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 재판(再版)

---[가디언]지에 실린 연재 글들에 대한 응답

<이 팜플렛을 구성하고 있는 8편의 글들은 [노동자 전위]지 제 23호(1973년 6월 22일)에서 시작하여 제 30호(1973년 10월 10일)까지 연재되었다. 카알 데이빗슨은 자기 조직의 주간지 [가디언]지에 실은 연재 글들을 통해 트로츠키주의를 날조하고 비방했다. 이에 대한 응답이 이 글들의 내용이다. 참고로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날조에 대항하여 트로츠키가 저술한 역작이다.>

 

<차례>

1.연속혁명

2.일국사회주의

3."제 3기"

4.인민전선

5.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위한 투쟁

6.1949년 중국혁명

7.모택동 치하의 중국: 스탈린에서 닉슨으로

8.트로츠키주의 대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수정주의

 

 

제 1장 연속혁명

 

스탈린주의자들은 노동자 농민의 투쟁을 배신하기 위해 지치지 않고 노력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혁명노선을 견지한다고 계속 허세를 부려야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선이 맑스주의와 대치되기 때문에 이들은 딜레마에 빠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이것은 맑스와 엥겔스는 물론 트로츠키의 입장을 왜곡시키는 것에서 시작하여 그가 봉기 조직자로서 10월 혁명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부정한다. 심지어 이들은 그가 일본 천황을 위해 첩보활동까지 했다고 비난한다! 1956년 흐루시초프는 이렇게 인정했다: 트로츠키주의를 지지한 죄로 모스크바 조작 재판에서 기소된 지노비에프, 부하린 그리고 기타 볼셰비키 지도자들에 대한 구체적인 기소 내용들은 다수가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의 날조 수법은 지금도 여전하다. 오늘날 특히 온갖 종류의 모택동주의 조직들은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 일당"으로 널리 부활했다. 노동계급에 대한 자신의 범죄행위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스탈린은 생전에 온갖 은폐를 자행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방글라데시, 인도네시아 그리고 기타 국가들에서 자신들이 자행했던 반혁명 정책들을 은폐하기 위해 모택동주의자들은 오늘날 악랄한 비방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부터 연재되는 글들은 이러한 거짓말들에 대한 응답이다. 그리고 동시에 지난 50년간 스탈린주의적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을 통해 발전되어온 트로츠키주의 기본 개념들을 소개한다.

스탈린주의의 개량주의 노선과 맑스, 레닌, 트로츠키의 혁명 노선 사이의 투쟁은 역사학자들에게만 흥미 있는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다. "패배의 위대한 조직자"(스탈린)의 반혁명 정책 때문에 트로츠키는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의해 암살되었을 뿐 아니라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서 수만 명의 러시아 좌익반대파 구성원들도 살해되었다. 또한 반혁명 정책들을 통해 월남의 스탈린주의자들은 1946년과 1954년의 "평화협정"으로 혁명을 팔아먹었을 뿐 아니라 1927년 중국혁명, 1933년 독일혁명, 1936년 프랑스혁명, 1937년 스페인혁명, 1965년 인도네시아혁명, 1968년 프랑스혁명 등을 목 졸라 죽였다.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투쟁은 말 그대로 혁명운동의 죽고 사는 문제였다. 따라서 맑스주의를 위해 투쟁하는 투사들의 아주 면밀한 관심을 요구한다.

 

연속혁명이란 무엇인가?

이 투쟁의 핵심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이다. 1905년 당시 처음으로 제출된 이 이론은 1939년에 그가 저술한 "러시아 혁명의 세 개념"에 집약되어 있다:

"...농민의 지지를 얻는 노동계급이 독재체제를 수립해야 러시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전히 승리할 수 있다. 노동계급 독재는 민주주의 임무 뿐 아니라 사회주의적 임무도 불가피하게 일정에 올려놓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국제 사회주의혁명을 강력하게 추동할 수 있다. 오직 서구 노동계급의 혁명 승리만이 러시아를 자본주의 복귀로부터 보호할 수 있고 러시아가 사회주의를 완전히 확립할 가능성을 보장할 수 있다."    

데이빗슨과 스탈린주의자들은 바로 이 이론을 거부한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러시아 혁명의 경로에 대한 트로츠키의 견해들은 멘셰비키들의 견해와 마찬가지로 역사에 의해 틀린 것으로 입증되었다"([가디언]지, 1973년 4월 4일). 사실을 말하면 1905년 혁명에서 노동계급은 봉기에서 실패했기 때문에 권력을 장악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트로츠키의 이론은 1905년에 실현되지 못했다. 반면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승리하였고 그의 이론의 올바름은 완전히 입증되었다. 소비에트 권력으로 구현된 노동계급 독재만이 짜르 치하에서 억압당해온 민족들을 해방시켰을 뿐 아니라 토지와 평화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었다. 더욱이 1905년과 1907년에 제출된 레닌의 견해들을 꼼꼼히 분석하면 그가 트로츠키 이론의 핵심에 동의했으며 자신의 구호였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스스로 기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17년에도 레닌은 "민주주의" 혁명을 지지했으며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했다고 스탈린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완전한 날조이다. 그리고 혁명 당시 트로츠키가 제출한 구호는 "짜르를 타도하고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자"였으며 이때 그는 농민을 무시했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계속 지적했다. 연속혁명의 구호는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 독재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의 견해에 따르면 세계 경제의 불균등 결합 발전 현상 때문에 후진국 부르주아 계급은 봉건체제 및 제국주의의 이해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이 계급은 정치 민주주의, 농업 혁명, 민족 해방 등 부르주아 혁명의 기본 과제들을 완수할 수 없다. 농민이 각성하고 노동계급이 투쟁으로 나서서 이 과제들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완수할 경우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지배는 바로 위험에 처할 것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농민과 노동계급의 동맹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맑스주의에 의하면 특정 국가의 지배계급은 하나뿐이다. [공산당 선언]이 말하듯이 노동계급은 유일하게 일관된 혁명 계급이므로 이 동맹은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 독재의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다. 혁명의 민주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노동계급의 국가는 지주 토지의 몰수 등을 통해 "부르주아 재산권을 전제적으로 침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혁명은 곧장 사회주의적 과제들을 완수하는 쪽으로 이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어떠한 자의적인 "단계들"도 혁명을 중단시킬 수 없다. 레닌이 표현한 바에 의하면 혁명의 부르주아적 단계와 사회주의적 단계 사이에는 "만리장성"이 놓여있지 않다. 이렇게 하여 혁명은 연속성을 띠면서 결국 계급들이 완전히 철폐되는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간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최고 수준의 생산력을 해방시킨 결과이다. 물질적 결핍을 해소하는 것을 통해서만 계급들은 철폐될 수 있다. 고립된 후진국에서 노동계급 독재가 수립될 수는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성취되려면 최소한 여러 선진국들의 협력이 성공해야한다. 이 보완적 이유들 때문에 노동계급 혁명은 확산되고 심화되지 않으면 패배할 수밖에 없다. 결국 트로츠키의 "연속혁명"과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사이의 투쟁은 실제로는 국제적 차원의 사회주의와 가장 잔인한 부르주아-봉건 반동체제(야만 체제) 사이의 투쟁이다. 이 두 노선 사이에 제 3의 길은 있을 수 없다.

연속혁명론은 레온 트로츠키의 업적이지만 이 이론의 개념은 1850년에 맑스에 의해 처음 개진되었다. 데이빗슨은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에 맑스주의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이렇게 주장한다: "연속혁명"과 관련된 맑스의 표현들은 사회주의 수립까지 계속될 계급투쟁에 대한 일반적 발언에 불과하다:

"이렇게 두 가지 점에서 혁명은 '연속적'이다. 첫째 미래를 투시하면 혁명의 경로는 계급들이 철폐될 때까지 연속된 계급투쟁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역사를 되돌아보면 일단 계급들이 철폐되면 한 계급이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상황과 계급투쟁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혁명은 연속적이다."-- [가디언]지, 1973년 4월 4일

이 추상의 수준에서 데이빗슨은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노선들의 차이는 오직 "문제의 구체적 성격"을 통해서만 나타난다. 그가 이렇게 결론 내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먼저 맑스가 실제로 한 말을 살펴보자:

"기껏해야 위에서 제시한 요구들을 성취한 후 민주적 소부르주아 계급은 혁명을 가능하면 빨리 끝내기를 원한다. 반면에 어느 정도 유산계급들이 전부 지배적 지위에서 강제로 쫓겨나고 노동계급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며 한 나라뿐 아니라 선진국 전부에서 노동계급의 연합이 한참 진전하여 이 나라들에서 노동계급 사이의 경쟁이 없어지고 최소한 결정적인 생산력이 노동계급의 손에 집중될 때까지 혁명을 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이해에 부합되며 우리의 임무이다. 문제는 사적 소유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철폐시키는 것이며, 계급 갈등을 부드럽게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급 자체의 철폐이며, 현 사회의 개선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의 수립이다."-- 카알 맑스, "공산주의동맹 중앙위원회에서의 연설", 1850년

이것은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스탈린의 궤변에 대해 75년이나 앞서 맑스가 펼친 강력한 논쟁이다. 트로츠키의 이론은 맑스가 개진한 기본 전제들을 제국주의 시대에 더욱 발전시킨 결과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는 후진 지역들 전역에 침투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계 차원에서 사회주의 수립의 객관적 전제조건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과거에 식민지였던 국가에서 신생 부르주아 계급의 존재마저 위협하고 있다.

 

단계에 의한 혁명: 1848년 독일혁명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하면 트로츠키주의의 가장 심각한 오류는 혁명 "단계들" 특히 사회주의 단계에 대비되는 민주주의 단계의 필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데이빗슨보다 뛰어난 선배 기회주의자 가운데 하나였던 부하린은 스탈린이 그를 "트로츠키주의자"로 몰아 살해하기 몇 년 전에 이렇게 말했다:

"트로츠키 동지는 노동계급의 독재를 혁명 과정의 처음에 위치시켰다. 그러나 그는 이 독재에 도달하기 전의 단계들과 이행들을 보지 못했다. 그는 구체적인 역관계를 무시했다...그는 혁명의 단계들을 보지 못했다...."-- 니콜라이 부하린, "연속혁명론에 대해", 1925년

그렇다면 2단계 혁명 "이론"과 연속혁명의 "특수성"을 논의해보자. 혹시 맑스가 이런 이론을 주장했는가? 물론 그는 사회적 내용에 따라 부르주아 혁명과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을 엄격하게 구분했다. 왜냐하면 이 두 혁명은 두 역사 시대를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19세기 중반에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 있었다: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 사이에 "만리장성"이 존재하기에는 부르주아 계급은 너무 허약하고 노동계급은 너무 강력하다. 사회적 내용은 서로 다르지만 두 혁명은 역사적으로는 밀접하게 연관될 것이다. 1848년 독일혁명은 이 연관을 특히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공산당 선언]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이렇게 말했다:

"공산주의자들은 독일에 특히 관심을 기울인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독일은 부르주아 혁명의 전야에 있다. 둘째 이 혁명은 유럽의 전반적 문명 수준과 관련하여 비교적 선진적 조건 속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17세기 영국 노동계급이나 18세기 프랑스 노동계급보다 독일 노동계급은 훨씬 더 발전했다. 이 결과 19세기 독일에서 부르주아 혁명은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 바로 앞에 올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이 1848년에 바로 승리할 수 있다고 맑스가 믿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자유 부르주아와 소부르주아가 봉건적-절대주의적 반동 세력에 대항하는 한 이들을 노동계급이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아주 허약하고 정치적으로 수공업자와 민주적 소부르주아 이해에 의해 지배받고 있던 제국주의 시대 이전인 이때에도 그는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노동계급 전체를 무장"시킬 뿐 아니라 혁명 동맹자인 이 두 계급에 저항하기 위해 "새로운 공식 정부 바로 옆에 동시에 혁명적 노동자 정부를 수립하라."

1848년 부르주아 혁명에 뒤이어 곧바로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맑스의 예상은 현실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 역시 성공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중을 분기시키는 최소한의 조치도 노동계급 혁명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두려워한 자유 부르주아들이 프로이센 및 오스트리아 반동 세력의 편에 붙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사회혁명이 터지는 것을 봉건 반동들만큼이나 두려워한 자유부르주아들은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처럼 왕정을 타도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이들과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했다. 엥겔스가 표현했듯이 독일 부르주아 계급은 "상점주인의 정치"수준을 넘어설 수 없었다.

 

단계에 의한 혁명: 1905년 러시아혁명

1905년 러시아혁명은 연속혁명의 문제를 다시 제기했으나 이번에는 독일혁명의 경우보다 훨씬 더 날카로운 형태로 제기했다. 러시아 부르주아 계급은 독일 부르주아 계급보다 훨씬 더 허약했다. 불리한 지리적 위치와 널리 분산된 인구 때문에 러시아 사회는 수백 년 동안 원시성과 더딘 발전을 면치 못했다. 러시아 제국 북부의 자본주의는 짜르 전제 국가에 의해 서구에서 주로 수입된 것으로 기존의 봉건적 경제체제에 접합되었을 뿐이었다. 이 때문에 가장 선진적인 기술을 동원한 주요 도시들의 대공장에 현대적 노동계급이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부르주아 발전의 경제적 기초였던 도시의 수공업과 초기의 공장제 수공업은 러시아에 발전할 시간이 없었다. 유럽의 자본과 국영은행들의 손에 대공업이 주로 장악되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자본가 계급은 소수였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되었고 반 정도 외국인이었으며 역사적 전통도 없었다. 더욱이 수천의 연줄을 통해 봉건적-절대주의적 국가나 대토지 귀족계급과 연결되어 있었다. 정치 민주주의, 농업혁명, 민족해방의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자본가 계급 주도의 부르주아 혁명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는 여전히 해결되어야했다.

이 현실에 직면하여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의 두 분파는 혁명에 대해 완전히 대립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도식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혁명적 줏대가 전혀 없었던 멘셰비키들은 당면한 혁명의 부르주아적 과제로부터 자유부르주아와의 동맹을 "전략"으로 도출했다. 1906년에 열린 "통합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 지도자 악셀로드는 이렇게 연설했다:

"러시아의 사회적 관계는 부르주아 혁명을 허용할 정도로만 성숙했다....이 일반적인 정치적 무법천지가 지속되고 있지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직접 투쟁하는 것은 언급도 하지 말아야한다....노동계급은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역사의 객관적 조건 때문에 러시아 노동계급은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부르주아 계급과 불가피하게 협력해야하는 운명에 처해 있다."

이 결론은 유럽 특히 프랑스의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고전적 도식을 러시아의 조건에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도출되었다. 노동계급 혁명은 자본주의 발전이 수십 년 지속된 후에야 가능하다는 것이 이 결론의 함의였다. 역시 멘셰비키 지도자였던 플레하노프의 발언은 멘셰비키의 입장을 핵심적으로 집약했다: "짜르 전제에 대한 투쟁에서 비(非)노동계급 정당들의 지지를 귀중히 여기고, 우리의 재치 없는 행동으로 이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에 대해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재치 없는' 행동을 지주 출신인 자유주의자들은 수백만 번이나 용서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토지를 농민들이 빼앗으라고 우리가 선동하는 것은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부르주아 계급과 동맹해야한다는 플레하노프의 주장에 대해 레닌은 농민과의 동맹을 통해 농업혁명을 수행할 것을 촉구했다. 이 주장은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로 정식화되었다:

"어떤 사회 세력이 진정 짜르 체제에 반대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확신해야한다....대(大)부르주아, 지주, 공장주, 자유주의자들을 따르는 '사회' 등은 이런 세력이 될 수 없다....자신들의 계급적 지위로 인해 이들은 짜르 체제에 대해 결연한 투쟁을 벌일 능력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들은 사적 소유, 자본, 토지 등에 의해 너무 무겁게 족쇄가 채워져 있어서 결정적인 투쟁에 나설 수 없다. 이들은 노동계급과 농민에 대항해 관료집단, 경찰, 군대 등을 동원하는 짜르 체제가 너무 필요하기 때문에 이 체제가 파괴되기를 원치 않는다. 아니다, '짜르 체제에 결정적으로 승리할' 능력이 있는 유일한 세력은 바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뿐이다." (강조는 원저자)--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의 두 전술", 1905년

이 노선은 멘셰비키의 무기력한 자유주의와 화해할 수 없이 대립되었다. 그리고 농민 봉기의 불길을 부채질하고 짜르 전제에 대해 노동계급이 "재치 없는" 공격을 가하도록 지도했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은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끈질기게 주장했다. 혁명 권력을 농민이 장악하고 자본주의가 꽃피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에 대해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러시아에게 필요한 정치 체제의 민주적 개혁, 사회적 경제적 개혁 등은 그 자체로는 부르주아의 사회적 지배를 침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개혁은 처음으로 아시아적이 아니라 유럽적인 자본주의의 발전을 폭넓게 그리고 빠르게 허용할 토대를 진정으로 제공할 것이다. 처음으로 부르주아의 계급 지배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 위의 글

이 글의 처음에 인용된 트로츠키의 견해는 멘셰비키나 볼셰비키의 입장과는 뚜렷이 구별되었다. 물론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더 가깝기는 했다. 나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05년에 처음 개진된 연속혁명론은...이렇게 지적했다: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민주적 과제는 지금 시대에는 직접 노동계급 혁명으로 나아가며 노동계급 독재는 사회주의 과제의 해결을 일정에 올려놓고 있다."-- "연속혁명", 1929년

그런데 데이빗슨은 이렇게 주장한다: 레닌은 "혁명이 단계들을 통해 발전한다고 주장했는데" 트로츠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완전히 무시했다. 이 주장은 연막술에 불과하다. 혁명의 당면한 역사적 과제에 대해 트로츠키는 혁명 첫 단계들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부인한 적이 결코 없었다. 다만 이 혁명의 원동력과 전망의 의미에서만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부인했다:

"이미 1905년에 뻬쩨르부르그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수립한 소비에트를 노동자 정부라고 불렀다. 이 명칭은 당시 일상 어휘가 되었으며 권력 장악을 위한 노동계급의 투쟁 강령에 완벽하게 체현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짜르 전제에 대항하여 보편적 참정권, 공화국 체제, 민병대 창설 등 정치 민주주의에 대한 정교한 강령을 수립했다. 우리는 이와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 정치 민주주의는 노동 대중의 발전에 있어서 필요한 단계이다. 다만 대단히 중요한 유보 조건이 있다. 하나의 경우에 이 단계는 수십 년을 경과하지만 다른 경우에는 혁명적 상황 때문에 대중은 정치 민주주의의 기관들이 현실로 드러나기 전에조차 정치 민주주의의 편견들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강조는 원저자) -- 트로츠키, [1905년 혁명] "서문", 1922년

이에 대해 데이빗슨은 또 다시 연막술을 쓰면서 쟁점을 흐리려고 한다. 그는 이번에는 이렇게 주장한다: 트로츠키는 "농민에 적대적이었고 레닌의 견해는 그와 정반대였다". 이것은 완벽한 날조이다. 농민이 전체적으로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동맹 세력"이 될 수 있다는 견해를 그는 물론 즉각 거부했다:

"권력을 장악한 순간부터 노동계급은 빈농과 부농, 농촌 노동자와 농촌 자본가 사이의 적대관계로부터 혁명에 대해 지지를 구해야만할 것이다."-- 트로츠키, "평가와 전망", 1905년

이 측면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견해는 일치한다:

"관료집단과 지주에 대한 투쟁은 농민 심지어는 부농, 중농과 함께 수행될 수 있고 수행되어야한다. 반면에 자본가 계급 그리고 부농에 대한 투쟁이 올바로 수행되려면 오직 농촌 노동자와 함께 해야 한다."-- 레닌,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노동계급 사회주의", 1905년

레닌과 트로츠키 사이의 논쟁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가 생략될 수 있거나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이 필요한가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의 협력에 대한 정치적 작동방식 즉 후자의 정치적 독자성의 정도에서 일어났다.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 뿐 아니라 과거의 혁명 경험들에서 드러났듯이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했다: 사회에서의 중간적 지위와 구성원의 이질성 때문에 계급으로서 농민은 독자적 역할을 수행하거나 독자 정당을 수립할 능력이 없다; 농민은 자본가 계급이나 노동계급의 지도를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단계에 의한 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이쯤 되면 데이빗슨의 글들이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을 거의 언급하지 않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는 농민의 역할에 대한 1905년의 논쟁에서 곧바로 "일국 사회주의" 문제로 넘어간다. 이 시기 레닌의 저작들을 인용했다면 그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레닌의 견해들과는 완전히 다른 견해들을 제시해야했을 것이다. 4월 4일 레닌이 해외에서 귀국하기 전에 볼셰비키당 다수파는 2월 혁명으로 짜르가 타도된 직후 수립된 르보프공의 부르주아 임시정부를 "비판적으로 지지할 것"을 촉구했다. 1917년 3월 볼셰비키당 협의회에서 이 견해를 가장 앞장서서 대변한 자는 바로 스탈린이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보고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적으로 임시정부는 혁명인민의 성과를 지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맡았다....사건들을 만들어 강요하고 부르주아들을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과정을 재촉하는 것은 지금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들은 미래에 어쩔 수 없이 우리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중간 부르주아가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에 제동을 걸고 시간을 버는 것이 필요하다....임시정부가 혁명의 경로를 강화시키는 한 우리는 이 정부를 지지해야한다. 그러나 이 정부가 반혁명적일 경우 이 정부에 대해 지지할 수 없다."-- 1917년 3월 당 일꾼 전국 협의회 초안 원본

당 지도부의 상당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완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레닌은 노동계급 독재를 촉구하는 것이 유일한 혁명노선이라고 끈질기게 주장했다. 이 입장을 통해 그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 강령을 수용했으며 우파에 의해 트로츠키주의를 주장한다고 비난받았다. 이 때문에 레닌은 당을 이념적으로 재무장시킬 필요가 있었다. 한때 그는 자신의 "4월 테제"가 지도부 내에서 표결에 붙여져 기각되자 평당원들과 함께 자신의 입장으로 투쟁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를 사임하겠다고 위협했다. 이 테제의 핵심 문구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노동계급의 불충분한 계급의식과 조직으로 부르주아 계급에게 권력을 넘겨준 혁명 제 1 단계에서 지금 러시아는 노동계급과 빈농이 권력을 장악해야하는 혁명 제 2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 이것이 현 정세의 구체적 모습이다."-- 레닌, "지금의 혁명에서 노동계급의 임무", 1917년

스탈린이 며칠 전 제시한 입장에 맞서, 레닌은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안된다: 이 입장이 제시하는 모든 전제가 전적으로 틀렸다는 점이 명확히 제시되어야한다...."(위의 글)고 요구했다. 카메네프는 레닌 입장에 대한 반대를 주도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성되지 않았다....레닌 동지의 일반적 정식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되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이 혁명이 사회주의 혁명으로 즉시 변모해야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전술에 대한 편지들"에서 레닌은 이 비판에 이렇게 응수했다:

"1917년 2월-3월의 혁명 후 권력은 다른 계급, 새로운 계급 즉 자본가 계급의 손에 장악되었다....

이런 한도 내에서 부르주아 또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은 완성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자신들을 "고참 볼셰비키"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항의의 함성을 보내고 있다.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에 의해서만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완성될 수 있다고 우리가 항상 주장해오지 않았느냐고 이들은 말한다....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전체적으로 볼셰비키의 구호들과 사상들은 역사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태는 우리의 예상과는 다르게 전개되었다....

'노동자 병사 대의원 소비에트' --- 바로 이것이 이미 현실에서 성취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이다.

따라서 이 정식은 이미 시효가 지났다....

이제 새로운 그리고 다른 임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내에서 조국방어노선 반대자, 국제주의자, '공산주의' 분자들인 우리는 꼬뮌으로의 이행을 지지하는 노동계급적 분자들과 소소유자 또는 소부르주아 분자들 사이의 분립을 성사시켜야한다.           

지금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은 사태 발전에 뒤떨어졌으므로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 진영으로 실질적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런 사람은 혁명 이전의 '볼셰비키' 골동품 문서보관소에 안치되어야 한다....

빠리 꼬뮌이 '즉시' 사회주의를 도입하기를 원했다는 부르주아들의 비방을 카메네프 동지는 반복해왔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꼬뮌은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데 너무 동작이 느렸다. 꼬뮌의 진짜 핵심은...특별한 유형의 국가를 수립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국가는 이미 러시아에 등장했다.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가 바로 이것이다!"-- 레닌, "전술에 대한 편지들", 1917년 4월

그렇다, 데이빗슨 동지, 빠리 꼬뮌은 노동계급 독재였다. 당시 [프라우다]지에 실린 글에서 레닌은 이 문제를 트로츠키와 똑같은 방식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강력한 혁명정부를 지지한다....문제는 이렇게 표현된다: 어떤 계급이 이 혁명을 수행하고 있느냐? 누구에 대항한 혁명인가?

짜르 체제에 대항한 혁명인가? 이런 의미라면 러시아의 지주와 자본가들 대부분은 지금 혁명가들이다....

지주에 대항한 혁명인가? 그렇다면 농민들 대부분 심지어는 부농 대부분 즉 러시아 인구의 10분의 9가 혁명가들이다. 지주들은 어쨌든 구원될 수 없다는 점에서 자본가들의 일부도 혁명가가 될 준비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본가들에 대항한 혁명인가? 이것이 진짜 쟁점이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자본가에 대항한 혁명이 아니라면 '병합이 없는 평화협정'이니 이런 평화협정에 의한 전쟁의 신속한 종식 등에 대한 모든 잡담은 단순함과 무지 또는 어리석음과 속임수에 불과하다....

소부르주아 지도자들 즉 지식인, 부농, 인민주의 정당...멘셰비키 등은 현재 자본가에 대항한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

결론은 명백하다: 반(半)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통해서만 러시아에 진정으로 강력하고 진정으로 혁명적인 정부가 수립될 수 있다."-- 레닌, "강력한 혁명정부", 1917년 5월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등장했던 소비에트를 레닌은 그 당시와 나중에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고 가끔 지칭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비에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지 않았다. 레닌이 표현했듯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는 구호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에 대항하기를 원치 않았던 소부르주아에 대한 투쟁이었다. 그리고 10월 혁명으로 탄생한 국가는 농민이 지지하는 노동계급 독재였다. 1917년 이후 레닌은 스탈린과 모택동이 그랬던 것처럼 두 계급이 지배하는 국가가 있을 수 있다는 암시를 한 번도 내비친 적이 없었다. 그는 카우츠키와 벌인 논쟁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소비에트는 노동계급 독재의 러시아적 형태이다" ("노동계급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1918년).

혁명정당의 구호와 강령은 계급투쟁에서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이것들은 어떤 행동들은 촉구하되 다른 행동들은 반대한다. 카메네프는 4월에는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구호를 유지하는 투쟁을 주도했다. 그리고 10월에는 혁명 봉기에 반대했고 봉기가 성공한 후에는 이에 대한 항의로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에서 사임했다. 이 행위에는 최소한의 일관성은 있다.

그러나 모든 곳에서 데이빗슨과 스탈린주의자들은 "고참 볼셰비키"의 강령이 10월 혁명에 의해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강변한다! 이 거짓 주장 뒤에는 스탈린주의 반(反)혁명 노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가 놓여있다. 사회주의적 요구들을 제출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농민이 토지를 장악하고 노동계급이 수탈자들을 수탈하기 전에 먼저 "민주적 단계"를 거쳐야한다 등등이 바로 이 반혁명 노선이다. 진정한 노동계급 혁명가로서 레닌은 1917년 경험으로부터 사태를 올바로 파악한 후 이전 강령의 불충분성이 명확히 드러났을 때 새로운 강령을 제출했다. 그런데 이 교훈들을 소화하기를 거부하고 검은 것이 희다고 계속 우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스탈린의 1927년의 "민주적 독재" 구호는 중국공산당의 무장해제 명령을 정당화했다. 그런데 이때 장개석은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전투적 노동자들을 학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도 이런 구호는 캄보디아의 시아누크공과 같은 "반(反)제국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전멸과 혁명의 패배라는 똑같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선택은 우리 모두 앞에 있다: 사회주의냐 야만상태이냐? 이 선택에는 어정쩡한 중간노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제 2장 일국사회주의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국가인 소련에서 관료집단은 노동계급으로부터 국가권력을 빼앗았다. 이러한 변화는 이론 영역에서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론으로 표현되었다. 후진국 러시아는 내전에 의해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제국주의 봉쇄와 1919년, 1921년, 1923년 독일혁명의 실패로 철저히 고립되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국가기구가 필요했다. 바로 이 기구 내부에서 특권 관료층은 자신의 기반을 강화시켰다. 불리한 내외 상황 때문에 맹목적인 혁명 "확산"보다 "타협" 및 토대 강화의 정책이 필요했다. 산업 재건을 도울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끌어들이고 기근을 끝내기 위해 중농에게 일정한 수입을 보장해주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중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개량주의 지도자들과 공동전선을 수립하는 것 등이 당면한 임무였다. "좌파 공산주의자들"처럼 "타협"이나 부르주아 전문가들을 이용하는 것 등을 원칙적으로 거부하고 "노동자 반대파"처럼 국가의 산업운영을 노동조합이 대신하는 등의 정책은 패배를 가져올 뿐이었다. 동시에 모든 타협은 그 나름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레닌은 처음부터 이 위험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관료적 직권 남용을 억제하기 위해 이미 1919년에 "노동자 농민의 감찰기구"(라브크린)이 설립됐다. 그러나 이 기구 의장이 스탈린이었기 때문에, 라브크린은 그의 사설 경찰력이 되었다.

1922년 제 11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 책임 있는 직위를 채우고 있는 4천7백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이 거대한 관료 기구, 이 엄청난 집단을 생각하면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누구를 지도하고 있는가? 공산주의자들이 이 집단을 지도하고 있다고 진실로 말할 수 있을지 나는 크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신의 최후의 저작 "소수정예가 더 좋다"(Better Fewer, But Better. 1923년)에서 그는 관료주의에 대항하는 전면전, 라브크린의 대대적인 축소, "현재 조금의 권위도 누리지 못하고 있는" 라브크린과 통제위원회의 통합 등을 촉구했다. 또한 자신의 "유언장" 후기에 당서기 스탈린의 경질을 촉구했다.

 

삼두체제 대 트로츠키

그러나 개인 또는 조직의 과오가 아니라 역사 자체가 초래한 현상을 단순한 행정 조치로 없앨 수는 없었다. 러시아는 5년간의 기근과 내전으로 지쳐있었고 오지도 않는 서구의 혁명을 기다리는 것에도 지쳤다. 이 패배주의 분위기와 공산당 자체를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대규모 관료층의 보수적 이해관계로 인해, 레닌이 사망하자 정권은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의 삼두체제로 확실히 넘어가고, 중앙지도부에서 트로츠키는 실질적으로 배제되었다.

결국 당내 민주주의와 공업화 전략의 쟁점이 결합되어 1923년과 1924년 사이의 겨울에 당은 격심한 위기에 휩싸였다. 농민과의 협력을 내건 "신경제정책"은 농촌에서 부농을 등장시켰다. 이들은 자신의 부르주아적 이해를 더욱 자각하면서 소비에트 정부에 저항했으며 공업은 계속해서 "달팽이 걸음"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동시에 스탈린은 비서들을 임명하는 제도를 정착시켜 당을 사조직처럼 운영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중앙 집중화된 계획과 공업화, 부농에 대한 공세, 당내 민주적 관행의 회복 등 노선의 급격한 전환을 요구했다. 물론 삼두체제는 그의 주장에 반대했다. (이로부터 일 년 후에 스탈린의 정책을 지지했던 부하린은 "달팽이 걸음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농민에게 "부자가 되시오!"라고 격려하는 등의 내용이 담긴 유명한 연설을 했다). 더욱이 이들은 자기들 노선의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1924년 2월과 3월에 이들은 "레닌 동지를 위한 소집" 캠페인을 통해 24만 명을 신입 당원으로 끌어들였다. 신입당원들은 곧바로 당서기(스탈린)의 노선을 지지하는 거수기가 되었다. 이외의 다양한 관료적 조치들을 동원하여 스탈린은 반(反)트로츠키 집회장으로 변한 1924년 5월 당 협의회에서 반대자 거의 전원을 당직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두 번째 벌어진 당내 투쟁은 트로츠키의 저서 "10월의 교훈"을 둘러싸고 시작된 "문필 논란"이었다. 이 저서는 1917년과 관련되어 그가 저술한 저작들의 서문이었는데 여기서 그는 혁명이 진행 중이던 때에 현재 당 지도부가 보였던 역할을 폭로했다.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봉기를 반대했었고 정부 및 당 직책을 사임했으며 멘셰비키와의 연립정부를 요구했었다. 스탈린은 1917년 3월 르보프공의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을 촉구했었다. 이 사실들은 젊은 세대 당원들에게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당 지도부는 대단히 곤혹스러워했다.

이들은 볼셰비키당 우파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트로츠키가 봉기 중에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반격에 나섰다. 그리고 10월 봉기 및 적군의 조직가였던 트로츠키가 1917년 이전에는 멘셰비키와 화해할 것을 주장해왔으며 이 입장을 한 번도 버린 적이 없다고 비난했다. 또한 그가 농민에게 적대적이었으며 레닌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정식에 대항해 "연속혁명"론을 계속 주장했다고 비난했다. 후자의 비난은 옳았다. 그러나 이들은 레닌이 1917년 "4월 테제"를 통해 연속혁명론의 핵심 내용들을 전부 수용했으며 자신의 이전 정식을 명확히 기각하고 이 점과 관련하여 특히 카메네프에 대해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무시해야했다. 그리고 이들은 나머지 문제들에 대해서는 거짓말과 비방으로 일관했다.

실제로 1914년까지 트로츠키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화해를 촉구하는 오류를 범했다. 그러나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인한 개량주의 사민당의 배신 때문에 조직 분립이 불가피하고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레닌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 "멘셰비키와의 통합은 불가능하다고 트로츠키는 오래 전에 말했다. 그는 이 점을 이해했고 이때 이후 그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었다"("볼셰비키당 뻬쩨르부르그 위원회 회의록, 1917년 11월 14일). 반면에 스탈린은 1917년 4월까지 멘셰비키와의 통합을 촉구했다. 이때는 이 문제가 날카롭게 제기되었고 멘셰비키 지도자 체레텔리는 곧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오늘의 안건: 체레텔리의 당 통합 제안

"스탈린: 우리는 통합해야한다. 통합 조건에 대해 우리의 제안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통합은 지머발트와 키엔탈 반전회의에서 제시된 노선에 따라 가능할 것이다."-- "1917년 3월 당 일꾼 전국협의회 초안 원본"

한편 트로츠키에 대항해 레닌주의를 방어했다는 삼두체제의 나머지 두 인물인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는, 멘셰비키와의 연립정부를 주장하면서 봉기 중 그리고 봉기 후에도 화해를 촉구했으며 봉기 자체를 반대했었다! 볼셰비키당에 우파가 없었다고? 레닌은 이들을 "혁명 파괴자들"이라고 규정했으며 이들이 직책으로 복귀하지 않을 경우 당에서 제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과정에서 있었던 이렇게 중요한 일화들을 "망각"하려면 역사를 의도적으로 다시 써야한다. 따라서 1917년의 뻬쩨르부르그 당위원회 회의록이 출판되고 있을 때, 편집자들은 레닌이 "트로츠키보다 더 훌륭한 볼셰비키는 없었다"고 발언한 회의 기록을 삭제했다! 그러나 인쇄공 한 명이 교정쇄를 트로츠키에게 넘겨주었으며 이것이 후세까지 보존되고 있다. 10월 혁명 과정에서 트로츠키가 수행한 지도적 역할을 날조하기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존 리이드의 저서 [세계를 뒤흔든 10일]이 봉기의 조직자 트로츠키의 역할을 아주 자세하게 묘사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트로츠키주의"에 대항하는 캠페인이 시작되었을 때 스탈린은 리이드가 사실들을 왜곡했다고 간단히 선언했다. 그런데 지난 7년 동안 아무도 리이드의 왜곡을 눈치 채지 못했다! 레닌의 "유언장" 역시 은폐되었다(나중에 흐루시초프는 이 내용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탈린이 "일국사회주의"를 발견하다

그러나 거짓말, 왜곡, 비방 등을 아무리 꾸준히 유포해도 새 지배파벌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스탈린-지노비에프-카메네프는 특히 취약했다. 왜냐하면 1917년 이후의 이론적 성과들, 코민테른 결의문들, 러시아공산당 강령 등 어디에도 이들의 더욱더 보수적인 성향을 "정당화시킬" 내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이들에게는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에 대항해서 명확한 대안이 될 새로운 이론이 필요했다. 바로 이 때문에 "일국사회주의"론이 등장했다.

트로츠키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지금 [가디언]지에 연재하고 있는 글들에서 카알 데이빗슨은 일국사회주의 이론이 진짜 볼셰비키 이론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노동계급은 광범위한 농민 대중과 '적대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유럽 노동계급의 직접적 지원이 없을 경우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을 유지하면서 자신의 일시적 지배를 지속적인 사회주의 독재로 전환시킬 수 없다. 이 주장을 통해 그는 볼셰비키들과 정반대의 입장에 섰다."-- [가디언]지, 1973년 4월 11일

그러나 이 주장은 완전한 날조이다. 1924년 12월이 될 때까지 심지어 스탈린을 포함하여 어떤 볼셰비키도, 승리한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직접적 국가 지원이 없이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론은 역사의 논리에서 벗어나 계급투쟁으로부터 고립된 채 안락한 둥지를 틀려는 기생적 관료 파벌의 욕구에 봉사하는 이론으로서 맑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했다.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 첫 초안에서 이 "이론"은 명확히 거부된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질문 제 19번: 이런 혁명은 한 나라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가?

대답: 그럴 수 없다. 대규모 공업은 세계시장을 형성시켜 지구상의 인민들 특히 문명화된 인민들을 긴밀히 연관시켜왔기 때문에 이들 각자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존하고 있다....따라서 공산주의 혁명은 한 나라 만의 혁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모든 문명국들 또는 최소한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에서 동시에 일어날 것이다."-- 엥겔스, "공산주의 원리", 1847년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너무 단도직입적이다. 왜냐하면 한 나라에서 혁명이 승리하고 노동계급 독재가 수립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한 나라에서 건설될 수 없다는 기본 전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레닌은 이 점을 인식하고 이미 1906년에 이렇게 적었다:

"러시아혁명은 승리할 수 있는 충분한 역량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승리의 성과를 유지할 정도로 충분한 역량은 가지고 있지 않다....왜냐하면 소규모 산업이 엄청나게 발달한 나라에서 농민을 포함한 소규모 상품생산자들은 노동계급이 자유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갈 경우 불가피하게 이들에게 저항할 것이다....자본주의 복귀를 막기 위해서는 러시아 내부의 예비 역량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세계에 이런 지원 예비 역량이 있는가? 있다! 서구의 사회주의 노동계급이다."

1917년 초가 되어서야 레닌은 후진국 러시아에서 먼저 노동계급 독재가 실현될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이것이 고립되고 헐벗은 "사회주의"를 암시한 것은 아니었다. 볼셰비키에게 노동계급 독재는 서구 혁명으로 가는 교량이었다.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조건과 계급이 철폐되는 사회주의 수립의 조건은 동일하지 않다. 러시아에 먼저 노동계급 독재가 수립되었다는 사실이 러시아가 사회주의에 맨 먼저 도달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었기 때문에 1924년 초 스탈린 자신은 이렇게 적었다:

"그러나 어느 한 나라에서 부르주아 권력을 타도하고 노동계급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라는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여러 선진국 노동계급의 공동의 노력이 없이 어느 한 나라에서 이 임무가 완수되고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물론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는 데에는 한 나라의 노력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우리의 혁명 역사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을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 특히 러시아와 같은 농민 국가로는 불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선진국의 노동계급들이 노력을 해야 한다."-- 스탈린, "레닌주의의 기초", 1924년 5월

그러나 같은 저서의 이후 판본에서는 이 부분이 정반대의 논조 즉 "완벽한 사회주의 건설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로 바뀌었다.

볼셰비키의 전망이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완전히 그리고 변화시킬 수 없을 정도로 반대되는 노동계급 국제주의였다는 점이 이보다 더 명확하게 표현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레닌 전집을 뒤져서 레닌 역시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믿었다고 "증명"할만한 인용구들을 찾으려고 한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고 레닌이 이 점을 부인한 많은 주장들을 무시한다고 해도 의문이 남는다. 즉, 왜 스탈린은 1924년 5월에는 정반대의 견해를 내놓았는가? 만약 "일국사회주의"가 정통 볼셰비키 이론이라면 왜 1924년 말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발견하지 못했는가?

데이빗슨이 인용하고 있으며 스탈린주의자들이 애용하는 "증거"는 레닌이 1915년에 쓴 글 "유럽 합중국 구호에 대하여"에 있다:

"그러나 별개의 구호로서 세계 합중국 구호는 전혀 올바른 구호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첫째 이 구호가 사회주의와 겹치기 때문이다. 둘째 단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의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나라와 다른 나라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잘못된 생각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와 정치의 불균등 발전은 자본주의의 절대 법칙이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먼저 여러 나라 또는 단 한 나라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 자본가의 생산수단을 몰수하고 자신의 사회주의 생산을 조직한 후 이 나라의 승리한 노동계급은 나머지 자본주의 세계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나 자신의 대의로 다른 나라의 피억압 계급들을 끌어당기고 자본가들에 대항하여 이 나라들에서 봉기를 부추기고 필요할 경우 착취 계급과 그 국가에 대항하여 심지어 무장력을 사용할 것이다."

이 시기 그의 저작들의 맥락을 보면 여기서 레닌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노동계급 독재를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 확실하다. 더욱이 그는 명백히 유럽을 지칭하고 있다. 왜냐하면 1915년에 그는 서구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러시아에서 노동계급 독재가 수립될 가능성을 인정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주로 애용하는 또 다른 "증거"는 레닌이 1923년에 쓴 글 "협동에 대하여"에 있다:

"대규모 생산수단 전부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 노동계급이 장악한 정치권력, 이 노동계급과 수백만 소농 및 빈농과의 동맹, 농민에 대해 확보된 노동계급 지도력 등은 완벽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모든 조건이 아닌가?"

이 글은 사회주의의 정치적 법률적 전제조건에 한정하여 논의하고 있다. 1923년의 글 "우리의 혁명"에서 레닌은 "러시아의 생산력 발전은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라는 말을 "논란의 여지가 없다"고 못 박고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부터 혁명이 무의미하다고 결론 내린 멘셰비키들을 논박하고 있다.

 

생산력

인플레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에 스탈린은 강제 집단화를 밀어 붙이면서 공산당 내부에 테러 통치를 자행하고 농민들과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사회주의의 완벽한 승리"를 선언했다. 1935년에 열린 코민테른 제 7차 세계대회의 한 결의문은 이렇게 선언했다: 산업의 국유화, 농업 집단화, 계급으로서 부농의 청산 등으로 "소련에서는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돌이킬 수 없게 승리했으며 노동계급 독재의 국가가 전면적으로 강화되었다." 1936년에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의 강령은 이렇게 선언했다: "전국 경제는 모두 사회주의화되었다." 이 새 강령을 지지하는 어느 연설가는 이렇게 주장했다:

"구 강령은 세계 노동계급 혁명을 통해서만 러시아가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심각한 오류를 가진 반(反)레닌주의 주장이다. 이것은 트로츠키주의를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구 강령은 1921년 부하린이 작성했으며 레닌이 참여한 정치국에 의해 승인되었다!

자신의 글에서 데이빗슨은 정통 맑스주의의 허세를 유지하려한다: "물론 맑스주의-레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의 최종적 승리 즉, 무계급 사회는 한 나라에서 가능하다고 주장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1930년대에 스탈린이 주도한 러시아공산당이 맑스주의-레닌주의에서 이탈했다고 그는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데이빗슨은 트로츠키가 일국사회주의에 반대하는 근거로 "우파 기회주의의 '생산력 이론'"을 주장했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생산력 이론"은 맑스주의 역사 유물론 분석의 기초 그 자체이다. 다음과 같이 주장한 사람은 바로 맑스 자신이었다:

"이 생산력 발전은...사회주의의 실제적 전제이며 절대적으로 필요한 개념이다. 첫째 이것이 없으면 결핍만이 일반화될 것이고 결핍과 함께 필수품 확보 투쟁과 과거의 모든 넌센스가 필연적으로 재생산되기 때문이다. 둘째 생산력이 이렇게 보편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통해서만 인간 사이의 보편적인 교류가 확립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없으면 (1) 공산주의는 어느 한 지역의 사건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2) 교류의 힘 자체는 보편적이고 따라서 무자비한 경제적 힘으로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3) 교류가 한번 확대될 때마다 지역 차원의 공산주의는 철폐될 것이다. 경험적으로 말하면 공산주의는 지배적 인민들의 행동이 '모두 한꺼번에' 또는 동시에 진행되는 행위로만 가능하다. 이것은 생산력의 보편적 발전 그리고 이것과 결부된 세계적 교류를 전제로 한다."-- 맑스와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1847년

그런데도 데이빗슨은 이 기본적 맑스주의 전제들이 흐루시초프와 유소기의 주장이라고 빈정거리면서 이렇게 주장한다:

"세계에서 지금까지 진행된 사회주의 건설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후진국에서 있어왔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견해에 따르면 이것을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근로 대중들 앞에서 사회주의 사회 사상을 가망없이 더럽히는 것이다'"

데이빗슨에 따르면 이 견해는 "확실히 웃기는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에 소련은 얼마나 "사회주의적"이었는가? 물론 소련은 공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를 통해 스탈린의 관료적 통치가 가한 끔찍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생산 조직의 우수성을 확정적으로 증명했다. 그러나 여전히 소련은 선진 자본주의국가들에 비해 한참 뒤져있었다. 적절한 수준의 의식주 등 가장 기본적인 필수품 등은 대중에게 여전히 제공될 수 없었다. 인플레는 기승을 부렸고 암시장은 계속 존재했다. 한편 관료집단은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들만의 안락을 확보했다. 높은 수준의 봉급, 특별 상점, 자동차, 휴가용 전원주택 그리고 다수의 기타 특권들이 이것의 실제 내용이었다. 레닌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가의 사멸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한 날부터 시작될 것이다. 아직도 계급 지배의 기관인 노동계급의 국가는 이제 절대 다수 인민의 도구가 되어 사회 위에 군림하는 독자적 권력을 지양하고 이들의 의지를 수행하고 이들의 적극적 참여로 운영될 것이다.' 그러나 1935년 소련에서 국가는 사멸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억압과 강제의 거대한 기관으로 성장했다.

데이빗슨 동지, 이것이 사회주의인가? 스탈린이 반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후에도 소련은 짜르 체제와 자본주의에 비해서는 크게 우수했다. 지독히 퇴보했지만 사회주의적 소유형태를 보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여전히 노동자국가였다. 그러나 1936년 소련 헌법을 통해 스탈린이 선언한대로 소련이 무계급 사회였던 것은 아니었다.

 

1926년 영국 총파업에 대한 배신

"일국사회주의" 이론의 반혁명적 의미를 가장 적나라하게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는 스탈린의 대외정책에서 나왔다. 그리고 노동계급 혁명이 위협하고 있던 여러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동맹하면서, 그가 코민테른을 체계적으로 격하시키고 최종적으로 해체시킨 것(1943년)에서 드러났다. 1926년 영국 총파업은 스탈린식 "국제주의"가 지닌 진정한 정치적 내용을 즉시 그리고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1925년에 영국 석탄광업주들은 1924년 체결된 계약을 폐기하고 광부들의 생활수준을 생존 이하 수준으로 추락시키려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새로운 단체협약을 원했다. 석탄 산업에 대한 공식 조사 후, 정부는 석탄산업 현대화의 주요한 부담을 광부들에게 지우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26년 5월 3일 광부들은 파업에 돌입했다. 다음날 전국이 총파업으로 들끓었다. 노동자지구에서는 투쟁위원회가 수립되어 투쟁 열기를 유지하고 응급 작업이나 특별 수송 등을 위한 허가증을 발행했다. 이것은 단순히 노사분규가 아니었다. 바로 자본가 국가에 대한 직접적 공격이었다.

그런데 파업의 조직을 맡은 노동조합총연맹은 파업이 혁명으로 번질까 겁에 질려 한창 파업이 상승하고 있던 9일째에 파업을 철회했다. 작업에 복귀한 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있거나 임금 삭감, 연공서열 폐기, 노동조합 활동 중지 등의 조건으로만 작업에 복귀할 수 있었다. 이에 항의하는 두 번째 총파업이 5월 13일에 터졌으나 노총 지도자들의 유화적 연설 끝에 그리고 대체할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다시 작업에 복귀했다. 그러나 12월 23일부터 29일까지 개별적인 합의서가 줄줄이 체결될 때까지 노동자들은 다시 작업을 중단했다. 결국 이들은 노동조합 지도부의 배신으로 혼자 투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광산소유주들은 모든 조항들에서 승리하여 전국에 걸쳐 유효한 단체협약은 패배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과 노동시간 연장을 감내해야했다.

1924년과 1925년 유럽에서 계급투쟁이 일시 후퇴하고 있을 때 스탈린은 개량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평화를 유지하고 어쩌면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을 해체할 방안을 마련하려고 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영국-러시아노동조합위원회였다. 이것은 1925년 5월 소련의 노동조합과 영국 노총 사이의 동맹이었다. 노총이 1926년 총파업을 배신하자 트로츠키는 이 파업파괴자들과의 합의를 즉시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탈린과 부하린은 이 요구를 거부했다. (이때 지노비에프는 반대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그러나 2년 후에 그는 스탈린에게 굴복했다.) 1926년에 영국 노총은 중국 혁명에 대한 영국 제국주의의 탄압을 지지했다. 다시 트로츠키는 영국-러시아노동조합위원회를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 요구를 다시 묵살했다.

마침내 1927년 이 위원회가 파기되었을 때, 파기를 주도한 것은 영국 노총 지도자들이었다. 이 위원회의 가장 주요한 목적은 러시아에 대한 영국의 간섭을 저지하는 것이었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논리적으로 확장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은 영국의 노동조합 배신자들이 언젠가 러시아를 지원할 것으로 믿으며 1926년 영국총파업을 희생시켰다.

 

스탈린이 명령을 내려 중국 공산당원들을 무덤으로 보내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의 또 다른 그러나 더욱 끔찍한 예는 1925년-1927년 중국혁명에 대한 스탈린의 정책이다. 이미 1924년에 중국공산당은 모스크바의 명령에 따라 손문의 인민주의적 부르주아 정당인 국민당에 입당해 있었다. 당시 정치국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트로츠키는 입당을 반대했었다. 진독수의 중국공산당 지도부도 반복해서 입당을 반대했다. 1925년 10월 이들은 국민당 탈당을 제안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 제안을 거부했다. 스탈린의 노선은 간단했다: 민족 부르주아, 도시 소부르주아, 노동자, 농민 등 "4 계급 동맹"의 지도하에 혁명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단계로 자신을 제한해야한다. 이 동맹의 정치적 표현은 국민당이며 이 정당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도시에서 "반(反)제국주의 부르주아"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을 억제해야하며, 농촌에서는 자신들과 농민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고 무엇보다도 반제국주의 세력의 단결을 유지해야한다고 명령 받았다.

당시 중국에서 스탈린의 주요 관심사는 혁명을 진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국민당 정부와 외교적으로 동맹하는 것이었다. 1926년 초 국민당은 제휴 정당으로 코민테른에 가입되었으며, "세계혁명의 총사령부"인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손문의 후임인 장개석 장군을 명예회원으로 선출했다! 이로부터 몇 주일이 지나지 않아 3월 20일에 장개석은 자신의 제 1차 반공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민당의 모든 지도적 직책에서 공산당원들을 축출시켰으며 국민당에 입당한 공산당원들의 명부를 요구했다. 코민테른 대표들의 명령을 받고 공산당 지도부는 이에 동의했다! 1926년 10월 스탈린은 실제로 전보를 보내 중국공산당에게 광동성의 농민 봉기 취소를 촉구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논평했다:

"공산당을 부르주아 지도부에 공식적으로 종속시키고 소비에트 수립을 공식적으로 금지시킨 것(스탈린과 부하린은 국민당이 소비에트를 대신하고 있다고 가르쳤다)은 1905년부터 1917년까지 멘셰비키들이 자행했던 맑스주의에 대한 모든 배신행위들보다 더 심대하고 노골적이다." -- 트로츠키, "연속혁명", 1928년

이렇게 스탈린의 정책은 해악이 컸다. 그러나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가 주도한 좌익반대파의 도전에 직면한 후, 그리고 1927년 3월에 시작된 상해 봉기의 결정적인 며칠 동안, 스탈린은 다시 또 다시 국민당에 굴복하는 자신의 정책을 재확인했다. 한편 국민당은 공산당을 전멸시킬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코민테른]지의 1927년 3월호 사설은 중국에서 주요 임무는 "국민당을 더욱 성장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4월 5일 트로츠키는 장개석이 노동자들에 대해 준(準)보나파르트적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다고 경고한 후 이 목적을 파탄내기 위해 노동자 소비에트의 수립을 촉구했다. 이때 스탈린은 모스크바의 당 회의에서 이렇게 뻐겼다: "우리는 중국 부르주아 계급을 사용한 후 이들을 쥐어짠 레몬처럼 버릴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때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아시아 최대의 노동자 봉기인 상해 봉기의 의의와 국민당과 결별해야할 필요성을 코민테른 지도부에 각인시키려고 모스크바에 호소했다. 그러나 이들은 장개석의 군대에게 상해를 넘기라고 지시를 받았을 뿐이었다. 4월 12일 국민당 군대는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은 공산당원과 전투적 노동자 수만 명을 학살했다. 이것이 바로 현실에 적용된 "일국사회주의"이론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스탈린은 자신의 정책을 기각하지 않았으며 장개석과의 동맹이 이제 끝났으므로(!) 우한에 정부를 수립한 국민당 좌파와 동맹할 것을 명령했다. 또 다시 중국 공산당원들은 "반제국주의" 부르주아 계급을 적대시하지 않기 위해 농민운동을 저지하라고 명령받았다. 그리고 다시 국민당은 공산당원들을 학살했다. 이 해 말에 스탈린은 자신의 중국 정책에 대한 좌익반대파의 비판을 물리치기 위해 수를 썼다. 전보를 통해 그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전술적 상황에서 광동 봉기를 명령했다. 광동 노동자들은 "소비에트 정부"를 영웅적으로 방어했으나 예상대로 봉기는 패배했다.

데이빗슨은 이렇게 주장한다: "모택동이 독자적으로 현실에 적용했으며 진독수와 장국도가 모두 반대한 정책을 코민테른이 주장했다." 실제로 모택동은 이 시기에 진독수의 노선을 비판하지 않았다. 1924년 가을에 그는 국민당 우파 지도자들과 너무 밀착한다는 이유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제명되었다!

중국에 대한 좌익반대파의 노선은 철저히 관료화된 러시아공산당과 코민테른에서 확고히 패배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소련의 수도에 트로츠키를 자유롭게 놔두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10월 혁명의 조직자이자 적군의 창립자인 트로츠키의 체포를 명령했다. 트로츠키는 중앙아시아의 알마아타로 유배되었고 이로부터 2년 후에 소련에서 추방되었다. 결국 볼셰비키당은 세계의 지도적 혁명 세력에서 스탈린 관료집단의 하수인으로 전락했다. 데이빗슨과 모택동주의자들이 일국사회주의 이론을 지지하면서 이들이 방어하는 것은 바로 이 배신의 역사이다.              

 

                

제 3장 "제 3기"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스탈린은 일관되게 우경화했다. 이 결과 러시아 국내에서는 부농에게 영국 총파업 때에는 영국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그리고 중국에서는 장개석에게 각각 굴복했다. 그는 정치국에서 부하린과 동맹하여 자신의 정책을 밀어붙일 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부하린은 농민에게 "부자가 되시오"라고 말했으며 사회주의를 "달팽이 걸음으로" 건설할 전망을 제시했다. 트로츠키가 주도한 좌익반대파는 스탈린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렇게 경고했다: 이 노선을 따를 경우 수천 명의 외국 공산당원들이 학살될 뿐 아니라 소비에트 체제의 기초 자체가 궁극적으로 위협받을 것이다. 이 비판에 대해 스탈린은 1927년 12월의 제 15차 당 대회에서 좌익반대파를 신속히 제명하고 이렇게 선언했다: "좌익반대파의 견해를 선전하고 우리 노선에 반대하는 것은 당원 자격에 위배된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일어난 부농의 반란은 트로츠키의 예상이 옳았다는 것을 극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극심한 인플레 때문에 통화의 가치가 크게 하락하여 농민들은 곡물을 팔아 번 돈으로 필요한 공산품을 구입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가가 정한 가격으로 곡물을 팔지 않기로 작정했다. 이 결과 국가의 곡물창고는 절반이 비었고 기아가 도시를 위협했다. 곡물 수매 과정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그러자 1928년 1월 스탈린은 갑자기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곡물을 강제로 빼앗기 위해 무장 원정대를 농촌에 보내라고 그는 명령했다. 그러나 이 조치로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5월에 그는 "부농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것이다"라고 여전히 선언했다([레닌주의의 문제들], 221쪽). 그러나 이 해 말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부농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을까? 이것은 황당한 질문이다....우리는 공개적인 전투를 통해 이 계급의 저항을 분쇄해야한다"(같은 책, 325쪽). 이렇게 스탈린은 정책을 정반대로 바꾸기를 되풀이했다.

1924년 이래 트로츠키는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를 주장해왔으며 이 때문에 스탈린은 그를 "농민의 적" 그리고 "초(超)공업화론자"로 낙인찍었다. 그러나 1928년 소비에트 정권에 반대하는 농민 반란에 직면하자 스탈린은 완전히 혼비백산하여 맹목적 보수주의에서 맹목적 모험주의로 정책을 바꾸었다. 1927년의 [통합 반대파 강령]을 통해 트로츠키와 지노비에프는 제 1차 5개년 경제개발계획의 성장률을 배로 올려 잡을 것을 요구했었다. 이제 스탈린은 노동자들의 엄청난 고통을 대가로 성장률을 세배로 높였다. 반대파는 협동조합의 신용대부를 통해 농민의 자발적 집단화를 유도하고 부농의 영향력에 대해 투쟁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 이제 스탈린은 4개월 만에 소련 농장의 절반을 강제로 집단화시켰다. 농민들은 이에 저항해 농사일을 거부하고 전국에서 말 50% 이상을 도살시켰다. 결국 국가와 농민 사이에 내전이 여러 해 지속되면서 3백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기관총으로 겨누면서 진행된 집단화를 트로츠키는 만행으로 규정하고 반대했다. 소부르주아를 설득을 통해 서서히 획득하고 협동적 생산을 통해 이들이 자발적으로 사회주의로 나아가도록 지도해야한다고 맑스주의자는 언제나 주장해왔다. 그러나 비록 관료적 계획에 의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으며 불필요하게 어려움들이 조성되었으나 그는 공업화 캠페인을 칭찬했다:

"소련이 이룩한 성공적인 공업 발전은 세계 역사적 의의를 획득하고 있다....이 공업화의 속도는 안정적이거나 확고하지 않다....그러나 사회주의 경제 방식에 내재한 엄청난 가능성들을 실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트로츠키, "무분별한 경제정책과 그 해악들", 1930년

스탈린이 실시한 농업 집단화와 공업화 모두는 반대파의 정책이 올바름을 완전히 입증시켰다. 그러나 이 정책들이 레닌주의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와 당의 민주주의가 다시 회복되어야했다. 위기를 통해 자신의 정책들이 파산했음이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스탈린은 정반대 노선을 택하고 자신의 관료적 독재를 강화시켰다. 그리고 트로츠키를 소련에서 추방했다.

 

스탈린이 "제 3기"를 발견하다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의 정책은 좌충우돌 국내정책의 복사판이었다. 1927년 상해 봉기 중 학살자 장개석 앞에서 중국 공산당원들이 무장을 해제할 것을 그는 명령한 바 있었다. 이 재앙 직후 그는 노선을 정반대로 바꾸어 광동 꼬뮌을 수립할 것을 모험주의적으로 명령했다. 이 역시 유사한 노동자 학살로 막을 내렸다. 1928년 여름 스탈린은 이제 무분별한 초좌익 노선을 제국주의 "제 3기" 이론으로 일반화시켰다.

이 "이론"에 따르면 1923년에 전후 혁명 상승기는 끝이 났으며 1928년까지 자본주의는 상대적 안정기를 누렸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즉시 그리고 최종적으로 붕괴하는 새로운 시기가 이제 도래했다. 오늘날의 파국론자들과 마찬가지로 스탈린은 경제위기가 자동적으로 혁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경제위기는 빈번히 노동계급의 격심한 사기저하를 초래한다.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국가권력을 넘본 공산당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후 급격히 우경화 정책을 펴면서 스탈린은 자신의 허풍에 찬 제 3기 이론을 조용히 거두었다.)                      

경제 불황의 와중에 코민테른의 초좌익 정책이 시행되자 각국 공산당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서구의 핵심 국가인 독일에서는 불황으로 인한 대대적인 노동자 해고사태와 공산당의 노동조합 기권 정책이 결합했다. 이 결과 공장노동자가 당원 가운데 차지하던 비율은 1928년의 62%에서 1931년의 20%로 추락했다. 이 때문에 공산당은 노동자 전위당이 아니라 실업자 전위당이 되었다. "제 3기" 모험주의의 처절한 결과가 전형적으로 드러난 예는 1929년 노동절 시위였다. 프랑스의 자본가 정부가 시위를 금지한 가운데 열린 행사에서 빠리 경찰은 4월 30일 활동적인 공산당원들을 모두 체포하여 3일 후에 풀어주었다. 베를린에서 사민당 경찰청장 최르기벨은 공산당원들을 잔인하게 공격했다. 이 때문에 총파업을 촉구한 공산당은 꼬리를 내려버렸다.

"제 3기" 정책의 또 다른 측면은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대중적 노동조합에 대항하기 위해 소규모 "혁명 노동조합"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공산주의자는 노동조합의 단결을 지지하지만 모든 분열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 대중을 조직하기 위해 회원 자격이 엄격한 직업별 노동조합을 분열시키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그리고 관료적이며 깡패처럼 개량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을 통제할 경우 좌익은 투쟁이 상승하여도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지 못할 수 있다. 이때에는 기존 조직에서 탈퇴하고 새로운 조직을 건설하는 것만이 패배를 막는 유일한 대안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압도적 다수 노동자들의 지지를 획득하여 대중조직으로 노동조합이 살아남는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이 원칙의 문제로 제기한 "제 3기" 복수 노동조합론은 문제가 아주 달랐다. 이 노선을 통해 개량주의자들이 주도하는 대중적 노동조합 연맹과 나란히 독자적인 노동조합 연맹들이 탄생했다. 미국의 노동조합단결동맹과 독일의 혁명적노동조합반대파 그리고 몇 몇 나라들에서 몇 십 명의 회원으로 구성된 수많은 극소 "적색 노동조합"은 성공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적색 노동조합" 정책은 기존의 대중 노동자 조직 내부에서 공산주의 지도부 수립을 위해 투쟁하는 레닌주의 정책과 완전히 대치된다. 그리고 몇몇 경우를 예외로 하면 이 정책은 패배할 수밖에 없다.

 

"사회파시즘"

이 정책을 이론적으로 일반화시키기 위해 스탈린은 새로운 것을 발견했다: 개량주의 사민당은 "사회 파시스트" 즉 "사회주의를 말하면서 파시스트로 행동하는 경향"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민당과 이들이 주도하는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의 일부가 아니므로 공동전선 전술은 적용될 수 없었다. 공산당이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은 사민당 평당원들과 노동조합원들에게 자기 지도자들을 버리고 공산당에 입당하라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 밖에 없었다.

사민당 지도자들은 파시즘 집권에 길을 내주었다. 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1919년 1월 독일사민당 지도자 노스케는 베를린의 "스파르타쿠스단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수백 명 혁명 노동자들의 학살을 개인적으로 조직했다. 독일공산당 지도자 리이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도 이때 학살당했다. 1929년 독일사민당의 최르기벨은 공산당의 노동절 행진을 피로 물들였다. 히틀러가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전진하는 순간마다 개량주의자들은 투쟁하기보다는 굴복했다. 히틀러가 이미 권력을 장악하고 난 후에도 약속한대로 대대적인 저항을 조직하는 대신 사민당 지도자들은 당의 전멸을 막을 수도 있다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나치 정부의 대외정책을 지지했다! 이들은 파멸이 닥칠 때까지 결코 투쟁하지 않았으며 사실 따지고 보면 노동계급 혁명보다는 히틀러의 집권을 더 원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스탈린이 주장한대로 사민당이 "파시즘의 좌파"에 불과한 것은 아니었다. 이 속물적인 사고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무시했다: 파시즘이 승리할 경우 사민당 조직과 노동조합들은 전멸당할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파시즘은 단순히 보복, 폭력, 경찰 테러의 체계인 것만은 아니다.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 내부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완전히 뿌리 뽑은 후 운영되는 특정한 정부 체계이다. 파시즘의 임무는 공산당 전위를 파괴하는 것 뿐 아니라 독자적이고 자발적인 조직을 모두 분쇄하고 노동계급의 방어 조직들을 전부 박살내고 사민당과 노동조합들이 75년 동안 성취한 모든 것을 송두리째 궤멸시키는 것이다."-- "다음에는 무엇이?", 1932년 1월

이때는 공동전선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투쟁보다는 후퇴를 원했다. 다만 평당원들과 평조합원들은 후퇴할 수 없었다. 이들은 투쟁하거나 전멸당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했다. 나치에 대항하여 사민당 지도자들이 공동으로 공세를 취할 것을 촉구하라! 만약 이들이 이것을 받아들이면 파시즘의 위협은 제거되고 혁명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이다. 만약 이들이 거부하면 이들의 배신은 노동자들 앞에 명확히 폭로가 되고 공산당이 유일하게 일관된 투쟁 지도부라는 것을 투쟁을 통해 증명하여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추동하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 공산당원 여러분, 여러분은 수십만 수백만 명이다. 여러분이 도망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여러분들에게 쥐어질 만큼 여권이 남아돌지는 않는다. 파시즘은 권력을 장악한 후 무시무시한 탱크처럼 여러분의 머리통과 척추 위를 지나갈 것이다. 여러분의 구원은 가차 없는 투쟁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민당 노동자들과 투쟁을 통해 단결하는 것만이 유일한 승리의 길이다."-- "반파시즘 노동자 공동전선을 위하여", 1931년 12월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에는 -- 우리가 집권 한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까지 스탈린은 "제 3기"의 종파주의적이며 패배주의적인 논리를 계속 밀어붙였다. 1930년 9월 선거에서 나치당은 이전의 80만 표에서 6백만 표 이상으로 득표율이 치솟았다. 이때 독일공산당 지도자 에르네스트 텔만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9월 14일은 어떤 의미에서 히틀러에게 최고의 날이었다. 그러나 앞으로는 좋지 않은 날들만 그에게 계속될 것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이 견해를 승인하고 독일공산당에게 "사회 파시스트 사민당에게 공세를 집중하라"고 촉구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파시즘에 대한 트로츠키의 분석을 비웃으며 사민당의 브뤼닝 정권과 나치당 사이에는 차이가 조금도 없다고 주장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들은 노동자 조직이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공산당 지도자 레멜레는 의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히틀러가 집권하게 하라 -- 그는 곧 파산할 것이고 다음에는 우리가 집권할 것이다." 이 범죄적이며 전적으로 비겁한 정책에 맞추어 공산당은 나치당과 손을 잡고 사민당의 프로이센 주정부를 타도하려했다. 그러나 1931년의 이 "적색 주민투표"는 실패로 끝났다!

독일 노동자들이 트로츠키의 공동전선 노선을 널리 지지하자 텔만은 1932년 9월에 이렇게 응답했다:

"나치를 패배시키는 방법에 대한 자신의 팜플렛에서 트로츠키는 하나의 해답만을 제시한다: '독일공산당은 사민당과 손을 잡아야한다...공산당이 사민당과 공동의 대의를 추구하지 않으면 독일 노동계급은 10년 또는 20년 동안 죽은 목숨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파산한 파시스트적 반혁명적 이론이다....독일에서 파시즘은 물론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 우리의 선거 승리가 이것을 보장한다."

이로부터 9개월 후 텔만은 히틀러의 감옥에 갇혀있었다. 나중에 그는 수천 명의 공산당원 및 사민당원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정당들과 노동조합들은 파시즘의 강철군화에 짓이겨졌다. 트로츠키의 분석과 정책은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 결국 독일 노동계급은 스탈린의 범죄적 맹목적 정책에 대한 대가를 톡톡히 지불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배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이미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다: "선진노동자들에게 될 수 있으면 크게 이렇게 말해야한다: 무분별과 허세의 "제 3기" 후에 극도의 공포와 굴복의 제 4기가 들어섰다"("독일, 국제정세의 열쇠", 1931년 11월). 비극은 시계바늘처럼 정교하게 진행되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후 극도의 공포에 질린 코민테른은 공산당 내부에서 독일 사태에 대한 논의를 일체 금지하고 사회파시즘에 대한 모든 언급을 중지했다. 대신 1933년 3월 5일자로 발행된 선언문 "만국의 노동자들에게"에서 집행위원회는 지난 5년간 거부했던 사민당 지도자들과의 공동전선을 촉구했다. 그리고 각국 공산당이 "공동행동의 기간 동안에는 사민당 조직들에 대한 모든 공격을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

 

공동전선

[가디언]지에 실린 카알 데이빗슨의 연재 글 "트로츠키의 유산"은 노동자운동에 대한 스탈린의 범죄행각을 일관되게 은폐하고 있다. 이것은 "일국사회주의", "평화공존", "2단계 혁명" 등 스탈린의 노선을 옹호하려는 시도이다. 히틀러 집권을 둘러싼 사건들에 대해 데이빗슨은 이렇게 주장한다: "실질적으로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잡도록 인도해 준 독일사민당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엄호하고 있다"([가디언]지, 1973년 5월 9일). 지금까지 위에서 제시한 글을 읽고 독자들 자신은 누가 파시즘 집권에 길을 열어 주었는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데이빗슨은 계속 이렇게 주장한다: "독일공산당이 오류를 범하지 않았거나 이들의 오류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비록 거부당했을지라도 이들은 사민당 지도자들과 단결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좀 더 했어야했다. 이렇게 하기보다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을 일면적으로 강조한 것을 포함해 '초좌익' 오류를 다수 범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사항을 하나 지적하지 않고 있다: 매 순간 스탈린 자신이 독일공산당의 정책을 지시했으며 그의 지시는 코민테른 회의들을 통해 반복 확인되었다!

레닌주의 공동전선 정책의 주요 구호는 "계급 대 계급의 투쟁"이었다. 이 노동계급적 내용을 스탈린주의자들은 일관되게 흐리려 하고 있다. 이것은 스탈린이 주장한 "민주적" 부르주아와의 "인민전선"을 레닌의 공동전선과 혼동시키려는 시도이다. 이들은 공동전선을 계급협조 전술이자 사민당 지도부에 대한 굴복으로 묘사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 때문에 진보노동당과 같은 일부 그룹들은 공동전선 전술을 아예 거부하고 있다:

"그동안 반복해서 지적해왔듯이 우리는 자본가들과의 공동전선 개념을 거부한다. 트로츠키주의자 그리고 좌익의 온갖 사이비들과의 공동전선 개념도 우리는 거부한다....

좌파와 중도파의 연합인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을 우리는 신봉한다."-- "혁명으로 가는 길 제 3호", [진보노동]지, 1973년 11월

개량주의 정당의 평당원들에게 자기 지도자를 버리라고 촉구하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은 언제나 유효하다. 그러나 전위를 무의미하게 고립시킬 생각이 없다면 개량주의 지도자들을 그저 무시할 수만은 없다. 코민테른 초기에 트로츠키는 공동전선 반대자들에 대해 이렇게 응답했다:

"공동전선은 노동 대중에게만 제시되는가 아니면 개량주의 지도자들도 포함시키는가?

이렇게 문제를 제기하는 자체가 오해의 소치이다.

우리의 깃발 주위로 또는 우리의 실제적인 당면한 구호들 주위로 노동 대중을 단결시키고 개량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을 무시할 수 있다면 이것은 물론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가장 깊은 열망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에 대한 영향력을 잃지 않기 위해 개량주의자들은 착취자에 대항하여 피착취자의 부분적 운동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음지에 숨어있는 개량주의자들을 끌어내어 투쟁하는 대중의 눈앞에 우리와 함께 세우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공동전선에 대해", 1922년

이 테제는 소련공산당 정치국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의해 승인되었다. 자신의 저서 [좌파 공산주의: 소아병]에서 레닌은 초좌익 분자들을 공격했으며 이 가운데 이렇게 촉구했다: "아무리 일시적이고 동요하며 믿을 수 없고 우연적일지라도 대중적 동맹자를 얻기 위해서는 모든 기회를 활용해야한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맑스주의와 현재의 과학적 사회주의 일반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다."

5년 동안이나 사민당 지도자들과의 동맹을 거부한 후 1933년 3월 스탈린은 완전히 노선을 뒤바꾸어 비판의 자유를 금지하는 "공동전선"에 합의했다. 이것은 개량주의자들의 불가피한 배신에 직면하여 미리 침묵을 지킬 것을 공산주의자들이 약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영국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1926년 총파업을 배신했을 때 스탈린이 이들에 대한 비판과 단절을 거부한 것과 똑같았다. 이것이 볼셰비키 노선과 전혀 무관하다는 점은 공동전선에 대한 코민테른의 결의문 원본을 읽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행동의 규율을 스스로 강제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은 행동 직전까지뿐 아니라 행동 이후에도, 그러나 필요하면 행동이 진행 중인 때에도 예외 없이 모든 노동계급 조직들의 정책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표현할 권리와 가능성을 보존해야한다. 이 조건을 거부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 "공동전선에 대한 테제", 1922년

 

소련: 퇴보한 노동자국가

독일의 사태를 통해 스탈린은 노동계급 혁명운동을 결정적으로 배신했다. 이 때문에 코민테른을 혁명적 인터내셔널로 더 이상 인정할 수 없었다. 이제 새로운 공산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수립하자는 주장이 정치적으로 필요한 결론이었다. 이 결론은 소련 자체에서 새로운 정당을 수립하는 문제와 소비에트 국가와 이것을 통치하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계급적 성격에 대한 문제를 동시에 제기했다. 스탈린에 의해 당에서 제명된 다수의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국가자본주의"체제로 보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 규정을 거부했다. 이렇게 할 경우 평화적 반혁명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며, 이것은 말하자면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과 같았다. 근본적으로 국가는 특정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소유형태에 기초하고 있다. 소련의 사회주의적 소유관계는 그대로 남아있었으며 10월 혁명의 이 거대한 성과는 가볍게 넘겨버릴 수 없었다. 관료주의적인 스탈린주의 지도부를 반대하면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소련을 무조건 방어해야한다.

동시에 소련은 건강한 노동자국가가 아니었다. 노동계급은 정치적으로 권력을 몰수당했다. 소비에트는 총서기의 결정을 승인하는 행정적 거수기에 불과했다. 이제 볼셰비키당은 관료집단의 창조물이었으며 1917년 혁명 지도부 전체는 스탈린 한 명을 제외하면 제명되거나 탄압 당했다. 반대파 전원이 제명되고 체포되고 유형에 처해진 최근 몇 년 간의 사태를 고려하면 이 기생적 관료집단이 혁명 없이 제거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범죄적인 경박함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혁명은 새로운 소유형태를 초래할 사회혁명이 아니라 정치혁명이 될 것이다. 소련은 퇴보한 노동자국가이다:

"...관료집단 자체의 특권은 소비에트 사회의 기초를 변화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료집단은 '계급'으로서 자신에게 특별한 소유관계로부터가 아니라 10월 혁명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노동계급 독재를 위해 근본적으로 적합한 소유관계로부터 자신의 특권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하면, 모든 관료집단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인민을 강탈하고 있다. 이 행위는 과학적 의미에서 계급 착취가 아니라 비록 대규모일망정 사회적 기생행태이다....

마지막으로 명확성을 완벽히 확보하기 위해 이렇게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소련에 맑스주의 정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치자; 그렇다면 이 정당은 정치체제 전부를 쇄신할 것이다; 관료집단을 교체하고 숙청하여 이것을 대중이 통제하게 만들 것이다 -- 그리고 모든 행정 관행들을 변모시켜 경제 운영에서 일련의 대단히 중요한 개혁들을 시행할 것이다; 그러나 소유관계를 타도하여 새로운 사회혁명을 수행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소비에트 국가의 계급적 성격", 1933년 10월

이에 대해 스탈린주의자들은 즉시 "반혁명이다"라고 고함을 지르고 트로츠키가 챔벌린, 히틀러, 일본천황 등의 첩자이며 자본주의를 러시아에 다시 복귀시키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은 트로츠키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소련을 방어하기를 거부하거나 사회주의 소유형태를 버릴 것을 촉구한 단 하나의 예도 들 수 없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임박한 1939년에 그는 히틀러에 대항하여 러시아를 방어하기를 거부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 맥스 섁트먼 분파에 대항하여 격렬한 투쟁을 수행했다. 트로츠키는 이때 반복하여 이렇게 강조했다: 아무리 지독하게 퇴보했더라도 소련이 노동자국가로 남아있는 한 이 체제를 방어하는 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은 혁명의 대의가 요구할 때 자신의 진지에서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한다.             

1960년대 초에 모택동은 이렇게 선언했다: 1956년 이래로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 소련 지도부는 "사회제국주의자"이며 소련은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적색 부르주아들"이 운영하는 새로운 제국주의 체제이다. 노동계급혁명동맹의 마이클 밀러는 "트로츠키주의에서 사회제국주의로"라는 제목의 팜플렛에서 모택동의 관점에서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했다. 이 관점은 트로츠키의 견해와 크게 대비 된다:

"1956년에 흐루시초프가 정치무대에 등장하여 노동계급 독재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고 모든 곳에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문화를 퍼뜨리고 있다....

소련과 중국 국가의 계급적 성격을 트로츠키주의는 이론적으로 전혀 이해하지 못했으며 실천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 경제적 토대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에서 사회적 소유로 변모하고 있던 러시아 역사의 시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언제나 정치구조 즉 상부구조를 강조했다....그러나 경제적 토대는 정치구조와 결코 분리되어 고려될 수 없다. 소련에서 정치구조의 핵심인 공산당은 부르주아 유형의 정치 파벌에 의해 장악되어 대(大)부르주아 정당의 변종이 되었다. 이제 이들은 사회주의적 경제토대를 역전시키고 시장을 위해 사적 소유와 생산을 회복시키고 엄청난 규모로 해당되는 모든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재생산하는 경제 정책들을 실시하느라 분주하다."

이 글은 모택동주의자들이 맑스주의 이론의 근본을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주장하고 있는 대로 러시아에서 평화로운 반혁명이 일어났다면 논리적으로 평화로운 사회주의 혁명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것은 레닌이 [국가와 혁명]에서 반박한대로 전형적인 사민주의적 입장이다. 더욱이 이러한 혁명이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집단에 의해 성취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관념론이다. 이것은 사회혁명은 소유관계의 타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는 맑스주의의 유물론적 이해와 완전히 대치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정책의 실제적 결과이다. 모택동의 주장에 따라 소련이 "제국주의"국가라면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대항하여 이 체제를 방어할 필요가 없다. 사실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는 중국-일본 동맹을 추진하고 유럽에서 "소비에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보루로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유지를 권장하기까지 했다! 이것은 "국가자본주의" 입장이 현실에 적용된 반혁명적 내용이다. 이것은 소련과 중국이 각각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동맹하여 서로에 대해 제국주의 전쟁을 벌이는 강령을 제시한다. 이것이 현실로 드러날 경우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의 사회주의적 소유형태들은 즉시 위험에 빠질 것이다. 현재 모스크바의 브레즈네프 파벌은 중국에 대항하여 자본주의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문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파벌은 작년에 미 제국주의와 동맹하려고 노동자국가들을 방어할 임무를 포기하려는 의도를 명확히 드러냈다. 미국의 폭격기들이 북베트남을 융단폭격 하던 바로 그 순간에 닉슨은 "평화공존" 선언문을 서명하도록 모스크바에 초대되었다!

이와 반대로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중국-소련의 단결과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무조건적 방어를 주장한다. 동시에 우리는 노동자국가 방어를 사보타지 하는 기생적 관료집단을 가차 없이 비판한다. 선진노동자들은 이 계급적 입장의 올바름을 인식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성과를 포기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모택동주의자들과 친소 스탈린주의자들을 거부할 것이다.      

 

 

제 4장 인민전선

 

1933년 말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제 3기" 초좌익 노선을 철회하고 갑자기 정반대 노선을 주장했다. 이제 "인민전선" 노선이 시작되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파시즘이 집권하고 제국주의 국가들이 소련을 군사적으로 공격할 위험이 다시 높아지자 공포에 질린 소련 관료집단은 자국 방어를 위해 동맹국들을 찾기 시작했다. 소련은 국제연맹에 가입하고 프랑스-소련 군사지원 조약을 체결했다. 이 시기 내내 코민테른은 유럽의 혁명적 노동운동을 면밀하게 저지하여 민주적 제국주의 강대국을 지배하고 있는 부르주아 계급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이를 위해 동원한 방법은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하는 계급협조주의였다. 그리고 이 방법에 반파시즘 투쟁이라는 미명을 사용했다.

1935년 8월 코민테른 제 7차 세계대회에서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보고를 통해 인민전선을 이론화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동자들을 위협하는 주요한 세력은 이제 파시즘이었다. 그러나 파시즘은 노동계급 뿐 아니라 농민, 소부르주아 일반, 부르주아의 일부 부위까지도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노동계급 독재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은 현 시기의 임무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제 다수 자본주의 국가들의 근로 대중은 노동계급 독재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가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의 하나를 명확히 선택하고 그것도 지금 선택해야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노동계급은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통해 부르주아의 "반파시스트" 부위를 포함하여 파시즘의 위협을 받고 있는 다른 모든 사회 세력들과 동맹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구체적 상황 속에서 우리는 노력을 기울여 이 정당들과 조직들 또는 이들의 일부 부위를 반파시즘 인민전선으로 끌어당기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것은 인민전선에 참여하는 조직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의해 주도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 급진당과 인민전선을 수립하는 것이 바로 이 구체적 상황이다...."-- 디미트로프, "코민테른 제 7차 세계대회 보고", 1935년

제 3기 초좌익 노선이 시행 중일 때 독일공산당은 히틀러에 대항하여 독일사민당과 공동전선을 수립하는 것을 거부하고 이들을 "사회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이제 공산당은 사민당과 지속적으로 동맹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 계급의 반파시스트 부위와도 동맹하여 정부를 구성하려고 했다! 1930년대 말 이탈리아에서는 이 "광범위한 동맹"이 더 확대되어 "정직한" 파시스트들까지 포괄했다!

인민전선은 계급협조주의 이론이자 실천에 불과하다.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방어라는 공통의 강령에 기초하여 다양한 계급들을 대표하는 조직과 정당들의 동맹이다. 이 동맹의 이름은 새로웠으나 그 내용은 새롭지 않았다. 독일사민당은 1920년대 내내 부르주아 중앙당의 민주적 분파와 "좌익연합" 정부를 구성했다. 유일한 차이점이 있었다면 공산당은 종종 자신이 혁명정당이라는 허세를 부린 반면 사민당은 자신의 개량주의를 좀 더 공공연하게 표방했다.

공동전선을 더 높은 차원에서 논리적으로 확대시킨 것이 인민전선이라고 스탈린주의자들은 주장하려한다. 그러나 이 주장만큼 진실과 거리가 먼 것은 없을 것이다. "노동계급의 공동전선"은 "계급 대 계급"이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결성되었다. 그리고 사민당이 "민주적" 부르주아 계급과 유지한 다년간의 계급협조주의 동맹을 파탄시키는 것이 이것의 목표였다:

"공동전선 전술은 공산당 소속 노동자들 그리고 다른 정당이나 조직에 속하거나 소속이 없는 노동자들이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공동으로 투쟁하자는 촉구이다."--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공동전선에 대한 테제", 1922년

다양한 노동자 조직들의 역량이 행동으로 결집되고 하부의 압력을 통해 투쟁에 나서도록 강요될 때에만 개량주의자들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위해 투쟁에 나선다. 그러나 적절한 때가 오자마자 즉시 투쟁을 배신한다. 따라서 이들의 정치적 본심을 폭로하는 것이 공동전선의 목표이다. 과거에는 볼셰비키당 만이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를 대표했기 때문에 개량주의자들과 공유하는 강령이 없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다. 왜냐하면 강령을 공유할 경우 레닌주의 강령을 포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다른 조직들을 비판할 권리에 어떠한 제한도 없어야했다. 따라서 공동전선의 두 번째 주요한 구호는 "비판의 자유와 행동의 통일" 또는 트로츠키가 표현한대로 "행진은 따로, 타격은 함께!"가 되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에서 노동계급 정당은 계급적 독자성과 강령을 포기해야한다. 1936년 12월 4일 미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고한 내용에서 당 지도자 얼 브라우더는 이 점을 아주 핵심적으로 요약했다:

"'인민'의 대다수에게 사회주의 강령에 동의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그들의 강령에 기초하여 그들과 연합하겠다고 우리는 말한다. 이렇게 한 후 그들의 강령도 우리의 강령으로 인정하면 우리는 이들을 조직하고 분기시킬 수 있다."

인민전선은 멘셰비키의 "2단계 혁명" 이론과 같다. 우선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한 후 자본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을 한다. 스탈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파시즘 사이에 근본적 사회적 갈등이 존재한다는 완전히 잘못된 개념에서 출발했다. 파시즘은 극심한 경제 하락의 시기에 자본주의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단계이다. 이 체제는 제 1차 대전 직후 유럽에서 등장했다. 정상적인 의회의 조치들로는 자본주의를 유지할 수 없을 때 자본가들이 마지막으로 기대는 수단이 파시즘이다. 스탈린주의자들은 파시즘이 자본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에 그 기원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2단계 혁명론을 정당화시키려 한 적도 있었다!

파시즘을 초래한 경제 붕괴의 상황 속에서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한 또 다른 해결책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공산당이나 사민당은 자본가 정부에 참여하도록 초대받는다. 이때는 그동안 있었던 부르주아 의회 내부의 합종연횡으로는 노동자 농민의 끓어오르는 투쟁을 효과적으로 제압할 수 없다. 연립정부에 참여할 경우 공산당은 파업을 파괴하는 등의 정부 조치를 지지해야한다.

193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준혁명적 상황이 초래되었고 이때 인민전선 정부가 수립되었다. "민주적" 부르주아 정당들과 동맹한 공산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총파업 그리고 심지어 봉기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으면서 대중의 강력한 투쟁의 물결을 잠재울 수 있었다. 월남과 같은 식민지 국가에서 인민전선 정책은 독립 요구를 취소하게 만들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계급협조주의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파시스트들을 분쇄하기 위한 노동계급 공동전선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공화파 장군들과 경찰에 의존하는 대신 이들은 노동조합에 기초한 노동자 민병대 수립을 촉구했다. 수적으로 열세였으며 코민테른의 극악한 비방 캠페인으로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노동운동에 대한 개량주의자들의 철저한 통제를 분쇄하여 대중적 지지를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또 다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의 노선은 올바른 것으로 증명되었다. 승리할 가능성이 많았던 혁명 상황이 치욕스럽게 패배 당함으로서 부정적인 의미에서 트로츠키주의 노선의 올바름이 증명되었다. 확실히 스탈린은 트로츠키가 그에게 붙인 별명 "패배의 위대한 조직자"를 자기 노력으로 얻었다.         

 

1934년부터 1936년까지 프랑스의 정세

"민주주의 거대 국가들" 가운데 프랑스에서 파시스트의 선동이 가장 성공하고 있었다. 파시스트 동맹들이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스트 조직들을 모방하여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파시스트의 위험을 수년 동안 무시하거나 폄하해온 공산당과 사회당 지도자들은 [불 십자가(Croix de Feu)] 그룹이 의회를 공격하여 쿠데타를 기도했을 때 공포에 질렸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자는 대중의 엄청난 압력 속에서 사회당과 공산당 주도의 노동조합 연맹들은 2월 12일에 대대적인 공동 시위를 벌였다. 이 시위의 엄청난 규모에 놀라 파시스트들의 활동은 몇 개월간 위축되었다. 지난 4년간 파시즘에 대항하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촉구해온 트로츠키의 투쟁은 스탈린의 제 3기 종파주의적-패배주의적 어리석음에 대항한 노동자 공동전선 전술의 올바름을 현실을 통해 증명했다.

1934년 프랑스공산당 지도자 모리스 토레즈는 프랑스사회당에게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공동전선은 레닌주의 구호 "행진은 따로, 타격은 함께"를 무시하고 대신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두 정당은 각자의 강령적 독자성을 포기하고 서로를 비판하는 것을 중지했다. 자신의 행위를 의회적 술수와 선거연합으로 한정하고 의회 밖의 반파시즘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을 분기시키기를 거부한 이 공동전선을 트로츠키는 비판했다. 이 당시 올바른 투쟁은 노동계급 혁명의 전망을 열 수도 있었다.

격심한 사회위기, 대대적인 파업의 물결, 노동자들의 투쟁 열기 한 가운데에서 "혁명적 상황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공산당은 권력 장악 투쟁에 나서기를 거부했다. 대신 "당면한 경제적 요구들"로 투쟁을 한정하여 노동계급을 혼란과 무질서 속에 빠뜨리고 파시즘의 성장을 가속화시켰다. 자본가들은 노동계급의 점증하는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파시즘을 지원했다. 공산당은 국유화 투쟁을 포기하고 노동자 민병대 수립 요구를 도발적이라고 간주하여 반대했으며 노동자의 무장을 거부했다. 대신 무장봉기의 직접적 전제조건인 "모든 곳에서 소비에트 수립"을 촉구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 혁명적 외피를 보존하려고 했다.

1935년 7월 프랑스공산당은 연립정부를 확대하여 부르주아 정당인 급진사회당을 포함시켰다.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에 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던 급진사회당은 진보적인 사회개혁을 주장했으나 사적 기업과 소유권을 확고히 지지했다. 급진사회당과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해 공산당은 이렇게 주장했다: 인민전선 강령은 파시즘에 대항하여 공화국을 방어하고 경제 불황과 노동개혁을 실시하는 것으로 한정되어야한다. 1936년 3월 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는 대승을 거두었다. 사회당은 하원의 최대 정당이 되었으며 이 정당의 지도자 레옹 블룸은 사회당과 급진사회당 연립정권의 수상이 되었다. 공산당은 부르주아 계급을 겁줄까 두려워 정부 참여를 거부했으나 의회에서는 인민전선 연립정부를 지지했다.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 시에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듯이 대중은 선거를 노동계급의 승리로 바라보고 엄청난 전투성을 분출시켜 5월과 6월의 총파업을 투쟁의 절정으로 상승시켰다. 총파업 초기의 요구들은 주로 방어적 성격이었으며 핵심은 15% 임금인상이었으나 파업은 거의 전부 전투적인 점거농성 파업 전술을 채택했다. 이에 부르주아 계급은 공포에 질려 블룸 정부가 즉시 출범하여 파업을 억제시킬 것을 요구했다. 블룸과 노동총연맹 관료들은 합의를 시도하여 일부 성과를 노동자들에게 선사하는 척 했으나 공장을 즉시 비울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그러나 이 합의안은 표결을 통해 파리의 금속노동자들에 의해 확고히 거부당했다.

트로츠키는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서술했다. 그러나 혁명을 두려워한 공산당은 투사들이 합의안을 지지할 것을 명령했다. 공산당 지도자 토레즈는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 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파업을 끝내는 법을 알고 있어야한다." 사회당과 급진사회당의 인민전선 정부는 파업 연장을 촉구하는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신문 [노동자 투쟁]지를 압수하여 부르주아 하수인 역할을 했다. 6월 중순이 되자 개량주의자들의 단합된 노력으로 파업은 저지되었다.

이때가 인민전선의 절정이었다. 왜냐하면 1936년 총파업을 분쇄하는 것을 통해 부르주아 계급이 블룸 정권에게 제시한 기본 임무 즉 혁명 상황을 저지시키는 임무가 성취되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 40시간 노동 등 몇 가지에 불과한 사회개혁은 곧 철회되었다. 1937년이 되자 블룸 정부는 임기 일 년째에 이미 노동계급의 신뢰를 상실했기 때문에 자신의 임무를 종료하고 상원에 의해 타도되었다. 1938년 중반에 급진사회당은 에두아르 달라디에의 주도 하에 보수주의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 해 가을에 일주일 48시간 노동제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의 발표가 있자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새로이 촉발되었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단 하루의 항의 파업을 제안했다! 달라디에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장에 군대를 보냈다. 노동운동은 붕괴하고 분노한 수백만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회원증을 찢어버렸다. 다음 해 1월이 되자 공산당은 불법화되었고 공산당이 주도하던 노동조합들은 전부 통합노동총연맹에서 축출되었다. 1940년 일부 사회당 의원들과 부르주아 정당 의원 전부는 표결을 통해 비쉬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로써 인민전선은 파시즘을 저지시키기는커녕 사회를 야만상태로 인도하는 "평화적 술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했을 뿐이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지속한 스페인의 인민전선

스탈린-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 정책은 스페인에서도 똑같이 반혁명적이었다. 1931년에 스페인 왕정은 타도되고 부르주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급진당과 사회당 연립정부의 사회정책은 1920년대 사회당의 지지를 받은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의 군사독재 정권보다 나을 것이 전혀 없었다. 1934년 10월에 정부의 보수적 정책에 항의하여 아스투리아스의 광산촌에서 봉기가 터졌다. 군대는 유혈 진압을 통해 수천 명의 광부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했다. 그러나 이 영웅적 봉기는 스페인 노동계급을 각성시켜 광범위한 노동자 공동전선인 노동자위원회가 수립되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응하기 위해 주요 노동자 정당들의 지도자들은 프랑스의 경우와 유사한 인민전선을 수립했다. 사회당의 우파와 좌파, 공산당,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등이 인민전선에 참여했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공산당 우파가 떨어져 나와 창당한 마우린 주도의 "노동자농민연합"(트로츠키는 이 정당을 "스페인판 국민당" 즉 2계급 연합정당이라고 불렀다)과 안드레스 닌이 주도했으며 한때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었던 공산주의좌파 그룹의 통합으로 탄생했다. 마우린의 정당과 무원칙하게 연합했으며 인민전선에 가담했기 때문에 안드레스 닌은 트로츠키운동으로부터 축출되었다.

1936년 1월 체결된 인민전선 합의는 노동계급의 투쟁노선을 포기한 전형적인 문서였다. 이 문서는 이렇게 약속했다:

"공화파는 토지가 국유화되어 무상으로 농민에게 배분되는 원칙을 인정하지 않는다....공화파 정당들은 은행의 국유화 조치들을 인정할 수 없다.... 그리고 사회당 대표단이 주장하는 노동자에 의한 생산의 통제도 인정할 수 없다."

1936년 2월 선거에서 공화파/노동자 선거연합은 다수당이 되었다. 그리고 부르주아 변호사 아자냐의 주도로 정부가 구성되었다. 프랑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대중은 이것을 승리로 해석하고 토지와 공장을 점거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 운동을 저지할 수 없었다. 이 결과 7월 17일 프랑코 장군을 비롯한 군대 지도부는 권위주의적 카톨릭 정권을 선포하며 반란을 시작했다. 이에 대해 아자냐 정권은 반란군 장군들과 협상을 시도했으며 대중에게 무기를 배포하기를 거부했다!

노동자 대중이 스스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 지연 전술은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과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아성이었던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은 수많은 공장들을 점거했으며 권총으로 무장한 채 군대의 병영을 공격했다. 단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이들은 이 도시를 완전히 장악했다. 이 봉기는 다른 곳들의 봉기를 촉발시켰다. 대중의 전투성에 놀란 공화파 정권은 기존의 정책을 뒤집어 대중에게 무기를 제공했으며 프랑코 반란군에 대한 미온적이나마 투쟁을 시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화파 정권에 대한 대안은 노동계급 혁명이었으며 이것은 언제든지 가능했다. 카탈로니아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주도한 전국노동자연맹(CNT) 산하 노동자위원회는 수송과 공업을 거의 전부 장악하고 있었다. 한편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로니아와 아라곤에서 농민협회와 농업노동자 조합 등은 집단농장을 수립했다. 기존의 지방정부는 사라졌으며 파시즘에 반대하는 정당과 노조 등의 위원회들이 정부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카탈로니아 반파시즘 민병대 중앙위원회였다. 이것은 부르주아 구성원들이 있기는 했으나 노동자 조직들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조직의 꼭대기에는 "부르주아 계급의 그림자"인 카탈로니아 인민전선 정부가 앉아 있었다. 이 정부는 역시 부르주아 변호사인 콤파니스가 주도하고 있었다. 1917년 2월부터 10월까지 러시아에 등장했던 것과 똑같은 이중권력 체제가 스페인에 등장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취약한 부르주아 정부를 암묵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러시아에서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고 요구했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 공산당,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무정부주의자들(이들은 국가를 부정한다고 주장하면서 노동자 정부도 거부했다!) 등 스페인의 노동자 정당들은 1936년 9월 부르주아 정부에 합류했다. 노동자들을 권력 장악으로 인도할 의사가 없다고 스탈린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친구들에게 확신시켰다. 1936년 8월 프랑스공산당 기관지 [인류]지는 이렇게 말했다:

"스페인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일반인에게 이렇게 알릴 것을 우리에게 요청했다: 스페인 인민은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할 생각이 없으며 오직 하나의 목적 즉 사적 소유를 존중하면서 공화국 질서를 방어하는 것만 알고 있다."

공산당과 사회당의 지지를 보장받자 아자냐와 콤파니스는 부르주아 법질서를 재확립하기 시작했다. 첫 조치는 노동자 신문의 검열이었다. 이어 카탈로니아 정부는 7월에 수립된 혁명위원회의 해산을 명령하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10월 말에는 전선 후방의 노동자들에 대한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곧이어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전국노동자연맹 지도자들은 노동자 탄압 조치들을 전부 지지했지만 정부에서 축출되었다. 또한 스탈린주의자들과 소련 비밀경찰(GPU)의 통제 하에 비밀경찰이 조직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노동자들의 저항을 분쇄할 수 없었다. 도발이 필요했다. 1937년 5월 3일 스탈린주의자들은 전국노동자연합 노동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국을 공격했다. 몇 시간 내에 도시 전체에 바리케이드가 설치되고 노동자들은 또 다시 권력을 장악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보복이 없을 것이라는 아자냐의 약속에 넘어가 중앙정부에 항복했다. 이로부터 이틀 후 정부의 공격 특수부대가 도착하여 전화국을 점령하면서 수백 명을 사살하고 수만 명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한 달 내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불법화되었고 스탈린주의자들의 요구대로 이 정당의 지도자들은 체포된 후 결국 총살되었다. 공산당은 즉시 공격 특수부대를 이끌고 집단농장과 노동자 민병대들을 해체시켰다. 내전은 일 년 반을 더 끌었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후였다. 노동자와 농민들은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없었고 급격히 사기가 저하되었다. 파시스트 반란군은 월등한 화력을 보유했기 때문에 승리를 보장받았다.

내전 기간 내내 스페인공산당은 부르주아 질서의 옹호자로 나섰으며 무정부주의 조직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집단농장, 노동자 민병대 등을 공격했다. "민주적" 제국주의 강대국들과 동맹하려는 필사적인 욕구에 사로잡혀 스탈린은 파시즘이 승리하는 한이 있어도 스페인 혁명을 절대적으로 반대했다. 패배의 거대한 조직자 스탈린은 스페인혁명의 학살자라는 타이틀을 하나 더 얻었다.

그러나 스페인혁명의 붕괴에 대한 책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닌을 비롯한 공산주의 좌파 그룹 지도자들은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자성을 위해 투쟁해온 경력이 있었다. 한때 이들은 스페인공산당보다 더 규모가 큰 조직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전선에 굴복한 이 중도주의자들은 스탈린만큼이나 스페인 혁명의 패배에 책임이 있다. 인민전선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을 때 이들은 시류를 거슬러 혁명을 준비했어야했다. 나중에 배신당했다는 사실을 인식한 대중이 이들을 지지했을 경우 이들은 노동운동의 지도력을 획득하여 혁명을 지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대중에 대한 배신행위에 영합했으며 결국 저항하기는 했으나 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인민전선

데이빗슨은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하면서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그리고 독일에서 스탈린 정책의 굴욕적인 패배 등을 거의 무시한다. 이 뿐이 아니다. 그는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스탈린이 자행했던 정책을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은 놀라운 현상이지만 나름의 이유들이 충분히 있다! 충실한 스탈린주의자인 그는 어쨌든 인민전선을 옹호해야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좀 더 인기 있는 예를 들면서 인민전선을 옹호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는 제 2차 세계대전을 예로 든다. 스탈린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이 전쟁은 파시즘에 대항하고 사회주의 조국인 소련을 방어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결론은 "심지어 부르주아 민주정부 내부의 일시적이며 동요하는 동맹자들까지 포함하여"([가디언]지, 1973년 5월 9일) 광범위한 인민전선을 수립하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전쟁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입장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반혁명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위대한 반파시즘 전쟁을 반대할 자가 하나도 없다고 가정한다. 사실 당시에 스탈린주의 정책은 확실히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의 "민주적" 성격에 대해 환상이 훨씬 적은 지금의 새로운 노동자-투사 세대는 스탈린주의에 쉽게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이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의 전쟁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입장은 제국주의 교전국들의 패배 그리고 내전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이었다. 동시에 이들은 소련을 무조건 군사적으로 방어했다. 이것은 학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를 가지고 당시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었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의 섁트먼 그룹에 대해 트로츠키는 격렬히 투쟁했기 때문이었다. 이 그룹은 소련에 대한 군사적 방어를 거부하면서 결국 전체 당원의 40%를 끌고 조직을 나가버렸다.

전쟁 중에 수적으로 열세였던 트로츠키 중핵들은 일부 지부가 사회 애국주의적 편향을 보이기는 했지만 대체로 국제주의 노선을 견지했다. 예를 들어 프랑스 지부는 독일 해군에서 트로츠키주의 세포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제 4 인터내셔널 지도자 다수는 나치에 의해 또는 스페인에서 닌과 같이 스탈린주의자들에 의해 처형되었다. 미국에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노총 지도부와 공산당이 지지한 파업 중지 합의안에 저항하는데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은 정반대의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공산당 지도자 얼 브라우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미국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해야한다....따라서 자본주의가 잘 유지되는 방법을 찾아야한다....우리는 자본가들이 자기 체제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도록 도와야한다."

1941년 12월 25일에 발간된 미국공산당 기관지인 [일간 노동자]는 이 정책을 시행하여 미국 노총의 파업 중지 합의안을 "국민적 단결을 위한 확실한 공헌"이라고 칭송했다. 이것을 현실에서 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쇄하는 것을 의미했다. 1943년 광부 노동자 파업에서 공산당 지도자 윌리엄 포스터는 파업 대체 인력과 "작업 복귀" 운동을 조직하기 위해 펜실베니아주의 광산지역을 돌아다녔다. 태평양 연안에서 공산당의 동조자였던 부두노조 위원장 브리지스는 작업 속도 올리기를 촉구했다.

이렇게 하여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인민전선 정책은 파업을 분쇄하고 혁명을 패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페인 혁명의 압살, 프랑스 총파업의 패배, 미국 광부 노동자 파업의 분쇄 등은 모두 계급협조주의의 결과였다. 이 정책을 논리적으로 결론지으면서 스탈린은 1943년 코민테른을 해체하여 자신의 부르주아 친구들에게 또 다시 양보를 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공동전선에 코민테른이 방해가 된다는 것이었다!                 

                                   

 

제 5장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위한 투쟁

 

노동계급이 투쟁을 통해 이룩한 성과들을 지킬 수 없는 당은 노동계급 혁명도 당연히 지도할 수 없을 것이다. 스탈린의 노선에 반대하여 1923년 성립된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는 10년 후 스탈린이 독일공산당에 명령을 내려 히틀러의 집권을 투쟁 한번 하지 않고 허용할 때까지 공산주의인터내셔널(코민테른, 제 3 인터내셔널)의 깃발을 흔들림 없이 지켜왔다. 러시아공산당과 코민테른이 자행한 가장 극악한 관료적 조작, 대대적인 제명조치, 유형, 추방 등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개혁을 철썩 같이 주장해왔다. 관료적으로 제명된 좌익반대파 회원들은 해당 공산당에 다시 가입될 것을 요구했으며 최대한 가능할 때까지 새로운 정당 창립을 선언하지 않고 코민테른의 분파로 활동했다. 소련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결정적인 사건들은 또 다시 노동계급을 투쟁으로 분기시키고 노동계급으로부터 권력을 탈취한 스탈린주의자들을 타도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역사상 유일하게 성공한 사회주의혁명과 연상되어 권위를 누리고 있던 코민테른은 대중과의 유대가 여전히 강력했으며 이 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좌익반대파가 성급하게 코민테른과 결별할 경우 수십만 명의 혁명적 노동자들은 관료집단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어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정치적 고립과 영향력 축소를 초래할 것이었다.

그러나 1933년 독일에서 파시즘의 승리를 초래한 코민테른의 종파주의적이고 패배주의적인 "제 3기" 정책은 좌익반대파에게 혁명전망의 근본적 변화를 강요했다. 1930년 이래로 트로츠키는 이렇게 경고했다: 독일에서 반파시즘 투쟁의 결과에 따라 세계 혁명운동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움직인 독일공산당은 나치에 반대하는 공동전선을 독일사민당에게 제안하기는커녕 이 정당을 "사회 파시스트"라고 비난하면서 파시스트 세력의 성장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

 

새로운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촉구하다

독일공산당은 저항의 시늉도 하지 않은 채 히틀러가 집권하는 것을 조용히 허용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트로츠키는 독일공산당이 결정적으로 퇴보했다고 올바르게 결론내렸다. 이 세계역사적인 배신과 패배로 독일 노동계급은 10년이 넘게 무력화되었으며 제 2차 제국주의 세계대전과 히틀러에 의한 소련 침공이 준비되었다. 이제 좌익반대파는 독일에서 새로운 정당을 창설할 것을 촉구했다:

"독일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공개적으로 결별하는 문제는 현재 원칙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스탈린주의자들이 저지른 역사적 범죄를 혁명 전위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텔만-노이만의 공산당이 혁명적 활력을 가지고 있다는 환상을 지지할 경우 우리는 대중에게 이들의 정치적 파산을 진정으로 방어하는 세력으로 비추어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이 중도주의와 정치적 부패의 길로 나가고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트로츠키, "독일공산당인가 새로운 정당인가?", 1933년 3월

그러나 코민테른의 나머지 공산당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코민테른의 다른 지부들 그리고 코민테른 전체에 대한 입장을 지금 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과 즉시 결별해야하는가? 확정적으로 그래야한다고 대답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독일공산당의 붕괴는 코민테른이 소생할 가능성을 낮추고 있다. 그러나 이 재앙 자체로 인해 일부 지부들이 건강하게 반응할 수도 있다. 이 과정을 돕기 위해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한다. 소련에서는 이 문제가 아직 확연하지 않다. 여기서 새로운 정당을 선언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독일에서 새로운 정당의 창당을 촉구하면서 코민테른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손에서 잡아채려할 것이다. 문제는 제 4 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것이 아니라 제 3 인터내셔널을 구원하는 것이다."-- 같은 글

그러나 독일공산당의 노선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는 스탈린의 똥고집에 대해 조금이라도 항의하는 지부가 코민테른에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독일 사태에 대해 토론을 촉구하는 지부도 없었다! 이에 대해 트로츠키는 이렇게 응답했다: 파시즘의 천둥 번개에 대해 전혀 미동도 하지 않고 관료들의 극악한 범죄행위를 온순히 따르는 조직은 죽은 것과 같으며 아무 것도 이것을 소생시킬 수 없다. 스탈린주의는 이미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넜다. 1933년 7월 트로츠키는 새로운 인터내셔널과 새로운 혁명정당을 창립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할 것을 좌익반대파에게 촉구했다. 새로운 전망에 따라 좌익반대파는 조직 이름을 국제공산주의동맹으로 바꾸었다.

트로츠키의 분석은 곧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 독일의 파산 후 코민테른은 제 3기 모험주의 노선 대신 어떤 대가를 치르든 부르주아 계급에게 굴복하는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국제 정책에서 소련은 레닌이 강도들의 소굴이라고 불렀던 국제연맹에 가입하기로 결정했고 프랑스 제국주의와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쪽으로 나가면서 공개적으로 혁명적 국제주의를 기각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은 제국주의 강대국을 "민주적이며 평화를 애호하는" 국가와 파시스트이며 호전적인 국가의 두 범주로 나누었다. 이제 제 3 인터내셔널은 러시아 관료집단의 외교적 이해를 추구하는 도구로 전환되어 "일국 사회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평화를 애호하는" 제국주의자들과 동맹했다. 따라서 프랑스공산당은 자기 부르주아 계급의 국방 예산안에 찬성하도록 지시받았다. 그리고 루즈벨트는 "제국주의 분쟁에 대해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정직하게 찾는" 인물로 공식 선언되었다. 또한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공산당은 자유 부르주아 정당들과 인민전선을 결성하여 3년 후 파시즘의 승리에 길을 열어주었다. 1943년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스탈린은 코민테른이 이제 어떤 목적에도 봉사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이 기구를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국제공산주의동맹과 이 조직에 동조하는 그룹들은 자신들을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고 선언하지는 않았다.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에서 제명되었기 때문에 정치활동의 무대가 박탈되었고 고립된 선전그룹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제한된 숫자의 중핵들을 훈련시킬 수는 있었으나 대중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수적으로 열세였다. 더욱이 좌익반대파의 조직들은 심각한 계급투쟁을 통해 검증되지 않았다. 따라서 가까운 미래는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준비하는 기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좌익반대파의 사상을 전파하고 개인이나 그룹을 통해 더욱 많은 동지들을 국제공산주의동맹의 일원으로 획득하면서 제 4 인터내셔널의 구호 하에 대중 선동을 수행하며 중핵들을 교육시키고 우리의 이론적 입장을 심화시키는 것 --- 이것이 가장 가까운 미래에 우리의 기본적 임무이다." (강조는 원저자)-- 트로츠키, "독일사회주의노동자당, 국제공산주의동맹 그리고 제 4 인터내셔널", 1934년 1월

국제공산주의동맹이 새로운 회원을 획득하는 데 사용한 가장 주요한 전술은 혁명적 재편이었다. 트로츠키는 자신의 고립된 소규모 운동이 직면한 임무의 거대함을 인식한 첫 번째 인물이었다. 그는 정치적 고립을 해소하기 위해 심지어 일시적인 동맹 세력이라도 찾아다니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의 첫발을 내딛기 위한 기회를 만들었다.

엄청난 혁명적 기회와 위험의 시기인 1930년대에 스탈린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지배적인 정서와 경향은 중도주의였다. 이들은 사회애국주의와 사회주의 혁명노선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었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의 독일 사태, 1934년 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 "좌파"와 그 산하에 있던 강력한 당 민병대의 탄압에 의한 파괴 등은 노동계급 운동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개량주의를 거부하는 분위기를 만연시켰다. 노동계급의 새로운 전투성이 고양되는 초기에 흔히 그렇듯이 중도주의 경향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했다. 국제공산주의동맹은 이들 가운데 가장 건강한 분자들을 혁명 강령으로 획득하기 위해 모범과 선전을 통해 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일부가 주장하고 있듯이 혁명적 재편 전술은 중도주의에 영합하는 전술이 아니다. 트로츠키는 동요하는 중도주의 지도부에 대해 일관되게 투쟁하였다. 그리고 강령이나 전술과 무관하게 모든 노동계급 조직의 "단결"을 주장하는 구호를 가차 없이 배격했다:

"'단결'을 촉진한다는 미명 하에 우리와 중도주의의 차이점을 흐리는 것은 정치적 자살일 뿐 아니라 관료적 중도주의의 모든 부정적 특징들을 은폐하고 강화시키고 키우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만으로도 혁명 경향들에 대항하여 중도주의 조직 내부의 반동적 흐름들을 돕는 것이다."-- "좌익반대파의 상태에 대하여", 1932년 12월 16일

유럽 노동계급을 재편하는 과정은 제 2 인터내셔널의 개량주의 정당들을 우회할 수 없었다. 코민테른에 대해 환멸을 느낀 다수의 노동계급 투사들과 청년들은 사민당에 가입하여 이 정당들 내부에 좌파 경향들을 급증시켰다. 프랑스, 스페인, 벨기에, 스위스 등의 개량주의 정당 내부의 청년조직들은 트로츠키의 사상에 공감했다.

프랑스에서는 1933년 말에 프랑스사회당이 우파로부터 분립하여 새로운 조직을 건설했다. 이로 인해 프랑스의 최대 노동자 정당인 사회당은 좌경화하였다. 트로츠키는 국제공산주의동맹의 소규모 프랑스 지부에게 사회당에 들어갈 것을 충고했다. 1934년 7월 사회당과 공산당이 "공동전선"을 체결하면서 통합 논의에 들어갔다. 이 사태는 즉시 사회당에 들어가야 할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주었다. 공동전선에 참여하지 않는 모든 경향은 자신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킬 것이었다. 소위 "프랑스 전환"이라는 이 입당전술을 트로츠키는 다른 지부들 대부분에 대해서도 주장했다.

프랑스 전환은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을 지지하는 세력 내부에서 격심한 분쟁과 심지어 조직 분열까지 초래했다. 미국의 오울러 같은 일부 초좌익 종파주의자들은 입당전술을 원칙적으로 거부했다. 이 문제 때문에 프랑스 지부는 반쪽이 났다. 안드레스 닌이 주도했던 스페인의 공산주의좌파 그룹은 이 전술을 단도직입적으로 거부한 후 1년 후에 개량주의 그룹과 통합하여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프랑스 전환이 시행된 경우에도 좌경화하고 있던 중도주의 조직들 가운데 혁명가들을 획득하려는 이 투쟁을 통해 확보한 새로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몇 명 되지 않았다. 노동계급은 이미 오랫동안 연속으로 패배했기 때문에 후퇴하고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위험이 다가온 상황에서 노동계급은 자기들 문제에 대한 역사적 해결책인 사회주의혁명보다는 즉각적 해결책인 경제투쟁에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는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은 이들에게 별 매력이 없었다.

 

제 4 인터내셔널의 창립

그러나 제국주의 세계대전은 임박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에 등장한 인민전선 정부 때문에 중도주의 조직들은 씨가 마르고 있었다. 따라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창립의 임무는 객관적인 필요가 시급하여 더 이상 지연될 수 없었다. 1938년 9월 파리에서 제 4 인터내셔널 창립총회가 열려 11개국을 대표하는 21명의 대의원이 참석했다. 제 4 인터내셔널은 수적으로 열세였으나 무엇보다도 강령에 있어서 레닌주의를 계승하고 있었다.

창립대회에서 채택된 강령적 기본문서 [자본주의의 단말마적 고통과 제 4 인터내셔널의 임무]("이행강령")은 제국주의 시대 노동계급의 이해를 응축시켜 표현했기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를 가장 포괄적이고도 집약적으로 표현한 문서이다. 그리고 이 문서의 내용을 반대하는 세력과 소위 수용하는 세력의 일부 모두에 의해 의도적으로 잘못 이해된 문서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이행강령]은 개량을 위한 강령이 아니며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을 주장하는 강령이다. 자본주의가 쇠퇴하는 제국주의 시대에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객관적 전제조건은 무르익었을 뿐 아니라 이미 물러 터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이 강령의 전제이다. 사회주의 세계혁명을 막고 있는 근본 요인은 노동조합과 대중적 노동자정당의 개량주의 지도부이며 이들은 노동자 운동 내부의 부르주아 하수인들이다: "인류의 역사적 위기는 혁명 지도력의 위기로 환원된다."

자본주의가 진보적인 시기에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조합 차원의 개량적 조치들, 정치 민주주의 등 자신의 최소강령과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최대강령을 구분시켰다. 그리고 후자를 기약할 수 없는 먼 미래의 임무로 미루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시대에는 "체계적인 사회 개량조치들 그리고 이들을 통한 대중의 생활수준 향상은 불가능하다....노동계급의 심각한 요구들은 모두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부르주아 국가의 한계를 넘어선다." 공산주의 전위의 임무는 노동계급의 객관적 필요를 표현하는 일련의 이행 요구들을 제시하여 자본주의를 타도할 필요를 노동계급에게 인식시키는 것이다:

"다가올 시기에는 선동, 선전, 조직 등을 통해 혁명을 준비해야한다. 이 시기의 전략적 임무는 혁명의 객관적 조건의 성숙성과 노동계급과 그 전위의 미성숙성(구세대의 혼란과 실망, 신세대의 경험 미숙)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 투쟁하는 대중이 현재의 요구들과 사회주의 혁명 강령 사이에 교량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필요가 있다. 이 교량에는 체계적인 이행 요구들이 포함되어야한다. 이것들은 광범위한 대중의 현재 의식에서 출발하여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이라는 하나의 최종적 결론에 반드시 도달해야한다." (강조는 원저자)-- [이행강령], 1938년

이러한 요구들에는 임금-노동시간 연동제, 자본가 경리 장부의 공개, 노동자 통제 하의 산업 생산수단의 몰수, 공장위원회-노동자 민병대-소비에트-노동자 정부의 수립 등이 포함되어 있다. 후진국에 대해 이행강령은 농민이 지지하는 노동계급 혁명을 촉구했다. 이것은 후진국에서 농업혁명, 민족해방 등 부르주아 민주적 과제와 사회주의 과제 등을 모두 해결할 것이다. 소련에 대해 이행강령은 노동계급에 의한 정치혁명을 촉구하면서 제국주의 세력의 공격에 대해 소련을 무조건 방어하는 제 4 인터내셔널의 임무를 강조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탄압

창립총회 당시에 제 4 인터내셔널은 2천5백 명의 회원을 보유한 미국 지부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제외하면 수십 명 또는 최대 수백 명 회원을 보유한 지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과 그의 추종 관료들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이 위협에 대한 스탈린주의자들의 유일한 해결책은 정치적 신체적 파괴행위였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기가 거느린 분파에 대해서도 걱정이 더욱 커졌다. 1936년을 기점으로 그는 군대의 지휘부 전체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조작 재판들을 통해 그는 1917년 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거의 전부는 물론이고 자기를 제외한 레닌 생전 정치국원 9명 전원을 기소하고 실형에 처했다. 1938년 3월에 열린 제 3차 모스크바 조작재판에서 트로츠키와 그의 아들 레온 세도프는 히틀러, 일본 천황 등과 결탁하여 소련 정부를 사보타지하고 타도하여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는 음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1956년 러시아공산당 제 20차 당 대회에서 행한 그 유명한 비밀 연설을 통해 흐루시초프는 모스크바 재판들과 이 재판들의 기초가 된 것으로 주장된 "자백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작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런데도 오늘날 소련을 추종하든 중국을 추종하든 스탈린주의자들은 모두 트로츠키가 파시스트들과 협력했다고 계속 비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증명할" 증거는 단 하나도 제시한 적이 없다.

모스크바 조작 재판들을 진행하면서 동시에 스탈린은 전 세계에서 트로츠키주의 지도자들과 소련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힌 수천 명의 좌익반대파 성원들을 처형하는 체계적인 캠페인을 벌였다. 보르쿠타 강제수용소의 어느 목격자에 따르면 이곳에는 약 1천 명의 볼셰비키-레닌주의자들이 있었으며 같은 도의 다른 수용소들에도 수천 명이 있었다. 죽을 때까지 이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 정권의 타도를 촉구하면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소련을 무조건 방어할 것을 언제나 강조했다. 1938년 봄 소련의 비밀경찰이 그나마 생존해 있던 트로츠키주의자 전원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을 때 이들은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사형장으로 행진했다.

국외에서 소련의 비밀경찰은 트로츠키의 아들, 트로츠키의 비서인 체코의 에르윈 볼프와 독일의 루돌프 클레먼트, 유럽에 주재한 소련 비밀경찰 총수였던 폴란드의 이그나스 라이스 등을 암살했다. 이와 같은 시기에 한때 유명한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스페인의 닌, 오스트리아의 란다우 등을 비롯한 다수의 인사들도 처형되었다.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 자신도 스탈린의 첩자에게 암살당하면서 이 캠페인은 절정에 다다랐다.

 

소련에 대한 무조건 방어

트로츠키가 제국주의 국가들과 결탁하여 소련을 타도하려 했다는 것이 이 시기 스탈린주의자들이 애용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뻔뻔스러운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진정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는 10월 혁명의 역사적 성과들을 무조건 방어해야한다고 트로츠키가 언제나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좌익반대파, 국제공산주의동맹, 제 4 인터내셔널의 모든 강령적 문서들은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소련을 무조건 방어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소련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체제를 일관되게 사보타지 해왔던 스탈린주의 정권을 타도해야했다.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통해 관료집단은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국가의 성과들을 진정으로 방어할 유일한 방법인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가능성들을 말살해왔다.

그러나 스탈린이 한 짓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1920년대에 적군을 반복하여 숙청했을 뿐 아니라 1930년대 말에도 소련군의 최고 지휘부를 두 번이나 숙청했다. 그리고 그는 히틀러와 맺은 독소불가침조약을 맹목적으로 신뢰하여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한 첫 몇 주일동안 소련군의 패주를 준비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항해 노동자들을 열성적으로 혁명으로 인도하고 소련에서 정치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회주의 건설의 길은 열릴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제 4 인터내셔널의 임무였다.

사실 트로츠키의 최후의 정치투쟁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전개되었다. 1939년부터 1940년까지 독소불가침조약 때문에 미국에서는 소련에 반대하는 여론이 빗발쳤다. 이 부르주아 여론의 압력에 굴복하여 미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 일각에서 소부르주아 반대파가 형성되었다. 섁트먼/버넘/에이번 그룹은 소련은 더 이상 노동자국가가 아니며 무조건 방어될 수 없다는 진실을 어느 날 갑자기 "발견했다". 트로츠키는 이 그룹의 주장에 대해 끝까지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결정적인 문제에 대해 동요할 경우 제 4 인터내셔널은 치욕스럽게 정치적으로 사망할 것이라는 점을 그는 완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섁트먼 그룹이 1940년 조직을 분리하고 청년 조직을 파괴했을 때 소련의 무조건 방어라는 볼셰비키 원칙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당원의 약 40%를 잃었다. 비록 조직적으로 허약하고 탄압을 당했으나 제 4 인터내셔널은 격심한 사회애국주의 물결의 시기에 자신의 강령을 흔들림 없이 지켰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비극을 모면할 수 있었다.

 

 

제 6장 1949년 중국혁명

 

"트로츠키의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가디언]지의 글들은 핵심적으로 이렇게 주장한다: "역사는 모택동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데이빗슨의 주장에 따르면 중국혁명은 식민지 후진국 혁명의 모델이다. 모택동 사상의 위대한 등불이 이 나라들에서 혁명의 길을 밝혀주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우선 모택동에 대해 널리 유포된 잘못된 생각을 하나 검토하자. 이에 따르면 그는 위대한 노동계급 지도자로서 언제나 노동계급 독재를 위해 투쟁했으며 그를 저지하기 위해 애쓴 유소기와 같은 배신자들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전에 연재된 글에서 데이빗슨은 이렇게 썼다: "1927년 코민테른은 당시 중국공산당 당수였던 진독수 그리고 장국도가 모두 무시하거나 반대했지만 모택동이 독자적으로 실행에 옮긴 정책을 주장했다." 이 주장만큼 진실에서 거리가 먼 것도 없을 것이다. 우선 진독수는 자신이 격렬히 반대했던 모스크바의 명령들을 불행하게도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수천 명의 중국 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스탈린의 명령을 거부할 정도의 노동계급적 줏대가 없었다.

둘째, 장개석 장군이 1926년부터 1927년 사이에 북부의 군벌들을 정벌할 때 코민테른이 내린 지시를 모택동은 거부했다. 이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모스크바는 모든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대중투쟁을 억제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1926년 10월 26일에 스탈린은 전보를 보내 농민운동을 억제시켜서 지주인 경우가 종종 있었던 국민당 장군들을 소외시키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때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모택동에게 명령했다: 핵심 지역인 호남성에서 이 투쟁 억제 명령을 실행에 옮겨라. 그는 즉시 자신의 고향인 호남성으로 내려가 명령과는 정반대의 정책을 실행하여 수만 명의 농민들이 농민협회를 수립하고 지주에게 속한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하도록 만들었다. 농민들의 이 거대한 투쟁 물결로 인해 국민당 군대는 재빨리 북부로 진격하는데 크게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이 투쟁은 쉽게 상상할 수 있듯이 국민당 장군들을 "불안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 모택동의 정책은 공산당 지도부의 정책보다 언제나 더 전투적이지만은 않았다. 1924년 가을에 그는 당 정치국에서 축출되었다. 국민당 우파와 너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정책에 대해 "항의"하는 모택동의 일반적 방식은 현장에 내려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정책을 실행하는 것이었다. 1927년 3월 31일자 코민테른 전보는 상해의 공산당과 노동조합들에게 명령했다: 상해에 당도한 장개석의 군대에 대해 총을 겨누지 말고 숨겨라. 장개석은 무장이 해제당한 중국공산당 소속 노동자들을 도살했다. 결국 이 명령은 수만 명의 공산당 투사들을 학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진독수는 이 자살적 명령에 대해 격렬히 항의했으나 명령을 따랐다. 그러나 모택동은 결코 항의하지 않았다.

1930년에 모택동은 "농민 소비에트" 지역의 토지개혁에 대해 다시 당 지도부와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공산당 당수였던 왕명은 모택동의 "부농 노선"을 비난했다. 왜냐하면 모택동은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촉구했기 때문이었다. 부농의 토지를 전부 몰수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도 똑같은 몫의 토지를 분배해 주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이것은 중농 노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왜냐하면 부농들은 일반적으로 급진적 폭력 투쟁을 거부하고 점진적 해결책을 원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토지와 자본을 축적할 기회가 더 크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봉건 지주계급을 과격하게 제거해서 가장 많은 이익을 보는 쪽은 중농이다. 역사적으로 토지의 "공평한(black) 분배"를 강령으로 제시한 것은 바로 중농이었다. 이들은 1917년 여름과 가을에 러시아의 농민 봉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것이 농촌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은 채 취할 수 있는 가장 과격한 토지개혁 노선이라는 사실이다. 게릴라 전쟁은 단순히 극빈 농민들 뿐 아니라 농민 일반의 지지를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립되고 장비가 빈약한 게릴라들은 농민으로부터 배신당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현대의 효과적인 무기들에 비해 농민의 유일한 무기는 이들의 압도적인 숫자이다. 그리고 이 무기를 이용하려면 단결이 필요하다. 따라서 모든 게릴라 운동이 계급투쟁을 농촌에 도입하는 대신 중농 또는 부농의 지지를 받는 정책을 택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맑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이 유일하게 일관된 혁명 계급이라고 주장하며 게릴라 노선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반일(反日) 공동전선" 시기

그러나 모택동은 그저 명민한 게릴라 지도자였던 것만은 아니었다. 서서히 그는 스탈린주의의 핵심을 명확히 이해하게 되었다. 노동자와 빈농을 관료적으로 통제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에 굴종하는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의 핵심이었다. 그는 대장정 직후 국민당과의 제 2차 "공동전선"을 열렬히 주장하면서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코민테른 제 7차 세계대회는 제 3기 초좌익 노선을 폐기하고 인민전선 노선을 채택했다.

코민테른 대회 직후인 1935년 8월 1일에 중국공산당은 모든 애국적 계급들에게 공산당과 손을 잡고 일본에 대항하자고 호소했다. 새로운 인민전선 정책에 부응하여 모택동은 부농과 중농의 지지를 얻기 위해 농업정책을 현대화하는 새로운 지침을 내놓았다. 1935년 12월 25일 중국공산당 정치국의 성명서는 이렇게 말했다:

"소비에트 인민공화국은 부농에 대한 정책을 변경한다; 봉건적 착취가 자행되는 경우를 제외하고 스스로 경작하든 일꾼을 사서 경작하든 부농의 토지는 몰수되지 않는다. 토지가 균등하게 분배될 때는 부농은 빈농이나 중농과 똑같은 몫을 분배받을 권리를 갖는다."

바로 여기에서 진짜 부농 노선이 드러났다. 이로부터 6개월 후 이 노선은 당 중앙위원회의 성명서를 통해 확장되었다: "일본에 대해 저항하는 군인들과 일본에 반대하는 사업에 종사하는 애국자들 모두의 토지는 몰수되지 않을 것이다." 이로 인해 대지주도 아들을 적군에 입대시키기만 하면 간단히 자기 토지를 그대로 가질 수 있었다.

이 토지 정책은 정치 차원에서도 반복되었다.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 정부"는 "소비에트 인민 공화국"이 되었고 이 정부는 이렇게 선언했다:

"'인민 공화국'은 광범위한 소부르주아 계급들이 대중과 단결하는 것을 자신의 영토에서 인정한다. 소부르주아 혁명 계급 전부는 소비에트 정부에서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를 부여받는다."

한편 1936년 가을에 명령이 하달되어 인민공화국이 장악한 지구의 하부 단위에서는 "공산당"이란 당명을 금지하고 대신 "반일민족해방협의회"를 조직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부르주아 계급에게 굴종할 의사를 밝힌 후에 중국공산당은 1937년 2월 10일에 국민당에 전보를 보내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최근 몇 년간 모택동주의자들은 공동전선만 강조할 뿐 당을 등한시한 자들에 대항하여 "위대한 조타수" 모택동이 쓴 저작들을 칭송해왔다. 그러나 "애국적 공동전선"에 참여하는 것은 대중에 대한 노골적인 배신이었다. 물론 모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 민족해방투쟁이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휩쓸리기 직전까지만 중국의 반일 투쟁을 확고히 지지했다. [역자 주: 중국의 반일 투쟁이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자 미국 등 서방 제국주의 교전국들은 중국을 지원하여 중국의 투쟁을 제국주의 전쟁의 일부로 만들었다. 이때 중국의 반일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제국주의 교전국 한편을 지지하는 것이 되어 사회주의 혁명 투사의 강령이 될 수 없었다.]) 공산당의 제안에 대해 국민당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조건이 충족되면 공산당의 제안을 수용하겠다고 새로이 제안했다: 적군과 소비에트 정부를 해체하고 공산주의 선전 일체를 중지하며 계급투쟁에 대한 선동을 포기한다. 이 제안을 중국공산당은 수용했다. 그러나 공산당 장악 지역을 국민당의 통치 하에 통합시키고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 군대를 흡수한다는 약속은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문서상으로만 합의되었다.

제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모택동의 계급협조주의 노선은 가능한 선에서 더욱 노골화되었다. 그는 스탈린의 "4계급 동맹"을 "신(新)민주주의" 구호로 이름만 바꾸었다. 이것은 "반혁명 및 배신자들에 대한 모든 혁명 계급들의 독재"로 규정되었다. 데이빗슨은 신민주주의 노선을 좀 더 그럴듯하게 치장하여 이 중간 단계는 내전이 끝날 때까지만 지속되고 이후에 "혁명은 즉시 그리고 중단 없이 사회주의와 노동계급 독재의 제 2 단계로 이행 한다"([가디언]지, 1973년 4월 25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모택동은 이런 얘기는 꺼내본 적도 없다:

"중국혁명의 과정은 두 단계로 분리되어야한다: (1) 민주주의 혁명; (2) 사회주의 혁명....이 식민지 반식민지 혁명의 제 1 단계 또는 제 1 조치에 대해 말하면 사회적 성격상 이것은 여전히 근본적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발전의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이 여전히 객관적으로 요구된다....

중국혁명은 오직 두 단계로만 성취될 수 있다: 첫 단계는 신민주주의이고 두 번째 단계는 사회주의이다. 더욱이 첫 단계의 기간은 상당히 길 것이고 하룻밤 만에 결코 달성될 수 없다." -- "신민주주의에 대하여", 1940년 1월

이 시기의 다른 문서에서 모택동은 이 점을 더욱 명확하게 설명했다:

"왜 우리는 혁명의 지금 단계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부르는가? 혁명의 목표가 부르주아 계급 일반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의 억압에 향해있기 때문이다. 혁명 강령은 사적 소유를 철폐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 일반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혁명의 결과는 자본주의 발전을 위해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따라서 '토지를 경작자에게' 정책은 노동계급적이거나 사회주의적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책이다....

신민주주의 정부 체제에서는 자본과 노동의 관계를 재조정하는 정책이 채택될 것이다. 우선 노동자의 이해가 보호될 것이다. 8시간에서 10시간까지의 노동일... 노동조합의 권리들. 또 한편으로 국가, 개인, 협동조합 등에 속한 기업들의 합당한 이윤이 보장될 것이다....중국 경제에 이익이 된다면 외국인의 투자도 환영한다...." -- "연립정부에 대하여", 1945년 4월

데이빗슨 동지가 주장하는 사회주의로의 "중단 없는 이행"은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사회적 경제적 차원에서 이 "신민주주의"의 의미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반일 공동전선"기간 동안 강제된 토지 정책을 검토하기만 하면 된다. 이 정책은 다음과 같은 "진보적" 조치들을 포함했다:

"대부분의 지주들은 일본에 반대하고 있으며 일부 계몽된 지주들도 민주주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따라서 당의 정책은 봉건적 착취를 감소시켜 농민에게 도움을 줄 뿐 봉건적 착취 전부를 청산하는 것은 아니다....

....지주의 민사적 정치적 토지적 경제적 권리들을 보호할 뿐 아니라 지대와 이자를 지불하도록 농민에게 충고한다." -- "반일 투쟁지역의 토지 정책에 대한 중앙위원회 결정", 1942년 1월

모든 혁명 계급들의 혁명공동독재라는 신비하면서도 완전히 반(反)맑스주의적 개념에 대해 모택동은 아주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두려움없이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애국자 장개석과 함께 진짜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이 정부에서 국민당은 정부의 다수파가 될 것이고 군대의 압도적 다수를 장악할 것이다. 이 계획은 1946년 1월 "정치협의회"에서 작성되어 중국공산당에 의해 수용되었다. 정부는 전적으로 장개석이 임명하는 40명의 인사들로 구성될 것이고 이 가운데 절반은 국민당 그리고 나머지는 공산당을 포함한 다른 정당들에 의해 채워질 것이다. 국민당 군대는 90개 사단으로 그리고 공산당 군대는 18개 사단으로 그 규모가 각각 제한될 것이다. 이 합의안이 결코 현실화되지 못한 원인은 국민당의 일부 특히 군부가 공산당과의 타협에 반대한 데에 있었다.

이렇게 1920년대 말부터 1940년대 말까지 20년에 걸쳐 모택동은 중국 자본가 계급 그리고 심지어는 가끔 봉건주의 분자들과 화해를 빈번히 시도했다. 동시에 그는 멘셰비키의 2 단계 혁명이론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의 경우처럼 공산당이 청산되고 수십만 명의 투사들이 살해되는 일은 중국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국민당 정부는 너무 부패하여 장개석은 연립정부를 수립할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 부르주아 계급은 언제나 그렇게 나약하지만은 않았다. 상해 학살 직후 장개석은 국민당의 통치를 안정화시킬 수 있었고 1927년부터 1936년까지 그는 공산당이 장악한 지역들 대부분을 체계적으로 점령할 수 있었다.

 

신민주주의인가 아니면 연속혁명인가?

이제 중국혁명의 두 번째 측면을 살펴보자: 역사는 누가 옳다고 증명했는가? 데이빗슨은 트로츠키의 주장을 인용한다: 1917년 4월 레닌이 명확히 기각한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노선을 스탈린이 중국에서 소생시키려는 시도는 완전히 틀렸다:

"민주주의 독재 정식은 그 효용성을 가망 없이 오래 전에 상실했다....중국의 엄청난 후진성 아니 좀 더 정확히 표현하여 러시아에 비교하여 중국의 엄청난 후진성 때문에 제 3차 중국혁명은 '민주적' 시기를 경과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러시아에서 1917년 11월부터 1918년 7월까지 있었던 6개월 동안의 민주적 시기도 중국에는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도시와 농촌에서 부르주아 소유체제를 가장 단호하게 뒤흔들고 철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레닌 사후의 제 3 인터내셔널], 1928년

데이빗슨은 "트로츠키의 이 빗나간 예상에 비해 모택동의 신민주주의 이론은 올바른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역사상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첫째, 모택동의 반복된 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장개석과 연립정부를 결코 구성할 수 없었다. 둘째, 내전 말기에 공산당이 전국을 점령했을 때 중국 자본가 계급의 상당 부분은 장개석과 함께 대만으로 도망갔고 이를 통해 "신민주주의"의 핵심인 부르주아 계급은 중국 본토에서 제거되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창립 직후 중국의 소유관계가 변화했다는 점이다. 1947년 10월 10일이 되어서야 모택동은 국민당 정부 타도 구호를 제출했다. 이 점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의 연안 지역을 점령하자 모택동은 국민당과의 타협은 불가능하며 "신민주주의 유형"의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고 인식했다. 바로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은 스탈린의 명확한 명령을 거부하며 독자적인 권력 장악에 들어갔다. 장개석을 타도하겠다고 공산당이 결정하자마자 논리적 결론에 따라 1930년에 모택동이 추구했던 "부농 노선"과 유사한 농업개혁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정책은 1942년부터 1947년까지 실시했던 자신감 없는 지대 인하와 적군이 강제하는 지대 징수 조치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더욱이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의 선포 직후 중국공산당은 "연립정부"를 수립했다. 이 정부는 "민주적" 소부르주아 정치인들이 몇 명 포함되기는 했으나 확실히 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국가권력이 의심의 여지없는 적군의 군사적 지배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본가 계급의 상당수는 이미 대만으로 도망가고 없었다.

정권수립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산당은 중공업을 국가소유로 운영하기 시작했으며 일부 제조업체들은 국가가 통제하고 감시하는 가운데 사적 소유권이 계속 인정되었다. 마지막으로 이 정책은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 전쟁 때문에 1952년 초에 시작하여 국내 자본가들에 대한 일련의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데이빗슨 동지, 어디에서 민주적 단계가 확장되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줄 수 있는가? 중국혁명의 과정 전체는 모택동의 완전히 환상적인 공상주의를 극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중국공산당은 반복적으로 민주적 부르주아 정부를 수립하려는 욕구를 선언했으나 혁명의 결과 확립된 소유관계는 노동자국가의 소유관계였다.

 

농민이 노동자국가를 수립할 수 있는가?

추산에 따르면 1949년에 노동자는 중국공산당 당원 전체의 5%에 불과했다. 공산당은 압도적으로 농민과 소부르주아 지식인의 정당이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혁명정당의 지도를 받는 노동계급만이 노동계급 독재를 수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제 3차 중국혁명"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는가? 우선 중국혁명은 트로츠키가 예상한 패턴을 따르지 않았다는 점을 명확히 인식해야한다. 모든 혁명기에 발생하는 격렬한 계급 양극화 과정에서 농민은 자본가 계급을 따르는 부위와 노동계급을 따르는 부위로 분열된다. 농민 혼자서는 자본가 착취 계급의 결연한 저항을 타도할 사회적 위력이 없다. 더욱이 사회주의 소유형태를 확립하는데 필요한 단결된 계급적 이해도 농민에게는 없다. 맑스주의 이론은 이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그러나 1949년 중국혁명은 농민이 압도적 다수를 구성한 정당의 지도를 통해 그리고 소부르주아 군사 관료집단이 지도한 군대에 의해 성취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다음과 같은 맑스주의 강령의 핵심에 모순되지 않았다: 후진국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민주적 과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농민의 지지를 받아 노동계급이 자신의 계급 지배를 실현하는 것이다.

농민에 기초한 중국공산당이 혁명에서 승리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사회적 위력에 기초하여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하는 노동계급이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진행된 제 2차 중국혁명 와중에서 중국의 노동계급은 패배와 패배를 거듭하면서 기가 꺾였으며 엄청난 인적 손실을 겪었다. 그리고 이후 중국공산당의 정책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의도적으로 억제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고려해야할 중국혁명의 근본적인 측면은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승리로 수립된 건강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이 체제에서 노동계급은 국가권력에서 배제되었다. 1949년 이래로 국가권력은 공산당 상층부, 인민해방군, 국가 관료집단 등에 의해 강력히 통제된 스탈린주의 관료-군사 계층의 것이었다. 중국 정부의 경제 정책은 "대약진 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보이듯이 연이어 실패했다. 그리고  참주선동적인 "노동계급 문화대혁명"의 시기에조차 노동자 통치의 민주적 형태들은 수립되지 못했다. 이 현상은 중국에서 계급이 완전히 철폐되는 사회주의 건설의 유일한 방도는 군사-관료집단을 타도하는 정치혁명뿐이라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1940년대 말 장개석 정권은 너무도 부패하여 스스로 타도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무단, 북경, 광동 등의 국민당 군대는 내전 말에 총 한방 쏘지도 않고 항복해버렸다. 더욱이 미국의 지배계급은 국민당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너무 실망한 나머지 1948년과 1949년 시기에 국민당 정권에 대한 물질적 지원을 중단했다. 마지막으로 소련이 만주를 점령하자 무기가 대단히 부족했던 공산당 군대는 갑자기 현대적인 일본 무기를 다량 공급받게 되었다. 이 특별한 상황들을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다시 말하면 만약 중국 노동계급이 제 4 인터내셔널이라는 자신의 깃발로 투쟁했고 국민당의 부르주아 정권이 저절로 와해되지 않았다면, 모택동의 농민군은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문화대혁명"의 신화가 바랬고 관료집단이 중국정부를 다시 직접 장악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중국이 소련, 동유럽 국가들, 쿠바, 북베트남 등처럼 기형적 노동자국가라는 점을 이해하기는 훨씬 쉽다. 그러나 오직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만이 모택동 정권 초기부터 이 입장을 견지해왔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1955년 당 대회의 결의문은 중국혁명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혁명 내내 모택동 일당은 혁명 과정 자체를 자의적으로 규제하고 제한했다. 농업개혁은 '단계들에 따라서' 진행되었고 한국전쟁 기간 동안과 이후 미 제국주의의 공격이 정권에 대한 지주들의 반대를 자극했을 때에야 완료되었다....제 2차 중국혁명 와중과 이후에 패배와 패배를 거듭했기 때문에 그리고 도시 특히 노동계급을 농촌의 군사적 투쟁에 종속시키고 이를 통해 독립적 정치세력인 노동계급의 등장을 봉쇄한 중국공산당의 의도적인 정책 때문에 중국 노동계급은 기가 꺾였다. 이때를 틈타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 국가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국공산당은 군사력으로 지지까지 받으면서 정치 중핵들과 지식을 보유한 유일한 조직이라고 대중은 인식하게 되었다." -- "제 3차 중국혁명과 그 여파", 1955년 10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기가 없을 때에도 대중에게 진실을 말할 용기가 있는 정당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혁명의 성과를 방어할 수 있고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진전시킬 수 있도록 연속혁명의 작동방식을 이해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모택동주의자들은 "진보적 자본가 계급"과 "공동전선"을 체결할 반동적 환상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소위 "문화대혁명"에 대해 아무 생각 없이 열광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할 역사적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는 점을 스스로 증명해왔다. 이 임무의 성취는 맑스, 레닌, 트로츠키의 혁명 전통을 진정하게 계승하고 있는 제 4 인터내셔널 투사들의 몫이 될 것이다.        

     

 

제 7장 모택동의 중국:  스탈린을 추종하다가 결국 닉슨과 손을 잡다

 

자금성에 출몰하는 명조와 청조 황제의 귀신들은 황제 타도의 음모를 꾸미고 있는 불충한 후계자에 대해 자기들도 그런 적이 있으므로 공감하면서 틀림없이 껄껄 웃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과 다르지 않은 새로운 왕조가 북경에 수립되어 중국 인민을 통치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신들의 피상적 인식과는 달리, 과학적 인식론으로 무장한 맑스주의자는 중국의 사태를 비교할 수 없이 깊이 인식하고 있다. 최종적으로 분석하면, 모택동의 궁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음모는, 자본주의에서 이탈한 채 고립된 후진국에 대한 제국주의 세계질서의 압력 때문에 발생하고 그 결과가 결정된다. 모택동의 관료집단이 아무리 기이하고 개인적인 특성을 드러내더라도 이들의 운명은 중국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미래의 운명과 떨어질 수 없이 얽혀 있다.

모택동의 소부르주아 민족주의 관료집단은 대대적인 농민 봉기를 통해 중국에서 자본주의를 파괴하고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수립했다. 이들은 중국을 옛날처럼 위대한 강국으로 회복시키려고 결심했다. 1950년대에 이들은 미 제국주의의 위협 때문에 소련 진영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소련의 통치자들은 중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허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점이 더욱 명백해지자 중국의 관료집단은 소련 진영에서 이탈했다. 그리고 중국을 후진국에서 강대국으로 변모시키려는 열망에 불탔다. 바로 이 열망이 1960년대 말 문화혁명이라는 격렬한 분파투쟁을 폭발시켰다. 이 투쟁을 통해 다시 권력을 장악한 모택동은 소련에 대항하여 중국을 미 제국주의의 반(半)동맹국으로 변모시켰다.

 

공상적 모험주의의 경제 논리

1958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된 대약진 운동은 실패했고 이 때문에 모택동은 조용히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실각은 문화혁명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중국은 농업이 대단히 후진적이었다. 이 때문에 중국의 제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53년-1956년) 기간 동안 정통 스탈린주의 공업화 정책은 이 나라에 적용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객관적 상황 때문에 대약진 운동이 실시되었다.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은 경제 잉여의 상당량을 대규모의 현대적 중공업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증가하는 도시 노동계급에게 필요한 식량과 공업 원료는 강제 집단화를 통해 농민에게서 짜내야했다. 이 때문에 농업 생산 총량과 식량 소비는 크게 감소되어야했다. 공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던 1930년대에 러시아의 식량 소비는 15% 하락했으며 특히 우크라이나에서 농민들은 대대적인 기근에 시달렸다.

극도로 빈곤한 중국은 소련의 급격한 경제성장 모델을 채용할 수 없었다. 1953년 중국의 일인당 식량 생산량은 1929년 소련에 비해 절반 밖에 되지 않았다. 1930년대 소련에서 강요된 식량 생산 축소가 그대로 적용되었을 경우 중국은 문자 그대로 대대적인 기근에 처했을 것이다. 중국의 빈곤과 정통 스탈린주의 공업화 모델 사이의 갈등은 1956년에 절정에 달했다. 이때 급격히 팽창하고 있던 중공업 투자는 소비재와 원자재의 품귀를 초래하여 인플레를 유발시켰다. 스탈린처럼 계획을 밀어붙이는 대신 중국 관료집단은 제 1차 5개년 계획을 포기하고 긴축정책을 실시했다. 1957년에 투자는 실질적으로 감소했으며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해고되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갔다.

스탈린주의 체제에서 흔히 그렇듯이 경제 긴축정책은 정치 자유화를 초래하여 백화제방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러나 활짝 핀 꽃의 향기는 관료집단에게 전혀 맘에 들지 않았다. 백화제방 캠페인이 드러낸 사회 불만의 규모와 깊이는 모택동 정권을 크게 긴장시켰다. 이제 국가의 권위를 다시 내세우고 더 가혹한 규율을 강제하면서 대중에게 국가적 목표를 강요해야한다고 관료집단은 판단했다.

농업 집단화의 모순적 상황 역시 대약진 운동을 초래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스탈린의 러시아와는 달리 중국의 경우 1956년까지 농업 집단화는 상당히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중국공산당은 지주에게 승리하여 토지를 평등하게 분배하여 농민들 사이에 상당한 도덕적 권위를 누리고 있었다. 이 때문에 대중은 공산당의 시책에 자발적으로 호응했다. 농민들은 협동조합에서 생산의 규모와 방식을 둘러싸고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협동조합을 책임지는 지역 당 간부들은 생산량 극대화의 압력에 시달렸다. 생산량 극대화를 위해서는 농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재투자하고 노동시간을 더 투입해야했다. 이 때문에 당 간부들은 농민의 지지 없이 농업 생산을 확대해야했는데 이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이 결과 협동조합을 실질적인 국영농장으로 전환하여 농민들이 국가의 시책에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당원들의 압력이 거세졌다.

이 요인들이 결합하여 1958년의 대약진 운동으로 나타났다. 대약진 정책의 핵심은 협동조합들을 수천 가구를 포괄하는 자급자족형 거대생산단위(인민공사)로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인민공사는 엄청난 규모의 노동력을 해방시킬 것이며 이 노동력으로 수공업 방식으로나마 공업을 성장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소형 용광로처럼 원시 기술로 중공업 제품을 생산하며 수자원 절약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경우 급격한 공업화의 토대가 마련될 것이었다. 이것이 대약진 운동 초기의 판단이었다. 이제 인민공사의 구성원이 된 농민들은 생산량에 따라서만 임금을 받으며 자기의 토지나 생산물에 대한 권리가 전혀 없는 농촌노동자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을 선전하기 위해 천년왕국이 곧 도래하여 모두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었다. 몇 년 만 지나면 중국은 서방의 생산력 수준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고 15년 이내에 완전한 사회주의가 성취될 것이라고 공산당은 자신 있게 떠들었다. 간단히 말해 몇 년 만 영웅적으로 희생하면 농민들은 지상낙원에서 살 수 있다는 장밋빛 청사진이 제시되었다.

이 운동이 실제로 경제성장을 가속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의 저변에 깔린 "공산주의 전망"은 반동적 공상주의였다. 선진 노동자국가들의 국제적 분업으로 일반적 궁핍이 해소될 때 공산주의 체제가 수립될 수 있다. 그러나 수백만 농민의 원시적인 노동을 통해 즉 빈곤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통해 공산주의가 성취된다는 것이 중국식 "공산주의"인 대약진 운동의 사상이었다. 대대적인 빈곤 속에서는 기생적 관료집단을 낳은 경제적 기초는 물론 반혁명을 통해 중국이 자본주의 착취질서로 복귀할 가능성은 그대로 남을 것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고 황당하게 떠벌리면서도 "시커먼 심보로 범죄를 마구 저지르는 배신자들의 반(反)당 파벌"이 새로 발각되고 이들의 직책이 박탈당할 때마다 이들이 자본주의 복귀를 음모해왔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급적 착취의 물질적 기초인 일반화된 궁핍이 해소되어 계급들이 사라지는 것이 사회주의 체제이다. 노동계급은 사회주의의 유일한 담지자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은 궁핍과 억압의 희생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문화혁명의 물질적 기초인 인류 최고의 기술적 성취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는 1백 명의 농민을 1대의 트랙터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택동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는 1대의 트랙터도 없이 1백 명의 농민들이 뼈 빠지게 노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약진 운동은 사상 유래 없는 규모로 노동 군사화를 시도했다. 관료집단은 체력이 소진될 때까지 농민들을 부려먹었다. 이 때문에 강제 노동으로 생산을 독려하는 지옥과 같은 현실이 나타났다. 결국 당 중앙위원회는 지역 당 간부들에게 이렇게 지시해야했다:

"어떤 경우에도 8시간의 수면, 4시간의 식사와 재충전 등 12시간은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며 이 시간은 절대 줄일 수 없다."-- [북경 평론]지, 1958년 12월 3일

대약진 운동이 중국과 소련 진영의 역사에서 대단히 특이한 경제 붕괴를 초래했다. 이것이 이 운동에 대한 일반적 평가이다. 생산 하락의 정확한 규모는 밝혀지지 않았다. 중국 정권은 1960년부터 1963년까지의 경제 통계들을 공개한 적이 없다. 이 사실 자체가 재앙의 정도를 짐작케 한다. 그러나 합리적 추산에 의하면 식량 생산은 1958년부터 1960년까지 15%에서 20%까지 하락했다([시사 현장]지, 1964년 1월). 그리고 1959년부터 1962년까지 공업 생산은 30%에서 40%까지 하락했다([계간 중국]지, 1970년 4월-6월).

대약진 운동이 초래한 재앙의 정확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주장들이 다양하다. 물론 악천후가 하나의 이유가 되겠지만 모택동주의자들은 오직 이 이유 때문에 대약진 운동이 실패했다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자기들이 한껏 부풀린 통계를 스스로 믿으면서 관료집단은 1959년에 실제 파종면적을 축소했다. 인민공사 책임자들은 여유 노동력을 가구 단위의 강철 제련과 관개공사 등 화려한 프로젝트에 투입했다. 이 때문에 기본적 농사일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너무 적었다. 생산 목표치를 달성하려는 열광 속에서 제품의 품질은 완전히 도외시되었다. 가구 단위로 생산된 강철은 대부분 사용이 불가능했으며 새로 개간되었다고 보고된 토지의 절반 이상은 농사가 불가능했다. 지역 인민공사 단위로 자급자족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에 면화 등 특정 지리적 조건에만 경작이 가능한 작물이 모든 곳에서 재배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의 원조가 1960년에 갑자기 중단되어 중공업 생산이 크게 하락했다.

그러나 경제적 재앙의 근본 원인은 농민의 경제적 이해를 완전히 무시한 채 엄격한 노동군사화를 실시한 데에 있었다. 이것은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농민들은 농사짓기를 거부했다. 이를 통해 자신에게 남은 유일한 방식으로 인민공사에 대한 반발을 표현했다. 대약진 운동 실패의 핵심 원인은 농민의 생산 동기를 무시한 데에 있다고 관료집단 스스로가 인정했다. 이 때문에 정권은 대약진 운동을 후퇴시키고 농민의 개인주의적 욕구에 크게 양보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의미에서 대약진 운동은 모택동 정권에게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내전을 지도하고 평등한 토지 분배 정책을 시행하면서 공산당이 쌓아 올린 도덕적 권위는 한 순간에 무너졌다. 1960년 이후 농민은 사회적 이상이나 미래의 풍요에 대한 약속이 아니라 현금 수입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모택동의 강등과 대후퇴 운동

대약진 운동은 재앙으로 끝났으며 이 책임은 오로지 모택동에게 있었다. 더욱이 당 지도자들 가운데 유독 그만이 이 운동을 계속 옹호했다. 심지어 그는 가두 단위로 뒤뜰에서 소형 용광로로 강철을 생산하는 운동을 옹호하면서 철도가 부족하여 이 강철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당 지도부는 농민의 경제적 이해를 완전히 도외시했기 때문에 대약진 운동이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이에 대해 모택동은 지역 당 간부들의 "오류"와 "직권 남용" 등이 운동을 실패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약진 운동의 전제들을 결코 기각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기아를 초래한 정책을 계속 옹호했기 때문에 모택동은 관료집단의 다른 분파들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국방장관 팽덕회는 소련을 지지했던 정통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는 1959년에 모택동이 대중을 소외시키고 경제 혼란을 부추기며 소련과 불필요한 마찰을 초래하고 있다고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모택동에 대한 대원수 팽덕회의 전면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는 숙청되어 모든 공직이 박탈되었다. 그러나 그의 공격으로 모택동의 당내 지위는 크게 손상당했다.

1959년부터 1961년 사이에 대약진 운동의 재앙적 결과들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 때문에 당 간부 대오에서 모택동의 권위는 크게 상실되었으며 그는 중앙 지도부에서 조용히 축출되었다. 그리고 모택동의 오랜 제 2 인자였던 유소기를 비롯하여 주은래, 당서기 등소평, 팽진 등의 파벌이 지도부를 장악했다. 모택동과 그의 지지자였던 임표, 진보대 등은 광범위한 당 지도부의 좌파로 위상이 축소되었다. 중앙 지도부의 교체는 대중에게 비밀로 붙여졌다. 그러나 팽진의 부하였던 우한, 등도 등은 거의 노골적으로 모택동을 공격했다. 이 공격은 이후 문화혁명의 빌미가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재앙에서 회복하기 위해 유소기 정권은 농업 및 공업 생산과 관련하여 부하린의 경제정책을 수용했다. 인민공사는 해체되고 약 20가구로 구성된 최소 집단생산 단위인 "생산 여단"이 조직되었다. 자유 시장, 개인 텃밭, 개인의 가축 소유 등이 장려되었다. 1962년에 운남성의 개인 곡물 생산량은 집단 생산량보다 더 많았다. 1964년에 귀주성과 사천성에는 집단 경작 면적보다 개인경작 면적이 더 넓었다.

1961년에 정부는 공업시설의 신규 건설을 전면 금지했다. 공업 생산 증대의 속도는 농민과 생산 여단이 달성하는 자유시장의 잉여와 일치되도록 계획되었다. 중국의 상황에서 공업 발전을 농민 시장의 증대에 맞추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반(反)노동계급적인 정책이었다. 1964년 중국의 지도적인 경제계획가인 보이보는 애너 루이즈 스트롱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도시인구를 2천만 명 줄일 생각이다(스트롱 저, [중국에서 온 편지들]).

시장경제로의 복귀는 공산당의 대중적 권위의 급격한 하락과 결합하여 관료집단 내부에 강력한 분열을 초래했다. 개인적 탐욕, 출세주의, 협소한 기득권과 지역적 패권주의 등이 만연했다. 문화혁명 기간에 이런 보도도 있었다: 1962년 상해를 비롯한 지역 당들은 곡물이 남아돌았던 몇몇 성의 하나였던 절강성에 곡물 수송을 요청했다. 그러자 절강성 당 제 1서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절강성은 상해의 식민지가 아니다....남아도는 곡물로 돼지를 먹여야한다"([계간 중국]지, 1972년 10월-12월). 이 대답은 이 시기 관료 분파들 간의 관계를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모택동은 관료집단 내부에서 나라를 구원해야한다는 공상주의 분파를 대표하고 있었다. 따라서 규율, 단결, 국민적 목적의식 등이 당 간부들 사이에서 점점 해이해지자 그는 크게 낙담했다. 1962년 사회주의교육위원회라는 압력단체를 만들어 모택동은 당 간부들의 소명의식을 회복시키고 농민 개인주의의 경제정책을 억제하려했다. 그러나 관료주의 관성의 위력에 비해 사회주의교육위원회의 노력은 거의 무기력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문화혁명과 관련하여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모택동의 정책과 유소기의 중앙지도부의 정책은 상당 부분 일치했다. 이 점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택동은 농업 집단화를 강화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시 인구의 농촌 복귀 등 노동계급보다 농민의 사회적 비중을 강화하는 정책을 확고히 지지했다. 그는 독립적 사회집단인 노동계급을 청산하고 이들을 농촌 대중 속에 해소시키려고 언제나 노력했다.

노동계급과 관련하여 모택동과 유소기의 태도 사이에는 이렇다 할 차이가 없었다. 문화혁명 기간에 모택동은 "노동자-농민"체제를 옹호했으나 이것은 대단히 인기가 없었으며 경제에 해악을 가져왔다. 1963년에 유소기가 도입한 대단히 반(反)노동계급적인 이 정책의 골자는 농한기에 농민이 공업 생산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정규직 노동자들보다 보수가 적었고 사회보장 혜택이 없었다. 또한 노동조합에 가입할 권리가 없었다. 한편 노동조합에 속한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자-농민"에 의해 대체되어 강제로 농촌으로 실려 갔다! 이 체제는 모택동의 공산주의 "이상"과 아주 잘 들어맞았다. 동시에 국가의 축적을 증대시키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을 억제시키는 데 효과가 있었다. 이 체제는 문화혁명 기간에 노동자들의 반발을 초래한 가장 큰 요인이었다. 모택동 일당은 이 체제를 옹호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농민"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한 계약직 노동자조직들을 탄압했다.

또한 1965년 이전의 대외정책에서 모택동과 유소기 지도부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는 증거 역시 없다. "흐루시초프의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캠페인을 조직한 것은 모택동이 아니라 유소기와 등소평이었다. 현재 적극적으로 조직 활동을 벌이고 있는 모택동주의자들 다수는 모택동이 조용히 지도부에서 밀려난 후 유소기와 등소평 일당이 벌인 "반(反)수정주의" 운동에 고무 받아 모택동주의로 획득되었다. 이들은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아야한다.

 

미국의 품에 안기는 인도네시아와 월남

1962년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렇게 폭로했다: 1940년대 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이 티토의 노선을 추종할지 모른다고 의심했다; 모택동 자신은 스탈린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을 뿐 중국공산당의 독립성은 결코 희생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냉전으로 인해 소련 미국의 양극화와 특히 한국전쟁 때문에 중국은 소련 진영에 합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 중국공산당은 소련 진영 내부에서 독자 경향을 수립하려고 노력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독립하는 노선으로 동유럽 공산당들을 획득하려고 적극 작업했다. 그리고 이 활동은 중요한 부산물을 남겼다. 모택동 정권의 독자 노선 노력에 긴장한 소련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압살하기로 결정했다. 독자 노선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던 이 행위를 소련은 이후 국제적으로 정당화시켰다.

미국의 아이젠하워와 소련의 흐루시초프가 평화공존을 협약한 "캠프 데이비드의 정신"은 소련이 중국의 팽창을 통제하는 것에 부분적으로 기초하고 있었다. 이 협약을 실행에 옮기면서 초래된 중소분쟁의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1958년 흐루시초프는 중국이 대만해협의 섬들에 대해 군사적 압력을 중단하도록 노력했다; 소련은 중국에 대한 핵무기 생산 지원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1960년 중국과 인도가 국경분쟁을 일으켰을 때 소련은 인도를 지지하는 "중립"을 선언했다. 중국이 더욱 강경하게 소련을 정치적으로 비난하자 1960년 소련은 중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모두 중단했다. 아마 이것이 중국과 소련이 공식적으로 관계를 단절한 시점일 것이다.

소련 진영에서 이탈한 후 중국의 대외정책은 두 초강대국에 대항해 "제 3 세계" 국가들을 결집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드골의 프랑스도 제 3 세계에 포함시켰다! 이 시기에 중국의 외교는 일시적인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1965년에 제 3 세계는 갑자기 중국 외교관들에게 접근 금지구역이 되었다. "중국 우호국들" 다수가 군부 쿠데타로 무너졌다. 특히 북경을 방문하던 중에 가나 대통령 느루마는 본국의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 우익 쿠데타들의 여파로 반(反)소 토론장으로 예상되었던 아프리카-아시아 회의는 취소되었다. 그러나 중국에게 진짜 엄청난 타격은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났다. 이 나라에서 수하르토의 친미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수하르노가 타도되었고 중국에 우호적이었으며 국가권력을 장악하지 않은 최대 공산당인 인도네시아공산당은 물리적으로 궤멸되었다.

1965년에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쓴 우익 쿠데타들은 한 가지 진실을 증명했다. 미 제국주의의 위력은 실제 군사력에 있을 뿐 아니라 전 세계 유산계급과의 유기적 유대에도 있다는 사실이 이것이었다. 계급투쟁이 일정한 수위 이상으로 끓어오르면 식민지 부르주아 계급은 북경 또는 모스크바와의 불장난 우호관계를 청산하고 이 시대 자본주의 질서의 주요 파수꾼인 미국 지배계급의 품에 안긴다.

제 3 세계에 대한 중국의 거대한 전략이 인도네시아 노동자 농민의 시체더미 밑에 깔려 엉망진창이 되자마자 새로운 위협이 중국을 압박했다: 미국이 월남전의 수위를 높인 것이다. "제 3 세계"가 중국을 제국주의의 위험에서 전혀 보호하지 못하고 이제 중국의 발밑에서 미 제국주의가 폭격을 자행했다. 이 위협 앞에서 중국 관료집단은 격렬하게 분열했다. 유소기, 팽진, 인민해방군 참모총장 요지청 등의 분파는 소련과의 관계 악화를 중지한 후 월남에 대해 소련과 일종의 군사적 공동전선을 체결하고 싶어했다. 모택동과 임표의 분파는 소련과의 단절을 더욱 가속화하고 문밖에서 한국전쟁 같은 것이 일어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막으려했다.

어떤 의미에서 문화혁명의 첫 전투는 인민해방군 최고지휘부에서 일어났다. "프로정신" 대 "정치"의 미명 아래 벌어진 이 싸움은 실제로는 월남전과 소련과의 군사적 동맹 문제로 일어났다. 요지청은 월남에 대한 대대적인 지상군 개입을 적극 준비하고 싶어 했다. 사실 그가 "인민의 전쟁"을 촉구한 것은 월남전을 낮은 수준의 게릴라전쟁으로 전환시켜 열기를 식힌 후 중국이 또 다른 한국전쟁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의도였다. 자기의 직속 부하 요지청에 대한 국방장관 임표의 승리는 중국 제일이라는 군사적 고립주의의 승리였다.

그리고 1966년 초반에 결정적인 순간이 왔다. 한때 중국을 지지했던 일본공산당이 월남전과 관련하여 공산주의 강대국들의 군사적 공동전선을 중재하려했다. 월남전과 관련하여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이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서는 소련의 "수정주의"를 비난하지 않음으로써 중소 군사협력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막판에 모택동은 이 합의문을 거부하고 공개적으로 당 지도자들 특히 이 합의문의 협상 대표였던 팽진을 공격했다. 모택동은 소련과의 연대를 드러냄으로써 미국의 의심을 자초하는 위험은 피할 작정이었다. "수정주의"에 대해 투쟁한다는 미명 하에 그는 미 제국주의에게 이렇게 알렸다: 미국이 중국을 직접 공격하지 않을 경우 다른 나라들에게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가장 극악한 탄압이 발생해도 중국은 개입하지 않는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중국의 유화 노선은 문화혁명으로부터 후퇴한 우경화 노선 이상이었다. "소련 사회제국주의"에 대한 자신의 "주요 모순"을 더 잘 해결하기 위해 모택동은 미 제국주의와의 동맹을 체결하려는 야욕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문화혁명"의 가장 핵심적인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분파적 대립과 국내외 정책 사이에는 명확한 연관성이 있었다. 유소기의 중앙지도부는 관료집단이 출세주의와 동물적 보신주의에 빠져 경제가 농민의 손수레 속도로 아주 느리게 성장하는 것을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소련의 전반적 군사 헤게모니 속에 들어가 보호를 받는 계획이 수립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모택동과 임표는 중국을 최대의 강대국으로 만들 결심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관료집단과 대중을 동원하고 옥죄어 중국의 물질적 후진성을 최단 시일 내에 극복해야했다.

 

문화혁명: 반(反)노동계급적 반(反)문화적 캠페인

대중 동원을 통해 국가를 구원한다는 열정을 기초로 하여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물질적 조건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바로 문화혁명이었다. 이를 위해 모택동 일당은 갈수록 보수적이며 자기 이해에만 집착하는 행정 관료집단을 숙청해야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택동은 인민해방군 장교들과 평민 출신 청년 학생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친소 화해주의 경향들이 숙청만 되면 군대의 장교단은 모택동 분파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것이었다. 장교들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 때문에 지역 차원의 기득권보다는 중국 국가의 장기적 이해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와 더불어 이들은 대중의 직접 압력으로부터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군비 지출을 위해 경제 잉여를 더 많이 짜내기를 원했다. 중국의 청년 학생층은 주로 미래의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를 상속받을 것이고 따라서 거대하고 강력한 정부와 근면-검소한 인민을 원했다. 야망을 품은 소부르주아 학생층의 기득권은 소부르주아 관료층의 미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공상적 이상을 쉽게 수용하였고 일상적 관심에만 매몰되어 이상의 실현을 막는 사회 세력을 공격했다.

임표와 인민해방군 지휘부의 지지를 받아 1966년 모택동은 주요 반대파 지도자들인 유소기, 등소평, 팽진 등을 지도부에서 손쉽게 밀어냈다. 이때 문화혁명은 아직 거리에 모습을 보이기 전이었다. 그러나 관료집단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은 극소수 지도부를 제거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결국 이 작업은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었다. 확고히 뿌리 내린 관료들이 문화혁명에 저항한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홍위병 "노동계급 혁명가들"이 바리케이드 반대편에 서 있는(!) 중국 노동계급과 대결했을 때 일어난 현상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소위 노동계급 문화대혁명에 대해 중국의 대중이 환상을 가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운동이 노동계급에게 더 나은 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경제주의"를 퇴치한다는 구호를 통해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은 임금을 억제하고 노동 강도를 강화하겠다고 나섰다. 1966년에 다수의 노동자 투쟁이 폭발했으며 1967년 1월 상해 총파업과 전국에 걸친 철도 파업으로 이 투쟁은 절정에 달했다. 이 사건은 중국 노동계급과 스탈린주의 관료집단 사이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충돌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다.

철도 노동자들은 중국 사회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력을 가장 명확히 의식한 노동계급 부위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독자적인 주택단지와 학교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화혁명은 이들을 특히 가혹하게 취급했다. 정상적인 운행 이외에 엄청난 규모의 홍위병 부대들을 전국에 실어 날라야했다. 또한 이들은 하루의 장시간 노동을 마친 후 모택동 사상을 연구해야했다. 노동 시간이 늘어나자 기존의 안전 규정은 침해되었다. 이들이 이 문제를 제기하자 홍위병들은 "모택동 사상을 따르지 않는 기존의 안전 규정"을 공격했다([시사 현장]지, 1967년 5월 19일). 말할 나위도 없이 홍위병들은 모택동 사상이 물리법칙보다 더 강력하다고 믿었다! 상해의 철도 노동조합은 늘어난 노동시간을 줄이거나 늘어난 시간만큼 봉급을 인상하는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12월에 상해의 지방정부는 전반적인 봉급 인상을 허용했다. 그런데 북경의 모택동 지도부가 임금 인상을 백지화시켰다. 이에 대해 상해와 중국의 철도 노동자들은 즉시 작업을 중지했다.

홍위병과 인민해방군은 상해의 지방정부를 타도하고 파업을 분쇄하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상해 인민 모두에게 보내는 편지"([일간 상해 해방]지, 1967년 1월 5일)는 "혁명의 목표를 이해하고 생산을 촉진시켜라"라는 명령으로 시작했다. "편지"는 계속해서 반(反)당 분자들이 노동자들에게 작업을 중지하고 북경으로 집결하도록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이것은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관료들에 대항해 "노동계급" 혁명을 지도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부터 나오기에는 이상한 내용의 선전이었다. 결국 철도 파업을 진압하는 데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대학생들이 비숙련 파업 파괴 인력으로 투입되어야했다.

1967년 1월 이후 홍위병이 공격을 가하자 관료들은 노동자들로 구성된 또 다른 "홍위병"을 자체 조직하여 자기 방어를 시작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홍위병이 사태를 장악하면 하루 12시간에 일주일 내내 일하고 또 8시간을 모택동 사상 연구에 바쳐야 한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리고 중국 전역의 도시에서 터진 가두 전투에서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은 승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중이 "참여"하기는 했지만 문화혁명은 관료집단 내부의 투쟁이었다. 이것은 모택동-임표의 분파 대 원자화된 보수적 당 기구 사이의 싸움이었다. 이 와중에서 학생들과 노동자들은 관료 파벌들에 의해 조직되어 냉소적으로 활용되었다. 혁명적 맑스주의자들은 모택동 분파의 공상적-군국주의적 민족주의와 자기 직책을 유지하려는 온갖 관료들의 출세주의 사이의 싸움에서 어느 쪽도 지지할 수 없었다.

문화혁명은 중국사회를 잘못 양극화시켜 관료주의에 대항하고 있다고 믿는 주관적 혁명가인 청년 학생들과 생활수준을 수호하려는 노동자들을 대치시켰다. 중국의 트로츠키주의 조직이 개입할 수 있었다면 이 조직의 임무는 이 잘못된 구분선을 가로질러 관료집단 전체에 반대하는 진정한 공산주의 분파를 건설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홍위병에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해야했다: 첫째, 노동자들의 공산주의 계급의식은 종교적 신비주의(모택동의 영혼이 당신의 영혼을 사로잡았는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민주적 기관들을 통해 중국사회를 진정으로 통치하는 행위를 통해서만 형성될 수 있다.

둘째, 사회주의 사상은 병영 금욕주의를 제거해야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대중의 물질적 복지에 진정한 관심이 있으며 빈곤과 끝없는 노동을 미화하지 않는다. 그리고 중국의 공산주의 사회는 중국 인민의 의지력과 희생만으로는 건설될 수 없다. 이것은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노동계급 혁명이 승리하여 중국 노동계급을 지원해야 가능하다. 그러나 이 혁명들은 중국 스탈린주의자들의 대외정책으로 방해받고 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가장 중심적인 임무는 중국 국가의 위력과 권위를 활용하여 세계 사회주의혁명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反)노동계급적인 부르주아 민족주의 정권들에 대한 지원을 즉각 중단하고 비록 소련이 관료집단에 의해 통치되고 있지만 이 나라와 즉시 군사적 동맹을 맺어야한다. 이 동맹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월남전 때문에 대단히 시급하게 요청되고 있다.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는 현직 관료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끌려들어간 노동자들에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말해야한다: 노동자들의 물질적 이해는 관료집단 내부의 "온건" 타락 분자들을 지원한다고 증진되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 정부가 중국 경제를 통제하고 보수적 관료집단의 억압적인 통제를 대체해야한다. 정치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 정부는 군사적 목적에 필요한 잉여를 창출하고 농민을 공업 노동력으로 흡수하기 위해 임금 인상을 억제시켜야만 할 것이다. 노동계급의 독재는 궁핍한 농민들의 바다에 둘러싸인 소수의 귀족적 노동계급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중국 인민의 물질적 조건의 근본적 개선은 선진 노동자국가들이 제공하는 자원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국제혁명을 통해 중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장기적인 전망일 필요가 없다. 아시아의 공업 강대국이며 대단히 의식적인 노동계급과 취약한 사회구조를 가진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을 촉발시킬 엄청난 동력이 중국의 노동자혁명으로 제공될 것이다. 일본과 중국의 상호보완적이며 계획적인 발전은 중국 인민의 빈곤을 효과적으로 퇴치할 것이다. 이것들이 문화혁명 기간에 중국 노동자와 학생들에게 트로츠키주의 운동이 제시했어야 할 정치 강령이다.

 

누가 승리했는가?

현직 관료들이 노동자들을 동원하여 홍위병에 대항하면서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의 문화혁명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그러자 모택동 지도부는 문화혁명의 경로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결국 이 운동을 청산하게 될 조치를 취했다. 1967년 1월에는 홍위병의 "권력 장악"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가 동원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민해방군 장교단이 온갖 개인적 사회적 연줄 등으로 중국의 나머지 관료들과 연결되면서 관료집단의 피와 살이 되었다. 홍위병을 군사적으로 지원하는 조건으로 인민해방군 지휘부는 현직 행정 관료들에 대한 대대적 숙청의 중단과 이들의 복권을 요구했다. 이것은 소위 "온건한 간부 정책"이었다. 관료집단을 보호하는 인민해방군의 역할은 문화혁명의 공식 강령이 바뀌면서 정식화되었다. 1966년에 문화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이것은 파리 코뮌을 모델로 한 정치체제를 수립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1967년에 이것은 "혁명 반란군"(홍위병), 인민해방군, "혁명 간부"(현직 관료들) 등의 소위 "삼각 동맹"으로 바뀌었다.

인민해방군과 홍위병의 진짜 관계는 1967년 8월 그 유명한 우한 사건으로 드러났다. 두 홍위병 집단 사이의 분파 투쟁에서 군대 지휘관은 당연히 우파를 지지했다. 모택동의 사절 몇 명이 북경에서 내려와 좀 더 급진적인 분파를 지지하자 군대 지휘관은 이들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거의 반란에 가까운 이 행위로 그는 직위 해제되었다. 그러나 우한 사건의 주요 등장인물들의 운명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반란을 시도한 지휘관 전사도는 지금 권력으로 복귀했으며 모택동의 두 사절은 "초좌익 분자"로 낙인찍혀 숙청되었다.

우한 사건으로 모택동 지도부는 인민해방군 지휘부에 일시적으로 대항했다. 이때 문화혁명은 무정부주의적 폭력의 절정에 다다랐으며 영국 영사관이 불에 탔다. 1967년 말에는 홍위병을 탄압하라는 인민해방군 지휘부의 압력은 저항할 수 없이 강했다.

1968년 1월 28일자 [일간 해방군]지는 인민해방군이 "일반적으로 좌파를 지지하지만 어느 특정 분파는 지지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홍위병을 분쇄하겠다는 거의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이 글은 계속해서 "소부르주아 분파주의"를 공격했다. 거의 같은 때에 문화혁명의 지도력이 청년 학생들로부터 노동자, 농민, 병사들로 바뀌었다고 주은래가 주장했다. 1968년 내내 "소부르주아 분파주의", "무정부주의", "종파주의" 등에 대한 공격들이 "친자본주의 노선", "수정주의" 등에 대한 공격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이 투쟁은 열대 과일 망고로 끝났다. 1968년 8월 모택동은 직접 개입하여 홍위병이 최초로 등장한 북경 청화대의 학생 홍위병 집단들 사이의 분파투쟁을 해결했다. 그러나 자기 성에 찰 정도로 분쟁이 해결되지 않자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러분은 나를 실망시켰다. 더욱이 여러분은 중국의 노동자, 농민, 병사 등도 실망시켰다"([극동경제평론]지, 1968년 8월 29일). 그리고 이 발언과 함께 문화혁명은 끝장이 났다. 모택동의 발언이 있은 후 48시간 내에 인민해방군 장교들이 지휘하는 중국 최초의 "모택동 사상 노동자-농민 선전대"가 청화대에 도착하여 홍위병들을 해산시켰다. 이에 대한 보답으로 모택동은 이 선전대에 직접 망고를 선물했다. 전국에서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홍위병이 탄압받았다. 이에 저항하는 활동가들은 모택동을 "실망시키는" 자들의 보편적 운명을 맞이하여 농민들과 노동하면서 사상을 "고쳐먹도록" 농촌으로 보내졌다.

모택동 분파는 문화혁명에서 승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간부들로 행정 관료들을 대체하고 여기저기에 젊은 광신도들을 박아 놓으면서 대중에게 혁명에 대한 열성을 불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는 반대로 대중이 문화혁명을 거부하자 현직 관료들의 저항이 강화되었다. 일단 군대가 간접적으로 동원되자 모택동은 관료적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인민해방군 장교들과 급진 청년 학생들 위에서 군림하여 이들의 분쟁을 조정하면서 자기 권력을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 소위 "승리자 당 대회"인 제 9차 중국공산당 당 대회가 열렸을 때 현직 관료들은 대부분 자리를 보존하고 있었다. 이것은 중앙위원회 구성을 통해 증명되었다. 중앙위원회의 평균 연령은 61세였고 당 평균 경력은 25년이었다. 문화혁명 이전에 사망하거나 숙청되지 않은 자들 가운데 1945년에 선출된 중앙위원들의 3분의 2가 1969년 중앙위원회에 재선되었다! 그리고 1969년 중앙위원회에는 모택동과 함께 대장정에 참여했던 고참들의 비율이 상승했으며, 인민해방군 장교들의 비율은 45%로 급상승했다. 순진한 모택동주의 열성파는 소위 반(反)관료주의 "혁명"의 이런 결과를 인정하기 힘들 것이다!

임표 분파의 몰락과 함께 문화혁명은 최종적으로 막을 내렸다. 임표는 일련의 명백히 파산적인 정책들과 연관되었다. 국내 경제정책과 관련하여 그는 1969년에 생산 목표 달성 운동을 시작하기를 원했으며 "농민의 합당한 수입을 박탈했다"고 비난받았다([극동경제평론]지, 1973년 연감). 임표가 대약진 운동을 다시 추진했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나 문화혁명에 대해 대중은 엄청난 불만을 드러냈고 기존의 생활수준을 방어하기 위해 노동자들은 정권에 얼마든지 대항하려 했다. 이 상황에서 1969년에 대약진 운동을 다시 추진하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사실 문화혁명 이래로 중국 경제는 1965년에 비해 시장지향성, 소득 불평등, 지역성 등이 더욱 두드러졌다. 모택동/주은래 정권은 크나큰 경제적 희생은 더 이상 요구되지 않을 것이라고 대중에게 확신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 정책에 대한 거의 모든 공식 성명서들은 농민이 개인 텃밭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계의 농촌이 세계의 도시를 정복할 것이다"라고 선언했던 모택동은 대외정책에서도 똑같이 실패했다. 1960년대 후반부에 중국이 미국/소련에 대항하여 "제 3 세계"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적 백치일 것이다. 문화혁명 때문에 중국은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 월남전에도 불구하고 1968년까지 미국의 대외정책은 중국에 대항하여 소련과 동맹을 맺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중국 정권은 외교적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는 객관적 조건들 때문에 우경적 대외정책을 펴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임표는 모택동이 미국의 닉슨과 화해를 시도하자 이에 반대하여 그와 결별했는지도 모른다.

군대에 정치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에 임표는 새로 등장한 모택동/주은래 분파에 대항하여 정치투쟁을 시작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 투쟁에서 패배했다. 지금 모택동 일당이 주장하고 있듯이 그가 군부 쿠데타를 계획했을 가능성도 확실히 있다. 그러나 살아있는 동안 임표가 모택동과 주은래에게 무슨 짓을 했든 죽은 지금 그의 시체는 이 나쁜 짓을 보상하고도 남았다. 왜냐하면 그는 문화혁명의 실패와 함께 드러난 모든 나쁜 결과들에 대한 책임을 질 완벽한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숙청된 "친자본주의 노선주의자" 관료가 권력에 복귀할 때마다 그를 탄압한 자는 임표가 되었다. 주은래가 영국 영사관의 화재 사건에 대해 영국에 사과했을 때에도 임표가 주동자였다고 발표되었다.

하루가 지날 때마다 문화혁명의 희생자들이 승리자들을 갈아치우는 것 같다. "권력의 제 2 인자로 친자본주의 노선을 주장했던" 등소평조차 이제 모택동과 함께 나란히 권력을 향유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혁명은 중국공산당을 크게 분열시킨 것이 확실하다. 제 10차 당 대회는 비밀리에 그리고 아주 신속하게 끝났다. 이것은 내부 투쟁이 심각하다는 징후이다. 당내 민주주의를 조금이나마 형식적으로 허용하면 서로 잡아 죽이는 분파투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이다. 무명의 왕홍문이 제 3 인자로 부상한 것은 아마도 급진 모택동주의자들에게 던져진 떡고물일 것이다. 이들은 분파 투쟁 때마다 언제나 승리하는 쪽에 등장하는 주은래를 크게 불신하고 있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왕홍문은 당 간부들 사이에 이렇다 할 지지 기반이 없기 때문에 얼굴마담에 불과할 것이다. 모택동이 죽으면 문화혁명은 공식 토론회로 보일 정도로 후계 싸움이 피터지게 벌어질 것이다. 물론 중국 노동계급은 모택동 후계자의 문제를 생략하고 자신의 민주적 계급 지배를 확립할 수도 있다.

 

모택동과 브레즈네프를 타도하자!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단결을 성취하자!

문화혁명 이래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중국의 대외관계에서 일어났다. 소련과 중국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어 1970년에는 실제로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중국과 소련의 국경은 세계에서 가장 무기가 많이 배치된 국경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모택동/주은래 정권은 현재 미국 닉슨 대통령과 새롭게 연애하고 있는 중인데 이 정책은 중국의 가장 주요한 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소련을 겨냥한 것임이 명백하다. 소련에 대항하여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중국의 시도는 지난 일 년 동안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소련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도록 중국은 유럽 나토군의 강화를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예를 들어 8월 3일자 [북경 평론]지는 [런던 타임즈]지에 보낸 찰폰트 경의 편지를 지지하는 듯이 인용하고 있다. 그의 편지는 나토군의 확대를 촉구하고 있다:

"최근 찰폰트는 [타임즈]지에 다수의 글을 발표하면서 소련의 위협이 유럽의 안보에 미치는 악영향을 폭로하고 서구 국가들의 방위 협력 강화를 호소하고 있다."

외교 전선에서 일시적인 무드의 변화는 늘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미 제국주의가 소련과 맺고 있는 객관적인 관계는 미국이 중국과 맺고 있는 관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소련은 경제와 군사 면에 있어서 중국보다 월등하고 미국과 군사적으로 맞먹는 강대국이다. 따라서 세계의 반(反)자본주의 정권들의 핵심이며 미 제국주의의 주요한 객관적 장애물은 바로 소련이다. (미국이 봉쇄한 쿠바에 중국이 물자를 지원할 수 있었을까?) 이와 반대로 소련은 제국주의 세력의 개입이 없을 경우 대규모 전쟁에서 중국을 제압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은 다른 강대국과 연합해야 승리를 기대할 수 있다. 따라서 초강대국 사이의 삼각관계는 소련에 대항하여 미국과 중국이 동맹하는 쪽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러나 초강대국 사이의 정치는 역사적 경험으로 보아 이성에 입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련이 미국과 동맹한 후 중국을 공격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소련과 중국 사이의 전쟁은 사회주의 대의를 위해서는 엄청난 후퇴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가 직접 개입하든 않든 1970년 국경 분쟁의 확대판인 이 전쟁이 터진다면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양측 모두의 패배와 양국에서 노동계급의 정치혁명을 주장해야한다. 그러나 미국이 소련이나 중국 어느 한쪽과 동맹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후 패전국에 자본주의를 복귀시킬 상황까지 갈 수 있다면 미 제국주의에 의해 직접 공격을 당하는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군사적 방어를 주장해야한다.

중소분쟁의 초점은 시베리아 국경이다. 18세기에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와 당시 만주의 국가였던 청나라 사이에 맺어진 조약이 양국 사이의 서로 모순되는 영토 주장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다. 그리고 청나라는 민족적 권리를 주장하는 데 빈틈이 없었다고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두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왜 자본주의 강대국과 동맹하며 인구도 별로 없는 땅덩어리를 두고 서로 전쟁을 벌이려는지 사회주의 운동에 새로 입문한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 현상은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국가도 제국주의 국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할까? 두 스탈린주의 국가 사이의 전쟁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경제적 동기가 있는가?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사실 소련과 중국은 서로의 존재 때문에 정치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 두 강대국은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노동계급을 무조건 억압하는 것을 통해서만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고립된 관료집단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이 러시아와 영토 분쟁을 하지 않는 티토, 좌파의 트로츠키부터 우파의 부하린까지 러시아 내부의 모든 반대 세력, 자기 분파 가운데에서 독자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있는 분자 등을 가혹하게 적대했던 것과 똑같이 흐루시초프/브레즈네프는 유소기/모택동을 적대해왔다.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주장을 전파할 국가권력을 가지고 있는 경쟁국은 반(反)노동계급적이며 안정성이 허약한 기형적 노동자 국가의 정권을 이중적으로 위협한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소련의 관료집단이 퇴보한 근본 원인은 후진국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의 일국적 한계와 고립에 있었다. 관료집단의 퇴보로 "일국 사회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이론이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 이론은 관료적 지배 파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허위의식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공산주의" 정권들은 노동계급의 국제주의를 거만하게 떠벌이고 있지만 동시에 자기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자기의 신성한 임무라고 진정으로 믿고 있다. 소련에게 올바르게 적용되는 이 분석은 중국은 물론 불가리아, 알바니아 등 이류 민족주의 관료집단들에게도 적용된다.

시베리아를 둘러싼 국경분쟁에서 현재 소련은 압도적으로 우세하다. 핵무기의 절대적 우위 외에도 소련군은 재래식 전쟁에서도 중국의 인적 자원으로 상쇄할 수 없는 우위를 가지고 있다. 중국과 국경을 면한 소련 영토는 중국 영토보다 인구가 훨씬 조밀하다. 그리고 중국의 북쪽 국경에 거주하고 있는 터키어 민족들은 수백 년에 걸쳐 자신들에게 강요된 한족 국수주의를 증오해왔으며 소련에 공감할지도 모른다. 더욱이 소련은 자본주의 강대국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브레즈네프는 시베리아의 유전과 가스전에 외국자본이 진출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재정적인 고려에서 나온 발상이 아니다. 미국과 일본이 시베리아에 자본을 투자할 경우 시베리아가 소련 영토로 남는 것이 이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러나 소련의 군사적 우위는 중국의 핵무기 개발로 급격히 침식되고 있다. 이 때문에 중국이 보복할 수 있는 핵무기 능력을 더 많이 보유하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 중국에 핵 공격을 감행하라는 압력이 브레즈네프 정권에 가해지고 있다. 현재 소련 당국은 특히 시베리아 주민들을 대상으로 "황인종 야만주의"라는 인종주의를 유포하면서 전쟁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런던 [이코노미스트]지의 특파원은 8월 25일-31일자 보도에서 시베리아 학교 선생의 말을 인용했다: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중국의 라디오방송은 이렇게 위협했다: 중국이 시베리아 남부를 점령하면 러시아인들을 전부 죽이고 러시아 여자 애들은 결혼감으로 남겨 놓을 것이다."

만약 모스크바와 북경에 혁명적 노동자 정부가 존재한다면, 시베리아를 둘러싼 분쟁은 러시아와 중국 노동자들의 이익을 중심으로 쉽게 해결될 것이다. 시베리아에는 중국인의 이민이 허용될 것이고 이 지역은 급격한 경제발전을 위해 양국 공동으로 관리될 것이다. 더욱이 소련과 중국에 단결된 혁명적 노동자 정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일본의 사회주의 혁명이 촉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 중국과 시베리아 개발을 위해 일본의 경제 자원이 투입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입장에 처해 있다. 이것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알고 있다. 우선 이들은 제국주의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강대국들과 가능하지도 않은 공존을 시도한다. 더욱이 이들은 자신들의 기생적 정권을 필연적으로 타도할 세계혁명을 두려워한다. 집단적 소유형태에 기초한 관료적 정권인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은 노동자 권력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어야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다. 민족주의 정책을 통해 중국과 소련의 관료집단은 노동계급 독재를 침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국내 반혁명이나 제국주의 공격으로 자신들이 타도되는 조건을 조성하고 있다.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후 제국주의의 가장 중요한 패배에 해당되는 중국 혁명은 이제 핵전쟁에 의해 치명적으로 위협받고 있다. 이 전쟁은 제국주의 국가와의 전쟁이 아니라 소련이라는 강력한 기형적 노동자국가와의 전쟁이다.

모택동 및 브레즈네프의 반동 정권을 타도하는 것을 통해서만 소련과 중국의 노동자들은 서로를 죽이는 전쟁을 막을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중국과 소련 노동자 국가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통합을 성취할 수 있다.

 

소련과 중국의 노동계급 정치혁명으로 반(反)제 공산주의 진영을 단결시키자!

노동계급 국제혁명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혁명을 방어하자!

 

 

제 8장 트로츠키주의 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수정주의

 

[가디언]지의 연재물 "트로츠키의 유산"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네 개의 논문은 트로츠키주의가 개량주의이며 "반혁명 노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들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그리고 부차적으로 <노동자동맹(Workers League)>의 정책들을 논의하고 있다. 그러면서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cist League)>은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때 제 4 인터내셔널의 지도적 정당이었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미 오래 전에 개량주의의 늪에 빠져 혁명적 트로츠키주의를 포기했다. 이 조직은 우선 1961년부터 1963년까지 카스트로의 쿠바혁명에 영합하면서 "권력 장악을 위한 게릴라 투쟁 노선"을 예측했다. 그리고 흑인 민족주의에 영합하여 "일관된 민족주의"가 사회주의를 가져온다는 이론을 발명했다. 그러다가 1965년에 이 정당은 개량주의로 추락하여 자유 부르주아들이 주도하고 있는 인민전선식 반전운동을 조직했다. 이때 이후 이 정당은 계급협조주의를 새로운 분야로 확장시키면서 거의 모든 세력의 자치권을 주장하는 "민주적" 요구를 내세우며 단일 쟁점의 운동을 조직해왔다. 예를 들어 흑인에 대한 백인 경찰의 가혹행위와 폭력에 대항해서 동네 치안 자치 운동을 폈으며 이밖에 여성, 동성연애자, 아메리카 인디언 등을 위한 개량주의 운동을 조직했다.

반면에 노동자동맹을 이끄는 정치 강도들은 미국 사회주의 운동사에 오명을 남겨왔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누리는 운동(휴이 뉴튼, 홍위병, 호지명, 아랍 민족주의, 좌익적 언사를 일삼는 노동조합 관료)에는 일단 무조건 영합한 후 바로 다음에 좀 더 "정통적인" 노선을 주장하면서 끊임없이 노선을 바꾸어왔다. 그러나 이 조직이 일편단심으로 고수해온 사상이 있다: 모든 사회 문제들의 근원인 자본주의의 최종적 위기는 이행강령에 기초한 정치투쟁을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이 때문에 이들은 사이비 급진주의자에서 극우 보수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색채의 노동조합 관료들의 꽁무니를 쫓아다니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노동자당과 노동자동맹의 노선을 인용하면서 트로츠키주의가 개량주의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시도는 흐루시초프를 인용하면서 레닌이 "사회주의로 가는 평화적인 길"을 주장했다고 "증명"하는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페미니즘과 트로츠키주의

지난 10년간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자행한 극악한 배신행위들 때문에 트로츠키주의는 다수의 투사들에게 자유 부르주아에 대한 가장 비열한 개량주의적 굴종과 혼동되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데이빗슨과 같은 모택동주의자들은 올바른 관점에서 트로츠키주의를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무수하게 제공받고 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노선은 대대적인 민주주의 운동이 자연발생적으로 터질 때마다 기회주의적으로 이를 추종하는 것이다. 이 운동의 주체들은 연속해서 노동계급을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전위'로 떠받들어진다. 그리고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렇게 덧붙인다: 이 운동에서 '전위 중의 전위'는 현재 청년 학생이다." -- [가디언]지, 1973년 7월 13일

한때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유럽 동지들이 "개입해야할 운동 영역의 변증법"이라고 부른 이 이론은 노동계급의 지도적 역할을 부인하고 있으며 페미니즘, 민족주의, 학생 권력 등에 대해 강령적으로 굴종한다. 다른 곳에서 데이빗슨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소부르주아 흑인들의 민족주의를 추종하고 있으며 노동자동맹이 노동귀족층의 국수주의를 추종하고 있다고 비판했다([가디언]지, 1973년 5월 30일). 이 비판 역시 올바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값싸다. 그의 비판은 노동계급의 투쟁을 전진시키는 데에 필요한 맑스주의 강령을 조금도 발전시키지 못하고 있다. 소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을 추종하고 있다고 사회주의노동자당을 비판한 후 데이빗슨은 "여성해방을 위한 대대적인 민주주의 투쟁"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개량주의이지 맑스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여성해방 투쟁이 사회주의 투쟁이 아니라 민주주의 투쟁일 뿐이라고 그가 주장하는 이면에는 "남편이 아내와 똑같이 가사를 분담하자"고 촉구하면서 부르주아 가족제도를 "개혁"하되 그대로 유지하자는 논리가 깔려있다. 그리고 "심지어는 착취계급의 여성들"과도 연대하자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트로츠키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부르주아 평화주의에 굴종하는 대신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월남전에 대한 계급투쟁적 반대를 촉구했다. 즉 전쟁에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정치파업, 반전운동에서 부르주아의 축출, 월남 민족해방전선에 대한 군사적 지지, 인도차이나 반도는 모두 공산화되어야 한다는 주장 등이 이것이다. 소부르주아의 징병 거부 운동에 대해 스파르타쿠스동맹은 일관되게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조직 작업을 유일하게 주장해왔다.

부르주아 민족주의에 굴종하지 않고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모든 종류의 인종차별을 끝낼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동네 치안 자치 운동과 인종적 성적 차별 고용을 반대했다. 또한 단결된 계급투쟁 강령에 기초한 흑인 투쟁조직의 결성을 촉구했다.

여성해방 투쟁 영역에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부르주아 페미니즘의 반동적 노선에 굴종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리고 각종 노동자주의 그룹들이 여성 해방 투쟁에 대해 기권했을 때 부르주아 페미니즘과 똑같이 반동적인 이 노선에 반대했다. 우리는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여성해방, 여성운동에서 부르주아 정치인의 축출, 무상 낙태 서비스 등을 촉구했으며 초기 코민테른에서 상정한 대로 조직 내에 여성그룹을 수립하는 전망을 채택했다.

모든 사이비 맑스주의 조직들에 비해 스파르타쿠스동맹만이 청년조직과 당의 레닌주의적 원칙을 옹호했다. 혁명적공산주의청년조직(그리고 지금은 스파르타쿠스청년동맹으로 개명)은 정치적으로는 당에 종속되어 있지만 조직적으로는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다.

 

민족주의 대 계급투쟁

흑인 민족주의를 언급하면서 데이빗슨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를 추종한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는...이렇게 선언한다: 미국의 흑인은 별개의 민족이며 분리 독립할 권리가 있다. 그의 주장은 흑인 민족주의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미국에서 "흑인이 민족이다"라는 민족주의 이론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도외시한다: 흑인과 여타 소수인종들은 압도적으로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고 있지만 미국 경제에 철저히 통합되어 있다; 이들은 자기들만의 영토, 언어, 문화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 가비가 주장한 "아프리카 귀환" 운동, 흑인 민족 이론 그리고 흑인 분리 독립의 다른 주장들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킨다. 그리고 가장 착취를 당하고 있으며 잠재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노동계급의 부위인 흑인노동자들을 독자적 목적을 위해 독자적 조직을 갖는 집단으로 소외시키는 주요한 해악을 초래하고 있다. 동네 치안 자치 운동에 열성적인 사회주의노동자당, 데이빗슨의 10월동맹과 같은 모택동주의자들, 흑인 민족이라는 반동적 공상적 사상을 유포하는 공산주의동맹 등은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면서 동시에 부르주아 계급에 종속시키고 있다. 흑인정당에 대해 열성적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1971년 인디애나주 게리에서 열린 떠들썩한 대회에 참가한 흑인 민주당원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한편 흑인 분리 독립주의는 포드재단이 지원하고 있는 뉴워크의 이마무 바라카(리로이 조운스)와 같은 부르주아 민족주의 참주선동가들을 도와주고 있다.

미국 좌익의 광범위한 부위는 흑인 민족주의에 굴종하고 있다. 이 현상은 미국 노동계급 가운데 가장 착취당하고 있는 흑인들이 미국의 사회주의혁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진실을 굴절된 상태에서 반영하고 있다. 흑인 노동자들은 잠재적으로 노동계급의 지도적 부위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이들의 가장 의식적인 분자들이 단일한 전위당에 통합되어야한다. 그리고 흑인 노동자들에게 단결된 노동계급 투쟁의 강령을 전파하려는 가차 없는 정치투쟁이 벌어져야한다. 이중적으로 억압당하고 있는 노동계급 부위에 대한 특별한 활동방식을 인식하고 있는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흑인의 독자 조직을 이들이 전위당에 통합되기 위한 과도적 단계로 촉구해왔다. 이것은 흑인 분리 독립주의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며 흑인 대중 사이에 민족주의를 더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다("흑색과 적색 -- 흑인 해방을 위한 계급투쟁의 길", [스파르타쿠스단]지, 1967년 5월-6월).

 

레닌주의 대 노동자주의

1969년 후반부에 <민주사회학생동맹(Students for Democratic Society)>의 지부인 <웨더맨-혁명청년운동(Weathermen-Revolutionary Youth Movement)> 그룹이 해체된 이래 조야한 노동자주의가 흑인 민족주의와 페미니즘에 가세하여 사회주의 운동권의 지배적인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지금 존재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후진적 의식에 영합하고 있는 노동자주의 그룹들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 수준에서 조직 활동을 벌이면서 즉각적으로 인기와 대중적 영향력을 누리려고 애써왔다. [역자 주: 사회 내 여러 계급들은 각자의 경제적 이해에 기초하여 행동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굴절되고 은폐되는 이 행동을 노동계급의 역사적 이해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사회주의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능력이 바로 사회주의 의식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노동조합을 비롯한 대중운동의 내부에서 독자적으로 또는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대중 지도자나 대중의 의식은 대개의 경우 일면적이고 일시적이다. 영구적이고 총체적인 사회주의 의식은 과학적 사회주의로 무장한 혁명 지식인 집단에 의해 유지-전파되어 왔다. 그리고 이들과 이들을 지도자로 하여 결집된 혁명 노동자들의 조직인 혁명정당에 의해 사회주의 의식은 구현된다.] 따라서 사회주의 의식은 혁명정당에 의해 노동계급에게 제시되어야 한다고 레닌은 말했다. 그런데 노동자주의자들은 레닌의 엄명을 주목하지 않거나 일부의 경우 부인한다. 오늘날 급진 노동자주의 그룹들은 노동조합 활동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것은 1930년대와 1940년대 개량주의 미국공산당이 수행했던 활동과 조금도 구별되지 않는다. 몇몇 현직 노동조합 관료들 뿐 아니라 이들을 타도하고 자신이 관료가 되려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전투적인 언사를 추종하는 이들은 혁명 강령에 기초하여 노동조합 내에서 정치투쟁을 수행할 수 없다. 이들은 대학교 교정에서 대학생들에게서나 자신들이 월남의 민족해방전선, 모택동 등을 지지한다고 말할 뿐이다.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의 노동자주의는 노동조합 내에서 이행강령의 일관된 체계를 전파하는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일부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임금인상 요구만이 혁명적이다(노동자동맹); 이행강령의 구성부분인 이행 요구들은 필요에 따라 하나씩 노동자들에게 제시되어야한다(계급투쟁동맹). 또 다른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말로는 이행강령을 받아들인다고 선언하지만 노동계급의 권력 장악 전략은 접근할 수 있는 모든 현직 관료를 "비판적으로 지지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혁명적사회주의동맹). 한편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노동조합 내부의 정치투쟁을 전혀 수행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고 있거나 장악한 적이 있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관료들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한다.

이들과 반대로 스파르타쿠스동맹은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기 위해 이행강령에 입각한 노동조합 분파[역자 주: 남한의 경우 "현장 조직"]를 건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특정 투쟁을 위해 공동전선을 수립하는 것에 대해 동의하면서도 스파르타쿠스동맹은 트로츠키주의 조직의 기본 임무가 전투적 노동조합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 분파를 노동조합 내에 건설하여 이행강령에 기초한 정치투쟁을 벌이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 지도부를 장악하여 노동조합을 혁명군대로 조직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행강령은 노동조합 내에서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강령이라는 점을 우리는 트로츠키와 함께 확신한다. 그렇다고 모든 현장 조직의 강령이 우리 조직이 채택한 출범 선언문의 복사판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구체적 상황에서 사회주의 의식을 가장 잘 제시할 이행 요구들을 선택해야한다. 여기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것은 현장 조직의 강령이 담고 있는 이행 요구들은 전투적 개량주의에 한정되지 말 것이며 사회주의 혁명의 전망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데이빗슨은 트로츠키가 1940년에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자들과 나눈 대담들을 인용한다. 그리고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이 "반공활동"이라고 주장한다. 최근 우리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조합 활동 내용을 담은 일련의 글들을 묶어서 출판했다("트로츠키주의자들의 노동조합 투쟁", [노동자 전위]지, 제 25호부터 제 28호까지). 이 글들을 통해 우리는 "진보적" 노동관료들과의 연합을 강조하는 사회주의노동자당 노선의 일면성과 이 노선이 노동조합에서 공산주의 분파를 건설하지 못하는 현상 등을 자세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에 노동조합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항하는 투쟁에 역량을 집중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왜냐하면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노동조합 내에서 루즈벨트의 하수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 2차 세계대전 중 미국 노동조합에서 파업 금지 협약을 제시하고 이를 강제한 자들이 바로 공산당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10월동맹이나 혁명노동조합에서 일하는 데이빗슨의 동지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공산당이나 전투적 개량주의 관료들을 공격하는 것은 전혀 비난받을 수 없다. 다만 이들의 문제는 농업노동자연맹의 차베스처럼 현직 좌파 관료들을 모두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현직 관료들이 너무 보수적이어서 노동자들에게 조금의 환상도 불어넣을 수 없는 경우에는 이들을 타도하려는 관료들과 동맹한다.

데이빗슨은 "트로츠키의 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전의 연재 글들에서 트로츠키의 입장을 왜곡해왔다. 그는 이 왜곡 행위를 나머지 글들에서도 계속하고 있다. 그래서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대항하여 "진보적" 관료들과 동맹한 행위를 트로츠키가 승인했다는 식의 인상을 풍기려한다. 그러나 그는 이 점에서도 왜곡을 자행했다! 1940년에 트로츠키는 사회주의노동자당이 루즈벨트를 지지하는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우호적으로 접근한 행위를 명확히 비판하고 공산당의 평당원 노동자들에게 활동의 초점을 맞출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제 4 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한 투쟁

사회주의노동자당은 볼셰비키주의에서 중도주의로 퇴보했다. 그러나 이 퇴보는 1961년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제 4 인터내셔널 내부의 강령적 퇴보 그리고 궁극적으로 조직적 퇴보가 일어난 과정의 결과였다. 제 4 인터내셔널의 결정적인 순간은 1953년 이 조직이 분열할 때였다. 이때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단일한 세계정당은 조직적으로 붕괴했다. 조직 분열의 핵심 쟁점은 국제서기국의 지도자 미쉘 파블로가 제시한 강령이었다. 그는 개량주의 사민당과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깊이 침투할 것"을 제안했으며 이때 이 정당들을 중도주의정당이라고 재규정했다. 이것은 새로운 노선을 정당화하기 위한 속임수였다. 파블로는 혁명적 지도력의 위기를 혁명의 핵심 장애물로 더 이상 간주하지 않았으며 제 4 인터내셔널의 확대-강화를 위기의 해결책으로 바라보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객관주의 이론을 채택하여 자본주의의 압도적인 위기(그의 "전쟁-혁명 테제") 때문에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최소한 기형적인 혁명을 수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파블로가 1951년 제 4 인터내셔널 제 3차 세계대회에 제출한 "국제 정세 전망 테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객관적 조건들은 대중운동의 성격과 동력을 결정한다. 대중운동은 특정 수위에 도달하면 혁명의 주관적 장애물들을 모두 극복할 수 있다."-- [제 4 인터내셔널]지, 1951년 8월-9월

파블로의 노선은 결국 제 4 인터내셔널을 청산하고 노동운동을 지배하는 스탈린주의 및 사민주의 정당들에 들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선 변경은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에서 파블로를 지지하는 청산주의 분파(카크런과 클락이 주도)의 등장으로 명확해졌다. 그러자 당의 다수파는 격렬하게 반응했다. 당 지도자 제임스 캐넌은 이렇게 적었다:

"파블로 수정주의의 핵심은 지금 시기에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가장 중요한 부분 즉 당 문제의 핵심인 인류의 위기가 노동운동 내 혁명적 지도부의 위기라는 사상을 타도하는 것이다." -- "분파 투쟁과 당 지도부", 1953년 11월

1953년 파블로의 수정주의로 인해 제 4 인터내셔널 조직은 붕괴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전 후 트로츠키주의 운동 전체 특히 이 조직의 유럽 지부들에 영향을 미친 다양한 요인들의 결과였다. 우선 전쟁 이전의 지도부 전체가 나치와 스탈린의 비밀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 트로츠키와의 살아있는 전통은 실질적으로 단절되었다. 더욱이 제 4 인터내셔널의 지부 회원들은 다수가 사망했다. 이 때문에 조직은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었다. 반면 스탈린주의 공산당은 반파시즘 빨치산 투쟁의 지도력을 장악하여 대중적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동시에 동구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수립되었다. 또한 중국에서 농민 대중에 기초한 봉기가 성공하여 자본주의가 타도되고 기형적 노동자국가가 탄생했다. 이 예상 밖의 사태들에 직면하여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초기 반응은 동유럽 스탈린주의 정권들이 아직도 자본주의 체제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955년이 되어서야 미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중국이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인정했다. 정통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의 변증법적 분석을 무의식적으로 속류화하면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이 때문에 이들의 이론은 현실에 들어맞지 않았다. 이 혼란으로 인해 파블로 주위에 결집한 수정주의 경향은 자신들의 기회주의적 욕구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 벌어진 제한적인 사회변화에 대해 이렇게 결론내렸다: 노동계급이나 트로츠키주의 세력이 아니더라도 사회혁명을 지도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 과정에 의해 가장 적게 영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기존의 지도부는 거의 그대로 살아남았고 당원 수와 노동계급에 대한 영향력은 증대했다. 그리고 유럽에 비해 미국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허약했다. 따라서 1953년에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하는 투쟁을 주도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실제로 이 정당은 오직 반쪽짜리 투쟁만 벌였다. 그리고 1950년대 후반부가 될 때까지 국제적 차원의 조직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파블로에 반대했던 프랑스와 영국 지부의 다수파들은 사회주의노동자당과 함께 "국제 위원회"를 수립했다. 그러나 이 조직은 이렇다 할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카크런-클락 분파와 투쟁하면서 노동조합 분야의 중핵들을 거의 상실했고 전체 당원의 과반수가 매카시 탄압 선풍에 굴복하여 당을 떠났다.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부에 당 지도부는 대중적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유착할 수 있는 세력이나 운동을 찾아 우경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쿠바혁명을 통해 이 세력을 찾아냈다. 쿠바혁명은 중남미와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자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는 쿠바가 노동자 민주주의의 기관들을 아직 탄생시키지 못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건강한 노동자국가이며 피델 카스트로는 자연적 맑스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즉 그는 처음에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그리고 나중에는 스탈린주의자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마치 트로츠키주의자처럼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이 노선은 유럽에서 파블로 일당의 노선과 동일했다. 동구에서 소부르주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사회혁명을 수행할 수 있다면 카스트로와 같은 소부르주아 민족주의자가 사회혁명을 수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쿠바혁명에 대한 입장을 통해 실질적으로 파블로의 노선으로 넘어갔다. 동시에 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에는 지도부에 반대하는 분파가 형성되었다. 스파르타쿠스동맹의 토대가 된 혁명적 경향(Revolutionary Tendency)은 쿠바가 기형적 노동자국가라고 올바르게 규정하고 카스트로와 유럽 파블로주의자들에게 굴종한 사회주의노동자당 지도부를 비판했다. 혁명적 경향은 1963년에 "제 4 인터내셔널의 재건을 위해"라는 대항 테제를 다수파의 문서에 대항하여 제시했다. 결국 다수파 지도부는 유럽의 파블로 조직들과 통합하여 "통합서기국(United Secretariat)"을 수립했다. 당의 다수파는 농민에 기초한 "권력 장악을 위한 게릴라 투쟁 노선"을 지지한 반면 혁명적 경향은 노동계급만이 농업 혁명과 민족해방 투쟁을 지도할 수 있다는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했다.

사회주의노동자당 다수파 지도부가 소부르주아 세력을 추종하는 파블로 노선을 견지하자 혁명적 경향은 이에 대항했고 1963년 당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사회주의노동자당의 노선과 스파르타쿠스동맹의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다. 한때 트로키주의를 옹호했던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이제 흑인 민족주의, 부르주아 평화주의와 페미니즘에 굴복했다. 지금 이 조직은 개량주의 조직으로 굳어져서 미국의 주도적인 사민당이 되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패배의 역사로부터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해야한다: 수정주의는 스탈린주의에서 나왔든 한때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한 세력에서 나왔든 똑같은 정치적 파산을 가져온다. [가디언]지가 옹호하는 모택동주의 노선은 사회주의노동자당의 개량주의와 마찬가지로 노동계급에게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자유 부르주아 조직들과 동맹하여 개량주의적인 단일 쟁점 운동에 열중하고 있다. 이에 대해 모택동주의 조직들은 자유 부르주아 세력과 동맹하여 똑같이 개량주의적인 다양한 쟁점 운동을 제안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혁명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은 스탈린주의나 파블로 수정주의와 확실히 단절하고 노동계급의 독자성을 옹호하는 맑스주의 강령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이 올바른 길은 오직 스파르타쿠스동맹만이 추구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이 올바른 길은 제 4 인터내셔널 재건을 위해 민주집중제에 기반하되 강령적으로 통일된 트로츠키주의 경향을 건설하는 가차 없는 투쟁을 벌이는 데에 있다.

 

파블로주의를 타도하자!

제 4 인터내셔널을 재건하자!

 

The Stalin School of Falsification Revisited

Workers Vanguard, in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