠키는 아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엘리트주의와는 전혀 다르다. 트로츠키는 유능한 맑스주의자들이 떠 안아야 할 엄청난 역사적 책임을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위해 쏟아 부은 그의 모든 노력에 진하게 배어들었다.

1935년 일기에서 트로츠키는 제 4 인터내셔널의 건설이야말로 그가 이룩한 성과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삭 도이처 같은 평론가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본심을 그대로 표현했을 뿐이다. 그는 실제로 제 4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트로츠키가 운동의 이론적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동안 이 분야의 거의 모든 업적들은 그로부터 나왔거나 그의 영향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한 현실 혁명정치의 지도자였다. 그는 망명가의 신분 때문에 국제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고 프랑스에 체류하고 있을 때만 몇 달간 잠시 국제서기국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법적 제약과 시간적 공간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그는 모든 전략적 전술적 결정과정에서 지도력의 중심이 되었다. 제 4 인터내셔널과 그 이전 조직들에 대한 그의 활발한 지도 활동은 제 1 인터내셔널의 맑스와 엥겔스, 제 2 인터내셔널의 엥겔스, 제 3 인터내셔널의 레닌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다.

사실 제 4 인터내셔널의 운명이 트로츠키 일인에 의해 얼마나 크게 좌우되었는지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다행스럽게 트로츠키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대단한 의지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엄청나게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를 계속 투쟁하게 만들고 이 과정에서 주위 동지들을 자극하고 끌고 갔던 그의 혁명 의지를 올바로 측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그의 불굴의 투쟁 의지 때문에 주위 동지들은 평소 능력을 훨씬 넘는 성과를 이룩했다. 그리고 그가 죽었을 때 이들은 풀이 죽어 시들어갔다.

혁명 전통이 계승되다

이제 한가지 의문이 더 남아있다. 제 4 인터내셔널이 창립되어야 했다 치더라도 과연 1938년에 창립되어야 할만큼 시급했을까? 더 늦게 창립되었다면 어떤 차이가 있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의 핵심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있다. 이 전쟁은 1938년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와 뮌헨회담을 전후하여 발발할 뻔하다가 결국 1년 후에 발발했다. 혁명 다음으로 전쟁은 혁명조직들을 시험하는 절호의 계기이다. 전쟁으로 인해 혁명조직은 엄청난 압력에 시달리며 종종 대중으로부터 고립된다. 그리고 전쟁은 혁명조직에 대한 온갖 환상들을 산산이 박살내고 조직 내의 허약하고 동요하는 분자들을 전부 쓸어 없애 버린다. 그리고 강인한 분자들에게는 사생결단을 강요한다. 전쟁이 발발한 지 몇 주 또는 몇 달만에 런던 사무국과 브란틀러가 주도하던 우익반대파 인터내셔널은 태풍에 날아가는 모기떼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왜소하며 허약한 제 4 인터내셔널도 전쟁의 파괴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유럽 대륙에서 각국 지부들은 지하운동을 강요받았고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살아남은 동지는 몇 명도 되지 않았다. 1938년 국제집행위원회 위원들 가운데 몇 명은 임무를 수행하다가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에서, 레옹 르소이으(Leon Lesoil)는 나찌의 집단수용소에서, 삐에트로 트레쏘(Pietro Tresso)는 프랑스에서, 타타투(Ta Ta Tu)는 월남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나 파시스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다른 동지들은 이탈하거나 투항하였다. 섁트먼과 같은 미국 트로츠키운동의 선구자는 미국이 참전하기도 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압력에 굴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창립에 기여한 제 4 인터내셔널을 거부했다. 그리고 조직을 분열시켜 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입혔다. 이에 반해 영웅적인 동지들은 유럽의 일부 지부들을 서서히 다시 건설하고 막강한 적들에 대항하여 계속 투쟁하였다. 그러나 전쟁 발발 후 4년이 지나서야 연락체계를 복구하고 제 4 인터내셔널 유럽서기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만약 제 4 인터내셔널이 1938년에 창립되지 않았다면 전쟁 중에 창립되기는 더욱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언젠가는 창립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1938년에 창립되어 혁명적 국제주의의 깃발과 전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전쟁에서 살아남은 제 4 인터내셔널에 비해 정치적 성격도 달랐을 것이며 조직적으로도 더 허약한 인터내셔널이 되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 인터내셔널은 본부를 미국으로 옮겼다. 이 결과 조직의 범위와 역할은 더욱 축소되고 제한되었다. 그러나 온갖 난관 가운데에서도 혁명적 기상과 이데올로기적 계속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혁명가들은 서로 연락이 두절된 경우가 많았으나 제 4 인터내셔널의 존재로 인해 많은 영감과 힘을 얻었다. 집단수용소, 감옥, 군대 그리고 지하세포 등에 산재해 있던 혁명가들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존재를 믿고 단합하고 영감을 얻었다. 이들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존재 때문에 더욱 열심히 투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내셔널이 없었다면 전쟁이 끝난 후 정치적 사상적 동질성을 쉽게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하자. 1938년 트로츠키가 살아있을 당시 제 4 인터내셔널 건설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 후에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귀중한 혁명적 계속성은 수년동안 단절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전쟁 후 창립되었을 경우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조직 내외의 온갖 난관 속에서 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여러 번의 실패도 있었다. 그러나 1938년의 노력이 실패로 끝났을 경우 이 작업은 훨씬 더 힘들었을 것이다.    

 

 

2. 붕괴(崩壞)의 역사(歷史) : 1938-1963


동요와 혼란

제 2차 세계대전 직전 트로츠키와 제 4 인터내셔널은 자본주의의 노쇠 현상과 파시즘의 등장 때문에 대중이 개량 조치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해 환상을 갖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파시즘에 대한 혐오감으로 미국과 유럽의 노동자들은 사회 국수주의(social chauvinism)에 귀를 기울이고 “민주적” 부르주아 계급에 대해 환상을 새로이 갖게 되었다. 예상과 현실의 모순 속에서 제 4 인터내셔널은 동요하였다.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상이 제 4 인터내셔널의 각국 지부들을 계속 짓눌렀다. 이 결과 어떤 지부는 종파주의 노선을 걸었으며 어떤 지부는 만연한 사회 애국주의(social patriotism)에 투항하였다. 미국 지부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잠시 “노동계급 군사정책(Proletarian Military Policy)”을 채택했다. 이 정책은 노동조합의 통제 아래 군사훈련이 실시될 것을 촉구했다. 미국에 노동자국가를 수립하지 않고도 제국주의 군대를 “통제하여” 미국 노동자들이 독일 파시즘에 대항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이 정책은 내포하고 있었다. 영국의 트로츠키주의자 테드 그랜트(Ted Grant)는 한술 더 떠 어느 연설에서 영국 제국주의 군대를 “우리의 제 8군(our Eighth Army)”이라고 지칭했다. 또한 독일 지부는 노골적인 멘셰비키주의로 돌아섰다. 즉 파시즘의 등장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근본적으로 같은 새로운 혁명 단계”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이론을 들고 나왔다.[“세가지 테제(Three Theses)” 1941년 10월 19일]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운동은 이 모순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었으며 전쟁 중 조직이 사분 오열되었다. 이중 한 분파는 노동계급을 제국주의 부르주아 정치인 드골(De Gaul)의 정치적 목표에 종속시켰다. 다른 분파는 생산현장의 혁명활동에만 중점을 두어 나찌 점령군에 대한 저항운동을 완전히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만연한 개량주의 의식을 무시하고 빠리 “해방”의 순간에 모험주의적으로 공장 점거를 시도했다. 이때 노동자들은 거리로 나가 전쟁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이 두 분파의 통합으로 국제공산당(Parti Communiste Internationaliste)이 창당되었다. 이 통합의 기초가 된 1944년 2월 유럽회의의 문서는 두 분파를 이렇게 규정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부르주아 계급의 민족주의는 제국주의 이해를 표현하고 있다. 반면 대중의 ‘민족주의’는 독일제국주의의 착취에 대한 저항이 반동적으로 표현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국제노동자당(POI) 지도부는 부르주아 계급의 나찌 저항운동을 진보적이라고 잘못 보았다. (...) 반면 맑스-레닌주의의 유산을 곧게 간직한다는 핑계를 대고 국제공산주의동맹(CCI)은 부르주아 계급의 민족주의와 대중의 나찌 저항운동을 한사코 구분하려고 하지 않았다.”

미국 지부의 일국주의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혁명의 과제를 놓고 미국과 유럽의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은 처음에는 서로 전혀 다른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허약한 국제주의는 멕시코에 망명해 있던 트로츠키의 세심한 지도력으로 유지되어 왔으나 그의 암살과 전쟁의 시작으로 허물어졌다. 그래서 독일 나찌 군대의 승리와 함께 유럽 지부들이 불법화되어 거의 전멸하자 겁을 먹고 국제주의를 포기한 채 고립을 자초했다.

전쟁 중 닥칠 조직의 난관을 염두에 두고 국제집행위원회는 본부를 뉴욕으로 옮겼다. 그러나 집행위원회의 뚜렷한 업적이라면 1940년 5월 19일에서 26일까지 개최한 “긴급국제회의(Emergency Conference)” 정도였다. 이 회의는 “미국, 멕시코, 캐나다 지부들의 주도로” “서반구 어느 곳에서” 열렸다. 제 4 인터내셔널 전체 지부 가운데 절반도 되는 않은 수가 참여한 이 긴급국제회의는 미국 지부에서 섁트먼 분파가 조직을 나가고 이후 국제집행위원 다수 역시 조직을 나간 뒤 퍼진 국제적 파장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이 회의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제 4 인터내셔널의 유일한 미국 지부임을 재확인하여 캐넌 다수파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또한 이 회의는 트로츠키가 작성한 “제국주의 전쟁과 노동자 혁명에 대한 제 4 인터내셔널의 선언문(Manifesto of the Fourth International on the Imperialist War and the Proletarian Revolution)”을 채택했다. 그러나 트로츠키 암살 이후 국제집행위원회는 이렇다할 활동을 보이지 못하고 투사들의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지금 돌아보면 미국 지부는 유럽의 어느 중립국에 비밀서기국을 설치하고 능력 있는 동지들과 망명 동지들을 통해 파시스트 국가 내에서 혁명활동을 직접 지도하고 전세계 활동들을 수렴했어야 했다. 그러나 미국 지부는 여러 지부들의 문서들을 출판하는 것으로 국제 활동을 제한하였다. 미국의 정치조직이 국제정치조직에 가입하는 것을 금지한 보히스 법(Voorhis Act)이 1941년 제정되자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자신의 국제적 책무를 방기할 핑계를 얻었다.

사실 전쟁 중 사회주의노동자당의 활동 일부는 국제주의 시각을 보여주기도 했다. 소속 부두노동자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출발한 소련 선박이 미국 태평양 연안에 정박하자 트로츠키의 “러시아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소련 선원들에게 비밀리에 전달하였다. 그리고 상선에서 일하는 동지들은 소련 북해의 항구 무르만스크에 배가 정박했을 때 정치 신문을 소련 내에 반입시켰다. 그러나 이 작업은 희생이 너무 커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명활동을 사전에 감지하기 위해 소련 비밀경찰은 트로츠키주의 조직 내에 소블렌(Soblen) 간첩망을 운영하였다. 이후 간첩들의 법정 증언에 의하면 캐넌의 전화는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도청되었으며 사회주의노동자당 기관지 [제 4 인터내셔널]의 주필 “마이클 코트(Michael Cort)”는 소련 비밀경찰의 요원이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부는 전쟁 속에서도 그대로 건재하여 이후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이후의 상황에 대처하기에는 이론적 능력이 부족했으며 편협한 일국주의에 고착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전후 호황기에 노동조합운동에 조직의 뿌리를 내리는데 성공했다. 새로운 선진노동자들은 공산당의 사회애국주의와 계급협조주의 정책에 반대하고 트로츠키주의의 깃발로 모여들었다.

좀더 자세하게 당시의 상황을 분석해보자.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전쟁의 종결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의 기운이 높아질 것이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1946년 전당대회와 이 대회의 결의문 “다가올 미국 혁명(The Coming American Revolution)”은 혁명활동이 무한정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위기와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상황의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 전위당의 국제적 성격은 인정하지 않았다. 이 결의문은 미국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칭송하면서도 이들의 정치적 후진성을 기정사실로 규정하며 그 이유들을 나열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을 주창하였다: 세계혁명의 결정적인 싸움은 생산수단이 고도로 발달했으며 강력한 노동계급을 보유한 선진국 특히 미국에서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미국에서만 혁명을 성공시키면 세계 자본주의체제는 끝장난다; 따라서 미국의 혁명활동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의 골이 깊은 인상주의는 전후 자본주의 질서의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 자본주의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았다.

그러나 전후 유럽의 상황은 낙관적 예상과는 달리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의 안정,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득세, 동구의 스탈린 체제 편입, 농민에 기반한 민족주의-스탈린주의 정치세력의 자본주의 전복(유고슬라비아, 중국) 등의 사태는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에게 새로운 이론적 문제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당시 당내에는 소부르주아 섁트먼 분파의 탈당으로 능력 있는 이론가들이 없었다. 또한 섁트먼 분파의 탈당에 이어 트로츠키가 암살되어 지도력에 공백이 생겼다. 이 결과 공허한 교조주의가 득세했으며 당의 고립은 더욱 고착되었다.

1950년대에 들어서자 유럽에서는 노동계급의 자연발생적 투쟁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미국에는 냉전의 마녀사냥이 휘몰아쳤다. 스미쓰 법(Smith Act)에 의한 공산주의자 탄압, 사회적 지적 생활의 피폐, 노조운동에 불어닥친 무자비한 빨갱이 사냥,  수년의 노고로 구축한 노조운동 내의 기반 유실, 1940년대 말 획득된 젊은 선진노동자층의 대규모 이탈 등이 뒤따랐다. 이 결과 미국 지부는 유럽과 식민지의 혁명적 격동에 대해 그저 박수나 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 몹쓸 상황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미국혁명을 완수하겠다는 공문구에나 집착하는 교조주의를 드러냈다.

유럽에서 혁명 전통이 단절되다

한편 유럽 지부들은 운동 초기부터 강력한 조직을 건설하지 못했으며 전쟁 중 조직이 철저하게 파괴되는 재앙을 맞았다. 따라서 이전 시기의 경험이 축적될 수 없었으며 수정주의 노선으로 빠져들 위험성이 높았다. 1934년 트로츠키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 투쟁을 시작했을 때 유럽의 노동계급은 파시즘의 등장으로 사회주의와 야만상태 중 하나를 선택할 기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혁명운동의 지도력이 수립되지 못했다. 이 당시 제 4 인터내셔널의 임무는 너무도 명확했다. 즉 파시즘과 전쟁의 위협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투쟁을 고무하고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과 제 2 제 3 인터내셔널의 사회 국수주의 투항에 맞서 노동자 국제주의를 주창할 세계혁명정당의 중핵을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노동계급이 처절히 패배한 상황에서 전위 분자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엄청난 난관, 당면한 임무와 이 임무를 수행할 능력의 턱없는 부족을 트로츠키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허약성은 프랑스 지부에 집약되어 나타났다. 트로츠키는 프랑스 지부를 계속 비판했으며 이 조직의 소부르주아적 노동자주의와 아마추어적 활동 방식에 대해 제 4 인터내셔널 창립대회는 특별 결의문을 채택하기까지 하였다.

제 4 인터내셔널은 파시즘과 전쟁에 맞서 결연한 방어적 투쟁을 결의하고 준비했으나 결과는 패배로 끝났다. 전쟁과 나찌 점령기 내내 인터내셔널 조직은 물론이고 각국 지부의 기반까지 파괴되어 국제적 차원의 계획된 투쟁이 불가능하였다. 인터내셔널은 소규모 투사의 그룹으로 나뉘어지고 각 그룹은 때로는 기회주의적인 그리고 때로는 영웅적인 투쟁을 해나갔다. 프랑스 및 독일 동지들은 혁명적 패배주의를 주창하고 독일군 내부에 트로츠키주의 세포를 구축하는 투쟁을 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65명은 모두 독일 비밀경찰(게쉬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1943년 7월 총살당했다. 이들의 영웅적 투쟁은 허약한 인터내셔널이 불가항력의 난관에 직면하여 국제주의 정신을 지킨 기념비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1943년 8월 유럽에 조직의 기초를 다시 세우려는 시도가 있었다. 벨기에에서 열린 회의에서 유럽 서기국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전쟁 이전 지도부 중 한 명만 살아남아 조직을 지켜나갔다. 또한 투쟁을 통해 검증된 중핵이 전무하였기 때문에 비밀활동 조직가에 불과했던 미셸 파블로(Michel Pablo)가 인터내셔널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1945년 6월 유럽 집행위원회가 세계대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소집되었을 때 경험 있는 지도적 동지들과 장래가 유망한 젊은 동지들은 이미 독일군 또는 소련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된 후였다. 유럽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맥은 이미 끊어wu 있었다. 세계 다른 곳에서도 같은 비극이 반복되었다. 타투타우(Ta Thu-tau)를 비롯한 월남 트로츠키주의자들,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 그나마 소련에 남아있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전쟁 중 투옥과 처형의 재물로 사라졌다. 경험 있는 지도적 동지들이 전멸하면서 삐에르 프랑크가 전후 프랑스 지부의 지도자로 행세하였다. 그는 1935년 트로츠키가 “전의를 상실한 중도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 바 있는 몰리니에 분파의 지도적 인물로 “프랑스 전환” 이후 프랑스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단절을 거부하여 1938년 조직에서 제명되었었다.  

이 참혹한 상황에서 미국 지부가 진정한 국제주의로 개입하여 운동의 지도력을 발휘했더라면 이후 사태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전쟁기간 내내 지도력을 행사할 위치에 있었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편협한 일국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파블로의 권위를 세워주었다고 나중에 캐넌이 고백했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조직 내의 많은 쟁점들을 슬쩍 회피하기까지 하였다.” (1953년 6월) 많은 결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강력하며 경험이 풍부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자신의 책무와는 완전히 반대로 나갔다.

교조에 집착하다

전후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당면한 과제는 중핵들을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고 과거 경험들을 검토하면서 전위와 계급대중의 상황을 다시 평가하는 것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예상대로 전후 서유럽 정권들은 대단히 취약했으며 유럽 전역에서 격렬한 계급투쟁이 다시 불붙었다. 나찌의 붕괴로 계급지배의 공백이 생긴 독일의 경우는 특히 그러했다. 그러나 개량주의 조직들 특히 스탈린주의 조직들이 다시 득세하여 노동계급의 자연발생적 투쟁을 소진시켰다. 전쟁 전에 사회당(SFIO)에 의해 장악된 노동총연맹(CGT)은 전후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면서 프랑스 노동계급을 통제하였다. 결국 유럽 노동계급의 혁명적 투쟁과 특히 프랑스, 벨기에, 그리스, 이탈리아, 서유럽 전역 등에서 일어났던 총파업의 거대한 물결에도 불구하고 노동계급은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으며 스탈린주의 조직들이 새로운 힘을 얻어 세계노동운동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이 사태에 대해 제 4 인터내셔널은 공허한 교조에 기대며 이 시기 노동계급의 투쟁이 패배했다는 사실을 완고하게 부정하였다:

“부분적인 패배의 상황에서 ... 일시적인 후퇴기는 노동계급의 사기를 죽이지 못한다. ... 부르주아계급은 경제를 다시 안정시킬 능력이 없음을 계속 보여주고 있으며 정치체제는 지극히 불안정하다. 이 상황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더 상승할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유럽의 기존 조직들 특히 스탈린주의 조직들의 확대는 이제 거의 모든 곳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제 이 조직들의 쇠퇴가 시작되고 있다.” (1946년 4월 유럽집행위원회)

독일 국제공산당(IKD),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골드먼-마로우(Goldman-Morrow) 분파 등 우파 기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분석의 과도한 낙관주의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투쟁과 전투성이 다시 고양될 경우 언제나 기존의 개량주의 조직들이 제일 먼저 득세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들의 지적은 옳았다. 그러나 이들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요구로 제한하고 전후 프랑스 부르주아 헌법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등 엉터리 “해결책”을 제시했다. 이들은 특히 개량주의 정당들에 입당하는 전술을 채택할 것을 주장했으나 다수파에 의해 손쉽게 거부당했다. 다수파는 노동자들이 트로츠키주의 깃발 아래 자연스럽게 다시 결집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다수파는 개량주의 조직들의 세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자 즉시 입당전술을 채택했다.

전쟁 직후 제 4 인터내셔널의 전망은 에르네스트 만델이 작성한 논문 “유럽 혁명의 첫 단계(The First Phase of the European Revolution)”에 집약되어있다. [제 4 인터내셔널] 1946년 8월 호에 실린 이 글의 제목이 암시하듯 “혁명”은 계속되며 불가피하게 승리로 나아가는 형이상학적 과정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이 정세 규정은 당연히 오류였다. 혁명은 국가권력 장악을 위해 격렬하게 그리고 반드시 제한된 시간 내에 벌어지는 적대 계급 사이의 투쟁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후 시기 전체를 좌우하는 대대적인 정치 사건이다.

한편 1947년 11월 파블로가 주도한 국제서기국은 이렇게 선언했다:

“소련은 이제 10월 혁명의 진보적 성과들이 스탈린 관료집단의 독재에 의해 더욱 더 소실된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다. ...

지금까지 남아있는 10월 혁명의 성과들은 사회주의 발전의 조건이 될 역사적 성격을 점점 더 상실하고 있다.

... 완전히 반동적인 친스탈린 정권이나 소련 점령군에게 우리는 부르주아 소유를 철폐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

그리고 캐넌이 완전히 퇴보한 노동자국가 즉 “국가자본주의”라고 소련을 성격 규정할 것이라는 소문이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에서 떠돌았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동유럽으로 확산된 현상에 대해서 제 4 인터내셔널은 단순한 교조로 일관하였다. [제 4 인터내셔널] 1946년 11월 호에 버트 카크런(Bert Cochran)은 [동유럽의 크렘린 집단](The Kremlin in Eastern Europe)이라는 제목의 긴 논문을 실었다. 이 글은 스탈린주의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한 후 적군이 점령한 나라들은 고의적으로 자본주의 체제로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46년 11월 15일 만델이 섁트먼의 주장을 비판한 내용은 더욱더 확신에 가득 찼다. 즉 “노동자 혁명이 발생한 적이 없는 나라에서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었다. 만델은, “유럽 대륙 절반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자본주의를 타도했다고 섁트먼은 정말로 믿는가?”([제 4 인터내셔널], 1947년 2월 호)라고 웅변조로 물었다.

여기서 구사된 방법론은 1959년 쿠바혁명에 대해 “국제 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가 채용한 방법론과 동일했다. 현실의 사태가 잘 이해되지 않으면 현실을 거부해 버려라! 다만 차이는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기구들이 그대로 버티고 있으나 국가권력은 퇴보한 노동자국가에서 온 점령군이 장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구 사회의 계급적 성격은 더욱 이해되기 어려웠다. 물론 경험주의자들과 배신자들은 동구 국가권력의 계급적 성격을 규정하는데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 나라들은 속도는 각기 다르지만 러시아의 경우와 똑같은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수립해왔다. 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리고 부르주아 계급이 생산수단을 급속하게 몰수당해 모든 경제력을 박탈당했으며 많은 경우에는 목숨까지 잃었다는 것도 누구나 알고 있다. ... 이런 나라에 남아있는 자본주의의 흔적은 내일이면 즉시 일소될 것이다. 러시아와 같은 사회체제를 확립하려는 완벽한 경향이 이들 나라에 존재한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맥스 섁트먼, “제 4 인터내셔널 대회” [새로운 인터내셔널], 1948년 10월 호)

이 조롱 섞인 비판은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당연히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들은 비혁명적 결론을 수용해야 동구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현실을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한 교조를 부여잡고서 우물안 개구리가 되었다.

만델은 당시 그에게 전형적인 방식으로 최소한 이론적 난점만은 명확하게 제기하였다: 스탈린체제가 반자본주의적 사회변화를 달성할 의사를 특정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면 스탈린주의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 동안 옳았다고 볼 수 있는가? 교조에 매달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 체제에 대해 트로츠키가 이해한 변증법적 측면을 의도적으로 억눌렀다. 트로츠키에 의하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10월 혁명의 성과 위에 걸터앉은 기생적 반혁명 지배집단이었다. 그래서 혁명에서 승리한 러시아 노동계급과 세계 제국주의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일종의 불안정한 중간상인이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정태적 교조로 변질시킨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만델의 문제제기를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되자 이들의 이론적 혼란은 극에 달했다. 이제 이 이론의 공백 안으로 파블로의 수정주의가 뛰어들어왔다.

이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했다. 제 4 인터내셔널 조직 전체는 유고슬라비아 혁명으로 또다시 혼란에 빠졌다. 20여 년간 스탈린주의가 단일 체제로 세계의 일부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반스탈린 노선은 충격이었다. 이 충격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꼼꼼하게 분석할 수 없었다. 이들에게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일당은 “동지”이며 “중도주의 좌파”였고 유고슬라비아는 “노동자혁명에 의한 노동자국가”였다. 티토에게 보낸 “공개서한” 가운데 하나에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렇게 말했다: “‘귀하의 당’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엄청나게 성장할 것이며 유고슬라비아공산당은 그곳 노동계급의 이해와 욕구를 효과적이고 집단적으로 표현하는 기구가 될 것입니다.” 이후 중국, 쿠바, 월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고슬라비아 혁명은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동구의 경우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보낸 군대에 의해 사회혁명이 이루어졌다. 이에 비해 유고슬라비아 혁명은 노동계급이나 트로츠키 정치세력의 지도력이 없이 토착 정치세력이 성공시킨 혁명이었다. 이 결과 (기형적) 노동자국가가 수립되었다. 제 4 인터내셔널은 이 혁명을 “노동자”혁명이라고 규정하고 티토 일당을 “중도주의 좌파”라고 명명함으로서 이론적 문제를 회피하려했다. 특히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55년까지 중국의 모택동 체제를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규정하지 않은 채 이 문제를 비껴갔다. 중국을 국가자본주의 체제라고 규정한 필립스 분파의 두 논문이 1954년에도 이 정당의 기관지 [제 4 인터내셔널]에 버젓이 실렸다.

이제 노동계급과 트로츠키주의에 반대하는 세력이 혁명에 성공했으므로 제 4 인터내셔널의 존재 이유가 사라졌다는 주장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경향은 이후 파블로가 일관된 입장을 제시하면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기형적 노동자국가는 노동계급에 의한 유혈 정치혁명을 통해서만 사회주의 발전의 길을 열고 해외로 혁명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노동자국가와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결정적이며 본질적인 차이는 이론적 혼란 때문에 이해되지 못했다.        

파블로주의의 득세

왜소하고 허약하며 사회적으로 고립된 제 4 인터내셔널은 이론적으로도 무장되지 않았다. 전쟁 이후 경험이 없는 중핵들로 채워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조직은 자신이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준혁명적 격동이 반복되면 혼란과 성급함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제 4 인터내셔널이 바로 이랬다. 1951년 초 새로운 수정주의인 파블로주의(Pabloism)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 이론은 답답한 객관적 상황에서 제 4 인터내셔널이 노동계급의 투쟁에서 고립되지 않을 대안을 제시했다. 이 대안은 수정주의 이론을 빌려 일반화를 시도했다. 이 시도의 결과인 파블로주의는 전쟁 직후 제 4 인터내셔널의 일면적 교조주의보다 더욱 일관되게 인상주의적 해답들을 제시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제 4 인터내셔널은 이론적 무능력, 조직의 허약성 등으로 수정주의적 퇴보의 전제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정주의가 확립되어 승리하지는 못했다. 심각한 정치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전쟁 직후 제 4 인터내셔널은 여전히 혁명적이었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인터내셔널은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세계적 사건들로부터 비혁명적 결론을 내리지 않기 위해 공허한 교조를 부적처럼 싸안고 있었을 뿐이었다. 결정적 순간에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이 틀린 이론을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역사는 이미 증명한 바 있다. 1917년 4월 이전 레닌은 러시아와 같은 후진국에서 노동자혁명을 목표로서 제시할 능력을 이론적으로 갖추지 못했다. 트로츠키도 1933년까지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테르미도르 반동을 자본주의 복귀로 보는 잘못을 범했다. 그러나 파블로주의는 탄탄한 거짓이론 이상이었으며 교조주의에 대한 인상주의적 과민반응 이상이었다. 선진국이나 식민지에서 노동자 전위당을 수립해야 한다는 역사적 전망을 포기하는 비혁명적 경향을 이론적으로 합리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951년 1월 파블로는 문건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Where Are We Going)”를 발표하면서 이론의 영역으로 모험의 첫발을 내디뎠다. 혼란스러운 황당무계함과 거의 의미도 없는 허장 성세의 문단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수정주의적 골격이 이렇게 드러난다:

“국제 장기판의 세력관계는 제국주의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한참 진전되었다. 이 변모는 종결을 이루는데 수세기를 요할 것이며 그 동안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온갖 형태들과 체제들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들은 ‘순수한’ 형태와 규준에서 이탈하는 변종 체제들이 될 것이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객관적 과정이 유일한 결정 요인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주관적인 모든 난관들을 도중에 극복한다.

각국 공산당들은 특정 상황에서는 거칠게나마 혁명 노선을 견지할 가능성이 있다.”

파블로는 “객관적 과정”을 “유일한 결정 요인”으로 격상시키고 주관적 요인(전위당의 의식과 조직)을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리고 “수세기”에 걸친 “이행기”(파블로의 반대자들은 나중에 이것을 “수세기에 걸친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의 존재”라고 명명하였다)를 말하면서 제 4 인터내셔널이 아니라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혁명적 지도력을 제공할 수도 있다고 제안한다. 이로서 파블로 수정주의의 분석 틀은 전부 모습을 드러냈다.

또 다른 글 “다가오고 있는 전쟁(The Coming War)”에서 파블로는 특별한 종류의 입당전술(entrism sui generis)을 제시했다:

“진짜 대중운동에 동화되어 대중적 노동조합에서 혁명작업을 수행하고 뿌리를 내리려면 ‘술수’와 ‘투항’ 등은 인정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필요하기도하다.”

즉 엄격히 규정된 강령을 기반으로 노동계급 조직의 분열을 도모하여 조직의 성장을 도모하는 입당전술을 기각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하였다. 새로운 입당전술은 파블로의 정세분석에서 바로 도출되었다. 세계의 계급 역관계가 혁명에게 유리하게 전개되고 있기 때문에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혁명적 역할을 담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다. 따라서 트로츠키 조직들이 스탈린주의 정당의 일부분이 되어 그 내부에서 압력을 가하는 정책을 추구하여야 한다 등등.

이 새로운 노선은 제 4 인터내셔널 중핵들의 머리 바로 위에 터진 폭탄과 같았다. 파블로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상임정치기구인 국제서기국의 수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수정주의 노선에 대해 어느 누구도 경각심을 가졌다는 증거는 없다. 그리고 수정주의에 저항하는 국제 분파가 필요했으나 이것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만델의 긴 논문 (“10개 테제”)과 동지들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불만의 웅성거림 때문에 파블로는 “이행기”에 대한 교조적인 논문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 강령에 대한 파블로의 가장 철면피한 공격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직격탄과 같은 비판적 논문을 쓰지 못했다.

1951년 3월 만델은 “10개 테제(Ten Theses)”를 작성했다. 이 글은 “우리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를 애매하게 공격했을 뿐 파블로를 대놓고 공격하거나 그의 논문의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았다. 만델은 맑스주의적 의미의 “이행기”를 혁명의 승리(프롤레타리아 독재)와 사회주의 성취(무계급 사회) 사이의 기간이라고 다시 확인했다. 파블로의 입장을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은 채 그는 이렇게 썼다: “스탈린체제 역시 부르주아 계급과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전쟁은 혁명의 세계적 격동기로 변모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소유형태에 기초하고 있으나 노동계급에 대항하여 관료집단의 특권적 지위를 옹호하는 스탈린주의 체제의 모순된 보나파르트적 성격을 만델은 끈질기게 주장하였다. 그는 소련 국외의 공산당들이 보이는 이중적 성격이 대중적 기반과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굴종에 의해서 결정된 것임을 강조했다.   

동구, 중국, 유고슬라비아의 자본주의 전복이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지도력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는 파블로의 논리에 대해서 만델은 정통 노선으로 반박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파블로의 노선을 공격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마치 “10개 테제”가 흥미 있는 이론 연습의 결과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졌다는 인상을 풍겼다. 세계적으로 새로이 혁명이 격동할 경우 스탈린주의 체제는 안정되기는커녕 치명상을 입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만델은 이렇게 썼다:

“새로운 혁명의 물결이 스탈린주의 정당들의 몰락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 정당들에 속한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이것은 새로운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기본 임무의 첫 단계에 불과하다. ... (강조는 인용자)

‘공산당에 소속된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은 곧 트로츠키주의 강령과 정책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굳게 확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10개 테제”는 동구의 사회 변화를 조직 내의 어느 누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물론 영국 지부인 혁명공산당(Revolutionary Communist Party)의 해스튼-그랜트(Haston-Grant) 다수파와 이 분파에 동조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로스앤젤레스 분파인 번-라이언(Vern-Ryan) 그룹은 올바른 분석의 일보를 내디뎠다. 이들은 전쟁 직후 동구의 상황을 분석하는 데에는 토착 소유형태만 고려하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즉 점령군인 적군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지역의 자본주의 소유형태는 변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올바른 분석의 출발점은 이후 파블로의 관료적 조치로 인해 매장되었다.

1951년까지만 해도 만델은 동구의 사회구조적 변화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며 결국 동구는 소련에 편입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특히 그는 동구의 사회적 변화가 자본주의 소유형태를 파괴했으나 관료 지배집단이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장애물로 등장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소련의 비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동구로 확대된 현상은 “적군에 의해 동구의 토착 노동운동이 압살당한 것보다는 훨씬 덜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중국 그리고 특히 유고슬라비아 혁명의 경우에는 이 관료적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반적으로 파악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 개인과 스탈린주의를 분리시키지 못했다. 티토가 스탈린과 결별한 현상은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노동계급에 대항해서 자신의 일국적 관료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티토 역시 소련과 질적으로 동일한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농민대중을 주도한 스탈린주의 정치세력이 반자본주의 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만델은 유고슬라비아와 중국 혁명을 노동자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고전적 의미의 스탈린주의 정당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파블로는 이 혁명을 ‘순수한’ 유형의 러시아 혁명과 대치시켰다. 즉 러시아 혁명의 형태와 규범을 무시하는 새로운 혁명모델이 등장한 것이다. 반면 만델은 여전히 파블로를 언급하지 않은 채 이 사건들이 선진공업국과는 다른 예외적 상황의 산물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아시아 식민지 민족의 혁명 세력과 소련 관료집단이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에 대항하여 사실상의 공동전선을 수립했다”고 보았으며 이것을 유럽에서 가능한 공동전선과 비교했다. 그리고 “제국주의 세력들의 공동전선과 소련, 동구, 식민지 혁명 등의 공동전선” 사이에서 즉시 제 3차 세계대전이 터질 것이라는 예상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 전쟁을 혁명전쟁이라고 찬양하는 대신 반혁명 전쟁이라고 불렀다. 만델의 요지는 다음과 같았다:

“현 시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투쟁을 통괄하여 공산주의의 전세계적 승리를 가져올 국제 지도부를 노동계급에게 선사하는 것이다. 소련 국외(유고슬라비아!)에서 처음으로 승리한 노동자혁명에 대해 격노하며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이 임무를 달성할 능력이 없다. 여기에 우리 운동의 역사적 임무가 있다. ...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자신의 사회적 성격으로 인해 세계 자본주의체제를 전복시킬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운동은 역사적 정당성을 획득한다.”

지난 수십 년의 경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반혁명적 성격은 1956년 헝가리에서 가장 극명하게 확인되었다. 1960년 쿠바혁명에서 농민 게릴라군을 이끈 소부르조아 민족주의 지도부는 자본주의를 전복하자마자 소련의 대대적인 지원에 힘입어 스탈린주의 국가기구를 수립시켰다. 중국공산당도 일관되게 민족주의와 스탈린주의를 추종했다. 이 경험에 의하면 만델의 “10개 테제”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문서가 일관되게 의도적으로 분파적 논조를 피했다는 것이다. 즉 만델은 파블로에 대항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올바른 노선을 견지하기 위한 조직 내부 투쟁과 무관하게 진행된 만델의 이론적 시도는 트로츠키주의를 방어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 역시 혁명의 주관적 요인인 조직의 중요성을 거부함으로서 또 다른 파블로주의로 빠졌다.

1951년 8월과 9월에 제 4 인터내셔널의 제 3차 세계대회가 열렸다. 주요 정세보고서들은 공산당과 “개량주의 정당”을 구별하였다. 전자만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강력한 대중투쟁의 압력에 의해 혁명정당이 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파블로가 새로 발명한 입당주의 전술의 기회주의적 성격이 여기서 날카롭게 드러났다. 대중정당 내부에 양극화와 분열을 가속화시켜 조직원을 획득한다는 입당전술의 원칙이 거부되었다: “공산당이 분열될 가능성은 없다. 대신 공산당 대오가 좌경화 되어 이 정당을 혁명정당으로 탈바꿈시키는 움직임이 등장했다.” 그리고 동구와 중국의 노동자국가들이 결정적으로 기형화되었다고 인정하는 입장 역시 제출되지 않았다. 이로써 세계대회는 건강한 노동자국가인 레닌의 소련과 퇴보한 또는 기형화된 노동자국가 사이의 차이는 양적일 뿐이라는 주장이 암묵적으로 제기되었다. 그리고 티토가 “자본주의체제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는 독립적으로 혁명세력들을 재결집하여 새로운 혁명 지도부를 수립하는 주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되었다. 또한 식민지 국가들의 연속혁명의 전망은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파블로의 “특별한 종류의 입당전술(entrism sui generis)”은 오스트리아 위원회에 의해 정교하게 적용되었다:

“동지들의 사회당 내부 활동은 다음과 같은 지시사항에 따라야 한다: ㄱ. 강령의 전체 내용을 밝혀 트로츠키주의자의 본색을 드러내면 안된다. ㄴ. 강령과 원칙의 문제들을 제기하지 말 것. ...”

이 결의문들은 정통을 자처하는 말들을 아무리 구사한다해도 진실을 덮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 지부인 국제공산당(PCI)은 만델의 “10개 테제”를 표결에 붙일 것을 제안하면서 이에 대한 수정안도 제출했다. 만델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표결을 이미 포기한 상태에 있었다. 결국 표결은 없었으며 국제공산당만 포결로 이 문서를 부결시켰다.

세계대회가 끝난 후 몇 달에 걸쳐 파블로 노선은 세계대회에 제출된 것보다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우리는 장기간의 체류를 위해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입당한다. 돌이킬 수 없는 준혁명 시기가 새로 도래할 것이다. 대중의 급진화와 객관적 혁명상황에 직면하여 공산당은 투쟁을 지도하는 중도주의 경향을 띨 수 있다. 우리는 이 커다란 가능성에 승부를 걸고자 한다. ...” (파블로, 1952년 2월 국제집행위원회 10차 전원회의 보고서)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과 식민지 국가의 혁명에 직면하여 소련 관료집단은 전자에 대항하여 후자와 동맹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 식민지 정당들에서 스탈린주의가 붕괴하고 있는 현상은 조직의 붕괴나 소련과의 단교가 아니라 공산당 내부의 진보적 변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스탈린주의의 등장과 쇠퇴”, 1953년 9월 국제서기국)

파블로주의에 대한 저항

처음에 만델은 파블로 노선에 반대하면서도 애매한 입장을 보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 지부는 만델을 어느 정도 신뢰했으나 결국 만델은 파블로에게 투항해버렸다. 이제 파블로 주의에 대한 투쟁은 프랑스 지부의 다수파 블렙트뢰-랑베르(Bleibtreu-Lambert) 분파와 미국 지부의 임무가 되었다. 널리 알려진 신화와는 반대로 이 두 지부는 수정주의가 등장했을 때 동요하였다. 그리고 자기 지부를 단속하는 정도로 투쟁을 제한했다. 두 지부 모두 불편한 심기를 보이면서도 파블로주의를 묵인하였다. 프랑스 지부는 가끔 저항했다. 그러나 파블로주의에 대한 미적지근한 투쟁이 자살 행위와 같다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격렬한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두 지부 모두 이 투쟁을 제 4 인터내셔널 지부 전부로 확산시킬 책임을 방기했다. 그리고 “정통 트로츠키주의 원칙”에 따라 투쟁한다는 명목으로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를 수립하여 결국 원칙에 입각한 분파투쟁에서 후퇴했다. 친파블로 분파와 반파블로 정통 분파로 이미 분열한 지부들이 국제위원회를 구성했으므로 이것은 처음부터 이름뿐인 인터내셔널에 불과했다.

국제서기국은 프랑스 지부 다수파에 대한 보호관리를 선언하고 메스트르(Mestre)와 프랑크(Frank)가 주도하던 소수파를 프랑스 지부의 지도부로 격상시켰다. 이때 다수파는 제 3차 세계대회의 공식 노선에 동의한다고 계속 주장했다. 그리고 파블로, 국제서기국, 국제집행위원회 모두가 세계대회의 결정사항을 위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즉 파블로 분파는 “세계대회에서 자기 주장을 제시하지 않다가 대회 이후의 혼란과 모순들을 이용하여 지금에야 자기 주장을 내놓고 있다”고 프랑스 다수파는 주장했다.(“국제집행위원회 정책에 대한 블렙트뢰-랑베르 그룹의 선언문”, 1952년 3월 또는 4월)

프랑스 지부 다수파를 대표하여 르나르(Renard)는 1952년 2월 16일자 편지로 미국 지부 지도자 캐넌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이 편지도 국제서기국의 프랑스 위원회(the French Commission)와 세계대회 노선을 프랑스 지부 다수파가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애매한 상투적 문구들을 인용하여 세계대회의 소위 정통노선을 증명하면서 국제집행위원회와 국제서기국의 파블로 노선과 대비시켰다. “파블로주의는 세계대회에서 승리하지 않았다”고 르나르의 편지는 주장하였다. 프랑스 지부가 세계대회에서 채택된 주요 문서들의 내용을 애초에 왜 반대했는지 그는 지혜롭게도 설명하지 않았다! 이 편지는 파블로주의 국제지도부의 프랑스 지부 개입 행위에 대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르나르의 편지에 대해 캐넌은 5월 29일자 편지를 보내면서 프랑스 지부 다수파가 공산당에 대항하여 진보적 반공주의자들과 연합한 것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감의 표시이며 일종의 기회주의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파블로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프랑스 지부 다수파는 파블로의 입당전술이 가져올 해악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소수파 이론가 메스트르와 행한 논쟁에서 다수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생각들이 올바르다면 입당전술이니 특별한 종류의 입당전술이니 하고 수다떨지 말아라. 우리의 새로운 임무를 명확하게 제기하라. 동지들은 우리가 공산당 내에서 소수 좌파도 아니고 좀더 일관된 경향이 될 것을 주장하고 있다. ... 이 경향의 역할은 스탈린주의가 자신의 동요를 극복하고 부르주아계급과 결정적인 일전을 치르도록 도와주는 것에 있다고 동지들은 주장한다. ... 만약 스탈린주의의 성격이 바뀌었다면 그것은 계급들 사이의 불안정한 균형에 자신의 목숨이 걸린 관료적 지배집단이나 보나파르트 집단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국가의 이익만을 방어할 것이다. 그런데 이 변화가 소련 노동계급의 개입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내부 변화에 의해서 가능하다면 이행 강령 뿐 아니라 1923년부터 제 4 인터내셔널 창립까지 트로츠키가 남긴 모든 저작들의 내용을 고쳐야 할 것이다.”  (“좌충우돌에 대한 첫 번째 의견”, 1952년 2월 국제공산당 내부문건집 제 2호)

그러나 프랑스 지부 다수파는 미국 지부 다수파처럼 파블로주의에 혼자 저항해야할 사태에 직면하자 구체적인 국제주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음을 입증했다.

1952년 6월 3일 다수파는 2개의 프랑스 지부를 인정해 달라고 국제지도부에 요청했다. 독자적 정책을 통해 국내 정치투쟁을 수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규약에 명백히 위배되었다. 그리고 규율에 입각한 세계조직인 인터내셔널을 청산하자는 말 밖에 되지 않았다. 필요한 것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정치노선을 놓고 국제적으로 분파투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지부 다수파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정통성과 계속성에 프랑스의 정치활동을 종속시킬 용의가 없었다. 파블로가 이 요청을 거부하자 다수파는 조직을 탈퇴했다.   

미국 지부는 카크런-클라크(Cochran-Clarke)분파의 클라크 파벌이 파블로주의를 지지하자 겨우 이에 대한 투쟁을 시작했다. 르나르의 편지에 대한 1952년 5월 29일자 답장에서 캐넌은 이렇게 말한 바 있었다:

“국제지도부는 친스탈린주의 경향이나 그 징후를 보이고 있지 않습니다. 세계대회의 문서들이 수정주의를 표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 이 문서들은 트로츠키주의 노선에 완벽히 일치합니다. ... 이 문서들의 입안자들은 우리 운동에 커다란 기여를 했습니다. 이것이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 전원의 일치된 의견입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세계대회 문서들에 대한 수정안을 준비했으나 대표로 참석한 클라크가 문서를 태워버렸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은 사실일 수 있으나 별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캐넌은 정말로 중요한 때에 파블로에 저항하는 프랑스 지부 다수파를 지지하지 않았고 파블로에게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카크런-클라크 분파가 파블로주의를 주창하자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는 대체로 동의했다. 다만 미국 예외주의를 내세웠을 뿐이었다. 즉 대중적 위세를 거느린 유럽 공산당들에 비해 미국공산당은 엉성한 3류 지식인들로 구성된 종파에 지나지 않으므로 장기간 입당전술은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카크런-클라크 분파의 파블로주의가 당을 장악할 위협에 처하자 캐넌은 로스앤젤레스의 와이스(Weiss)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분파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주의에 대한 화해를 의미하는 파블로주의에 반대하여 고참 중핵들이 결집하자고 호소하면서 그는 던(Dunne), 스웨이벡(Swabeck) 등 노조활동가 당원들에게도 접근했다. 즉 당내 분파투쟁이 노동조합운동에서 개량주의자에 대한 투쟁과 동일하다고 주장하면서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1953년 5월 전당대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작년 본인은 당이 계속 존속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심각히 의심했습니다. ... 지난 25년의 노력이 재앙으로 끝나고 다시 한 번 한줌 밖에 안되는 동지들을 규합하여 옛날의 기초 위에서 새 정당의 중핵을 결집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폐막 연설, 5월 30일)   

그러나 캐넌은 다른 노선을 추구했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필요한 투쟁을 수행하는 대신 카크런-클라크 분파에 대항하여 답스-케리-핸슨(Dobbs-Kerry-Hansen) 분파와 무원칙한 동맹을 맺었다. 이 대가로 그는 판에 박힌 보수주의자인 답스에게 당을 통째로 넘겨주었다.

파블로주의에 대항해 사회주의노동자당은 편협한 일국주의 고립정책을 정력적인 반(反)국제주의로 심화시켰다. 1953년 5월 18일 당 다수파 회의에서 행한 캐넌의 연설에는, “미국 지부는 보스의 지시에 따라 일하는 다국적기업의 지사가 아니다”는 언사가 튀어나왔으며 “가능하면(!) 공동노선을 추구하는” 토론을 찬양하였다. 그는 국제지도부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빠리의 몇몇 인사들”이라고 지도부를 지칭했다. 또한 국가권력을 장악했으며 지도력이 널리 인정된 레닌의 코민테른과 제 4 인터내셔널을 비교한 후 후자가 민주집중제 조직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캐넌은 프랑스 지부 다수파에 대한 파블로의 개입 정책을 늦게나마 문제삼았다. 그러나 이것도 국제지도부가 지부의 일에 간섭하면 안된다는 식으로 조직적 측면만을 문제삼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 지부의 최근 분쟁과 분열에 대한 국제지도부의 전술은 놀라울 따름이다. 국제지도부가 내린 조치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르나르의 편지에 대해 우리가 답장을 오랫동안 미룬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국제서기국을 정치적으로 돕고 싶었다. 그러나 당원에 의해 선출된 다수파에 대해 취해진 조치들은 인정할 수 없었다. 결국 르나르의 편지 가운데 이 조치들을 언급한 내용을 무시해 버렸다.”  (“탐에게 보내는 편지”, 1953년 6월 4일)

또한 이 편지는 제 3차 세계대회가 수정주의 노선을 채택하지 않았음을 재확인했다.

파블로주의에 대한 프랑스와 미국 지부의 미온적 대책을 파블로 추종자들은 적절하게 이용했다. 제 14차 국제집행위원회 전원회의는 캐넌이 인터내셔널을 “연방주의 연합체”라고 주장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미국 지부가 파블로식 입당전술을 원칙적으로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면서 중국문제에 대해서 프랑스 지부와 무원칙하게 연합한 것을 비난했다. 또한 스탈린주의를 철저한 반동이라고 규정한 미국 지부 다수파의 주장을 일면적 교조라고 비판했다. 미국중앙정보국(CIA)나 이렇게 규정하지 않는가! 이 비판을 통해 파블로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조직 청산주의를 은폐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을 엄숙하게 재확인하면서 정통노선에 충실한 체했다.

결국 파블로주의를 주장했던 소수파인 카크런-클라크 분파가 조직을 탈퇴하자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은 급작스럽게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당은 파블로와 어떤 조직적 관계도 없다. 1953년 11월 16일자 [투사](the Militant)지에 실린 편지의 제목은 “전세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이 편지에서 미국 지부 다수파는 카크런-클라크 분파와 파블로를 비난하고 늦게나마 “부당하게 축출된” 프랑스 지부 다수파에게 연대를 표시했다. 그리고 제 3차 세계대회를 “트로츠키주의에 철저히 입각한 대회”라고 규정했기 때문에 대회 이후 파블로주의가 등장했다고 주장했다. 이 결과 1952년부터 프랑스 지부 소수파가 작성한 전단 한 두 건에만 의존하여 파블로주의를 공격했다. 당연히 이 공격은 설득력이 없었다. 거의 같은 시간에 미국 지부 다수파는 “파블로의 수정주의를 비판하며”라는 팜플렛을 제작하여 스탈린주의에 대한 파블로의 투항을 좀더 효과적으로 분석했다:

“대중의 압력이 충분하면 공산당이 혁명의 길로 들어선다는 주장은 틀렸다. 이것은 혁명 패배의 책임을 지도부가 아니라 대중에게 떠넘기는 주장이다. ...

파블로는 노동계급과 트로츠키주의 조직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일 분파를 혁명으로 밀어붙이는 집단으로 격하시켰다. 이로써 관료집단은 혁명의 장애물이자 배신자로부터 혁명의 지원 동력으로 격상되었다.”

1954년 “국제위원회(International Committee)”가 수립되었다. 이 새 국제조직의 구성원은 프랑스 지부 다수파,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영국의 히일리-번즈(Healy-Burns) 그룹이었다. 히일리 그룹은 수정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별 역할을 하지 못했다. 전후 영국 지부였던 혁명공산당은 붕괴하고 있었으며 이 와중에서 히일리-로런스 (Healy-Lawrence)분파가 조직에서 나왔다. 이 분파는 영국노동당에 대한 파블로식 입당전술을 주창했다. 당연히 파블로는 이 분파를 지지했다. 이 결과 2개의 영국 지부가 생기면서 국제집행위원회에 대표를 같이 보냈다. 히일리는 영국에서 캐넌의 “사람”이었고 혁명공산당 내부투쟁에서 일관되게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지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파블로와 단절하게 되자 히일리-로런스 분파도 분열되어 히일리는 사회주의노동자당과 손을 맺고 로런스는 파블로에게 붙었다. 이후 로런스는 프랑스 지부 소수파 지도자 메스트르와 같이 스탈린주의로 넘어갔다. 파블로에 반대하는 국제조직의 일부였으나 히일리 그룹은 계속해서 영국노동당 내부에 파블로주의 입당전술을 열렬히 추구했다. 당연히 이 그룹은 국제위원회에서 전혀 영향력이 없었으나 1956년 헝가리혁명 이후 공산당을 추종하던 능력 있는 지식인과 노조활동가들을 획득하여 영국 좌익운동권에서 상당히 중요한 조직이 되었다.

국제위원회는 이미 조직 분열을 겪은 망명 중국 지부와 조그만 스위스 지부도 손에 넣었다.

1954년 초 국제위원회는 내부문건집을 여러 차례 발간하였으나 진짜 국제조직에 걸맞는 회의는 한번도 소집하지 못했다. 당연히 중앙집중적 지도부를 선출하지도 못했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제 4 인터내셔널의 제 4차 세계대회에 불참했다. 이 대회가 제 4 인터내셔널의 정통성을 결여했으며  파블로 일파의 모임에 불과하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세계운동은 큰 대가를 지불했다. 실론 지부인 LSSP는 파블로주의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았으나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제 4차 세계대회에 참가할 것을 호소했다. 진정한 국제주의 시각을 가졌다면 이때 수동적인 실론 동지들에 대해 강력한 분파투쟁을 벌여 단호한 중핵들을 획득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 투쟁이 수행되지 못한 끝에 LSSP는 파블로 쪽으로 표류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7년 후 LSSP는 실론의 부르주아 연립정부에 참여하여 트로츠키 운동에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이 치욕적인 정책이 채택되기 직전 파블로는 LSSP를 분열시켜 일부 당원들을 자기편으로 획득했다. 수정주의에 대항한 강력한 분파투쟁이 1953년 수행되었더라면 실론에는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계승하는 단호한 혁명조직이 건설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가 LSSP의 배신적 행위와 연상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세계운동의 차원에서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투쟁이 이렇게 의도적으로 회피된 결과 국제위원회는 이미 분열을 완료한 그룹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수정주의를 패배시키고 진정한 트로츠키주의에 기초하여 제 4 인터내셔널을 재건할 투쟁은 미래의 과제로 남았다.

붕괴의 완료

1957년 파블로의 국제서기국은 국제위원회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과 통합을 추진했다. 두 조직이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해 취한 동일한 입장이 통합의 기초가 되었다. 두 조직 모두 헝가리 혁명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타도하고 진정한 노동자국가를 수립하려는 헝가리 노동자들의 정치혁명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캐넌은 파블로의 책략을 의심했으며 국제위원회 소속의 영국, 프랑스 그룹이 반대했기 때문에 통합은 실패로 끝났다. 과거의 견해 차이와 현재의 전망을 검토하지 않은 채 단순히 경험적인 동의만으로 통합이 가능하다고 양 조직은 생각했다. 이 점에서 이 에피소드는 두 조직의 허점만 드러냈다.

그러나 다시 통합이 제기되었을 때는 정치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국제서기국과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모두 쿠바혁명을 고전적인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칭송하면서 카스트로 관료집단을 정치적으로 지지했다. 그러나 이 상황은 1957년의 경우와는 달랐다. 그때에는 두 조직이 트로츠키주의 정통 노선을 형식적으로나마 인정했기 때문에 통합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스탈린주의자 카스트로를 정치적으로 지지하면서 파블로주의로 투항했기 때문에 통합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1963년 두 조직은 통합서기국(United Secretariat)을 결성했다. “세계 트로츠키주의운동의 조기 통합을 위하여 -- 사회주의노동자당 정치위원회 성명서”라는 제목의 문서가 통합의 기초가 되었다. 이 문서는 1963년 3월 1일 발표되었는데 새로운 노선의 핵심은 이 문서의 제 13항에 나타나 있다:

“(쿠바 혁명은) 단순한 민주주의 요구로 시작된 혁명이 자본주의 소유관계를 전복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혁명을 수행할 결의에 찬 지도부 아래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농민과 반(半)노동계급으로 구성된 게릴라 부대는 식민지 및 반식민지의 국가권력을 약화시키고 그 전복을 재촉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투쟁을 통해 우리가 도출할 수 있는 교훈 중의 하나이다. 이 교훈은 식민지에서 혁명적 맑스주의 정당을 건설하는 전략에 의식적으로 결합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경험은 소부르주아 지도부가 지휘하는 농민 게릴라 전쟁은 반(反)노동계급적 관료주의 정권 밖에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러한 정권들의 수립은 제국주의의 쇠퇴, 스탈린주의 정치세력의 배신으로 인한 대중의 사기저하와 혼란,  혁명적 맑스주의 지도부의 부재 등의 조건 속에서 가능했다. 식민지 혁명은 혁명적 노동계급의 지도로 완수될 때만 완전히 진보적이다.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지도력을 격하시키는 노선을 전략에 결합시키는 것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심대한 부정이다. 맑스주의자는 농민 게릴라 전쟁에 의한 모험주의적 사회주의 건설 노선을 단호하게 반대해야 한다. 이 노선은 레닌이 대항했던 사회혁명당 노선과 역사적으로 비슷하다. 이 노선은 사회주의 건설의 정치적 목표에 대한 자살행위이며 모험주의자들에게는 육체적인 자살행위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사회주의노동자당은 계속 우경화하면서 위에서 인용한 제 13항의 기본노선마저 부정하였다. 통합서기국이 소부르주아 게릴라 노선을 지지하는 것은 합법적으로 생존을 도모하여 미국 내 개량주의 대중정당이 되고자 열망하던 사회주의노동자당에게는 너무도 무거운 짐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트로츠키는 반복해서 국제적 차원에서 혁명조직을 건설해야 할 절대절명의 임무를 강조했었다. 일국 차원에서 고립이 계속되면 주관적으로 아무리 강인한 혁명조직도 결국에는 노선상의 혼란과 조직상의 붕괴를 피할 수 없다.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운동 내부 부르주아 하수인들은 혁명조직에게 편협성과 사회국수주의를 끊임없는 강제한다. 이 압력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원칙과 규율에 입각한 국제적 협력과 연대를 실천해야 한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강령에 기반한 국제적 민주집중주의 세계정당을 건설할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레닌의 전위당 노선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파블로 수정주의에 의한 제 4 인터내셔널의 붕괴와 현재 여러 국제조직들의 파편적 존재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향한 끝없는 투쟁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