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전쟁과 혁명--- 영화 [랜드 앤드 프리덤]이 다루지 않은 사실들영국의 좌익 감독 켄 로우치의 영화 [랜드 앤드 프리덤]은 스페인 내전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관점과 주제가 대단히 뛰어나 1995년 깐느 영화제에서 두 부문을 수상했는데 20세기의 주요 계급투쟁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다. 6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스페인 내전은 영웅적 투쟁의 현장으로 우리에게 가슴 뭉클한 낭만으로 남아있다. 이 내전에서 해외의 이상주의적 좌익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보통 노동자와 농민들은 극우 프랑코 장군의 군대, 스페인 지배계급 그리고 히틀러와 무쏠리니가 보낸 파시스트 군대들에 대항했다. 이 내전이야말로 우리가 어느 편을 들어야 할 지를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계급 격돌이었다. 내전 중에 스탈린주의자, 사민주의자, 평화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모두 이 전쟁을 스페인 "민주주의" 투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내전의 극히 적은 동기에 불과했다. 진짜 문제는 [스페인이 자본가와 지주들의 나라가 될 것인가 아니면 노동자와 농민의 나라가 될 것인가?]였다. 1930년대 중반의 스페인과 1917년 2월 혁명으로 짜르가 타도된 러시아는 유사한 측면이 대단히 많다. 1931년 스페인에서 왕정이 무너지자 자유 부르주아 계급과 사민주의자들은 공화국을 선포했다. 자유부르주아 계급의 지도자는 마누엘 아자냐(Manuel Azana)였다. 그를 트로츠키는 "스페인의 케렌스키"라고 불렀다. 케렌스키는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 후 잠시 존재했던 임시정부의 지도자였다. 케렌스키와 똑같이 아자냐는 대부르주아 계급과 유산 계급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따라서 권력을 지탱하기 위해 처음에는 사회당 다음에는 공산당 등 노동자 정당들에게 기대었다. 그러나 케렌스키와 똑같이 아자냐의 대중은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이 결과 1930년대 내내 스페인의 노동 계급과 국가는 계속 충돌했으며 이것은 갈수록 격화되었다. 1933년 카디즈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었다. 투쟁이 격화되자 극우 장교들이 암살단을 조직하여 노동자 조직의 대중 지도자들을 살해했다. 그리고 극우 파시스트들과 함께 팔랑헤당을 결성했다. 1934년 아자냐가 축출되고 레루(Alejandro Lerroux)가 우익 연합 정권을 수립하자 평소에 합법주의에 머물렀던 사회당은 당내 좌파의 압력을 받아 무기를 구입하여 당원들에게 배포하겠다고 공언하기 시작했다. 1934년 10월 반정부 총파업이 터진 와중에 아스투리아스의 광산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꼬뮌을 수립했다. 그러자 정부는 아프리카 식민지 모로코에 주둔한 군대의 총사령관 프랑코에게 급히 진압 명령을 내렸다. 프랑코가 지휘한 군대는 5천여 노동자들을 학살하고 3만 명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노동자들의 저항이 끝나지 않았다. 1936년 1월 레루는 금융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임을 강요당했고 새로운 선거가 실시되었다. 당시 스페인의 최대 노동조합 조직으로 1백5십만 조합원을 거느린 전국노동자연맹(CNT)의 무정부주의 지도자들과 무정부주의 비합법 조직인 스페인무정부주의연합(FAI)은 사상 최초로 선거 기권 원칙을 포기하고 인민전선 후보들을 지지했다. 인민전선은 자유부르주아 정당들, 사회당, 공산당의 연합으로 성립되었다. 투쟁이 격화되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은 계급협조주의를 비판했던 이전의 올바른 노선을 거두고 인민전선의 아자냐를 지지했다. 과거 트로츠키주의 지도자였던 안드레스 닌(Andres Nin)과 노동자농민연합의 후아킨 마우린(Joaquin Maurin)이 두 조직을 통합하여 성립시킨 이 정당(POUM)은 인민전선의 선거강령에 서명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인민전선에 합류했다. 1936년 1월 트로츠키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배신" 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 노선을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이라고 비난했다. 선거로 다시 집권한 인민전선의 아자냐는 몇 개월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스페인 지배계급에게 인민전선 정부가 조금의 위협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그는 노동자들의 무장을 반대했으며 군대 내의 우익분자들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다는 널리 퍼진 소문들을 무시하였고 장교들을 숙청해야 한다는 제안을 거부했다. 인민전선 정부의 이 수동적 태도는 반동들에게 용기를 주어 1936년 7월 17일 모로코 주둔군이 반동 장교들의 주도로 반란을 일으켰으며 스페인 전역의 주둔군들도 이에 호응했다. 그러자 카톨릭 교회와 부르주아 계급 거의 전부가 반란을 즉시 지지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 인민전선 정부는 반란군들에게 유화 제스처를 쓰며 인민을 무장시켜야 한다는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나름의 결론에 도달했다. 노동자들이 무장하면 정부와 의회의 권위가 훼손된다는 인민전선의 주장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대중은 스스로 무장에 나섰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반란군 병사들에게 접근하여 이들을 설득시켜 무장을 해제시킨 후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발렌시아의 파시스트 병기고와 병기창을 습격, 무기를 전부 탈취했다. 한마디로 이들은 `공화국' 군대가 조직한 파시스트 반란에 노동계급의 반란으로 응답했다."--- 장 루, [1936년~39년의 스페인: 살해당한 혁명], [혁명의 역사 제 4권, 1호와 2호]에서 공화국 정부를 지지하는 지역에서 노동자들은 지배 계급이 프랑코의 군대에 합류하기 위해 내팽개친 공장과 토지를 접수했다. 곧바로 노동자들은 스스로 생산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정당들에 의해 서둘러 조직된 민병대가 극우 반란군과 싸우기 위해 전선으로 출동했다. 한편 후방에서는 노동자 순찰대가 기존 경찰을 대신했다. 소설가 조지 오웰은 1937년 아라곤 전선에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 조직한 민병대의 일원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했다. 그의 경험이 르뽀 문학의 백미인 [카탈로니아 찬가]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혁명의 격동 중에 목격한 인류의 잠재력을 이렇게 묘사했다: "자본주의에 대한 불신과 높은 정치의식이 정상으로 인정되는 서유럽의 유일한 사회에 나는 우연히 들어가게 되었다.... 이 사회의 사상은 평등이었으며 실제도 사상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미리 맛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사회의 지배적 분위기는 사회주의의 그것과 같았다. 속물 근성, 금전에 대한 집착, 상사에 대한 두려움 등 문명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들이 이곳에서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정상적인 사회의 계급 구분도 사라졌다. 돈으로 오염된 영국의 분위기라면 이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무관심이나 냉소보다 희망이 더 정상적인 사회였다. `동지'라는 말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웃기는 얘기이지만 이곳에서는 진정한 동지애를 의미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를 마셨다.... 보통 사람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끼고 이것을 위해 목숨을 걸게 만드는 사회주의의 `신비로움'은 평등 사상에 있다. 절대 다수의 인민에게 사회주의는 무계급 사회이거나 아무 것도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영화 [랜드 앤드 프리덤]의 커다란 매력은 바로 이 정신을 영상으로 재현시켰다는 데에 있다. 영화의 주인공 데이빗은 리버풀 출신의 실업자 청년 공산당원인데 스페인에 건너가 국제여단의 일원이 된다. 그리고 우연한 과정을 거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민병대에 합류한다. 그의 경험은 서서히 그의 정치노선을 바꾸어 놓는다. 처음에는 공산당의 노선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던 그는 새로운 인식에 도달한다: 자본가들이 인정하는 한계 내로 투쟁을 제한하는 공산당은 혁명을 배신하고 있으며 결국 프랑코의 승리를 재촉하고 있다. 데이빗의 모델은 실존 인물인 스태포드 코트먼이다. 그는 오웰이 소속된 민병대의 가장 어린 대원으로 영국노동당의 청년조직에서 공산당 청년동맹으로 획득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민병대의 일원이 되었다. 그가 영국으로 돌아오자 공산당원들은 그의 집 앞에 모여 그를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제기된 문제는 지금도 계속 그 여운을 남기고 있다. 영국 무정부주의자 신문 [자유]의 1995년 6월 10일자 보도에 의하면 스페인공산당 지도자였던 산티아고 까리요는 이 영화의 개봉을 하루 앞두고 마드리드의 일간지 [나라]에 이 영화를 비난하는 글을 실었다. 그는 이렇게 불평했다: 이 영화는 20세기에 벌어졌던 자유를 위한 거대한 투쟁인 스페인 내전을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스페인공산당의 갈등으로 격하시켰다. 이에 대해 로우치 감독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시 까리요 자신은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프랑크와 동맹한 파시스트라고 비방했다. 그러자 잡지 [새 정치인]의 2월 16일자 커버스토리에서 영국의 역사학자 폴 프레스튼은 까리요를 거들고 나섰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이 영화는 괴팍스럽지 않다면 별 볼 일 없는 영화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프랑코와 그의 동맹국 독일에 대항하여 목숨을 바친 스페인 인민과 외국인들의 영웅적 투쟁을 찬미하는 대신 이 영화는 스탈린주의 공산당에 대한 반대 논조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우치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스탈린의 인민전선 정책이 실행된 당시 국제 정세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탁월함이다. 이 영화의 절정은 민병대와 민병대가 해방시킨 농촌 주민들 사이에 오간 논의 장면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점령한 토지를 집단화시킬 것인지 말것인지 토론하고 있다. 이때 미국의 스탈린주의자가 토론에 끼어 든다. 그는 토지가 집단화될 경우 공화국과 동맹을 맺으려는 민주적 자본주의 국가들이 공화국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한다. 스탈린이 인민전선을 이용하여 혁명을 말아먹은 이유가 바로 영국, 프랑스와 방어조약을 체결하기 위해서였다는 점을 이 스탈린주의자가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로우치의 관점에는 주요한 결함이 있다. 그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전혀 비판하지 않고 있다. 이 영화를 보면 공산당과 반대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일관되게 혁명노선을 추구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달랐다. 내전이 발발한지 2주일 후 쓴 글에서 러시아 내전을 적군의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내전에는 군사적 무기 뿐 아니라 정치적 무기도 동원된다. 순전히 군사적 관점에서 보면 스페인의 혁명 세력은 적들보다 훨씬 열세에 놓여있다. 그러나 혁명 세력의 힘은 절대 다수의 대중을 투쟁으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능력에 있다. 심지어는 반란군 병사들을 반동적 장교들로부터 떼어내 자기편으로 만들 수도 있다. 이 능력을 발휘하려면 혁명 세력은 사회주의 혁명 강령을 진지하고 용감하게 제시해야한다. 지금부터 자본가의 토지, 공장, 상점을 인민이 접수할 것을 촉구해야한다. 노동자들이 사태를 장악한 지역에서는 이 강령을 즉각 실천해야한다. 파시스트 군대는 이 강령의 힘을 단 24시간도 저지시킬 수 없을 것이다. 병사들은 장교들의 손발을 묶어 가장 가까운 민병대 본부에 넘길 것이다. 그러나 부르주아 장관들은 이 강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 사회혁명을 저지시키면서 이들은 노동자와 농민이 내전을 통해 필요한 것보다 10배나 더 많은 피를 흘리게 몰아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신사양반들은 노동자들이 승리한 직후 이들을 다시 무장해제 시킨 뒤 사적 소유의 신성한 법을 따르도록 강요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민전선 정책의 핵심이다."--- "스페인 혁명의 교훈", 1936년 7월 30일 그러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 조직들은 인민전선에 굴복했다. 즉 노동자와 농민의 이익을 "진보적" 자본가들의 이익에 종속시켰다. 혁명이 패배하고 결국 공화국 정부가 패배한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노동자 정당들이 "진보적" 자본가 세력들과 동맹을 유지하는 한 혁명투쟁은 사적 자본을 존중하고 스페인의 식민지를 지켜야 한다. 공화국이 모로코의 독립을 선언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모로코의 독립 선언은 프랑코 군대의 중요한 부분인 모로코 주둔군에게 엄청난 타격을 가했을 것이다. 또한 인민전선 공화국 정부는 농민의 토지 접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국가기구를 "정규화시켜" 자본가들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바로 이 때문에 노동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면서 1936년 7월 봉기로 등장한 인민권력 기구들을 해체시켰다. 맑스주의노동자당은 정부의 이러한 조치들을 비난했으나 인민전선과 결별하기를 거부했다. 이 정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이 할 수 있는 최대치는 "혁명에 대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는 것이었다.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의 배신에 대해 그는 좌익적 비판을 늘어놓았으나 모든 중요한 고비 고비에서 정치적으로 굴복했다. 우선 선거에서 인민전선을 지지했으며 1936년 9월 카탈로니아 부르주아 정부에 참여했다. 이 정부의 첫 번째 조치는 이중권력 상황에서 정부기구들과 경쟁하며 등장한 노동계급 권력기구들을 해체시킨 것이었다. 노동자민병대 중앙위원회가 해체되고 이 기능은 국방부에게 이전되었다. 그리고 노동자 조직이 주도한 반파시즘 지역위원회들은 정부가 임명한 지방행정기구로 대체되었다. 더욱이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 장관직을 맡고 있는 동안 노동계급은 강제로 무장이 해제되었다. 8일 내로 모든 무기들이 국방부로 반납되어야 한다는 법이 통과되었다: "명시한 기간이 지난 후 계속 무기를 소지하는 자들은 모두 파시스트로 간주될 것이며 이에 따라 엄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필릭스 마로우, [스페인의 혁명과 반혁명]에서 인용) 이 포고령은 이 정당의 신문 [전투]의 1936년 10월 28일자에 실렸다. 노동자의 무장해제와 노동자 조직의 제거에 자신의 이름을 빌려준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1936년 12월 12일 정부에서 소리도 없이 쫓겨났다. 이 정당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더 나긋나긋했던 무정부주의 전국노동자연합(CNT)은 1937년 7월까지 장관직을 가지고 있다가 역시 같은 꼴을 당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공산당은 공화국 국가기구를 더욱 철저히 장악했다. 인민전선 정부 내에서 공산당은 집요하게 자본가들의 이익을 옹호했다. 1937년 3월 스페인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의 총서기 호세 디아즈는 이 노선을 아주 명확하게 표현했다: "이성을 상실하여 현실을 뛰어 넘으면 안된다. `자유의지 공산주의'(무정부주의)나 공장과 농촌의 `사회화' 실험들은 시도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경과하고 있는 민주주의 혁명 단계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의 참여를 필요로 한다. 위와 같은 실험들은 반파시즘 세력 가운데 아주 중요한 부분을 쫓아낼 수 있다. . . . 대지주들과 산업자본가들이 토지와 공장을 버렸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생산을 계속해야했다. 이 때문에 처음에는 `사회화', `집단화'의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상조의 시도들은 당면 투쟁의 성격을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왔다. 그러나 현재 이 시도들은 정당화될 수 없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이 인민연합 정부에 대표되어 있다. 따라서 이 시도들은 바람직하지 못할 뿐 아니라 결코 허용될 수 없다." --- 코민테른 기관지 [코민테른], 1937년 5월 이 연설을 통해 디아즈는 공산당 주도의 탄압이 임박했음을 불길하게 표현했다. 우선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고립시키려는 명백한 시도를 내비치면서 그는 전국노동자연합/스페인무정부주의연합이 탄압의 대상이라는 보도를 부인했다: "무정부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있을 것이며 누가 누구를 제압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불가피하게 제기될 것이라는 소문을 적들이 퍼뜨리고 있다. 이 소문들을 퍼뜨리는 자들은 우리의 적이며 무정부주의 동지들의 적이다." 그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가차없는 투쟁"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제거가 무엇보다도 우선될 것임을 명백히 표명했다: "우리의 최고의 적은 파시즘이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는 투쟁역량과 인민의 증오심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파시즘의 첩자들, 적의 첩자로써 역할을 다하기 위해 혁명적 언사를 늘고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같은 세력에게 우리는 똑같이 증오의 화살을 날린다. `제 5열'을 파괴시키기 위해 우리는 적의 정치구호를 옹호하는 자들을 제거해야한다. 적의 구호들은 민주공화국에 반대하고 반파시즘 인민전선에 반대하고 인민연합 정부에 반대하고 있다...." 이로부터 2개월이 지난 5월 공산당은 전국노동자연합(CNT)이 점령하고 있던 바르셀로나 전화국에 공격을 개시했다. 전국노동자연합과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투사들이 지도한 수천 명의 무장 노동자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이 도발에 대응했다. 전투 초기에 노동자들은 즉시 대세를 장악했다. 수백 명의 정부 경찰들이 생포되어 무장 해제되었다. 도시의 대부분 지역이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갔다. [랜드 앤드 프리덤]은 이 전투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국노동자연합과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지도부가 공산당의 도발과 노동자들의 저항 모두에 놀라자빠졌다는 사실은 다루지 않고 있다. 두 조직의 지도부는 초기의 우세를 이용하여 정부를 타도하고 노동자들의 직접 통치체제를 회복시키기는커녕 인민전선 정부의 수반 아자냐와 야합했다. 소규모 트로츠키 조직인 [볼세비키-레닌주의 그룹]과 무정부주의 좌파 조직인 [두루티의 친구들]만이 인민전선 정부와의 결별과 노동자 권력의 수립을 촉구했다. 전자는 성명서를 통해 공화국 경찰의 무장해제와 노동자의 무장을 촉구했다. 이들은 이렇게 경고했다: "지금이야말로 결정적인 순간이다. 지금이 지나면 너무 늦을 것이다.... 노동자 권력만이 군사적 승리를 확보할 수 있다." 무정부주의 좌파도 이와 비슷하게 촉구했다. 그러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무정부주의 지도자들은 스스로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 후 귀가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가로 보복조치가 없을 것을 약속하라고 정부에 요구했다. 이로부터 몇 주 내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은 불법화되었고 산하 민병대들은 해체되었다. 중핵들은 체포되었으며 지도자들은 살해되었다(부록을 참조할 것). 공산당의 좌익 탄압은 공화국 정부를 강화시키기는커녕 프랑코의 승리만을 재촉시켰다. 스페인 내전의 결말을 결정지은 핵심 문제는 계급의 이익이었다. 스페인의 지배계급은 처음부터 이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프랑코를 지지했다. 그의 승리는 노동조합의 압살, 좌익의 전멸, 자본주의 지배를 보장하기 위한 군사독재체제의 수립 등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최소한 자신의 미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공화국 정부에게는 이와 같은 계급 이익이 없었다. 인민전선 정부를 장악한 공산당은 노동자와 농촌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훈계했다: 승리한 후 똑같은 자본가들의 "민주적" 지배를 받으며 다시 생활할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싸우시오. 영국의 의회주의 독립노동당(ILP) 지도자 페너 브록웨이는 물론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1937년 6월과 7월 스페인을 방문한 후 그는 이렇게 결론 내렸다: "정부가 혁명 노선에서 후퇴했기 때문에 대중에게 전쟁에 대해 환멸 그리고 심지어는 무관심을 조장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파시즘에 대한 효과적인 전쟁은 사회혁명을 위한 전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스페인의 경험이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열정의 원동력이다. 스페인에 반혁명이 진행되자 프랑코에 대한 투쟁은 그 열기가 식어버렸다." --- "스페인 방문에 대한 개인적 보고서", 등사판 회보, 1937년 [랜드 앤드 프리덤]은 1930년대 중반 스페인이 노동계급 혁명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했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또한 배신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서서히 갖게된 투사들의 혼란을 잘 포착하고 있다. 영화의 절정에서 주인공 데이빗이 소속된 민병대는 공산당에 의해 무장 해제된다. 바로 이 부분이 가장 처절하고 애끓는 장면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전국노동자연합/스페인무정부주의연합의 정치적 굴복에 대해 하나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관객들이 불필요하게 비관적 결론을 내리도록 오도하고 있다. 왜냐하면 정치적 지도력이라는 결정적인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1936년의 스페인의 상황은 노동자들이 승리한 1917년의 러시아보다 훨씬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1936년의 스페인 노동계급은 1917년의 러시아 노동계급보다 사회적 비중이 훨씬 더 컸으며 정치적으로 더 선진적이었다. 더욱이 주로 소부르주아 계급이었던 러시아 농민과는 달리 스페인의 농촌 인구는 대부분 토지가 없는 농촌노동자이거나 반(半)노동자였으며 도시 노동자들과 자신의 이익을 같은 것으로 보았다. 스페인의 대중은 영웅적으로 투쟁했다. 그러나 일관된 혁명 지도력이 없었기 때문에 인민전선을 지지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 공산당, 무정부주의조직, 사회당 연합을 제압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주의 혁명의 시기에 부르주아 계급과 연합하는 것보다 더 큰 범죄는 없다." 인민전선 노선을 수용하는 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을 망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의 승리와 스페인의 패배에서 유일한 차이는 노동운동 좌파의 정치적 지도력의 수준이었다. 볼세비키들은 코르닐로프 장군의 반동 쿠데타에 대항해 계급연합 임시정부의 지도자 케렌스키를 방어했다. 이것은 스페인에서 트로츠키가 프랑코에 대항하여 아자냐를 방어할 것을 촉구한 것과 같았다. 그러나 레닌은 결단코 케렌스키를 정치적으로 지지하지 않았으며 인민전선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익을 옹호했다. 반면 스페인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좌익의 나머지 부분은 고립을 피하기 위해 인민전선 연합정부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과거 자신의 맑스주의 분석 틀을 기회주의 노선과 화해시키기 위해 온갖 희한한 짓을 연출했다. 이것을 영화에서 포착해내기는 누구에게든 어려울 것이다. 최소한 로우치 감독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 진실을 말했다. 이 점에서 그는 높이 인정받을만하다. 스페인 내전이 파시즘의 승리로 끝난 핵심은 바로 공화국 인민전선 진영 내부에 있었다. 이것을 묘사한 점에서 이 영화의 정치적 가치는 매우 높다. 로우치 감독은 인민전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이 현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이런 의미에서 스페인 혁명이 패배한 내막 전체는 언젠가 대중 영화팬들에게 소개되어야한다. 그러나 정치에 대한 절망과 냉소가 만연한 이 시기에 [랜드 앤드 프리덤]은 값진 영화이다. 새로운 세대에게 이 배반당한 혁명의 실현되지 않은 역사적 가능성들을 최소한 심사숙고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부록: `소규모의, 결의에 찬, 잘 조직된'** 찰즈 오어는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영어 잡지 [스페인 혁명]을 편집했던 미국인이었다. 그는 "`공화국' 스페인에서 자행된 외국 혁명가들에 대한 탄압의 몇 가지 사실들"이란 글을 통해 이 정당이 탄압 받던 당시의 경험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기에 그의 글은 한번도 출판된 적이 없다. 여기에 발췌되는 글은 탄압에 직면한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이보다 훨씬 규모가 작았던 [볼세비키-레닌주의 그룹]을 흥미롭게 비교하고 있다. "나와 동지 한 명은 6월 26일 바르셀로나 감옥에서 석방된 이래 계속 이런 질문을 받았다: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과 같은 혁명 정당이 어떻게 그렇게 철저하고 빨리 탄압될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이다. 우선 이 정당의 지하활동에 대한 준비는 한심할 정도로 부족했다. 이 점에서 이 정당은 혁명정당의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 다른 측면에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카탈로니아에서 5월 내내 지속된 혁명의 기회를 이 정당은 전혀 활용하지 못했다. 몇 개월 동안 특히 5월 이후 평당원들은 비합법 활동을 준비할 것을 촉구해왔다. 탄압이 닥칠 것이라는 사실이 눈에 뻔히 보였다. 그러나 안드레스 닌과 집행위원회는 어느 때와 다름없이 낙관론에 차 있었다. 마침내 5명을 한 조로 하는 세포 재조직이 마지못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실무회의는 한번도 소집되지 않았다. 이 보다 더 큰 세포들은 당대회가 끝난 후로 재조직이 계획되었다. 스페인의 정당들처럼 과도하게 중앙 집중화된 조직에서는 당내 개인들과 소그룹들이 지하활동을 면밀하게 준비할 동인이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주요 당기구들과 개인들은 이미 노출되어 있었으면서 이렇다할 걱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수천 명의 혁명적 당원, 수백 개의 세포조직, 수십 개의 신문을 카탈로니아에서 거느리고 있었던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 단지 몇 시간 내에 중앙위원 절반과 집행위원 3분의 2를 잃고 마치 머리가 잘린 닭처럼 무기력하게 허우적거린 이유가 이것으로 일부 설명될 것이다. 탄압 당시까지만 해도 상대적으로 보잘 것 없었던 [볼세비키-레닌주의 그룹]이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의 모든 신문과 당원들보다 인쇄물을 더 효과적으로 제작하고 배포한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려운 상황에서 소규모의 결의에 찬 잘 조직된 그룹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을 모범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탄압이 닥치고 3주일이 지날 때까지 이 소규모 그룹의 조직원은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미리 준비를 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주하는 공간과 조직원의 이름을 계속 바꾸고 동시에 두 집에서 살면서 한 조는 일하고 한 조는 잠자는 등 지하활동에 걸 맞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감옥에서 석방된 후 이 그룹의 지도자를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자랑스럽게 나에게 이런 사실들을 설명해주었다." "6월 16일과 17일의 24시간 사이에 맑스주의통일노동자당이 완전히 와해된 또 하나의 이유는 경찰에게 있었다. 맑스주의 혁명가라면 당연히 예측해야 할 것을 당내의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것이 조직화된 경찰의 탄압 공작이었다. 모든 것이 언제나 엉성한 스페인에서 경찰이 그렇게 효과적으로 당원들을 체포한 경우는 없었다. 사실 탄압을 조직한 것은 스페인 경찰이 아니었다. 소련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이 그 계획과 실행을 지도했다. (감옥에 있을 때 우리는 이 사실을 목격했고 이 점에 대해 서로 얘기를 나누었다.)"
[Spain: War & Revolution](Article in {1917} No.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