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유산

 

 

제1부: 혁명으로 가는 긴 여정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의 멘셰비즘과 볼셰비즘

혁명조직: 새로운 형태의 정당

혁명 강령: 1905년 혁명과 연속혁명

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와 국제주의

러시아혁명과 내전

 

제2부: 러시아혁명의 퇴보

스탈린주의로의 퇴보: ‘일국 사회주의’

중국 혁명의 비극

파시즘의 등장과 독일에서 나치의 승리

 

제3부: 제4인터내셔널의 건설

재결집과 입당전술

인민전선과 스페인혁명

제4인터내셔널: 레닌주의 전위의 재무장

트로츠키의 마지막 투쟁: 10월 혁명 성과의 방어

덧붙임: 트로츠키 사후의 트로츠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내의 멘셰비즘과 볼셰비즘

러시아 맑스주의는 1880년대 초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해방단의 수립으로 시작됐다. 훨씬 널리 받아들여지던 나로디즘(민중주의)과 경쟁하던 노동자해방단은 처음에는 소수의 선진 노동자들에게 선전 작업을 하는 대단히 제한적인 소규모 학습서클이었다. 파업 물결과 대중활동으로의 전환 이후, 1890년대 중반 당세의 확장이 일어났고 노동자해방단의 지도부(이들이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창립의 선봉이었다.)로 알려진 새 세대 맑스주의자들이 들어왔다. 여기에는 레닌, 율리우스 마르토프, 레프 다비도비치 브론슈타인(우크라이나에서 온 젊은 투사이자 훗날 트로츠키라는 가명을 사용한다.)이 포함된다. 국가탄압으로 인해(첫 번째 당대회가 당국에 의해 해산되었다.) 비밀 활동으로 한정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거의 조직으로서 기능하지 못했다. 1900년에 창간된 당 기관지 <이스크라>는 망명자였던 레닌에 의해 편집되었고, 당 지도부의 입장을 선전하고 차르 제국 전역의 당원들을 응집시키고 정치적으로 교육시켰다.

창당 이후 성장해가던 1890년대 후반은 러시아 노동운동 내에서 경제주의라 불리던 경향이 확대되는 시기였다. 이 경향은 세기가 바뀌던 즈음의 독일에서 ‘점진적’ 사회주의를 신봉하던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과 느슨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경제주의는 ‘빵과 버터’를 요구하는 개량을 위한 노동자투쟁에서 사회주의 투쟁과 사회주의 의식이 성장해 나온다고 보았다. 1902년 소책자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이스크라 경향의 편에 서서 ‘사회민주주의 정치를 노동조합주의 정치(예를 들어 노조를 조직하고 노동법을 제정하는 것 등)로 끌어내리는’ 경제주의자들을 공격했다. 사회주의 의식은 노동자의 일상적 경험에서 나오는 것(다시 말해 ‘자생적’인 것)이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이러한 (사회주의)의식은 오직 외부에서 들어올 수 있을 뿐이다. 노동계급은 그 자신의 힘만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의식 즉, 조합으로 단결하여 고용주들과 투쟁하고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이러저러한 법률들을 정부가 제정하도록 하는 등등의 것이 필요하다는 신념만을 마련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나라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이다.”—『무엇을 할 것인가?』

‘외부에서’라는 정식은 일정한 오해를 빚었고 이후 그에 반대하기 위해 쓰이기도 했다. 레닌의 요지는 경제투쟁 그 자체만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당시의 용어로 ‘사회민주주의’) 의식으로 발전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는 혁명정당이 계급투쟁에 참여해 정치적 이해를 끌어올리는 적극적 개입을 필요로 한다. 주류 맑스주의가 ‘엘리트주의’적 편향이라고 말하는 것과 반대로 레닌의 관점은 트로츠키를 비롯한 다른 맑스주의 지도자들과 공유하던 것이었다. 그리고 러시아 당이 속해있던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이데올로기에 전적으로 부합했다.(『레닌과 전위당』을 보시오.)

이러한 정통 이데올로기는 ‘전체 노동계급의 당’으로 표현되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지도적 인사인 카우츠키가 분명하게 주장한) 폭넓고 포괄적인 조직 개념도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투쟁에서 노동계급이 모든 역량을 집중하기 위해서는 모든 나라에서 부르주아 정당들에 대항하여 오직 하나의 사회주의당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노동계급도 하나만 존재하기 때문이다.”—『레닌과 전위당』에서 재인용

사회주의 강령에 기초하여 제2인터내셔널이 창설되고 대부분의 회원들에게 맑스주의가 받아들여졌지만, ‘하나의 계급 하나의 정당’ 개념이 의미하는 바는 노동운동 내부 모든 주요한 정치 경향들을 아우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비록 소부르주아 개량주의가 그 때문에 당에 둥지를 틀더라도 이는 노동계급의 미성숙 때문으로 보았다. 계급의 조직 역량이 발전하고 규모도 커지면, 객관적 조건이 비혁명적 요소의 뿌리를 침식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레닌이 맑스주의 정당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한 것은 당시로서는 모든 맑스주의자들의 통념이었다. 다만 ‘전위’ 개념에 대한 지지는 ‘계급 전체의 당’ 모델과 최종적인 결별에 이를 씨앗을 품고 있었다.

1903년 7~8월 (처음엔 브뤼셀, 다음엔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2차 당대회에서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고참인 플레하노프, 파벨 악셀로드, 베라 자술리치, 알렉산더 포트레소프와 젊은 세대였던 레닌, 마르토프로 이루어진) 이스크라 편집위원회의 지도적 지위를 승인했고, 공식 정치강령과 당원 자격기준을 채택했다. 다수파인 이스크라 경향은 대의원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경제주의자와 유태인노동자연합(차르 제국에서 유태인 노동자들의 유일한 대표자를 자처한 반半민족주의적 조직)도 일부를 차지했다. 2차 당대회는 당의 미래, 나아가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또한 젊은 날의 트로츠키는 이후 10여년을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중대한 정치적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비록 당대회에서는 표면상 통일되어 있었지만, 이스크라 경향은 당원 자격 문제를 놓고 레닌의 ‘강경파’와 마르토프의 ‘온건파’ 두 진영으로 급격하게 분열됐다. 기회주의적 요소를 배제하고 당의 느슨한 학습서클적 습성을 극복하기 위해, ‘당 기구에 직접 참여하는 자’가 당원 자격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레닌은 주장했다. 이와 달리 마르토프는 좀 더 모호하게 ‘당 기구 지도하에 개인적 지원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자’로 규정했다. 겉으로는 사소해 보였지만 훗날 나타나게 될 직업 혁명가의 전위정당과 모두를 포괄하는 개량주의당(현대의 용어로 사회민주주의)이라는 정식의 차이를 미리 보인 것이었다. 이러한 초기의 분열은 양 진영 모두에서 충분히 발전되거나 이해되지 못했다. 레닌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의도는 단지 “말만하는 사람들로부터 활동하는 사람들을 구분하려는 것”이었다.(「당 규약 토론 가운데 두 번째 연설」, 1903년 8월)

마르토프의 제안이 통과되었으나 그를 지지했던 경제주의자, 유태인노동자연합은 그 뒤 조직 관련 문제 때문에 대회에서 철수해 버렸다. 이로 인해 레닌파는 다수파가 되었고 마르토프파는 소수파가 되었다. 그리고 러시아 말로 ‘다수파’(볼셰비키), ‘소수파’(멘셰비키)라는 이름이 붙었다. 레닌은 이스크라 편집위원회의 수를 줄여 볼셰비키 다수파(레닌과 플레하노프)와 멘셰비키인 마르토프로 구성되도록 하자고 제의했다. 존경받던 노장 세대(악셀로드, 자술리치, 포트레소프)를 제외하자는 이 제안은 많은 대의원들의 감정을 상하게 했다. 여기에는 정치 선배들에 대한 정서적 애착을 느끼던 트로츠키도 포함됐다. 레닌의 당원 자격기준에 찬성했었음에도 플레하노프는 결정사항을 취소하고 구 편집위원회 인사들을 복직시켰다. 당대회의 여파로 순전히 조직적 문제로 보이는 일로 인해 당이 분열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항의의 표시로 사임하고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독립적 조직(다수파위원회 사무국)과 신문을 만들고 새로운 당대회를 개최했다. 그래서 당내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레닌은 여전히 ‘계급 전체의 당’ 이론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멘셰비키를 소부르주아 경향으로 보았고 농민이 압도 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의 후진성이 우연히 맑스주의 정당 내에서 표현된 것으로 생각했다.

2차 당대회까지, 트로츠키는 이미 수년간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는 이스크라에 기사를 썼고 런던의 편집위원회와 협업을 했다. 당대회를 몇 달 앞두고서 레닌은 트로츠키를 편집위원회에 선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대회에서 새로운 편집위원 구성에 대한 레닌의 안이 제출되자 트로츠키는 레닌을 ‘대리주의’라는 혐의로 비판하고 공격을 개시했다.

“당내 정책에서 레닌주의 방법론은 당 기구가 당 자체를 대체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기구를 대체하고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체하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트로츠키, 「우리의 정치적 임무」, 1904년

트로츠키가 가했던 레닌에 대한 난폭한 공격은 본질적으로 근거가 없었다. 레닌의 직업 혁명가적(또는 ‘엄격한’) 당원 자격 개념의 논리적 문제를 추론하면서, 논쟁에 참여하던 트로츠키는 부지불식간에, 레닌주의를 10여년 후에 보게 될 그 안티테제인 스탈린주의와 연결시켰다. 볼셰비즘이 승리한 후에 쓴 그의 자서전에서, 이전의 친멘셰비키적 관점의 동기를 트로츠키는 이렇게 설명했다.

“레닌과 나의 결별은 ‘도덕적’ 또는 개인적 이유로 발생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표면적으로만 그랬다. 결국 이 결별은 정치적이었고 단순히 조직 방식의 영역에서 표현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중앙집중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구체제에 대한 전쟁에서 수백만 대중을 지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하고 강압적인 중앙집중주의를 혁명정당이 필요로 할 것인가를 나는 그 당시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 점은 매우 명백하다.“—트로츠키, 『나의 생애』, 1930년

1905년 혁명 당시 페테르부르그 소비에트 의장으로 있던 짧은(하지만 중요한) 기간에 볼셰비키와 가까웠던 것을 제외하면(아래를 보시오), 트로츠키는 2차 당대회부터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는 십 수 년 동안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대단히 쓸모없는 조직을 만들면서 낭비했다. 때로는 멘셰비키에 접근했고 다른 경우에는 바깥에서 양 분파를 통합하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이와 반대로, 같은 시기의 레닌은 강령에 입각해서 강고한 전위당의 중핵을 건설했다. 이후 트로츠키 자신도 동의했던 것처럼, 혁명적 기회가 찾아왔을 때 그 필수불가결함이 입증되었다.

“나는 계급투쟁의 논리에 따라 결국에는 두 분파가 동일한 혁명노선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 당시 레닌의 정책 즉, 진실로 혁명적인 당의 핵심분자들을 결속하고 단련시키기 위해 이데올로기적 비타협성을 고수하고, 필요하다면 분열도 불사하는 그의 정책이 갖는 위대한 역사적 의의가 나에게는 여전히 불명료했었다.”—트로츠키, 『연속혁명』, 1931년

러시아 노동운동 내 인물들과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1914년 7월까지도)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 모두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를 통합시키려 했다. 그러나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은 1912년 프라하 협의회였다. 여기서 레닌은 멘셰비키와 명확하게 결별하고 볼셰비키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라고 선언한다.(<1917> 35호의 「레닌주의: ‘화해할 수 없는 이념적 경계’」를 보시오.)

트로츠키는 여전히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프라하 협의회의 결정을 뒤집기 위해 무원칙한 <8월 연합>을 만들었다. 이 연합은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세력들(초좌익 <전진> 그룹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우익인 멘셰비키, 유태인노동자연합)이 단지 레닌파에 반대하기 위해 결합했을 뿐이었다. 볼셰비키는 트로츠키가 조직한 이 회의에 참가를 거부했고, 전진 그룹은 도중에 퇴장했다. 때문에 이 ‘통합 회의’는 이제 멘셰비키에 의해 장악되었고 분명하게 반(反)볼셰비키적 태도를 취했다.

그는 이후 이를 자신의 가장 큰 정치적 실책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 동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이 동맹을 만들었다. 정치적으로 나는 멘셰비키들과 모든 근본문제들에서 견해를 달리했다. 그리고 나는 초좌익 볼셰비키들인 소환파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일반적 정치경향을 놓고 보자면 나는 볼셰비키들에게 훨씬 더 가까웠다. 그러나 나는 레닌식 ‘조직운영’에 반대했다. 혁명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탄탄히 결집된 중앙집중주의 정당이 필수적이라는 진리를 당시 아직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당의 노동계급 경향에 대항하는 온갖 잡탕들과 일시적 동맹을 만들었다.”

“레닌은 8월 동맹에 대해서 가차 없는 비판을 퍼부었으며 가장 매몰찬 타격은 나에게 가해졌다. 내가 정치적으로 멘셰비키나 소환파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한 나의 정책은 모험주의라는 것을 그는 증명했다. 이 비판은 가혹했으나, 사실이었다.”

“나는 멘셰비즘에 대한 화해주의와 레닌식 중앙집중주의에 대한 불신을 질병으로 가지고 있었다. 8월 대회가 끝난 직후 8월 동맹은 그 구성부분들로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원칙적으로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도 동맹의 바깥에 존재하였다.”—「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맑스주의를 옹호하며』, 1940년

레닌에게 이런 ‘통합’이라는 발상은 좋게 봐야 무의미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파괴적인 것이었다.

“자유주의 노동 정치꾼, 노동계급 운동의 방해꾼, 다수의 의지를 거부하는 자들과는, 연방적이든 아니든, 통합은 있을 수 없다. 일관된 맑스주의자들, 맑스주의 사상을 온전히 지지하고, 깎여나가지 않은 구호들을 지지하는 모든 분자들, 청산주의자들과 단절한 모든 분자들 사이에는 통합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한다.

“통합은 위대한 것이고 위대한 구호이다. 그러나 노동자 운동이 필요한 것은 맑스주의자들의 통합이지 맑스주의를 반대하고 왜곡시키는 자들과 맑스주의자들 사이의 통합이 아니다.”[강조는 원저자]—「통합Unity」, 1914년 4월

프라하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레닌은 공식적으로는 ‘하나의 계급 하나의 정당’이라는 제2인터내셔널 조직이론을 고수했다. 따라서 여전히 멘셰비키를 노동운동 외부의 소부르주아 급진파로 묘사했다. 그의 독자적인 전위당 개념은 아직 완전히 발전되지 않았다. 레닌이 이러한 이해에 중대한 수정을 가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그에 따라 제2인터내셔널이 사회애국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애국주의적 지지)로 미끄러지며 붕괴한 이후였다.

 

혁명조직: 새로운 형태의 정당

레닌이 <전진>(독일사민당 중앙기관지)에서 1914년 8월 4일 독일사민당 의원들이 독일정부의 전쟁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그는 신문이 위조된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독일사민당은 제2인터내셔널의 두에 선 정당이었다. 그리고 이 정당의 지도자들(프리드리히 에베르트, 구스타브 노스케, 필리프 샤이데만)은 확실하게 노동계급 출신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배신은 일탈이 아니었고 제2인터내셔널의 다른 지부들에서도 반복되었다. 노동운동과 관련된 무언가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던 것이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한 계급에 하나의 정당’이라는 조직적 방법론에 내재된 모순들에 맞서야 했다. 그 ‘하나의 정당’에는, 이제 ‘통합’이 불가능한, 제국주의 전쟁에서 자기나라 지배계급을 떠받드는 사회배외주의자들도 있었다. 레닌은 ‘새로운 종류의 정당’이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사회배외주의자들(에베르트, 샤이데만, 노스케)에서부터, 동요 분자들 그리고 사회배외주의자들의 행동을 용인하고 그들과 분명하게 단절하기를 거부한 중앙파(카우츠키)에 이르기까지, 노동계급의 견해에 드리운 모든 [기회주의] 조류로부터 독립하여 튼튼한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들을 토대로 당은 건설되어야 했다.

“세계대전이 초래한 위기는 모든 가려진 비밀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고, 모든 관습들을 날려버렸으며, 그 오랜 동안 절정에 도달해버린 악성종기를 적나라하게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와의 동맹만이 자신의 진정한 역할일 뿐인 이 기회주의의 본모습을 들춰내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과 조직적으로 완전히 단절하는 것은 노동자정당의 시급한 임무가 되었다.…극단이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정당 안에서 기회주의는 ‘허용할 만한 그림자’라는 옛 이론은 이제 노동자에 대한 엄청난 기만이고 노동계급 운동에 심대한 장애가 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즉각 혐오감을 주는 공공연한 기회주의는 이 중용의 이론만큼 무섭거나 해롭지는 않다.…이 이론의 가장 뛰어난 대변자이자 제2인터내셔널에서 지도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카우츠키는 자신이 터무니없는 위선자이며 맑스주의적 매춘 행위의 대가임을 스스로 드러냈다.”—「제2인터내셔널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Second International」 9장, 1915년 5-6월

레닌은 이제 노동운동이 그것을 구성하는 정치적 조류들로 분리되는 것을 옹호했고 (즉, 완전한 조직적 단절) 새로운 (제3)인터내셔널을 호소했으며, 전쟁 이전에 볼셰비키들이 추구하던 정당건설 방법을 일반화할 것을 제안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오랫동안 당의 기회주의자들과 절연해왔다. 게다가 러시아의 기회주의자들은 이제 애국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과의 분열이 사회주의의 이해에 필수적이라는 우리의 입장을 강화할 뿐이다. 우리는 현 정세에서 기회주의자 및 애국주의자들과 결별하는 것이 혁명가들의 주된 의무임을 전적으로 확신한다.…”

“제3인터내셔널이 그러한 혁명적 기초 위에 건설되어야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사회애국주의자들과 절연하는 것이 이로운가 하는 질문은 우리 당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단호하게 답변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당에 존재하는 유일한 질문은 그것을 가까운 미래에 국제적 규모로 성취될 수 있느냐 없느냐이다.”―『사회주의와 전쟁』, 1915년

동시에 레닌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소멸하지 않을 노동운동 내부의 유기적 경향인, 개량주의와 기회주의를 사회학적으로 설명해줄 제국주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었다. 소멸하기는커녕 더욱 견고해진 노동관료주의는 발생하여, ‘자본주의의 경비견’ 역할과 친자본주의 사상을 노동운동 내부로 전달하는 벨트 역할을 했다.

“‘유럽의 노동운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승리한 거대하고 역겨운 기회주의(사회배외주의의 형태를 띤)와 제국주의 사이에 연결고리가 존재하는가?’”

“이것은 현대 사회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리고 우리 당의 문헌을 통해 충분히 설명된 바, 이 질문은 첫째, 우리 시대와 현대 전쟁의 제국주의적 특징 둘째, 사회배외주의와 기회주의 사이 정치사상의 본질적 유사성과 더불어 불가피한 역사적 결합과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는 반드시 이 근본적 질문 분석에 착수해야 한다.”

“…기회주의자들(사회배외주의자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착취의 기초 위에 제국주의 유럽 건설로 나아가는 제국주의 부르주아들과 긴밀히 공조하고 있다. 그리고 객관적으로 볼 때 기회주의자들은, 소부르주아지이거나 제국주의자 초과이윤에 매수되어 자본주의의 경비견으로 전락하고 노동운동을 오염시키는 노동계급 내의 특정계층이다. 우리 당의 글과 결의안들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심오한 연결고리 즉, 노동운동 내에서 승리(오래갈지는 알 수 없지만)를 거둔 기회주의와 제국주의 사이의 경제적 연결고리를 거듭 지적해왔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회배외주의자들과의 분열이 불가피하다고 결론내렸다.”

“제국주의 강대국의 자본가계급은 ‘자국’ 노동계급의 상층부를 경제적으로 매수하기 위해 약 10억 프랑 정도 되는 초과이윤 중 1억 프랑 가량을 지출한다. 그리고 이 뇌물을 ‘노동자 장관’, ‘노동자 대표’(이 단어에 대한 엥겔스의 인상 깊은 분석을 기억하라), ‘군수산업위원회의 노동자 대표’, ‘노동조합 간부’, ‘편협한 직능별 조합에 속한 노동자’ 그리고 ‘사무직 노동자’ 등등이 어떻게 나눠먹는지를 따지는 것은 부차적 문제이다.”

“높은 임금을 받는 정부, 군수산업위원회, 의회, 다양한 위원회와 ‘존경할만한’ 합법신문의 편집부 혹은 경영협의회나 그 못지않게 훌륭하고 부르주아 법을 준수하는 노동조합의 편안한 직장들은,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들이 ‘부르주아 노동자당’ 지지자들과 대표들을 유혹하고 떡고물을 주는 미끼이다.”―「제국주의와 사회주의의 분열Imperialism and the Split in Socialism」, 1916년

볼셰비키 당에 가입한 몇 년 뒤, 트로츠키는 사회배외주의의 기원에 대한 레닌의 분석을 요약했다.

“전쟁기간 동안, 대부분의 선진자본주의국가 노동당들이 자국 부르주아들과 한패임이 드러났다. 레닌은 이러한 경향을 사회배외주의라고 불렀는데 사회주의의 외피를 뒤집어쓴 애국주의를 의미한다. 국제주의에 대한 배반은 하루아침에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은 개량주의자들의 수정주의 정책들이 지속되고 발전됨에 따라 필연적으로 등장했다. 기회주의와 사회배외주의의 이념적 정치적 내용은 동일하다. 계급투쟁이 아닌 계급협조주의, 혁명을 위해 자국정부의 위기를 이용하지 않고 위기에 빠진 정부를 지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차 제국주의 세계전쟁 바로 직전 (1909년~1913년) 자본주의 번영기 때, 노동계급 상층부는 제국주의와 매우 긴밀하게 유착했다. 제국주의 부르주아들이 식민지와 후진국에서 착취한 초과이윤의 일부가 많은 수의 노동귀족과 노동관료들에게 돌아갔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애국주의는 제국주의 정책에 얽힌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사회적 관계들이 폭로된 전쟁기간에 부르주아, 정부 그리고 군사참모부와 동맹을 맺고 있던 기회주의자들과 사회배외주의자들은 거대한 권력을 부여받았다.”

“사회주의 내부에서 중간에 위치해 있고 어쩌면 가장 광범위한 경향은 소위 중도주의(카우츠키 등)이다. 이들은 평화 시기에 맑스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자신들을 평화주의 문구들로 치장하다가 거의 예외 없이 사회배외주의자들의 포로가 되었다. 대중들이 보기에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어 온 기구에 의해 영락없이 속고 당한 것처럼 보였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노동관료제를 사회학적/정치적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 ‘기회주의자와의 통합은 특정국가 노동계급과 부르주아지의 동맹이고, 그것은 혁명적인 전세계 노동계급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국제주의자들은 사회배외주의자들과 단절해야 한다. 기회주의나 중도주의 같은 사회주의 내 부르주아 경향과의 단호한 단절 없이 현 사회주의의 과업들을 충족시키고 진정한 전 세계 노동계급의 단결을 이뤄낼 수 없다. 당명(사회민주당)은 바뀌어야만 한다. 이제 더럽혀지고 가치가 떨어진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을 버리고 공산주의자라는 옛 맑스주의자들의 이름을 사용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이제 제2인터내셔널과 단절하고 3번째 인터내셔널을 세울 때가 되었다.”—「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사상Lenin on Imperialism」, 1939년

1917년 러시아 혁명이 한창일 때 트로츠키는 볼셰비키 당에 입당했고 곧바로 당 최고지도자들 중 한명이 되었다. 이전에 자신을 ‘대리주의’라고 비난한 정치적 적수였던 트로츠키에 대해, 입당한 이후 “더 뛰어난 볼셰비키는 없었다.”라고 레닌이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러시아 볼셰비키당(공산당)의 다른 지도자들은 191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3인터내셔널을 창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이는 ‘사회주의 내 부르주아적 경향’과 절연하기 위한 중요한 진전이었다.

혁명정당은 혁명가의 의식적 개입으로부터 분리된 계급투쟁의 ‘객관적 과정’을 통해 반자동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맑스주의 강령에 바탕을 둔 중핵들의 정치적 발전과 그들의 능동적 계급투쟁 참여를 통해서만 건설 수 있다. 혁명전위의 결집과 노동계급 내부에서 전위의 영향력 확대(궁극적으로 노동계급 대다수를 영향력 안에 넣기 위해서)는 개량주의와 중도주의에 맞선 가차 없는 정치적 투쟁을 통해 이루어진다. 트로츠키가 그들을 화해시킬 길을 모색하고 있던 1903년부터 1917년까지, 레닌은 바로 그 투쟁을 수행했다. 트로츠키 제자 중 한 명은 이후에 그 점을 간명하게 정리했다.

“그가 레닌과 결합하기 전에 인식하고 극복해야 했던, 트로츠키의 가장 커다란 잘못은 그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레닌 정책의 올바름은 실천적으로 입증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그의 탁월한 능력과 재능으로도 이뤄내지 못했고, 그가 가졌던 멘셰비키에 대한 잘못된 평가 때문에 트로츠키가 이뤄낼 수 없었던 당 건설을 레닌은 해냈다.”—「색트먼주의자들과의 통합에 대하여On ‘Unity with the Shachtmanites’」, 제임스 캐넌,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내부회보, 1945년 8월

‘맑스주의자들의 통합’을 상징하는 당은 순수하게 혁명적 강령에 기초해서만 건설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1917년 혁명 이전 러시아에 대한 트로츠키의 정치적 분석은 볼셰비키들보다 뒤쳐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보다 앞서 있었다.

 

혁명 강령: 1905년 혁명과 연속혁명

20세기로 접어드는 무렵의 차르 러시아는 인구 대다수가 소규모 농업에 고용되어 일하는 후진국이었다. 1861년 농노제 폐지로 대다수 농민들이 지주에 대한 농노적 처지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지주에게 빚을 갚아야 하는 처지였고 다양한 형태의 봉건적 초과 착취가 남아있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 대다수가 파산했고, 땅을 팔고 도시로 떠나야했으며, 그곳에서 막 형성되기 시작한 산업 프롤레타리아의 일부가 되었다. 임금은 박했고 노동일은 길었다. 작업 현장의 규율은 총격과 매질로 유지되었다. 파업과 노동조합은 불법이었고, 노조를 조직하면 감옥에 갇히거나 유배되었다. 차르 제정은 독재정권임을 숨기지 않았고, 정치적 반대자를 옥죄었다. 혹심한 계급 착취에 더해, 차르의 ‘민족의 감옥prison house of peoples’은 민족 억압의 장이었다. (폴란드, 핀란드,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사람 등) 러시아인이 아닌 거주자가 절반이 넘었다.

봉건사회의 잔재가 여전한 후진국 러시아는 한편으로는 대단히 현대적인 산업부문과 결합되었다. (옷감, 기관차, 무기 등) 다양한의 상품과 산업물품을 생산해 내었다. 1908년에, 러시아 노동자 전체의 40% 이상이 1,000명 이상을 고용하는 대규모기업에서 일하고 있었고,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산업지역에서는 그 수가 각각 44%, 57%나 되었다. 이 수치는 미국, 영국, 독일보다 높은 것이었다.

차르 러시아는 이질적 요소가 결합된 나라였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제국 가운데 하나였지만, 동시에, 유럽의 보다 산업화된 제국주의 열강들의 반(半)예속 국가였다.’ 트로츠키는 러시아의 이 특수한 ‘불균등결합’ 발전을 그의 눈부신 저작 『러시아 혁명사』의 첫 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러시아 역사의 근본적이면서도 가장 일관된 특징은 사회 발전의 느린 속도이다. 이 결과가 경제의 후진성, 사회형태의 원시성, 문화수준의 낙후성으로 나타났다.

“후진국은 선진국의 물질적 지적 성과를 흡수한다. 그러나 이 성과를 노예처럼 비굴하게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또한 선진국의 모든 발전 단계들을 그대로 반복하지도 않는다.”

“역사의 법칙은 현학자의 도식과는 전혀 무관하다. 발전의 불균등성은 역사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의 역사발전에 가장 날카롭고 복잡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외세의 압력에 직면하여 후진국의 문화는 도약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보편 법칙인 발전의 불균등성에서 결합발전(combined development) 법칙이라고 부를 수 있는 또 다른 법칙이 따라 나온다. 즉, 역사의 각 단계들이 겹치게 되면서 현대적인 형태들이 낡은 형태들과 섞인다. 구체적인 사례 전체 속에 관통하는 이 법칙을 흡수하지 못하면, 러시아 또는 이류, 삼류 아니 십류 문화국의 어떤 역사도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경제분야에서 결합발전 법칙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혁명 직전까지 러시아 농민의 토지경작은 일반적으로 17세기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공업은 기술과 자본주의적 구조 측면에서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선진국들을 추월했다.…”

“공업자본과 은행자본의 결합 수준도 역시 러시아가 가장 높았다. 그리고 은행자본이 공업자본을 지배하듯이 서유럽 자본시장은 러시아 공업자본을 지배했다. 금속, 석탄, 석유 등 중공업은 거의 전부 외국 금융자본의 손안에 있었다. 한편 외국 금융자본은 자기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러시아에 종속적인 중간단계 은행들을 탄생시켰다. 경공업도 같은 처지였다. 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러시아 주식의 약 40%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업의 주요부문들에서 이 비율은 더 높았다. 과장이 전혀 없이 러시아의 은행, 공장, 생산설비의 지배적인 주식은 해외에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벨기에는 독일에 비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러시아 주식을 손에 넣고 있었다.”―『러시아 혁명사』, 1930년

러시아의 이와 같은 성격은 1905년 중대한 사건 이후 ‘연속혁명’ 이론을 발전시키도록 트로츠키를 이끌었다. 그리고 그 강령은 1917년 10월에 볼셰비키가 실천에 옮긴 그것이었다.

트로츠키가 나중에 1917년 2월과 10월 혁명의 서막이었다고 말한 1905년 혁명은 차르 군대가 일본에 패배한 이후 발생했다. 1905년 1월 9일, 페테르부르크에 수십 만 명이 모여 8시간 노동을 요구했다. 정권은 수백 명의 시위대를 쓰러뜨리는 발포로 응답했다. 이 ‘피의 일요일’ 학살은 분노를 폭발시켰고, 농민이 지주를 공격하고, 육군과 해군에서 항명폭동이 일어나고, 총파업이 조직되고 모스크바에서는 무장 폭동이 시도되었다.

혁명은 소비에트(즉, 노동자평의회)를 탄생시켰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였고, 1905년 10월 총파업을 조직하기 위해 구성된 것이었다. 일정하게 자생적으로 나타난 이 소비에트는 노동계급의 모든 요소를 끌어안는 대중적 기구였다. 정치적으로 단일하지 않았기 때문에 광범위한 사안에 대해 각종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것은 노동자국가의 권력 형태가 되었다.

“소비에트는 노동대중을 조직하여 정치파업과 시위를 이끌었고, 노동자들을 무장시켰으며, 소수인종 학살로부터 인민들을 보호했다.…한편으로는 노동자 자신이 다른 한편으로는 반동 언론이 소비에트에 붙인 ‘노동자정부’라는 이름은 소비에트가 실제로 노동자정부의 맹아라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처음부터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이었고, 그 목표는 혁명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었다.”—『1905년』 중 제22장 요약, 트로츠키, 1907년

트로츠키가 러시아로 귀국한 직후인 1905년 10월, 그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1월에는 의장이 되었다. 볼셰비키는 소비에트에 참가하기를 처음에는 꺼렸고, 그로 인해 트로츠키라는 가장 두드러진 발언자를 갖는 등, 멘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끌어안는 소비에트의 성격과 전투적 대중행동의 분출은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협력하도록 강제했고, 지역 수준에서는 통합하는 경우도 있었다.

1905년 12월 초,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가 차르 정부에 대한 빚 갚기를 거부하자, 정부는 소비에트를 해산하고 지도부를 체포했다. 1906년 10월 트로츠키는 두 번째로 시베리아 유형 선고를 받았다.

차르 정부는 억압과 더불어 정치적 양보를 통해 혁명적 격동을 견뎌내었다. 헌법이 승인되었고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다. 외국은행에서 꾼 돈으로 차르 정부는, 결국 해산된, (‘두마’라고 불린) 의회로부터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었다.

1905년의 여파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3개 진영으로 나뉘었다. 러시아는 자본주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고 믿는 멘셰비키,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를 전망하는 볼셰비키,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 혁명이 당면 과제라는 ‘연속혁명’론을 제기하는 트로츠키가 그들이었다.

러시아 노동계급은 권력을 잡기에 너무 왜소하므로 그렇게 하려는 모든 시도는 치명적 실수라고 멘셰비키는 여겼다. 대신에 사회주의로 가는 ‘두 단계’ 중 첫 과정으로서 부르주아 자유주의 분파와의 전략적 동맹(즉, 정치적 종속)을 구상했다.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그리고 대부분의 멘셰비키 지도자들에게, 당면 혁명의 성격을 부르주아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사회주의라는 붉은 유령으로 부르주아계급을 겁줘서 그들이 반동진영으로 내빼는 것을 예방한다는 점에 의의가 있었다. 1906년의 통합대회에서 멘셰비키 주요 책략가인 악셀로드는 “러시아의 사회관계는 단지 부르주아혁명에 적합한 정도로 성숙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정치권리 일반이 박탈된 우리의 현실에서, 정치권력을 둘러싼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이의 직접적 전투는 언급조차 할 수 없다.…프롤레타리아는 부르주아적 발전 조건을 위해 싸우고 있다. 객관적인 역사적 조건은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공동의 적에 맞선 투쟁에서 부르주아계급과 협력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었다.” 이리하여 러시아혁명의 내용은 부르주아계급 자유주의 분파의 이익과 입장에 모순되지 않는 변화 정도로 제한되었다.”—「러시아 혁명에 대한 세 가지 사상」, 트로츠키, 1940년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민주주의 독재’라는 레닌의 사상은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레닌은, 1789년 프랑스 부르주아지와 달리, 러시아 부르주아지가 끝장을 보려는 혁명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얼버무리고 우물쭈물하며 독재 권력과 동맹을 맺을 기회를 엿본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노동자와 동맹한 농민은 차르 전제를 혁명적으로 타도하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차르의 타도는 급속한 자본주의적 경제발전을 촉발할 것이고 사회주의 혁명의 기초를 닦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맑스주의자들은 러시아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격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고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러시아에서 불가피해진 정치체제의 민주주의적 개혁과 사회/경제의 개혁이 그 자체로 자본주의의 토대 침식, 부르주아 지배의 토대침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반대로 그 개혁들은, 폭넓고도 급속한 그리고 유럽적이며 비아시아적인 자본주의 발전의 토대를 처음으로 확실하게 닦아놓을 것이며, 부르주아지가 하나의 계급으로서 지배하는 일을 처음으로 가능하도록 만들 것이다.”

“우리는 어떤 현실적 사회세력들이 (누구나 완전히 알 수 있는 현실적 세력인) ‘차리즘’과 적대하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 ‘결정적 승리’를 거둘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 철저하게 확신하고 있어야 한다. 대부르주아지, 지주, 공장 소유주 그리고 <해방>지의 지도를 따르는 ‘사회’는 그러한 세력이 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결정적인 승리를 원하지조차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계급적 위치로 인하여 차리즘에 대한 결정적 투쟁을 수행할 수 없으며, 그들은 사유재산, 자본, 토지 등에 심하게 얽매어 있어서 결정적 투쟁으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 또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차리즘 파괴를 원하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에 대항하여 사용되는 관료제, 경찰, 군대 등을 지닌 차리즘을 또한 몹시 필요로 한다. 우리가 주요하고 커다란 세력을 차지하고, 또한 ‘인민’의 부분인 지방과 도시지역의 소부르주아지를 농민과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 배치한다면, ‘차리즘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인민 즉, 프롤레타리아트요, 농민인 것이다. ‘차리즘에 대하여 결정적으로 승리한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 혁명적 민주독재를 확립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

레닌의 혁명적 노동계급과 농민의 ‘민주적’ 통치라는 생각은 추상적이고, 그것과 국제 사회주의 혁명과의 연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나중에 이렇게 지적했다.

“헌법개정보다는 농업혁명을 당면한 혁명의 중심과제로 제기하고, 그 과제를 완수할 수 있는 사회세력들의 유일하고 현실적인 결합을 지적한다는 점에서 레닌의 혁명사상은 실제로 거대한 진전이었다. 그렇지만 레닌의 혁명사상이 갖고 있는 약점은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모순적 개념 자체에 있었다. 레닌 자신이 그것을 공공연하게 부르주아적인 것으로 여겼을 때, 이미 이 ‘독재’의 기본적 한계가 강조된 것이다. 결국 그는, 노동계급이 농민과의 단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일어나려 할 때, 사회주의적 과제 제기는 자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려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게급으로 하여금 자신의 독재를 포기하라는 의미였다.”—「러시아 혁명에 대한 세 가지 사상」

연속혁명 강령은 농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이, 한편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첫 단계를 착수하면서, (차르 독재를 분쇄하고 대토지 소유주를 몰수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속혁명의 전망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러시아 민주주의혁명의 완전한 승리는 오직 농민의 지지를 받는 노동계급 독재 외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보장되지 않는다. 노동계급독재는 불가피하게 민주주의적 과제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적 과제까지도 일정에 올릴 것이고, 그것은 동시에, 세계 사회주의혁명에 강력한 자극을 줄 것이다. 서구 노동계급의 승리만이 부르주아적 복고로부터 러시아를 지켜줄 수 있다. 그것만이 러시아의 사회주의를 완전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증할 것이다.’”—같은 글

‘러시아 부르주아지는 너무 허약하여 민주적 과제를 완수할 수 없다. 농민은 독립적으로 행동할 능력이 없다. 노동계급의 차리즘 타도는 국제 사회주의 혁명의 장을 열어낼 것이다.’ 등 트로츠키 연속혁명론 핵심 사상들의 정당성은 “1905년에 입증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지, 그 혁명이 더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노동자와 농민의 봉기는 제한적이었다. 그로부터 10여년 뒤에 볼셰비키가 노동자를 지도하여 권력을 장악했던 1917년 10월에 연속혁명론은 입증되었다.

 

1차 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와 국제주의

1차 대전 발발 이전, 공식적으로 제2인터내셔널은 국제주의와 노동계급 단결의 원칙에 서 있었다. 1889년 창립총회는 전쟁은 계급 사회의 산물이고 사회주의가 자본주의를 대체하기 이전까지 존재하게 된다고 천명했다. 그 총회는 또한 상비군을 해체하고 무장한 인민들로 구성된 전투조직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7년 제2인터내셔널은 레닌과 독일 사민당 좌파의 지도적 인물 로자 룩셈부르크가 기초한 <군국주의와 국제 갈등에 대한 슈투트가르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그것을 즉각 종식시키고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전쟁으로 조성된 정치경제적 위기를 이용하고 그리하여 자본주의 질서 종식을 촉진하는 것이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의 임무이다.”

제2인터내셔널이 1912년에 채택한 <바젤선언>은 이러한 취지를 재확인하고 사회주의자가 그들이 속한 나라 제국주의 통치자들 편에 선다는 생각을 비난하였다.

“프롤레타리아는 자본주의 이윤 추구를 위해, 왕조의 야망을 위해, 비밀 외교협약에 의한 그 이해의 도구가 되어 서로를 향해 총질하는 것을 범죄로 규정한다.”

1914년 7월 25일, 독일사민당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동지들! 평화에 대한 독일 노동계급의 확고한 의지를 대중집회에서 지체 없이 표현하라…. 평화 시에 여러분 입에 재갈을 물리고 여러분을 경멸하고 착취하는 지배계급은, 전쟁 시에는 여러분을 대포밥으로 만들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모든 곳에서 이런 구호를 들어야한다: ‘우리는 전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전쟁을 끝장내자! 세계 인민의 국제 형제자매애 만세!’”―『레닌과 전위당』에서 인용

10일 후인 1914년 8월 4일, 제2인터내셔널의 프랑스와 독일지부 의원단은 노동계급 단결에 대한 겉치레마저 던져버리고, 전쟁공채에 찬성하고 그들 통치자의 제국주의 야욕을 승인해주었다. 프랑스 개량주의자들은 전쟁에 대한 그들의 지지를 독일 군국주의에 맞서 그들의 “공화국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편 독일 쪽에서는, 독일이 전쟁에서 지게 되면 사회주의 운동이 지금까지 성취한 (노동조합, 여러 종의 당 언론매체와 출판물, 의원단 등) 모든 성과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1907년 시베리아로 유배 가는 도중에 탈출한 트로츠키는, 비엔나로 갔다. 1914년 8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러시아와 전쟁에 돌입하자 러시아 망명자인 그는 비엔나를 떠나 중립국인 스위스로 가야했다. 스위스에서 그는 『전쟁과 인터내셔널』(1914)을 썼다.

“자본주의는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물적 기초를 창조한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들을 가장 혼돈스런 상태로 끌고 간다. 1914년 전쟁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의 길에 오르라고 폭력적으로 재촉하는 방식으로, 이 혼돈이 어디에 다다를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노동계급,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낡아빠진, 경제발전의 주요 장애물이 되어버린, 이른바 ‘조국’을 방어해야 할 이유가 없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는 보다 강력한 저항을 통해 보다 강력한 조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세계연방공화국의 기초로서 유럽연방공화국 건설이 그것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는 비극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무지하거나 비겁한 자이다.”

“체계적으로 작업하기에는 좋지 않는 조건에서, 아주 급하게 이 책을 썼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낡은 인터내셔널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책 전체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마음속에 새로운 인터내셔널이라는 생각을 품고 쓴 것이다. 새 인터내셔널은 현재의 세계 격변 속에서, 마지막 전쟁에서 최종의 승리를 일굴 인터내셔널이다.”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트로츠키의 관점은 레닌의 ‘혁명적 패전주의’라는 반제국주의 노선과 같은 것이었다.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면서 레닌은,

“현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승리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이기지도 않고 지지도 않기’ 구호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비슷한 규모로 사회국수주의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혁명계급은, 반동적 전쟁에서 자국 정부의 패배를 원할 수밖에 없으며, 후자의 군사적 패퇴는 그것의 타도를 용이하게 할 것이다. 정부에 의해 시작된 전쟁은 반드시 정부 간의 전쟁으로 끝나야 한다고 믿고, 또한 그처럼 끝나기를 바라는 부르주아만이 ‘자국’ 정부가 패배하기를 바라는 모든 교전국 사회주의자들의 바람을 ‘우스운’ 그리고 ‘터무니없는’ 짓거리로 간주할 수 있다. 반대로 계급의식을 가진 모든 노동자들이 가진 소중한 사상과 일치하고,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바꿔내기 위한 우리 활동에 어울리는 전술이 바로 그것이다.”

“영국과 독일, 러시아의 일부 사회주의자들에게 지도받고 있는 신중한 반전 선동은 의심할 것도 없이 각국 정부의 ‘군사력을 약화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자들의 체면유지에 그치고 있다. 사회주의자들은 ‘자국’ 정부를 혁명적으로 타도하지 않고서는 어떤 다른 구원의 길도 없다는 것을 대중에게 설명해야 하며, 현 전쟁에서 그런 목적을 위해 정부가 처해 있는 난관을 정확히 이용해야 한다.”―『사회주의와 전쟁』 1장, 1915년

제국주의 교전국들이 ‘방어를 위한 전쟁’을 수행하고 있다는 사회국수주의자들의 주장을 레닌은 비난했다. 그는 또한 식민지나 반식민지가 제국주의 열강에 침략당할 때, 맑스주의자는 제국주의 패배와 예속국가의 군사적 승리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만약 내일, 모로코가 프랑스에 대해, 인도가 영국에 대해, 페르시아나 중국이 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면, 선제공격을 누가 했는가에 관계없이, 그 전쟁은 ‘정당’하고 ‘방어적’인 것이다.”―같은 책

1915년 9월, 유럽 전체의 좌파 사회주의 지도자들 소수가 스위스 치머발트Zimmerwald에 모여 제2인터내셔널 지도부의 사회국수주의를 비난하고 노동계급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한편으로 레닌의 혁명적 패전주의 입장을 채택하지 않았지만, 치머발트선언은 전쟁에 참가한 열강들의 전쟁 목표와 제국주의 학살을 비난하고, “병합과 배상 없는 평화를 위한 투쟁”을 호소하고,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어올리고 “노동계급의 가차 없는 투쟁”에 돌입할 것을 노동자들에게 촉구했다.

(트로츠키, 마르토프, 악셀로드 등을 포함하여) 선언에 참여한 서명자들이 여러 사안에 대해 중요한 정치적 차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언은 국제주의라는 맑스주의 원칙을 재확인했다. 한계에도 불구하고 볼셰비키 대표단은 치머발트 운동이 새로운 혁명적 인터내셔널을 향한 의미 있는 걸음이라고 간주했다.

제국주의에 대항한 식민지와 반식민지의 혁명적 방어라는 레닌의 정책은 이후 제3(또는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이 채택하였다. 1920년에 열린 코민테른 2차 총회는 레닌이 작성한 ‘21개 가입 조항’을 채택하였다. 그 중 일부는,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자 하는 당은 반드시 ‘자기’ 나라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정책을 가차 없이 폭로해야 한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모든 식민지 해방운동을 지지해야 하고, 식민지로부터 제국주의자들의 축출을 요구하고, 식민지와 피억압국가 노동인민에 대한 진정한 연대의식을 자국 노동자의 심장에 심어주어야 하며, 식민지 인민에 가해지는 모든 억압에 맞선 무장세력 속에서 체계적인 선동을 수행해야 한다.”—「코민테른 가입조항」, 1920년 7월

국제주의, 반(反)제국주의, 연속혁명은 레닌과 트로츠키가 지도하는 볼셰비키가 러시아 노동계급을 이끌고 1917년 10월 권력 장악으로 나아가게 한 핵심노선이다.

 

러시아혁명과 내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1917년 10월 혁명은 노동계급이 자본주의를 성공적으로 전복하고,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자를 위해 복무하는 국가권력을 수립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러시아 노동자와 빈농 대다수의 지지를 획득할 정치역량을 가진 혁명정당의 개입이 성공의 비결이었다.

1905년의 ‘최종 예행연습’처럼, 10월 혁명은 차르 제정의 군사적 패배로 조성된 정세에 기초한 것이었다. 1914년 상반기 동안, 수백만의 노동자들은 여러 건의 불법 파업에 참가했었다. 러시아가 전쟁에 뛰어든 요인 가운데 하나는 지배계급 가운데에서 그 전쟁으로 민족주의가 솟구쳐 나라를 단결시키고 노동계급의 저항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전쟁이 개시되자, 러시아엔 실제로 애국주의 열기가 솟구쳤다. 다른 나라에서도 사정은 같았다. 좌익 상당수는 그에 압도되었고 전쟁을 지지했다. 한편, 처음부터 전쟁 참여에 반대한, 그보다 더 왼쪽의 조직들은 지지자가 급감했다. 한때 볼셰비키를 지지했던 이웃들과 노동조합 지부들, 작업 현장이 그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사상자가 쌓이고 경제가 망가지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1917년 즈음, 러시아 군대 1천5백만 병사 중 1천만 명이 포로가 되거나 중상을 입거나 죽거나 했다. 1917년 2월 23일 국제여성의 날 이후 며칠 동안, 시위대들은 ‘빵!’ ‘독재타도!’ ‘전쟁종식!’을 외쳤다(『러시아 혁명사』 7장의 ‘5일간’을 볼 것). 페트로그라드(페테르부르크) 경찰이 시위대에 총격을 가하자, 노동자들은 1905년의 경험을 좇아 소비에트를 수립하였다. 2월 26일 차르가 페트로그라드 군대에 봉기 진압을 명령했을 때, 병사들은 그 명령을 거부하고 시위대열에 합류했다. 차르는 퇴위하였고, 정권은 붕괴했다.

다양한 자본가 정당과 ‘온건파 사회주의자’(즉, 친자본주의 개량주의자)의 대표들로 구성된 임시정부가 권력의 공백 속에 들어섰다. (대안 정부기구의 맹아) 소비에트 옆에 나란히 이 부르주아 기구가 수립되자 ‘이중권력’이라는 불안정한 정세가 조성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혁명의 정치기제는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것이다. 무력을 동반한 권력의 타도는 보통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어떤 계급도 하룻밤 사이에 심지어는 하룻밤 혁명으로 피지배계급에서 지배계급으로 격상되지는 않는다. 이 계급은 혁명 이전부터 구 지배계급에 대해 대단히 독립적인 태도를 확립하고 있어야 한다. 나아가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독자적 역할을 할 수 없는 중간계급 계층들의 희망을 자신에 집중시켜야 한다.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도록 부름 받은 계급은 혁명 직전의 시기에, 사회의 주인은 아니지만 국가권력의 상당 부분을 이미 장악하고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혁명이 준비된다. 물론 이때 공식 국가기구는 여전히 구 지배계급 손아귀에 있다. 이것이 모든 혁명에서 나타나는 이중권력의 초기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중권력의 유일한 형태는 아니다. 자신이 원치 않았던 혁명으로 권력에 올라선 새로운 계급이 실제로는 이미 낡은 그래서 역사적으로 시효가 지난 계급이라면, 이 결과 이 계급이 공식적으로 권력을 넘겨받기도 전에 벌써 새로운 과제를 해결할 능력을 상실한 계급이라면, 이 계급이 권력으로 밀려 올라간 순간, 충분히 성숙하여 권력을 도모하는 적대계급과 마주칠 수 있다. 이때는 불안정한 이중권력보다 더 불안한 권력이 정치혁명으로 수립된다. 이중권력의 ‘무정부 상태’를 새로운 단계마다 극복하는 것이 혁명의 또는 반혁명의 과제이다.”―『러시아 혁명사』, 11장 ‘이중권력

러시아의 군사동맹들로부터 공식 승인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는 대중적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다. 평민 대중 내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지고 있던 소비에트는 공식 국가기구를 가지고 있지 못했고, 유산계급 엘리트들이 불신했다.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그에 충성을 맹세한 개량주의 좌익 정당들이 소비에트에 지배적이라는 사실로 인해 이 모순은 가려져 있었다.

레닌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정식 내에서 활동하고 차르의 타도 이후 부르주아민주주의 통치 기간이 열릴 것이라고 전망한 볼셰비키당은 2월 혁명 직후 방향을 상실했다. 1905년 모든 볼셰비키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자당 3차 총회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미리 정확하게 단정할 수 없는 역관계와 다른 요인들에 기초하여, 우리 당의 대표들이 임시혁명정부에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서 모든 반혁명 시도들에 대항하여 가차 없이 투쟁하고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해를 옹호할 것이다.”—『레닌과 전위당』에서 인용, 글쓴이 강조

1917년 2월의 사건들을 통해 레닌은 이 전망을 조정했고, 빈농의 지지를 업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트로츠키 연속혁명론의 정치적 핵심 수용을 의미한다.

1917년 4월 초, 망명에서 돌아온 직후 레닌은 당시 볼셰비키 지도부였던 스탈린과 카메네프가 추구하던 노선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당면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임무(일명 ‘4월 테제’)」를 발표했다. 1917년 3월 스탈린의 다음과 같은 설명처럼, 임시정부를 조건부로 지지한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였다.

“…사실 임시정부는 혁명 인민이 성취한 것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현 상황에 압력을 가해, 언젠가 우리 손에 끌어내려질 부르주아 요인들을 배제하는 작업을 촉진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우리의 일이 아니다. 중간층 부르주아 집단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여 시간을 버는 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임시정부가 혁명 과정을 강화하는 한, 그 정도만큼 반드시 우리는 지지해야 한다. 그러나 혁명을 막아선다면, 임시정부 지지는 허용될 수 없다.”—「1917년 3월 총회 (1부)」, 트로츠키의 『날조를 일삼는 스탈린일당』에서 인용

이 입장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레닌의 「4월 테제」는 천명했다.

“임시정부를 결코 지지해서는 안 된다. 임시정부의 모든 약속이 전적으로 거짓임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이 정부, 자본가들의 정부가 제국주의 정부이기를 그만 둘 것이라는, 허용될 수 없는 환상을 낳는 ‘요구’ 대신에 폭로를.”

“노동자 대표단의 소비에트가 혁명정부로서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점을 대중에게 설명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권력 전체가 노동자 대표단의 소비에트로 이전되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알려야 한다.”—「4월 테제」

며칠 후 레닌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를 분명히 폐기했다.

“이 정식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다. 사태는 그것을 정식의 영역에서 현실의 영역으로 옮겨놓았고 그것에 살과 뼈를 입혔으며 구체화시켰고 그리하여 그것을 수정했다.”

“지금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만을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시대에 뒤처져 있으며, 결과적으로 그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투쟁에 반대하여 소부르주아 진영으로 실제로 넘어간 꼴이며, 그런 사람은 혁명 이전의 ‘볼셰비키’ 골동품 보관소(‘옛 볼셰비키들’의 보관소라고 불러도 무방하다)에 위탁되어야 한다.”—「전술에 관한 편지들」

레닌의 강력한 정치적 권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볼셰비키 간부들은 그의 정책을 종파주의적인 것으로 취급하였다. 오직 몇 주에 걸친 치열한 정치투쟁 이후에야 레닌은, 4월말에 열린 볼셰비키 총회에서 다수의 대의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 정치적 재무장은 10월의 승리로 가는 길목에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이후 몇 개월 동안 해결되어야 할 중요 문제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4월 테제」의 수용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가는 전략적 항로가 설정되었다.

임시정부는 노동자 농민의 요구뿐만 아니라 대지주와 자본가들의 요구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이 얼마 안 가서 확인되었다. 인민들은 점점 더 러시아의 ‘이중권력’ 체제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 조만간 오른쪽으로 급격하게 이동하여 소비에트와 반항적인 노동운동을 쓸어버리는 군사독재가 수립되든지, 왼쪽으로 결정적으로 움직여 임시정부를 들어내고 그 자리에 노동계급 통치를 수립하든지 해야 했다. 중간 지대가 사라지자, 심화되는 사회양극화는 한편으로는 볼셰비키 다른 한편으로는 군부의 반혁명분자들을 강화시켰다.

레닌의 「4월 테제」와 임시정부에 대한 화해 불가능한 반대 정책은 결정적 문제를 두고 트로츠키와 볼셰비키 사이의 정치적 거리를 좁혔다. 5월에 러시아로 돌아온 트로츠키는, 공식적으로는 멘셰비키와 볼셰비키의 중간적 입장을 취한 소수의 메즈라욘치Mezhrayontsy그룹[‘지역 사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제국주의 전쟁과 임시정부를 국제주의 관점에서 반대한 조직. 1917년 8월 볼셰비키당과 통합. 이 그룹의 신문 이름은 <전진>]에 소속되어 페트로그라드에서 활동했지만, 볼셰비키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나의 입당이 3개월 동안 지연된 까닭은 메즈라욘치그룹 최상의 분자들 그리고 혁명적 국제주의자들 전체를 볼셰비키와의 통합에 참여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라고 설명했다(『10월 혁명의 교훈』, 1924년). 1917년 7월 통합협상이 성사되었다.

1917년 7월 임시정부 수반이던 자칭 ‘사회주의자’ 알렉산더 케렌스키는, 이전에 약속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공격을 감행했고, 이는 곧 심대한 패배로 귀결되었다. 이 패배는 그나마 있던 전쟁지지 정서를 파괴했고,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대중의 극적인 좌선회를 낳았다.

7월,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대규모 무장 시위로 페트로그라드가 들썩거렸다. 시위를 주도한 수병, 병사, 노동자들은 임시정부의 즉각 타도를 원했다. 좌익적 저항을 촉구하던 볼셰비키였지만 봉기는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왜냐 하면 모스크바를 포함하여 수도를 벗어난 곳에서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개량주의자들이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쉽게 고립될 것이고 유혈 낭자한 패배로 끝날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 폭동군중이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케렌스키가 반격을 가했다. 볼셰비키는 불법화되고 레닌과 지노비예프는 체포를 피해 핀란드로 몸을 숨기고, 카메네프와 트로츠키는 감옥에 갇혔다. 케렌스키는 극우 군주주의자인 코르닐로프를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코르닐로프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즉시 케렌스키 제거 음모를 꾸몄고, 그 시도가 드러나자 파면되었다. 그러자 그는 그의 군대를 동원하여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했다.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노동운동을 분쇄할 것이었다.

여전히 수병, 병사, 노동자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던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에 맞서 케렌스키에 군사적 동맹을 제안했다. 케렌스키는 거절할 수 없었고 감옥에 갇힌 볼셰비키들을 석방하였다. 코르닐로프의 군대는 볼셰비키 선동가들을 만났고 상당수는 임무를 저버리고 위협을 거두어들였다. 몇 주 후, 케렌스키가 코르닐로프를 사주했다는 것이 밝혀지자,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는 다시 바닥을 쳤고 볼셰비키를 위한 무대가 마련되었다.

봉기 문제는 볼셰비키 지도부 내에 또 다른 논쟁을 낳았다. 7월과 10월 사이 볼셰비키는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확고한 지지를 얻었고 다른 도시 중심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국에 걸쳐 그 지지가 상승하고 있었지만, 작은 도시들 특히 제국의 비(非)러시아인 지역에서는 아직 다수가 아니었다.

레닌은 기회가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즉각 봉기 안을 제기했다. 4월에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고립되었지만 몇 주에 걸쳐 다수의 지지를 얻어내었다. 10월 10일 당 지도부가 봉기에 찬성했을 때, 그 결정에 동의하지 않은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 두 명의 중앙위원이 규율을 어기고 볼셰비키 계획을 폭로했다. 레닌은 그들을 ‘혁명 파괴자’라고 비난하며 당에서 축출할 것을 주장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볼셰비키의 계획이 노출되기는 했지만, 케렌스키는 너무 약해서 그 정보에 대해 이렇다 하게 대응할 수 없었다.

또 다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이 된 트로츠키는 러시아 소비에트 2차 전국총회의 개막을 기해 봉기할 것을 기획했다. 대표단이 권력 장악을 승인하도록 하자는 생각이었다. 반혁명에 맞서 수도를 방어 임무를 띤, 트로츠키가 이끄는 페트로그라드 혁명군사위원회가 권력 장악을 위한 기구였다. 임시정부가 페트로그라드 주둔군에게 맞서라고 명령하자, 병사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소비에트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이로써 혁명군사위원회는 사실상 수도의 군사력을 통제하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혁명군사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가 임시정부의 명령을 거부하여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던 순간, 이미 우리의 봉기는 수도에서 성공한 셈이었다. 남아있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 형태의 잔재가 사태의 본질을 살짝 가리고 있었을 뿐이다. 10월 25일의 봉기는 이미 보조적이었다.”—『10월 혁명의 교훈』

10월 24일 케렌스키가 볼셰비키 언론을 봉쇄하자, 혁명군사위원회는 즉각 대응했다.

“건물의 봉인은 즉시 찢겨졌고 식자판 제조를 위해 거푸집에 쇳물이 부어졌다. 인쇄 작업은 계속되었다. 몇 시간 내에, 정부가 탄압했던 신문은 체포 권한이 있는 혁명군사위원회의 군대들에 의해 보호되었다. 이것이 봉기였다. 봉기는 이렇게 일어났다.”—『러시아 혁명사』

몇 시간 동안에 페트로그라드는 혁명군사위원회에 충성하는 병사와 적위대(노동자민병대)의 손에 떨어졌다. 10월 25일에 적위대는 임시정부가 자리 잡고 있던 겨울궁전을 접수했고 부르주아 통치의 잔재를 쓸어버렸다.

다음 날 러시아 소비에트 2차 전국총회는 권력 장악을 승인했고, 레닌이 수장이 되고 트로츠키가 외무장관이 된 새 내각을 임명했다. “우리는 이제 사회주의 질서 건설에 착수할 것이다.”라고 시작되는 레닌의 연설이 있었다. 사회혁명당(즉, 농민 급진주의자) 우파 대표자들 그리고 멘셰비키 내에서 보다 보수적인 분자들은 항의의 뜻으로 퇴장했다. 트로츠키는 그들이 “역사의 쓰레기통”을 향해 가버렸다고 표현했다. 볼셰비키와 더불어 연립정부를 구성한 사회혁명당 좌파와 약간의 소수 정당 대표들은 자리에 남았다. 볼셰비키 다수파가 이끌고 무장 노동계급이 방어하는 노동자, 병사, 농민의 소비에트로 구성된 새 국가,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탄생했다.

권력 장악 이후 볼셰비키는 새 정권을 강화할 몇 개의 중요한 포고령을 발표했다. ‘노동자와 농민의 정부 수립 포고령’은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이었다. ‘평화에 관한 포고령’은 러시아가 전쟁에서 즉각 철수한다는 것과 모든 교전국들이 참여하여 영토병합과 배상금 없는 평화 협약을 체결할 회의를 제안했다. 사회혁명당 좌파의 농업 강령에 기초한 ‘토지 포고령’은 대지주, 귀족, 교회의 자산몰수와 빈농에 대한 토지분배를 촉구했다(「러시아혁명의 토지문제」를 볼 것).

겨울궁전이 점령되기 전에 도망쳤던 케렌스키는 그가 모집할 수 있는 병력을 집결시켰다. 볼셰비키 혁명 4일 후, 코사크족(族)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이 지휘하는 케렌스키의 지지자들이 반격을 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적위대는 그 반란을 신속하게 격퇴하였다. 그러나 모스크바에서는 전투가 며칠 동안 지속되었고 상당한 사상자를 냈다.

세계 자본주의 언론은 볼셰비키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이고 문명을 위협하는 폭도라고 비난했다. 실상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사건 이후, 거의 폭력이 없었다. 사실 처음에 볼셰비키는 반대자들에게 지나치게 유화적이었다. 크라스노프는, 미수에 그친 공격 이후, 다시는 새 정부를 향해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석방되었다. 몇 주 이후 약속을 어겼다.

혁명이 유럽을 관통하여 10월 혁명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던 볼셰비키는 (교회, 귀족, 대지주에 대해서는 예외였지만) 유산계급에 대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소비에트 정권은 방대한 자본주의 기업들 대부분을 즉각 국유화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1918년 5월에서야 방어조치로서 집행했다.

유럽 지배자들은 전혀 유화적이지 않았다. 영국 군수장관 윈스턴 처칠은 “아기(소비에트를 지칭)는 요람에 누워있을 때 목 졸라야 한다.”라고 노골적으로 선언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수상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 전역이 혁명 열기에 들떠있다.…내가 생각하는, 지금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위험은 독일이 볼셰비키와 운명을 함께할지 모른다는 것이다.…만약 그 일이 일어나면 모든 동유럽은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 아래 들어갈 것이다.…볼셰비키 제국주의는 단지 러시아 접경국들만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 전체를 위협하고 프랑스가 지금 위태로운 것처럼 아메리카 역시 위험에 노출될 것이다.”—『퐁텐블로 비망록Fontainebleau Memorandum』, 1919년 3월 25일

1917년 12월, 혁명이 일어난 지 겨우 한 달이 지난 뒤,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반혁명 조직을 위해 역할 분담했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를 책임지고 영국은 코카서스 지역을 지원한다. 정치적 원조와 군수물자 제공에 그치지 않고, 영국, 프랑스, 미국, 캐나다, 호주, 이탈리아, 일본 그리고 그 밖의 여섯 나라들이 반혁명 백군 편에 서서 러시아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했다. 1918년 5월 동맹국들과 백군에 부추겨진 5만 명의 체코 죄수들이 봉기를 일으켜 중앙 시베리아 지역 한 덩이를 장악했다.

1918년 초, 트로츠키가 외무장관으로서 평화조약을 논의하기 위해 (지금 폴란드 땅인)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만난 독일 통치자들 역시 적대적이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그 협상을 둘러싸고 심각하게 나뉘어 있었다. 니콜라이 부하린이 이끌던 좌파는 제국주의자들과 어떤 타협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무장력이 바로 붕괴될 것을 염려한 레닌은 독일의 요구를 즉각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강화도 아니고, 전쟁도 아닌no peace, no war’(즉, 전쟁을 지속하지도 않고 평화협정에 조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제안했다. 트로츠키는 사실상 적대 행위가 멈춘 상황에서 독일이 소비에트 영토를 더 차지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잘못 계산했다. 독일 군부가 러시아로 깊숙이 진격하자, 볼셰비키는 1/3가량의 국토와 상당한 공업과 농업 역량을 포기하는 굴욕적 협약에 조인해야 했다.

이 양보로 사회혁명당 좌파가 분개하여 정부에서 뛰쳐나가 폭동을 일으켰다. 그들이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건물을 폭파하여 14명이 목숨을 잃었다. 국가비상위원회Checka 수장인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인질로 붙잡고, 모스크바 전화국을 장악하고, 독일 대사를 살해하고, 레닌에 총격을 가했다(생존했으나 심각하게 부상당했다.). 볼셰비키는 사회혁명당 좌파를 불법화했다. 1918~1920년 사이 내전 기간 동안,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정권을 방어하기 위해 ‘적색 테러’에 의존했다(「무정부주의자와의 대화」를 참고할 것). 그러한 조치들은 당장의 긴급한 위험으로 인한 임시방편으로 여겨졌다.

1917년 10월 혁명은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치명적 위협이었다. 지배계급을 수탈하고 새로운 국가 권력 즉, 노동자정부를 수립하면서 봉기한 러시아 프롤레타리아는 전 세계에 충격을 가했다. 볼셰비키, 특히 레닌과 트로츠키(적군 수장으로서의 그의 역할을 포함하여)의 지도력은 혁명이 생존하는 데에 결정적 요소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필연적이지도 않았고 볼셰비키가 예상하지도 못했던, 소비에트 노동자국가의 고립은 비싼 대가를 치르게 했다. 이 고립은 1924년 레닌이 사망한 이후 혁명의 운명을 둘러싸고 트로츠키와 스탈린 사이의 갈등으로 집약되는 치열한 정치 투쟁을 낳은 배경이기도 했다.

 

제2부: 러시아혁명의 퇴보

 

스탈린주의로의 퇴보 : ‘일국사회주의’

탁월한 트로츠키 전기(무장한 예언자(1954), 비무장의 예언자(1959), 추방된 예언자(1963) 등 3권) 작가 아이작 도이처는 1921년 소비에트 지도부가 처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레닌의 당이 통치하는 러시아는 국가적으로 거의 와해될 상황에 직면했다. 국가의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기반이 모두 파괴됐다. 내전이 끝날 즈음 러시아 국민소득은 1913년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했고, 내전 이전에 비해 공업 생산은 5분의 1 이하로, 석탄은 10분의 1 이하로, 철강은 정상적인 수준의 4분의 1로 각각 줄어들었다. 철도는 파괴됐고, 경제 작동에 필요한 예비물자는 소진됐다. 도시와 농촌 사이의 생산물 교환이 중단되고 도시 인구가 급감해서 1921년에 이르면 예전에 비해 모스크바 인구는 절반으로, 페트로그라드는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이 두 수도의 주민들은 하루 57그램의 빵과 몇 개의 냉동감자를 배급받아 그것으로 끼니를 이으면서 여러 달을 버텨야 했고, 집안에 있던 가구를 뜯어 땔감으로 써서 난방을 해야 했다. 이것만으로도 혁명 4년째의 러시아가 어떤 상태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7년에 걸쳐 세계대전, 혁명, 내전, 외국 군대의 개입, 전시공산주의를 겪는 동안 사회변화가 극심했기에 전통적 정치 개념, 사상, 구호는 거의 다 무의미해졌다. 러시아 사회구조는 단지 전복된 것이 아니라 아예 파괴됐다. 내전 때 서로 무자비하고 격렬하게 싸운 사회계급들은 일부 농민들만 제외하고는 모두 기진맥진해 축 처지거나 깔아뭉개진 상태였다.—『비무장의 예언자 트로츠키』

전쟁과 혁명의 시기에 러시아 노동계급은 많은 수가 목숨을 잃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완전히 탈진했다. 최상분자 상당수는 내전으로 죽거나 볼셰비키당과 소비에트 국가 기구로 들어갔다. 볼셰비키당은 ‘전시공산주의’(1918~1921)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의 행정 명령이 공장에서 노동자 통제의 확대를 대신했고, 도심과 군으로 보내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식량을 강제로 징발해야 했다. 단기적으로 보면 전시공산주의는 백군과의 내전에서 적군이 이길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고립된 노동자국가 내에 새롭고 거대한 모순을 형성했다.

짜르 체제의 복귀라는 위협이 지나가자마자 스미치카(도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의 동맹)는 깨졌다. 소소유자인 농민이 볼셰비키를 지지한 이유는 오직 토지 정책과 백군이 대지주들을 복귀시킬 두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안정되자, 농민들은 국가통제를 벗어나고 생산물을 자유시장에서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자 했다.

1917년에 견고한 친(親)볼셰비키였던 크론슈타트 해군 수비대는 1921년 3월,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요구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원래의 크론슈타트 선원 노동자들은 내전 동안 해체되었고 그 자리를 농민 출신의 보다 후진적인 부위가 채웠다.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상황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이것이 실패하자 반혁명을 진압하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반란 지도자들은 반혁명적 백군 장군들과 연결되어 있었다.(「크론슈타트와 반혁명」참조)

내전의 황폐화로 야기된 사회적 긴장은 결국 볼셰비키 당 내부로도 표현되었다. 1921년 3월의 10차 당 대회에서 ‘노동자 반대파’는 노동조합의 산업 통제를 요구했다. 절망적 상황에 처한 노동계급의 당 지도부를 비난하면서도, 노동자 반대파는 여전히 ​​소비에트 국가에 충성했고 크론슈타트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대회는 당이 분열될 수 있고 이는 반혁명의 문을 열 수 있다고 느꼈다. 따라서 임시적 조치로 생각하며 당내 분파 금지라는 특별조치를 결정했다.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지도부는 노동자 국가의 관료주의적 기형화가 증대하고 있음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있었다. 1차 대전 후 신생 소비에트 국가에 가해지는 압력을 경감시킬 해외 혁명 봉기들이 실패했다. 이제는 제한된 내부 자원만으로 경제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했다. 1921년 3월 당 대회에서 볼셰비키는 (중앙 계획과 산업화 강화 또한 주장했던) 트로츠키의 제안에 따라 전시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신경제정책(NEP)’으로 대체했다. NEP는 재산 소유 농업생산자에게 세금을 매기는 것으로 강제 곡물징발을 대체했다. 불만에 찬 농민에 대한 이 양보조치는 전쟁과 기근으로 몇 년간 거의 붕괴된 산업과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NEP는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한편으로 농촌지역에서 부농(쿨락)과 소자본가(네프맨)가 생겨났다. 이 사회계층은 사회, 당 및 국가 내 보수적 경향이 자라날 비옥한 토양이 되었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소련의 고립과 혁명적 기회의 유실(1918-1919년 독일, 1919년 헝가리, 1919-1920년 이탈리아, 1921년 다시 독일 그리고 1923년 불가리아와 독일)로 인한 사기저하였다.

1923년까지 노동자국가의 붕괴를 막기 위해 필요했던 임시 조치는 본질적으로 융합되어버린 당과 국가관료의 특권화로 나타난 퇴보의 과정을 막지 못했다 (「Platformism & Bolshevism」 참조). 관료주의는 정부 상층부에 뚜렷이 드러났고, 공산당 총서기 조셉 스탈린(Joseph Stalin)으로 인격화되었다. 그에 충성하는 간부를 골라 요직에 앉히는 방식으로 자신의 패권을 확립했다. 정치적으로, 스탈린 분파는 남아있던 노동자 민주주의를 점점 더 우습게 여겼다. 게다가 소련 전역의 수많은 소수민족 국가에 대해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드러냈다.

1922년 레닌은 뇌졸중이 발병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행동을 알게 되자 막후에서 서기장 직을 제거하려는 투쟁을 시작하며 트로츠키에게 도움을 청했다(모셰 르윈의 『레닌의 최후의 투쟁』 참조). 1923년 3월, 레닌은 또 다른 뇌졸중으로 극도로 쇠약해졌고, 1924년 1월 서거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같은 전술/조직적 경험이 부족했고, 당 간부 중 상당수가 트로츠키를 굴러온 돌로 여기며 탐탁치 않아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에게 허를 찔렸다. 스탈린은 당 지도부 장악을 위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연합(이른바 ‘삼인방’)을 결성했다.

러시아 혁명의 관료적 퇴보를 되돌리고 소련을 세계 혁명의 중심으로 복원하려는 운동으로 1923년 10월 ‘트로츠키주의’가 등장했다. 이는 ‘46인 선언’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주요 간부들이 서명한 문서로, 몇 주 전 트로츠키가 주장한 것과 비슷하게, 관료화와 경제 실책 그리고 소련 공산당 내 민주주의 부재에 대한 구체적 비판을 담았다.

트로츠키의 ‘좌익 반대파’는 주로 1917년 이전부터 활동한 볼셰비키와 혁명과 내전에서 활약한 베테랑들로 구성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당원 다수는 경험이 부족하고 당 지도부에 굴종하는 데에 익숙했다. 이런 현상은 1924년 초 이른바 ‘레닌의 소집’이란 이름으로 24만 명의 신입 당원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면서 더욱 가속되었다.

스탈린의 동맹이자 당내 좌파에서 우파로 이동한 니콜라이 부하린과 함께,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의 중앙지도부는 트로츠키를 비관주의자, 농민에게 적대적이고 외국의 혁명 모험을 위해 러시아 노동자국가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스탈린은 세계 혁명을 밀쳐두고 ‘일국사회주의’의 건설을 내세운 보수적 전망을 제기했다.

일국에서 무계급 사회주의 사회를 만들겠다는 본질적으로 민족주의적 기획은 볼셰비키 전통으로부터의 근본적 이탈이다. 새로운 교리가 발표되기 불과 6개월 전, 맥스 색트먼이 말한 바와 같이 스탈린은 『레닌주의의 기초(Foundations of Leninism)』 초판에서 정반대의 견해를 주장했다.

“처음 민족적 사회주의론을 만들어 낸 스탈린 자신이 『레닌주의의 제문제(레닌주의의 기초)』(1924년 2월)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화라는 사회주의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직 완수되지 않았다. 여러 선진국 노동계급의 공동의 노력이 없이 어느 한 나라에서 이 임무가 완수되고 사회주의가 최종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럴 수 없다. 물론 부르주아 계급을 타도하는 데에는 한 나라의 노력으로 충분하다. 이것은 우리의 혁명 역사에 의해 입증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 사회주의 생산의 조직을 위해서는 어느 한 나라 특히 러시아와 같은 농민 국가로는 불충분하다. 이를 위해서는 여러 선진국의 노동계급들이 노력을 해야 한다.’”

“그 해에 발행된 같은 책의 2번째 판에서는 여전히 조심스러웠지만 이후의 거침없는 민족주의적 교리로 발전하게 될 명확하고 분명한 결론으로 전환했다.

‘한 나라의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농민에 대한 승리를 거둔 후에,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또한 건설해야만 한다.’”

—『트로츠키주의의 기원Genesis of Trotskyism』, 1933년

스탈린주의의 중심 교리인 ‘일국사회주의’는 레닌 당의 특징이었던 전투적 국제주의에 대한 근본적 거부를 의미한다.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공격하기 위한 파벌적 목적으로 제기되었으나 이 새로운 민족주의적 관점은 관료집단의 정치적 분위기에 부합했으며, 그 분위기는 소비에트 인민들이 느끼던 피로감에 의해 강화된 것이었다. 관료집단의 물질적 기반을 유지하려는 이 이론은 보수적인 국내외 정책을 정당화하고 궁극적으로 혁명 도구인 제3인터내셔널을 파괴했다.

1926년 스탈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돌변을 합리화하려고 했다.

“일국에서 사회주의가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 사이의 모순을 해결할 가능성,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 힘을 사용하여 우리나라에서 완전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연대와 지지를 받겠지만 외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가 없더라도 가능하다.”

“그러한 가능성이 없다면, 사회주의 건설은 전망 없는 건설이 될 것이며, 사회주의가 완전히 건설될 것이라는 확신 없이 건설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기술적 후진성이 완전한 사회주의 건설에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것을 완벽하게 구축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지 않으면 사회주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이다. 그러한 가능성을 부인한다는 것은 사회주의 건설 대의에 대한 불신을 의미하며 레닌주의로부터의 이탈이다.”―『레닌주의에 관한 문제들Concerning Questions of Leninism』, 1926년

‘일국사회주의’ 문제는 신비로운 이론 논쟁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의) 사회주의의 최종 승리는 (제국주의 군대의) 개입 시도에 대한 완전한 보증”(같은 책)이라고 한 스탈린의 주장은 외국 혁명가들의 중심적 임무 중 하나를 제국주의자를 중립화하고 현상 유지를 위해 싸우는 것이라고 암시했다. 트로츠키가 지적했듯이, 이것은 혁명투쟁을 촉진하기 위한 기관으로 설립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본래의 존재 이유를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민족 사회주의론은 기껏해야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투쟁에나 유용한 보조무기로 코민테른을 전락시켜 버렸다. 현재의 코민테른 정책이나 체제, 지도부 인선은 코민테른이 독자적 임무 해결을 담당할 수 없는 보조역할로 격하된 것과 완전히 조응한다.”

“부하린이 기초한 코민테른 강령은 완전히 절충주의이다. 그 강령은 일국사회주의론과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를 융화시키려는 가망 없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국제주의는 세계 혁명의 연속적 성격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코민테른에서 올바른 정책과 바람직한 체제를 요구하는 공산주의 좌익반대파의 투쟁은 마르크스주의적 강령을 위한 투쟁과 뗄 수 없게 연관돼 있다. 또한 강령의 문제는 서로 배타적인 두 이론 즉, 연속혁명론과 일국사회주의론의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연속혁명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완전히 낡아빠진, 레닌과 트로츠키의 사소한 의견 차이라는 틀을 이미 오래 전에 뛰어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마르크스 레닌의 기본 사상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도주의자들의 절충주의 사이의 투쟁이 된 것이다.”—『연속혁명』, 트로츠키

트로츠키와 좌익 반대파는 스탈린-부하린 지도부 정책의 반혁명적인 영향을 지적했다.

“일국사회주의 이론은 집요하게 극복해야 하는 어려움을 과소평가하고, 획득한 성과를 과대평가한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는 이미 90% 실현되었다’라는 뜻의 스탈린의 진술보다 더 반(反)사회주의적이고 반(反)혁명적인 주장을 발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진술은 특별히 자기도취적인 관료들에게 한 말 같다. 이런 식이면 근로대중이 보는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인식은 구제불능으로 나빠질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이들이 차지해온 종속적 지위와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낮은 문화적 수준을 고려한다면, 소련의 노동자계급은 웅대한 성공을 쟁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이상이라는 척도로 보면 이런 업적은 극히 작은 규모이다. 혁명 11년 동안에 가난, 불행, 실업, 빵 배급 줄, 문맹, 갈 곳 없는 아이들, 주벽, 매춘이 자기들 주위에서 줄어들지 않고 있음을 아는 노동자, 농업 노동자, 빈농의 기운을 북돋기 위해서는 달콤한 거짓말이 아니라 냉혹한 진실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이들에게 사회주의가 90% 실현되었다고 거짓말을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제적 수준, 우리의 사회적, 문화적 상황이 사회주의보다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그것도 후진적이고 비(非)문화적인 자본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이들에게 가장 발달한 나라들의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할 때에만 우리가 진정한 사회주의 건설의 길에 접어들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또한 이를 위해서는 우리 내부의 경제적 노력이라는 단기적 수단과 국제 노동자투쟁이라는 장기적 수단 두 가지를 다 사용하여 끈기 있게 노력할 필요가 있다.”—『레닌 이후의 제3인터내셔널』, 1928년

이 ‘단기적 수단‘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트로츠키가 ’가위 위기‘라고 부른 것 즉, 공산품 가격 상승과 농산물 가격 하락 사이의 커지는 격차가 도시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갈등을 일으켜 국가를 불안정하게 만든 것이었다. 트로츠키와 반대파는 농민이 생산한 잉여생산물을 걷어 산업 생산에 투자할 것을 제안했다. 이것은 생산물의 범위와 품질을 증대하는 동시에 노동 계급의 사회적 비중을 증가시킬 것이었다. 부하린이 농민에게 “부자가 되시오!”라고 권유하는 동안, 반대파는 강력한 쿨락(부유한 농민) 출현으로 인한 위험을 경고했다. 평형추를 맞추기 위해 반대파는 농업 협동조합의 설립과 빈농들에 대한 장기 신용 제공을 옹호했다. 이 정책의 의도는 농촌 사회의 사회적 양극화와 이로 인한 자본주의 복귀 지지 경향의 성장을 피하고, 자발적 집단화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정권은 이 제안을 거부했고, 몇 년 후 쿨락이 도시에 식량공급을 차단하여 압력을 가하려고 시도하자 스탈린은 방향을 바꾸어 소비에트 농업 생산을 수십 년 퇴보시킨 가혹한 강제 집단화를 시행했다.

‘단기적 수단’의 힘을 최대화하는 것은 또한 볼셰비키 당과 소비에트 국가의 관료화를 되돌릴 것을 요구했다. 소비에트는 오랫동안 당 정치국과 간부회의 지시를 따르는 거수기로 축소되었다. 당 내에서, 레닌 하에서는 언제나 조직 활동의 특징이었던 선발 과정, 선거, 내부 정치토론 및 논쟁이 빠르게 사라졌다. 좌익 반대파는 관료적으로 교살된 소련 노동자 국가와 당을 ‘레닌주의 정책‘으로 되돌리기 위한 투쟁의 기치를 올렸다.

반대파는 ‘독단적 임명과 선출된 대표자의 해고 종식, 노조와 소비에트의 노동자 민주주의 증대, 증대하는 쿨락 세력의 억제, 노동자와 빈농을 국가기구 운영에 끌어 들이는 것을 통한 노농동맹의 강화’를 제기하며 ‘관료주의’와 투쟁했다. 그리고 ‘진정한 당내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당내 회보 발행 포함 현안 토론과 논쟁에 평당원 참여, 내부 논쟁 위해 당 출판 개방, 당원을 위한 확고한 마르크스주의 교육 프로그램, 출세주의자 배제를 위한 보다 철저한 후보자 검토, 당 활동가의 무보수 노동강화로 부풀려진 당 예산 축소, 관료적으로 추방된 반대파 회원 재조직’ 등을 제기했다.

비록 신규 당원 다수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지만, 좌익반대파의 정통 레닌주의 방어는 스탈린주의 관료제 공고화에 심각한 잠재적 위협이 되었다. 반대파는 1927년 11월에 추방되었지만, 대단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소비에트 노동자국가의 관료적 퇴보와 그에 따른 맑스주의 전면 수정에 맞서 레닌주의 정수를 지키기 위해 수 년 동안 투쟁했다.

스탈린 분파가 승리한 결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은 세계혁명 기관에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이 제국주의자들과 협상하는 도구로 질적으로 변형되었다. 다음 10년 동안 코민테른은 의식적으로 반혁명적 대외 정책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점점 바뀌었다. 신생 중국 공산당에 대한 크렘린의 재앙적 지시로 인한 2차 중국혁명의 패배는 (트로츠키가 맞서 싸웠던) 그 과정의 중요 사건이었다.

 

중국 혁명의 비극

볼셰비키당은 1917년 레닌의 「4월 테제」 채택으로 ‘노동자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를 포기하고 트로츠키의 연속혁명론과 동일한 관점을 지지했다. 그러나 아직 트로츠키 자신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없었던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에도 이 경험이 적용될 수 있다고 결론 내리지는 않았다.

초기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은 반(反)식민지 운동과 긴밀한 관계 구축을 위해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제2인터내셔널을 특징짓는 사회배외주의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1920년 7월 코민테른 제2차 대회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규정했다.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자 하는 모든 당은 식민지에서 자행하는 ‘자국’ 제국주의자들의 만행을 용서 없이 폭로하고 모든 식민지해방운동을 구호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지지하고, 이 식민지들로부터 자국의 제국주의자들을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조건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을 포함하여 “식민지 혁명 운동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선언하면서, 동시에 “소비에트 권력의 승리”를 추구한다고 코민테른은 선언했다. 이 결의안은 레닌이 초안을 작성하여 제2차 대회에서 승인되었다: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혁명운동을 지지할 의무를 지고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모든 후진국에서 장래의 프롤레타리아당—명칭만이 아니라 진정한 공산당—의 분자들이 결집되어 그들 독자의 임무 즉, 자기 민족 내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과 투쟁한다는 임무를 자각할 수 있도록 교육할 것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코민테른은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파와 일시적 협정 때로는 동맹도 맺어야 하지만, 그것과 융합해서는 안 되며, 비록 맹아적 형태일지라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자주성을 무조건 유지해야 한다.”—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

이 대수적 공식은 인도나 중국과 같은 식민지 국가에서 부르주아 세력과의 다양한 형태의 협력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1922년 제4차 대회에서 채택된 「동방문제에 관한 테제」는 식민지 세계에서 ‘모든 혁명적 인자들’과 더불어 ‘반제국주의 공동전선’ 수립 전략을 옹호했다. 이는 토착 자본가 계급의 ‘반제국주의’ 분파와 연합할 가능성을 암시한다.

식민지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에 대한 초기 코민테른의 모호한 태도는 1920년대 중반 중국에서 비극을 낳았다. 스탈린 지도부 아래에서 코민테른은 멘셰비키 ‘2단계 혁명론’ 즉, 부르주아지에 대한 정치적 추종을 부활시켰다(헤럴드 아이작 『중국 혁명의 비극』을 볼 것)

1923년 코민테른은 중국공산당에게 국민당으로 완전히 들어가라고 지도했다. 국민당을 ‘노동자 농민의 당’이라고 묘사하며, 소련 지도부는 장개석 장군과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맺고 ‘4계급 동맹(노동자, 농민, 도시 소부르주아, 민족자본가)’으로 나아갈 것을 모색했다. 그 동맹 유지를 위해 소위 ‘반제국주의’ 부르주아지를 소원하게 할 이슈는 억제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산당원들은 국민당 내에서 국민당 창립자 손문의 이상적 개량주의 정책을 비판하지 말라고 교육받았다.

1925년 5월 30일, 상하이 경찰은 공산당원이 이끄는 노동운동과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았다. 광동(지금은 광조우), 홍콩으로 확산되어 가는 총파업 저지를 위한 것이었다. 파업 물결은 국민당 자본가 지도자들을 놀라게 했고 ‘반자본주의’ 동맹을 흔들었다. 스탈린은 1926년 초 국민당을 코민테른의 ‘동조’ 지부로 인정하고 장개석을 명예회원으로 칭송하는 방식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고분고분해지지 않았고 파업이 지속되던 1926년 3월 공산당 지휘부를 습격하여 공산당 투사들을 체포하고 국민당 내에서 공산당원의 주요 지위를 박탈했다. 중국공산당은 이 우익 쿠데타에 맞서 국민당과의 관계를 끊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스탈린은 장개석을 달래기 위해 중국공산당 전회원 명부를 넘기고 코민테른과 중국공산당 사이 모든 소통기록을 열람하게 하는 방식으로 중국공산당원들을 배신했다.

1926년 11월 연설에서 스탈린은 자기 정책 방어를 위해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독재’라는 정식을 천명했다. 이는 레닌이 「4월 테제」를 통해 분명히 부정했던 것이었다.

“문제는 중국 전체 혁명정부의 맹아인 [장개석의] 광동 정부가 지닌 부르주아 민주주의 성격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무엇보다도 이 정부가 반제국주의 정부라는 사실에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무엇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 정부가 수행하는 모든 것은 세계 제국주의에 타격을 가할 것이고 한편 세계 혁명운동에는 이익이 될 것이다.”

“나는 미래의 중국 혁명정부는 1905년 우리나라에서 이야기하던 정부의 성격과 닮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성격을 지닐 것이다. 약간은 다르겠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반제국주의 정부일 것이다.

“이점에서 국민당 그리고 미래의 중국 혁명정부에 대한 중국 공산주의자의 임무가 제기된다. 중국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동지들, 그것은 틀렸다. 국민당에서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지금 나오는 것은 심각한 잘못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 중국 혁명의 성격과 전망은 국민당에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남아서 그 안의 작업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미래의 혁명정부에 참여할 것인가? 단지 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고 반드시 그래야 한다. 지금까지의 과정을 통해, 중국 혁명의 성격과 전망은 미래의 혁명정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증언하고 있다.

“중국 프롤레타리아의 실질적 헤게모니를 건설하는 것이 필수적 요소의 하나이다.”—「중국 혁명의 전망The Prospects of the Revolution in China」, 1926년

몇 달 후 1927년 3월, 장개석 군대가 공산당 본거지인 상하이를 위협하고 있을 때, 5십만 명의 노동자 시위대가 봉기에 가까운 총파업에 돌입했다. 스탈린 지도부는 또 다시 중국공산당에 ‘반제국주의 공동전선’을 깨뜨리지 말 것을 명령했고 노동자들은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장개석은 상하이로 진격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수만 명의 좌익들을 처형했다.

어처구니없게도 스탈린은, 상하이 비극은 혁명 ‘두 번째 단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장개석의 쿠데타를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확대하고 강화할” 승리라고 규정했다. 상하이의 비극은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제는 장개석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무한(武漢)의 이른바 ‘혁명적’ 국민당 좌파와 합류하라고 중국공산당원에게 지시했다.

“장개석의 쿠데타는 혁명이 두 번째 단계에 진입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범국가적 공동전선 혁명으로부터 노동자와 농민 대다수의 혁명 그리고 농업혁명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은 제국주의, 귀족, 봉건 지주, 군벌, 장개석의 반혁명 조직에 대한 투쟁을 확대 강화할 것이다.

“군벌과 제국주의에 맞선 과감한 투쟁을 통해, 무한의 혁명적 국민당은 실질적으로 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 기관으로 될 것이다. 남경(南京)에 있는 장개석의 반혁명 조직은 노동자와 농민으로부터 스스로 떨어져나가 제국주의와 밀착하면서, 군벌들의 운명과 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으로부터 국민당 단결 유지 정책, 국민당 우파 고립 정책 그리고 혁명 목표를 위해 그들을 이용하는 정책은 더 이상 새로운 혁명 과제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 도출된다. 국민당에서 우파를 과감하게 축출하는 정책, 정치적으로 그들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우파와 단호히 투쟁하는 정책, 우파가 없는 국민당, 국민당 좌파와 공산주의자의 동맹으로 이루어진 혁명적 국민당 손에 이 나라 전체의 권력을 집중시키는 정책으로 대체되어야 한다.”—「중국혁명의 문제Questions of the Chinese Revolution」, 1927년

그러나 그 ‘혁명적 국민당’은, 장개석의 우파 세력에 의해 해소되기 이전에, 동맹이 되길 원하는 중국공산당에게 이내 달려들었다. 1927년 12월, 국민당 정책의 재앙적 귀결이 명백해졌을 때, 스탈린은 급작스럽게 좌선회를 하면서 광동의 중국공산당에게 준비되지 않은 봉기를 일으키라고 지시했고 결국 패배했다. 한때,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투적인 노동계급의 헤게모니를 장악했었던 중국공산당은 1927년 재앙 이후 도시를 끝내 장악하지 못했다. 마오쩌둥 지도부는 변방으로 망명을 떠났고 농민에 기초한 게릴라 전쟁 노선을 추구했다.

중국은 레닌 사후 러시아공산당 내부 투쟁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분파적 계산과 오판은 다양한 지점에서 트로츠키의 노선에 영향을 주었다. ‘1923년 반대파’는 응집된 분파라기보다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당원들의 총합을 의미했다. 그 그룹에서 트로츠키가 가장 권위 있는 인물로 여겨지기는 했지만, 본인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1921년의 분파금지가 여전히 지속되는 상황에서 그는 분파 소속에 관한 질문을 회피했다. 빠르게 진행된 당의 관료화는 반트로츠키주의 마녀사냥을 벌이며 위험수위를 넘었지만, 트로츠키는 여전히 적군의 영웅적 창립자이자 레닌 다음의 지도자로 대중에 비춰졌다. 전쟁 이후 일었던 혁명적 파고는 가라앉고 있었다. 소련은 당분간 고립되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 레닌은 병으로 쓰러져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스탈린은 아직 ‘일국사회주의’의 옹호자로 나타나기 전이었다. 이러한 요인들은 ‘1923년 반대파’가 공고한 분파로 나아가지 않게 했다.

당 중앙기구를 관장하는 역할로 인해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인물로 부상한 스탈린은 삼인방[트로츠키를 상대로 한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동맹]을 해체하고 우파 지도자인 부하린과 손을 잡았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로 이끌렸고, 1926년 중반 통합반대파를 결성했다. 때마침 중국 사태가 전개될 때였다. 그러나 통합반대파는 중국 혁명이라는 결정적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1923년 초, 트로츠키는 중국공산당의 국민당 입당 전술에 반대했다. 정치위원회에서 이 문제가 제기될 때 유일한 반대자였다. 그러나 당시 코민테른 의장이었고 입당전술에 동조했던 지노비예프는 통합반대파가 국민당 탈당 노선을 취하는 것에 반대했고 트로츠키는 타협을 생각했다.

“1926년과 1927년에 나는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지노비예프 분파와 끊임없이 갈등했다. 두 번 또는 세 번이나 그 문제로 갈라설 뻔했다. 우리 중앙은 참여한 분파들이 거의 비슷한 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은 단지 동맹에 지나지 않았다. 투표에서, 라덱과 퍄타코프가 ‘1923년 반대파’[국민당 입당 반대파]를 무원칙하게 배신했다. 그러나 지노비예프 분파와 분열하는 문제로 제기되었을 때, 내가 공식적으로 이 문제에 뜻을 굽히고 반대파에게는 내 입장을 문서로 알린다는 것이 결정된 안이었다.

“이제 나는 이 문제에 뜻을 굽힌 것은 잘못이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맥스 색트먼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ax Shactman」, 색트먼의 『중국혁명에서 트로츠키가 제기한 문제들』에서 재인용

트로츠키는 연속혁명론과 관련해서도 비슷한 타협을 했다. ‘트로츠키주의’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과거에 있었던 레닌과의 차이를 깎아내리려 했다. 1927년 9월 통합반대파 강령은 이렇게 적는다.

“우리[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는 코민테른 전체[1926년 12월 15일]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우리가 트로츠키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트로츠키는 레닌과 견해 차이가 있었던 근본 문제 모두에 대해서, 특히 연속혁명과 농민 문제에 대해서 레닌이 옳았다고 코민테른에 밝혔다.’ 코민테른 전체에 대한 이 성명을 스탈린 그룹은 출판하려고 하지 않으면서, 우리를 계속 ‘트로츠키주의’라고 비난하고 있다. ”—「통합반대파 강령」

동맹 협력자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유화적 태도는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통합반대파 회원들이 공산당에서 제명당하자,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스탈린에 굴종했다. 자신들의 당내 지위를 보전해 보려는 헛된 시도를 했다.

아돌프 요페는 오랜 친구였고 충직한 지지자였다. 그는 자살하기 직전 트로츠키에게 편지 한 통을 남겼다. 그 편지에서 요페는, 싸우는 것이 마땅한 상황에서 타협을 추구하는 트로츠키의 경향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나는 당신이 제시한 길의 정당성을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고, 알다시피 ‘연속혁명론’ 이후 25년 동안 당신과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레닌이 지닌 불굴의 의지, 비타협성, 언젠가는 다수파가 되고 또 장차 모든 사람이 그 노선의 정당성을 인정할 것이라고 예견하며 혼자 남더라도 버티겠다는 의지 등을 당신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줄곧 생각했습니다.

정치적으로 1905년 이래 당신은 항상 옳았습니다. 그리고 레닌이, ‘1905년에도 옳았던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었다.’라고 인정했다는 말을 내 귀로 들었다고 당신에게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은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다시 한 번 당신에게 되풀이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과대평가된 합의 또는 타협을 위해 당신의 옳은 견해를 종종 버렸습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되풀이해 말합니다. 당신은 정치적으로는 늘 옳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옳습니다.’ 언젠가는 당도 그것을 깨달을 것이고, 역사도 반드시 그것을 평가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사 누군가 당신 곁을 떠난다고 해도 또는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빠르게 당신에게로 달려오지 않는다고 해도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당신은 옳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옳은 견해의 승리를 보장해 주는 것은 바로 극도의 비타협성, 철저한 선명성, 모든 타협의 전면적 거부 등일 뿐이며, 바로 여기에 레닌이 승리한 비밀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이 말을 여러 번 하고 싶었지만, 지금에서야 마지막 작별 인사로 그렇게 하게 되었습니다. ”—「트로츠키에게 보내는 편지」, 1927년 11월 16일

이후로 요페의 충고는 지워지지 않는 충격을 트로츠키에게 남겼고 그의 결심을 굳게 했다. 중국 비극의 교훈을 끌어내었고 부르주아 모든 세력으로부터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그 패배의 책임이 스탈린과 부하린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중국 공산당은 부르주아 당인 국민당에 들어갔다. 이 당의 자본가적 성격은 ‘노동자와 농민의 당’ 그리고 심지어 ‘4계급’ 정당(스탈린-마르티노프)이라는 돌팔이 철학으로 감추어졌다. 그로써 프롤레타리아는 가장 결정적인 시기에 자기 당을 빼앗겼다…. 그 책임은 그렇게 지도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스탈린에게 있다.

어떤 경우에도 그리고 결코 프롤레타리아 당은 다른 계급의 정당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그 당과 조직적으로 합치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 당의 완전한 독립은 공산주의 정치의 첫째 그리고 결정적 조건이다. ”—「중국의 정치상황과 볼셰비키-레닌주의 반대파의 임무」 트로츠키, 1929년 6월

트로츠키는 ‘민주주의 독재’ 사상을 거부하고, 연속혁명 전략(노동계급 독재를 향한 투쟁)이 러시아뿐만 아니라 반식민지나 식민지 나라들에도 적용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민주주의 독재’는 혁명적 시기 부르주아의 은폐된 통치일 뿐이다. 1917년의 ‘이중 권력’ 경험과 중국 국민당의 경험은 모두 이 점을 가르쳐 준다.

“부르주아적 발전이 뒤처진 나라들, 특히 식민지와 반식민지 나라들에서 연속혁명론은,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의 성취라는 그들의 과제가 오직 종속된 민족―특히 농민 대중―의 지도자인 프롤레타리아의 독재를 통해서만 순수하고 완전한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현대사 전체―특히 최근 25년 동안의 러시아 경험―가 입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농민 정당의 창출 과정에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물 중 하나는 소부르주아가 정치적 ‧ 경제적 독자성을 결여하고 있고 그 내부도 심각하게 분화돼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소부르주아지(농민)의 상층은 모든 결정적 시기마다, 특히 전쟁이나 혁명의 시기에는 대부르주아지와 보조를 같이 한다. 하층은 프롤레타리아와 함께 나아간다. 따라서 중간층은 양극단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케렌스키 체제와 볼셰비키 권력 사이에, 국민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사이에는 어떠한 중간적 단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다시 말해 노동자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속혁명』

이후의 역사적 실천은 트로츠키의 분석이 옳음을 입증했고, ‘부르주아적 발전이 뒤처진(즉, 신식민지)’ 나라들에서 제국주의로부터의 민족적 독립과 농업혁명(경작자에게 토지 분배)은 노동권력을 위한 투쟁과 반드시 연결된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여줬다.

그러나 스탈린-부하린 동맹은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에 승리를 거두었다. 1927년 11월 트로츠키는 러시아공산당에서 축출되었다. 1년 후엔 소련에서 추방되었고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소련에 있던 좌익반대파 지지자들은 제명되고, 자백을 강요받고, 유배당하고, 수감되었으며 처형되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반대파들은 코민테른을 개선하고 부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을 반대했다. 국제노동운동의 가장 혁명적 인자들에게 여전히 영향력이 막강한 코민테른은 볼셰비키-레닌주의 분파의 유일한 국제당이라는 생각을 간직했다. 왜냐하면 소련을 위태롭게 하고 공산주의 운동을 파괴한 퇴보 흐름은 역전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엔 독일에서 국제 노동계급의 심대한 패배가 발생했다. 결국 트로츠키와 국제 좌익반대파는, 2차 인터내셔널이 그랬던 것처럼 3차 인터내셔널도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들어가 버렸다고 결론내렸다.

 

파시즘의 등장과 독일에서 나치의 승리

소련에서 추방된 트로츠키는 터키의 프린키포 섬에 거주했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칼 라데크, 이바르 스밀가, 에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 등) 명망 있는 반대파 인사들의 굴복은, 재정 문제와 가족 문제로 어려운 그를 더욱 힘들게 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러시아와 세계 정치상황을 면밀히 추적했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유럽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 주기적으로 그를 방문했다.

1930년 초, 독일은 국제 정치무대의 중심에 있었다. 히틀러 나치당의 불길한 성장은 유럽에 새로운 암흑시대 도래를 알리고 있었다. 스탈린주의 이론가들의 혼란과 달리 파시즘에 대한 트로츠키의 명징한 해석은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시작된다.

“파시즘은 단순히 보복, 노골적 폭력, 경찰 테러의 체제가 아니다.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노동자 민주주의 요소들을 근절시킨 기초 위에 수립되는 특수한 지배체제이다. 파시즘의 임무는 공산주의 전위뿐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단결을 강제로 파괴하는 것이다. 이 임무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가장 혁명적 부위를 전멸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모든 조직을 분쇄하고 노동계급의 방어적 진지를 모두 제거하고 사민당과 노동조합이 지난 75년 동안 이룩한 모든 성과를 제거할 필요가 있다.”—「다음에는 무엇이?What Next?」, 1932년 1월 27일

부르주아민주주의가 일상적으로 돌아가고 있을 때, 자본가 지배자들은 파시스트 도당을 위험한 흉악범으로 여긴다. 그러나 위기가 닥쳐 전투적 노동운동에 직면하면, 파시스트는 유산 계급을 위한 특별한 수단이 된다. 사회 붕괴 시기 파시스트 선동가는 (소상인, 농민, 중간 관리자나 공무원 등) 소부르주아 계층과 만성 실업자와 가난한 사회 하층, 심지어 노동계급의 후진 부위에서 지지자를 끌어들인다.

1928년 독일 선거에서, 히틀러 나치당 지지는 3%에도 못 미쳤다. 그러나 1929년 주식시장 붕괴 이후 경제가 곤두박질치자 1930년엔 18%, 1932년엔 37%를 득표했다. 이로써 국가사회주의당[독일나치당]은 의회의 다수당이 되었으나, 부르주아지는 이 파시스트 폭도에게 국가기구를 넘겨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32년 히틀러가 수상이 되겠다는 의사를 내비치자, 국가수장이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장군은 “그 자가 수상을? 나는 그 자를 우체국장에 임명해 내 얼굴이 있는 우표를 핥게 하지(The Second World War, Vol. 1, 1964, Winston S. Churchill).”라고 비웃었다. 1932년 7월과 11월 사이 선거에서 나치당 지지는 2백 만 표가 떨어졌다. 절망한 베를린의 나치당 지도자 괴벨스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미래는 어둡고 음울하다. 기대와 희망은 거의 사라져버렸다(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 William L. Shirer and Ron Rosenbaum).”

그러나 2개월 뒤 히틀러는 반대 없이 수상이 되었다. 독일 지배계급 상층 내에 심각한 방향전환이 있었고 그 후 정세는 급속하게 파시스트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 1933년 1월 말, 히틀러 반대자로 알려진 독일군 총사령관 쿠르트 폰 해머스테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해머스테인과 퇴임을 앞둔 수상 쿠르트 폰 슐레이허]는 모두, 장차 수상이 될 자는 오직 히틀러뿐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외 다른 선택은 내전이나 총파업을 낳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국가사회주의 당원들을 상대로 전혀 원하지 않게 군사력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F.L. 카르스텐, 『독일군의 정치』, 1973

독일의 강력한 노동운동이 독일공산당과 사회민주당으로 깊게 분열된 것은 나치당 성공의 중요 요인이다. 그 둘의 지지를 합치면 파시스트의 것보다 훨씬 많았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나치당 분쇄를 위한 노동자 공동전선을 너무 늦지 않게 구축해야 한다고 절실히 호소했다. 노동조합원, 좌익, 유태인 그리고 그들이 보기에 불쾌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 대한 나치 갈색셔츠단의 공격이 성공하자, 반정부적인 노동운동의 위험성을 걱정하던 지배계급에게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었다. 거리 위에서 파시스트를 분쇄하는 것만이 히틀러 운동의 위험을 멈출 수 있을 것이고, 그러기 위해 노동계급의 단결이 필요했다. 1933년 히틀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운동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 딱 하나 있었다. 만약 우리의 적이 그 원칙을 이해하고, 일이 시작될 즈음 우리 운동 중핵을 무자비하게 타격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 교육자료 「미국에서의 파시즘에 맞선 투쟁The Fight Against Fascism in the USA」에서 인용

중국에서 패배하고 국내에선 쿨락이 폭동을 일으키자, 스탈린은 급격한 좌선회를 선언했다. 세계 자본주의가 종말을 향한 해체의 ‘제3기’에 진입했으며 그것이 코민테른 지부들에 혁명적 돌파구를 열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크렘린의 신호를 받아, 독일공산당은 독일 자본주의가 곧 붕괴할 것이고 그러면 자신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새 정책의 핵심 요소는 (여전히 독일 노동계급 다수가 지지하는) 사회민주주의 개량주의와 파시스트가 ‘쌍둥이’라는 인식에 있었다. 사회민주당이 사실상 ‘사회파시스트’(“말로는 사회주의이지만, 실상은 파시스트”)라는 것이다. 나치당에 대항하여 사회민주당과 공동전선을 맺는 대신에, 독일공산당은 사회민주당 평당원들에게 그들의 조직을 버리고 독일공산당이 이끄는 ‘아래로부터의 공동전선’에 참여하라고 호소했다(<1917> 3호에 실린 「‘제3기’라는 신화The Myth of the ‘Third Period’」, <1917> 4호에 실린 「쌍둥이가 아니라 그 반대Not Twins, but Antipodes」를 참조할 것)

트로츠키의 노동자 공동전선 요구는 추상적인 단결 호소가 아니었다. 또한 그것은 상호비판 금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치당의 치명적 위험을 경고하면서, 공산당과 (그 지도부를 포함한) 사회민주당 그리고 여타의 노동계급 조직들 사이의 특정한 공동행동 제안이었다.

“공동전선은 반드시 파시즘에 대항한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프롤레타리아를 포괄하는 이 공동전선은 사회민주당에 맞선 투쟁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측면 공격이지만 여전히 위력적으로.

“사민당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반파시즘 동맹을 수립하겠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일 필요가 있다. 사민당 소속 노동자들에게, “사민당 지도부를 걷어차고 우리의 ‘무소속’ 공동전선에 참여하자”고 단순히 권유해서는 결코 안 된다. 사민당 지도자들로부터 노동자들을 실제로 떼어낼 방법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지금 현실은 반파시즘 투쟁을 요구하고 있다. 사민당 노동자들의 일부는 사민당 조직의 요구와 관계없이 또는 요구에 반대하여 공산당 노동자들과 손을 잡고 싸울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런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가능한 한 가장 밀접하게 접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러나 현재 이런 노동자의 수는 많지 않다. 독일 노동자는 조직과 규율의 기풍 속에 성장해 왔는데 이 경향은 약점뿐 아니라 장점도 가지고 있다. 사민당 노동자 절대 다수는 반파시즘 투쟁에 동참하고자 한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이들은 사민당 조직을 통해 투쟁하려고 할 것이다. 이 단계는 생략될 수 없다. 노동자들의 생사가 걸린 이 새롭고 특별한 상황에서 사민당 노동자들이 행동을 통해 자기 조직과 지도자들을 시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공산당 노동자 여러분, 여러분들은 수십만 수백만 명이나 된다. 어디로도 도망갈 곳이 없다. 여권의 수는 턱없이 모자라 여러분에게 차례가 돌아올 수 없다. 파시스트들이 권력을 장악하면 무시무시한 탱크처럼 여러분의 두개골과 척추를 짓이길 것이다. 오직 가차 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여러분은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사민당 노동자들과 공동으로 투쟁할 때만 승리는 여러분의 것이 될 것이다.” —트로츠키, 「반파시즘 노동자공동전선을 위하여」, 1931년 12월

1932년 9월, 독일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은 노동자 공동전선이라는 생각에 이와 같이 답했다.

“트로츠키는 단지 하나의 대답을 했다. ‘독일공산당은 반드시 사회민주당과 손을 잡아야 한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이것이 독일 노동계급이 파시즘으로부터 살아남을 유일한 길이다.’ 또한 그는 ‘공산당이 사회민주당과 공동의 대의를 공유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 노동계급은 10년 또는 20년을 잃어버릴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노골적으로 파산한 파시스트 이론이고 반혁명적 이론이다…. 독일은 당연히 파시스트 국가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거둔 선거 승리들은 이것을 보증한다.”—『추방당한 예언자』 1963년

10년 전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채택한 (트로츠키가 초안을 잡은) 공동전선 문서는 나치당의 위험에 직면하여 국제 좌익반대파가 제기한 바로 그 접근법의 개요를 담고 있다.

“공동전선은 오직 노동 대중만 포괄할 것인가 아니면 기회주의 지도자까지 포괄할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은 오해의 산물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깃발 주변에 모여든 노동대중이나 우리의 지금의 구호에 호응하는 노동대중만 단결시키고, 당이건 노동조합이건 개량주의 조직을 무시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공동전선이라는 문제는 그런 조건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제기된다. 노동계급의 상당히 중요한 부위가 개량주의 조직에 속해 있거나 그를 지지한다. 그들의 현재 경험은 개량주의 조직과 단절하여 우리에 가입하기에 아직 충분하지 않다. 일정에 오른 대중 행동에 개입한 이후에야 의미 있는 변화가 이 관계 속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애써 얻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때가 되지 않았다.

“지금 상황은 [공산주의자, 중도주의자, 개량주의자] 이 세 조직과 그들을 따르는 미조직 대중 사이에 제기되는 모든 중요 사안을 두고 노동자 공동행동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 동안 말해 왔지만, 공산주의자는 그 같은 행동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하기는커녕 그것을 주도해야 한다. 그 투쟁에서 처음 제기되는 구호는 대단치 않은 것이라 할지라도, 대중이 그 운동에 많이 참여하면 할수록 대중운동은 더욱 자신감을 가질 것이고 더욱 과감히 전진할 것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 대중성이 성장하면 그 운동을 더욱 급진화시킬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속에서 투쟁 방법과 구호를 제기할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낼 것이다.

“개량주의자는 대중운동의 혁명적 잠재력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선호하는 무대는 의회 연단, 노동조합 사무실, 중재위원회, 장관 사무실 등이다.

“그와 대조적으로 우리는, 다른 점은 별개로 하고, 그들의 은신처에서 끌어내 그 개량주의자들을 투쟁하는 대중의 눈앞에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 이 점을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공산주의자는 최선의 수영 방법만 알 뿐 과감하게 물로 뛰어들지는 않는 수영선수와 다를 바 없다.”—「공동전선에 대하여On the United Front」, 1922년, 『코민테른의 첫 5년 간』

공산당이 1930년대 초 이 방법론을 채택했다면, 사회민주당 지도자는 파시스트에 맞서 싸우거나 아니면 그 지지자들 앞에서 싸우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야 했을 것이다. 어떤 선택을 했더라도 공산당은 전투적인 사회민주당 노동자의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는 대신, 사회민주당이 ‘사회파시스트’라는 공산당의 주장은 나치당에 대항한 공동전선에 나서기를 꺼리는 사회민주당원에게 핑계거리를 제공했다. 그런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이렇다 할 심각하고 조직적인 반대 없이,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그 직후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모두 궤멸되었다.

히틀러의 승리는 세계 노동계급에게 치명적 패배를 안겼다. 그때까지 국제좌익반대파는 크렘린[소련공산당 지도부]이 저지른 재앙적 정책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 재가입을 추구했었다. 코민테른이 아직 결정적으로 붕괴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스탈린화된 코민테른 내에서 독일 재앙에 대한 의미 있는 반대의 부재는 이제 그러한 전망이 부질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국제 좌익반대파 지도부를 대표하여 트로츠키는 독일의 새로운 정당과 새로운 인터내셔널 건설을 제기했다.

“좌익반대파가 창건된 이후로 그 임무는 맑스주의적 비판과 내부 분파 투쟁으로 코민테른을 개량하는 것이었다. 모든 나라 그리고 특히 독일에서, 최근 일련의 사태로 인해 관료적 중도주의 정책 [스탈린주의]의 치명적 성격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이론적으로, 독일공산당의 붕괴는 스탈린주의 관료에 두 경로를 제기한다. 그 정치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 또는 그 반대로 코민테른 지부들에서 모든 생명력을 말살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일의 새 정당 건설 구호를 제기한 이후[1933년 3월]에도, 좌익반대파는 이러한 전망으로 사태를 바라보면서도 여전히 코민테른의 운명에 대한 문제를 열어놓고 있다.

“모스크바 지도부는 히틀러에 대한 승리를 보증할 무오류의 정책을 천명할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모든 논의를 금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 부끄러운 금지는 도전 받지도 타도되지도 않았다. 국가별 총회도, 국제총회도, 정당 모임의 토론도, 언론의 논의도 없다. 파시즘이라는 벼락에도 깨어나지 않고 관료의 그와 같은 터무니없는 행동에도 저항하지 않는 유순한 굴종은 이미 사망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으로도 재생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점을 분명하고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이 프롤레타리아와 그 미래에 대한 우리의 직접적 임무이다. 우리의 후속 작업은 코민테른의 역사적 붕괴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공산당과 인터내셔널을 다시 건설하기 위하여To Build Communist Parties and an International Anew」, 193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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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November 2015
The Legacy of Leon Trotsky