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 인권운동가이자, 급진 언론인

무미아 아부-자말 방어 운동

<차례>

1. 무미아 아부-자말의 목숨이 위태롭다. 치료 소홀로 인한 사형집행을 중단하라! 무미아를 석방하라! (2015년 4월 10일)

2. 무미아 아부-자말을 석방하라! (무미아 사건 요약) (2012년)

3. 노동자, 무미아의 석방을 위해 싸우다! 인종차별적 사형 선고를 철회하라! (1999년)

4. 무미아, 존 브라운 훈장을 받다 (1999년)

5. 자료 링크 (무미아 아부-자말의 Prison Radio와 IBT 글모음)

 

1. 무미아 아부-자말의 목숨이 위태롭다

치료 소홀로 인한 사형집행을 중단하라! 무미아를 석방하라!

 

3월 30일 월요일 무미아 아부-자말이 심각한 당뇨 쇼크로 쓰러졌고 감옥의 부속병원인 스쿨킬 메디컬센터 중환자실로 이송되었다. 그의 상태는 심각했지만, 단 이틀 만에 펜실베니아 마하노이 교도소 내의 의료시설로 되돌아왔다. 무미아에 관한 가장 최근의 보고와 사진들은 그가 여전히 위독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심각한 체중감소, 휠체어 의존, 당뇨와 습진으로 인한 통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가까운 친구, 가족 그리고 지지자들과 접촉해왔지만, 무미아는 지금 적절한 영양공급과 외부 진료를 거절당하고 있다.

무미아는 인종주의 조작으로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범죄 누명을 쓰고 30년 이상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굴하지 않고 침묵하기를 거부하며 버텨왔다. 무미아를 당장 석방하라!

All Out for Mumia on Friday, 10 April:

Detroit: 4pm, Spirit of Detroit Statue, 2 Woodward Avenue

Los Angeles: 4pm, Downtown Los Angeles Federal Building

Milwaukee: 4pm, US Federal Courthouse

New York: 5pm, 125th St & Adam Clayton Powell Blvd

Oakland: 4pm, Oakland Federal Building, 1301 Clay Street

Philadelphia: 4pm, Love Park, 1599 John F. Kennedy Blvd

Washington, D.C.: 12pm, Freedom Plaza, 14th St. NW and Pennsylvania Ave

 

Write, call and email to protest the treatment of Mumia:

John E. Wetzel, PA Secretary of Corrections

1920 Technology Parkway

Mechanicsburg, PA 17050

(717) 728-4109

Email: ra-crpadocsecretary@pa.gov

John Kerestes, Superintendent

SCI Mahanoy

301 Morea Road

Frackville, PA 17932

(570) 773-2158

10 April 2015
Mumia Abu-Jamal’s Life in Danger

No to Execution by Medical Neglect! Free Mumia!

 

 

2. 무미아 아부-자말을 석방하라!

 

무미아 아부-자말은 전 검은표범당원이자 정치 평론가이다. 1981년 겨울, 펜실베니아에서 경찰관 다니엘 포크너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형수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시 관리들의 부패와 그가 지지한 MOVE 조직에 대한 경찰 공격을 폭로한 언론인으로서의 활동과 그의 정치적 과거가 이 누명을 뒤집어 쓴 이유였다. 검은표범당원으로서의 과거 행적이 그가 사형선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배심원들에게 불법적으로 제출되었을 때, 그 재판의 성격은 분명해졌다. 그는 미국 감옥에 갇힌 대단히 기이한 비율로 많은 흑인 수감자와 흑인 사형수라는 통계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무미아는 단순히 통계 숫자 중 하나가 되길 거부했다. 그는 그 감방 안에서 지속적으로 쓰고 방송해왔다. 그를 감옥에 가둔 체제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이 그 글과 방송에 담겨 있다. 이로 인해 그는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정치범이 되었다.

구체적인 누명 씌우기 방식은 복잡하다(The Case of Mumia Abu-Jamal을 볼 것). 거짓 자백과 강요된 목격자, 엉터리 탄도학, 배심원 조작과 인종주의 판사 등의 종합으로, 무미아는 30년 동안 그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 혐의로 철창에 갇혀 있다. 반복되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원은 무미아에게 유리한 증거 검토를 외면해왔다. 자신이 포크너를 죽였다는 어떤 남자의 자백까지 포함하여.

아놀드 비벌리는 자신이, 포크너가 그들의 근무 외 활동을 일러바친다고 믿는 부패한 경찰들이 포크너 살해를 위해 고용한 두 명 가운데 한 명이라는, 증인선서에 서명했다. 이 선서는 그 당시 필라델피아 경찰 부패 기록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리고 왜 주정부가 죄를 들씌울 사람이 필요했는지를 설명한다. 그들은 편리하게도 그 잘못된 거리 잘못된 시간에 무미아를 발견했다. 법정은 이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지 않았다. ‘법과 질서’의 국가 수호자들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이 문제는 다루기 너무 뜨거운 문제이다.

2011년 12월 7일, 그의 체포와 투옥 30 주년 이틀 전에, 무미아에게 내려졌던 사형선고는 마침내 철회되었다. 필라델피아 지방법원의 세쓰 윌리암스는 그는 무미아 사형집행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목소리’는 이제 더 이상 사형수 대열에 있지 않고 감형 없는 종신형을 언도 받고 펜실베니아 프랙빌의 SCI 마호니 교도소의 일반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무미아의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은, 독극물 주입을 통한 사형집행에서 감옥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는 형벌로 감형되었다고,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 무미아는 인종주의 부정의의 희생자들과 모든 피억압 인민을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재판 받고 선고 받고 감옥에 갇혀 있다. 그와 연대를 지속하는 것은 우리의 기본 의무이다. “한 사람에 대한 가해는 모든 이에 대한 가해이다.”

http://www.bolshevik.org/mumia/

 

 

3. 노동자, 무미아의 석방을 위해 싸우다!

인종차별적 사형 선고를 철회하라!

 

4월 22일로 전 검은표범단원이자 급진적 언론인 무미아 아부 자말이 누명을 쓰고 사형 선고를 받은 지 17년이 되었다. 그 사형선고는 이 유창한 비판자의 입을 막고 싶어하는 잔인한 인종 차별 체제에 의해서였다. 무미아의 글들은 억압 받는 사람들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하였으며, 그에겐 ‘말하지 못하는 자들의 목소리’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그는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사형 수감자이다.

무미아의 생일인 4월 24일에 수십 만 명의 사람들이 전세계에서 그를 방어하기 위해 움직일 예정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에 대한 가해는 모두에 대한 가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노동자, 소수자 그리고 피억압 인민 모두는 억압에 저항했다는 이유만으로 공격 받는 이들을 방어 하는 데에 공통의 이해를 느끼고 있다. 미 서해안 지역에선 무미아 사건이 주류 언론의 조명을 받고 있으며, 특히 이 지역 사람들을 포함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이 무미아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노동조합 투사들은 무미아의 주장을 알리기 위한 몇몇 투쟁을 주도하면서 이 투쟁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토요일엔 많은 화물이 하역되지만, 이번 주는 그렇지 않다. 서부해안항만노조(ILWU)가 무미아연대 투쟁의 일환으로 4월 24일로 넘어가는 순간 샌디에이고부터 벨링험까지 모든 항구의 ‘작업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26일 ILWU 항만지부 회의에 참석한 대표자들이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다. 회의는 또한 그 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무미아 시위에 ILWU 회원들이 참석한다는 안을 투표로 결정하였다. 미국 노동계급의 상당 부분이 참여하는 이와 같은 행동들은 4월 24일 데모의 영향력을 크게 높여줄 것이다.

지난 1월에는, 캘리포니아 오클랜드의 한 교원노조(OEA) 조합원들이 자본주의 언론, 경찰, 시장, 학교 관리자, 그리고 자신들의 노조위원장의 입장을 거역하며, 학교에서 무미아 사건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사건은 많은 지역 언론이 다뤘는데, 이것은 이 사건이 오클랜드의 주 구성원인 흑인 주민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증명하며, 그렇기 때문에 OEA 관료들과 학교 관리자들이 이에 대해 어떤 제재도 취하지 못한 것이다.

브라질 리우 데 자네이루의 교사들도 4월 23일 한 시간 파업을 선언했는데, 그 이유는 “무미아 아부-자말의 상황을 전세계에서 여러 양태로 일어나고 있는 인종주의 반대 투쟁과 결합시키기 위해서”였다. 브라질, 프랑스, 이탈리아, 뉴질랜드, 남아공 등 세계에 있는 많은 국제 노동 단체들 또한 무미아의 자유를 위한 운동에 동참했다.

무미아 스스로는, 다양한 종류의 노동투쟁에 대한 지지를 표명해왔다. 1998년 그는, 영국 리버풀에서 파업에 돌입한 항만노동자들과 연대했다는 이유로 사용자들이 가하는 법적 공격에 맞선 ILWU 노동자들의 투쟁이 정당하다는 견해를 개진했다. 무미아가 ABC-TV의 인기 프로그램 20/20의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은 더 최근의 사례이다. 그는 파업 중인 카메라맨과 기술자들을 지지했고, 파업 동참자와는 대화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것이다. ILWU 기관지 디스패처(DIspatcher)와의 인터뷰에서, 무미아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고민했습니다. ‘내가 거짓 자유 속에서, 촬영장 안으로 걸어들어가기 위해 피켓 라인[파업방어선]을 넘을 것인가?’ 대답은 자명했죠. ‘그럴 수 없다’. 내가 지금 이런 상태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NABET(The National Association of Broadcast Employees and Technicians: 방송노동자기술자전국연합) 사람들과 아주 가까운 친밀감을 느꼈고, 그것이 그들과 저의 연대를 보여주고 극적으로 만들 중요한 기회라고 여겼죠.”

경찰의 악질적 도발

무미아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지지를 넓혀가고 있지만, 반대 세력 또한 부상하고 있다. 특히 필라델피아에서 그렇다. 지난 4월 13일, 필라델피아의 ‘무미아를 지지하는 수백만’ 시위의 조직자들은, 에드 렌델 시장과 필라델피아 경찰청의 4월 24일 시위 훼방 계획을 포착했다고 밝혔다. 시 당국은 약 500명 가량만이 시청 앞 ‘기념 행사’와 대중 행진에 참석할 수 있다고 결정했다는 것이다. 동시에, 무미아에게 살해 혐의를 씌운 고(故) 대니엘 포크너 경관의 ‘추모 행사’를 위해 도시의 주요 도로 몇 개를 봉쇄하겠다는 것이다.

‘무미아를 지지하는 수백만’ 시위의 조직자들은 이 같은 결정을 비난했으며, 공식적인 허가가 있든 없든 행진을 하겠다고 밝혔다. ‘무미아 아부-자말의 안녕을 걱정하는 세계 가족과 친구들’의 팜 아프리카는 이 결정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이 인종차별적 시 행정부는 수십 만 명의 사람들로 하여금 이 곳에 와서 한 무고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도록 강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휴가 나온 게 아닙니다. 그들이 우리가 이런 입장에 서도록 만든 거죠.”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분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 거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이미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수천 명의 무미아 지지자들이 우리의 제안에 따라 수도 없이 행진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필라델피아,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 일어나는 시위들은 국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 투쟁 물결은 1995년 펜실베니아 주지사 톰 리지가 무미아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8월 17일에 집행을 결정했을 때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 항의 목소리들 때문에 펜실베니아 주정부는 예정 집행일 10일 전에 사형집행을 보류하였다.

무미아는 다시 한 번 사형 집행에 임박해 있다. 그는 조만간 미국 고등법원에 그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서류를 제출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무미아는 필라델피아 지방법원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방법원은 해당 사건에 새로운 증거가 제출되는 것에는 개의치 않고 판결을 내리게 될 것이다. 상소 제도는 거의 효력이 없으며, 아직도 주지사로 남아 있는 톰 리지는 여느 때처럼 무미아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싶어한다.

아 아부-자말은 누구이며, 지배계급은 왜 그를 미워하는가?

무미아는, 1954년 4월 24일 필라델피아에서 출생했으며, 십대 때 정치 행동을 시작했다. 15세 때, 그는 검은표범당(Black Panther Party) 필라델피아 지부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검은표범당이 파괴된 이후, ‘인민의 역사(history from below)’에 주목하는 라디오 기자가 되어 자본주의의 부당함을 역설하였다. 무미아는 잔인한 경찰의 공공연한 적이었다. 또한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라스타파리 운동[아프리카 기독교 종파 중 하나]에 영감을 받은 MOVE 집단의, 경찰의 괴롭힘에 맞선 운동을 옹호했다. (이 운동은 1985년 필라델피아와 연방 경찰이 MOVE 건물을 방화하고 11명의 사망자를 냈을 때 절정에 달했다).

1981년 12월 9일, 오전 4시 조금 못 미친 시각, 부업으로 택시 운전을 하던 무미아는 한 경관이 그의 형제를 폭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차를 멈추고 곧장 달려갔다.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소 불분명한데, 주 정부의 왜곡된 증거와 협박 받은 증인들 때문이었다. 분명한 것은, 대니엘 포크너 경관이 총에 맞았다는 것과 포크너의 총에서 발사된 총알이 무미아의 간을 뚫고 척추까지 들어가 그를 중태에 빠뜨렸다는 것이다.

이 때부터 경찰의 조사와 법원의 재판 절차는 명백히 무미아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데에 그 목적이 맞춰졌다. 실제 증거와는 상관 없이 말이다. 경찰은 사건 현장에서 탄도 실험을 통해 무미아의 이름으로 등록된 권총에서 총알이 발사된 적이 있는지를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발포 당일 밤에 인근에 있었던 다른 용의자들은 손에 발포 잔여물이 있는지를 조사 받았지만, 무이아는 그런 테스트를 받지 못했다. 검시관은 포크너를 죽음으로 이끈 총알이 44구경이라고 했지만 무미아의 권총은 38구경이었다. 경찰의 시체에서 나온 총알 파편 두 개 중 하나는 주 정부에 의해 ‘바꿔치기’ 당했다. 검사 측에게 유리한 증언을 한 증인들 중 많은 이들이 발언을 철회했고, 무미아를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하라는 압력을 경찰로부터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무미아가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더할 나위 없이 명백하다. 심지어 애초부터 인종차별적 성격을 가진 사법체제의 기준으로 볼 때에도 그렇다. 증거와 증인들의 증언으로 봤을 때, 무미아가 경찰에 의해 누명을 쓰게 된 희생자라는 것 역시 자명하다. 그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던 증인들은 소환되지 않았으며, 그의 무죄를 입증할 증거들은 제출되지 않았다. 무미아의 변호사(능력이 부족한 공공변호인[국선변호인]으로 후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함)는 재판 준비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증인도 취조하지 않았다. 변호측은 병리학자나 탄도학 전문가를 섭외할 지원도 받지 못했다. 흑인 배심원은 배심원단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고, 거짓 ‘선서’가 이루어졌다.

첫 재판의 검사 조지프 맥길은 재판 절차에서 무미아의 권리를 총 두 번 침해했다. 하나는 그가 검은표범당의 당원이라는 사실을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것이고, 또 하나는 배심원단에게 (당시의) 펜실베니아에서는 사형수에 대한 사형이 집행되고 있지 않으므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데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첫 항소에서 무미아 반대편에 섰던 변호사 론 캐스틸은 이제 주 고등법원에 있으며, 최근(1998년 10월) 새로운 항소를 기각했다.

1982년 알버트 새보 판사는, 경찰공제조합의 평생 지지자였고, 1995년 무미아의 유죄 판결 후 구제 공청회를 담당했다. 새보는 교수형을 좋아하는 판사로도 알려져 있는데, 미국의 어느 판사보다도 사형 선고를 많이 내린 것으로 유명하다. 새보에게 사형 판결을 받은 피고들은 두 건만 제외하고 모두 소수자였다. 새보는 재판 절차 내내 피고와 변호인단을 선입견을 가지고 대해왔다.

자본주의와 인종주의

무미아 아부-자말에 대한 보복적 기소는, 인종적 억압과 정치적 탄압이라는, 미국 자유시장 체제 두 개의 토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종주의는 자본주의 구성 요소의 하나로, 미국 노예제의 산물이다. 미국 흑인들은 역사적으로, 가장 낮은 급여를 받고 가장 더러운 직업에 내몰렸으며 ‘산업 예비군’으로 분리 차별되었다. 흑인에 대한 대대적 착취는 그들의 임금을 낮추었으며 백인우월주의는 백인 노동자로 하여금 계급의식을 자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미국 내전[남북전쟁] 이후 미국 자본주의는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고, 그 배후에는 언제라도 이용 가능한, 수천 만 명의 흑인 산업 예비군이 있었다. 그들은 노예제로부터 이어진 인종적 열등 사상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차별을 받아야 했고, 따라서 미국 역사의 ‘특정한’ 면들이, 흑인을 사회 밑바닥에 강제로 분리시키려는 카스트 제도를 만들기 위한 자본주의의 ‘일반적’ 필요와 결합되었다.―「흑인 해방과 계급투쟁」, <1917> No.8, 1990

미국 사회의 인종주의 제도화는 사법체제 속에서 더 빛이 난다. 미국에서 감옥은 성장 산업이 되었고, 15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는데, 그 중 대부분이 흑인과 빈곤층이다. 미국 형사법 체제의 정점에는 사형제도가 있다. 이 경우에도 희생자는 대부분 흑인이다. 최근 재판부는 전통적으로 있었던 ‘구속적부심(habeas corpus)’의 권위를 약화하고 죽음 기계의 속도를 올리고 있다.

미국의 정치 탄압: 헤이마켓부터 무미아까지

무미아 아부-자말은 사법적 인종주의의 단순한 희생양 그 이상이다. 그는 정치견해 때문에 재판 받고 기소 당한 것이다. 미국 지배계급은 미국 사법체제의 정치적 성격은 감추려 하면서, 다른 나라 지배자들이 정적 제거 수단으로 사형 제도를 이용할 때 그들을 ‘인권 침해자’라고 비난한다. 일반적으로, 미국 지배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가장 효과적이고 저비용의 정부 형태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자본가들은 그들의 지배에 심각한 위험이 되지 않는 한, 부르주아 선거제가 제공하는 안전장치를 선호한다. 민주적 권리의 존재 또한 합의에 기초한 지배 라는 이런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부와 권력을 가진 미국 부르주아지들은 주기적으로, 개인 저항자들을 세간의 이목을 끄는 법정에 세워왔다. 1887년, 8시간 노동권을 보장 받기 위해서 투쟁하다 교수당한 헤이마켓 사건의 순교자들로부터, 살인 누명을 쓰고 1927년 전기의자에서 생을 마감한 두 명의 아나키스트 사코와 반제티로, 그리고 매카시의 마녀사냥이 한창이던 1953년 사법 살인을 당한 줄리어스 로젠버그와 에셀 로젠버그로까지 그 기록은 이어진다.

사형제도가 없는 부유한 제국주의 국가에서조차, 국가는 생사여탈권을 휘두른다. 자살자를 포함하여, 수감 중 사망자는 흔한 일이며 발포 ‘사고’나 경찰 폭력으로 죽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경찰들이 자본주의 국가의 최전선에 있다. 그들의 주요 역할은 사유재산과 그 소유자들을 지키는 것이고 때때로 그것은 현재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사상적 위험이 된다고 판단되는 이들에 대한 억압을 의미한다.

사회정의를 쟁취하기 위해, 노동자들과 피억압자들은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억압자들에 대항하여 ‘사형에 맞선’ 무미아 아부-자말의 지속적 투쟁은 용감한 저항정신을 보여줬고, 이는 수만 명의 젊은 투사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무미아 사건은 인종차별적 탄압과 국가의 억압적 기능이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IBT의 무미아 방어 운동

국제볼셰비키그룹(IBT)은 무미아의 자유를 위한 싸움에 동참한 여러 단체 중 하나이다. 우리의 자원이 허락하는 한, 우리는 무미아의 자유를 위한 지지를 넓히고 투쟁에 새로운 인자를 끌어들이기 위한 공동전선 구축에 노력했다. 공동 행동의 틀 안에서, 우리는 이 투쟁의 교훈과 필요한 정치적 과제에 대한 우리 견해를 주장할 것이다.

토론토에선, 펜실베니아 고등법원이 새로운 재판을 위한 그의 상소를 기각한 이후, 1998년 11월 14일, IBT 회원들이 다른 좌익 단체들과 더불어, 무미아 방어 시위에 참여했다. 약 150명이 ‘무미아 아부-자말을 석방하라! 인종 차별적 사형 선고를 철회하라!’라는 구호 아래 집회에 동참했다. IBT 외에 이 시위를 후원하고 발언을 한 단체들로는 반인종주의행동, MOVE의 친구들, 가난에 대항하는 온타리오 연합, 사회주의행동, 트로츠키주의연합(TL, 미국 스파르타쿠스그룹의 캐나다 연계 단체) 등이 있다.

위와 같은 단체들(더 이상 그 행사 조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표명한 TL을 제외하고)에는 국제사회주의자, 흑인행동방어위원회, 신민주주의청년당(캐나다의 대중사회민주주의청년정당), 그리고 4월 24일 시위를 조직하는 몇 개의 단체들이 가담했다.

영국에선, IBT 동지들이 아나키스트 동지 등과 함께 ‘무미아 아부-자말을 석방하라! 인종 차별적 사형 선고를 철회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무미아를 살리자!’라는 공동전선 구축에 중심 역할을 하고 있다. 1999년 초반 런던에 설립된 이 공동전선은, 많은 정치적 사건에 대한 유인물을 제작하고 4월 25일 ‘무미아를 위한 저녁’의 연설, 연극, 음악 등 일련의 행동을 조직하면서 국제적 물결에 동참하여 무미아 사건을 널리 알리고 있다. 이 운동 지지자들에는 리버풀 항만노동자연맹, 노동당 좌파 의원인 제레미 코빈, (형제 윈스톤이 인종차별주의자 경찰에 의해서 부당하게 수감된) 조지 실콧 등과, 노동자자유동맹, 아나키스트흑십자단, 아나키스트공산주의연방, 영국공산당, 사회주의노동당(해크니 지부) 등 좌익 단체가 있다. 이 연합체는 공공부문노동조합 UNISON의 지부와 상점노동자들로부터 지원을 받는 한편, 철도, 해양, 운송연합 및 전국언론인조합으로부터도 지원 받았다.

뉴질랜드의 우리 동지들은 ‘무미아 아부-자말의 자유를 위한 위원회’를 웰링턴에서 발족했고, 이 단체는 다른 단체 좌파와 아나키스트들이 함께 한다. 1998년 11월 28일 토요일 즉,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운동과 발맞추어, 위원회는 ‘무미아 아부-자말을 석방하라!’라는 구호 아래 집회를 열었다. 웰링턴 시위는 노동조합연합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약 50명의 참가자를 모았다. 위원회는 오는 4월 24일 국제 시위에 맞추어 무미아 시위를 조직하고 있다.

뉴욕 앨버니의 동지들은 지역 노동조합원들과 결탁하여 무미아 사건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하였고, 그 성명서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헤이마켓 순교자들과 러들로 대학살, 조 힐과 빅 빌 헤이우드, 사코와 반제티, 그리고, 더 최근의 경우로는, PATCO, 디케이터 분쟁 지대, 디트로이트 신문사 점거파업 운동은, 무미아 아부-자말의 즉각 석방을 요구한다.”

이 운동은 앨버니 지역 우편노동조합 및 뉴욕 주의 모든 대학원생을 대표하는 조합과 앨버니의 교수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었다.

노동의 힘

샌프란시스코에서 IBT 동지들은 ‘무미아 아부-자말의 자유를 위한 노동자 행동위원회(LAC)’에 참여하고 있다. 이는 지난 2월에 ILWU 그리고 다른 조합 활동가들과 무미아 아부-자말 석방운동을 위한 ‘노동자 교육과 노동행동 촉진’을 위해 조직되었다. LAC의 주요 활동가 잭 헤이먼은, ILWU 제10지부 지부장이며 4월 24일 파업 운동을 처음 추진한 것도 그였다.

ILWU의 시위는 오클랜드와 리우 데 자네이루의 교직원조합의 행동과 마찬가지로, 무미아 방어와 사형 반대 운동이 큰 진전을 이뤘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들은 노동 운동 그 자체로서도 중요하다. 관료들과 보수적 지도자들은 그들 자신의 눈 앞의 이익과 무관한 모든 행동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해운조합과 교직원 조합의 몇 지부를 통해 표현된, 그들의 이익과 무미아를 위한 정의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은, 무엇보다도 가장 환영 받을 만한 진전이다.

무미아의 자유를 위한 싸움은 모든 좌익 진영과 모든 노동조합, 그리고 사회 정의를 위해 투쟁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주 중대한 문제이다. 오직 대중 시위를 통해서, 필라델피아 경찰과 법원이 그에게 씌운 추잡스러운 누명을 폭로해야만 무미아를 구할 수 있다. 무미아 사건으로 드러난 인종주의적 부정의를 뿌리째 뽑으려는 이 투쟁은 노동운동 내에서 노동자와 피억압 인민을 착취자들을 몰수하는 투쟁으로 이끄는 지도력의 건설이 필요하다.

1999, Labor: Fight to Free Mumia!, <1917> No. 21:

 

4. 무미아, 존 브라운 훈장을 받다

다음은 199년 2월 26일 뉴욕 시청에 모인 1500명 이상의 사람들 앞에서 래리 로렌스가 무미아 아부­자말을 대변하여 존 브라운 협회의 황금 훈장에 대해 팸 아프리카에게 소개하며 한 말이다.

우리 존 브라운 협회는 이 모임을 주최한 분들에게, 무미아 아부­자말의 신념과 용기에 경의를 표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황금 훈장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정의라는 성스러운 목적을 위해 고통 받고 희생된 이들에게만 수여됩니다. 우리는 학대 받는 노예들을 구제한 19세기의 가장 위대한 영웅의 이름으로, 존 브라운[John Brown (1800~1859) 무장투쟁만이 미국 노예제를 타도할 유일한 방법임을 주장하고 실천한 백인 노예제폐지론자]이 캔자스와 하퍼스 페리에서 보여준 그 위대하고 강인한 면모를 오늘까지 이어온 투사들을 기립니다. 존 브라운은 인종 평등이라는 등불을 높이 들어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의 사회정의를 위한 혁명 투사들이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이라고 여기며, 그들에게 우리의 모든 사랑과 존경을 표하는 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두 주요 정당에 속한 자본주의 정치가들에게는 훈장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점도 밝히고 싶군요. 그들의 정치 경력이란 건 자기 배를 불리기 위한 부패의 경력에 불과하고 그들이 하는 일이라는 건 미국이라는 잔인한 전쟁기계의 부품이 되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는 무엇보다도 낭만주의자들이자 꿈꾸는 이들입니다. 좌익에게 있어 논쟁과 비판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만, 시와 고전적인 수사법 또한 필요합니다. 우리는 19세기로 돌아가 윌리엄 로이드 개리슨, 웬델 필리스, 프레더릭 더글라스와 같은 인물에게 배움으로써 사회평등의 대의를 한 단계 더 높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투사이자 서정적인 대중 연설가였습니다. 웬델 필리스는 우리에게 “단조로운 삶에서 벗어나 위대한 대의를 위한 자기희생에 나서기 이전까지, 사람들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라는 것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레온 트로츠키는 다른 표현으로 우리 시대의 혁명 투사들을 기렸습니다. 1938년 그는 인간 최상의 행복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낳은 미래를 건설하는 데에 참여하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인류 운명의 한 부분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는 의식”을 가졌을 때,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무미아는 감옥 속에서, 우리들 한 명 한 명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있고, 우리들은 그 위에서 인류의 드넓은 미래 즉, 보편적 형제애와 정의가 있는 미래를 바라봅니다. 우리는 그에게 자유를 되찾아줘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우리에게 돌아오고,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싸움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존 브라운의 정신이 그가 지고 있는 가혹한 무게를 가벼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무미아에게, ‘당신이야말로 존 브라운의 정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무미아 아부­자말에게 존 브라운 협회의 황금 훈장을 수여하게 된 걸 제 일생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1999, Mumia Awarded John Brown Medal, <1917> No. 21:

 

5. 자료 링크

Prison Radio

무미아 아부-자말에 대한 IBT 문서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