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동맹이 미국 순회 중인 통합서기국 지도자 만델과 대면하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25호, 1978년 여름)

이 논문의 축약판은 5월 4일 만델이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강연한 뉴욕에서 배포되었다. 강연회에 대한 보고는 [노동자 전위]지 제 205호(1978년 5월 12일)의 글 "만델이 인민전선에 대해 얼버무리다"를 참조하시오.

 

만델: 카멜레온 중도주의자

<차례>

"만델의 수많은 얼굴과 장기(長期) 파동"

만델라의 인간성: 파블로주의자가 되면서 그가 보여준 모습

게릴라 노선에서 인민전선으로

이름들

객관주의자와 투항자들

 

에르네스트 만델은 세계적인 좌익 학자이다. 그는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오가며 강연과 좌담에 참여하고 서적과 논문들을 줄기차게 출판한다. 유행을 따라가는 출판사들 그리고 가장 고루한 부르주아 신문들과 잡지들도 그의 의견을 열렬히 추종한다. 한마디로 그는 "스타"이다. 자칭 맑스주의 경제학자들 가운데 그는 아마도 가장 유명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위지나 베틀렝보다 정통 레닌주의에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현실 참여 지식인의 전형이다. 루벵, 베를린의 "자유 대학"에서 강의를 마치자마자 곧장 그는 자신이 지도하는 "제 4 인터내셔널 통합서기국" 회의에 참여하고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경제 관리들과의 회담하기 위해 비행기에 오른다. 대중 매체와 제국주의 정부들에 따르면 만델은 "트로츠키주의의 위협"을 구현하고 있어서 비밀경찰에 의해 국경에서 제지되거나 매카시 입법에 의해 사회에서 격리되어야할 괴물이다.

"테러를 옹호하는 제 4 인터내셔널"에 대한 주기적인 반동적 히스테리를 제외하면 만델은 닳고 닳은 자유주의자에서 후안무치한 스탈린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넓은 스펙트럼 내에서 긍정적인 평판을 누리고 있다. 이 현상은 레온 트로츠키 그리고 그의 생전 그와 함께 투쟁했던 제 4 인터내셔널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지배계급의 비난과 탄압과 너무도 대비된다. 그래서 우리는 왜 그럴까라고 스스로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만델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계급 지배나 관료적 정권들 모두에 대해 비타협적으로 반대하고 모든 수정주의 경향에 대해 진정한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결연히 방어하며 노동계급의 대의를 배신하는 자들을 열렬하게 비난하는 인물이라면 왜 그는 모든 이들의 증오를 받지 않는 것일까?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그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라 사기꾼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볼세비키-레닌주의자의 강연을 들으러 온 사람들은 환불을 요구해야한다.

사실 그는 볼세비키의 비타협성이 무엇인지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기회주의를 변호하는 글들을 마음대로 써재끼는 만큼이나 정통적인 논쟁을 쉽게 전개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25년간 만델은 결정적인 순간마다 트로츠키주의 혁명 전망과 강령에 대항해왔다. 재빠른 머리와 놀라운 박학다식을 이용하여 그는 크게 유행하는 모든 소부르주아 급진 기회주의("대학생 권력", 농민 게릴라 "무장투쟁", 인민전선 등)에 수정주의적 "이론"의 보호막을 씌워주었다. 1960년대에 "대학생 권력" 운동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신좌익(New Left) 유행에 즉시 합류했다. 노동계급이 여전히 혁명운동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대신 그는 노동자 투쟁이 "신(新)자본주의"에 의해 매수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의 지지자들은 "적색 대학교" 강령을 주창했다. 대학생 운동에서 "체" 게바라가 우상이 되자 노동대중의 투쟁을 지도하기 위한 레닌주의 전위당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는커녕 그는 강단 게릴라가 되어 그의 추종자들에게 카스트로의 사산된 게릴라 "인터내셔널"인 남미국가기구(OLAS)에 가입할 것을 명령했다.

현재 그는 최근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는 인민전선과 유럽식공산주의(유로콤) 운동을 다시 뒤쫓고 있다. 트로츠키는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인민전선을 반대하는 것이 이 시대 혁명 전략의 핵심이자 "볼세비키와 멘세비키를 가르는 최고의 기준"이라고 간주했다. 그런데 프랑스의 만델 조직은 좌익연합(역자 주: 1972년 공산당, 사회당, 부르주아 급진사회당 사이에 체결된 선거연합)을 인민전선이라고 규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고립"이 두려워 좌익연합 후보들에게 표를 던지는 대중의 꽁무니를 쫓아갔다. 유럽식공산주의를 따르는 유럽의 공산당들이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반소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동안 만델은 스페인공산당 지도자 까리요와 같은 골수 개량주의 배신자들이 "혁명적 맑스주의로 복귀하리라는 희망과 신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까리요는 예일대학교 노동자들의 파업방위선을 무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미국 방문을 허가해준 미 국무부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증명했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는 것이 적은 사람들조차 만델과 같은 자가 영웅적인 좌익반대파 성원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좌익반대파 지도자 트로츠키는 1940년 스탈린이 보낸 깡패에 의해 살해되었다). 왜냐하면 대학생 권력을 주창하는 대중의 자발성 옹호자들, 게바라 추종자들, 인민전선 등이 혁명투쟁을 이끌 수 있다면 트로츠키주의 정당은 필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스페인공산당의 개량주의자들이 혁명적 맑스주의로 "돌아온다면" 트로츠키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셈이 될 것이다. 그는 1933년 독일공산당의 스탈린주의자들이 싸움 한번 하지 않고 히틀러의 집권을 허용했을 때 코민테른이 부르주아 계급의 편으로 확실히 넘어갔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이로부터 5년 후에 그는 제 4 인터내셔널을 창립했는데 만델의 행동에 따르면 이것은 기껏해야 가련한 오류에 불과했을 것이다.

 

"만델의 수많은 얼굴과 장기(長期) 파동"

뉴욕에서 만델은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강연할 것이다. 그는 독점자본주의 시대에 맑스를 해석하고 대중화시키면서 경제학 분야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가 저술한 교과서 [맑스주의 경제이론]은 이런 종류의 서적들 가운데에서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그리고 만델은 이론을 혁신시킨 인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저서 [후기 자본주의]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듯이 그는 러시아 경제학자 콘드라티에프의 "장기 파동"이론을 재발견했다. 폴 스위지가 노동가치 이론을 왜곡하여 공황이 없는 독점자본주의라는 자신의 신좌익 이론을 정당화하고 샤를르 베틀렝이 "사회제국주의" 소련이라는 자신의 모택동주의 교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본주의를 제멋대로 재규정하고 있는 것에 비해 만델은 맑스주의 정통을 수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만델의 경제 저서들은 그의 정치적 입맛에 맞게 만들어진 산물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그의 "정통 맑스주의"는 실제로는 맑스의 용어를 빌린 가장 순수한 형태의 인상주의에 불과하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자. 우리의 "이론가"인 만델은 콘드라티에프의 "장기 파동"을 왜 들고 나왔는가? 만델은 이렇게 주장 한다: 1945년부터 1966년까지 "경제는 급격히 성장했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기순환 역전 정책은 성공했다; 이 때문에 1929년의 대공황과 같은 사태는 다시 발생할 수 없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지금은 장기적 경기 침체기이며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자본가들의 탐욕적 이윤추구에 의해 벽에 막히고 있다. 그러나 우선 만델에게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경제 자료가 없다. 그는 19세기의 경제 자료를 전혀 제시하지 않고 있으며 1920년대 중후반의 호황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양차대전 사이 기간 전체가 경기 하강기라고 자신이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 시기에 경기는 상승과 하강을 수차례 반복했으며 국제적으로 경기 곡선은 대단히 불안정했기 때문이다.

결국 만델이 장기 파동 이론을 들고 나온 것은 경제 이론과는 무관하며 순전히 정치적인 의도 때문이다. 장기 파동 이론은 자신의 정치적 기회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그가 발명한 정직하지 못하며 객관주의적인 변명에 불과하다. 1960년대에 그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이 더 이상 혁명세력이 아니라고 단정 지었다. 이때 그는 "후기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동화와 핵에너지의 "제 3차 산업혁명"에 기초한 "신자본주의"를 주장했다. 자신의 소책자 [맑스주의 경제학 개론]에서 만델은 이렇게 주장 한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신자본주의 단계는 장기적 경제팽창 단계이다...." 이 주장은 레닌의 테제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레닌은 제국주의 시대를 생산력 쇠퇴의 시대라고 규정했고 트로츠키는 제 4 인터내셔널 창립 강령의 제목에서 이것을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이 장기적 경제팽창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 만델은 이렇게 설명 한다:

"장기적 경기 순환은 제 2차 세계대전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은 경제팽창을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협상의 여지는 커졌다. 노동자들에게 양보하는 것을 통해 자본가 계급이 체제를 강화할 가능성이 생겼다.... 근본적으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팽창하고 있는 자본가 계급과 노동운동 내 보수 세력 사이의 밀접한 협력이 유지되고 있다."-- [맑스주의 경제학 개론]

지금 이 주장을 소부르주아 급진주의 운동권에 들이 밀 경우 만델은 웃음거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주장은 "신(新)노동계급" 이론들의 인기 있는 주제였으며 늘 그렇듯이 우리 "맑스주의" 경제학자 양반은 유행을 쫓아 이 피상적 인상주의에 들어맞는 이론을 정교하게 개발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기꺼이 "매수 한다"는 주장은 허구이다. 미국 자본가 계급은 1959년에 철강 노동자들의 파업을 잔인하게 분쇄했다. 이 하나의 예만으로도 만델의 주장은 그 허구성이 증명된다.

그러나 만델의 이론은 사실 왜곡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적 배신을 합리화한다. 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예는 1960년-61년 벨기에 총파업에 대한 그의 배신행위이다. (이 사건은 그의 "신자본주의" 이론에 의하면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만델은 당시 [좌파]지의 편집자였다. 이 신문은 노동조합 왕(王)관료 앙드레 르나르의 휘광을 등에 업고 벨기에사회당 내 광범위한 좌파의 대변지로 자처했다. 이때 [좌파]지는 "구조 개혁"을 주창했다. 여기에는 기독교민주당 정부의 반(反)노동자적 긴축정책인 "특별법"의 철폐, 전기산업의 국유화, 정부 주도의 경제계획, 독점기업 규제, 국방예산의 반감 등이 포함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조 개혁은 대단히 온건한 사민주의 개혁 강령이었다.

특별법에 반대하는 총파업이 확산되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대중 집회에서 "에이스켄스 정권을 타도하자!"고 외쳤다. 그러나 만델의 [좌파]지는 1960년 12월 24일 이렇게 주장했다: "지금의 사회위기로 정권이 무너지면 벨기에사회당이 새 연립정부에 참여할 것이라고 노동자들은 걱정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조건 하에서만 새 연립정부를 인정할 수 있다고 만델은 주장했다: "1) 새 정부가 특별법을 철폐한다, 2) 구조 개혁의 핵심 내용들이 정부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결국 "구조 개혁"의 미명 하에 부르주아 연립정부를 인정하겠다고 만델은 선언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1961년 1월 1일 [좌파]지는 "브뤼셀 행진을 조직하자!"라는 붉은 글씨의 제목을 신문 맨 앞면에 달았다. 그러나 만델은 자기 스승인 르나르의 허락도 없이 허풍을 떤 셈이 되었다. 르나르는 에이스켄스 정부와 대결한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주에 [좌파]지는 정한 시간 정한 장소에 노동자들을 집결시키는 것을 반대하면서 게릴라 전술을 촉구했다. 그리고 1월 14일 만델은 비겁하게 투항 노선을 발표했다:

"브뤼셀 행진을 촉구했다고 우리는 비난받았다....지도자들이 이 요구를 거부했으므로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적할 것이 있다. 브뤼셀 행진을 촉구할 당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했다."

이 주장은 물론 사실이다. 르나르가 행진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만델이 알았다면 그는 결코 행진을 촉구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순회 강연에서 만델이 거론할 또 다른 주제는 1968년 파리의 5월 투쟁이다. 그러나 그의 "신자본주의" 이론은 노동자 대중의 국가권력 장악 투쟁을 금지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강연에서 그는 이 결론을 결코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1968년 파리의 5월 투쟁에서 1천만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이면서 프랑스공산당과 노동조합의 관료적 통제를 벗어던질 기세였다. 그러나 만델은 당시 이렇게 주장했다: "노동대중을 즉시 승리로 인도할 정도의 영향력과 조직력을 갖춘 통합된 전위가 공산당 왼쪽에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문에 반(反)자본주의 구조개혁 전략인 '이행 요구들'이 전부 유효하다"([투사]지, 1968년 6월 14일). 그러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이행 요구들은 "국가권력 장악이라는 최종적 결론으로 노동자들을 반드시 인도하는" 강령의 일부이다. 그런데도 만델은 이렇게 선언했다: "대중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없다." 그리고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 회사 장부 공개, 은행 비밀의 종식 등을 담은 "구조 개혁"을 촉구했다. 그에게 이행 요구들은 자본주의에 대한 도전이 아니라 자본주의 "보장책"이었다.

1970년대가 되자 만델은 더 이상"신자본주의"를 주장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전후 호황"의 장기 파동이 이제 경기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진짜 변화한 것은 경제상황이 아니었다. 1968년 프랑스와 1969년 이탈리아("뜨거운 가을")의 경제상황은 1960년대 초기와 유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5월 투쟁에서 만델이 추종했던 대학생 전위들은 노동계급을 혁명세력으로 다시 발견했다. 모택동주의/조합주의 그룹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자 만델 조직은 자기 왼쪽의 공격 위협에 직면하여 노선을 바꾸면서 급진화 된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새로운 대중(그리고 나중에는 광범위한)전위"를 추종하기 시작했다. 지금 만델의 경제 예측은 겉으로는 그의 "신자본주의" 곡해보다 더 정통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트로츠키주의에 조금도 더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노동계급의 자발적 전투성을 추종하고 노동조합에서 온전한 이행 강령을 제시하지 않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만델의 인간성: 파블로주의자가 되면서 그가 보여준 모습

만델은 25년도 더 전에 트로츠키주의와 결별했다. 그 당시 제 4 인터내셔널은 조직 내부에서 거대한 위기를 겪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1953년에 분열했다. 이 결과 사회주의 혁명의 세계정당인 제 4 인터내셔널은 붕괴했다. 세계트로츠키주의운동에 가해진 이 엄청난 타격의 정체는 파블로의 청산주의였다. 만델은 처음에는 이 수정주의 경향에 대해 어정쩡하게 반대하는듯하다가 곧이어 굴복했다. 이후 그는 청산주의자들의 변호사가 되었다. 이 굴복은 정치적 비겁이 그의 핵심 성격임을 드러냈다. 이 결함은 혁명 지도자와는 당연히 무관하다. 이때 이후 그는 기본적으로 지적인 창녀가 되어 좌익의 대세에 영합해왔다. 바로 이것이 그가 누리고 있는 인기의 비결이다. 그는 유행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대가는 크다: "아무리 쓰디써도 대중에게 진실을 말하는" 혁명 지도자가 되기를 그는 끊임없이 거부하고 있다.

1940년대 후반부에 서구 특히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스탈린주의 정당들은 나치 점령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 운동을 주도한 결과로 영향력을 크게 확대하고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전쟁 중에 스탈린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의 암살 공작으로 인해 크게 약화된 제 4 인터내셔널은 대체로 노동운동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었다. 동시에 냉전이 시작되자 크렘린궁의 노선은 완강해졌다. 이때 동구와 중국에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탄생하자 인상주의자들은 이렇게 결론 내렸다: 압박을 가할 경우 스탈린주의자들은 좌경화하여 혁명 세력이 될 수도 있다.

바로 이 객관적 상황에서 정치적 고립의 압박은 제 4 인터내셔널을 강하게 짓누르고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국제 서기 미쉘 파블로가 주도하는 수정주의 경향이 조직 내부에 등장했다.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라는 제목의 1951년 1월 문서에서 파블로는 "전쟁/혁명" 테제를 제출했다. 이 테제는 주장했다: 미국과 소련이 격돌하는 제 3차 세계대전이 임박했으며 서구 노동운동은 이 격동에 휩쓸릴 것이다; 더욱이 대중의 압력을 받아 "공산당들은 특정 상황에서 혁명을 지향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트로츠키주의 전위가 상당한 세력을 결집하기 전에 혁명이 터질 수 있으므로 "특별한 입당" 정책이 필요하다; 제 4 인터내셔널 지부들은 스탈린주의 및 사민주의 대중정당에 입당하여 오랫동안 머물면서 개량주의자들을 좌로 압박해 이들이 혁명 세력이 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파블로의 주장에 따르면 제 4 인터내셔널은 존재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다수의 지부들이 그의 노선에 저항했다. 프랑스 지부의 지도부가 공산당에 대한 "깊은 입당" 정책을 거부하자 파블로는 스탈린처럼 치사한 술책을 동원하여 프랑스 지부를 활동 정지시켰다. 이때 글을 통해 파블로 노선에 반대한 첫 번째 인물은 만델이었다. "10개 테제"로 알려진 그의 글은 겉으로 보면 스탈린주의의 반(反)혁명성을 다시 확인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파블로의 이름을 제시하며 공개적으로 그를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이 글의 내용은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공격하고 있었다:

"혁명의 물결이 맹아적으로나마 스탈린주의 정당들을 파괴할 위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공산당 노동자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 이 활동은 새로운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우리의 기본 임무를 성취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그러나 파블로가 국제서기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델의 테제는 조직에 의해 정식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제 4 인터내셔널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있었지만 만델은 강력한 분파투쟁을 수행할 베짱이 없었다. 결국 그는 파블로에게 굴복하였다. 그리고 국제서기라는 권한을 휘두르는 이 독재자의 앞잡이가 되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10개 테제"를 애초에 지지했던 프랑스 지부의 지도부를 제거하는 공작에 나섰다. 파블로에 반대한 프랑스 지부의 지도자 파브르-블렙트뢰는 1951년 만델에게 이 비겁한 배신행위를 항의하는 편지를 보냈다:

"동지의 글들이 보여주고 있는 문화적 수준, 이미지의 풍부함, 문체 등은 동지가 우리 조직의 가장 뛰어난 저술가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우리는 동지의 글들을 읽으면서 언제나 똑같은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한 가지 확신을 가지고 있다. 동지는 지도자의 가장 필요한 자질 즉 자신의 정치적 사상에 대한 확고함을 결여하고 있다.

동지는 파블로의 수정주의에 대해 몇 번 저항한 후 그의 품속에서 안식처를 찾는 비겁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오늘 동지는 프랑스 지부 지도부에게 '제 4 인터내셔널 다수파의 대오 안에서' 평화로운 안식처를 찾으라고 너그럽게 권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지와 같은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인터내셔널은 계략 그리고 특히 동지의 가련한 계략들을 통해 건설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만델 동지, 얄팍한 계략 그리고 비겁하고 무책임한 속임수를 포기하라. 그리고 앞으로 나서서 우리와 같이 동지의 사상을 방어하라."-- 프랑스판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7호, 1974년 8월에서 직접 번역

박식한 "지도자" 만델은 조금만 압력을 받아도 금방 굴복했다. 이 때문에 그를 따르다가 제 4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된 프랑스 동지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배신으로 인해 화를 당한 프랑스 동지들의 불행은 스탈린주의 모택동 정권에 의해 감옥에 갇힌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불행과는 비교될 수 없다. 후자의 불행 역시 만델의 배신행위 때문에 초래되었다. 이 만행의 진상은 제 4 인터내셔널 중국 지부의 지도자 펑슈치가 1953년 12월 미국의 트로츠키주의 지도자 제임스 캐넌에게 보낸 편지로 드러났다. 파블로는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을 중도주의 조직으로 규정하고 모택동이 트로츠키주의 연속혁명론의 중심 테제들을 소화했다고 주장했다. 펑슈치는 이 사실을 유럽으로 탈출한 후 시간이 좀 지나서 알게 되었다. 그는 스탈린주의자들의 탄압 때문에 중국을 탈출했기 때문에 파블로의 주장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52년 6월 제 4 인터내셔널 국제집행위원회는 중국에 대한 파블로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펑슈치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결의문에는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의 혁명 전망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이것은 최악이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이 결의문의 지지자들은 중국공산당 입당을 위해 중국 지부를 해체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펑슈치가 진짜 충격을 받은 사건은 나중에 일어났다. 그는 1952년 11월에 열린 국제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모택동 정권의 잔인한 탄압을 보고했다. 이에 대해 파블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모택동 정권의 학살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실수에 의한 것이며 그것도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1953년 5월에 펑슈치는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촉구하는 호소문과 모택동 정권의 트로츠키주의자 살해와 체포에 항의하는 공식 서한을 국제집행위원회에 제출했다. 파블로는 호소문을 공표하겠다고 말한 후 나중에 이것을 덮어 버렸다.

이제 파블로의 하수인이 된 만델은 공개서한에 대해 펑슈치에게 이렇게 말했다: 공개서한은 모택동 정권의 혁명 업적을 치하하면서 정권에 대한 전적인 지지를 표명한 후에야 탄압 사실을 언급해야한다. 국제집행위원회와 국제서기국의 일원이었다가 결국 파블로에 의해 축출된 펑슈치는 모택동 정권을 스탈린주의 정권으로 규정하고 반대했다. 그러자 만델은 그를 "가망 없는 종파주의자"라고 비난한 후 공개서한을 제 4 인터내셔널 전체에 배포하기를 거부했다. 수정주의자 만델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혁명으로 인한 난민"으로 규정했다!

파블로 일당은 스탈린주의 정권을 혁명 정권이라고 칭송하고 자기 동지들을 비방한 후 이들에 대한 탄압과 암살을 공개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것도 모자라 이들은 펑슈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호치민(호지명)의 월남공산당에 입당하기 위해 귀국하고 있는 월남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모택동 정권의 탄압 사실을 알리지 말라. 그런데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 통치 재개에 저항하여 1945년 8월 봉기를 주도했던 트로츠키주의 지도자 타투타우 등 다수의 제 4 인터내셔널 성원들은 바로 호지명에 의해 암살되었다! 모택동 정권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파블로의 "깊은 입당" 전술에 대해 열광하여 월남으로 귀국하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파블로의 노선을 다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이들은 결국 귀국했으며 이후 연락이 완전히 끊겼다.

펑슈치는 자신의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델은 우리 운동의 가장 유망한 새로운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인상주의적 기질이 있어서 중요한 문제들에서 아주 자주 동요하고 유화적이다. 또한 그는 자기 입장을 바꾸는데 거리낌이 없다." 인상주의와 정치적 비겁 때문에 만델은 파블로의 품에 안겨 혁명 지도자로서의 길을 거부했다. 그의 굴복은 파블로가 제 4 인터내셔널 기구를 관료적으로 장악한 후 파괴시키는데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의 비겁한 정치적 굴종으로 인해 파블로의 수정주의 경향은 허약하고 혼란에 빠진 제 4 인터내셔널에 손쉽게 승리하였다. 이로써 트로츠키가 창립한 세계혁명의 도구는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그리고 만델은 사망하지 않았다면 지금도 모택동의 감옥에 있을 중국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시급한 방어를 직접 사보타지 했다.

개인적 결점으로 인하여 만델은 수정주의자이자 트로츠키 운동의 배신자가 되었다.

파블로의 수정주의 강령은 트로츠키주의 전위를 건설하는 투쟁을 청산시켰을 뿐 아니라 스탈린주의에 대한 일련의 정치적 굴종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1953년 6월 17일에 동베를린의 노동자들이 처음에는 러시아 점령군에 대해 그리고 나중에는 관료 지배집단에 대해 봉기를 일으키자 이 투쟁의 파장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오랫동안 공산당 당원이었던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쓰디쓴 아이러니와 체념의 글을 남겼다: 당국에 따르면 "인민이 정부에 대한 신뢰를 거두었으며 배가된 노력으로만 이것을 다시 찾을 수 있다. 정부가 차라리 인민을 해산시키고 다른 인민을 선출하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소련 진영에서 처음으로 정치혁명을 시도한 이 사건에 대해 파블로의 국제서기국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그의 조직은 "공산당의 진정한 민주화" 즉 관료집단의 자기개혁을 촉구하면서 의도적으로 소련군의 철수 요구를 빠뜨린 성명서를 발표했다([제 4 인터내셔널]지, 1953년 7월).

이로부터 3년 후에 파블로/만델 일당은 증오스러운 비밀경찰과 러시아 점령군에 대항해 봉기한 헝가리 노동자들에게 등을 돌리면서 똑같은 짓을 했다. 관료집단에 반대한 노동자들의 정치혁명을 폄하하면서 이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폴란드의 경우를 빗대었다: "중도주의 경향이지만 좌경화하고 있는 고물카 지도부 덕분에 폴란드는 결함과 위험을 모면했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이러한 정치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바로 이 결함과 위험이 초래되었다..."([제 4 인터내셔널]지, 1956년 12월) 또 다시 이들의 전망은 관료집단의 일 분파에게 압박을 가하는 것이었을 뿐 독자적 트로츠키주의 정당으로 노동자들을 결집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1960년대가 시작되자 파블로주의자들은 소위 "제 3 세계" 특히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인 알제리의 벤 벨라와 쿠바의 카스트로에게 눈을 돌렸다. 1960년 가을/겨울의 국유화로 인해 쿠바의 자본가 계급이 청산되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이들은 한술 더 떠서 카스트로 지도부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다. 1953년에 늦기는 했지만 확고하게 파블로의 청산주의를 거부했던 미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도 이들과 함께 카스트로를 정치적으로 지지했다. 1963년 3월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제출한 문서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조속한 재통일을 위하여"는 이렇게 주장했다: "혁명적 맑스주의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카스트로의 7월 26일 운동은 다수의 다른 나라들에게 모범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이제 만델이 주도하는 "통합서기국"의 창립 문서가 되었다.

이때 다른 문서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 조지프 핸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쿠바는 "노동자 민주주의 통치 형태를 아직 갖추지 못한" 노동자국가이다. 사실 쿠바 노동자국가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형태 뿐 아니라... 내용도 갖추지 못한 것이 확실했다. 사실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1963년에 쿠바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감옥에 가두면서 이 점을 아주 확정적으로 증명했다. 트로츠키의 저서 [연속혁명]은 금지되었고 카스트로 정권의 비위에 거슬리는 내용이 담긴 글자판은 인쇄기에서 박살났다! 통합서기국이 특히 좋아했던 게바라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미국의 첩자라고 암시하면서 이들이 미군기지 근처의 관타나모 시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행사했던 사실을 주목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도 만델은 산업부에서 게바라를 만나 경제 정책에 대해 "나의 친구 '체'"에게 조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게릴라 영웅"이 될 게바라에게 조언한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혹시 권력의 심장부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위해 만델이 싸우고 있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만델은 게바라의 산업부가 발행한 [새로운 산업]지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나라의 경제가 후진적일수록 중요한 투자와 재정 문제에 대한 결정권을 중앙 당국이 가지고 있는 것이 지혜롭다고 생각한다."-- "이행기의 상업적 범주들", 버트램 실버먼 편집, [쿠바의 인간과 사회주의]

이것은 쿠바 관료집단의 대단히 비이성적인 경제 "계획"을 변호하는 주장에 불과하다. 쿠바의 경우 결정과정은 너무도 중앙집중화 되어 있어서 모든 것을 최고 지도자 카스트로가 지프차의 의자에 앉아 결정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탄압은 파블로 일당을 당혹스럽게 만들지 않았다. 이들은 어느 것에 대해서도 당혹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1966년 쿠바의 수도 아바나의 삼대륙대회(Tricontinental Congress)에서 카스트로는 유명한 연설을 통해 입에 거품을 물고 트로츠키주의를 비난했다. 이때 통합서기국 지도자 핸슨은 이렇게 주장했다:

"카스트로의 연설은 공산당 우파 지도자들을 크게 만족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전위 분자들은 카스트로가 기껏해야 트로츠키주의를 호세 포사다스의 기이한 종파와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에도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오랜 비방들을 그가 모방했을 뿐이라고 본다. 어쨌든 이렇게 한 카스트로의 의도는 전혀 명확하지 않다."-- [국제사회주의 평론]지, 1967년 11월-12월

그러나 카스트로의 감옥에 갇힌 노동계급 투사들은 카스트로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다. 쿠바의 스탈린주의 정권을 변호한 통합서기국 지도자들은 한 가지는 옳게 알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를 비난하면서 카스트로는 통합서기국의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정치혁명을 통해 보나파르트 정권을 타도하고 이를 소비에트의 민주적 통치체제로 대체하자고 촉구한 진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통합서기국이 스탈린주의에 투항하고 있는 반면에 국제스파르타쿠스경향만이 유일하게 맑스주의 강령을 옹호하고 있다. 그런데 양자를 동일시하는 것은 확실한 오해이다. 만델이 트로츠키주의자라는 죄명으로 재판을 받을 경우 그는 "나는 무죄요!"라고 항변할 수 있다. 이 경우에 그는 양심이 확실히 깨끗할 것이다.

 

게릴라 노선에서 인민전선으로

1960년대 후반부에 만델의 조직은 명성과 권위를 단 번에 얻으려고 남미의 카스트로주의 운동에 주로 관심을 집중했다. 1969년 열린 통합서기국의 "제 9차 세계대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주장했다:

"도시에서 먼저 대규모 투쟁과 계급갈등이 폭발하는 나라들의 경우에도 내전은 무장투쟁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일 것이다. 이 때 전체 시기의 중심축은 농촌의 게릴라 전쟁이 될 것이다...."-- "남미에 대한 결의문 초안",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국제정보게시판]지, 1969년 1월

따라서 남미에서 통합서기국 지지자들의 일차적 임무는 "(1) 쿠바 혁명과 남미국가기구가 대표하는 역사적인 혁명 조류에 통합되는 것이다." 이것은 1950년대 초반부에 파블로가 제시한 청산주의 전망과 기본적으로 똑같았다. 다만 정치적 아첨과 굴종의 대상만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늘 그래왔듯이 게릴라 노선에 대해 만델은 리비오 마이탄처럼 단순 무식하게 "총을 들자"식의 게릴라 노선보다는 좀 더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파블로의 방법론을 계승하는 점에서는 그는 확실히 정직했다. "제 4 인터내셔널 역사에서 제 9차 세계대회가 차지하는 위치"(1969년)에 대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1960년대에 상황은 바뀌기 시작했다. 이 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낸 사건은 바로 프랑스의 1968년 5월 투쟁이었다....제 9차 세계대회는 이 변화상을 국제혁명운동 전체에 환기시키려했다.

이 변화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세계적 차원에서 새로운 혁명전위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은 스탈린주의 및 개량주의 기구들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으로 조직된다. 이 새로운 현상의 첫 징후는 멀리 거슬러 올라가 "7월 26일 운동"에서 찾아진다. 이 운동은 쿠바공산당 그리고 기타 쿠바 좌익의 기존 조직들과 완전히 독자적으로 존재한 채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타도하는 게릴라 투쟁을 주도했다....

이것은 개량주의자도 스탈린주의자도 아니면서 국내외에서 재편을 추구하는 새로운 전위 투사들의 구심점이 될 수 있는 독자적 조직으로의 전환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전환은 운동의 주요한 형태에 대한 강조점이 변화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전환은 제 3차 세계대회의 전환과 똑같이 중요하다. 다만 인터내셔널의 건설에 있어서 훨씬 더 발전된 단계에서의 전환일 뿐이다."

여기서 얘기하는 제 4 인터내셔널 제 3차 세계대회는 파블로가 처음으로 공산당과 사민당에 대한 "깊은 입당" 전략을 정교하게 제시한 대회를 말한다. 만델은 계속 주장한다:

"기본적으로 고립된 활동을 청산하고 혁명적 대중운동으로 통합되는 것이 제 3차 세계대회에서 다루어진 문제였다. 그러나 제 9차 세계대회에서 문제는 기본적으로 선전활동 즉 노동운동의 기존 지도부들의 배신과 오류를 비판하는 것을 청산하고 대중운동 내에서 혁명 활동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었다."-- [혁명의 긴 전진] (1976년)

두 경우 모두 "전술"의 핵심은 노동계급 이외의 계급들에 대한 굴종이었다. 그러나 핸슨의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은 "제 7차 세계대회"의 "게릴라 노선 전환"에 반대했다. 그 이유는 월남전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세력과 동맹하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미국의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인 민주당의 "비둘기파"는 남미에서 "테러행위"(즉 게릴라 투쟁)를 지지하는 자들과 동맹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만델의 통합서기국은 자신의 계략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게바라의 게릴라 투쟁이 볼리비아에서 붕괴한 후 카스트로의 남미국가기구는 "둘, 셋, 다수의 월남"을 전혀 조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게릴라 투쟁을 수행하던 통합서기국의 두 주요 그룹들이 조직을 나갔다: 볼리비아의 조직은 카스트로의 민족해방전선에 집단 가입했고 1973년 아르헨티나의 혁명적노동자당은 통합서기국을 탈퇴했다.

정글의 게릴라 투쟁을 통해 볼리비아나 칠레에서 단 번에 권력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이때 소련을 지지하던 공산당들은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노선"을 다시 부르짖기 시작했다. 칠레에서 이 노선을 실현할 도구는 인민연합이었다. 공산당, 사회당, 소규모 부르주아 정당들로 구성된 이 인민전선의 지도자는 살바도르 아옌데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1968-69년 노동계급과 대학생들의 투쟁이 불타 오른 후 개량주의자들은 혁명으로 나아갈 대중의 급진화를 저지할 수단을 찾고 있었다. 이들의 해답은 인민전선의 새로운 물결이었다. 프랑스의 좌익연합 그리고 이탈리아공산당의 "역사적 타협"이 바로 인민전선이었다.

칠레의 경험은 통합서기국이 1960년대 후반부의 게릴라 노선에서 1970년대의 인민전선으로 전환하는 중심점이었다. 또한 가장 중요하게 칠레는 인민전선의 드라마가 처참하게 끝나는 전장이었다.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노선"은 유혈 속에 패배했다. 칠레군 장교단과 "민주적" 자본가 분파에 대한 신뢰를 설교했던 공산당과 사회당의 책임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러나 만델의 통합서기국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우선 이 조직의 지지자들은 칠레에서 아옌데의 1970년 선거 승리에 환호를 보냈다. 그러다가 1년 뒤에 통합서기국은 인민연합을 인민전선이라고 "만장일치로" 규정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심지어 이렇게 선언하기까지 했다:

"인민전선에 대해 완벽한 독립해야한다. 혁명가들은 이런 연합체에 대해 선거에서 지지도 하지 말아야한다. (특정 상황에서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노동운동의 후보에게 표를 던질 수 있으나 소부르주아 및 부르주아 정당들을 포함하고 있는 전선의 후보에게는 표를 던질 수 없다.)"-- [대륙간 언론]지, 1972년 2월 21일

그러나 실제로 1970년 선거 국면에서 이 노선을 따른 조직은 국제스파르타쿠스경향 뿐이었다. 더욱이 이때 이후 통합서기국은 인민전선 후보들 모두에게 표를 던졌다. 그러나 위의 성명서는 이 조직이 인민전선에 대한 트로츠키주의 정통 노선에 무지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증명한다. 다만 이들은 이 노선에 반대했을 뿐이다. 어쨌든 칠레에서 통합서기국을 지지하는 여러 그룹들은 모두 인민연합에 표를 던졌다. 그리고 뒤이어 칠레의 수도 산티아고에서 미국 중앙정보부의 사주를 받은 피노체트의 군부 쿠데타가 승리하여 수만 명의 노동자와 농민이 학살되거나 투옥되었고 칠레 인구 10분의 1이 해외로 탈출하는 처참한 일이 벌어졌다. 이 유혈 참극이 벌어지고 난 뒤인 1973년 9월에 통합서기국의 만델 다수파는 "정치결의문 초안"을 통해 인민연합에 대한 이전의 규정을 뒤집었다:

"...처음부터 칠레의 인민연합은 사회주의로 나아갈 결의를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며 역시 공개적으로 조직 노동운동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것은 고전적인 인민전선과는 달랐다."--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 토론집], 1973년 10월

이것은 아옌데 일당과 다른 혁명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한 통합서기국의 오류를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술수였다. 그러나 이 술수는 유럽에서는 복잡하게 꼬였다. 1973년 프랑스에서 만델의 조직인 혁명적공산주의동맹은 의회선거 결선투표에서 좌익연합에 표를 던질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1974년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역시 좌익연합의 대통령 단일 후보 미테랑에게 표를 던질 것을 촉구했다. 또한 1977년 지방자치단체선거 결선투표에서 부르주아 정당인 좌익급진당 후보들을 포함한 좌익연합 명부에 표를 던질 것을 호소했다. 대신 이 명부가 급진당 후보를 제 1 순위로 올려놓은 경우에만 기권을 호소하면서 좌익적 외피를 아주 살짝 뒤집어썼다.

이탈리아에서도 상황은 유사했다. 통합서기국의 이탈리아 지부는 1976년 6월 의회선거에서 선거연합인 노동자민주주의로 후보를 냈다. 기독교민주당과 선거연합을 체결한 공산당보다는 왼쪽에 있었지만 노동자민주주의는 칠레의 인민연합과 같이 부르주아 계급의 소규모 공화파 정당 및 비(非)종교 정당들과 연합했다. 포르투갈에서 만델의 조직은 군대운동의 일 분파를 지지했으며 이 분파의 지지를 받은 노동자연합전선에 참여했다. 그러나 1976년 6월 대통령선거에서 통합서기국의 대스타 크리빈은 부르주아 장교단의 오텔로 데 카르발호 장군에게 표를 던질 것을 주장했다!

상습적으로 트로츠키주의를 배신해온 파블로주의자들은 1950년대에는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시녀 노릇을 했으며 1960년대에는 카스트로의 게릴라 노선에 응원부대가 되더니 1970년대에는 인민전선의 좌익 압력집단이 되었다.

 

이름들

1963년에 통합서기국이 출범했을 때 통합의 양 당사자들은 "과거지사는 과거지사로 묻어두자"고 합의했다. 이 때문에 중국, "깊은 입당" 전략, 그리고 기타 논쟁거리들에 대한 입장 차이들은 논의 불가능한 영역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대중이 급진화하는 징조가 처음으로 드러나자마자 모든 정치적 차이들은 다시 드러나면서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과 그 부하 그룹들은 파블로의 조수들이었던 만델 일당과 정면으로 대치했다. 이 결과 1969년부터 1977년까지 통합서기국 내부에는 분파투쟁이 가열되었고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주도하는 개량주의 소수파와 중도주의적 다수파는 공개적으로 서로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마침내 다수파가 게바라식 게릴라 노선에 대한 이전의 지지를 철회하여 분파의 해소를 시도하자 분파투쟁의 과정에서 나온 온갖 문서들은 "조직의 역사와 관련된 자료"로 중요성이 격하되었다.

결국 인민전선 시기에 소수파와 다수파가 진정으로 통합했지만 여전히 통합서기국은 썩어빠진 연합이다. 따라서 광범위한 "극좌" 그룹들이 함께 하는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제 4 인터내셔널"이라는 거짓 이름을 떼어버리자고 만델이 주기적으로 제안하는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이런 연합체는 소련을 격렬히 반대하는 모택동주의자,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 대중의 자발성을 신주 모시듯이 하는 조합주의자 등을 모두 포괄한다. 그리고 공산당, 사민당 등 노동자정당이 포함되는 거대한 인민전선을 왼쪽으로 압박하자는 정치적 합의만으로 같이 움직인다. 1976년 만델은 스페인 좌익 평론지와 대담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운동의 미래는 트로츠키주의를 자임하는 그룹들보다 광범위한 조직들에게 있다. 그러나 이 조직들은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제 4 인터내셔널 지부들과 통합해야한다."-- [늙은 두더지]지, 1976년 11월

이보다 몇 달 전에 만델은 파블로가 주도하는 프랑스 사회주의통일당  내의 좌파와 대화하면서 이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만델이 거느리는 프랑스의 혁명적공산주의동맹이 미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보다 이탈리아의 모택동주의-조합주의 그룹들과 더 가깝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레온 트로츠키라는 턱수염이 난 사람과 관련된 조직이름, 조직 형식, 규약, 인간관계, 언급 등은 중요하지 않다....

이름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정치투쟁의 장에서 우리의 전략과 전술에 동의하면서도 역사와 관련된 언급이나 이름 때문에 주저하는 세력이 있다면 우리는 24시간 이내에 트로츠키주의라는 조직 이름을 떼어버릴 것이다."-- [주간 정치]지, 1976년 6월 10-16일

사회주의통일당 좌파 지도자 이반 크레뽀는 한때 트로츠키주의자였는데 이렇게 응답했다: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레닌주의 당 개념도 버려야한다.

이런 종류의 계략으로 통합서기국 마술사들이 "새로운 전위"와 접촉하여 은밀하게 이들을 장악할 수 있을까? 과거에 있었던 이런 종류의 시도들을 잠깐 살펴보기만 해도 답은 저절로 나온다. 이런 중도주의 연합의 원형을 최근의 예에서 찾는다면 칠레의 국제혁명운동 그룹을 들 수 있다. 이 조직은 카스트로 노선을 추종하는데 루이스 비탈레가 주도하던 통합서기국 조직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1965년에 출범했다. 제 4 인터내셔널, 트로츠키주의, 연속혁명, 기형적/퇴보적 노동자국가 등 모든 "이름들"은 던져버리고 공산당의 왼쪽에 해당하는 모호한 강령에 기초하여 조직된 이 그룹을 통합서기국 기관지 [세계 전망]지(1965년 9월 17일)는 "칠레에서 탄생한 조직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맑스-레닌주의 정당..."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2년이 채 되지 않아서 국제혁명운동 그룹 지도부는 비탈레와 다른 최고 지도자들을 포함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모두 체계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숙청된 비탈레를 포함하여 만델의 유럽 조직들은 자신들이 건설한 중도주의 조직에게 계속 아양을 떨었다. 그리고 통합서기국 다수파가 칠레 인민연합에 실질적으로 "비판적 지지"를 보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국제혁명운동 그룹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만델의 프랑스 조직인 혁명적공산주의동맹의 남미위원회는 위에 인용한 통합서기국의 1971년 12월 결의문에 대해 항의했다. "연속혁명의 문제에서 완벽히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으며 "트로츠키주의 노선의 영향"을 받은 국제혁명운동 그룹을 이 결의문이 온건하게 비판했다는 것이 이 항의의 내용이었다(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 국제토론집], 1973년 2월). 이들은 칠레의 자매 조직이 국제혁명운동 그룹보다 더 형편없다고 비판하면서 자기 동지들의 곤궁함을 버려둔 채 카스트로주의 조직인 국제혁명운동 그룹을 위해 빈번하게 대규모 자금을 모금해주었다!

그러나 만델이 꿈꾸고 있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좌익 조직의 고전적인 예는 스페인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었다. 안드레스 닌의 공산주의좌익과 요아힘 마우린의 노동자농민동맹이 1935년 통합하여 수립된 이 정당 역시 이름들을 전부 버리고 소련의 사회성격, 인민전선 그리고 기타 핵심적 문제들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배신자 닌과 모든 정치적 관계를 끊었으며 제 4 인터내셔널 내부에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나 이와 유사하게 혁명을 가로막는 중도주의 조직들에 대해 동조하는 분자들에 대해 부단히 경계하며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정치적으로 동요하는 이런 종류의 잡탕조직이 스페인의 노동자 혁명에 최악의 적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만델의 기회주의적 "재편"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경우 그 결과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재앙과 똑같을 것이다.

 

객관주의와 투항자들

지난 2년간 유럽 좌익운동의 주요한 변화는 유럽식공산주의(유로콤) 경향의 등장이다. 언제나 새로운 유행을 추종하는 만델은 유럽식공산주의를 통해 산티아고 까리요 같은 골수 스탈린주의 하수인들이 레닌주의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늙은 두더지]지와의 제 2부 대담에서 만델은 유럽식공산주의의 등장이 가지고 있는 "긍정적 부정적 측면들" 사이의 모순을 이렇게 표현한다:

"공산당의 지도적 동지들 특히 노동자 중핵들은 이 모순을 해결해야한다. 이들은 혁명적 맑스주의의 길로 복귀하는 것을 통해 이 모순을 긍정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나는 희망하고 믿는다.

유럽식공산주의의 목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이 운동은 하여간 자신의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어쩌면 사민주의가 공산당을 다시 흡수하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것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운동은 새로운 스탈린주의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또한 당의 노동자 중핵들이 혁명적 맑스주의인 레닌주의를 수용하는 쪽으로 나아갈지도 모른다."-- [늙은 두더지]지, 1976년 12월

  그의 주장은 1950년 파블로의 원래 주장과 똑같다. 공산당의 "지도적 동지들"을 혁명운동으로 구원해 낼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따라서 스탈린주의, 사민주의 그리고 모든 종류의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으로 건설된 독자적 트로츠키주의 정당과 진짜 제 4 인터내셔널은 다시 한 번 있으나 마나한 존재이며 조직적 술수를 통해 버려야 하는 "이름들"에 불과하다.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사람도 트로츠키주의 정당과 인터내셔널을 건설할 생각을 하지 않는 "트로츠키주의자"는 뭔가 문제가 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 질병의 이름은 파블로식 청산주의이며 만델은 이 질병을 가지고 다니는 가장 주요한 인간 중의 하나이다.

만델의 정치적 수정주의는 근본적으로 객관주의적인 자신의 경제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1950년대 초반에 그는 "계급 역관계가 반(反)자본주의 진영에게 유리하게 결정적으로 변화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통해 친소 공산당과 연합할 경우 공산당이 불가피하게 주도할 대중적 혁명운동의 지도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만델은 생각했다. 동시에 그는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었다: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복귀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이제 불가능하다"("스탈린주의의 쇠퇴와 멸망", 파블로 일당의 "제 5차 세계대회"에 제출된 결의문, [제 4 인터내셔널]지, 1957년 12월).

이 객관주의는 1960년대 중반에는 자본주의가 "1929년과 같은 새로운 공황을 다시는 겪지 않을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으로 나타났다([현대]지, 1964년 8월-9월). 따라서 "신자본주의"에서 이행 강령은 "반자본주의 구조 개혁"이라는 허접 쓰레기로 모습이 바뀌었다. 이 객관주의는 그의 전망의 핵심 부분이다. 그의 저서 [맑스주의 경제학 개론]의 첫 문장은 이렇게 주장한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문명의 모든 일보 전진은 노동생산성의 증대로 가능했다." 이 주장과 똑같이 명료하게 언명하는 [공산당 선언]과 그의 주장을 비교해보자: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중국 혁명의 영형을 받아 만델이 1953년 1월 장-폴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정치경제학적 객관주의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어느 시기의 성격은 대중운동의 지도부가 아니라 이 운동의 규모에 의해 결정된다....전 세계에 걸쳐 대중운동의 참여자 수, 폭력, 규모가 지금만큼 상당했던 시기는 자본주의 역사에서 있어본 적이 없다. 바로 이 때문에 지금 시기는 뚜렷한 혁명기이다.

...세계적 규모에서 계급역관계는 자본주의에게 갈수록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혁명의 긴 전진]

만델의 "장기 파동"이론은 부하린의 제국주의 "시기들"이론을 좀 더 일반화시킨 버전이다. 이런 점에서 만델과 부하린의 경제적 객관주의는 유사성이 있다고 다른 곳에서 우리는 지적해왔다. 1928년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강령 초안을 작성할 때 부하린은 자본주의의 마지막 위기라는 "제 3기"를 전제로 깔고 펜대를 놀렸다. 이때 그를 비판하기 위해 트로츠키가 논쟁적인 글을 발표했는데 이 글은 동시에 만델의 객관주의적 대중추수주의를 철저히 논박하고 있다:

"객관적 전제조건들이 성숙하자마자 역사 과정 전체의 열쇠는 주관적 요인 즉 당의 손에 들어간다. 지난 시대에 영감을 받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번창하는 기회주의는 언제나 주관적 요인 즉 당과 혁명 지도부의 역할을 과소평가한다. 1923년 10월의 독일 혁명, 영러노동조합위원회, 중국 혁명 등의 교훈에 대해 토론하는 과정에서 이 점은 완벽히 드러났다. 이 역사적 사건들과 이들보다 중요성이 덜한 사건들에서 기회주의 경향은 오직 '대중'에게만 의지하면서 혁명 지도부 '최고층'의 문제를 완전히 경멸했다. 일반적으로 오류인 이러한 태도는 제국주의 시대에는 대단히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레닌 사후의 제 3 인터내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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