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1950년대 미국노동운동 속에서의 혁명활동

당당한 혁명조직이었던 1973년, <스파르타쿠스동맹>의 기관지 <노동자전위( Workers Vanguard)에 4차례에 걸쳐 실렸던, 미국 트로츠키주의 혁명가 크리스 녹스(Chris Knox)의 논문이다.

<차례>

권력을 위한 강령 : 초창기 공산주의자의 노동조합 활동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 1부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 2부: 1934년 미니애폴리스 총파업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 3부: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 4부: 스탈린주의와 사회애국주의

[초록색 ]……역주

권력을 위한 강령 : 초창기 공산주의자의 노동조합 활동

 

기회주의자들은, 온전한 이행강령만이 노동조합 관료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적절하게 인도할 수 있다는 우리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cist League)의 주장을 “종파주의”라고 비난한다. 예를 들어,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 노동자동맹(Workers League: WL)은 4월 16일자 그들의 회보 1면에서 격앙된 어조로 스파르타쿠스동맹을 비난하였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기본적으로 자동차 산업에서의 투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임금, 생산라인 속도, 고용보장, 애로사항과 파업권에 관한 것들은 모두 조합주의적 요구들이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동맹에 따르면, 맑스주의자는 이런 ‘개량주의적’ 요구를 관철시키는 대신에 혁명을 추구한다. 따라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공산주의’가 기본적인 요구로 제기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린다! 그 외의 것들은 이 과격한 소리를 늘어놓기를 좋아하는 자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우리 입장에 대한 이 역겨운 왜곡은 노동자동맹(WL)의 노동조합 노선을 수행할 최근 조직인 <노동자정당을 위한 노동조합동맹(TUALP)>의 자동차산업 강령 방어의 일환인 듯하다. 이 강령은 임금, 고용보장, 라인 속도, 애로사항, 노동권, 초과근무, 연금, 보건, 안전과 휴가에 관한 것으로만 구성되었다. 이것은 노동자정당을 언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종차별, 성차별, 보호무역, 전쟁 또는 권력 문제(노동자 통제와 노동자정부 슬로건)에 대하여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이 모든 것들을 말이다. 노동자동맹은 “단순한 조합주의적 요구”가 “완전히 혁명적”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동맹은 경제주의와 현 상태의 계급투쟁에 대한 숭배 즉, 노동자주의에 함몰된 오늘날 미국 좌익에 만연한 기회주의 가운데 하나이다.

1938년 제4인터내셔널 창립총회에서 채택된 트로츠키주의 『이행강령』은 트로츠키가 노동조합에 적용될 수 있는 강령으로 제출한 것이었다. 이 강령은 개량 요구에 대한 ‘반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일상적 노동조합 투쟁과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목표 사이에 가교를 놓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강령은 실업에 맞선 투쟁을 위한 임금/노동시간 연동제와 공장위원회, 산업과 은행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몰수, 소수자 차별과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투쟁,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노동계급 권력의 명확한 표현인 소비에트와 노동자정부 요구를 포함하고 있다.

개량주의 옹호자들

노동자동맹처럼 국제사회주의자(International Socialists: IS)도 이행강령에 동의한다고 주장하나, 스파르타쿠스동맹이 그것을 노동조합의 일상에 적용한다는 이유로 ‘종파주의’ 그리고 ‘혁명가인 척하는 태도’라고 비판한다. 노동자동맹은 격렬한 자본주의 공황을 근거로 조합주의적 요구가 ‘혁명적’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공황이 최소요구조차도 자본주의 하에서 실현될 수 없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IS는 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제주의를 방어한다. 이들에 따르면 계급투쟁이 최고조에 도달하고 나서야 온전한 이행강령이 “유의미해진다”. 서로 양립불가능한 두 입장들을 통해, 실천적으로 두 조직은 이행강령을 거부하는 동일한 입장에 도달한다! 소규모 조직인 스파크(Spark), 계급투쟁동맹(Class Struggle League),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등 다른 자칭 ‘트로츠키주의’ 경향들도 두 가지 입장에 나름의 각색을 곁들여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다.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트로츠키주의 유산을 완전히 거부하면서 페미니즘, 흑인 민족주의, 청년문화 등으로 향하는 씁쓸한 ‘이행’ 가교들을 발명해냈다. 물론 가장 중요한 부분인 노동조합에서의 활동은 무시하면서 말이다(혹은 노조 관료주의 거부를 회피하면서, 최소요구에 기초해서 그것을 수행하거나).

이행강령 실천의 포기는 제4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널에 의해 극복된 결함투성이 사상 즉, 옛 사회민주주의의 ‘최소’/‘최대’ 강령으로의 회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자는 일상적 문제를 위한 것이고, 후자는 일요일 ‘사회주의’ 연설용이다. 사민주의 노조관료들은 당의 ‘실제’ 활동에 최대강령이 침투하는 것을 조금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행강령이 ‘실제’ 실천에 적용되면, 오직 최소강령에 기초해야 하는 기회주의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 왜냐 하면 오늘날의 소위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이행강령은 ‘최대’ 강령의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천 속에서 이행강령을 반대하는, 허울뿐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모든 종류의 마오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 특히 공산당과 자신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산당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의 폭넓은 연합을 형성하는 전략(‘인민전선’)과 더불어 개량주의적 실천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오랜 세월 레닌과 트로츠키의 강령을 부정해왔다. 자동차산업 내 조합주의자, 관료적 출세주의자들의 조직인 통합전국회의(United National Caucus)는 공산당, IS, 계급투쟁동맹의 지지를 받는 전형적인 잡탕조직이었다. 심지어 조합주의에 전적으로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노동위원회전국회의(National Caucus of Labor Committees)조차도, 다른 조직적 형태로 같은 인민전선적, 자유주의적 정치를 추구하는 공산당 지지자들과 더불어 UNC 회의에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노동자동맹이 정치적으로 UNC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자동차산업 강령뿐만 아니라 ‘UNC가 임금을 위해 결사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다!’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들의 터무니없는 종파주의적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국제 공산주의 전략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트로츠키가 공식화한 이행강령뿐만이 아니라,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첫 4개 대회를 통해 형성되고 코민테른 지부들이 1923년까지의 혁명적 시기 동안 (오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수행한 [이행강령의 기초가 된] 그 이전 강령 위에 홀로 서 있다. 특히 미국노동자당(공산당)의 노동조합 부문조직인 노동조합교육연맹(TUEL)을 통한 노동조합 활동은, 오늘날에도 적용될 수 있는 노동조합 내 공산주의 활동의 좋은 사례이다.

모든 종류의 개량주의자들은 즉시 이렇게 고함지를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시대가 달랐다. 그때는 혁명이 노동대중에게 유행처럼 여겨졌다!’ 물론 시대가 다르긴 했다. 하지만 노동조합 속의 공산주의자들의 목표가 개량주의자들이 성급하게 단정짓는 것처럼 달라진 것은 아니다.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제3차 총회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 합중국에서, 공산주의 중핵을 형성하고 그것을 노동대중과 결합시키는 것이 단순하면서 최우선적인 공산주의자의 과제이다.”―「전술에 대한 테제」, 공산주의인터내셔널 제3차 세계 총회에서 채택된 테제와 결의들, 1921년 6월 22일~7월 12일

파업의 수위와 계급의식 일반이 높기는 했지만, 미국에서 전위당은 노동조합 내에서 노동계급의 신뢰와 지도력을 얻기 위하여 폭로하고 대체해야 할 반동적 관료에 직면한, 여전히 매우 작은 세력이었다.

물론 유럽당들 대부분이 미국지부보다 훨씬 커서 계급지도력에 더 근접해 있었지만, 코민테른의 전반적 상황은 미국과 비슷했다. 준비부족, 숙련된 활동가와 지도부의 부재 때문에, 공산당들은 1919~1920년 유럽과 미국에서 정점에 이른, 전후의 거대한 혁명의 파도를 이용할 수 없었다. 1920년에 레닌은, 혁명을 필연으로 여기고, 노동조합 활동을 반대하거나, 부분적 요구를 내거는 것을 ‘기회주의’로 간주하는 경향과 투쟁하기 위하여 『공산주의 ‘좌익’ 소아병』이라는 책을 썼다. 제2, 3차 총회(1920, 1921년)는 모든 무대와 모든 방법들을 투쟁에 활용하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대중들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엉터리 지도자들과 투쟁하기 위해서였다. 제4차 총회(1922년)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오직 공산당만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일상적 요구를 포함한 노동자들의 모든 이익을 위해 일관되게 투쟁하는 진정한 계급투사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하여, 사회민주당 및 기타 세력들과의 공동전선 전술을 호소하며 이를 위해 분투하였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이 노선을 여전히 기회주의로 간주하는 모든 ‘초좌익’과 결별할 준비를 하였다.

1922~23년 노동조합교육연맹 활동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에 호소한 ‘공동전선’ 전술을 미국에 적용한 것이었다. 혁명의 물결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고, 그 당시 공산당들은 노동계급에 대한 직접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므로 이 전술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노동자당(공산당)의 노동조합 활동은 ‘이중노조 노선(dual unionism)’ 즉, 지배적이면서 반동적인 미국노동총연맹(AFL) 내에서의 모든 활동을 거부하고 지하활동을 원칙으로 내세우면서, 결과적으로 부분적 요구와 대중운동과의 모든 접촉을 회피하는 노선을 추구한 초좌익들과의 분파투쟁에서 승리한 경험에 기초하여 수립되었다(초좌익주의자들은 1919-1920년의 기회를 날려버린 것에 막대한 책임이 있다).

노동조합교육연맹(TUEL)의 기원

TUEL이 단순히 노동자당(공산당)의 산물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1922년에 TUEL은 시카고의 윌리엄 Z. 포스터(William Z. Foster)의 조직과 통합하면서 공산당 조직이 되었다. 비록 이전 시기의 많은 좌익들이 열렬한 이중노조주의자였지만, 포스터는 그 전략이 무익하며 결과적으로는 반동적 지도부와의 지도부 쟁취를 둘러싼 싸움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포스터는 막대를 반대방향으로 지나치게 구부렸으며, 곰퍼스 관료집단으로 하여금 자신의 조직사업을 지지하도록 압력을 가하려고 자신의 정치강령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포스터가 조직한 철강 파업에 대한 상원청문회가 열렸을 때, 포스터는 자신의 모든 정치강령을 포기했으며, 열렬하게 자신의 애국심을 고백하고 전쟁공채 구입을 맹세하였다.

포스터의 입장에서, 노동자당(공산당)과의 통합은, 미국 공산주의자들의 입장에 완전히 반대되는, 레닌의 ‘내부공작’ 전술에 대한 그의 동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포스터는 TUEL을 계속해서 지도했고, 당의 노동조합 활동을 총지휘하게 되었다. 만약 이 시기 TUEL에서 어떤 오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종파주의가 아니라 기회주의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포스터의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편애 혹은 코민테른 공동전선 노선의 맹목적인 적용 때문에 말이다.

노동조합 활동에 오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양쪽[종파주의/기회주의]에 속하는 오류는 노동자당(공산당)에 없었다. 당의 지도 아래, TUEL은 코민테른 강령에 기초하여 1922년에 재탄생하였다. 비록 ‘대중 속으로’와 부분적 요구를 위한 투쟁에 대한 의지가 강조되었지만, 코민테른의 강령은 이행강령으로 이해되었다.

“개량주의자와 중도주의자의 최소강령 대신에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이 제출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의 구체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이행하기 위한 투쟁이다. 그들이 아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조차도 말이다…

“공산당은, 가장 광범한 대중의 필요에 기초한 부분적 요구가 대중을 투쟁으로 이끌어가는 것에 머물지 않고, 대중을 조직하는 요구가 될 수 있도록 유의해야 한다. 노동자대중의 경제적 곤궁으로부터 생겨나는 모든 구체적 슬로건은 생산통제를 향한 투쟁의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 경제를 승인하는 관료 조직의 슬로건이 아니라, 노동자평의회 및 혁명적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주의에 맞서 싸우는 조직의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전술에 대한 테제」, [강조는 원문의 필자]

TUEL은 대중운동을 지도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승인, 노동자정당 건설, 직능조합을 대중적 산업노동조합으로 통합하는 문제 등과 같은 중요한 개별 사안을 위해 노동조합 관료 분파와 공동전선을 체결하기도 했지만, 총체적 강령에서 출발하여, 모든 활동 속에서 그 강령을 선전하였다.

게다가, 오늘날의 거의 모든 현장조직이나 기회주의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과 기타 ‘혁명가들’의 지지를 받는 그것들과 달리, TUEL은 정치로 회원을 규정했다. 누군가가 여기에 가입하고자 한다면, 그는 기본적 강령에 전반적으로 동의해야만 했다. 그 강령은 포스터의 『미국 노동운동의 파산』(<레이버헤럴드> 라이브러리, 1922)에 서술되었으며, 8개 조항으로 요약되어 있다. 제1조는 “자본주의 철폐, 노동자 공화국 수립”이었다:

“노동조합교육연맹은 노동조합을 지금의 낡고 침체된 상태로부터, 자본에 맞선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현대적이고 강력한 노동자 조직으로 발전시킬 것을 제안한다. 만연해있는, 수치스럽고 혼란스러운, 자본과 노동의 이해의 조화에 관한 헛소리를 대변하는 대신에, 자본주의 철폐와 노동자공화국 수립이라는 감격스러운 목표를 선전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그들의 놀라운 이상주의와 에너지를 표현할 것이다.”

이것은 1938년 트로츠키 이행강령에서의 ‘노동자농민정부’ 요구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이행요구를 정식화한 것이다. 이 시기 코민테른과 그 지부의 강령 전반에 이행요구라는 개념이 드러나 있다. 분명 그것들은 트로츠키의 ‘발명품’이 아니었다!

TUEL 강령 제2조는 “계급협조주의 거부, 계급투쟁 정책”이다. 이것은 반동적인 AFL 관료주의를 전적으로 대체하는 전망이 함축된 요구이다.

제3조는 노동조합의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RILU) 가입을 위한 것이다. RILU는 1922년에 창립된 코민테른의 국제 노동조합 부문조직으로, 기존 노조 내부의 반대파들, 사민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기존의 노동조합연맹에서 제명된, 종종 러시아 혁명의 깃발에 이끌리는 혁명적 생디칼리스트들에 의해 지도되기도 하는 많은 노조를 위한 조직적 푯대를 제공했다.

제4조는 “러시아 혁명의 지지”이다. 물론 혁명은 세계의 모든 노동운동을 자국의 혁명을 원하는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분열시킨다. 하지만 TUEL이 지도하는 [소련의] 기근 원조, 외교적 승인 등을 위한 운동 속에서 이 요구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닌다.

제5조는 산별노조 요구이다. 이것은 비영어권 이주민의 압도적 다수를 포함하는 대다수 산업노동자들이 조직되지 않았을 때부터 중대한 노동조합 문제였다. 이 요구는 노동대중을 보수적이고 직능연합에 기초한 관료들과 대치시켰다.

제6조는 ‘이중노조주의에 대한 투쟁’이다. 이것은, 관료가 승리할 때마다 격분하여 [기존 노조 내에서의] 투쟁을 포기하고 이중노조 수립을 주장하는 세계산업노동자(IWW) 같은 급진주의자들의 영향력에 맞서 TUEL이 끊임없이 제기해야 했던 의제이다. 장기적으로 RILU에 가입할 것을 기대하며, 제명된 일부 노동조합 지부나 지회들도 기존의 노조에서 활동할 것을 TUEL은 주장했다. 그러나 TUEL과 RILU의 노동조합 단결 요구는 굴종적 ‘단결’이 절대 아니었다! RILU/TUEL은 제명된 노동조합 조직의 재가입을 추진하되, 그것이 그들이 지속적으로 계급투쟁 정책을 선전할 자유에 기초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관료적이고 배신적인 조건으로 뉴욕 사회서비스노조(SSEU)가 AFL-CIO에 재가입할 것을 지지하는 노동자동맹(WL)의 노동조합 개량주의와 날카롭게 대비된다.)

제7조는 현장대표체제 요구이다. 당시 노동조합에는 현장대표자가 부족했다. 마지막 제8조는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정치적 행동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즉시 노동자정당을 위한 요구로 변모했는데, 나중에는 노동자당(공산당) 지도부에 의해 농민-노동자당 캠페인으로 변질되었다.

강령에 기초한 연합

회원들이 활동하는 모든 조합과 월간지 레이버헤럴드(Labor Herald)에서 제기되는 총체적 강령에 기초한 회원들과 더불어 TUEL은 시작되었다. 또한 노동자당(공산당)의 개입과 더불어, TUEL은 시카고노동총연맹(CFL)의 피츠패트릭/너클스/브라운 지도부 같은 노동조합 관료분파와의 공동전선에 참여하면서 소련의 승인, 통합과 노동자정당과 같은 핵심적 요구들을 중심으로 광범한 캠페인을 수행하였다. TUEL이 만든 공동전선의 쟁점들은 노동대중을 관료들에 맞서 결집시킬 수 있는 TUEL 강령의 핵심 부분들이었다. 피츠패트릭의 농민-노동자당과의 연합을 제외하면, 이 요구들엔 정치적 타협이 없었다. 어떤 관료분파가 공산주의로 넘어오도록 강제하고, 대중운동에 공산주의 지도부를 세우기 위한 항목들이었다. (피츠패트릭을 미리 찾아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도 CFL의 승인을 얻은) 통합 캠페인을 실시한지 1년 뒤인 1923년 시카고 농민-노동자당 집회에서, 노동자당(공산당) 세력은 피츠패트릭의 그것을 극적으로 앞질렀다. 더군다나 공산주의자들이 연합을 만든 사안들은, 당의 동맹자들과 여타 노동조합 관료 사이에 깊은 정치적 심연을 만들며, 서로를 공고히하는 경향이 있었다. 승인, 통합, 노동자정당을 지지한 피츠패트릭은 AFL 관료들에 의해 돈줄이 끊겼으며, 곰퍼스에게 공산주의자의 ’앞잡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비판할 점이 하나 있다. 노동자당이 애초에 자신의 목표인 “임금노예제 철폐, 노동자 공화국 수립과 집산화된 생산체제”를 추구하는 “계급정당”(「노동당을 위하여」, 노동자당의 1922년 10월 성명서)으로서의 노동자정당을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페퍼/러브스톤 지도부는 이 노선을 일관되게 수행하는 데 실패했다: ‘농민-노동자당 캠페인을 당으로 도입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었다.’ 개량주의자처럼 당 강령에 접근하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 관료에 미리 투항해버린 것 외에도, 이들은 두 계급 즉, 노동계급과 소부르주아 한 분파의 계급적 이해를 한 정당으로 결합하려는 가망 없는 시도인 농민-노동자당의 모순을 인지하지 못했다. 이 오류는 1923년 피츠패트릭과 갈라선 이후 코민테른이 페퍼/러브스톤을 문책해야 했을 다른 오류와 결합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피츠패트릭의 농민-노동자당에 입당하는 대신에, 지지조건으로 단일한 계급의 정당을 유지해야 했다. 비록 다른 사안에 대하여 피츠패트릭과 연합을 지속하더라도 말이다. 덧붙여서, 덜 중요한 또 다른 비판이 이 시기 당과 노동조합 활동에 대하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비판들은 1922~23년까지 이들의 활동을 모범사례로 간주하는 우리의 전반적 평가를 바꾸지 않는다. 만약 TUEL이 자신의 강령과 공동전선에 기초하여 AFL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더라면, AFL은 혁명지도부의 수중에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정치투쟁과 차이의 명확화는―심지어 분열도―의심의 여지없이 필요했을 것이다. 기본적인 혁명적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정치적 후퇴를 예방하기 위해서 말이다.

조합 선거

포스터의 주된 선거 전략은 단순히 TUEL 후보를 출마시키기보다는 노동조합 내 동맹자들과 연합을 형성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러나 지지는 대체로 TUEL 강령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1922년에 TUEL이 지지하는 로스 너드슨(Ross Knudsen)이 ‘RILU 지지, 산별노조, 노동자공화국’을 내걸고 나선 기계공노조 위원장 선거에서 30%를 득표했다. TUEL은 관료들의 내부 경쟁이나 출세주의자들의 제한적인 ‘보다 나은’ 조합주의 강령을 지지하지 않았다. 친자본주의 관료와 질적으로 다른 정치적 입장에 기초할 때에만 다른 세력에 비판적 지지를 보냈다.

올바른 공동전선이나 연합의 시험은 노동조합 관료의 주류로 어떠한 재통합이 있기 전에 그것의 기초가 되는 쟁점을 기각하게 한다. 모든 관료들이 항상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위한다지만, 1923년 곰퍼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공산주의자들과 단절한 피츠패트릭은, 통합, 소련 승인, 독립적 노동계급 정치에 반대하면서 이전에 표명한 모든 입장을 스스로 뒤집어야 했다. 그는 노동운동 내에서 맹렬한 반공주의자가 되었으며, 곰퍼스의 반동 노선을 지지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1923년 이후 호황 국면으로 접어들며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안정되면서 시작되었다. 피츠패트릭과의 단절로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운동 내의 동맹자를 상실했다. TUEL은 공산당이 그랬던 것처럼, 특히 1922년에 급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들을 결속시킬 경험 있는 간부들이 대오에 부족했고, 일찍이 대중의 거대한 파도를 흘려보낸 당은 노동운동 내에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했다. TUEL에는 ‘이중 노조’의 딱지가 붙었고, 조직에 속한 투사들의 축출이라는 격랑을 겪으며 1924년 말에 이르면 사실상 지하로 숨게 되었다.

스탈린주의가 TUEL을 망치다

1923년, 레닌의 와병과 독일혁명의 유산과 더불어, 카메네프, 지노비에프, 스탈린 3인방은 소련 내에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했고, 코민테른은 새로운 소비에트 관료집단의 대외정책을 위한 기구로 왜곡되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정치적 문제들이 그랬듯이, 이것은 공산당의 노동조합 활동을 무원칙한 분파투쟁을 위한 이전투구의 수단으로 만들었다. 이전에 유지한 관점들을 포기하는 것이 국제지도부에 승인을 받기 위한 기준이 되었다. 이리하여 공산주의자들이 지도한 1926년 파사익 파업은 처음에는 포스터와 TUEL에 대한 분파적 음모의 일환으로 당의 루텐버그 지도부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코민테른의 우선회(지노비에프 ‘좌편향’에 대한 스탈린의 첫 행동)가 공산당에 의한 직접적 개입이 아닌 TUEL을 통한 활동의 재개를 시사하자, 모든 분파들이 그 투쟁을 방기하였다.

TUEL은 1928년(이 해에 ‘제3기’ 이중노조 조직으로 변모)까지 공산당에 의해 유지되었다.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새로운 지도부의 영향력 하에서, TUEL의 강령은 공동전선 전술을 전략으로 격상시키는 식으로 퇴보했다. 1927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의 미국 문제에 대한 결의에 따라, TUEL의 강령은 희석된 5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미조직노동자 조직,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위하여, 통합, 노동자정당, 그리고 ‘자본가들에 대한 공세적인 투쟁’’. 이 결의안은 사실상 “반동세력의 정책에 맞서 싸우고자 하는 모든 진보세력”을 TUEL로 불러 모을 것을 주창했다. TUEL 회원과 임시적 동맹 사이의 경계선은 완전히 삭제되었다.

이러한 삭제를 은폐하고 영구적 전략으로서의 좌익-중도파 연합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개념을 공고화하기 위해, 포스터는 그의 후기 저작에서 원래의 구분선을 의도적으로 흐리기 시작했다(포스터, 『미국 노동조합주의』, 1947년). 이를 위해, 그는 초창기에 자신이 TUEL을 공동전선으로 언급한 것(그중에 하나는 1973년 4월 18일자 <노동자 전위> 18호에 불행하게도 논평이 빠진 채로 인용되었다.)에 의존했다. 사실 TUEL은 공동전선이 아니라, 공산주의 강령을 노동조합에 제시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공산주의적 노동운동가들과 기타 인원으로 이루어진 회원제 조직이었다. 이들은 타 세력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였다. 일반적으로 TUEL은 오늘날 스파르타쿠스동맹이 지지하는 노동조합 현장분회와 정치적으로 동일한 것이었다. 비록 조직적으로 특정 노조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노조를 아우르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이와 반대로, 공동전선은 자본가들에 맞서 전체로서의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해 고안된, 노동자의 직접적 이해에 기초한 연합이다. 물론 공동전선은 다양한 형태(임시적 동맹, 노동조합, 그것의 최고 단계인 소비에트)를 취할 수 있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강령을 통한 노동운동에의 전위당의 개입과 같거나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포스터와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얼버무리는 것의 명백한 차이이다. 포스터는 TUEL의 강령 전체가 ‘진보세력’과의 연합에 적용되었다는, 그리고 1922년-24년의 노동자당(공산당)과 TUEL의 작업이 그의 초창기 노동조합 투사들의 작업과 동일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이 거대한 TUEL 운동[1922년 캠페인]의 뒤에서 조직된 세력들은 좌익과 진보세력의 광범한 공동전선 형태를 취했다. 진보세력, 특히 피츠패트릭-너클스의 농민-노동자당 그룹이 함께 활동하던 동안에, 공산당과 TUEL은 강력한 좌익세력이었다. 통조림 공장과 철강 산업에서의 캠페인을 통해 수행된 공동행동의 성장과 지속이었다.”―『브라이언에서 스탈린까지』, 1936년

따라서 포스터의 결론은, 연합이 지속되는 동안 강령 전체는 TUEL에 의하여 노동조합에 침투할지라도, 가장 반동적인 세력을 자극하지 않기 위하여 정치강령을 포기한 연합과 코민테른 강령에 기초한 연합 사이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적 퇴보 이후 공산당의 노동조합 활동에서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연합을 만들어라.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연합을.’

정치적 대안을 위하여

1928년[국제적으로 1926년과 1927년 각각 영국 총파업과 중국 혁명을 조합관료나 자본가계급에 대한 동맹이라는 우경화 노선으로 치명적 패배로 이끈 스탈린관료집단은, 국내적으로도 부하린의 부농노선이 쿨락의 반란으로 곤란에 직면했다. 그러자 갑자기 1923년 전후의 혁명 상승기(‘제1기’), 1928년까지의 상대적 안정기(‘제2기’)를 지나 자본주의가 즉시 그리고 최종적으로 붕괴하는 시기(‘제3기’)가 도래했다는 새로운 이론을 제기하며, ‘사회파시즘론’ ‘이중노조 노선’ ‘폭력적 집단화’ 등의 극좌 노선으로 돌아선다. 이 ‘제3기’ 노선은 사회민주당과의 공동전선을 거부하는 등의 극좌노선으로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자, 이번엔 다시 ‘인민전선’이라는 정반대의 계급협조주의 노선으로 급선회하며 철회되었다.] 공산당의 이중노조주의로의 전환은 배신행위였다. 그것은 당시 상당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을 뿐만 아니라, 통합광산노동자(UMW)의 미숙련 노동대중을 조직하는 시기에 존 L. 루이스 같은 반동적 개량주의자들이 노동운동 내에서 지도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왔다. 포스터는 전적으로 이 전환을 승인했을 뿐만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의 무파업 서약을 비롯한 이후 공산당의 모든 배신도 승인했다.

루이스와 여타 관료들이 혁명지도부의 등장을 막기 위해 CIO를 조직했을 때, 자본주의 지배 방식과 노동 규율에 중대한 변화가 있었다. 이전에 경찰, 군대, 총격, 구속에 직면했을 파업은, 이제 주기적 후원에 대한 답례로 노동의 질서를 보증하는 노동관료의 중재를 통해 다루어지게 되었다.

CIO 운동은 실업 등과 같은 사회문제들을 해결하는 데에 있어 조합주의의 한계를 드러내게 했고 노동계급의 정치적 전망을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따라서 CIO 관료들과 이들의 우군인 공산당은 그 당시 노동자정당 건설 운동이라는 형태로 발생한 노동자들의 초보적 정치운동을 방해하고 그것을 부르주아지에게 종속시키고자 했다.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의 계급협조주의 연합(‘인민전선’)을 ‘노동계급 전략’이라고 속이는 것을 통해 그렇게 했다. 관료들의 배신행위는 회사나 정부로부터 답례를 대가로, 노동조합을 제국주의 2차 세계대전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완결되었다.

노동조합의 기본 과업이 개량주의 지도부 하에서 성취된 이후로, 노동조합 내에서의 혁명가들의 주된 조직적 목표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1934년 미니애폴리스 총파업에서 보여주었던 것처럼, 노동조합 투쟁에 혁명적 지도력을 제공하는 것에서 개량주의적 관료주의에 대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행강령의 체계화를 통해서 트로츠키는 이를 공식화했다.

1930년대 후반에 이것이 옳았다면, 온전한 정치강령은 시대의 성격상 오늘날의 노동조합에 훨씬 더 요구된다. 이전 시기와의 차이점은―과거의 패배와 배신의 산물인―낮은 의식수준 등과 같은 주관적 요인이 아닌, 노동조합이 국제적 경쟁과 새로운 전쟁을 위해 노동력을 동원하려는 제국주의의 직접적인 도구가 되거나, 아니면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혁명기관이 될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이다. 트로츠키가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1940)에서 역설했듯이, 이 둘 사이에 제3의 길은 존재할 수 없다.

경계선은 더욱 날카롭게 그어진다. 개별 노조들은 당면 문제(인플레이션, 실업, 회사의 이전 등)에 대한 해결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이 문제들은 세계적 계급역관계와 제국주의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 바로 이런 모순 때문에 노조 지도부는 외부의 정치세력에 더욱 의존하게 된다.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강령과 투쟁에 기초하지 않는, 모든 노조 지도부나 혹은 지도부를 지망하는 자들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의 한 분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에 대한 항복을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관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행강령과 트로츠키주의 세계 전위당 건설을 위한 분투를 통해서만 표현된다. 따라서 온전한 이행강령에 기초한 지도부만이 모든 문제에 맞닥뜨릴 채비를 갖출 수 있으며, 노동조합을 약탈적인 제국주의 통제기구에서 세계적 반자본주의 투쟁을 위한 노동계급의 진정한 무기로 변모시킬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 1부

 

크리스 녹스, <노동자전위Workers Vanguard> 25호, 1973년 7월 20일

트로츠키주의 운동에는 어려운 여건과 난관 속에서 레닌주의 원칙들을 위해 투쟁한 자랑스러운 전통이 깃들어 있다. 미국에서 최초의 트로츠키주의 조직(미국공산주의동맹 1928~34)을 건설한 지도부 중핵은 30년 이상 투쟁을 지속하였다. 냉전기 반공주의 마녀사냥에 시달리다가, 1960년대 초, 정치적으로 퇴보하고 볼셰비키주의로부터 이탈하기까지 말이다. 스파르타쿠스 동맹은―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SWP 내―트로츠키주의 운동의 퇴보에 맞선 투쟁 속에서 탄생하였으며, 운동의 전통을 계승했음을 천명한다.

이 전통 속에는 소련의 관료적 퇴보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투쟁, 독일에서의 반파시즘 노동자 공동전선 캠페인, 파산한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대체할 프롤레타리아 지도부 구성을 위한 새로운 제4인터내셔널 건설 투쟁이 담겨 있다.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초기 과정이 늘 그렇듯,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오류를 범했다. 초창기 투쟁들과 그 전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오류를 교정하는 것은 운동의 성장과 정치·이론적 무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예컨대 누군가가 ‘청년 레닌이 레닌주의 전체―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수립을 위한 투쟁 경험을 구체화한 것―를 반영한다.’라고 여긴다면, 그는 많은 오류와 문제점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공산주의 지도자이자 미국 트로츠키주의의 선구자인 제임스 P. 캐넌James P. Cannon은 민주집중제 전위당 개념의 발전 과정을 논하면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지금의 우리 당이 1차 세계대전 이전 무정형의 전투적 노동운동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 강령의 우수성 때문만이 아니라, 볼셰비키 조직의 원칙과 방법들을 실천 속에서 일관되게 적용시켜온 것 때문이기도 하다. 사반세기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이것이 혁명정당 건설을 위한 올바르고 유일한 길이라고 거듭 확신했다.…

“아무 일도 없었고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것 마냥 이미 왔던 길을 되돌아가 반복하는 것, 정치에서 이것처럼 어리석고 유치한 것은 없다.”―「감옥으로부터의 편지」

그가 극복하려 했던 사회민주주의의 약점을 청년 레닌이 지니고 있었듯이,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여러 오류를 저질렀는데, 그 일부는 그들의 등장무대였던 퇴보해가는 공산당을 반영하는 것이었고, 또 다른 일부는 그들이 처한 국내 정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대중 조직화의 전형이자 산별노조 노선에 따라 운송을 조직한 최초 사례인 1934년 미니애폴리스 팀스터 총파업, 무쟁의 선언과 전시노동위원회[War Labor Board,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 수행에 차질을 줄 수 있는 파업을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정기구]에 맞선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투쟁과 같은 절정의 순간들을 포함하는, 미국 노동조합 내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역사는, 모범적 사례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지속적 오류가 드러나는데, 새로운 위험에 맞서 운동을 무장시키기 위해, 혁명가들은 이 오류를 연구하고 교정해야 한다. 이 역사가 완전히 밝혀지고 기록된 것은 아니지만, 대강의 비판적 검토는 가능하다.

1920년대 공산당의 퇴보

미국 공산당 내에서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검토가 끝난 이후, 캐넌, 색트먼, 에이번 등 미국 트로츠키주의 창시자들은 1928년에 갑작스럽게 트로츠키의 반대파에 가담했다. 그들은 1920년대 당의 스탈린주의적 퇴보에 맞선 의식적 투쟁의 경험이 없었다. 당의 퇴보는 지도부와 간부들 대부분을 형편없이 타락시켰고, 당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고분고분하게 만들었으며 당을 떠나도록 했다. 당 지도부는 혐오스럽고 신뢰할 수 없는 냉소적 분파주의자 제이 러브스톤(Jay Lovestone)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권모술수와 무원칙한 순응주의로 당을 지배했다. 국제적으로 부하린주의 우파를 지지하는 러브스톤 파벌은 비관주의에 기초한 노골적 기회주의로 당을 이끌었다. 평화주의[어떠한 형태의 폭력, 심지어 자기방어적인 폭력조차도 거부하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자유주의자들에게 맞추어진, 러브스톤의 정책은 노동조합 상층부에 대한 책략에 크게 의존하였다. 미국노동총연맹AFL의 극적 쇠퇴를 고려하면 이 정책은, 특권을 누리는 숙련공과 극소수의 조직노동자에 집중하고, 다수의 비숙련 노동자에 대한 사실상의 방치를 의미했다.

20년대 후반 스탈린주의화된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각국 지도부는, 모스크바에서 불어오는 정치적 변화를 제때에 감지하고 그에 따라 노선을 바꿀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격심한 분파투쟁은 매우 무원칙하게 변질되었고 이는 곧 조직일원주의[monolithism 이견과 분파를 허용하지 않는 조직운영]로 대체되었다. 따라서 러브스톤의 우익 기회주의는 그의 타고난 편견과 조직적 방법론에 걸맞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파의 정치강령은, 그의 맞수였던 윌리엄 Z. 포스터의 그것처럼, 이렇다 할 정치적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둘 모두, 스탈린과 부하린이,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 그리고 초좌익에 대항하여 연합했던 1926년까지, 오른쪽으로 불고 있었던 코민테른의 바람에 편승하여 권력을 얻고자 했다.

캐넌 역시 코민테른 퇴보로 영향을 받았지만, 그는 일찍이 1925년, 제3의 분파를 형성하였는데, 그 목적은 몰정치적 분파투쟁 청산과 집단지도체제 수립이었다. 사기가 저하된 캐넌은 1928년 코민테른 6차 대회에 마지못해 참석했고, 이 대회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강령 초안 비판」[『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판] 한 부를 우연히 입수했고, 코민테른의 퇴보가 소련의 국가관료 엘리트의 이해에 기인한다는 트로츠키의 분석에 동의하게 되었다.

‘미국당의 우경화’

코민테른 6차 대회 당시 캐넌은 「미국당의 우경화」라는 문서에 기초하여 포스터 그룹과 ‘동맹’(bloc, 그룹 간의 통합이 아닌 일시적 협력관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그것을 산출한 동맹과 마찬가지로 모순적이었다. 이 문서는 러브스톤의 심각한 기회주의적 오류들에 대한 원칙적 비판을 담고 있으면서도, 막 시작된 코민테른 좌선회에 편승하여 공산당을 장악하려는 포스터 추종자들의 무원칙한 강령도 담고 있었다.

6차 대회에서 스탈린은 부하린과 공개적으로 단절할 준비를 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좌선회를 확실히 준비하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기존 노선을 폐기하는 이 좌선회는 여러 가지 상황이 스탈린을 강제한 것이었다. 또한 1928년의 좌선회는 일단 트로츠키를 추방하고, 이어서 그의 슬로건이 채택된 것처럼 보이게 해서, 좌익반대파의 의표를 찌르려는 음모였다. 많은 반대파 성원들이 이 함정에 빠져 스탈린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제명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신문 <밀리턴트Militant>에 다시 실린 「미국당의 우경화」는, 6차 대회 이전에 새로운 ‘제3기’로의 전환이 임박했음을 암시하는 모스크바 발(發) 신호를 반영했다. 러브스톤에 맞서, 이런저런 불만을 담은 코민테른의 서신과 미조직 노동자 조직 작업에 대한 <적색노조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노동조합 부문)>로부터의 압력을 이용했다. 물론 러브스톤과 여타 노조관료들의 기회주의적이고 투항적 동맹에 대한 공격은 지당한 것이었지만, 이 문서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이라는 제3기의 잘못된 개념에 경도되었다.

“반동적 노동조합, 자유주의자, 사회당 지도자들과의 위로부터의 공동전선에 반대하고, 그들에 맞선 노동자 공동전선을 지지하는 코민테른 노선은 미국에서는 특별히 강조해서 적용되었다.”―밀리턴트, 1928년 12월 15일

그렇기 때문에 「미국당의 우경화」는 막 시작된 스탈린주의적 좌충우돌을 반영하는 몇 가지 오류들을 담고 있었다(그리고 미국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큰 틀에서는 올발랐다. 캐넌의 관점에서, AFL이 약하거나 존재하지 않는 현장에서 새로운 노조 건설 필요성을 제기한 것은 원칙적이었다. 포스터는 극단적인 AFL 물신주의자이자 ‘내부공작’ 지지자였던 반면, 캐넌은 1926년 파사익Passaic 파업이 ‘새로운 노조는 공산주의 지도력 하에 건설되어야’ 하는 사례라고 여겨, 포스터와 결별하였다.

트로츠키와 연대하자마자 자신들의 독립적 입장을 채택한 미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공산당에서 즉각 축출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이 채택한 그들의 슬로건을 활용하려했고, 제3기 노선에 뒤늦게 뛰어든 러브스톤에 대한 폭로를 지속하고자 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슬로건, “쿨락 척결! 네프맨 척결! 관료 척결!”을 그들 자신의 것으로 선언했으며, 공산당이 광산, 직물, 의류업에서 새로운 노조 건설에 나서도록 압박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부문들이 AFL 안에서 좌파로서 활동함과 동시에 새로운 노조 건설 작업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트로츠키주의 노동조합 활동은 이 노동조합들, 특히 남부 일리노이의 광산에 집중되었다.

AFL 관료들이 방치하고 배신한 현장에서 새로운 노조를 건설하려는 이 입장을, 스탈린주의자들은 이중노조를 원칙으로 격상시키는 것으로, 기존 노조에서의 활동을 거부하는 것으로 곡해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가 되기 이전부터) 트로츠키주의 반대파[‘반대파’: 조직 또는 특정 경향 내 다수파와 다른 정치노선을 가진 소수파라는 의미]가 지속적으로 보여주었듯이, ‘새로운 노조’ 노선은 객관적 상황과 공산당의 개입 능력에 따른 것이었다. 1920년대 전반에 걸쳐 AFL 산하 노조들은 계급협조주의 준동, 전투성 상실, ‘빨갱이’ 축출을 겪었다. 관료들의 반동적 태도는 수공업자의 근시안적 시각을 극복하고 노동계급 다수를 조직할 유일한 방안인 비숙련 노동자 대중을 산별노조로 조직하는 것에 노골적으로 적대했다. 그 결과, AFL 산하 노조들은 새로운 노동자 조직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노동자들과 그들을 조직하기를 원하는 이들이 떠나면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되었다. 20년대 말경에 프롤레타리아 지도력의 위기는 미조직 노동을 조직화할 지도력의 공백으로 표현되었다.

혁명 지도부의 의무는 이 공백을 메우고, 그 과정 속에서 AFL 관료주의를 타격하는 것이었다. 이 상태는 30년대까지 계속되었고, 마침내 AFL 관료 일부가 AFL 지도부가 하지 않으면 ‘빨갱이’들이 하리라는 두려움으로 거대 산업 조직에 나서면서 종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산별노조협의회(CIO)가 만들어졌다. CIO는 한편으로 이전의 AFL 지도부와 치열하게 경쟁하였지만, 그 경쟁은 기존 노조에서 같은 노동자들을 두고 다툰 것이 아니라, 미조직 산업에 새로운 노조 건설을 둘러싼 것이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늘 구체적 상황에서 출발했으며, 기존 노조를 장악하려는 투쟁이 관료주의의 벽에 완전히 막힌 곳에서만 새 노조 건설을 지지했다. 광산이 그런 사례 중 하나였다. 남부 일리노이 같은 곳에서 평조합원들은 배신과 민주주의를 하찮게 여기는 루이스 조직[미국의 노동관료 존 L. 루이스(John L. Lewis)의 통합광산노동자(UMW)]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것은 기존의 낡은 것을 대체할 새 노조의 기반이 되었다. 1928년 이전 공산당 내 반대파 지도자들은, 점진적 ‘진보세력’(브로피, 해프굿 등)[존 브로피(John Brophy)와 파워스 해프굿(Powers Hapgood)은 당시 루이스와 대립하고 있었던 노동관료]뿐만 아니라 루이스 조직 자체에 굴종하는, 러브스톤의 정책에 맞서 싸워야 했다. 공산당과 반(反)루이스 지도자들이 결합하여 전국광부노조(NMU)를 건설했지만 너무 늦었을 뿐더러, 공산당의 모험주의적 오류로 발목이 잡혔다. 하지만 평조합원의 압력은 1932년에 진보세력을 다시 추동했고, 공산당으로 하여금 <미국 선진 광부들> 건설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1973년 8월 3일자 <노동자전위>에 다음과 같은 정정기사가 실렸다. “이 연재물의 1부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마지못해 「미국의 선진 광부들」을 설립했다고 기술하였다. 사실 그들은 “제3기”가 최종적으로 기각된 후, 단지 거기에 들어가기만 했을 뿐이다.”]

새로운 노조가 선호되는 객관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의 제3기 적색노조는 재앙적 배신행위였다. 공산당이 적색노조를 건설할 때의 방식, 다시 말해 일단 광산과 의류업 경우에 너무 늦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준비없이 서둘렀기 때문에, 적색노조는 재앙이 되었다. 파업도 똑같은 방식으로 즉, 다수 노동자의 의식적 준비에 기초하지 않고 극소수의 모험적 방식으로 선포되었다. 더군다나 특정 상황을 위한 전술을 전체 운동의 원칙으로 격상시켰기 때문에 공산당의 정책은 곧 배신이 되었다. 물론 공산당은 기존 노조 내부에 반대파로 계속 있겠다고 선언했지만, 제3기 종파주의의 핵심이 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AFL 지도부, 사회당, 트로츠키주의자, 머스티 추종자를 비롯한 다른 모든 경향들을 ‘사회 파시스트’이거나, 어떤 의미에서도 노동운동의 일부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이것은 공동전선 즉, 공산주의자들이 투쟁을 전진시키고 비공산주의적 노동계급 지도자들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한 그들과의 동맹(bloc) 형성―노동조합 내 공산주의 활동에서 필수적인―을 불가능하게 했다. 종파주의와 모험주의로 얼마 되지 않는 새 노조들이 분쇄되는 동안, 스탈린주의자들은 반동적 관료들이 남아있는 기존 노조에서 작업하기를 거부하고 방해했다. 이것은 산별노조로의 대중적 전환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산별노조를 기존 반동세력에 내맡기는 것이었다.

공산당의 ‘새로운 노조’ 입장이 제3기 종파주의로 완전히 발전하는 순간부터,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들의 오류를 폭로하고 위험을 경고하는 투쟁을 벌였다. 비범한 통찰력으로, 그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이 새로운 ‘이론’은 노동조합총연맹인 AFL로부터 공산당의 이탈을 정당화하고 조직 확장과 성장을 차단하려는 시도이다…

“그럴듯한 ‘급진주의’를 명분 삼아, 현재 벌어지고 있는 [AFL 내부] 투쟁에 기권하는 것은 오직 기존 노조 내 저항운동 결집을 가로막고, 관료들이 새로운 노조를 보다 효과적으로 가로막도록 내버려두는 일이 될 것이다. 그 결과 자본주의 전쟁기구의 일부로서 AFL 관료집단의 영향력이 강화될 것이다[실제로 AFL과 CIO가 루즈벨트의 제국주의 전쟁을 적극 지지하면서 이 예견은 현실이 되었다].”―「공산주의 반대파의 강령」, <밀리턴트>, 1929년 2월 15일

러브스톤의 기회주의에 대한 반대와 마찬가지로, 제3기 종파주의와 모험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의 반대는 공산당 내에서 캐넌의 초기 입장과 연관이 있었다. 이후 노동조합 활동에서 나타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오류는 대체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게다가, 20년대 후반 러브스톤의 기회주의와 투쟁하면서, 반대파 그룹들(포스터와 캐넌)은 당의 노동조합 조직인 노동조합교육연맹(TUEL)이 아닌, 노동조합 내의 ‘프랙션[fraction, 대중 조직 내부의 당원 조직]’만을 통해 활동하려는 경향을 종파주의라고 비난했다. 러브스톤 그룹 입장에서 이 경향은 1924-25년 코민테른의 좌선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에서 루텐버그/러브스톤 분파(루텐버그는 1927년에 사망)는 포스터와의 분파 투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이 좌선회를 이용하였다. 포스터의 조직적 기반인 TUEL 건설 대신 당이 노동조합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캐넌은, 필요할 때 새로운 노조 건설을 비롯해 노동조합 문제에 항상 유연한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는 또한, 당시에 성장하고 있었으며 당과 동일시되던, TUEL에 대한 ‘협소한’ 이해에 반대했다. 대신에 그는 당의 독자성과 비판의 자유를 유지하되, 광범한 공동전선 형성을 지지했다.

“1925년에 지금의 반대파는, TUEL을 공산주의 강령을 갖춘 순수한 공산주의 기구로 협소화하는 것에 맞서, 그것을 공동전선 조직으로 확장하기 위해 투쟁하였다. 그 투쟁은 우리 당의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 투쟁 중 하나였다.”―「반대파 강령」

1929년의 [반대파] ‘강령’은 제3기가 시작될 무렵의 공동전선 전술 거부와 이전의 좌우익적 실패 모두를 비난한다. 여기서 실패란, 광범한 공동전선 건설이 가능했음에도 실패한 것과 이러한 동맹과 운동 내에서 당이 지도적 역할을 하기 위한 투쟁(‘진보적’ 동맹 파트너가 배신할 것이라는 경고 등을 비롯해서)에 실패한 것을 말한다.

이 논쟁 속에 묻혔던 오류는 공산당 강령의 요체를 노동조합에 직접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TUEL이 고안되었다는 점이다. [캐넌을 비롯한 공산주의자들은 지도부의 종파주의적 오류를 교정하려다가 오류를 범했다. TUEL을 상이한 강령을 가진 세력들을 모아놓은 영구적 공동전선으로 전환시키려고 한 것이다.] TUEL은 동맹bloc이나 공동전선이 아닌, 강령에 기초한 회원제 조직이었다. 이들이 다른 세력과 공동전선을 실시했다. 1924년, 다른 세력과 TUEL 회원 다수가 노조에서 사라지거나 쫓겨난 이후, 루텐버그/러브스톤에 의해 TUEL과 공산당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증대된 것은 캐넌이 보기에 종파주의적 오류였다. 그럴 바에야, 당은 TUEL을 새로운 동맹세력을 얻기 위해 사용해야 했다. 20년대 후반 퇴보해가는 코민테른이 그랬듯이 캐넌이 TUEL의 정치적 성격을 희석시키는 것을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1927년부터 정치적 희석은 영구적 전략으로서의 동맹bloc 정책(‘좌익-중도 연합’)을 낳았다(<노동자전위> 1973년 6월 22일자 제22호를 볼 것).

당시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캐넌의 입장은, 열정적 당건설과 당 독립성 유지와 더불어, 중요 사안들에 대하여 원칙에 입각해 공동전선과 동맹bloc 형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동맹세력들에 대한 비판의 자유를 갖고, 지도적인 역할을 맡기 위해 분투하면서 말이다. 캐넌은 공동전선의 성격에 대해 혼란스러워 하지는 않았다. 다만, 캐넌은 TUEL이나 그와 유사한 즉, 이러저러한 동맹bloc이나 공동전선 이상의 것[현장분회나 당처럼 혁명강령으로 규합된 조직]을 하찮게 여겼다. TUEL이 당시에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던(스탈린주의적 퇴보 이전까지), 노동조합에서 당강령으로 투사들을 획득하는 조직적 푯대에 대한 개념을 캐넌은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TUEL과 같은 것 즉, 이행강령에 기초한 현장분회caucuse 같은 것을 건설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만들었던 현장조직은 당면 노동조합 사안에 기초한 일시적인 동맹bloc의 성격을 지녔다. 이것은 노조 외부에서 유일하게 공개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당 그 자체만이 [강령 지지자들을] 온전한 강령으로 충원하는 유일한 조직적 푯대임을 의미했다.

이런 접근법의 문제점은 훨씬 뒤 산별노조협의회CIO 등장 이후에도 표면화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선 이 시기에는, 미조직 노동자들을 산별노조로 조직하기 위한 공동전선이 무엇보다도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유능한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화가 필요했는데, 트로츠키주의자들, 특히 미니애폴리스의 노련한 투사들과 캐넌 자신이 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러한 전망을 가지고 몇몇 스탈린주의 이중 노조, 진보세력의 <미국의 선진 광부들> 그리고 1934년의 역사적인 미니애폴리스 트럭노동자 파업의 지도부에 들어갔다.

미니애폴리스 파업은 오늘날까지 혁명적 노동조합 조직화의 표본으로 남아있다. 같은 해의 샌프란시스코와 톨레도 총파업과 함께, 미니애폴리스 파업은 산별 노선에 입각한 전체 생산노동자 조직화의 위대한 선례로 남았다.

 

Revolutionary Work in the American Labor Movement: 1920s–1950s

Program for Power: Early Communist Work in the Trade Unions

By Chris Knox. Reprinted from Workers Vanguard No. 22, 8 June 1973

Trotskyist Work in the Trade Unions, Part 1

By Chris Knox. Reprinted from Workers Vanguard No. 25, 20 July 1973

Trotskyist Work in the Trade Unions, Part 2: Minneapolis 1934—General Strike!

By Chris Knox. Reprinted from Workers Vanguard No. 26, 3 August 1973

Trotskyist Work in the Trade Unions, Part 3: The Primacy of Politics

By Chris Knox. Reprinted from Workers Vanguard No. 27, 31 August 1973

Trotskyist Work in the Trade Unions, Part 4: Stalinism and Social-Patriotism

By Chris Knox. Reprinted from Workers Vanguard No. 28, 14 September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