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르타쿠스동맹(SL)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과 혐오증, 지배계급의 압력 앞에서 몸 사리기, 기회주의"

 

<소제목 목차>

조인나사를 느슨하게 풀다

조급성과 인상주의

러시아 문제에 대한 수정주의

결국 브레즈네프의 후계자에게 만세를 보내다

동독 사태에 개입한 ICL

트렙토우 공원의 시위

통일사회당과의 동맹에 대한 환상 그리고 대대적 허세

환상의 거품이 푹 꺼지다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 동독의 '정치 혁명'

동독 붕괴에 대한 ICL의 1990년 입장

동독의 합병과 소련의 붕괴

중국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ICL의 혐오증

황당한 종파주의: ICL이 1999년 시애틀 시위를 비난하다

SL/ICL: 20년 동안의 종파주의

SL과 '반전운동'

ICL의 종파주의와 무미아 석방운동

ICL의 총파업에 대한 입장번복

ICL의 '기회주의적 몸사리기'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 다시 몸사리기

SL은 왜 중요했는가

 

 

2004년 봄에 나온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에서 국제공산주의동맹(International Communist League, ICL)은 자신의 최근 정치 행적이 "기회주의적 돌출행위", "종파주의에 입각한 도덕주의", "더욱더 추상적이고 내용이 빈약한 활동 방식" 등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렸다: "소련 붕괴 이후의 세계에 직면하지 못한 무능력과 이 결과 초래된 혁명의식의 퇴행이 ICL이 현재 처하고 있는 위기의 뿌리이다." 이것은 심각한 자기반성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동안 ICL의 본부격인 미국의 스파르타쿠스동맹(Spartacist League, SL)의 지도자들은 "러시아 문제"에 관한 한 자기들이 전문가라고 항상 자처해왔기 때문이다. 소련 진영의 자본주의 복귀는 국제노동운동의 세계 역사적 패배였으며 수백만 좌익분자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이 거대한 사건으로 인해 ICL은 큰 혼란을 겪었으며 이 조직의 중핵들은 심각하게 자신감이 떨어졌다. 또한 조직 지도부의 정치적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그러나 소련의 붕괴는 SL/ICL이 겪고 있는 질병의 근본 원인이 아니다.

[스파르타쿠스단]지를 오랫동안 읽어온 독자들은 이와 유사한 "솔직하고도 비판적인 평가"가 지금부터 10년 전 SL의 제 9차 총회 직후 이 잡지의 제 51호(1994년 봄)에도 실렸다는 사실을 기억해낼 것이다. 이 평가는 "속물주의적 돌출행위", "인상주의", "종파주의적 허세", "시류에 영합하기", "조직의 중앙 사무실에 박혀 있는 지도부"의 "가장 좋게 얘기하면 수동성과 선전주의 가장 나쁘게 얘기하면 기권주의" 등을 보고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당시 이렇게 논평했었다:

"아첨의 기세가 조금도 없는 이 솔직한 자화상은 의심의 여지없이 SL의 창립자/지도자인 제임스 라벗슨(James Robertson)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 지역에서 반 정도 은퇴한 가운데 여유를 즐기면서 거리를 두고 자기 조직을 바라볼 수 있는 장점을 누리고 있다. 그는 자기 조직의 지금 모습이 확실히 맘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SL이 바로 자신의 피조물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그럴싸하게 설명할 수 없다."-- "음울한 조화(Dismal Symmetry)", [1917년]지 제 15호, 1995년

1994년 [스파르타쿠스단]지에 실린 이 글은 SL의 병적인 상태를 소련의 붕괴 탓으로도 돌렸다. 그리고 반혁명의 승리가 "세계 역사에서 근본적으로 새로운, 격동에 찬, 급격히 다른 시기를 개막했으며 이 시기와 관련하여 우리의 분석과 노선 확정을 위해 참고할 수 있는 역사상의 유사한 예가 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SL 자신이 인정한 "소련 붕괴 이후의 세계에 직면하지 못한 우리의 무능력"은 "역사상의 유사한 예"가 없기 때문에 생겨났다고 설명하기는 거의 힘들다. 왜냐하면 소련의 관료적 퇴보에 대한 뛰어난 분석을 통해 레온 트로츠키는 이와 관련된 핵심 사안들을 이미 정치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다.

소련 관료집단에 대한 충성을 기초로 수립된 각국의 스탈린주의 공산당과는 달리 SL은 소련 스탈린주의 지배집단에 대한 트로츠키의 견해를 수용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노동자국가 내부에서 작동하고 있는 세계 자본가들의 계급적 기관"(주 1: [이행 강령], IBT판, 1998년, 62쪽)으로서 불안정하고 기생적이며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집단이다. 1970년대에 혁명 조직이었던 SL은 소련을 비타협적으로 방어하면서 동시에 소련 관료집단의 범죄행위들을 비난했었다(예를 들어 "소련 스탈린주의자들의 '심리적' 고문을 저지시키자!", [노동자 전위]지, 제 96호, 1976년 2월 13일).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SL 지도부는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Stalinophilia)을 연이어 노정하면서 자신들이 옹호해왔다고 주장해온 트로츠키주의 강령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 결과 이 조직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이후 이 조직 지도부는 이번에는 정반대로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Stalinophobia)을 표출하여 이전의 짝사랑과 완벽한 조화를 연출했다. 바로 이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ICL은 강령과 노선 상의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트로츠키주의 혁명조직이었던 SL에서 계속 활동해온 이 조직의 중핵들은 왜 이 편향들을 그대로 인정해버렸는가?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혁명적이고 민주 집중제를 실천하는 조직이었다가 누적적으로 퇴보하여 지도부 일반 특히 이 조직의 창립자/지도자 제임스 라벗슨에 대한 무조건 복종이 기본 원칙이 되어버린 조직으로 SL의 성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조직 운영 원칙이 변질되면서 SL은 레닌주의에서 이탈했고 이후 드러난 모든 편향들의 토대가 이렇게 마련되었다.

SL의 퇴보는 여러 해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시기에 조직에는 갈수록 비정치적인 권위 싸움과 숙청들이 반복되었다. 1982년에 국제볼세비키그룹(International Bolshevik Tendency, IBT)의 선행 조직인 외부 경향(External Tendency, ET)은 이렇게 평가했다:

"SL의 핵심 지도부는 의식적으로 지극히 냉소적이 되었기 때문에 자발적 개혁 능력이 없다. 볼세비키 정당이 오랜 회원들을 계속 당 활동에 종사시키면서 동시에 새로운 회원들을 정치적으로 동화시키기 위해서는 반복적인 교육이 필수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 활력, 중핵, 기회 등이 투자되어야 한다. 이 혁명적 투자를 관료적으로 생략하기 위해 SL은 회원들을 과도하게 학대시켜왔다. 분파 투쟁의 소모적인 결과와 이 사실 때문에 SL은 그만큼 자기 파괴적인 조직이 되었다."-- [국제스파르타쿠스그룹(international Spartacist tendency, iSt, ICL의 이전 명칭) 내 외부 경향의 출범선언문], 1982년

우리는 또한 이렇게 말했다: SL의 "초(超)중앙집중적이고 편집증적이며 개인숭배적인 조직 운영 방식은 극에 달했다. 이 때문에 과연 SL이 조직 규모를 상당히 확대하고 트로츠키주의 중핵들을 재생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 평가는 몇 년 뒤에 올바른 것으로 확인되었다. SL의 시카고 지부 책임자 에드 클락슨은 공개적으로 이렇게 불평했다: "청년 회원들과의 정치투쟁에서는 정치 문제들이 명확히 해명되기는커녕 자기 고백과 비난들만 난무하고 있다." 그는 지도부에게 으름장을 당하고 기가 죽은 청년 회원들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레닌이 말했듯이 여러분이 정치적으로 발전하려면 자기주장을 펼칠 능력이 있어야한다. 이것은 청년의 특징이었다. 그러나 우리 조직에서 이 특징은 이상하게 약 10년 전부터 사라진 것 같다."-- "레닌주의 전술과 노동자 권력으로 가는 길", [청년 스파르타쿠스]지 제 131호, 1985년 11월

그러나 청년 회원들의 수동적 태도는 아주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스파르타쿠스청년동맹(Spartacus Youth League, SYL)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라벗슨 자신이 직접 조종했고 명백히 "정치 수준 이하의" 숙청을 통해 조직에서 축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들 대신 얼굴은 새로우나 좀 더 아첨하는 청년 지도부가 옹립되었다. 그러나 SYL은 과거의 모습을 결코 회복하지 못하고 1986년에 마침내 해체되어 오지 않을 미래를 기약했다. 이 사건은 이후 몇 년에 걸쳐 iSt의 거의 모든 단위를 휩쓴 지도부 주도 숙청 시리즈의 서막에 불과했다. 이 결과 SL/iSt는 정치적 수준이 상당히 높은 중핵들을 보유했으며 건강한 모습을 보인 조직에서 변질하여 지도부가 회원들에게 으름장을 놓을 능력이 있다고 공개적으로 뻐기는 조직이 되었다.

우리는 1985년에 나온 글 "제임스 라벗슨이 건설한 도시로 가는 길(The Road to Jimstown)"을 통해 이 과정 전체를 개괄했다. 그리고 이 과정 중에 드러난 공식적인 노선 상의 편향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이렇게 주목했다:

"즉각 느껴진 조직의 이해를 위해 SL은 기이하게 강령적 동요와 혼란을 보여 왔다. 이것이 바로 특이하면서도 특별히 냉소적인 형태의 중도주의인 정치적 강도주의(political banditry)의 특징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관료적으로 조직이 운영되고 약간 삐딱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SL은 혁명조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리비아의 카다피를 지지하고 그로부터 돈을 받기 직전까지 영국의 히일리(Healy) 그룹이 보인 모습을 SL은 지금 그대로 가지고 있다. 또한 한때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었으나 지금은 권위적인 최고 지도자에 대한 복종심으로 뭉친 정치적 강도 집단이다."

1980년대 초반부에 이미 SL의 내부 분위기는 썰렁했다. 사소한 권위 싸움과 지도부에서 지시한 마녀사냥이 진정한 의미의 정치 토론을 대신했다(주 2: "라벗슨 식의 당 건설 파", [1917년]지 제 1호<1986년 겨울>를 참조하시오). 이 때문에 다수의 중핵들은 조직에서 축출되었거나 혁명운동에 식상하여 활동을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충분한 수의 중핵들은 그대로 남아서 SL을 미국 좌익 운동권의 생명력 있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지금도 애쓰고 있다. 그러나 공개 정치활동 무대에서 SL 회원들은 조직 내부에서 발생한 압력들을 견디지 못하고 기이하고 빈번히 혐오스러운 모습들을 더욱 자주 보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조직 지도부는 메모를 통해 회원들에게 "혐오스러운 존재"로 보이는 행위들을 삼가라고 주기적으로 충고하고 있다.

 

조인 나사를 느슨하게 풀다

최근 몇 년 간 SL 지도부는 새 회원을 획득하고 기존 회원을 계속 유지하기가 어려워서 크게 걱정해왔다. 들은 것을 모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청년 회원들은 별 가치가 없다는 것이 빈번히 드러났다. 우수한 능력의 개인을 끌어들이고 조직에 동화시키기 위해 회원들에 대한 통제가 약간 완화되었고 으름장보다는 교육과 설득이 더욱 강조되었다. 동시에 지도부는 ICL의 정치노선을 좀 더 일관되게 유지하면서 과거의 특히 황당하고 기이한 입장들을 철회했다. 교정되어야할 입장이 어느 것이고 인정될 수 있는 비판의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물론 라벗슨과 그의 최측근의 독점적 특권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오류로 확인된 입장들 대부분은 IBT나 잰 노든(Jan Norden)의 국제주의그룹(Internationalist Group, IG)이 그동안 비판해왔던 것들이다.

[스파르타쿠스단]지에 실린 이 글은 이렇게 보고 한다: 25년 전에 라벗슨은 쿠르드족(Kurds)을 "똥(Turds)"이라고 불렀다; 이 저속한 국수주의 발언을 IBT가 폭로했다; 이 폭로로 "치열한 내부 토론"이 촉발되었다; 토론이 끝난 후 ICL의 2003년 총회가 열렸다(주 3: [스파르타쿠스단]지의 이 글은 조직에서 1996년에 축출된 회원들로 구성된 IG를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러나 라벗슨의 "똥" 발언으로 빚어진 소동을 제외하면 IBT를 대체로 무시한 채 언급하지 않는다. IBT는 1999년 씨애틀의 세계화 반대 시위 그리고 2001년 9/11 테러 와중에 국방부 건물이 공격당한 것에 대한 SL의 입장을 각각 비판했다. 이 비판을 SL은 암묵적으로 수용했다. SL이 IG의 입장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들이 있다. 이 가운데 하나는 IG가 ICL의 정치적 오류들을 과장하는 경향에 있다. 예를 들어 2003년에 SL이 이라크 전쟁에 대해 미 제국주의 패배 노선을 취하지 않았다고 IG는 잘못 주장했다. 이 때문에 IBT보다 IG를 반격하는 것이 SL에게는 더 수월하다. 그러나 진짜 주요한 이유가 있다. IG가 SL의 중핵들과 관계가 더 밀접하다는 점이다. IG는 1996년 이전까지 SL이 저지른 모든 오류들을 기꺼이 방어하려한다. 이 때문에 ICL 회원들은 당연히 IG가 정치적으로 자신들과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다수의 논쟁들에서 IG는 IBT와 ICL 입장의 중간노선을 취한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ICL에서 소동을 일으킨 라벗슨의 국수주의 "똥" 발언에 대해 IG는 엄격하게 무반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노든은 [노동자 전위]지의 황당한 변명을 지지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기 위해 SL 회원들을 불필요하게 적대시할 경우 자기에게 이익이 없다고 생각한다. IG가 이 문제에 대해 아무 입장도 밝히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SL의 정치적 퇴보 과정을 IG는 불문에 붙이려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우리의 [트로츠키주의 게시판] 제 6호 그리고 이 가운데 특히 1995년 12월 15일에 보낸 우리의 편지를 참조할 것.). [노동자 전위]지의 편집부는 이 문제를 회피하려했다. 이 때문에 "[노동자 전위]지 편집부의 행동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우리 조직은 자신의 혁명적 목표로부터 정치적으로 표류하는 경향이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회 준비 토론"이 진행되었다(주 4: 우리의 팜플렛 [쿠르디스탄과 민족해방투쟁]에 이 문제와 관련된 모든 문서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 문제를 교정하기 위해 ICL 총회는 새로운 그러나 좀 더 원자화되어 독자적으로 행동할 능력이 더 부족하도록 의도된 국제지도부를 선출했다.

 

'조급성과 인상주의'

[스파르타쿠스단]지에 실린 이 글은 과거 SL이 저지른 대단히 심각한 오류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오류들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왜 그렇게 오랜 세월동안 끈덕지게 옹호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분석하지 않고 있다. 대신 이 글은 모든 문제들이 ICL 중핵들의 정치적 깊이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손쉽게 결론 내린다: "미쉘 파블로(Michel Pablo)와 같은 자들로 대표되는 조급성과 인상주의는 오직 역사적으로 한 시기에만 훈련을 거친 중핵들의 허약성을 특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주장은 나름대로 옳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이 모든 오류들이 저질러졌을 때 최고 지도자 양반과 그의 측근들은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SL은 규율이 매우 엄격한 조직이며 노선에 대한 중요한 결정들은 모두 최고 지도부에 의해 내려지거나 최소한 검토된다. 그리고 지금 거의 50대나 60대인 SL의 핵심 중핵들은 30년이나 40년간 조직에서 활동해왔다. SL의 정치적 허약성은 의문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경험이 부족한 청년 회원들 때문이라고 변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레닌은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운동에서 기회주의는 노동계급의 혁명 잠재력을 폄하할 때 발생한다. SL 지도부의 "조급성과 인상주의"가 가장 먼저 드러난 예는 1980년대 초반부에 조직의 노동조합 활동을 청산하려는 의식적인 결정이었다(주 5: 1970년대 후반부에 SL의 노동조합 분파는 미국통신노동조합, 국제항만창고노동조합에서 기존 지도부에 반대하는 가장 주요한 현장 조직이었다. 또한 자동차노조를 비롯한 다른 노동조합들에도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1982년에 발표한 출범선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SL의 중앙지도부는 노동조합 분파 건설의 필름을 거꾸로 돌려왔다. 이들은 노동조합에 근소하지만 진정한 기반을 가진 중핵들이 사회현실에 대한 독자적인 의식을 가지면서 언젠가 조직 내에 반대 분파의 핵심 부위가 될지 모른다고 우려해왔다. 바로 이 우려가 이 불행한 사태의 전조가 되었다. 포스터, 넬슨, 라벗슨 등은 '노동조합 의식은 부르주아 의식'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회주의노동자당에서 노동조합 중핵 대부분을 이끌고 조직을 나갔던 버트 카크런의 유령을 수차례 언급하였다. 이들은 SL에서 노동자들을 대변해온 지도자 대부분의 기를 꺾고 이들을 정치적으로 파괴한 다음 축출시켰다. 특히 이 만행은 태평양 연안의 조직에서 격심하게 자행되었다. 또한 노동조합 활동과 관련된 다수의 중핵들도 지도부의 손에 의해 같은 운명을 겪었다...."-- [iSt 외부 경향의 출범선언문], 1982년 10월

1983년 6월 우리는 팜플렛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청산을 저지시키자!"를 제작했다. 그리고 이를 통해 SL을 "70% 흑인 정당"으로 발전시킨다는 미명 하에 지도부가 자행한 노동조합 활동 기권행위를 문서화했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힘겨운 투쟁을 통해 조직 노동자들 속에 확립한 교두보를 버림으로써 흑인 노동자들 속에 기반을 마련하려는 SL의 작업은 더욱 어려워졌다.

 

러시아 문제에 대한 수정주의 -- 브레즈네프의 대외정책에 만세를 부르고...

"우리야말로 러시아혁명을 계승한 정당이다"라고 SL은 자주 주장해왔다. 그러나 SL 이외에 어느 누구도 이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러시아 문제에 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지도부의 주장은 조직 내부에서 이들의 정치적 권위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일 뿐이다. 1980년대 초반에 SL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국주의자들이 후원하는 회교 반군에 반대하고 소련군을 지지했다. 그리고 폴란드 연대노조 지도자들의 자본주의 복귀 기도에 확고히 반대했다. 이를 통해 SL은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경쟁조직들과 자신을 확실히 구분시켰다. 그러나 이때 이후 러시아 문제에 대해 SL은 수정주의적 동요를 계속해왔다(주 6: [맑스주의 게시판]지 제 3호, 제 4부에 실린 1965년 10월 8일자 대담에서 제임스 라벗슨은 이렇게 말했다: "요동, 변화, 움직임, 이질적 분자들의 집합 등이 바로 중도주의의 특징이다....회원들의 생각 속에 온갖 종류의 모순적 사상들이 뒤섞여 있는 경향이 바로 중도주의이다.").

[스파르타쿠스단]지에 실린 이 글은 러시아 문제에서 조직이 일부 심각한 편향을 보였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지도부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 이 편향들을 정치적으로 해명하거나 이 오류들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진지하게 추적하지 않고 있다. SL의 자기비판에 대한 IG의 논평(주 7: "소련 붕괴 이후의 SL/ICL: 새로운 지그재그로 드러난 중도주의 편향", [국제주의자]지 제 19호, 2004년 여름)은 약간의 통찰력을 드러내고 있으나 이 문제의 근원은 분석하지 않았다. 대신 1996년 자기들이 조직에서 축출되기 전까지 SL이 잘 나가고 있었다고 증명하는데 주로 초점을 맞추었다(주 8: "IG: 과거를 부정하고 의도적으로 진실에 눈을 감는 라벗슨 추종자들", [1917년]지 제 20호<1998년>를 참고하시오.). 그러나 IG의 논평은 실제 사실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러시아 문제에 대한 라벗슨 지도부의 의식적으로 냉소적인 수정주의 편향은 iSt의 독일 지부인 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Trotzkistische Liga Deutschlands, TLD)의 1981년 9월 총회에서 처음 드러났다(주 9: 트로츠키주의에 역행하는 SL 지도부의 공개적인 행위는 이보다 몇 달 전에 처음 모습을 보였다. 이때 SL 회원들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시위에서 엘살바도르인민전선(FMLN)의 군사기구 깃발 아래에서 행진했다. 우리의 출범선언문은 이렇게 논평했다: "반제(反帝) 시위대 한 가운데에서 SL 회원들 일부는 트로츠키의 제 4 인터내셔널 깃발을 들었고 일부는 인민전선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대오에 인민전선의 깃발이 올라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단기적 인기를 위해 일시적으로나마 원칙을 흐리려는 SL의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우려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 iSt의 국제집행위원회는 폴란드공산당이 연대노조를 탄압하는 과정에서 "자행할지도 모르는 어떤 형태의 어리석고 극악한 행위에 대해서도 미리 책임을 진다"는 내용의 동의안을 제출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논평했다:

"폴란드의 연대노조와 같은 내부 반혁명 세력이나 1940년 핀란드의 경우처럼 외부 자본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스탈린주의 정권을 트로츠키주의자는 군사적으로 지지한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자들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노동계급의 소유형태를 군사적으로 방어하는 등의 과정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노동계급에게 저지르는 범죄행위에 대해 우리는 책임지지 않는다. 이러한 범죄행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군사적으로 이들을 지지한다."-- "폴란드: 스탈린주의자들의 범죄행위에 대해 책임지지 않는다!", [iST 외부 경향의 게시판]지 제 1호, 1983년 8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짝사랑하는 이 동의안은 회원들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이 노골적인 수정주의를 섁트먼주의로 간주하면서 맹목적으로 수용하기를 거부한 TLD 중핵들을 숙청하기 위한 연막술이었다(주 10: [캐나다 스파르타쿠스단]지는 다음과 같은 우리의 주장을 공격했다: "현재 니카라과에서 핵심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는 소련 방어가 아니라 니카라과 혁명의 방어이다." 캐나다의 라벗슨 추종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주장은 1939년 핀란드의 러시아 침공에 대항하여 섁트먼이 러시아를 방어하기를 거부한 것과 유사하다: "지금의 BT와 마찬가지로 당시의 섁트먼에게 소련 방어는 '핵심 문제'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진짜 중요할 때 이를 위해 투쟁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응답했다:

"사포아 협정을 통해 산디니스타 정권은 중미 신식민지 통치자들 그리고 미국의 용병인 반군들의 명령에 따라 나라를 '민주화 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협정이 조인된 지 2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우리의 입장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자칭 트로츠키주의 조직들이 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ICL의 캐나다 지부인 트로츠키주의동맹(Trotskyist League, TL)은 이해하기 쉬운 우리의 이 입장을...섁트먼주의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SL의 창립자/지도자 라벗슨은 1940년대 후반부에 냉전이 막 기세를 올릴 때 공산당을 떠나 섁트먼의 조직에 가담했다. 마치 과거에 그가 저지른 죄를 속죄하듯이 SL은 소련 방어 노선이 언제나 모든 곳에서 '핵심 쟁점'이라고 결정했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미국 국무부가 사주한 사회주의자라고 자동적으로 비난받는다. 이것은 소련 방어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의 입장을 저속하게 왜곡하는 행위인데 하나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새 회원들에게 가르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 정치가 이렇게 단순하다면 지능이 그럴듯하게 좋은 구관조(九官鳥)도 몇 주 만에 이 정식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혼미와 혼란 속을 헤매다(Dazed and Confused)", 1988년 9월 17일

한편 iSt는 자신의 공식 매체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올바른 입장을 유지했다(주 11: 그러나 ICL은 1995년 8월에 출판한 팜플렛 "국제볼세비키그룹 --- 그 정체는 무엇인가?"에서 다음과 같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면서 이 올바른 입장을 마침내 기각했다:

"폴란드의 연대노조를 저지하는 문제가 가장 시급하게 제기되었을 때 IBT는 다음과 같은 우리 입장에 대해 마치 미친 것처럼 비난하며 날뛰었다: '소련의 스탈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필연적으로 어리석고 잔인한 방식을 통해 무력 개입할 경우 우리는 이것을 지지하고 이들이 자행할지도 모르는 어떤 형태의 어리석고 극악한 행위에 대해서도 미리 책임을 진다.'"

우리는 ICL의 주장 전체와 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5호에 다시 실었다.).

이 에피소드는 1980년대 내내 iSt 지도부가 갈수록 심하게 드러낸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 편향을 미리 선보인 것에 불과했다(주 12: 그러나 이 편향은 미국 지배계급의 분노를 비껴가기 위해 비겁하게 몸을 사리는 정반대의 편향과 가끔 충돌했다. 예를 들어 대한항공 007호는 1983년 9월 도발적으로 소련 영공을 침입했다. 소련 공군기는 이 여객기를 격추시켰다. 이때 SL은 소련을 무조건 방어한다는 가식을 모두 벗어던지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이 여객기에 죄 없는 민간인 승객들이 타고 있다는 것을 소련 당국이 알았다면 "이 비행기의 첩보 임무가 끼칠지도 모르는 군사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격추시킨 것은 "극악한 야만행위보다 더 나쁘다"<[노동자 전위]지, 제 337호, 1983년 9월 9일>. 당시 우리가 논평했듯이 SL의 이 입장은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보다 미국 국무부가 비호하는 사회주의와 훨씬 더 가까웠다.). 1979년 후반부에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냈을 때 SL은 이 결정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면서 "적군 만세!" 구호를 채택했다. 이것은 러시아 문제와 관련하여 SL이 처음으로 중요하게 오류를 범한 경우였다. 이 구호는 군사적 충돌에서 어느 한쪽을 군사적으로 지지하는 선을 넘어서 정치적 지지로 나아갔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1930년대 스페인 내전에서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 반란군에 대항한 공화국 군대에 대해 또는 1960년대 월남전에서 미 제국주의에 대항한 월맹 민족해방전선에 대해 군사적 지지를 표명했었다(주 13: "적군 만세!" 구호의 정치적 논리는 1989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ICL 주최 공개 토론회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이때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주의동맹<TL, ICL의 캐나다 지부>의 책임자 미리엄 맥다널드의 주장을 우리는 이렇게 요약했다:

"TL의 주요 연사였던 미리엄 동지는 자신의 주장을 요약하는 과정에서 이 구호가 암묵적으로 가지고 있는 매우 반(反)트로츠키주의적인 강령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이 혁명을 배신할 가능성은 항상 있으며 주요한 사회 투쟁에서 배신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다고 그녀는 주장했다. 그리고 특히 '러시아 혁명에서도 배신의 가능성은 있었다'고 말했다!

iSt의 권위 있는 대변인이 레닌/트로츠키의 1917년 볼세비키당과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난 뒤 브레즈네프의 부패한 스탈린주의 볼세비키당이 '배신'을 때릴 가능성이 같았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 우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TL은 이 발언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겠다고 공언할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이 발언은 귀하 조직의 중핵들마저 피의 강으로 그어진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 사이의 경계를 흐리면서 이 문제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는 예가 된다."-- TL에 보내는 편지, 1989년 4월 2일,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8호에 재수록

수년간 우리는 "적군 만세!" 구호를 옹호했다. 그러나 어떤 동지가 이 구호에 반대한 후 다수를 이 입장으로 획득했을 때 우리는 이 오류를 교정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SL의 오류 정도를 과장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SL은 이 구호를 제출할 때 이미 소련이 아프가니스탄 혁명을 배신할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했다. 공정을 기하기 위해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 진주했을 때 소련에 충성한다는 여러 나라의 공산당들은 제국주의자들의 반대 여론에 움찔하면서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그러나 이때 SL은 미국을 휩쓸고 있는 소련 반대 물결에 직면하여 의도적으로 날카롭게 이 구호를 제출했다. 제국주의 언론에 정면으로 대항하려는 이 혁명 본능은 칭송받을만하다. 그러나 이 구호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소련의 역할을 무조건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행위일 뿐이다."-- "'적군 만세!'구호에 대하여", [1917년]지 제 5호, 1988년-89년 겨울

그리고 우리는 이 오류와 SL의 정치적 행보 사이의 연관을 논의했다:

"혁명조직은 하룻밤 사이에 퇴보하지 않는다. 주위 사건들이 이 조직에 가하는 압박과 다른 조직들과의 정치투쟁을 통해서 수정주의 욕구는 서서히 생긴다. 레이건 대통령의 소련 반대 캠페인이 시작되었을 때 SL은 강경한 소련 방어 노선을 채택했고 이것은 옳았다. 그러나 이때 이미 SL의 조직 내부 운영은 퇴보한 지 한참 되었다. 노동계급을 지도할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한 SL이 이 임무를 성취하기 위해 다른 세력들에 기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같은 글

1980년대 초반부에 시간이 갈수록 SL은 트로츠키주의를 일종의 좌익적 소련 충성주의로 변질시키고 있었다. 이 경향은 근본적으로 이 조직이 겪고 있는 정치적 사기 저하의 반영이었다:

"어떤 조직이 자신의 혁명 능력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을 때 국내 정치판에서 몸을 사리면서 맑스주의의 혁명 임무를 아프가니스탄의 '적군'처럼 멀리 있는 세력에게 전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같은 글

1920년대 미국공산당의 정치적 퇴보에 대해 제임스 캐넌도 이와 유사한 의견을 피력했다:

"당의 스탈린주의화는 1920년대의 장기 호황기에 시작된 당의 퇴보과정의 결과에 불과했다. 미국의 모든 계급 대중들은 이 시기의 장기화된 번영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 분위기가 공산당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리 없었다. 당의 지도적 중핵들은 유약해졌으며 미국 혁명에 대해 이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자신감은 손상되었다. 결국 이들은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을 쉽게 수용했다.

이 이론을 수용한 자들에게는 혁명이 승리한 '유일한 국가'인 러시아가 미국혁명의 대체물이었다.

              .                 .              .

우리 시대의 현실적 전망으로 이 나라의 사회혁명 투쟁을 포기하고 다른 나라 혁명들에 동조하는 역할로 스스로를 낮출 경우 과거 공산당에게 일어난 일은 우리를 포함한 어떤 당에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미국 공산주의운동의 첫 10년]

캐넌 자신이 창설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Socialist Workers Party, SWP)은 1960년대 초반에 공산당의 퇴보를 그대로 되풀이 하였다. SWP는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그가 통치하는 쿠바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무비판적으로 선전했다. SWP의 혁명적 경향(Revolutionary Tendency, RT)은 SL의 선행 조직이었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SWP의 반대 좌파가 되었다("쿠바와 맑스주의 이론", [맑스주의 게시판]지 제 8호를 참조하시오.).

아프가니스탄의 소련군에게 "만세"를 보낸다는 SL의 노선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동독'(독일민주공화국, DDR) 사태에 이후 ICL이 개입하면서 초래한 핵심적인 오류를 미리 예견했다:

"소련공산당의 민간인 기구가 관료집단의 보수적 측면을 대표하고 있는 반면 소련 군부는 관료집단의 '진보적' 측면을 어떤 방식으로든 구현하고 있다고 SL은 암시하고 있는가? 이 전제 하에서만 '적군 만세!' 구호는 관료집단의 좌파(군부)를 우파(정치국)와 대항시키면서 소련 지배층의 '모순'을 활용하는 시도로 인정될 수 있다.

             .               .             .

소련 군부와 나머지 국가기구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어 있다고 SL은 암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련을 구원할 세력이 소련의 노동계급이 아니라 관료집단의 일부 분파라고 SL은 암시하고 있는가?"-- "'적군 만세!' 구호에 대하여", [1917년]지 제 5호, 1988년-89년 겨울

 

... 결국 브레즈네프의 후계자에게 만세를 보내다

아프가니스탄 사태에 대한 SL의 오류를 우리는 늦게야 인식했다. 그러나 1982년 11월 SL이 반파시스트 집회에서 자기 대오를 "유리 안드로포프 대대"라고 불렀을 때 우리는 이것이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조야한 짝사랑 편향이라는 사실을 금방 인식했다. 우리의 비판에 대해 라벗슨은 SL의 이 입장이야말로 완벽한 트로츠키주의 노선을 구현하고 있다면서 몸소 이 입장을 방어하고 나섰다(주 14: 이 문제와 관련된 논쟁은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1호 "트로츠키주의만이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할 수 있다"에 재수록 되었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45호와 46호에 연속으로 실린 글에서 SL의 지도적 이론가 조지프 시모어는 1970년대의 소련 관료집단을 명쾌하게 꿰뚫어보았다: "브레즈네프 관료집단은 스탈린식 '맑스주의-레닌주의'를 당연히 말로만 칭송하고 있다. 이들의 실제 이데올로기는 '초강대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논리를 따르면 우리는 유리 안드로포프를 좋아하는 SL 지도부의 이데올로기를 "대리적 초강대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진행된 논쟁에서 SL 지도부는 이렇게 선언했다: "수만 명의 공산주의자들과 적군 장교들을 살해한 스탈린이나 베리아 같은 통 큰 살인범들을 안드로포프와 비교하는 것은 [논평]지에 실려야 마땅한 외설적인 잡탕에 불과하다." (주 15: [노동자 전위]지 제 348호<1984년 2월 17일>에서 인용. 이로부터 몇 년 후 [노동자 전위]지는 똑같은 "외설적인 잡탕"을 만들어냈다. 이 신문은 크렘린궁의 후계자들을 "스탈린의 상속자들"<제 479호, 1989년 6월 9일>이라고 묘사했으며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 고르바초프"<제 498호, 1990년 3월 23일>라는 표현을 썼다. 이 시점에서 라벗슨이 소련공산당 지도자 고르바초프에게 특별한 애착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이 이 표현으로 드러났다. 1993년 출판된 팜플렛 "소련의 노동자국가는 어떻게 목이 졸려 죽었는가?"에서 ICL은 이렇게 주장했다: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밑에서 고르바초프는 브레즈네프 밑에서 도제 수업을 받았다. 옐친과 크라브추크도 같은 부류였다. 이들은 모두 똑같이 스탈린주의라는 돼지우리에서 나왔다."

이보다 5년 전에 우리는 SL이 고르바초프와 그의 친위세력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여 "상당히 유능한 지도부"라고 표현한 것을 비판했다. 그리고 "페레스트로이카는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위협하는 반(反)노동계급적 정책이다"라는 사실을 이들이 무시하는 태도를 비판했다. 한편 1987년 11월의 [캐나다 스파르타쿠스단]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과 기본 정책을 일부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기본적으로 같다는 주장은 백치나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주장을 특히 강하게 비판하면서 이것을 "트로츠키주의로부터의 명백한 이탈"이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물론 고르바초프는 스탈린 자신이 아니라 그의 후계자이다. 스탈린 사후 35년 동안 그가 확립한 관료적 정권의 모순들은 더욱 격화되었으며 이 때문에 관료집단은 정책을 바꾸기로 결정하고...이것을 시행에 옮길 인물들도 바꾸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고르바초프가 등장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에 대한 관료집단의 정치적 지배는 여전하다. 러시아 노동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찬탈한 관료집단의 대표로서 고르바초프는 스탈린과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특권을 누리는 크렘린궁의 과두집단과 소련 노동계급 사이의 기본 관계는 스탈린부터 고르바초프에 이르기까지 '기본적으로 같다'. 그리고 소련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강령도 스탈린부터 고르바초프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로 같다."-- "혼미와 혼란 속을 헤매다(Dazed and Confused)", 1988년 9월 17일             

또한 이 신문은 최근 사망한 안드로포프를 위해 추모 난을 할애하면서 그에 대한 SL의 집무 지지율이 75%라고 선언했다.

안드로포프는 1956년 헝가리 노동자 정치혁명을 유혈로 진압한 장본인이었다([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1호를 참조하시오). 그러나 SL 지도부의 눈에 그는 제국주의자들에 기꺼이 대항한 강인한 인물이었다. 논쟁을 통해 우리는 SL에게 "스탈린주의와 볼세비키주의는 철천지원수지간이다"라는 트로츠키의 발언을 상기시켰다. 그리고 안드로포프와 그의 관료집단은 궁극적으로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그런데 SL 지도부는 우리의 주장을 실질적으로 제 3 진영 입장[역주: 미 제국주의와 소위 소련 제국주의를 모두 반대한다는 노선으로 국제사회주의자들의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모두 반대한다!" 구호가 이 노선의 대표적 표현이다.]이라고 규정했다. 이 시기에 SL의 중핵들은 퇴보한 또는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좀 더 비타협적 분자들과 동맹해야한다는 사고를 내면화했다.

1980년대 말이 되자 SL 지도부는 제국주의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더욱더 굴종적인 정책이 서유럽 공산당의 수천여 평당원들을 동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인식했다. "전 세계의 헌신적인 공산주의 노동자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 iSt는 1989년 5월에 조직 이름을 "국제공산주의동맹(ICL)"으로 바꾸었다("트로츠키주의를 비웃는 냉소주의자들", [1917년]지 제 7호를 참조하시오). 조직에 가입할 것으로 예상되는 공산당 소속 노동자들이 ICL에서 편안함을 느끼도록 조직 명칭 변경과 함께 스탈린과 몇 명을 제외한 과거와 현재 스탈린주의자들 모두에 대한 무조건적 사면을 포함한 내용이 발표되었다:

"스탈린주의와 볼세비키주의를 잘못 동일시하면서 전 세계에서 스탈린에게 헌신한 정치 앞잡이들이 생겨났다. 스탈린과 어쩌면 수년에 걸쳐 명단이 계속 바뀐 그의 심복 대여섯 명만이 이에 대한 진상을 알고 있었다."-- "국제공산주의동맹이 출범하다", [노동자 전위]지 제 479호, 1989년 6월 9일

강조를 위해 같은 주장이 글의 끝에 반복되었다: "스탈린 그리고 상황을 알고 있는 그의 심복 대여섯 명 등과 똑같은 스탈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건설'의 미명 하에 계급 협조주의 배신을 위한 도구로 '전일적 독재' 정당을 더 이상 휘두를 수 없다."

트로츠키의 유물론적 분석에 따르면 소련 관료집단은 집단적 경제에 기생하는 특권적 계층이다. 그렇다면 SL의 주장은 이 이론에 대한 심각한 수정이 아닐 수 없다. 사악한 대여섯 명을 제외하면 소련에서 수만 명의 혁명가들을 살해한 관료집단의 살인적 기구는 주관적으로 볼세비키주의에 "헌신하는 정치 앞잡이들"로 구성되었다고 SL은 암시한다. 이것은 "소련 귀족층"에 대한 트로츠키의 신랄한 비난보다는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난하면서 자신을 사면한 흐루시초프의 행위에 훨씬 더 가까웠다.

 

동독 사태에 개입한 ICL: 허세, 헛된 소망, 중도주의적 혼란

1989년-1990년 겨울에 동독의 지배 관료들을 자기 쪽으로 유혹하면서 스탈린 관료집단에 대한 ICL의 짝사랑 편향은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결국 ICL의 이 전망과 함께 동독 역시 자체 붕괴했다. 이 결과 ICL 회원들은 혼란과 사기저하에 빠졌다(주 16: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1호에 재수록 된 SL의 1994년 "전망과 임무" 문서는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주의가 붕괴하면서 동독이 독일 제국주의에 의해 흡수되는 사태를 우리는 목격했다. 이것은 국제적으로 우리 당 전체에 사기저하의 물결을 가져왔다...."

그러나 라벗슨은 동독 사태에 대한 ICL의 개입을 자기 조직의 역사적 절정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맑스주의자 개인이 한 평생 노동계급의 혁명적 기회를 언제나 보고 죽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수의 ICL 중핵들은 이 기회를 누렸다. 이것은 1989년-1990년 동독(DDR)에서 시작된 정치혁명이었다."-- "소련 붕괴 이후의 시대에 혁명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 2004년 봄

동독 사태에 대한 ICL의 개입은 이 그룹 역사상 가장 중요하며 가장 일관되게 유지된 활동이었음이 확실하다. 몇 주일에 걸쳐 ICL의 일간지에 가까운 소식지였던 [노동자통신](Arbeiterpressekorrespondenz)은 동독 전역에서 수천 명의 열성적 독자들을 확보했다. 이 신문은 와해되고 있던 기형적 노동자국가의 정세에서 소규모나마 진정한 요인이었다. 위에서 인용한 [스파르타쿠스단]지의 글은 동독 사태에 대한 ICL의 개입을 "우리 당의 성격을 규정한 투쟁"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개입은 이 글이 경고하고 있는 "조급성과 인상주의"에 의해 결정적으로 손상당했다.

동독 사태에 대한 ICL의 정치 선전은 허세, 헛된 소망, 중도주의적 혼란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시카고의 대학생이 동독의 정치혁명을 직접 목격하다"([노동자 전위]지, 제 494호, 1990년 1월 26일)라는 제목의 글에서 SL의 어느 신입 회원은 동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자기 눈 앞에서 전개되고 있던 사태를 숨을 헐떡이며 보도했다: "스탈린주의자들의 관료적 통치에 맞선 노동자 정치혁명의 한 가운데에서 나는 서 있었다." [노동자 전위]지 다음 호(제 495호, 1990년 2월 9일)는 독자들에게 돈을 보내달라고 호소했다.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였다: "지금 전개되고 있는 독일노동자 정치혁명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있다." 실제로 ICL 지지자 다수는 돈을 보냈고 회원의 상당수는 "혁명"에 참여하기 위해 일주일이나 이주일 동안 동독에 머물렀다.

그러나 정치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때 우리 동지 한 명은 동독을 둘러본 뒤 이렇게 보고했다:

"노동자 정치혁명이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TLD, ICL의 독일 지부)은 정치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 국가권력을 다투는 노동자 소비에트는 수립되지 않았다. 이중권력을 조성하거나 열망하는 노동계급의 조직 역시 동독에 아직 수립되지 않았다. 병사 소비에트는 장교들이 장악하고 있으며 병사들의 '근무'조건들을 개선하는 임무에 제한되어 있거나 직업군인들을 대표하는 압력단체에 불과하다."-- "동독의 붕괴", [1917년]지 제 8호, 1990년 여름

동독 사태에 대한 ICL의 개입은 처음부터 두 가지 기본적 오류에 의해 심각하게 뒤틀려 있었다. 첫째 ICL은 노동자 정치혁명이 실제로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둘째 ICL은 동독의 집권정당인 통일/민주사회당(Socialist Unity Party/Party of Democratic Socialism) 지도부의 사회주의 분파라고 추정된 분자들과 일종의 전략적 공동전선을 수립하는 것을 혁명전망으로 상정했다. 이 두 오류는 서로를 강화시켜 오류의 정도를 증폭시켰다. 이 오류들은 상하로 비판이 가능한 조직에서는 교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ICL이 이런 조직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류는 교정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현장에 있던 ICL 회원들은 혼란에 빠졌다. 한편으로 ICL은 동독 집권정당의 관료집단에 맞서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 정치혁명 한 가운데 있거나 이 혁명을 지도할 위치에 있다고 주장했다(주 17: ICL은 동독의 사태를 보도하면서 분산적이며 "전개되고 있는" 정치혁명<disembodied, "unfolding," political revolution>이라는 표현을 주기적으로 사용했다. 예를 들어 [노동자 전위]지 제 492호<1989년 12월 29일>를 참고하라. 이 표현은 수년에 걸쳐 파블로주의의 통합서기국<United Secretariat>이 "낙관적으로" 예상한 것을 그대로 모사한 것 같다. 목적론적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전개되는" 역동성을 통해 역사가 반(半)자동적으로 진행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역사관은 레닌주의와 무관하다. 헨리쿠스 스니블릿에게 보낸 1935년 2월 26일자 편지에서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볼세비키와 멘세비키 사이의 투쟁사 전체는 '과정'이라는 조그만 단어로 점철되어 있다."). 또 한편으로 ICL은 와해되고 있던 스탈린주의 집권정당의 최고 지도자들과 동맹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모순이 어떻게 해결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ICL은 지금까지 아무런 설명이 없다.

1990년 1월 특별 제작된 독일어 [1917년]지에서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통일/민주사회당 개혁가들이 주창하듯이 '사회 시장 경제'를 통해 존재하지도 않는 제 3의 길(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을 간다는 혼란된 강령은 조만간에 자본주의 반혁명을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또 이렇게 경고했다: "자신들이 수립한 레닌주의 국제주의 정당이 없을 경우 동독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복귀 세력이나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스스로를 오랫동안 방어할 수 없다." 와해되고 있는 스탈린주의 기구에 대항하여 (또는 이와 함께!) 노동자 정치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ICL의 주장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주목했다:

"현재 동독은 정치적 공백 상태에 있다. 노동자 소비에트가 수립되어 노동계급의 통치기관들을 구축하지 않으면 이 공백은 곧 노동계급에게 불리하게 채워질 것이다....

                .               .               .

이 순간 시급한 임무는 노동자 소비에트를 통해 독일의 자본주의적 통일을 막고 동독의 권력 공백을 채우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통일/민주사회당 관료들에 대한 환상을 경고했다:

"고르바초프, 모드로우...일당은 노동계급을 신뢰하거나 진정한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시행할 능력이 태생적으로 없다. 레닌은 1917년에 노동자 소비에트를 국가권력의 토대로 촉구하거나 지지했다. 그러나 스탈린주의자들의 최상의 '개혁'도 이렇게 한 예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자 권력기관의 수립은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모든 분파들을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의 이 주장은 전혀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50년도 더 전에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가 정식화한 노동자 정치혁명의 강령을 동독의 현실에 적용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이것은 ICL의 전망과 너무도 날카롭게 대비되었다. 중도주의 조직의 진면모를 발휘하여 ICL은 스탈린주의자들을 좌로 살짝 밀쳐서 혁명의 지름길을 찾으려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스스로 옹호한다고 주장해왔던 트로츠키주의 강령을 포기했다.

1989년 10월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그러자 통일사회당은 혼란에 빠졌다. 이로부터 몇 주일 뒤 ICL은 스탈린주의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1989년 12월 8일로 예정된 통일사회당 비상 당 대회에서 연설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요청했다:

"독일의 새로운 공산당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새로운 정당이며 스탈린주의의 범죄와 거짓말을 반대하며 제국주의적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이것은 독일공산당 창립자인 룩셈부르크와 리이프크네히트 동지 그리고 코민테른의 레닌 동지의 정신에 입각하여 수립되어야한다.

통일사회당의 다수 동지들도 이 견해를 공유하고 있다고 우리는 믿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의 대단히 중요한 당 대회에서 간단히 인사하기를 원한다."-- [노동자 통신]지 제 8호(1989년 12월 18일)에서 인용

12월 8일에 통일사회당의 대회는 예정대로 그러나 짧게 진행되었다. 대회는 동독을 "존재의 위기"에 빠뜨린 것에 대해 인민에게 사과한 후 정회했다. 12월 16일에 대회가 속개되었을 때 당의 이름은 통일/민주사회당(SED/PDS)으로 바뀌었으며 그레고르 기지(Gregor Gysi)가 새 당수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대회는 이렇게 선언했다: 서독과의 통일은 동독을 "연방의 발전 수준이 낮은 일개 주로 전락시킬 것이며 동독 시민들을 불확실한 미래로 내던지게 될 것이다." 속개된 당 대회에 ICL이 보낸 12월 16일자 환영인사는 일국 사회주의를 "잔인한 사기극"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통일/민주사회당 지도부의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을 반영하는 투로 스탈린주의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맞추었다:

"동독 노동자들은 부패상에 대해 올바르게 분노하고 있다. 부패는 동독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척한 자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 없이 경제는 살아날 수 없다."-- [노동자 통신]지 제 8호

다음날 계속된 통일/민주사회당 당 대회에 보낸 선언문에서 ICL의 국제서기국은 동독의 경제상황과 특히 노동자 파업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문제에 대한 ICL의 시각은 불만을 품은 평당원이 아니라 민주사회당 지도부의 관점을 암묵적으로 채택했다:

"지난 여름 소련 광부노동자들의 '파업권'은 정당화되고도 남았다. 모든 파업 특히 동독의 파업은 이것이 인구 전체와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기초하여 정당화되어야한다."-- [노동자 통신]지 제 9호, 1989년 12월 19일

파시스트 도발에 대한 어떤 노동자 파업도 지지한다고 명확히 밝힌 후 ICL 지도부는 이때 동독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경제파업에 대해서는 논평을 회피했다. 이것은 최소한 개선된 면모였다. 서베를린에서 개최된 공개 토론회에서 SL 지도부가 임명한 ICL 독일지부(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의 책임자 막스 쉬츠는 동독 노동자들이 스스로에 대항하여 파업을 벌이지는 말아야한다고 선언했었다! 이것은 ICL이 적당히 넘어가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파업은 전개되고 있는 노동자 정치혁명의 첫 징후가 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이 스탈린주의자들이 진압하려고 필사의 노력을 하는 파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춰질 경우 민주사회당과의 "동맹" 전술을 중도 하차시킬 위험이 있었다. 따라서 ICL 지도부는 머리를 써서 애매하게 추상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여 이 문제를 대충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동독 사태에 대한 ICL 개입의 목적은 통일/민주사회당의 노동계급 대중 가운데 지도부에 반대하는 좌파 분자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었다. 대신 스탈린주의 기구의 일부가 좌경화하도록 부추기는 것이었다. "스파르타쿠스단이 원하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ICL은 추상적으로 "부패한 기생적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을 비난한 후 "레닌주의-평등 당을 수립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통일/민주사회당 지도부 모두가 동독의 위기에 책임이 있다는 핵심적인 지적을 회피했다. 대신 ICL은 이렇게 선언했다:

"스탈린주의 통일/민주사회당의 당원들과 최근 탈퇴한 당원들 그리고 사회주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지지한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통해 폐허 위에서 생산한 것을 히틀러의 후계자들이 몰수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고 이들은 결심하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단이 원하는 것", [노동자 통신]지 모든 호에 수록, [노동자 전위]지 제 492호(1989년 12월 29일)에 재수록

같은 글은 이렇게 불평하고 있다: "볼세비키 혁명의 공산주의 강령과 이상은....스탈린주의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왜곡되고 배신당했다." 그러면서도 ICL 지도부는 동독에 주둔한 소련군 사령관 스네트코프 장군에게 아첨 섞인 제안을 했다. "동독에서 진행 중인 정치혁명의 평화적 발전"에 관한 1989년 12월 28일자 편지([노동자 전위]지 제 494호<1990년 1월 26일>에 재수록)에서 ICL은 스네트코프에게 존경을 표하며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 국제주의자들은 민족주의적 국수주의를 퇴치해야합니다...."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관료집단에 반대하는 대중 시위는 정치혁명의 전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성격의 시위가 발생하지 않자 스탈린주의 과도정권은 꾸준히 우경화하고 있었다. 1990년에 국제볼세비키그룹(IBT)과 통합한 독일의 제4인터내셔널그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동독의 새 수상 모드로우(Modrow)가 이끄는 정권은 친자본주의 정권이며 서독에 합병되는 정책을 통해 안전한 반혁명을 보장할 임무를 띠고 있다. 부르주아 야당은 이 과정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우파는 제국주의 압력에 의해 벼랑에 몰려 있으며 자신의 권력기관이 해체될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은 자본주의 복귀를 통해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려고 애쓰면서 이를 통해 부르주아 계급의 직접 대리인이 되고 있다. 베르크호퍼(Berghofer)는 사민당에 제일 먼저 합류한 통일/민주사회당 지도자들 가운데 한 명이다. 그가 서둘러 민주적 반혁명 세력에게 전향한 것은 새로운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과 구 자본주의의 재확립 과정에서 뭔가를 건지려는 국가기구 관료들과 공장 관리자 계층의 기생적이고 출세 지향적 태도를 전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허약한 보나파르트 체제를 이끌고 있는 모드로우는 통일/민주사회당과 거리를 두면서 서독 자본이 직면한 최후의 장애물들을 제거하고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자본주의 체제에 확정적으로 굴복하고 있다."-- [게시판]지 제 1호, 1990년 1월

스탈린주의자들의 하위 파트너가 되려고 열망한 ICL과는 달리 독일의 우리 동지들은 "진실을 말하기"를 회피하지 않았다. 이후 IBT의 독일 지부가 된 제4인터내셔널그룹은 신문을 통해 이렇게 선언했다: 통일/민주사회당의 기지 지도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이 정당 내부에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 분파가 구성되어야 한다." (같은 글)

 

트렙토우 공원의 시위: ICL 개입의 절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 ICL 회원들은 동베를린 공장 노동자 출신이며 통일/민주사회당의 좌파 중핵인 군터 엠(Gunther M.)을 만났다. 이 모임은 ICL 독일 지부의 경쟁 조직이며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그룹(Bund Sozialistischer Arbeiter)이 서베를린에서 개최하고 있던 공개 토론회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로부터 몇 주일 후 ICL 접촉선에 불과했던 군터는 트렙토우 공원의 소련 전쟁기념관을 파시스트들이 더럽힌 행위에 항의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조직하자는 ICL의 제안을 민주사회당이 우연히 승인하게 만들었다. 이때는 새해 전야였다. 그리고 그가 알고 지내던 당의 하위 관료가 당 본부를 지키도록 남겨졌다. 당의 상부 지도자들은 한 해가 끝나가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당사를 떠나 있었다.

동독의 주요 일간지 [독일 소식]지에 시위에 대한 공식 발표가 실리자 민주사회당 평당원들은 열성적으로 이를 반겼다. 1990년 1월 3일에 열린 시위에는 놀랍게도 25만 명이 참여했다. 이 시위의 엄청난 규모와 좌익적 성격은 제국주의자들과 소련 관료집단을 긴장시켰다. 이후 ICL은 이 시위에 대중을 동원한 자신의 역할을 과장하면서 자기들의 선동이 민주사회당 지도부의 시위 승인을 이끌어 냈다고 주장했다. 사실 민주사회당이 시위를 주최하겠다고 승인한 후에야 ICL 독일 지부인 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은 시위를 촉구했다. 물론 ICL의 제안이 없었을 경우 시위는 결코 열릴 수 없었을 것이다.

ICL의 시위 선언문은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을 촉구했으며 사민당을 "반혁명의 트로이 목마"라고 비난했다: "히드라의 머리를 가진 파시즘의 목을 조르면 동독에 대한 사민당의 자본주의적 침투를 무디게 할 수 있다"([노동자 전위]지 제 493호, 1990년 1월 12일). (주 18: 사민당을 반파시즘 공동전선에 초청하면 이 정당에게 환상을 가지고 있는 독일 노동자들에게 이 정당의 진정한 정치적 성격을 폭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제안했다. 그러나 ICL은 화를 내며 이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사민당을 격렬하게 공격하면서도:

"ICL 독일 지부인 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의 시위 촉구 유인물에는 민주사회당의 자본주의 굴종 노선에 대해서는 단 한 자의 비판도 없었다. 또한 서독 제국주의와 독일 민족주의에 굴종하는 모드로우에 대해서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이 전쟁기념관을 공격하도록 애초에 기를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이들의 정치노선이었다."-- "환상의 세계에 빠져있는 ICL (Robertsonites in Wonderland)", [1917년]지 제 10호, 1991년 제 3 4분기

거대한 시위가 열린 트렙토우 공원의 단상에는 스탈린주의 관료들과 함께 ICL의 연사가 한 명 배석했다. 이것은 ICL이 민주사회당과의 "단결"을 성사시키려는 목적을 최고로 근접시킨 순간이었다. 레나터 달하우스는 ICL 독일 지부의 대변인이었고 이 집회의 연사였다. 연설문([노동자 전위]지 제 493호, 1990년 1월 12일에 재수록)은 ICL의 본부 뉴욕에서 작성되어 팩스를 통해 베를린으로 전달되었다. 이 문서는 ICL이 동맹하기를 원하는 스탈린주의자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표현되었다:

"트렙토우 시위의 연설에서 스파르타쿠스노동자당의 달하우스 동지는 '민주사회당과의 단결' 노선을 완벽하게 제시했다: '우리(!) 경제는 낭비와 노후화로 고통 받고 있다. 민주사회당 독재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을 드러내었다.' ([노동자 통신]지 제 15호, 1990년 1월 4일) 이 발언은 '민주사회당의 권력 독점은 깨졌다'는 선언과 함께 스탈린주의자들의 정치에 대해 언급한 내용의 전부였다(같은 글). 달하우스의 연설에는 호네커의 통일사회당만 언급되었다. 물론 시위대는 이 정당이 더 이상 언급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문제는 '개혁된' 민주사회당에 대해 대중이 가지고 있던 환상은 폭로/비판되지 않았다."-- "환상의 세계에 빠져있는 ICL"

자본주의에 굴종하는 민주사회당의 노선이 우익적 정서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대신 달하우스의 연설은 사민당이 "동독을 도매금에 팔아넘기고 있다"는 공격에 집중되었다.

 

통일사회당과의 동맹에 대한 환상 그리고 대대적인 허세 부리기

트렙토우 시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라벗슨은 자신이 민주사회당 최고지도부와 직통으로 대화 채널이 열려 있다고 상상했다. 그는 군터가 모임을 주선하여 자신이 동독의 정보책임자 마르쿠스 볼프, 소련의 장군 스네트코프, 민주사회당 지도자 그레고르 기지 등 세 명의 최고위 스탈린주의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이 세 명은 미국의 별 볼일 없는 과대망상증 환자의 조언을 들을 기회를 무시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독일 제국주의가 동독을 흡수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러자 ICL은 마침내 스탈린주의자들과 "단결"하겠다는 환상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주 19: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는 정치혁명은 스탈린주의자들의 "타도"를 의미했을 것이라고 무심결에 말하면서 통일/민주사회당 관료들에게 유화적으로 나왔다고 노든을 공격하고 있다:

"1995년 1월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공개 강연회에서 노든은 계급 배신자인 통일/민주사회당 지도자들이 반혁명 순간에 '마비되었으며' 자신들을 타도했을 정치혁명을 '생각할 수'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사면했다."

그러나 라벗슨은 1990년 1월 "계급 배신자들"과 대화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1989년 12월 28일에 ICL은 "동독에 전개되고 있는 정치혁명"에 대해 아주 붙임성이 좋은 편지를 "국제주의자" 동지인 스네트코프 장군에게 보냈다. 이 행위들은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전략상 근본적인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대신 단결을 추구하는 책략 전체는 "제임스"의 지시를 잘못 해석했다고 간주된 무능한 부하들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북한에서와 마찬가지로 ICL에서도 경애하는 지도자를 깎아 내리는 일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될 수 없다.

이제 시간을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ICL 지도부는 급작스럽게 180도 전략 수정을 포고하며 대중을 직접 장악할 순간이 무르익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독일트로츠키주의동맹의 몇 명 되지 않는 회원들은 독일스파르타쿠스노동자당(SpAD)이란 이름의 독자적 노동자 "정당"이라고 선언되었다. 동독의 통신사가 SpAD의 보도 자료를 입수하여 이 정당의 창당을 발표하자 ICL 지도부는 너무 기뻐하며 이 전보 전체를 [노동자 전위]지 제 495호(1990년 2월 9일)에 실었다. 그리고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이들은 신문의 같은 호 제 1면에 다음과 같이 특히 감칠 맛 나는 내용을 인용했다: "1월 21일 동독에서 창당된 이 정당은 스스로를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는 전위당이라고 간주한다...."

1990년 3월 선거에서 몇 명의 SpAD 후보를 출마시켜 대중을 어쨌든지 자극하여 이들을 투쟁으로 소생시키는 것이 이제 ICL의 희망사항이었다. 스탈린주의자들과 직접 경쟁하는 대중적 혁명노동자정당이라는 새로운 가면을 쓴 SpAD의 선전은 "단결"이 표어였던 이전보다 민주사회당에 대해 덜 유화적일 수밖에 없었다. 모금의 목적을 위해 [노동자 전위]지는 이 상황에서 SpAD의 역할을 우스꽝스럽게 과장했다:

"....스파르타쿠스노동자당의 우리 동지들은 혁명의식을 보유한 레닌주의 전위이며 자본주의 복귀 세력들의 공세에 맞서 동독 노동자들을 방어하는 단 하나의 정당으로 뚜렷이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키고 있다....

독일의 정치혁명은 경각에 달려있다. 허비할 시간이 거의 없다."-- [노동자 전위]지 제 497호, 1990년 3월 9일

ICL의 출판물들은 널리 배포되었으며 수천 명의 동독 노동자들은 이것들을 열심히 읽어주었다. 그리고 ICL 회원들은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활동했다. 그러나 SpAD는 20명 정도의 활동적인 회원들을 보유하는 선을 넘지 못했다. 이 조직이 노동자의 이해를 방어할 수 있으며 심지어는 있지도 않는 "정치혁명"의 결과를 결정할 수 있다는 허세는 우리가 국제주의그룹(IG)에 보낸 1996년 12월 15일자 편지에서 말했듯이 "포사다 그리고 히일리 같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이나 가질 수 있는 생각"이었다(주 20: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6호 제 13쪽을 참조하시오.).

 

환상의 거품이 푹 꺼지다

1990년 3월 우리는 선거에 임하는 성명서를 통해 SpAD를 비판적으로 지지했다. 그리고 동독 노동자의 정치혁명을 목격하고 싶은 우리의 욕망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경고했다:

"통일/민주사회당은 혼란에 빠져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노동계급은 불신당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들 그리고 권력의 공백을 채우면서 자본주의적 통일을 추진하고 있는 정당들로부터 정치권력을 빼앗을 혁명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정치혁명은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소비에트의 통치를 통해 진정한 사회주의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동독 노동자들이 노동자 정치혁명의 길로 나서기를 우리는 열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주관적 욕망을 현실로 오인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SpAD에 대한 비판적 지지", [1917년]지 제 8호, 1990년 여름

트렙토우 공원의 대규모 시위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을 직접 조직했다고 ICL은 자신의 역할을 과장했다. 이 때문에 선거에서 수십 만 대중이 SpAD에게 표를 던질지도 모른다는 환상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환상은 선거일을 12일 앞둔 1990년 3월 6일에 산산조각이 났다. 민영화 추진 법에 항의하기 위해 SpAD가 촉구한 이 날의 시위에 이 조직의 회원들 외에 단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노동자 전위]지 제 497호(1990년 3월 9일)는 한 면을 대부분 할애하여 독일 "당"의 대대적 항의 시위 촉구문을 다시 실었다. 여기에는 트렙토우 공원에 모인 대규모 인파를 찍은 사진도 당연히 실렸다. 그런데 이 신문의 다음 호는 무산된 이 시위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20명 미만의 인원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사진을 게재했다(주 21: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ICL이 이전에 주최한 두 번의 공개 행사에는 100명 미만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한 번은 트렙토우 공원의 시위 후 있었던 뒤풀이였고 또 한 번은 룩셈부르크와 리이프크네히트를 추모하기 위해 1990년 1월 14일에 열린 민주사회당 주최 대규모 시위 뒤에 열린 공개 집회였다.).

같은 호에서 [노동자 전위]지는 3월 18일의 선거 결과를 동독 합병을 지지하는 압도적인 표결이라고 보도했다: "우리는 베를린, 할러, 라이프찌히, 로스톡 등 4개 선거구에 후보를 냈다; 그러나 이 선거구들에서 우리가 얻은 득표율은 0.06%였다"([노동자 전위]지 제 498호, 1990년 3월 23일). 있지도 않은 정치혁명에 대한 환상의 거품이 꺼지자 ICL 지도부는 지혜롭게 이렇게 논평했다: "운명적인 동독 사태의 결과는 전적으로 스탈린과 그의 후계자 고르바초프에게 그 책임이 있다."

 

아득한 기억 속으로 사라진 동독의 '정치혁명'

반혁명을 지지하는 압도적인 선거 결과 후에도 ICL은 노동자 정치혁명이 "전개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을 여전히 인정하지 않으려했다. 대신 [노동자 전위]지는 왜 노동계급이 자신의 "정치혁명"을 포기했는지 궁금해 했다:

"처음부터 동독의 정치혁명은 노동계급의 조직적 참여가 배제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같은 글

영국 철학자 오컴(William of Occam)의 스콜라주의 면도날을 써보면 이 의문은 절로 풀린다: 정치혁명은 있지도 않았다. 통일/민주사회당의 노동자 평당원들은 자기 지도자들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 노동계급의 어떤 부위도 정치권력 투쟁에 근접하는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명백한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ICL 지도부의 판단 전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결국 이 문제는 아득한 기억 속에 보관되어 소급 조작의 대상이 되었다.

동독 정책에 대한 ICL 지도부의 새로 "회복된 기억"은 자신의 팜플렛 "국제볼세비키그룹 --- 그 정체는 무엇인가?"에서 선을 보였다. 이 팜플렛에는 "전개되고 있다"고 주장되었던 정치혁명이 "생겨나고 있는" 또는 "시초의"라는 단어로 대체된 후 가능성만 존재했다는 식으로 수위가 하향 조정되었다. 동독 사태에 대해 우리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이 글은 우리의 입장을 새로운 입장이라고 날조했다. 이 글에 따르면 우리는 당시 "동독에서 노동자 정치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선언했다"(주 22: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5호, 26-28쪽을 참조하시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에 실린 글은 이렇게 주장한다: 잰 노든은 "혁명의식을 보유한 동독 혁명의 전위였던 ICL의 역할을 모욕하거나 부인했다; 그는 혁명의 핵심 요소인 혁명지도부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라고 반복하여 떠벌렸다. 1995년 1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 공개 강연회에서 노든이 했던 이 발언은 다음 해에 그가 조직에서 숙청되는 중심적 핑계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주 23: 사실 노든은 명백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강연회가 있은 지 8개월 후에 ICL이 출판한 팜플렛 "국제볼세비키그룹 -- 그 정체는 무엇인가?"는 동독의 자본주의 복귀는 "집단적 소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할 노동계급의 적극적이며 권위 있는 중심축이 부재했다는 조건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다"고 털어 놓으면서 진실을 말했다.). 실재하지도 않았던 정치혁명의 "혁명 지도부"였다고 허세를 부리던 ICL은 지금은 이 허세가 주로 노든을 공격하기 위해 발명된 과장된 논쟁이었다고 둘러대고 있다.

자신의 1994년 "전망과 임무" 문서에서 SL은 과거 자신이 드러내었던 정치적 혼란들을 자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였다:

"강령적으로 이 당은 레이건 대통령 시기를 올바르게 극복했다....철저한 내부 토론과 투쟁을 통해 내부적으로 정치적 편향과 문제들을 교정하는 이 당의 능력 역시 명백히 증명되었다. 동독 사태에 대한 우리의 개입을 철저히 토론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한 것은 이 점에서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소련의 붕괴를 정치적으로 준비했다."-- "소련 붕괴 이후의 세계",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1호, 1994년 가을

동독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 환상이 극적이고 완전하게 박살나자 ICL은 이후 정반대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혐오증을 진정으로 드러낼 "준비를 마쳤다". 이 그룹은 1991년 8월 모스크바의 결정적 사태에서 어느 쪽도 편들지 않았다. 동독의 부끄러운 오류는 같은 문서에서 이 조직이 저지른 제 3 진영주의 편향의 토대가 되었다: "중국의 스탈린주의자들은....위로부터의 자본주의 복귀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같은 글). 그런데 이 주장을 ICL은 지금 번복하고 있다.

이제 1989년-1990년의 동독 개입을 10년 뒤에 재검토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전의 "철저한 논의와 비판적 검토"를 통해 내린 만장일치의 결론을 다시 만장일치로 번복했다:

"'통일/민주사회당이 동독의 반혁명을 주도했으며 1989년-1990년 동독의 시초적 정치혁명에서 우리가 혁명 지도부였다'는 표현은 올바르지 못하다. 차라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동독의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계급의 혁명 지도력을 위해 경쟁한 조직은 우리뿐이었다. 그리고 소련이 서독 자본주의에 동독을 팔아 넘겼을 때 통일사회당 최고 지도부는 이 배신에 순응하여 민주사회당이 되었다.'"-- "소련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혁명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 2004년 봄

ICL 지도부는 차라리 정정 당당하게 진실을 전부 말하는 것이 더욱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이들의 동의안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과 야합하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전개 중인 노동자 정치혁명 한 가운데에 우리가 있었다고 우리는 주장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혁명은 없었다. 우리는 '혁명의식을 보유한 레닌주의 전위, 동독 노동자들의 이해를 방어하는 유일한 당으로 유일하게 부각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당이 아니었다. 우리는 노동계급의 어떤 부위에도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한 극소 규모의 선전그룹이었으며 더욱이 가장 중요한 사안들의 다수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 당시 논쟁 거리였던 모든 정치적 문제들에서 이후 IBT의 독일 지부가 된 동지들이 기본적으로 옳았으며 우리는 틀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성명서를 보지 못할 것이다. 노동자 정치혁명의 "전개"를 통일사회당 최고 지도부가 지원해야하며 어떤 방식으로든 이들이 이렇게 행동하도록 유도될 수 있다고 라벗슨은 생각했다. 당연히 이 생각은 황당무계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ICL 지도부의 자발적 자기 개혁도 불가능하다. 당시 ICL 지도부는 우리의 입장을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혐오증이라고 분노에 차서 비난했다. 그런데 바로 이 입장을 이들이 수용했더라면 진짜 "더 좋았을" 것이다(주 24: ICL 지도부는 우리의 활동을 칭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리고 물론 동독 사태와 관련하여 우리의 비판과 제안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우리는 ICL의 신입 회원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분자들에게 이 그룹의 성격을 경고했다. 이것을 ICL은 특히 증오했다. 따라서 ICL 지도부의 전술은 자기 회원들을 히스테리적인 거짓말들로 절연시키면서 우리를 "매우 의심스러운 밀정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이었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미국 흑인들을 싫어하는 것 같고 시온주의를 갈망하며 미국인들이 저지른 대대적인 학살들을 칭송하고 있다. 세계의 국가 정보기관들 가운데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인 모사드만이 이들과 유사한 취향을 가지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단]지 독일판 제 14호, 1989년-1990년 겨울, "트로츠키주의: 그 본질과 가식" 영어판에 재수록

혁명조직이었을 당시 SL은 제리 히일리와 그의 하수인 팀 울포스로부터 똑같은 정도의 악랄한 비방을 당했다. 스탈린주의자들, 사민주의자들, 사이비 혁명 돌팔이들은 정치적으로 반대 좌파에게 대항할 수 없을 때 종종 비방에 의존한다.).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기본적인 오류가 애초에 어떻게 저질러질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SL도 IG도 해명할 수 없다.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성격은 트로츠키주의 강령의 오랫동안 확립된 요소이다. 그런데 이 중요한 강령적 내용이 ICL 내부에서 조금의 반대도 없이 내동댕이쳐질 수 있었다. 이것은 ICL의 공식 강령과 "원칙"은 이 조직의 창립자/지도자 제임스 라벗슨의 변덕과 충돌할 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동독 붕괴에 대한 ICL의 1990년 입장

동독 사태에 대한 ICL의 개입은 이 조직의 역사상 어떤 활동과도 비교할 수 없이 야심찬 것이었다. 지도부는 거대한 것을 약속했고 회원들은 상당한 희생을 감수했다. 이 때문에 이 전망 전체가 대대적으로 실패하고 이렇다 할 조직적 성과가 없자 어떤 설명이 필요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 붕괴의 역사적 교훈을 소화하기 위한 조직 내부의 토론이 즉시 선언되었다. 그러나 동독 사태에 대한 지도부의 예상이 어떻게 그렇게 엄청나게 빗나갈 수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토론은 매우 높은 수준의 역사적 추상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 토론을 위해 가장 가치 있다고 판단된 글 두 편이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45-46호(1990년-91년 겨울)에 재수록 되었다.

1990년 9월 6일자 글에서 앨버트 세인트 좐(별명 "앨")은 스탈린주의에 의해 원자화되었고 정치적으로 무장 해제되었기 때문에 동구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복귀를 묵묵히 따랐다고 암시했다. 그는 가장 오랫동안 라벗슨의 측근이었으나 최근 맘에 들지 않는 인물의 범주로 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강령적 또는 사회적 분석을 흐리거나 회피한" 동독의 "소부르주아"좌익을 비난한 후 분노에 차서 이렇게 선언했다:

"...동독 노동자들에게 지도부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다만 '개혁된' 민주사회당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동독 노동자들의 전통적인 당인 통일사회당의 강령과 다른 '좌익' 그룹들의 강령들이 노동계급의 객관적 이해와 주기적인 투쟁 본능에 180도로 거슬렸을 뿐이었다."-- "맑스주의 명확성과 미래 지향적 전망",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45-46호, 1990년-91년 겨울

이 글의 내용은 정말 중요한 때에 제기되었을 경우 가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1990년 9월이 되면 이미 통일/민주사회당에 대한 비판은 아주 값싼 것이었다. 이 시점에서 앨은 극소규모의 SpAD가 노동계급을 지도해왔다는 허세를 더 이상 부리지 않았다. 이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물론 그는 몇 년 후 분파 투쟁에서 노든을 물리칠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이 허세를 다시 냉소적으로 되풀이했다. 그런데 현재 이 허세는 다시 한 번 "올바르지 않은" 것으로 ICL에 의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동독의 합병과 소련의 붕괴

SL의 이론가 조지프 씨모어는 나머지 한 편의 글을 실었는데 이것은 사리가 맞고 당시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에세이였다. 이 글은 내전이 없이 동구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들이 붕괴했지만 이것이 맑스주의 국가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1990년 10월 10일자 자신의 글에서 씨모어는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보수파와 친제국주의 민주주의자들 간의 대결을 예상했다:

"소련 사회의 해체에 직면하여 크렘린궁의 관료집단은 분열했다. 고르바초프의 제 1기 집권 팀은 서로 적대적인 인물들을 중심으로 분열했다. 이것은 관료집단 전체가 분열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예고르 리가초프는 보수적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대변인이 되었는데 이들은 최소한의 변화를 통해 현상을 유지하려고 했다. 고르바초프 집권 초기에 모스크바당 서기였던 보리스 옐친은 친서방 '민주주의' 반대파와 동맹하여 사이비 인민주의 참주선동가가 되었다."-- "동유럽 스탈린주의 체제의 붕괴에 대하여",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45호-46호, 1990년-91년 겨울

이보다 몇 달 전인 1990년 8월에 ICL은 "크렘린궁에 보내는 편지"(스네트코프 장군에게는 복사본을 보냈다)에서 제국주의에 대한 고르바초프의 화해 조치를 중지하라고 "요구했다"(주 25: "크렘린궁에 보내는 편지 -- 이라크에 대한 무기금수 조치를 폐기하라", [노동자 전위]지 제 590호, 1990년 9월 7일. 이 편지에 대한 우리의 논평은 "필사적으로 스네트코프를 찾습니다", [1917년]지 제 9호, 1991년 제 1 4분기.). 동유럽의 경우와는 달리 소련의 자본주의 복귀 세력은 투쟁을 통해서만 권력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씨모어는 전망했다:

"현재 러시아 사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반혁명 세력과...보수적 스탈린주의 및 친슬라브주의적 분자들로 양극화되어 내전 발발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노동계급은 이 두 진영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그러나 소련에 임박한 결전에 대한 ICL의 입장에 대해 씨모어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에서 과거에 스탈린주의자였던 분자들로 구성된 "좌익" 정부가 좀 더 공격적인 우익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격돌할 경우:

"우리의 전망은 우익에 대항하여 이 정부와 군사적 공동전선을 수립하는 것이다. 동시에 과거 스탈린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로 구성된 현 정부에 대한 노동자들의 환상을 불식시키는 정치투쟁을 결합시켜야 한다."

라벗슨이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혐오증 편향을 표현하기 이전에 씨모어의 글이 작성된 것이 명백하다. 왜냐하면 라벗슨 자신이 그렇게도 만나고 싶어 했던 통일/민주사회당 관료들은 사실 동독 반혁명의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이다. 라벗슨의 이 입장은 곧 소련에 확대 적용되었고 조금 후에 중국에도 적용되었다. 1991년 3월이 되면 [노동자 전위]지는 새로운 노선을 퍼뜨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옐친의 "민주주의자들"과 아직도 소련을 고수하는 보수적 스탈린주의 "애국자들" 가운데 편을 들 세력은 없다:

"소련의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자'와 '애국자'라는 잘못된 구분을 극복해야한다. 이 두 세력은 반동적이고 기생적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구제불능으로 퇴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산물이다. 이 두 세력은 모두 세계 자본주의의 이해를 위해 일하는 노동계급의 적이자 억압자이다."-- "소련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노동자 전위]지 제 522호, 1991년 3월 15일

1991년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노동자투쟁그룹(Lutte Ouvriere)이 주최한 축제에서 우리는 러시아 문제를 둘러싸고 노동자권력(Workers Power)그룹과 토론을 했다. 이때 이 그룹의 지도자 키이쓰 하아비는 이렇게 예상했다: 옐친 진영과 소련 "강경파" 진영 사이의 결전에서 트로츠키주의자를 자칭하는 세계의 모든 정치조직들 가운데 IBT만이 스탈린주의자들을 지지할 것이다(주 26: "강경파"가 1991년 8월 실패한 쿠데타를 벌이기 몇 달 전에 우리는 우리의 노선을 명확히 표현해 놓고 있었다:

"미래의 어느 시점에 관료집단의 지도적 분파들이 자본주의 복귀 과정을 정지시킬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옐친 진영에 반대하여 '보수파'와 군사적으로 동맹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될 것이다. 스탈린주의 보수파는 애초에 '개혁'을 자초한 문제들을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들이 자본주의 복귀 과정에 브레이크를 세게 밟을 경우 소련은 붕괴하기 전에 최소한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의 양 극단", [1917년]지 제 10호, 1991년 제 3 4분기

이번에는 "SL조차" 스탈린주의자들을 지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는 예상했다. 이와 반대로 논쟁이 가열될 경우 ICL이 결국 올바른 노선을 취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러나 하아비의 예상이 올바른 것으로 드러났다. 1991년 8월의 최종적 대결에서 "유리 안드로포프 여단"을 자임했던 ICL은 반혁명에 대항하여 스탈린주의자들을 군사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이들은 결국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를 배수진을 치고 방어하기를 비열하게 포기했다. 이 결전에서 ICL은 창피하게 중립을 선언했고 설상가상으로 옐친의 승리가 반혁명의 승리라는 것을 완고하게 부인했다. 이 때문에 ICL 회원들은 계속해서 불편한 정치적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주 27: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의 글은 ICL 총회가 "이 주제에 대한 국제적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과 토론"을 실시할 것을 결정했다고 알리면서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골치를 썩이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의 글은 이렇게 허세를 부리고 있다: "좌익의 조직들과는 크게 대비되는 모습으로 ICL은 결정적 순간에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과들을 방어하는 진지를 지켰다." 스탈린이 한때 말한 적이 있듯이 종이 위에는 아무 내용이나 적을 수 있다. 다만 1991년 8월의 "결정적 순간에" ICL이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1991년 8월 사태에 대한 ICL 입장은 근본적으로 모순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를 둘러싸고 ICL은 계속 혼란에 빠졌다. 더욱이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지난 몇 년간 ICL이 제시한 변명과 해석들은 서로 모순을 일으켜서 한마디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ICL 지도부는 우선 자신들이 1991년 8월에 중립을 지켰다는 사실을 화를 내며 부인한다. 그러면서 두 진영 모두 자본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에 어느 쪽도 군사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IBT는 쿠데타를 모의한 스탈린주의자들을 군사적으로 지지하면서 1991년 8월 사태에 대해 자기들이 원래 가지고 있던 패배주의를 은폐하려한다. 이 입장은 우스꽝스럽다. 왜냐하면 옐친과 똑같이 자본주의 복귀에 헌신했던 쿠데타 주동자들은 자본주의 복귀에 진지하게 저항하는데 필요한 정치적 군사적 결집을 시도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국제볼세비키그룹 --- 그 정체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응수했다:

"만약 야나예프를 비롯한 쿠데타 주동자들이 '옐친과 똑같이 자본주의 복귀에 헌신했다'면 이들이 정치적 군사적으로 결집하든 말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신경 쓸 이유가 무엇인가? 비밀경찰과 군부의 수장들을 비롯한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러시아 의회 건물 밖에서 옐친 주위로 모여든 미국 중앙정부부의 하수인들만큼이나 자본주의 복귀에 '헌신했다'면 1991년 8월 사태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야나예프 일당이 옐친만큼이나 '자본주의 복귀에 헌신했다'면 1991년 8월 19일 이전에 소련 관료집단은 골수 반혁명 집단으로 이미 변모해 있었다는 논리적 결론이 나올 것이다."--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5호, 1996년

ICL은 이 질문들에 대답할 수 없다. 이들은 옐친의 승리가 "반혁명의 물꼬"를 텄다고 인정하면서도 그 순간부터 (처음에는 아무리 허약하고 엉성하더라도) 국가권력이 자본주의 복귀에 헌신하는 세력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사실을 한사코 부인한다. 옐친의 승리로 인해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는 분쇄되었고 전 세계가 이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지도부의 권위를 보존하기 위해 SL은 이 사실을 부인하고 일 년 동안이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잭 바안즈, 통합서기국의 에르네스트 만델, 노동자권력그룹 등 다종다양한 수정주의자들과 함께 이렇게 웃기는 주장을 늘어놓았다: 짜르 보리스(보리스 옐친)의 통치 하에서도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는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옐친의 권력이 더욱 확고해지자 이 입장은 너무 황당하여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1992년 11월이 되자 [노동자 전위]지는 소련의 노동자국가를 과거 시제로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ICL은 언제 그리고 어떻게 소련의 노동자국가가 멸망했는지를 설명할 수 없다.

1991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리고 1992년에 변한 것이 있다면 라벗슨의 생각뿐이었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그의 생각을 변화시킨 촉매제는 토론토의 ICL 회원 두 명과 한때 통합서기국의 중핵이었으며 ICL 회원이 될 가능성이 있었던 마크 디 사이의 서신 논쟁이었다. 마크 디는 "소련이 퇴보한 노동자국가로 아직 존재하고 있다"는 ICL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서신 논쟁을 읽자마자(주 28: 이 서신 논쟁은 1993년에 발행된 [1917년]지 제 12호에 수록되어 있다.) 라벗슨은 마크 디가 옳고 소련의 노동자국가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ICL의 새로운 입장은 하나의 문제를 해결한 반면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켰다. IBT의 "배신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소련 노동자국가의 멸망 시점을 1991년 8월 옐친의 승리로 소급할 수가 있었다. 야나예프, 푸고 등을 군사적으로 지지하지 않았기 때문에 SL 지도부는 옐친의 승리 시점을 노동자국가의 멸망 시점으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ICL과 이 대단히 황당한 입장을 아직도 옳다고 고수하고 있는 IG는 대단히 반(反)맑스주의적 사고를 수용했다. 즉 "1991년과 1992년"에 옐친의 권력 밑에서 소련 노동자국가는 서서히 그리고 누적적으로 부르주아 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이다(주 29: 국제좌익반대파 초기 시절에 트로츠키는 소련에서 정치적 반혁명이 승리한 시점을 결정하는 문제와 씨름했다. 1935년 2월에 저술한 "노동자국가, 테르미도르 반동, 보나파르트 체제"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이 시작된 시점은 바로 1924년이었다." "소련의 테르미도르 반동은 언제 일어났는가?"<[스파르타쿠스단]지 제 43호-44호, 1989년 여름>에서 SL은 결정적인 시점을 1924년 1월에 개최된 제 13차 당협의회를 위한 대의원 선거 조작 사태라고 올바르게 파악했다. ICL의 문서들은 이 입장을 주기적으로 반복했다:

"1924년 1월 당협의회에서 스탈린, 지노비에프, 카메네프의 삼두체제가 승리한 순간이 관료층이 소련의 노동자 계급으로부터 정치권력을 탈취한 결정적 시점이었다. 이 시점 이후 소련을 지배한 인물들, 소련이 지배되는 방식, 소련이 지배되는 목적 등이 모두 바뀌었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6호, 2001년 봄

쿠데타 주동자들의 비상위원회에 대해 옐친이 승리한 시점은 1924년의 정치적 반혁명에 대비되는 사회적 반혁명의 승리 시점이었다. 1991년 8월에 "소련을 지배한 인물들, 소련이 지배되는 방식, 소련이 지배되는 목적 등이 모두 바뀌었다." 그러나 이 조직의 창립자/지도자인 라벗슨의 권위가 손상될까 우려하여 SL/ICL은 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을 끈질기게 부인한다. 그리고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소규모의 누적적 조치들을 통해 퇴보한 노동자국가가 부르주아 국가로 전환했다고 주장한다. 여전히 혁명조직이었던 1973년에 SL은 국가가 자신의 계급적 성격을 서서히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고를 "파블로주의의 초석"이라고 올바르게 낙인찍었다:

"또한 이 점과 관련하여 우리는 국제주의공산당조직<OCI>이 1972년 7월에 출판한 [진실]지 제 557호의 쿠바 사태 분석을 주목한다. 이 분석에 의하면 쿠바는 질적으로 기형적 노동자국가이다. 이 분석은 우리의 분석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분석으로부터 OCI는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마치 온도계와 마찬가지로 질적인 변화가 없이 소규모 누적을 통해 '부르주아 국가'가 '노동자 국가'로 서서히 이행한다는 식의 단선적인 부르주아국가론을 이 조직은 수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 조직이 레닌주의 국가론에서 이탈할 가능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징후이다. 이러한 방법론은 파블로주의의 초석이다. 이 사고에 따르면 소규모의 누적적 변화를 통해 '노동자 국가' 역시 '부르주아 국가'로 역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트로츠키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비난했다."-- "OCRFI와 OCI에게 보내는 편지",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22호, 1973년-74년 겨울

트로츠키는 이런 종류의 황당한 사고를 "개량주의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라고 적절하게 폄하했다.

2003년 여름 런던에서는 노동자권력그룹으로부터 영국 SL의 청년조직으로 획득된 똑똑한 고등학생이 있었다. 그는 SL 내부의 순종적 분위기에 동화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련의 붕괴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ICL의 노선이 실제 현실을 올바로 반영하는 쪽으로 수정될 것을 제안하는 만용을 부렸다. 그러나 조직은 그를 유망한 회원으로 간주한 것 같았다. 이 때문에 조직이 처리하기에 불편한 문제들을 제기하는 지혜롭지 못한 신입회원들에게 가해지는 관행이 그에게는 면제되었다. 대신 그는 이 중요한 문제에 대해 고참 회원들의 지혜를 수용하도록 설득되어졌다. 그리고 지도부의 노선에 충성하는 내용의 답장들을 연이어 받았다. 이 글들은 ICL 중핵들의 정치적 비논리를 잘 보여주고 있어서 흥미를 자아낸다. 그런데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이 글들의 지적인 힘에 압도되는 대신 이 골치 아픈 청년은 이 글들보다 더 길게 반박문을 작성하면서 자신의 원래 주장을 고수했다. 동시에 그는 스승으로 자처하는 고참 회원들의 허술한 논리를 여러 차례 아주 정확하게 공격했다. 그러자 그를 가르치려는 시도는 포기되고 히스테리로 가득 찬 비난들이 그에게 가해졌다. 결국 이 청년은 곧장 조직에서 축출되었고 ICL의 런던 지부에는 만장일치의 평화가 회복되었다(주 30: 세계 역사적인 1991년 8월 사태에 대한 ICL의 정치적 혼란은 똑똑한 어느 고등학생의 주장들을 효과적으로 반박하지 못하는 무능력에 의해 확실히 드러났다. 우리는 이 청년과 고참 ICL 회원들 사이의 논쟁 전체를 이 팜플렛의 부록에 수록했다.).

1991년 소련의 8월 사건에 대한 SL의 입장은 다른 그룹들과의 논쟁에 이 조직이 동원한 입장들과 가끔 충돌했다. 예를 들어 [노동자 전위]지는 피터 태프의 노동자인터내셔널위원회(CWI)가 모스크바의 회원들을 쿠데타 기간 중에 공장에 보내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강경파"를 지지하지 못하게 막은 행위를 최근 비난했다:

"태프의 투사그룹(Militant tendency) 회원들은 있을 필요가 없는 옐친의 바리케이드에 나갔을 뿐 아니라 공장에도 갔다. 여기에서 이 사민주의 배신자들은 옐친과 부시의 '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하는 노동자들의 결집을 저지하려 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국가비상위원회의 선언문은 소위 "민주주의자들"에 대항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민주주의자들"의 원칙인 사적 소유와 자본가 권력의 지배를 지지하지 않는 노동자 조직들이 쿠데타 세력을 지지할 위험을 제기했으며 실제로 노동자들은 이들을 지지했다. 노동자 조직들의 일부는 쿠데타 환영 메시지를 내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 공장들에서 노동자들은 심지어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는 방어 부대를 조직하려고 했다.

아침부터 계속해서 우리 회원들 전원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설명했다: 비상위원회의 입장은 노동자들의 이해와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다른 조직의 노동자 활동가들과 연계하여 노동자들의 성급한 행동을 막으려했다.'--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CWI 성명서]

노동자들의 본능은 투사그룹의 본능보다 훨씬 우수했다. 투사그룹은 옐친을 지지하면서 세계의 제국주의 진영에 합류했다."-- "태프의 CWI: 옐친의 바리케이드에서 돼지우리로 추락하다", [노동자 전위]지 제 828호, 2004년 6월 11일

이 주장은 옳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본능"은 또한 위선적인 ICL 지도부보다 "훨씬 우수했다". 왜냐하면 ICL 지도부는 양 진영의 싸움에서 어느 편도 들지 않는 제 3 진영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1993년 10월에 옐친 일당은 자기들끼리 싸움질을 했다. 이때 우리는 반혁명 일당 가운데 어느 편이 승리하든 노동자들은 편을 들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ICL은 처음에는 우리와 같은 입장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 사태를 "부패하고 냉소적인 분파들 사이의 다툼"([노동자 전위]지 제 585호, 1993년 10월 8일)이라고 올바르게 규정했다. 그러나 이로부터 한 달 후에 이들은 "우리 입장에 대한 수정"([노동자 전위]지 제 587호, 1993년 11월 5일)이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자신들의 원래 입장을 "기권주의"라고 비난하고 옐친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하라고 노동자들에게 촉구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선언했다.

소련을 방어한다고 자임해온 이 그룹이 1991년에 자본주의 복귀 세력에 대항하여 스탈린주의 강경파를 지지하지 않은 것에는 논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로부터 2년 후에 이 조직이 "부패하고 냉소적인 분파들 사이의 다툼"에서 "막 탄생한 부르주아계급의 담합주의 분파의 하수인들"과 동맹한 것에도 논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중국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ICL의 혐오증

1994년에 중국공산당이 중국의 기형적 노동자국가를 서서히 자본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려 한다는 잘못된 생각이 널리 유포되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면밀히 검토해보면 최근 중국의 경제 동향은 이 나라가 '시장 사회주의'로 나아가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중국을 자본주의 국가로 전환시키고 약 2천만 명의 중국공산당 당원들을 새로운 자본가 계급으로 의식적으로 변모시키는 작업을 관료집단이 시작한 것도 아니다....공산당 최고 부위의 이해관계는 국가적 소유에 묶여있다."-- "중국: 몰려들고 있는 폭풍우", [1917년]지 제 14호, 1994년

같은 글에서 우리는 중국혁명의 성과들을 무조건 방어하는 우리의 입장을 다시 확인했다:

"미래에 격돌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자본주의 반혁명 세력에 대항하여 집단적 소유를 방어하려는 관료집단의 분파와 군사적으로 동맹할 것이다. 이것은 1991년 8월 소련에서 권력을 유지하려고 최후의 가련한 노력을 한 스탈린주의자들을 우리가 군사적으로 지지한 것과 같다."-- 같은 글

그러나 ICL은 옆길로 새고 있었다. 동독에서 통일/민주사회당과 동맹하려한 시도가 쓰디 쓴 실망으로 끝나고 소련에서 스탈린주의 보수파를 옐친의 공공연한 자본주의 복귀 세력과 동일시 한 경험을 일반화하여 ICL은 중국공산당이 위로부터 자본주의를 "냉철하게" 복귀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IG는 ICL 노선에 도전하였고 즉시 논쟁이 가열되었다:

"1996년 SL에서 축출당한 후 분립한 IG의 지도자들은 개인적 권위가 손상될까봐 두려워서 1991년 소련 쿠데타에 대한 SL의 노선을 지지한다. 그러면서도 중국에 대해 기본적으로 같은 노선을 견지하는 SL을 비판했다. 이에 대해 SL은 이렇게 응수했다: IG는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혁명을 수행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 한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자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SL은 이렇게 비난했다: IG의 지도자 잰 노든은 "동독의 늙어빠진 스탈린주의 통치자들이 혁명적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중국 관료집단의 일부가 자본주의 반혁명에 저항할 것이라는 환상을 유포했다"([노동자 전위]지, 1999년 6월 11일). 그러나 스탈린주의 관료들의 일부가 자본주의 복귀에 대항하여 노동자들 편에 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리고 혁명가들은 관료집단 내부의 모순들을 활용하여 독립적 정치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의 지위를 강화시키려고 당연히 노력할 것이다."-- "붕괴의 벼랑으로 향하는 중국", [1917년]지 제 26호, 2004년

중국에 대한 ICL의 오류는 스탈린주의자들이 동독의 "반혁명을 주도했다"는 주장에서 드러나듯이 지배 관료집단을 깨지기 쉽고 불안정한 계층이 아니라 사회 계급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데에 있다.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 한다는 바로 이전의 입장에서 ICL은 이제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의 글은 이 점을 최종적으로 명확히 표현했다:

"이 점에서 우리가 1994년에 중국공산당이 '위로부터 자본주의를 냉철하게 복귀'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틀렸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스탈린주의 정권은 그대로 있으면서 자본주의가 복귀될 수 있다고 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정정하면서 총회 문서는 이렇게 주목했다: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은 위로부터 냉철하고 서서히 자본주의를 복귀시킬 수 없다. 중국의 자본주의 반혁명은 스탈린주의 보나파르트 체제가 붕괴하고 집권 공산당의 정치적 지배가 균열하는 현상을 동반할 것이다.'"-- "소련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혁명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 2004년 봄

이 주장은 1991년 소련에서 실제 일어난 현상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관료집단은 균열했으며 옐친이 주도한 자본주의 복귀 세력은 사기가 떨어진 "보수파" 스탈린주의 잔당을 권력에서 끌어 내렸다. 만약 ICL이 "러시아 혁명을 계승한 정당"이라면 10월 혁명의 운명에 대한 이 단순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 라벗슨이 건설한 도시 ICL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강령적 올바름이 지도자의 권위에 밀려 부차적인 고려사항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ICL이나 IG가 소련 노동자국가의 마지막 장에 대한 자신들의 입장을 곧 정정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황당한 종파주의: ICL이 1999년 씨애틀 시위를 비난하다

[스파르타쿠스단]지의 이 글은 중국과 동독에 대한 편향들 일부를 정정하면서 지난 10년여에 걸쳐 ICL이 저지른 종파주의 노선의 좀 더 황당한 경우들 일부 역시 틀린 것으로 인정하고 정정했다. 이 가운데 가장 극적인 것은 전 세계의 "세계화 반대" 투사들을 고무시켰으며 세계무역기구를 반대한 1999년의 씨애틀 시위에 대한 ICL의 입장 번복이다. 이 시위가 있기 몇 주일 전에 이미 SL 지도부는 이미 이렇게 결정했다:

"우리는 11월 30일 씨애틀의 세계무역기구 반대 시위에 참여하거나 우리의 출판물을 팔지 않을 것이다. 이 시위는 일종의 쇼이며....민족적 국수주의, 인종주의적 무역보호주의, 중국의 기형적 노동자국가에 대한 반혁명적 공격 등 반동적 사상들이 지배하고 있다."-- "미국 노총(AFL-CIO)의 최고위 관료들은 반공주의와 보호주의의 독약을 강요하고 있다", [노동자 전위]지 제 725호, 1999년 12월 10일

시위가 끝나자 청년 시위자들 대부분이 "민족적 국수주의, 인종주의적 무역보호주의, 반혁명" 등을 지지한 대신 세계무역기구,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 등의 약탈에 분노하여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런데도 SL은 끈덕지게 이 현실을 부인했다.

2000년 1월 3일 우리는 자체 웹사이트에 게시한 글에서 [노동자 전위]지의 발언을 "종파주의적 백치행위"라고 낙인찍고 IBT 회원의 목격담을 인용했다:

"자본주의 기업을 적이라고 올바르게 파악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개입하여 이 의식을 기업의 탐욕과 착취를 보호하는 부르주아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이해로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씨애틀 시위가 제공했다. 그런데 이 초보적 사회주의 의식이 시애틀 시위에는 대체로 전무했다. 이것은 비극이다. 세계무역기구 반대 시위에 대한 탄압이 대단히 격렬하고 폭력적이었다는 사실이 수천 명의 시위자들을 경악시켰다. 이들 가운데 다수에게는 국가기구와 높은 수위로 대결한 것은 상대적으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시위자들을 거리에서 몰아낸 수요일의 경찰 테러는 바로 클린튼 행정부가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씨애틀 시위는 "시위자들의 일부를 사회주의 강령으로 획득하기 위해 맑스주의자들이 개입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명백한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사회주의자들이 ICL의 명령에 따라 이러한 시위에 개입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 세계질서의 비이성적 작동 방식에 분노한 광범위한 청년 투사들은 녹색당, 종교인 등 소부르주아 세력들의 품에 확실히 안길 것이다."

그러나 SL은 이렇게 "설명했다": "각종 기회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전 세계 급진 활동가들에게 씨애틀의 국수주의적 반공적 열광을 '국제주의'로 치장하여 속아 넘겼기 때문에" 씨애틀 시위는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종파주의를 실제적으로 희화화하면서 [노동자 전위]지는 이렇게 선언했다:

"국수주의적 씨애틀 시위에 대한 우리의 반대는 혁명적 국제주의적 노동계급적 강령의 표현이다. 노동자의 계급적 이해를 옹호하기 위해서는 맑스주의와 사회국수주의 사이에 분리선을 명확히 긋는 것이 필요하다...."-- "제국주의자들이 반혁명을 위해 중국의 '개방'을 추진하다", [노동자 전위]지 제 729호, 2000년 2월 11일

같은 글은 이렇게 불평했다: "IBT는 씨애틀의 국수주의적 반공적 시위에 대한 우리의 원칙적 반대를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IG가 "씨애틀 시위에 대한 비판을 회피하기 위해 정도를 벗어났다"고 맹비난 했다. 그러나 [노동자 전위]지는 마지못해 이렇게 인정했다: IG 웹사이트의 1999년 12월 21일자 성명서는 씨애틀 시위가 "보호주의라는 국수주의에 기초했으며 노동계급 국제주의자들은 이런 시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비난했다(주 31: 만약 IG가 씨애틀 시위 불참에 대한 자신의 정책을 재고했다면 SL의 모범을 따라 용기 있게 공개적으로 이것을 인정해야한다.).

[스파르타쿠스단]지의 이 글은 어떻게 SL이 이렇게 중요한 정치적 사건에 대해 그렇게 심각하게 잘못 생각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자신의 "원칙적인" 불참을 "소련 붕괴 이후에 좌익 정치지형의 변화들 특히 무정부주의에 근접하는 그룹들의 확산을 고려하지 못한" 결과라고 어설프게 변명하려했다. 그러나 ICL이 씨애틀 시위대를 히스테리에 차서 비난한 진짜 이유는 명백하다:

"씨애틀 시위에 SL 지도부가 불참한 이유는 정치적 원칙이 아니라 청년 회원들을 '당' 외부에 존재하는 정치 세계에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욕구에 있었다. 그러나 이 시위의 파장은 정치화된 미국 청년들에게 너무 큰 영향을 미쳐서 SL 통제부는 자신들의 고상한 '원칙'을 번복하고 국제통화기금에 반대하는 워싱턴의 4월 시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씨애틀 시위와 좌익", [1917년]지 제 22호, 2000년

이제 ICL은 이전에 자신이 저지른 오류를 공개적으로 번복하지 않은 정치적 비겁을 암묵적으로 시인했다. 그리고 씨애틀 시위에 대한 자신의 황당한 입장은 뒤이은 워싱턴 시위에 참여하는 것을 통해 "실천적으로 역전되었다"고 주장한다. [스파르타쿠스단]지의 글은 "씨애틀 시위에 우리가 원칙적으로 불참한 것은 우리 중핵들과 우리 활동을 주시하는 동조자들 모두에게 손상을 입히고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즉 SL을 웃음거리로 만들었다)"고 인정하면서도 애초의 어리석은 불참 전술을 맑스주의 원칙과 혼동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문제를 회피하고 있다. "원칙에 입각한" 어리석음의 대표적인 경우가 왜 발생했는지를 ICL이 너무 깊이 탐구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오류를 수정하라고 명령을 내린 전지전능한 노인네가 바로 이 오류를 원래 지시한 제임스 라벗슨 자신이기 때문이다.

 

SL/ICL: 20년 동안의 종파주의 실천

SL/ICL이 종파주의로 추락한 근본 원인은 이 조직 지도부의 사기 저하에 있다. 라벗슨의 박수부대가 가까운 시기 내에 혁명의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에 대해 자신감을 상실하자 조직 활동의 우선순위는 지도부의 도전받을 수 없는 지위를 확보하고 회원들을 현상 유지하는 데에 주어졌다. 이 새로 설정된 보수적인 활동 목적은 SL 회원이 될 인자들의 수준과 이들에 대한 정치훈련에 반영되었다. 지금 ICL에서는 정치노선의 문제는 지혜로운 지도부의 독점적 영역으로 대개 취급되고 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조직 내부의 "싸움들"은 진정한 정치적 차이와는 거의 무관하고 지도부의 "정치적 권위"를 강화하고 지도부 서열을 조정하는 데에 주목적이 있다.

SL이 지금 번복할 준비가 되어있는 종파주의 오류들의 목록에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부두노동자들이 198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화물에 대한 하역 작업을 거부한 투쟁 과정에서 SL이 이 투쟁을 파괴하려고 획책한 사건은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11일 간에 걸쳐 미국항만창고노조의 조합원 수백 명은 남아공 흑인노동자들을 지지하는 노동자 국제연대의 표현으로 네들로이드 킴벌리호에 실린 인종분리 화물을 내리지 않았다. 이 노조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반대 세력들 특히 외부 경향(IBT의 선행 조직) 지지자들이 이 투쟁을 주도했기 때문에 SL은 이 투쟁을 사보타지 하려했다. 이 중요한 투쟁을 패배시키려고 안간힘을 쓰던 중에 SL 지도부는 자기 회원들을 시켜서 투쟁 전날 밤 가짜 "파업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 가치 있는 투쟁을 수행하는 부두 노동자들을 "대체인력"이라고 비난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결국 SL의 [부두 투사]지는 궁극적으로 파업을 깬 연방 법원의 파업 중지 명령에 필요한 "물적 증거 제 1호" 정보를 파렴치하게 제공했다. 그리고 파업이 분쇄된 후에 SL은 자신이 파괴하려고 그렇게도 애쓴 하역거부 파업투쟁을 칭송했다. 그런데 IG는 속으로는 꺼림칙하면서도 이 범죄행위를 옹호하고 있다. 이 범죄적인 종파주의 만행은 [iSt의 외부 경향 게시판]지 제 4호에 자세하게 논의되어 있다.

 

SL과 '반전운동'

미국이 1991년 1월 이라크의 후세인 정권에 대해 "사막 폭풍" 작전을 시작했을 때 SL은 이 전쟁에 대한 저항을 조직하는 일을 거부했다. 그리고 이를 정당화하는 새로운 논리를 개발했다. 제국주의 전쟁 선전이 진행되고 있던 상황에서 샌프란시스코 지역에서는 1990년 9월 22일에 "중동의 월남전에 반대하는 위원회(CAVWME)"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100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최소한 절반은 소속된 조직이 없는 개인들이었다. 이때 IBT 회원들은 이 회의를 개량주의적인 선전연합에서 맑스주의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참석자들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할 수 있는 진정한 공동전선으로 변모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이 회의를 조직했으며 통합서기국과 연계된 사회주의행동그룹의 개량주의자들은 이 제안에 대해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회의에 참석한 열댓 명의 SL 회원들이 이 제안을 지지했을 경우 이 파블로주의자들은 소수파로 몰렸을 것이다(주 32: 1988년 2월에 IBT의 토론토 지부 회원들은 통합서기국의 좌파 회원들 그리고 여러 분자들과 협력하여 미국 중앙정보부가 니카라과 반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행위에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했다. 이 공동전선에는 300명이 참여했다. 이때 iSt의 캐나다 지부인 트로츠키주의동맹은 시위에 초청받았으며 이 투쟁에 협력할 경우 시위대에게 연설할 가능성도 제공받았다. 그러나 이 시위가 "반혁명 협잡"의 외피라고 주장하며 라벗슨 추종자들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이 사건의 전말은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4호에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제안을 지지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SL 회원들은 이 위원회와 주최 조직을 비난만 했고 이 때문에 사회주의행동그룹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날 밤 같은 지역에서 SL은 공개토론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IBT 회원 한명은 SL의 종파주의적 기권주의를 비판했다:

"반전운동을 개량주의 지도부에게 맡겨버린다면 이 운동이 개량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될 것이라는 예상은 저절로 현실화될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전술과 반전운동", [1917년]지 제 9호, 1991년

"강령이 이론을 생산한다"는 잘못된 사고의 고전적인 예를 SL의 지도적 이론가 조지프 씨모어가 제공했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며 자기 조직의 기권주의를 옹호했다: "반(反)자본주의 운동과 별개로 존재하는 반전운동은 없다"("BT: 인민전선의 깍두기", [노동자 전위]지 제 511호, 1990년 10월 5일). [1917년]지 제 9호에서 우리는 이것을 "종파주의적 헛소리"로 규정하고 1966년 SL의 창립총회 선언문을 인용했다: "반전운동에 참여하지 않은 채 조언이나 하면서 이 운동의 일상적 활동에 '손을 더럽히기'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역할이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렇다면 SL은 1960년대 후반부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없었다고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 이에 대해 SL은 대답을 거부했다. 그러나 씨모어의 지혜로운 선언을 실은 [노동자 전위]지의 다른 글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월남전에 반대하는 '반전운동'을 언급해서 우리의 실소를 자아냈다(주 33: "결정적인 결함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전운동은 미국으로 귀환하는 병사들에게 '침을 뱉을'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았다"<[노동자 전위]지 제 511호, 1990년 10월 5일 제 7쪽>.). SL이 이렇게 행동한 동기를 이해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SL 지도부는 광범위한 정치투쟁의 장에서 자기 회원들의 활동 능력을 거의 자신하지 못한다. 따라서 가장 사소한 전술적 움직임이나 발언조차도 지도부에서 지시해야한다. SL 회원들이 다른 좌익 그룹들의 회원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할 경우 회원에 대한 지도부의 통제는 위협받는다. 따라서 반전운동에 대한 SL의 '개입'은 막 등장하고 있던 반전운동 내부에서 영향력을 획득하려는 진지한 투쟁 대신 기권주의를 은폐하기 위한 일련의 비판에 한정되었다."-- "공산주의자의 전술과 반전운동", [1917년]지 제 9호, 1991년 제 1 4분기

 

ICL의 종파주의는 무미아 석방운동에 대한 당파변호위원회(PDC)의 공헌을 훼손하고 있다

우리는 최근에 팜플렛 [무미아 아부-자말 사건]을 발간했다. 여기서 우리는 SL과 당파변호위원회(Partisan Defense Committee, SL의 재판 변호기구)의 역할을 규정했다. 미국의 가장 중요한 정치범인 무미아는 경찰의 음모로 조작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SL과 PDC는 이 음모를 폭로하여 "무미아와 노동운동 전체에 크게 기여했다"고 우리 팜플렛은 밝혔다.

그러나 이 모범적인 활동조차 가끔 SL의 종파주의에 의해 손상을 입었다. 무미아의 사형 집행이 임박한 상황에서 1995년 8월 우리의 영국 동지들은 영국의 SL에 긴급 공동전선 투쟁을 제안했다:

"시간이 촉박하다. 그러나 8월 17일 사형 집행일 이전에 상당한 규모의 전국적 시위를 조직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다른 그룹들도 다양한 행사들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계획된 전술이 없을 경우 고립 분산적인 성격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부르주아 언론은 무미아 사건에 대해 최근 상당한 관심을 보여 왔다. 따라서 대부분의 좌익 조직들은 공동전선에 참여할 것이다. 미국의 SL이 무미아 변호를 위해 수년 동안 일해 왔기 때문에 영국의 극좌 조직들 가운데 SL은 이러한 공동전선을 조직하기에 아마 가장 좋은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이러한 투쟁을 조직하는데 필요한 최대한의 지원을 우리는 약속한다...."-- 영국 SL에 보내는 편지, 1995년 8월 6일

그러나 이 제안은 거절당했다. 이에 대한 이유는 이 제안 직후 발간된 [노동자 전위]지 (1995년 8월 25일자, 제 627호)에 명확히 제시되었다:

"IBT가 영국의 우리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는 우리가 '공동전선 위원회'를 조직하지 않아서 무미아 변호운동을 손상시켰다고 주장한다. BT가 어떤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잘 모르지만 우리는 사회현실과 우리의 사회적 비중을 잘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 조직, BT 그리고 다른 소규모 좌익 조직들로 구성된 '무미아 석방 위원회'가 무미아의 자유를 쟁취하는데 필요한 사회 세력을 결집시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응수했다:

"미국의 SL이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다른 소규모 좌익 조직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사안으로 결집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무미아 석방을 위한 시위가 성공할 수 있었다. 그의 자유를 쟁취하는데 필요한 대중적 지원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이 공동전선을 조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7월에 뉴욕에서는 일련의 개별적인 시위들이 있었다. 이 중의 일부는 SL이 조직하고 통제했다. 그리고 일부는 다른 조직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모범은 아니다. 물론 좌익 조직들의 힘을 전부 합쳐도 대대적인 수위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만이 더 대규모의 시위를 조직할 수 있다고 SL은 제안하고 있는가?"-- "공동전선을 통한 무미아 아부-자말의 석방을 위하여!", [1917년]지 제 17호, 1996년

ICL은 무미아를 위한 성공적인 공동전선 투쟁에 가끔 동참했다. 1990년대 후반부에 토론토에서 여러 번의 공동전선 시위가 조직되었다. 2002년에는 "무미아를 석방하라! 인종주의 사형 제도를 철폐하라!"라는 구호에 기초하여 대규모 공개토론회가 열렸다. ICL의 캐나다 지부인 트로츠키주의동맹은 어떤 때에는 투쟁에 참여하고 어떤 때에는 불참했다. 다양한 종류의 무정부주의 조직들을 비롯해 여러 참가 조직들을 궁금하게 만든 이 기이한 행동은 ICL의 내부 소용돌이에 의해 결정되었던 것 같다. 이 소용돌이가 "종파주의에 반대하는" 쪽으로 돌면 참여하고 그 반대로 돌면 참여하지 않았다("노동운동은 무미아를 석방시키기 위해 투쟁해야한다!", [1917년]지 제 21호, 1999년을 참조하시오.).

1999년 4월 24일에 미국항만창고노조는 무미아에 대한 연대 표시로 파업에 돌입하여 미국 서해안의 모든 항구를 마비시켰다. 이때 [노동자 전위]지는 이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했다. ICL이 특히 증오하는 SL의 과거 회원들이 이 투쟁을 주도하고 지원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샌프란시스코와 필라델피아에서 동시에 열린 무미아 석방을 위한 대대적인 시위에도 SL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시위들을 조직한 개량주의자들이 무미아 석방보다는 "새로운 재판"을 촉구했기 때문이라고 SL은 이 기이한 종파주의적 기권을 설명했다. [노동자 전위]지에 보낸 편지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동지들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미아를 석방하라!'라는 구호를 원한다. 그러나 이것이 SL/PDS가 지금까지 조직할 수 있었던 소규모 시위들보다 몇 배 규모인 전국 차원의 시위에 불참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는 '무미아를 석방하라!' 등 우리 자신의 구호를 가지고 이 시위들에 참여한다.

월남전 와중에 SL은 명확히 사회평화주의적 구호들로 조직된 많은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때마다 SL은 인도지나 반도의 혁명 승리를 촉구하는 자신의 플레카드를 가지고 행진했다. 이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불쾌한 종파주의자들", [1917년]지 제 21호, 1999년

이런 종류의 종파주의적 행위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를 우리는 계속 언급했다:

"대부분의 정치 활동가들은 SL을 약간 황당하며 빈번하게 히스테리를 보이는 그리고 일반적으로 불쾌한 종파로 간주한다. 무미아 석방 투쟁에서 SL 지도부가 절반만 참여하는 유일한 이유는 자신의 회원들이 다른 좌익 조직들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현실에 너무 노출되는 것을 막는 데에 있다."-- 같은 글

 

ICL이 총파업에 대한 자신의 1974년 입장을 번복하다

총파업에 대한 자신의 입장이 왔다 갔다 하는 데에서 드러나듯이 ICL의 종파주의적 실천은 이 조직의 강령에도 일시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고 있다. 총파업 촉구의 전제 조건은 혁명적 대중정당의 존재라는 SL의 주장은 맑스주의 전술의 꽤 중요한 확대 적용을 명백히 번복하는 행위이다. SL은 지금부터 30년 전 혁명조직이었을 때 이 확대 적용을 성취했었다. 1974년 겨울 영국의 전투적인 광부노조는 공공연히 개량주의적인 지도부 하에서 테드 히이쓰의 토리당 정부와 대결하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모순에 봉착해 있다: 지금 상황은 총파업을 통해 히이쓰의 공격에 조직 노동계급 전체를 결집시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총파업은 권력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쉽게 혁명적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노동조합과 노동당/공산당 지도부는 총파업이 자본가 계급의 국가권력에 도전할 경우 이것을 배신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총파업의 객관적 요구와 계급 대중을 배신하는 현 지도부를 고려하면서 우리는 제한된 방어적 목적의 총파업을 촉구해왔다. 이 투쟁은 국가의 임금통제 정책을 분쇄하고 이것을 강제시키기 위해 포고된 조치들(예를 들어 토리당 고용주의 공장폐쇄)을 역전시키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지금 영국에서 총파업을 촉구하는 이유", [노동자 전위]지 제 39호, 1974년 3월 1일

이 투쟁의 성공이 미리 보장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노동자 전위]지는 이렇게 주장했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승리할 수 있는 총파업을 배신할 가능성이 언제든지 있으므로 토리당이 무슨 짓을 하든 노동자들이 투쟁 없이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최악의 스콜라주의적 수동성이 될 것이다....

현재 영국 혁명가들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에서 승리하여 대대적인 인플레의 비용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려는 자본가들의 시도를 패배시킬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이 임무는 개량주의 지도부의 힘 때문에 봉기가 성공할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같은 글

이 문제에 대한 트로츠키의 저작들과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는 이 정책은 지금도 우리가 옹호하는 노선이다. 그러나 중도주의로 퇴보한 ICL은 이제 총파업은 언제나 국가권력 장악 투쟁의 전 단계가 되어야하며 대중적 혁명정당의 지도부가 없이는 이것을 시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1990년대 중반 캐나다의 온태리오주에서는 노동조합 관료들이 일련의 하루 한 도시 총파업을 주도했다. 이것은 마이크 해러스의 우익 보수당 정권이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데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우리는 이렇게 주장했다:

"전면화 된 자본가들의 공격에 대한 응답은 전면화 된 대응 즉 사회 프로그램들을 방어하는 총파업이다....그러나 우리는 전문 '노동 정치꾼들'이 총파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으로 기대할 수 없다. 따라서 총파업은 지역과 주 차원의 대표체에 의해 조직되고 민주적으로 선출되는 직장 파업위원회에 의해 통제되어야한다."-- "저항과 배신", [1917년]지 제 19호, 1997년

그러나 ICL의 트로츠키주의동맹은 총파업을 촉구하는 모든 조직들과 견해를 달리했으며 이들을 "돌팔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혁명 지도부의 부재를 그 이유로 들었다. [캐나다 스파르타쿠스단]지(1996-97년 겨울)는 토론토 총파업에 대한 우리의 유인물을 공격했다. "노동자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친자본주의 지도자들을 정치적으로 패배시키고 이들을 대체시켜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응답했다:

"이 주장은 무미건조한 도식에 불과하다. 오직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서만 노동자 대중은 기존 지도부를 거부하고 새로운 혁명적 대안을 수용할 것이다.

....IBT 유인물의 결론 문단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에 입각한 새로운 노동자 지도부'를 촉구했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트로츠키주의동맹은 우리의 입장을 부주의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부정직하게 매도하지만 핵심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공산주의자들이 개량주의 관료들을 '정치적으로 패배시키고 이들을 대체할' 유일한 방법은 실제 계급투쟁에 개입하여 이 투쟁의 범위를 확대시키고 일반화시키는 것이다.

대중은 총파업을 원한다. 관료들은 이것을 주도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총파업 촉구는 관료들의 비겁을 폭로하고 공산주의에 반대할지도 모르는 전투적 노동자들에게 최소한 이 문제에서는 기존 지도부가 틀렸으며 공산주의자들이 옳다고 증명할 수 있다."-- "저항과 배신", [1917년]지 제 19호, 1997년

당시 IG에게 보내는 우리의 편지에서 우리가 밝혔듯이 1995년 11월과 12월에 정부의 긴축정책에 저항하여 프랑스를 뒤흔들었던 총파업 기간에도 ICL의 선전은 똑같은 오류를 범했다:

"1990년대 중반에도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총파업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민간부문에도 파업이 확대될 것을 촉구하면서도 ICL의 프랑스 지부인 트로츠키주의동맹은 의도적으로 총파업 촉구를 자제하고 있다. 대신 이들은 '권력의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 조직의 중심 구호는 '새로운 혁명 지도부' 즉 트로츠키주의동맹을 건설하자는 촉구였다"-- "IG/LQB에 보내는 IBT의 편지", 1996년 12월 15일,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6호에 재수록

혁명조직이었을 때 SL은 샌프란시스코, 뉴욕, 호주 등 다수의 투쟁에서 총파업을 촉구했었다고 우리는 지적했다. 그런데 이 투쟁들의 경우 국가권력 장악 투쟁은 당면 일정에 오르지 않았었다. 이 문제에 대해 ICL에게 보낸 최종적이고 답장 받지 못한 응답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총파업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계급 가운데 누가 사회를 통치할 것인가 즉 권력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 트로츠키주의동맹의 핵심 주장이다. 문제를 이렇게 표현한 후 이들은 자본가들의 공세를 패배시키고 이것을 주도하는 정부를 타도하기 위한 우리의 총파업 촉구를 '의회의 재편을 위한 압력 전술에 불과하다'고 폄하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SL이 1974년에 쓴 글은 바로 이 멍청한 삼단논법을 공격했다....

권력 장악 투쟁이 당면 일정에 올랐을 때에만 총파업이 적절하다면 1934년 미국에서 터진 털리도, 미니애폴리스 또는 샌프란시스코의 총파업은 정당화되기가 힘들 것이다. 이 투쟁들은 전부 제한적이고 방어적인 지역 차원의 투쟁으로 시작하여 결국 북미에 산별노조를 수립한 대대적인 총파업 투쟁으로 터져 올랐다...."-- "전술을 방어하며", [1917년]지 제 20호, 1998년

 

ICL의 '기회주의적 몸 사리기'

[스파르타쿠스단]지의 글에 의하면 SL의 종파주의적 기권주의의 정반대 편향은 일련의 "기회주의적 몸 사리기"였다:

"ICL 총회는 종파주의 패턴을 동반한 기회주의 편향을 주목했다. 9//11 테러 공격 이후의 반동적 정치 분위기로 인해 중앙 지도부 이외의 지도적 중핵들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상황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는 우리의 능력에 핵심적으로 중요했다. 이것은 우리의 선전물에서 공허한 허세 뿐 아니라 기회주의적 몸 사리기를 퇴치하는 끊임없는 투쟁을 요구했다. 미 제국주의의 군사력을 직접 대표하는 미국 국방부 건물 등 국가기관에 대한 공격과 세계무역쎈터의 경우처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맑스주의자들은 뚜렷이 구별한다. 무려 한 달 동안이나 우리가 이 중요한 차이를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은 것이 몸 사리기의 가장 뚜렷한 예였다."-- "소련 붕괴 이후의 세계에서 혁명적 연속성을 유지하기 위한 투쟁",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 2004년 봄

SL과 달리 우리는 처음부터 세계무역쎈터와 미국 국방부 건물에 대한 공격의 차이를 기본적으로 구별했다. 사실을 말하면 토론토에서 2001년 9월 28일 열린 공개토론회에서 우리가 급진 자유주의자 타리크 알리에 대해 개입하면서 이 문제를 제기한 후에야 [노동자 전위]지는 자신의 오류를 정정했다. 이 행사가 끝난 후 우리는 9월 11일 테러 공격에 대한 SL의 성명서가 이 차이를 누락한 것의 정치적 의의에 대해 트로츠키주의동맹 회원 여러 명에게 도전했다. 우리가 발표한 9월 18일자 성명서는 미국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이해가 지배자들의 피에 굶주린 군사적 모험에 반대하는 것에 있다"는 점을 인식시키는 것의 핵심적 중요성을 지적했었다. 그리고 SL이 1983년 레바논 사태에 대해 저지른 몸 사리기를 상기시켰다. 이때 미 제국주의는 중동에서 교두보를 확보하려다가 회교도들의 트럭 폭탄 공격을 받아 엄청난 사상자를 내고 즉시 군대를 철수시켰었다:

"제국주의 군사력에 대한 공격과 무고한 민간인에 대한 공격을 맑스주의자는 구별한다. 예를 들어 '회교 성전' 그룹이 1983년 레바논에서 미국과 프랑스의 주둔 기지를 폭파한 것은 중동에서 군사적 교두보를 확보하려는 제국주의의 시도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이것을 우리는 옹호한다. 맑스주의를 자임하는 일부 조직들은 이 문제에서 몸을 사렸다. 좌익적 허세를 부리는 미국의 SL은 회교도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미 해병대원들을 구출하자고 촉구하여 사회애국주의 노선을 따랐다."-- "미 제국주의의 지배: 끝없는 공포", 2001년 9월 18일, [1917년]지 제 24호에 재수록

레바논,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 관계없이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점령에 대한 토착 세력의 저항에 혁명가들은 언제나 군사적 지지를 보낸다. 제국주의 깡패들이 자기 발로 걸어 나가든 시체 가방에 실려 나가든 중요한 것은 이들이 쫓겨난다는 것이다(주 34: 레바논의 미 해병대원들을 구하자는 SL의 수치스러운 촉구는 일련의 확대된 논쟁의 주제가 되었다. 이 논쟁의 전모는 [트로츠키주의 게시판]지 제 2호에 재수록 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몇 개월 전에 대한항공 007호 여객기 격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에 대한 몸 사리기와 마찬가지로 레바논 사태에 대한 SL 지도부의 몸 사리기는 반공 정책을 공격적으로 구사한 레이건 행정부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왔다. 이와 똑같은 비겁한 본능 때문에 그 다음 해에 SL 지도부는 "레이건 반동"과 "극우의 공격"에 대항하여 SL 회원 열댓 명을 보내 민주당 전당대회를 "방어하겠다"고 나섰다. [노동자 전위]지는 황당하게 이렇게 경고했다:

"자신의 정치적 반대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 레이건은 '테러 공포'를 활용하고 있다. 이것의 적절한 역사적 모델은 1933년 독일 제국의회 방화사건이다. 나치당은 이 사건을 활용하여 정치적 반대 세력을 탄압하고 제 3 제국을 확립시켰다."-- "경찰과 레이건이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폭력 사태를 계획하고 있는가?", [노동자 전위]지 제 358호, 1984년 7월 6일

1984년 7월 11일 편지에서 우리는 이렇게 지적했다: SL의 이 제안이 "우익을 저지하기 위해 단결하자"는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전형적인 인민전선 노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공포에 질린 히스테리 목소리이다. 그리고 SL이 혁명조직이었을 때 주장한 노선을 상기시켰다: 인종주의와 제국주의 전쟁을 자행하는 민주당/공화당의 쌍둥이 부르주아 정당 사이에는 "동전 한 닢의 차이도 없다"(주 35: 이 편지는 1985년 5월 4일에 출판된 [iSt의 외부 경향 게시판]지 제 4호에 재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 SL 지도부는 1984년 8월 31일자 [노동자 전위]지에서 이렇게 응수했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만데일과 공화당 후보 레이건 사이에는 '동전 한 닢'이상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맹인이 아니면 다 볼 수 있다...."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황당한 이 제안을 민주당에게 한 지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SL은 다시 몸을 사렸다. 1986년 1월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지구 궤도를 빠져 나가던 중 폭파되었다. 이 때문에 미군 소속 우주인 5명을 포함한 승무원 전원이 사망하고 중요한 별들의 전쟁(Star Wars) 임무가 도중하차 되었다. 이에 대해 SL은 이렇게 논평했다:

"이틀 전에 미국의 수도 워싱턴의 아파트 지하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9명의 가난한 엘살바도르인들이 죽었다. 이런 종류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사망하는 사람들에 대해 느끼는 것과 똑같은 연민을 우리는 챌린저 호 승무원들에게 느낀다."-- "챌린저호가 레이건의 얼굴 앞에서 폭파되다", [노동자 전위]지 제 397호, 1986년 2월 14일

엘살바도르의 우익 테러 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피난한 궁핍한 엘살바도르인들의 죽음에 대해 느끼는 연민을 똑같이 제국주의의 전문적 군사 중핵들의 죽음에 대해 느끼다니 과연 ICL 회원들은 어떤 종류의 "혁명가"인가?(주 36: "노동계급에게는 재앙이 아니다", [1917년]지 제 2호, 1986년 여름을 참조하시오.)

 

2001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또 다시 몸 사리기

[스파르타쿠스단]지의 이 글은 자신의 "기회주의적 몸 사리기"를 말하면서 미국 국방부 건물의 예만 들고 있다. 따라서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략하고 점령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해 비겁하게 몸을 사린 것을 ICL이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다:

"따라서 지금 미국의 군사적 패배를 촉구하는 것은 환상이며 가장 순수한 허세와 '혁명적' 말싸움에 불과하다. 그리고 국가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미국 노동계급을 결집시키는 임무를 방기하는 결과 나타나는 행위이다."-- "'자본가 계급의 국민적 단결에 반대하자!', 국내의 계급투쟁을 지지하자!", [노동자 전위]지 제 768호, 2001년 11월 9일

우리가 주목했듯이 이 노선은 ICL의 최근 노선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좌익이 직면하고 있는 핵심 문제는 어느 쪽 편을 들 것인가이다. 우리가 우리 지배자들의 승리를 원해야 하는가 아니면 패배를 원해야하는가? 2년 전에 나토군의 폭탄이 유고 연방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SL은 이 문제에 대해 명확하게 답하였다: '세르비아를 방어하라! 미국/나토 제국주의 군대에게 패배를! 노동계급 혁명을 위하여!'([노동자 전위]지, 1999년 4월 16일).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지금 달라야 할 이유가 있는가?"-- "ICL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1917년]지 제 24호, 2002년

이 질문에 대해 지금 ICL은 대답할 수 없다. 라벗슨 추종자들과는 달리 우리는 제국주의의 승리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제국주의 연합군은 상당수의 지상군을 투입하여 파쉬툰족 지역의 탈레반 군대와 그 동맹 세력을 제거하도록 강요되고 있다. 그렇다면 회교 게릴라들이 이 전쟁을 충분히 오랫동안 질질 끌어서 미군에 충분한 수의 사상자를 초래하여 이 전쟁에 대한 미국 국내의 지지를 식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충분히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최상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며 지금 시점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다."-- 같은 글

제국주의 전쟁기구에 저항하는 것은 부질없다고 ICL 지도부는 기가 죽은 채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3년째로 접어들고 있는 지금 이 추측은 다시 한 번 ICL의 몸 사리기 노선이라는 것이 폭로되고 있다. 그런데도 ICL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2003년 아들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미국의 정치 분위기는 충분히 변화했다. 그래서 SL/ICL은 명백한 패배주의 노선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었다:

"미 제국주의자들의 모든 승리는 더 많은 군사적 모험을 부추길 뿐이다. 한편 이들이 겪는 모든 치욕, 모든 후퇴, 모든 패배는 전 세계 노동자와 피억압 인민의 투쟁을 지원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미국 SL 정치국 성명서", [노동자 전위]지 제 800호, 2003년 3월 28일

아주 올바른 말이다. 그런데 왜 이와 똑같은 입장은 16개월 전에는 "허세와 '혁명적' 말싸움"에 불과했는가? 이유는 자명하다 --ICL의 비겁한 지도자들은 "9/11 테러" 직후 "비애국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58호의 글은 레닌의 유명한 말로 시작한다:

"자신이 저지른 오류에 대한 정당의 태도는 이 정당이 얼마나 진지하며 어떻게 실천을 통해 자기 계급과 근로 대중에 대한 의무를 완수하는 가를 판단하는 가장 중요하고 확실한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이 오류가 발생한 이유들을 확인하고 이 오류를 초래한 상황들을 분석하고 이것을 정정하는 수단을 마련하는 것 --- 이것이야말로 진지한 정당의 특징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정당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방법이며 이 정당이 자신의 계급과 피억압 대중을 교육하고 훈련하는 방법이다."-- '좌파' 공산주의: 소아병 (1920년)

참으로 좋은 충고이다. 그러나 혁명적 패배주의에 대해 ICL이 최근 왔다 갔다 하는 오류를 저지른 것이 증명하고 있듯이 이 조직은 "진지한 정당의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 [스파르타쿠스단]지의 자기비판은 "오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도부의 권위가 손상을 입은 것을 만회하려는 처방에 불과하다. 자신의 좀 더 터무니없는 오류 몇몇을 번복하는 것을 통해 라벗슨 일당은 결정적으로 중요하지만 매우 엷은 부위인 똑똑하고 젊은 ICL 회원들로부터 지도부의 권위를 회복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지금까지 인정한 몇몇 오류들에 대한 지도부의 진정한 태도를 가장 의미 있게 나타내는 징후들 가운데 하나는 이 오류들을 정정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ICL은 씨애틀 시위에 대한 어리석은 종파주의를 철회하는데 4년 반이 걸렸고 중국의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혐오증 편향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데 10년이 걸렸으며 동독에서 자신이 노동계급을 혁명으로 지도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마침내 철회하는데 14년이 걸렸다. 반면에 라벗슨의 국수주의적 "똥" 실언을 [노동자 전위]지 편집부가 방어하지 못한 오류는 즉시 "정정되었다"(주 37: "황제가 알몸뚱이예요"<[쿠르디스탄과 민족해방투쟁] 팜플렛에 재수록>에서 우리가 지적했듯이 라벗슨의 국수주의에 대한 [노동자 전위]지의 억지 변명은 "너무나 황당하여 심지어 딱딱하게 굳은 SL의 앞잡이들조차 이에 대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캔터베리의 성 안셀름의 신조를 수용하면서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ICL 회원들만이 공식 변명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제임스 라벗슨의 도시에서는 무오류 지도자의 평판보다 더 귀중한 것은 하나도 없다.

 

SL은 왜 중요했는가

SL은 아직도 주위 세계에 대해 근본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역사/문서기록과 관련된 가치 있는 작업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조직이다(주 38: SL의 프로메테우스 연구 도서관이 2권의 책으로 출판한 제임스 캐넌의 저작집은 이 도서관이 프로메테우스 연구 시리즈로 발행한 다른 출판물들과 마찬가지로 트로츠키주의 운동사 연구에 기여한 바가 크다.). 그러나 이 조직은 상황이 어려울 때에는 맑스주의 원칙보다는 편의와 예상되는 조직적 이득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결정해온 전력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스파르타쿠스 경향이 볼세비키주의의 살아있는 계승자이지 않았다면, 라벗슨가(家)의 쇠퇴와 멸망은 기록할 가치가 없을 것이다. SL이 혁명조직이었던 시기에 라벗슨은 트로츠키주의를 보존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트로츠키주의를 강령적으로 확장한 기여를 여러 번 했다. 이후 그는 정치적으로 퇴보했지만 이 공헌 때문에 그는 훌륭한 혁명 지도자로 인정받을 가치가 있다.

라벗슨이 정치적으로 성숙하던 1950년대 중반에 트로츠키의 제 4 인터내셔널을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한 대부분의 조직들은 제 4 인터내셔널보다 상당히 우경화해 있었다. 맥스 섁트먼과 토니 클리프 같은 "제 3 진영"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뿐만 아니라 미쉘 파블로, 에르네스트 만델, 테드 그랜트 등 "새로운 세계 현실" 수정주의자들, 1960년대 중반에 삐에르 랑베르, 조우 핸슨, 제리 히일리 등 파블로에 대항하여 "정통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한다고 주장했던 자들은 모두 그랬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벗슨과 그가 건설한 조직은 트로츠키가 실제로 지도한 제 4 인터내셔널의 정치에 기초해 있었다. 1970년대에 핸슨은 라벗슨을 "재능 있는 문서기록자"로 폄하했다. 그러나 이 평가는 그가 트로츠키주의 운동의 강령적 유산을 진지하게 간주했다는 사실에 대한 치사였다. 이 당시 그와 같은 정치가는 거의 없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초반부를 통틀어 그는 처음에는 맥스 섁트먼의 독립사회주의동맹이 사회민주주의 조직으로 붕괴하고 있을 때 이 조직의 반대 좌파였으며 패럴 답스의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카스트로 노선을 수용했을 때에도 그랬다. 이 과정에서 그는 혁명 강령의 청산을 성공의 열쇠로 간주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성기에 제임스 라벗슨은 혁명적 연속성의 중요한 고리였다:

"SL은 다수의 좌익 그룹들 가운데 단순히 하나의 조직이 아니었다. 코민테른이 스탈린주의의 매독에 걸려 파괴된 상황에서 볼세비키주의를 전진시키기 위해 트로츠키는 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당을 훈련시켰으며 이 정당을 캐넌은 건설했다. 그리고 이 정당이 파블로의 수정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파괴되고 있을 때 SL은 반대 좌파의 결정체였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수정주의 지도부에 의해 축출되기 전에도 SL의 선행 조직이었던 혁명적 경향은 조직 분립을 겪었다. 한때 혁명적 경향의 스승이었으며 영국 사회주의노동동맹의 지도자였던 제리 히일리는 자기 조직원들에게 거짓말에 서명하라고 명령했다. 제임스 라벗슨이 주도한 조직의 다수파는 이를 거부했으며 이 과정에서 혁명적 경향의 절반을 잘라 내고 조직을 분립했다. 이 때문에 사회주의노동자당 중핵들의 일 부위를 혁명 강령으로 획득할 가능성은 상당히 약화되었다. 그러나 라벗슨에게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것은 명예로운 시작이었다."-- "제임스 라벗슨이 세운 도시로 가는 길", [iSt 외부 경향의 게시판]지 제 4호, 1985년 5월 4일

1960년대와 1970년대에 혁명적 SL은 경직된 원칙주의 조직이었다. 그러나 피억압 피착취 계급의 가장 선진적인 부위 내에 혁명적 공산주의 강령을 뿌리 내리기 위한 효과적인 전술을 개발하려고 고군분투했다. 모든 대중운동들을 지배한 개량주의적 부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영합하지 않은 채 SL은 이 운동들에 개입했다. 노동조합 운동에서 좌익의 대부분은 경제주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거나 직책에서 쫓겨난 관료 사기꾼들의 좌익적 언사를 지지했다. 이때 SL 회원들은 계급투쟁 강령을 의미 있게 만들기 위한 길을 찾기 위해 고투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들은 다수의 노동자들로부터 "자기 길을 가는" 원칙에 입각한 투사로 존경받았다(주 39: 1970년대에 SL의 노동조합 활동은 세계혁명사의 가장 밝은 장에 속한다. 이 그룹이 전략적 노동조합들에서 강령에 입각한 분파를 건설하려고 투쟁했던 정수는 IBT판 [이행 강령]에 재수록 되었다.).

최전성기에 SL은 중도주의 경쟁조직들과 쉽게 구별되었다: SL은 혁명 원칙에 충실하여 강령을 우선시했다. 제리 히일리와 리비오 마이탄이 모택동의 "혁명적" 홍위병에 열광하고 있을 때 SL은 "노동계급 문화대혁명"이 중국 스탈린주의 관료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이라고 올바르게 규정했다. 그리고 흐루시초프에 반대하는 모택동의 "반(反)수정주의" 허세가 소련의 퇴보한 노동자국가에 대항하여 미 제국주의와 동맹할 태세라고 설명했다.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들 전부와 달리 SL은 칠레의 아옌데가 다계급 동맹인 인민연합을 결성하자 이를 (아무리 "비판적이라도") 선거에서 지지하지 않았다:

"아옌데의 인민연합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표명하는 것은 계급에 대한 배신이다. 국제 제국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아 국내의 반동 세력이 준비되어있을 경우 이 배신행위는 칠레 노동자들의 유혈 패배를 자초할 것이다."-- "칠레의 인민전선", [스파르타쿠스단]지 제 19호, 1970년 11월-12월

이로부터 9년 후 증오의 대상이었던 이란 국왕에 대항해 전개되고 있던 이란의 "회교 혁명"에 대해 좌익 전부는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SL은 또 다시 홀로 이를 거부했다. "이란 국왕을 타도하라!, 회교 지도자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는 SL의 구호는 호메이니의 권력 장악을 혁명의 위대한 승리라고 환호하던 자들 모두를 경악시켰다. 그러나 이후의 사건들은 SL의 노선이 옳았음을 비극적으로 입증시켰다.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조직들 거의 대부분과는 달리 SL은 아나톨리 샤란스키와 같은 소련의 친제국주의 반체제 인사들을 방어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탈린주의자들의 범죄들을 올 곧게 비난했다. 1973년에 세계 좌익 운동권 내에 호지명과 월남공산당에 대한 존경심이 절정을 이르렀던 때에 SL은 월남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배신한 전력을 낱낱이 폭로한 가치 있고 독창적인 기록물을 출판했다(주 40: 1973년 5월 25일자 [노동자 전위]지 제 21호는 SL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조직의 역사 내내 SL은 민족해방전선에 대해 군사적 방어를 촉구해왔다. 이 노선이 인기 없는 때와 장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동시에 트로츠키주의자인 우리는 연속혁명의 깃발을 높이 들고 월남 스탈린주의자들의 반복된 배신들을 폭로한다."

이 글은 나중에 연재물의 일부가 되었고 이 글들을 모아 SL은 1976년에 [월남의 스탈린주의와 트로츠키주의]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출판했다.).   

1970년과 1973년 사이에 신좌익(New Left) 운동이 말기적 위기에 처해 있을 때 SL은 조직 규모가 4배로 증가했으며 다양한 급진 조직들에서 수십 명의 헌신적 투사들을 획득했다. 이 중핵들은 SL에게 높은 수준의 논쟁적인 주 2회 신문을 발간하고 여러 전략적 노동조합들에 진지하게 개입하고 국제적으로 조직을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 1970년대 중반에 SL은 규율이 높은 조직이 되어 트로츠키주의 강령으로 응집된 재능 있고 동기 부여가 높은 회원들을 보유하였다. 이 조직의 수준 높고 내적으로 일관된 정치노선의 평온한 명확성은 이 조직의 청년 중핵들에게 자신감과 투쟁 결의를 부여했다. 이것은 사이비 트로츠키주의 경쟁조직들과는 확연하게 구분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에 조직 확대의 기회가 차단되고 계급투쟁의 수위가 하강하자 SL은 퇴보하기 시작했고 라벗슨의 생활방식은 위로 치솟았다. 숙청의 물결이 정치적 반대의 구심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회원들을 강타하자 이 조직의 오류 정정 능력은 소진되었다. 이 "볼세비키화" 캠페인의 결과는 일련의 기이한 강령적 동요로 곧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ICL 회원들은 의문의 여지없는 복종에 너무 익숙해 있어서 조직의 정치 노선을 이해할 능력이 있다고 기대되지 않는다. 심지어 이들은 노선이 사리에 맞아야만 한다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1995년의 글에서 우리는 러시아 문제에서 SL이 보인 강령적 편향과 이 조직의 매우 관료화된 내부 조직 운영과의 연관성을 주목했다:

"다른 어떤 문제보다 SL을 정치경향으로 확고히 규정한 단 하나의 문제 즉 러시아 문제에서 SL은 이제 완전한 혼란에 빠졌다. 이것은 단순히 잘못된 분석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애국주의적 편향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초반에 이 조직이 드러낸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에 대한 짝사랑 편향은 건강하고 민주집중적인 조직에서는 손쉽게 번복될 수 있었을 것이다. ICL이 동독의 상황을 오판하고 1991년 8월 소련 사태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그 자체로는 혁명에 대한 배신이 아니다. 정직한 혁명가들도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입각한 조직 생활만이 제공할 수 있는 오류 정정 능력이 SL에게는 없다. SL은 원래의 오류를 고집하면서 이것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현실을 혼동하고 마침내 서서히 비논리로 빠져든다. 이러한 오류 생성 과정들을 강요하는 것은 바로 라벗슨이 무오류의 지도자라는 사상이며 SL이 틀릴 수 있고 경쟁조직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철썩 같이 거부하는 사고방식이다."-- "음울한 조화", [1917년]지 제 15호, 1995년

SL/ICL에서는 비판이 아래로만 내려간다. 아래로부터의 정치적 반대를 거세하는 과정에서 라벗슨과 그의 조수들은 이를 통해 분파 투쟁과 조직 분립이라는 비싼 경상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애초에 판단했다. 라벗슨은 언제나 이렇게 생각했다: 1940년의 조직 분립을 통해 가장 뛰어난 청년 당원들의 대부분을 섁트먼 분파에게 빼앗기면서 캐넌이 창립하고 지도한 사회주의노동자당은 영원히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 그래서 그는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한때 혁명적이었던 SL의 목을 졸라 질식시켜 이 조직이 정치적으로 망각되는 별 볼일 없는 조직으로 추락하게 만들었다. 현재 SL/ICL이 드러내고 있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은 혁명조직의 내부 조직 운영과 이 조직의 공식 강령 사이의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증명하고 있다. 1903년 러시아의 볼세비키와 멘세비키의 조직 분립과 마찬가지로 SL의 썩어 문드러지는 질병은 궁극적으로 분석했을 때 혁명가들에게 이 진리를 증명하고 있다: 조직문제는 곧 정치문제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